[204호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 가지 ⑥]참된 영성의 길 


우리의 현주소


한국교회에는 대략 1980년대 말부터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약 20년이 지난 오늘날에는 그리스도인 사이에 이야기되는 어떤 주제이든 ‘영성’이라는 말이 빠지면 흡사 그 핵심이 빠져 버리기나 하는 것처럼 이 용어는 매우 귀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리하여 예배의 영성, 기도의 영성뿐 아니라 직업의 영성, 일상생활의 영성이라는 어구들도 빈번히 회자되는가 하면, 심지어 가난의 영성, 폭력의 영성 등과 같은 표현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다. 또 과거에는 영성이 기독교의 전유물인 것처럼 취급을 받았으나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이 활성화되면서부터, 불교의 영성, 이슬람의 영성, 힌두교의 영성, 인디언의 영성 등 다원주의적인 표현 또한 버젓이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이토록 ‘영성’이 무질서하게 난무하는 현상에 대해서 그리스도인들(및 지도자들)은 서로 전혀 다른 두 가지 반응을 나타냈다. 첫째,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은 ‘영성’이라는 용어 사용이 제멋대로인 현금의 풍조에 대해 하등의 비판 의식 없이 그대로 수용하는 경향을 보였다. 둘째,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유행하는 ‘영성’과 ‘영성 훈련’ 등에는 다분히 비(非)기독교적(혹은 반(反)기독교적) 요소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아예 ‘영성’이라는 단어를 사용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과격한 제의를 시도하기도 했다.


필자는 상기한 두 가지 극단적 반응 사이에 제 3의 길이 있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선, 성경 자체가 ‘영성’을 말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 반응의 과민성을 지적함), 또 성경이 언급하는 ‘영성’은 그 안에 일정한 신학적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 반응의 문제점을 노출함). 그러므로 영성과 연관한 제 3의 길을 명확히 제시하고자 하면, 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 그 가르침을 면밀히 검토해야 한다. 바로 이렇게 ‘영성’의 성경적 뿌리를 찾는 것이 이 글에서 필자가 의도하는 바이다.


‘신령한’(spiritual)의 세 가지 의미

‘영성’이라는 단어 자체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는다. 단지 형용사형인 ‘신령한’이 신약 여러 곳에 등장할 따름이다. ‘신령한’은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의 번역어로서 ‘영/성령의 영역에 속하는’(belonging to the realm of spirit/Spirit) 혹은 ‘영/성령을 구현하는/나타내는’(embodying or manifesting spirit/Spirit)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필자는 신약에서 ‘신령한’과 관련하여 세 가지 종류의 용례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1) 존재론적 의미 (ontological meaning)


이 경우 ‘신령한’은 ‘영에 대한’(concerning spirit)이라는 의미로서, 영이라는 실체를 염두에 두고서 어떤 존재를 묘사할 때 등장한다. 그런데 여기에 나타난 ‘영’은 어떤 종류의 ‘영’이든 상관이 없다. 우선, 이 영이 인간의 영(human spirit)일 수도 있다 (고전 2:11). 또 어떤 경우, 천사거나(히 1:14) 사단일 수도 있다 (엡 2:2). 심지어 창조주-영(Creator-Spirit)이신 하나님(요 4:24)을 지칭할 수도 있다. 다시 말해서, 전기한 어떤 종류의 영과 관련해서도 ‘신령한’이라는 표현을 쓸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의 용례를 보라.


 (P1) 모든 인간은 신령하다 (Every human being is spiritual).

 (P2) 사단은 신령한 존재이다 (Satan is a spiritual entity).

 (P3) 신령성(영성)은 하나님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다 (Being spiritual is one of God's attributes).


인간은 누구나 비물질적 구성 요소인 영(혹은 혼)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영에 관한 한 ‘신령하다’라고 말할 수 있다. (P1)이 바로 그런 진술이다. (P2) 역시 참된 진술이라 할 수 있는 것은, 사단은 천사의 하나로서 ‘영’―이는 하나님과 달리 ‘피조된 영’(creaturely spirit)이다―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께서는 영이시되 천사와 달리 창조주-영(Creator-Spirit)이시고, 이러한 영적 특성 (‘영이심’ 혹은 ‘영성’)은 그 분께서 보유한 여러 가지 속성들 가운데 한 가지이므로 (P3)의 진술 역시 참되다고 할 수 있다.


이상의 진술들((P1), (P2), (P3))은 어떤 주체자의 영적 실체―(P1)은 인간 영혼, (P2)는 피조적 영, (P3)은 창조자―영―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존재론적’ 의미라고 말한 것이다. 이때의 ‘신령한’은 물질적(material) 혹은 신체적(physical) 이라는 개념과 정반대의 의미를 갖는다. 바울은 두 곳에서 신령한 것―영/성령이 주도적 역할을 함으로써 산출된 바―과 육신적인 것―주로 인간의 신체와 연관이 되어 형성된 바―을 대조시키고 있다.


롬 15:27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신령한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신의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고전 9:11  우리가 너희에게 신령한 것을 뿌렸은즉 너희 육신의 것을 거두기로 과하다 하겠느냐?


그런데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오늘 다루고자 하는 영성과는 의미심장할 정도의 상관성을 갖지 않는다.

(2) 기원론적 의미(etiological meaning)


이 경우 언급되는 ‘신령한’은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이것은 어떤 사물이나 대상 혹은 사태가 그 기원상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았다는 뜻이다. 이러한 의미의 ‘신령한’은 주로 바울 서신에 등장하는데, 이것을 다시 세 부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i) ‘~은 신령하다’의 형태를 띤 경우가 있다.


롬 7:14  우리가 율법은 신령한 줄 알거니와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 팔렸도다.

율법이 신령한 까닭은 그것이 성령에 의해 계시되고 영감을 입게 되었기 때문이다 (cf. 딤후 3:16; 벧후 1:21).

(ii) ‘신령한 것’이라는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 때 ‘신령한 것’이 각각의 경우 무엇을 지칭하는지 명확히 해야지만 해당 성구의 의미를 알 수 있다.


고전 2:13~14  13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4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알지 아니하나니 저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상기 13절에 나오는 바 ‘신령한 일’과 ‘신령한 것’의 같은 단어인 프뉴마티코스(pneumatikos)의 번역어이지만, 각각이 지칭하는 바는 서로 다르다. ‘신령한 일’은 13절 초두의 ‘이것’을 말하고,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12절)을 가리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은 무엇인가? 그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고전 2:2)이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이므로, 이렇게 성령께 기원을 두고 있다는 의미에서 ‘신령한 일’이다.


반면 ‘신령한 것’은 ‘신령한 말들’(spiritual words)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앞에 나오는 바 ‘성령의 가르치신 것’을 의미하고 ‘인간의 지혜의 가르친 말’과 대조되는 표현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령께서는 십자가의 진리를 계시하심에 있어 그 진리가 전달되는 말들(words)까지 통제하셨다는 뜻인데, 바로 이것이 축자 영감론(verbal inspiration)의 근본 사상이다.


‘영적으로라야’는 한 단어로서 프뉴마티코스(pneumatikw'")라는 부사이다. 신령한 일에 관해 듣거나 소개 받는 사람이 그 내용을 이해하려면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 (cf. 엡 1:17). 이것을 ‘영적으로라야’라고 표현한 것이다.


고전 12:1  형제들아! 신령한 것에 대하여는 내가 너희의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고전 14:1  사랑을 따라 구하라. 신령한 것을 사모하되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

고전 14:12  그러면 너희도 신령한 것을 사모하는 자인즉 교회의 덕 세우기를 위해 풍성하기를 구하라.

고전 12~14장은 성령의 은사를 다루는 장이다. 고전 12:1; 14:1, 12에 나오는 ‘신령한 것’은 결국 ‘신령한 은사’를 말한다. 은사가 신령한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성령께서 부여하시는 바이기 때문이다 (cf. 고전 12:9).

(iii) ‘신령한’이라는 말 다음에 어떤 명사를 대동하는 경우가 있다.


롬 1:11  내가 너희 보기를 심히 원하는 것은 무슨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눠 주어 너희를 견고케 하려 함이니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는 목적 가운데 한 가지는 그들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분여하고자 함이었다. 그런데 이 말은 바울이 그들로 하여금 무슨 성령의 은사를 받도록 해 준다는 뜻이 아니고, 그가 사도로서 이미 향유하고 있는 하나님의 값없는 선물(은사) ― 그가 받은 계시, 그의 신앙 지식과 경험 등 ― 를 활용해 그들에게 신앙적 유익을 끼치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은사가 ‘신령한’ 것은 그것이 영이신 하나님께로서 말미암았기 때문이다.


고전 15:44, 46  44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 … 46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여기에 등장하는 대조 항목 ― ‘육의 몸’과 ‘신령한 몸’ ― 을 인간론적 구성의 각도에서 관찰하면 실수를 저지르는 셈이 된다. 왜냐하면 언급되는 두 가지 특질의 실체가 모두 ‘몸’으로 되어 있어, 흔히 생각하는 의미에서의 ‘육’과 ‘영’의 대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대조는 현재 우리의 몸(육의 몸)과 부활하게 될 몸(신령한 몸) 사이의 차이에 대한 것이다.


 부활의 때에 우리의 몸이 ‘신령하게 되는’ 것은 ‘그 몸이 인간의 영에 적응한다는 의미에서든지 그것의 비신체적 구성/실체 때문이 아니라 … 성령께서 신자 속에서 일하시는 최고도의 작동 방식 ― 이것이 궁극적 결과인데 ―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의 부활체가 ‘신령한 몸’인 이유도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기 때문인 것이다. 46절의 ‘신령한 자’는 ‘신령한 몸’으로 바뀌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육 있는 자’도 ‘육의 몸’이 되어야 한다.)


엡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사람들은 흔히 복의 내용을 자연적인 것들 ― 바라던 바의 실현, 자녀의 생산, 재물의 증식, 건강과 장수 등 ― 에만 국한시키거나 그것이 표준인 듯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복은 그런 것들과 전혀 성격을 달리한다. 구원은 성부께서 창안하시고 (엡 1:3~6), 그리스도께서 역사 선상에서 실현하셨으며 (엡 1:7~12), 성령께서 적용하시는 바(엡 1:13~14)로서, 철두철미하게 영이신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누리는 복이다. 이렇듯 신적 기원의 근본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신령한’ 복이라고 말한 것이다.


엡 5:19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신령한 노래들’은 ‘하나님의 역사를 상술하고 그 내역 때문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예를 들어, 계 5:9; 14:3; 15:3)으로서, 하나님께서 하신 바 모든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던 구약의 시편과 비슷했다.’ 이러한 노래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영감을 입어야 만들어질 수 있었을 터이므로 ‘신령한’ 노래라고 한 것이다.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지혜와 총명(이해력)은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신적 기원의 산물이다. 다시 말해서, 지혜와 총명은 그리스도께서 풍성히 주시는 바(엡 1:8)라고 할 수 있다. 구약 시대를 보면 성전 내부 장식의 전문가였던 브살렐은 성령님으로부터 지혜와 총명을 공급 받았고 (출 31:3), 솔로몬 역시 하나님께 지혜와 총명을 부여 받았다 (왕상 4:29). 따라서 지혜든 (약 1:5) 총명이든 (딤후 2:7)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기 ― 곧 ‘신령한’ 것이기 ― 때문이다.


골 3: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벧전 2:5  너희도 산 돌 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신령한 집’은 신앙 공동체를 집합적으로 표현하는 말인데, 구약의 성전을 기본 사상으로 깔고 있다. 신약 시대에는 ‘그(그리스도)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락하며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간다’ (엡 2:21~22). 다시 말해서 우리 가운데 성령께서 거하심으로써 우리를 성전으로 삼으셨는데(고후 3:16), 이것이 곧 ‘신령한’ 집의 실체이다.


‘신령한 제사’ 역시 구약의 제사 의식을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신약 시대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사장이 되었다는 점에서 변화가 일어났다. 우리가 제사장으로서 드리는 제사는 몸을 바치는 일(롬 12:1),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일(히 13:15), 재화나 물질을 바치는 일(빌 4:18; 히 13:16), 선행의 제사를 드리는 일(히 13:16) 등이다. 이러한 제사는 영적 예배의 일환으로서 신령과 진정으로 (요 4:24) 드려짐을 전제로 하고 있는데, 바로 이런 까닭에 이 모든 것을 ‘신령한’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신령한’이라는 용어를 기원론적 의미에서 살펴보았다. 이러한 의미에서 ‘신령한’과 그 묘사 어구들은 객관적 기원상 ‘좋다’라고 한 것이다. 예를 들어, 신령한 은사, 신령한 몸, 신령한 복, 신령한 노래, 신령한 지혜와 총명, 신령한 집, 신령한 제사는 모두가 좋은 것들이다. 이들은 영이신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아 형성된 객관적 사항들이기 때문에 ‘선하다.’ 그 이전에 다룬 존재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어떤 존재의 실체론적 성격에 대한 묘사이므로 선악 간에 구별이 없고, 따라서 윤리적으로 보아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항시 선하고 좋은 것이다.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한’과 반대되는 개념으로 ‘더러운’(unclean)(마 10:1; 막 1:23), ‘악한’(wicked)(눅 11:26), ‘육에 속한’(natural)(고전 2:14; 유 1:19)이 있다.


마 10:1  예수께서 그 열두 제자를 부르사 더러운 귀신을 쫓아내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권능을 주시니라.

눅 11:26  이에 가서 저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서 거하니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전보다 더 심하게 되느니라.

유 1:19  이 사람들은 당을 짓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은 없는 자니라.


 (3) 판단론적 의미(axiological meaning)


이 경우의 ‘신령한’은 ‘신령한 자’로도 표기될 수 있는데, 어떤 그리스도인이 상당한 정도의 영적 성숙을 나타낸다고 판단될 때 붙이는 말이다. 다음의 성구를 참조하라.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미성숙을 지적하면서 그들을 ‘신령한 자’로 인정하지 못하겠다고 나무라듯 말한다.


고전 14:37  만일 누구든지 자기를 선지자나 혹 신령한 자로 생각하거든 내가 너희에게 편지한 것이 주의 명령인줄 알라.


바울은 자신의 편지 내용이 신적 영감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주장하면서, 만일 어떤 이가 선지자나 혹은 선지자 정도의 역할을 감당하는 성숙한 이라면 곧 그런 점들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말하는 것이다.


 갈 6:1  형제들아! 사람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네 자신을 돌아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울은 공동체 내에서 범죄하는 이들에 대한 조치를 마련함에 있어서, 올바른 판단력과 성숙한 태도가 관건이 됨을 밝히고 있다. 바로 그런 면에서의 자격을 갖춘 이들은 ‘신령한 너희’라고 부른다.


어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판단론적 의미에서 신령하다고 말할 때, 우리는 그가 영적으로 성숙한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전항에서 다룬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과 몇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이 객관적 기원상 ‘좋다’라는 것이었다면, 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주관적 상태상 ‘좋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전자는 한 개인과 무관한 어떤 객관적 사항들 ― 율법, 은사, 복, 지혜와 총명, 집, 제사 등 ― 이 영이신 하나님께로 온 것임을 인정하여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이고, 후자는 그가 보유한 어떤 특질 ― 그의 심령 상태 속에 갖추어진 영적 성숙의 면모 ― 이 훌륭하다고 판정하는 것이다.


둘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그리스도인 신앙의 기초와 연관이 되는 반면,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은 그러한 기초에 입각해 상당한 영적 훈련을 쌓은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이 신령한 성전이라는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은 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인정할 수 있는 바이지만, 범죄한 형제들에 대한 조치를 제대로 취하려면 (즉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이 있으려면) 상당한 신앙적 연륜을 겪은 후에야 비로소 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기원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그리스도인이면 차별 없이 누구에게나 해당이 되는 것이지만, 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일부 소수의 그리스도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볼 수 있다.판단론적 의미에서의 신령함은 이처럼 개인의 영적 성숙을 전제하는 것이기에, 반대 개념으로는 ‘육신에 속한’(worldly)(고전 3:1), ‘어린 아이’(infant)(고전 3:1; 히 5:13) 등에서 찾을 수 있다.


고전 3:1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히 5:12~14  12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13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참된 영성에의 길

필자는 지금까지 ‘영성’에 대한 정의를 뒤로 미뤄 왔다. 이제 영성의 근본이 되는 단어 ‘신령한’의 의미를 자세히 고찰했으므로, 이에 기초하여 ‘영성’이 무엇인지 밝힐 계제에 이르렀다. 영성(spirituality)은 문자 그대로 그리스도인이 견지하는 ‘신령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그리스도인의 신령한 상태가 가능하려면 세 가지 사항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첫째, 영성은 영(혹은 혼)이라는 비물질적 실체(invisible substance)를 가진 존재와 연관해서만 언급할 수 있다.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짐승의 경우에는 영성을 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인간과 천사가 후보자로 부상하는데, 우리의 토의 상 후자를 제외하면 인간만이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고전 2:11). 둘째, 영성은 영적 실체를 만드시고 붙드시는 하나님(히 12:9)을 고려함 없이 이야기될 수 없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 자신이 영이셔서(요 4:24) 자신의 피조물 또한 영적 존재로 만드신 것(창 2:7)이기 때문이다.


셋째, 영성은 영이신 하나님과 영적 존재인 인간 사이에 이루어지는 활동 및 상호 작용을 전제함 없이 논의가 불가능하다. 이 때 하나님은 물론 삼위일체 하나님이지만 특히 성령 하나님께서 주도적으로 관여한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렇게 ‘신령한 상태’를 지칭하는 일은 오순절 이후에나 가능한 바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신령성’의 표현이 ‘70인역에나 복음서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실상 이것은 오순절 이후에 생긴 단어(an after-Pentecost word)이다 (강조는 필자의 것).’ 다시 말해서 진정한 의미의 영성은 오순절 이후 성령님의 보편적 사역과 연관시켜서만 생각할 수 있다는 뜻이 된다.


이러한 내용을 배경에 깔고서 필자는 영성을 ‘영이신 하나님 (특히 성령)께서 영적 존재인 인간과 관계를 맺으시고 지속적 역사를 이루심으로써 그의 심령 가운데 형성하시는 신령한 상태’라고 정의 내리고자 한다. 영성을 이렇게 이해할 경우, 우리는 참된 영성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여섯 가지 주장을 할 수 있을 것이다.

(i) 첫째, 참된 영성의 출발점은 중생이다.

죄인인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첫 단계는 부패하고 죄된 그의 심령이 성령의 새롭게 하심을 통해 영적 생명을 부여 받는 일이다. 성경은 이 현상을 여러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요 3:5~7  5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6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으로 난 것은 영이니 7내가 네게 거듭나야 하겠다 하는 말을 기이히 여기지 말라.

행 2:38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ii) 둘째, 참된 영성의 목표는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가는 것이다.

중생은 참된 영성을 이루어 가는 시작일 뿐 성숙의 목표는 되지 못한다. 따라서 일단 중생한 이들은 신령한 자 (고전 3:1; 14:37; 갈 6:1)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여기에는 우리가 영적 어린 아이의 상태에 머무르지 않고(고전 3:1; 히 5:13), 장성한 자(히 5:14)로 성장하겠다는 결의와 노력이 요구된다. 지난 분단에서의 표현을 빌리자면, 기원론적 의미의 신령함에만 머무르지 않고 판단론적 의미의 신령함을 추구하는 태도와 자세를 말한다.

(iii) 셋째, 참된 영성의 형성은 성령께서 부여하신 자원을 올바로 활용할 때 이루어진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성령께서는 적어도 여섯 가지 사항의 영적 자원을 허락하셨다. 이런 것들을 활용함으로써 우리는 참된 영성을 형성하고 신령한 자로 성숙해 갈 수 있다.

① 우리가 신령한 집이 되도록 하셨다(벧전 2:5): 이는 우리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의 몸으로 병입될 때(고전 12:13)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각자(고전 6:19)와 공동체(고전 3:16; 고후 6:17; 엡 2:21~22)는 성령님의 내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성전이 되었다는 뜻이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과 긴밀히 연계하여 사역하시기 때문에(요 16:14; 고전 15:45; 고후 3:17), 성령님의 내주는 그리스도의 내주를 가능하게 했다(롬 8:9~10). 따라서 우리는 개인적으로나 연합적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었고 살 깊은 교제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요 14:20, 23; 15:5; 고전 6:17; 고후 13:5; 갈 2:20; 엡 3:17). 이러한 연합과 교제를 통해 참된 영성의 형성을 추구할 수 있게 된다.

② 우리에게 영적 분별력과 신령한 지혜․총명을 허락하신다: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기독교적 지성(Christian mind)의 계발이 필수적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영적 분별력(고전 2:13~14)과 신령한 지혜 및 총명(골 1:9)을 받아 누릴 수 있고, 이것이 또 우리의 영성 형성에 중요한 요인이 된다.

③ 우리에게 신령한 복을 내려 주셨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구원의 복을 향유하게 하심으로써(엡 1:3) 우리가 복된 존재임을 알려 주신다. 우리가 신령한 복을 향유하면 할수록 참된 영성의 형성이 가속화된다.

④ 우리가 신령한 노래를 부를 수 있게 하신다 (엡 6:19; 골 3:16): 우리의 노래는 하나님과의 관계 및 성도 간의 교제를 활성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이런 수단을 옳게 활용할 때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형성된다.

⑤ 우리에게 각양 다양한 영적 은사를 나누어 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해(롬 12:5; 엡 4:12), 교회의 덕을 세우기(교회가 신앙적으로 든든히 세워지기) 위해 (고전 14:12), 서로 봉사하기 위해(벧전 4:10), 그리스도인 사이의 교제를 활성화하고 상호간의 영적 유익을 신장하기 위해(롬 1:11~12), 우리의 은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그런 은사들을 사모해야 한다 (고전 12:1). 이러한 영적 은사의 활용은 우리로 하여금 참된 영성을 형성하도록 돕는 좋은 방편이 된다.

⑥ 우리로 하여금 신령한 제사를 드리도록 해 주셨다(벧전 2:5): 우리가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제사장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신령한 제사 또한 드릴 수 있게 되었다. 우리가 우리의 몸을 바치든지(롬 12:1), 찬미를 하든지(히 13:15), 재물을 드리든지(빌 4:18; 히 13:16), 선행을 하든지(히 13:16) 이 모든 일은 하나님께 드리는 신령한 제사로 간주된다. 이러한 제사 행위야말로 우리의 영성 형성을 이루어내는 구체적 수단이 될 것이다.


(iv) 넷째, 참된 영성의 표징은 사랑이다.

무엇이 참된 영성의 필수불가결한 표징일까? 많은 이들은 성령의 은사를 첫째 가는 목록으로 꼽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사랑이 참된 영성의 양도할 수 없는 표징임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로부터 배울 수 있다. 사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 이야기하자면, 고린도 교회만큼 풍족히 받은 예도 드물 것이다. 그들은 ‘모든 일 곧 모든 구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했는데 (고전 1:6), 이는 그들이 결국 ‘모든 은사에 부족함이 없었다’(고전 1:7)는 뜻이다. 어느 정도로 풍족했느냐 하면 바울은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지경이었다 (고전 1:4). 성령의 은사에 대해 바울 편에서 자세히 설명을 베푼 것(고전 12:4~11) 또한 그들이 은사를 풍족히 누리고 있던 때문이었다.


자, 그러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은 신령한 자, 곧 성숙한 그리스도인들로 인정을 받을 수 있었는가? 웬걸!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들은 육신에 속한 자(고전 3:1, 3)요, 영적으로 어린 아이들이었다(고전 3:1).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그들의 풍족한 영적 은사에도 불구하고 미숙한 그리스도인으로 판정을 받은 것은,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기’ 때문이요 (고전 3:3), 더 구체적으로는 그들 사이에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라는 이름의 파당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 1:11~12; 3:4). 그들 사이에 이러한 시기와 분쟁이 존재하는 한, 아무리 성령의 은사를 풍족히 누린다 하더라도 그들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신령한 자)은 아니라는 말이다.


바울은 후에 성령의 은사를 설명하는 맥락에서 이 점을 다시 한 번 더 밝히고 있다. 그들 가운데에는 성령의 은사와 관련하여 열등의식에 빠진 이도 있었고(고전 12:15~16), 반대로 우월의식에 휩싸인 이도 있었다 (고전 12:21). 이러한 그릇된 태도를 시정하기 위하여 바울은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는 가장 좋은 길로서 ‘사랑’을 제시한다 (고전 12:31 하반). 사실 우리가 사랑 장(章)이라고 이야기하는 고전 13장은 철두철미하게 성령의 은사 활용 문제와 관련하여 주어진 바이다.


사랑의 특성으로 제시된 구절들 (고전 13:4~7)은 실상 성령의 은사를 활용하고자 할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특성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참된 영성의 표징을 성령의 은사가 아니라 성령의 열매인 사랑(갈 5:22~23)에서 찾아야 한다.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으로 하면 그것을 통해 참된 영성이 발현되는 것이다. 반대로 우리에게 은사가 많든 적든 사랑이 없이 은사를 활용하면, 이는 우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요 영적 어린 아이임을 노정하는 것이다.

(v) 다섯째, 참된 영성의 원동력은 성령 충만으로부터 생긴다.

성령 충만이란 ‘그리스도인이 일시적으로나 항구적으로 성령께 장악되어 그 분이 원하시는 바를 이루어 드리는 영적 활동’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 성령님의 역사와 관련하여 성령 충만을 간구하지 않아도 될 사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은 참된 영성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심령에 참된 영성이 이루어지는 것이 성령님의 소원이실진대, 성령께서 우리에게 성령 충만의 은혜를 덧입혀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 단지 우리 편에서 일시적으로나 (행 2:4; 4:8, 31; 9:17; 13:9) 항구적으로나 (눅 1:15; 행 6:3, 5; 11:24) 성령 충만에 대한 열망이 사라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러기에 바울은 지속적으로 성령 충만을 받으라(엡 5:18)고 권면한 것이다.

(vi) 여섯째, 참된 영성의 실상은 그것이 하나의 삶 ― 곧 성령으로 사는 삶 ― 이라는 데에 존재한다. 참된 영성은 종교적 의미를 반영하는 어떤 특정한 시간이나 어떤 특정한 활동과만 연관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삶의 문제이다. 이러한 삶은 성령님과의 동행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을 터인데, 여기에는 ① 종교적 영역과 일상 생활을 망라한 총체적 삶, ② 우리가 경험하는 삶의 과정 전체가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런 사상을 성경 몇 곳에서 밝히고 있는데, 이는 성령을 언급하는 권면에 있어 함께 등장하는 동사들을 보아 알 수 있다.


갈 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갈 5:18  너희가 만일 성령에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갈 5: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상기 구절에서 성령과 연계되어 나타나는 동사는 세 가지이다. ‘성령을 좇아 행하라‘ (롬 8:4; 갈 5:16)는 ‘성령의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생활하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다’(롬 8:14; 갈 5:18)는 ‘성령의 통제와 주관 하에서 이끌림을 받다’라는 뜻이다. ‘성령으로 행하라’(갈 5:25)는 갈 5:16의 경우와 다른 동사가 사용되었는데, 이 말의 의미는 ‘규칙에 맞추어 걷다’이다.


그래서 신국제역(NIV)은 이 동사를 ‘성령과 지속적으로 보조를 맞추다’(to keep in step with the Spirit)라고 번역했다. 이 세 가지 동사의 의미를 종합적으로 정리해 본다면 ‘성령으로 산다는 것’은 ‘성령의 주관 하에서 그의 통제를 받는 가운데 성령께서 주시는 자극과 능력에 의거해 그의 뜻에 맞게 생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성령으로 사는 삶에는 필연적으로 내면적 싸움이 포함된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의 죄성이 엄연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표현에 의하면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갈 5:16~17  16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거룩한 투쟁, 선한 싸움을 지치지 말고 계속해 나가야 한다. 이러한 영적 씨름이 없이는 ‘성령으로 사는 삶’을 운운할 수조차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지금까지 참된 영성을 위한 길로서 여섯 가지 주장 ― 참된 영성의 출발점, 목표, 형성, 표징, 원동력, 실상 ― 을 펼쳤다. 우리가 이러한 영성의 길을 걸어갈 때, 오늘날 영성과 관련한 혼란한 풍조를 넉넉히 이길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영성이 흡사 성경의 교훈과 무관한 것처럼 이교도시(視)하는 순수주의적 오류에서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글 송인규 목사 (새시대교회) senioso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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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호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가지] 십일조


우리의 현주소


20세기 후반 한국교회의 성장과 발전이 교우들의 헌금 생활에 힘입은 바 크다는 것과 그 헌금 명목 가운데 십일조가 커다란 비중을 차지했다는 것은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십일조의 성실한 헌납으로 말미암아 전임 사역자에 대한 재정적 지원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주일 학교 교육의 활성화나 농촌 교회에 대한 후원이 가능했으며, 초문화 사역에 몸담은 선교사들을 지속적으로 돕는 일 또한 막힘없이 실행될 수 있었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십일조는 한국교회의 효자 노릇을 한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십일조에 대한 이러한 열심이 앞으로도 계속될 지는 미지수이다. 이렇게 비관적 태도를 표명하는 데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과거 십일조의 헌납과 관련하여 강조되었던 캐치프레이즈 ‘십일조를 하면 복 받는다’가 더 이상 교우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둘째, 십일조를 장려하기 위해 사용된 방식들-예를 들어 주보에 헌금자 명단을 수록한다든지 아니면 심지어 예배 시에 공개한다든지 하는 일-이 전에 비해 점차 구속력(拘束力)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무엇보다도 심각한 것은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에 대한 의문이나 도전이 공공해진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규례냐 하는 데 대해 진지한 질문들을 던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 글에서 마지막 사안을 다루고자 한다. 먼저,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 문제를 주석적․신학적으로 살핀 뒤, 교회에서의 헌납 행위와 관련한 지침을 소개하도록 할 것이다.


모세 오경에 나타난 십일조

모세 오경에는 세 가지 유형의 십일조가 등장한다. 첫 유형으로서 기업(基業) 해당용 십일조가 있는데, 이는 레위 지파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이스라엘의 십일조를 레위 자손에게 기업으로 다 주어서 그들의 하는 일 곧 회막에서 하는 일을 갚나니 … 오직 레위인은 회막에서 봉사하며 자기들(이스라엘 자손)의 죄를 담당할 것이요 이스라엘 자손 중에는 기업이 없을 것이니 이는 너희의 대대에 영원한 규례라.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거제로 드리는 십일조를 레위인에게 기업으로 준 고로 내가 그들에 대하여 말하기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기업이 없을 것이라” 하였노라(민 18:21, 23~24)

레위 자손은 제사와 성막에 관련한 봉사에만 전념해야 했던 까닭에 다른 지파처럼 기업(땅)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치는 십일조-땅의 곡식과 각종 짐승 (레 27:30~32)-를 레위 자손에게 할당시켰다. 이로써 레위 자손은 생계 문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들에게 부과된 종교적 사명에 진력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 레위인들은 자기들이 이스라엘 백성에게서 받은 십일조 가운데 다시 10분의 1을 제사장에게 바치도록 되어있었다(민 18:26~28).


십일조의 둘째 유형은 절기 충당용 십일조라 부를 수 있겠는데, 각종 절기 시에 필요한 예물을 위한 것이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 이름을 두시려고 한 곳을 택하실 그곳으로 나의 명하는 것을 모두 가지고 갈지니 곧 너희의 번제와 너희 희생과 너희 십일조와 너희 손의 거제와 너희가 여호와께 서원하는 모든 아름다운 서원물을 가져가고 너희와 너희 자녀와 노비와 함께 너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할 것이요 네 성 중에 거하는 레위인과도 그리할지니 레위인은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음이니라(신 12:11~12)

너는 마땅히 매년에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곧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두시려고 택하신 곳에서 네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의 십일조를 먹으며 또 네 우양의 처음 난 것을 먹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항상 배울 것이니라(신 14:22~23)

두 번째 유형의 십일조는 온 가족이 (레위인과 더불어) 절기에 예루살렘에 올라가 함께 여호와 앞에서 음식을 먹으며 즐거워하는 일에 충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만일 어떤 이스라엘 사람이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예루살렘까지 여행하기가 힘들 때에는 그 십일조의 내용물을 돈으로 바꾸었다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는 다시금 우양이나 포도주 등 자신이 원하는 품목으로 바꿀 수 있었다 (신 14:24~26).

마지막 유형은 빈자(貧者) 지원용 십일조로서 매 3년에 한 번씩 헌납하도록 되어 있었다.


매 3년 끝에 그 때 소산의 십분 일을 다 내어 네 성읍에 저축하여 너희 중에 분깃이나 기업이 없는 레위인과 네 성중에 우거하는 객과 및 고아와 과부들로 와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손으로 하는 범사에 네게 복을 주시리라. (신 14:28~29) 

제 3년 곧 십일조를 드리는 해에 네 모든 소산의 십일조 다 내기를 마친 후에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서 네 성읍 안에서 먹어 배부르게 하라. (신 26:12) 

세 번째 십일조는 3년마다 한 번씩 바치는 것이므로 매년 단위로 계산하면 3⅓이라고 해야 정확할 것이다. 이 십일조는 공동체 내 경제적으로 빈핍한 계층의 유익을 위해 설정된 것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이 거하는 성읍에 비축하여 두었다가 필요시에 그 성내에서 사용하도록 했다 (신 14:28; 26:12).

그런데 이 세 유형의 십일조는 결국 한 종류 (혹은 두 종류)의 십일조를 나타내는가? 아니면 세 종류의 십일조를 구성하는가?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은 매년 소출의 23.3% (혹은 20%)를 십일조로 납부했는가? 아니면 그저 10%였는가? 전문가들의 의견은 이 점에 있어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있다. ①가장 주창자가 많은 견해로서 십일조는 결국 한 가지밖에 없었다는 주장이 있다. 십일조가 한 가지뿐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한 종류의 십일조가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과 처지에 따라 기업 해당용 십일조의 역할을 하기도 하고 절기 충당용 십일조의 형식으로 둔갑하기도 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모세 휘하에서는 이스라엘이 유목민 형태의 삶을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절기 충당용 십일조라는 개념이 맞지 않고 레위 자손과 제사장 그룹을 가난한 계층으로 여기는 기업 해당용 십일조가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단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에 이르러서는 레위 지파가 전보다 훨씬 안정이 되었기 때문에, 중앙 성소로 모이는 식의 절기 충당용 십일조와 레위인 이외의 빈자들에게도 신경을 쓰는 빈자 지원용 십일조 개념이 도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절기 충당용 십일조와 빈자 지원용 십일조의 관계에 대해서는 ②의 주장 내용을 참조하라.) 이 입장이 맞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득의 1/10을 십일조로 바쳤다는 뜻이 된다.


②그러나 십일조를 두 가지로 상정하는 학자들도 꽤 많이 있다. 이들은 십일조에는 근본적으로 기업 해당용 십일조와 절기 충당용 십일조가 있다고 본다. 다만 빈자 지원용 십일조를 별도의 것으로 보지 않고 절기 충당용 십일조의 다른 이름으로 간주한다. 다시 말해서, 매 두 해에는 절기 충당용 십일조를 수거하고 제 3년째에는 같은 십일조가 빈자 지원용 십일조의 명목으로 드려졌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경우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소득의 2/10을 십일조로 드린 것이라고 할 수 있다. ③가장 소수적 견해는 십일조의 세 유형이 십일조의 세 종류를 구성한다는 주장이다. 만일 이 주장이 맞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소득의 2.3/10 정도를 십일조로 바친 셈이 된다.


십일조의 형태와 종류에 대한 상기 입장들은 이스라엘의 십일조가 단순히 수입의 1/10에만 한정되었다는 통념을 깨기에 충분하다.


신약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


신약 성경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매우 적다. 우선, 예수께서 말씀하신 내용이 복음서의 몇 군데에 기록되어 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마 23:23)


화 있을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눅 11:42)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눅 18:12)


또 한 가지 언급은 히브리서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멜기세덱을 설명하는 맥락에서 주어져 있다.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레위의 아들들 가운데 제사장의 직분을 받는 자들이 율법을 좇아 아브라함의 허리에서 난 자라도 자기 형제인 백성에게서 십분의 일을 취하라는 명령을 가졌으나 레위 족보에 들지 아니한 멜기세덱은 아브라함에게 십분의 일을 취하고 그 약속을 얻은 자를 위하여 복을 빌었나니 폐일언하고 낮은 자가 높은 자에게 복 빎을 받느니라. 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또한 십분의 일을 받는 레위도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아 십분의 일을 바쳤다 할 수 있나니(히 7:4~9)


이상의 구절들 가운데 히브리서 본문은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전리품의 1/10을 바친 내용으로서, 오늘날 우리의 헌금 생활과는 거리가 멀다. 눅 18:12는 예수님의 비유에 나타난 바리새인의 십일조 행위로서, 역시 우리의 헌금 지침이 되기에는 간극이 크다. 그렇다면 결국 신약 성경에 나타난 십일조 구절 가운데 가장 의미심장한 것은 마 23:23(눅 11:42는 병행 구절임)이라고 할 수 있다.


마 23:23에는 적어도 다음의 세 가지 사항이 나타나 있다. ①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 당시 십일조의 항목 가운데 박하, 회향, 근채까지 포함시켰다. “박하”(mint)는 밭에서 기르는 향료용 식물로서 말리거나 가루를 내서 사용했다. “회향”(茴香, dill)은 야생 혹은 정원 작물로서 생야채의 일종으로나 조미용으로 사용되었다. 눅 11:42에는 회향 대신에 아람어를 기원으로 한 단어(주-1) “운향”(芸香, rue)이 사용되고 있다. “근채”(芹菜, cummin)는 1년생 방향성 작물로서 음식에 맛을 내거나 눈에 대해 의료적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율법에는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말하면서(신 14:22),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신 14:23)에 대해서만 언급하고 있다. 후에 서기관들이 토지 소산의 목록을 확장시킨 경우에도-이런 내용이 미쉬나(Mishna)에 기록되어 있는데- 회향과 근채만 포함시켰을 뿐 박하와 관련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없었다고 한다(주-2). 이것을 보면 당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헌납이 지나칠 정도로 철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②그러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책망을 받은 것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린 것 때문이 아니었다. 비록 율법에 명시되어 있지는 않았지만 그런 세부적 품목에 대한 십일조를 바친 것 자체가 문젯거리일 수는 없었다. 단지 그런 십일조의 품목을 율법이 지향해야 하는 정신-의(義), 인(仁), 신(信)-과 무관히 바친 것이 문제였다. 좀 더 큰 맥락에서 보자면, 십일조의 헌납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정신(목표와 동기) (마 22:37~40)을 염두에 둔 가운데 이루어져야 했는데,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경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질책을 받았던 것이다.

③결국 예수께서는 십일조의 규례와 관련하여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양자택일(either-or)이 아니라 양자 필요(both-and)의 논리를 천명하셨다. 즉, 의와 인과 신의 정신 가운데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상의 세 가지 사항에 의거할 때 십일조의 시행과 관련해 마 23:23의 중요성이 부각된다. 비록 예수께서 십일조의 헌납을 매우 적극적으로 강조하시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 23:23을 통해 십일조 규정의 유효성을 뒷받침하셨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내용은 신약 성경에서 십일조의 시행을 긍정적으로 가르치는 유일의 구절로 채택될 수 있을 것이다.


십일조의 구속력: 네 가지 입장


이제 우리는 십일조가 하나님의 정하신 규례로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구속력을 갖느냐 하는 핵심적 질문에 이르렀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명령인가? 이 질문과 관련해 필자는 네 가지 입장-확정설, 지속설, 참조설, 폐기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필자는 이들 가운데 참조설을 지지하는데, 일단은 각 입장들을 소개하고 동시에 비판적으로 검토하도록 할 것이다.


①확정설: 이 입장은 십일조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여전히 구속력을 발휘하는 하나님의 규례라고 주장한다. 대표적 주창자로서 켄덜(R. T. Kendall)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켄덜은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여전히 유효한 하나님의 규례임을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구절-마 23:23과 고전 16:2-을 근거로 제시한다. 우선, 두 번째 구절부터 살펴보자.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고전 16:2)


켄덜은 이 구절에서 “‘이(利)를 얻은 대로’(NIV: ‘자신의 수입에 맞게’ (in keeping with his income))라는 어구는 십일조라는 단어를 쓰지 않았을 뿐 사실상 십일조를 지칭하는 명백한 표현이다(주-3)” 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설명은 객관적 인증을 받기에 너무 버거운 주장이다. 왜냐하면 상기 표현이 수입과 헌금 사이의 관계를 묘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율이 꼭 1/10이라는 것을 못 박고 있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 비율을 5%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이도, 12%로 정하고 있는 이도, 아니면 그 때 그 때 조정하리라고 마음먹은 이도 모두 고전 16:2의 권면에 순응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켄덜이 고전 16:2를 내세우며 “십일조를 지칭하는 명백한 표현”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지나친 처사임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켄덜을 도울 수 있다. 만일 켄덜이 고전 16:2에 접하기 전에, 이미 “십일조의 규례는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해당이 된다”라는 성경적 원칙(T)을 확보했다면, 고전 16:2는 그가 원하는 내용으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논의는 과연 성경에서 T라는 원칙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로 초점이 맞추어지고, 결국 이 시점에 이르면 마 23:23이 주요 후보로 부상하게 된다.


켄덜은 이 점에 있어서 매우 확고한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즉, 예수께서는 마 23:23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고 명백히 주장했다는 것이다(주-4). 우리의 논변 과정에 비추어 본다면, 아마 그는 이렇게 환호성을 질렀을 것이다. “야호, 여기 마 23:23에 T가 있네. 이제야 고전 16:2도 십일조를 가리키는 구절이라고 확실히 내세울 수 있겠군” 하는 식으로 반응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승리는 그렇게 쉽게 얻어질 수 없다. 왜 그런가?


필자는 여기에서 매우 중요한 사항-또 이것을 옳게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빠지는 함정-한 가지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우리가 책으로서의 신약과 의미로서의 신약 (새 언약)을 명료히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어떤 내용이 신약 성경에 등장하면 그것이 자동적으로 신약적 (새 언약적) 의미를 확보한다고 그릇되게 생각한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다시 말해서, 어떤 내용은 분명 신약 성경에 등장하면서도 신약(새 언약)에 속하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복음서에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마 10:5-6)”는 명령이나,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네 깨끗케 됨을 인하여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저희에게 증거하라(막 1:44)”는 지시나, 예수께서 성전세를 내신 일(마 17:24-27)이나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킨 일(눅 23:56; 행 1:12) 등은 비록 신약 성경에 나타나지만 구약(옛 언약)적 규례와 연관이 된다고 하겠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복음서에 등장하는 모든 사항이 구약적 의미를 갖는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교회에 관한 약속(마 16:18-19)이나 예수님의 임재(마 16:18; 20:28) 등은 의미에 있어서도 신약적이다. 따라서 복음서에 등장하는 주제가 의미에 있어서 옛 언약에 속하는 것이냐 새 언약에 속하는 것이냐 하는 사안은 사례별(case by case)로 다루어져야 한다.


그렇다면 어떤 주제의 언약적 의미는 어떠한 표준에 의해 판명되는 것일까? 이에 대한 결정적 답변은 새 언약과 옛 언약의 분기점을 어떻게 잡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와 직결이 된다. 학자들에 따라서 또 다루고자 하는 주제에 따라서 조금씩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신구약의 분기점은 일찍 잡아 십자가의 구속사건, 조금 뒤로 잡아 오순절의 성령 강림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어떤 주제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 사건이나 오순절 성령 강림 이전의 맥락에서 기술되어 있다면 비록 그것이 신약 성경에 나타나 있다 할지라도 옛 언약의 질서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고, 그렇지 않은 것 -심지어는 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고 해도(주-5)-은 새 언약의 질서와 연관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누적적으로 고려함으로써 어떤 주제의 언약적 의미를 판정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어떤 주제가 구속사적 분기점의 어느 쪽에 해당이 되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둘째, 논의 중인 주제가 서신 부분-서신은 모두 오순절 이후에 기록된 것이므로 -에서 구속사적 발전의 맥락 가운데 다시금 확증되고 있느냐 하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제 이런 준거에 따라 십일조라는 규례를 검토해 보도록 하자. 과연 이 규례는 구속사적 분기점의 어느 쪽에 해당이 되는 것인가? ①우선, 예수님의 이 진술(마 23:23)은 십자가 사건 이전에 이루어진 바이다. ②둘째, 이 진술이 겨냥하고 있는 일차적 대상은 당시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었다. ③셋째, 마태복음 23장에서 거론되는 대부분의 연관 사항들-랍비(7~8절), 성전과 제단(16~21절), 정결례의 실행(25~26절), 구약 시대 선지자들에 대한 언급(29~32절), 이스라엘이 곧 받을 심판(예루살렘의 멸망)(34~36절)-은 옛 언약의 질서에 속하는 내용들이다. ④마지막으로, 서신 부분 어디에서도 십일조의 규례와 관련한 명령이나 약속, 혹은 모범을 찾아볼 수 없다. 이러한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할 때 비록 십일조가 마 23:23에 언급되어 있다 할지라도 이것은 옛 언약의 질서에 속한 규례라고밖에 판정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켄덜(및 기타 주창자들)의 확정설은 그의 주장과 달리 성경적 근거가 결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②지속설: 두 번째 입장은 십일조의 규례와 관련하여 형식과 정신/취지를 나누고, 전자는 아니지만 후자는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에게도 유효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십일조 헌납을 지속해야 한다고 주장을 펼친다. 이들은 왜 십입조-또 한 걸음 더 나가서는 율법-에 있어서 형식과 정신/취지를 나누는가? 이 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구약의 율법이 신약 시대의 그리스도인에 어떤 의미를 던지는 것인지 부터 규명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오심이 구약의 율법을 온전히 이루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7~18) 


그리스도께서 이렇게 율법을 성취하심으로써 우리의 구원이 가능하게 되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을 성취하셨다는 것은 구약의 모든 율법-의식법(儀式法, ceremonial law), 시민법(civil law), 도덕법(moral law)-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을 때 하나님께서는 흡사 내가 모든 율법을 지킨 것처럼(법적 차원) 의롭게 여기셔서 칭의(稱義, jutification)의 은혜를 베푸신다(롬 10:4; 고후 5:21; 빌 3:9).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부터는 이 의가 나의 인격과 삶에 주관적으로 실현되도록 힘써야 한다. 비록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율법을 이루어 주셨지만, 그렇다고 하여 내가 실제로(개인적 차원) 율법을 성취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주관적 실현은 나의 몫이다. 이러한 성화(聖化, sanctification)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결국 변화된 심령으로 율법(하나님의 법도/규례/말씀)에 반응하는 삶인 것이다. 다음 구절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도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환기시켜 준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9~10)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갈 6:2)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5)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약 2:8~11)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그런데 그리스도인으로서 율법(하나님의 법도/규례/말씀)을 지키고자 할 때 그 방식은 율법의 종류-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에 따라 차이가 난다. 의식법의 경우에는 그 법이 지향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과 십자가를 상기함으로써 지키는 것이 된다. 이 경우에는 그 규례와 관련해 오늘날 아무런 구체적 실행-짐승을 제물로 바침(레 1:2), 돼지고기를 피함(레 11:7~8), 산후(産後)에 정결례를 행함(레 12:1~8) 등-이 요구되지 않는다.


시민법의 경우에는 그 율법의 형식과 정신을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다시 말해서, 구약에 나타난 바대로의 형식을 그대로 지킬 필요는 없지만 그 규례의 정신을 살려 새로운 방식으로의 순종이 요구된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에게 꼭 곡물이나 작물 수거 시 이삭이나 열매를 남겨 두는 방식(레 19:9~10)이 요구되지는 않지만, “성도들의 쓸 것과 손 대접하기를 힘쓰는 일”(롬 12:13)과 같은 형태의 순종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 현재 논하는 시민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새 언약의 질서에 속한 합당한 시행 방안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도덕법의 경우-주로 십계명에 나타나 있는데-에는 그 조항에 대한 순종에 있어서 구약 시대나 오늘날이나 별 차이가 없다.


자, 그렇다면 십일조의 경우에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필자는 얼마 전에 모세 오경을 말하면서 십일조에도 세 가지 유형이 있음을 밝혔다. 먼저, 기업 해당용 십일조는 의식법과 시민법 양자에 모두 걸리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레위 지파의 성전 봉사는 의식법적 측면으로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에서 완성을 보았는데, 그 결과 우리 모두가 제사장이 되고 함께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주-6)이기 때문에 오늘날에는 구약 시대처럼 어떤 특정 대상에게만 부과되는 그런 종교적 사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동시에 기업이 없는 레위인들을 재정적으로 돕는다는 면에서 생각하면 시민법적 측면 또한 개재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절기 충당용 십일조는 의식법에만 해당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구약의 절기는 실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오늘날 별도의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골 2:16). 마지막으로 빈자 지원용 십일조는 전형적인 시민법의 일종으로서 오늘날 구약과 똑같은 형식은 아니더라도 그 규례의 정신만큼은 살려봄직하다. 종합적으로 본다면, 구약의 십일조는 시민법적 특징이 강한 율법의 조항으로서 그 형식은 그대로 유지할 필요가 없지만 그 정신만큼은 살려야 할 것이다.


필자는 지속설과 관련하여 여기까지의 내용에 대해서는 동조를 한다. 그러나 이 규례의 정신을 어떻게 살리느냐에 있어서 지속설 주창자(주-7)와 의견을 달리하는 것이다. 지속설자들은 십일조의 정신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말하면서, 그 정신의 실현은 수입의 1/10 헌납이라는 헌금 방식에서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필자의 반대는 두 가지이다. 첫째, 율법의 정신/취지를 살린다는 것은 ①어떤 율법이 주어진 윤리적․영적 목적의 천명과 ②율법을 시행하는 이의 동기나 목적에 관련된 마음 자세를 밝히는 데서 끝나야지, 1/10이라는 구체적 시행 세칙까지 내세우면 안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신이나 취지가 아니라 구체적 형식을 고수하자는 것으로, 만일 그렇게 한다면 이 입장은 확정설과 차이가 없는 셈이 된다.


둘째, 구약의 율법이 신약에 어떻게 적용되느냐 하는 사안의 결정 시에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율법의 항목이 새 언약의 질서 하에서 어떤 구체적 형태로 등장하는지를 살펴보는 일이다. 이렇듯 적용 형태에 대한 새 언약의 증거가 바로 율법의 정신/취지를 살리는 방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증거가 있으면 새 언약 하에서의 시행 방식으로 삼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결코 새 언약의 질서에 속하는 방안으로 채택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오늘날 우리가 짐승 제사를 드리지 않는 것은 신약 시대에 그것이 폐해졌다는 증거 때문(히 10:8~9)이요, 오늘날에는 부정한 음식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도 새 언약적 증거 때문(롬 14:20)이며, 안식일의 정신이 토요일에서 주일로 옮겨졌다고 하는 것도 신약의 증거(마 28:1, 6; 행 20:7; 고전 16:21; 계 1:10)에 기초한 때문이다. 그렇다면 십일조에 관한 새 언약적 증거는 무엇인가? 새 언약의 질서에 속하는 증거를 아무리 찾아보아도 우리는 1/10이라는 시행 세칙을 발견할 수 없다. 헌금과 관련하여 가장 가까운 긍정적 진술을 찾아본다 해도 고작해야, “매 주일 첫 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라(고전 16:2)”  (이것이 십일조를 지칭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 있다),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게 했다 (고후 8:2)”,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 9:7) ” 정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십일조의 정신을 운운하면서 1/10을 시행 방안으로 들먹이는 것은 성경의 증거를 넘어가는 처사로 여겨진다.


바로 이러한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필자는 지속설의 입장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④폐기설: 순서로는 참조설이 먼저이지만 주장의 상반적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 네 번째 입장부터 다루고자 한다. 폐기설은 그 단어가 짐작케 하듯, 십일조는 구약에 등장하는 율법의 조항이기 때문에 폐기되었고 따라서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규례라고 말한다(주-8). 그들은 보통 ‘율법’과 ‘은혜’를 날카롭게 대조시켜 구약은 율법의 시대에 속하고 신약은 은혜의 시대에 속한다고 하면서,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에 속해 있기 때문에 (“이는 너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음이니라(롬 6:14)”)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는 여타의 율법 조항들과 더불어 폐기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필자가 폐기설을 찬성하지 않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 폐기설의 주창자들은 ‘율법’의 의미를 너무 단차원적으로만 이해하기 때문에 성경 전체의 가르침을 놓치고 있다. 율법은 한편으로 죄를 깨닫게 하고(롬 3:20; 4:15; 5:13; 6:20; 7:7; 갈 3:19; 약 2:9), 결국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를 가리킨다는 점 (롬 3:21~22; 갈 2:16; 3:14)에서는 은혜와 상극이 되지만(율법의 제 2 용도), 그리스도인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뜻을 제시하고 (롬 2:18~19),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실천하게 자극한다는 점 (롬 13:9~10; 갈 6:2; 약 1:25; 2:8~11; 요일 5:3)에서는 철저히 은혜의 방편인 것이다 (율법의 제 3용도).


둘째, 폐기설의 주창자들은 모세 율법의 복잡성과 다차원적 성격을 간과하고 그 모든 조항들을 싸잡아서 배척한다. 필자는 이미 모세의 율법 조항들과 관련하여 의식법, 시민법, 도덕법의 범주를 도입했고, 이런 것들이 그 형식과 정신에 있어 신약 시대에는 어떤 식으로 적용되어야 할지 살펴보았다. 폐기설을 운운하는 이들은 이러한 섬세한 노력을 기울임 없이 그저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 조항이라는 한 가지 이유만으로 그 적용 가능성을 일축해 버리고 있는데, 이 역시 보통 큰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필자는 폐기설을 반대하는 것이다. 이제 남은 입장은 참조설 밖에 없다.


참조설과 그리스도인의 헌금 방침


③참조설: 이 이론은 십일조에서 말하는 1/10이 우리의 헌금 생활에 있어서 한 가지 참조 사항으로 고려될 수 있다는 입장이다. 참조설은, 확정설에서 주장하듯 십일조가 신약 시대에도 구속력을 갖는 하나님의 규례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속설과는 어느 정도 상통하는 면도 있는데, 이것은 다름 아니라 십일조의 형식과 정신을 구별하여 전자는 아니지만 후자는 오늘날에도 유효하다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조설은, 십일조의 정신을 구현하는 것이 수입의 1/10을 헌납하는 방안으로 나타나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반기를 든다. 동시에 참조설은, 십일조가 구약의 율법 조항으로서 신약 시대에는 폐기되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적용점도 갖지 못한다는 폐기설에 대해서도 반대를 한다.


필자가 참조설을 지지하는 이유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성경적 이유로서, 새 언약의 질서 하에서 구약의 십일조 규례는 그리스도인의 구체적 시행 방안으로 자리 잡을 근거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둘째는 실제적인 이유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우들의 헌금 생활에 구체적 지침이 필요할 경우 수입의 1/10이라는 방안을 참조하는 것이 좋겠기 때문이다.


필자가 참조설을 내세운다고 해서 교회 헌금에 대해 부정적 태도를 지지한다는 것은 아니다. 단지 성경의 증거에 의거해 볼 때 십일조 헌납의 근거가 희박하다는 것뿐이지, 헌금의 중요성이나 필요성을 약화시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렇다고 하여서 성경적 근거가 확실하지 않은 헌금 제도를 실용상의 이유 때문에 성경적 방안으로 부각시키는 것도 문제라고 보는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헌금 생활을 시작할(또 영위할) 때 수입의 1/10이라는 헌납 방안을 참조하도록 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꼭 수입의 1/10만을 헌납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신앙의 용기와 확신이 있다면 (또 자기 의에 빠지지 않음을 전제할 때) 그 이상의 금액까지도 하나님께 드리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이 헌금 생활을 제대로 할 때 전임 사역자의 경제적 지원이 가능하게 되고, 이로써 교회의 각종 사역과 활동이 활성화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각도에서 본다면, 헌금의 액수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 하는 야심찬 생각도 해 본다.


글 송인규 목사 (새시대 교회) seniosong@hanmail.net


주-1) Craig S. Keener, The IVP Bible Background Commentary: New Testament (Downers Grove, Illinois: InterVarsity Press, 1993), p. 109.

 주-2) Francis W. Beare, The Gospel According to Matthew (Peabody, Massachusetts:

Hendrickson Publishers, 1981), p. 455.

 주-3) R. T. Kendall, Tithing: A Call to Serious, Biblical Giving (Grand Rapids, Michigan:

Zondervan Publishing House, 1982), p. 32.

 주-4) 같은 책, pp. 29~31.

 주-5) 예를 들어 죄에 관한 설명(시 51:3~5)이나 사죄에 대한 묘사(시 32:1~2), 또 복의 본질에

대한 진술(시 73:28)이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시 110:4) 등은 구약에 기록되어 있지만 새 언약의 의미를 표명하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주-6) 성전에 대해서는 <복음과상황>(2007년 6월): 122~29의 내용을, 제사장에 대해서는 <복음과상황>(2007년 7월): 154~61의 내용을 참조하라.

 주-7) 김인환, <십일조 생활을 해야만 하는가?> (서울: 총신대학교출판부, 2001), pp. 263~91.

 주-8) Joel Parker, Tithing in the Age of Grace (Canada: Trifford, 2003), pp. 12~3.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기독교사상 2008/02 ]

 

 

이 한 편의 설교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

골로새서 3장 22-25절



1
한국 근대사에 있어서 ‘성공 신화’의 탁월한 모델로 알려져 있는 분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많이 밝아지고 활력이 회복되고 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대통령 선거 결과에 대해 외신들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도덕성이 아니라 능력을 선택했다”고 평했다고 합니다. 새로운 대통령 당선자에게 여러 가지의 도덕적인 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그 동안 살아오면서 이루어낸 놀라운 성공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에 압도적인 득표를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대통령직 인수위원장으로 임명된 이경숙 숙명여대 총장도 역시 성공에 관한 한 둘째 가라하면 서러워할 만한 분입니다. 한 대학교에서 14년 동안 네 번이나 연속으로 직선제 총장으로 선출되었다는 사실은 다시는 볼 수 없는 진기록이 될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14년 동안 학교를 눈부시게 발전시켰다고 칭찬이 자자합니다. 새 정부에서는 성공 신화의 주인공들이 전면에 포진될 전망입니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캠프에서 내걸었던 구호가 “대한민국 국민성공시대”였습니다. 선거 운동원들은 선거 기간 내내 “국민 여러분, 성공하세요!”라고 외쳤다고 합니다. 이명박 후보에 대한 요지부동의 지지도가 어디서 나온 것인지에 대해 이론도 많지만,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은 ‘성공하고 싶은 국민들의 열망’이 그만큼 강렬하다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지금 높아만 가는 청년 실업이 사회 문제가 되어 있습니다. 치열한 경쟁 환경 속에서 국민의 다수가 패배 의식에 젖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성공의 상징이랄 수 있는 대통령을 쳐다 보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혹시나, 그 대통령이 나에게도 성공 신화를 이루어주지나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조국에서는 ‘성공에의 열망’이 분출되고 있습니다. 작년까지 “부자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했는데, 이제는 “성공하세요!”라는 인사가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동안 침체된 사회 분위기 속에서 웅크리고 살던 사람들이 기지개를 펴고 성공을 위한 도약을 시도할 마음의 채비를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과거를 털어 버리고 새로이 다가오는 한 해를 준비하면서 뭔가 새로운 꿈을 품는 시기이기에 더욱 더 성공 신화에 대한 국민의 염원은 강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2007년도를 보내고 2008년도를 맞이하면서 우리는 무엇을 꿈꾸고 있습니까? 누구는 새로운 사업이 잘 되기를 꿈꾸고, 누구는 좋은 직장에 취업하는 것을 꿈꿀 것입니다. 누구는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을 꿈꾸고, 또 누구는 좋은 집을 사는 것을 꿈꿀 것입니다. 사람마다 꿈의 대상은 다 다르지만, 그 모든 꿈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성공하기를 바란다는 점입니다. 저도 역시, 2007년도의 저의 삶과 목회가 좋은 열매를 맺었기를 바랍니다. 2008년도에도 좋은 열매를 맺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저도 제 인생의 성공을 꿈꾸고 있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2
성공은 결코 나쁜 것이 아닙니다. 성공은 우리 모두가 하나도 예외 없이 염원하는 바입니다. 심리적인 병이 있지 않고서야, 자신이 하는 일이 실패하기를 바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말입니다. 성공과 관련하여 우리가 잠시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시한 진리의 길을 따라 걷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꼭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입니다. 성경에는 ‘성공’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개역개정판>을 보면, 구약성경에는 딱 두 번 나옵니다. <새번역>을 보면, ‘성공’이라는 말이 구약에만 열 일곱 번 나오는데, 그 가운데서 성공을 이루기 위한 교훈은 하나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어떤 번역을 따르든지 간에, ‘성공’이라는 말이 신약성경에는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영어 번역본을 보아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공이라는 단어는 신약성경에는 거의 나오지 않고, 구약성경에만 몇 번 나오는데, “성공하라”는 명령도 없고, 성공을 위한 비결도 발견할 수 없습니다. ‘성공’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와 헬라어가 있었지만, 성경의 저자들은 그 단어를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참, 이상한 현상이 아닙니까? 지금이나 성경이 쓰여진 옛날이나, 인간은 모두 자신이 하는 일이 잘 되기를 바라며 성공을 추구하고 살아가는 점에서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성공에 대한 가르침이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원하는 것이 성공인데, 성경은 그것에 대해 아무런 관심도 없습니다.


이 현상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성공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까요? 그렇다면 무엇을 추구하라는 뜻입니까? 실패를 추구하라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이 실패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예레미야가 유다 백성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다. 

내가 너희를 두고 계획하고 있는 일들은 재앙이 아니라 번영이다. 너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주려는 것이다.(렘 29:11) 

이것이 하나님의 본심입니다. 희망의 본질은 성공 아니던가요? 미래에 성공하리라는 기대감이 있을 때 희망이 생기지 않던가요? 그런데 왜 성경은 성공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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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라는 사실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사실이 하나 더 있습니다. 성경이 일관되게 제시하는, 믿는 사람에게 기대되는 가장 중요한 덕목은 ‘성실’(faithfulness)이라는 사실입니다. ‘성실’, ‘신실’ 혹은 ‘충성’으로 번역되는 이 말을 성경에서 찾아보면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이 두 가지 사실을 합쳐 보면, 우리는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원한다!”


‘성공’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 있는 말입니까? 반면, ‘성실’이라는 말은 얼마나 매력 없어 보입니까? 우리 국어사전에 보니, 성실을 이렇게 정의해 놓았습니다. “정성스럽고 참되어 실속이 있음.” 이와 비슷한 뜻으로 쓰이는 ‘신실’이라는 말은 “믿음성 있고 진실함”이라고 정의되어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히브리어나 헬라어도 비슷한 뜻입니다. 성실성 혹은 신실성이 좋은 덕목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덕목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로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성실’이라는 말을 들으면 제게 떠오르는 친구가 있습니다. 사실, 군대에서 훈련 받는 동안에 만났다가 더 이상 교분을 나누지 못했으니 친구라고도 할 수 없겠지요. 저는, 지금은 없어진 ‘석사장교’라는 특수부대(?) 출신입니다. 이 특수부대는, 석사 과정을 마친 사람들 중에서 선발하여 장교 훈련을 시킨 다음 소위로 임관시키면서 곧바로 전역시킵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나면 소집하여 소위 ‘총알받이 소대장’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부대입니다. 이 과제를 위해 영천에서 4개월 동안 장교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 때, 같은 내무반에 지독하리만큼 성실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그 친구의 성실성은 밤에 보초 설 때 빛을 발했습니다. 그곳은 훈련소이므로 누가 침입할 가능성이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훈련 과정의 하나로써 밤에 시간을 정하여 보초를 서게 합니다. 그냥 훈련의 한 과정으로서 보초를 서게 한 것입니다. 저희에게 지급된 총에는 실탄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보초를 서는 사람들이 그 일에 성실하게 임하게 되질 않습니다. 보초 시간에 우리는 보통 한쪽 구석에서 잠을 자거나, 둘러 앉아 잡담하거나, 어두운 불빛 아래서 책을 읽거나, 혹은 편지를 씁니다. 그런데 그 친구는 그렇게 불성실한 다른 훈련병들을 비웃듯, 세 시간 동안, 정해진 곳에서 부동자세로 보초의 의무를 다했습니다. 심지어 눈동자도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정말 군인 정신에 투철한 친구였습니다.


그 친구의 전공이 철학이었는데, 내무반 전우들은 그 친구의 지독한 성실성을 두고, “저렇게 앞뒤가 꽉 막혀 가지고야 어떻게 철학을 연구하는지 모르겠다.”고 빈정대곤 했습니다. 신학을 전공하고 그 부대에 들어간 저는 가끔 그 친구에게서 일종의 열등감을 느끼곤 했었습니다. 저는 자주 다음과 같은 질문에 봉착했습니다. “철학을 전공한 사람이 저렇게 성실한데, 신학을 전공한 너는 왜 그렇게 불성실하냐?” 하지만, 저는 아무 위험도 없는 훈련소에서 세 시간 동안 부동자세로 서서 경계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만이 아니라, 그 친구의 성실성 앞에서 ‘회개’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친구의 성실성을 비웃었습니다.


저의 이 기억은, 이 세대가 ‘성실성’에 대해 가지고 있는 태도를 잘 묘사해 준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 세대는 ‘성실성’을 가장 따분하고 재미없고 가망성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잘 나가기 위해서는 성실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성공하기 위해서는 요령을 피울 줄도 알고, 꾀를 부릴 줄도 알고, 때로는 파격적인 언행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신랑감 중에서 가장 인기 없는 신랑감이 ‘성실한 사람’입니다.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 후보는 ‘재미있는 사람’입니다. 이 정도로, 성실성은 우리 시대에 비웃음의 대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성경에서 말하는 성실함이 이렇게 앞뒤가 꽉 막힌, 숨 막힐 정도로 답답한 태도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군대에서 만난 그 친구가 성실함의 모델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신실함은 동시에 매우 창조적입니다. 요령은 없지만 여유가 있습니다. 술수는 없지만 전략은 있습니다. 파격은 없지만 창조적인 변형은 있습니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신실하지만 동시에 그 안에는 자유와 기쁨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의미에서의 성실성이 이렇게 매력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세상은 성실이라는 미덕을 반기지 않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을 칭송하기보다는 비웃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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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큰 아이러니입니까? 세상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성공’에 대해서는 성경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고, 성경에서 가장 높이 사는 ‘성실성’에 대해서는 세상 사람들이 아무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성경의 가르침과 세상이 추구하는 방향이 정반대로 엇나가 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제대로 믿어보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을 따라 살자니 세상에서 인기 없는 사람이 될 것이고, 세상을 따라 성공을 추구하며 살자니 성경의 말씀을 역행하는 것이 되니, 이를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듯, 성경을 왜곡시켜서 “성공에 이르는 성경적 비법”을 만들어 내어 스스로를 속일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이 고민에 답하기 위해, 성경에서 가장 성공한 사람의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이 그 사람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는 너무나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에서 요셉은 가장 성공한 사람 중 하나이며, 따라서 요셉의 이야기를 통해 성공의 비결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요셉은 성공을 위해 분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은 어릴 적에 꿈을 많이 꾼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꿈은 뭔가 심상치 않은 미래를 예견하게 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요셉이 적극적으로 추구한 꿈이 아니었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 뭔가 큰 목표를 세우고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한 사람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대제국 이집트의 총리가 되는 꿈은 요셉의 마음 어디에도 있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이야기를 성공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잘못 읽은 것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전심을 다하고 진실했던 사람입니다. 그가 위대한 이유는 불굴의 투지로써 ‘성공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삶의 우여곡절에도 불구하고 ‘성실신화’를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그 태도가 결국 그를 이집트의 총리로 만든 것입니다.


그는 보디발의 집에 노예로 팔려갔을 때에도 노예의 일에 성실했습니다. 노예의 일이 어떤 것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사람치고, 노예가 하는 그런 허드레 일을 즐길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 때문에 남의 나라에 노예로 팔려온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고 세월을 죽일 수도 있었습니다. 열 사람이면 여덟은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노예의 신분을 벗어나기 위해 음모를 꾸미지도 않았습니다. 노예로서 어떻게든 잘 먹고 잘 살아보기 위해 머리를 짜 내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노예로서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지속되자 집주인 보디발이 그에게 모든 것을 맡겼습니다.


보디발의 집에서 요셉이 전성기를 구가할 때, 주인의 부인이 그를 유혹했습니다. 한 번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유혹을 했습니다. 만일, 인생 역전을 꿈 꾼 사람이었다면, 그 유혹을 이용할 음모를 꾸몄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얼마나 기가 막힌 기회입니까? 호박이 넝쿨체로 굴러온 것 아닙니까? 그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부인을 통해서 뭔가 모사를 도모할 절호의 기회였습니다. 야심 있는 청년이라면 그 부인이 자신을 유혹하기까지 기다리지 않고, 자신이 그 부인을 유혹할 계책을 꾸몄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신을 믿어준 주인을 배신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노예로서 자신의 신분에 어긋나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유혹을 뿌리쳤고, 결국 미움을 받아 감옥에 갇혔습니다.


감옥에 떨어졌을 때, 그도 사람인 이상 어찌 낙심되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그는 금새 마음을 수습하여 자신이 처한 상황에 성실했습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 떨어졌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성실했습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어 보여도, 그 일에 정성을 다했습니다. 그로 인해 간수들의 신임을 얻게 되었습니다. 성실성은 그의 변함없는 삶의 태도였습니다. 그렇게 일관되게 성실했을 때, 간수의 마음이 동했던 것입니다.
요셉의 성실성은 항상 그에게 이롭게 작용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성실성 때문에 감옥에 떨어졌습니다. 지금이나 옛날이나, 진실이 언제나 통하고 성실성이 언제나 먹히는 세상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실하게 살다가 손해를 보고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성공하기 위해 성실을 택한 것이 아닙니다.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이 바른 길이므로 성실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는 마침내 성실성을 통해 이집트의 총리에 오르지만, 그것이 그의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총리가 되었을 때, 그는 “아, 내가 드디어 성공을 이루었다!”고 만세 부르지 않았습니다. 만일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총리가 된 다음에 필경 부패하고 타락했을 것입니다. 그의 목적은 성실성이었습니다. 그래서 총리가 된 다음에도 그는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성실하게 살아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성실하게 사는 데에 성공했습니다. 그것이 요셉의 성공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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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요셉은 어떻게 그렇게 일관되게 성실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일관된 성실성의 원인을, 저는 그의 하나님 신앙에서밖에는 찾을 길이 없습니다. 사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아니고는 성실함으로 삶을 일관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켜보고 계시며, 하나님께서 진실할 것을 기대하시며, 하나님께서 작은 일에 충성하기를 바라시며, 그렇게 살아가는 나를 하나님께서 지키시고 인도하시리라는 믿음이 없이는, 그렇게 일관되게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진실하다면, 그리고 그 믿음이 살아 있다면, 마땅히 성실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산다고 해서 늘 만사형통하고 늘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장담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은 늘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됩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성공한 것이며, 하나님을 떠나 있는 한 그 어떤 일을 이룬다 해도 성공했다고 할 수 없습니다. 바로 그런 까닭에 성경에서는 “성공하라!”고 말하지 않고, “성실하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지 맥도날드(George McDonald)는 “하나님 없이 무슨 일을 도모한다면, 참혹하게 실패하거나, 아니면 성공은 하지만 그 성공으로 인해 더 참혹한 운명을 만날 것이다.”(In whatever man does without God, he must fail miserably or succeed more miserably.)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예를 찾아보자면 우리 주변에도 많이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성공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안에서 신실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가느냐에 있습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에게는 실패도 결국 성공이 되며, 그렇게 살지 않는 사람에게는 성공도 결국 실패가 되고 맙니다.


얼마 전, CNN에서 방송된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들의 토론회를 볼 수 있었습니다. 시청자들이 자신의 질문을 동영상으로 제작하여 보낸 것을 방송국에서 선정하여 틀어주고 후보들이 그 질문에 대해 답하는 형식으로 토론이 진행되었습니다. 질문자 중 어떤 사람이 성경책을 들어 보이며,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여러분은 이 책을 믿으십니까? 다른 책이 아니라, 바로 이 책! 이 책을 믿으십니까? 대답해 주십시오.”(Do you believe this book? This book, specifically this book! Do you believe this book? Answer me!) 이 질문에 대해 후보들은 아주 불편해 했습니다. 약간만 실수했다가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표를 잃어 버리거나, 아니면 비기독교인들의 증오를 살 수 있는, 아주 위험천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해 여러 후보들이 진땀을 빼면서 대답했는데, 그 중 한 사람의 답변이 제게는 특히 인상 깊었습니다. (저는 어느 당을 비판하려는 것도 아니고, 어느 후보를 지지하거나 깎아 내리자는 것도 아닙니다. 한 교회의 담임목사로서 정치적인 중립을 지켜야 할 책임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그 후보의 답변이 오늘의 말씀을 조명해 주는 예가 될 것 같아서 말씀드립니다.) 제가 볼 때, 그 후보는 정치적인 역량도 뛰어나고, 행정 능력도 뛰어난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의 사적인 생활 양상을 생각하면, 신앙인이라고 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그 질문에 대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예, 저는 성경을 지혜의 책이라고 믿고 있고, 지금도 자주 읽고 있습니다. 과거에 제가 위기를 겪을 때는 더 자주 읽고 지혜와 용기를 얻곤 했습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지혜의 책’으로만 오해하고 있는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성공하는 삶의 기술을 찾으려고 힘쓰는지요? 그들은 성경을 뒤져 가면서 자신들의 삶에 이로운 교훈들을 찾아 적용하려고 힘씁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들에게 들이대는 도전에 대해서는 고개를 돌립니다.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패륜아처럼 살아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위해 분투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성경을 자주 읽는다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온갖 수단과 방법을 동원할 수야 없는 것 아닙니까? 성경은 자신의 야망을 이루는 비법을 알려주는 책이 아니라, 바르고 참되게 살아가는 길을 안내하는 책입니다. 성공의 길로 안내하는 책이 아니라, 진실되게 하나님을 믿고 그 믿음 안에서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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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우리는 2007년도를 보내고, 며칠 후면 2008년도를 맞이하는 전환점에 서 있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미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나, 2007년도를 마감하면서 다가오는 한 해 동안에는 자신이 도모하는 모든 일에서 성공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작은 일에서든 큰 일에서든, 자신이 바라고 노력하는 일에서 좋은 결실을 맺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의 말씀을 생각하며 마음 깊이 새겨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공’이 아니라 ‘성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인생의 참된 행복은 성공을 이루는 데 있기보다는 성실하게 사는 데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실하게 살아 성공할 때, 우리는 그 성공으로 인해 타락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성공을 목적으로 삼으면 그 성공 때문에 타락하게 됩니다. 성실하게 살아갈 때, 실패도 영원히 실패로 남아있지 않게 됩니다. 실패 가운데서도 흔들림 없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성공도 실패도 그 사람의 목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런 말씀을 하고 싶은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아휴, 목사님! 누가 성실하게 살아야 좋다는 것을 모르나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실을 기대하신다는 사실도 모르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요? 눈 뜨고 있는 상태에서 코를 베어가는 이 비정한 사회에서 어떻게 늘 진실하고 성실하게 행동할 수 있겠습니까? 다들 반칙을 하는데, 어떻게 저만 규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혹시 목회하는 분들은 그렇게 사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아가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입니다.”


목회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런 유혹이 없는 줄 아시나요? 하루에도 몇 번씩 반칙을 쓰고 싶은 유혹, 요령을 피우고 싶은 유혹을 마주합니다. 가끔, 술수와 음모를 사용하고 싶은 유혹도 없지 않습니다. 목회 현장이나 도심의 슬럼가에 있는 가게나 혹은 쉐라톤 호텔의 회의실이나, 성실함을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에서는 동일합니다.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을 지키기에 더 유리한 곳이 있고 더 불리한 곳이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디나 마찬가지입니다.


다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믿음입니다. 성실함과 진실함과 신실함은 하나님의 길에 머물러 있다는 증거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머물러 있을 때, 지금의 상황과 상관없이 진정한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 술수와 요령과 사기와 반칙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해도,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희망도 있다 할 수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서 신임을 얻고 승진할 때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희망 없어 보이는 상황을 견뎠을까요? 그는 지하 감옥에서 간수들의 신임을 받고 높임을 얻기까지 얼마나 오랫동안 절망스러운 상황에서 살아야 했을까요? 그래도 그는 하나님을 믿었기에, 미래의 모든 일을 그분께 맡기고, 오늘은 다만 주어지는 일에 성실했고 진실했으며 또한 신실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자라나면,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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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중에는, 노예로 팔려온 요셉의 신세처럼 혹은 모함을 받아 죄수로 전락한 요셉의 신세처럼, 딱한 신세에 처한 분들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나를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사람들에게 복수하기 위해서라도 어떻게든 성공하겠다는 앙심이 마음에 사무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분들이라면 잠시 물러나, 보디발의 집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지는 일에 정성을 다하던 요셉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어둡고 침침한 감옥에서 자신의 일에 성실했던 요셉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지금 여러분이 당한 상황에서 가장 훌륭한 선택은 모든 원한과 분노를 내려놓고, 여러분에게 주어지는 일을 정성껏 받드는 것입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이 한 말씀 즉,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에게 하듯이 하지 말고, 주님께 하듯이 진심으로 하십시오.”(골 3:23)라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작은 일에 성실할 때, 주님께서 여러분의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때까지, 여러분이 하실 일은 그저 전심을 다하고, 맡겨진 일에 진실하게 정성을 다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 요셉의 전성기와 같은 시기를 지내는 분들이 계십니까? 여러분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여러분을 인정하고 신뢰하며, 여러분의 손이 닿는 모든 일이 형통하고 있습니까? 그 때가 성실함이 더욱 필요해지는 때입니다. 일이 잘 될 때, 유혹이 더 많은 법입니다. 고난 중에서 넘어지는 사람보다 번영 중에 넘어지는 사람이 더 많은 법입니다. 일이 잘 될 때 마음은 부풀고 눈은 높아져서 헛디디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상황에 계신 분들은 더욱 더 성실함을 추구해야 합니다. 더 큰 성공을 위해 분투할 것이 아니라, 마음을 낮추고 정성을 다해 주어진 일에 성실하게 대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여러분이 지금 누리고 있는 것,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킬 수 있고, 바른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공 바이러스가 유행입니다. 깨어 있어야 할 때입니다. “성경에는 성공이 없다”는 이 엄연한 사실 앞에서 우리의 인생의 방향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성실하게 사는 일에 성공할 수 있기를 추구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하나님께 대한 더 큰 믿음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싸구려 성공주의에 마음 팔리지 않고 바른 길을 걸어가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하셨듯이 앞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 즉 성실한 삶이야말로 진정한 성공의 삶이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성실하신 주님,
주님의 그 성품을 닮아 
저희도 성실함에 있어 성공하게 하소서.
앞뒤가 꽉 막힌 성실함이 아니라
창조적이며 진취적인 성실함을 저희에게 주옵소서.
낮고 어둡고 좁은 길을 걸을 때나
높고 밝고 넓은 길을 걸을 때나
늘 신실하고 진실하게 하소서.
흔들리지 않고, 지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가도록
주님을 진실 되게 믿게 하소서.
아멘. 



김영봉 l 목사는 현재 미국 버지니아 주에 있는 와싱톤한인교회(www.kumcgw.org)를 담임하고 있다.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등의 저서가 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월간 [기독교사상] 8월호 원고입니다.

청년들아, 욕망의 바다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라 

누가 문제인가? 

“이 세상을 회복시키는 한 알의 밀알이기보다는 오히려 세상을 타락시킨 공범으로서의 우리 자신 말이다”([내게 있는 것], 115). 오늘 우리 시대는 그리스도와 성경이 아니라 교회와 교인이 골칫거리이다. 특히 청년들에게 예수는 찬성하지만, 교회와 교인은 또 하나의 ‘오 노’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현시해야 할 교회가 도리어 방해거리가 되었단 말인가? 누가 영광의 복음을 이다지도 초라하고 비참한 나락으로 몰아넣었는가? 그건 다름 아닌 우리 자신이다. 성경이 결코 불교신자나 이슬람교도에 의해 왜곡된 적이 없듯이 기독교와 그 신앙의 왜곡은 “언제나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하나님의 말씀을 잘 안다는 사람들, 스스로 하나님의 선민이라 자랑하는 자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직업적으로 맡았다는 성직자들에 의해 왜곡되어 왔다”([인간의 일생], 162). 세상이 교회를 유혹하더라도, 타락의 책임은 전적으로 교회 자신에게 있다. 

그럼에도 세상을 변혁하는 교회가 되자는 구호가 넘쳐나고 있다. 세상의 부패와 타락에 일조하고 있는 자신에 대한 깊은 성찰과 철저한 회개가 수반되지 않는 말은 결국 졸업식장에서 온갖 화려한 수사를 동원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여 듣지 않는 송사와 답사와 같다. 교회의 대 사회적 발언들이 도리어 냉소와 무관심으로 되돌아 올 때, 교회사의 개혁자들이 그랬듯이 기존에 정립된 모든 정답들에 대해 한번쯤은 의문부호 안에 넣어 두는 것, 그리고 전통과 역사, 현실이라는 외양을 제쳐두고 원초적 복음으로 돌아가는 것, 다시 말해 본질을 회복하는 것이 살 길이다. 

본질을 회복하는 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설교자가 이재철 목사이다. 그의 외적인 공식 이력은 대략 다음과 같다. 홍성사의 창립자로, 주님의 교회 담임목사로, 스위스 제네바의 선교사로, 그리고 지금은 개인 복음 전도자로 서울의 한 작은 교회에서 중고등학생들을 섬기는 교사이다. 이 여정에서 주목할 것은 성공할수록, 유명해질수록 자연스레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것이 일반적 관례라면, 그는 이 공식을 파괴하고 있다는 점이다. 홍성사나 주님의교회나 제네바한인교회나 모두 성공한 경우이다. 그럼에도 그는 잘 나가는 자리를 훌훌 털고 유목민처럼 미련 없이 떠나 버린다. 마치 그곳에 오래 머물러 있으면 큰 일이라고 나기라도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하나님을 위한 고난의 자리에서 자신을 위한 영광의 자리로 변질되기 전에 얼른 그는 포기하고 새로운 길을 개척하는 탁월한 자기 부인의 정신을 보여 준다. 

그런 그가 현존하는 미래인 청년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네 권의 청년 서신을 일관되게 흐르는 주제는 핵심 키워드는 하나는 버려야 할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추구해야 할 영원이다. 그리고 이 두 단어를 하나로 종합해 주는 개념어는 바로 ‘회복’이다. 그러니까 회복되기 위해서는 인간의 욕망을 버려야 하고, 회복은 바로 영원의 논리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그가 말하는 회복은 믿음의 본질을 되찾는 것이다([회복의 신앙], 8). 이런 경향은 그의 청년 서신의 후반부에 갈수록 강도를 더한다. 모두가 부자 되기를 꿈꾸는 세대를 지배하는 황제의 논리, 경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십자가의 주님의 논리를 따르는 믿음을 강조하는 [내게 있는 것], 그리고 다윗의 일생을 통해 신앙을 자기 야망의 도구로 삼는 것의 위험을 경고하면서 진짜 크리스천, 프로 크리스천이 되기를 당부하는 [인간의 일생]에서 그 수위를 더 높이고 있다. 그리고 결단을 촉구한다. 그리스도만을 따르라고. 예수를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에게만 순종하겠다는 약속이다. “한 마디로, 이 세상을 압도하고 있는 황제의 논리를 따르지 않고 주님의 논리를 따르겠다는 고백이다. 경쟁자를 가차없이 짓밟고 최고 최대가 되어야 한다는 거대주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목표를 달성해야 한다는 성공제일주의, 인간의 인격마저 물질로 가늠하는 황금만능주의로 대변되는 황제의 논리, 즉 매머니즘의 경제논리를 배격하고, 오직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주님의 논리 - 그 영원한 논리를 따르겠다는 결단”([내게 있는 것], 22)이다. 

회심에서 회복으로 

욕망으로부터 회심하여 본질을 회복하라는 그의 설교는 삶에서 우러나온 것이다. 이재철의 설교는 그의 자전적인 글인 [믿음의 글들, 나의 고백]의 반영이다. 모든 설교는 설교하는 자기 자신을 통과하게 되어 있다. 가장 좋은 성경 번역본이 어머니가 읽어 주는 성경이라면, 가장 좋은 성경 해석은 신자 자신의 삶이라면, 가장 좋은 설교는 역시 설교자 자신의 삶이다. 설교자의 역할은 파수꾼이기도 하지만, 증인이다.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공적으로 증언한다. 다른 그 누구의 것도 아닌 내게 있는 것을 더하거나 감하지도 않고 전한다. 파이프가 물은 전달하되 자신의 삶과 인격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나뭇가지는 가지를 흐르는 물로 인해 잎사귀가 푸르고 열매를 맺는 법이다. 

그는 이 책에서 홍성사의 역사와 함께 구두 속의 돌멩이 같은 인생이 ‘산 속의 돌멩이’가 되어 생명과 축복의 통로가 되기까지의 여정을 담담하게 기술한다. 방탕한 선데이 크리스천으로 살았던 시간들이 역설적이게도 오늘 그와 설교를 형성하였다. 이 여로에서 주목할 만한 단어가 ‘욕망’이다. 그는 겉으로는 홍성사의 경영이 하나님의 영광 때문이라고 했지만, 그 이면에는 세상의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자기의 욕망이 들끓고 있었던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분하지 못했고, 육체의 욕심을 마치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라고 믿었다.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것도 그의 욕망을 교묘하게 위장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에 불과했다([나의 고백], 182). 그는 이제 성령을 거스르는 육체의 소욕에서 돌아서서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런 모습이 이재철 목사 한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가 내뿜은 설교는 청년들에게 큰 가치가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혹은 더 출세하기 위해서 예수님께 매달린다”([나의 고백], 205). 지금의 청년들도 젊은 시절의 이재철 목사와 하등 다를 바 없이 살아간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자신의 욕망을 성경과 하나님에게 투사한 다음, 그 투사된 욕망의 성취를 위해 매진한다([인간의 일생], 63). 하지만 그런 삶은 어리석다. 자기 스스로 만든 예수를 믿는 것은 헛되고 헛된 일이다. 육체의 소욕 추구는 일시적이고 덧없는 허상이요 안개다. 인생의 허비요 낭비다. “욕망과 본능의 자리에 집착하여 허망한 황제의 논리로 내 생의 귀한 부분을 어이없이 탕진한 것이다”([내게 있는 것], 132). 따라서 그의 설교는 자신의 경험이 고스란히 녹아 있는 육성고백인 셈이다. 

하지만 단지 욕망을 버리라고 촉구하는 것으로 굽어진 인간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어둠을 탓한다고 밝아지는 것이 아니다. 빛만이 어둠을 몰아낸다.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서 신자가 신자답게 되어야 한다. 조금 엉뚱한 질문을 하나 해 보자. 성경을 깨달아야 제자가 되는가? 아니면 제자가 되어야 성경을 깨닫는가? 예수의 말씀을 이스라엘이 듣고도 듣지 못했던 것은 그 말씀이 지적으로 모순이 되거나 까다롭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 아니다. 요한은 그들이 모세로부터 말씀의 제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제자가 아니기 때문에 말씀을 아무리 들어도 제자의 삶을 살지 못하고, 말씀으로 오신 예수를 박해하였다. 이 질문은 어느 하나를 선택하라는 것도 아니다. 복음을 듣지 않고서 어떻게 제자가 될 수 있으며, 제자가 되지 않고서 어찌 주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마치 닭이 먼저냐, 계란이 먼저냐와 같은 상호 순환적이고 서로를 전제해야 하는 물음이다. 요는, 복음의 본질이 바르게 선포되어도 우리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성경은 듣는 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우리가 먼저 제자가 되지 않고서는 우리의 성경 읽기와 설교 듣기, 그 외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자기 탐닉을 조장하고, 욕망을 가속화할 뿐이다. 

본질의 회복을 추구하는 구도자 

“모든 인간은 단 한 줄로 표현할 수 있다”([회복의 신앙], 182)고 했다. 이재철 목사를 단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구도자가 가장 적절해 보인다. 그렇다. 이재철 목사는 구도자이다. 실제로 그 스스로도 목회자를 구도자라고 정의한다.([회복의 목회], 89-95) 물론 산 속에 유리된 자가 아니라 세상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 속의 구도자이다. 하지만 이 구도자는 진리를 알지 못해 진리를 찾아 방황하는 이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길,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길 - 그 진리와 생명의 도를 좇아간다는 의미에서의 구도자이어야 한다.” 기독교에서 구도자는 진리를 찾는 자가 아니라 진리를 사는 자이다. 아침에 도를 듣고 죽어도 좋다고 믿는 공자의 제자가 아니라, 아침에 도를 듣고 하루 종일 도를 위해 살다가 저녁을 맞이하는 것이 예수의 제자이다. 

구도자는 자기 욕망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야망과 비전은 엄연히 다르다. 그럼에도 교회는 “역사적으로 비전의 미명하에 망상을 좇았고 야망을 추구했다”([청년아], 73). 믿음이란 무엇인가? “신앙이란 신실이고, 신실이란 본질에의 신실함이다.”([참으로 신실하게], 4)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눈으로 볼 수는 없으나 영원히 살아 있는 진리와 목숨을 맞바꾸는 자들을 일컬어 우리는 믿는 이라고 부릅니다.”([믿음의 글들] 취지문에서) 믿음은 자기 욕망과 이기심에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을 갈아엎는 것이다. 자기 욕망을 위해서 진리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려는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벗어나 진리의 지배에 복종한다. 

자기 욕심과 하나님의 뜻의 동일시는 하나님을 왜곡하고 필요에 따라 조종한다. 이는 [야베스의 기도]의 저자인 브루스 윌킨슨을 비교해 보면 단박에 알 수 있다. 이재철 목사는 제네바에서 장신대 신대원 수련회를 인도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윌킨슨은 중요한 강의를 위해 가는 길에 비행기를 놓칠 뻔하다. 이 상황에서 윌킨슨은 ‘주님, 비행기를 연착시켜주셔서 제가 탈 수 있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한다. 어떤 이유에서든 지간에 비행기는 연착했고, 그 결과 소피라는 한 여인을 인도하게 되었다. 이러한 기도 응답은 윌킨슨에게는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존귀한 자로 여기신다는 증거 자료이다. 이런 잘못은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음으로 그릇된 자아를 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망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은 자신의 힘과 능력, 즉 자기 자신을 하나님 위에 두고 있다”([인간의 일생], 171). 

반면에 이재철 목사는 두 시간이나 늦게 비행기가 이륙해도, 도착 시간이 바뀌어서 가족과의 약속이 어그러지고, 트렁크도 제 때에 도착하지 않는, 완벽하게 꼬이는 상황이 인생의 기로에 서서 번민에 빠진 한 젊은이를 인도하려는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주님의 섭리라고 고백한다. 여기서 그는 비행기가 빨리 떠나게 해 달라고, 가족이 도착 시간 전에 미리 나와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존귀하신 하나님의 손길과 섭리를 믿는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윌킨슨이 자기 스케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시간표를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는 기도를 천연덕스럽게 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한다. 아니, 어떤 하나님이 윌킨슨을 존귀하게 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이 타고 여행하는 비행기를 멈추게 한단 말인가? 이재철 목사는 하나님의 시간표에 자신을 맞출 뿐이다. 그 시간표에 따라서 만나게 된 한 젊은이를 돕는다. 이처럼 그는 “비성경적이고 그릇된 모든 인습이나 구습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요구하고 계시는 교회로의 회복”([회복의 목회], 65)을 외치며 그렇게 행동한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요, 말씀에 대한 믿음은 반드시 말씀대로 사는 삶을 수반한다([참으로 신실하게], 18). 그리스도인에게 절대 가치는 말씀대로 사는 삶이다. 욕망대로 살지 않는다. 

하지만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대가를 요구한다. 말씀 때문에 최고와 최대가 되려는 꿈, 성공을 포기하는 경우가 생긴다.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가치는 최고와 최대가 아니라 영원이기 때문이다. 영원을 구하는 삶에게 성공은 배격해야 할 우상이며, 얼마든지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겸허하게 수용해야 한다. 세상의 경제 논리로 보자면, 예수와 바울의 삶 모두 실패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참으로 신실하게], 235-40). 그래도 우리는 크리스천이다.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 있으며, 성공과 실패와 상관없이 “크리스천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사람들이다”([청년아], 62). 상대가 무례하게 행해도, 성공과 승리의 가망이 보이지 않아도 우리는 크리스천이기 때문에 크리스천답게 행동해야 한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본질에 신실하기 보다는 성공과 맘몬의 이름을 섬기는 한, 우리는 하나님을 부인한다. 하나님께 순종하기보다 이용하려 한다. 

“성장제일주의와 최고최대주의로 인해 말씀이 왜곡되고 있다. 황금만능주의와 세속주의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뿌리 깊은 기복주의로 인해 왜곡되고 있다. 이기적인 개교회간의 무한 경쟁으로 왜곡되고 있다. 교회의 폐쇄적인 조직 논리에 의해 왜곡되고 있다. 직업적인 교역자에 의해서뿐만 아니라, 교회 안팎의 삶이 표리부동한 교인에 의해서도 말씀이 왜곡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한 마디로 한국 교회의 역사 또한, 물론 신실한 말씀의 증인도 적지 않았지만, 그 큰 흐름이 왜곡의 역사였음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인간의 일생], 171).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것 외에는 어떠한 방법이 없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슬로건은 지금도, 언제나 유효하다. 참된 구도자는 자신을 변화시킬 뿐, 하나님을 통제하지 않는다. 

구도자는 자기를 부인한다. 

영원의 진리를 이미 맛본 자는 현상의 세계를 게걸스레 탐식하지 않는다. 도리어 걸림돌로 여긴다. 소멸하는 세계에서 불멸하는 영원을 꿈꾸는 자는 반드시 눈에 보이는 세계가 허상임을 직시한다. 이런 것들은 마치 투우가 자기 죽을 줄 모르고 투우사가 흔들어 대는 붉은 깃발에 피가 끓어 날뛰다가 쓰레기 더미에 내던져지는 꼴이다. 욕망뿐만 아니라 욕망하는 자아 역시 안개와 같다.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한다. 교회와 신자는 “궁전을 구축하는 곳이 아니라, 저마다 집착하고 있는 자기 욕망의 궁전을 허무는 곳이다”([인간의 일생], 8). 실제로 이재철 목사가 사용하는 예화는 자기 성취의 자랑을 하나님의 은혜인양 포장하는 여느 목사들의 예화와 판이하게 다르다. 그는 자기 욕심을 따라, 세속의 논리를 따라 살려는 청년들을 도리어 절망하게 한다. 자기 논리의 포기 속에서 주님의 뜻을 발견하게 한다. 

그렇다면 스스로 부정해야 할 자기는 누구인가? 성서는 자아 자체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그리스도교에게서 언제나 문제되는 것은 자아의 자리 또는 방향에 있다. 바울은 인간을 몇 가지 단어로 표현한다. 하나는 ‘프뉴마’이다. 영혼을 가리킨다. 다른 하나는 ‘사르크스’이다. 이는 육체를 말한다. 마지막으로 ‘소마’이다. 이것은 몸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에게서 이 세 단어는 한 실체를 지시한다. 모두 인간을 뜻하는 말들이다. 인간의 요소로서 영과 육의 이분법은 그의 안중에 없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다른 용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인간이 주 안에 있으면 그는 프뉴마이다. 영생을 누린다. 하지만 사람이 세상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면, 그는 사르크스이다. 썩어 없어질 존재에 불과하다. 바울은 한 존재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는 프뉴마로, 세상과의 관계 속에 있는 인간을 사르크스라고 표현했고, 이 양자를 통칭하여 소마라고 했다. 인간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지 아니면 땅의 것을 구하며 사는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원을 소망하는지 아니면 눈에 보이는 허욕을 갈망하는지에 따라 그는 프뉴마가 되기도 하고, 사르크스가 되기도 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가 부정하는 자아는 자아의 실체가 아니라 방향 또는 중심에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기 부인이란, 사르크스의 지양이자 프뉴마의 지향하는 소마가 되는 것이다. 

이를 청년들 사이에 논쟁이 되었던 고지론과 미답지론에 적용해 보자. 이재철 목사에게 중요한 것은 신자의 위치와 지점이 아니라 중심이다. 우리가 어디에 서 있는가의 문제도 중요하지만, 왜 그 자리에 서 있는가가 더 중요하다. 낯선 이교도의 땅, 사로잡힌 땅, 바벨론 강가에서 다니엘은 고지에서, 에스겔은 미답지에서 하나님과 민족을 섬겼다. 낮은 곳에 서 있어도 그의 중심이 하나님에게 있지 않으면 그는 사라질 사르크스이다. 높은 곳에 올라도 그가 지향하는 바가 하나님 안에 있다면 그는 프뉴마이다. 어느 곳에서라도 하늘을 향해 기도의 창을 내는 청년이라면, 그는 영과 육이 통합된 소마, 곧 하나님의 몸이다. 

그러면, 무엇을 부인할 것인가? 하나님이 아닌 것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2,000년 전 주님을 찾아왔던 청년은 오늘을 사는 청년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보다 더 신뢰하는 그 무엇인가를 지니고 있다. 그것이 돈일 수도 있고, 지식일 수도 있으며, 특정 인간일 수도 있고, 자신의 힘과 능력일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섬기기 위해, 실제로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심긴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온갖 열심을 다한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을 다한들 부족한 한 가지를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보다 더 귀히 여기는 바로 그것을, 하나님보다 그것을 더 신봉하려는 자기 자신을 ‘베레스 웃사’ 하는 것이다”([인간의 일생], 203). 그렇다. “오늘 이 시대는 투사를 요구하지 않는다. 오늘 이 시대는 진실한 신자를 요구한다. 진실한 신자만이 누가 보든 보지 않던, 용기 있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런 용기의 사람을 통하여 이 땅의 역사를 바꾸어 가신다.”([청년아], 167). 

구도자는 이웃을 위해 존재한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인간의 변혁에 있다. 에베소서는 새 인간의 창조라고 선언한다. 새로운 인간은 고립된 개인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공동체이다. 이 관계 속에서 신앙이 표현되고 분출된다. 구도자라도 이 관계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리스도교의 구도자는 다른 공간을 차지하거나 외적인 간격을 확보하지 않는다. 구도자는 공간과 거리가 아니라 내면의 중심과 지향 속에서 빛을 발하는 법이다. 기독교 신학에서 초월은 현실 도피가 아니라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본다. 

하나님과 나의 만남은 너의 배제가 아닌 나를 매개한 우리의 만남이 되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이재철 목사는 하나님 앞에서 고독한 구도자의 모습을 취하지만, 너를 배제하지 않는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존중하는 자는 이웃을 인정한다. 하지만 온갖 신념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다종교, 다문화 사회에서는 충돌이 불가피하다. 갈등이 불거지는 것이 어쩔 수 없다고 해도, 피할 수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예컨대, 오늘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기독교와 일반 사회와의 갈등과 충돌은 대개 복음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하기에 미심쩍다. 타종교와의 갈등이건, 사회 정치적 충돌이건 간에 화해할 수 없는 신앙의 차이, 즉 진리의 대립이 아니라 신념의 대립일 따름이다.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이 무례한 기독교인들의 행동 양식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표현 방식이다. 물리적 힘과 폭력을 동원해서라도 자기 주장을 관철하려는 권력에의 의지 앞에서 십자가는 그저 포개어 놓은 두 개의 작대기이다. 

최소한의 시민적 소양도 갖추지 못한 교인들의 모습에 세상은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드는 것이다. 사소하게는 공공장소에서 신발 하나 제대로 벗어 놓지 않는 모습에서, 선교 여행 중에 대한항공 기내용 담요를 버젓이 들고 오는 모습에서, 성지 순례 중에서 세금을 내지 않고 보석을 들여오려는 모습에서, 비행기 승객으로 지켜야 할 예절을 스스럼없이 어기는 모습에서, 아이들이 호텔에서 요란하게 뛰어 다녀도 아무도 제재하지 않는 부끄러운 모습에서 우리는 타인에 대한 예의범절을 갖추는 것이 더불어 사는 법이면서도 신자의 덕목이라는 점을 각인하게 된다([인간의 일생], 85-92). 

이재철 목사의 설교가 단지 개인 윤리에만 멈추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지평으로 시선을 확장한다. 분명 교회는 세상에 속하지 않는 하나님의 것이다. 교회의 거룩함은 세상과의 분리 속에서, 즉 거리를 많이 확보하여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교회의 본질에 의해서 세상과 구별되며, 세상을 전복한다. 교회란 본시 어두운 세상과 분명하게 대조되는 대안 공동체이다. 그렇다면, 청년 그리스도인들의 역사 참여는 세상의 것과는 다름에 틀림없다. 나라 사랑에도 그리스도의 향기나 절로 우러나는 법이다. 그는 잘라 말한다. 크리스천이 말하는 애국은 세상의 애국과 다르다. 

“현해탄 저쪽 일본 사람들은 이토 히로부미를 근대 일본의 기틀을 만든 위대한 애국자로 추앙하여 일본 지폐에 그의 얼굴을 새겨 넣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현해탄 이쪽 한국인들에게 이토 히로부미는 우리 나라를 강탈했던 원흉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가 우리 나라에서는 애국 지사로 존경받지만, 일본인들에게는 그들의 영웅을 죽인 폭도일 뿐이다. 만약 이런 것이 애국이요 애족이라면 이것은 결코 크리스천들이 추구할 애국 애족일 수는 없다. 시간과 공간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애국 애족은 크리스천들의 추구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크리스천들은 영원한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들이기에, 영원한 진리의 기초 위에서 추구하는 애국 애족이란 어떤 시간과 공간에서도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청년아], 103-04). 

이 대목에서 요한과 바울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들은 복음을 인간의 혈통과 전통에 제한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구원사는 특정 민족에 얽매이지 않는 보편적인 것임을 보여주었다. 그랬기에 바울이 유대인들로부터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던 것이다. 또한 지나치게 편협한 이기적인 민족주의는 일종의 우상숭배라는 것을 나치의 역사는 증명한다. 

이 세상을 변혁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예수쟁이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고 살면 된다. 그분의 가르침대로 살지 않으면서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명목상의 신자로는 세상을 변혁할 수 없다. 자기를 변혁하는 자만이 세상을 변혁한다. 교회가 변화된 하나님의 공동체로 산 위에 우뚝 설 때에 세상은 그리스도를 보게 될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의 과제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내는 것이다. 이 삶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한다. 만약 우리 속에서 그분을 볼 수 없다면, 이 세상의 그 누구도 주님을 볼 수 없다. 청년들이 그를 가장 잘 아는 삶의 현장, 곧 가정과 일터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교회에서의 경건은 연기에 불과하다. “연기로는 결코 이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한다”([참으로 신실하게], 227). 이처럼 “입으로 고백은 하면서도 자기 부인과는 전혀 동떨어진 채, 세속적 사고방식에 젖어 이기적인 기복주의자로 살아가는 현재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서는 전 국민의 25퍼센트가 아니라 100퍼센트가 교회에 다닌다고 할지라도 이 세상은 새로워지지 않을 것이다. 도리어 그 같은 우리로 인해 세상의 어둠과 혼란이 가중될 뿐일 것이다”([내게 있는 것], 58). 

흔들리는 욕망의 바다에서 

세상은 원래 그렇다고 하더라도, 교회마저 황제의 논리, 세속의 논리에 사로잡혀 주님의 논리를 저버린다는 것은 참으로 끔찍한 자기 배신이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적당히 살라는 유혹을 받는다. 흔들리는 대로 자신을 맡기라고 부추긴다([인간의 일생], 338). 더 나아가 적당하게 살지 않고 꼿꼿하게 살려고 애쓰는 것을 불편해 한다. 

이 목사가 청년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간단하다. 우리가 말하는 대로 행동하라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삶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말씀은 결코 들려지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세상을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구분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말씀을 따라 산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구별한다. 잣대는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삶과 눈에 보이는 욕심을 따라 자신과 이웃의 생명을 깎아 먹고 산 것으로 가늠한다. 신자와 불신자의 이분법이 아니라, 예수를 위해 자신을 판 자와 자신을 위해 예수를 판 자의 구분이다. 신자는 세상이란 원래 그렇고 그런 것이라고 말하라고 부름을 받은 자가 아니다. 그렇고 그런 세상에서 그렇지 않은 삶을 살겠다고 결단하는 자다. 자기의 욕망을 따라 산자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산 자는 영원을 달리하게 된다. 

오늘의 청년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사람은 군중이 아니라 깨어 있는 한 인격이라는 것을 기억한다면, 역사의 지평을 뒤흔드는 인간으로 일생을 하나님께 드리고자 한다면, 자신의 인생을 자신과 이웃,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현존하는 미래가 되고자 한다면, 살아 있는 동안 지금부터 진짜 크리스천으로 살고자 한다면, 욕망의 바다에서 영원의 길을 찾는 구도자가 되기를 결단한다면, 그는 반드시 말씀을 사모하게 될 것이며, 구도의 여정에 동반자로 이재철 목사와 그의 청년 서신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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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christianitytoday.com/ct/2000/005/5.92.html



christianitytoday가 선정한 20세기의 책입니다. 


christianity today, april 24, 2000



books of the century
leaders and thinkers weigh in on classics that have shaped contemporary religious thought



| posted 4/24/00


if you want to be changed, read a good book. or so said a. w. tozer: "the things you read will fashion you by slowly conditioning your mind." of the millions of books published this century, only a few hundred have shaped people in extraordinary ways. here are some of those—100 books that had a significant effect on christians this century.



christianity today asked more than 100 of its contributors and church leaders to nominate the ten best religious books of the twentieth century. by best books, we meant those that not only were important when first published, but also have enduring significance for the christian faith and church. we have included books which do not always prompt agreement, but which are important for evangelical christians to read and contend with. a few "period" pieces also made the list of 90.



by far, c. s. lewis was the most popular author and mere christianity the book nominated most often. indeed, we could have included even more lewis works, but finally we had to say: "enough is enough; give some other authors a chance."

readers are welcome to send us their own nominations of the top ten religious books of the twentieth century, with comments.



the top 10

1. c. s. lewis
mere christianity
the best case for the essentials of orthodox christianity in print.
david s. dockery



씨. 에스.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홍성사.



2.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
leaves you wondering why you ever thought complacency or compromise in the christian life was an option.
mark buchanan



본회퍼. [나를 따르라]. 대한기독교서회.



3. karl barth
church dogmatics
opened a new era in theology in which the bible, christ, and saving grace were taken seriously once more.
j. i. packer



칼 바르트. [교회교의학]. 대한기독교서회(현재 i/1이 박순경 선생님에 의해 번역되었구요, 계속 출간될 예정입니다.)



4. j. r. r. tolkien
the lord of the rings (trilogy)
a classic for children from 9 to 90. bears constant re-reading.
j. i. packer



톨킨. [반지의 제왕]. 두 군데서 나왔죠.



5. john howard yoder
the politics of jesus
some 30 years after this book was published, the church has found itself culturally in a more marginal position, and this book is making wider and wider sense.
rodney clapp



존 요더의 책입니다. 아직 번역이 안되어 있는데, 시급히 소개되어야 할 책입니다. 개인적으로 엄청 부담을 갖고 있는 책입니다. 



6. g.k. chesterton
orthodoxy
a rhetorically inventive exposition of the coherence of christian truth.
david neff



체스터톤. [오소독시: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이끌리오



7. thomas merton
the seven storey mountain
a painfully candid story of one christian soul's walk with grace and struggle, it has become the mark against which all other spiritual autobiographies must be measured.
phyllis tickle



토마스 머턴. [칠층산]. 바오로 딸.



8. richard foster
celebration of discipline
after foster finishes each spiritual discipline, you not only know what it is, why it's important, and how to do it—you want to do it.
mark buchanan



리처드 포스터. [영적 훈련과 성장]. 생명의 말씀사.



9. oswald chambers
my utmost for his highest
a treasury of daily devotional readings that has fed the souls of millions of christians in the twentieth century. future generations of christians must continue to draw from this treasury.
richard j. mouw



오스왈드 챔버스. [주님은 나의 최고봉]. 두란노.



10. reinhold niebuhr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introduced a breathtakingly insightful, shrewd, and cunning realism about human sin, especially in its social expressions, rooted in biblical theology and a penetrating appraisal of the dark era into which the western world had entered.
david p. gushee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 현대사상사.



the other 90
in alphabetical order by author



chinua achebe
things fall apart



추누아 아체베. [모든 것은 무너진다]. 학민사.



alcoholics anonymous
(the big book of a.a.)



roland bainton
here i stand



롤란드 베인튼. [마르틴 루터의 생애]. 생명의 말씀사.



karl barth
the epistle to the romans



칼 바르트. [로마서 강해]. 한들.

(이 책을 저는 영어로 읽었습니다. 우리 말로 번역되었기에 소장할 가치가 있다고 봐서 사 두었는데, 번역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하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참조하세요)



ernest becker
the denial of death



robert n. bellah, et al.
habits of the heart



georges bernanos
the diary of a country priest



dietrich bonhoeffer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본회퍼. [옥중서간]. 대한기독교서회.



david bosch
transforming mission



데이비드 보쉬. [변화하고 있는 선교]. 기독교문서선교회.



walter brueggemann
the prophetic imagination



월터 브루그만. [예언자적 상상력]. 대한기독교서회.



emil brunner
truth as encounter



albert camus
the plague



카뮈의 [페스트]입니다.



edward john carnell
the case for orthodox christianity



에드워드 존 카넬. [기독교 변증학 원론]. 성지출판사. & 풍만.



willa cather
death comes for the archbishop



dorothy day
the long loneliness



annie dillard
pilgrim at tinker creek



Documents of vatican ii



w. e. b. dubois
the souls of black folk



t. s. eliot
four quartets



ralph ellison
invisible man



랄프 엘리슨. [보이지 않는 인간]. 문예출판사.



jacques ellul
the technological society



자크 엘룰. [기술의 역사]. 한울.



shusaku endo
silence



엔도 슈사쿠. [침묵]. 분도 & 홍성사.



anne frank
the diary of anne frank



안네 프랑크. [안네의 일기]. 문학과 사상사.



victor frankl
man's search for meaning



빅터 프랑클. [죽음의 수용소에서]. 청아출판사.



sigmund freud
civilization and its discontents



지크문트 프로이트. [프로이트 전집]. 열린책들.



the fundamentals



langdon gilkey
shantung compound



carol gilligan
in a different voice



캐롤 길리건. [다른 목소리로]. 동녘.



graham greene
the power and the glory



john howard griffin
black like me



gustavo gutiérrez
a theology of liberation



구티에레즈. [해방신학]. 분도출판사.



philip paul hallie
lest innocent blood be shed



stanley hauerwas
a community of character



václav havel
living in truth



richard hays
the moral vision of the new testament



리처드 헤이스. [신약의 윤리적 비전]. ivp.



carl f. h. henry
god, revelation, and authority (six volumes)



칼 헨리. [신, 계시, 권위]. 생명의 말씀사.



john r. hersey
hiroshima



존 허시. [히로시마의 증인들]. 분도출판사.(소책자입니다.)



abraham heschel
the prophets



아브라함 헤셀. [예언자]. 삼인.



aldous huxley
brave new world



헉슬리. [멋진 신세계]. 문예출판사 & 범우사.



william james
the varieties of religious experience



윌리엄 제임스. [종교적 경험의 다양성]. 한길사 & 대한기독교서회.



franz kafka
the trial



카프카의 [심판]입니다.



martin luther king, jr.
a testament of hope



thomas s. kuhn
the structure of scientific revolutions



토머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이화여대출판부 & 까치글방.



harper lee
to kill a mockingbird



하퍼 리. [앵무새 죽이기]. 문예출판사.



aldo leopold
a sand county almanac



c. s. lewis
the chronicles of narnia
(especially the lion, the witch and the wardrobe) and the screwtape letters



루이스. [나르니아 연대기]. 시공주니어.



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그레셤 메이첸. [기독교와 자유주의]. 크리스챤 출판사.



alasdair c. macintyre
after virtue



알레스데어 매킨타이어. [덕의 상실]. 문예출판사.



malcolm x and alex haley
the autobiography of malcolm x



말콤 엑스. [말콤 엑스]. 세기.



george m. marsden
fundamentalism and american culture



조지 마스든. [근본주의와 미국문화]. 생명의 말씀사.



françois mauriac
viper's tangle



jürgen moltmann
the crucified god



위르겐 몰트만.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 한국신학연구소.



richard john neuhaus
the naked public square



les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ivp.



reinhold niebuhr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 (two volumes)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리처드 니버. [그리스도와 문화]. 대한기독교서회.



kathleen norris
the cloister walk



henri j. m. nouwen
the wounded healer



헨리 나우웬. [상처입은 치유자]. 두란노.



anders nygren
agape and eros



안더스 니그렌. [아가페외 에로스]. 크리스찬다이제스트.



elizabeth o'connor
journey inward, journey outward



flannery o'connor
a good man is hard to find and other stories



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루돌프 오토. [성스러움의 의미]. 분도출판사.



j. i. packer
knowing god



패커. [하나님을 아는 지식]. ivp.



alan paton
cry, the beloved country



jaroslav pelikan
jesus through the centuries



야로슬로프 펠리칸. [예수의 역사 2000: 문화사 속의 그리스도의 위치]. 동연.



josef pieper
the four cardinal virtues



michael polanyi
personal knowledge



마이클 폴라니. [개인적 지식]. 아카넷.(나는 미국가서 영서를 사와서 읽을려고 하는 찰나에 번역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인격적 지식이라고 하여야 하는데, 개인적 지식이라고 하였다.)



chaim potok
the chosen



walter rauschenbusch
christianity and the social crisis



dorothy l. sayers
the mind of the maker



albert schweitzer
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



nevil shute
on the beach



ronald j. sider
rich christians in an age of hunger



로날드 사이더. [가난한 시대의 부유한 그리스도인]. ivp.



alexander solzhenitsyn
the gulag archipelago and 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



알렉산더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민음사.



john r. w. stott
basic christianity



존 스토트. [기독교의 기본진리]. ivp.



paul tournier
the meaning of persons



a. w. tozer
the pursuit of god



토저. [하나님을 추구함]. 생명의말씀사.



barbara tuchman
the guns of august



evelyn underhill
mysticism



에블린 언더힐. [실천적 신비주의]. 은성.



miroslav volf
exclusion and embrace



gerhard von rad
old testament theology



폰라트. [구약성서신학]. 분도출판사.



andrew f. walls
the missionary movement in christian history



max weber
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



막스 베버. [프로텐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 문예출판사.



simone weil
waiting for god



시몬느 베에유. [신을 기다리며]. 대한기독교서회(현대신서 87번)



elie wiesel
night



엘리 위젤. [흑야]. 분도출판사.



charles williams
descent into hell



walter wink
engaging the powers



월터 윙크.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 지배체제 속의 악령들에 대한 분별과 저항]. 한성수 옮김. 한국기독교연구소.



philip yancey
the jesus i never knew



필립 얀시. [내가 알지 못했던 예수]. 요단.



related elsewhere

most of these books are still in print and can be purchased at the christianity online bookstore and other book retailers.



near the end of 1999, harpercollins published a list of the 100 best spiritual books of the century. john wilson, editor at large of christianity today and editor of books & culture, was on the nominating committee.



april 24, 2000, vol. 44, no. 5, page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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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의 위기와 성서해석학, 정용섭

교의학, 푈만

조직신학, 판넨베르그

복음주의 신학 입문, 바르트

신앙의 본질, 에벨링

현대 교회의 고민과 설교, 틸리케

인문학 훈련- 철학, 문학, 정신분석,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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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청년아카데미 공동체 지도력 훈련원 2기

- 하나님나라 * 공동체 * 제자도 -




▣ 공동체 지도력 훈련원은...

기독청년아카데미 학기별 강좌들과 연계하여 진행되는 집중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나라와 공동체에 대한 소명과 도전이 심화된 청년들과 함께

보다 집중적으로 공부하며 ‘공동체 지도력’을 양성하는 훈련과정입니다. 


공동체 성서읽기, 공동체 관계 및 지도력 훈련, 목회상담 등을 통해,

서로의 은사와 소명을 자각하고 이를 함께 공유하도록 돕습니다.  

성령의 소통하심을 통해 생성되는 ‘은사공동체’의 지체됨을 자각하고,

자신이 속한 공동체와 사역 현장에서 ‘상호 목회적 관계’를 구현할 수 있는 지도력을 훈련합니다. 


하나님나라의 영성과 제자도를 토대로 우리시대의 역사, 사상과 문명의 흐름을 공부합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작동하는 세속적 가치질서의 우상적 작동을 분별하는 지혜를 공부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나라의 대안적 생활양식과 관계를 창출하고자 하는 소명 속에서 수행됩니다.


하나님나라 운동을 각자의 생활, 사역 현장에서 다양하게 생성시키고,

우리시대의 우상적 삶의 양식과 세속적 가치질서를 거스르는

대안적 공동체를 다양하게 창출해 갈 수 있도록 도울 것입니다. 


1. 졸업을 앞둔 기독학생들을 위한 선교적/공동체적 사회진출 운동

2. 하나님나라운동을 사회생활 현장에서 지속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생활양식과 관계를 생성하는

   생활/사역 공동체 창출 운동

3. 선교단체 간사, 청년목회자, 청년 지도력들의 공동체 사역을 돕는 공동체 지도력 양성 운동



▣ 일시 : 07년 2월 14(수) 개강, 1년 과정

          매주 수요일 저녁 7:00~10:30


▣ 장소 : 기독청년아카데미 세미나실 (지하철 혜화역 4호선 4번 출구)


▣ 강사 : 최철호 목사 (아름다운마을공동체, 기독청년아카데미 운영위원장)


▣ 등록 : 직장인 300,000원 (학생/간사 250,000원)  /  국민 373701-04-067555 오세택

        계좌입금 후 게시판(전화)로 연락주시면 등록 완료됩니다. 인원제한 있음. 꼭 사전등록해 주세요.

▣ 문의 : 764-4116  /  김준열 간사 010-3014-7910  http://lordyear.cyworld.com

 

 

 


▣ 주요 교육 내용 

성서와 공동체

세미나 주제

교 재

영성 ․ 삶 ․ 제자도

공동체 성서읽기

(요한복음/로마서)

*

공동체 관계훈련

*

생활 나눔

상호목회

*

밥상공동체

*

목회상담

하나님나라

복음

역사

통전적 선교

르네 빠딜라 / 나눔사

제자입니까

후안까를로스 오르티즈/두란노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로날더 사이더 / IVP

기도

   리차드 포스터 / 두란노

영적 성장의 길

   고든 맥도널드 / 두란노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고든 맥도널드 / IVP

모든 것을 새롭게

   헨리 나우엔 / 두란노

현대인을 위한 생활영성

   폴 스티븐슨 / IVP

대화-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리영희, 임헌영 / 한길사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폴 사르트르 / 한마당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 돌베개

나무야 나무야

   신영복 / 돌베개

더불어숲

   신영복 / 돌베개

대천덕 자서전

   대천덕 / 홍성사

문익환 평전

   김형수 / 실천문학사

나를 따르라

   본회퍼 / 기독교서회

옥중서간

   본 회퍼 / 기독교서회

중력과 은총

   시몬느 베이유 / 사회평론

신학의 역사

A. 맥그라스 / 지와 사랑

현대사상/문명의 흐름과 전환

동북아 사상의

영감과 논리

세계관적 성찰

논술과 철학 강의

김용옥 / 통나무

철학과 굴뚝 청소부

이진경 / 새길

이성의 기능

화이트헤드 / 통나무

사건의 철학

이정우 / 철학아카데미

강의-나의 동양고전 독법

신영복 / 돌베개

하나님나라

공동체

지도력

현대신학의 패러다임

도르트 죌레 / 한국신학연구소

참으로 해방된 교회

하워드 스나이더 / IVP

신도의 공동생활

본 회퍼 / 대한기독교서회

균형, 그 조용한 목회혁명 

유진 피터슨 / 좋은 씨앗

기초공동체 생성과 연대를 통한 하나님나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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