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에 해당되는 글 192건
- 2011.08.06 [찬양]십자가의 길 순교자의 삶
- 2011.08.06 [찬양]내입술의 말과
- 2011.08.06 [찬양]Revival Generation
- 2011.08.06 [찬양]주님만 사랑하리
- 2011.08.06 [찬양]주의 아름다움을 말로다...
- 2011.08.06 [찬양]언제나 내모습...
- 2011.08.03 목회자 자기관리수칙 33(이재철 목사)
- 2011.08.01 산상수훈의 삶을 사는 법
내 마음에 주를 향한 사랑이
주께 열납되길 원하네
내반석 나의 구원자 나의 노래할 이유
주님 눈에 축복되길 원하네
모든 순간순간 마다 주의 종 되길 원해
주님 눈에 축복되길 원하네
May the words of my mouth
and the meditation of my heart
be pleasing to you be pleasing to you
you're my rock and my redeemer
you're the reason that i sing
i desire to be a blessing in your eyes
every hour and every moment
i want to be your servant
i desire to be a blessing in you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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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청년부 수련회의 주제가...
어느 목사님의 결단처럼
기도하기 전에는 말하지 않으며
영의 양식을 먹기 전에는 육의 양식을 먹지 않고
찬양하기 전에는 일하러 가지 않는
묵상의 삶을 다시 결단해본다.
스스로 겸비하고 기도하며
주얼굴 구하오니
이땅 고치소서
†주여 들으소서
주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에게
부흥을 주소서
†하나님 얼굴 구하는 세대 되게 하소서
온땅 덮는 주의 영광 보게 하소서
모든 나라 족속 가운데 부흥 임하기 까지
밤낮울부짖는 부흥의 세대 세우소서
거룩함으로 부르심에 답해
우리가 성회로 모여
울며 기도하고 금식하오니
주여 세월을 아끼겠나이다
지금의 때가 악하니 아멘 주예수여 오시옵소서
주여 들으소서
주이름으로 일컫는 백성에게
부흥을 주소서
†하나님 얼굴 구하는 세대 되게 하소서
온땅 덮는 주의 영광 보게 하소서
모든 나라 족속 가운데 부흥 임하기 까지
밤낮울부짖는 부흥의 세대 세우소서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Reviv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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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 성경의 역사서 특히 왕들과 포로기 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을 보고있다.
가증한 우상들을 섬김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주변국들의 압제에 시달리고...
그렇지만 하나님 앞에 나와 겸손히 구하기만 하면 그분께서는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을 구원하신다.
이때 온 백성이 모여 하나님의 말씀을 온종일 듣고 재를 쓰고 금식하며 회개하는 장면을 읽자면 온몸에 전율이 전해진다.
겸비함과 기도...
부흥의 전주곡이다.
주의 아름다움을 말로다 형언할 수 없고
주님의 그 놀라우심은 다 표현할 수가 없네
누가 그 지혜를 깨닫고 누가 깊은 사랑 측량할까
보좌에 앉으신 주의 위엄 아름다우신 주님...
중고등부 예배시간에 찬양인도를 하다보면 참 마음이 어렵다.
아이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주보를 읽거나 다른 아이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그냥 관두고 싶은 마음이다.
그런 마음으로 찬양하고 있을때 마음에 다가왔던 곡...
아...참으로 나의 부족한 찬양인도로 그 아름다우신 주님을 저들이 조금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다라는 강한 소원이 내안에 일어났었다.
그러면서 그 아름다운 주님 내 힘으로는 그들에게 전할 수 없구나라는 고백이 나왔다.
다 알 수 없는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하지만 내 평생에 더욱 많이 알아가길 기도한다...
언제나 내모습 너무나 부끄러워
무릎으로 주님께 기도로 가오니
나홀로 서있는 죽은 내영 깨우사
주님만 나를 세워 내영 살게 하소서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내 안에 계시고
주님 내 안에 주님 내 안에
나를 세워주소서
현재 교회에서 Holy Fire(중고등부) 찬양인도를 맡고 있다.
저저번주인가?
이 찬양을 하는데 문득 세번째줄 가사가 눈에 들어왔다.
나홀로 서있는 죽은 내영 깨우사...
아...
나홀로 서있는 것은 산 것이 아니라 죽은 것이다...
아이들에게 항상 매순간 속에서 주님의 의식하며 그분의 도움을 구하자고 이야기했다.
오...주님 그렇습니다.
저 혼자 살아보려고 했던 모든 내면의 것들을 회개합니다.
주님께서 함께 해주시지 않으시면...
주님이 주시는 생명이 아니면...
저는 산 것 같으나 산 것이 아닙니다.
다시한번 내 안에 주님을 초청하고 주님의 주권을 인정합니다.
주님 내 안에 내가 주님 안에서 누리는 이 기쁨
날마다 더욱 나를 놀라게 하신 성실하신 나의 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살아가는 모든 즐거움
내안에서 새일 행하신 주님 생각함일세
(정종원 '나의 안에')
원문 http://blog.daum.net/jesuswmddls/10
1.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 service'라 한다.
그러므로 교인들에 대한 봉사정신에 투철하지 않는 한 진정한 목회자가 될 수 없다.
2.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지 휴일이 아니다.
만약 목회자의 토요일이 휴일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목회자는 교인과 구별되지 않는다.
3. 토요일 자 신문이 오면 주일에 대한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필요한 조치를 미리 취하라.
4. 반드시 시간을 지키라.
어떤 예배든 정해진 시각 정각에 시작하라.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다고 예배 시간을 늦추지 말라.
예배 시간이란 사람과의 약속이자,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5. 새벽 기도회가 끝남과 동시에 개인 기도를 충분히 하라.
그 시간을 놓치면 하루 중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 어렵다.
6. 새벽 기도회가 끝난 뒤 집에 가서 다시 잠들지 말라.
하루 중 그 시간보다 영성을 기르기에 더 좋은 시간은 없다.
7. 어떤 교인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어떤 교인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라.
말씀 읽기와 기도는 습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8.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것은 교인에게 요구하지 말고, 교인들에게 설교한 것은 무조건 행하라
참된 설교는 강단에서 내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9. 좋은 설교는 그 전체 내용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설교에 초점이 없다는 뜻이다.
10. 다른 사람이 설교할 때 주의를 집중하여 경청하라.
타인의 설교를 소홀히 하면 다른 사람도 나의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에 귀 기울이는 것 자체가 이미 교인을 향한 훌륭한 설교다.
11. 월요일 아침에는 자기 교구 교인 명단을 놓고, 주일에 누가 보이지 않았는지 대조하면서 전화로 확인해 보라.
목회는 관심이고, 관심은 쏟아야 계발된다.
12. 교인들에게 대접만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목회자가 나눔의 종착역이 되려 하면 스스로 썩어 버린다.
13. 심방의 대가로 어떤 경우에도 돈을 받지 말라.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인격을 파는 짓이요, 스스로를 삯꾼으로 전락시키는 것이다.
14. 목회 활동 중에 알게 된 교인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누설해서는 안 된다.
15. 이성이 교역자 혼자 심방해 줄 것을 요구하면 절대로 응하지 말라.
이성은 단둘이 식사도 하지 말라.
이성과 상담을 할 때는 반드시 교회 사무실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하라.
정신질환자인 이성이 상담을 요구할 때는 반드시 누군가를 배석시켜야 한다.
16. 교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목회자여야 한다.
교인들이 없다고 해서 목회자의 정체성을 망각한다면 결국 사람들 앞에서는 목회자 연기를 하는 셈인데,
연기를 통해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17. 장례식 때 하관예배 설교는 5분을 넘지 말라.
그때가 유족들이 가장 지쳐 있는 시간이다.
18. 하관예배까지 다 끝난 후에는 유족의 집까지 따라가서 위로의 기도르 해드리라.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문을 들어서는 순간이 유족이 가장 외로울 때다.
19. 다른 목회자가 어떤 일을 주관할 때, 반드시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워 보라.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20. 교인의 모든 행사는 교역자 위주가 아니라 교인 위주여야 한다.
21. 명단을 작성할 때는 교인들의 이름을 먼저 쓰고, 교역자의 이름은 제일 끝에 넣으라.
교인들을 위한 섬김은 종이 종이 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22. 교인 수첩 제작 등 교인 명부를 작성할 때 교인의 이름이 틀리거나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라.
사람의 이름을 빠뜨리거나 틀리게 기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다.
23. 교회 재정에 관여치 말라.
한번 관여하기 시작하면 재정이 목회의 핵심이 되어 버린다.
목회의 핵은 복음이지 재정이 아니다.
24.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위하여 교회에 금전적인 요구를 하지 말라.
목회자는 주어진 것 속에서 지족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권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25. 내일 떠나더라도 지금 섬기는 교회를 중간 기착지라 생각지 말고 종착역으로 여기라.
내일이 되기 전에 내 생명이 끝날지도 모른다.
26.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27.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즉시 사과하라. 실수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실수를 깨닫고도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세 번 이상 반복하는 것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다.
28. 절대적인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도 있어야 하지만, 상대적인 것이라면 모두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
29. 부목사 시절에 세계문학전집 한 집은 반드시 읽으라.
목회의 대상은 사람이고 문학은 사람에 관한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문학은 사람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해 준다.
사람을 알지 못하는 자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30. 신학자는 수직적 사고만으로도 족하지만, 목회자는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 사고가 교직되어야 한다.
31. 지식과 정보는 반드시 공유하라.
32. 목회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다.
33. 삶은 결코 되돌아오는 법이 없기에, 목회자는 자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중단 없이 정진해야 한다.
2001년 여름수련회 선택특강
산상수훈의 삶을 사는 법
김 성래 목사(익산지구 책임)
1. 서 론
우리는 장난감이나, 약, 자동차, 어떤 것이든 처음 사면 그 설명서를 읽어본다. 기독교도 마찬가지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여러 성경말씀에서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시는 삶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사는 것은 스스로 문제를 자초하는 것과 같다.
산상설교는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따르는 자(천국백성)들에게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가르침이다. 산상설교의 요지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야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가 아니라, '너희가 기독교인(천국백성)이니까 이렇게 살아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의 세계가 참된 기독교인을 찾고 있고,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 시대의 사람들의 그러한 기대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 기독교인다운 생활을 다시 살기 시작해야한다.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 복음의 다이내믹한 것이 나타나야 한다. 교회가 이런 모습을 회복할 때 사람들은 교회의 건물 속으로 밀려들어 올 것이다.(행2:42-47) 그리고 그들은 '그 비결이 무엇이냐?'고 물을 것이다. 우리가 산상설교대로 살기만 한다면 이런 일이 가능해진다. 세상 사람들은 기독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부흥이다.
2. 마태복음 속에 산상설교
산상설교는 마태복음 5-7장에 기록되어 있다.
'왜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서두에 기록되었는가?'라는 의문을 한번쯤은 가져볼 만하다. 거기에는 충분한 이유가 있다. 마태는 그의 복음서를 유대인을 독자로(1차 적인 독자) 생각하고, 유대인을 위해 쓰고 있다. 마태는 마태복음을 통해 '천국'(天國 The Kingdom of Heaven)을 강조하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의 왕 되심과 다윗의 후손이며(1장/계보소개) 그 위(位)에 앉으실 분으로 소개하고 있다. 따라서 마태복음을 '왕의 복음'이라고도 한다.
*하늘나라(天國)-33회
*하나님의 나라-4회
*다윗의 아들-9회
마태복음의 서술방식에 따라 분류
⊙1- 4장/ 연대기적 서술
⊙5- 13장/ 주제별 서술
⊙14-28장/ 연대기적 서술
마태복음에는 여섯개의 대강화가 나온다.
1)산상설교(5-7장)
2)열두 제자에 대한 강화(10장)
3)천국에 대한 일곱 가지 비유(13장)
4)천국에서의 관계-비하, 실족, 용서-(18장)
5)서기관과 바리새인에 대한 반박(23장)
6)감람산 설교(24-25장)
3.산상설교의 구조
4. 산상설교 성경공부를 위한 제언
1)산상설교를 공부하기 전에 먼저 마태복음을 최소한 1번 정독하라.
*마태복음을 읽는 그 자체로 산상설교의 훌륭한 주석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산상설교의 부분(5-7장)을 반복해서 5번 이상 읽어 보라.
*읽으면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면서 읽어라.
-산상설교가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산상설교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나의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산상설교는 누구에게 적용되는 것인가?
-산상설교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산상설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5. 마태가 말하는 천국의 관점
마태복음과 산상설교의 주제가 '천국'이라고 했다. 신약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의 나라'라고 기록하고 있는 반면, 마태는 '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마태는 그 당시 많은 유대인들 처럼 '하나님'이라는 말의 사용을 꺼렸다. 그래서 '하늘'과 같은 완곡 어법을 사용하였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거짓된 물질 천국관을 갖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정치적 해방을 주기 위해 오시는 분으로 생각했다. 그들은 메시야가 오시면 로마제국의 속박과 법에서 그들을 구해 주실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 그들의 천국관은 항상 외적 의미로 기계적이며, 군사적이며, 물질적인 의미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태는 천국에 대한 가르침을 그의 복음서 첫머리에 놓고 있다. 마태는 유대인과는 달리 '천국은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천국은 큰 군사력으로 이끄는 것하고는 거리가 먼 '심령이 가난하여 지는 것'과 관계가 있다. 진정한 천국이란 사람의 마음과 정신을 지배하고 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는 것이 아니고 '너희 안에 있다'는 것이다.
6. 산상설교를 공부하는 이유
1)산상수훈(설교)의 삶을 살기 위해서이다.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해서 ....'(딛2:14)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산상설교의 삶을 살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2)산상설교는 중생과 성령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성을 보여준다.
팔복의 말씀은 나를 땅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산상설교를 대할 때 내 자신이 얼마나 무력하며, 부패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중생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고, 성령의 내적 사역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3)산상설교를 듣고 실천하면 할 수록 우리는 더 많은 축복을 체험하게 된다.
이것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 약속된 축복에 주목하라. 만일 당신이 생활의 능력을 얻으며 축복받기를 원한다면 산상설교로 곧바로 돌아가십시오. 산상 설교대로 살며, 실천하며 몸을 내어 맡기라. 그럴 때 약속된 축복은 임할 것이다.
Ⅰ. 천국시민의 특성과 복(마5:1-12)
A. 서론 (마5:1-2)
1.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취하신 행동은 무엇인가?(1,2)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 어떤 눈으로 보셨다고 여겨지는가?
*당신은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떤 눈으로 보고 있는가?
2.예수님께서 입을 열었을 때 그 입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이었는가?
*입을 열어 가르쳤다는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은 입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무슨 말이 나오는가?
B. 팔복(마5:3-12)
예수님의 팔복 - 심령이 가난한 자(3)
'심령이 가난한자'는 '영적거지'로 의역할 수 있다. 즉 자신이 영적으로 파산(부도)되었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자이다. 자신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어떤 소망이나 목적을 달성 할 수 없다는 것을 아는 자들이다. '가난'은 헬라어로 두 가지 종류의 개념이 있다.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가난은 '페네스'가 아니라 '프토코스'의 가난이다.
☆가난: 페네스(Penes)-다소간 수입은 있으나 넉넉하지 못하여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가난
프토코스(Ptochos)-아무 것도 전혀 가지지 못한 사람, 거지, 무능력자
'심령의 가난'은 외부적인 환경을 통해서 조성되어진다.(일이 안되어야 사람이 된다/눅5:1-11)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게되고, 사회적으로 소외를 당하고(세리, 삭개오, 사마리아 여인-부자청년/마19:22), 질병의 위협을 받으면서(야이로의 딸, 혈루증 걸린 여자/막5:21-43) 천국을 소유할 수 있도록 심령(영혼과 마음)의 준비가 되어진다. 하나님은 이런 상태로 준비되기 전에는 말씀하시지 않으신다.(사57:15, 사66:2, 시119:67,71) 산상수훈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맥을 주의 깊게 보아야한다. 산상수훈이 마태복음 5장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4장23-25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절박한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게 필요를 채워주시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더라…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이 무리들은 예수님이 가르침을 마쳤을 때 '놀랐다'라고 성경기자는 기록해 놓고 있다.(마7:28-29) 이 사람들은 예수님의 만져주심과 가르침을 통해 천국을 막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약속된 축복은 '복이 있나니'라는 선언이다.
'복'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마카리오스(makarios)'이다. 이 말은 '얼마나 행복한가, …에게 축하한다, …의 인정을 받다'라는 의미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 보다 더 고귀한 축복이 어디 있겠는가? 본문은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구절이 여덟 번 반복된다. 그리고 축복의 종류가 임의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앞에 묘사된 성품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6절에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의로) 배부를 것이며 7절에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 심령이 가난해질 수 있을까?
1)영적 자만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한다.(계3:17-19)
겸손은 Open mind이고, 교만은 Close mind이다. 교만하면 아무 것도 받을 수도 배울 수도 없다. 모든 것이 잘되어갈 때, 환경적으로 어려움이 없을 때 조심해야한다.
2)환경적으로 어려움을 당하여 '깨어진 마음'(가난한 마음)이 되었을 때 감사하라.
C.S.루이스는 '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라고 했다. 어려움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영적으로 준비시켜준다.
예수님의 팔복 - 애통하는 자(4)
'애통'은 심령의 가난에 대응되는 정서적인 부분이다. 여기서 말하는 애통이란 단순한 슬픔이나 울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우울하고 눈물지으며 지내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애통'이라는 단어에는 여러 가지의 의미가 있다.
☆애통: 인간적인 애통(자기 중심적)-질병, 고통, 죽음, 사고, 물질의 손실, 자존심의 침해
영적인 애통
개인적인 차원-자신의 죄 때문에 운다.(사6:5, 롬7:24)
*데이빗 브레이너드(인디안 선교사) 1740년 10월 18일자 일기
"나는 아침 기도 시간에 나의 영혼은 심히 녹아내려 나의 엄청난 사악함과 타락을 몹 시 슬퍼하였다" 이와 같은 눈물은 하나님께서 그의 병에 담으신다고 하는 거룩한 눈 물이다.(시56:8)
넓은 차원-이 세상의 죄, 불의, 잔인함
*겔9:4- 예루살렘에서 행해지는 모든 가증스러운 일
*시119:136-저희가 주의 법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내 눈물이 시냇물같이
*주님의 애통하심-요11:35, 눅19:41, 히5:7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세상과 현재의 세상이 너무나 다르다.(말2:15) 이런 것을 보았을 때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은 애통하지 않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다 이런 안목이 있었다.(DL무디) 바울은 고후7:10에서 이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라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철저한 현실주의자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빗나간 세상을 보면서(가정, 교회, 학교, 문화) 탄식하고 울며 기도해야한다.
우리는 내 자신의 문제나 상실 때문에 애통해 하는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의 죄와 타락한 도성을 바라보면서 이 민족과 세계의 비참한 현실을 바라보면서 애통하는 것이 필요하다.(눅23:28) 그 사람의 크기는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의 싸이즈에 의해 결정되어진다. 조국을 위해 일할 사람은 그 가슴에 이미 조국이 들어있다. 애통하는 자가 받게 될 복은 '위로'이다. 이 위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위로이다. (사61:2-3, 계7:17, 시34:18) '위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라칼레인(Parakalein)'이라는 동사의 수동태이다. 이 낱말은 '권고하다(to exhort)' 또는 '격려하다(to encourage)'를 의미한다. 즉 개인적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경건한 슬픔을 갖고 하나님께 나아가면 그는 죄의 용서함을 받고 기쁨으로 위로를 받게되고 마음은 용기로 가득 채움을 받게 된다.
예수님의 팔복 - 온유한 자(5)
온유(meek)라는 말이 현대인들에게는 '약하고, 힘이 없고, 우유부단하고 결단력이 없고, 남자답지 못하고, 고분고분하고, 홀로 독립할 수 없는 사람'으로 이해되어진다. 그러나 헬라어에서 온유라는 단어는 '프라우스(Praus)'인데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1)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태도(하나님의 인도와 섭리에 겸손하게 반응하고 복종하는 마음)
2)그 이웃에 대한 인간의 태도
여기서 온유라는 말은 전자의 의미가 강하다. '온유'는 야생마가 잘 길들여져서 주인의 명령과 행동에 익숙하여 고삐를 이끄는 대로 따르도록 훈련된 것을 말한다.(욥1:21, 13:15, 눅1:38) 즉 하나님께서 그분의 시간에 일하실 것을 잠잠히 기다리고 포악한 사회에서도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며, 소유를 향해 혈안이 되어있는 사회에서도 기본적인 필요를 채우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과 믿음으로 얻는 위로로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시37:3-5, 14-17) 또한 온유라는 말은 자기 자신의 유익에 앞서 남의 유익을 볼 줄 아는 욕구통제(controlled desire) 이다. 아브라함도 온유했고(창13:8-12) 모세도 온유한 사람이었다.(민12:3) 예수님도 자신이 온유하다고 하면서 우리보고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마11:28-29)
진정한 강함은 강함에서 나오지 않는다. 진정한 강함은 부드러움에서 나온다. 모든 딱딱한 것은 죽음의 부류이다. 나무는 살아있을 때 부드럽고 휘어진다. 그러나 죽으면 딱딱해지고 장작이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살아있을 때는 부드럽다. 그러나 죽으면 즉시 딱딱해진다. 사람도 장작같이 된다. 군인에서 용장(勇將), 지장(智將), 덕장(德將)이 있다. 최고의 힘은 강함에서 나오지 않고 온유함에서 나온다.
하나님은 온유한 자에게 땅을 기업으로 주시겠다고 말씀 하셨다.(시37:11) 그래야만 땅과 세상과 사람들이 복을 받기 때문이다. 온유한 사람은 자신의 실력과 힘을 자신만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아니다. 온유한 사람은 실력이 있을 뿐만 아니라 땅과 세상과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와 같은 사람에게 땅을 기업으로 맡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온유한 사람으로 복의 근원을 삼으신다. 그에게 복을 주어 나라와 민족을 축복하려 하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팔복 -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6)
우리는 우리의 행복과 만족을 '이(利)'에서 찾는데 하나님은 우리의 행복과 만족은 이(利)에 있지 아니하고 의(義)에 있다고 말씀하신다. 세상적인 이(利)를 추구함으로 욕심을 채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욕심을 채운다고 해서 삶을 채우는 것은 아니다. 이(利)를 추구하는 삶의 패턴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의(義)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면 틀림없이 배부름(만족)을 얻게 될 것이다. 다윗과 같이 '나의 잔이 넘치나이다'라는 고백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利)를 위하여 의(義)를 버리는 세상 속에서, 그리고 본능적으로 의(義)보다 이(利)를 추구하는 죄성을 지니고 의(義)를 추구하는 삶을 산다는 것이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의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인가?
성경에서 '의'라는 단어는 관계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의를 단순히 동양적인 사고에 맞춰 '올바른 행실, 정의로움'으로 이해하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과 기준대로 살고자 발버둥하며 그렇게 살고 싶어하는 삶의 갈증'으로 이해해야 한다.(시42, 63) 즉 '의에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 맺기를 강렬하게 열망하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의미이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에게 주시는 약속은 '배부름'이다. 이 단어는 헬라어로 '코타제스타이(chortazesthai)'로 포만할 정도로 배부르게 음식을 먹이는 것을 의미한다.(요4:14, 6:35) 그렇다면 우리의 경우는 어떤가, 영적인 갈증(義)과 육적인 갈증(利)중에 어느 쪽이 더 강렬한가?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돈을 쓰고 진정한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을 위해 수고하는 일이 없어야겠다.(사55:2)
예수님의 팔복 - 긍휼히 여기는 자(7)
긍휼- 엘레오스(Eleos)란 단어는 신약에서 27회가 나온다. 긍휼은 '비참한 상태 속에 있는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사랑과 친절을 베푸는 것이고, 그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의 일과 이익을 잊어버리고, 희생적으로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눅10:30-37)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처럼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엡2:4, 애3:19-22, 시103:2-4, 시145:9 히4:16)
긍휼이란 상대방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공감)을 말한다. 즉 다른 사람과 자기를 동일시했을 때만이 긍휼을 베풀 수 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그 수렁과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비참한 처지에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사랑을 쏟아 부어주는 것이 긍휼이다.(북한동포, 실직자, 소년소녀가장) 우리가 긍휼을 베풀어야 할 대상은 믿는자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심지어는 내가 미워하고 나를 핍박하는 자까지도 그 대상이 되어야 한다.
긍휼히 여기는 자가 받을 복은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좋은 씨를 뿌리면 반드시 좋은 열매를 맺는다.(갈6:7) 긍휼을 심으면 긍휼의 열매를 얻는다. 사람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뿐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도 긍휼히 여김을 받는 것이다. 하나님께 긍휼함을 입을수록 좋다.(마25:31-46)
예수님의 팔복 - 마음이 청결한 자(8)
'청결'이란 말은 헬라어로 '카타로스(kataros)'이다. 여기서 '카타르시스'라는 말이 생겼다. 카타로스라는 단어는 때가 묻은 더러운 옷과 비교된 깨끗한 옷을 설명할 때 쓰는 말이다. 즉 흠이 없고 이물질과 섞임이 없는 순수한 것을 가리킨다. 이 말이 구약에서는 제사용어로도 사용되어졌는데 주로 제사를 드릴 때 정결함을 묘사하는데 쓰였다. 대제사장이 성막 제사에 나아갈 때 정결 의식이 있다. 부정한 동물을 만져서도 안되고,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도 안되고, 시체를 만져서도 안되며 동물의 피를 통해 정결함을 먼저 받아야 했다.
예수님은 외모가 청결한자가 복이 있나니… 하지 않고 '마음이 청결한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다. 여기서 마음이란 감정이 아니고 인격의 중심이며 속 사람을 가리킨다. 마음이 청결하다고 하는 것은 '진실 된 믿음을 가진 사람, 말과 행동이 일치하는 진실한자'를 의미한다.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은 행동하는 동기가 순수하고, 두마음을 품지 않고 일편단심이라는 말이다.(마6:24, 약4:8)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외모를 아름답게하고 청결하게 하는데는 신경을 곤두세우면서도 마음을 청결하게 하는데는 별 관심이 없다. 사람의 관심은 보이는 것에 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치 물처럼 우리의 마음을 정화시켜주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 들어올 때 마음에 더러운 죄가 씻겨진다.(요15:3, 엡5:26-27)
마음이 청결한자가 누리는 복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마음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된다는 의미이다.(시24:3-4 히12:14) 즉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고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이 전달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하나님과 함께 산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마음이 청결치 못한 자는 영적 소경이 되어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게되어 결국은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된다.(사16:20)
예수님의 팔복 - 화평케 하는 자(9)
'화평'은 영어로는 피스(Peace), 헬라어로는 에이레네(Eirene), 히브리어로는 샬롬(Shalom)이다. 이말은 단순히 평화라는 의미보다는 '부족함이 없는 상태, 고난과 역경이 지나간 후의 성숙함, 완전함'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바른 인격적 관계를 뜻할 때도 이 말을 사용했다. 샬롬은 '모든 피조물의 안녕, 평안'이라는 뜻이다. 또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최대의 선'이라는 의미도 있다.
여기서 화평케 하는 자는 '평화애호가'(Peace lover) 아니고 '평화를 만드는 자'(Peace maker)를 가리킨다. 즉 화평케 하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지불하는 것을 말한다.(테레사 수녀) 세상에는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 있지만 반면에 전쟁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화평케 하는 사람도 있지만 세상에는 불화케 하는 사람도 많다. 불화를 만드는 사람을 트러블 메이커(Trouble maker)라고 부른다. 하나님은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한다.
평화는 하나님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에 하나이기 때문에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된다면 사람들은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게 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워진다면 불화케하는 사람, 언제나 문제를 일으키는 사람은 마귀의 자식이라고 불리워지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교회에 다닌다고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는 않는다. 우리가 과연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자기가 속하여 살아가고 있는 가정과 세상을 화평케 하는가를 보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아니라 판단하게 될 것이다.(요13:35, 시133)
그러면 어떤 사람이 진정한 화해자가 될 수 있는가?
① 자기 자신이 하나님과 화해가 된 사람(롬5:1, 고후5:20. 요14:27)
②용서하고 용기있는 자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다른 사람이 실수와 잘못을 하였을 때 그 것을 덮어주고 용서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있어야만 한다. 남의 실수와 잘못을 용서하고 덮어 주지 아니하고 남의 실수와 잘못을 자신의 기회와 발판으로 삼으려고 하는 사람은 절대로 평화의 사람이 될 수 없다.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고 하는 용기있는 자가 되어야 한다. 불의에 대하여 항거하는 정신이 없이 평화를 얻을 수 없다. 화평에는 참 화평과 거짓 화평이 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10장 34 절에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화평은 참 화평이 아니다. 불의와 타협해서 얻은 거짓 평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참 화평은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말씀의 검으로 싸울 때 주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검을 무조건 불화로 이해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진정한 화평은 검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다. 때문에 평화의 사신으로 우리에게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검을 주러 오셨다 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화평케 하는 사람이 되려고 하면 불의와 타협하지 아니하고 그것과 싸우려고 하는 진정한 용기가 있어야 할 것이다.(롬12:18, 히12:14, 고후5:18)
예수님의 팔복 -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10)
여기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11)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고집이나 실수, 죄 때문에 핍박받는 자가 아니라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 자가 복이 있다고 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란 '핍박을 받아도 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의미한다. 오늘날 우리들에게 가장 필요한 정신이다. 조금만 어려운 일이 닥치면 의를 포기하는데 그런 나약한 정신으로는 절대로 승리할 수 없다. 핍박의 헬라어 단어는 '데디오그메노이'(dediogmenoi)인데 그 의미는 '성가시게 굴고 못살게 굴다, 다른 사람을 죽을 때까지 끈질기게 괴롭히다'라는 뜻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에게 핍박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딤후3:12) 윌리암 바클레이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핍박당함을 3단계로 나누었다. 첫째는 직장생활의 어려움을 겪게되며 둘째는 사회생활의 어려움을 겪게되고 셋째로는 가정생활의 어려움을 겪게 된다고 했다. 토마스 왓슨은 '가짜 성도들은 예수님을 따라서 감람산까지는 따라갈 수 있으나 갈보리까지는 따라갈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영어로 Commitment라고 하면 헌신 또는 책임을 뜻한다. 그런데 같은 어근에서 나온 말로 Committee 라고 하면 그 뜻은 위원회라는 말이 된다. 요즘 교회의 문제는 Committee는 있는데 commitment가 없다. 제직회와 당회와 같은 Committee는 활발하게 움직이는데 정작 중요한 헌신 즉 Commitment는 없다.
의를 위하여 핍박받는 자들이 받게 될 복은 하늘의 상급이다.(마5:10-12,롬8:17,딤후2:12, 계 21:7)그리스도인의 능력이 무엇인가? 핍박 속에서도 기쁨을 잃지 않는 것이 능력이다.(12, 행5:41, 행16;25, 벧전4:16,19) 현대 기독교가 무기력한 이유가 무엇일까? 핍박이 사라지면서부터이다. 기독교는 고난과 핍박 속에 있을 때 세상에 영향력을 주었다.(달라이 라마, 체 게바라)
Ⅱ.천국시민과 세상과의 관계 (마5:13-16)
교회는 세상에 있는 '천국의 영토'이다. 예수님께서는 교회에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셨다.
첫째는 교회는 '세상의 소금이다'(5:13)
소금이 비록 적은 양은 적고 그 역할은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맛을 내게 된다.
둘째는 교회는 '세상의 빛이다'(5:14)
등잔 위에 있는 등불 하나가 집안 전체에 있는 어둠을 몰아낸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에서 해야할 일은 중요하고(맛을 내고) 영향력(어둠을 몰아내는)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교회가(우리)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어 주기를 원하고 계신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이 교회를 통해 복 받기를 원하고 계시다. 교회는 복의 근원이 되어야 한다. '복은 이렇게 받는 거야'라고 세상 사람들에게 가르쳐주어야 한다. 세상이 교회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교회가 세상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 목적이고 우리의 존재 목적이다. 소금은 과학적으로 그 짠맛을 잃을 수 없는데 마5:13에 '소금이 맛을 잃으면…'이라고 할 때 이 말의 의미는 교회가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가 그냥 소금과 빛이 아니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신다. 세상의 소 금이란 세상을 위한 소금이 되라는 뜻이다. 세상의 빛이란 세상을 위한 빛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심은 세상에 있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심은 세상이 있지 않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이 다니고 있는 교회뿐이다. 자기들의 교회를 더 부흥시키고 튼튼하게 하기 위하여 최선을 다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관심의 대상인 세상에 대하여서는 무관심하다. 좋은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애를 쓰면서도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신자들이 세상에서의 자기 책임을 잊어버리고 교회에만 와서 열심을 내는 것을 좋아하시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교회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소금과 빛이라고 말씀하셨다. 한국 교회는 그 동안 너무 교회 중심적이었다. 교회의 힘을 너무 교회에만 쏟았다. 그래서 교회는 어느 정도 부흥하고 성장하였다.(세계적인 교회가 한국에 다 있다) 그러나 지금 와서 보면 그것이 진정한 의미의 부흥과 성장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 교회는 세상에 대하여 아주 무력한 교회가 되고 말았고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는 교회가 되고 말았다. 세상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대하여 기대하지 않는다. 교회의 지도자들을 존경하지도 않는다. 교회가 세상을 걱정해야하는데 반대로 세상이 교회 걱정을 하고 있다.
교회가 교인들을 잘못 가르쳤다. 교회에서만 큰소리치고 열심을 내는 교인들로 만들었지 세상에서 큰소리치고 열심을 내는 신자로 만들지 못했다. 왜 요즘 세상이 살 맛나지 않는가? 소금이 되어서 맛을 내야할 교회가 맛을 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맛이 있고, 멋이 있고, 힘이 있는 크리스챤이 되어야 한다.
Ⅲ.천국시민의 의(마5:17-7:12)
A.구약의 율법(마5:17-48)
1. 예수님과 율법(마5:17-20)
마태복음서의 일차적인 독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들은 모세의 율법을 배우며 자란 자들이다. 모세의 율법은 순종했을 때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축복이고 선물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유대인의 율법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는 큰 관심거리였다. 이 문제는 초대교회의 아주 중요한 이슈였다.(사도행전15, 갈라디아서)
이것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견해가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도 구약의 율법을 온전히 지켜야 한다.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안에서 자유함을 얻은 자들이기에 율법은 폐하여졌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이 두 견해를 물리치고 세 번째 해결책을 제시하신다.
율법과 선지자가 가르치는 모든 면을 그리스도의 사건으로 다시 조명하고 해석하고 삶에 적요해야한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율법에 담긴 원래 참된 의도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즉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의 율법을 보면서 '이 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가?'를 생각해야한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깊은 의도를 분별하고 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셨다. 이것을 가르치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섯 가지 실제적인 문제를 예로 들어 가르치셨다. 여섯 가지 예들은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말하노니…"라는 말로 시작된다. 그래서 이 부분을 '여섯가지 대구(對句)'라고 부른다.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이유는 "율법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 이 율법의 진정한 의도를 설명하여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주겠다"라는 말이다.
2. 분노(미5:21-26)
3. 음욕(마5:27-30)
4. 이혼(마5:31-32)
5. 서원(마5:33-37)
6. 원수갚음(마5:38-42)
7. 사랑(마5:43-48)
B.하나님 사랑(마6:1-34)
1. 구제(마6:1-4)
2. 기도와 금식(마6:5-18)
1)기도(마6:5-7)
2)주기도문(마6:8-15)
3)금식(마6:16-18)
3. 재물(마6:19-34)
C. 이웃사랑-균형과 완전(마7:1-12)
1. 비판적으로 될 때 오는 위험(마7:1-5)
2. 무비판적으로 될 때 오는 위험(마7:6)
3. 계속적인 신뢰가 상실될 때 오는 위험(마7:7-11)
4. 균형과 완전-황금률(마7:12)
Ⅳ. 천국시민을 위한 권면-세 가지 경고(마7:13-28)
A. 천국에 들어가는 길의 시작(두 가지 문) 마7:13-14
B. 천국의 진행과정(두 종류의 지도자) 마7:15-20
C. 그 길 끝에 관한 말씀(두 가지 집) 마7:24-27
Ⅴ. 결어(마7:28-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