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에 해당되는 글 192건
- 2011.09.01 요한복음-성경공부강의안-강대훈
- 2011.09.01 하이델베그크교리문답-성구포함
- 2011.09.01 김회권 교수 추천도서 |
- 2011.09.01 벤후저-Guide to Old Testament Theology and Exegesis
- 2011.09.01 [스크랩][복상]2007년6월 기고: 제 6편-혁명 vs. 부흥
- 2011.09.01 [스크랩]메가 처치 논박 3-B: 교회의 크기에 대한 불건전한 관심의 역사(1)
- 2011.09.01 [스크랩]메가처치논박(Against Mega Church)02-B:시장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당한 교회
- 2011.09.01 [스크랩]메가처치 논박(Against Mega Church)02-A: 메가처치 형성의 사회적 조건
1. 까레또, 까를로, 사막에서 온 편지
3-4세기 사막교부들의 영적인 전통을 이어받은 묵상집으로 도시 생활의 분요를 떠나 사막의 고요와 무(無)의 지점에서 하나님을 충만히 체험할 수 있음을 확신시켜 주는 글. 아침 경건의 시간 독서용으로 좋음.
참고) 이 분의 책은 가톨릭쪽(분도출판사)에서 나옵니다. 이 책은 그리 두껍지(앏은) 책으로 곰곰히 생각하면 할수록 깊이를 더해갑니다. 이외에 '도시의 광야' 분도출판사가 있습니다. 3,000원 함께 읽어보세요.
2. 까르데날, 에르네스또, 침묵 속에 떠오르는 소리
사막교부의 전통을 이어받은 현대의 대표적인 카톨릭 사제로서 침묵훈련의 영성적 신앙적인 유일을 기록.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훈련임. 자기전 혹은 아침 일찍 성경 묵상후 읽을 수 있으면 좋음.
참고) 이 책은 남미 최고의 영성시인 '에르네스또 까르데날'이 지은겁니다. 사랑의 찬가와 해방의 시편으로 분도출판사, 가격은4,500원입니다.
3. 김남준, 카롤라모 사보나롤라
14세기 이탈리아의 플로렌스의 카톨릭 종교개혁자. 16세기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영감을 고취한 사람. 루터의 동상에 새겨진 네 사람 중 한 사람. 성적으로 및 문화적으로 방종한 플로렌스에서 종교개혁을 일으키고 성(性)플로렌스를 성(聖)플로렌스로 만들기 위해 분투. 허락받지 않고 대중들에게 바로 설교했다는 죄목으로 장작더미 위에서 자신의 양떼들이 보는 앞에서 화형당함.
참고) 천상천하의 배감독님께서 제일 좋아하시는 (한국사람중) 설교자입니다. 이 분의 책은 모두 읽어봤습니다. 그 중 단 한 권을 추천하라면 이 책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두란노 이고...
요즘 학교서점에서 김남준목사님 부흥시리즈(솔로몬) 30% 세일합니다.
위의 책도 솔로몬에서 나왔고 가격은 5,000원인데 30%해서...
4. 김세윤, 구원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구원론을 복음서 및 바울서신들을 통하여 아주 쉽고 간결하게 설명해 놓은 책. 뿌리 뽑힌 나무, 잔치 등 생동적인 그림언어들이 사용되어 믿지 않는 분들도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책임. 김홍전의 <복음이란 무엇인가?>와 존 스토트의 <기독교의 기본진리>와 같이 읽으면 큰 도움. 초신자 및 리더의 필독서. 이 책은 죄인을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과 분리되어 자신의 자원에만 의존하여 사는 사람으로 규정. 곧 자기 안에 갇힌 사람으로 규정. 구원은 자기폐쇄적인 삶의 문을 열어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자기 것으로 삼는 것. 자신의 자기주장 의지(self-assertive will)로 살아가는 삶의 한계는 죄와 죽음과 온갖 유한한 조건들에 매임. 구원은 하나님의 생명의 잔치에 초청되어감.
참고) 이 책의 장점은 쉽고 간결하다는 겁니다. 두란노에서 6천원으로 새로나왔는데 학교엔 이전에 나왔던 다른출판사 것이 있습니다. 그외의 것도 제가 김세윤교수님 추천도서에서 언급했습니다.
5. 김수환 추기경 추천, 주여 왜?
등산가가 되려는 꿈을 가졌던 사람이 다리를 저는 장애인(신부)이 된 사제의 감동적인 강론집. 개인적으로 공동체적으로 당한 애매한 고난과 억울한 일들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받아들여야하는 문제에 대한 씨름임. 니콜라스 월터스터로프의 <아버지의 통곡>과 같이 읽으면 도움이 됨. 목회상담적 접근임. 김수한 추기경이 90년 중반에 자신이 읽은 한 해의 최고의 책으로 추천함.
참고)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그거라면 생활성서사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만...
6. 김정환, 김교신-그 삶과 믿음과 소망
일제 시대 양정고보의 지리선생으로서 민족주의와 신앙을 일치시킨 기독교 애국자의 삶의 기록. 우찌무라 간조의 영향아래 무교회자로서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발행한 선각자. 그는 마지막으로 흥남질소비료공장에서 노동자들과 고락을 같이하다가 하나님께 소천. 애국심과 신앙의 관계를 숙고하게 함. 그는 제도적 교회의 한계를 지적하며 무교회주의자 되었지만 그리스도가 세우신 교회를 부정한 것은 아님.
참고) 전 김교신이나 함석헌 선생님보다 그 선생님이신 우찌무라 간조를 좋아합니다. 얇은 책자인데 책 제목을 잊었네요? 하옇튼 그 분 책 한번 보세요. 좋아하시게 될 겁니다.
7. 김진홍,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 꼴찌에게.
곤경에 빠진 모든 청소년들 그리고 실패의 충격과 상처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목회자적인 위로. 자신의 인생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참담한 지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희망의 메시지. 생동감 넘치는 간증들이 읽는 이의 마음을 뜨겁게 한다.
8. 김홍전, 복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복음을 관련 성경 귀절들의 튼튼한 주석을 통해 정리한 글. 김세윤 박사의 <구원이란 무엇인가?>와 같이 읽으면 도움. 초신자 및 리더 필독.
참고) 김홍전목사님의 책은 성약출판사에서 다 나오는데 이 분거 모두 읽어보세요. 구약 공부하실분은 특히. 위의 책은 1,500원입니다. 꼭 읽어보셔야 할 책입니다. 제가 장모님께 선물한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9. 나우엔, 헨리, 제네시 일기
영성 저술가인 저자가 켄터키주의 트라피스트 수도원(토마스 머튼이 26년간 머문 곳)에 6개월 방문객으로 있으면서 겪은 내면의 사건들을 일지 형식으로 기록. 우리 인간의 내면의 영적 성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잘 지적해 주는 가볍지만 좋은 책. 인간 속에 있는 허영심 공명심 질투심 분노 그리고 공동체 구성원 즉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오래 참지 못하고 쉽게 실망하고 분노하는 경향성을 잘 분석함.
참고) 이 책은 밖에 나오지 못하는 규율의 수도원에서의 일을 쓴 겁니다. 출판사는 성바오로 출판사고 책값은 5,200원 입니다. 제가 제일 좋아하는 영성가 토마스 머튼과 관계된 책이죠! 그리고 토마스 머튼 책 모두 다 추천합니다. 영성쪽에 관심있는 분들은 보셔될 겁니다. 아, 그리고 트라피스트(염률 씨또회)수도회에 대해 '토마스 머튼'이 글을 썼죠.
제목이 '침묵속에 하느님을 찾는 사람들'입니다. 분도출판사, 3,000원
10. ------, 예수의 이름으로
25년간 하바드대학교의 실천신학교수였던 저자가 장 바니에(Jean Vanier) 신부가 이끌고 있는 토론토의 라르쉬 공동체(정신지체아 공동체: 이 공동체에 관하여 더 알기 원하면 장바니에 신부가 쓴 <공동체와 성장>을 읽으면 됨. 도서목록중에 포함)에 가서 영적 회복을 경험하면서 쓴 크리스챤의 리더쉽, 관상(觀想 혹은 명상) 기도, 고독 등에 관한 신앙 수상록. 저자는 새벽 공동체(Daybreak Community: 토론토에 있는 또 다른 정신지체아 공동체)의 사제로 섬기면서 전혀 다른 상황(정신지체아 공동체를 비롯하여 하바드대학교와 같은 아카데? 분위기와 다른 공동체에서 일하는)에 놓여 있는 사람들에게 목회와 신앙생활에 관한 자신의 묵상을 나누려고 한다. 명상기도, 고백과 용서 등에 관한 좋은 묵상임.
참고) 허허, 참. 책 제목이 잘못되었네요. "예수님의 이름으로"입니다.
두란노출판사고 2,000원 입니다. 이것 역시 나우웬 책이죠.
11. ------, 영혼의 양식
365일간 매일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신앙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매일 묵상집. 이 묵상집은 일용할 양식과 같이 힘을 북돋운다. 그가 장애인 공동체(라르쉬)에서 체득한 사랑과 용서, 우정과 공동체적인 친밀에 대한 주옥같은 깨우침은 우리에게 영적 자원이 된다.
참고) 이 책은 제가 결혼 전 저와 결혼할 사람에게 사준 책입니다.
역시 나우웬 책으로 지금은 그 책도 함께 시집와 제 책꽃이 꽂여 있습니다. 책값은 8,5000원 두란노 출판사입니다.
12. -------, 영적 발돋움
이 책은 "영적 생활의 세 가지 운동들"이라는 부제가 가리키듯이 자신의 내면을, 그리고 자신이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는 동료인간들과 하나님을 향한 교제의 욕구와 요구를 다루는 책이다. 첫째 운동은 사람들 사이에 끼이지 못해서 오는 불충분함의 상징인 고독(loneliness 외톨이 처지)에서 하나님을 넉넉히 경험하고 자신을 충분히 되찾기 위한 건강한 고독(solitude)으로 발전하는 고독의 발견이다. 둘째는 적대심/적의(hostilitity)에서 환대(hospitality)로 바뀌는 운동인데 동료인간들을 향한 적대적 태도에서 환대적인 관계로 이동한는 움직임이다. 셋째 운동은 하나님에 대한 자기 나름의 헛된 환상에서 마음 중심으로 드리는 기도생활로의 이동이다. 여기서 기도 생활은 하나님을 향해 가까이 가고자 내뻗는 영적인 발돋움의 핵심이다(reaching out). 기도생활은 하나님이 지으신 우리의 원래 모습을, 망가지기 이전의 모습을 되찾아 가는 발돋움이다.
참고) 제 아내가 요즘 나우웬 책에 푹 빠져 있는데 이 교수님도 그런가 봅니다. 제가 이 책을 살땐 두란노출판사 5,000원 이었는데.
13. 닉, ?터, 회심자들
8명의 대표적인 회심자들의 간략한 전기적 연구서. 과거는 청산되고 새사람으로 거듭날 수 있는가 의심하는 분들에게 필요한 책. 사보나롤라 또스또예프스키 시몬느 베이유 등의 회심에 관한 이야기가 특히 흥미롭고 감동적임. 카톨릭적 관점에서 저작된 책이나 보편적인 진실이 들어있는 글.
참고) 책 제목과 지은이가 이상하게 적혔네요. 지은이는 '왈터 닉' 이고 제목은 '회심자들'입니다. 분도출판사구요. 가격은 3,000원입니다.
이외에 왈터 닉이 지은 '위대한 성인들'도 있습니다. 분도, 2,500원
14. 로제, 님의 사랑은 불이어라
프랑스의 떼제 공동체 회원인 로제 형제의 일기와 묵상집이다. 수도공동체에서 느끼는 인간 관계의 회복을 향한 열망과 하나님의 사랑의 구현체로서 수도적인 공동체적인 삶의 향기가 느껴지는 책이다. 하나님, 이웃, 공동체적인 인간의 운명 등에 대한 신앙 수상집. 남자가 쓴 매우 여성적인-아니 전인적인 감수성이 넘침.
참고)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전 이미 결혼했기에(?) 책 제목에 관심이 없었나봅니다.
15. 로핑크, 게하르트, 예수는 어떤 공동체를 원했나?
복음서들 특히 산상수훈을 중심으로 예수님이 형성하려고 했던 공동체의 사랑과 윤리의 급진성을 논의. 기독교 신앙이 본질적으로 표출하는 공동체적인 지향성과 공동체적인 차원을 효과적으로 논증. 기독교 공동체는 세상을 섬기고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공동체이다. 파편적인 개인들이 자신들의 다양한 욕구를 자기 나름대로 충족시키고 돌아가는 공동체가 아니고 교회를 세우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공동체이다. 이 책은 <산상 설교는 누구에게>와 같이 읽을 수 있으면 더 유익.
참고) 제가 이책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잘 모르겠네요! 내용은 하도 오래되어서 잃어버렸습니다. 좋은 책이란 기억뿐. 그리고 모든 목회자의 필독서란 것뿐. 아, 분도에서 나왔나봅니다. 주홍색 표지에.
16. 루이스(Lewis) C. S., 내가 믿는 기독교
40세 이후에 예수를 영접한 옥스포드의 영문학 교수의 기독교 신앙 입문서. 불신자들로 그의 명료하고 정직한 글에 매료될 정도로 투명한 기독교 소개의 글이다. 서구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더욱 도움이 될 만한 책. 대학생 정도의 자녀들에게 권할 만한 책. 특히 그는 우주와 자연의 배후에 비인격적인 법칙이 아니라 한 인격적인 하나님이, 창조주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논증하는데 탁월함. 그의 사상의 핵심은 인격적인 지식(Personal knowledge)의 우선성을 강조함. 하나님과 사람과 같은 인격자를 알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지식이 긴요함을 역설. 우주와 삼라만상의 배후에 비인격적인 법칙이 아닌 지성과 감정을 가진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심을 효과적으로 논의함.
참고) 이 책이 홍성사에서 나왔던가요? 전 이책을 작은 소책자로 대한기독교서회 현대신서로 가지고 있습니다. 가격이 2,000원이라 저렴해서.
12. 리빙스턴, 제임스, 현대기독교 사상사 상권, 하권,
버지니아의 윌리암 &메어리 대학의 교수였던 저자의 현대기독교 사상사의 형성과 영향에 관한 교과서적 저작. 각각의 기독교 사상의 형성의 역사적 배경이 먼저 개괄되고, 그것의 대표적인 사상가들의 저작 속에 표현되어 있는 핵심 사상의 다소 긴 해석이 뒤따른다. 이 과정에서 원전으로부터의 직접 인용이 매우 많아진다. 이 책은 기독교 사상과 현대 철학, 역사학, 그리고 자연과학과의 각각의 만남을 분석한 글임. 매우 많은 사상가들이 인용되고 해석되고 있어서 기독교인의 교양도서로 도움이 됨. 대학생이 된 자녀들에게 권유할 만한 책임. 존 로크로 대표되는 영국의 이신론(理神論: 하나님의 인격성을 부정하고 한 우주적인 이성 혹은 법칙으로서 신만을 인정-자연과학의 기본 전제와 합치됨)으로부터 시작하여-볼테르-레싱-루소-흄-칸트-코울리지-슬라이에르마허-헤겔-스트라우스-포이에르바하-칼막스-니체-다윈-리츨-하르낙-슈바이쳐-키에르케고르-칼바르트-마틴 부버-폴틸리히-불트만-짜크 마리탱-니챠드 니버-라인홀드니버 등 약 250년간의 기독교 사상사 역사를 인물별로 망라한 대작. 저자는 기독교 사상이 인류에게 기여할 여지가 아주 많으며 장래가 매우 밝다고 주장한다. 저자의 낙관주의는 매우 조심스럽게 내려진 결론.
참고) 이렇게 골치 아픈 책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좋은 책이라 들은것 같기도 하고...
13. 리즈, 보언, 중국의 예수 가정
이 책은 기독교 토착화와 공동체에 대한 한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외래적 색채를 일체 지양하고 중국의 기독교 토착화를 위해 투신한 운동들 중 하나가 바로 "예수 가정"운동이다. 이 "예수 가정 운동"(대천덕 신부에 의하면)은 가장 성공한 기독교 공동체 일뿐만 아니라 "세계기독교 토착화운동의 가장 훌륭한 모델"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다. 초대교회의 이상을 구현하려고 하는 모든 공동체적인 교회들은 이 운동에서 얻을 통찰들로 인해 기뻐할 것이다.
참고) 이 책은 도서출판 '무실'에서 나온걸로 알고 있는데. 하도 오래되서... 근데 정확할 겁니다. 제 기억으론 가격이 4,500원이었던 걸로...
중국삼자교회에 대해 쓴 걸로 기억합니다만. 중국공산당 치하의...
14. 리챠드슨, 돈, 화해의 아이
인도네시아 오지 선교연합회 회원인 리챠드슨 부부가 인도네시아의 원주민 사위 부족에게 전한 화해의 메시지. 몹시 감동적인 책. 세계 선교학의 필수적인 교과서. 선교부원 추천도서. 사위족과 그 문화에 대한 선교사의 따뜻한 시선은 모든 선교사들의 귀감.
참고)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15. 맥그래스, 알리스터, 위대한 기독교 사상가 10인
옥스포드의 조직신학교수인 저자는 현대 활동 중인 대표적인 복음주의 신학자로서 현대의 기독교인들에게 많이 끼친 기독교 사상가들의 발자취를 추적. 아타나시우스- 어거스틴-안셀름-아퀴나스-루터-쯔빙글리-캘빈-조나단 에드워즈-칼바르트-시에스 루이스가 분석된다. 매우 유익한 간결한 책임.
참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선가 은성출판사에서 나온걸로 아는데...
16. 맥도날드, 고든, 마음과 마음이 이어질 때
저자의 건강한 영적 관계에 대한 이해는 우리들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과의 관계형성과 지속에 실제적인 도움이 된다. 내면지향적인 인관 관계의 가능성이 탐구된다.
참고) IVP 던가?
17. 메이, 롤로, 카운슬링의 기술
개인 심리학의 창시자인 알프레드 아들러 밑에서 공부한 카톨릭 사제의 목회상담에 관한 저작. 전문적인 심리치료사들이나 정신과 의사들이 아닌 독자들이 인간의 내적인 품성(personality)이 어떻게 기능하고 작용하는지에 관심을 가질 때 필요한 기초적인 상담 기술론. 인격형성은 자유의지에 의하여 지배되는가 아니면 환경과 상황의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는가하는 문제부터 시작하여 상담에 필요한 지식을 쉽게 설명. 몇 가지 임상 사례도 제시되어 도움. 상담자의 필수적인 자질로 공감적인 이해(empathy)를 들고 있다.. 2부의 실제적인 지침들 및 3부의 상담시 반드시 고려되어야 요소들에 대한 강의는 매우 유익.
참고) 전 분도출판사 걸로 갖고 있습니다.
18. 모트, 스티븐, 복음과 새로운 사회
이 책도 기독교회가 일반 세속문화의 소비자로 머물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본받을 수 있는 좋은 문화의 창조자 보급자가 될 수 있음을 강조한 책. 교회와 복음은 누룩과 같이 세상변혁적인 에너지원임을 강조.
참고) IVP 에서 나온 걸로 아는데...
19. 몰트만, 오늘 우리에게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그리스도가 어떤 의미에서 혼돈과 공허로 치닫는 인간 역사에 혹은 나의 삶에 희망의 근원이 되시는가? 미래는 이름을 가지고 있다. 그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희망의 신학의 교과서이다. 예수님안에서 하나님안에서 희망을 찾고자 하는 사람에게 필독.
참고) 대한 기독교출판사입니다. 제가 몰트만 추천도서에 언급했습니다.
20. 미우라 아야꼬(삼포능자), 하늘의 사닥다리
척추카리에스라는 병과 결핵으로 11년간 병상 신세를 진 저자가 고독과 고통 중에서 하나님의 은총과 복을 낱낱이 세워 보는 매우 격조높은 신앙에세이. 한국의 임옥인 여사의 글을 생각나게 하는 글로서 모성적인 감수성이 돋보임.
참고) 이 책은 못 읽어봤네요. 위와 비슷한 내용으로 범우사 '이 질그릇에도' 라는 것을 읽어봤는데... 미우라 아야꼬의... 혹시 같은 건 아닐런지...
21. 바니에, 장, 공동체와 성장
카나다의 라르쉬 공동체(정신장애자 공동체)의 사목 신부의 공동체 인간론. 공동체생활의 빛과 어둠을 잘 조명. 공동체 생활은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에게 더욱 위험한 장소임을 경고하며 공동체 안에서 부대끼는 모든 부정적인 경험도 하나님 안에서 우리 신앙인격의 성장과 성숙의 자양분이 될 수 있음을 가르쳐 준다.
참고) 이 책은 분도에서 나왔던가 그럴껍니다.
22. 바르트, 칼,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짜르트
모짜르트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여 스위스의 신학자요 목사가 쓴 모짜르트 음학의 신학적 해석서. 바르트의 <1917년판 로마서 강해서>는 1차 세계대전으로 폐허가 되어버린 유럽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하나님의 초청장. 이 도서 목록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지만-왜냐하면 다소 어렵기 때문에-그의 <로마서 강해>는 꼭 일어 볼 만한 책임. 20세기 최고의 신학자(1886-1968)로 불리는(그가 기독교 역사이래 가장 많은 양의 글을 남긴 사람. 스위스 자펜빌에서 14년간의 목회를 하면서 기독교회의 영적 무능력을 절감하고 캘빈의 정통 개혁주의 신앙을 20세기의 언어로 재해석한 학자) 바르트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 문명의 진보와 미래에 대한 낙관주의를 강조하였던 19세기 유럽의 자유주의 신학의 철저한 비판자로서 정통주의 신앙을 다시 재생시킴. 바르트는 모짜르트 음악의 신학적 의미를 분석한 대표적인 사람. 이와 관련하여 음학과 신학에 정통한 도미니크 수도회원인 레기날드 링엔바하(Reginald Ringenbach)가 쓴 모짜르트 해석서인 <하나님은 음악이시다>(분도출판사)도 읽어 볼 만한 책임. 요약하면 바르트가 모짜르트를 열정적으로 연구한 이유는 신앙적 신학적 근거가 있다. 모짜르트의 음악은 자신의 기분을 표현하는데 동원된 도구가 아니다. 바하의 음악처럼 메시지적 성격이 강한 것도 아니고(17세기 독일 루터교 신학의 자양분 위에 창작된 음악) 베토벤의 음악처럼 자신의 삶을 고백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즉 청중에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으며 어떤 결정이나 입장을 천명할 것을 강요하지 않는 그 곳에서 바르트는 "자유"를 느끼며 그 자유 때문에 바르트는 모짜르트를 좋아한다고 고백한다(일부는 신혜은의 글 인용, 1999년 5월 <복음과 상황>).
참고) 전 신학자가 음악가에 대해 쓰는 걸 화가 나게 생각합니다. 쉬바이쩌가 오르겐 연주를 한다길래 들었더니 완전 초보 수준 삐익 삐익 끽.
제 생각이 편견이길...
23. 바르트, 하웃즈, 현대 우상, 이데올로기
현대의 우상은 이방신상들이 아니라 인간의 탐욕을 자극하는 모든 권력체제 기관들, 즉 이데올로기임을 강조. 특히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할 개인의 충성심을 앗아가는 우상들임을 강조.
참고) 못 읽어봤습니다.
24. 바운즈, 이엠, 기도의 위인들
참고) 생명의 말씀사 소책자가 아닌가요?
25. 바클리, 윌리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세상으로부터"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안에 여전히 살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책.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속하지 않으나(not of the world) 이 세상 안에 있는 이유는 (still in the world)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사랑의 표지. 그리스도인들은 빛과 소금의 관계로 세상과 관계를 맺어야 함을 주장. 왜냐하면 세상도 하나님의 사랑과 관심의 영역이며 주권이 미치는 영역이므로.
참고) 못 읽어 봤습니다. 바클레이 책은 하도 많아서...
26. 박동현, 예언과 목회 1
장신대 구약교수인 저자의 예언자적인 목회 및 신앙 에세이. 그의 에스겔 및 예레미야서의 목회적 주석은 탁월함. 예언자는 탄핵하고 비판하지만 또한 감싸고 쓰다듬는 목회자였다는 깨달음은 신선함. 예언자는 대중들이 절망에 빠질 때 희망의 표지들을 읽고 말하며 그들이 잘못된 희망의 기초 위에 집을 지을 때 그 거짓된 희망의 기초를 무너뜨리고 미래를 향하여 달려나가도록 촉구/격려/도전한다. 리더 일독요.
27. 방선기, 직장 설교
한국의 기독교적 사업체인 E-Land의 사목 출신. "세속적"인 영역으로 말해지는 직업의 신앙적 신학적인 의미 추구. 세상은 속되고 교회는 거룩한 곳이며, 세상 일은 교회일 보다 덜 온전한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성속(聖俗) 이원론을 극복하도록 도와줌. 올리버 바클리의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과 같이 읽을 수 있음.
28. 벡스터, 리챠드, 참된 목자
17세기 영국 청교도들의 신앙을 대표하는 최고의 영적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의 신앙묵상집. 청교도 신앙의 핵심은 십자가 신앙인데 삶의 모든 부정적인 경험들을 십자가의 빛 하에서 밝고 긍정적으로 재해석하는 영혼의 위안이 되는 책.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 살면서 겪는 온갖 종류의 부정적인 삶의 기억들은 가치있고 중요한 일임을 역설.
참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와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왔죠. 학교에서 30%
29. 본회퍼, 신도의 공동생활
핀켄발데의 지하 신학교에서 학생들과의 공동생활을 바탕으로 쓰여진 신앙 에세이. 고독과 공동체 생활의 균형을 강조하고 하나님과 홀로 있는 시간을 잘 보내어야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 생활에서 영적인 풍요를 누릴 수 있다.
참고) 현대신서죠. 대한기독교서회
30. ------, 옥중서신
히틀러치하의 폭정에 저항하는 설교 및 가르침으로 독일 나찌의 만행에 저항. 그의 제자들 일부가 히틀러 암살 모의에 가담했기 때문에 배후조종자로 지목되어 1944. 4월 9일 사형당함. 그가 감옥에서 쓴 편지인데 기독교 신앙이 갖는 급진성과 실천력을 옹호하는 글.
31. 브루스, A. B., 초대 교회 역사
사도행전부터 시작하여 초대교회의 복음의 역동적 사역을 추적한 책. 필독서.
32. 블뢰쉬, 도날드, 세계의 예수 공동체
본서는 기독교 공동체적인 삶의 정당성, 역사성 그리고 그 필요성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이다. 특히 시대적으로 초대교회에서 현대에 이르기까지 나타났던 공동체들을 언급함으로써 공동체의 발자취를 역사적으로 전망해 볼 수 있도록 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본질을 공동체의 성격에서 조명해 냄으로써 공동체성의 회복이 바로 기도교 본질주의 하나의 회복임을 역설한다.
참고) 도서출판 무실에서 나온 책입니다. 세계에 있는 공동체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33. 사이더, 로날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기독교 신앙에서는 가난한 자를 단순한 구제의 대상으로 보지 않고 부자들을 구원하는 도구로까지 본다. 부유한 그리스도인들이 나눔과 하나님을 위한 급진적인 버림의 제자도까지 나아갈 수 있는 가능성 탐구. 구제부원 필독도서.
34. 사이어, 제임스, 기독교 세계관과 현대사상
기독교 신앙과 경합하는 현대의 종교 및 이데올로기 등을 비교 분석한 글. 막시즘이 기승을 부릴 때 나온 책으로 다소 시대에 뒤진 감은 있으나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이미 고착되어 있는 세계관에 의존하여 산다는 사실을 강조함.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아무 것도 안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대신하는 그 무엇을 믿는다는 사실을 설득력 있게 논증함. 영어판을 구해서 자녀들과 같이 공부할 수 있음.
참고) 이 책도 본 건데 하도 오래되어 기억이 안나네요! 표지는 파란색인데... IVP 던가?
35. 선한용, 성 어거스틴
모든 기독교 개종자 혹은 회심자들의 고전적인 참회록. 마니교에 빠져 방탕한 삶을 즐기던 저자가 어머니(모니카), 신앙위인(성 안토니-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처음으로 사막에 들어가 일생동안 영적 지도자로 살아간 사막 교부), 스승(암브로시우스), 그리고 친구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기독교 신앙으로 귀의하는 과정이 일인칭 고백문의 형식으로 기록되었음. 이 책의 9-13장은 시간의 실존적 이해에 관한 고전적인 철학적인 명상을 제공. 오거스틴은 성(性) 오거스틴에서 聖오거스틴으로 변화. 4세기 최고의 기독교신학자가 되어(아프리카의 힙포의 감독역임) 바울-오거스틴-안셀름-루터/캘빈-칼바르트로 이어지는 기독교 신앙의 원죄론의 중시조인 셈. 인간의 전적 생래적(生來的) 타락(depravity)을 강조하고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을 받을 수 있음을 강조. 그의 생애 전체가 이 교리를 예해(例解, illustration)하는 부교재임.
참고) 어거스틴 수업 교재입니다. 대한기독교서회
36. 손봉호, 나는 누구인가?
현대사회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무엇인가를 물은 책. 곧 기독교 신앙은 진정한 나를 찾는 진정한 자아실현임을 가르쳐 줌. 신앙 권유 입문서. 초신자 필독.
참고) 샘터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습니다.
37. 송인규, 복음과 지성
대학시절에 기독교신앙을 어떻게 지키며 발전시킬 수 있을까? 대학시절에 겪는 온갖 종류의 지적인 문화적인 도전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에 대한 답이 됨. 대학생을 둔 부모들에게 도움. 대학인들이 지성의 상아탑에서도 신앙을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 모색. 저자는 뉴욕주 시라큐스대학교의 철학박사 학위 받음.
참고) IVP 출판사죠.
38. 쉘던, 찰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
19세기말 20세기초 미국을 휩쓴 베스트 셀러 종교 교양소설. 고난이 없는 시대에 의를 인하여 고난을 자취하는 믿음의 사람들의 이야기. 감동적인 소설. 소설 중에는 음란기사가 실린 광고를 거부한 신문기자가 해고당하는 이야기도 나온다.
참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예찬사에서 나왔죠. 전 예찬사 것을 읽었습니다.
39. 스토트, 존, 그리스도의 십자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예수의 십자가의 중요성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서. 다소 어렵고 딱딱하지만 참으로 수준 높은 책. 기독교회사에서 십자가에 대한 소홀한 이해 혹은 무지가 일어날 때 어떤 온갖 종류의 파행적인 기독교 신앙이 나타나는지 점검해 주는 책. 저자의 결론은 십자가는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자 지혜의 절정이라는 것. 바울-오거스틴-안셀무스-종교개혁자(루터와 캘빈)로 이어지는 십자가 중심의 신학이 가진 위력을 마음껏 소개한다.
참고) IVP 에서 출판되었습니다.
40. -------, 신앙생활 가이드
그리스도인은 도대체 무엇을 왜 믿어야 하는가? 이 책은 기독교 신앙 입문서로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견고한 기초를 세워 주고 행동지침을 제시하는 책이다. 특히 구원과 성숙을 다루는 기초편과 삼위 일체 신앙을 다루는 핵심편으로 나눠진다. 초신자는 물론 새롭게 신앙생활을 점검하려는 이들을 염두에 두고 저술된 책으로 각 장에는 토론문제와 참고도서 목록이 실려있어 유용하다.
참고) 이건 뭐죠? 장로회출판사에서 나온 건가요? 얇은 소책자?
아니면 대한문서선교회?
41. -------, 기독교의 기본 진리
이 책은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로서 아무리 시대가 바뀌고 상황이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기독교의 기본진리-하나님의 창조,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 성령의 내주와 충만, 그리고 최후 심판과 예수님의 재림-를 아주 간결하게 요약한 책임. 특히 부활의 역사적 사실성(事實性)과 확실성을 매우 설득력 있게 논증함. 영어판 <Basic Christianity>는 대학생 이상의 자녀들과 같이 공부하고 토론하기 좋은 책.
참고) 존 스톳트 목사님의 책은 초신자에게 권하면 좋죠. 생명의 말씀사
42. 스티븐스 폴,, 현대인을 위한 생활 영성
저자는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의 일상적인 삶과 영성"이라는 주제를 적절하게 결합시켜 가장 평범한 삶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영적으로 성장하게 되는 길을 제시한다. 일, 이성관계, 이웃, 자아성찰, 여가생활, 그리고 안식일 등 적절한 주제에 적절한 지혜를 담은 논의는 통찰력이 넘친다.
참고) IVP 출판사
43. 스티어, 로저, 허드슨 테일러 상권, 하권
19세기 중순에 맺어진 난징조악으로 중국과 영국은 몇 개의 항구들을 조차하는 계약을 맺었다. 중국 정부는 이 때 항구주변에서만 선교사들의 선교활동을 보장하였는데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 내지선교(China InLand Mission)회의 일원이 되어 중국 깊숙한 곳에 들어가 자신 스스로 만주족처럼 체두변발하고 전도사역에 참여하여 많은 결실을 맺었다. 현재 중국교회의 부흥은 그의 선교에 적지 않게 빚진 셈이다. 이 책은 그가 중국내지선교에 참여하기까지 치룬 댓가들을 주목하고 그가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의 신실한 공급하심을 세밀하게 경험하였는가를 보여줌. 마태복음 6:25-34을 친히 경험한 예수님의 제자.
참고) 전 두란노출판사에서 나온걸 읽었는데...
44. 씨맨즈, 데이빗, 상한 감정의 치유
고든 맥도날드의 <내면의 질서와 영적 성장>과 비슷한 노선의 책인데 특히 상한 혹은 상처받은 감정은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복원력을 가지고 언젠가 어떤 형식으로 표출된다. 일주일 전에 상처받은 감정(혹은 자존심)이 일주일 후에 어떤 전혀 언뜻 보기에는 관계가 없어 보이는 부정적인 행동/반응으로 표현된다. 상한 감정은 하나님과 관련 당사자들의 도움으로 치유되어야 한다. 상처입은 감정은 흉터를 남기고 긴 후유증을 남기기 쉽다.
참고) 이것도 두란노출판사고요...
45. 아켐피스, 토마스, 그리스도를 본받아
중세 영성의 최고봉이라고 일컬어 지는 책.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믿는 것은 그의 인격과 덕을 본받기 위하여 애쓰는 것임을 강조. 완덕(完德)에의 정진을 격려하는 글로서 성경과 존 번연의 <천로역정> 다음으로 많이 읽힌 책. 중세 영성은 그리스도의 가난을 이상으로 삼고 낮아지고 겸손한 삶아 가는 것이었다. 이 책 중에 겸손에 관한 가르침은 언제 읽어도 우리를 겸비케 하는 글이다.
참고) 예찬사와 크리스챤 다이제스트가 있는데 전 예찬사걸 봤습니다.
이 책으로 기독교번역상인지 편집상인지를 받은 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46. 안이숙 죽으면 죽으리라 상권, 하권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반대하고 유명한 박관덕 장로와 더불어 일제의 국회에 들어가 일제의 멸망을 경고했다고 전해지는 기독교 여성지도자의 자전적 소설
참고) 두꺼운 책인데 이 책이 어디서 나왔죠? 하도 오래되서 아마 중학교때 읽은 걸로 기억합니다. 신사참배 반대로 감옥에 들어가 겪은 일을 썼습니다. 후편으로 죽으면 살리라 등 몇권이 계속 나왔죠.
이 책은 당시 저희 교회 전도사님께서 권하셔서 읽었습니다.
47. 얀시, 필립, 고통의 하나님
알지 못할 이유로 고통받는 신자들을 위로하는 수상록 (임상적인 사례들로써). 저자는 Christianity Today 잡지의 칼럼니스트임.
참고) 홍성사
48. 엄두섭, 영성의 새벽
수도원적인 운동의 관점에서 여러 교회사의 인물들 일별. 수도생활의 중요성 강조. 절제, 근면, 소비 억제, 이웃사랑의 수도사적 경건만이 자본주의 물신주의 이데올로기를 이길 수 있음을 강조하는 노수도목사의 신앙수상집. 프란체스코 및 한국의 이세종 등 수도사적인 전통에 서 있는 사람들에 대한 간결한 해설들이 도움이 됨.
참고) 은성출판사로 엄두섭목사님 책은 왠만한 건 다 본 것 같은데...
'영맥', '영풍' 등도 함께 보세요! 아, 엄목사님께서 채플시간에 말씀하신 이현필이란 분에대한 내용은 '맨발의 성자'란 제목으로 은성에서...
49. 에드워드, 조나단, 데이비드 브레이너드의 일기
18세기 미국의 인디언들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한 인디언 선교사의 일기를 미국의 제 1차 영적 각성운동의 중심인물인 조나단 에드워드가 편집한 책(데이빗 브레이너드는 뉴져지주 크랜베리 근처에서도 활동한 적이 있음). 이 책은 기도와 하나님과 영혼을 사랑하는 열정이 감동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특히 그의 글은 기도하고 싶은 마음을 불일듯하게 하는 눙력이 있다. 리더 일독요.
참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고전 시리이즈 중 제일 첫번째로 나온 책이죠.
50. 에블리, 루이, 사랑의 회복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분을 위한 카톨릭적인 신앙입문서. 현대인의 의식속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들이 하나씩 벗겨짐을 경험할 수 있다.
참고) 못 봤습니다.
51. 엔도 슈사꾸, 침묵
스페인의 예수회 신부들이(교황청 파견) 일본의 불교정신과 만나서 겪는 정신적인 방황과 좌절을 그림. 카톨릭으로 개종한 일본인들이 박해자들의 취조에 못이겨 예수님의 성상(초상화)를 밟으라는 요구에 굴복하는 장면과 요구에 불복하여 순교를 맞이하는 장면은 압권. 순교의 의미와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과 예수님의 고난의 동심원적인 관계가 잘 묘사됨. 교양도서.
참고) 제가 제일 좋아하는 일본 작가입니다. 홍성사에서 나왔죠.
'여자의 일생'을 읽고 얼마나 감동되었던지. '예수의 생애', '그리스도의 탄생', '사해의 호반'도 있고.
52.--------, 위대한 몰락
일본의 기독교 작가가 덕천 막부시대에 스페인의 한 카톨릭 신부가 일본의 봉건질서(특히 사무라이 계급사회)에 직면하여 선교하면서 참 믿음에 이르는 여정의 역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이야기. 주인공은 위대한 몰락을 맛보면서 참 하나님의 모습을 발견. 교양도서.
참고) 위와 같은 출판사와 작가.
53. 엘룰, 자끄, 뒤틀려진 기독교
저자는 프랑스의 법학자 사회학자, 그리고 신학자. 기독교 신앙은 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편승하는 종교가 아니라 지배적인 영향을 미치는 이데올로기를 비판하고 전복하는 부활의 능력을 가짐을 강조. 체제전복적인 기독교의 위력을 강조. "뒤틀려진"이라고 번역된 영어는 subversive 로서 "체제 혹은 기존체제(이데올로기)변혁적인" 이라는 뜻을 내포. 미국이 주도하는 자본주의적-자유주의적 대중문화(전 세계가 추종하는 문화가 됨: 1998. 7월 타임지 기사-극도의 개인주의-쾌락주의-소비주의-물질만능주의)를 비판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길러 줌.
참고) 20대 땐 대장간책도 많이 읽었는데. 사회정의에 관심이 많은 때이니까.
54. 엘리엇, 땅콩 박사-죠지 워싱톤 카버의 전기
흑인 최초의 농학박사인 죠지 와싱톤 카버의 전기. 어린 시절 부모와 가족을 백인 갱단에 의해 잃은 저자가 불우한 시절을 딛고 창 1:29을 요절(푸른 식물을 식물로 주노라)로 삼아 남부 알라배마주의 쇠락해 가는 땅콩농업을 되살려 낸 위대하고 아름다운 삶의 기록. 면화농장으로 막 넘어가려는 알라배마주의 땅콩농장의 농업을 살려 내었기 때문에 "땅콩박사"라는 별명 얻음. 그의 미국 상하양원에서의 강연은 유명. 카아버의 삶에서 얻을 수 있는 최고의 교훈은 그의 한없는 낙관주의, 어떤 곤경과 불우한 처지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음을 믿는 믿음의 자세임. 자녀들에게 영어판을 읽혀 볼 만한 책.
참고) 생명의 말씀사 등 여러 군데에서 나왔죠. 이 책이 한때 미국 국회에서 필독서로 읽혔대나 뭐래나.
55.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구안록(求安錄)
일본의 유명한 성경교사의 신앙 에세이. 한국 유학생 함석헌, 김교신, 유영모 선생등에게 깊은 영향을 끼친 기독교 사상가. 전후의 많은 일본의 정계 관계의 지도자들이 직간접으로 우찌무라 간조의 기독교적인 가르침에 영향을 받음. 이 수필집은 병들고 외로워 질 때 읽을면 큰 도움이 됨.
참조) 앗, 우찌무라 간조의 책이 여기에 있다니. 위에서 제가 말한 책이 바로 이 책인데...
56. 월터스토프, 니콜라스, 아버지의 통곡
예일대 종교학부 교수의 아들 잃은 슬픔의 기록. 참척(懺慽)의 고통을 신학적인 용어로 정리하고 해석한 책. 인생을 살다가 만나는 억장무너지는 슬픔이 하나님안에서 어떻게 풀리는가?
참조) 아주 얇은 책입니다. 전 이 책을 그리 감동적으로 읽지 못했습니다. 서약 사고방식과 동양사고가 틀려서 그런지...
57. 이기반, 히말라야의 눈꽃
39세에 산화한 인도의 성자요 선교사인 썬다싱의 생애와 열정에 대한 연구서. 인도의 최고 계급인 브라만계급 출신이 그가 처음에는 성경을 불태우면서 선교사의 복음전도(미션 스쿨다님)에 저항하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위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고 이 사랑을 실천하기 위하여 전도자의 삶을 살았다. 티벳의 원주민들에게 (고산지대의 마을) 복음을 전하다가 눈에 막혀 죽은 위대한 사랑의 실천가. 우리들의 안일하고 자기중심적인 삶에 큰 경종을 울리는 영원한 감동의 타종. 필독서.
참고) 홍성사에서 나온 책인데 썬다싱의 생애는 정말 읽어보셔야 합니다. 그의 영성과 신비주의는 그 누가 따르랴. 그 누구도 그의 죽음을 모르닙다. 한때 저희 교회 청년부에서 썬다 싱의 생애에 대한 글을 번역했었습니다.
58. 이동원, 비유로 말씀하시다
미국에서 오랫 동안 목회했던 저자의 설교집. 여러가지 도시생활에서 뽑아낸 일화들과 예화들이 인상적이다.
참조) 못 읽어봤습니다.
59. 이만열, 한국기독교사 특강
한국기독교회사를 아주 간결하게 정돈한 책. 이 책의 특징은 한국교회는 서양 선교사들이 들어오기 전에 이미 자체에서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스스로 교회 개척을 준비했음을 강조.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찬양.
참조) 숙대 교수로 저자의 '한국기독교 문화운동사' 등 한국기독교사에 관한 책 시리이즈가 대한기독교출판사에서 나왔는데. 한국기독교백년사대계로. 한국교회사 공부의 필독서입니다. 근데 위의 책은 잘 모르겠습니다.
60. 장경철, 기독교 신앙이란 무엇인가?
기독교 신앙의 입문서로 아주 평이하고 간결하게 기독교 신앙을 소개하고 옹호한다. 저자는 기독교 대학의 종교교양 과목 강좌라는 맥락을 전제하고 아주 논리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확실성을 논증. 특히 하나님의 존재 문제를 존재와 <현존>을 설득력있게 구분함. C. S. Lewis와 비슷한 접근이지만 보다 더 일상생활에 밀착된 문체로 전개. 초신자 필독요.
참조) 대한 장로교 출판사에서 양장 커버로 나온 책인가요?
서울여대 교수(조직신학)로 10월 한달 동안 주님의교회에서 설교합니다.
61. 장경철, 사랑은 훈련입니다.
사랑에 대한 천박하고 감각적인 이해를 깨고 사랑이 얼마나 숙달이 필요한 것인가를 상기케 하는 책. 기독교적인 인격의 성숙이라는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사람들에게 좋은 도움이 됨. 앞의 책과 마찬가지로 일상생활의 문체로 전개된 글이라서 쉽다. 어려운 개념도 쉽게 풀고 새롭게 정의하는 저자의 은사가 돋보임.
참조) 못 읽어봤습니다.
62. 죤스, 마틴 로이드, 부흥
영국 왕실 채플인 웨스트민스트 채플린으로 30년 이상 봉직한 저자의 부흥론. 탁월하고 감동적일 글. 리더 필독요. <부흥의 긴박성> <영적 무력증> 등은 위대한 강의다. 그리스도인의 가슴속에 들어있는 개인적인 부흥에 대한 갈증을 이처럼 잘 해석한 글이 별로 많지 않다. 하나님의 성령을 물붓듯이 경험하는 교회의 부흥 없이는 세상은 희망이 없다.
참조) 부흥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다. 기독교문서선교횐가 IVP 인가 확실치 않네요. 요즘 학교에서 세일하는게 로마서와 에베소서 강해인데... 요건 기독교문서선교회인데...
63. 최일도, 밥퍼 1, 2
청량리 588 윤락가를 중심으로 노숙자와 부랑아들을 섬기는 사회구제 선교지도자. 이 책은 수녀였던 그의 아내와 만나 구애하고 결혼에 이르기 까지가 더 주목받은 책. 기독교복음의 바깥 사회 및 더 넓은 세상을 향하여 품는 왕같은 제사장의 책임감잘 정리된 책. social outreach에 관심이 있는 분, 교회의 구제 활동(diakonia)에 관심이 있는 분은 필독서.
참조) 동아일보사던가 하옇튼 신문사에서 나왔습니다. 전 별로...
64. 토레이, 알 에이, 기도와 영력
기도생활은 영적인 힘의 가장 중요한 공급원임을 설득. 기도생활을 하도록 유인하는 힘이 있는 겸손한 책이다. 기도는 영적인 능력의 송유관과 같은 것. 실제 기도하는 것은 이 책을 읽는 것 보다 더 중요.
참고) 토레이 책은 많이 봤지만 이 책은 못봤네요. 산골짜기에서 온 편지나 성령론이 대표작으로 알고 있는데...
65. 투르니에, 폴, 모험으로 사는 인생
삶은 모험인데 시도해 볼만한 모험임을 역설. 스위스 내과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저자의 삶에 대한 따뜻하고 예지에 찬 통찰들의 묶음. 인간의 특성과 고유성에 대한 깊은 이해, 노동과 직업에 대한 성찰, 하나님을 믿는 모험이 인생에게 끼치는 유익들이 설득력있게 제시됨. 2부에서는 실패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을 쓰다듬은 좋은 글이 있음. 기독교 신앙을 수채화처럼 그림언어로 소개한다. 딱딱한 교리적인 어투나 설교조의 주장이 아니라 고백적이고 서술적인 문체로 되어 신앙의 모험을 아직 해 보지 않은 분들도 읽기 편하다. 신앙입문자 독서요.
참조) IVP 에서 나온 걸로 알고 있는데... 아니 분도던가?
66. --------, 여성 그대의 사명
스위스의 내과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의 글. 흔한 페미니즘과는 다른 여성에 대한 신앙적 신학적 사명에 대한 묵상집- 그는 일반 페미니스트들과 마찬가지로 지배적인 사회가 가부장적 남성주의적인 모순에 빠졌음을 지적하고 여성에 대한 기능주의적 사회학적인 이해를 극복하고자 함- 여성의 사명이라고 할 때 그것은 여성만의 사명이 아니라 여성이 더 중심적으로 대표하는 살림(living- 생명을 살림)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 살림의 사명은 사실 인류의 사명을 가리킨다. 이런 광범위한 의미에서 여성의 사명은 죽임과 경쟁과 파괴의 문화에 대하여 관계추구적 살림의 문화 창조임을 주장. 교양도서.
참고) IVP 에서 나온 책으로 제가 제 아내에게 사준 책. 말 좀 잘 들으라고(?)...
67. -------, 삶에는 뜻이 있다.
저자는 삶의 궁극적인 의미가 왜 창조주 하나님과의 건강한 관계정립에서 찾아진다고 주장하는가? 전도적인 용어를 구사하지 않으면서도 기독교적인 관점에서 얼마나 풍성하게 인생을 바라보고 즐길 수 있는가를 설득. 기독교인은 교회에 "매인"이 비참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 안에서 무한한 삶의 자원을 발견한" 풍성한 사람임을 강조. 기독교인의 삶은 삶을 피곤하게 하고 빈곤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면에서 풍성한 삶임을 강조. 삶의 뜻은 하나님과 더불어 찾아지는 신앙의 다차 방정식의 답과 같다. 신앙 입문자에게 도움이 됨.
참고) 이건 뭐죠? 제목은 낯설지 않은데...
68. 통합윤리학회, 21세기의 도전과 기독교 문화
기독교 윤리학은 내면적인 기독교신앙고백의 외형적 열매. 기독교 윤리가 씨름하는 주제들이 망라되어 있는데 기독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을 어떻게 확장할 것인가에 대하여 고민하는 신자들에게 도움.
참고) 못 읽어봤습니다.
69. 펙, 스코트, 거짓의 사람들
이 책은 우리가 인간의 생명을 심각하게 취급하도록, 그리하여 인간의 악에 대하여 훨씬 더 심각하게 여기도록 격려하고 있다. 악의 궁극적인 실체를 인정하지 않고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이 저자의 확신이다. 그의 지론은 그래서 악의 심리학은 치유의 심리학이라는 주장이다(마지막 7장 "위험과 희망"은 특히). 그래서 부제는 <인간 악의 치료에 대한 희망>이다. 구체적으로 악마(사단)의 실재, 귀신들림과 축사, 그리고 집단적 악에 대한 연구가 있다.
참고) 못 읽어봤습니다.
70. 포스터, 리챠드, 영적 훈련과 성장
미국 교회의 제자훈련의 기본 교과서로서 기도, 성경, 금식, 그리고 헌신 및 QT 등에 대한 포괄적인 접근을 보여줌. 리더 필독. 영어판도 구입.
참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왔는데 이것과 아울러 이분의 책 가운데 단 두 권의 책을 꼽으라면 '기도', 두란노에서 나온 52주 동안 신앙고전을
짧게 발췌한 것이 있습니다. 가격은 15,000원인데 책 제목이 생각이 안나네요. 몇 권이나 선물한 책인데...
71. 피니, 챨스, 승리의 원천
성결교, 오순절, 하나님의 성회 등 교단의 신학적 토대중 일부를 놓은 사람의 교회 부흥을 위한 고전적인 교본. 그의 부흥론은 성령의 감화와 집중된 기도의 합력을 강조한다. 피니는 또한 복음성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참고) 이 책도 크리스챤 다이제스트 고전 시리이즈 가운데 한 권입니다.
72. 피취, 윌리암, 인간, 만남, 그리고 창조
일치와 나눔의 인간관계를 위하여라는 부제가 암시하듯이 이 책은 원활한 인간 관계를 맺는 방법과 지혜를 가르쳐 준다. 창조적인 인간 관계의 건설자가 되기를 원하면 이 책은 긴요함.
참고) 이 책은 정말 모르겠네요.
73. 칼빈, 존, 기독교 강요(Christian Institutes) 요약
16세기 스위스(프랑스 출신이지만 스위스에서 주로 활동)의 젊은 종교개혁자 캘빈의 필생의 저작. 초판은 80쪽 정도의 팜플렛에 불과하였으나 마지막 35판 증보판은 오늘날과 같이 두꺼운 책이 되었다. 내용은 기독교 신앙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의 교리를 가지고 기독교 교회의 가장 중요한 신앙의 유산들인 십계명, 사도신경, 주기도문을 강해한 글이다. 그의 철저한 성경적인 생각은 우리를 감동시킨다. 그의 철저한 하나님의 영광 중심의 신학이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를 가장 명료하게 드러내고 있다. 모든 세계의 역사가들은 이 <기독교 강요>를 세계를 뒤흔든 10권의 책들 중 하나로 뽑는데 주저함이 없다. 리더 필독. 현대인에게 인내와 침착성을 요구하면서 읽히기를 원하는 책임. 무거운 책이나 너무나 은혜로운 책임. 모든 분들의 필독도서. 초신자들은 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자신을 아는 지식에 관한 장을 읽으면 되고 이미 오래 믿은 신자들은 성도의 견인(perseverance)에 대하여 읽으면 됨. 놀라운 위로와 희망의 책임. 그의 교리를 튤립(TULIP)이라고 하는데 그 이유는 다섯 가지 교리의 첫 글자를 합하면 TULIP이 되기 때문이다. 소개하면 T는 인간의 전적 타락론(Total depravity)이다. 인간 속에 있는 어떤 선도 구원을 가져 올 수 없다. 우리 안에 자신을 구원할 만한 어떤 자질도 자원도 없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 분의 주권을 인정하기를 거부한다. 인간은 하나님에 관하여 백지상태가 아니라 이미 뭔가가 이뤄진 상태임. 하나님을 본래적으로 인정하고 자신의 마음대로 살려고 하는 고집이 제한적인 선을 이루기도 하지만 하나님과 관련해서는 어떤 선도 하나님과의 평화도 이룰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처음부터 알고 있다. 아무도 순전한 의미에서 중립적인 무신론자는 없다. 하나님을 (잘못/자기중심적으로)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은 하나님에 대하여 이야기를 듣는 순간에 이미 하나님에 대한 태도를 결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가지고 인생을 살고 하나님의 자원에 의지하여 문명을 건설해 놓고도 인간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창조주로 모셔들이기를 싫어한다. 이 하나님을 배척하는 일에는 인류의 성현이나 거리의 강도나 창녀나 한 가지로 단결하여 일치한다. 하나님을 배척하는 일에는 인류가 하나된다.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본성적인 거부감/적대감/소외/불화/무관심의 마음 상태를 캘빈은 전적 타락상태라고 말한다. 바깥에서 빛을 비추어 주지 않으면 도저히 스스로 구원의 여망이 없는 상태를 전적인 박탈 상태(total depravity를 직역하면 하나님의 형상의 전적 박탈을 의미한다-원래 이것은 14세기 카톨릭 신학의 집대성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부분 박탈설에 대한 반론이다. 아퀴나스는 도덕감/양심은 타락했지만 지성 즉 하나님을 지성으로 알아가는 인식능력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고 주장했음)라고 말한다. 두 번째로 U는 Unconditional Love의 첫 글자이다. 인간의 전적 타락설과 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말한다. 인간 안에 하나님의 사랑과 호의를 받을 만한 어떤 자질이나 가치도 없기 때문에(조건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 주신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다. 셋째, L은 Limited redemption의 첫 글자로 제한적인 속죄론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 들이지 않고 일부만 구원의 믿음에 이른다는 관찰이다. 이것은 마땅히 일부만 구원받아야만 된다는 것이 아니라 인류의 일부만이 예수님을 믿는 현실로부터 나온 경험적인 교리이다. 바울과 마찬가지로 캘빈도 모든 사람이 구원에 이르기를 희망한다. 이 교리를 20세기의 현실에 맞게 개정한 사람이 칼 바르트다. 네째, I는 Irresistible Grace의 첫 글자다. 즉 불가항력적인 하나님의 은혜이다. 구원받은 사람은 자신의 공로가 아니라 불가항력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다섯째, P는 Perseverance of saints(성도의 견인<堅忍>교리)이다. 불가항력적인 구원을 받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경우에서건 지키고 보호하여 마침내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가르침이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나서도 반복하여 죄를 짓고 어둠에 빠진다면 우리가 받은 구원이 헛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할 때 성도의 견인교리는 참으로 놀라운 위로의 소식이다. 이 다섯 가지 교리를 염두에 두고 캘빈은 십계명, 사도신경, 그리고 주기도문에 대한 강해를 진행한다. 주제를 다루는 순서는 개략적으로 사도신경의 순서 1) 전능하시 천지를 지으신 하나님 2) 예수님 3)성령과 교회 4) 윤리와 시민적 의무를 따랐다.
참고) 크리스챤 다이제스트에서 나왔습니다. 지금 학교 칼뱅특강 수업시간에 쓰는 교재는 '기독교강요선' 대한기독교서회 이형기 역 입니다.
73. 하임, 칼, 세계의 완성자 예수
예수님의 주되심에 대한 탁월한 강의. 예수님이 왜 우리에게 주되심을 요구하는가 예수님은 이 세계의 종말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를 설득력 있게 가르침. 다소 어렵지만 인내를 가지고 읽으면 영혼의 큰 유익.
참고) 모르겠습니다.
74. 할레스비, 오, 기도
기도에 관한 가장 초보적인 입문서. 그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 마음에 들어오시도록 허용하는 것이라고 정의. 주기도문의 정신을 따라 기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매우 설득력있게 파헤침.
참고) 생명의 말씀사에서 나온 얇은 책입니다.
75. 헤셀, 아브라함, 사람은 혼자가 아니다
유대교적인 유신론에 입각한 인간과 삶에 대한 깊은 영적인 수상록
"우주를 구성하는 것은 별도 돌맹이도 원자도 물도 아니다. 그것들의 서로 상호예속됨, 상호작용,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관계가 우주를 구성한다. 그 어떤 세포도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한다." 신에 대한 어떤 철학적인 사변도 미치지 못할 깊이와 감동이 이 책에 들어있다. 유대교적인 일신론에 입각한 하나님 이야기는 구약성경공부의 좋은 서론 역할을 한다. 짧으면서도 심오한 신학적 수상록.
참고) 아브라함 요수아(또는 조수아) 헷셀의 대표작은 '예언자들 상.하'
76. ------, 사람을 찾는 하나님
구약의 하나님을 매우 설득력 있고 친근하게 기술한 책. 그의 유대교적인 교양과 랍비로서의 깊은 사색이 글 읽는 사람에게 통찰을 제공한다. 구약의 하나님을 진노하고 벌주고 심판하는 부정적 이미지로만 기억하는 분에게 좋은 교정이 됨. 구약의 하나님은 인간에게 우정을 발견하고 우정을 완성하기 위하여 손을 내뻗는 하나님임. 구약의 하나님은 홀로 자족한 하나님이시지만 또한 역설적으로 우정과 사랑에 굶주린 하나님임. 구약성경공부 준비 독서정도.
77. 홈즈, 아더, 기독교 세계관
현대의 비기독교적인 세계관과 기독교 세계관을 명료하게 구별하여 기독교 세계관의 우월성을 논증한 책. 기독교 세계관의 구조와 세계관의 실천적인 함의들을 이보다 더 잘 정돈한 책은 없다. 저자는 혼돈에서 질서를 정글에서 길을 찾는 사람임.
참고) IVP
*일부 오류가 있는 문장을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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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편: 혁명 vs 부흥
by 신광은(침례신학대학 PH.D과정)
“Again 1907!”
지금 온 나라를 휩쓸고 있는 열병의 이름이다. 최근에 누가 “부흥의 조짐이 오고 있다”고 했다는데.. 글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일어나긴 할 것 같다. 십 수년 전부터 북치고 징 울리던 심령부흥회와는 사뭇 다른 종류의 부흥을 말하는 이들이 하나 둘씩 생겨나기 시작하더니 점차 ‘부흥’이 한국 교회의 주된 관심사가 되어버렸다. 확실히 ‘부흥(Revival)’은 최근 10년 간 한국 교회의 가장 큰 화두다. 그리고 올해 2007년, 한국 교회의 부흥 ‘갈망’ 운동은 그 절정에 달한 느낌이다. 부흥을 누가 마다하겠는가? 주께서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사 불이 섶을 사름같이, 불이 물을 끓임같이 행하시고, 주께서 이 땅을 고치시는 크고 기이한 역사를 뉘라서 싫다하겠는가? 그리고 그러한 부흥이 있기 위해서, 챨스 피니가 말했던 것처럼 부흥을 열망하며, 또 우리가 가진 수단들을 정당하게 활용하는 의무를 다하자고 할 때 어찌 이를 거부하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이 있다. 과연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부흥인가? 그리고 부흥이 필요하다면 어떤 부흥이 필요한 것인가?
두 가지 부흥 운동 : 심리학적 부흥 운동과 기술적 부흥 운동
참으로 부흥 열풍이다. 여기 저기서 부흥에 대해 말하고, 기도하고, 기다린다. 말들도 많고 색깔도 다양하지만 지금 우리가 보는 부흥 운동은 큼지막하게 두 부류로 나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심리학적 부흥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기술적 부흥운동이다. 심리학적 부흥운동이라 함은 부흥이 인간의 내면에서 시작한다고 보고 내면의 변화를 강조하는 시도라고 하겠다. 이들 입장 중에는 초대교회나 청교도, 대각성 운동시절, 혹은 1907년과 같은 초기 한국 교회의 신앙으로 돌아가자는 역사주의적 부흥운동도 있겠고, 열정과 헌신의 회복을 강조하는 감성주의적 부흥운동도 있을 테고, 이성주의와 합리주의로 물들기 전의 의심 없는 믿음으로 기적과 표적을 맛보았던 신앙을 회복하자는 은사주의적 부흥운동도 있겠고, 믿음은 실천과 분리될 수 없다며 믿음과 행위 간의 통합을 강조하는 제자도적 부흥운동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의 공통된 견해는 오늘날의 문제를 본래 신앙의 순수성을 상실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본래의 순수한 신앙을 회복하는 것이 대안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들에게 있어서 부흥은 ‘회복’과 동의어인 것처럼 보인다.
기술적 부흥운동은 오늘날 교회가 당면한 문제의 원인을 비합리성과 비효율성으로 보려 한다. 또한 교회와 세상, 복음과 문화의 관련성이 끊어진 것을 심각한 문제로 여긴다. “교회가 일상 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불신자들의 질타를 교회가 겸허히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린&빌 하이벨스, 「윌로우크릭 커뮤니티 교회」, 104)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들은 복음의 본질과 상관없는 교회의 전통과 인습을 공격한다. 그리고 현대인의 언어와 문화에 적합한 방식으로 전도하고 설교하고 목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릭 워렌이나 빌 하이벨스는 이 운동의 대표 주자가 아닐까 싶다. 이들의 주장을 따라 교회는 CCM, 영상 등 다양한 매체, 테크놀로지, 방법론을 수용하고 있다. 또한 보다 미래지향적인 목회, 교회 내의 재정과 행정의 투명성, 보다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교회 운영 등을 위해 노력한다. 아마도 이들에게 있어서 부흥이란 ‘개혁 & 갱신’인 모양이다.
혁명이냐, 부흥이냐?
모든 부흥운동은 복음의 영향력이 증대되기를 갈망한다. 베드로의 때처럼, 조나단 에드워즈의 시절처럼 복음이 불신자와 신자들의 심령 속에 파고들어가기 실제적인 능력으로 나타나기를 원한다. 그러나 도무지 그러한 일들이 잘 일어나지 않고 있다. 무엇 때문일까? 많은 부흥운동가들은 복음(text)이 변질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엘룰은 상황(context)이 변화되었다고 말한다. 교회가 문제이기 앞서 세상이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에게 책임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다. 변화하는 상황에 휩쓸린 것은 교회의 전적인 잘못이다. 어쨌든 엘룰은 지금 우리가 처한 상황의 중요성을 말하려 한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인가?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에서 엘룰은 오늘날 복음을 들어야 하는 청중들은 돼지가 되어버렸다고 했다. 인간이라야 복음을 듣고 책임 있게 반응할 것인데, 복음을 듣는 이가 인간이 아니라 돼지니 어떻게 반응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 엘룰의 문제 의식이다. 현대인을 돼지라고 부르는 것은 엘룰 뿐만 아니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현대인을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했고,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라고 했다. 이들의 공통된 문제의식은 오늘날 인간성이 심각하게 위협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엘룰에 의하면 현대의 직장인들은 로마 시대의 노예들보다 훨씬 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리고 있다. 물론 노동 시간의 면에서 보자면 현대인들의 노동 시간도 훨씬 짧고, 강도도 많이 약해졌다. 그러나 문제는 노동의 속도와 밀도다. 현대인들은 근무가 시작된 순간부터 마치는 순간까지 원칙상 단 1분 1초도 다른 행동과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쉴 새 없는 감시와 실적 평가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현대인은 자신을 노동하는 기계로 철저하게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신체적 영역 뿐만 아니라 정신적, 영적 영역에까지 미친다. 그래야 진짜 기계가 되기 때문이다. 여가 시간에도 노동은 끝나지 않는다. 끊임없는 자기 개발, 부단한 학습과 연구, 심지어 자신의 성격과 인격개조까지 서슴지 않음으로써 지속되는 노동의 압력에 적응해야만 한다. 여기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로버트 라이시의 말처럼 기술 사회에 적응하는 화려한 적응자가 되든지 아니면, 질주하는 황소의 발굽아래 짓이겨지는 낙오자가 되던지 둘 중 하나다. 다른 모든 선택의 가능성, 곧 자유는 없다. 그래서 현대인을 노예라 하는 것이다.
고대의 노예와는 다르게 현대의 노예는 자신이 노예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고대 노예의 주인은 눈에 보였지만 현대 노예의 주인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구조와 시스템 속에서 노예 주인은 증발되고 없다. 합리성이라고 이름 붙여진 거대한 사회질서와 구조, 이것이 바로 현대인의 주인이다. 생활비를 벌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 일하지 않고 먹으려는 놈팽이들에게 내려지는 무서운 저주, 직장생활은 의무일 뿐만 아니라 신성한 권리라는 이데올로기 등.. 이 모든 것들은 너무도 당연해 보이고 합리적이어서 의문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현대의 새로운 지배 형태다.(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1장) 또한 현대의 노예는 자신의 지위에 불평하기는 커녕 도리어 만족스러워하고 뿌듯해 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존엄성, 자유, 가치 등.. 현대인들은 이런 것들을 포기하는 대신 상품과 물질로 보상받기 때문이다. 잔디 깔린 전원주택, 미끈하게 잘 빠진 최신형 자가용, 홈 씨어터,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대기업 간부 직함 등.. 이 정도면 충분하다. 더 바랄 것이 없다. 현대의 노예들은 고대의 노예들과는 달리 자신의 노예 신분에 대해서 불만을 갖는 것이 아니라 보상품 때문에 불평한다. 무제한의 권력욕과 소유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인간이기를 포기한 현대인, 이것이 돼지가 아니고 무엇인가?
이러한 변화된 상황을 고려하지 않은 채 현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마치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것이 엘룰의 주장이다. 돼지에게 진주를 던지는 교회는 두 가지 태도를 취한다. 하나는 ‘저들이 듣든지 아니 듣든지 전하는 것은 내 책임이니 나는 그저 피묻은 십자가의 복음을 전하리라’하는 태도다. 이것은 무책임하고 무식하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태도다. 또 다른 태도는 복음을 돼지가 먹기 좋은 쥐엄 열매로 바꿔 주는 태도다. 그러나 이것은 세속화의 지름길이다. 엘룰은 묻는다. “도대체 왜 불신자들에게 다가가려 하는가?”(The Humiliation of The Word, 202) 주님은 말씀하셨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하나를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마23:15] 복음전도에 대한 열망은 참으로 가상하지만 그러나 우리는 돼지에게 던져준 진주가 찢겨지고 상하여지는 꼴을 목도하고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엘룰은 복음전도에 선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것은 바로 혁명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모든 사람들로 이 복음의 말씀을 진정으로 들을 수 있게 하는 일이다. 즉 경제적, 지적, 심리적 및 육체적으로 인간적인 수준을 회복하도록 애쓰는 것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149) 다른 말로 돼지를 먼저 인간으로 되돌려 놓고 난 다음에라야 비로소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수준이 최소한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정도는 되어야 하는 것이다.”(위의 책) 그리고 이것을 엘룰은 혁명이라 한다. 곧 혁명은 돼지를 인간으로 바꾸어 복음에 반응하게끔 하는 일종의 예비적 조건이다. 엘룰에게 있어서 혁명은 부흥의 예비적 조건이면서, 결국 혁명이 곧 부흥이다.
혁명세력, ‘X’
혁명 하니까 데모나 폭동, 쿠데타 같은 것을 생각할른지 모르겠다. 그러나 엘룰이 혁명이라고 한 의미를 잘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혁명에 대한 일반적 오해는 혁명(revolution)을 반란(revolt)과 혼돈하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과 반란은 비슷하면서도 굉장히 많이 다르다. 반란은 파괴를 초래한다면, 혁명은 파괴하고 반드시 재건한다. 반란은 절망의 분출인 반면, 혁명은 비전에 이끌린다. 또 반란이 천년왕국으로 도약하려는 탈역사성을 가진 반면, 혁명은 철저히 역사적이다.(Autopsy of Revolution, 1장)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반란이 아니라 혁명이다. 혁명에 대한 또 한 가지 오해는 공산혁명과 혁명을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혁명의 본질을 호도하는 것이다. 사실 오늘날 혁명이라는 용어의 남용으로 인해 혁명이 본래 가졌던 심각한, 비극적인, 충격적 의미를 많이 상실해 버렸으며, 특히 좌파계열에서 혁명을 좌파의 전유물인 것처럼 사용하는 통에 혁명의 본의가 많이 변질되었다. 엘룰은 위기에 빠진 현대 문명과 인간성을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의 혁명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혁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만이 진정한 혁명의 주체가 될 수 있다. 엘룰에 의하면 기독교는 모든 권력을 모든 방향에서 뒤엎는다. 전복하는 힘, 뒤엎는 능력이 기독교에 있다. 초기 한국 기독교도 그런 전복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전택부는 한국 기독교 초기에 “예수의 복음이 한 동네에 들어가는 날이면 그 동네는 결단이 나고” 말았는데, 이런 기이한 기독교의 마술적 힘(?) 때문에 크리스찬을 예수 ‘쟁이,’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예수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I」, 28) 옳다. 기독교가 기독교다워진다면 언제라도 이러한 혁명적 능력이 다시 가능해질 것이다.
예수께서 돈궤를 엎으시듯 기독교는 맘몬을 뒤엎는다. 초대교회가 로마질서를 거부하듯 기독교는 정치권력을 뒤엎는다. 선지자들이 우상숭배를 정죄하듯 기독교는 모든 종교를 뒤엎는다. 또한 기독교는 도덕과 윤리적 질서도 뒤엎고, 문화마저 전복한다. 기독교란 이 세상의 질서와는 완전히 다른 이질적인 것으로서 종교 냄새가 물씬나는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부르기에는 너무도 특이하고, 이질적이고, 혁명적인 것, 정의할 수 없는 ‘X’이다.(「뒤틀려진 기독교」, 1장) 초대 교회 한국 기독교는 X로서, 한국 사회에 충분히 혁명적이었다. 원산지방 초대교인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열심히 성경 읽고, 열심히 전도하자는 3대 원칙과 함께 3대 사업을 책정했는데, 이 사업의 내용이 놀랍다. 첫째 부녀자들에게 국문을 배워주기, 둘째 가묘와 신주를 부숴 버리기, 셋째 상투 자르기 등이었는데 이 세 가지 사업은 실로 혁명이라 할 수 있었다.(전택부, 「토박이 신앙산맥 I」, 191) 그리고 이것이 바로 X의 힘이다. 바로 이 X가 혁명세력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뒤틀려진 기독교
혁명 없이 이 세상은 가망이 없고, 교회 없이 진정한 혁명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교회는 혁명성을 잃어버렸다. 수구와 보수의 선두주자다. 어떻게 이렇게 되었는가? 엘룰은 「뒤틀려진 기독교」에서 어떻게 기독교가 최초의 혁명적 역량을 점차로 상실해 갔는지를 추척하고 있다. 기독교 계시가 철학으로 변질되면서 최초의 타락이 시작되었다. 콘스탄틴에게 권력을 분여받은 후 기독교는 심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으며 교회는 큰 성공을 거두었으며 부와 권력이 더욱 기독교를 변질시켰다. 대중들이 교회로 몰려오자 성서의 제자도의 요구는 하향조정되었으며, 점차 기독교의 혁명성은 사라지기 시작했다. 급기야 기독교는 민간신앙도 흡수했으며, 최종적으로는 러시아의 블라디미르를 감동시킬 만한 근사한 종교로, 그리고 훌륭한 도덕체계로 타락하게 되었다. 전적으로 이질적인 X는 사회학적 한 세력으로서 종교가 되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종교가 되어버린 오늘날 현대 기독교는 영향력과 권력에 중독되어 있다. 인간적인 영광과 세상을 소유하고픈 허기짐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한국 교회에 불어닥치고 있는 부흥 운동이 이러한 허기짐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어떻게 이렇게 단언할 수 있는가? 이것은 부흥 운동이 대중 집회를 선호하고 있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금새 알아챌 수 있는 사실이다. 엘룰에 의하면 대중 집회는 일종의 이미지다. 초청강사와 그의 메시지가 아무리 탁월하더라도 실상 그것은 배경음향에 불과하다.(The Humiliation of The Word, 202) 집회의 주인공은 ‘집회 자체’다. 수 천, 수 만 명이 운집해 있는 스펙타클.. 이것이 사실 대중 집회의 주인공이다. 아무리 이곳에 많은 수가 모이고, 그럴듯한 프로그램이 기획되고, 훌륭한 장비와 장치들이 행사를 돕는다고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은 성육신하시어 우리 가운데 계심으로 진리를 드러내셨던 그리스도와 그의 X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할 것인가?
혁명이 대안이다! 혁명이 없다면 지금 우리의 문명은 파국을 맞이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혁명할 것인가? 그는 조직을 구성하고, 당을 결성하고, 사람들에게 홍보하고, 집회를 통해 사람들을 일으키는 형태의 혁명 운동에 반대한다. 그 모든 행동주의는 철저히 기술적이어서, 기술 사회에 더욱 편입될 뿐이다. 또 그는 축제를 벌이자는 식의 혁명 운동에 반대한다. 성(sex)의 무차별적 개방을 혁명이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한다. 비합리적 초현실주의와 실존주의로 도피하는 것도 진정한 혁명이라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엘룰이 말하는 혁명은 단순히 제도에 일탈하는 것이나 반란과 폭동을 일으키는 것과도 다른 혁명이다. 그러한 대안들은 결코 현 시대의 문명의 구조를 뿌리까지 뒤엎지 못한다.(Autopsy of Revolution, 5장)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혁명은 문명의 토대를 바꾸는 세상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혁명이다. 그렇다면 그 혁명은 어떻게 창출되는가?
첫째는 깨달음을 통해서다. 엘룰이 무엇보다 강조하는 것은 깨달음, 곧 각성이다. 거짓을 걷어내고, 진실에 눈을 뜨는 것! 여기서부터 혁명은 시작된다는 것이다. 엘룰은 항상 인식을 강조하며, 따라서 이성과 지성의 역할을 중요시한다. 혁명이란 현 상황에 대한 정확한 각성이 축적됨으로써만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Autopsy of Revolution, 284) 오늘날 선전은 근거없고 비합리적인 신화들을 유포하여 우리 시대의 끔찍한 실상을 보지 못하도록 환상과 망상을 창조하였다. 그 거짓을 걷어내는 작업이 먼저 필요한데 이것이 바로 지성인의 역할이다. 그러나 이 작업을 위해서 또 한 가지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기독교 계시다. 세상을 정확히 보기 위해서는 세상 밖에서 세상을 들여다보아야 하는데, 성서는 전적 타자이신 하나님의 작품이요, 따라서 성서는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타자적 관점을 제공해 준다. 곧 성서에서 세상과 우리를 평가할 수 있는 외적 준거점(referent point)을 찾을 수 있은 것이다.(「우리시대의 모습」, 140) 따라서 혁명은 ‘오직 성서’에서 시작된다.
두 번째는 거부다. 우리는 현 사회가 우리에게 당연시하게 만드는 것들, 또한 그 체제 속에 포함되도록 요구하는 것들에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합리성과 효율성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는 기술의 정신을 거부해야 한다. 성장이 곧 진보라고 말하는 생산주의에 대해서 거부해야 한다. 모든 개인의 개성을 억압하고 체제 속에 일방적으로 편입되기를 강요하는 국가주의에 거부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모든 공적 사적 영역을 끊임없이 감시하고 관리하는 관료사회와 조직화에 반대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거짓된 신화와 이데올로기, 그것을 유포하는 선전을 거부해야 하며, 뿌리깊은 시청각적, 이미지 중심의 사회를 거부해야 한다. 이 모든 거부는 단순히 거부를 위한 거부가 아니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 가치를 공격하는 세상적인 구조와 악을 거부하자는 것이다. 또한 단순한 거부가 아니요, 공격이다. 또한 이러한 거부는 결코 피상적인 거부일 수 없다. 우리의 거부로 말미암아 모든 영역에서 효율성이 떨어지게 될 것이요, 생활 수준이 낮아질 것이며, 공공 사업이 광범위하게 감소하고, 또 대중 문화의 상당부분이 침식당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각오해야 한다. 혁명은 자기 희생으로만 가능하다.(Autopsy of Revolution, 5장)
셋째로 신앙이다. 많은 사람들은 엘룰에게 행동을 원한다. 분명한 행동 강령과 정책들만 있으면 모든 것을 기꺼이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많다. 그들은 순종하기를 강렬히 열망한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오?’ 그러나 엘룰은 그들에게 답한다. 중요한 것은 ‘행동’이 아니라 ‘존재’라고 말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92) 원리, 정책, 규율, 행동 등.. 이 모든 것들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지만 사실 엘룰은 바로 그것들과 싸우자고 우리를 초청하고 있다. 엘룰이 말하는 것은 결국 우리더러 ‘신자(believer)로 살라!’는 것이다. 행동이 아니라 삶으로 혁명해야 한다. 삶은 삶이되 신자로서의 삶, 곧 신앙의 삶으로 혁명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신앙인은 본성상 혁명적이다. 신자는 그들의 구원 받은 신앙으로 이 세상을 초월한 존재다. 그들은 세상 왕국에 매이지 않으며 하나님의 왕국에 속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다만 이 땅에 할 일이 있어 보냄을 받은 천국의 스파이다. 이러한 신자의 정체성이 불가피하게 그를 혁명적 상황으로 내몬다. 따라서 만일 신자가 제대로 신자 되기만 하다면 기필코 혁명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엘룰은 신자에게 제대로 신자가 되라고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믿노라 하면서도 안 믿는 것이 문제다. 그리하여 혁명은 ‘오직 믿음’으로 일어난다.
마지막으로 그가 「기도와 현대인」에서 제시하는 방법, 곧 기도(혹은 명상)이다. 신앙인은 기도한다. 기도란 신앙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도는 불가능해졌거나 변질되었다. 기술사회에서 목사들은 이렇게 설교한다. “왜 신을 시험하지 않는가?”(마르쿠제, 「일차원적 인간」, 33)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기도해보라!는 것이다. 기술 사회의 기도는 점차 효과를 얻어내는 방법과 수단으로 변질된다. 기도는 기술이 아니라 신자의 삶의 표지다. 우리는 참으로 힘든 싸움으로 초대되었다. 싸움이 힘들고, 도저히 승리할 수 없을 것 같은 때에 우리는 기도한다. 왜냐하면 기도는 대충 가능한 것을 얻어내는 수단이 아니라 전혀 불가능한 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이기 때문이다. 기도는 인간적인 행위가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행위요, 그래서 은혜의 수단이다. 기도는 눈에 보이는 사실만 전부라고 주장하는 오늘날의 사실숭배를 거부하며, 보이지 않는 실재가 존재함을 단언하고, 우리들에게 주입하는 모든 거짓된 신화와 이데올로기를 걷어내며, 부단히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성령님의 인도를 받는 행위다. 우리들의 싸움이 아무리 고될 지라도 신자가 기도하는 순간 그는 결코 패배하지 않는다. ‘오직 기도’로 혁명은 가능하다.
마치는 글
2007년 오늘, 나는 참으로 부흥의 계절(Seasons of Revival)이 오기를 소망한다. 그러나 우리의 소망은 결코 기독교라는 이름의 한 종교가 성장하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바라고 소망하는 것은 기독교가 본래의 모습, 엘룰식으로 말하자면 혁명세력으로서의 X의 면모를 되찾는 것이다. 혁명세력으로서의 X가 회복될 때 현대 문명의 뿌리부터 뒤엎어지는 거대한 혁명이 일어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현대 문명 전 영역에 걸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이러한 혁명은 위기에 빠진 인간성을 건져내며, 벼랑 끝에 서 있는 문명을 살려낼 수 있을 것이며, 그러한 연후에라야 기독교 복음의 전파가 가능한 상황도 초래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혁명은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필연적 요청이다. X의 혁명, 이것은 기독교와 교회의 관심사일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관심사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이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우리는 끝장이며 인간 문명 전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세상 속의 그리스도인」, 46)
*여러분들의 논평을 기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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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크기에 대한 불건전한 관심의 역사 (1)
by 신광은 목사, 박삼종 전도사
본 연재글의 중요한 전제 중 하나는 메가 처치 현상이 이천년 기독교 역사상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메가 처치는 20세기의 산물이며, 메가 처치 현상은 대단히 최근에 나타난 현상이다. 하지만 메가 처치의 뿌리는 상당히 옛날까지 뻗어 올라가 있다. 상당히 오래 전부터 교회는 ‘크기’에 눈을 뜨고,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이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가능케 한 교회 내부의 동인이 되었다. 이번 글에서는 교회가 크기에 어떻게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간단히 추적해 보고자 한다.
1. 규모에 대한 무관심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과 야만인들의 개종이 있은 후, 천 년이 넘도록 교회는 교회의 규모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기본적으로 제도적이고 사회적인 것이었기에 교회의 규모가 역동적으로 증가하는 현상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별히 초대교회 때부터 시행한 것으로 보이는 교구제 덕분에 개교회가 갑작스럽게 비범한 성장을 보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또 많은 목회자들은 숫자나 규모의 지나친 관심을 세속적 허영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하여 대체로 규모는 진리에 비해서 부차적인 문제로 치부되었다. .
2. 18세기의 대부흥 운동: 규모에 눈을 뜨다.
그러다가 18세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갑자기 대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18세기 영국과 미국을 강타한 1차 대부흥, 혹은 1차 대각성 때 교회는 점차 ‘규모’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과거에도 여러 가지의 개혁과 부흥 운동이 있었으나 ‘숫자’와 ‘규모’는 부차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영국 국교회 내에서부터 시작된 부흥 운동은 교회로 하여금 무엇보다도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메마른 설교와 교리 교육, 형식적인 예배에 지쳐 깊은 영적인 잠에 빠져 있던 대다수 교인들이 어스킨(Erskine) 형제로부터 시작하여, 휫필드(Whitefield), 그리고 웨슬리 형제(Westley)로 이어지는 위대한 부흥설교가들의 설교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이들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사람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교회당은 이들을 수용하기에 역부족이었다. 그래서 최초로 야외에서 집회를 열게 된다. 한번 상상해 보라.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려 와서 야외에서 집회를 열 수 밖에 없는 상황을.. 하늘로부터 무한한 성령의 은혜의 소낙비가 쏟아져 내려오는 것 같지 않은가! 아직까지 이런 역사는 한 번도 없었다. 놀라운 흥분과 감격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리고 교회는 처음으로 숫자와 규모에 눈을 뜨게 된다.
3. 조지 휫필드의 착각: 규모를 하나님의 역사로 혼돈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설교가로 꼽히는 휫필드의 미국 사역은 그야말로 전설적이다. 회의주의자인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마저 그의 설교를 듣고는 고아원을 위해서 전액을 헌금하고 말았다니 말이다. 프랭클린이 참석했던 집회에 모였던 청중의 숫자는 자그마치 3만명이나 되었다. 규모면에서 1차 대각성 운동 중 가장 성공한 사람을 꼽으라면 휫필드라고 해도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우리가 여기서 휫필드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가 숫자와 규모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는 것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시지와 신념을 최대한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어 했다. 때문에 그는 ‘숫자’와 ‘규모’에 유별나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래서 그는 적극적으로 사람들을 동원하고 또 자신의 집회에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한 기술적 방법을 적극 개발했다. 이안 머레이나 마이클 호튼 같은 이들은 참 부흥(revival)이 거짓된 부흥주의(revivalism)로 타락하게 된 것은 알미니우스의 신학 때문이라고 하지만 최초로 숫자를 통한 부흥을 추구했던 휫필드는 칼빈주의자였다. 신학적으로 휫필드는 인간의 능력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과 은혜를 강조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복음전도의 ‘효과(effect)’에 적극적인 관심을 가졌던 첫 번째 대표주자로 손꼽히고 있다.
그는 주로 야외에서 이동을 하며 복음을 전했다. 교회로 사람들을 모이게 한 것이 아니라, 그가 사람들 가운데로 찾아 들어간 것이다. 요즘으로 치면 일종의 ‘구도자 중심의 집회’를 한 것이다. 그는 집회를 열기 며칠 전에 스탭들을 미리 보내서 장소를 확보하고, 전단지를 돌리고, 분위기를 조성하며, 신문 광고, 설교문 배포, 풍문 조성 등을 통해 휫필드 집회에 기대심을 높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휫필드의 영웅적 면모는 각별히 부각되었다. 전형적인 스타 시스템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휫필드는 집회와 예배에 광고와 선전을 활용했다.
집회의 방식도 이전과는 전혀 달랐다. 동시대의 인물, 조나단 에드워즈가 설교했던 방식은 이미 쓰여진 설교문을 설교단에서 읽는 원고설교였다.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반응은 에드워즈의 관심의 초점이 아니었다. 다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선포할 따름이었다. 그러나 휫필드는 달랐다. 그는 배우 출신으로서, 자신의 말과 억양, 얼굴표정, 몸짓을 적절하게 연출할 줄 알았다. 거대한 군중 앞에서 원고 없이 즉석으로 자유설교를 했다. 그래서 그는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ex tempore)’ 설교할 수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들고, 발을 구르고, 성서의 이야기를 몸으로 극화하고, 큰 소리로 우는 등 온 몸으로 설교했다. 또 그는 사람들의 양심을 향해 직접 공격했으며, 회개하지 않는 자들을 향해 벼락같은 소리를 지르고, 심지어 상스러운 말까지 내뱉었다. 이러한 그의 탁월한 연출력 때문에 그가 “메소포타미아..”라는 말만해도 사람들은 울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은 휫필드가 ‘숫자’와 ‘규모’를 늘리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실제로 휫필드는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집회 참석 인원의 숫자를 뻥튀기하기도 했다. 휫필드가 이렇게 ‘규모’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선한 목적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활용하고자 했던 그의 모습에서 오늘날의 모든 메가 처치의 목사들의 원형을 발견한다. 그는 개인이 아니라 대중을 상대로 했던 사역했던 대중 운동가다. 대중을 마음대로 요리할 줄 알았던 휫필드는 근대 거인주의의 시조로서, 카리스마적 종교 지도자의 모범이요, 미국 대통령 리더쉽의 원천이다.
4. 노천 캠프 집회와 시장 상황의 개막
휫필드와 웨슬리의 야외 집회는 무엇보다 교구제의 파괴를 가져왔다. 야외 집회를 소개받았을 때 웨슬리는 처음에 주저했으나 ‘영혼 구령’이라는 지상 과제 앞에서 결국 마지못해 수용하고 만다. 그리고 웨슬리는 말했다. “전 세계가 나의 교구다!” 이제 기성 교회가 임의로 잘라 놓은 교구는 새 시대에 새롭게 역사하는 하나님의 능력 앞에서 무너져야 하는 낡은 장벽이었다. 교회의 질서는 새로운 운동에 의해서 새롭게 재편되어야 했다. 이때부터 교구제는 급속히 무너져갔다.
미국의 부흥운동가들은 노골적으로 견고한 교구제를 파괴하는 데 앞장섰다. 19세기 이후 미국에서 노천 캠프 집회는 상당히 대중화되었는데, 캠프 집회가 교회당이 아니라 야외에서 열렸기 때문에 부흥운동은 기존의 지역교회 구도를 벗어나 있었다. 캠프 집회에는 불신자 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부흥사들은 이들의 마음을 도둑질했다. 솔직히, 신자들이 볼 때에도 기존 교회 목사들은 교구제의 보호 아래 안일하고, 나태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것처럼 보였다. 그에 반해 부흥운동가들은 뜨겁고, 능력이 충만하며, 아골 골짝 빈들에도 복음만 들고 전진하는 하나님의 참 종처럼 보였던 것이다. 때문에 집회에 참석했던 신자들은 참 지도자를 찾아 교회를 옮기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소위 ‘수평 이동 현상’이 이때 이미 발생한다.
대다수 부흥사들은 이와 같은 상황을 더욱 조장했다. 그들은 기존 교회 목사들을 비판하며, 회심조차 체험하지 못한 목사를 과감히 떠나라고 했다. 은혜가 없고, 메마르고, 능력이 없는 목사를 떠나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한 부흥설교가들에게로 가라고 신자들을 종용했다. 그리하여 부흥운동이 진행되면서 부흥운동에 소극적이었던 회중교회, 성공회, 장로교는 교세가 추락하고, 운동을 주도했던 감리교와 침례교는 급성장했다. 이로써 바야흐로 능력과 실력 위주의 목회 시장이 열린 것이다. 부흥운동은 새로운 교단을 출현케 했으며, 수많은 기존 교회와 교단을 갈가리 쪼개 놓았다. 교단이 많아지면서 신자들의 교회 선택의 폭은 점점 더 넓어졌다. 선택권은 점차 교회에서 신자에게로 넘어가게 되었다. 바야흐로 시장 상황이 열리고 있었다. 부흥사들의 의도와 상관없이 시장 상황 속에서 신자들은 점차 고객이 되어 가고, 교회는 기업이 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5. 챨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
1) 새로운 방법(new measure)
19세기 2차 대각성 운동을 주도했던 챨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교회가 ‘숫자’와 ‘규모’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을 정당화할 뿐만 아니라 획기적이고도 정교한 방법론까지 교회에 제공했다. 그가 제시한 방법을 새로운 방법(new measure)이라고 부른다. 새로운 방법이란 부흥을 이루는 방법을 말한다. 부흥이란 크고 놀라운 역사로서 규모가 비범하게 크다는 것이 핵심이다. 죄인들의 회심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회심이 “많이” 일어나는 것, 이것이 부흥의 핵심이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은 언제든지 적절한 수단과 방법만으로 얼마든지 일으킬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피니의 부흥론의 핵심이다.
될 수 있는 한 많은 죄인을 회심시키기 위한 부흥의 방법이 새로운 방법인데, 새로운 방법은 무엇보다 대중 집회가 필수적이다. 큰 교회 건물이 없으면, 시청이나 학교 강당을 찾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노천 캠프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사람들을 동원한 다음, 그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즉시’ 회개하겠다고 결심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을 위해서 피니는 최대 효과를 거둘 수 있는 방법들을 동원하였는데, 환풍기를 조절하고, 음악을 신중하게 활용했으며, 그 외에도 예배의 순서를 갑자기 바꾸기, 예배를 연장하기, 거칠고 통속적인 말을 사용하기, 기도와 설교에서 개인의 이름을 거명하기, 예배 시 설교단에서 가까운 사람에게 질문하기 등이 그 예이다.
무엇보다 피니는 집회의 효과를 구체적인 척도로 측정하고 싶어 했다. 그는 그 전부터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했던 “제단 초청(altar call)” 방식을 적절히 변형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구도 좌석”이다. 집회가 끝날 때쯤 피니는 회심할 사람을 앞으로 나오게 하여 맨 앞에 비워둔 의자, 곧 구도 좌석에 앉게 했는데, 이것으로 그는 회심자의 숫자를 계산할 수 있었고, 집회의 효과를 숫자로 측정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이제 집회의 목표는 구도좌석에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수의 사람들을 앉히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는 강렬하고 응시하는 듯하며 짜릿한 느낌을 주는, 미친 듯한 예언자의 눈으로 청중들을 노려보며, 그들의 이름까지 호명하며, 회개하도록 촉구했다. 그는 “지금 즉시!” 회심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소리쳤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고 협박했다. 청중들 사이사이에 앉은 회개를 돕는 스탭들은 죄인들이 결단하도록 여러 가지 방법으로 분위기를 조성했으며, 그들이 결단하고자 일어설 때 즉시 그들을 구도 좌석으로 인도했다. 이러한 방식은 직업적 부흥사들에게 큰 인기를 끌어 어떤 목사는 시계를 꺼내들고 “15분 안에 회개하라”고 위협하기도 했다.
2) 오직 부흥으로..
피니에 와서 부흥은 이제 절대적인 것이 된다. 부흥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은 사소하고 부차적인 것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느냐는 것이 피니의 주장이었다. 피니는 자주 신자들에게 이렇게 위협하곤 했다. “지금 당신이 그를 돕는다면 그가 살 수 있다. 그러나 지금 당신이 그를 돕지 않는다면 그는 영원히 지옥불에 떨어질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님은 그 영혼의 핏값을 누구에게 찾겠는가?” 수많은 영혼을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구하는 것, 이로써 거두어지는 부흥, 이것이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말하는 부흥이 ‘숫자’와 ‘규모’의 동의어나 마찬가지라는 데 있었다. 결국 그는 숫자와 규모가 전부라고 말한 셈이었다. 이로써 피니는 오늘날의 메가 처치를 향한 속도제한 없는 고속도로를 닦아 놓았다.
3) 부흥 테크놀로지
“부흥을 일으키고 싶어도 안 되는걸 어떡하냐?”라고 피니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그는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당신이 부흥을 이루는 방법에 대해서 무지하거나, 아니면 부흥을 원하지 않거나 둘 중 하나다!” 피니는 최초로 방법만 올바르면 결과는 자동으로 얻을 수 있다는 테크놀로지의 원리를 복음 전도에 적용한 사람이다. 피니의 부흥론은 사실 테크놀로지이다.
피니에 의하면 신앙이나 회심은 ‘하나님의 역사’가 아니라 전적으로 ‘인간의 일’이다. 그리고 부흥은 ‘기적’이 아니라 정확한 ‘과학’이다. 부흥이란 “자연의 힘을 옳게 사용”하면 언제나 나타나는 그 무엇이다. 그는 말한다. “부흥은 결코 기적도 아니며 또 기적에 의존한 것도 아니다. 부흥은 당면한 수단을 옳게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사를 짓는 것과 같다. 농사 수단을 제대로 활용하기만 하면 농부는 풍작을 거둘 수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방법이 옳다는 것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피니는 이렇게 말했다. “결과는 수단을 정당화한다.” 부흥만 이루면 과정은 문제될 것이 없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오늘날 대다수 메가 처치 목사들의 전형적인 목회철학이다.
4) 표지로서의 부흥
부흥이 만일 과학이고 테크놀로지라고 하면 이제 누구라도 부흥을 이룰 수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런데도 그 교회의 부흥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신자나 교회가 문제라는 말이 된다. 마음만 먹으면 부흥을 일으킬 수 있는데도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교회나 신자가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부흥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은 신자나 교회가 병들었거나 죽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부흥은 신자나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표지가 된다. 부흥을 일으키는 신자나 교회는 건강하지만, 부흥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신자나 교회는 병들었거나 죽었다. 부흥은 신자나 교회, 특히 목사의 책임이다. 부흥을 일으킬 줄 모르는 목사는 무지하거나 나태한 목사다. 피니와 함께 부흥, 곧 규모가 모든 것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었다.
4. 무디와 이벤트의 시작
19세기 말, 또 한 명의 위대한 복음전도자가 나타났다. 드와이트 무디(Moody)다. 무디는 소박하고 겸손한 사람이었다. 그는 하층민 출신으로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다. 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받고 수 십 만 명에게 복음을 전하는 복음 전도자로 쓰임을 받았다. 무디는 새로운 복음주의자의 모습을 창조했는데, 그것은 “오직 열정만으로” 영혼 살리는 일에 올인(All-in)하는 전도자의 모습이다. 무디의 영향을 받은 수 만 명의 그리스도인들은 오직 영혼 살리는 그 한 가지 일에 자신의 전 인생을 기꺼이 헌신했다.
무디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어 신학이 약했고, 지식이나 논리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들이 갖지 못한 “열정”이 있었다. 그는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소박하고, 진실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부족함을 그대로 인정했고,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열게 만들었다. 문제는 그가 그리스도인에게는 열정만 있으면 되고, 지식이나 학문은 필요 없는 것처럼 말했다는 것이다. 그는 현대 신학과 현대 과학을 불신앙으로 비난했으며, 축자영감설과 같은 근본주의 신앙에만 헌신하도록 촉구했다. 오직 열정만 강조하는 무디와 함께 사고할 줄 모르는 그리스도인의 무리가 점차 만들어졌다.
무디의 열정주의는 더욱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음 전도를 하게 만들었다. 언젠가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한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면 당신이 어떻게 하나님께로 인도하였는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이것은 정확히 피니의 정신과 일치한다. 그러나 무디는 피니보다 훨씬 덜 지성적이고, 대신에 보다 더 감성적이라는 점이 달랐다. 피니처럼 무디에게도 과정은 중요하지 않았다. 결과만 좋으면 모든 것이 용납되었다. 이렇게 해서 무디식 이벤트 전도 집회가 탄생한다.
무디는 논란이 많은 피니식 “구도 좌석”은 활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회심한 영혼들을 초청하는 방식을 버리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것을 훨씬 더 정교하고 세련된 이벤트로 만들었다. 무디는 호통을 치거나 꾸짖는 대신 솔직하고 소박하게 자신을 내보이며, 그러나 간절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했다. 메시지가 끝나면 모두 조용히 기도하게 했다. 그러면 파이프 오르간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기 시작한다. 음악은 커졌다 작아졌다 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잠시 뒤 집회 전문 가수인 아이라 생키(Ira Sankey)가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한다. 가사는 대충 이런 식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라, 지치고 상한자여.. 집으로 오라.” 생키의 노래할 때 잘 준비된 백 코러스가 중간 중간 화음을 넣어준다. 속삭이듯 감미로운 목소리로 코러스는 “집으로 돌아로라, 오라, 오! 집으로 오라”를 반복한다. 집회장은 숙연해지고 여기 저기서 눈물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회심자들이 하나 둘씩 일어나면 스탭들은 그들을 준비된 장소로 인도한다. 이러한 무디의 전도 집회는 정확히 오늘날 메가 처치의 이벤트성 집회의 원형이다.
5. 빌리 그래함과 테크노 복음주의
20세기의 가장 탁월한 부흥설교자 빌리 그래함은 LA의 천막 집회에서 명성을 얻은 사람이다. 이러한 점에서 그도 휫필드 이후의 복음주의자의 계보를 잇는다. 그는 선조들의 복음주의적 전통을 20세기의 테크놀로지와 잘 버무려 테크노 복음주의(Techno Evangelism)를 완성한 사람이다. 애초에 3주를 계획했다가 극적인 성공으로 9주까지 연장된 천막 집회에 빌리 그래함은 연예인, 스포츠 스타, 회심한 조직 폭력배 등을 게스트로 참석시켜 대중의 관심을 촉발시켰다. 이후 빌리 그래함의 전도 집회는 사상 유래가 없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피니의 3만명 집회도 1974년 여의도 광장에서 열렸던 엑스폴로 74대회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다. 주최측은 이때 158만명이 모였다고 발표했다. 물론 이러한 대형 집회가 가능한 것은 전자 테크놀로지 덕분이다.
그는 무엇보다도 대중 매체의 위력을 잘 알고 그것을 적극 활용한 미디어 복음주의자다. 그는 「하나님과의 평화」, 「불타는 세계」 등의 베스트셀러를 저술했으며, <크리스차니티 투데이>, <결단> 등의 잡지를 창간하여 영향력을 배가했다. 또 “결단의 시간” 등과 같은 유명한 라디오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인도해서 전 세계 2500만명에게 영향력을 미쳤다. 그는 또 영화를 제작하고, TV에 출연했으며, 다양한 영상물을 사역에 적극 활용했다. 그는 또 위성중계를 통해 전 세계 수 억 명에게 복음을 전하기도 했다. 빌리 그래함과 함께 모든 ‘규모의 장벽’이 무너지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어디서나 복음전도자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기독교 하이퍼 리얼리티가 완성되었다. 그리고 그의 방법과 기술은 모든 메가 처치의 모범이 되었다
*뉴조에 보내면서 조금 수정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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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메가처치 논박(Against Mega Church)02-B:시장자본주의 논리에 잠식당한 교회
by 신광은 & 박삼종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데 크리스천들만 모르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기업'이라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아이의 눈에도 훤히 보이는데, 교회 안에 있는 사람은 박사라도 보지 못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교회가 '비지니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안델센의 ‘벌거벗은 임금님’ 이야기는 동화가 아니라 실화다. 오늘날 교회는 벌거벗은 임금님이다. 아무리 눈을 씻고 보아도 오늘날 교회는 신약시대의 교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1층에 장로교, 2층에 감리교, 3층에 침례교, 그리고 지하는 나이트클럽... 백화점 바겐세일과 같은 총동원 전도, 교인 뺏기 경쟁, 집짓기 경쟁... 도대체 어디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발견할 것이며, 도대체 어디서 로마 제국을 굴복시킨 신약교회와 초대교회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단 말인가? 교회는 벌거벗었다. 이 사실을 남들은 다 아는데 교회만 모른다.
교회가 벌거벗은 모습 중 하나는 오늘날 교회가 자본주의의 질서에 편입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앞 글에서 논의한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의 발생 등과 같은 세속적인 현상들은 그 자체로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이 같은 현상의 결과로 교회가 시장과 자본의 논리에 종속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 안에는 자본주의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 메가 처치는 교회 안에 자본주의의 논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자본주의화가 낳은 열매다. 여기서 잠깐 교회 안에서 작동 중인 자본주의의 논리를 분석하고 다음 주제로 넘어가자.
1) 고객의 탄생
고객이 탄생했다. 시장 상황에서 오늘날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존재한다. 고객이 되어버린 오늘날의 구도자는 자신들의 삶을 전적으로 새롭게 바꿀 생명의 진리에는 관심이 없다. 이들은 다만 일용품으로서의 종교에 관심이 있다. 일용품 종교란 무엇인가? 파스칼이 말한 대로 만에 하나 있을지 모를 지옥의 불행을 피할 수 있는 ‘보험증서’를 말한다. 또 일용품 종교란 한 주간의 긴장된 삶을 잠시 이완시켜 줄 ‘기분전환’을 말하며, 바라는 바를 ‘빌 대상’을 말하며, 자신감으로 충전시켜 줄 ‘격려자’를 말하며, 자신의 삶을 한번쯤 돌아보게 하는 ‘자기 성찰’을 말한다. 그리고 마음이 동하면 몇 푼의 헌금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제 사업’을 말한다. 오늘날 구도자는 이곳 저곳 교회를 전전하며 자신의 필요를 채워줄 일용품 종교를 구매하고 다닌다. 고객이 탄생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부터 교회에 고객이 생겨나게 된 것일까? 고객이 출현하게 된 결정적인 원인은 사람들이 신앙에 대한 ‘선택권’을 가지게 된 것이다. 피터 버거식으로 말하자면, 과거에 신앙은 운명적인 것이었다. 초대 교회는 교회 입문에 참된 제자도의 열매를 요구했기에, 또 중세 교회는 기독교 제국의 지배력을 행사했기에 선택권은 교인이 아니라 교회에게 있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신앙이란 처음에는 지역별로, 더 나아가 도시, 개인별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이 시발(始發)은 교회의 분열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신교냐, 구교냐를 선택할 수 있게 되었으며, 다시 신교는 독일 루터란이냐, 프랑스 위그노냐, 영국 성공회냐, 화란 개혁주의냐, 스코틀랜드 장로교냐, 재침례교냐, 그냥 침례교냐, 퀘이커냐...등을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한 채 사람들은 보다 자유로운 선택권을 추구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대륙으로의 이주를 촉발시켰다.
때문에 미국은 처음부터 자유의 나라였으며, 그리하여 선택의 나라였다. 수정헌법 1조는 미국이 국교를 인정하지 않는 나라임을 명시하고 있다. 미국에서 모든 교단이나 교파들은 철저한 자유 경쟁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사람들은 교회나 교단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유는 점점 더 강화되고 확대되었다. 유럽의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신앙의 자유’는 ‘양심의 자유,’ 혹은 ‘사상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었다. 자유권은 하늘이 부여한 인권 중 가장 중요한 권리로 정당화되었다. 유럽으로부터의 독립을 쟁취한 신생국가 미국은 새로운 하나님, 곧 ‘자유의 여신’을 숭배하기에 이른다.
자유권, 곧 자유로운 선택권은 19-20세기를 지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이것은 대중의 지위 향상과 관계가 있다. 19-20세기에 시민권의 확대를 위한 지속적인 투쟁이 있었으며, 이와 함께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하였다. 그 결과 모든 사람들은 동등한 참정권, 특히 투표권이 주어졌다. 그래서 이제 대중은 ‘표밭’이 되었다. 대중에게 권력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그 뿐 아니라, 자본주의의 발전은 또한 각 개인을 ‘소비주체’로 승격시켰다. 사람들이 모인다는 것은 곧 돈이 모인다는 것을 뜻하게 되었다. 이제 숫자는 힘이 되었다. 강력한 힘을 소유하게 된 대중은 모든 영역에서 자신의 ‘숫자의 힘’을 주장하게 되었다. 대중은 여론으로 세상을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대중 독재가 출현한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교회라고 예외가 아니다. 대중은 교회의 최고 고객이 되었다.
악순환은 계속되었다. 교회의 분열이 자유를 확대했고, 자유의 확대는 다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촉진시켰다. 마음에 안 맞으면 그냥 갈라서 버렸다. 교회의 분열은 분파주의와 이단의 폭발을 초래했다. 19세기를 지나면서 신종 이단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밀러라이트, 몰몬교, 안식교, 크리스천 사이언스, 여호와 증인 등.. 피터 버거의 말대로 바야흐로 ‘이단의 시대’다. 하지만 누가 이들을 막을쏘냐? 무슨 권리로 신앙의 자유권을 제한할 수 있을 것인가?
이 같은 현상은 미국만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나라도 해방 이후 6.25를 전후하여 교회를 가르는 붐이 일어났다. 조금만 의견불일치가 생기면 그냥 찢어버렸다. 신사참배 문제로 장로교에서 고신파가 떨어져 나갔다. WCC 가입 문제로 통합과 합동이 나뉘고, 합동은 다시 교단의 전횡에 반대하여 개혁교단이 떨어져나갔다. 자유주의 신학의 문제로 기독교 장로회가 예수교 장로회로부터 또 떨어져 나갔다. ‘예수’와 ‘그리스도’가 갈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유행이 되었다. 감리교도 기감과 예감이, 성결교도 기성과 예성이 갈라졌고, 침례교는 이단 때문이기는 하지만 역시 기침에서 예침이 떨어져 나왔다. 순복음 교회도 갈라졌다. 교회 분리는 이단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황국주, 박태선, 문선명, 나운몽 등에 의해 수많은 이단들이 만들어졌으며, 이것은 지금도 구원파, 안산홍, 신천지 등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이러한 교회의 분리가 교회의 성장을 낳았다는 것이다. 교회가 갈라지면 맨 먼저 신학교를 세우고, 목회자들을 양산하여 내보내면, 목회자들은 목숨을 걸고 교회를 세우고 사역을 하니 교회가 성장할 밖에.. 1960-70년대 유래가 없는 엄청난 한국 교회의 부흥은 그리스도의 몸을 갈가리 찢어 얻은 댓가였다.
그러나 교회의 핵분열로 말미암는 신학교의 난립과 목회자의 대량양산은 점차 교단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것은 교단이 개교회에 일일이 책임 있는 지원을 해주지 못하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고, 또 교단 하나를 갈라 세우는 것이 밥 먹는 것만큼이나 쉬우니 그만큼 교단의 치리 권능이 약화된 것과도 연관이 있으며, 교회들이 점점 더 치열한 생존 경쟁을 겪게 된 것과도 연관이 있다. 완벽한 시장 상황이 조성된 것이다. 교단의 영향력이 약화되자, 이제 교회는 순전히 시장 상황 한 복판에 ‘개교회’로 내동댕이쳐지게 된다. 이것이 오늘날의 ‘개교회주의’의 모습이다. 바야흐로 교회의 무한분열의 종착점에 도달한 것이다.
교회의 이러한 무한분열은 고객에게 그만큼 넓은 선택의 폭을 제공하게 되었다. 교단이나 교파, 신학이나 전통은 아무래도 좋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의 자유인가? 이 얼마나 풍성한 선택의 기회인가? 사실 이러한 선택의 폭은 기독교 안에서만 국한되지 않고 전 종교에게로 확장되고 있다. 모든 교회와 교파, 그리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종교 시장에 자신들의 특성화된 상품을 내밀며 고객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시장 상황은 신학이나 전통은 부차적인 것이 되게 만든다. 가장 중요한 것은 판매와 구매다! 신교나 구교, 그리고 종교를 막론하고, 모든 사상과 종교는 이러한 시장 상황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믿는다는 것은 마치 백화점에서 상품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한 것이라고 다들 생각하게 되었다. 이와 함께 교회의 메시지도 심각하게 변화하게 되었다. 오르띠즈 목사의 말에 의하면, 현대 교회는 “나를 따르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을 “예수님을 믿어보지 않으시겠어요?”라는 호객 행위로 뒤바꾸어 놓았다고 한다.
이러한 변질된 메시지는 성서나 초대교회의 메시지와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초대교회는 믿고 싶다고 해도 절대로 아무나 받아들이지 않았다. 엄격한 심사와 기나긴 예비자 교육을 통과하지 않고서 신자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천박한 복음주의는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며 면죄부를 남발하고 있다. 천박한 복음주의에서 구원은 자동으로 전제되게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구도자의 선택 뿐이란다. 고객의 선택은 곧 구원 자체란다. 맙소사! 현대 교회에서 더 이상 그리스도는 왕이 아니다. 고객이 왕이다. 현대의 구도자는 물에 빠져 ‘살려달라’ 절규하는 자가 아니라, 거드름을 피우며 백화점에 진열된 상품들을 구경하는 쇼핑객이며 구매자다.
2) 기업의 출현
고객의 탄생과 동시에 기업이 출현했다. 오늘날 교회는 고객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기업이다. 교회는 지난 수 세기 동안 스스로를 상품판매자로 변신시켜 왔다. 메가 처치는 교회가 자신을 기업, 곧 상품판매자로 변신시킨 결과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변신은 무죄!’라고. 어찌하여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은 교회의 이 기묘한 변신을 ‘무죄’라고 판결하는가?
교회는 언제부터 기업이 되기 시작했을까? 교회가 기업이 되기 시작한 시점은 교회들이 경쟁하면서부터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은 역시 교회의 분리로부터 시작하였다. 정리하면, 교회가 갈라지자 경쟁하게 되고, 경쟁이 시장상황을 만들어 낸 것이다. 시장의 관점에서 볼 때, 16세기 종교 개혁은 가톨릭의 시장 독점권을 박탈한 효과를 발생시켰다. 신교 진영와 구교 진영 간의 길고 지루한 전쟁 끝에 양측은 서로의 종교 시장을 넘보지 않기로 하는 베스트팔리아 조약을 맺는다. 이제 유럽은 신교 진영과 구교 진영으로 반토막 났다. 그리고 신교 진영은 다시 여러 조각으로 갈라졌다. 대단히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를 전후로 가톨릭 진영이 해외 선교에 열을 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다. 무엇 때문이었을까? 가톨릭 내부의 종교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끈 예수회의 공헌이라는 평가도 있지만, 시장의 관점에서 보면 가톨릭 교회는 유럽에서 잃어버린 시장을 개신교가 미처 눈을 돌리지 못하고 있던 미개척지인 해외시장에서 되찾고자 했던 것이다. 바야흐로 시장 질서가 수립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시장 상황은 북미의 신대륙에서 처음으로 본격적인 시작을 알려왔다. 메이 플라워호가 뉴잉글랜드 플리머스항에 도착하기 전후로 유럽의 수많은 교회들이 신대륙으로 넘어오고 있었다. 뉴암스테르담의 화란개혁교회, 델라웨어의 스웨덴 루터교, 롱 아일랜드와 뉴저지의 스코틀랜드 장로교, 버지니아지역의 성공회, 퀘벡지역의 가톨릭, 펜실베니아의 독일 경건주의 등등.. 초기에는 그런대로 각 교회, 교파 간의 지역주의(localism)가 잘 지켜지는 편이었다. 하지만 두 번의 부흥운동, 독립전쟁의 혼란, 도시화, 서부 개척 등의 요인으로 지역주의는 서서히 무너져갔다. 이는 국교가 없는 미국에서 모든 교회, 교파는 처음부터 자유 경쟁으로 자신들의 교세를 불려 나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계속되는 거대한 이민의 물결은 고객의 증가와 시장의 확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 시기를 전후로 발생한 복음주의는 한편으로는 영혼을 향한 순수한 사랑으로 촉발된 것이지만, 동시에 여러 교파들이 경쟁하는 상황에서 자신들 교세의 확대를 도모하고자 하는 동기에 의해서도 불꽃이 지펴졌다고 할 수 있다. 한 마디로 교회는 ‘고객’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교회사에서 북미 신대륙의 독특한 점은 그 땅이 처음부터 선교적 상황이었다는 것이다. 1,000년 가까이 국가교회를 통해서 유아세례를 시행해 왔던 유럽에서는 나면서부터 전부 크리스천이었기 때문에 선교나 복음 전도가 원칙적으로 성립할 수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달랐다. ‘미국은 청교도들이 세운 기독교 국가다’는 식의 낭만화된 건국 신화가 있기는 하지만 사실 미국은 성인(成人)들에게도 복음을 전하고 세례/침례를 베풀어야 하는 선교적 상황의 국가였다. 그리고 이러한 선교적 상황은 여러 교회와 교파에게 큰 기회를 주었다. 그 기화란 곧 교세 확장과 발전의 기회였던 것이다. 다른 말로 미국은 선교 각축장이었다. 이러한 선교의 경쟁적 상황이 미국 특유의 실용주의와 결합되며 점차 교회는 ‘보다 효과적인 선교’에 대해서 눈을 뜨게 된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알미니안주의 신학의 산물이라는 통설과는 다르게, 칼빈주의나 알미니우스주의, 신교나 구교를 막론하고 예외 없이 모든 미국 교회와 종교의 공통된 관심사라고 할 수 있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은 칼빈주의자인 죠지 휫필드의 노천 캠프 집회와 자유 설교의 전통으로부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알미니우스주의자인 찰스 피니의 ‘새로운 방법’으로 큰 발전을 이루게 되는데, 피니의 이러한 방법론은 19세기 이후 교단과 교파, 신구교를 막론하고 모든 교회에서 표준적인 것으로 수용되어졌다. 찰스 피니 이후 19세기 말의 D. L. 무디, 20세기 초의 빌리 선데이, 그리고 20세기 중후반의 빌리 그래함, 21세기 릭 워렌, 빌 하이벨스 등은 이러한 효과적 선교와 전도의 새로운 방법에 대한 헌신자들의 계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주의적 전통과 방법론은 오늘날 미국제 복음주의의 선교를 통해 전 세계 모든 교회로 퍼져나갔다.
효과적 선교에 대한 관심으로 고안되기 시작한 복음전도의 방법론은 교회를 급속도로 기업화시켰다. 복음주의자들의 효과에 대한 관심과 기업가들의 수익에 대한 관심은 점차 비슷한 것이 되어 갔다. 이미 1차 대각성 운동 때부터 거인주의, 곧 스타 시스템이 교회에 도입이 되었으며, 이 방법은 지금도 메가 처치의 가장 효과적인 교회 성장의 방법이다. 또 이 스타 시스템은 메가 처치라는 대기업(?)에 취업을 원하는 수많은 목회지망생들에게 지속적으로 허황된 야망을 부추기는 본보기로 자리 잡고 있다.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자본주의의 소비자 중심주의, 고객만족의 원칙을 충실히 받아들여 갖가지 신앙 상품들을 개발하여 고객들을 유혹하고 있다. 물론 이 상품들은 그 컨텐츠가 얼마나 성서적이고 복음적인지 모른다. 다만 문제는 그것이 상품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매일 매일 만들어 내고 있는 기발한 신앙 상품들을 보고 있노라면 기가 막힐 지경이다. 메가 처치는 그야말로 신앙 상품들로 즐비한 대형 할인마트다. 메가 처치의 성장 방법이나 경영 기법, 마케팅 기술, 선전 테크놀로지 등은 아무리 보아도 세속 기업과 다를 바가 별로 없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것은 이런 메가 처치가 소위 ‘건강한 교회’의 모델과 표준으로 알려지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메가 처치는 교회가 기업화된 최종적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3) 자본과 시장의 논리
시장 상황 속에서 교회는 점점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하게 된다. 교회가 자본과 시장의 논리에 지배를 받고 있는 몇 가지 징후들만 살펴보자. 자본주의는 자본이 형성되지 않으면 생겨날 수 없는 경제시스템이다. 자본은 큰 돈(big money)이다. 쌓이지 않는 돈은 자본이 아니다. 돈이 계속 쌓여 일정량을 넘기면 자본이 된다. 바로 이 초기 자본이 자본주의 경제 시스템을 움직일 수 있게 했다. 역사를 살펴보면, 18세기까지 유럽에 거대한 자본이 축적하기 되었는데, 이렇게 잔뜩 축적된 자본이 산업혁명이라는 불꽃과 함께 웅장한 폭발음을 울리며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기관차의 엔진을 가동시키기 시작했다. 이것이 자본주의의 기원이다.
축적된 초기 자본은 18세기 자본주의가 발생한 시점에만 중요한 것이 아니다. 자본주의 경제 질서 안에 들어오기를 원하는 모든 판매자와 기업에게도 초기 자본은 중요한 것이 되었다. 예를 들어, 음식 솜씨만 좋다고 식당을 하는 시대는 지났다. 목 좋은 곳에 점포를 임대하고, 인테리어를 하고, 홍보를 할 정도의 최소한의 초기 자본이 없으면 장사를 할 수가 없다. 아이템만으로 사업을 할 수 없다는 말이다. 반드시 초기 자본이 있어야 한다. 흥미롭게도 교회도 똑같은 원리에 지배를 받는다. 교회도 아이템과 자본, 두 가지가 다 있어야 한다.
흔히들 요즘은 교회 개척이 잘 안 되는 시기라고 한다. 왜 그럴까? 그 실상인즉 목사가 하나님을 향한 사랑, 말씀에 대한 열정, 영혼을 향한 사랑, 인품과 도덕적 자질이 아무리 훌륭해도 종교 시장 진입에 필요한 초기 투자 비용을 지불할 능력이 없으면 아예 교회 시장에서 도태되어 버리고 말기 때문이 아닌가? 같은 맛이라면 인테리어가 잘 된 식당을 찾는 것이 고객의 취향이듯, 오늘날 교회 고객들은 겉모양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교회는 아예 얼씬도 하지 않는 취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어느 개인이나 어느 교회를 탓할 일이 아니다. 그저 현실일 뿐이다. 그래서 최소한 100명 정도의 교인(특히 직업이 번듯한 어른 성도는 필수), 예배당을 세 얻을 수 있을 정도의 재정, 십자가나 의자, 강대상 같은 가구 및 집기, 씬디싸이저나 피아노, 드럼 같은 악기, 주일학교, 중고등부, 청년부, 성가대와 같은 기본적인 조직, 전도 및 양육 프로그램, 거기에 더하여 설교가 괜찮은 목사 등의 기본 아이템이 갖추어져야만 그 교회는 시장 상황에서 생존할 수가 있게 된 것이 현실이다.
하지만 일단 이런 식으로 개척을 하게 되면 교회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의 논리를 따르지 않을 수가 없다. 자본주의의 특징 중 하나는 ‘지속적인 성장’이다. 이상하게도 자본주의는 멈추어 서 있을 수 없다. 꼭 자전거 같다. 그래서 앞으로 전진하든 아니면 넘어지든 둘 중 하나다. 자본의 힘으로 시작한 교회도 이와 마찬가지다. 계속 페달을 밟아야만 굴러간다. 어느 교회 목사가 한 말이다. “자고로 성도를 굴려야 교회가 잘 되는 법이여.” 그렇다. 목사는 끊임없이 일을 벌여서, 성도들을 굴려야 한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조직의 간단한 생리일 뿐이다. 끊임없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교인들을 적당히 동력화시켜 주어야 조직에 활력이 생긴다는 것은 경영 리더십의 기초 중 기초다. 그냥 가만히 놔두면 교인들은 ‘안식’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침체’해 버린다. 이것이 시장질서 안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피곤한 교회다. 교회력에 따른 절기뿐만 아니라 정기 심령 부흥회, 사경회, 총동원 전도주일, 바자회, 선교여행, 체육대회, 야유회, 특별새벽기도회 등이 끊임없이 계획되고 시행되어야 하니 말이다. 물론 이 모든 행사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사업이라는 이름으로 시행되어야 할 것이다.
특히 ‘성전(?) 건축’이라는 기묘한 이름의 프로젝트는 대단히 중요하다. 왜냐하면 점점 커져가는 예배당은 교회 성장의 가시적인 징표요, 하나님 나라 건설에 대한 훌륭한 은유이기 때문이다. 사실 성전건축 프로젝트는 개별 성도들의 여러 잡다한 요구와 불만들을 싸그리 청소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공통의 목표의식을 설정할 수 있다. 또 눈물겨운 헌신의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으며, 하나님의 사업에 현실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제시할 수 있는 대단히 훌륭한 전략이다. 무엇보다 근사한 건물과 인테리어는 새신자 전도(?)에도 큰 도움이 된다. 더불어 근사하고 쾌적한 공간과 감각적 인테리어, 최신식 장비까지 누릴 수 있으니 얼마나 금상첨환가! 요즘 목회자들은 예수님보다 능력이 많은 모양이다. 예수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그토록 어렵게 허무신 성전을 단 돈 몇 푼으로 간단히 다시 세워버리니 말이다. 그것도 예루살렘에 한 채가 아니라, 수 백, 수 천 채의 성전이라니..
이른바 총동원 전도주일이라는 교회 성장 전략은 백화점 정기 바겐세일을 닮았다. 날짜가 정해지면, 그 다음은 교회 전체의 목표 인원수를 정하고, 교구별, 구역별, 개인별 목표 인원이 할당된다. 각 개인은 나눠준 용지에 후보자인 VIP명단을 기입하고 전도주일 당일까지 새벽마다 기도하며, 온갖 선물공세, 전화공세, 식사공세, 심지어 현금공세까지 제공하며 예배당으로 끌어 댕기는 행사를 소위 총동원 전도주일이라고 한다. 물론 전도주일 당일이 되면 교회는 축제의 날이다. 화려한 장식에 적당히 들뜬 분위기, 초특급 강사, 연예인 초청, 각종 영상과 특별 프로그램, CCM 가수, 파워풀한 복음 설교, 거기에 경품까지! 이것은 보험 세일즈나 백화점 바겐세일, 신천지 등 이단의 전도수법이 훌륭하게 버무려져 있는 퓨전 스타일의 복음주의다. 교회는 이처럼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사람들을 동원하는 수법을 가리켜 ‘영혼 구령’이니 ‘지상 명령에 대한 순종’이니 ‘이웃에 대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이런 저런 변명으로 합리화하려고 해도, 영낙 없이 기업의 판매촉진 수법과 닮았으니 이 일을 어쩌랴!
정리하면 이렇다. 교회의 분리가 경쟁 구도를 만들었고, 경쟁 구도가 시장 상황을 초래했다. 물론 이러한 교회의 시장 상황은 대중의 출현, 도시화, 테크놀로지의 발전, 시장 자본주의의 탄생과 같이 때맞춰 조성된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들과 결합되어 더욱 큰 진전을 이루게 되었다. 문제는 교회가 이러한 사회적 환경에 대안적 공동체로 존재한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고 말았다는 것이다. 교회는 마치 후천적으로 면역 결핍증에 걸린 AIDS 환자처럼 외부 환경의 독소들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그 과정에서 점차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시장 상황에서 구도자들은 고객으로 변신했으며, 교회는 기업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러한 탈선의 종착역은 교회의 무한분열, 완전한 시장 상황의 도래, 자본주의 질서의 정착 등이다. 메가 처치는 교회의 이 탈선이 맺은 풍성한 열매다.
메가처치 논박(Against Mega Church)02-A: 메가처치 형성의 사회적 조건
by 신광은, 박삼종
메가 처치는 문화적 교회다. 문화적 교회라고 해서 문화가 꽃피는 교회라는 뜻이 아니다. 세상 문화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라는 뜻이다. 교회가 수용한 세상 문화란 무엇인가? 메가 처치는 우선적으로 근대 문화(modern culture)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교회이다. 특히 메가 처치는 근대 자본주의와 테크놀로지의 적극적 수용을 통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아울러 메가 처치는 포스트모더니티 역시 과감하게 수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 메가 처치는 '카니발'이나 '바보제'와 같은 '축제로서의 예배 기능'을 적극 개발하고 또 활용하고 있다. 이처럼 메가 처치 현상은 사회문화적 조류와 흐름을 교회가 적극 수용함으로써 생겨난 교회다.
메가 처치가 문화적 교회요, 메가 처치 현상이 세속적인 조류와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왜냐? 그것은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한 통속적 견해를 비판적으로 검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은 메가 처치를 가리켜 '성령께서 강력하게 역사한 결과'요, '하나님께서 넘치는 축복을 부으신 결과'라고 한다. 그러나 메가 처치는 성령님의 역사나 하나님의 축복의 결과이기 앞서 교회가 세상의 흐름과 세속적 조류를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생겨나게 된 결과이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태생적으로 세속적인 교회다.
1) 대중의 출현
그렇다면 교회가 받아 들인 세속적 흐름이란 어떤 것들이 있는가? 첫 번째는 '대중(mass)'의 출현이다. 오르테가 가제트에 의하면 대략 19세기 경에 갑작스럽게 대중이 출현했다고 한다. 1800년대까지 유럽 인구는 1억 8천만명을 넘은 적이 없다. 그런데 1800년부터 1차대전까지 유럽 인구는 갑작스럽게 4억 6천 만명으로 성장한다. 거의 3배나 증가한 셈이다. 전 세계 인구는 1800년까지 6억을 넘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00년 사이 세계 인구는 16억으로 성장하고, 다시 100년이 지나면서 60억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급속한 인구 증가가 만들어 낸 한 가지 중요한 현상은 '양'과 '수'로 승부하는 거대한 무리들, 곧 '대중(mass)'이 출현했다는 사실이다.
대중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더 이상 텅 빈 자리는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곳곳마다 사람들로 그득하다. 시각적인 거대한 무리, 몹(mob)이 온 세상 구석구석을 가득 채우게 되었다. 여기 저기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거리에도 사람들이 가득하고, 기차 역이나 오페라 홀, 식당, 백화점, 공원 등에 사람들이 넘쳐 나기 시작했다. 마치 대접에 물이 넘치듯 모든 곳은 갑자기 대중들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대중의 위력, 곧 '숫자'가 위력을 발휘하게 된 것이다.
대중은 자신들의 무기인 '숫자'로 자신들의 생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기 시작했다. 예컨대, 1820년대 파리에서 욕실 딸린 주택은 단 10채 밖에 안 되었지만 대중은 주장하기를, 모두가 이런 주택을 소유할 권리를 누려야 한다고 했다. 모두가 소비하고, 소유하고,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를 막는 어떠한 제한이나 장벽도 용납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 이전까지 모든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생(生)의 제한(limitation)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으나 대중은 이를 거부했다. 생의 제한은 급속하게 제거되었으며, 무한대의 소비, 소유, 향유의 욕망이 화산처럼 폭발했다. 그리고 이러한 대중의 권리 주장으로 말미암아 근대 세계의 '거대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대중의 분출하는 욕망 덕분에 모든 것이 커졌다. 백화점, 식당, 극장, 역, 공원 등.. 이 모든 것은 '똑같이 누리는 권리'를 가진 대중들을 위해 커지지 않으면 안 된다. 자신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대중을 위해서 백화점도 커지고, 극장도 커졌으며, 상품은 대량생산되었고, 도시는 폭발했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감히 대중의 요구를 내 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교회도 바로 이 대중을 받아들여, 커켰다. 이것이 메가처치다. 따라서 메가 처치는 대중 교회(mass church)다.
2) 도시화
두번째로 지적할 것은 도시화(urbanization)다. 과거에도 도시는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전혀 새로운 도시가 나타났다. 이것을 근대 도시라고 한다. 근대 도시의 가장 큰 특징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는 거대한 규모다. 18세기 말, 19세기 초,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것은 주로 산업화와 함께 일어난 현상이다. 그러자 도시가 팽창하기 시작했다. 이 팽창이 너무도 갑작스러워 이를 '도시 폭발(urban sprawl)'이라고 부른다. 과거의 도시와는 다르게 근대 도시는 성곽과 같이 도시의 크기를 제한하는 경계선이 없다. 도시는 무한히 확장가능한 공간이 되었다. 인구 1천만명 이상이 사는 초거대도시, 메트로폴리스가 출현하는가 싶더니 이제는 메트로폴리스끼리 결합되는 메가로폴리스 시대가 도래했다. 이처럼 도시는 끊임없이 팽창하고 있으며, 사람들은 계속해서 도시로 몰려오고 있다. 이것이 근대 도시의 특징이다.
근대 도시의 또 한 가지 특징은 도시가 사람들이 사는 일반적인 공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18세기까지 도시란 극히 예외적인 공간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도시지역에 살았다. 1800년대 이전까지 전 세계의 도시 인구는 10%를 넘지 않았다. 우리나라의 경우 19세기 말, 5만명 이상의 도시는 서울과 부산, 단 2곳 뿐이었으며, 대부분의 도시는 1만명을 넘지 않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전 세계 인구가 도시로 집중하기 시작했다. 현재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으며, 선진국을 비롯 우리나라의 경우 도시 인구는 80%에 육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앞으로 이와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될 것이어서 종내에 전 세계 모든 인구는 도시에만 살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사실 이미 오늘날 농촌은 자급 능력을 상실했으며, 식량 공장으로 도시에 편입된 지 오래다. 그렇다면 이미 사람이 사는 모든 곳은 도시로 뒤덮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메가 처치는 바로 이 근대 도시에 세워진 교회다. 도시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 현상은 근대 도시가 만들어 낸 현상이다. 메가 처치는 근대 도시의 여러 특성들을 적극 수용했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완벽하게 도시에 적응된 교회다. 그리고 더 나아가 메가 처치는 그 자체가 하나의 작은 도시다. 모든 메가 처치는 자기만의 작은 도시를 꿈꾼다. 메가 처치의 모든 조직, 구조, 활동은 도시의 축소판이다. 그래서 메가 처치는 도시성(cityness)으로 충만하다. 도회적인 흥분, 자극, 세련미, 추상성 등이 메가 처치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고? 아니다. 초대교회도 도시에 있었으나 그들은 철저히 반도시적이었다. 어쨌든 메가 처치는 도시성을 적극 수용한 도시 교회(city church)다.
3) 테크놀로지
세 번째로 주목할 것은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다. 테크놀로지가 없다면 메가 처치도 없다. 메가 처치는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가 없는 교회인데, 이는 성장의 한계를 돌파할 수 있도록 하는 가공할 만한 테크놀로지의 발달 덕분이다. 가령 교통의 발전이 이동의 자유를 보장해 주었고, 이동의 자유가 성장의 한계를 넘어서게 한다. 서울 모 교회 장로님은 제주도에 사시는데 매 주 비행기로 예배에 출석한다고 한다. 물론 이것은 극단적인 케이스이긴 하지만 대부분의 메가 처치 교인들도 교회버스, 승용차, 대중 교통을 이용하여 교회가 어느 곳에 있든지 자유롭게 이동하여 교회에 출석할 수 있다. 메가 처치는 마음껏 이동의 자유를 즐기는 점퍼(jumper)들의 교회다.
목사의 설교를 어느 곳으로나 전송할 수 있는 전자 테크놀로지의 발전도 빼놓을 수 없는 요인이다. 목사는 더 이상 멀리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설교를 듣게 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높일 필요가 없다. 마이크를 쓰면 되고, 소리가 작으면 볼륨만 조금 키우면 된다. 너무 멀어져서 목사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면 TV화면을 통해서 목사의 얼굴을 소리와 함께 전송하면 된다. 메가 처치의 상징처럼 되어 버린 초대형 스크린은 목사의 얼굴을 얼마든 크게 키울 수 있다. 그래서 수 만명이 운집하는 돔형 실내 체육관에서도 천정에 매달린 4면 대형 스크린으로 얼마든지 목사의 얼굴을 볼 수 있게 한다. 뿐만 아니라 전자 테크놀로지는 메가 처치를 본당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 메가 처치는 본당을 넘어선 교회다. 부속실로 전자 신호를 송출하여 본당 밖에서도 얼마든지 예배를 드릴 수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위성 송출을 통해서 전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동시에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다. 더 나아가 집에서 편안히 클릭 한 번으로 인터넷 화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교회의 전자결제 계좌로 헌금을 송금하는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쯤 되면 메가 처치의 외곽 경계선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메가 처치는 규모 때문에 불가피하게 테크놀로지를 필요로 한다. 규모가 작으면 테크놀로지에 대한 의존도가 낮지만 규모가 커질 수록 테크놀로지 의존도는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메가 처치는 테크놀로지 의존적인 교회다. 부속실에서 TV화면으로 예배를 보는데, 갑자기 음향시스템이 문제가 생겨서 소리는 안 들리고, 그림만 보이는 경우를 생각해 보라. 이런 경우 예배는 엉망이 되고 제대로 드려질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메가 처치가 얼마나 테크놀로지에 의존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한 가지 예이다. 그러니 메가 처치는 실상 테크노 처치(techno church)인 셈이다.
테크놀로지란 단순히 기계장치나 장비가 아니다. 테크놀로지란 자크 엘룰(Jacques Ellul)에 의하면 '목표하는 바를 가장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게 하는 방법들의 총화'다. 이런 점에서 테크놀로지는 정신의 문제요, 태도의 문제며, 나아가 그 자체가 하나의 영성(spirituality)이다. 메가 처치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부분의 프로그램은 전부 테크놀로지다. 행정기술, 조직기술, 경영기술 등 무진장한 테크놀로지가 교회를 유지, 관리, 성장시키고 있다.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선전(propaganda) 테크놀로지다. 세속적인 광고 기법, 심리학적 발견, 통계조사 방법 등을 도입한 설교, 교육, 예배는 테크놀로지의 위대한 개가다. 테크놀로지를 소유한 메가 처치는 마음 먹은 대로 사람들을 감동시키고, 울거나 웃게 할 수 있다. 초단위, 분단위로 계획된 큐시트로 콘트롤 되는 메가 처치의 예배는 원하는 시점에, 목표하는 만큼 청중들에게 은혜를 끼칠 수도 있게 되었다. 아마 마음만 먹으면 원하는 시점에 78%의 청중을 울게 만들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테크놀로지의 능력을 성령의 능력이라고 착각한다. 메가 처치 안에는 테크놀로지의 영이 운행하고 있다. 참으로 메가 처치는 테크노 처치다.
4) 시장 경제의 출현
메가 처치의 출현이 가능하기 위한 가장 결정적인 요인 중 하나는 자본주의가 출현한 것이다. 자본주의는 18-19세기에 서양에서 출현한 매우 특이한 경제 시스템이다. 자본주의의 여러 특징이 있겠지만 본 논의와 연관해서는 자본주의가 시장 경제 시스템이라는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 시장 경제의 원리는 단순하다. 판매자가 상품을 시장에 내다팔면 소비자가 시장에서 돈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 이것이 시장 경제의 원리다. 사실 이것은 그다지 새로운 원리가 아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이렇게 물건을 시장에 내다 팔고, 사고 하는 시장은 어디에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이후에 출현한 시장(market)은 독립적이고, 자율적이라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시장이다.
시장 경제란 바로 이 자본과 시장의 자율성을 신뢰하는 경제 시스템이다. 과거의 자본과 시장은 독립적일 수가 없었다. 과거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와 같은 수없이 많은 외부 세력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간섭과 제재를 받아왔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자본과 시장은 전적으로 자율적인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그래서 시장의 질서는 왕이나 국가가 아니라 시장 자체가 스스로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믿어졌다. 시장에 맡겨 두면 시장이 알아서 질서를 세우고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시장에는 여러 판매자가 물건을 내다 팔고, 또 여러 소비자가 물건을 사려고 할 것인데, 이들의 판매 경쟁과 소비 경쟁이 저절로 합리적인 가격조정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국가가 개입하지 않고 방임해 둔다면 시장은 판매와 소비, 공급과 수요가 맞물려서 알아서 잘 굴러갈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가 이것이 보이지 않는 신의 손이 개입한 것이라는 믿음이 19세기에 출현한 시장의 특징이다. 이 시장 경제의 원리가 자본주의 시스템을 가동시키는 중요한 원리다.
놀랍게도 메가 처치는 이 시장의 원리를 그대로 받아들였다. 메가 처치는 시장 상황(market situation)에서만 세워질 수 있다. 시장 상황이 도래했다. 오늘날 교회는 시장에 내몰리고 있다. 그리고 교회와 신자들은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도록, 그리고 그 신앙을 구매하도록 설득당하고 있다. 그래서 마치 여러 판매자들이 상품을 시장에 내다 놓으면, 소비자들이 쇼윈도우 안의 상품을 원하는 가격에 구매하듯이, 교회도 똑같은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을 판매하고 또 구매하고 있다. 심지어는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찾아 이 채널 저 채널 재빨리 이동하는 채널 하퍼(channel hopper)처럼 손쉽게 기독교 시장에서 구매 상품인 교회를 옮기는 처치 하퍼(church hopper)족들이 등장하게 된다. 이것은 과거에는 도무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과거에는 일부를 제외하고는 교회가 신자를 선택했지, 신자가 교회를 선택하는 일은 있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신자는 시장에 나와 있는 여러 교회들 중 자신이 원하는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다. 메가 처치는 시장에서 판매 경쟁에 성공한 교회며, 소형 교회는 판매 실적이 부진한 교회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교회가 크든 작든 모든 교회는 종교 시장에 자리잡고 있으며, 자유경쟁 시장의 원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큰 교회나 작은 교회나 결국 동일한 원리에 의해서 움직여 지고 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 모든 교회는 마켓 처치(market church)다. 이에 대해서 좀 더 자세히 알아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