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가 처치 논박

Against Mega Church

by 신광은, 박삼종


1. 들어가는 말


 

아, 

메가 처치(Mega Church)..


오늘날 교회의 문제들을 지적하는 많은 선지자들(?)이 있다. 하지만 메가 처치를 문제 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다들 이렇게 말한다. 메가 처치가 문제가 아니라, 목사들의 인간적인 야망과 욕심이 문제라는 것이다. 성도들이 말씀대로 살지 못해서 문제라는 것이다. 교회가 바알주의, 맘몬주의, 성장주의, 영웅주의, 세속주의, 엘리트주의 어쩌고 저쩌고, 기타 등등, 이런 것들에 물들어서 문제지 메가 처치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들은 말한다. 교회의 크고, 작음은 중요하지 않다고. 도리어 교회가 크면 복음 전파나 사회 사업 등에서 힘 있고 효과적으로 사역을 할 수 있는 장점도 많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리고 또 말한다. 물론 교회가 커지다보면 몇 가지 문제점들이 생기긴 한다. 하지만 그래도 교회의 규모 자체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메가 처치 현상은 그리 간단히 말할 수 있는 현상이 아니다. 이 현상은 교회의 무능력, 부패와 타락과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메가 처치가 현대 기독교의 모든 잘못의 원인이라는 말은 아니다. 하지만 메가 처치 현상은 오늘날 교회와 기독교의 세속주의, 부패, 타락 등의 모든 문제 한 복판에 존재하고 있다. 교회의 무능력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메가 처치 현상이 생겼으며, 다시 메가 처치는 그러한 교회의 무능력과 부패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다. 분명히 메가 처치는 교회의 침체 과정에서 중요한 고리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그토록 신랄하게 문제를 제기하면서도 메가 처치에 대해서만큼은 조용하다. 참으로 이상하다. 그러니 교회 개혁이니 갱신이니 말들은 무성하지만 정작 가장 심각하고 본질적인 문제는 간과한 체 변죽만 울리고 있다.


메가 처치 현상은 현대 교회에 주어진 도전이요, 과제다. 각 시대마다 주어진 신학적, 신앙적 과제들이 있다. 가령 사도시대에는 유대주의의 도전이 있었고, 1-3세기에는 영지주의와 여러 이단들의 도전이 있었으며, 또 로마 제국의 핍박이라는 도전이 있었다. 4세기 이후의 교회는 콘스탄틴주의의 도전을 받았으며, 16세기에는 교회의 타락과 맞서 싸워야 했고, 19세기에는 현대주의라는 도전이 있었다. 또 20세기 중반부터는 탈현대주의라는 이름의 도전과 맞서 교회는 분투하고 있다. 이처럼 각 시대마다 도전과 과제가 다른데, 21세기 초두의 한국 교회에게 주어진 과제는 다름 아닌 메가 처치 현상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교회의 싸이즈, 곧 규모의 문제에 대한 성서적, 신학적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


메가 처치라는 새로운 현상


메가 처치에 대해서 논하기 전에 먼저 분명히 해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메가 처치가 2000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이다. 물론 전에도 상당한 규모의 중대형 교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는 이런 종류의 메가 처치는 존재하지 않았다. 혹 일부 신학자나 목회자가 초대교회나 기타 시대의 교회에서 메가 처치의 전범을 찾으려 하지만 이것은 전적으로 시대착오적인 시도다. 이것은 오늘날의 상식이나 관점, 생각을 옛날에다 뒤집어 씌워서 바라보는 행태다. 메가 처치 현상은 드물게나마 역사상 존재해 왔던 현상이 아니라 20세기에 나타나기 시작한 전적으로 새로운 현상이라는 사실을 알 필요가 있다. 메가 처치는 전혀 새로운 교회다. 그렇다면 도대체 뭐가 새롭다는 것인가?


과거의 교회와 20세기 이후의 메가 처치의 가장 큰 차이점은 ‘성장의 한계(Growth Limitation)’의 문제다. 과거의 교회는 아무리 성장해도 어쩔 수 없는 ‘성장의 한계’가 존재했다. 그리고 이 성장의 한계는 여러 가지 요인들이 함께 작동함으로 정해졌다. 가령 교구의 크기는 교회 성장의 절대적 한계 중 하나였다. 500명이 사는 마을에 세워진 교회는 절대로 500명을 넘지 못했으며, 대도시의 교구의 경우도 교회의 크기는 그 교구의 크기를 넘지 못했다는 말이다. 설령 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하더라도 또 교회의 성장의 한계를 정하는 보다 근본적인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인간의 신체적 능력의 한계였다. 가령 예배당은 목사의 얼굴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거리, 또 설교자의 음성이 도달할 수 있는 거리를 넘기가 어려웠다. 19세기의 기술혁명이 이러한 인간 신체 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게 해 주기까지 메가 처치는 존재할 수 없었다. 이 외에도 기타 여러 가지 요인들이 상호작용함으로써 교회는 어쩔 수 없는 성장의 한계를 안고 있었다.


그러나 20세기 이후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다. 성장의 한계는 사라졌다. 하나의 지역 교회(local church)가 성장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어떠한 한계나 장애물도 이제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이론상이기는 하지만 오늘날 지역 교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우리가 메가 처치 현상이라고 했을 때, 이것은 단순히 수 만 명이 넘는 몇몇 초대형 교회만을 가리켜 하는 말이 아니다. 메가 처치 현상은 보편적이고 일반적인 현상이다. 왜냐? 오늘날 모든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situation) 가운데 있으며, 또 무한한 성장을 가능한 조건(condition)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means)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고 큰 교회, 작은 교회를 막론하고 거의 모든 교회는 무한 성장을 추구하고 있다. 무한 성장을 향한 모든 교회의 추구와 이 거대한 흐름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메가 처치 현상이다.


오늘날 한국의 거의 모든 교회는 ‘무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다 가지고 있다. 우리가 방문했던 우리나라의 수십, 수백 여 개의 교회들 중에서 성장의 한계를 말하는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다. 정말이다! 성장이 잘 안 된다고 말하는 교회는 많았다. 성장해야 한다고 말하는 교회는 더 많았다. 그러나 교회가 어디까지만 성장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하는 교회는 단 한 교회도 없었다. 이 말은 무슨 뜻인가? 모든 교회는 ‘무한한 성장이 가능하다’는 교회성장학적 전제를 다 가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한다. “복음의 능력이라면, 성령의 역사라면, 구령의 충만한 열정이라면, 지역교회는 무한히 성장할 수 있다.” 그래서 심지어 어떤 교회 성장학자들은 교회성장의 한계를 마귀의 역사라고까지 말한다. 이제 성장의 한계는 돌파하고, 극복해야 하는 표적이다. 물론 모든 교회가 노골적으로 무한 성장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저 대부분의 교회들은 성장만 말하고, 성장의 한계는 말하지 않을 따름이다. 그렇지만 교회가 성장은 말하되, 성장의 한계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은 교회가 사실상 무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 우리의 견해다.


성장의 한계를 말하지 않는다면 무한한 성장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것은 한국 교회를 보면 정확히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전 세계 50대 교회 중 23개가 한국에 있다. 세계10대 교회 중 5개가 한국에 있는 교회다. 세계 최대의 교회도 한국에 있고, 세계 최대의 장로교회, 세계 최대의 감리교회도 다 한국에 있는 교회다. 한 교회의 숫자가 대전시 전체 인구의 절반이 되는 교회도 있다. 참으로 이러한 현상은 2000년 기독교 역사에서 한 번도 찾아 볼 수 없는 현상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메가 처치 현상을 오늘날 한국 교회가 당면한 과제로 보는 이유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과제다. 교회성장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교회가 교회의 규모 자체를 신학적으로나 신앙적인 주된 논의 과제로 삼은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 한국교회는 이 일을 해야 한다. 교회의 규모 자체를 중요한 신학적 논의 과제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오늘날 한국 교회가 가장 시급하고도 심각하게 논의하고 토론해야 하는 신학적 주제는 기독론이나 삼위일체론, 구원론이 아니라 교회론이요, 교회론 중에서도 교회의 싸이즈, 곧 규모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현대 교회에서 바로 이 메가 처치 현상만큼 강력하고도 실제적인 문제도 없기 때문이다.


두 얼굴의 밀라노 칙령


여기서 잠깐 AD 313년의 밀라노 칙령을 회상해보자. 밀라노 칙령의 반포는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물론 3세기에 기독교는 로마 제국 전역에 퍼져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어느 마을의 경우는 100%가 복음화었다고 할 정도였다. 로마 귀족과 원로원, 군인, 그리고 심지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가족들 중에서도 상당수가 그리스도인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기독교는 큰 성공을 거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로마 제국에서 기독교의 입지는 볼품없었다. 기독교는 여전히 신앙의 자유가 없었으며, 사회적인 지위도 다른 종교와 비교할 때 보잘 것 없었다. 무엇보다 기독교는 300년 가까이 지속적인 박해를 받아왔다. 네로 황제 때부터 시작된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는 밀라노 칙령이 반포되기 직전까지 계속되었다. 물론 박해가 계속 이어졌던 것도 아니고, 제국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시행된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박해라는 상황으로부터 한 번도 자유로운 적이 없었다. 특히 마지막 박해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는 역사상 전무후무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가장 넓은 지역에 걸쳐, 가장 철저하고, 살벌한 박해가 자행되었다. 이 때문에 밀라노 칙령이 예상치 못했던 일로 여겨졌던 것이다.


마지막 박해였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의 박해는 대략 303년부터 311년까지 약 8년 정도 계속되었다. 303년 한 해 동안 세 가지 기독교 박해 칙령이 반포되었는데, 점차 그 내용이 가혹해졌다. 성서는 불태워지고, 예배당도 파괴되고,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고문을 받거나 사형에 처해졌다. 수많은 순교자들이 나왔으며,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배교자들이 나왔다. 304년, 또 다른 로마 황제 중 한 사람인 막시미아누스는 최악의 칙령을 내렸다. 이 칙령으로 말미암아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공직에서 박탈되고, 시민권은 몰수당했다. 그리고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신들에게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처형하게 했다. 308년에도 또 하나의 칙령이 선포되었다. 이 칙령에는 시장에 나와 있는 모든 음식에 제사로 썼던 술을 뿌리라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굶어죽든지, 아니면 배교하든지 양자 택일을 하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런데 역사상 가장 잔혹한 기독교 박해가 갑자기 끝났다. 먼저 311년에 갈레리우스가 박해를 중지시키는 관용령을 공포했다. 그러나 이러한 포고령에도 불구하고 박해가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제국 곳곳마다 박해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313년 밀라노 칙령이 발표된 것이다. 참으로 이것은 놀라운 대사건이었다. 제국 내에서 박해는 즉시 중단되었다. 그리고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에 대한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었다. 제국은 빼앗긴 교회의 예배당을 직접 사서 교회에 되돌려주었다. 투옥되었던 신자들은 풀려났다. 어느 곳에서든 공적인 신앙고백과 예배, 전도가 허용되었다. 기독교는 단순히 허용 받은 것이 아니었다. 기독교는 제국 법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 공인 종교가 되었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 자신이 기독교의 열 세 번째 사도로 추앙을 받는 동시에 교회에 대한 특별한 보호자로 자처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러니 교회는 다른 종교들에 비해서 특혜를 받게 된 것이다. 성직자들은 제국의 공무원으로서의 직위를 보장받았으며, 각종 세금의 혜택을 받았다. 참으로 대사건이요, 대혁명이다!


이러한 뜻밖의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역사 뿐만 아니라 세계의 역사까지도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다. 과연 교회는 이 뜻밖의 밀라노 칙령을 어떻게 보았어야 했을까? 당시 교회는 밀라노 칙령을 이방 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승리요, 제국과 황제에 대한 그리스도의 승리요, 이교 철학과 종교에 대한 복음의 위대한 승리로 보며 경축했다. 뿐만 아니라 교회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열광했고, 온갖 미사여구로 황제를 칭송했다. 교회는 그를 열 세 번째 사도요, 하나님의 지상 대리인으로 숭앙했다. 로마 제국을 향한 찬미도 더해졌다. 이제 로마 제국은 하나님의 보호와 은총을 입은 지상 왕국이 되었으며, 하나님 나라의 가시적인 모형인 것으로 덧칠해졌다. 역사학자들은 바로 이것이 콘스탄티누스가 기대했던 것이라고 말한다. 어쨌든 제국 내 모든 교회와 주교, 신자들은 일제히 황제와 제국에게 기꺼이 충성을 맹세했다. 이것은 초대교회 300년간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리고 교회는 황제와 제국이 제공하는 모든 특권와 시혜를 마음껏 누렸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위대한 승리로 얻은 전리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과연 교회가 이렇게 하는 것이 옳았을까?


확실히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위대한 승리다. 카르타고의 영웅 한니발의 도발, 검투사 스파르타쿠스의 무장봉기, 유대인들의 반란, 그 외 기타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략들을 거뜬히 막아냈던 로마 제국이었다. 그러한 로마제국이, 로마의 지식인 켈수스가 무식쟁이들이요, 천한 것들이라고 멸시했던 그 기독교 앞에 무릎을 꿇은 것이다. 황제는 끝내 그리스도 앞에 굴복한 것이다. 이것은 분명 승리였으며 백 번 천 번 경축할 일이었다. 그러나 밀라노 칙령은 위대한 승리임과 동시에 교회의 가장 끔찍한 패배이기도 했다. 초대 교회 300년간 이어져왔던 초대교회의 위대한 생명력과 영향력은 밀라노 칙령 이후 급격하게 감소하게 된다.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어 침례/세례를 받았다. 수많은 사람들이 존경과 특혜를 받는 성직자가 되는 길을 밟았다. 교회당은 크고 빠르고 급속하게 제국 전역에 세워졌다. 보스포러스 해협이 내려다 보이는 맨 땅에는 웅대한 기독교 도시, 곧 콘스탄티노플을 세워졌으며, 제국의 수도로 정해졌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이자, 제국의 유일한 종교로 만들었다. 이제 다른 종교를 신앙하는 것은 로마법을 어기는 것이 되었다. 300년 동안 박해를 받아왔던 기독교는 5세기가 넘어서면서 박해자가 되었다. 점차로 교회는 힘을 얻었으나 이상하게도 교회는 점점 더 어두운 나락으로 한없이 한없이 추락해갔다. 언제부터였을까? 정확한 건 알 수 없지만 밀라노 칙령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밀라노 칙령은 기독교의 엄청난 패배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교회는 밀라노 칙령에 어떻게 반응했어야 했단 말인가? 밀라노 칙령을 거부했어야 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와 복음의 위대한 승리를 경축하지 말았어야 했단 말인가? 아니다. 위대한 그리스도의 승리를 왜 거부해야 하겠는가? 왜 하나님의 승리를 축하하지 말았어야 한단 말인가? 그러나 교회는 신중했어야 했다. 제국의 관용이 무조건 좋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별했어야 했다. 제국으로부터 받는 특혜가 박해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무서운 사단의 훼방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했어야 했다는 말이다. 교회를 향한 황제의 겸양과 제국의 공손함이 콜로세움의 사자 이빨보다 더 무섭고 간교한 것으로 화할 수도 있음을 간파해 냈어야 했다.


만일 교회가 그랬더라면, 조금만 더 신중하고, 조금만 더 깨어 있었더라면, 교회는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의 신앙의 자유를 허용한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되, 국가 권력이 제공하는 특권에 대해서는 경계를 했을 것이다. 만일 교회가 조금만 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교회는 전도와 선교의 문이 활짝 열린 것에 대해서는 감사하되, 교회로 몰려오는 새 신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신자의 삶을 살도록 교육하는 과정들을 더욱 엄격히 관리했을 것이다. 교회가 조금만 신중했더라면, 배교자를 교회가 다시 받아들이는 문제로 교회 안에서 논쟁이 벌어졌을 때 도나투스주의자들은 논쟁을 해결해 달라고 황제에게 위탁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제국으로부터 법적 직위, 권리, 인장과 휘장, 상징, 의전 등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서 신중했을 것이다. 또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문제로 아타나시우스측과 아리우스측이 갈라졌을 때, 그래서 황제가 자기 돈을 들여 니케아로 세계 교회의 주교들을 불러 모아 최초의 세계 공의회가 개최했을 때, 교회는 황제가 그 회의의 주관자로 앉는 것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에서 작성된 니케아의 신조가 제국과 황제의 이름으로 공포되는 것에 대해서 신중히 고려했을 것이다. 또 만일 교회가 조금만 더 분별력이 있었더라면,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와 싸우려고 로마로 진군하던 중 밀비안 다리 근처에서 환상 중에, “이 상징으로 네가 정복할 것이다.”(Hoc signo vinces)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고 했을 때, 교회는 그 환상이 주님으로부터 온 것인지를 분별하고자 했을 것이다. 또 만일 교회가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콘스탄티누스가 막센티우스나 리키니우스와 같은 정적들과 싸우기 위해서 방패마다 십자가를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깃발을 들고, 적들을 살상하는 기이한 일을 제지하고자 했을 것이다. 어찌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을 죽이는 살육의 신, 전쟁의 신이 되었단 말인가?


논의의 장으로 초대하며..


물론 말하기는 쉽다. “그때 교회가 조금 더 신중했더라면..” 하지만 누군들 그때 그 상황 속에서 그렇게 하지 않았겠는가? 이 글을 쓰고 있는 우리라도 그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행동하고야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에서 한 사람의 잘못은 그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의도가 선했다 하더라도 한 사람의 잘못은 역사가 흐르면서 수 천, 수 만의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이끄는 전범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가이사르는 이렇게 말했다지 않는가? “아무리 나쁜 결과로 끝난 일이라도, 그것이 시작된 당초의 동기는 훌륭한 것이었다.” 역사의 유익은 한 번의 실수를 거울삼아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것이라 하겠다. 메가 처치 현상은 여러 모로 밀라노 칙령 이후의 교회의 모습과 닮았다. 그래서 우리는 밀라노 칙령을 거울 삼아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해서 교회가 조금 더 신중하고, 조금 더 분별있고, 조금 더 사려깊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메가 처치 현상은 누군가가 의도해서 만들어진 현상이 아니다. 목회자들은 다만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서 최선을 다했을 따름이다. 그리고 그러는 과정에서 이 기이한 현상이 점점 우리 눈앞에서 나타난 것이다. 이 현상은 누군가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누군가를 비난할 성질의 것도 못된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 악한 의도로 만든 일이 아니라고 해서, 모두가 다 선한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고 해서, 그것이 옳은 일이 되지는 않는다. 메가 처치 현상이 누군가 악한 의도와 불순한 영으로 교회 안에 유포시킨 그런 현상이 아닐지라도 우리는 이 현상에 대해서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 과연 이 일이 옳은가, 그른가? 성서적으로 합당한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부합되는가? 이것이 바울이 말했던 영적 전쟁의 실상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세상 주관자들과 어둠의 영들과의 싸움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해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것이 오늘날 한국 교회가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해서 가져야 할 관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어려운 점이 있다. 메가 처치 현상은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대단히 새로운 현상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현상을 객관적으로 조망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교회의 전통이나 신학적 이론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지에 대해서 아직 배움이 없다. 66권 신구약 전체 성서도, 베드로나 바울과 같은 사도들도, 오리겐이나 어거스틴과 같은 교부들도, 프란시스나 도미니크 같은 수사들도, 루터나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자들도, 웨슬리나 에드워드 같은 부흥운동가들도 메가 처치 현상에 대해서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는 이 현상을 도외시할 수 없다. 메가 처치 현상을 무조건 하나님의 능력의 결과요, 성령의 역사하심의 결실이라고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과거 밀라노 칙령에 대한 교회의 섣부른 판단을 반복하는 짓이다. 물론 그런 측면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면도 있다. 우리는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위험성, 기만성, 유혹 등의 측면을 간과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생각해 보자는 마음으로 이 글을 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침신대 신문에 실을 글을 써달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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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음터에서..

신광은 목사(열음터 공동체)


교회를 개척하면서 가장 많이 고민한 문제가 하나 있다. ‘어떻게 해야 제·대·로· 목회를 하는 것일까?’ 하기야 누군들 이런 고민도 없이 ‘감히’ 목회를, 그것도 개척을 하겠는가? 하지만 나는 진짜제·대·로· 목회를 해보고 싶다. 나는 1만 명 목회는 커녕 1천명 목회를 할 생각도 없다. 전 세계를 돌아 다니며 세계 복음화에 앞장 설 특급 강사 목사가 될 자신도 없다. 그저 나는 제대로 된 목회를 하고 싶다. 큰 목회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그냥 내 유일한 한 가지 관심은 열심히 목회를 한다고 했는데, “나, 너 모른다!” 이 한 마디 안 듣고 싶을 따름이다.

주여, 주~여! 제가 주의 이름으로 설교도 하고, 가르치기도 하고, 목사노릇도 많이 했잖아요, 길목마다, 거리마다 전도도 엄청 했잖아요, 귀신도 무지 많이 쫓았잖아요, 병도 고치고, 기적도 행하고, 엄청난 능력을 행했잖아요? 저, 진짜 열심히 목회했거든요.” 내가 이러는데, 주님께서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야, 내게서 떠나라.” 이러실까봐 나는 너무 두렵다. 이 생각만 하면 등판 가득히 식은 땀이 송송 솟아날 지경이다.

그런데 요즘 <뉴스 후>가 나의 소심증을 더 심화시켰다. 정말 내로라하는 우리나라 최고의 교회, 최고의 목회자들 이야기가 조금도 여과 없이, 무차별적으로 쏟아져 나오는데 너무 창피하고 화가 나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 너무 무서웠다. 어쩜 신약성서에 나오는 그 사람들과 똑같은지... 잔치의 상좌 앉기를 즐겨하고(마23:6), 네 거리, 시청 앞 광장, 상암 월드컵 경기장에서 멋지게 기도하기를 좋아하고(마6:5), 돈을 좋아하고(눅16:14), 말과 행동이 다르고(마23:3), 타종교인, 불신자, 구원 받지 못하는 자들보다 스스로를 낫게 여기는(눅18:11) 등등.. 어쩜 저리 똑같을까..

한참 속상해 하고 있는데 이런 생각이 든다. ‘나라고 뭐가 틀린가?’ 난 그 높으신 양반들보다 뭐 나은 것이 있는가? 정직하게 돌아보면 나도 높으신 윗분들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다. 나도 돈을 사랑하고, 겉과 속이 틀리고, 마음으로는 온갖 더럽고 부패한 것들 뿐이고, 비판하기 좋아하고, 교만하지 않는가? 그러니 이거 큰 일이다. 나중에 주님 앞에서 뭐라고 할꼬. 주님께 무슨 말씀을 듣겠는가? 열심히 주의 일을 한다고 했는데, 뚜껑 열어봤더니 밥이 아니라 모래면 어떡하나..

이런 두려운 마음으로 개척을 했다. 솔직히 내가 무슨 위대한 영성가도 아니고, 산 속 깊은 곳에서 세월 좋게 수도정진할 자신도 없다. 그냥 나는 평범한, 너무도 평범한 한 인간이다. 나는 위대한 목사일 자신도 없고, 큰 목회할 실력도 안 된다. 그냥 나는 진짜로 ‘제대로’ 목회를 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다른 것 다 제끼고 딱 한 가지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그것은 “사랑”이다. 바울이 말하지 않았던가..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 것도 아니고(I am nothing!), 사랑이 없으면 아무 유익이 없다고(I gain nothing!).

우리 교회는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 소위 가정교회(house church)이다. 지금 달랑 두 가정이 모이고 있다. 솔직히 좀 썰렁하다. 그래서 얼마 전까지 몇 사람 더 보내달라고 기도드렸다. 그랬더니 며칠 전에 주님께서 이렇게 물으셨다. “지금 너희들의 숫자가 서로 사랑하기에 부족하냐?” 허걱! 몰래 뭐 훔쳐 먹다 들킨 느낌이었다. 참으로 지당한 말씀이었다. 부족하지 않았다. 전혀 부족하지 않았다. 아니 너무 많았다. 지금 우리는 단 두 가정이 모이지만 벌서 사랑하기에는 너무도 많은 숫자다. 우리들은 아직 서로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 서로를 위해서 목숨을 내 주기는커녕, 내 맘에 들지 않은 서로의 모습을 수용할 마음의 준비도 아직 덜 되어 있다. 우린 지금 사랑하기에는 너무 많다. 사랑을 논하기에는 아직 멀었다. 멀어도 한참 멀었다. 사랑이 본질인데.. 다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꽹가리, 요란한 깡통인데,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아닌데..

그래서 다시 난 이렇게 기도한다. “하나님, 큰 건물이 없어도 좋습니다. 수 백 명이 안 모여도 좋습니다. 성가대, 찬양팀, 빵빵한 재정, 중고등부니, 청년대학부니, 남전도회 & 여전도회니 하는 여러 부서들.. 이런 것들이 다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 이거 한 가지는 꼭 있게 해 주십시오. 서로에 대한 뜨거운 사랑, 후회 없는 사랑, 미워 죽겠는 원수마저 용서하고 품는 사랑, 가진 것 없어도 콩 한 조각이라도 나누는 그 사랑.. 이것 한 가지는 꼭 있게 해 주십시오. 이것만 있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서 쫓겨나지는 않겠지요. 이것 한 가지만 있다면 나중에 주님 앞에 섰을 때 책망 받지는 않겠지요. 우리 교회가 여력이 없어서 다른 많은 열매들 못 맺더라도, 정말 이거 한 가지만 꼭 맺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 열음(열매의 옛 말)! 우리 교회가 이거 한 가지만이라도 풍성하게 맺는 터가 되게 해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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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W. Tozer 목사의 안수서약기도


오, 주님!

저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웠습니다. 중차대한 위기의 때에 주님은 저에게 거룩한 일을 맡기려고 부르셨습니다. 주님은 흔들릴 수 없는 것들만 남도록 만국의 온 땅과 하늘을 흔드실 것입니다.


오, 주님! 나의 주님!  

주님은 스스로 낮추시고 저를 높이사 주님의 종으로 세우셨습니다. 아론처럼 하나님께 부름 받은 자들이 아니고서는 주님의 종이 되는 영광을 스스로 취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저에게 안수를 허락하신 것은 마음이 완고하고 듣는 것이 더딘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함인 줄 믿습니다. 그들은 주인 되신 주님을 거부했으므로 종 된 저 역시 거부할 것입니다.

  

나의 하나님!  

저는 저의 연약함과 무능력을 한탄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않을 것입니다. 책임을 지시는 분은 제가 아니라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내가 너를 알았고, 너를 구별하여 세웠고, 너를 거룩하게 하였다"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그에게 갈지어다. 그리고 내가 네게 명한 것을 모두 말할지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누구관대 주님과 논쟁을 벌이겠습니까? 제가 누구관대 주님의 주권적 선택을 문제 삼을 수 있겠습니까? 결정을 내리는 이는 제가 아니고 주님이십니다. 주여, 주님이 결정하소서. 제 뜻대로 마시고 주님의 뜻대로 하소서.


선지자들과 사도들의 하나님이시여!

제가 하나님을 높이면 하나님께서 저를 높이실 것입니다. 그러하오니 자비하신 하나님, 제가 이 엄숙한 서약을 평생의 사역 동안 지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소서. 순풍에 돛을 달든 폭풍에 힘들어하든, 살든지 죽든지 생명이 붙어 있는 한 이 서약을 지키게 하소서.

  

오, 하나님!  

이제 하나님이 일하실 때가 되었습니다. 원수가 하나님의 초장에 들어가 양들을 찢고 흩어버렸나이다. 그렇지만 양들이 위험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거짓 목자들이 너무 많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양떼에게 닥치는 위험을 무시합니다. 이런 삯꾼들에게 속은 양들은 가엾게도 그들을 열심히 따르지만, 그러는 동안 늑대가 양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기 위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구하오니 제게 원수가 다가오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 지혜를 주소서. 제가 본 것을 성실하게 전하도록 제게 용기를 주소서. 저의 음성이 주님의 음성을 닮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심지어 병든 양들도 저를 통해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주 예수님!  

주께 나아오니 저를 영적으로 준비시키소서. 저에게 주님의 손을 얹으소서. 신약의 선지자의 기름으로 저를 성결하게 하소서. 제가 종교적 서기관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저로 하여금 선지자적 사명을 망각하는 잘못을 범하지 않게 하소서. 현대의 성직자들의 얼굴에 깔려 있는 어두움의 저주에서 건져주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타협하고 다른 사람들을 모방하고 직업적 타성에 빠지는 저주스러운 행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회의 규모, 교회의 인지도 그리고 교회의 연간 헌금 액수를 기준으로 교회를 판단하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도록 도우소서. 제가 흥행사나 교회의 관리자가 아니라 선지자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소서. 제가 선지자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제가 군중의 종이 되지 않게 하소서. 저의 육신적 야망을 고쳐주소서. 인기를 얻어야 직성이 풀리는 명예욕에서 저를 건지소서. 또한 제가 물질의 노예가 되지 않게 하소서. 집 언저리를 어슬렁거리며 허송세월하는 사람이 되지 않게 하소서.

  

오, 하나님이여!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기도의 장소를 찾아서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싸울 것입니다. 제가 과식하지 않으며, 늦잠을 자지 않도록 도우소서. 제가 제 자신을 잘 훈련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가 되게 하소서. 저는 이 세상에서 많은 수고와 적은 보상을 택합니다. 저는 편한 자리를 구하지 않습니다. 제 삶의 안일을 위한 약삭빠른 길을 외면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편한 길을 추구한다 할지라도, 저는 그들을 예리하게 판단하지 않고 제 나름대로의 힘든 길을 택하려 노력할 것입니다. 저를 대적하는 사람들이 생길 테지만, 그런 경우에도 차분히 대응할 것입니다. 주님의 친절한 백성들이 주님의 종들에게 흔히 그러하듯이 저에게도 감사의 예물을 억지로 주려고 할 때 저를 붙드셔서 실족하지 않게 하소서. 저에게 무엇이 주어지든지 그것을 선용할 줄 아는 지혜를 주소서. 그리하시면 저의 영혼이 해를 입지 않을 것이고 그것 때문에 저의 영적 능력이 줄어들지도 않을 것입니다. 만일 주님께서 깊은 섭리 가운데 저로 하여금 주님의 교회에서 영예를 얻게 하신다 할지라도 제가 두 가지를 꼭 기억하게 하소서. 첫째, 제가 주님의 가장 작은 은혜조차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둘째, 사람들이 저의 진짜 모습을 안다면 저에게 영예를 돌리지 않거나 그 영예를 저보다 더 자격이 있는 사람들에게 돌릴 것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하늘과 땅의 주님이시여!

저의 남은 날들을 성별하여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의 뜻을 따라 그 날들을 짧게도 길게도 하소서.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높은 사람 앞에 서게 하소서. 그러나 또 주님의 뜻이라면 제가 낮고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섬기게 하소서. 선택권은 저의 것이 아닙니다. 만일 저에게 선택권이 있다 할지라도 그 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주님의 뜻을 행하는 종일 뿐입니다. 지위와 재물과 명예보다 주님의 뜻이 제게는 더 소중합니다. 하늘과 땅의 그 어떤 것보다 주님의 뜻을 선택할 것입니다. 주님이 저를 택하시고 거룩하고 높은 소명을 받는 영광을 저에게 허락하셨습니다. 하지만 제가 재와 먼지라는 것을 기억하게 하시고, 제가 인류를 괴롭히는 선천적 결점과 격정들을 타고 난 인간임을 잊지 않게 하소서.

  

그러하오나 나의 주, 나의 구원자시여!

제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지 않게 하소서. 저를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제가 주님의 능력 안에서 행하고 주님의 의를 선포할 것입니다. 저는 저의 목숨이 붙어있는 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의 메시지를 널리 전파할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사랑의 주님! 제가 늙고 지쳐서 더 일할 수 없을 때 하늘에 저의 처소를 마련하시고 제가 영원한 영광 중에 거하는 주님의 성도들 중 하나가 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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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행

심판

예정

거짓말

고난

안수

제사장

성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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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8호 쉽지 않은 주제, 풀어야 할 숙제 12 가지⑨] 선행 

  

우리의 현주소


대부분의 사람들―비그리스도인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도인까지도―은 ‘선행’을 기독 신앙과 연관시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을 강조하고, 그리스도인의 성숙을 묘사할 때도 “저 사람은 참 믿음이 좋다”라는 식으로 말한다. 교회에의 소속은 “믿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한 반응으로 결정이 되고, 교회는 그 정체성을 단연코 ‘믿음’의 공동체 됨에서 찾는다.

한편으로 이와 같은 현상은 당연하고 바람직한 것이다. 기독 신앙은 그 근본이 ‘신앙’인지라 이처럼 믿음이 강조되어 마땅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믿음’만큼 중요한 인식 활동이 어디 있겠으며, 이신칭의(以信稱義)라는 종교 개혁자들의 구호에도 반영되어 있다시피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선언을 받을 수 있게 해 주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기독 신앙의 화단에서 선행의 꽃이 거의 발견되지 않는 것은 비극이요 위험의 징조이다. 왜냐하면 신앙인을 신앙인답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가 거룩한 삶이요, 성화(聖化)의 모습이요, 선행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비록 구원이 믿음에서부터 출발하고 구원의 전 과정 내내 믿음의 역할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믿음은 결국 선한 행실로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믿음인 것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흔히 목격되는 이러한 선행 희귀 증상은 심지어 우리의 ‘믿음’에 대해서조차 그 진정성을 의심하게 만든다.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 내에 선행이 결여되어 있음을 발견하기란 별로 힘든 일이 아니다. 사회적 선행―장학금 기탁, 입양, 소외층에 대한 봉사, 환경 보호 등―의 대부분은 비종교인이나 타종교인에 의해 수행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의 일상적 만남, 대화, 사회적 교류에서 거만하고 독선적이며 무례하기 짝이 없는 존재로 인식되고 있다. 심지어 그리스도인들(특히 지도자들)이 선행은커녕 세상의 범죄와 범법 행위에 깊이 연루되어 있는 것을 보기도 한다.


선행 실종의 이유


왜 이토록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선행의 실종을 연출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 때문에 기독 신앙이 착한 행실과는 담을 쌓은 것으로 부각되어야 했을까? 아마도 세 가지 맞물린 이유를 제시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신앙 전통상의 이유이다. 한국교회는 언젠가부터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후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교훈과 모범을 제대로 받지 못했다. 그것이 혹자의 주장처럼 한국교회의 발전 초창기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서양 선교사들 가운데 일부의 신앙적 특징 때문이건, 아니면 일제 강점기와 해방 전후의 암울하고 혼란스런 사회 분위기로 인해 기독 신앙이 신비주의화한 때문이건, 또 아니면 우리 민족의 심성 깊은 곳에 자리 잡은 무교적 성향 때문이건, 어쨌든 교회는 거룩한 삶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고 그리스도인들 또한 높은 윤리적 수준을 체현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에게 선행이 요구된다고 주장하면 이것은 은혜에 역행하는 도덕주의(moralism)나 율법주의(legalism)의 징표로 곡해하곤 했다.

둘째, 구원의 단계(혹은 면모)와 관련한 신학적 이유를 들지 않을 수 없다. 보통 구원은 칭의(justification) → 성화(sanctification) → 영화(glorification)의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을 한다. 이 가운데 문제가 되는 것은 주로 칭의와 성화 사이의 관계이다.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그 그리스도인에게 전가(轉嫁)하시는 사법적(judicial) 행위이다.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구원 은택이지 우리 편에서의 무슨 기여―선한 행실이든 그 무엇이든―때문에 획득된 바는 아니다. 칭의는 우리가 최초로 신앙을 고백할 때 하나님께서 선언하시는 것으로서, 일단 그리스도인이 되고 난 이로서는 과거의 어느 한 시점에 발생한 사건으로 인식하게 된다.

그러나 성화의 경우는 좀 다르다. 성화는 칭의 이후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의 전 과정과 연관되는 사항으로서, 그리스도인 편에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실제로 거룩하게 변화되는 일이다. 따라서 칭의의 경우에는 인간의 노력이나 업적이 하등의 기여를 할 수 없지만, 성화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인의 끊임 없는 노력이 동반되어야 한다. 물론 이 때 그리스도인이 기울이는 노력도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만, 어쨌든 그런 노력은 그리스도인 자신의 노력이다.


지금까지의 설명에 기초해 이 두 가지 항목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그런데 이 둘 사이의 관계가 그리스도인 개인의 삶에서 어떻게 이루어져야 할지 규명하는 일은 쉬운 과제가 아니다. 따라서 교회 역사상에는 몇 가지 바람직하지 않은 패턴이 등장했다. 우선, 칭의 없는 (혹은 칭의를 약화시킨) 성화 강조의 패턴이 있었다. 이것은 복음의 속죄적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않은 채 윤리적 의지와 삶만을 강조할 때 등장할 수 있다. 19세기 독일의 신학 풍조가 그랬고, 오늘날 기독 신앙을 또 하나의 윤리 수양으로 간주하는 민족주의적 양심가들이 그렇고, 또 70년대 초 한국 교회의 도덕주의적 분위기가 비슷한 전철을 밟았다고 볼 수 있다.

또 칭의와 성화를 혼합해서 가르치는 패턴이 주로 로마 가톨릭 내에 크게 성행하고 있다. 이러한 혼동은 칭의의 법적 성격을 흐리게 하고 또 독특한 형태의 공로주의(meritorialism)를 낳을 수 있기 때문에 많은 주의가 요구된다.

그런가 하면 첫 유형과 반대로 성화 없이 칭의에만 집착하는 패턴 또한 발전하기도 한다. 교회 역사적으로 보면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 불건전한 경향의 경건주의자들, 청교도들 가운데 일부에게서 발견되는 소위 율법 폐기론(antinomianism)이 바로 이런 패턴의 대표적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오늘날 한국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 개신교 신자들에게서 많이 발견되는 패턴은 이 세 가지 가운데 마지막 유형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고 모든 죄가 용서 받았으며 천국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기 때문에,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그리스도인이 어떻게 ‘개판을 친다’ 하더라도 전혀 문제 되지 않는다는 식의 ‘싸구려 은혜주의 증상’(cheap-grace syndrome)이 영적 질병처럼 번져 있다. 그러니 어찌 이 가운데에서 성화의 삶, 선행의 열매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셋째, 성경 해석상의 이유 또한 선행 실종에 일조하고 있다. 필자가 여기에서 말하는 ‘성경 해석상의 이유’란 그릇된 성경 해석법의 채택이나 어떤 해석학적 원리의 오용과 같은 거창한 사안을 거론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어떤 특정한 성경 구절과 관련하여 문맥을 무시하고 그 해석과 적용에 있어 한쪽 경향으로 치달은 사례를 지적하는 것이다.

한국교회는 성경 공부와 관련하여 70년대 이후 각종 대학생 선교 단체의 도움을 직․간접적으로 받아 왔다. 우선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교재들이 선교 단체들의 것이었고, QT․제자 훈련․그룹 성경 공부 등을 목회에 접목시킬 때 대부분 선교 단체에서 사용하던 교재들에 의존하곤 했다. 이것은 성구 암송, 개인전도 시 비신자의 질문에 성경적으로 답변하기 등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많이 인용되는 구절 가운데 하나가 엡 2:8~9이었다.


엡 2:8~9  8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상기 구절은 우리의 행위가 구원을 얻는 데 아무런 기여를 할 수 없다는 진리를 간명히 표현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가르침이 논리적 비약을 동반해 “우리의 행위는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위와 상극이다”는 식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만일 성경을 가르치거나 공부하는 이들이 엡 2:8~9를 2:10과만 연계시켰던들 이런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선한 일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상기 구절에서는 분명 구원이 선행과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명시하고 있다. 비록 우리의 행위가 칭의에는 기여하지 못하지만―엡 2:8~9이 가르치고 있듯―선행은 분명 구원 받은 사람으로서의 지향 목표가 된다는 것이다.

구원 이후의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토록 선행 지향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성경으로부터 찾지 못하고 그저 엡 2:8~9의 내용에만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에, 한국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선행을 발견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선행의 중요성과 의의


그렇다면 선행(선한 행실 혹은 실행)은 왜 중요한가? 선행이 기독 신앙과 관련하여 갖는 의의는 무엇인가? 여섯 가지 항목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첫째, 선행(혹은 행함)은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온전케 하고 그 진정성을 입증한다.


약 2: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약 3: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요일 3:18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상에서 보여 주는 그리스도인의 여러 덕목들―믿음, 사랑, 지혜―은 행함이나 선행으로 말미암아 온전케 되고 그 덕목의 특징이 드러난다.


둘째, 선한 일의 구현은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간구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로 등장한다.


골 1: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살후 2:17  너희 마음을 위로하시고 모든 선한 일과 말에 굳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히 13:18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

히 13:21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케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그리스도인이 다른 이를 위해 간구할 때나 다른 이들에게 기도를 부탁할 때, 그는 필시 상대방과 자신의 신앙생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한 사안을 제목으로 삼을 것이다. 바울과 히브리서 기자의 간구 내용을 보든지(골 1:10; 살후 2:17; 히 13:21), 히브리서 기자 자신을 위해 기도해 달라는 부탁 내용을 보든지 (히 13:18) 그 가운데 ‘선한 일’이 등장한다는 것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항목임을 알 수 있다.


셋째, 선행은 구원 받은 성도의 마땅한 책임이요 당연한 귀결이다.


엡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선한 일들)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딤전 2:9~10  9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10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딛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딛 3: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계 19:7~8  7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8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그리스도인이 선행에 따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구원을 받고 난 이들의 경우에는 반드시 선행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


넷째, 선행/행실은 지도자의 필수적 자질 가운데 하나이다.


딤전 4:14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딤후 2: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딛 2:7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히 13: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이르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을 생각하며 저희 행실의 종말을 주의하여 보고 저희 믿음을 본받으라.


선한 행실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땅한 증거라면 그들을 인도하고 모범이 되어야 하는 지도자들에게야 얼마나 더 그렇겠는가?


다섯째, 성경 교훈의 궁극적 목표는 그 내용의 실행에 있다.


시 119:9  청년이 무엇으로 그 행실을 깨끗케 하리이까? 주의 말씀을 따라 삼갈 것이니이다.

딤후 3:16~17  16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17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약 1:22, 25  22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 25자유하게 하는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성경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궁극적 목표는 그 교훈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실행함으로써 모든 선한 일을 행하는 데 있다.


여섯째, 선행은 비신자들에게 신앙적 영향력을 발휘한다.


마 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에게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벧전 2: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하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벧전 2: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주1)]이라.

벧전 3:1~2  1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2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그리스도인의 선한 행실은 비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우리에게 올바른 행실이 있을 때 비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고 (마 5:16; 벧전 2:12), 자신들의 사실 무근한 비방을 그치게 되며 (벧전 2:15), 심지어는 구원을 받는 경우까지 생기게 된다 (벧전 3:1~2).


필자는 지금까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에 대해서 갖는 여섯 가지 의의 ― (i) 그리스도인의 덕목을 온전케 함, (ii) 그리스도인 상호 간의 간구 제목이 됨, (iii) 구원 받은 이들의 마땅한 책임, (iv) 지도자의 필수적 자질, (v) 성경의 궁극적 목표, (vi) 비신자들에 대한 영향력 행사 ― 를 한 항목씩 정리해 보았다.


선행의 내용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선행의 내용이 무엇인지 알아보도록 하자. 선행의 내용을 소개함에 있어서 필자는 교육적 효과를 위해 세 분야―(i) 하나님과의 관계,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 (iii) 세상과의 관계(-주2)―로 대별하고자 한다. 물론 어떤 경우에는 하나의 선행이 두 분야 (혹은 세 분야)에 해당되는 수도 있다.


 (i)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대하 19:3  그러나 왕에게 선한 일도 있으니 이는 왕이 아세라 목상들을 이 땅에서 없이하고 마음을 오로지하여 하나님을 찾음이니이다 하였더라.


여호사밧은 우상을 제거하고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았는데, 선견자 예후는 이를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말한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께서 미가에게 가르쳐 준 선한 것은 세 가지 항목―공의를 행함, 인자를 사랑함,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함―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가운데 앞의 두 가지는 백성들에 대한 조치와 연관이 되기 때문에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 및 (iii) 세상과의 관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마지막 항목인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확실히 (i) 하나님과의 관계에 해당되는 내용이다.


막 14:6, 8  6예수께서 가라사대,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저를 괴롭게 하느냐?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 8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


이 여인은 예수께 향유 붓는 일을 통해 그의 장사를 예비했다는 의미에서 선행을 한 것이다.


이상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찾음, ②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주3)


(ii)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느 13:14  내 하나님이여! 이 일을 인하여 나를 기억하옵소서! 내 하나님의 전과 그 모든 직무를 위하여 나의 행한 선한 일을 도말하지 마옵소서!


느헤미야는 성전 내에 레위인 지급용 십일조 및 제사장들 할당 분의 거제물 보관소를 재확보했고(느 13:8~9), 이런 물품의 충실하고 공정한 분배를 위해 직분자를 세웠다 (느 13:10~13). 바로 이렇게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힘쓴 것을 “선한 일”이라 불렀다.


시 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형제끼리 연합하고 함께 하는 일 또한 선한 행실이다.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행 가운데에는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곧 긍휼)를 사랑함도 포함이 된다.


행 9:36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은 번역하면 도드가라. 선행과 구제라는 일이 심히 많더니


다비다는 살아생전 구제하는 일을 힘썼는데 그것이 곧 선행으로 되어 있다.


고후 8:20~21  20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21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와 아가야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를 위하여 연보한 것 (롬 15:25~26)을 가리켜 “선한 일”이라고 말한다.


고후 9: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역시 위와 같이 연보를 가리키는 말이다.


딤전 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디모데 당시의 교회는 핍박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일부 그리스도인들은 분명 지도자가 되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회피하기가 일쑤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고난을 각오하고 감독이 되고자 하는 것은 분명 “선한 일”이었던 것이다.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디모데가 사역할 당시에는 참과부를 경대하기 위해 그들의 자격 조건을 명시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자녀 양육, 나그네 대접, 성도들의 발 씻김, 환난 당한 자들의 구제, 모든 선한 일을 좇음 등을 예로 들고 있다. 이 가운데 “성도들의 발을 씻기는 것”은 확실히 (ii) 그리스도인끼리 관계에 있어서의 선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그네 대접”과 “환난 당한 자들의 구제”의 경우에는 좀 복잡하다. 만일 이 나그네와 환난 당한 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ii)에 해당되는 선행이 될 것이고, 이런 활동의 대상이 비신자라면 이것은 (iii) 세상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의 선행으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히 13:16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 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그리스도인 사이에 서로 나눠 주는 것 또한 선행의 내용으로 나타나 있다.


지금까지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기 위한 노력, ② 형제와의 연합, ③ 공의를 행함, ④ 인자를 사랑함, ⑤ 구제와 나눔, ⑥ 나그네 대접, ⑦ 성도들의 발을 씻김, ⑧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등이 그리스도인끼리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iii) 세상과의 관계에 있어서 선행의 내용.


미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사회생활에서 공의를 행하는 것과 인자(긍휼)를 사랑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이 나타내야 할 선행이다.


롬 13:3, 6  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 6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정부에 세금을 성실히 납부하는 것이 선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엡 6:5~8  5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6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7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초대 교회에는 노예 신분의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데 비록 그들의 상전들이 믿지 않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마치 주께 하듯 그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섬겨야 하는데, 바로 이것을 가리켜 “선을 행함”이라고 설명한다.


딤전 5:10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는 자라야 할 것이요


가정에서 자녀를 제대로 양육하는 것, 나그네를 대접하는 것,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는 것이 선한 일이다.


딤전 6:17~18  17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속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부한 자들은 자신의 부를 다른 이들과 나누는 것이 필요하며 이것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라 말한다.


딛 3: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위정자에 대한 순복이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이다.(-주4)


벧전 3:6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사라가 남편에게 복종한 것 또한 선행의 하나로 나타나 있다.


이상의 교훈을 정리해 보면 ① 공의를 행함, ② 인자를 사랑함, ③ 세금 납부, ④ 믿지 않는 상급자에게 순종함, ⑤ 올바른 자녀 양육, ⑥ 나그네 대접, ⑦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⑧ 부자의 공유 정신, ⑨ 위정자에 대한 순복, ⑩ 남편에 대한 복종 등이 세상에서의 선행 내용으로 되어 있다.


지금까지 필자는 그리스도인에게서 나타나야 할 선행을 그 내용에 있어서 살펴보았다. 이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i) 하나님과 관계에서의 선행.

   ① 우상을 멀리하고 하나님만을 찾음.

   ②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함.

(ii) 그리스도인 끼리에 있어서의 선행.

     ① 공동체를 회복하고 세우기 위한 노력.

     ② 형제와의 연합.

     ③ 공의를 행함.

     ④ 인자를 사랑함.

     ⑤ 구제와 나눔.

     ⑥ 나그네 대접.

     ⑦ 성도들의 발을 씻김.

     ⑧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iii) 세상 관계에서의 선행.

     ① 공의를 행함.

     ② 인자를 사랑함.

     ③ 세금 납부.

     ④ 믿지 않는 상급자에게 순종함.

     ⑤ 올바른 자녀 양육.

     ⑥ 나그네 대접.

     ⑦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함.

     ⑧ 부자의 공유 정신.

     ⑨ 위정자에 대한 순복.

     ⑩ 남편에 대한 복종.


우리 자신에 대한 점검

선행이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서 얼마나 커다란 의의를 갖는지, 또 구체적으로 어떤 사항들이 선행의 내용인지 알고 났으면, 그 다음 마땅히 요구되는 바는 우리(나 개인 및 공동체)에게 눈길을 돌려 자신을 살피도록 해야 한다.


 (i) 자문의 필요성: 무엇보다도 스스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해 보아야 한다. “나의 삶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선행이 어떤 방면에서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선한 일에 열심 내는 친백성으로 알려져 있는가?” “비신자들은 선행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인과 교회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


 (ii) 마음에 되새길 바: 동시에 우리는 늘 다음과 같은 중요한 주장을 마음에 되새겨야 한다.“일단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신앙의 목표가 선행에 있다,” “만일 어떤 그리스도인의 삶에 선행이 전혀 없다면 그의 구원은 자기기만(self~deception)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은 주로 잘 ‘믿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실은 동시에 ‘선행을 잘 하는’ 사람으로도 알려져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수준은 로마 가톨릭보다도 다른 종교인들보다도 더 뛰어나야 한다.”


 (iii) 회개와 돌이킴: 물론 우리 가운데 누구도 이상의 질문에 대해 자신있게 “네!”라고 답할 수 없고, 이상의 주장이 자신의 삶에서 그대로 실현되고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깨닫고 허물투성이인 자신의 모습을 안타까워해야 한다. 그 때마다 우리의 연약함과 잘못된 것을 하나님께 아뢰고 십자가를 붙들며 용서를 받아야 한다. “주여! 당신의 보혈로 깨끗케 하소서! (요일 1:8)” “성령님이시여! 권능을 베푸소서! (행 1:8)” “주님이시여! 선행을 행함으로써 주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를 소원하옵나이다!” (골 1:10) 등의 회개 및 간구의 기도가 있어야 한다.


이렇게 용서를 받은 후 우리는 우리가 구원 받은 자임을 아는 즐거움 가운데 다시금 선행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자기 성찰 → 회개 → 사죄 → 노력)을 반복하면서, 비록 우리가 매순간마다 연약함을 발견하지만, 우리의 삶을 전반적․장기적으로 볼 때에는 선행의 열매가 점점 풍성히 맺혀져야 하며 그런 면에서 진보와 발전이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iv) 자기 의(self-righteous)는 금물: 그러나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바는 우리에게 크고 작은 선행의 열매가 나타날 때에 그릇된 마음 자세가 배태되지 않도록 하는 일이다. 이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해야 한다. 첫째, 우리가 크고 작은 선행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주님께서 그럴 능력을 주셨기 때문임을 인정해야 한다. 주께서 사도들을 파송하시면서 가르쳐 주신 태도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해당이 된다.


마 10:8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쫓아내되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런 태도가 있을 때 우리는 교만과 자랑(신 8:11~14, 17; 고전 4:6~7; 약 4:14~16)에서 헤어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우리가 마땅히 할 일을 한 것에 불과함을 늘 고백해야 한다.


눅 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 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이런 고백이 계속될 때 불건전한 공로 의식(눅 18:11~12)을 퇴치할 수 있다.


셋째, 결국 선행에 있어서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드러내기보다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시 115:1  여호와여! 영광을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우리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오직 주의 인자하심과 진실하심을 인하여 주의 이름에 돌리소서!


이러한 자기 부인의 자세가 바탕이 될 때 “오직 하나님만”의 원리(고전 3:6~7)가 일관성 있게 나타날 것이다.


기독 신앙과 선행―이 두 가지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관계로 엮이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주1 원문에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어구가 들어 있으나 어떤 이유인지 개역판 한글 성경에는 이 어구가 빠져 있다.

주2 이스라엘은 신정 통치(theocracy) 형태의 사회였기 때문에 교회와 사회가 따로 구별되지 않았다. 따라서 언약 백성 사이에 이루어져야 할 바는, 오늘날로 보자면 어느 정도 자기 민족이나 나라에서 이루어져야 할 바를 함의하고 있는 셈이다.

주3 막 14:6, 8에 등장하는 여인의 경우는 다시금 반복될 수 없는 유일무이한 선행의 예이기 때문에 제외시켰다.

주4 물론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순복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에 권세에 대해 항거해야 할 때도 있다 (행 4:19). 또 로마 제국을 짐승으로 상징한 것(계 13:1)도 그것이 바람직하지 않은 권세라고 여겨야 함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예외가 아니라면 정부나 위정자에 대한 순복은 하나님의 뜻이다 (롬 13:1~7).



송인규 교수 (합동신학대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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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회퍼에 대한 몇가지 해명
-관계에 있어서의 그리스도의 중재를 말하는 이유는 인간의 죄됨의 심각성을 고려한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의 대상이 될 때의 우상숭배/오인된 전이를 거부하는 논리입니다(물론 심각한 문화신학에 대한 거부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때의 그리스도의 중재는 통상적인 기독교스러운 영적인 말, 분위기와 다른 차원입니다. 따라서
기독교인들하고만 교제하라든지 하는 것과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타자에 이를 때 그리스도를 통해 중심에 이른다 정도가 핵심일 것입니다. (앞의글)


본회퍼의 그리스도 중재론은 독일민족교회의 히틀러에 대한 충성서약과 그의 스승이었던 자유주의신학자들의 나찌에 대한 찬동에 반작용의 결과이다.

본회퍼는 '민족'이라는 이름의 뒷편에는 자연, 이성, 종교, 문화라고 하는 자유주의신학의 방법론이 자리잡고 있음을 간파하고, 이를 신학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초기 바르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독일민족교회 혹은 독일제국교회에 반대하는 복음적인 고백교회의 비인가비밀신학교의 하나인 핑켈발데목회자양성소를 책임지면서 예비목회자들에 대한 훈련의 경험으로 나온 것이 성도의 공동생활이다

따라서 이 저서에서 일차적인 대상은 신학, 목회에 소명을 가지고 있는 '신학생'들임을 간과해서는 않된다

하지만 이것이 소위 일반성도들에게 의미없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그의 방법론적인 전향과정을 살펴봄으로써 해명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본회퍼를 이해하기 위해서 빼놓지 말아야 할것은 루터적인 전통이다
바르트가 본회퍼를 루터적인 암울함이 배어난다고 평한 것은 결코 과장된 것이 아니다

수많은 스승들의 배신과 양심을 마비시키는 분리주의에 경도된 루터적인 잘못된 두 왕국론을 바라보면서 본회퍼는 '이 세상성'을 강조하기에 이른다

민족이라는 이름의 우상에 무릎꿇는 것을 보면서 인간에서 하나님에게 이르는 방법론을 철저하게 거부한다. 그것은 인간의 욕망의 투사물에 불과하다.

본회퍼에게 있어 그것은 자연신학이었으며 우상숭배로 필연적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리스도를 통해 이웃에 이른다고 하는 것은 모든 관계의 시작이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다는 고백이요 모든 관계의 주인이 또한 그리스도임을 고백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고는 후기의 이 세상성을 발견하고 나서도 연속되어지면서 독특한 선을 그리게 된다

본회퍼에게 있어 하나님의 초월은 '이 세상적인 초월', 삶의 한 복판에서의 현실이기에 실제 모든 세속적인 관계도 그리스도의 중재 가운데 있는 거룩한 영역이다

모든 관계에 그리스도의 중재는 '이 세상성'과 연결되어 루터적인 이원론을 철저하게 격파한다

모든 관계에서 그리스도의 중재를 고민한다는 것은 발견된 성숙한 이 세상성과 관련하여 종교적인 분위기나 말 , 색채를 벗어버리고 철저한 주되심 가운데로 들어가 그분의 주되심을 세속 가운데 모호하게 보이는 '행동'으로 실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구체적인 통로인 제자는 이렇게 이 세상가운데 우상을 타파하며 종교를 거부하고 그 분만을 주로 고백하며 다른 것이 우상되는 것을 거부하는 행동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발견하지 소위 종교적인 거룩한 양식들, 제단들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지 않는다.

이 세상적인 초월을 발견한 제자는 성인된 세계에서 하나님의 파트너로서 책임을 지닌 자로 행동한다

이런 제자는 현실의 실천 가운데로 과감히 뛰어드는 행동가이다
주님의 주되심이 훼손되는 모든 자리에서 그분을 따르는 철저한 제자도를 살기위해 싸우며 구체적인 현실의 행동을 감행하기에 자신을 모호하고 애매한 현실정치의 영역에 두는 용기를 지닌 자요 비난을 감수하는 자이다. 주님의 주되심의 관점에 따라 다양한 전선을 형성하고 자유롭게 넘나드는 자이다. 가치와 양심은 제자로서 따르는 행동하는 고백 가운데 있지 이론과 신학에 있지 않다

이런 의미에서 겉보기에 그는 거룩한 자가 아니며 오히려 하나님에게 불경한 자이나 루터가 말한대로 하나님은 거룩한 자의 기도보다 죄인의 불평을 기뻐하신다.

이렇게 제자는 현실 가운데 전혀 거룩하지 않으나 철저한 신앙으로 사는 자로 은밀히 행동하는 모호하고 애매한 숨겨진 삶을 사는 자이다. 

제자는 고백하는 행동 가운데 자신의 이 세상됨을 철저하게 긍정하는 자이다

이렇게 겉모양이 아닌 영성을 추구한다면, 너와 나의 만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성도의 공동생활은 배경이 된 경험이 신학생으로 제한된 이상적인 내용이지만 후기의 본회퍼의 사고의 궤적을 따르자면 주를 따르는 제자로서의 삶을 살고자하는 모든 '성인'들에게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 없이라는 이야기는 자신의 배를 숭배하는 종교로서의 기독교를 철저하게 거부하고, 의존하는 신앙에서 벗어나 딱딱한 것을 먹을 줄 아는 자가 되는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 앞에서는 종교의 영역의 하나님, 삶의 구석에서만 유효한 분리되고 제한된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전 영역에서 그 분의 주됨을 고백하는 태도이다

지극히 이 세상적이라는 말은 복음이 인간의 중심을 가르는 참된 궁극적인 것임을 아는 것이다. 세속 가운데 그들의 언어로 충분히 그들과 공감할 수 있다

은밀한 제자는 그들의 말, 생활 가운데 계시는 그리스도의 주인되심을 거룩한 모양없이 충분히 공명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전도사님들의 요청으로

올립니다. 고백록을 중심으로 어거스틴 신학을 강의하신

내용이네요.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기독교 지도자상의 재조명-예수님의 이름으로 
헨리 나웬

들머리 
내친구 머레이 맥도넬(Murray McDonnell)이 토론토 근처에 있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Daybreak Community)로 나를 찾아와서는, 워싱톤 D.C.에 있는 인류 발전 연구소(Center forHuman Development) 15주년 기념행사때 나더러 21세기 있어서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기꺼이 강연을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최근 나는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 공동체들(Larche Communities) 가운데 하나인 데이브레이크에서만 성직자로서 혼신의 힘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인류발전연구소 소장으로서 이 연구소의 발전을 위해 온갖 정력과 시간을 바치고 있는 머레이를 실망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또한 이 연구소의 설립자인 드와이어(Father U. Dwyer)도 알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감정적. 영적 완전을 추구하는 성직자들과 목회자들을 돕는데 그가 그토록 헌신적으로 일하는 것에 대하여 나는 깊은 경의를 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러마라고 대답하였다.
하지만 그 초청강연의 연사로 가겠다고 말한 후에 가만히 생각해 보니 다가올 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진지하게 전망해보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청중들이 성직자로서 동료 성직자들과 함께 사역에 깊이 열중하고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생각하니 더더욱 그러했다. 날이면 날마다 성직의 미래와 교회에서의 목회를 생각 하고 있는 그들에게 도대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무엇이란 말인가 오늘날 대부분의 성직자들 가운데 앞으로 어떤 상황으로 변화될 것인지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금세기도 마감하기 전에 어떻게 나 자신을 예견하겠는가에 대해서도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하지만 나 스스로에게, 나는 이 일을 할 수 없어 라고 말하면 할수록 내가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 합류한 이래 그들이 전개한 사역에 대한 나의 견해를 말로 옮겨보고 싶은 간절한 바램도 없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수년 동안 나는 목회에 대한 강의를 했었다. 지금은 학자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정신장애자들과 그들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소위 성직자로서의 길을 걸어오면서 내 자 신에게 이렇게 물어본다.
목회를 위해 준비된 삶을 살아온 젊은 사람들에게 20년 동안이나 강의를 해온 내가지금은 매일매일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역에 대하여 나는 어떻게 생각하며, 이런 생각들은 매일매일 나의 언행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나는 또한 내일이나, 다음 주나, 내년 혹은 다가올 세기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나는 생각하는 것과 말하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 대하여 나 스스로 정직하게 돌아보면 볼수록 내 속에 계시면서 나의 앞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와 훨씬 쉽게 교통할 수 있음을 알았다. 하나님은 현재의 하나님(God of the present) 이시며, 미래를 향하여 발걸음을 내딛으려는 순간까지도 조심스럽게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사람 들에게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 분이다. 예수님께서는 내일 일을 걱정하지 말아라. 내일 일은 내일 걱정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의 것으로 충분하다 (마6:34)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생각으로 나는 지금까지 데이브레이크에서 성직자로서의 삶을 살아오면서 아주 진하게 느껴온 것들을 기록 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 자신의 경험과 식견 중에서 어떤 것이 아주 다른 환경 속에서 살고있는 성직자들과 봉사자 들에게 전달될 수 있는 것인지 구별하려고 애를 썼다. 현재의 사역은 바로 그 결과이다.
그러나 이 들머리의 의견을 마무리 짓기에 앞서 이 소책자를 읽는 독자들에게 미리 밝혀두어야 할 것은 워싱톤 D.C에 나 혼자 가지 않았다는 것이다. 나는 강연을 준비하면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결코 혼자서 말씀을 증거 하러 다니도록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그분은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 그런데 나와함께 가고자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에 대하여 나는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현재 나의 삶이 참으로 장애자들을 위한 삶이라면 왜 나와 함께 여행을 하고, 나의 사역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이 그들 중에 한 사람도 없다 는 말인가 몇차례의 의논 끝에 데이브레이크 공동체는 빌 뷰렌(Bill V. Buren)을 나와 함께 가도록 결정했다. 내가 데이브레이크에 온 이래 빌과 나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었다. 이 공동체에 속한 모든 장애자들 가운데 그는 말과 손짓 몸짓으로 의사표현을 가장 잘 하였다. 우리의 우정이 싹트기 시작할 때부터 그는 성직자로서 해야하는 나의 일에 진정한 관심을 보여주었으며, 내가 봉사하는 동안에 나를 거들어 주겠다는 제의를 하기도 했다. 어느날 그는 나에게 세례를 받지도 않았다고 실토하면서 교인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말했다. 그래서 나는 세례를 받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구(敎區)의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하라고 권유했다. 그는 매주 목요일 저녁마다 지역 교구 모임에 신실하게 참여했다. 비록 모임이 지루하고, 때로는 복잡다기한 각양각색의 토론이 그의 정신적인 능력으로는 감당하기에 버거웠지만, 그는 그 공동체에 속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는 용납과 사랑을 느꼈다. 그는 많은 것을 받아들였으며, 반대로 관대한 마음을 가지고많은 것을 베풀기도 하였다. 세례와 견신례 및 부활절 전야제 때 처음으로 가진 성찬식은 그의 생애에 있어서 위대한 전환점 이 되었다. 비록 그의 능력상 많은 언어로 의사를 표현 하는 데는 제한을 받았지만, 그는 예수님을 몸으로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알았다.
간혹 나는 빌에게 세례와 견신례를 받은 사람은 새로운 소명을 갖게되며, 그 소명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 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빌은 나의 말을 아주 열심히 들어주었다. 그리고 내가 내가 성직자와 목 회자들에게 강의하려 워싱톤 D.C.에 갈 때 함께 가자고 부탁했을 때 그는 그것을 나의 사역에 동참하자는 권유로 받아들였다. 우리는 이 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라고 그는 우리가 떠나기 전 날 몇번이나 말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이 일에 있어서 동 역하고 있습니다. 당신과 나는 복음을 증거하기 위하여 워싱톤에 가고 있습니다 라고 나는 계속하여 말해 주었다. 
빌은 이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 가서 무엇을 어떻게 말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신경이 무척 예민해 있는 동안에, 빌은 그의 일에 놀라운 확신을 보였다. 그리고 나는 여전히 빌이 나와 함께하는 이 첫번 여행 이 그에게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반면, 빌은 처음부터 내내 나를 돕기 위해 간다 는 확신에 가득 차있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가 나보다 많이 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우리가 토론토에서 비행기에 발을 들여놓을 때에도 빌은 나에게 다시 한번 상기시켜 주었다.
우리는 이일을 함께 하는 것이지요. 그렇지요 그러자 나는 그럼요. 빌, 그렇고 말구요 라고 말해 주었다.
이 책에서 나는 워싱톤에서 강연한 내용을 먼저 밝힌 후에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왜 빌의 참석이 나의 강연보다 훨씬 지속적인 영향을 끼칠 수 있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여는글
다가오는 21세기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한 강연 요청은 나에게 약간의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만일 사람들이 바로 다음 달에 대하여 묻는다 해도 어찌할 바를 모르고 당황할것인데, 내가 어찌 다가오는 세기에 대하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숱한 내적갈등을 겪은 후에 나는 가능한 한 나 자신에게 정직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스스로 반문 했다. 너는 요즘 어떤 결정을 내리고 있으며, 그 결정들은 네가 미래에 대해 느끼는 방향을 얼마나 반영하고 있는가 아무튼 나는 하나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며, 내가 안팎의 새로운 곳으로 가는 그 길(방향)이 거대한 움직임 가운데 지극히 작은 한 부분이며 나는 그 중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는 것을 믿어야만 했다.
20년 후 학계(學界)에서 목회심리학, 목회신학, 기독교영성학(基督敎靈性學) 교수로서 나는 깊은 내적 위협을 경험하기 시작했다. 내가 50세에 들어서고 내 나이가 두 배나 되었음에도 나의 모습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때, 나는 이런 단순한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다. 내 나이가 많아짐에 따라 예수님께도 더 가까이 나아갔는가 성직 25년을 맞으면서 나는 기도생활도 형편없이 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는 다소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뜨거운 논쟁점들에 온통 정력을 쏟고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모든 사람들은 내가 훌륭하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들 말했지만, 내 마음 은밀한 곳에서는 나의 성공은 내 영혼을 위험한 수렁 속으로 몰아놓 고 있다 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이는 것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렇게 반문하기 시작했다. 깊이 묵상하며 드리는 기도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나의 생활과, 고독감 그리고 아주 절박하게 보이는 일에 항상 변화무쌍하게 말려드는 것은 성령을 점점 외면하고 있다는 증거가 아닌가 하고. 내가 그것을 분명하게 알기란 아주 아려운 일이었다. 비록 농담으로는 그러했을지언정 나는 지옥과 같은 상태에 대해서는 결코 말하지 않았음에도, 어느날 나는 나 자신이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살고 있으며, 전소(burn out:신경쇠약) 란 말은 영적인 죽음을 쉽게 풀이한 심리학 용어임을 깨달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살던 가운데 나는 계속하여 기도하였다.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께서는 내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시는지 나에게 보여주소서. 나는 당신을 따르고 싶습니다. 그저 이에 대하여 분명하고 확신한 것을 보여주시길 바랄 뿐이옵니다. 다행히 하나님께서는 응답하셨다. 정신장애자들을 위한 라슈공동체의 설립자 진 바니어(Jean Vanier)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저 심령이 가난한 자들 가운데 가서 그들과 함께 살아라. 그러면 그들이 너를 치유 해줄 것이다 라고 말씀하였다. 이 부르심은 너무나 분명하고 확실했기 때에 나는 순종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하바드대학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갔다. 즉 세계를 지배해 보고 싶었던 가장 멋지고 아름다운 곳에서 말도 거의 못하거나 전혀할 수 없는 사람들, 기껏해야 우리 사회의 요구의 가장자리에서 맴돌 것이라고 생각되는 사람들, 즉 소외된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옮겨간 것이다. 그것은 아주 어렵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이 어려움을 극복해 가는 과정중에 있다. 20년이 지나 내가 가고 싶었던 곳에 가며 선택한 것에 대하여 토론하는 자유함을 얻은 후에도 말이 거의 필요 없는 엄격하고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필요로 하는, 영육(靈肉)이 상한 사람들과의 소박하고 감춰진 삶이 그 즉시 영적인 전소(burn out)의 해결책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라슈에서 새로운 생활을 하면서 나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강연하는데 사용할 수 있는 새로운 말들을 얻게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로서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도전들을 발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정신장애자들과 함께 살아온 나의 삶의 모습을 몇가지 보여주고자 한다.
나는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하여 방향감각을 잡지 못하고 있을 때에, 그들이 새로운 방향 제시를 할 수 있는 몇가지 암시를 할 것이라고 바라마지 않는다.
나의 의견을 여러분과 나눔에 있어 나는 복음서의 두 가지 사건-예수님이 광야에서 유혹 받으신 사건(마4:1~11)과 내 양을 먹이라 면서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요21:15~19)을 기조(基調)에 깔아두고자 한다.

1. 현실과의 타협에서 기도로 유혹: 현실과 타협하라
정신장애자들과 한 집에서 살게 되면서 첫번째 나를 강타한 사건은, 내가 했던 많은 유익한 일들 가운데 그 어떤 것도 그들이 나를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요인으로 전혀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내 책을 읽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 어떤 것도 인용할 수 없었고, 또한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학교에 다닌 적도 없었기 때문에 내가 20년 동안이나 노틀담, 예일, 하바드 등지에서 보낸 것은 나에 대한 중요한 소개가 되지 못했다. 
그동안 내게 있어서는 중요시 되었던 전반적인 내 경험들조차도 전혀 무가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저녁 식사를 하던 중에 내가 한 보조원에게 고기를 몇 점 집어주었더니, 장애자 중에 하나가 그에게 고기를 주지 마시오. 그는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그는 장로 교인 입니다 라고 말하지 않는가.
과거에는 매우 실제적이라고 입증되었던 그 어떤 기술들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도 정말 불안의 원천이 되었다. 나는 그 순간 다른 사람들에게 내가 어떻게 인식되었는가에 전적으로 좌우되며, 인정과 거부, 포옹과 타 격, 웃음과 눈물에 노출되어 있는 적나라한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게 되었다.
어쩌면 마치 내가 나의 삶을 처음부터 아주 다시 출발하는 것처럼 보였다. 관계, 연줄, 명예 등은 더 이상 중요시되지 않았다.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것은 여러가지 면에서 여지껏 나의 새 생활의 경험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의 진정한 주체성을 재발견하게 했기 때문이다. 이 깨어지고 상하고 철저히 겸손한 사람들은 내 속에 내재(內在)한 현실 타협적인 자아-어떤 일은 보여주고, 증명하고, 내세울 수 있는 자아-를 내버리게 하였다. 또한 그들은 나에게 어떤 일의 성취 여부에 관계 없이 사랑을 주고 받을 수 있도록 열려진 완전히 약점 투성이 인 꾸밈없는 자아를 갖도록 만들었다.
내가 이 모든 사실을 말하는 것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현실에 철저히 비타협적이고, 또한 이 세상에서 약점 투성이인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 놓는 것 외에 아무 것도 주장하지 않아야 한다고 깊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방법이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로서 또한 에수님을 따르는 자로서 우리가 전해야만 하는 아주 귀중한 메시지는 우리가 어떤 일을 행하거나 성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 가운데 구속하셨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인생살이의 진짜 원천은 바로 그 사랑이라는 것을 선포하도록 우리를 선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첫번째 받은 유혹은 현실과 타협하라는 것으로 돌을 빵으로 바꿔보라는거였다. 아, 나도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하고 얼마나 소원했던가 나는 영양실조와 수질오염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가 죽어가는 페루의 리마(Lima) 변두리 지역에 있는 신흥 도시들을 두루 다녀보면서, 길거리에 쫙 깔려있는 먼지투성이의 돌에게 신비한 마술을 부려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수천개의 돌 가운데 어느 것을 집어 들든지 크로사왕(초승달 모양의 롤 빵), 커피케익(아침에 먹는 과자빵)이나 아주 멋드러진 건포도롤빵으로 변화되고, 또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두 손을 컵 모양으로 오므려 저수지의 썩은 물들을 받아내면 그것이 맛있는 우유로 변해 즐거이 마시게 되는 신비한 은사를 받았다면 거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배고프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주고 도와주도록 목회자와 성직자로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닐까 또한 우리가 그들의 삶에 변화를 일으켰다고 그들이 느낄 수 있는 어떤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지 않았는가 병든 사람을 치료하고, 굶주린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며, 가난한 사람들의 고 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우리는 부름받지 않았는가 예수님께서도 똑같은 문제에 직면했었다. 하지만 그분은 돌을 빵으로 변화시키는 그런 지극히 현실 타협적인 행동을 함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보라는 요구를 (시험을) 받았을 때, 말씀 선포 라는 자신의 사역을 고수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이 사역을 감당하면서 겪은 가장 큰 고통은 소위 자존심이 깎여 들어가는 것이었다. 오늘날 많은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점점 자신들이 거의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그들은 아주 바쁘게 보내지만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그들의 노력은 효과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그들은 교회 출석하는 교인의 숫자가 점점 감소하는 현실에 직면하고 있으며, 심리학자들이나 정신과 의사들, 결혼 상담가들과 의사들이 자기들보다 더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을 자주 보기도 한다.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고통스러운 현실은 그들의 뜻을 따르고 그 뜻에 매력을 느끼는 젊은이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목사나 신부가 존재한다는 것과 그들처럼 되고자 하는 것은 더 이상 생명을 바칠 만큼 고귀한 가치가 깃든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오늘날 교회 안에 칭찬의 소리는 거의 없고, 비판의 소리만 가득차 있는데 어떤 상태이든 의기소침해지지 않고 그런 상황 속에서 오랫동안 헌신할 수 있겠는가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세속적인 사회의 사람들은 큰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 살 수 있어. 하나님도 필요없고 교회도 목사도 필요없어.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관리할 수 있단 말이야. 만일 우리가 그 렇지 못하다면, 우리 스스로를 관리하기 위해서 더 노력해야 한다. 이 문제는 믿음 부족이 아니라 능력 부족이 다. 만일 네가 병들었다면, 유능한 의사가 필요하고, 네가 헐벗고 굶주린다면 유능한 정치인이 필요한 것이다, 기술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면 유능한 엔지니어가 필요한 것이며, 전쟁이 터진다면 유능한 협상자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 교회, 목회자들이 수세기 동안 무능력의 골을 메워왔지만 오늘날은 그 골이 다른 방법으로 메워지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실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더 이상 영적인 대답이 필요없다. 이런 세속화의 풍토 속에서 기독교 지도자들은 자기들이 점점 더 현실적이 되지 못하고 외곽으로 밀려나는 것을 느끼고 있다. 많은 목회자들은 이래도 계속 성직에 남아있어야 할 것인가 하고 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간혹 그 들 가운데서는 보다 나은 적성을 계발시켜 성직을 떠나기도 하며,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적절한 헌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강연하고자 하는 내용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이야기이다. 우리 시대에 이룩된 모든 위대한 성취 아래에는 절망의 심연의 도사리고 있다. 능률과 통제는 우리 사회에서 아주 중요한 바램인 반면에 고독감, 격리감, 우정과 친밀성의 결핍, 관계성의파괴, 권태감, 공허감, 억압감, 자신을 무용지물로 깊이 자학하는 감정 등은 세상에서 성공한 수백만 사람들의 가슴마다 꽉꽉 채워져 있다.
엘리스(B. E. Ellis)의 소설 제로 이하(Less Than Zero) 는 그 당시 부와 성공과 대중적인 인기 및 권력의 뒷면에 숨겨진 도덕성과 영적 기근을 아주 생생하게 묘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는 극적으로 또 단선적으로 LA거부(巨富) 및 예능인들의10대 자녀들의 성생활, 마약 복용, 폭력 등을 묘사했다. 이런 타락의 모든 이면에는 너무도 분명하게 이런 부르짖음이 들려오고 있다. 나를 사랑해 줄 사람 없습니까 진정으로 나를 돌보아 줄 사람 없습니까 나를 위해 집에 머물러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내가 절제할 수 없었을 때, 내가 울고 싶을 때 나와 함께 있어 주기를 원하는 사람 없습니까 나를 붙들어 주고, 심어줄 사람 없습니까 우리가 표면 상 자신이 넘치는 사회를 보고 있을 때, 비현실적(현실과 비타협적)이란 느낌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널리 퍼 져 있다. 낙태를 할 때 발달된 의학기술과 점증하는 비극적인 요소는 우리 사회에서 정신장애자의 수를 급격히 감소시킬지는 모른다. 하지만 벌써부터 분명한 것은 이렇게 될 때 어느 곳에서도 치유할 대책 조차도 없는 철저한 영적. 도덕적 장애의 고통을 가진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진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새로운 기독교 지도자의 필요성이 보다 분명해진다. 앞으로는 세상 풍조와 결코 타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사람이 기독교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화려한 성공의 밑거름이 된 고통과도 연계성 을 가질 수 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빛을 자기의 성역에서 증거할 수 있게 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소명이다.

질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양을 치라고 명령하시기 전에 이렇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예수님께서는 또 다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그리고 또 세번째로 예수님께서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셨다. 이 질문이 우리에게 현실과 타협하지 말 것과, 진정한 의미에서 자신감을 동시에 부여해주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질문을 모든 기독교 사역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으로 서 받아 들여야 한다.
예수님을 바라보자. 세상은 그에게 아무런 관심도 갖지 않았다. 그분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 그분의 사 랑의 메시지는 권력과 능률과 통제를 추구하는 세상에 의해거 부당했다. 하지만 그분은 영광의 형체에 상처를 지니시고 볼 눈이 있고, 들을 귀 있으며 또한 이해할 마음이 있는 몇몇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거부 당하고, 오해 받고, 상처 입은 이 예수님은 단순히 이렇게 물으셨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참으로 나를 사랑하느냐고. 
오직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을 전하는 데만 관심을 쏟으신 그분이 유일하게 하신 질문이 바로 네가 날 사랑하느냐 이다.
이 질문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너를 중요하게 생각하느냐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해내고 있느냐 네가 어떤 성과를 보여줄 수 있느냐 의 차원이 아니라 네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랑을 나누고 있느냐 의 차원이다. 아마도 이 질문을 다르게 표현하면 너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을 알고 있느냐 로 적용시켜 볼 수 있다. 고독과 절망 속에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들, 즉 용서하고 돌아보며 치유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한다. 그 마음은 의심이 없으며, 원한도 없고, 분개하는 마음도 없을 뿐더러 미워하는 기미도 전혀 없다. 그 마음은 오직 사랑을 주기 원하며, 또한 그 응답으로 사랑을 받기 원하는 마음이다. 그 마음은 위로와 소망을 주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신뢰하기를 매우 거부하는 모습과 인간의 심각한 고통을 목도함으로써 엄청난 고통을 당하는 마음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는 예수로 성육신하신, 즉 육신의 마음 을 가지신 하나님의 마음을 참으로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은 사랑-최상의 사랑-이시며, 매순간 인간의 영혼을 갉아먹는 공포, 격리, 절망 등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지속적으로, 철저하게, 매우 구체적으로 선포하고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아주 단순하고 진부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어떠한 조건이나 제한없이 자기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이런 무조건적이고 무한한 사랑을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이라고 불렀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해 주셨기 때문이다 (요일4:19)라고 그는 말했다. 우리가 부모님과 스승, 배우자 그리고 친구들로부터 받는 확신, 애정, 인정, 격려, 지지 등은 종종의 심과 좌절, 분노, 원망 등을 남겨주는 소위 두번째 사랑이다. 우리모두는 이 두번째 사랑이 얼마나 제한적이고, 깨어지기 쉽고, 덧없는 것인지 알고 있다. 이런 사랑을 숱하게 표현하는 뒷면에는 거부, 취소, 학대, 공갈, 폭 행뿐만 아니라 오히려 증오의 가능성까지도 포함되어 있다. 오늘날 많은 영화와 연극은 인간관계의 모호성과 양면 가치를 표현하고 있으며, 이 두번째 사랑의 긴장과 스트레스가 심하게 느껴지지 않는 우정, 결혼, 공동체는 없다. 
종종의 우리 일상 생활에서 유쾌한 감정 뒷면에는 소위 포기, 배신, 거부, 단절, 손실 등으로 일컫는 숱한 결함들이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이 모든 것은 두번째 사랑의 어두운 측면이며 우리의 가슴 속에서 결코 완전히 사라질 수 없는 어두움을 드러내고 있다.
두번째 사랑은 첫번째 사랑의 깨어진 모습일 뿐이다. 첫번째 사랑은 아무런 어두운 빛도 없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은 참으로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실체로서 성육신을 하신 데에서 찾을 수 있다. 그분의 마음속에는 생수의 강이 흐르고 있다. 그분은 큰 소리로 이렇게 부르신다. 누구든 지 목마른 사람은 나에게로 오라 나를 믿는 사람은 와서 마셔라 (요7:39).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 영혼이 쉼을 얻을 것이다 (마11:28~29).
그 마음 속에서 네가 날 사랑하느냐란 말이 나왔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과 예수임을 사랑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안다는 것은 곧 참 마음(the heart)을 안다는 것을 뜻한다. 우리가 그런 지식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어느 곳을 가든지 치유, 화해, 새로운 삶과 새로운 희망을 심어주는 일 등을 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을 것이다. 현실과 타협하며 성공하고자 하는 욕망은 마침내 사라져 버릴 것이며, 오직 하 나의 소원은 온 인류가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당신은 사랑스러운 존재입니다. 두려워 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우리 몸의 모든 기관을 만드시고, 어머니의 태에서 우리를 베 짜듯 이 지으셨습니다 (시편139:13을 보라).

훈련: 묵상기도
현실과 타협하여 적당히 살아보려는 욕망의 지배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아는 지식 안에 안전하게 거 하려면 우리는 신비주의자가 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신비주의자란 자신을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 안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사람을 말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필요한 어떤 중심점이 있다면, 그것은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네가 날 사랑하느냐 고 계속하여 물으시는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하는 훈련일 것이다. 그 훈련이란 묵상기도를 말한다.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긴급한 문제만을 좇아다니게 되는 것과 하나님의 마음이나 자신의 마음에 대해 무감각해 지는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비록 길거리에 있을 때에나 이리 저리 옮겨다닐 때나, 간혹 폭력과 전쟁 소리에 휩싸인다해도 묵상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다. 우리가 벌써 자유함을 얻었다는 것과, 벌써 안전하게 거할 처소를 찾았 다는 것과, 벌써 하나님께 속했다는 사실을 우리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증거들이 그렇지 않다고 계속하여 주장한다 고 하여도, 우리는 묵상기도를 통하여 그같은 사실들을 신뢰할 수 있다.
미래의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도덕적인 사람이 된다거나 훈련을 잘 받았다든가 동료들을 도우려는 간절한 열망과 그 시대의 불붙는 논쟁들에 대하여 창조적인 대응책을 제시할 능력이 있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그 모든 것이 아주 가치있고 귀중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기독교 지도자의 마음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중심 질문은, 미래의 지도자들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존전에 거하기를 간절히 사모하는 사람들입니까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고자 합니까 구체적인 하나님의 말씀에 접하고자 합니까 하나님의 그 끝없는 인자하심을 맛보고자합니까 이다.
신학(theology) 의 원래 의미는 기도 속에서 하나님과의 연합(union with God in prayer)이다. 오늘날 신학은 많은 다른 분야들과 병존하는 하나의 학문 영역으로 변해가고 있으며, 신학자들은 자주 기도하기가 퍽 어렵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는 신학의 신비한 면을 개선하여, 하나님을 충심으로 알기 원하는 마음으로부터 모든 말씀이 선포되어지고, 모든 충고가 제시되어지고, 모든 방법들이 개발되도록 하는 것은 절대 필요한 일이다. 최근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 주요 논쟁점들 이를테면 교황권, 여성의 안수 문제, 신부의 결혼, 동성애, 산아제한, 낙태, 안락사 등의 문제들은 일차적으로 도덕적인 수준에서 일어나는 문제들 이다. 그 도덕적인 수준을 놓고 서로 다른 파벌들이 옳거니 그르거니 하고 투쟁한다. 하지만 그 투쟁은 간혹 모든 인간 관계의 밑바닥에 깔려있는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체험함으로써 없어질 수 있다.
우측-날개(우익), 세력, 보수주의, 자유주의, 좌측-날개(좌익) 같은 말들은 사람들의 입장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 되어 왔다. 그리고 많은 토론들은 진리를 추구하기 위한 영적인 것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권력을 쟁취하기 위한 정 치적인 투쟁으로 전개돼 온 것처럼 보인다.
우리 시대의 불붙는 논쟁점들에 대하여 박식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하여 단순히 기독교 지도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지도력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영속적이고 친밀한 관계에 깊이 뿌리를 박 고 있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그들의 언어와 충고와 지침의 원천이 되어야 함을 알아둘 필요가있다. 묵상기도 훈련을 통하여, 기독교 지도자들은 사랑의 목소리를 반복하여 듣는 법을 배워야 하며, 어떤 문제가 발생하든 그에 대처할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그 사랑 속에서 찾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불붙는 논쟁점들을 다룰 때 하나님과 깊은 개인적인 관계가 배제된다면 너무도 쉽게 불화가 발생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우리의 자의식은 주어진 주제에 대하여 우리의 의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삶의 원천을 하나님과 개인적인 아름다운 관계로 견고하게 뿌리를 내릴 때, 현실과 타협하지 않고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으며, 고정관념 없이도 확신할 수 있다. 또한 불쾌하지 않게 기꺼이 대항할 수 있고, 물러빠지지 않고도 온화하고 또한 용서할 수 있으며, 교활하지 않은 진정한 증거를 할 수 있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은 진정 아름다운 열매를 맺어야 하며, 도덕적인 것에서 신비적인 것으로의 전환이 요구된다.

2. 대중의 스타 에서 성직자로 유혹: 극적으로 해보라
이제는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올 때 일어났던 또 다른 경험들을 말하고자 한다. 그 경험이란 성직의 공유이다. 나는 신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또한 그렇게 받은 교육으로 말미암아 내 자신이 성직이란 근본적으로 개인적인 일 이라고 믿었다. 나는 훈련을 아주 잘 받아야 했고, 학교에서 요구하는 모양을 잘 갖추어야 했다.
그리고 6년 간의 훈련과 자질형성 과정 이후, 나는 설교, 성례 인도, 상담, 교구 관리등을 잘 할 수 있게 되어야 했다. 나는 스스로 길을 걸으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에게 도와줄 모든 필요한 것들을 꽉꽉 채운 아주 묵직한 배냥을 짊어지고 머나먼 도보 여행을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물음에는 답이 있었고, 문제에는 해법이 있었으며, 고통에는 그에 합당한 약이 있었다.
어느 문제가 닥쳐오든 모든 걸 다 알고 있었다. 수년 후에 나는 그러한 인식들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기본적인 나의 개인주의적 성직관은 변하지 않는다. 교수가 되었을 때 나는 오직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는 데서 큰위로를 얻었다. 나 스스로 주제와 방법을 선정하였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학생들까지도 내 마음대로 골라서 가르쳤다. 내가 하는 일의 방법에 있어서 그 누구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수업을 끝낸 다음에는 그럴 듯하다고 여겨지는 일은 무엇이든지 완전히 내 마음대로 하였다. 결국 나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의 개인적인 삶을 개인적으로 살아갈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슈공동체로 갔을 때 내속에 있는 이런 개인주의는 급진적으로 변화되었다. 그곳에서 장애자들과 더불어 신실하게 살아보려는 숱한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에 불과했다. 내가 성직자라는 사실이 개인적인 행동을 할 수 있는 자격증이 되어주지 않았다. 갑자기 모든 사람들이 매시간 나의 행방을 알기 원했으며, 매순간에 대해 나는 책임을 져야 했다. 한 사람이 나의 수행자로서 지명되었고, 작은 모임이 하나 만들어져서 내가 어떤 초대는 받아들이고 어떤 초대는 거절해야 하는지를 간여하였다.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내게 가장 많이 던진 질문은 오늘밤 당신은 집 에 있습니까 였다. 한번은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 가운데 트레버(Trevor)에게 안녕 이란 말 한 마디도 없이 여행을 떠났다. 그런데 내가 도착지에서 받은 첫번째 전화는 트레버가 눈물겹게 말하는소리였다. 헨리, 왜 당신 은 우리 곁은 떠났단 말입니까 우리는 정말 당신이 보고 싶어요. 제발 어서 돌아와 주세요. 이 공동체에서 상처받은 사람들과 살아오면서, 나는 내 인생의 대부분이 높다란 탑 이쪽에서 저쪽 끝까지 이은 가느다란 선을 타고 다니면서 언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질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항상 다른 사람들의 박수갈채만 고대하는 줄타기 곡예사로서의 삶이었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받은 두번째 유혹은 정확하게 말하면 그를 스타로 열렬하게 환호해 줄만한 어떤 일을 극적으로 해보라는 것이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보아라. 그러면 천사를 이 손으로 너를 붙들어서 네 발이 돌에 부딪 히지 않게 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한 사람의 곡예사가 되는 것을 거부했다. 그분은 자신을 스스로 증거해 보이지 않으셨다. 그분은 활활타는 석탄 위를 걷지도, 불을 삼키지도 않으셨고, 자기가 한 말이 상당히 권위가 있어 사자가 척척 움직여 줄 것이란 것을 증거해 보이기 위해 사자의 입속에 손을 집어넣지도 않으셨다. 그분은 이렇 게 말씀하셨다.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당신이 오늘날의 교회를 바라보면, 목회자와 성직자들 사이에서 개인주의가 유행하는것을 쉽게 알아차릴 수 있다. 우리들 가운데 너무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자랑할 만큼 다재다능한 솜씨를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일단 아무 것이라도 보여줄게 있다면 그것을 자기 혼자만 하여야 할 일들이라고 느끼고 있다.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자신은 수천 명의 사람들을 끌어들일만한 능력도 갖고 있지 않으며, 많은 변화를 일으킬 수도없으며, 아름다운 예배의 식을 창조할 재주를 갖고 있지도 않으며, 또한 바라는 대로 젊은이나 어른들에게 인기를 누리고 있지도 않고, 기대 하는 대로 성도들이 필요에 따라 반응할 수도 없는, 소위 실패한 줄타기 곡예사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은 아직도 관념상으로는 그 모든 일들을 성공적으로 잘 해낼 수 있다는 인식을 하고 있다. 우리 시대의 경쟁 사회에서 너무도 분명한 스타의식과 개인적 영웅주의는 교회에서 전혀 조화가 되지 않는다. 모든 일을 혼자 하려드 는 소위 자수성가형의 사람들에게는 지배적인 모습이 너무도 강하다.

과제: 내 양을 먹이라 
베드로에게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세번이나 물으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내 어린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신 후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선교의 과제를 주셨다. 우리 의 문화 통념상 이에 대하여 마치 베드로가 지금 영웅적인 전도자로 파견된 것처럼 아주 개인주의적인 것으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목양(牧羊)에 대해서 말씀하실 적에 그분은 우리에게 순한 양떼를 돌보는 용감 하고 외로운 목자를 상기시키고자 하신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방법으로 주님께서는 목양이 더불어 함께 나누는 것이며 또한 공동체험이어야 함을 분명히 하셨다.
무엇보다도 먼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둘씩 짝지어 보내셨다(막6:7). 우리는 둘씩 짝지어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계속하여 잊어버리고 있다. 우리는 혼자서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우리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복음을 선포 하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여기에 바로 하나님이 허락하신 지혜가 있다.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마음을 같이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19~20). 여러분은 이미 오래 전에 혼자 여행하는 것과 함께 여행하는 것이 얼마나 현격한 차이가 있는지를 스스로 깨달았는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하여 깨닫는 것은 나 혼자 있을 때 예수님을 진실로 신뢰하는 것이 무지무지하게 어렵다는 것이다. 나와 함께 기도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며, 또한 가까이에서 영적인 과제를 함께 이야기할 형제 자매가 필요하다. 뿐만 아니라 나에게 도전이 되고, 나의 몸과 마음과 영혼을 순수하도록 유지시켜 줄 형제 자매가필요하다. 그러나 훨씬 중요한 것은 치유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진리를 말씀하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며,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이다. 우리 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을 선포할 때 이 사실을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참으로 우리가 함께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할 때는 언제든지 우리가 우리들의 이름이 아니라 우리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나아간 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보다 쉽게 인식시킬 수 있다.
지난날 나는 수없이 많은 여행을 하면서, 전도도 하고 명상의 시간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대학 졸업식 같은 데에 서 기조연설도 하였다. 그러나 나는 항상 혼자 떠났었다. 하지만 라슈공동체에 들어간 지금은 내가 어디에 강연을 가려고 할 때면, 공동체에서는 언제든지 꼭 한 사람의 수행자를 딸려 보낸다. 내가 빌과 함께 여기에 있는 것은 우 리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야 할 뿐만 아니라 공동체 안에서 사역을 감당하여야 한다는 견고한 비젼의 표현이기도 하다. 빌과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의 띠로 묶어주시고 또 우리가 함께 길을 걷는 동안 우리와 다른 사람들에게 당신을 계시해 주실 것이라고 확신하는 우리의 공동체에 의해 여러분에게 보내졌다. 하지만 그 이상의 것이 있다. 
목양이란 더불어 함께 체험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는 경험이다.
예수님께서는 목양하는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신다. 나는 선한 목자이다. 이것은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그래서 나는 양들을 위해내 생명을 바친다 (요10:14~15). 예수님께서 좋은 목자이신 것처럼 그분 또한 우리가 좋은 목자되길 원하신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그분의 양을 먹이고 돌보라고 하실 적에, 위탁자의 문제들을 알고 양을 돌보는 전문직업인 으로서가 아니라 이미 알고 있거나 알려진, 혹은 돌보고 있거나 돌보아야 할, 용서하거나 용서받아야 할, 사랑하거나 사랑받아야 할 상처받기 쉬운 형제. 자매들을 보살피길 원하셨다. 우리는 훌륭한 지도자란 지도받는 사람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젖어있다. 의 학,정신치료 그리고 사회사업은 오직 일방적인 봉사의 모델을 우리에게 제시해 주고 있다. 봉사를 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역할은 상호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자기와 개인적인 깊은 관계도 맺지 않은 사람에게 자신의 삶을 바칠 수 있단 말인가 자기의 삶을 바친다는 것은 자기의 신앙과 의심,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용기와 공포 등이 다른 사람들이 생명의 주님과 더 가까와져가는데 유용하게 쓰이도록 내어놓 는 걸 의미한다.
우리는 치유자도 아니고, 화해자도 아니며, 삶의 증여자도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돌보아 준 만큼 누군가가 우리를 돌보아 주어야 할 죄 많은 사람이며, 깨어지기 쉽고, 상처받기 쉬운 사람들이다. 목양에서 신비스러운 일은 택함 받은 우리가 행하는 지극히 제한적이고 조건적인 사랑이 하나님의 무한하고 무조건적인 사랑에 이르는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참 목양은 서로 긴밀한 관계가 있어야 한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함께 거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목자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거나 사랑하지 못한다면 목양 자체는 다른 사람 위에 군림하는 종교 적인 권력 이란 교활한 모습으로 갑자기 변해버리거나, 권위적이고 독재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능률적이고 통제적인 세계는 에수님께서 목양하시던 방법으로 목양하기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모델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소위 돕는 직업이라고 하지만 그것도 철저히 세속화되었고, 그 관계성도 역할의 혼동으로 말미암아 나약하고 위험한 모습만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지도자는 세상에서 말하는 지도자와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것은 로버트 그린리프(Robert Greenleaf)가 사용한 말처럼 종이며 지도 자 이다. 즉 지도자들도 상처받기 쉬운 종이며 사람들이 그들을 필요로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들 역시 사람 들을 필요로 한다.
미래의 교회가 요구하는 완전히 새로운 유형의 지도자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지도자의 모델은 모름지기 세상의 권력 잔치 에 모델을 두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자기의 육체를 기꺼이 내어놓은 섬기는 지도자, 예수님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훈련: 고백과 용서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미래의 지도자가 개인적인 영웅주의의 유혹을 극복하려면 어떤 훈련이 필요합니까 나는 고백과 용서의 훈련이라고 제안하고 싶다. 미래의 지도자들이 깊은 묵상기도에 잠기는 신비주의자여야 하는 만큼 또한 그들은 상한 심령을 주님 앞에 내놓고 고백하는 사람이 되어야 하며, 그들이 섬기는(목양하는)사람들에게도 용서를 구해야 한다.
고백과 용서는 죄 많은 우리들이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모습이다. 나는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가장 적은 고백을 하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하곤 한다. 고해성사도 공동체가 갖고 있는 이러한 취약성을 그대로 남겨두는 경우가 많다. 각종 죄악들이 고백되어지고, 종교적인 언어로 용서가 말해지지만, 예수님의 존전에서 체험할 수 있는 화해나 치유가 일어나는 진정한 만남은 참으로 힘든다. 거기엔 두려움과 거리감과 일반화된 되풀이가 많고, 진정한 경청과 상담과 해결은 별로 없으니 진정한 의미의 고해성사는 기대하기 어려운 것이다.
목회자와 성직자들이, 자기들이 섬기는 사람들에게는 자기들의 죄와 결점들을 숨기고 멀리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서나 위로를 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스스로 성도들에게 사랑과 관심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그리고 목자가 양들을 알지 못하고 깊이 사랑하지 못할 때, 어떻게 양들이 그 목자를 돌보거나 그들이 성직을 신실하게 지켜나갈 수 있도록 힘이 돼 줄 수 있겠는가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정서적 고독과 애정과 친밀감에의 깊은 욕구로 괴로와하며 때때로 성도들의 면전에서 뿌리깊은 죄책감과 부끄러움 등을 겪는다는 사실에 대하여 전혀 놀라지 않는다. 종종 그들은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내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며 또한 공상이 무엇인지, 내가 공부한답시고 혼자 앉아있을 때에 내 마음은 어떤 모습으로 방황하고 있었는지를 성도들이 안다면 어떻게 하나 평생 헌신적으로 일해온 지도자들도 아주 쉽게 노골적인 세속정욕에 넘어지기 쉽다. 그 이유는 그들이 성육신의 진리를 삶에 어떻게 적용시켜야 하는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과 자신이 속한 공동체를 서로분리하고 있으며, 또한 멀리 떨어진 곳에서나 익명의 장소에서는 자신들의 필요를 아예 무시해버리거나 아니면 욕구대로 다 충족시켜 버리는 경향이 있다. 그럼으로써 자신의 내적 세계와 자신이 전하는 복음 사이에는 점점 심한 분열이 생겨나는 이원적인 현상을 경험한다. 즉 영혼이 영적으로 되어갈 때도, 육신 생활은 정욕적으로 되 어가는 것을 경험한다.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들의 사역을 감당하면서 머리속으로는 꼭 전해야 할 가치있는 이상으로서 복음에 관계된 것을 구상하지만, 육체는 감정과 정욕을 추구하며 큰 소리로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면서 여지없이 앙갚음을 해온다. 기독교 지도자들은성육신의 삶을 살기 위하여 부름을 받았다. 즉 오직 그들 자신의 몸 뿐만 아니라 공동체라는 전체의 몸을 위하여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고백과 용서는 정확히 말하면 도피적 영성과 정욕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진정한 성육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훈련이다. 고백을 통하여 그들은 정욕의 어두운 세력을 몰아내고 공동체의 빛 가운데 거할 수 있게 된다. 용서를 통하여 그들은 의심이 가셔지고, 원한이 지워져 버리고, 또한 영육 간에 새로운 통합이 가능해 진다.
아마도 이것은 아주 비현실적인 소리로 들릴지 모르지만, AA(Alcoholicy Anony maus-알콜중독 방지회)나 ACA(Adult Children of Alcoholics-알콜 중독자 자녀들을 위한 모임)같은 치유 공동체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이런 훈련이 치유의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성직자와 목회자를 포함한 많고 많은 크리스챤들은 성육신에 대한 깊은 의미를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알게되는 것이 아니라, AA와 ACA의 12단계 훈련 속에서나 치유를 추구하는 고백하는 공동체 안에 하나님의 치유가 실재(實在)한다는 것을 깨달음으로써 성육신의 깊은 의미를 알게 된다.
이 모든 것은 분명하게 말해서 목회자나 성직자들이 스스로의 죄나 실패를 강단이나 매일매일의 사역에서 다 털어놓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건전하지 못한 것이며 또한 분별없는 것으로서, 섬기는 지도자의 모습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목회자와 성직자들도 그들의 공동체에 완헌한 회전으로 부름 받았고,공동체에 함께 책임을 지며, 공동체로부터 애정과 지원을 필요로 하고 있고, 상처 입은 자아를 포함한 그들의 전존재로서 사역 하도록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이다.
나는 성직자와 목회자들 가운데 특별히 고통으로 번민하는 사람들과 관련된 사역을 하는 분들은 자신을 위해서도 참으로 안정된 공간이 필요하다고 확신한다. 그들도 그들들 더 깊은 하나님의 사랑의 신비 속으로 인도해 줄 사람들과 함께 자기의 깊은 고통과 고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필요한 것이다.
개인적으로 나는 다행이도 라슈공동체에서 그런 공간을 확보했으며, 그곳은 종종 나의 감추어진 고통에 관심을 가져주는 동료들과 나의 사역을 계속할 수 있도록 점잖은 충고와 사랑의 격려를 해주는 친구들과 함께 나눌 수 있는 공간이 되어주고 있다.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은 자신을 위해서 그런 안전한 공간이 있어야 한다.

3. 지배하는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유혹:권력을 잡아라
이제는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긴 것과 관련된 세번째 나의 경험을 말해보기로 하겠다. 지배자의 자리에서 섬기는 자리로 위치변경 된 사실은 너무도 분명했다. 이전에 나는 나이를 먹어가고 점점 성숙해감에 따라 내가 점차적으로 지도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었다. 사실 나는 해가 더해갈수록 자신있게 살아왔다. 나는 어떤 것이라도 깨닫을 수 있고, 또 그것을 표현할 능력도, 들을 능력도 있다고 느꼈다. 자제력도 날로 더해갔다.
그러나 정신장애자들과 그 조력자들을 돕기 위해 라슈공동체에 들어왔을 때, 모든 통제력은 풍지박산이 되어버렸다. 나는 매시간마다, 매일같이 매달동안 깜짝 놀랄만한 사건의 연속임을 깨달았다. 간혹 그 사건들은 내가 거의 예기치 못한 것들이었다. 빌은 내 설교에 대한 자신의 생각(그것이 찬성이든 반대이든)을 굳이 예배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말하지도 않았다. 나의 논리적인 생각은 더 이상 논리적인 반응을 얻어내지 못했다. 사람들은 종종 내 말이나 행동이 그들의 삶과는 별 상관이 없다는 것을 깊이 느끼는 눈치였고, 또 그것을 내게 말해 주었다. 나의 실제 감정과 기분은 미화(美化)된 언어나 설득적인 주장들에 더 이상 가려져 있을 수 없었다. 지적인 능력이 거의 없는 사람들은 대개 자기 마음-사랑하는 마음이든, 분한 마음이든, 갈급한 마음이든-을 직접적이고 원색적으로 표현한 다. 나와 함께 살게된 그들은 나의 지도력의 정도가 아직도 복잡한 상황, 혼란스러운 감정, 분한 마음을 억제하기를 갈망하고 있는 수준이라는 것을 자기들도 모르는 사이에 서서히 인식시켜 주었다. 이런 예기치 못한 상황 아래 서 내가 안정을 찾기까지는 상당히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아직도 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입을 다물고, 규칙을 지키고, 나의 말을 들으며, 내가 한 말을 믿으라고 압박감을 주며 말하는 때가 있다. 그러나 나는 또한 지도 한 다는 것은 많은 경우에 지도 받는다는 것을 뜻한다는 신비함에 점점 눈 떠가고 있다. 나는 새로운 것을 무궁무진하게 많이 배우고 있다. 꼭 고통과 상한 심령들과의 괴로운 싸움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은사와 은혜에 대해서도 그들은 그 어떤 학교에서도 내가 결코 배워본 적이 없는 기쁨과 평화와 사랑과 관심과 기도에 대하여 가르쳐 주었다. 그들은 또한 나에게 그 어느 누구도 가르쳐준 적이 없는 슬픔과 소요, 공포와 무관심에 대해서도 가르쳐주었다. 그들 중에 대부분은 간혹 내가 실망과 절망 속에 빠져있을 때, 나에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을 펀뜻 보여주기도 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세번째 유혹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그것은 권력에 대한 유혹이다. 내가 이 세상 모든 나라의 영광을 너에게 주마 라고 마귀가 예수님께 말했다. 지난 10년 동안 프랑스, 독일, 화란, 캐나다, 미국 등지에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는 가에 대한 핵심적인 이유를 나 자신에게 자문자답해 볼 때 면 권력(power) 이란 말이 내 마음 속에 쉽게 떠오른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가장 큰 아이러니 가운데 하나는 기독교 지도자들이 말은 예수님-신적 능력을 스스로 버리시고 자신을 비워 우리와 같이 낮아지신-의 이름으로 한다 하면서도 실제로는 온갖 권력-정치. 군사. 경제. 도덕. 영적 권력-의 유혹에 끊임없이 굴복해 왔다는 것이다. 권력 이 복음 전파의 유용한 도구가 될 것이라는 유혹은 실로 가장 큰 유혹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권력이 하나님과 사람의 유익을 위해 사용되기만 한다면 권력을 쥐는 것은 좋은 것이라는 애기를 줄곧 들어왔고, 이제 우리 자신도 그렇게 말하고 있다.
바로 이런 이론적인 배경 아래 십자군이 일어났으며, 종교재판소들이 설립되었고, 인디언들은 노예가 되었다. 또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는 자리가 굉장히 선호를 받게 되었으며, 감독의 저택과, 현란한 대성전과 화려한 신학교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양심에 있어서도 숱한 도덕적인 조작이 자행되었다. 사실 11세기의 교회 대분열, 16세기의 종교개혁, 20세기의 세속화 바람 등과 같은 교회사의 위기들 굽이굽이에는 정작 가난하고 권력 없는 예수의 추종자들이 돼야 할 사람들에 의해 저질러진 권력 놀음이라는 것이 그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음을 우리는 잘 알 고 있다.
권력에 대한 유혹을 그토록 당연하게 보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도 권력은 다루기 힘든 사랑의 문제를 쉽게 대치해 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하나님이 되는 것이 훨씬 쉬워 보이며,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당연히 쉽게 보이는 법이며, 삶을 사랑하는 것보다 삶을 소유하는 것이 물론 쉬워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고. 우리는 이렇게 요구한다. 주님의 나라에서 우리를 오른쪽과 왼쪽에 다 앉혀 주시렵니까 (마20:21).
뱀이 너희가 이 나무의 열매를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혀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분별하게 될 것 (창3:5)이라고 말한 이래, 우리는 줄곧 사랑 대신에 권력을 대치해 보라는 유혹을 받아왔다. 예수님께서는 광야에서 골고다언덕까지 가장 괴로운 유혹을 받으며 사셨다. 길고도 고통스러운 교회사의 역사는 사랑보다는 권력 을, 십자가의 희생보다는 지배력의 구사를, 섬기기보다는 지도자가 되기를 선택하도록 유혹받은 사람들의 역사이다. 이런 유혹에 끝까지 저항하여, 우리에게 희망을 주고 있는 사람들이야말로 참성도라도 할 수 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친밀한 관계가 부재한 곳에 권력의 유혹이 극대화된다는 것이다. 사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는 건강하 고 친밀한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는지를 모른 채 그저 힘과 권력만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많다. 많은 신앙의 거성들 은 사랑을 줄줄도 받을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도전: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지금 우리는 다시 예수님을 바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에게 다른 사람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는가에 대해 세번씩이나 물으시고 그에게 세번의 같은 명령을 하신 뒤에 주님께서는 아주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말하노라.
네가 젊었을 때는
스스로 네 옷을 차려입고
네가 원하는 곳에 마음대로 다녔으나, 네가 늙으면
너는 팔을 벌리고
다른 사람이 네 옷을 입혀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너를 데려갈 것이다 (요21:18).

이 말씀은 내가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가도록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 말씀은 기독교 지도자상의 핵심을 건드리고 있으며, 우리를 권력으로부터 해방시켜 예수님의 겸손한 길을 따르게 하는 새로운 길을 제시해 주고 있다. 세상은 이렇게 말한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남에게 신세를 지고 살면서 네가 가고 싶은 길은 걸을 수 없었지만, 어른이 되어서는 네 마음대로 결정을 내릴 수 있으며, 네 자신의 독자적인 길을 걸을수 있고, 네 운명을 통 제할 수도 있다 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성숙에 있어서 전혀 다른 비젼을 갖고 계셨다. 성장하여서는 가고싶지 않은 곳으로 인도되어져도 기꺼이가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베드로가 양을 치는 목자로서의 임무를 부여 받은 이후 예수님께서는 즉시 베드로에게 섬기는 지도자는 잘 알려지지도 않고, 달갑지도 않으며, 고통스러운 곳으로 인도되어진다는 엄연한 진리를 던져 주셨다. 기독교 지도자의 깊은 이 세상에 쫙 깔린 위로 향하는 길 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끝나는 아래로 향하는 길이다. 이 말은 좀 병적이고 자기학대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의 음성을 듣는 사람들은 그것에 대하여 예 라고 대답한다. 예수님의 아래로 향하는 길은 하나님의 기쁨과 평화의 길로서, 이 기쁨과 평화는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는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특성을 다루려고 한다. 그것은 권세와 통제의 지도력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속에 분명히 담긴 무력(Powerlessness)과 겸손 의 지도력을 말한다. 그렇다고 기독교 지도자가 복잡다기한 주변 환경에 단순히 수동적이어야 한다는, 심리적으로 나약한 지도 자상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권력이란 사랑을 위해서 버리는 것이라는 따위의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 도 아니다. 진정한 영적인 지도자상을 말하는 것이다. 영적인 생활 속에서 무력과 겸손은 아무런 줏대도 없는 사람 을 말하는 것도 아니며, 모든 사람들에게 스스로 결정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사람을 일컫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로서, 예수님이 그들을 어디로 이끄시든지 기꺼이 따를 준비된 사람들이며, 예수님과 동행함으로써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으며 또한 삶이 풍성해진다는 것을 항상 믿는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가난해져야 할 필요가 있으며 마가복음 6장 8절에 여행하는데 필요한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말아라. 식량이나 가방이나 돈도 가지지 말고 신발만 신고 여분의 옷도 껴입지 말아라 는 말씀처럼 지팡이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여행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가난해지는 것에 무슨 유익이 있는가 아무 것도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단 하나 가난은 우리로 하여금 인도 받는 자가 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참 인도자상을 가르쳐 줄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돕는 사람들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반응에 귀를 기울일 줄 알게 될 것이고, 그럼으로써 참으로 성령께서 인도하시는 곳으로 인도함을 받을 수 있게 될 것이다. 풍요와 부로 말미암아 우리는 예수님의 길을 올바로 분별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렇게 편지했다. 부자가 되려고 애쓰는 사람은 시험과 함정에 빠지고, 사람을 파멸시키는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망에 떨어집니다. (딤전6:9). 만일미래에 희망이 있는 어떤 교회를 꼽으라면 바로 지도자들이 기꺼이 인도를 받는 자리에 서려고 하는 가난한 교회라고 할 것이다.

훈련: 신학적인 조명
그러면 이렇듯 팔을 벌리고(요21:18) 살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훈련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서 나는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 의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마치 기도가 우리를 하나님의 첫번째 사랑에 연결시켜 주고, 고백과 용서가 우리의 사역을 공동체로 연결시켜주는 것처럼 부지런한 신학적인 조명은 우리가 어디로 인도 받아야 할지를 엄밀하게 분별할 수 있도록 해준다.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목회자와 성직자는 거의 없다. 그들 중 대부분이 거쳐온 교육의 풍토는 신학보다는 행동과학 (심리학. 사회학 등)이 지배하는 풍토이다.
오늘날 기독교 많은 지도자들이 제기하는 질문들을 성경적 용어로 포장된 심리학적 사회학적 질문들이다. 에수님의 마음으로 가득찬 진정한 신학적인 사고를 실제 사역 속에서 찾아보기가 퍽 어렵다는 말이다. 믿을 수 있는 신학적인 조명이 없다면, 미래의 지도자들은 심리학자, 사회학자, 사회사업가의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능력있는 사람, 일을 쉽게 하는 사람, 사표(師表), 부모의 상징, 좋은 후견인이나 선배 등등으로 생각할 것이며 그것은 곧 그들이 일상생활의 스트레스 해소를 돕는 사람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된다는 걸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의 지도자상과는 거의 무관하다. 왜냐하면 기독교 지도자들을 인류를 죽음의 세력에서 벗어 나게 하고 영생의 문을 열어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생각하고 일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지도자 가 되기 위해서는 개인과 공동체와 나라와 세계의 일상 사건들이 어떻게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의 삶에 더욱 더 민감해지도록 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식견이 있어야 하며, 또 하나님께서 어떻게 인간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가를 매 순간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의 과제는 자기들이 처한 시대의 아픔과 고난을 해결하는데 조그만 기여라도 해야한다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신다는 즉 황량한 땅에서 자유로운 새땅으로 인도하여 주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선포하는 데에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개인적인 분쟁 가족들의 갈등, 국가의 재난, 국제적인 긴장과 더불어 하나님의 실재(實在)에 대한 분명한 믿음 등을 답변해야 할 힘든 과제를 안고 있다. 그들은 모든 형태의 운명론, 패배주의, 우연론 혹은 통계학이 우리에게 진리라고 제시하면서 미혹하는 자연방생론 등에 대하여는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들은 또 인생이 순전히 선과 악과 행운에 의해 결정되는 것처럼 보인다는 모든 형태의 절망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 들은 고통과 절망과 죽음 등의 불가피한 상황에 직면할 때 그들을 체념이나 금욕적인 무관심에 빠뜨리려고 하는 그 어떤 감상적인 시도에 대해서도 반드시 아니오 라고 대답하여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그들은 세속적인 세계를 향하여 또한 그들은 만유의 근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됨으로써 인간 역사의 가장미세한 사건도 카이로스 (Kairos) -그리스도의 마음속으로 우리를 깊숙히 인도해주는 기회-가 되도록 해왔다는 사실을 분명한 목소리로 선포해야 한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들은 신학자가 되어야 하며, 예수님의 마음을 알고 또한 기도와 연구와 치밀한 분석 등을 통 해 훈련받은 사람들로서 그들의 시대에 혼탁스럽게 보이는 수많은 사건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성스러운 부분을 확실히 밝혀낼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인 조명은 매일매일 예수님의 마음으로 고통스럽거나 기쁨에 찬 현실을 조명해보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 써 온화하게 인도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사람들의 의식 속에다 심어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종종 가려 져 있어서 발견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이일은 매우 어려운 훈련이다. 세상의 잡다한 소리들이 우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드럽고, 온화하며, 사랑스러운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한다. 기독교 지도자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그런 음성 을 들으며 평안과 위로를 얻는데 도움을 주기 위해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다.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이 지도자상이 신학적인 지도자상을 요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각종 신학교에서도 많은-아주 많은-일들이 일어나야만 한다. 신학교는 시대의 징후를 진정으로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들을 길러내는 요람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꼭 지적(知的)인 훈련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이 훈련은 전인(全人)-몸과 생각과 마음-을 포함하는 깊은 영적 편성체계여야 한다. 신학교들이 얼마나 세속화 되어 있는지에 대해 우리는 반밖에 모르고 있다.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마음을 비운 채 종의 형체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은 이미 많은 신학교의 주요 관심사가 아니다. 우리 시대의 경쟁적이고 야망적인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예수님의 마음에 철저히 배치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정도의 영적 편성체계가 추구되어 지고, 실현되어 진다면, 다가오는 세기의 교회는 큰 희망이 있다.

마 무 리
이제 요약하겠다. 하바드에서 라슈공동체로 옮겨 가면서 나는 기독교 지도자가 현실과 타협하고자 하는 욕망과 대 중의 스타가 되고자 하는 욕망 및 권력을 쥐고자하는 욕망에의해 얼마나 무서운 악영향을 받아왔는가에 대한 나의 사고를 새로운 방법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너무도 자주 나는 현실과의 타협, 대중적인 인기, 권력이 효과적인 목회의 한 요소으로 취급되는 것을 너무도 자주 보아왔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유혹이라는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예수님께서는 물으신다. 네가 날 사랑하느냐 라고. 예수님께서 우리를 목자로 파송시켜 주시며, 또한 이제는 팔을 벌려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감을 당하는 삶을 우리에게 약속하신다. 그분은 우리가 현실과 타협하는 생활에의 관심에서 탈피하여 기도하는 생활로, 대중적인 인기에 영합하는 자세에서 탈피하여 공동체적이고 서로 협조하는 사역으로, 권력 위에 형성된 리더쉽에서 탈피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신다는 엄밀한 인식 위에 형성된 지도력으로 변화될것을 요구하신다.
라슈공동체의 사람들은 나에게 새로운 길들을 보여 주고 있다. 내가 그런 것들을 배우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곤 한다. 아주 유용한 것으로 증명된 옛날 양식을 포기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내가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에 대 하여 생각해 볼 때, 정작 내게 그 길을 가르쳐 주는 사람들은 내가 배울 것이라고는 거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거의 기대하지 않았던 바로 그 사람들임을 분명히 보게 된다. 내가 지금 새 생활에서 배우고 있는 것들이 꼭 내게 만 유익한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상을 정립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희망하며 기도하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말해온 것이 전혀 새로운 내용는 아니다. 하지만 나는 가장 오래되고 가장 전통적인 이런 기독교 지도자관(指導者觀)이 바로 미래의 기독교 지도자관이 되기도 한다는 사실을 여러분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기도한다.
나는 낮은 데로 임하는 삶을 선택한, 팔을 벌리고 사는 지도자상을 제시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지도자, 상처 입기 쉬운 지도자, 사람을 신뢰하는 지도자를 말한다. 이런 지도자상이 다가오는 세기를 맞이하는 여러분들의 마음 을 희망과 용기와 자신감으로 충만케 하기를 기원한다.

닫 는 글
이것을 글로 쓰는 것과 워싱턴 D. C. 에서 실천에 옮기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이다. 빌과 내가 워싱톤 공항에 도착하여 크리스탈 시티의 공항 주변 포도맥강(Potomac River)과 같은 쪽에 현대의 모든 것을 모아놓은 것처럼 보이는 고층 유리 건물로 된 클라덴던 호텔(Clarenden Hotel)로 갔다. 빌과 나는 그 호텔의 번쩍번쩍하는 풍취에 강한 잎상을 받았다. 우리에게는 둘 다 각각 2인용 침대와 목욕실과 많은 수건과 유선 TV가 있는 널찍한 방이 주어졌다. 빌의 방 탁자 위에는 과일과 포도주병이 가득한 바구니가 하나 있었다. 빌은 그것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그는 TV를 보는 데 아주 익숙해 있기 때문에, 커다란 침대에 편안하게 자리를 잡고서는 리모콘으로 모든 채녈을 맞춰보았다.
그런데 우리들에게 좋은 소식을 알려주는 시간이 너무나 빨리 다가왔다. 금빛 초상과 조그만 분수들로 장식된 한 무도회장에서 맛있는 부페로 만찬을 끝낸 후에, 빈센트 드와이어(Vincent Dwyer)는 나를 청중들에게 소개했다. 그 순간까지도 나는 함께 한다는 것 의 의미를 몰랐다. 나는 나 혼자가 아니라 빌과 함께 왔기 때문에 무척 기쁘다 는 말로 먼저 서두에 꺼냈다. 그리고는 내가 직접 쓴 육필(肉筆)원고를 꺼내어 연설(강연)을 하기 시작했다. 그때 나는 빌이 자리에서 일어나 칸막이 벽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오더니 내 뒤편 오른쪽에 꿋꿋이 서는 것을 보았다. 
함께 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는 그가 나보다 훨씬 구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연설문을 한장씩 읽어낼 때마다, 그는 내 연설문을 한장씩 떼어내어 곁에 있는 조그만 탁자 위에다 차곡차곡 옮겨주었다. 나는 그가 이렇게 도와주는데 대하여 굉장히 편안한 기분을 갖게 되었으며 또한 동역자로서의 감정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빌은 이에 대해 보다 뜨거운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소위 현실과 타협해 보라 는 유혹으로서 돌을 빵으로 변화시켜 보라는 예수님이 받은 유혹에 대하여 말할 때, 그는 내 말을 막으면서 모든 사람이 들릴 정도로 크게 소리쳤다. 나는 그 말을 이전에 들은 적이 있단 말입니까. 그건 사실이었다. 그는 내 연설을 듣고 있 는 모든 성직자와 목회자들이 그가 나를 아주 잘 알고 있는 것과 나의 사상에 아주 익숙해 있다는 것을 진심으로 알기를 원했다. 그것은 또한 내 연설 내용에서 청중들이 믿어주기를 바라는 것만큼 새로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나에게 되새겨주었다. 무도회장에서 빌이 이렇게 사이에 끼어듦으로써 보다 밝고, 편안하고, 쾌활한 분위기가 연출 되었다. 그렇게 빌은 긴장상태를 누그러뜨려 평상시의 소박한 상태를 유지하도록 해주었던 것이 연설을 계속하면서 나는 점점 더 우리가 진정으로 함께 동역을 이루고 있다고 느꼈으며, 또한 그것을 좋게 받아들였다.
내가 두번째 파트에서 나와 함께 살던 장애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당신은 오늘밤 집에 있을 겁니까 였다는 대목을 읽자 빌은 또다시 참견을 하였다. 그건 맞습니다. 그 말은 존 스멜춰(John Smeltger)가 항상 묻는 말입니다. 그의 말속에는 또 다시 안심시키는 그 무엇이 들어있었다. 빌은 존 스멜춰와 꽤 여러 해 동안 한집에서 살았기 때문에 그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빌은 단순히 사람들이 자기 친구 스멜춰에 대해서 알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 그는 마치 청중을 우리 앞으로 끌어들이기라도 하듯이 그들을 친밀한 우리의 일상 생활 가운데로 초청하는 것이었다.
내가 연설문을 다 읽은 후에, 참석자들이 각자 나름대로 감사를 표할 때 빌은 나에게 말했다. 헨리, 이제 내가 말 좀 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얼른 걱정부터 되었다. 어쩌지 저 친구가 횡설수설하여 곤란한 상황을 만들지도 모를텐데 하지만 그가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얘기를 할 것 같은 느낌을 가지면서도 나는 청중들에게 여러분들, 조금만 더 앉아 계시겠습니까 빌이 여러분들에게 몇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라고말하였다. 빌은 마이크 앞으로 가서 아주 힘겹게 한마디 한마디 해나갔다. 지난번 헨리가 보스톤에 갈 적에는 존 스멜춰를 데리고 가더니 이번에는 나를 데리고 이렇게 워싱톤에 왔습니다. 나는 여기에 와서 여러분들과 함께 있는 것이 무척 기쁩니다. 너무너무 고맙습니다. 그렇게 말을 끝내자 모든 사람들이 일어나 그에게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우리가 그 조그만 연단을 걸어나올 때, 빌은 헨리, 내 연설이 좋았습니까 라고 물었다. 아주 좋았어요. 
당신이 말한 내용에 대하여 모든 사람이 진정으로 기뻐했단 말입니다. 빌은 아주 좋아했다. 사람들이 건배를 그 와 하려 그에게 몰려들자 그는 이전보다 훨씬 마음이 열렸다. 각 사람을 돌면서 자신을 소개하면서 그날밤이 유쾌한지를 묻고는, 데이브레이크 공동체에서 그가 겪은 모든 생활을 그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다.
나는 한 시간 이상이나 그를 보지 못했다. 그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를 알리기에 너무 열중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우리가 떠나기 전 식사시간에 빌은 커피잔을 손에 들고 테이블을 돌면서 전날 밤에 알게된 모든 사람 들과 석별의 정을 나누었다. 그가 이런 보통 자리가 아닌 데에서도 많은 친구를 사귀고, 마음 편히 지내는 걸 보면 서 내 마음은 더욱 상쾌했다.
우리가 다시 토론토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빌은 그가 어디에 가든지 들고 다니는 단어 퍼즐책에서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헨리 이번 우리 여행이 좋았습니까 그러자 나는 그러믄요. 당신과 함께 다닌 이번 여행은 굉장히 좋았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빌은 나를 찬찬히 들여다 보더니 또 이렇게 말했다. 이일은 우리가 함께 한 일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순간 나에게 진정으로 깨달아지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었다. 두세 사 람이 내 이름으로 모이는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다 (마18:20). 지난날 나는 항상 혼자서 강의 하고, 설교 하 고, 강연 하고, 연설도 했다. 간혹 나는 내가 한 말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기억될까를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내가 말한 것들은 오래 기억되지 않더라도 나와 함께 했던 빌과 나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 게 되었다. 나는 우리를 함께 보내주시고 이번 여행 기간 동안 우리와 함께 해주신 예수님께 크리스탈 시티 클라렌 던호텔에 모인 사람들에게도 임재해주시기를 진심으로 소원하며 기도했다.
비행기가 착륙했을 때 나는 빌에게 말했다. 빌, 이번에 나와 동행해 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아름다운 여행이었으며 우리가 한 일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함께 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나의 진심이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