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에 해당되는 글 192건
- 2011.09.01 에드워즈 자기점검표
- 2011.09.01 에드워즈 결심문
- 2011.09.01 [스크랩]에드워즈 결심문 묵상자료
- 2011.09.01 [스크랩] 근대성과 대면하는 신학의 또 다른 방식 -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단상
- 2011.09.01 이 가을에 청년들이 읽을 책 20선
- 2011.09.01 신학생 목회자 필독서(두란노몰 추천)
- 2011.09.01 [215호 책 읽는 사람들]‘십자가’를 말한다
- 2011.09.01 성경배경사연구자료_이연길추천
Texas에 소재하고 있는 Southwestern Seminary 축제에 가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는데.....
해마다 하는 축제때 인근 교회마다 부스를 설치하고 전도및 소개를 하거든요.
그런데 눈에 띄는 인물이 있어 가보니 Redeemer Church에서 에드워즈의 결심문을 묵상자료로 만들어 내놓았더라구요.
침례교인데 웬일인가했더니 이 교회는 Reformed Baptist 교회랍니다. (자신들을 복음주의, 침례교, 개혁파 로 소개하고 있네요.)
미국 침례교 안에서 개혁신학을 가진 분들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어서, 침례교 내에서도 말씀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곤 합니다.
옆의 침례교 목사님 말하기를 이교회는 골수 칼빈주의자들이고 설교수준이 매우 높아서(?) 교인은 별로 없다네요...ㅎㅎ
그런데 부스에서 열심히 설명해주는 모습이 좋았고, 교인수도 아주 적지마는 않은 것 같았습니다.
아마 이 자료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Tim Presson)이 쓴 에드워즈 관련 논문의 부록자료인것같습니다.
아무튼 책자를 보자마자 이상웅 목사님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요 ? ^^
학문적으로 귀한 자료라기 보다는 개교회에서 에드워즈를 어떻게 교인들의 묵상자료로 만들었는가 하는 점에서
높이 살 자료라 생각되어 링크를 걸어놉니다.
http://redeemerfortworth.org/images/Redeemer_Files/Edwards_Resolutions.pdf
이 교회 이름은 Redeemer Church 입니다. 교회의 싸이트는 www.Redeemerfortworth.org 입니다.
이번 종교개혁기간중에는 세미나도 개최를 하네요. 세미나 및 설교를 통해 종교개혁자들을 소개하는 모처럼 멋진 교회를 만났습니다.
제가 소속된 노회의 가을노회 장소가 코네티컷입니다. 혹 가서 에드워즈 관련 자료라도 얻으면 또 올리겠습니다.
*요즘 한국 개신교를 보면서 예수신앙이 취하는 형태(form)로서 한국 개신교는
더이상 유효성이 없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는 단지 교회조직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을 고백하는 양식과도 관련이 있을 듯 싶습니다.
그런면에서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라는 문제의식을 다시 한번 음미해볼 필요가 있을 듯 하구요.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에서 이제 전통적인 신 고백은 적실성이 없어진 것은 아닌가를 묻고 있지요.
저는 본회퍼적 질문은 수긍하면서도 그의 답변에는 별로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의 질문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 문제의식에 천착한다면 그의 답변 역시 낡은 것이 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그런 생각을 <옥중서간>에 나타난 '성인이 된 세계'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몇자 적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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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성과 대면하는 신학의 또 다른 방식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단상-
본회퍼에 대한 나의 이미지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나치에 저항에 히틀러 암살을 기도하다 감옥에 갇혀 결국 사형당한 진보적이고 실천적인 신앙인. 다른 하나는 천재적인 기독교 신학자. 특히 신학자로서 본회퍼는 더 이상 종교적 신앙형태가 필요 없게 된 ‘성인이 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탐구하려한 면모가 흥미로웠다. 한 참 기독교 신학에 관심이 있던 시절 세속화 신학의 출발점이라고 불리는 이 신학자의 작업이 궁금하여 그의 <옥중서간>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때는 기독교에 대한 비종교적 이해보다는 신앙인으로서 본회퍼의 경건함에 더 감동했던 것 같다. 신과 성서와 교회에 대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그 어떤 보수적 그리스도인들 보다 뜨겁고 깊이 있는 모습에 강한 인상을 받았던 것이다. 그저 급진적인 사유와 행동을 한 과격한 신학자라고 생각했었는데 말이다. 그러나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그의 논의는 대부분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 다시 읽으니 전혀 새로운 내용을 읽는 것 같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 책을 다시 읽는 지금에는 ‘성인이 된 세계에서 기독교 신앙’에 대한 본회퍼의 고민이 매우 흥미롭게 다가온다.
본회퍼가 말하듯 기독교를 종교의 형태로 이해하지 않으려 시도했던 최초의 신학자는 바르트였다. 내 기억이 맞다면 바르트는 <로마서 강해> 서문에서 기독교를 ‘종교’와 대비하여 ‘계시’로 규정하고 종교가 인간의 편에서 시작된다면 계시는 신의 편에서 시작된다고 규정하였다. 그리고 신의 계시가 인간의 지평으로 들어와 인간의 지평을 부정하는 사건에서 그의 ‘위기신학’이 시작된다. 그러나 본회퍼는 바르트가 신학적 개념의 비종교적 해석을 위한 어떤 구체적인 길도 제시하지 않았다고 비판한다. 본회퍼에 의하면 바르트는 ‘계시적극주의’의 한계에 매몰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르트에 대한 비판은 동시에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을 전제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회퍼가 말하는 ‘성인이 된 세계’, 기독교 신앙에 대한 ‘비종교적 해석’, ‘무종교성의 시대’와 같은 개념들은 정확히 자유주의를 겨냥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회퍼는 이와 같은 개념들을 통하여 슐라이어마흐에서 시작된 자유주의의 근대정신에 대한 대응을 비판하는 것이다. ‘성인이 된 세계’란 인간의 이성이 성숙하여 더 이상 자연세계에 대한 신앙적/신학적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대를 의미한다. 이성과 과학으로 해명될 수 없는 신앙과 신학은 이제 비진리의 영역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대한 자유주의의 대응은 인간의 한계상황에 대한 답변의 영역이 신앙이며, 그 영역은 감정의 영역이라고 보았다. (슐라이어마흐는 종교의 원천을 인간의 ‘절대의존의 감정’에서 찾는다) 이렇게 하여 신앙과 신학은 감정이라는 종교의 영역에 고착되게 된다.
하지만 본회퍼는 인간이 자기의 한계상황에서 조차 더 이상 종교를 필요로 하지 않게 된 시대에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을 애써 보존하기 위해 여전히 한계상황에 대한 구원신화를 작동시키는 것이 과연 의미가 있을지를 의심한다. 이런 방식은 비성인에게나 걸 맞는 방식이다. 마치 율법이라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이 존속하는 시대가 예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수명을 다하였듯이 종교라는 형태로 기독교 신앙이 유지되는 시기도 끝났다는 것이다. 한계상황에서 구원으로 요약되는 종교적 형태의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부정을 함축하게 된다.‘불안, 곤궁, 공포, 동경으로부터의 구원, 보다 좋은 내세에서의 죄와 죽음으로부터의 구원’(199)을 추구하는 종교는 결국 이 세상에 대한 부정을 결과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성인이 된 세계에서 이제 기독교 신앙은 세상에 대한 강한 긍정을 의미하게 된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기독교인은 구원신화를 믿는 자와 같이 이 지상의 과제와 곤란에서부터 마침내 영원으로 도피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인까?) 이 지상의 생을 남김없이 다 맛보지 않으면 안 된다네.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십자가에 달리셨고 부활하신 분이 그와 함께하시게 되고, 또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히고 부활하는 것이라네.....구원신화는 인간의 한계경험에 의해서 성립한다네. 그러나 그리스도는 인간을 생의 한가운데서 붙잡는다네.”(200)
그렇다면 ‘성인이 된 세계’를 긍정한다는 것.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긍정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인간을 죄인으로 선언하고 그 죄라는 한계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신에 의존하는 부정의 계기에 의해서 신앙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며, 그러한 구원을 베푸는 신을 인간의 내면성이라는 영역에 가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인이 된 세계에서 우리는 이제 신 앞에서 우리가 어떤 상태로 서있는 가를 아는 것이다. 이제 성인이 된 우리에게 “신은 우리들이 신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자로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212)준다. 다시 말해, 이제 무신성의 세계를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 이상 신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을 나누지 않고 인간이 처한 상황 전체로서 있는 그대로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고유하고 독자적인 영역이 사라지고, 종교의 영토가 상실된 세계 속에서 신은 어떻게 존재하며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 본회퍼는 이 세상 속에서 신의 상실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신의 무기력함이라고 말한다. 예수가 그의 전능함이 아니라 그의 약하심과 고난에 의해서 우리를 도와주는 것(마8:17)이 보여주는 바가 바로 이것이다. 그래서 그는 말한다.
“신 앞에서 신과 함께, 우리들은 신 없이 산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으로부터 십자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 있어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그리고 신은 바로 이렇게 해서, 이렇게 함으로써만 우리들과 함께 있고 우리를 도와준다네”(212)
신을 상실한 세상, 무신성의 세상이란 바로 신이 이 세상 속에서 무기력하게 고통 받고 고난당하는 존재로 자리 잡은 세상을 의미한다. 그리고 신은 그렇게 무력하게 고난당함으로 고난 받는 자와 함께 하며, 그리스도인이란 이 세상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자인 것이다. 무기력하게 고난 받고 고통 받는 신을 긍정하는 것. 그리고 그러한 신을 따라 이 세상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회개이며 그러한 삶을 사는 자가 그리스도인인 것이다. “종교적 행위가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생활 속에서 신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이 기독교인을 만드는 것”(215)이다. 그러므로 이제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존재가 된다. 세상과 구별되는 특정한 의례들과 종교적 행위들이 교회의 정체성,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의 고난에 동참함이 교회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신이 이 세계 속에서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며 그것이 교회의 존재론이다. 타자를 위한 존재로서 교회.
본회퍼의 논리는 상당 부분 동감이 간다. 특히 이 세계 속에서 신이 어떻게 존재하며 활동하는가에 대한 그의 문제의식은 나의 고민과 유사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본회퍼가 무신성의 세계를 신이 무기력하게 세상 속에서 고난 받는 세계로 이해할 때 매우 공감했다. 신의 전능함에 대한 믿음(나는 이런 믿음이 일종의 신화라고 생각한다)이 또 하나의 폭력이 되는 세계에서 신의 전능함에 대한 이미지를 변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하지만 그의 이런 문제의식은 계몽주의로 대표되는 근대적 문제제기를 전면적으로 수용하는 가운데서 형성된 것이기에 나로서는 그의 사상 전반에 전면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바르트처럼 그 운동에 대립하지도 않고, 자유주의처럼 종교의 고유영역으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대신 그는 그 운동의 문제의식을 전면적으로 수용하고 이제 근대세계(이 세계가 바로 ‘성인이 된 세계’의 조건이며, 바로 그 용어의 세속적 버전이다)에서 무기력하고 비참해진 신의 존재를 인정한다. 그가 주장하는 성인이 된 세계, 인간의 자율성 등은 전형적인 계몽주의적 개념이다. 칸트는 계몽을 한 마디로 성숙으로 정의하며, 그에게 성숙이란 이성의 자율적 사용에 대한 용기에 다름 아니다. 기독교가 영광스런 신의 표상에 대한 맹목 속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폭력이 되고, 인간의 이성과 자율성을 부정하는 상황에 대한 계몽주의적 비판의 해방적 가능성을 본회퍼는 인식하고 있었고, 그는 계몽주의의 그러한 문제의식에 십분 동의했던 것 같다. 그래서 계몽 이후 인간 이성의 자율성이 확장된 세계에서 신과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관한 종교적 표상은 더 이상 무의미해지고 있을 뿐만이 아니라 그런 상황을 그리스도인들 역시 이제는 전면적으로 인정하고 그들조차 자신의 신앙을 종교로부터 탈피해가야 한다고 그는 생각했던 것 같다. 본회퍼의 이런 문제의식은 그의 해방적 관심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지 않았나 싶고, 그런 측면에서 그가 왜 그런 주장을 하는지 이해가 가기도 한다.
그러나 본회퍼의 이런 생각은 계몽주의를 비롯한 근대적 사유가 가진 또 다른 한계를 보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것은 아니었을까? 해방의 약속이며 자율의 약속이었던 계몽주의와 근대성이 또 다른 억압의 시작이었음을 그가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위 말하는 포스트모더니즘까지 갈 것도 없이 본회퍼와 비슷한 시기를 독일에서 살았던 철학자인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오히려 계몽의 이면을 바라본다. 본회퍼가 감옥에서 ‘성인이 된 세계’에 대한 그의 신학적 작업을 구상하던 시기인 1944년에 출간된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의 <계몽의 변증법>은 계몽이 자연의 계산가능성 확보를 통한 지배의 논리였음을 음울하게 보여주고 있지 않았던가. 성숙과 자율을 추구한 계몽이 사실은 지배와 폭력의 에토스를 생산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그들의 냉철한 분석은 결코 성인이 된 세계라는 조건이 우리가 그대로 긍정해야할 조건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본회퍼의 의도는 공감이 가지만 현실에 대한 그의 분석에는 동의하기는 어렵다. 그는 지나치게 계몽을, 그리고 근대성을 긍정했다. 상황에 대한 철저한 응답을 지향했던 그의 신학적 지향으로 인해 그는 근대성의 어두운 면을 살필 수 있는 문제설정능력을 상실했던 것은 아닐까? 동시대의 철학이 계몽과 근대성을 회의할 때, 오히려 계몽과 근대성을 자신의 신학이 전개되어야 할 조건으로서 삼은 상황신학적 경향의 한계를 그의 논의는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더욱이 이제 탈근대적 세계를 살아가는 나로서는 본회퍼의 분석이 현실 적합성을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 과연 본회퍼의 신학, 특히 '성인이 된 세계'론이 과연 현재적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본회퍼의 중요성은 그가 자신이 처한 상황 속에서 자기 신앙의 의미를 구체적으로 질문하였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는 것 같다. 본회퍼의 ‘성인이 된 세계’ 개념은 본회퍼가 살아갔던 시대적 상황인 근대성과 기독교의 충돌 가운데서 나온 신학적 대응의 산물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동시대의 상황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와 이미지를 고민했던 그의 신학적 질문은, 상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는 신학이라면 여전히 유효하게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본회퍼가 여전히 현재적 의미를 가진다면, 그것은 그의 질문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본회퍼를 현재적으로 활용하고자 한다면 그의 질문을 따라서 이렇게 물어야 하지 않을까? 탈근대적 세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의 의미는 무엇일까? 탈근대적 맥락에서 기독교 신앙에는 어떤 이미지가 필요한 것일까?
2005년 이 가을에 청년들이 읽을 책 20선
2005년 청년들이 가을에 읽을 책 20권을 추천하면서
몇 년 전, 한 학생과 나누었던 대화가 잊혀지지 않습니다. 대화의 끄트머리쯤 어떤 책을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그 학생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책이요? 저는 책을 증오해요” 물론, 그 학생의 대답은 반쯤 농담이었지만 독서량이 눈에 띄게 줄어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요즘 청년과 몇 년 전 그 학생은 어쩐지 닮은꼴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캠퍼스나 지하철에서 PDA나 PSP를 들여다보고 있는 청년들은 쉽게 만날 수 있어도 전공 책 이외의 책을 읽는 청년들은 만나기 어려운 요즘입니다. 그래서 청년들의 지적 수준이 예전에 비해 많이 낮아졌다고 걱정하는 청년사역자도 종종 만나곤 합니다. 이런 상황을 바라보며, ‘어떻게 하면 청년들이 책을 읽게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에 대한 고민과 동시에 ‘어떤 책을 읽게 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청년들은 책을 떠나고 있지만, 역설적이게도 ‘책의 홍수’라 불리울 만큼 많은 책이 세상에 나오고 있는 현실 가운데 책을 많이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좋은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한 문제라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청년들이 점점 책을 떠나는 이유는, 그들에게 양질의 책을 소개하지 못했다는 반성이 들기도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고민 끝에 지난 여름동안 청년사역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거나, 출판계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고 있는 그룹을 대상으로 하여 ‘청년들이 읽으면 좋은 도서’추천을 받았습니다. 2003년 이후 발간된 도서 중, 기독서적 두 권과 비기독 서적 두 권을 추천받아 추천도서 목록을 정하였습니다. 추천을 받아본 결과, 그 기준이나 범위가 모호하여 추천철학이나 원칙이 조금 더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하는 세밀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그래서, 추천도서 목록을 기준으로 하여 추천 철학과 원칙에 입각한 재선정 작업을 별도로 하였습니다. 두 번의 과정을 걸쳐 진행된 도서추천의 기준과 원칙은 다음과 같습니다.
::비기독 서적의 경우
첫째, 사회적 흐름이나 기존 현상에 대한 올바른 현실인식과 안목을 길러주기에 적합한 도서.
둘째, 쉽게 읽히며 역사와 시대를 통찰하게 하는 도서.
::기독 서적의 경우
첫째, 복음의 기본진리에 대한 성찰이 담긴 도서.
둘째, 현대의 문화적, 사회적 흐름을 기독교적 관점으로 조망한 도서.
::비기독 서적과 기독 서적 모두에 해당하는 경우
첫째, 완성도가 높은 도서.
둘째, 트렌드를 앞서서 조명할 수 있는 독창성이 돋보이는 도서.
셋째, 이슈나 흐름을 적절하게 반영하며 기준을 잡아주는 도서.
이상의 기준으로 비기독 서적 10개 항목, 기독서적 10개 항목의 도서를 최종 선정하였습니다. 각 항목 당 1권의 도서를 기준으로 하였으나, 추천된 도서와 함께 읽을 때 내용적 보완이나 이해의 깊이를 돕기 위해 복수 추천된 항목도 있습니다.
깊어가는 가을, 청년들과 함께 책을 읽고, 나누며 지적․정서적․영적 풍요로움을 누리시길 소망합니다.
선정절차
[1차 추천]
+추천위원 - 캠퍼스 선교단체 사역자, 교회 담임목사 및 청년대학부 사역자, (기독)NGO활동가, 언론 및 출판사 관계자.
+추천범위 - 2003년 이후 발간된 도서 중 기독서적 2권, 비기독 서적 2권씩, 총 4권 추천.
+추천방식 - 각각 추천이유와 도서핵심, 독서포인트 서면 제출.
[최종 선정]
+선정위원 - 양희송편집장(복음과 상황), 김성민목사(SFC 학원사역연구소), 강은수전도사(남서울산본교회 ), 강남호총무(학복협 총무) 오수경간사(학복협문서담당)
+선정범위 - 1차 추천된 도서를 기준으로 한 2003년 이후 발간된 도서.
+선정방식 - 1차 추천된 도서에 대한 선정 기준 적용 및 그 외 도서에 대한 전략 선정.
[최종 선정 도서]
2005년 이 가을에 청년들이 읽을 책 20선
NO | 도서명 | 저자/번역 | 출판사 |
기독 서적 | |||
1 | 그리스도인의 양심선언 | 로날드 사이더/이지혜 | IVP |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 | 로날드 사이더/한화룡 | IVP | |
2 | 뿌리깊은 영성은 흔들리지 않는다 | 게리토마스/전의우 | CUP |
종교개혁 시대의 영성 | 알리스터 맥그래스/박규태 | 좋은씨앗 | |
3 | 변혁과 샬롬의 대중문화론 | 신국원 | IVP |
4 | 현대사회 문제와 그리스도인의 책임 | 존스토트/정옥배 | IVP |
전쟁과정치 | 신원하 | 대한기독교서회 | |
5 |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 양용의 | 성서유니온 |
미국을 움직이는 작은 공동체 세이비어 교회 | 유성준 | 평단문화사 | |
6 | 나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습니다 | 니콜라스 월터스토프/박혜경 | 좋은씨앗 |
존재의 이유 | 자끄엘룰/박건택 | 규장 | |
7 | 인도의 길을 걷고 있는 예수 | 스탠리 존스/김상근 | 평단문화사 |
8 | 하나님이 기도에 침묵하실 때 | 제럴드 싯쳐/마영례 | 성서유니온 |
9 | 토마토와 빨간사과 | 레베카 피펏/김성웅 | 사랑플러스 |
10 |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되었는가 | 존 스토트/양혜원 | IVP |
오소독시 | G.K 체스터턴/윤미연 | 이끌리오 | |
비 기독 서적 | |||
1 | 미쳐야 미친다 | 정민 | 푸른역사 |
2 | 헌법의 풍경 | 김두식 | 교양인 |
3 | 대한민국사 1.2.3 | 한홍구 | 한겨례신문사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현대사 | 서중석/역사문제연구소(기획) | 웅진닷컴 | |
4 | 북한 현대사 :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 김성보․기광서․이신철/역사문제연구소(기획) | 웅진닷컴 |
우리 통일, 어떻게 할까요? | 강만길 | 당대 | |
5 | 괴짜경제학 | 스티븐 레빗․스티븐 더브너/안진환 | 웅진지식하우스 |
쾌도난마 한국경제 |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엮음 | 부키 | |
6 | 문익환 평전 | 김형수 | 실천문학사 |
대화 : 한 지식인의 삶과 사상 | 리영희/임현영 대담 | 한길사 | |
7 | 지도 밖으로 행군하라 | 한비야 | 푸른숲 |
8 | 생각의 지도 | 리처드 니스벳/최인철 | 김영사 |
9 |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진중권 | 휴머니스트 |
10 | 일의 발견 | 조안 B 시울라/안재진 | 다우출판사 |
*복수 추천인 경우는 추천된 책과 함께 읽을 때 내용적 보완이나 이해의 깊이를 돕기 위한 선정입니다.
*추천된 도서는 2003년 이후 발간된 도서를 기준으로 하였습니다(단, 기독서적 분야에서 복수 추천된 <가난한 시대를 사는 부유한 그리스도인>은 1998년 발간 도서입니다).
*추천된 도서는 출판사와 저자의 중복을 고려하지 않고 내용과 주제적 측면만 고려하였습니다.
학 원 복 음 화 협 의 회(직인생략)
공동대표 김동호목사, 이 철목사, 홍장빈간사
상임대표 이승장 목사
“작금의 기독교를 보라. ‘자아를 긍정하라’,‘자아를 계발하라’는 논리를 펴고 있다. 기독교의 이름으로, 예수의 이름으로 정글의 논리를 부추긴다. 그걸 보면 슬픔이 치솟는다.”
2008년 6월 26일 <중앙일보> 21면, “기독교서적 베스트셀러 코너에 가면 ‘자아 긍정’,‘자아 계발’서적이 붐이다”라는 기자의 질문에 <십자가>의 저자 김응국 편집장이 한 말이다. <십자가>는 규장출판사 직원들의 경험에 관해 쓴 책으로 “규장과 갓피플에 임한 강력한 성령 체험”을 소개하면서 독자들의 주목을 받았다. 이 책은 갓피플의 영성 서적 판매 1위이고, 많은 사람들이 읽고 감동을 받고 회개를 했다는 글을 온라인에 올리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왠지 불편하다는 반응도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복음과상황> 책 편집위원들이 모여서 <십자가>를 읽고, 그들이 불편한 이유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김병규, 이원석, 정모세, 정지영 편집위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십자가> 나는 이렇게 읽었다
정모세 한마디로, 뜨겁지만 새롭지는 않다. 저자는 진정으로 십자가를 통과한 사람만이 참된 구원을 얻는다고 말한다. 또 한국교회가 복음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잘 요약해서 보여준다. 그러면서 기존의 한국교회 문제, 자기 계발류의 책들, 부와 번영에 대한 복음 대신 진짜 복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대중적 차원에서 주장한다. 한국교회의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기존에 흔히 제시되었던, ‘원류로 돌아가자’라는 흐름 속에 있는 책이다.
김병규 이 책은 독창적인 신학 책도 아니고 그렇다고 간증집도 아니다. 규장 출판사와 기독교 인터넷 기업 갓피플의 경험을 책으로 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설교집이라고 하기도 조금 어렵겠다. <하늘의 언어>를 출판한 이후 많은 사람들이 규장과 갓피플에서 경험한 것을 궁금해 했기 때문에 이 책을 낸 것 같다.
이원석 <십자가>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부흥이나 평양 대부흥을 하나의 모델로 삼고 그 사건의 재현을 기대하는 부흥사의 메시지 같다. 청교도의 대중화 버전이라고 할까. 또 전형적인 한국교회의 모습처럼―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다고 하는―십자가의 복음이 개인 윤리적으로 환원되고, 사회 구조적 맥락은 결여되어 있다. 회사와 관련해서도 개별적인 업무 수행과 관련한 회개의 항목은 있어도, 회사를 지속시키는 자본주의의 작동과 관련한 거시적 맥락과 관련한 고민의 흔적은 없다. 그저 일반 부흥 집회 메시지로 써도 될법하다.
정지영 이 책의 논지는 분명하다. 저자는 ‘십자가의 복음이 있던 자리에 부(富)와 번영의 복음이 자리하게 되었다. 교회에서 아첨하는 소리에 너무나 친숙하다. 그런 복음이 만연한 현대교회에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가.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아야 하는데 십자가 없이 구원받은 사람이 많다’고 말하며 십자가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자세로 살게 되는지를 신랄하게 책망한다. 물론 긍정적인 방향을 위한다고 하면서 말이다.
‘십자가’를 상업적으로 홍보했다?
이원석 책의 전달 방식은 중요한 논의거리이다. 이 책의 홍보부터 이야기하자.
정모세 규장은 트렌드를 잘 만든다. 이전에 <하늘의 언어> 등으로 ‘성령’(방언)이라는 독서 트렌드를 만들고 논의를 활성화시켰던 것처럼 이번에는 ‘회개’(컨버전) 시리즈와 함께 <십자가>를 매우 자극적인 광고 문구를 이용해 ‘컨버전’ 트렌드를 세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김병규 이 책은 규장과 갓피플의 체험을 효과적으로 홍보해서 초장부터 독자들의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러한 전달 방식과 홍보 때문에 그 경험의 진실성이 오히려 약화된 것은 아닌가 할 정도로 자신들의 경험을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사용한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정지영 <십자가>는 한마디로 ‘규장스럽다’라는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책 여기저기서 등장하는 저자의 주장에 밑거름 역할을 했을 책 제목, 예를 들어 월터 챈트리의 <부러진 십자가>라든가 책 내용, 저자의 신학과의 관계를 찾아볼 수 없는 무의미한 저자의 나열 등 앞으로 무슨 책을 출판할지 사전 광고하는 것을 보면 저자의 메시지는 몰라도 책 출간에 담긴 진정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다. 즉 메시지의 진정성을 담보로 책을 홍보하겠다는 마케팅 전략밖에 보이질 않아 무척 불편했다.
이원석 ‘저희 죄악을 공개 자복합니다’라고 해서 머리말을 살펴보니 사원들의 고백 내용을 그대로 수록해놓았다. 이게 무슨 짓인가. 세속의 상담가도 상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 것이 기본 윤리이다. 사주(社主)인 CEO야 상관없겠지만, 사원들은 무슨 죄가 있어서 (실명은 아니라도) 자복 사항이 이렇게 공개되어야 하는가. 이 직장에 다닌다는 것이 죄라면 죄겠다. 또 이 책에는 전병욱 목사의 설교 스타일이 엿보인다. 제목과 본문에서 계속 명령조로 말하고 있는 게 그렇다. 이 설교는 나에게는 일종의 종교적 폭력으로 느껴진다. 또 저자는 토저, 로이드 존스, 보스 등을 언급한다. 그런데 이 책에는 토저의 예언자적 깊이도, 로이드 존스의 우주적 전망도, 보스의 구속사적 시야도, 그 어느 것도 보이지 않는다.
김병규 규장에서 발간한 책 중 쉽게 읽히고 단순한 내용의 책들은 그 어조가 모두 비슷하다. 전병욱 목사나 김응국 목사뿐만 아니라 청교도적인 신앙 색채를 가진 분들에게도 이런 분위기를 느낀다. 이건 강한 자기 확신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다만 박영선 목사는 좀더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있는 것으로 보이는 반면 저자는 자신이 칼을 빼들고 위에서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원석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은 확실하게 이해했다는 태도는 굉장히 위험하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좀 더 겸손해야 한다. 이런 식의 확신은 겸손보다 오만에 가깝다.
<십자가>에 담긴 한국교회의 ‘십자가’ 없는 ‘십자가 신학’
정지영 저자의 메시지는 그간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전해진 전형적인 메시지이다. 6,70년대 개신교의 감상적이고 피상적인 복음 이해를 현대적으로, 하지만 독설에 가까운 말로 뱉어낸 것에 불과하다. 그러면서도 한국교회의 전형적인 십자가 메시지를 전하는 저자가 부와 번영의 복음, 나 중심의 복음이 만연해 있는 한국교회를 비판하고 있는 것이 나에게 굉장한 아이러니다. 왜냐하면 성경적이고 신학적인 성찰이 배제된 십자가 신학을 대신한 공허하고 피상적이며, 감상적인 십자가 신학이 결국 나 중심의 복음, 부와 번영 신학을 교묘하게 때로는 노골적으로 교회에 파고들게 만들어 오늘 우리교회의 형편없는 실정을 만든 질 나쁜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정모세 이 책은 한국교회가 기존에 상정하는 모범적 구원론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바로 속죄 중심적 구원론, 실존적 체험 중심적 구원론, 삶의 개인 윤리적 변화를 강조하는 구원론이 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기독교 구원의 한 부분이고, 한국 교회에 필요하기는 하지만, 바로 동일하게 그 지점에서 한국 교회의 모범적 구원론이 지닌 어떤 단점을 잘 보여준다.
정지영 십자가에 대한 저자의 신학도 무척 불편하다. 죄, 복음에 대한 이해는 철저하게 개인적인 차원으로 해체되어 있다. 구원의 역사적 지평이 개인적인 실존에 함몰되어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전달하는 방식도 자극적이고 원색적이며 나아가 폭력적이기까지 하다. 어떤 의미에서 이 책에는 십자가, 하나님이 없다. ‘나’ 복음이 잘못이라고 하면서도 ‘나’밖에 주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책에는 광대한 구속적 신학도 하나님나라의 깊이도 없다. 날 위해 죽은 예수님의 은혜에 감복해 눈물 흘리며 영적 결벽증을 갖고 살아야 하는 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라고 말하는 저자의 주장은 복음의 우주적인 지향점을 결국 자기 안에서 해체해 버리고 만다. 십자가의 의미와 구원의 역사적 지평은 사라지고 모두 나의 죄와 연관해서 해석하고 하나님과 멀어진 인간이 본질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두려움을 조장한다. 달라스 윌라드는 이런 류의 신학을 ‘죄 관리 복음’이라고 날카롭게 비평한다. 이 책에는 신학의 공허함, 회개라는 의미의 공허함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김병규 한국교회가 말하는 십자가에는 정서적 슬픔 외에는 다른 게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는 십자가도 아닌 십자가만 있는 것 같다. 저자가 편집장으로 남아있지 않고 저자로 나선 것 자체도 의심스럽다. 갓피플의 ‘마이북 다이어리’등을 보면 이 노선에 심취해 있는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발언을 많이 한다. 나는 그들과 신학적 이해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고, 그들이 보여준 모습들을 나 또한 보여주었기에 그들의 진심에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그것이 가진 배타적일 수 있는 위험성, 개혁 신학 혹은 개신교 신학이 전부라고 생각할 수 있는 위험성이 거기 분명히 존재한다.
정모세 저자는 마태복음 4장 17절을 언급한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말하는데 정작 복음의 핵심인 하나님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설명하지 않고 회개하라는 말만 한다. 본질상 회개라는 것은 그 임박한 하나님나라로 돌아서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십자가를 말하지만 정작 십자가가 하나님나라의 복음에서 어떤 자리를 차지하는지를 거의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나님나라 공동체로서의 교회나 그 새로운 질서에 대한 논의가 거의 없다.
‘나’를 넘어서는, ‘감정’을 넘어서는 ‘복음’을 말하자
이원석 저자는 예수가 나로 인해 십자가에 달리신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 지못미(지켜주지 못해 미안해)도 아니고 굉장히 황당하다. 예수님의 위대한 구속 사건이 왜 이렇게 정서적으로 환원되어야 하나. 저자가 조나단 에드워드의 집회나 평양 대부흥을 모델로 삼고 있는 건 이해한다. 하지만 왜 이런 류의 죄를 공개해야 하는 걸까. 이 모두가 복음이 아닌 상업 같다. 고객의 필요에 따라 상품을 파는 것이다. 김응국 목사의 회개 복음은 사실상 십자가를 상품으로 들이밀고 있는 것이다. 의식적으로 진정성이 있더라도 무의식적으로 상업주의, 자본주의에 깊이 젖어서 한국의 전통 기독교와 만난 위험한 작품이다.
정모세 그럼에도 이 책이 비판하는 대상들, 즉 모양만 기독교인인 사람, 모태신앙이지만 신앙이 없는 사람, 친구 따라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보다는 이 책이 낫다. ‘십자가’는 현재 한국교회의 많은 사람들에게 그저 지적 이해로서, 구원을 위한 암기 공식으로 이해되고 있다. 나의 죄가 마이너스인데 예수의 보혈인 플러스가 만나 제로가 된다는 식이다. 구원 받고 천국 가고 영생을 얻는 다는데 누가 그걸 거부할까. 한국교회는 주로 그렇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야말로 ‘십자가’가 문제다! 그런 맥락에서 이 책이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죄와 맞닥뜨려서 예수의 은혜를 고백하고 내 삶이 바뀌어야 한다는 말 자체는 옳은 것이다. 그런데 여전히 거기까지라는 게 아쉽다.
정지영 달라스 윌라드가 ‘죄 관리’를 얘기한 건 그 차이는 오십보백보라는 말을 하고 싶어서다. 반쪽짜리 진리는 그것을 진리의 전부라고 믿게 만든다는 점에서 명백한 거짓보다 못하고 위험할 뿐이다. 십자가를 말하면서 구원의 총체적인 면을 인간의 개인적인 죄로 제한하고 언제든 떳떳하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인간의 영원히 죄스런 마음을 근거로 책망하는 저자의 주장은 무척 위험하다.
정모세 이 책 속의 ‘우리가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죄’를 다루는 부분에서, 아주 미묘하지만, 우리의 우상 숭배적 죄악보다도, 우리가 결과적으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회개의 ‘감정적인’ 측면을 너무 강조하는 것을 느꼈다. 예수 십자가가 우리를 막다른 궁지로 몰아넣는 확증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꼭 ‘감정적인’ 자복만을 이끌어 내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맥락상 도마의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평가절하하고 있다. 그 이야기 속에서 도마의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에서다.
이원석 이 책은 수동적 복음을 전파한다. 185쪽에서 저자는 고아원에 가서 봉사활동을 한 후 고아원 원장이 “와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면 “내가 한 것이 아닙니다. … 예수님께 감사하십시오”라고 말하라고 한다. 이건 말도 안 되는 적용이다. 저자는 또 ‘나’를 강조하지 말라고 한다. 존 스토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자아의 죽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도 ‘나’가 6번 나오는 것을 언급한다. 십자가는 자아를 무화(無化)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새롭게 한다. 이는 자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역전시키는 것이다. 자아의 중심에 하나님이 들어오시고, 그분이 나의 중심이요, 주님이 되시는 것이다. 그것은 자아를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건전한 자아상은 십자가의 복음과 모순되지 않는다. 자아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것은 신학적 깊이는 없고 열심만 있는 목사가 말할 수 있는 내용에 불과하다. 이것은 복음이 아니다.
김병규 성경의 가장 앞에 나와 있는 모세오경이 말하는 역사에 뿌리박힌 지극히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그 전망, 공동체 중심의 생활, 장엄한 복음에 대한 지평은 이미 한국교회에서 사라졌다. 또, 요한복음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읽고 다른 사람에게 권하는 성경이다. 그 안에 하나님나라가 드러나 있고 신적 생명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 등 공동체적 요소가 많다. 그런데 <십자가>에서는 ‘나’외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문제다. 직원 중 한 명이 전한 메시지가 아니라, 저자의 이력을 생각할 때, 저자 정도 되시는 분이 한 얘기로서는 너무 부족하다.
정모세 이 책에 자아 중심에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받아들이는 삶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이 있다고 변명할 수도 있지만, 전반적으로 볼 때 여전히 ‘나’에 대한 관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해 갖고 있는 비전에 대해서는 눈 감고 있다. 엄격하게 말하자면, 균형이 없다면 틀린 것이다. 특히 한국의 상황에서 이러한 ‘나’ 중심적인 십자가 문제가 심각하기에 더 그렇다.
이원석 성서의 구속사적 전망까지 나가라고 하지도 않겠다. 부디 구약에서 말한 고아와 과부를 돌보라는 명령만이라도 제대로 전해주었으면 좋겠다. 즉 성서에 있는 표면적 메시지 만 이라도 놓치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정지영 저자나 규장 직원 분들이 체험한 일의 진정성을 다 받아들이더라도 이 책에서 말하는 신학만 보더라도 <복음과상황>에서 추천할 수 있는 책은 아니라고 본다. 복음도 없고 상황도 불충분하다.
진정한 십자가를 찾아서
정모세 성경의 구속 역사의 측면에서 십자가를 바라봐야 한다. 예수님이 “회개하라”고 말씀하셨을 때, 여기서 ‘죄’의 문제는 하나님나라, 곧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하나님 백성 되지 못하게 한 것, 이스라엘이 멸망하고 포로로 잡혀가게 만들어 하나님의 영광에 먹칠을 하게 한 것이었다. 따라서 ‘회개하라’는 말은 다음의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선포와 함께 본질적으로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 나라의 회복에 관해 말하고 있다. 그저 개인의 존재론적이고 윤리적인 결함을 해결하는 문제가 아니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길을 통해 하나님나라 백성의 모범적 삶을 분명하게 보여주셨다. 부활은 그 길에 대한 하나님의 지지 표명이자 긍정이다. 한국교회는 십자가를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께 죽기까지 순종하고 그 순종이 옳았음을 하나님이 부활로 신원하셨던 것을 그리 강조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뤄진 하나님 나라에 대해, 또 교회가 그 연장선상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라는 것에 대해 잘 모르는 듯하다.
정지영 십자가가 우리 죄의 해결책이지만 이는 곧 하나님과의 화평하기 위한 길이다.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 죄를 없애는 것이지 죄는 목적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교회 십자가 이해는 어떤 의미에서 너무 기계적이다. 인격적인 관계가 없다. 법정적 칭의가 너무 극단적으로 강조되다 보니 관계적 칭의에 대한 이해는 너무나 부족하다. 또한 십자가에 극도의 감정 이입을 해서 그렇게 사는 것이 가진 문제는, 잘 사용하라고 받은 선물을 상처라도 날까봐 깨지지 않게 잘 간직하고 아무 것도 못하는 것처럼 복음의 의미를 축소시켰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광활하고 단단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원석 복음의 본질은 관계적이고, 복음의 지평은 우주적이다. 오스카 쿨만의 <그리스도와 시간>(나단)을 보면, 창조의 우주적 지평에서 이스라엘의 선택으로, 다시 남은자로 줄어들어 급기야 그리스도로 집중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남은 자와 상응하고, 교회의 탄생이 이스라엘의 선택에 대응된다. 또한 구속의 우주적 완성이 창조의 우주적 지평에 겹친다. 복음은 구속의 우주적 확장이라는 원대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 그런데 고작 식비 청구를 속인 것 때문에 예수님이 죽었다니… 그 위대한 십자가가 이렇게 코믹하게 환원이 되나 싶었다.
김병규 복음 안에서 십자가가 바른 위치를 잡게 해 줘야 한다. 죄에 대한 불안감을 조성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이야기하는 게 중요하고 전 우주적 지평의 틀 안에서 하나님나라의 이해가 자리매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십자가·부활·승천·재림 사건이 하나하나 별개의 사건들의 집합체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연속적 흐름, 계획안에서 이루어져 갈 것이다.
이원석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의 변화가 행동의 변화보다 중요하다. 결혼을 한 뒤 싸우고 밉더라도 결혼했다는 것에 변함이 없듯 정서적, 윤리적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역사·사회·구조에 대한 관점도 없고, 하나님나라에 대한 거시적 시야도 부재한 상황이 아쉽다. 복음의 관계적 전망을 회복하는 게 중요하다.
어떤 책을 낼 것인가, 그것으로 평가해야
정모세 책을 만드는 출판사가 책과 함께 출판사의 생활을 엮어낸다는 것은 정말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늘의 언어>의 “갓피플·규장 전 직원 70여 명이 근무 중 성령세례를 받는 큰 사건이 일어났다!! 상상치도 못한 이 놀라운 일이 2007년 4월 6일 오후 4시에 일어났다”에 이어서 연타석 홈런 아닌가? 다만, 부와 번영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성령 체험과 죄를 자복해야 한다는 메시지와 새로운 공동체적 변화를 출판에 담아내고자 한다면 그걸 카피로 쓸 게 아니라 앞으로 낼 책을 통해 하나씩 보여 주는 게 더 낫지는 않았을까? 출간하는 책들이 스스로 말을 하게 하는 방법도 좋았을 것이다.
김병규 일과 관련해 갓피플 사람들을 만나보면 진정성이 느껴진다. 회사의 변화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나 공개적으로 죄를 자복할 만큼 진정한 회개가 있었다면 출판· 유통을 하는 회사로서 자신들이 과거에 냈던 책들, 더 나아가 지금 내고 있는 책들을 돌아보고 거기에 대해 말해야 했지 않을까? 그러나 책에는 그런 언급이 한 군데도 없는 점이 아쉽다.
정지영 기독교 출판사 실무자로서 현실이 앞에 있기 때문에 뭐라고 얘기하긴 힘들다. 다만 책은 구호와 선동이 아닌 핵심과 내용을 다뤄야 한다. 우리의 비판을 통해 어렵지만 꼭 읽어야 하는 책들이 출판되면 좋겠다.
김병규 창조 세계를 폭넓은 시각으로 이해한다면 인문학적 관심도 가져야한다. 십자가가 원색적 복음으로 돌아가야 했다면 오히려 반대로 더 멀리 퍼져나가 있어야 했다. 그런데 거대 출판사 편집장인 저자가 십자가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출판계가 너무나 빈약하고 가난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원석 아무리 그래도 회사 직원들이 고백한 내용을 책으로 내는 것은 상도의를 넘어서는 것이다. 이는 신자들의 자복 내용을 상품으로 판매하는 행위이다. 일종의 관음증을 자극하는, 상행위라고 생각한다. 의식적 진정성을 넘어서서 전인적 진정성을 고민해야 한다. 돈을 버는 것이나 특정한 내용을 홍보하는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오히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는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기독인과 기독교 기업으로서 넘어서면 안 될 선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그래서 우리가 추천하는 책
정모세 몇 달 전에 짐 월리스의 <회심>의 번역을 마쳤다. 번역하는 중에 감동을 받아서 중간중간 자주 번역을 멈추고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던 책이다. IVP에서 8월 중에 출간될 예정이다. 이 책은 <십자가>나 ‘컨버전 북스’와 어떤 점에서 다루는 주제는 동일하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이 정말로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컨버전 북스’의 책들은 고전으로서의 묵직한 메시지를 담고 있어 좋지만, 짐 월리스 책에서 어떤 중요한 차별성과 메시지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꼭 비교해서 읽어보면 좋겠다.
한국교회의 복음 이해와 관련해서는, 나는 복음의 ‘정치성’에 대해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더 깊이 인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구약의 이스라엘이나 신약의 하나님 나라와 교회 모두 굉장히 정치적인 실체이다. 예수님 자신이 정치범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것을 내면화하고 개인 윤리화함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바의 맛깔을 심각하게 잃어버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나라 이해를 위한 기본서로 양용의 교수의 <하나님 나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성서유니온선교회)를 그리고 그 나라의 정치성에 관해서는 요더의 <예수의 정치학>(IVP)과 짐 월리스의 <하나님의 정치>(청림)를 권한다. 톰 라이트의 <예수와 하나님의 승리>(크리스챤다이제스트)와 아직 번역되지 않은 <What Saint Paul Really Said >등 바울의 복음 이해에 관한 책들은, 우리 시대의 빈약한 복음을 해독하는 데 아주 좋은 치료제가 되리라 생각한다.
이원석 김세윤 교수의 <구원이란 무엇인가>(두란노)와 <복음이란 무엇인가>(두란노)를 추천한다. 한국교회에 결여된 복음의 관계적 이해를 가장 쉽게 설명하고 있다.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 이 관계 속에서 윤리적 문제는 오히려 사소한 것이다. 사실 자식이 성장하며 부모의 속을 썩이기도 한다. 언제나 착한 자녀로 사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런 자식을 사랑하며 자식은 그런 사랑 속에서 점점 성숙하게 된다. 복음의 관계적 지평 속에는 개인의 지적 오류와 윤리적 실패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대한 넓은 시야가 담겨있다. 개인의 윤리 이전에 하나님의 사랑을 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불의한 현실에 대한 분노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고작 자신의 윤리 속에서 멈추지 말아야 한다.
정지영 달라스 윌라드의 <하나님의 모략>(복있는사람)을 추천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잘 설명하고 있고 복음에 대한 시각을 교정하고 있다. 또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IVP)을 추천한다. 그 책에서 가장 절정에 이르는 부분은 양자됨에 대한 내용이다. 또 복음을 하나님과의 화해라고 볼 때 샬롬을 개론으로 다룬 월터스토프의 <정의와 평화가 입맞춤할 때까지>(IVP)를 추천한다.
김병규 나는 특정 책을 추천하기보다 저자, 정확히는 설교자 두 명을 추천하고자 한다. 독자들이 박영선 목사의 책을 읽음으로써 김응국 편집장의 <십자가>의 아쉬운 점을 보완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박영선 목사가 하나님 은혜의 장엄하고 큰 은혜를 전해줬다면 그 다음으로 추천할 김홍전 목사가 자신의 강설들을 통해 전하는 복음의 역사적 정황에서의 하나님나라의 광대함을 독자들이 만날 수 있길 바란다.
정리·사진 이종연 기자 limpid@newsnjoy.co.kr
1)갈릴리-예수와 랍비들의 사회적 맥락-
리처드 A. 호슬리 저, 박경미 역, 이대출판부, 16.000원
2)바울의 공동체 사상-문화적 배경으로 본 초기 교회들-
로버트 뱅크스 저, 장동수 역, IVP.
3.구약신학의 역사적기초
장영일저,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사.
4. 성경의 세계와 지도-성경, 역사, 지리, 고고학, 신학비교-
자코모 페레고저, 민남현 역, 바오로딸.
5.Christ and The Cynics-Jesus and Other Radical Preachers in First Century Tradition-
Downing F. Gerald, Sheffield Academic Press.
6.Galilee, Jesus and the Gospel: Literary Approaches and Historical Investigations-.
Sean Freyne, Philadelphia: Fortress.
7. Jerusalem in the Time of Jesus-예수시대에 예루살렘(한글번역출판)-
Joachim Jeremia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