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신약/고린도전서'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5.11.17 고전9:19-27
  2. 2015.11.15 고전9:1-18
  3. 2015.11.13 고전7:29-40
  4. 2015.11.12 지금, 여기에서.
  5. 2015.11.11 고전7:1-16
  6. 2015.11.10 고전6:12-20
  7. 2015.11.09 고전6:1-11
  8. 2015.11.08 고전5:1-13

매여야 자유롭다

고전9:19-27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19절), 내 몸을 쳐 복종케 함은(27절)

사도바울은 믿음 안에서 자유를 누린다. 그러나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다. 책 해설에서 이것은 문화에의 적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큰 범위의 복음이 아닌 대상의 수준을 고려한 작은 범위만을 말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또한 사도바울은 복음에 참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경주하고 격투하듯이 스스로 절제하는 삶을 산다. 다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복음을 위해, 자신의 구원을 위해 기꺼이 종이 된다. 복종의 삶을 산다.

사역자는 복음을 잘 알아야 한다. 복음의 큰 범위 전체를 이해해야 한다. 또한 대상을 잘 알아야 한다. 저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 안에서 전달해 야 한다. 마지막으로 자신을 잘 알아야 한다. 전하기만 급급해서 자신이 복음대로 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위해 말씀과 신학 연구에 매여야 한다. 섬기는 대상의 형편이 어떤지 살피는 것에 매여야 한다. 자신이 말씀대로 실천하는지 성찰하는 일에 매여야 한다. 매여야 살린다. 매여야 산다. 매여야 자유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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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자의 품격

고전9:1-18
이 권리를 쓰지 아니하고(12, 18절)

오늘 말씀을 보면 교회에서 지원을 받지 않는 것을 두고 사도의 자격이 없어서 그렇다는 공격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것에 대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 자체가 자신의 사도됨을 증거하는 도장이 된다고 말한다. 계속해서 사람의 예, 율법의 증거, 주님의 명령을 들어 권리를 사용함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결론적으로 복음의 유익을 위해, 그리고 주님 주신 사명 때문에 자신의 권리를 제한한다. 결국 본인이 진짜 사명자라는 것을 이것을 통해 증명한다.

먼저 사역자의 사역자됨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섬기는 대상의 삶을 통해 증명되어야 한다. 자신이 강해지고 자신이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이들이 복음 가운데 변화되어지는 열매가 있어야 한다. 자신은 쇠하고, 사역 대상은 흥해야 한다. 올바른 가르침과 함께 헌신적인 기도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된다.

또한 사역자는 자신의 권리를 제한해야 한다. 마땅한 권리를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진정 주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는 증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재고해보아야 한다. 누림보다 나눔을 선택해야 한다.

이 두가지를 위해서는 영적, 물질적 다이어트가 요구된다. 몸의 S라인이 아니라, 영적 S라인을 갖는 사명자 그가 진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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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과 같이, 그러나 이전과 같을 수 없는

고전7:29-40
그때가 단축하여 진 고로(29절)

오늘 사도바울은 앞에서 이야기한 것과 일면 충돌되는 이야기를 한다. 17-28절에서는 부르신 "그대로 지내라"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지금까지 지냈던 것과는 다른 자 같이 하라고 권면한다. 바로 '그 때'라고 하는 종말이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많은 것은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미혼도 결혼도 다 가능하지만 하나님을 향한 헌신이 나뉘지 않는 미혼을 더 낫다고 말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는 부르심 받은 자리에서, 그 자리를 지키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것은 현상유지가 아니다. 종말을 인식하며, 이 땅의 삶의 한계를 인식하며 살아간다. 주를 위하여,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게 된다. 이전과 같이 지내지만, 이전과 같을 수 없는 삶을 살아간다.

나는 본문에 의하면 차선인 기혼자로 살아간다. 그렇다고 결혼의 자리를 떠날 수 없다. 이전과 같이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사도바울이 염려하는 것은 주님과 배우자로 마음이 나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전과 다르게 가정을 통해서도, 배우자를 통해서도 하나님을 섬기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 땅에서의 안락함 위에 가정을 세우지 말고, 하나님 나라 가치 위에 가정을 세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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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여기에서.

고린도전서7:17-28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17, 20, 24)

음행과 관련하여 독신과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하던 바울은, '각각 하나님께 받은 은사대로' 라는 원리를 종교적인 부분과 사회적인 부분까지 확장시키고 있다. 자신의 입장과 형편이 어떠하든지 부르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라는 말씀이다.

할례자이든 무할례자이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본질을 따라 자신의 현재 모습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중요하다. 종이든 자유인이든 '사람들의 종'이 아닌 그리스도의 종으로 사는 것이 중요하다. 미혼이 더 좋지만, 미혼이든 기혼이든 있는 자리에서 하나님을 섬기라고 권면한다.

이렇게 보면 기존체제를 옹호하고 어떤 변화와 개혁을 부정하는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는 더 심원한 변화와 개혁을 요구하고 있다. 순종의 삶과 그리스도의 주되심과 성에 있어서의 신실함을 통해 진정한 변화가 어디서 시작되어야 하는지를 말하고 있다. 말씀 순종은 지금,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주되심은 지금, 여기에서. 성적인 거룩과 신실함은 지금, 여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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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7:1-16

결혼에 대한 교훈과 권면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7절)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성과 결혼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독신과 결혼은 하나님께 받은 은사에 따라 하는 것이 맞다. 자신의 편의와 생각만으로 할 수 없다. 독신에 대해, 결혼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기보다 상대방의 권리를 우선시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그러고보면 오늘 묵상은 참 안된다. 아마 최근 당신은 가정적인 사람이 아니다 라는 말을 들은 여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든다. 나의 몸을 내가 아니라 배우자가 주장하도록 기꺼이 내어주는 것이 오늘 말씀이다. 좀더 가정적인 남편이 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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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몸의 주재권

고전6:12-20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15절)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모든 것이 가하다는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음행을 정당화하는데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사도바울의 주장은 단호하다. 무엇보다 우리 몸은 예수님의 몸의 일부이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하나님의 전이라는 것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음행에 지배를 당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말할 때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우리 죄를 해결하신 구원자이실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주인되시어서 모든 영역을 다스리신다는 것이다. 모든 영역이라고 하니 추상적이다. 음행에 관해서 구체적으로 고백할 필요가 있다. 내 몸의 주재권은 주님께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내 몸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여전히 음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나를 본다. 그것을 정당화하는 내 교활함을 본다. 말씀의 능력을 경험하기 원한다. 내 의지, 내 방법이 아니라,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이 말씀을 반복적으로 암송하기 원한다. 내 삶의 주재권이 주님께 있음을 몸을 통해서도 고백하기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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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운오리 그리스도인이여, 자각하라

고전6:1-11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2절)

오늘 말씀에서 사도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세상법정에서 서로 소송하는 것을 어리석다고 말하고 있다.그러면서 이렇게 말하는 이유를 제시한다. 그것은 성도가 세상을 판단하고, 세상이 성도에게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법정에서 판결을 받을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여기서 새삼 깨닫게 되는 것은 성도가 더 높은 도덕과 의의 기준을 가지고 세상의 일들을 분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세상의 기준이 성도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놀랍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일어나면 당연히 세상 법정으로 가는 현재 우리의 모습이 말씀과 너무 달라 놀랍다. 그리고 말씀에 나타난 성도의 본모습이 얼마나 고귀하고 아름다운지 보게 되니 놀랍다.

오리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이 백조임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갔던 미운오리 새끼가 생각나는 아침이다. 교회여. 그리스도인이여. 그대는 세상의 판단을 받아야 할 자가 아니라, 세상의 기준이 되어야 할 자이다. 너 미운오리 그리스도인아. 너는 세상의 기준임을 자각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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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에게 권징을 시행하라

고전5:1-13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2절), 너희 중에서 내쫓으라(13절)

고린도교회 가운데 서모와 음행을 범한 자가 있었는데, 교회가 적절하게 처리하지 못하였다. 사도바울은 이 상황에서 성도들의 교만을 지적함과 동시에 중요한 한가지 태도를 묻고 있다. 왜 이것을 슬퍼하지 아니하였냐는 것이다. 이런 죄가 발생하고 교회가 부정하게 된 것을 왜 아파하지 아니하였냐는 물음이다.

이 순간 가슴이 뜨끔하였다. 최근 여러 목회자의 부정과 교회의 비리가 드러나는 일련의 상황을 대했던 나의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이젠 뭐 새로울 것도 없다는 무감각하고 무정한 태도를 취하였던 것이다. 나도 뭐 저들과 다를바 없다는 온정주의적인 마음을 가졌었다. 그러나 이것을 대해야 하는 태도는 슬픔이었어야 했다. 통한이어야 했다. 아파해야 했다.

이런 슬픔 가운데 죄를 범한 지체를 적절하게 권징하되, 그것을 통해 구원을 이어가도록 하는 사도바울의 권면은 참으로 덕스럽고 아름답다. 이것은 너의 지체(눈, 손, 발)가 죄를 범하거든 찍어버리라는 복음서의 말씀이 교회 공동체에도 그대로 적용됨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해야 나머지 지체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게 되고, 그 공동체의 거룩함이 유지되기 때문이리라.

그러고보면 내가 교회에서 쫓겨나야 맞다. 교회가 거룩을 유지하기 위해서 내가 짤려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음란과 세속적 욕망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자의적인 쫓겨남의 시간을 가져야겠다. 너의 죄를 슬퍼하자. 권징이 사라진 교회를 시정하려 하기보다, 너에게 권징을 시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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