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 살전3:1-13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너희 마음을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살전3:12-13)
*오늘의 묵상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에서 비교적 짧은 시간 밖에 보내지 못했기에 환란 가운데 있었던 성도들에 대한 염려가 컸습니다. 그러나 디모데로부터 이들이 사랑과 믿음 안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기뻐합니다. 직접 방문하여 볼 수는 없지만 기도라는 최고의 선물을 줍니다. 넘치는 사랑과 온전한 거룩, 우리의 기도제목입니다.
*오늘의 기도
믿음 안에 견고히 서며 환난에도 흔들리지 않기 원하시는 하나님. 우리가 공동체요 지체로 서로의 믿음을 붙들며 견고하게 하는데 쓰임받게 하소서. 영혼에 대한 관심을 가지며 서로에게 신앙의 진보가 있음을 인해 기뻐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무엇보다 서로를 위해 사랑과 거룩에의 삶을 살도록 기도의 선물을 주고받는 영적인 교제가 우리에게 있게 하소서.
'말씀묵상_신약/고린도전서'에 해당되는 글 18건
- 2019.07.09 살전3:1-13
- 2015.12.05 고전16:13-24
- 2015.12.03 고전16:1-12
- 2015.12.02 고전15:50-58
- 2015.12.01 고전15:35-49
- 2015.11.30 고전15:20-34
- 2015.11.27 고전14:26-40
- 2015.11.25 고전14:1-12
섬김의 사이다
고전16:13-24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하게 하였으니(18절)
사도바울은 편지를 마무리하면서 마지막 권면과 인사를 전합니다. 믿음에 굳게서고 사랑으로 행하라 말합니다. 한 가지 모든 성도를 섬기는데 헌신된 스데바나의 집은 모범적인 가정입니다. 모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서로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존재입니다.
문제와 갈등이 많은 고린도교회였지만 거기에 대안과 같은 가정이 있습니다. 바로 스데바나 가정입니다. 성도를 섬기는데 온전히 헌신되었습니다. 이 가정은 모든 이들이 보고 배워야 할 모델입니다. 나의 삶이, 우리 가정이 이런 가정이 되길 소망합니다.
최근 싸이가 칠성사이다를 패러디한 칠집싸이다 앨범을 냈습니다. 유투브 조회수가 엄청 빠르게 올라간답니다. 젊은이들은 금기를 넘고 욕구를 발산하는 이 음악과 뮤직비디오를 보며 시원함을 느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섬김으로 시원함을 느낍니다. 시원함을 끼칩니다. 칠성사이다도 아닌, 칠집싸이다도 아닌, 섬김사이다가 되고 싶습니다.
물질의 은사, 동역의 은사
고전16:1-12
연보(1, 2, 3), 디모데(10), 아볼로(12)
구제를 위한 연보는 매번 모일때마다 모든 구성원이 자신의 소유를 따로 모으라고 권면합니다. 갑자기 억지로 하지 않기 위함입니다. 이 모아진 물질은 모든 신령한 은사와 함께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냅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일정 기간 머물면서 교회를 견고히 세우기 원합니다. 그러나 큰 영향력을 미쳤던 그에게도 반대하고 어렵게하는 자들이 있었음을 봅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동역자인 디모데와 아볼로와 연합하며 교제하며 교회를 세우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다양한 영적 은사를 풍성하게 주심은 교회를 세우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는 물질적 은사도 필요합니다. 무엇보다 함께 교회를 세워갈 동역자들과의 연합과 교제도 중요합니다. 영적 은사와 함께 물질의 은사, 동역의 은사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원합니다. 이런 은사를 귀하게 여기고 잘 활용해야 합니다. 교회의 유익을 위해서 입니다.
나의 지갑이 고인 웅덩이가 되지 않기 원합니다. 누군가에게 하나님의 은혜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흘려보내는 노력을 하기 원합니다. 주변의 동역자들을 돌아보기 원합니다. 추운 겨울 몸과 마음이 시려운 이 계절 따뜻한 온기를 전하는 전화 한통, 문자 한통 날려야겠습니다.
공격 앞으로.
고전15:50-58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58절)
부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 썩는 육신의 몸이 썩지 않는 영의 몸을 입는 것입니다. 그 때에 사망과 죄와 율법을 완전히 극복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결국 이 부활 때문에 우리는 믿음의 사역에 더욱 힘을 쏟아야 합니다.
여전히 율법에 정죄를 당하고 아파합니다. 죄짓지 말아야지 결심하지만 이내 무너지는 내 모습에 좌절합니다. 미움과 갈등을 조장하여 온 세계에 사망의 세력이 더 공고해지는 것 같아 절망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부질 없어 보입니다. 교회가 무기력해보입니다. 예수님이 계신가 의심스럽습니다.
그러나 부활이 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그 날에 영광스럽고 거룩한 몸을 입게 될 것을 소망하게 합니다. 치열하고도 끝이 없어보이는 영적전쟁에서 우리에게 승리의 나팔소리가 울려퍼질 것을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대장되신 주님의 우렁찬 명령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제자리를 지켜라. 물러서지 말라. 공격 앞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완성은 부활
고전15:35-49
하늘에 속한 이의 형상(49절)
바울은 부활의 가능성과 구체성을 묻는 질문에 답한다. 가능성에 대해서는 씨로 비유한다. 다양한 열매를 기대하며 씨를 뿌리듯이 우리의 죽음에는 부활에 대한 소망이 있음을 말한다. 또한 부활할 때 우리의 몸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되는가를 말하면서 지금의 몸과는 다름을 말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다고 말한다.
먼저 우리의 몸은 씨앗이다. 부활을 품은 씨앗이다. 비록 육의 몸으로 이 땅에서 죽어 없어지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다.이 몸을 가지고 믿음으로 살고, 부활에 대한 소망을 가질 때 반드시 부활의 열매를 맺는다. 성도들은 이것을 보여주는 자이다. 부활이라는 열매를 보게 하는 씨이다.
또한 우리는 부활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게 된다. 죽음 이후에 혼으로 떠돌아다니는지, 영혼불멸인지, 시집가고 장가가는지 아닌지, 천국인지 지옥인지, 면류관을 받는지 개털모자를 쓰는지 등등, 이런 것에 대한 관심이 참 많다. 그러나 부활할 때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는다. 이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 땅에서 주님 닮기 원하는 기도를 하지만, 오히려 더 절망할 때가 많다. 그러나 소망을 품자.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의 완성은 부활이다.
다시 살 것이니, 죽는다
고전15:20-34
나는 날마다 죽노라(31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인가? 첫열매이다. 이후에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고, 온 만물이 새하늘과 새 땅이 될 것을 예기하신다. 그 때가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왕으로 세상을 다스리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 가운데 여러 고난과 역경과 손해를 감수한다. 날마다 죽는다. 의를 행하기 위해 죽고, 죄에 대해서 죽는다.
예전에 어느 성당 광고판에서 본 글이다. 순교는 어렵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은 훨씬 더 어렵다. 왜냐하면 순교는 한번 죽는 것이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매일 죽는 것이기 때문이다. 죽는 것은 어렵다.
최근 친구를 위해 죽는 것은 할 수 있지만, 친구가 나보다 더 잘 나가는 것은 못 봐준다는 글을 보았다. 너무 수긍이 되어서 씁쓸했다. 처음에는 앞문장에 집중이 되어서 이것은 친구를 위해 진짜 죽은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보니 한번 죽는 것은 쉽지만 더 잘 나가는 친구를 위해 기꺼이 축하하는, 여러번 죽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라고 묵상했다. 어려워도 그리해야 한다.
나는 살았는데 왜 죽으라고 하는가? 왜 날마다 죽어야 하는가? 부활이 있기 때문이다. 믿음을 위한 헌신과 수고가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죄와 악과의 싸움을 끝내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실 것이다. 다시 살 것이니, 오늘도 죽는다.
절제 되어지는 은사
고전14:26-40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
교회에서 모임 중 방언과 예언을 할 때의 기준도 덕을 세우는 것에 따른다. 이것을 위해 방언은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 두 세명이 차례를 따라 해야 한다. 예언은 마찬가지로 두 세명이 한 사람씩 하되 분별해야 한다. 이렇게 은사는 품위 있고 질서 있게 사용되어야 한다.
구체적으로 품위가 있고 질서가 있으려면 어떤 모습이 필요할까? 때로는 자기에게 계시가 주어지고 확신이 있다고 해도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 양보할 줄 알아야 한다. 침묵해야 한다. 이미 세 사람이 말했다면 할 말을 삼켜야 한다. 철저한 절제가 요구된다.
영적인 은사를 통해 받은 확신이나 감정은 다른 모든 사람을 압도하고자 할 때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철저히 교회의 덕이라는 기준에 의해 절제가 되어야 한다. 인내와 침묵이라는 검증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뜻인지 아닌지 분별되어질 것이다. 절제할 수 있는가? 그것이 참된 은사이다.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가
고전14:1-12
교회의 덕을 세우기(4, 5, 12절)
사도 바울은 사랑이라는 가장 큰 은사를 추구하면서도 다른 은사를 사모하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 은사들 가운데 방언보다는 예언을 권장한다. 방언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어서 알아 들을 수 없지만 예언은 사람에게 하는 것이어서 유익을 가져온다. 또한 방언은 구별된 소리가 없고, 뜻을 알지 못하기에 예언만 못하다고 말한다. 여기서 이 두 가지를 바라보는 기준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가 이다.
은사하면 개인적인 면에 치우칠 때가 많다. 개인의 성장, 문제해결, 능력, 치유, 신비 등등 한 사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다른 이 위에 군림하려 하고, 다른 사람과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은사는 늘 밖을 향한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신경쓰고, 교회 공동체를 견고히 하는가를 생각한다.
예언에 설교의 의미도 있다고 생각된다. 그러고보면 그동안 나의 설교에 대한 태도도 철저히 개인적이었다. 나는 왜 설교를 못하는가? 왜 준비가 안 됐을까? 왜 실수했을까? 왜 칭찬을 못 받았을까? 이제는 시각과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 이 설교를 통해 공동체가 견고해졌는가? 공동체를 유익하게 했는가? 이 질문이 마음에서 늘 우러나오도록 내 생각과 감정을 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삶도 그렇다. 삶도 하나님이 주신 은사이자 선물이다. 현재(present)가 선물(present)이지 않은가. 그렇다면 나의 삶에도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공동체를 위한 삶인가? 공동체를 유익하게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