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예수님은 죄인을 부르러 오셨다. 교회에서 사역을 하다보면 신앙이 견고한 사람들, 경제적으로 안정된 분들이 필요할 때가 많고 또 그런 분들과 오래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죄인, 소외되고 연약하고 돌봄이 필요한 분들에 대한 접촉도 없고 관심이 사라지게 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저들에게 행한다. 나의 관심과 시선을 재조정할 필요가 있는 아침이다.
예수님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받고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이 땅에 사는동안 죄인됨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나에게 유효하기 위해서는 나의 죄인됨을 계속 상기해야 한다. 내가 의인으로 길을 나서면 죄인을 찾아 길을 나선 주님과 엇갈릴 수 밖에 없다. 오랜 신앙생활과 규칙적인 경건생활을 하면서도 죄인으로 주님께 나아가기를 잊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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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자는 머리 둘 곳도 없도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본다.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 동기가 무엇이었는지를 생각해본다. 목회자인 아버지의 영향이기도 하지만 부흥사로서 많은 이들에게 존경받고 칭찬받는 모습이 좋아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또한 부흥하는 여러 대형교회를 보며 나도 언젠가는 그런 교회에서 목회를 하게 되지 않을까 라는 기대도 가졌었다. 물론 목회를 옆에서 지켜보며 여러 어려움을 보기도 했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가는 길은 기본적으로 고생의 길이다. 짐승만도 못한(?) 길이다. 집나가면 개고생이 아니라 예수님 따라 가면 개고생이란다. 나는 목회해서 잘 살아보려고 하는가 고생하려고 하는가?
오늘 24-34절에는 염려라는 단어가 총 6번 등장한다. 염려하지 말라가 주요내용으로 새삼 다가왔다. 결국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도 염려와의 관계 속에서 바라보게 된다. 염려는 다름아닌 이 땅의 것을 추구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믿음에 있어서 염려의 반대는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을 염려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그 의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최근 부르심이라 느끼지만 경제적으로 어려운 길을 가는 것에 대해서 자꾸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말했는데, 또다른 차원의 염려의 모습이다. 염려하지 말자. 대신 하나님 나라와 의를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