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에 해당되는 글 192건
- 2014.08.03 산둥수용소
- 2014.08.02 고통당하는 자들로 하여금 더 부르짖게 하라
- 2013.10.13 사사기17:1-18:31
- 2012.08.16 김병삼 목사님의 페북글 중..
- 2012.04.15 착하게만은 안된다.
- 2011.09.01 절반의 긍정, 부정 없는 긍정-김기현
- 2011.09.01 2010 여름수련회 말씀
- 2011.09.01 2009년 청년부 가을특새(김병년목사님)
최근 욥기를 묵상하면서 하나님과 고난에 대한 묵상을 하고 있는 중이다.
내 스스로가 큰 고난을 겪어본 일이 없다고 생각이 된 터에 여러 글을 통해서 나의 묵상은 상당히 개념적이고 추상적임을 인식하고 있었다.
또한 최근 총리후보자의 발언으로 이슈가 된 고난을 통과한 공동체의 운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하겠다 생각을 하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중 페북을 통해 한 분이 이 책을 읽고 있다는 글을 보고 검색하던 중 블로그에서 발견하게 된 글이다.
전체 내용이 중요하지만 눈에 들어온 문장들을 파란색으로 표시해본다.
읽고 나서 느끼게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과 고난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아픔과 목소리에 더욱 귀를 기울여야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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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blog.naver.com/yijaeju/220035070879
고난과 하나님의 전능 리뷰
기독교 신학의 최우선 과제는 부조리한 고통과 악의 문제에 직면하여 기독교화 된 형이상학이나 형이상학화된 신학을 구성하는 것에 있지 않으며, 형이상학적 질문의 방향을 따라 악의 기원과 본질에 대한 해명이나 형이상학을 통해 고통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형이상학을 해체시켜 그 속에서 숨죽이고 있던 고통의 희생자들이 그들의 고통을 더 크게 부르짖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하나님의 전능과 고난의 극복 (정리)
전능하신 하나님은 피조세계에 대한 그의 사랑 안에서 자신의 힘을 행사하며 자신의 고유한 힘을 사랑 안에서 드러낸다. 하나님의 사랑의 절정은 그리스도 사건에서 드러나며 하나님의 전능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스스로 참여하는 사랑의 전능으로 드러난다.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사랑의 하나님이며, 타자를 위해 스스로를 고난 속에 던져 놓는 하나님의 사랑은 전능하다. 그리스도의 고난 안에서 하나님의 전능과 사랑은 분리되지 않는다. 그는 약하기 때문에 고난당하는 것이 아니라 전능하기에 고난에 참여하며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자신의 전능하심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으로써, 인간과 피조세계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며, 이를 자신의 고난으로 짊어짐으로써 사랑의 힘을 드러낸다. 이 역사의 질곡 속에 동참할 수 있는 사랑의 힘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의 무력함을 통해서 힘들의 갈등을 품고 극복하는, 하나님의 고유한 아가페의 힘으로 드러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의 전능이야말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의 현실 속에 주저앉지 않고 고통의 틈새로 비춰오는 새로운 현실의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줄 수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랑 안에서 고통에 참여할 뿐 아니라 고통당하는 인간 자신을 끌어안고 포기하지 않으신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하나님은 고난당하는 자의 아픔에 동참함으로써 불가능을 넘어서는 자신의 사랑을 보여주며, 이러한 사랑의 전능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가 고통을 딛고 일어설 힘의 원천이 되신다. 하나님께서 그 사랑 안에서 나의 고난에 함께하신다면, 나는 고난 중에 결코 홀로 버려진 존재가 아니다. 나의 슬픔과 아픔이 내 자신만의 고통이 아니다. 이 사실은 나를 해방시켜 줄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고통과 연대할 힘을 제공한다. 하나님은 피조물과의 자유로운 사귐을 위해 역설적으로 자신의 전능을 포기하는 전능을 보이시며 사랑을 자신의 고유한 본성으로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우리를 돕기 위해 고난 속으로 들어오시며, 고난가운데서 우리를 도우신다.
하나님의 창조적 구원적 힘에 대한 신앙은 고난의 흔적을 몸에 지니면서 그럼에도 고난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삶과 용기를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능에 대한 신앙은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내가 약할 그 때에 오히려 내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고후12:10) 이는 하나님의 전능을 통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짊어질 용기를 얻기 때문이다.
고난과 신학
고통의 문제와 관련해서 우리는 더 이상 악의 본질과 원인을 형이상학적으로 물을 것이 아니라, 고통의 극복과 그것의 가능성을 하나님과 관련하여 물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아무런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감 으로써 율법적, 종교적으로 이해되었던 인과적 연결고리를 해체해버렸다. 또한 그는 고통의 종교적 원인을 밝히려고 하기보다는 고통당하는 자를 위로하고 그를 치유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은 세계의 원인이 아니라 새로운 삶의 가능성으로 다가오셨다.
우리는 고통과 악의 문제를 직면하여 기존의 형이상학적 신학과는 정반대로 미래적 가능성으로 하나님을 묻는 법을 배워야 할 것이다. 이때 미래적 가능성으로 희망되는 하나님의 힘은 현재의 모든 파괴적인 것을 극복하는 힘, 사망에서 생명의 충만으로 창조하는 힘이다. 고통의 현실 속에 있는 자에게는 이 하나님은 여전히 힘없는 존재로 경험된다.
하지만 기독교 신앙이 하나님의 무력함을 곧 하나님의 사랑으로 경험한다면, 함께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사랑을 미래적 힘의 선취로 이해한다면, 고통당하는 자는 현실의 부조리에 좌절하지 않고 미래를 향한 희망에 하나님과 동참하게 될 것이다. 이 자는 고통과 악의 파멸적인 힘에 짓눌린 삶의 암흑 속에서도 일어설 힘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현시적 무력함과 가능적 전능을 연결시켜 주는 메타포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찾을 수 있다. 현실의 틈새를 꿰뚫고 들어오는 하나님의 가능적 미래의 빛에서만 우리는 전능한 하나님을 고백한다. 하나님의 힘은 현실 속에서 고난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 받는 사랑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의 사랑은 미래적 가능성 안에서 고난당하는 자를 일으키실 창조와 구원의 힘으로 희망된다.
기독교 신학은 신의 존재와 행위 속에서 진지하게 고난의 현실을 목도하며, 고난의 자리에서 하나님에 대한 질문이 제기되며, 동시에 새롭게 하나님을 경험해야 하는 자리로 인식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속에 계시된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는 기독교 신앙은 타자의 고통에 대한 공감적 참여를 통해 하나님이 가까이 계심을 경험한다.
하나님은 고난의 의미를 해석하는 분이 아니라 고난을 극복하게 하시며, 파괴적인 고난 상황 속에서도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고통과 악에 짓눌려 닫혀버린 삶의 철문을 파쇄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 주신다.
농어촌연구소 강성열 목사님의 설교 중에서
http://lifenongsun.com/tbbs/board.php?board=pds02&command=body&no=58
"사람도 착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착함을 지킬 독한 것을 가질 필요가 있어요. 마치 덜 익은 과실이 자길 따 먹는 사람에게 무서운 병을 안기듯이, 착함이 자기 방어 수단을 갖지 못하면 못된 놈들의 살만 찌우는 먹이가 될 뿐이지요.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억세고 독한 외피를 걸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는 제게 "정말 착하게만 살면 안 되는 것인가요?" 하고 물어왔습니다. 착함을 지키기 위해서 걸쳐야 할 독한 외피가 뭐냐고도 물었습니다. 이건 그가 갈등 상황에 놓일 때마다 불끈불끈 솟는 분노를 다독이며 했을 법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을 듣는 순간 이야기 하나가 생각났습니다. 마을에 사는 뱀 한 마리가 많은 사람들을 물었기 때문에 아무도 들에 나갈 엄두를 못 냈다고 합니다. 성덕이 뛰어난 스승이 나서서 그 뱀으로 하여금 비폭력의 원칙을 실천하게 설득했습니다. 머지않아 마을 사람들은 그 뱀이 물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뱀에게 돌을 던지고 심지어는 꼬리를 붙잡아 끌고 다녔습니다. 심하게 두들겨 맞은 뱀이 어느 날 스승의 집에 기어와서 불평을 했습니다. 선생님의 비폭력 덕분에 이 꼴이 되었다고 말입니다. 그러자 스승은 혀를 차며 말했습니다. "해치기를 그만두라고 했지 겁주는 일을 그만두라고 하지는 않았네."(앤소니 드 멜로, <<일분지혜>>, 분도출판사, 59쪽).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도 무골호인(無骨好人)이 되어선 안 됩니다. 그러다가는 뱀의 신세를 면할 수 없을 겁니다.
* 참고 : 무골호인 無骨好人[없을 무/뼈 골/좋을 호/사람 인] - (구글에서 퍼옴)
☞뼈 없이 좋은 사람. 지극히 순하고 남의 비위를 두루 맞추는 사람.
[예문] 1931년에 결국, 산타클로스는 코카콜라 회사가 파급시킨 광고 사진에서 전혀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해든 선드블롬의 예술적 재능 덕에, 산타클로스는 그때부터 인간적인 모습(보다 설득력 있고 훨씬 접근하기 쉬운), 불룩 나온 배, 호감이 가는 얼굴, 쾌활한 분위기와 무골호인 같은 태도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여 거의 35년 동안이나 코카콜라사는 전 세계의 신문과 잡지에, 그 다음에는 텔레비전에 이러한 산타클로스의 모습을 파급시켰다. 어린이들이 오늘날 산타클로스에 대해 갖고 있는 개념은 아직도 이 모습이 강하게 젖어 있다.
첫째날 설교.
무늬만 그리스도인이지만 은혜가 없다. 교회의 코드와 세상의 코드가 다르다.
1. 올바른 신앙인이 되어야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있다.
천국, 영생, 하나님 나라를 영접하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말라.
십자가 해석에 따라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십자가를 받아들일 것이냐? 십자가를 받아들이고 사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경험할 것이다.
십자가는 기적이다. 영원이 시간 안으로 들어온 것이 예수님. 십자가에서 예수님의 삶과 사역과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가라지-무늬만 그리스도인. 종교의 피상성
말씀을 받아도 깨닫지 못하는 것.
환난으로 쓰러짐
세상의 유혹으로 무너지게 하는 것. 우리 안에 이것이 섞여 있다. 하나님 나라로 갈수록 제해진다.
악마성- 선과 악을 판단. 하나님과 같이 된다.
자기 의. 남이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 은혜를 manipulation하는 것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민감함이다. 회개하고 죄사함을 받는 것이다.
성령님을 요청하는 이유는 민감함을 회복해서 양심에 찔리고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공동체 안의 하나님의 생명에 민감하라. 그 안에 예수님이 있기 때문이다.
가라지와 알곡의 차이는 십자가의 의미를 아는가 모르는가이다.
십자가-힘있는 사람에게 맞아죽는다라는 것을 아는 것. 돈 있는, 매너없는 놈한테 당하는 것이다.
우리의 탁월함을 알고도 죽는 지혜로운 바보가 되는 것이다.
1등이 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악을 알고도 좁은 길을 가겠는가이다.
소소하고 미미한 것이라도 세상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나님 나라는 자수성가가 아니다.
은혜- 내가 기대하지 못하는 방법. 의외성이 하나님 나라다.
그리스도인의 탁월함은 좁은길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 때 우리에게 주시는 메리트가 있어야 한다. 그 기쁨이다.
밭에 보화가 있다는 것을 나만 안다.
하나님 나라의 지식
성경에서는 실천적 앎을 말한다. 적용이 아니다.
맞을 때 참음을 통해 달라진 태도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경험하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첫발을 내딛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십자가를 선택할 수 없기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약속을 주신다.
자신의 황폐함 속에서 믿음이 필요하다.
자신의 의지의 종말점에서 하나님 나라가 시작된다.
예수님이 우리를 들고 가신다. 그것이 은혜다.
우리의 basic trust. 아이가 아빠가 받아줄 줄 믿고 뛰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면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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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것을 어떤 마음으로 지키며 살 것인가?
성스러운 것을 세속화 하는게 바리새주의다.
세속스러운 것을 성스럽게 하는 것이 십자가이다.
하나님의 임재가 드러나는 것이 거룩이다. 율법을 하나님의 가치관으로 받으면 세속적인 것이 성스럽게 바뀐다.
눅10장. 하나님 나라에서 중요한 것은 이웃의 주객을 바꾸는 것이다.
내가 선정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사랑의 진정성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타자 중심이다. 타자 중심적인 민감함. 타자에 민감하지 못하면 복음도 천박해질 수 있다.
부자들 가난한 자들 심령이 가난한 자이면 우리는 사랑을 베풀어야 한다.
고위직에 있는 사람이라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감이 생긴다.
대통령을 대통령이 아니라 이웃으로 볼 수 있다.
마음이 가난한 것은 더 가지려는 마음을 포기하는 것이다. 욕망을 버리는 것이다.
창3:3 사단적인 것은 계속 욕망을 부추기는 것이다. 자신을 컨트롤 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어려운 것은 먹음직해 보이기 때문이다.
의지를 포기하는 것이다.
가지고 싶은 마음이 들 때마다 십자가 앞에 서라.
마8:33 십자가앞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당겨온다. 그 의기를 가져오는 것이 십자가이다.
염려하지 않고 걱정하지 않게 한다.
의지를 뽑아내어서 하나님이 일하시게 하는 것이다.
오병이어-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잊지 말라.
만나: 하나님은 필요한만큼 딱 채우신다.
한국교회는 만나의 방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만나를 못 먹는다.
자기의 의지와 방향을 포기해야 한다.
공동체적으로 버려야 할 것이 무엇인가?
마태복음이나 예수님은 재물과 관계를 말씀하신다.
돈의 윤리를 새롭게 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이 채우시고 하나님이 일하시도록 하나님의 계획을 세우라.
6절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눅4장. 갇혀있고 눌리게 하는 세상이 아니다.
비교하며 판단하면서 저 사람이 열등하다 느끼는 순간 하나님 나라는 끝이다.
본인 자신도 하나님의 신분이 아니라 자신을 가두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본질은 내가 누구인가 이다.
존재 본질 자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십자가는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다.
상처가 나음을 입는다.
하나님이 주신 자존감을 가져라.
공동체
하나님의 정의를 이루는 공동체는 만족이 있다. 만찬을 베품받는 것이다.
가난한 이들과 먹고 마시고 느끼고 생각한다. 감정이입을 하는 것이다.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려는 열망. 공감.
시시하고 미미하게 느끼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 된다.
우리 안에 생명, 열정이 있는 사람들을 모아서 세상을 바꾸는 주체가 된다.
공동체. 탁월한 사람이 아니라 생명, 사랑, 좁은 문을 선택할 믿음 있는 사람을 택해서 세우는 열망이 있었으면 좋겠다.
공동체 안에서 차별을 없애고 판단하지 말아라.
선교: 가난하고 약하고 존엄함을 모르는 이들에게 존엄하다 선포하고 섬기라.
김병년 목사님
고넬료
경건- 내 길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그분이 어디로 인도하시는가에 달려있다.
목자되신 하나님을 더 알아가고 교제하면 길이 희미하지만 함께 걸어가는 기쁨이 있다.
로드십- 주여, 그럴 수 있습니다.
주로 인정한다면 그럴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없다.
호칭과 해야 할 일들이 연결된다.
경건한 사람의 2가지 특징
1. 기도하는 사람
기도 후에, 기도 전에 순종하라
2. 백성을 많이 구제한다.
가난한 사람을 섬김, 경건은 삶이다.
3. 온 집으로 하나님을 경외하였다.
가정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식으로 살아간다.
경건의 삶을 통해 편견의 공동체를 깨트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