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셀름 그륀 신부,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습니다"

 

-예수의 팔정도(八正道):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
-성 베네딕도 수도회 한국진출 100주년 기념 초청강연

 

 

2009년 09월 21일 (월) 17:00:06 배은주 기자  ejb63@hanmail.net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윤택한 삶을 살려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닙니다” 

<아래로부터의 영성>, <삶의 기술> 등을 집필한 성 베네딕도회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의 말이다. 그는 20일,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예수의 산상설교로 알려진, 여덟 가지 행복선언은 성공적인 삶으로 가는 여덟 가지 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강연을 듣기 위해 신자들은 시작 전부터 강당을 가득 채웠고, 그륀 신부는 따뜻한 영성으로 신자들을 감싸 안았다.

그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의 한국진출 100주년을 기념하여 국내 신자들과 경제인 등을 대상으로 대중강연을 하고 있다.

여기에 안셀름 그륀 신부의 강연 중 ‘예수의 팔정도-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을 요약 정리하여 강연초를 싣는다. 

예수의 팔정도(八正道)-복된 생활로 이르는 길 : 여덟 가지 행복선언의 실존적 해석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내가 아는 하느님은 너무나 크고 파악할 수 없는 분이다. 나는 하느님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도 적다.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을 이용하려 한다. 하느님을 통해 좀 더 건강해지려하고, 삶이 더 윤택해졌으면 하고, 마음의 평안을 찾으려하는 식으로 하느님을 이용하려고 한다. 하느님은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하느님을 있는 그대로 놔두어라.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은 결국 하느님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 내맡기는 것이다. 부나 재산에서부터 자유로운 내적 자세를 말한다.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놓쳐버린 것을 슬퍼해야만, 내가 지금 취한 것에 감사하며 살 수 있으며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고통을 뚫고 나가야 자신의 영혼과 만날 수 있다. 이겨내지 못하면 연민에 빠지거나 다른 사람을 비난하게 된다. 

행복하여라, 비폭력적인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폭력적으로 대한다. 자기 실수를 단죄하거나 고루하고 편협한 사람이 된다. 이런 편협함, 엄숙함의 근거는 자기 자신의 내면에 있다. ‘비폭력적’이라는 말은 그리스말로 ‘온유함’이다. 독일어로는 ‘무엇을 모으다’를 뜻한다.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모으고 허용함을 의미한다. 

내 안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받아들이는 것이 용기다.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일부만 떼어내어 인정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들은 실재를 만났다고 할 수 없다. 반쪽으로만 만나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 부분만으로 하느님을 만나고자 하기 때문에 하느님을 전적으로 만날 수 없다. 모든 것을 인정할 때 내 삶이 더 넓어지고 예수님이 말씀하신 땅을 차지할 것이다.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배은주)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네 번째 행복선언에 대해 4세기경의 한 교부는 예수께서 그리스철학을 완성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의로움’이 모든 덕행의 근거라고 말했다. 

의롭다는 것은 내 자신의 본질을 정당하게 표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병으로 고생하고 있는데  이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무절제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완전하고 완벽하기를 바라고 언제나 성공하기 바란다. 자기만의 상을 가진 사람은 본질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심리학에서 ‘우울함’은 자기 자신의 무절제함에 대해 영혼이 외치는 절규라고 한다. 

올바르고 성실하게 사는 것이 의로움이다. 의로움은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해당된다. 우리는 교육이나 사회에서 다른 사람을 정당하게 평가해야 한다. 불의하고 부당한 것에 정치적인 의로움으로 자신을 투신해야 한다. 사회의 의로운 구조를 위해, 정당한 분배와 기회균등, 정당한 임금 등을 위해 투신해야 한다. 성서는 의로움을 위해 씨 뿌리는 사람은 평화를 얻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정의 없이는 세상에 평화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가정, 회사, 사회 전 세계에 적용된다. 내 자신과의 올바른 관계도 얘기하고 있지만, 사회와 온 세계에 대한 참여도 말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자비를 위해 우는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얻을 것이다 

누군가와 약속을 하고 지키지 못하면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이 경우는 자기 자신에 대한 자비가 필요하다. 그래야 다른 사람과 지속적으로 관계를 이어갈 수 있다. 성서에 자비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 나온다. 히브리어로 자비는 ‘어머니의 자궁’을 말하는데, 엄마는 판단하거나 평가하지 않고 돌본다. 만약 우리가 나와 다른 사람들에게 자비롭지 못하면 다른 사람을 평가하게 된다.

심리학에서 모든 사람 안에 ‘상처받은 아이’ 혹은 ‘버림받은 아이’가 있다고 말하는데, 종종 이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가 다른 사람을 상처주거나 버리기도 한다. 많은 이들이 자기가 치유되기를 기대하고 있다. 자비롭다는 것은 상처받고 버림받은 아이를 따뜻하게 다루는 것이다. 잘 다루면 하느님같은 아이를 발견할 수 있다. 

예수께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롭듯이 너희도 자비로워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자비로운 자는 하느님이 어떤 분이지 알게 된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그리스인들은 이 여섯 번째 행복선언을 무엇보다 좋아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보는 존재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리스어의 하느님은 ‘바라보다’에서 왔다. 그리스인들은 피조물을, 인간을 바라보며 그 속에서 하느님을 바라보았던 것이다. 보는 것, 내 자신을 보는 것, 하느님을 보는 것,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느님을 보는 것을 뜻한다.  

독일어의 하느님은 ‘부르다’, ‘불려지다’에서 왔는데, 사람이 곤경에 처해서 구해달라고 하느님을 외칠 때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깨끗한 마음은 하느님을 보는데 첫 번째 조건이다. 실수가 없거나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저의가 없는 것,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것을 말한다. 맑은 눈, 온 세상을 환히 비추는 깨끗한 눈에 대해 예수도 말씀하셨다. 반면 무엇인가 소유하려는 눈, 탐욕스러운 눈, 상처 주는 눈이 있다. 부수적인 의도가 없는 어린 아이와 같이 깨끗한 눈을 본다. 노인들에게서도 평화로운 눈을 보게 된다. 

예수는 요한복음에서 ‘너희들은 너희들에게 한 내 말로 인해 깨끗하다.’고 했다. 예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깨끗하게 느끼도록 말한 것이다.

만약 도덕적인 설교로 많은 이들을 비난하게 되면 내가 더러운 사람이 아닐까, 더럽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또 다른 경우, 이야기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통해 불만이 있는 경우를 느낄 수 있다. 우리의 과제는, 우리의 감정을 정화시켜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섞여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감정을 순화시키고 진정시키는 방법으로 기도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순수함, 깨끗함, 티없음이 있다. 마리아는 하나의 상징이다. 구원된 사람이라는 상징이다. 동정마리아 탄신대축일에 읽는 에페소서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거룩하고 흠없는 사람입니다’라는 말씀이 있다. 낙관적인 표현이다. 우리의 단점과 잘못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내면의 맑고 순수한 핵심을 발견할 때, 자기 자신의 정체성, 신원을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자신이 근본적으로 나쁘다고 하면 그 상황을 벗어날 수 없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순수함’이란 주제를 선호했고 ‘순수함’과 ‘아름다움’을 연결했다. 그는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 말했다. 예수님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고 선사하고 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구하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아들 딸이라 불릴 것이다.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리스말로 평화는 ‘이레네’인데, ‘조화로운 음악’을 말한다. 평화를 이룩한다는 것은 불협화음 등 모든 음이 함께 울리는 것을 말한다. 히브리어로 평화는 ‘샬롬’으로 ‘온전하게 하다’라는 뜻이다. 평화는 내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접합하는 것, 연결하는 것이다. 

라틴어로 평화는 ‘팍스’인데 ‘토의하다’, ‘상의하다’에서 왔다. 평화는 대화를 통해 이루어진다. 대화를 통해 다른 이들의 가치를 듣고 공통의 토대를 발견한다. 

자기 안에 평화를 이루는 사람만이 주변에 평화를 이룰 수 있다. 자기가 분열된 경우 주변 역시 분열되게 만들 것이다. 만약 어떤 사제가 평화에 대해 말하면서 사제 본인은 일그러져 있다면, 그 공동체는 그렇게 분열되고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자기 자신과 평화를 이루고 다른 사람, 세상과 평화를 이루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은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기에 깊은 지혜가 들어있다. 길을 제시하고 있다. 고통이나 어려움이 있는 현실 속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안의 적대적인 것도 나를 해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다가가게 한다. 질병이나 불행, 좌절감 등도 우리를 깨뜨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 열리게 하는 것이다. 우리 안에 하느님이 계심을 알게 된다. 

그때 그곳에서 우리는 자유로움을 느낀다. 다른 사람의 비난이나 단죄,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서 완전함을 느끼고 어느 누구도 상처주지 못한다. 그곳에서 우리가 만들어 낸 상이 깨지고 비로소 본원적이며 진실하게 되며, 하느님 상이 드러나게 된다. 그곳에서 우리는 순수하고 맑은 존재로 있게 된다. 이렇게 하느님의 신비가 머무는 그곳에서 집에 있는 듯한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우리는 우리 안에 하느님 나라가 있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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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핵심「삶의 기술」2 / 안셀름 그륀

    행복의 핵심 "행복의 핵심은, 네가 지금의 너 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젊은 시절 나는 유명한 사람들을 본받으려고 노력했다. 위대한 신학자 칼 라너처럼 학식이 풍부하고 명철한 사람이 되고 싶었고, 유명한 테너 프리츠 분더리히처럼 멋지게 노래 부르는 것이 꿈이었다. 물론 이제는 나도 안다. 오직 별을 따려고만 하는 사람은 자신을 지탱해 주는 기반을 잃고 만다는 것을. 그러나 본받고 싶은 우상이 있다는 것 역시 우리 인생에서는 여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살아가는 동안 우상은 바뀌게 마련인데, 그 또한 당연하다. 사회가 발전하면서 상황이나 인생의 목적도 변하고 그에 따라 우상도 달라지긴 하지만, 어쨌든 그런 우상 때문에 삶은 자극을 받는다. 우상들은 언제나 '나'를 연구하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그들은 내가 내면 깊숙이 들어가도록 도와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오직 그들에게만 사로잡혀 있다면, 나는 결코 '나' 자신에 만족할 수 없게 된다. 현재 나는 '지금의 나'에 대해 감사한다. 물론 '아우구스티누스처럼 또는 에르하르트 케스트너처럼 그렇게 멋진 말을 할 수 있으면 좋 겠다' 또는 '대화할 때 나도 누군가처럼 그렇게 명쾌한 답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종종 하기도 한다. 그러다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스스로를 의식하게 되면 나는 '내 곁에' 머물고자 노력하 고, "나는 나다. 지금의 나로도 충분하다. 나는 나에게 잘 어울린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곤 한다. 그리하여 나 자신과 완전히 화합하고 하느님이 나에게 주신 능력을 감사히 받아들이면서 내 한계까지 인정하게 되면, 나는 진정한 행복을 느낀다. 나는 '지금' 행복하고 '지금 이대로' 좋은 것이다. 지금 앉아서 숨을 들이 마시고 내쉬면서 삶을 느끼고 오직 하나뿐인 나를 느낀다. 또 삶과 행복의 맛을 즐긴다. 그 어떤 것도 억지로 바꾸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채근하지 않는다. 나는 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있는 그대로의 나, 하느님의 사랑으로 보호받고 하느님이 조건없이 받아 주시는 나다. 내 안에 평화가 있다. 이제 모든 것이 완벽하다. Buch der Lebenskunst 「삶의 기술」 안셀름 그륀 지음/ 안톤 리히테나우어 엮음/ 이온화 옮김/ 분도출판사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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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다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살아라”(톨스토이)

 

러시아의 위대한 작가 레오 톨스토이가 말하는 삶의 기술은 이처럼 간단하다.

그리고 그의 말은 옳다.

기쁨과 마찬가지로 행복도 노력 하는 대로 얻어 지는 것만은 아니다.

행복해지고 싶은 사람은 삶에 헌신해야 한다.

행복이란 충족된 삶의 표현이기 때문이다.

 

모든 감각을 깨워 열정적으로 살면, 나는 활기 속에서 행복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행복은 삶과 마찬가지로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흐른다.

삶은 어두운 계곡을 흐르기도 하고, 때로는 폭포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아픔 속에도 삶은 흐르고 있다.

이웃을 위해 나를 개방하는 아픔 안에도,

그들과 나누는 기쁨 안에도,

정상에 오르기 위해 감내하는 노력 안에도,

바다를 헤엄치는 긴장감 안에도 삶과 행복은 흐르고 있다.

 

실제로 우리는 삶의 도처에서 행복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삶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할수록 행복 역시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된다.

살고 있는 사람, 활동하고 있는 사람, 모든 감각을 열고 적극적으로 살아가는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온다.

 

 

- 안셀름 그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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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자 예수


“삶은 고독하도다.

아무도 서로 알지 못하고

저마다 혼자일세”


헤르만 헤세의 이 시구는 많은 사람들의 존재의식을 표현한다. 첨단 정보 통신망의 발달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외롭다. 만나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마음을 열 데는 없다. 덩그런 집에서, 군중 속에서, 그들은 고독에 떤다.


   예수님은 항상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께 바라는게 많았다. 강복을 청했고 병을 치유해 다라고 부탁했다. 복음서마다 예수님 주위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도 예수님은 외로웠다. 틈틈이 홀로 고독에 잠기셨다. 자신을 돌아보는 데는 고독이 필요했다. 고독 속에서 하늘 아버지와 단둘이 오붓하게 게셨다.

 

   군중 속에서 예수님은 외로웠다. 요한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 당신은 그들을 믿지 않으셨다. 모든 사람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께는 누가 어떤 사람에 대해 증언할 필요도 없었다. 사실 그분은 사람 속에 들어 있는 것까지 알고 계셨다”(요한 2, 24-25)

 

   예수께서 교회의 반석으로 삼은 베드로는 그분이 조만간 고난을 당할 거라는 말씀을 하시자 불만을 토로한다. 예수님은 그런 그를 매섭게 나무라셨다: “물러가거라, 사탄아!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들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마르 8, 33). 예수님은 결국 제자들의 위로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수난의 길을 가시게 되었다.

 예수께서 올리브 산에서 홀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이 함께 깨어 있을 거라고 믿으셨지만 그들은 정신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실망하신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시몬, 자고 있습니까? 한 시간도 깨어 있지 못하겠습니까?”(마르 14, 37). 예수님은 기도하며 하느님께 간절히 호소하셨다.

 

   예수님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함께하신다고 믿었기 때문에 혼자 고독을 견뎌 낼 수 있었다고 요한 복음사가는 전한다: “보시오, 그대들이 뿔뿔이 흩어져 가고 나를 홀로 버려 둘 때가 오고 있습니다. 이미 왔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서 함께 계시니 나는 홀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요한 16, 32). 아버지께서 함께 계셨던 것이다. 그것이 그분의 고독을 변모시켰다. 고독은 어느새 아버지와 하나 되는 일체감, 아버지 안에서 자신과 하나 되는 일체감으로 변했다.

 

   예수님은 성공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차마 털어놓지 못할 사연을 가슴에 품고 있는 고독한 사람이었다. 내가 외로울 때, 그것이 위안이 된다. 나는 고독을 묵묵히 받아들인다. 고독은 하느님이 가까이 계시다는 절신한 체험이자 하느님과 하나 되는 행복한 체험이다. 외로움은 괴로운 것이다. 오해받고 ‘왕따’당한 느낌이다. 어려워지면 아무도 나를 거들떠보지 않는다. 좌절했을 때 내 편이 되어 주는 사람도 없다. 모두가 나보다 잘났다. 나는 위기에 방치되었다. 온갖 고독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나와 함께 계시는 분이다. 그분이 곁에 계시다는 생각을 하면 외롭지 않다. 그분과 함께라면 나의 고독을 수용하고 주시하고 견디어 낼 수 있을 것 같다.


  여러분은 언제 외롭습니까? 버림받은 적이 있습니까? 버림받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하지는 않습니까? 외로울 때는 어찌합니까? 고독을 잊으려 다른 데로 눈 돌립니까, 아니면 참고 견딥니까? 외로웠던 예수님을 생각하면 고독을 견디는 데 도움이 됩니까?

 

  유엔 사무총장으로 세계사의 큰 족적을 남긴 다그 함마슐트도 예수님처럼 뼈저린 고독을 체험했지만 신앙으로 고독을 다루는 법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 방법은 이렇습니다: “기도하라, 그리하여 너의 고독을 시련으로 삼아 네가 평생 헌신할 수 있고 네 목슴을 바칠 만큼 큰일을 찾으라!” 여러분이 외로움을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데 아마 보탬이 될 것입니다.


                        안셀름 그륀  「50가지 예수 모습」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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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예수님은 현재에도 우리에게 이런 질문을 하십니다.

신앙이 두터워질 무렵 주님은 이런 질문을 던지시며 우리를 한 단계 높게 이끄십니다.

모두 다른 대답을 하겠지요.

"내가 외로울 때 곁에 계시는 분입니다."

"내가 행복할 때는 잊어버리고 내가 불행할 때는 찾게 되는 분입니다."

"내 은행 통장에 적자가 날 때 '좀 채워주십시오' 하고 기대보는 분입니다."

"내가 두려울 때 기도할 대상입니다."

여러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고 이 대답을 보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게 해줍니다.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메시아라 여기며 엘리아 선지자와 세례 요한과 비교했습니다.

하지만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다른 메시아와 다릅니다.

엘리아는 이교도들과 바알 신을 믿는 사제들을 죽이는데 조금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 믿는 자들을 엘리아 선지자처럼 처형하지 않으시고 

신앙안에 감싸주신 분이라는 점이 다릅니다.

이방인을 배척하는 대신에 하늘의 왕국으로 초대하시고 

하느님의 사랑의 연회에 참석할 기회를 주셨지요.


예레미야 처럼 고통 속에 절규하는 선한 자의 모습과도 다르십니다.

삶의 고행을 묵묵히 받아들이던 자기 학대자 masochist 가 아니셨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행복보다는 불행을 선택하곤 하지요.

세례요한도 지상의 행복은 포기한 사람이었지요.


이런 선지자의 모습에 익숙한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먹보에 술주정뱅이' un glouton et un ivrongne 라는 취급을 받기도 하십니다.

결혼식에 참가해 함께 와인을 마시며 흥청거리며 기뻐하시며 취하시는 분이셨고

아마 결혼 축가도 한 구절 불러 주셨을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산상설교를 하기 전에도 배를 먼저 채워 주신 분입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것을 아시던 인간의 뱃 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아는 분이셨습니다.





베드로는 우리 시대의 신앙인의 모습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믿음이 있으면서도 의심하게 되고

신앙고백을 한 사람이면서도 예수를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배반한 사람이죠.

제자였으면서도 적이 된 적도 있고 

강하면서도 약한 모습을 보여주었죠.

사랑이 가득찬 사람이면서도 많이 비겁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사람, 항상 그의 곁으로 돌아온 사람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아 임을 알아차린 사람이고

예수님이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할 수 있던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든 약속을 실행하려 오신 분이지만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살리시려 오신 분입니다. 사랑으로 말입니다.

'La Loi de Jesus ne se fait jamais accusatrice pour l'homme. Seul l'amour montre si nous sommes fideles ou non au Christ.' / Anselm Grun


믿음을 가졌다고 하면서 불행 속에 머무른다면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는 것은 사랑 뿐입니다.

우리의 가슴이 사랑의 감정으로 콩콩 달음박질 할 때 느껴지는 

삶에 대한 능동적인 기쁨이 바로

예수님의 우리를 향하신 마음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런 기쁨안에 머무르길 바라십니다.


이상은 책에 나오는 한 생각에서 부터 나의 말로 바꾸어 본 글입니다.


마태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모습을 여러 구절을 인용하여 설명한 

안셀름 그륀 신부님의 이 책은 

신부님의 인간적인 훈훈한 시선으로 복음서를 여태까지 알던 의미와

전혀 다른 시선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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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름 그륀 신부의 '참된 자아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 특별 영성강연 지상중계 
 

 

   21세기 영성의 대가 안셀름 그륀(Anselm Gr??n, 성 베네딕도 수도회) 신부의 '참된 자아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 특별 영성 강연이 2007년 11월 2~3일 이틀간 서울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열렸다. 서울대교구 전진상 교육관 개관 50돌을 맞아 마련된 이번 강연은 ▲제1강의 :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9가지 로기스모이에 관한 가르침 ▲제2강의 : 사막 교부들이 생각과 정서를 다루는 길 ▲제3강의 : 두려움을 다루는 영적 길 ▲제4강의 : 우울증을 다루는 영적 길 ▲제5강의 : 치유의 길로서의 관상 ▲제6강의 : 영적 그리고 치료적 동반 ▲제7강의 : 구원의 책인 성경 

 

 

자신을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길이 보인다

감정과 욕망 잘 다스려야 참된 자아 찾고 내적 평화 누릴 수 있어 
 
▨ 제1강의 :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의 9가지 로기스모이에 관한 가르침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는 수도자로서 상당한 학식을 겸비한 영적 저술가였다. 그러나 그는 유혹과 욕망에 시달리고 그것을 극복하면서 감정과 욕망에 대한 전문가가 됐다. 그는 사람의 아홉 가지 욕망을 '9가지 로기스모이에 관한 가르침'으로 설명한다. 
 에바그리우스는 인간의 욕망을 본능적ㆍ감성적ㆍ정신적 욕구로 분류했다. 본능적 욕구에는 식욕, 성욕, 물욕의 본능이 있다. 식욕은 삶을 즐기게 하며 성욕은 삶을 생기가 넘치도록, 물욕은 우리 삶을 안전하게 한다. 그러나 본능에 중독되면 식욕은 탐식이 되고 성욕은 방탕, 물욕은 소유욕으로 변한다. 본능에는 두려움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식욕은 '굶지는 않을까', 성욕은 '사랑받지 못하면 어쩌나', 물욕은 '가난하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에서 출발한다.
 감성적 욕구에는 슬픔, 분노, 게으름(아케디아, Akedia)의 감정이 존재한다. 슬픔은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을 때 느끼는 자신에 대한 연민이다. 슬픔은 자신이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는 비애와는 다르다. 분노는 내적 분열에 이르게 하고 세상에 대해 도전하게 한다.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면 내면의 공격성이 파괴적인 힘으로 분출된다. 아케디아는 흥미가 없는 상태로 가장 위험한 감정이다. 아케디아는 순간에 존재하는 능력의 결핍을 의미한다. 본능적 욕구는 중독되느냐, 자유롭게 되느냐가 관건이지만 감성적 욕구는 어떻게 조화를 이루느냐가 과제다.
 영적 욕구는 명예욕과 시기심, 교만이 존재한다. 명예욕을 추구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평가로만 살아간다. 이들은 칭찬받고 이해받길 바란다. 시기심은 늘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한다. 시기심에는 누구보다 더 많은 성취를 이뤄내고 싶은 욕구가 있다. 교만은 자신의 진면목 보기를 거부하게 한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이상적 표상만을 가지고 있다.
 이 9가지 욕망에 대한 가르침은 영적인 길로 향하게 하는 도전이다. 궁극적으로 이 가르침의 목표는 하느님과 일치에 있다. 하느님과 일치를 위해선 삶에서 이 9가지 욕망을 평가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잘 다스려나가야 한다.
 
 ▨ 제2강의 : 사막 교부들의 생각과 정서들을 다루는 길, 생각과 느낌들의 대화


 초기 수도자들은 이 욕구들을 다루는 5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첫째는 안티르헤티콘(antirrheticon) 방법이다. 에바그리우스의 저서 「안티르헤티콘」에는 유혹의 말을 물리칠 수 있는 성경 구절이 기록돼 있다. 이 방법의 첫 걸음은 부정적인 생각을 인지하는 것이다. 두 번째 걸음은 치유의 성경 말씀을 찾아 내면에 스며들도록 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우리의 생각을 바꾼다. 
 두 번째 방법은 생각과 대화하는 것이다. 모든 생각과 욕구들이 찾아오면 억압할 것이 아니라 허락해 삶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 내 안에 일어나는 생각과 욕구와 친밀하게 지내면 그것들이 지닌 긍정적 힘을 발견하게 된다. 문제가 있는 곳에 자신의 보물을 발견할 수 있다. 보물은 참된 자아에 대한 표상이다. 성욕이 문제라면 스스로 생명력을 억압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문제를 깨달아야 참된 자아를 찾고 내적 평화를 누릴 수 있다.
 세 번째 방법은 비동질화다. 로베르토 아사지올리가 제시한 개념이다. 내 짜증을 스스로 관찰할 수 있다면 내면은 짜증으로부터 물들지 않은 상태다. 물들지 않은 곳은 하느님이 존재하는 공간이다. 머리와 가슴은 감정에 반응하지만 내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곳에는 감정의 욕망이 힘쓸 수 없다.
 네 번째는 싸울 것인가 평화를 맺을 것인가다. 에바그리우스는 감정과 싸울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잘 다뤄 그 안에 있는 힘을 영적 삶을 위해 활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욕망과 대항해 싸워 억압하면 결국 욕망에 의해 지배된다.
 다섯 번째는 집 안에 머물기다. 에바그리우스는 방 안에 홀로 머물 것을 제안했다. 방에 머물면서 유혹을 제대로 바라보고 유혹 안에 있는 깊은 동기를 파악한다. 그러면서 유혹들이 자신에게 남겨놓은 상처를 발견한다. 유혹과 상처를 하느님의 빛에 드러내 놓는다.
 수도자들은 욕망을 극복하는 여러 방법을 개발했다. 공통적인 것은 욕망을 부정적으로 보지 말라는 것이다. 욕망이 없다면 수도자들의 삶은 아무런 힘이 없다. 영적 길의 중요한 부분은 욕망을 잘 다스리는 것과 같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아래로부터의 영성의 한 부분이다. 감정과 욕망들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말씀하시고자 한다. 하느님의 소리를 듣는 사람은 하느님의 진면목을 만나, 하느님 안에서 참된 자신의 모습을 만날 것이다.


두려움과 우울증, 영성 되찾는 첫 걸음

자기 과신 완벽 추구하는 생활에서 비롯
스스로 자기 한계 인정할 때 하느님 만나


▨제3강의 : 두려움을 다루는 영적 길

 

  두려움을 다루는 두 가지 길이 있다. 첫째는 두려움이 엄습할 때 피하지 않는 것이다. 하느님께 두려움을 없애달라고 기도할 게 아니라 두려움이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물어봐야 한다. 둘째는 두려움을 떨쳐버리려 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움은 없애려고 할수록 더 강해진다. 두려움은 인간이 지닌 한계를 보여주고 하느님께서 삶의 가장 깊은 근원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두려움 없는 삶은 없다. 그리스도인의 삶 역시 그렇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한다. 이들은 내면에 있는 부정적인 것을 볼 수 없도록 벽을 쌓는 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두려움은 삶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음을 지적한다. 그것은 '절대 실수하면 안 된다', '실수하면 나를 우습게 볼 것이다'는 생각이다. 내면세계는 하느님께서 만드셨고 하느님께서 내 안에 사신다면 어둠에 대해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하느님은 사랑의 빛으로 내 안의 모든 것을 비추신다. 두려움은 사람의 평가에 연연해하는지, 하느님의 평가를 중요하게 생각하게 하는지를 알게 한다.
 마음 깊은 곳에는 상처받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갑옷을 만들어 아무도 상처를 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갑옷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단절시킨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내적 공간에는 어느 누구도 상처를 주는 어떤 힘도 발휘할 수 없다.
 혼자 내버려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가진 사람 중에는 부모가 이혼을 하거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난 경우가 많다. 이들은 살면서 배우자나 친구가 떠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그러나 이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면 다른 사람에게 매달려 살아가게 된다. 인간은 수많은 참새보다 더 가치있는 존재다. 하느님은 우리를 한 사람 한 사람 소중하게 지켜주신다.
 두려움을 치유하는 두 가지 심리치료 방법이 있다. 먼저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다. 자신에 대한 가치를 심화시키면 혼자 내버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면 혼자 있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둘째는 하느님께서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믿음이다. 듣기 좋은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런 믿음은 자신을 받아들이고 그런 상황을 견뎌내게 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하느님을 생각함으로써 극복할 수 있다. 인간은 죽음을 통해 하느님의 손에 맡겨진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위대한 업적을 남기는 게 아니라, 하느님 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인간은 언젠가 반드시 죽고, 살아있을 때나 죽었을 때도 언제나 하느님 품 안에 있다.

 

▨제4강의 : 우울증을 다루는 영적 길

 

 우울증은 사람들이 일터에서 멀어지는 중요한 원인으로, 성취와 성공만이 존중되는 사회에 대해 반작용으로 등장한다. 우울증은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표상에 있어 하나의 도전이다. 우울증을 대면하면 영혼의 깊은 바닥에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마르 1,40 참조).
 우울 증세가 있는 사람은 혼자 있으려는 경향이 있다. 다른 사람에게 거부를 당할까봐 두려움을 지닌다. 이런 사람은 자신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며 가족이나 친구들이 항상 자신을 인정하고 돌봐주기를 바란다. 자신이 잘못했다는 죄의식에 시달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삶을 힘들게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죄의식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살아가기를 거부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마르 2,1-12참조).
 우울한 사람들은 사물의 외적 모습은 보지만 내면의 모습은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을 제대로 만나지 못한다. 우울 증세가 심해지면 성경도 읽지 못한다. 이들은 벌하고 심판하는 구절만 눈여겨 본다. 적극적으로 살아가라는 경고의 말씀을 다르게 이해한다. 그래서 오직 부정적이고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것만 인지한다(마르 8, 22-26).
 우울증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까. 첫 단계는 우울증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되,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두 번째는 스스로 좋은 영향을 주는 일을 하는 것이다. 음악을 듣는다던지 대화를 해야 한다. 세 번째 단계는 우울증과 대면하는 것이다. 우울증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물어봐야 한다. 우울증은 자신이 항상 완벽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비롯된다. 언제나 무엇이든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이다. 네 번째 단계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울증은 스스로 완벽하기를 원하기 때문에 생긴다. 중세시대에는 우울함을 창조적 활동을 위한 하나의 샘으로 봤다. 우울증을 잘 견뎌내면 창조적 작업을 하는 데 에너지가 된다. 하느님께 나가는 길은 우울증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통과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울증에 내재된 하느님을 만나게 된다.
 
성경은 영혼을 치유하는 거룩한 '약'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 일치 통해 치유 가능
자신의 삶이 활기에 넘쳐야 영적 생기 회복

 

▨제5강 : 치유의 길로서의 관상

 

    수도자 에바그리우스 폰티쿠스(345~399년)는 참된 치유는 관상 속에서 하느님과의 일치를 통해 가능하다고 봤다. 관상의 본질은 기도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기도하는 존재며, 기도는 인간의 본성을 초월한다.
 관상하는 동안에는 떠오르는 생각과 감정에 관심을 주지 않아야 한다. 불편한 생각과 싸우지 말고 구름처럼 지나가도록 둬야 한다. 파도가 이는 바닷속이 고요하듯 관상하는 내면은 고요하다. 인간은 모두 내면에 거룩한 성전을 가지고 있으며 그 안에는 하느님이 존재한다. 관상을 통해 내면의 공간으로 들어가면 질병이나 혼란스러운 생각은 우리에게 영향을 줄 수 없는 것임을 깨닫게 된다.
 관상은 보이는 사물 뒤에 있는 하느님을 보는 것을 의미한다. 믿는다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 뒤에 하느님이 빛을 비추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제6강: 영적 지도 그리고 치료적 동반

 

 영적 지도에서 중요한 것은 자신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내어 드리고 변화시켜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영적 지도의 중요한 테마는 하느님과 자신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생각과 표상은 신학적인 것만이 아니라, 심리학적인 것이기도 하다.
 완벽하기를 바라는 사람은 하느님도 완벽을 추구하는 분이라고 생각한다. 늘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해 강론하는 신부가 있다. 신부의 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신부는 자신이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버지에 대한 표상을 하느님께 주입시켰다. 본인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에 대해 잘 알고 있었지만 내적으론 하느님이 두려운 존재였던 것이다. 
 신자들은 벌 주는 하느님에 대한 강론을 듣는 것을 종종 힘들어 한다. 스스로를 벌하는 사람은 어디서나 불확실한 하느님의 표상에 대해 듣지만 스스로 자비롭고 평화를 느끼는 사람은 같은 강론을 듣더라도 다르게 생각한다. 하느님에 대한 표상은 자신에 대한 표상과 연결돼 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신부가 있다. 그에게 불면증을 어떻게 대하는지 물었다. 신부는 스스로 통제하려 한다고 했다. 이 신부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대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강박강념이 있었다. 중요한 점은 불면증으로부터의 도망이 아니다. 불면증에 대항해 싸우기 보다 하느님이 불면증을 통해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인지 들어야 한다. 하느님은 불면증을 통해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를 말하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을 병들게 하는 엄격한 하느님의 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들은 기도할 때 도대체 하느님을 느낄 수 없다고 불평한다. 나는 묻는다. 기도할 때 자신을 느끼느냐고. 자신을 느낄 수 없다면 하느님도 느낄 수 없다. 자신을 느낀다는 것은 자신의 진실한 모습을 인식하는 것이고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내어 놓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의 관계는 시작된다.
 가끔 생명력이 고갈된 수도자나 성직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다. 이들은 기도 안에서 생명력이 충만한 하느님을 만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불편하게 한 부모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영적 활기를 회복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는 어린 시절 어떤 상황에서 즐거웠고 무엇을 가지고 몇 시간 동안 할 수 있었는지 회상해보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 하느님과 일치한 체험을 했는지를 기억해, 그 체험을 영성에 도입하는 것이다. 삶이 활기에 넘쳐야 영적 생기도 회복할 수 있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치유받는 것에 대해 관심이 많다. 한 유다인 시인은 성경 구절을 '꽁꽁 얼어붙은 마음을 깨는 도끼'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또 적합한 책을 적당한 때에 읽는 행위는 자살을 시도하는 많은 이들을 구제할 수 있다고도 했다. 책이 치유를 위한 것이라면, 성경은 영혼을 치유하는 약이다.
 성경은 단순히 좋은 책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는 거룩한 책이다. 거룩한 말씀을 우리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하면 그 말씀은 우리를 치유한다.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자신의 삶을 성경에 비춰보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성경을 읽는 것을 어려워하는 사람도 있다. 어떤 사람은 성경 구절이 전혀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럴 경우 읽기 쉬운 소설 책을 권한다. 이러한 책을 읽는 것은 성경을 읽는 데 도움이 된다.
 읽는다는 것은 영적인 삶에서 아주 중요하다. 읽는 것을 통해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체험하는지를 알게 된다. 책에 있는 내용을 공감할 수 없다고 호소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읽는 동안 만큼은 다른 사람의 체험 자체가 삶에 영향을 준다.
 참된 영성은 우리를 활기차게 하고 온전히 살게 한다. 여러분도 영적 삶에서 자유롭고 사랑을 느끼며 내면의 넓은 세계를 체험하면서 살기를 바란다.

 

 

 

 

 

 

[가톨릭인터뷰] ‘21세기 영성의 대가’ 안셀름 그륀 신부

 

“자신을 만나야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영성은 성령의 힘으로 사는 것
나 자신의 삶에서 주도권 찾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 받아들여야”

이번 호 가톨릭인터뷰가 만난 인물은 안셀름 그륀 신부(Anselm Grun, 62, 독일 성 베네딕도 수도회)다.

‘21세기 영성의 대가’로 불리는 안셀름 그륀 신부가 한국을 찾았다. 서울대교구 전(全)·진(眞)·상(常) 교육관(관장 유혜심)이 개관 50주년을 맞아 초청한 자리다. 그는 2007년 11월 2~3일 연이틀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참된 자아와 하느님을 찾아가는 길-인간성과 영성의 통합’을 주제로 특별 영성 강연을 펼쳤다. 

본지는 11월 3일 영성 강연에 앞서 안셀름 그륀 신부와 인터뷰를 가졌다.

▲ ‘그리스도교 영성’이란 무엇입니까?

- ‘영성’이란 영적인 힘으로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 ‘영성’은 성령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성령 안에서 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 스스로 나 자신을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비로소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그 분의 말씀이 내 안에서 들리게 됩니다. 

▲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들은 스스로 ‘영성’이 부족하다고들 합니다. 잃어버린 영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 자기 자신과의 관계를 단절하고, 외부와의 관계만을 맺으며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영성을 회복하는 길은 내가 나 자신의 삶에서 삶의 주도권을 갖는 것입니다. 아울러 오직 진리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했던 예수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진리를 직시하고 이를 지키려 할 때 영성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좀 더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십시오.

- 영성을 되찾기 위해서는 우선 아침에 일찍 일어나기, 제 때 식사하기 등 규칙적인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내가 나에 대한 주도권을 쥐고 외부에 흔들리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을 바로 아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바깥으로 활동하고, 다른 누군가를 만나는 일에만 선호하지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알지 못합니다. 자기 자신을 알 때, 하느님도 알 수 있습니다.

▲ 급속한 산업화 사회를 겪으며 현대인들이 두려움과 우울증 등 정신 질환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 두려움과 우울증은 현대인들이 지나치게 완벽을 추구하고, 빠른 결과를 얻으려는 데서 발생한 부작용입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이에 대해 의학적 치료만을 우선으로 합니다.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우울함을 느끼는 것 자체가 영혼이 옳은 길을 찾도록 하는 마음의 작용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런 증상을 겪음을 고마워해야 합니다. 

▲ 어떻게 치유할 수 있을까요?

- 치유를 위해서는 자기 내면의 세계와 자주 만나야 합니다. 조용한 가운데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요즘 같이 바쁜 사람들에게는 자기 자신을 돌아보며 묵상하는 시간을 갖는 것도 ‘능력’이라고 합니다. 혼자 눈을 감고 조용히 묵상하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하고 가장 소중한 자신을 만나고, 그러한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때 인간은 더욱 행복해 질 수 있습니다.

▲ 신부님께서는 동양의 명상법인 불교의 ‘선(禪)묵상’에도 관심을 갖고 계시다 들었습니다.

- 1968년부터 1975년까지 불교 ‘선 묵상’을 배웠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가톨릭의 묵상은 불교의 참선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실제로 ‘선 묵상’은 3세기 가톨릭교회 수도자들이 도입한 것입니다. 저는 불교신자가 아니지만 지금도 이 묵상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 방법만 불교의 것을 빌려왔을 뿐 기도는 하느님께 드립니다. 타종교에 열린 마음을 갖고 대화할 수는 있지만, 종교를 뒤섞어서는 안됩니다. 

▲ ‘선 묵상’ 기도는 어떻게 하는 것입니까?

- 동방교회 전통 중에는 ‘예수기도’란 것이 있습니다.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숨을 들이쉬면서 ‘예수님’, 숨을 내쉬면서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반복하며 기도하는 방법이지요. 여기서 중요한 점은 침묵 속에 잠기는 것입니다. 

▲ 한국은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입니다. 신부님은 분단과 통일을 겪은 독일 국적을 갖고 계십니다. 남북한 관계 회복에 대해 한 말씀 해 주십시오. 

- 과거 분단되기 전 독일 국민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신자였습니다. 그런데 분단이 되면서 동독의 경우 국민의 80%가 신앙을 잃었습니다. 신앙을 잃으면서 내적으로 공허하게 됐고, 그 자리에 신나치주의나 극우주의 같은 사상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독일은 통일 후에도 이 부분이 큰 문제가 됐습니다. 남북한도 통일 과정에서 이러한 문제를 고려해야 합니다. 

현재 북한은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다고는 하지만, 정작 주민들은 내적인 공황 상태를 겪고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통일 시대를 맞는 한국인들은 그러한 북한 주민들을 이해하고, 대화하겠다는 긍정적인 자세가 필요합니다. 통일은 국민 개개인이 마음의 문을 열고 열린 자세로 상대방과 대화하는 것부터 시작됩니다.

▲ 한국은 내달 대통령 선거를 치르게 됩니다. 신부님께서 생각하시는 이 시대의 진정한 지도자상이란 무엇입니까?

- 지도자는 먼저 자기 자신과 일치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과 일치한다는 것은 자신이 갖고 있는 마음 속 상처들을 어루만지며 스스로를 자비롭게 대하는 것을 뜻합니다. 인간은 잘못을 범했을 때 스스로 힘들어하고 자기 자신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신을 용서하지 못한다면, 남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아울러 평화의 마음을 가져야 하고 다른 이들을 사랑을 감싸 안을 수 있어야 합니다. 또한 사람들 저마다가 갖고 있는 긍정적인 부분들을 읽어내고 그것을 성장해 나갈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국가에 대한, 국민에 대한, 이 사회에 대한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 안셀름 그륀 신부는

1945년 독일 융커하우젠에서 태어난 안셀름 그륀 신부는 1964년 독일 성 베네딕도회에 입회했다. 1965년부터 1974년까지 성 오틸리엔과 로마 성 안셀모 대학에서 철학과 신학을 전공하고 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부터 수도원 피정의 집에서 수많은 피정 및 영적 지도를 하면서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이를 통해 각종 영성 강좌와 심리학 강좌를 두루 섭렵했다. 1976년 첫 영성 책 ‘깨끗한 마음’이 나온 이래로 지금까지 200여 권이 출판돼 28개 국어로 나왔으며 총 1400만 부가 판매됐다.

안셀름 그륀 신부는 동양의 명상법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면서 지역과 종교를 뛰어넘어 많은 독자들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전해주는 ‘우리 시대 최고의 영성 작가’로 추앙받고 있다.

 



▨ 안셀름 그륀 신부 약력


 △1945년 독일 융커하우젠 출생
 △1964년 독일 뮌스터슈바르짜흐 성 베네딕도 수도회 입회
 △1965~1974년 성 오틸리엔 대학(철학), 로마 성 안셀모 대학(신학) 수학
 △1991년~ 현재 정신적 어려움을 겪는 사제와 수도자를 위한 프로그램 운영
 △주요 저서 : 「아래로부터의 영성」 「행복한 선물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http://www.cyworld.com/soriroom


“예언자들의 부름”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겔 13:1-16; 요 1:14-18


목회를 할 때 목사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찬사는 “그 목사님은 참 예언자다”라는 말일 것입니다. 예언자는 오늘 날의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식별할 수 있는 사람이며, 예언자는 “때의 징조”를 읽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모든 목회자들은 예언자처럼 때때로 일어나는 사건들 앞에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어쩌면 여기에 있는 우리 모두가 참으로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고 싶어 합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되려는 욕망이 있습니다.


오늘 성경 에스겔서의 구절은 참으로 놀랍게도 예언자들을 공격합니다. 왜냐하면 예언자들이 그들 마음대로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는 자들은 여호와가 보낸 자가 아니다.” 다음 축제일에 무엇인가를 설교하기 위하여 거짓 예언자들은, 그들 자신의 견해와 그들 자신의 사상, 그들 자신의 영감과 감상을 끌어들입니다. 그들의 설교는 자신들이 좋아하는 견해들로 채워지고 구성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중들은 너무 자주 그리고 온전히 복음을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에스겔에 따르면, 참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말씀만을 선포하는 사람입니다. 참 예언자는 자기 백성을 잘못 인도하는 것을 거부합니다. 참 예언자는 평강이 없을 때, “평강이 있다”고 말하기를 거부합니다. 사실 우리의 생각으로는 예언자는 분명히 심판을 설교하는 사람입니다.


제가 신학대학원을 다닐 때 신학생들에게 발견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3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신학생들은 열심히 지식을 함양하게 됩니다. 싫든 좋은 간에 모두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도록 강요를 받고, 때가 되어 교정을 떠날 때가 되면 신학생들은 모두 교회를 향하여 공격적이 됩니다. 기존의 교회를 향하여 왜 잘못되었는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말하려고 앞으로 나가고 싶어 견딜 수가 없어합니다. 실제로 우리가 설교를 할 때면 내가 예언자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자기중심적인 습성으로 인하여, 어리석게도 그들을 혼내주는 것이 예언자적 목회의 진정한 본질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런 예언자들을 향해 공격합니다. “너희 선지자들이 성 무너진 곳에 올라가지도 아니 하였으며, 이스라엘 족속을 위하여 여호와의 날에 전쟁을 방비하게 하려고 성벽을 수축하지는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은 이것을 군사적 용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은 거짓 예언자들이 그들 자신을 군대의 전열에 배치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전선에 뚫린 구멍을 메우려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극단적인 위험을 당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전쟁의 날에 적을 공격할 화살을 나르지도 않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알든 모르든 우리와 우리들의 교회들이 전투에 종사하고 있습니다. 승리하거나 아니면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삶과 죽음의 투쟁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생명을 영원히 소멸시킬 수 있는 적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적은 원자폭탄을 소유하고 있는 나라들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실제로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적은 또한 우리가 예측하고 있는 사탄이나 사망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 적은 이미 전투에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 인해 패배했기 때문입니다.


놀라지 마십시오. 우리의 적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이 사실이 에스겔의 말에서 아주 명확하게 나타납니다. 그는 여러분과 저 그리고 백성들을 공격하고 계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영원히 죽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라. 하나님은 우리가 투쟁해야 할 분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삶과 죽음의 투쟁을 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주의 날이다.


오늘 날처럼 안락과 안전을 추구하는 축복의 복음에 익숙한 시대에 사는 우리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이 우리의 적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은 큰 충격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은 우리와 싸우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의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다”라고 말합니다.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이라는 찬양은 그리스도인인, 비그리스도인을 넘어 모두의 찬양이자, 노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실제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전혀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제로 우리들의 죄가 우리 자신과 우리의 조물주 사이에 불모지를 만들었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리는 거기에, 즉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전체 속에 있습니다. 자기 백성, 자기 아내를 매음녀라고 비난하는 무도한 남편인 하나님, “내가 자식을 양육하였거늘 그들이 나를 거역하였도다.”라고 말씀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너 하늘아 이 일을 인하여 놀랄지어다 심히 떨지어다 두려워할지어다……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나를 버린 것이다…”고 외치시는 창조주 하나님.


우리는 정중하게, 아, 그것은 바로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옛 이스라엘이었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들의 거역하는 죄를 모른 체 우리들의 사업에 열중합니다. 가령, 우리는 소수민족의 인권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잘 못한 것에 대해여 화를 냅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을 거부합니다.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이들의 무모한 시도를 비웃고 미워합니다. 하나님의 법을 택하지 않습니다. 단지 “신약성서의 윤리는 불가능한 요구이다.”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일시적인 기분에 맞도록 신약성경을 고칩니다. 단지 우리는 우리들의 요구를 잘 들어줄 가장 훌륭한 목사를 찾아 교회탐방을 합니다. 유물론적인 무신론자입니다. 우리는 공산주의의 세계적인 폭력행위를 규탄하면서도 베트남과 중동 지역에서 그들의 진로를 봉쇄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들의 자원을 뺏고자 명분 없는 전쟁을 시작합니다. 우리의 편리와 욕심을 위해 자연생태계를 고려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정말 하나님 나라에서 파괴분자들이요, 극단주의자들이며 부랑자들입니다. 우리는 우리들 자신을 우리의 왕이신 하나님을 적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본문의 메시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반란을 진압시키기 위해 우리를 공격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그에 대하여, 반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싸워야 할 적입니다.


오늘 본문을 깊이 조사해 보시면, 우리는 어느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공격의 주요 역할을 담당하도록 요청되고 있음이 명백하게 나타납니다. 한 사람에게 적에 대한 주요공격이 담당하도록 요청됩니다. 그 사람은 바로 예언자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공격을 실행하는 자입니다. 오늘 날로 말하면 강단에 서 있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마치 설교자라는 사실 때문에 어쨌든 그들이 병역 의무를 면제받는 것처럼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은 심판을 선포하도록 지명된 자들보다 그것을 훨씬 더 손쉽게 해낸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예언서들을 살펴보면 예언자들 자신이 제일 먼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통을 당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백성들 가운데서 매음 행위를 하는 신부들을 징계하려 하십니다. 그래서 호세아 역시 우선 매음녀와 결혼한 자식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놀고 있는 자기 자식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예언자들의 집과 유산을 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자기 가정을 버려야 만 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보시기에 가장 소중한 것, 시온을 파멸에 넘겨주십니다. 그래서 에스겔 역시 그의 사랑하는 아내를 죽음의 손에 넘겨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은 적인 하나님의 공격을 피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말할 것 같으면, 주님은 예레미야와 싸우는 무서운 용사셨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귀로 들은 말을 소리 높여 고통 중에 외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하나님의 공격의 파도를 자신의 삶 속에서 고스란히 경험하였습니다.


“슬프고 아프다 매 마음 속이 아프고 내 마음이 답답하여 잠잠할 수 없으니 이는 나의 심령 네가 나팔 소리와 전쟁의 경보를 들음이로다”


에스겔은 예루살렘의 포위와 멸망을 전하도록 택함 받은 자들 가운데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포위됐기 때문에 불결한 거름더미 위에서 요리한 형편없는 음식을 먹어야 했던 최초의 예언자였습니다. 에스겔은 전혀 활동할 수 없는 철저한 무감각 지대로 끌려가는 포로 신세를 가장 먼저 경험한 사람입니다.


분명히 성경에 나타난 예언자들의 직무는 백성들 대신에 먼저 고통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강단에 선 현대의 예언자들 역시 그와 못지않은 운명이 요구됩니다. 여러분은 죄 많은 여러분의 회중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설교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삶 속에서 그 심판을 경험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 많은 여러분의 백성들에게 고통과 패배, 근심과 슬픔, 그리고 절망에 빠지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언자처럼 여러분은 그들이 있는 삶의 집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는 그들과 함께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공격의 결과를 견디도록 요구됩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려고 한다면, 평안하고 어려움 없는 목회를 구하지 마십시오. 예레미야나 에스겔의 죄를 위하여 상함 받고 눈물 흘리며 고통당하는 투쟁을 구하십시오.


예언자들은 적에 대해 저항합니다. 그들은 전선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많은 민족이 무너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죄 많은 민족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디서나 우리는 그들이 저 많은 백성을 용서해 달라고 주께 탄원하고 기도하는 소리를 듣습니다. 시내산에서 40일간 밤낮으로 금송아지 만든 것을 없었던 것으로 해 달라고 간청하는 모세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위해 기도하는 모세-우리는 그를 정의의 예언자라고 부른다-가 있습니다.


주 여호와여 청컨대 사하소서!

야곱이 미약하오니,

어떻게 서리이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 형제인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로부터 저주를 받고 끊어지기를 원한다는 다소의 바울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마침내 예레미야에게 그런 모든 기도로 자기를 괴롭히지 말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성경의 예언자들은 어디서든지 죄 많은 자기 백성을 위한 중보자로 나타납니다. 만일 우리가 예언자적인 목회를 하기 원한다면, 예레미야 같이 완강하게 한 영혼을 멸망하는 심판에 넘겨주기를 거부하며 가장 슬픈 자,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자들 가운데서 가장 무지한 죄인을 위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한 영혼을 포기 하지 않음은 우리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행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싫어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여러분의 교회 안에서 한 푼도 헌금하려 들지 않고, 자기가 아는 아무에게나 여러분을 비판하는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모임에서 너무나 독선적이기 때문에 여러분으로 하여금 화가 치밀게 하는 그런 여인에 대해서는 어떻습니까? 우리를 경멸하고 있는 교만하여 철저히 고집쟁이나 과격적인 이들을 향해 어떻습니까? 그들과 고통당하고 그들을 포기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함께 고통당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위하여 중보하며,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복음의 확실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여, 그들의 주의 날에 있을 전투에서 견딜 수 있도록 하려 하십니까? 만일 여러분이 예언자가 되기 원한다면, 바로 이것이 여러분에게 요구되는 과제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예언자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다는 것은 그 말씀에 따라서 행동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 주 예수님도 역시 한 영혼을 넘겨주기를 거부했습니다. 우리 주님은 전쟁터에서 우리의 대열에 구멍이 뚫린 것을 보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자신의 몸을 그 갈라진 구멍에 끼우지 않는 한, 우리는 멸망할 운명에 놓여 있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공격하실 때 전투를 견뎌낼 수 없는 하나님 나라의 파괴자요, 부랑자요, 극단주의자들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날에 해를 당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고 불모의 땅 변두리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적 앞에서 살게 하셨습니다. 그의 자녀로, 그의 백성으로 말입니다.


참으로 여기에 놀라움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전투에서 우리의 편에만 있던 분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적이 보낸 사절이었습니다. 전쟁에서 우리 편을 들려고 우리나라의 대왕(하나님)이 그분을 전선에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적인 그 대왕께서(하나님) 우리의 구원과 평화를 위해 자신을 매개자로 내어 주셨습니다. 그 분은(하나님) 우리 가운데 있는 한 반역자를 포기하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의 아들(예수님)을 죽이려 하셨습니다. 그 분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기 왕국에 있는 백성을 구원하려고 결심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인간을 예언자로 만드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것은 사랑의 사자, 즉 하나님의 말씀이 성육신학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좌우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 말씀의 완전한 희생과 자비 가운데서 선포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여러분이 현명하여 시대의 징조를 식별할 수 있다고 해서 예언자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단순히 여러분이 여러분의 백성에게 심판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에 예언자가 아니라, 여러분은 여러분이 고통을 당하고, 주의 날에 있을 전투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서 있는 새 이스라엘의 집을 위해 방벽을 쌓을 때에만 하나님에 의해 보내지는 예언자입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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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요한일서 3:10-16 20040711 조동천(현대교회 목사)

니키 검블의 저서, 「인생의 의문점들?」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젊은 경찰이 런던 북부에 있는 헨든 경찰 대학에서 마지막 시험을 치르고 있었다. “당신이 런던 외곽을 순찰하고 있는데 근처에 있는 주유소가 폭발했다. 조사를 해보니 인도에는 구멍이 생겼고 옆에는 차가 뒤집힌 채로 널부러져 있다. 차안에서는 강한 알코올 냄새가 나고 있다. 차안의 두 사람 모두 - 남자와 여자 - 는 부상을 입었다. 그 여자는 지금 멀리 미국에 나가 있는 당신 구역의 경위의 아내이며, 당신은 그녀를 알고 있다. 오토바이를 몰고 지나가던 사람이 멈추어 서서 당신을 도와주겠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가 무장 강도 용의자로 수배중인 사람임을 알아본다. 갑자기 근처 집에서 한 남자가 뛰어나오며 자기 아내가 임신 중인데 폭발의 충격으로 곧 출산하려 한다고 외친다. 또 다른 사람이 도움을 청하고 있는데, 그는 폭발로 인해 가까이 있는 수로 속에 빠졌으며 수영을 할 줄 모른다. 정신 보건법 조항들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지 간략하게 써라.”
그 경찰은 잠시 생각한 후, 펜을 들어 이렇게 썼다.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겠다.” 그의 대답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크리스천으로서 크리스천 제복을 벗고 ‘군중 속에 섞이는’것이 더 쉬울 때가 많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 있든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구별되어야 하며, 크리스천의 정체성을 유지해야 한다. 빛이 빛날 때, 사람들은 그 빛에 끌리기 마련이다. 

이 세상은 너무나 잔혹한 일도 가슴아픈 일도 많습니다. 어디서 어떻게 손을 대야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망막할 때가 많습니다. 정말 그리스도인이라는 제복이 있다면 벗어던지고 군종 속에 섞여 살고 싶은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무력하게만 느껴집니다. 

세상에는 신의 이름으로 너무나 많은 잔악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습니다. 어떤 특정한 종교의 사람들은 자기 신을 부르짖으며 민간인을 참수하기도 합니다. 그것이 애국이든 신에 대한 충성이건 잔혹하기 짝이 없습니다. 또 다른 종교의 한 지도자는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위한답시고, 비참하게 죽은 이를 비하하기까지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억울하게 죽은 이들을 위해 잔인하게 복수를 감행해야 한다고 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이런 세태를 보면 세상을 움직이는 실제적인 힘은 왠지 증오나 미움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런 시대를 향해 하늘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외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분명히 오늘 본문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하셨을 겁니다(11절). 도대체 사랑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악을 이기는 힘으로 사랑을 말씀하시는 것일까요? 세상을 구원할 이 사랑을 우리 모두 소유하길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1. 정체성 규정: 사랑은 정체를 드러냅니다. 
첫째,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규정합니다. 사랑은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밝히 드러내는 역할을 합니다(10-12절).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나의 나됨을 여러분은 어디서 찾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입증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특징이 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보면 대강 ‘동남아시아 사람이겠다’ 또는 ‘아랍인이겠다’ 또는 ‘미국인이겠다’라고 쉽게 말할 수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외형적인 특징이 있어서 구별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들의 특징은 무엇으로 나타나겠습니까? 오늘 본문은 그것을 의와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나니 무릇 의를 행하지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10절)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로서 우리의 표지가 무엇인지 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의를 행하지 않거나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 속한 자가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에 초점을 맞추겠습니다. 사랑! 하나님의 자녀들은 형제를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스도인의 표지를 놀랍게도 믿음에 두고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귀신들도 믿고 떨기 때문입니다. 소수의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강조하면서 사랑과 동떨어지게 정죄하기에 바쁘고, 심지어 상대편을 매장하고 죽일 만큼 악을 자행하기도 합니다. 그러게 증오심이 가득하면서도 믿음의 순수성, 진리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는 믿음으로 탄생하지만, 사랑으로 입증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는 것은 결코 믿음을 강조하는 것에 있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만, 그 자녀로 드러나는 것은 사랑입니다. 조용히 사랑을 실천하면 하나님의 자녀로 세상에 인정받게 됩니다. 믿음의 있는 사람임을 사랑으로 입증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외침으로 입증되는 것이 아닙니다. 선언으로 봉헌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겸손히 자기가 속한 공동체와 단체에서 사랑을 실천할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의 자녀임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말로 떠드는 것으로 세상이 결코 감동하지 않습니다. 높은 권력을 휘두르고 강한 이미지를 드러냄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이 나타나는 것도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을 위한 답시고 자기의 욕망을 은밀히 채우면서 하나님의 자녀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께 우리가 속한 것을 드러냅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우리가 주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요 13:35) 또는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것에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형식상의 교인인 가라지들도 많기 때문입니다. 축복을 얼마나 받고 부자로 또는 학자로 명성을 얻은 것에 두고 있지도 않습니다. 다만 의를 행하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에 두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이것은 외형적인 것이 아니라 그 자체의 인간됨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넌 내 자녀구나! 나를 빼 닮았구나!” 할 때 그 기준이 외형에 있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체가 없으십니다. 다만 인격적인 분이시기에 우리의 인격과 삶의 태도와 방식에 하나님을 닮은 면들을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랑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고 사랑이 없으면 마귀의 자녀라고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요즘 기독교가 지탄을 받고 하나님께 속한 거룩한 존재가 아니라 세속적인 욕망이 가득한 천박한 자들로 욕을 먹는 이유가 무능해서가 아님을 잘 알 것입니다. 사랑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우리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속한 자는 사랑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은 선택사항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성격이나 체질과 상관없이 사랑이라는 공통분모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특징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표지가 사랑이길 바랍니다. 그 사람의 특징이 바로 사랑이 많다는 거야! 이런 소리를 세상 사람들에게 듣고 살아가시길 축원드립니다. 


2. 구원의 증거(14-15절): 사랑은 구원을 보장합니다.
둘째, 사랑은 구원받은 것을 확실히 알게 합니다. 사랑은 구원의 시금석이기 때문입니다(14-15절). 우리가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무엇으로 알 수 있겠습니까? 14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형제를 사랑하면 구원받은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인지 아니면 혼자 착각하고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사랑하면 놀랍게도 자기도 알고 남도 알게 됩니다. 바로 내가 하나님께 속한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번역가인 위클리프 도우그 멜란드 부부가 브랄질의 풀니오 인디언들의 마을로 이주했을 때 원주민들은 순순히 그를 “백인”으로 불러 주었으나 그들의 말투에서는 인디언들의 백인에 대해 가져야할 경의를 느낄 수 가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백인들이 그들을 착취했고 집을 불태웠고 그들의 땅에서 약탈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멜란드 부부가 풀니오 말을 익힌 이후부터 그들은 의술과 다른 여러 수단으로 원주민들을 돕기 시작했다. 그러자 원주민들은 그러한 도우그를 “가장 존경하는 백인”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들 부부가 그 종족의 풍습에 익숙해지기 시작했을 무렵에 부족은 이젠 도우그를 “인디언 백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던 어느 날 도우그가 상처로 인해 피가 엉겨붙어 있는 원주민 소년의 발을 씻어 주고 있을 때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한 원주민이 다른 원주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무심코 들었다. “지금까지 인디언의 발을 씻어준 백인에 대해 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분명히 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입니다!” 그 날로부터 도우그가 인디언 가정에 갈 때마다 그것은 이러한 도착을 알리는 것이 되었다. “여기에 우리에게 보내어진 하나님의 사람이 오신다.”-제임67 스 C. 헤플리

여기서 중요한 사실의 하나는 사랑이 영적인 상태, 즉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구원의 상태에 대한 인식의 방식이라는 것입니다. 보이지 않는 영적인 사실에 대한 정보는 사랑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결코 자기의 정의감이나 능력으로 영적인 상태가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컨디션은 반드시 사랑의 정도 즉 그 수준으로 드러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영적인 컨디션이 아주 안좋은 상태임을 스스로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태는 “...사랑하지 않은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14절)는 표현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4살 먹은 마사는 그녀의 짧은 팔에 인형을 안고서 생각게 잠긴 듯이 엄마를 쳐다보며 말했다. “엄마, 나는 이것들을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 그러나 이것들은 결코 나에게 사랑을 돌려주지는 않을 거예요.”-자넷 W. 로커비 

사랑이 없으면 죽은 인형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죽음사랑이 없으면 오히려 사랑이 없는 삶은 이미 지옥의 고통에 거하는 것이 됩니다. 잘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고 풍성한 은혜 안에 거할 때, 우리는 어떤 외부에서 닥친 사건의 충격이나 세상이나 가족에게서 무리한 대우를 받을 때 곧잘 기쁨으로 오히려 이기며 축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상태가 피폐해 있고, 죄에 빠져 있을 때는 작은 시비에도 격분하고 증오와 미움으로 과격한 반응을 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결국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은 영적인 수준에 따라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형제를 사랑함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상태, 천국에 있는지 지옥에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한 가지 만으로도 이미 스스로 심판을 받고 있는 불쌍한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를 살인하는 자라고 극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는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한다고 말합니다(15절). 사랑과 반대인 미움은 우리를 살인자로 몰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영생의 없음을 입증하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사랑이 없는 미움이 가득한 상태는 이처럼 영적으로 심각한 병이든 상태입니다. 

엘머 게이츠라는 사람의 실험에 의하면 성인이 분을 내며 뿜어내는 탄산가스를 액화시키면 여러 가지 색깔의 침전물이 생기는데, 이 물질은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치명적인 독소가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화를 낼 때는 밤색, 고통이나 비애를 느낄 때는 회색, 후회로 마음의 가책을 느낄 때는 핑크색의 침전물이 생긴다는 것이다. 화가 날 때 생긴 밤색 침전물을 쥐에게 주사하자 몇 분 내에 죽었으며, 한 사람이 한 시간 동안 계속 화를 낼 때 생긴 독소는 80명을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심한 독소가 배출된다고 했다.

그리스도인이 미움이 가득한 상태에 머물러 있을 수 없습니다. 순간적인 미움을 속히 버리고 사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줄을 알게 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은 자신이 진리에서 난 것을 알게 되고 하나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한 줄을 알고 또 우리 마음을 주 앞에서 굳세게 하리니”(18-19절).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에 속한 줄을 알게 될 뿐 아니라, 주 앞에서 우리 마음이 굳세게 될 만큼 구원의 확신 가운데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 없이 힘 있는 신앙생활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사랑은 구원의 증거가 됩니다. 즉 믿음이 있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이 진실한지의 여부는 사랑으로 판명이 된다는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랑은 자기 자랑이고, 자기 의이지만, 사랑이 없는 믿음은 위선이고 껍데기에 불과 합니다. 스스로 속아서는 안됩니다. 정교하게 자신을 진찰하고 사랑이 없으면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기 위해 회개하고 주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미움 이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살인자나 다를 바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줄을 알게 되는 복된 성도가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3. 사랑의 능력(16절):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사랑의 기원
셋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생기느냐는 점입니다. 이기심 많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생길 수 있습니까? 누가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러겠습니까? 그것이 잘 안되어서 문제이지요! 자 어디서 사랑의 힘을 공급받을 수 있을까요? 우리는 어떻게 사랑의 사람이 될 수 있습니까? 16절은 사랑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 마땅히 행할 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 사람을 사랑의 사람으로 바꾸어 온통 사랑 안에 머무르게 한다는 것입니다. 

16절 본문의 흐름을 잘 보십시오. 사람의 생명처럼 귀한 것은 없습니다. 더구나 자신의 생명을 무엇으로 바꾸겠습니까? 그런데 그 자신의 생명을 형제를 위해 버리다니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그 해답이 이렇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16절) 여기서 놀라운 논지는 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처절한 사랑이 마땅한 것,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즉 자기의 목숨을 내어줄 만큼 희생적인 특별한 일이 더 이상 기적도 억지로 하는 힘겨운 현상도 아니라는 말입니다. 어떻게 이런 능력이 나올 수 있습니까? 다만 예수님의 사랑, 그 분이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린 사랑에 젖어 있으면 사랑은 밥을 먹거나 이야기하거나 걸어 다니는 것만큼이나 일상의 자연스런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사랑은 받은 만큼 맛본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렸을 때부터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온 사람은 사랑이 아주 자연스럽고 편안합니다. 사랑하는 것 자체가 마땅한 일이 됩니다. 그것은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랑을 부모에게 형제에게 이웃에게 받고 자라서 그렇습니다. 가난하건 부하건 상관없이 사랑에 감싸여 살아온 사람은 이미 엄청난 하늘의 은혜를 받고 축복을 다 받고 산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아온 사람은 사랑을 한다는 것이 기적같이 어렵고 힘든 일이고 부자연스런 고역이 됩니다. “이로써 우리가 사랑을 알고”라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랑을 받아 본 적이 그의 삶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아픔이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산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버지나 어머니가 성격적인 결함이 심하여 어린 아이의 마음에 심각한 상처를 남기고 늘 폭행을 가하고 잔인하게 대한다면 그 아이는 어떻게든 자기의 정신을 잃지 않으려고 더욱 강퍅해지고 단단한 악으로 자기의 마음을 무장해서 중심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막으려고 애를 쓸 겁니다. 이것은 자기 방어지제가 작동하여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무의식적인 현상입니다. 물론 그것마저 꺾이고, 기를 빼게 되면 아이가 정신병에 걸리거나 반쯤 넋이 나간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황이 오니 스스로 자신을 잊어버리고 부인하여 그 상황에서 고통을 잊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아이에게 무정하게 한 부모의 성격적인 결함은 자신이 몰라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도 어쩔 수 없는 자동적인 반응이고, 복받치는 분노와 피곤함을 감당 못해 미움과 증오가 순간 폭발하여 그런 것입니다. 이미 물리적이건 언어건 폭력을 가하는 그 사람 또한 상처를 받은 피해자로서의 과거가 많은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가슴이 아픈 이야기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는지 모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그렇게 어떤 사람의 행동이 포악하고 거칠다면 ‘그 내면에는 그리고 그의 과거에는 얼마나 상처가 많았으면 그런 지경이 되었을까?’를 헤아려 보아야 합니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사랑하라고 하는 것은 전혀 자신의 체질과 정서에 어울리지 못하기에 차라리 죽는 것이 견디기 쉬운 일로 느껴질 정도로 스스로를 역행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우리가 볼 때 우리는 그가 살아 있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마땅합니다. 얼마나 불쌍한 사람입니까? 그 포악함 속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라고 남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는 마음이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필수적입니다. 그들은 마귀의 자녀로 평생 하나님의 사랑을 인식하지 못한 불쌍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우리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구체적인 사랑을 경험하게 되면 감격하고 놀라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본래 진노의 자녀였는데, 예수님의 구속의 사랑, 자기 목숨을 내어준 사랑 때문에 오늘 사랑하는 것이 자연스런 사람이 된 것 아닙니까? 

조류중 모성애가 가장 뜨거운 것은 펠리컨입니다.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줄 먹이가 없으면 자신의 가슴살을 뜯어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 가는 새끼에게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인간의 죄를 모두 짊어지고 대신 피를 흘린 펠리컨 같은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2천년 전 이 땅에 오셔서 인류의 죄를 모두 책임지셨습니다. 그분의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인간의 탐욕 교만 불신 증오 거짓을 모두 혼자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희생한 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떡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영생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명을 위한 밥이 되시길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지금 미국의 뉴욕 주가 아직 황야로 있을 때입니다. 그 지역의 원주민 인디언들은 유럽에서 파송된 선교사들을 매우 괴롭게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출신의 브레베 선교사, 달르망 선교사는 참으로 놀라운 신앙의 증인이었습니다. 선교사들이 당한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친 몽둥이로 온몸을 두들겨 맞고 머리카락, 턱수염, 손톱은 생채로 뽑히고, 손가락은 그들의 입에 넣고 깨물었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고통들을 주님과 인디언들을 사랑하므로서 견디어 냈습니다. 그 인디언들은 선교사들에게 소름끼치는 고문을 가한 다음에 심장을 도려내어 씹어 먹고 피는 그대로 마셨습니다. 왜 그들은 이토록 잔인한 행동을 하였을까요? 인디언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사람의 피를 마심으로서 용감한 정신을 자기들 안에 스며들게 하려 했던 것입니다. 인디언들도 그 선교사들의 죽음을 초월한 사랑의 능력을 느꼈던 것입니다. 그 선교사들은 죽음을 통하여 승리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끔찍한 죽음 희생적인 죽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이루어졌던 것이 아닙니까? 우리의 죄악을 사하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피를 내어주셨고, 몸의 살을 주셨습니다. 그 희생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얻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를 사는 것이 마땅치 않겠습니까? 그런 의미와 각도에서 본문을 보십시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기에 우리가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의 사랑이 없었다면 결코 하나님 아버지를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마땅한 것으로 알고 행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 목숨을 버리신 그 감동이 있고, 그 은혜 가운데 젖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처럼 엄청난 희생적 삶이 마땅한 것, 자연스러운 것이 됩니다. 이것은 자랑할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목숨을 내 놓은 사랑을 받은 우리는 얼마나 복된 사람입니까? 그러니 사랑할 능력이 우리 속에 이미 있는 것입니다. 그분의 목숨을 내어 놓을 수밖에 없을 만큼 흉악한 죄인이었는데,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을 생각하며 우리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랑에 젖어서, 사랑의 공급을 받아, 사랑에 능력이 있는 사람들 되시길 축원드립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