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연(外延)을 넓혀 가는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

복음주의적 기독 청년들의 사회 참여가 점차 그 외연을 넓혀가고 있다. 공의 정치 실현,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 성경적 토지 정의의 입법화, 공정 무역, 교회 갱신, 교육 개혁과 사교육 폐해 극복, 세상에 대한 기독교의 선한 영향력 확장 및 교회에 대한 자기비판적 담론형성을 위한 언론 운동, 기독교 윤리의 실천, 그리고 평신도들을 위한 각종 교육 프로그램 운영 등 열의와 진정성으로 가득 찬 기독 청년들의 사회적 활동은 한국 기독교의 앞날에 대해 밝은 전망을 갖게 한다. 이들의 활동은 한국의 주류 교회로부터 아직 두터운 지지와 환영을 받지는 못하지만 생각 있는 그리스도인들의 기대를 받고 있다. 이런 활동에 종사하는 청년들을 통합시키고 집중시키는 중심 주제는 하나님나라다. 여기서 하나님나라는 공간적 실체를 가리키기보다는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통치 자체를 의미한다. 하나님나라는 개인의 인격, 가정, 조직체, 국가, 국제 질서, 그리고 피조 세계 전체에 하나님의 통치가 온전히 관철되는 사건이요 상태다. 물론 하나님 통치의 완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실현될 것이지만 동시에 인간 역사를 통해 점진적으로 성취될 나라다. 그것은 죄악된 권력 집단들과 개인들의 집단적인 반대와 완강한 저항을 감수하면서도 소수의 남은 자들인 하나님 자녀들의 부단한 순종과 견결한 실천을 통해 완성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통해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나라는, 특정한 시공간의 역사 속에서 점진적으로 건축되어져 가는 것이다. ‘영원한’ 하나님나라가 덧없는 ‘특정한’ 시대의 과업을 통해 건축되어져 간다.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세계사를 보면, 어떤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자유 가치를 실현하는 데, 또 다른 시대는 하나님나라의 정의와 공평, 연대성과 평화를 실현하는 데 투신되었다.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기초를 놓는 데, 어떤 민족은 하나님나라의 세계적 확장에 쓰임받았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는 하나님 당신의 고유한 과업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에게 공명하고 응답하는 사람들의 과업이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고유하고 ‘절대 주권적인’ 통치 확장 행위이지만 특정한 시대와 장소에 사는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위임된 과업인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운동임과 동시에 하나님께 붙잡힌 하나님 자녀들의 ‘응답적’인 운동이다. ‘운동’이라는 말 때문에 하나님나라가 인간 주도적인 기획 혹은 인간의 힘만으로 성취되는 특정한 역사 발전이나 정치․경제상의 진보를 의미하는 말로 오해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단연코 그런 말이 아니다. ‘운동’이라는 개념은 성경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의미와 그 성경적 기원
    
첫째, 창세기 1:2이 하나님의 창조 운동을 증언한다. ‘하나님의 신이 수면에 운행하고 있었다’는 구절은 하나님의 세계 창조가 하나님의 명령과 하나님의 신이 주도한 ‘운행’의 산물임을 보여 준다. ‘운행하고 있었다’라고 번역된 히브리어는 ‘머라헤페트’는 ‘라하프’(rāḥaph)라는 동사의 능동분사형으로 지속적인 운동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신(혹은 바람)이 지속적으로 흑암에 뒤덮인 바다를 향해 운동했다는 뜻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흑암의 원시 바다에 뒤덮여 있는 ‘땅’을 건져내기 위해 하나님의 신이 쉴 새 없이 운행했다는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기초가 될 마른 땅이 드러나도록 불어 대는 바람같은 야훼 하나님의 운행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의 으뜸되는 신학적 근거다. 

둘째, 사도행전 2:1~4의 불같고 바람같은 성령의 강림이다. 성령의 불같고 바람같은 역동적 ‘운동’은 낱개의 개인들을 공동체로 변형시키는 운동이며, 하나님의 영에 100% 공명하고 공감하도록 결단케 하는 자복 운동이다. 바람같고 불같은 성령의 내습(來襲)을 경험한 개인들은 하나님나라 운동의 대의에 합류할 수 있는 능력을 덧입게 된다. 

셋째, 히브리서 4:12~13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어 …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라는 구절이다. 하나님 말씀의 운동력은 인간의 가장 깊은 마음까지 분석해 내고 폭로하는 신적 분석력이자, 자복시키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갤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에 설복되고 감화되어 발생하는 활동이 바로 하나님나라 운동인 셈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신적 주도성 및 인간적 수동성을 가리킨다. 즉 하나님의 영과 말씀에 사로잡혀 파생되는 운동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순전한 복종을 바치는 운동이며, 자기 기득권(계급적․계층적․신분적 기득권)을 희생해 가면서까지 추진하는 자기 부인 운동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의 보상은 하나님과의 생명 연합, 하나님 모방, 하나님 자녀들의 대가족 향유, 그리고 종말론적으로는 하나님나라의 상속이다. 오늘날 한국의 기독 청년들이 말하는 하나님나라 ‘운동’은 바로 이런 의미다.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중심 주제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임에도 불구하고 현실의 종교 권력에게는 철저하게 외면당하고 배제된 성경 사상이었다. 왜냐하면 하나님나라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기득권자나 권력 체제를 향해 항구적인 자기 갱신과 자발적 변혁을 요청하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개인들에게는 급진적 전향을 요구한다. 따라서 하나님나라라는 성경의 중심 메시지는 패역하고 음란한 세대에 살면서 고독을 느껴 보지 못하고 불안에 떨어 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생경하고 거추장스러운 짐일 뿐이다. 2000년 교회사를 보면, 이스라엘 본토에서 시작된 기독교 복음이 유럽 문명에 이식될 때 기독교 신은 본래의 체제 변혁적이고 급진적인 신선함을 잃고 기존 세계의 상류층 문화에 길들여진 채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하나님나라 복음은 제왕들과 영주들의 종교로 전락했고, 기독교회는 적어도 1500년 이상 세상 정치권력과 종교, 경제적 권력의 최상층부에 자리 잡은 사람들에 의해 대표되는 귀족들과 왕후들의 지배자 종교가 되어 버렸다.

로마의 성베드로 대성당이나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을 보면 유럽 문명이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얼마나 결정적으로 왜곡하고 변질시켰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거대한 대리석 석궁과 엄청난 크기의 돔(dome) 지붕과 화려한 고딕식 예배당이 기독교 문명의 가시적 기념물로 남겨지는 동안에, 하나님나라의 세계 변혁적이고 자아 갱신적인 에너지는 거대한 대리석 예배당과 그 안에서 벌어진 거창한 종교 제의들 안에서 소거되어 버렸다. 우리는 이 시점에서 다시 한번 기독교 신앙이 거룩한 문화 창조의 에너지도 발출하기 전에 세속화의 위협 아래 굴러 떨어진 한국교회의 앞날을 걱정하며,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묵상해 보고자 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되는 나라다

하나님나라는 창세기 1~2장에서 그 첫 모습을 드러낸다. 창세기 1장은 하나님나라의 기원과 토대를 말하고, 2장은 하나님나라의 역사적 지향을 부각시킨다. 1장에서는 하나님께서는 우주의 최고 주재권을 가지신 왕만이 내리실 수 있는 명령(fiat)으로 세계를 창조하신다. 하나님의 세계 창조는 인간의 협조와 지지, 믿음과 순종의 매개없이 일어났다. 하나님께서 아무에게도 의논하지 않고 인간과 세계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자기만족적 자기평가를 일곱 차례나 반복하심으로써 이 세계가 하나님의 의도대로 창조되었음을 인정하셨다. 화가가 자기 그림에 낙관을 찍듯이, 하나님은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반복된 말로 자신의 창조물을  품평하신다.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애착과 무한 긍정을 표현하신 것이다. 적어도 우리는 창세기 1장에서 이 세계의 창조 목적이 하나님의 자기만족, 자기 왕권의 과시요 확장임을 짐작할 수 있다.

후대의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부연 해설을 제공했다. 이사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세계 창조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창조 세계에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하박국에 따르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알고 인정하는 거룩한 교양이 온 피조 세계에 넘치게 하기 위함이었다. 이 두 구절은 하나님께서 통치하시기 위해 이 세상을 창조하셨음을 강조한다. 온 세계가 하나님의 보좌요 발등상이라는 말이 바로 온 세계가 하나님의 통치 대상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통치는 온 세계 안에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영광을 인정하는 지식과 교양을 충만케 하는 사역인 것이다. 창세기 2장은 이 하나님나라가 인간의 순종과 믿음을 통해 역사 속에 뿌리를 내릴 것을 보여 준다. 하나님나라는 천상 영역, 이데아 영역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대표로 하는 피조물의 세계 속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하나님의 세계 통치에 결정적인 동반자인 ‘사람’이 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말씀과 그것에 대한 피조물의 대표자인 사람의 순종과 응답으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에 바로 피조물인 인간의 믿음과 자발적 순종의 위치가 드러난다. 인류의 대표자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순종이 첫 사람 아담의 실패를 일거에 만회하는 사건이 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 때문이다(롬 5:12~21). 결국 창세기 1~2장은 하나님나라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명령이 성취해 가는 하나님 스스로의 통치권 확장 활동이면서 동시에 피조물 인간의 응답을 요청하는 매우 인간적이고 역사적인 과업임을 강조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전적인 고유 절대 주권과 권능으로 시작되고 세워지는 나라임과 동시에, 인간의 자발적인 순종으로 완성되어 간다는 것이다(시 33편). 
   
창세기 1~2장에서 인간에게 위탁된 중심 활동은 다스리고 통치하고, 관리하고 지키는 행위다. 하나님나라와 인간에게 위임된 이러한 사명은 긴밀하게 결속되어 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창조에서 시작된다. 창조는 물과 땅이 뒤얽힌 혼돈(混沌)으로부터 경작지를 건져 내어 피조물들을 위한 생명의 왕국을 건설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창조는 질서 부여 행위였으며,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이 세계의 기초를 하나님의 성품인 공평과 정의 위에 세우는 일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물리적 환경의 창조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성품에 맞는 질서, 신적 친절과 공평(시 89:13~14)으로 운영되는 생명 공동체의 창조까지 포함하는 활동이었다.

그러나 창세기 1~2장 이후의 하나님나라의 행로는 아담 자손의 불순종과 저항으로 숱한 좌절과 퇴행을 겪었다. 구약성서의 첫 책인 창세기 3~11장의 인류 원 역사는 하나님나라 운동의 전진을 가로막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들로 점철되어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적 저항과 방해에 대하여 징벌과 심판으로 응답하셨다. 인간의 죄악을 징치하는 징벌 행위는 하나님께서 이 세계를 다스리신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사람과 피조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는 징벌과 심판만으로 관철되지는 않았다. 하나님은 일부 인간을 먼저 선택하셔서 구원하는 구원사를 개시하심으로써 당신의 세계 통치를 이어가셨다. 죄와 불순종으로 부패하는 인간을 갱생시켜,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동역자로 변혁시키기 위해 믿음의 사람들을 이 땅에 일으키셔서 세상에 파송하신 것이다. 아담-셋-에노스-노아-셈-아브라함-이삭-야곱으로 이어지는 믿음의 계보는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보여 주는 증거다. 또한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율법을 받아 나라를 구성하고 사회를 이루도록 부름받은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자체가 하나님의 세계 통치의 증거였다. 특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역사에 일으키신 예언자들은 인간 왕국들을 아우르시고 어거하시는 초월적인 세계 통치 지휘부가 존재함을 보여 준다(사 6:1~3; 렘 22:18~22; 암 3:7~8; 왕하 22; 시 103:19~22). 이스라엘 역사를 세계 만민의 역사와 결정적으로 구분 짓는 표지는 초월적인 하나님나라의 특명 전권대사로 활약한 이 예언자들이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역사의 참된 왕이 인간 왕들이 아니라 천상 보좌에 앉아 세계를 통치하시는 야훼 하나님임을 결정적으로 증거했다.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의 종점에 나사렛 예수가 등장했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구약 예언자들을 거쳐 독생 성자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절정에 이르렀던 것이다. 구약 예언자들의 야훼의 말씀 대언은 창조 때 시작된 하나님나라 건설 과업을 계승하는 작업이었고,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창세기 1장에서 시작된 하나님나라를 완성시키려는 활동이었다. 나사렛 예수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잠시간 혹은 부분적으로 대언하는 예언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자체였다. 창조적 권능을 내뿜는 하나님의 말씀 자체면서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적 순종의 화신이었다. 그래서 나사렛 예수의 인격과 사역 전체는 태초부터 이 세계 속에 활동해 온 하나님나라의 총체적 면모를 일시에 계시했다. 나사렛 예수의 순종을 격려하고 돕는 성령이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의 고갱이였다. 12사도와 사도 바울의 복음 전파 사역은 성령으로 추동된 자발적인 순종 운동이었다. 
   
하나님나라는 이처럼 철저하게 하나님 주도적인 나라다.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전하게 순종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즉 하나님이 이 세계를 다스린다는 증거가 나타난다. 사랑, 평화, 희락, 연대와 우정, 돌봄과 치유가 일어난다.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나라를 말할 때에는,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이어지는 부단하고 순전한 순종이 담보로 한 것이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나라를 말하려면 스스로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순종이 담보된 사람들의 입술에서 하나님나라가 선포될 때 그것은 자아 갱신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파급력이 발산되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철저히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총으로 주도되는 운동이다. 하나님께서 성령의 감화 감동과 말씀의 감화력으로 개인과 공동체를 추동시켜 하나님나라에 근사치적인 세계를 만들어 가는 운동이다. 한국교회의 영적 분투나 열심만으로는 하나님 통치를 매개할 수 없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약간 더 의로운, 약간 더 청빈한 그리스도인들이 주도하는 대중 계몽운동도 아니고 윤리 각성운동도 아니다. 그런 행동들도 의미 있기는 하나 성경적인 하나님나라 운동은 아니다. 이 말은 모든 점진적이고 상대적인 의미의 사회 개선 활동의 의의를 훼손하는 말로 오해되어서는 안 된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나라 운동이라는 말의 의미를 너무 비근하게 사용하지 말아야 한다는 다짐이다.
 
하나님나라는 다양한 단위로 존재하며 역사 속에서 점진적이며 유기적으로 성장한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피조물에게 나타나는 은총이다. 그것은 구원의 형태, 약속과 인도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종종 징벌, 정화적 심판, 그리고 쉼 없는 징계와 연단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기 이전의 에덴동산은 물리적 인간세계에 나타난 하나님나라였다. 하나님나라는 먼저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된 자 거듭난 자, 믿는 자에게 영생으로 나타난다. 영생은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삶으로서 의와 진리, 거룩함으로 거듭난 개인의 삶이다. 둘째, 하나님나라는 믿음의 가정에 나타난다. 셋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이 지배하는 확대된 가족공동체나 교회 공동체에 나타난다. 넷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사랑과 정의가 지배하는 국가 공동체다. 다섯째,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국제 질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인애와 정의가 지배하는 피조물 전 생태계 공동체다(사 11, 65장).
    
따라서 하나님나라 운동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기 위한 개인의 부단한 인격 갱신과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근접하는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중단없는 사회변혁 운동을 내포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감화 감동으로, 혹은 하나님의 강력한 부름에 응답한 개인들의 복음 영접과 회개 운동이다. 세례 요한과 나사렛 예수 모두 하나님나라가 도래했다는 복음 선포를 통해 복음 영접과 회개를 동시에 요청했다. 개인의 믿음과 회개가 하나님나라 운동의 가장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나라의 복음을 듣고 하나님나라의 질서에 편입되려면, 개인이 하나님나라의 도래의 현실성을 인정하고, 즉각 하나님 없이 살던 때의 삶을 전적으로 혁파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나님 없이 살던 때는 돈과 권력, 부동산과 동산, 인맥과 학맥, 종교적 열심과 세습적 상속 등이 구원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러나 하나님나라의 질서에서 이런 세상적인 토대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어진다. 그래서 그것들을 버리고 나사렛 예수가 전파하는 하나님나라의 가치에 순복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복음을 믿고 회개한 시민들이 많아지면 사회구조적 변혁 가능성이 그만큼 커진다. 로마제국의 콜로세움 검투사 경기장이 사라지는 역사가 이런 진실을 잘 예증한다.
   
콜로세움 원형경기장은 주후 72년에 유대 전쟁을 통해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 예루살렘 성전을 초토화했던 베스피안 황제가 짓기 시작하여 400년 이상 로마제국의 대중오락장으로 성황을 누렸으나 주후 500년경에는 사실상 용도 폐기되었다(523년경 마지막 검투 경기 기록). 그렇게 된 이유는 로마 인구의 대부분이 기독교인들로 바뀌면서 검투사 경기가 흥행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로마의 원형경기장 2층의 베스피안 황제 유물 전시장에 걸린 해설문의 분석이기도 하다. 이것은 한 사회의 구조악을 해체하는 데 개인들의 자각적이고 의식 있는 조용한 결단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는 일화다. 초대 로마의 기독교인들이 콜로세움 경기장 안 가기 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신앙 고백상과 가치 지향 자체가 잔인한 동물 학대, 전쟁 노예 학대, 잔악한 살인 경기와는 상극이었다. 기독 청년들 개개인의 사사로운 소비 행위, 내밀한 윤리․도덕적 결단 등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독교인들의 내밀하고도 자발적인 결단이 축적되어야 비로소 한 사회에 기독교적 가치를 표방하는 문화가 생겨난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인들이 교회력에 충실한 신앙생활만 해도 한국의 대중문화를 어느 정도 순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40여 일의 사순절 기간이나 종교개혁 주간에 모든 기독교인들이 절제와 금욕을 실천한다면 그 기간 동안에는 영화사들이 자극적인 블록버스터를 만들어 흥행을 시도하지 않을 것이며, 과도한 육류 소비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을 통해 기독교가 어떤 가치를 지향하는지를 세상에 널리 공포할 수 있을 것이며, 절제와 겸손, 자비와 나눔의 기독교 문화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는 사회 관습, 제도, 법, 그리고 가치관이나 세계관을 성경적 진리와 일치시키는 사회구조를 만들어가는 운동이어야 한다. 하나님나라 운동은 한 사회의 운영 원리를 성서적 정의와 공평, 인애와 자비의 원칙에 수렴시키는 운동인 것이다. 가령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성실하게 운동하는 개인을 생각해 보자. 성실하게 운동하는 것은 건강에 좋은 일이나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에서 막무가내로 성실하게 운동하면 할수록 건강에 해롭다. 먼지가 가득 찬 체육관 시설과 구조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개인의 건강 증진은 어렵다. 한국사회가 부동산 투기로 재테크를 하거나 온갖 편법과 탈법, 위법과 불의로 토지를 매입하여 부를 구축하는 틀을 바꾸지 않고 개인의 양심만 세차게 담금질해서는 한계가 있다. 마약 밀수업 조직에 뛰어든 조직폭력배가 아무리 성실하게 일해도 그 조직의 목표 자체가 반사회적이라면 그의 성실한 조직 생활은 반사회적일 수밖에 없다. 나치 체제가 흉악무도한 악의 왕국이었기에 그의 지휘 계통에 따라 성실하게 공무를 수행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행동 자체가 악의 실행 이상 아무 것도 아니었듯이, 우리가 속한 조직이나 사회의 구조적 악과 불의를 해소하지 않고는 개인의 윤리적 청정화만 강행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우리 기독 청년들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개인의 양심을 더럽히고 죄를 짓지 않고는 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운영의 틀 즉 법, 제도, 관습, 심지어 가치관까지를 바꾸고자 하는 활동이다.

이러한 하나님나라 운동은 다양하고 구체적으로 나타날 수 있다. 예를 들어, 생태 환경을 지키기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활동이 하나님나라 운동의 일환일 수가 있다.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는 양수리 부근의 한강 상류는 서울 시민이 식수를 채취하는 1급수 수원지다. 따라서 이곳의 농촌 마을은 농약 사용이 금지된 지역이다. 농약 대신에 오리가 물이 찬 논 사이를 오가면서 벌레를 잡아 병충해를 막고 있다. 그런데 인근 지방자치 단체들이을 탐낸 러브호텔 건축을 무분별하게 허가해 생활 폐수를 배출하여 문제가 되고 있다. 정부가 시도하는 4대강 정비 계획에 따르면 이 유기농 지역도 인위적인 제방 구축 등의 이유로 시멘트 구조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소수의 생각 있는 시민들이 팔당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관련 법규를 고치려고 하고, 수원지 파괴 오염 행위를 막으려고 온갖 노력을 하고 있다. 그러나 역부족이다. 이런 경우 기독 청년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실로 다양하다. 해당 지자체장과 의회를 찾아가 항의하고 주의를 진작시키는 일, 관할 국회의원 사무실에 전화하고 관련 자료를 보내는 일, 이런 사회적 영향력이 큰 쟁점을 언론에 보도하는 일, 그리고 그 수원지를 보호하기 위해 도보로 순례하는 퍼포먼스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기독 청년들은 이런 사회적 활동의 신앙고백적 근거를 분명히 자각하고 있어야 한다. 생명 가치가 특정 사기업의 단기적 경제적 이익보다 훨씬 더 소중한 하나님나라의 본질적인 가치임을 믿고 생명의 강을 지켜야 하는 것이다. 특정 기업의 재개발 이익보다는 자국민의 생명권과 주거권을 보장해 주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공평과 정의에 보다 더 가까운 정부 정책이다. 용산 참사는 상대적으로 힘 약한 개인들을 희생시키고 기업이나 부동산 재개발 업자의 배타적 이익을 훨씬 우선시한 반기독교적인 정부가 일으킨 참사인 것이다. 
 
결론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에 추동된 하나님의 자녀들의 자발적이고 자기희생적인 헌신 운동이다. 그것은 성령의 감화 감동을 덧입은 하나님 자녀들에게 위탁된 운동이다. 그것은 정치권력을 휘둘러 타인의 의지를 복속시키는 현실 정치 운동이 아니다. 유다의 예언자 예레미야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고도의 민중 자치적․ 자율적인 계약 공동체가 형성된다.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고 하는 강제적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들은 인간의 어떤 시민적 법적 강제가 요구하는 것을 훨씬 초월하는 자기희생적인 봉사를 할 능력으로 가득 차게 되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 성령의 감화 감동에 사로잡힌 120문도는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유재산을 팔아 가난한 형제자매들의 생존권을 옹호해 준다. 그 결과 아무도 핍절한 사람이 없는 공동체가 탄생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그리스도인들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물적 희사로 유지되는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불렀다. 한 지체가 다른 지체의 불편과 고통을 자동적으로 공감하고 체휼하는 완벽한 공동체인 것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이상 사회의 표본이다. 교회, 즉 그리스도의 몸에 붙어 있는 지체들의 삶이야말로 육법전서로 대표되는 법적 강제력으로 유지되는 세속 왕국을 거룩하게 해체하는 참 대안 사회, 곧 하나님나라라고 본 것이다.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바로 그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발적이고 자원적인 십자가 순종을 재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십계명의 금지 조항이 요구하는 윤리적인 기대를 상회하는 사랑과 공의의 능력을 발휘한다(롬 13:8). 이처럼 하나님나라 운동에 동참한 기독 청년들의 삶은 하나님의 감미로운 생명력 넘치는 통치가 구현되는 현장이어야 한다. 약간 더 의로운 삶을 살아서는 다른 사람의 불의를 고칠 수도 없고,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혁시킬 수도 없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하나님의 자녀들만이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하나님나라는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 가신다는 말이 맞다. 하나님의 성령으로 감동된 자들만이 하나님의 율법 요구에 복종할 수 있기 때문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기독 청년들이 직면하고 있는 무신론의 두 전선

몇 해 전 옥스퍼드대학교의 생물학자인 리처드 도킨스가 쓴 <만들어진 신>(God delusion)이라는 책이 한국에 소개되어 큰 반향을 일으켰다. 진화생물학자인 그의 책은 초월적 인격신을 철저히 부정하고 조롱한다. 그는 서구 계몽주의의 무신론자들이 개진했던 논거들을 저널리즘적인 용어로 잘 정리했으나 아직까지 인류사에 정말 치명적인 해악을 끼친 무신론을 간과하고 있다. 그 책에서 다룬 무신론보다 훨씬 더 해악스럽고 무서운 무신론을 소개하는 책이 있다. 성경이다.

성경에는 정말 인격적인 하나님을 알고도 그 면전에서 거룩하신 하나님의 영광의 눈을 촉범한 자들에 대한 탄핵으로 가득 차 있다(사 3:8). 그들은 한편으로는 하나님에 대한 가족적 친연성(親緣性)을 느낀다고 주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정치경제적 악법들을 제정하고 집행하여 가난한 자들을 압제하는 자들과 그들을 후원하는 종교 권력자들이다. 오늘날 사회에 가장 큰 해악을 끼칠 수 있는 무신론자들은 하나님과 가족적인 친연성, 혹은 친족적인 유착을 느낀다고 주장하며 하나님의 이름으로 종교 권력, 정치권력, 그리고 부당하게 얻은 경제적 기득권을 휘두르는 자들이다. 그중에서도 성직자들은 직업적으로 가장 교묘하게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기 쉬운 자들이다.

구약성경에는 무신론 혹은 무신론자라는 말이 직접적으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창세기 20장에는 ‘그랄 사람들 중에는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는 말이 나온다(11절). 이 말이 구약적 의미의 무신론이다.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는 태도가 무신론이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들과 지주들, 제사장과 예언자들은 스스로를 하나님과 아주 가깝다고 간주했으면서도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무신론자들이었다(사 1:11~15; 29:13). 구약성경이 말하는 무신론은 인격적인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상감이나 외경이 사라진 태도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구약의 무신론은 어떤 철학적 인지 행위라기보다는 아무런 제한을 받지 않고 악행을 범하는 도덕적 무감각 상태를 지칭하는 말이었다(시 14:1; 94:1~11). 신약성경에서 무신론자를 의미하는 단어 ‘아데오이’(ἄθεος)는 에베소서 2:12에 처음 나온다. 이 말은 인격적인 한 분 하나님 야훼를 모르고 사는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오늘날 우리가 대면한 무신론은 매우 현대적인 개념이다. 서구에서는 18세기부터 아브라함이 믿었던 유일 인격신 하나님을 더 이상 믿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무신론자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후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무신론의 논거들은 많으나 요약하면 다섯 가지 정도 된다. 첫째, 도덕적 무정부 상황이다. 악의 범람으로 좌절당하는 세계는 전능하면서도 선량한 신의 존재를 부정한다. 둘째, 일관성 없는 신의 계시들이다. 신의 대리자들이라고 하면서도 신의 이름으로 반문명적 전쟁을 일삼는 사태가 신의 존재를 의심하게 만든다. 신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의 도덕적 타락과 기독교 문명권의 악행이 신의 존재를 부정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셋째, 신 관념의 심리학적 환원주의 혹은 인류학적 환원주의다. ‘신’은 인간의 유아기 의식에 생긴 강박관념이라고 보는 프로이트적 환원주의와 인간 의식의 소외 현상으로 생겨난 심리적 투사물이라고 보는 포이어바흐의 인류학적 환원주의다. 넷째, 신은 지배 집단이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기 위해 만든 보조 정치경제학이라고 보는 사회학적 환원주의다. 마지막으로 진화론적 생명 창조 모델로 인해 생긴 신 무용론이다. 신 없이도 모든 생명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유사종교적 우주 진화론이나 생명 진화론이다.  
   
오늘날 신실한 기독교인들은 교회 내부로부터 자생하는, 즉 하나님의 친족권에서 발생하는 성경적인 의미의 무신론자들과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근대 계몽주의 이후의 무신론자들의 이중적 도전에 직면해 있다. 이들의 도전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거듭난 기독 청년들의 신앙을 근절시킬 수 없다. 오히려 이 무신론적인 도전에 응전하다보면 기독 청년들의 신앙은 깊어지고 성숙해질 수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서구 사회에서 만개한 계몽주의적 무신론의 쇄도에 대비하여야 할 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자생하는 더 치명적이고 해악스러운 무신론자들의 도전에도 응전해야 한다. 역사 속에는 이런 이중적인 위기에 처했던 무수한 신앙인들의 분투가 있다. 독일의 신학자요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디트리히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 함께”의 신학

한국 기독 청년들에게 가장 잘 알려진 본회퍼의 모습은 히틀러 암살 음모에 가담해서 처형당한 순교자의 그것이다. 그는 1933년에 정권을 잡고 독일 전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당 체제에 대해 협력적이거나 적어도 순응주의적인 독일 개신교의 대세에 크게 반발했고, 박해와 살해 위협 속에 살아가던 독일 거주 유대인들의 해외 도피를 돕기 위해 적극 활동했다. “미친 운전사가 모는 차에 희생되는 많은 사람들을 돌보는 것만이 나의 과제가 아니다. 이 미친 운전사의 운전을 중단시키는 것도 나의 과제이다”라는 말은 우발적인 의기나 의협심에서 우러나온 생각이 아니라 그의 신학적 사유의 귀결이었다. 당시의 보통 성직자들과 신학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 세계를 주장하시기에 히틀러의 등장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심지어 루드비히 뮐러(Ludwig Müller) 감독이 중심이 된 ‘독일 기독교인 연맹’은 히틀러의 나치 이념을 찬양하는 치욕적인 성명을 잇달아 발표했다.

그리스도는 히틀러를 통해 우리에게 오셨다. (중략) 모든 민족에게 그러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도 영원하고 특별한 종류의 법을 주셨다. 이 법은 지도자 아돌프 히틀러와 그에 의해 이룩된 국가사회주의 속에서 구체화되었다. (중략) 독일 민족을 위한 시대는 히틀러 안에서 성취되었다. 왜냐하면 히틀러를 통해 참 도움이며 구원자이신 하나님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 가운데 그의 능력을 나타내셨기 때문이다.

‘독일 기독교인 연맹’은 이처럼 하나님의 뜻이 아니면 어떤 우연도 일어나지 않기에 히틀러 체제를 하나님나라의 대행자라고 믿고 그것에 적응하려고 했다. 이러한 독일 개신교회의 대세에 거슬러 본회퍼는 행동을 통해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했다. 본회퍼는 하나님은 역사 속에 들어와 행동하시는 하나님이라고 믿었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형이상학적 영역에 세워진 보좌에 앉아 역사를 감찰하기만 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역사의 과정에 참여하여 고난을 자취하고 피해를 당하는 자리까지 내려오시는 참여적인 하나님이다. 그는 서구 계몽주의가 주창했던 무신론을 맞받아치는 성경적인 의미의 세속 신학, 즉 종교성 없이도 표현되는 기독교 신앙을 내세웠다. 본회퍼는 ‘하나님 없이(ohne), 하나님 앞에서(vor), 하나님과 더불어(mit)’ 사는 삶을 주창했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 이원론의 호위를 받지 않고 전통적 기독교 유신론의 기득권 없이 세상 한복판에서 기독교 신앙을 그대로 실천해 내는 지극히 차안적(此岸的)인 기독교를 주창했다. 
    
이런 주장은 그의 생애 후기 즉, 그가 나치에 의해 투옥된 1943년 이후에 쓴 옥중서신들에서 단편적으로 개진한 사상이었기에 온전한 신학 담론으로 성숙하지는 못했다. 그래서 이 신학은 1960년 미국의 ‘신 죽음의 신학’, ‘세속화 신학’의 원천으로 인용되거나 인증되기도 했다. 그러나 자크 엘룰 등을 비롯해 대부분의 본회퍼 연구가들은 ‘신 죽음의 신학’이나 ‘세속화 신학’이 본회퍼 신학의 본질을 왜곡했거나 과도하게 단순화했다고 비판한다. 하나님은 더 이상 인간과 관계없다는 주장, 하나님이 하나의 문화적 가공물이 되었다고 보는 입장은 그의 신학을 왜곡했다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본회퍼의 단편적 서신들을 통해 그가 내세운 종교성 없는 기독교에 대한 착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종교성 없는 기독교는 이 덧없는 세상을 떠나 저 영원한 천국으로 이동하는 구원을 약속하는 기독교가 아니라, 육신을 입고 이 세상으로 내려오신 초월적인 하나님을 모방해서 이 세속 사회 한복판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기독교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삶

첫째, ‘하나님 없이’ 사는 삶이다. 1943~1944년의 옥중서신들에서 본회퍼는 성인이 된 세상에서 교회와 기독교가 수행해야 할 역할에 대한 질문들을 제기했다. 본회퍼는 테겔 감옥에 투옥되어 있었을 때 신학과, 차안성과 구체적 행동의 관계를 급진적으로 탐구했다. 본회퍼는 1944년 4월 30일에 에버하르트 베트게에게 보낸 한 서신과 그 후에 쓴 서신들에서 종교성 없는 기독교를 개략적으로 기획했고 하나님에 대한 세상적인 신학 담론을 착상했다. 본회퍼에 따르면 오로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이 세상 안에서만 의의가 있다. 그가 보기에는 ‘순전히 피안적인 하나님’은 오로지 제도권 종교의 본질적 요소일 뿐이었다. 그는 동시대의 기독교가 내면으로 침잠하는 기독교로 전락했고, 개인적 의식 영역으로 퇴각해 버려 형이상학으로 변질되었다고 진단했다. 또한 동료 죄수들 안에서 2차 세계대전이 1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어떤 대단한 종교적 각성도 불러일으키지 않았으며 자율적인 인간들이 되어 버린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자신의 한계상황을 돌파하기 위해 기도마저도 하지 않는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인간적인 약함과 죄가 만연한 상황에서 인간을 도우실 수 있는 초월적인 해결사로서의 하나님의 역할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는 시대가 도래했다고 진단했다. 본회퍼는 인간이 처한 한계상황을 이용해서 하나님의 자리를 만들어 보려는 시도를 비판한다. 그런 하나님 개념은 어차피 세속화된 인간들에게는 의미가 없어졌다고 본 것이다. 세속화된 인간들에게는 심지어 죄와 죽음도 진정한 한계상황으로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을 본 것이다. 여기서 현대인들을 영적으로 기습하여 다시금 하나님께로 이끌어오기 위해서 오히려 종교성 없는 기독교가 출현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를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난 1900년간 서구 역사에서 덧입힌 형이상학적인 규정들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본회퍼가 종교를 부정적으로 본 이유는 바르트의 영향 때문이었다. 본회퍼는 종교를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구원받으려는 인간의 욕망이 만든 인간 문명의 가공물이라고 규정했다. 종교는 이 세상을 덧없는 곳으로 간주하고 구원이란 더 실재적이고 영원한 형이상학적 영역으로 이주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종교가 가장 강조하는 하나님 이미지는 전지전능한 해결사(Deus ex machina)다. 하나님은 인간의 한계상황을 이용해서 인간에게 개입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참 기독교 신앙은 하나님의 주도적인 자기 개방, 말 걸어오심, 그리고 인간의 자리로 내려오심에 대한 응답이다. 
   
이처럼 본회퍼는 인간 역사가 ‘작업가설로서의 하나님’을 더 이상 필요치 않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보았다. 즉 전통적 기독교 유신론이 말하는 하나님이 이제는 과학이나 정치학 심지어 도덕(종교와 철학)이 그 고유한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요청했던 가정으로 더 이상 쓰임받을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고 본 것이다. 그러면 근심하는 영혼, 즉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종교적 권위들이 모든 권리를 주장했던 시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대신 ‘궁극적인 정직’으로 살아가는 길만 남아 있다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시는 것처럼 이제 철든 성인(成人)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 ‘성인’의 삶은 십자가 고난에 참여하는 삶이다(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 [London, 1971], 362).
   
이와 같은 본회퍼의 ‘하나님 없는’ 삶에 대한 주창은 근대 계몽주의가 조성해 온 반기독교적인 무신론에 대한 신학적 고투가 담긴 응전이었다. 근대 서구의 무신론은 천상 세계의 전능하시고 무소부재하시는 하나님이 이 세계에 대해 갖고 있다고 믿어진 기득권을 부정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 프로이트, 그리고 현대의 인문주의적․과학주의적 사고가 종합한 이런 무신론이 본회퍼에게서 전혀 다른 기독교적 응전을 받은 것이다. 본회퍼에게 있어서 무신론은 도덕적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다운 인간의 현실 참여적, 고난 자취적인 행동 책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영지주의적 현실도피의 구원 관념을 극복하고 이 세상을 가득 채울 하나님나라의 영광을 위해 기독교인들이 짊어져야 할 성스러운 책임감을 부각시킨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입각해 실천의 의무를 제고시키는 실천 담론인 것이다. 본회퍼는 하늘로부터 땅으로, 저 세상으로부터 이 세상으로, 초월로부터 내재로, 관념으로부터 현실로 ‘내려오셔서’ 초월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기독교인들이 철든 성인처럼 세상 경영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는 모든 이원론적 종교를 폐기하고 인간의 성숙과 책임감을 강조하는 신학적 언명이었지, 하나님의 존재 폐기를 의도하거나 암시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책임을 방기한 채 아무런 행동이나 현실 참여도 없이 노예적 종교 근성으로 하나님만 의존하려는 신앙을 질타한 것이다. 다시 말해 자기 책임을 하나님께 떠넘기지 말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악으로 치닫는 세상과 대결하고 그런 세상을 변혁하는 데 앞장설 것을 강조한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둘째, ‘하나님 앞에서’ 사는 삶은 이기적인 자아를 하나님의 심판과 다스림에 맡김으로써 이웃과 현실 앞에 책임 있는 존재로 사는 삶이다. 즉 그리스도인은 타자를 위한 삶, 현실 참여, 연대성의 경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1928~1929년 미국 월가(Wall street)발 세계 금융 위기와 공황 앞에 아무런 신학적 분석과 대책도 내놓지 못하는 교회를 보고 본회퍼는 충격을 받았다. 세상의 필요에 무감각한 교회와 신학, 종교의 거적더미 아래 그리스도를 묻어놓은 교회를 보고 좌절했던 것이다. 그는 1930년 미국 뉴욕의 라인홀드 니버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밟기 위해 유니온 신학교로 갔다가 흑인 친구 프랭크 피셔(Fisher)를 만나 신학적 지평이 넓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는 1년 정도 흑인 할렘가의 아비씨니언침례교회 주일학교 교사로 봉사했다. 이 과정에서 검은 그리스도가 열광적으로 전파되는 현장과 소수자들이 고통받는 불의한 현장을 목격했고, 교회가 참된 공동체의 평화를 창조하는 데 전혀 무기력하고 서툰 것에 실망했다. 그는 아래로부터, 압박당하는 자의 관점에서부터 사물들을 바라보는 관점을 획득했다. 몇 마디 자구나 말에서 그치는 신학에서 현실에 상관성이 있는 실천적 신앙 사고로 급격하게 전향했다고 고백했다. 
   
그가 말하는 실천 지향적 기독교 신앙은 시민적 용기(Zivilcourage), 정직(Ehrlichkeit), 사회공동체의 희생자인 기층 민중의 관점에서 사물을 바라보는 것을 포함한다(Dietrich Bonhoeffer Werke, ed. Eberhard Bethge u.a., Kaiser[1986~1999], 8, 33~34). “행동 없는 기대와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관망은 결코 기독교 신앙의 태도가 아니다. 자신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이 우선이 아니라 형제의 삶에서 일어난 경험들이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위한 행동과 연대로 이끈다.”

하나님과 더불어

셋째, ‘하나님과 더불어’ 사는 삶은 하나님의 성육신, 즉 십자가 고난에 동참하는 공동체적 기독교인의 삶을 의미한다. 본회퍼 신학의 핵심은 땅에서 공생애를 펼치신, 성육신하신 그리스도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세상이 화해한 곳이다. 본회퍼의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그의 현존을 드러내시다가 인간의 폭력 사정권까지 들어오셔서 급기야 고난받는 하나님이다. 본회퍼는 하나님의 성육신이신 그리스도를 믿는 이상 어떤 그리스도인도 하나님과 세상을 별개의 영역으로 구분한 채 말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루터의 두 왕국론에 대한 암묵적인 공격이었던 셈이다. 그는 개인적이면서도 집단적인 경건을 강조했고 그 경건의 핵심은 그리스도의 모방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세상 속에서의 타자를 위한 그리스도인적 삶’을 강조해 천국과 세상의 이원론에 기반을 둔 종교로서의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서려고 했다. 기독교 문명권이 일으킨 두 차례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학살 사건은 기독교가 외치는 형이상학적 영역의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저항적 무신론을 확산시켰다. 2차 세계대전이 몰고 온 이 신학적 대파국에 본회퍼는 역사 속에 들어오셔서 ‘행동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담론으로 응전했다. 그는 신의 본질에 대한 규정에 치중한 재래의 서구 신학을 비판하고 신의 행동을 문제 삼았다. 신이란 누구인가가 아닌 어떤 행동이 신의 행동인가를 물었다. 그리고 타자 지향적인 삶, 고난을 자취하는 삶이 신의 행동이라는 답을 얻었다. 본회퍼는 타인을 위해 고난을 자취하는 기독교인이 하나님을 모방하는 것이며 자아 초월적인 삶을 사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본회퍼는 영이신 하나님이 육체적 인간이 되어 오만한 무신론적 권력자들의 폭력에 희생당하는 자들의 대열에 끼어 참여한 것 자체가 형이상학적 신의 자기 초월로 보았다. 신의 ‘초월’은 세상과 자신을 무한하게 이격시키는 초월이 아니고, 무기력과 전능성이 은닉되고 유보된 채 악의 피해자들의 자리로 ‘내려서는’ 초월이다. 완전한 신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  그것도 인간이 범한 악행의 피해자가 되는 것이 신의 자기 초월이다. 본회퍼는 재래적인 서구 신학의 파산을 초래한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신(神) 다운 신이 없어진 시대, 신이 죽어 버린 시대, 무종교 시대, 무신론 시대가 되었다고 보았다. 그동안 서구 신학이 강조했던 전지전능하시며 사랑과 공의가 동시에 많았던 그 신이 죽은 것이다.

본회퍼가 참 신이라고 고백한 신은 서구의 기독교 유신론이 주창해 온 신과는 달랐다. 로마가톨릭교회나 제도권 교회의 종교 권력을 갖고 세상을 구원하려고 했던 신과는 전혀 다른, 전능성이 유보되거나 억제되어 있는 무력한 신이었다. 사람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냄새나는 발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을 동정하기 위해 자기 몸을 구부린 겸손하신 신이었다. 본회퍼가 보기에 이 세속 사회로 초월하신 그 신은 종교 권력자들인 사제 집단이나 화려한 교세를 자랑하는 군중이나 건물 안에 현존하시지 않는다. 가장 비종교적인 인간의 실존 상황에 와 계신다. 제도 교회가 제공하는 구원은 꿈도 꾸지 못하는 죄인들, 매주 성전 출입을 통해 하나님의 일상적 축복도 누릴 수 없게 배제된 자들의 한복판에 와 있다. 예수가 창녀와 세리, 죄인들의 식탁에 내려온 것 자체가 재래적 구원의 길의 시효가 종료되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를 따르는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에서 퇴각해서는 안 되고 이 세상 안에서 행동할 의무를 지닌다. 기독교 신앙을 구성하는 두 요소는 정의의 실현과 신적 고난의 감수이기 때문이다(Edward Craig, Routel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835).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려면 무신론적인 세상의 손아귀 아래서 하나님이 겪고 있는 고난에 참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하나님이 무신론적인 세상에서 모욕당하고 있다). 이 사상의 핵심은 동정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고통에 동참하시는 하나님만이 인간을 도우실 수 있다는 진리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라 능력을 갖지 못한 하나님이 도우실 수 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본회퍼의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하나님과 더불어’의 신학은 더 이상 안셀름이나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 존재 증명이나 기독교 유신론을 의지하지 않는다. 계몽주의 이후의 현대적 무신론들을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프란시스 쉐퍼나 존 스토트가 개진하는 기독교 변증의 관념론적인 정향도 초극할 수 있는 실천 담론이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앞에서 한가한 인문주의적‧과학주의적 무신론은 무력해질  수밖에 없고 하나님과의 친연성을 내세우는 지상의 권력자들과 그들의 동맹 세력인 오만한 무신론도 패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결론

본회퍼 신학의 중심 주제는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며 그 안에 정초된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추종하는 자들의 공동체다. 교회는 하나님에 의해 세상과 연대하도록 위탁된 공동체다. 본회퍼의 신학은 그 자체의 내성적(內省的)인 방향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교회를 설명할 때와 같이 군데군데에서 신비주의적 특징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실천의 고리를 상실하거나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의 한복판에 현존하신다. 교회는 인간적 가능성이 부서지는 곳, 즉 한계상황에 서 있지 않고 마을 한가운데 있다”(Brief an Eberhard Bethge vom 30. April 1944 in Widerstand und Ergebung; [Gütersloher Verlagshaus, 1978], 135). 그래서 본회퍼는 종교적 방법으로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려는 재래식 변증을 버리고 인간과 세계의 자율성과 책임성을 받아들인다. “만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이 세상 속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하지 않고는 우리는 성실할 수 없다”(1944년 7월 16일). 본회퍼는 이런 자신의 진술이 단순한 무신론 옹호 진술로 오해당하지 않도록 ‘신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의 예를 들어준다. “신은 자기를 이 세상에서부터 십자가로 추방한다. 신은 이 세계에서는 무력하고 약하다. 신은 무력하고 약한 변경에 스스로를 추방함으로써 자신이 구원할 인류와 함께 있고 인류를 도와준다. 그리스도가 그의 전능성이 아니라, 그의 연약하심과 고난받음을 통해 인류를 도와주신다는 진리가 마태복음 8:17에 아주 분명히 나타난다.”
 
본회퍼가 성숙한 세계를 받아들인 것은 동시대의 무신론적 정황에 동조하거나 동화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성인의 나이에 도달한 세계가 그 성숙에 걸맞게 그릇된 하나님 관념을 일소시키고 … 성서가 계시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게 그 관점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다”(1944년 7월 16일). 이처럼 본회퍼는 이 세상에 ‘종교성 없는 기독교’의 도래를 착상하고 기획했으며 전통적인 유신론의 한계를 넘으려고 했다. 계몽주의적 무신론들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도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정당성과 타당성을 정초하려고 했다. 그가 비판한 종교는 이원론을 먹고사는 사제 계급, 종교 권력, 사회의 상부구조와 일체를 이루는 구원 판매소 같은 권력 집단이었다. 그 권력 집단으로서 종교는 분명히 순기능을 할 수도 있지만 대부분은 개인주의적 구원을 상품으로 팔아 천국에 안전한 처소를 마련하려는 투자자들을 모집하는 협잡 세력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많은 현실 기구요 세력이었다. 그 종교는 항상 천국과 세상, 성과 속, 사제와 평신도를 구분하는 몽롱하고 애매한 형이상학적 신학 토대 위에 구축되어 있다.

본회퍼가 내세운 비종교화된 하나님은 세상 한복판에서 활동하고 계시며 사건들 속에 계시다. 본회퍼는 성인이 된 인간, 강하고 무종교적인 존재가 된 현대인을 일단 인정하면서 무신론적인 세계마저도 여전히 그리스도 예수의 것이라고 보는 점에서 세상을 긍정했다. 이런 이유로 그는 종교성 없이 세속적으로 하나님, 교회, 예배 혹은 기도에 대하여 말할 수 있는 기독교의 출현 가능성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새로운 신학 담론과 신앙 실천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서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를 더 이상 구체적으로 보여 주지는 못했다.

본회퍼의 사상은 1924년부터 1945년까지 유럽의 기독교 문명권이 대파국을 맞이할 때 형성된 신학이었고, 우리 한국 기독 청년들이 볼 때는 아주 유럽적인 문제 의식에 응답한 신학이다. 하지만 한국은 아직 계몽주의 단계에 접어들지 못한 종교적 기독교만으로도 기독교가 부흥하고 있다는 외양을 주는 사회다. 따라서 본회퍼의 문제의식을 곧장 한국교회 맥락에 도입하면 과도하게 앞서간다는 인상을 풍길 수도 있다.

그 외에도 본회퍼의 신학에서는 한국의 복음주의적 기독 청년들이 보기에는 아쉬운 대목들도 발견된다. 첫째, 본회퍼의 신학에는 바울 서신의 대속론적 기독론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거나 주변화되어 있다. 또한 교회를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모임이라고 정의하고 아울러 기독교적인 실존을 연대와 고통 참여 등 고도의 윤리적 명제로 정의함으로써 그런 기준에 미치지 못한 채 그야말로 하나님의 은혜에만 의존하는 절대적으로 연약한 많은 신자들의 자리를 없애는 것처럼 보인다. 공관복음서에는 제자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귀신 들렸다가 나아 집으로 돌아가는 일상귀환형 신자들도 있지 않은가? 세상과의 연대를 이루지 못하고 그야말로 예수의 은혜에만 호소하고 의존하는 십자가상의 강도 같은 자들도 있다. 종교적 기독교가 가진 폐해를 지적하고 경계하되 종교의 폐기를 주창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본회퍼의 신학 담론을 실천할 수 있는 길은 없을까? 셋째, 교회와 세상의 관계성에 대한 규정이 더욱 엄밀하게 발전되지 못한 점, 즉 교회가 세상을 향해 해야 할 과업만 과도하게 강조한 나머지, 바르트나 불트만의 초기 신학, 위기 신학자들이 그토록 강조했던, 세상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결단해야 할 상황에 대한 분석이 미흡해 보인다는 점이다. ‘성년이 된 세상’이라는 개념도 지나치게 서구 중심적인 착상이라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회퍼의 신학 담론은 한 시대의 중심적인 신앙 주제들을 갖고 분투하는 기독 청년들에게 아주 신선하고 생산적인 자극제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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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교회’의 천사들에게 보내는 편지-메가처치와 사랑의교회

 

*신광은 목사「메가처치논박」 저자, 열음터 교회 담임.

 

1. 들어가는 말

 

사랑의교회의 교회당 건축 문제 때문에 포럼이 열렸다. 일개 교회의 건축 문제 때문에 한국교회의 이목이 집중되는 포럼이 열리다니, 참 대단하다. 이것은 분명 사랑의교회가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가지는 상징성과 대표성 때문일 것이다. 우선 먼저 나는 사랑의교회가 지난 30여 년간 이러한 모습으로 한국 개신교회 내에서 자리매김해 온 점에 대해서 사랑의교회 모든 형제들과 옥한흠 목사님, 그리고 오정현 목사님께 경의를 표하고 싶다.

 

사랑의교회가 집을 짓는단다. 왜일까? 공간이 부족해서다. 사랑의교회는 여러 그럴싸한 이유를 갖다 대지만 그건 화려한 수사일 뿐이다. 새 시대니, 역사적 사명이니, 땅 끝 선교니, 민족을 섬긴다느니 하는 것들은 미사여구일 뿐이고 설득력도 별로 없다.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려는 가장 큰, 그리고 가장 설득력이 있는 이유는 절대적으로 공간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나도 사랑의교회의 형편을 조금 알고 있는데 사랑의교회는 정말 공간이 부족하다.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의 건축은 공간이 별로 부족하지도 않는데 턱없이 큰 교회당을 지어놓고 빈자리를 채우라며 교인들을 닦달하는 일부 몰지각한 교회의 경우와는 사정이 조금 다르다. 사랑의교회는 정말 건물이 필요해서 - 물론 얼마나 크게 짓느냐는 또 다른 문제이겠지만 - 건축을 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인가?


2.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다.

 

내가 보기에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이미 한국 교회에 만연해 있는, 그리고 온 세계에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번져가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관점으로 살펴봐야 할 것 같다. 메가처치 현상은 20세기 중반에 등장한 대단히 독특하고 새로운 현상이다. 2,000년 교회의 역사 속에서 한 번도 전례(前例)를 찾아볼 수 없었던, 대단히 특이한 현상이며, 전혀 새로운 현상이 바로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리 새롭다는 말인가?


 

먼저 과거 어느 시대에도 찾아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지역교회, 곧 메가처치(Mega-Church)가 등장했다는 점이다. 현대의 메가처치의 특징은 과거와는 다르게 성장의 한계가 없다. 한 마디로 무한히 성장하는 교회다. 문제는 이러한 교회가 일반화되었으며, 모범적인 교회로 여겨지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로, 큰 교회만이 아니라 작은 교회도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모든 교회는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무한 성장이 가능한 ‘상황’ 가운데 있으며, 무한 성장이 가능한 ‘조건’을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수단’을 소유”하게 되었다. 때문에 모든 교회는 메가처치 DNA를 소유하게 되었다. 그래서 현대 교회는 약 5%내외의 메가처치와 거의95%에 달하는 잠재적 메가처치로 구성되어 있다. 셋째로, 대부분의 교회와 목회자는 메가처치를 만드는 것을 한 영혼이라도 구원하는 구령의 사역이며, 세계 선교에 동참하는 일이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사명이라고 스스로 합리화하고 있는 점이다. 메가처치가 성서적, 신학적, 역사적 정당성을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 도무지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교회는 무한히 성장하는 것이 옳고 건강하다는 생각이 한국 교회를 사로잡고 말았다. 그래서 모든 교회가 끝도 없는 성장을 향해 줄달음질을 치고 있다. 잠재적 메가처치는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메가처치는 슈퍼 메가처치를 지향하고, 슈퍼 메가처치는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를 지향한다. 한도 끝도 없이 성장을 향하여 치닫고 있다. 거의 미친 수준이다. 바로 이것이 지금 대한민국을 휩쓸고 있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무시무시한 광풍의 정체다.

 

사랑의교회측은 공간이 부족해서 어쩔 수 없이 교회당을 건축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왜 공간이 부족하게 되었는가? 그만큼 교회가 성장했기 때문이다. 왜 건축을 하려는가? 더 크게 성장해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사랑의교회는 자그마치 45,000명이나 출석하는 슈퍼 메가처치가 되었다. 그런데 공간이 부족해서 더 성장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2,100억짜리 교회당을 지어 성장의 걸림돌을 제거하고 킹슈퍼 울트라짱 메가처치가 되려고 한다. 이것이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의 본질이다.


3. 사랑의교회는 변질했는가?

 

교회당 신축을 계획하고 있는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다면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옥한흠 목사님과 예전의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몇몇 분들은 사랑의교회가 최근 들어 변질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니까 옥한흠 목사님께서는 목숨을 걸고 사랑의교회에 제자 훈련을 정착시킴으로써 건강한 교회를 세워 놨는데 후임 목사님이 옥 목사님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의 사랑의교회에 이르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일견 일리가 있는 말이다. 하지만 최근 옥 목사님의 애매모호한 행보 때문에 이 주장은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사실 두 목사님의 스타일이나 지향하는 방향에 상당한 차이가 있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관한 관점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이다. 그에 비해 오 목사님은 옥 목사님보다는 교회의 성장과 크기에 대해서 더 우호적이고 관대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두 분의 사역 방향에 분명한 차이가 있음을 동의하면서도 나는 옥한흠 목사님 역시 메가처치 현상으로부터 결코 자유롭지 못했음을 분명히 하고 싶다. 다른 모든 교회들처럼 사랑의교회도 처음부터 메가처치의 상황 가운데에 놓여 있었으며,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메가처치가 된 교회일 뿐이다. 물론 나는 이것이 옥 목사님께서 의도하셨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 모든 과정은 옥 목사님 개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그렇게 된 것이다. 문제는 옥 목사님이 메가처치 현상을 간과한 점이다. 그리고 이것이 지금의 사랑의교회가 저토록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히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옥 목사님은 맹목적 성장주의에 대해서는 분명 비판적인 분이다. 그러나 그는 결코 교회 성장 자체에 대해서 비판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양적 성장이 결코 나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고 단언한다. 물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본성상 겨자씨처럼, 혹은 누룩처럼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것은 복음서의 분명한 가르침이다. 하지만 신약성서에서 ‘믿는 자의 수가 더 많아진다’고 했을 때 그것은 언제나 전체 교회의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었지 어느 한 개교회의 성장을 지시하지 않았다. 사실 신약교회에서는 ‘개교회’라는 말 자체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가정 모임이든, 지역 모임이든 언제나 ‘교회’라고 불렀다. 지상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교회만이 존재했으며, 그 교회가 성장한 것이다. 그러나 옥 목사님이 말하는 ‘양적 성장’은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 전체의 궁극적 승리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 물론 그러한 의미를 포함하기는 하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그것은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실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부흥’이라는 말과는 사뭇 다르다. 통상 부흥이라는 말은 구원 받은 무리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는 것과 관계가 있다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 교인의 수적 증가와 관계가 있는 말이다. 부흥이라는 말이 다소 에큐메니칼한 표현이라면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다소 개교회주의적인 표현이라는 말이다. 즉 양적 성장이라는 말은 개교회가 성장을 위해서 각개전투를 하는 상황을 전제로 하고 있다. 따라서 양적 성장이라는 말 자체는 개교회주의적 상황을 함축하고 있으며, 개교회의 성장을 항한 생존 경쟁을 긍정한다. 때문에 양적 성장은 질적 성장의 상대적 개념이 결코 될 수 없다. 그것은 그저 개교회주의와 저급한 성장경쟁을 합리화하기 위한 언어적 장치일 뿐이다. 불행히도 옥 목사님은 바로 이러한 개교회의 양적 성장을 긍정하고 수납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옥 목사님은 제자 훈련을 개별 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소개하기까지 한다. 교회 성장에 대한 옥 목사님의 관점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질이 양을 결정하는 부흥”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질은 무엇이 결정하는가? 제자훈련이다. 즉 제자훈련이 교회의 체질을 건강하게 바꾸어 놓고, 체질이 바뀌면 교회는 자연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성장한다는 것이 바로 옥 목사님의 교회성장 전략이다. 그는 말한다. “제자 훈련을 해보라. 교회 체질이 ……. 바뀌는 것을 2, 3년 안에 목격하게 될 것이다.” 대부분의 개교회는 옥 목사님의 이러한 권유를 받고 제자 훈련을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 전략으로 이해하며 받아 들였다. 분명한 것은 성장의 약속이 없었다면 그토록 많은 교회와 목회자가 제자 훈련을 배우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만일 옥 목사님의 사랑의교회 출석교인이 500명을 넘지 않았다면 제자 훈련은 결코 오늘날과 같이 크게 보급되지 않았을 것이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의 중요한 기여 중 하나는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하다는 신념을 유포시킨 것이다. 하지만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바로 메가처치 현상을 정당화하고 합리화하고 있는 핵심논리이다. 사람들은 말한다. 건강하지 못한 개교회의 성장이 문제이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이 논리는 다시 건강하지 못한 메가처치가 문제지 건강한 메가처치는 도리어 본받아야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하지만 교회가 종말론적 공동체의 궁극적 승리의 약속으로부터 벗어나 개교회의 성장을 지향하고, 의욕하고, 추구하는 순간 이미 교회는 함정에 빠지고 말았다는 사실을 옥 목사님은 깨닫지 못했다.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은 처음부터 불가능하다. 건강한 성장이라면 그것은 개교회의 성장이 아닐 것이며, 개교회의 성장이라면 그것은 건강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건강한 개교회의 성장이 가능할뿐더러 그것을 가능케 할 수 있는 방법론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즉 메가처치를 이룰 수단과 더불어 메가처치 현상을 아름답게 치장할 수 있는 화려한 장식품까지 제공해 준 것이다.

 

물론 나는 옥 목사님이 얼마나 치열하게 성서와 복음의 요구에 합당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했는지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사랑의교회의 명성과 지위를 가져다주는 데 결정적 요인이 되었음도 인정한다. 또한 옥 목사님의 신앙 양심과 목회 철학은 사랑의교회가 맹목적 성장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한 것도 사실이다. 이 점에서 과거의 사랑의교회는 확실히 지금의 사랑의교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문제를 바로잡는 데 있어서 옥 목사님은 기여한 바가 거의 없다. 도리어 메가처치 현상을 부추기고 변호하는 역할만 했을 뿐이다. 나는 이 점에서 사랑의교회는 오 목사님의 부임과 함께 크게 변질되었다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사랑의교회는 처음부터 메가처치 현상 속에서 자란 메가처치일 뿐이다. 지금의 사랑의교회의 모습은 이미 과거의 사랑의교회의 모습 속에 배태되어 있었던 것이다.

 

성서의 가르침은 명료하다.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마7:1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


4.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에 영향을 미친다.

 

1) 성장에는 한계가 있다.

 

옥 목사님은 비록 존경할 만한 정직과 성실함으로 교회 갱신을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했지만 메가처치 현상을 제대로 간파하지 못한 치명적 오류를 저질렀다. 옥 목사님의 설명에 따르면 교회의 성장은 제자훈련을 통해서 자연스럽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 하지만 교회 성장이 어느 선에서 멈춰야 할는지에 대해서 옥 목사님은 아무런 언질도 해주지 않았다. 성장만 말하고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옥 목사님은 결국 무한성장을 향한 길을 스스로도 걸어가고 말았다. 

 

옥 목사님이 성장의 한계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 것이야 말로 치명적인 오류라고 할 것인데, 이는 아마도 그가 교회의 크기를 교회의 본질과 무관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교회의 크기는 그저 가치중립적인 문제에 속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는 말한다. “하나님의 교회는 그 크기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고. 중요한 것은 건강한 성장이지 성장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옥 목사님의 이론에 따르면 아무리 교회가 커도 교회의 크기 자체는 문제될 것이 없다.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교회의 형태는 본질과 동일시할 수 없지만 분리될 수도 없다’고 한 한스 큉(Hans Küng)의 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크기는 본질과 연결되어 있다. 생명체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는 성장의 한계를 갖는다. 성장의 한계가 없는 생명체는 하나도 없다. 하워드 스나이더(Howard Sneider)의 ‘쥐와 코끼리의 유비’에서와 같이 쥐는 쥐의 적정 크기가 있고, 코끼리는 코끼리의 적정 크기가 있는 법이다. 종(種)마다, 개체마다 적정 크기가 다르기는 하겠지만 적정 크기가 있다는 점은 똑같다. 만일 교회가 생명체라면 다소 큰 교회, 다소 작은 교회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무한히 성장하는 메가처치는 결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잘 알다시피 유기체(organic system)는 개체의 정상적 활동이 가능한 수준까지만 성장하고 그 이상은 성장하지 않는다. 만일 적정 크기를 넘어서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유기체가 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건강하지 못한 유기체라고 부를 것이다. 우리가 교회를 생명체요, 유기체로 보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다음 두 가지 원리를 인정해야 한다. 첫째는 교회의 크기는 교회의 본질과 유기적으로 연관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교회의 정상적 기능을 위한 적정 크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한성장은 유기체(organic system)가 아니라 기계적 시스템(mechanical system)의 특성이다.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에도 시스템의 안정화와 최적화라는 기준에 맞추어 크기와 시스템 내부의 속성 간에 긴밀한 연관성이 있다. 그러나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 내부의 속성이 크기의 확장을 막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기계적 시스템은 크기의 확장을 위해서 내적 속성을 지속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기계적 시스템의 경우는 내적 본성을 지속적인 변형시킴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룰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정확히 메가처치의 모습이기도 하다. 즉 메가처치는 교회의 내적 본질을 지속적으로 변질시키고, 희생시켜 감으로써 무한 성장을 이루는 것이다.

 

2) 크기의 영성

 

교회의 크기는 결코 호락호락한 문제가 아니다. 메가처치에서의 교회의 크기는 한 개인의 의지나 도덕성, 영성을 벗어나 버린다. 그것은 스스로의 구조와 질서, 속성을 갖기 때문이다. 교회가 단순히 개인들의 집합이 아니라 거기에 구조와 조직, 질서가 새롭게 추가된다는 것, 그리고 교회가 커질 때 그러한 구조와 질서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은 상식적인 지식이다. 교회가 새롭게 획득한 구조와 조직, 질서는 자체의 논리를 가지며, 힘을 발휘한다. 그것이 무생물이고, 인격이 아니라고 만만히 보면 큰 코 다친다. 어떤 개인도 교회의 구조, 조직, 질서 등을 임의대로 통제할 수는 없는 법이다. 현실은 그 반대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월터 윙크(Walter Wink)의 통찰을 참조해야 할 것이다. 윙크는 요한계시록 2-3장에 나오는 ‘교회의 천사들’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을 내놓는다. 그에 따르면 교회의 천사란 날개달린 수호천사가 아니라 “하나의 통일된 실체로서의 교회의 실제적인 영성(spirituality)과 같은 것”이다. 따라서 “천사는 교회의 물리적 외형 안에 존재하고 그것과 함께 존재하며, 또한 그 이면에 존재하는 교회의 내면성(interiority)”이라고 했다. 따라서 교회 건물의 크기나 가격, 회중둘 실, 예배 스타일, 권력 구조 등이 교회의 천사, 곧 교회의 영성을 결정하는 요인들이라는 말이다. 이처럼 그는 사회 조직이나 구조, 질서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하나의 실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또한 그에 따르면 “조직이나 국가에서 규모가 크다는 것은 권세와 가치의 증거다”라는 논리는 사탄의 지배체제의 중요한 가치관이라고 했다. 그런데 ‘큰 것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정확히 메가처치를 옹호하는 논리가 아닌가. 만일 윙크의 말이 옳다면 메가처치의 천사는 교회의 천사가 사탄적으로 타락한 교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마르바 던(Marva Dawn)도 비슷한 관점을 취한다. 그녀 역시 사회 조직과 구조, 질서 등이 발휘하는 강력한 힘을 ‘정사(principality)’와 ‘권세(power)’라는 성서적 용어로 설명하고자 했다. 정사와 권세란 무엇인가? 우리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한 사회적이고 실제적인 ‘힘’이다. 여기에는 돈, 권력, 인력, 미디어, 테크놀로지, 법과 같은 것들이 있다. 문제는 이와 같은 정사와 권세가 세상 속에서 하나님께 대항하며 그리스도의 통치를 가로막는 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악한 권세는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의 권세 앞에 굴복하고 말았다. 놀라운 것은 그리스도의 권세는 ‘큼,’ ‘많음,’ ‘강함’이라는 세상 권세가 아니라 ‘작음,’ ‘적음,’ ‘약함’의 권세다. 불행히도 현대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세보다는 세상의 권세를 택하고 말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다. 이러한 던의 주장은 메가처치 현상과 정확히 일치한다. 돈, 권력, 인력이 집중된 메가처치는 그 자체로 타락한 권세이다. 뿐만 아니라 생존 문제 앞에 굴복한 수많은 잠재적 메가처치 역시 세상 권세의 속박 아래 있는 교회다.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크기와 양이 영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루돌프 오토(Rudolf Otto)는 인간이 거대하고 웅장한 것과 마주했을 때 본성적으로 누미노제(das Numinöse)라는 성스러운 감정을 느낀다고 했다. 이 때문에 고대 종교는 피라밋, 스핑크스, 대신전, 동상 등을 세워서 신성함을 표현하고자 했다. 이와 비슷하게 반 델 레에우(Gerardus van der Leeuw)도 폴리네시아인들이 평균보다 훨씬 더 많은 열매를 맺는 사과나무를 가리켜 마나(mana) 나무라고 부르는 것에 주목했다. 이때 마나는 신성한 기운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비슷하게 현대의 많은 크리스천들도 갑자기 크게 수가 불어난 교회를 가리켜서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는 교회’라고 불러준다. 불어난 거대한 교회당을 보면서 하나님의 손길을 감지하고, 회중의 웅장한 회집 장면을 보고 성령의 터치를 경험한다고 고백한다. 여기에는 분명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인간의 내면 깊은 곳에서는 크기와 숫자를 영성(spirituality)과 연결시키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때의 영성은 이교적 영성이다. 크기의 영성은 십자가의 영성과 반대되는 이교적 영성이다.

 

옥 목사님은 크기의 영성을 분별했어야 했다. 그래서 교회의 크기가 자신의 신학과 목회철학의 핵심 키워드인 ‘깨어난 평신도’마저 위태롭게 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있음을 알아차렸어야 했다. 옥 목사님의 제자 훈련은 20세기에 큰 영향력을 미친 평신도 운동과 이를 가능케 한 평신도 신학에 기초해 있다. 평신도 신학의 요지는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용어의 폐기에 있다. 성직자와 평신도라는 교회 내 2층 구조를 파기하고 만인제사장주의라는 종교개혁적 가르침을 온전히 실천해 보자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의 크기는 불가피하게 교회 안에 대중이라는 평균인으로 들끓게 한다. 또한 이를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서는 담임목사에게로의 권력의 집중, 피라밋 구조로 서열화, 성직자 집단을 대체하는 전문가 엘리트 집단, 관료제, 효율적 커뮤니케이션 네트워크 등이 요구된다. 결국 메가처치는 군중을 이루는 평신도와 이들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전문가 집단으로 이원화되고, 담임목사는 제왕의 자리로 추켜세우고야 만다. 따라서 메가처치 내에서 평신도 운동은 말뿐인 선전 구호로 전락하고 만다. 이 모든 것이 교회의 크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들이다.


5. 문제의 뿌리는 빈약한 교회론에 있다.

 

옥 목사님이 교회의 크기 문제에 주목하지 못한 것은 큰 유감이나 이 책임을 옥 목사님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문제의 뿌리는 옥 목사님도 잘 지적하셨듯이 개신교회의 빈약한 교회론으로부터 찾아야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빈약한 개신교 교회론을 수정하고자 참신한 시도를 하기는 했지만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을 충분히 넘어서지 못한 것이 부족한 부분이라고 해야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1) 개인주의를 넘어서

 

종교개혁자들의 교회에 대한 고전적인 정의는 “택자들의 총회”이다. 이러한 정의의 큰 약점은 교회를 개인의 집합으로 보는 것이다. 그나마 이것도 보이지 않는 불가시적 교회의 정의다. 보이는 교회는 ‘택자와 비택자의 혼재된 집단’이라고 해야 맞다. 이러한 교회관은 우리의 시선을 교회 자체보다는 교회 안의 개인에게로 향하게 한다. 

 

그러나 에릭 제이(Eric C. Jay)의 말대로 “교회는 그리스도나 성령과 사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개인들의 총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는 개인들의 집합 그 이상의 것이다. 개신교 교회론에 따르면 구원받은 개인들이 모여서 교회가 만들어 진다. 교회보다 개인이 먼저다. 그러나 교회는 개인이 침례/세례를 받고 교회 안으로 들어오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개인이 있기 전에 교회가 먼저 존재한다. 교회는 실체성이 있는 사회다. 

 

교회에 해당하는 에클레시아(ekklisia)는 상당한 정치성을 함축한 회중을 의미한다. 그래서 큉은 “에클레시아라는 말은 제의적이고 종교적인 집회가 아니라 정치적 집회를 의미한다.”고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현저히 뚜렷한 정치성을 지니는 사회다. 로핑크(Rohfink)는 이러한 교회의 사회성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교회는 그 자체가 ‘사회’라야 하고, ‘대립 세계’라야 하며, 하나의 정책이라야 하고, 문화를 가져야 하며, 그 신앙으로부터 사회적이며 미학적인 형식들을 위한 새로운 척도들을 세상 안에 내어 놓아야 한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 안의 개인들이 모여서 개인적인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해나가는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도리어 교회는 개인보다 선행하는 하나의 실체로서 이 실체가 자신의 전존재로서 기독교 신앙을 표현해 내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기독교 신앙을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구조, 질서, 조직, 그리고 크기가 어떠한 것인지를 비판적으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이에 대해서 헤베르 루(Hebert Roux)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적 관계와 접촉이 성립하기 너무 어려운 도시의 큰 소교구 대부분의 구조 자체의 완전한 변화 없이 실천적 실현이 나타날 가능성은 별로 없다. 오늘날 큰 도시의 격렬하고 끔찍한 삶이 만들어 낸 익명과 고립 그리고 거리감, 사회적 조건의 차별 그리고 또 다른 요인들은 그 안에서 ‘공동의’ 삶이 유토피아인 큰 소교구의 실재를 유지하기 위한 노력을 헛된 것으로 만든다. 교회는 적은 인원의 집단과 모임도 증가시키면서, 모든 위장된 정신주의의 정체를 폭로하면서, 그리고 교회 공동체를 일상적이고 개인적인 삶의 현실 영역에 건립하면서, 구성원들 사이의 관계 안에서 사람들 각각의 특별한 상황과 필요를 알게 하는 조직 형태를 찾아야만 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직은 계시를 따르고 동행해야만 하는 것이지 조직이 계시를 선행할 수 없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로부터 기독교 신앙에 합당한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 메가처치의 태만을 비난하지 않을 수 없다. 메가처치는 교인들에게는 신앙을 실천하라고 하면서도 자신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교인들에게는 제자의 길을 따르라고 요구하면서 자신은 제자의 길을 배반한다. 교인들에게는 십자가의 길을 걸으라고 하면서 자신은 영광의 길을 추구한다. 마치 그 옛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말이다.

 

2) 성육신적 방법론

 

그런데도 메가처치는 도리어 스스로를 변호하며 이르기를, “메가처치는 선교와 구제에 특심이다. 교회가 클수록 선교 사업이나 구제사업에 더 왕성한 참여를 할 수 있다. 메가처치는 작은 교회가 가지고 있지 못한 큰 사명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뻔뻔스럽고 가증한 자기 정당화에 불과하다. 이러한 메가처치의 주장의 이면에는 선교와 구제를 교회 내의 개인이나 부서의 활동으로 보거나, 혹은 교회의 여러 기능이나 활동 중 하나로 보는 전제가 깔려 있다. 

 

그러나 이는 참으로 오해다. 선교와 구제는 교회 내 개인이나 부서가 하는 사역이기에 앞서 교회 그 자체가 하는 것이다. 또한 선교와 구제는 교회의 여러 활동 중 하나가 아니라 교회라는 사건 자체가 바로 선교와 구제로 이어져야 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교회는 이미(already) 임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다. 또한 교회는 장차(not yet) 임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예표다. 스탠리 하워와스(Stanley Hauerwas)가 즐겨 쓰는 표현으로는 교회는 하나님 나라의 ‘식민지’다. 따라서 교회는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종말론적 실체를 자신의 존재(being)로 예시하는 공동체다. 이 책임은 교회 내 개별 신자에게 있기도 하지만 우선 교회 자체에게 있다. 따라서 교회는 자체의 구조와 조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반영해야 한다. 즉 교회는 자신의 존재 자체로 선교와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이것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성육신의 원리를 따르는 성육신적 공동체임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비밀을 전하는 것을 계시라 할 때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가 완성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완성이라고 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의 전달자(messenger)임과 동시에 그분 자신이 계시(message)라는 뜻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의 말씀대로 말씀이 육신이 된 사건 자체가 바로 온전한 계시가 주어진 사건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마샬 맥루한(Marshal McLuhan)의 ‘미디어는 메시지(Medium is Message)’라는 유명한 테제에 가장 정확히 일치하는 사건이다. 즉 예수의 성육신은 단순히 계시의 매체(media)일 뿐만 아니라 계시 자체(message)이다. 그리고 바로 이 성육신의 모델이 교회와 신자가 복음을 증거하는 방식이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바로 이러한 성육신적 원리를 따라서 복음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교회와 신자는 자신의 행동이나 말보다 앞서서 자신의 존재로 복음을 증거해야 한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것은 신자나 교회 내 부서에게만 해당되는 원리가 아니라 교회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원리다. 때문에 교회는 복음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스스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선교와 구제를 행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3) 선교를 다시 생각하다.

 

그렇다면 교회가 자신의 존재로 선교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교회는 자신의 구조와 존재로써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복음은 무엇인가? 그리스도 사건이다. 그의 성육신, 십자가의 죽음, 부활이 바로 복음이다. 따라서 교회는 자신의 존재로써 자신을 비워 그리스도 사건을 온전히 증거하기를 힘써야 한다. 교회는 낮은 자로 오심, 가난한 자의 친구가 되심, 십자가의 길을 걸으심,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대신 죽으심, 부활하심 등의 그리스도 사건을 자신의 존재로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강단에서의 설교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가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현하기를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보라. 성장 경쟁에서 승리한 텐프로(10%)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자기를 비우신 그리스도의 케노시스를 찬미할 수 있겠는가? 거대한 부를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가난한 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전할 수 있겠는가? 막강한 권력을 소유한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권력의 희생자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증거하겠는가? 주변의 중소 교회를 먹어치우고 성장을 거둔 메가처치는 무슨 수로 십자가의 희생의 죽음을 나타내겠는가? 모든 교회가 개교회로 뿔뿔이 흩어져 성장을 위한 각개 전투를 벌이고 있는 마당에 무슨 수로 메가처치는 막힌 담을 허무시고 만물을 하나로 통일하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겠는가? 2,100억짜리 교회당을 소유한 교회가 무슨 수로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제자도를 전하겠는가? 소가 웃을 일이다. 친절한 금자씨는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선교는 교회가 하는 어떤 활동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선교다. 수 천, 수 만 명의 선교사를 땅 끝까지 파송하는 것이 교회의 선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하나님에 의해서 세상으로 보냄을 받아 세상을 섬기는 것이 바로 선교다. 따라서 교회는 선교를 교인들에게 내맡겨 버리기 전에 먼저 자신의 구조와 신학을 통해 세상을 섬겨야 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호켄다이크(J. C. Hoekendijk)는 말한다. 만일 교회의 구조가 이러한 세상을 섬기는 일을 방해한다면 그 구조는 “이단”이나 마찬가지라고.

 

4) 구제를 다시 생각하다.

 

구제도 마찬가지다. 많은 메가처치는 막대한 돈을 구제사업에 쓰고 있다며 자랑을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더 많은 구제를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더 성장해야 한단다. 참으로 가당치 않은 소리다. 물론 그러한 구제라도 그것은 분명 값진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신의 직무를 유기한 채 그러한 구제를 한다면 그것은 구제의 세속화를 초래하며, 구제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사회사업이나 홍보 수단으로 전락하고야 말 것이다. 따라서 이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헤베르 루가 말한 대로 구제는 교회의 한 가지 활동이 아니라 교회의 본질과 연결된 것이라야 한다. 즉 교회가, 모든 권세가 그리스도께 굴복될, 장차 올 세상의 예표라면 교회는 돈의 권세를 그리스도께 굴복시키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가 구제사업보다 선행해야 할 일이다.

 

이를 위해서 교회는 먼저 교회 안에서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소유권에 대한 개념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을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창조 사상에 비추어 볼 때 모든 소유권 주장은 근본적으로 반역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소유는 아무 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다. 이와 함께 교회 안에서 일어나야 할 일은 “돈의 절대 권력이 멈추고 맘몬의 힘이 빼앗김”을 당해야 한다. 돈의 권세는 실상 아무 것도 아니며, 기독교 신앙을 실천하는 데 어떠한 필연성도 없음을 교회는 선포해야 한다. 그런데도 더 많이 구제하기 위해서 더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스스로 맘몬에게 사로잡혀 있다는 자백일 뿐이다. 돈의 권세가 결박을 당할 때 교회에서 재물로 형제를 돕는 코이노니아는 비로소 가능하게 된다. 재산의 나눔은 교회가 하는 자선이나 구제‘사업’이 아니다. 교회가 다가올 새 창조의 예시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이것은 교회의 생명과 본질에 관계되는 일이다. 이것이 참된 구제다.

 

이상의 설명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간단하다. 교회는 자신의 존재를 통해서, 곧 자신의 구조와 조직, 질서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가처치는 이 일을 할 수가 없다. 메가처치는 교회 내의 신자들에게 복음을 살라고 설교할 수 있을지 언정 결단코 자기 자신은 복음을 살아 낼 수 없다. 메가처치가 딛고 서 있는 기초는 교회의 크기와 본질이 무관하며, 교회의 활동(doing)과 존재(being)가 아무 상관도 없다는 정신주의와 관념론이다. 그리고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에서 메시지를 잘라 내려고 했던 영지주의와 다를 바 없다. 교회의 크기는 본질과 무관하지 않다. 행함(doing)이 존재됨(being)을 대체할 수 없다. 교회는 먼저 자신의 존재, 곧 구조와 조직, 신학을 통해서 복음을 체현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무척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러나 만일 교회가 요더(Joder)의 말대로 ‘효과’가 아니라 ‘신실함’으로 복음을 살아 내고자 노력한다면 결코 메가처치는 가능할 수 없음이 드러날 것이다.


6. 해법을 모색하며

 

1) 문제를 대하는 자세

 

자, 그렇다면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는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까? 문제 해결에 앞서 먼저 우리는 이 문제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님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어떠한 점에서 그런가? 일차적으로, 이 문제는 어느 한 개교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한국 개신교회에서 상징성과 대표성을 가지는 대단히 중요한 교회의 문제다. 그래서 사랑의교회가 어느 쪽으로 결정을 내리든 간에 그 결정은 한국 교회 전체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는 의미 있는 결정이 될 것이다. 나아가 한국 교회사에서 한 획을 긋는 중대한 결정이 될 수도 있다. 따라서 이 문제를 대하는 태도는 대단히 신중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남의 교회 일에 간섭하지 말라는 개교회주의적 태도나, 한 가지 해법만이 존재한다는 기술주의적 태도나, 일사천리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독단적 태도는 옳지 못한 자세다.

 

둘째로, 이 문제는 결코 사랑의교회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서 나는 사랑의교회의 건축이 결국 사랑의교회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혀 있는 교회임을 증명하는 슬픈 사건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만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혔는가? 사랑의교회만 교회당을 짓겠다고 하는가? 작은 교회는 건축 마케팅을 하지 않는 줄 아는가? 사랑의교회를 비난하는 교회와 목회자는 의로운가? 물론 사랑의교회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진 교회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모든 책임을 사랑의교회에만 지우는 것은 부당하다. 한국 교회 모두는 이 문제에 연루되어 있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공범임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문제를 간홌자는 현장에서 잡힌 여인을 기소하는 무리들처럼의 민재판식으로 몰아붙여서는 안 된다. 또 이 문제를 건축을 찬성하는 입장럼의 대하는 입장 간의 대결구도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고, 큰 교회와 작은 교회 간의 갈등 문제로 몰아가서도 안 될 것이며, 사랑의교회와 근 중소형 교회 간의 나와바리 다툼으로 보아서도 안 될 것이다. 이 문제를 대하는 가장 올바른 태도는 한국 교회 모두가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범죄자임을 고백하는 자세라야 할 것이다.

 

셋째로, 이 문제는 어느 쪽으로 결정을 하든지 모두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건축을 해도 문제요, 안 해도 문제다. 참으로 골치 아픈 문제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때문에 우리는 이 문제를 간단하게 평가하고, 손쉽게 해법을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따라서 사랑의교회 측은 건축 이외에는 대안이 없다고 밀어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반대로 재고를 요청하는 측에서도 대안도 제시하지 않은 채 무조건 건축만은 안 된다고 주장한다면 무책임하다는 비난을 면키 어려울 것이다. 나는 감히 제안하는 바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를 시간을 두고 한국 교회 전체가 연합하여 지혜를 모아 해결해 나가면 어떻겠는가?


 

넷째로, 우리는 이번 사건이 한국 교회의, 나아가 개신교회 전체의 보다 근본적 오류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옥 목사님께서 정확히 간파하셨듯이 교회론의 빈약함이라고 할 것이다. 옥 목사님은 이러한 개신교회의 근본적 오류에 대한 대안으로 제자훈련을 제시했다. 그러나 30년이 지난 지금 그 대안은 충분치 못했음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위대한 신앙의 선배의 경험을 발판 삼아 그의 성패를 정확히 평가하고, 보다 충분하고 철저한 대안이 무엇인지를 모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문제를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방식으로 풀기를 진심으로 원한다면 우리는 이번 사건을 계기로 우리와 선조들이 저질러 왔던 근본적인 오류를 풀어내는 회개와 돌이킴의 기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2) 두 가지 선택 가능성

 

Alt. 1 : 건축을 한다.

 

지금 이 시점에서 사랑의교회가 내릴 수 있는 결정은 별로 많지 않아 보인다. 건축을 하는 것과 하지 않는 것, 이 두 가지가 전부가 아닐까 싶다. 그리고 사랑의교회 입장에서는 건축을 하는 쪽이 하지 않는 쪽보다 훨씬 쉽고 합리적일 것이다. 하지만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한다면 결국 사랑의교회는 메가처치 현상에 완전히 사로잡힌 교회임을 만천하에 공표하는 셈이 된다. 결국 사랑의교회는 무한성장을 향한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교회요, 암세포와 같이 통제되지 않는 성장(uncontrolled growth) 때문에 스스로의 덩치를 주체할 줄 모르는 병든 메가처치임을 자인하게 된다. 나아가 사랑의교회는 이와 유사한 문제에 처한 교회들을 향해서 자신과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라고 모범을 보임으로써 메가처치 전도사 노릇을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계속해서 한국 교회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가지기 어려울 것이다. 사랑의교회는 한국에 있는 다른 많은 교회들 중에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또 하나의 교회’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물론 다른 면에서 사랑의교회는 주목을 끌 수는 있을 것이다. 예컨대, 신축한 교회당이 건축상을 받는다거나, 거대한 규모의 선교 및 구제 프로젝트를 추진한다거나, 멋들어지고 근사한 이벤트를 연다거나, 단기간 내에 빠른 성장을 보임으로써 성장 기록을 경신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교회는 더 이상 건강한 교회의 모델로 자신을 내세우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아마도 2009년을 사랑의교회가 자신의 대표성을 상실한 해로 기록할 것이다. 사랑의교회의 건축을 두고 열린 이번 포럼의 의의는 무엇인가? 그것은 사랑의교회가 가지고 있는 대표성과 상징성을 이제 그만 내려놓으라는 역사의 준엄한 요구인 것이다. 그리고 사랑의교회는 고작 2,100억 원으로 자신의 대표성과 상징성을 팔아먹으려고 하고 있다.

 

Alt. 2: 건축을 하지 않는다.

 

만일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사랑의교회가 건축을 하지 않는다면 사랑의교회는 분명 상당한 혼란을 겪게 될 것이다. 건축을 향해 줄기차게 달려오면서 가졌던 방향성이 흔들리게 될 것이고 이와 함께 목회자와 교인들이 혼란을 겪을 것은 뻔 한 일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대적인 공간 부족의 문제를 다른 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다시 떠안게 될 것이다. 원점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매 주 마다 몰려오는 거대한 규모의 교인들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아마도 교회당 건축보다 훨씬 더 어려운 문제일지 모른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큰 문제는 사랑의교회는 이제 더 이상 교회 성장을 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성장을 위해 매진하지 않는다면 메가처치인 사랑의교회는 이제부터 ‘뭘 해야 할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의교회의 건축 포기 결정은 한국 사회와 교회에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역시 사랑의교회는 달라도 뭐가 달라’라는 칭송을 들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메가처치 현상에 물든 한국 교회를 향해서 커다란 경종을 울릴 것이다. 물론 사랑의교회가 한국 교회에서 차지하는 상징성과 대표성은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누가 보더라도 건축을 포기하는 결정은 불러일으킬 편으로서는 상당한 희생일 수밖에 없으며 대단한 자기 부인이 아니라고 할 수 없기 아이다.


 

이번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가 불거지면서 사랑의교회를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분립 개척이나 교인들을 분산시키는 것, 또 건물 임대 등을 대안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는 분명 사랑의교회를 향한 애정의 표현이요, 참된 교회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절한 열망의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의미 있고 나름대로 현실적인 제안이다. 나 역시도 사랑의교회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차라리 이러한 용기 있는 결정을 해주었으면 하고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제안은 근본적인 해법이 될 수 없는 것도 사실이다. 교인들을 돌려보내거나 분산시키기, 혹은 분립 개척 등은 인위적으로 사랑의교회의 교인수를 줄여서 공간 부족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인데, 나는 작은 교회 역시 잠재적 메가처치일 뿐이라고 보기 때문에 사정은 그다지 나아지지 못할 것이라고 본다. 또 건물 임대라는 제안 역시 답이 되지 못한다. 사랑의교회는 이미 충분히 많이 건물을 임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윤리적 성격의 해법은 결국 “왜 우리만 그래야 되는데?” 그리고 “대체 왜 그래야 하는데?”라는 물음에 답할 수 없으리라고 본다. 결국 이 문제는 윤리적 문제가 아닌 신학적 문제인 것이다.


7. 제 3의 길 : 교회 일치 선언을 제안하다.

 

1) 메가처치 현상은 개교회주의의 산물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이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의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사랑의교회의 건축 문제는 메가처치 현상이라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대한민국 모든 교회가 너나 할 것 없이 무한 성장을 향해 미친 듯이 줄달음질을 하고 있는 마당에 사랑의교회도 끼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메가처치 현상의 뿌리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교회 밖의 사회적 요인이고, 또 하나는 교회 내의 신학적 요인이다. 물론 둘 중에서 신학적 요인이 훨씬 더 중요하다. 왜냐? 가톨릭교회를 보라. 개신교회와 똑같은 사회적 상황 속에서도 메가처치 현상을 비껴가고 있지 않는가. 이것은 분명 가톨릭 신학, 특별히 견고한 교회론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메가처치 현상을 가능케 한 것은 결국 개교회주의다. 교회의 일치 문제를 보이지 않는 교회에게로 투사해 버리고, 교회 간 연합은 거추장스러운 정치적 야합인양 여기는 풍조가 지난 500년간 개신교회를 휩쓸었다. 결국 남은 것은 모든 교회는 개교회로 존재한다는 개교회주의다. 개교회주의는 세속의 풍조를 막아내고, 자신을 보호할 수 있는 방어막을 해체하는 결과를 낳았다. 급격한 사회적 변동에 맞서 교회는 아무런 면역력도 갖추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유린당하고 말았다. 그로 인해 세속의 물결이 쓰나미처럼 교회 안으로 밀어닥쳤다. 특별히 시장 자본주의의 논리가 교회를 범람한 것은 치명적이었다.


 

대한민국의 밤하늘을 수놓는 수많은 네온 십자가는 개교회주의가 만들어 놓은 한국 교회의 슬픈 초상이다. 1층 편의점, 2층 장로교회, 3층 감리교회, 그리고 지하는 침례교회. 주일 아침이면 교인 한 사람이라도 더 끌어 오기 위해서 교회마다 봉고차를 운행하고 이웃 교회 교인들에게까지 소위 전도한답시고 영업의 손길을 뻗는 현실……. 대체 이게 뭔가? 넘치는 목사 후보생들이 아무렇게나 교회를 개척해 놓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교회를 성장시키려는 것이 지금 우리의 현실이 아닌가? 개교회주의에 함몰된 교회는 스스로 면역력을 잃어버린 채 교회 밖에서부터 가해지는 세속의 조류에 힘없이 휩쓸리고 만 결과가 바로 메가처치 현상이 아닌가 말이다.


 

얼마 전 미국의 메가처치에서 꽤 오랫동안 원로목사측과 갈등하던 신임목사가 끝내 사임을 하고 근처에다 교회를 개척한 일이 있었다. 새로 개척한 교회는 그 전 교회로부터 차로 고작 6분 거리에 떨어져 있단다. 그런데 한국의 내로라하는 메가처치 목사들이 그러한 교회 분열을 축하하는 메시지를 보냈단다. 대체 이게 뭐하는 짓들인가? 책망은 못할망정 축하라니?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가 맞는가? 이것이 바울이 그토록 사모했던 그리스도의 몸이 맞느냐는 말이다. 왜 이와 같은 패역한 상황을 아무런 비판 없이 그냥 받아들이는가? 왜 주님 앞에서 이와 같은 패역무도한 죄악을 범하면서도 아무런 감각 없이 모든 상황들을 수용하고 마느냐는 말이다. 

 

메가처치 현상은 결국 개교회주의가 낳은 산물이다. 그리고 개교회주의는 우리와 선조들이 지난 500년간 저질러 온 근본적 오류의 산물이다. 근본적 오류란 무엇인가? 그것은 교회의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결국 교회의 일치야 말로 개교회주의를 치유하는 길이요, 메가처치 현상을 잠재울 수 있는 근본적인 해법이다. 물론 교회의 일치가 한국 교회의 모든 문제에 대한 해답은 아니다. 교회는 지금보다 훨씬 더 거룩해져야 한다. 이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는 거룩을 향한 첫 걸음인 것 또한 틀림없는 사실이다.

 

2) 교회는 하나다.

 

교회 분열과 그로 말미암은 개교회주의는 단순히 윤리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복음의 본질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다. 교회가 증언하는 복음은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함께 이 땅에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기 시작했음을 증언하는 증인이다. 그리고 교회는 을 의 말 뿐만 아니라 을 의 그리를 통해서 도래하기 시작한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의 참된 의미다. 따라서 교회가 만일 을 의 그리로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체현하지 못한다면 그의 말은 아무런 실효성도 없어지고 만다.

 

교회가 일치되지 못할 때 교회는 사랑을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위대한 선교학자 데이비드 보쉬(David Bosch)는 흔히 지상명령의 근거 구절이라고 알려져 있는 마태복음 28장 19-20절을 새롭게 해석한다. 이 구절은 전도자나 선교사로 나가라는 명령이 아니라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이다. 그리고 제자를 삼는 방법은 산상설교에서 드러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가르쳐 온전히 지키게” 하는 것이다. 산상설교의 핵심은 결국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요약된다. 결국 우리가 지상명령이라고 부르는 것은 사랑 계명과 다르지 않다. 요한에 따르면 토라를 대체할 만한 새 계명은 제자들끼리 “서로 사랑”하는 것인데, ‘서로 사랑’이 제자됨의 표지가 될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다.[요13:34-35] 또 바울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 했다.[고전13:2-3] 따라서 교회 일치에 실패하면 교회는 결코 사랑의 복음을 증거할 수 없다.

 

또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교회는 평화를 증거하지 못하게 된다. 마태복음 10장 16절에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이리 가운데 보내진 양에 비유하셨다. 이는 이리의 포악함에 반대되는 양의 온순함을 강조하시는 표현이다. 제자는 다툼과 폭력이 난무하는 곳에 평화를 이루는 양으로 보냄을 받았다. 평화는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대표적인 표징이다.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나라가 바로 하나님의 샬롬의 나라다.[미4:3] 교회는 그러한 샬롬의 나라를 자신의 존재로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교회가 분리되고 서로 타투고 이기기 위해서 경쟁하면서 평화의 복음을 전할 수는 없다. 사도는 경고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갈5:15]

 

교회가 일치하지 못할 때 십자가의 복음은 왜곡된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께서 이루신 일의 핵심은 화목과 화해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화목제물이 되심으로써 하나님과 세상 간의 원수 관계를 화해시키셨고, 지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물며 적대적 원수 관계들을 청산하셨다. 그리하여 가장 화해하기 어려웠던 이방인과 유대인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 건물로 이어지게 되었다.[엡2:14-22] 교회는 이러한 그리스도의 화해의 역사가 온전히 드러나는 곳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 통일”되는 곳이다.[엡1:10] 따라서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은 아무런 화목도 이루지 못하며, 어떠한 막힌 담도 허물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불일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다.

 

교회가 일치하지 못하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선포될 수 없다. 사랑, 평화, 화목은 장차 도래할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의 특징이다. 교회는 지금 여기서 다가올 하나님의 나라를 선취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았다. 이것이 교회가 받은 선교사명이다. 따라서 교회는 사랑, 평화, 화목이 왕노릇하는 공동체라야 한다. 모든 차별과 분리, 장벽이 철폐되는 혁명 공간이라야 한다. 이러한 혁명 공간인 교회에 대해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그래서 교회 안에서) 하나이니라.”[갈3:28] 초대교회는 이것을 실제로 실천했다. 그리고 모든 장벽이 완벽하게 허물어진 지상에서 가장 급진적인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하나님 나라를 현시했다. 그리고 외인들은 교회에서 성취되는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화해와 화목을 충격으로 받아 들였다. 이방인들은 급진적 혁명 공간과 해방 공동체를 목격하면서 큰 혼란에 빠졌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선포될 때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분리되고 일치하지 못한다면 교회는 세상에게 아무런 충격도 주지 못할 것이며, 교회가 전하는 하나님 나라 복음은 아편으로 퇴락할 것이다. 

 

교회가 분열할 경우 교회는 더 이상 참 교회일 수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합당하게 증언할 수 없게 된다. 바울이 수석 사도 베드로를 호되게 면책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베드로가 이방인과의 식사의 자리에서 슬그머니 도피한 것은 이방인과 유대인을 다시 가르는 분리의 행위였으며, 이는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로 행하지 아니”하는 배교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갈2:14] 같은 이유로 그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사태에 대해서 그토록 통탄해 했던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교회의 분열은 십자가에 대한 배신 행위요 반복음적 행위다.[고전 1~2장] 로마의 클레멘트(Clement of Rome)가 여전히 분열을 거듭하고 있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담대하게 권면할 수 있었던 이유도 세계교회는 하나라는 신념 때문이었다. 키프피아누스(Cyprianus)가 순결주의자 노바티아누스(Novatianus)와 결국 갈라선 이유도 교회의 일치를 포기하는 행위는 복음으로부터 멀어지는 행위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개교회주의로 뿔뿔히 갈라져 서로 경합하고 다투는 한국 교회는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한국 교회는 스스로 참 교회가 아님을 자신의 전 존재로 떠벌이고 있는 실정이다.

 

3) 어떻게 일치를 이룰 것인가?

 

사랑의교회 건축 문제의 근원은 메가처치 현상이요, 메가처치 현상의 근원은 개교회주의요, 개교회주의의 근원은 교회의 불일치다. 따라서 이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해법은 교회 일치 뿐이다. 하지만 어떻게 이 일을 이룰 것인가? 과연 이런 일이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물론 이 일은 쉽지 않다. 불가능해 보인다. 꿈꾸는 소리처럼 들린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할 수 있느니라”[마19:26]는 주님의 약속을 붙들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일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더 이상 지금의 상황을 용납하지 말아야 한다. 교단 및 교회의 분리, 개교회주의, 메가처치 현상 등을 비판 없이 수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지금의 패역한 상황에 대해서 분노하고, 비난하며, 결연히 저항(protest)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개신교(protestant)의 정신이다. 

 

셋째로 나는 이 지면을 빌어 한국 교회가 교회 일치 선언을 할 것을 감히 제안하고자 한다. 선언은 어디까지나 말일 뿐이다. 하지만 선언이 충분히 진지하고, 충분히 엄숙하다면 개교회 성장의 추구가 아닌 전체 교회의 성장의 추구라는 거대한 패러다임 전환의 물꼬가 트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일에 사랑의교회와 포럼 주최자들이 앞장서 주기를 바란다.

 

넷째로 선언에 걸맞는 구체적인 실천 방안들을 제안하고 모색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 교단을 초월한 열린 대화, 성장 경쟁의 종식, 상호 부조 등과 같은 구체적 풀뿌리 에큐케니컬 운동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사랑의교회는 건축에 힘을 쏟는 대신 인근 사방 수 백 미터 내에 있는 교회들과 함께 성장 경쟁을 종식할 것을 선언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연대하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를 통해서 강남땅에 하나님의 샬롬이 임하고, 그리스도의 화해가 임할 수 있는 보다 실제적인 일들을 함께 구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연합 모임에서 사랑의교회는 단 하나의 교회로 자신의 위치를 낮추는 일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4) 일치의 원리

 

하지만 이 시점에서 우리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와 만나게 된다. 과연 무정부상태나 다름 없는 지금의 한국 교회가 아무런 구심점 없이 교회 일치를 이룰 수 있을까? 과연 개신교회는 바티칸 없이 어떻게 보편교회(Catholic Church)의 일치를 구현할 수 있을 것인가? 바티칸의 품에 안길 수는 없는 노릇이다. 특정 메가처치가 바티칸을 대신 할 수도 없고, 또 바티칸을 대체할 만한 기구를 새로 결성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W.C.C.로 바티칸을 대신하는 것은 어떨까? 새로 연합기구를 만드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 방법인 듯하다. 한국 교회는 교회 일치를 위해서 일찍부터 많은 수고를 해 온 W.C.C.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협력을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지금 한국 교회가 필요한 교회 일치는 어떠한 식의 정치적 연합도 아니고 오직 성령으로 말미암는 일치와 연합뿐이라는 것이다.


 

성령으로 하나 된다는 뜻은 무엇일까? 나는 고린도교회의 분열을 치유하고자 바울이 제시한 십자가의 연합 전략을 한국 교회가 깊이 묵상하게 되기를 바란다. 고린도교회에는 최소한 네 개의 파벌이 있었다. 아마도 가장 큰 파벌은 바울파였을 것이다. 바울파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은 유대인 중심의 베드로파였다. 그리고 철학적이고 지적인 성향의 아볼로파와 원리주의적 성향의 그리스도파가 비주류로 자리 잡고 있었다. 바울은 이들 네 파벌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고 있다고 준엄하게 꾸짖은 뒤 네 개의 파벌이 스스로의 정체성의 근거로 붙들고 있는 자랑거리들을 향해 무차별 융단폭격을 가한다. 베드로파가 자랑하는 표적과 능력, 바울파와 아볼로파가 자랑하는 말과 지식, 그리고 문벌이나 지혜 등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격하게 성토한다. 그런 다음 가장 초라하고 부끄럽고 작고 약한 십자가야 말로 하나님의 참 능력임을 선포한다. 바울은 심지어 자신을 동조하는 파벌을 포함하여 네 개의 파벌 모두를 십자가 앞에 무릎 꿇게 함으로써 교회의 일치를 이루고자 했다. 그는 정치적 연합이 아니라 십자가 중심의 연합을 모색했던 것이다.

 

그렇다. 진정한 교회의 일치는 자신의 강함과 자랑거리를 수치거리로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수치스러운 가운데 은총을 베푸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야 말로 교회의 일치를 이루는 가장 건강한 방법이라고 믿는다. 나는 이러한 점에서 사랑의교회가 자랑하는 제자 훈련조차 한국 교회에 많은 유익을 끼쳤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일치를 저해하는 자랑거리였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옥한흠 목사의 인격과 덕성도 마찬가지고, 소위 사랑의교회라는 브랜드 가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사랑의교회가 짓게 될 2,100억 짜리 교회당은 십자가 앞에서 가장 부끄러운 괴물로 드러날 것이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모든 자랑거리는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나누는 서슬 퍼런 칼과 창에 불과하다. 따라서 크기를 자랑 삼았던 메가처치는 자신의 크기를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이다. 프로그램을 자랑하는 교회는 그것을 부끄러워해야 할 것이다. 많은 구제와 선교를 행한 것으로 자랑했던 교회, 순수한 교리를 자랑했던 교회, 설교를 자랑했던 교회, 역사와 전통을 자랑했던 교회, 특별히 담임목사를 자랑하는 이 시대의 허다한 교회들은 그 모든 자랑거리를 내려놓고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그리스도의 몸이 치유되고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8. 마치는 글

 

솔직히 나는 이러한 제안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일지 확신이 서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뜬금없는 제안에 어리둥절하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메가처치 현상을 치유하는 길은 이것뿐이라고 믿기에 감히 이러한 제안을 해본다. 메가처치 현상에 사로잡힌 한국 교회는 순전히 덩치만 남아 있는 형국이다. 그 안에 진리도 없고, 복음도 없다. 이는 교회 스스로가 진리를 가리고 있기 때문이고, 스스로가 복음을 부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진리가 없는 곳에 성령이 없으며, 성령이 계시지 않는 곳에 더 이상 교회는 지속될 수 없다. 다만 종교만이 남아 한 두 세대를 이어갈 뿐이다. 아직 남아 있는 거대한 덩치가 하나님의 역사를 증명하는 듯 하지만 실상 이는 허수요, 허상이요, 허세일 뿐이다. 하나님의 역사를 실감하기 위해서 교회의 덩치를 더 크게 키우는 일은 바닷물로 목을 축이려는 가련한 시도일 뿐이다. 한국 교회는 한때는 크게 부흥했지만 성령께서 떠나간 뒤 급속하게 쇠락해 버렸던 역사 속의 허다한 교회를 살펴 자신의 교훈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몸이 하나이요, 성령이 하나이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입었느니라. 주도 하나이요, 믿음도 하나이요, 침례/세례도 하나이요, 하나님도 하나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 만유 위에 계시고 만유를 통일하시고 만유 가운데 계시도다.”[엡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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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나면 예의를 갖추지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진다.

친근해지면서 함부로 대하게 된다.

이유는 자기 자신을 대하듯이 다른 사람을 대하기 때문이다.

자기의 허물과 약점을 못 덮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허물도 못 덮는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이웃사랑의 토대이고 가족 사람의 기초이다.

건강한 자기 사랑은 소극적 차원과 적극적 차원 두 가지가 있는데,

 

소극적 차원은 자기 자신의 죄와 허물을 용서하고

덮어 줄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다른 사람에 화내고 성질내는 것은 그 행위 자체가

70%는 자기 자신을 학대하는 성향에서 비롯된 것이고

나머지 30% 자녀나 아내에게 하는 것이다.

자기가 용서 받고 용납 받는 경험을 많이 받아 봐야

다른 사람도 많이 덮어 줄 수 있다.

따라서 사죄의 은혜, 복음적 사랑을 느껴 봐야 한다.

많이 받아봐야 한다.

 

적극적 차원은 자신의 장점을 기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격려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장점을 스스로 알고 기뻐 할 줄 알아야 한다.

은사에 대해 행복감을 젖을 수 있어야 한다.

열등감이 있으면 칭찬 받지 못한다.

누군가 칭찬해주면 아니예요 라고 말하며 변명할 필요가 없다.

옷이 이쁘다고 칭찬해주면 이거 2500원짜리예요 하고

쓸데 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가 없다.

칭창받으면 '감사합니다'라고 말하라.

이것은 그것을 인정한다는 뜻이 아니고

호의에 대한 감사의 표현일 뿐이다.

 


 

사람을 보고 잘생겼다고 좋아하지 말라.

잘생겨서 좋아하는 것은 아직 안친하다는 증거이다.

안 친하니까 잘생겨서 좋아하는 것이다.

외모가 좋다는 것은 고체적인 아름다움인데,

이것만으로는 인생이 행복하지 않다.

외모가 중요하지 않지만 인상은 상당히 중요하다.

인상은 기체적인 아름다움이다. 밝은 사람이랑 결혼하라.

10년 뒤가 아름다워질 사람이랑 결혼하라.

분위기가 아름다운 사람이란

차갑지 않고 따뜻한 사람,

어둡지 않고 밝은 사람,

딱딱하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이다.

 

사랑한다고 모두 결혼하는 것은 아니다.

백날 사랑해도 결혼 할 수 없다.

결혼하는 것은 고백하는 것, 그리고 반응을 얻는 과정이다.

고백을 연습하라.

용기 있는 자가 미녀/미남을 얻는다.

고백이란 언어 가운데 담긴 사랑이다.

고백 없는 사랑은 비 없는 구름 같다.

 

고백할 때는 사랑고백을 바로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럴 경우75%가 거절당한다.

고마움에 대한 고백을 먼저 하라.

칭찬하고 고마워 하고 세워주고 격려하라.

즐겁게 해주고 유쾌하게 하라.

그 사람이 기분 좋을 때 앞에 나타나 있는 것만으로도

그사람이 자기를 좋아하게 할 수 있다. ^^

사람은 누구가 자기를 칭찬해주는 사람과 같이 있고 싶어 한다.

잠시 다른 사람에게 갔다가도

인정받았던 사람에게 돌아오게 되어 있다.

 


 

"사람은 칭찬받고 인정받지 못하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몇 안되는 동물 중 하나다"

 

칭찬과 인정이 얼마나 중요한가!

바뀌지 않는 부모님, 교수님, 선생님을 더 칭찬하고 인정해드리라.

우리가 원하는 그 모습으로 격력하고 인정해 드려라.

그리하면 우리는 변화된 그들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 칭찬과 인정을 알라.

 


 

 

용기란 상대방 앞에서 나 자신이 되기를 회피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잘 하려고,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하지 말아라.

'나'보다 못한 사람만 아니면 된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진정한 나의 모습이면 된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하나님 안에서의 변화된 모습이란,

우리가 모세나 다윗으로 바뀌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부여하신 가능성들을 최대한 실현한 모습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다.

사실 자신에게 가장 가혹한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나 자신을 사랑하기가 가장 어렵다.

자신을 포기하고 싶을 때 내 안에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이 가능성을 보시고 사랑해 주신다.

하나님 사랑으로 사랑하라.

 

다른 사람을 사랑할 때도 반응을 살피지 말라.

내 사랑의 대가로 반응이 오지 않아도 실망하지 말라.

반응을 점검하며 사랑하면 사랑과 봉사의 진정성을 잃는다.

진리와 함께 기뻐하며 사랑하라.

상대방 보다 상대방 안에 있는 예수님을 먼저 사랑하라.

그러면 끝까지 사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내면에서 자기 사랑을 방해하는 어두운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이,

그 어두운 것 자체를 없애려고 노력하는 것은 답이 아닐 수 있다.

방에 불을 켜면 마치 어두움이 빛으로 바뀌는 듯 하다.

그렇지만 사실은 어두움이 없어지고 빛이 생긴다는

두가지의 독립적인 사실이 동시에 일어난다.

이와 마찬가지 원리로,

우리는 우리 안에서 제거하고 싶은

그 부정적인 요소에 focus를 하는 것 보다,

우리가 개발하고 싶은 긍정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이

답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어두움과 빛이 혼재하겠지만,

결국에는 빛이 어두움을 이긴다는 것이다.

 

 

 

written by 서현정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두란노에서 발간하는 「목회와 신학」 2003년 3월호에서 추천한 도서 목록입니다. 


구약신학 

「20세기 구약신학의 주요 인물들」 벤 C. 올렌버거 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베이커 엠마오 
「구약 성서 이해」 버나드 W. 앤더슨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 세계의 이해」 박준서 한들출판사 
「구약 이스라엘사」 김희보 총신대학교출판부 
「구약 정경 개론」 B. S. 차일즈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성경과 구약학」 박동현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구약성경신학」 월터 카이저 생명의말씀사 
「구약성서개론」 노만 가이슬러 엠마오 
「구약성서신학」 게르하르트 본 라트 분도출판사 
「구약성서신학」 발터 아이히로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롤랑 드 보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구약신학」 존 H. 스택 솔로몬 
「구약신학」 폴 하우스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신학의 과제 2」 룰프 크니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신학의 요소」 클라우스 베스터만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기독론」 E. W. 헹스텐베르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메시야사상」 게라르드 반그로닝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의 역사이해」 강사문 한국성서학연구소 
「구약총론」 글래슨 아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총론」 에드워드 영 개혁주의신행협회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 허버트 리빙스톤 기독교문서선교회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새로운 주경신학 연구」 월터 카이저 엠마오 
「성경신학」 게르할더스 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성경어휘와 그 의미」 모세 실바 성광문화사 
「신구약성서신학」 B. S. 차일즈 은성출판사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 트렘퍼 롱맨 IVP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송제근 두란노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이스라엘의 역사」 존 브라이트 분도출판사 
「최신구약개론」 레이몬드 딜러드 & 트렘퍼 롱맨 크리챤다이제스트 
「하나님의 나라」 존 브라이트 컨콜디아사 


신약신학 

「공관복음서의 기원」 스톤하우스 성광문화사 
「누가행전」 하워드 마샬 엠마오 
「바울, 율법, 유대인」 E. P. 샌더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복음의 기원」 김세윤 엠마오 
「바울신학」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바울신학」 헤르만 리델보스 개혁주의신행협회 
「비유해석학」 크레그 블롬버그 생명의말씀사 
「사도 바울」 크리스천 베커 한국신학연구소 
「사도행전 비평사」 W. W. 가스끄 엠마오 
「성경해석학 개론 : 성경의미의 탐구」 월터 카이저 & 모세 실바 은성 
「신약사」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신약신학」 G. E. 래드 대한기독교서회 
「신약신학」 레온 모리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 요아킴 예레미야스 새순출판사 
「신약신학」1, 2 레온하르트 고펠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신약의 기독록」 오스카 쿨만 나단 
「신약의 윤리적 비전」 리처드 헤이스 IVP 
「신약해석학」 하워드 마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요아킴 예레미아스 한국신학연구소 
「예수와 바울」 김세윤 두란노 
「예수와 하나님 나라」 G. R. 비슬리-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노만 페린 솔로몬 
「요한계시록 신학」 리처드 보쿰 한들 
「하나님 나라의 도래」 헤르만 리델보스 생명의말씀사 
「하나님나라 방정식」 존 팀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교회란 무엇인가」 H. 큉 분도출판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IVP 
「기독교 강요」 칼빈 생명의 말씀사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대한기독교서회 
「나와 너」 마르틴 부버 대한기독교서회 
「루터 선집」 마틴 루터 컨콜디아 
「세속도시」 하비 콕스 대한기독교서회 
「신앙과 정서」 조나단 에드워즈 지평서원 
「신의 도성」 어거스틴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조직신학」 벌코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웨인 그루뎀 은성 
「조직신학」 찰스 하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폴 틸리히 한들출판사 
「존 머레이 선집」 존 머레이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칼빈주의 강연」 아브라함 카이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하나님을 아는 지식」 J. I. 패커 기독교문서선교회 
「하나님의 모략」 달라드 윌라드 복있는사람 
「하나님의 아들」 M. 헹엘 대한기독교출판사 
「하나님의 큰 일」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해방신학」 G. 구티에레즈 미래사 
「희망의 신학」 J. 몰트만 현대사상사 


교회사 

「간추린 미국장로교회사」 제임스 스마일리 대한기독교서회 
「개신교역사와 신학」 박건택 개혁주의신행협회 
「교회사 100대 사건」 케네스 커티스외 생명의말씀사 
「기독교신앙과 역사이해」 로날드 H. 내쉬 성광문화사 
「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로날드 H. 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새롭게 조명한 초대교회의 역사」 J. 포스터 웨스트민스터출판사 
「세계교회사」(1~3) 이형기 한국장로교출판사 
「신학사」 벵트 헤그룬트 성광문화사 
「신학의 역사」 앨리스터 맥그레스 지와사랑 
「에큐메니칼 교회사3」 레이문트 콧체·베른트 묄러 한국신학연구소 
「역사와 진리」 폴 리쾨르 솔로몬 
「요세푸스」 클론 L. 로저스 엠마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은성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존 우드브리지 횃불 
「종교개혁사」(Ⅰ,Ⅱ) 토마스 린제이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부 
「종교개혁사」 오원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존 칼빈 솔로몬 
「중세교회사」 윌리암 R. 캐논 기독교문서선교회 
「중세교회사」 R. W. 서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헨리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은성 
「중세교회사」, 
「현대교회사」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I.C. 헤네르 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회사」 민경배 연세대학교출판부 
「현대교회사」 J .H. 니콜스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사 사상시리즈1/ 칼 바르트 엠마오 공동체, 국가와 교회」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브루스 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설교학 

「건축술로서의 강해설교」 김서택 홍성사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이레서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브라이언 채플 은성 
「목사님, 설교가 아주 신선해졌어요」 브루스 모힌니 베다니출판사 
「목사와 설교」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김남준 두란노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성서의 문학 유형과 설교」 토마스 롱 대한기독교서회 
「언어의 직공이 되라」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프리칭 예수」 칼스 L. 캠펠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생명의샘 


목회상담학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죠이선교회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 H. 노먼 라이트 죠이선교회 
「목회상담과 상담목회」 오성춘 쿰란출판사 
「목회상담신론」 하워드 클라인벨 한국장로교출판사 
「목회상담학」 제이 E. 아담스 총신대학교출판부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두란노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빗 A. 씨맨즈 두란노 
「신학과 목회상담」 드보라 벤 두젠 헌싱거 한국심리치료연구회 
「우울증상담」-기독교상담시리즈13 아치볼드 D. 하트 두란노 
「인간이해와 상담」 로렌스 J. 크렙 두란노 
「죄책감과 은혜」 폴 트루니에 IVP 
「크리스챤 카운슬링」 게리 콜린스 두란노 


선교학 

「21세기를 향한 한국선교의 비전」 정민영 외 IVP 
「교회는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패트릭 존스톤 WEC출판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IVP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 조종남 편저 IVP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찰스 벤 엔겐 두란노 
「문화 속의 종교」 유진 나이다 로고스 
「문화적 갈등과 사역」 셔우드 링엔펠터, 죠이선교회 마빈 메이어스 
「미션 퍼스펙티브」 랄프 윈터, 스티븐 호돈 예수전도단 
「변화하고 있는 선교」 데이비드 J. 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선교사가 되려면」 오스왈드 스미스 생명의말씀사 
「선교사열전」 루스 터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허버트 케인 두란노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허버트 케인 나단 
「선교와 문화인류학」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선교학 개론」 J. H. 바빙크 성광출판사 
「선교현장 이야기」 레나 테일러 IVP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세계 기도 정보」 패트릭 죤스톤 죠이선교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허버트 케인 죠이선교회 왜 되어야 하는가」 
「현대의 자비량 선교사들」 크리스티 윌슨 순출판사 
「화해의 아이」 돈 리챠드슨 생명의말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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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 “잘되는 삶이란?”

 

[강연 발췌]

 

건강한 인생의 기술

건강한 인생을 찾는 그리스 사상에 대한 루카복음의 해답

2009년 09월 22일 (화) 00:47:38 배은주 기자  ejb63@hanmail.net

 

9월 20일, 서울 동성중고등학교 강당에서 열린 안셀름 그륀 신부의 강연 2부
<건강한 인생의 기술 - 건강한 인생을 찾는 그리스 사상에 대한 루카복음의 해답>을 발췌해서 싣는다.
-편집자

 

 

   
▲동료 수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한상봉)

 

루카는 예수를 정의로운 사람으로 보여주었다. 마르코사가는 십자가에서 숨을 거둔 예수를 백인대장의 말을 인용하여 ‘이 사람은 참으로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루카는 예수를 ‘이 사람은 참으로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수 탄생 전 400년 전, 플라톤은 이 세상에서 가장 정의로운 사람이 있다면 그는 도성에서 쫓겨나고 매질당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스 교부학자들은 루카가 그리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정의로운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이루었다고 말한다. 

예수의 정의로운 마음은 아무리 악한 사람도 미워하지 않았다. 십자가에 자기를 못 박는 이들을 위해 ‘저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모른다’며 하느님께 기도를 올리기까지 한다. 

예수 안에 정의의 관점은 모든 대립으로 나타난다. 그리스 사람들은 정신과 육체, 사랑과 미움 등 대립을 두고 두려워했다. 루카사가는 서로 반대되는 면을 보여준다. 서로 반대되는 것은 예수 안에서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루카에 따르면 사람은 훌륭한 존재지만 자기의 참된 물질에서 멀어졌다. 그래서 예수가 세상에 와야 했고 거기에서 신적 힘을 찾는다. 예수가 세상에 온 이유는 사람이 다시 일어서기 위해서다. 

   
 ▲안셀름 그륀 신부(사진/한상봉)

루카는 의사였다. 루카복음 전체는 치유하는 말씀이 들어있다. 예수는 안식일에 병을 고쳤다. 사랑의 본질에 따라 회복시키는 것을 보여준다. 그리스 사람에게는 선한 사람의 이상이 있었다. 루카에 의해 사람이 원래 가지고 있는 아름다움을 보여준 것이다. 예수는 나자렛 회당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사람을 치유한다고 말했다. 사람들의 병, 앞을 못보는 사람, 중풍 등을 고쳐주었다. 

예수는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상처를 치유한다. 예수는 최초의 가정의사였다. 예수는 부모에게나 자녀에게 책임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는 치료함으로써 부모와 자녀 사이에 일어나는 어려운 일을 해결했다. 

예수는 잘되는, 성공하는 삶을 인도한다. 그리스철학은 이런 목적을 두고 있다. 바로 삶의 기술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는 삶을 위한 인도자라는 명칭을 썼다. 이것을 잘되는 삶을 위한 인도자라고 번역할 수 있다. 잘되는 삶을 몇 가지 관점에서 설명하겠다. 

첫 번째, 내적인 원수와 화해하라


예수가 우리에게 남긴 비유를 인용할 수 있다. “어떤 임금이 다른 임금과 싸우러 가려면, 이만 명을 거느리고 자기에게 오는 그를 만 명으로 맞설 수 있는지 먼저 앉아서 헤아려 보지 않겠느냐? 맞설 수 없겠으면, 그 임금이 아직 멀리 있을 때에 사신을 보내어 평화협정을 청할 것이다”(루카14,31). 이것은 원수를 친구로 바꾸자는 것이다. 여기서 원수란 질투, 불안, 너무 예민함을 말한다. 자기 마음 속에 있는 문제와 싸울 때 반대하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더욱 에너지를 소비하게 된다.  

하나의 예로 공포를 들 수 있는데, 공포와 싸우지 않고 대화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 공포가 나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 혹시 공포는 내 삶에서 기본적으로 틀린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공포를 두고 배울 수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내가 많은 권력을 주는 것이다. 공포가 생기는 목적은, 사람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으로부터 나를 보는 것이다. 공포와 좋은 관계를 맺어 하느님께로 가게 된다. 

두 번째, 죄의 관점이다.


우리는 너무 죄를 강조해 왔다. 죄부터 가르쳤다. 루카는 그렇지 않다. 좋은 사람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죄를 짓게 된다. 루카 복음서에서는 죄의 문제에 관해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지 ‘부정한 종지기’를 예로 보여준다. 종지기는 채무자를 불러 그중 얼마를 탕감한다. 그런데 우리를 위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진 죄에 대해 모든 것을 내야하는 입장이 아니다. 하느님이 모두 용서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자기 죄를 의식하면서 남과의 관계도 의식해야한다. 내가 죄를 졌고 남도 죄를 졌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도 나누어야 한다. 그래야 내가 남의 집에 들어갈 수 있고 나도 내 집에 들어갈 수가 있다. 양쪽에서 서로를 쳐다볼 수 있다.

현대 사람들은 죄에 대한 태도가 부족해 보인다. 독일의 유명한 한 사업가는, 매스콤에서 자신을 비판하는 소리에 자살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자살사건을 생각하더라도, 한국에서도 치유가 부족한 것 같다. 
예수 안에서 죄의 문제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죄를 모른 체하거나 합리화시키는 게 아니라, 죄의 용서, 하느님의 자비를 믿는 게 중요하다. 

세 번째, 재물과 세상과의 관계다.


루카는 복음에서 교육수준이 높은 사람뿐 아니라 상인들과 땅주인들에게 글을 썼다. 그들이 직업을 그만 두고 재물을 바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루카는 재물의 이용을 세 가지로 정리했다. ➀재산을 나누어라. 재산을 나누어 연대를 보여주는 것은 중요하다. ➁재산이나 소유의 문제에서 내적으로 자유로워라. ➂세상의 재물을 다루는데 충실하라. 이 세상의 재물은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중심은 사람의 영혼이다. 재물에 대한 좋은 자세는 예수의 가르침에 따라 살 때에 결정된다. 

마지막으로 삶을 위한 결정이다.


그리스 신화에 갈림길에 선 헤라클레스가 있다. 때가 되면 삶의 방향을 결정해야 한다. 결정해야 할 문제는 진복팔단에 나타난다. 루카복음에는 행복선언 네 가지와 불행에 관한 선언도 네 가지가 나온다. 삶과 예수를 따라야 하는 것을 결정할 때, 사람들이 삶이 어렵다고 한다. 그런 사람에게 이렇게 권한다. “오늘은 내가 삶을 결정한다.” “삶을 내가 선택한다”라고. 좋은 길을 가더라도 여러 시련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루카는 말한다. 

공자와 그리스 사람들, 그리고 예수에 따른 삶의 기술을 비교할 수 있으면 좋다. 같은 점을 알 수 있고, 그리스도교 사상과 반대되는 것도 찾을 수 있다. 이 두 가지, 연결과 반대되는 점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 철학을 우선 인정하고 좋은 점을 받아들였다. 그러다가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한다. 그리스 사람들이 따라갈 수 없는 십자가와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교의 풍부한 지혜를 찾을 수 있다. 십자가와 부활은 아무리 어려움이 있더라도 희망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무리 큰 어려움도 빛으로 변할 수 있음을 말해준다. 십자가와 부활의 메시지는 사람의 가슴 속에 아무리 문제가 많아도 달라지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역사와 전통에서 나오는 지혜와 성경의 지혜가 합해져서 참된 기쁨을 찾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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