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한손에는 성서'에 해당되는 글 192건
- 2011.09.01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인간과 하나님처럼 되려는 인간- 본회퍼
- 2011.09.01 하나님의 이름
- 2011.09.01 크리스챤 파워 블로거
- 2011.09.01 [스크랩] 네 꿈에 미쳐라
- 2011.09.01 [스크랩] [마태복음 26:36~46]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 2011.09.01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인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을 위한 서설(序說) / 김회권
- 2011.09.01 새해 벽두에 읽는 아모스 - '복음'으로 '상황' 읽기의 성경적 모범 / 김회권
- 2011.09.01 왜 우리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읽어야 하는가? / 김회권
2009 청년부 특새(조성광 목사)
여호와 이레
창22:1-4
1. 예배의 장소이며 예배의 명령을 따라가는 자에게 선물
공의, 인자, 사랑, 하나님과 동행 -> 순종으로 예배
2. 순종하는 자에게 주시는 선물(바치라, 멈추라)
삼일길- 감정의 아픔, 모든 추동이 사라지고 고민을 이겨내고 순종
막다른 길. 내 지혜가 포기. 하나님이 상화 개입. 만드시고 여시도록 맡김.
여호와라파
출15:22-26
예배하기 위해 사흘길을 걸어 광야에 왔다. 그러나 예배는 커녕 쓴 물.
원망 vs 하나님께 부르짖음.
칠칠절- 율법 받음 -> 신약 오순절. 성령받음.
율법 지키는 것은 성령을 따라 사는 것이다. 치료를 맛보라.
신7:12-15. 질병, 죄, 죽음에서 치유
여호와 닛시
출17:8-16
1. 하나님이 빽이다. 지휘하신다. 뒤에 함께 계신다.
2. 하나님께 집중하라. 예수님은 하나님께 집중하셨다. 예수, 십자가 집중.
3. 너희가 바로 하나님의 대표선수이다. "맞서 싸워라" 우리 어깨 위에 예수 이름이 걸려 있다.
요16:32-33 십자가를 견디고 싸워라.
여호와 샬롬
삿6:11-24
1. 소심함 안에 안심을 주신다. 맞서 싸울 때 주시는 것.
2. 그 힘은 내 안에 있다.
3. 그 힘을 이미 너에게 주었다.
식사 -> 제사
에벤에셀
삼상7:3-14
에벤에셀은 두번이나 피했던 장소이다(실패했던 자리).
세상의 신, 방식을 버리라. 기도와 금식. 회개.
온전한 예배를 드리고 기도를 한다. 전투 준비가 안된 상황.
엘로이 ->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
창16:1-13
제거되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살펴보신다.
돌아가라. 떠나지 말고 거기서 버텨라. 그럴 때 너를 통해 민족을 이루셨다.
엘 샤다이 -> 전능한 하나님
창17:1-8
하나님의 사람, 자녀, 택하신 자에게 얼마나 많은 것을 줄 수 있는지 드러내고 싶어서.
엘 샤다이의 기원은 가슴, 자궁이다. 자궁은 태아에게 충분하다. 감싸안고 공급한다.
구십 구세 때에 모든 것을 포기할 때에, 약속을 잊고, 기도하지 않을 때에 약속 주심. 4절이하
의무를 주심. 너는 내 앞에 순종하여 흠이 없어라. 거룩하라. 나를 향한 정절 지키라.
야웨- 스스로 있는자
출3:1-5, 13-14, 11-12
떨기나무. 연약한 자에게 임하신 하나님
내가 거기에 함께 있었다. 내가 거기에 함께 있으리라. 여호와 삼마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사7:1-17
하나님을 시험치 않겠나이다. 불신앙. 해주셔도 좋고 아니어도 좋고.
만져주시기를. 강하게 붙드시기를 요청해보아야 하지 않는가?
임마누엘은 심판의 아이였다. 그날이 오는 것 막을 수 없다.
사41:9, 10. 사43:2
예수-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마1:18-25
히12:2 예수님의 즐거움은 피조물이 구원받는 것이다. 참된 생명을 얻는 것이다. 우리도 참된 기쁨을 위해 십자가, 부끄러움을 참아야 한다.
네 꿈에 미쳐라
김상훈 (지은이) | 엠에스디미디어(미래를소유한사람들) | 2007-02-15
안철수는 서울대 의대를 졸업했지만 의사 가운을 벗어던지고 컴퓨터 바이러스 연구소를 세웠고, 안철수연구소를 국내 최고의 벤처기업으로 성장시킨 인물이다. 2005년 회사 경영에서 한발 물러선 뒤 미국에서 '제2의 인생'을 준비 중인 안철수가 오랜만의 침묵을 깨고 우리 사회에 새로운 메시지를 던졌다.
이 책은 안철수의 성장과정부터 최근까지의 모습을 제3자의 눈으로 그리고 있다. 어린 시절부터 안철수를 우상으로 생각해온 기자출신 저자가 저널리즘적 시각에서 '인간' 안철수와 '프로그래머' 안철수, '기업인' 안철수를 다각적인 측면에서 분석해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인간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전달한다.
책 표지 글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에 대한 글이나 기사를 꽤 많이 접해온 편인데도 아직도 저에 관한 새 글을 대할 때마다 쑥쓰럽고 불편합니다. 이는 마치 혼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주위가 소란스러운 것 같아 둘러보니 숨낳은 사람들이 일제히 제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글이나 저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할 때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죠.
- 안철수
김상훈
1977년 서울출생, 2004년부터 2년 동안 동아일보 경제부의 정보기술팀에서 안철수연구소를 비롯한 IT 벤처기업을 취재했으며, 현재 동아일보 경제부 산업팀에서 경제단체 및 주요 대기업을 담당하고 있다.
- 머리말 : 안철수│미국에서 띄운 편지
- 프롤로그 : 그리고 다시 시작
* 10주년을 맞이하며│안철수가 사장직에서 물러나며 직원들에게 보낸 편지
1장 늘 혼자였던 소년
나의 청소년 시절
2장 대학, 꿈 그리고 부모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아버지 안영모
3장 컴퓨터, 컴퓨터 바이러스와의 만남
프로그래머를 꿈꾼다면│프로그래머와 스타
4장 자고나니 유명해졌다
나의 딸 그리고 할아버지
5장 다시 학생이 되다
남의 눈에 좌우되지 않는 줏대 있는 선택
6장 돈과 명예, 그것만 버리면 선택은 쉽다
좋은 경영자의 조건
7장 컴퓨터 바이러스와의 전쟁
정보보안은 일상적 이슈로 다루어야
8장 그가 떠난 빈자리
우리 시대의 선각자 안철수의 메시지
디지털 시대에 맞는 사고방식
우리는 진정한 인터넷 강국인가?
벤처의 바람직한 인재상과 인재 유지법
전문가에 사회적 배려를
공동의 가치관 정립을 위하여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
CEO의 경쟁력
빌 게이츠 흉내 내기
의료봉사 동아리 활동 시절
안철수연구소의 필생 가치
전문가를 믿지 말아야 하는 이유들
행복의 조건
- 안철수연구소가 밝히는 컴퓨터 보안 10계명
안철수 박사의 語錄...
오피러샤 | 2009-10-15
무릎팍도사에서 안철수 박사가 이야기한 감동과 교훈이 되는 어록을 모아 봤습니다. 최고의 게스트였다는 찬사가 쏟아지고 있습니다. 심지어 나라를 구한 안철수 장군이라고 언급하는 네티즌들도 있더군요. 하하하..순서에 관계없이 모아본 안철수 어록입니다.
"자기에게 정말 맞는 분야를 찾기 위해 쓰는 시간은 값진 시간인 것 같아요. 자신에게 기회를 주는 게 가장 중요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고 어떤 일을 하면 재미있는지 그런 것을 알 수 있는 기회를요."
"많은 사람들이 요즘 젊은이들은 안전지향적이다 도전정신이 없다 그러는데, 학생 개개인이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그런데 사회가 안전지향적인 선택을 할 수밖에 없도록 몰아세우고 있어요. 미국 실리콘밸리는 성공의 요람이 아니라 실패의 요람이에요. 100개의 기업 중 하나만 살아남지요. 하지만 실패한 기업이라도 도덕적이고 문제가 없다면 계속 기회를 줍니다. 계속 실패하더라도 한 번 1000배 성공하면 그동안의 고통을 모두 갚고도 남음이 있지요. 실패한 사람이라도 계속 기회를 주는 그쪽이 젊은이들의 도전정신을 만드는 곳입니다."
"학생 때 가장 심했던 일탈이 성룡 영화를 본 거예요. 선생님께 거짓말을 했으니까요."
"저는 학창시절 공부 못하는 아이였어요. 종이에 씌인 까만 글자는 모두 읽어야 속이 풀릴 정도로 책을 즐겨 읽었다. 저는 활자중독증이었던 것 같아요. 반에서 30등 정도 했어요. (책을 읽다보니) 고등학교 3학년 끝날 때 처음 1등을 했어요."
"효율성 측면에서 보면 저는 가장 비효율적인 사람이죠. 효율적안 면만 따진다면 저 같은 삶은 '실패한 인생'이라 봐야 하거든요. 그래서 인생은 효율성이 다가 아닌 것 같아요. 그래서 자기가 정말로 맞는 분야를 찾기 위해서 쓰는 시간은 저는 값진 시간 같습니다"
"군대에 가는 날 새벽까지도 백신 만들어 놓고 입대했는데요. 군대 내부반에서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듣다보니 가족들에게 (그 날) 군대 간다는 말을 하지않고 왔더라구요."
"저는 직원들 모두에게 존댓말을 썼어요. 부부싸움도 존댓말로 합니다. 가장 힘들었던 게 군대에서 대위로 있었을 때 사병들에게 반말을 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많이 쓴 말이 '이것 좀 해줄래... 요?'였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 어릴 때부터 저에게 존댓말을 쓰셨습니다. 고1 때 어느날은 택시를 타는 저에게 "안녕히 다녀오세요"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을 들은 택시기사 분께서 '저런 부모님 없다'며 '어머니께 잘 하라'고 하셨습니다."
"남들 앞에서 화내본 적은 없어요. 욕은 못해요. 하지만 저 스스로에게는 화가 나기도 해요. 제가 잘못한 부분에 대해서... 욕실에서 샤워하다 혼자 고함을 지른 적도 있어요."
"그렇게 참으로면서 행복하냐고 물으시는 분들이 있더라구요. 그래서 그 질문받고 생각해 봤는데요. 제가 참으면서 산 기억이 없더라구요. 사람이 1~2년은 참아도 20년을 어떻게 참겠어요? 전 오히려 마음 편한 대로 산 타입이거든요. 오히려 저는 정말 돈보다 명예가 중요하고 명예보다 제 마음 편한 게 더 중요해요."
<화도 안내고 참으면서 사는 것이 행복하느냐는 질문에>
"저는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씁니다. 회사에 있어서 CEO라는 게 제일 높은 사람이 아니라 단지 역할만 다른 사람입니다. 우리는 다 수평적인 사람이고, 당신은 당신이 하는 일이 있고, 나는 대외적으로 회사를 대표해서 하는 일이 있는 역할 분담만 다른 것이지 전혀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게 제가 가진 기본적인 생각입니다."
"지금은 술을 끊었지만 대학 다닐 때는 많이 마셨습니다. 과로로 건강을 상한 다음부터 완전히 끊었지요. 요즘 직원들이나 사람들을 만나면 저를 술 못 마시는 사람인 줄 압니다. 조금 억울하기도 해요, 저도 술 잘 마셨는데..."
"저의 경영철학은 조직에 영혼을 불어넣는 것이었어요. 조직에 영혼을 만들 수 있으면 제가 떠나도 영원히 변치 않는 회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죠."
"지금 의사를 했으면 아마 더 행복했을 것 같아요. 지금보다는 더 단순하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렇다고 의사 그만둔 것을 후회하지는 않아요. 지금 훨씬 다채롭게 사는 게 좋아요."
"7년 정도를 계속 두가지 일을 했는데요. 그 때 고민이... 결국은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그런 상황이 됐죠. 의대 쪽으로는 계속 있었으면 지도학생을 받아야 하는데요. 그런데 생각해보시면 지도교수가 학생 몰래 새벽에 일어나서 딴 짓하고 있으면 지도학생이 너무 불쌍하잖아요. 자기 인생 걸고 저한테 온 사람인데..."(낮에는 의사로, 새벽에는 백신 개발하던 시절에 왜 의사를 그만 두었느냐는 질문을 받고)
"사실 '운이라는 것은 기회가 준비와 만났을 때이다'라는 표현이 있거든요.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람에데 기회가 오는데요. 준비된 사람만이 그 기회를 자기 것으로 가질 수 있다는 거죠. 어떤 사람이 성공했다는 것은 분명히 그 사람이 재능도 있고 그리고 열심히 했고 운이 좋아서 성공했겠죠. 그런데 그것 말고도 사회가 그 사람에게 준 기회는 인정을 해야 합니다. 그 기회 때문에 또 다른 사람들은 기회를 못가질 수도 있으니까요. '100% 성공을 개인화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머리가 좋고 개인적인 성공만 추구하는 사람이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되는가를 심각하게 생각해봐야 한다는 거죠."
"경찰도 그렇고 군인도 그렇고 저희 같은 보안회사도 그렇고...내가 왜 이 일을 하는지에 대한 그런 의식이 참 중요한 것 같은데요. 사명감이 중요하죠."
"항상 보면 어려운 방법이 최선인 경우가 많더라구요."
"새벽에 어떤 분이 전화를 해서 컴퓨터가 안된다고 하는 거예요. 새벽에 남의 집에 전화할 정도면 얼마나 괴로웠겠어요. 그래서 저도 하나하나 차근차근 알려주죠."
아래는 안철수 박사가 다른 곳에서 한 어록입니다. 좋은 이야기인 것 같아서 발췌해 왔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 좋은 교훈이 될 수 있는 어록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제가 차라리 같은 서울대라도 경영대나 공대를 나왔으면, 벤처기업으로 더 빨리 진입해 더 잘 됐을 거라는 덕담도 하십니다. 하지만 제 생각은 좀 다릅니다. 열심히 공부하고 봉사진료도 다니면서 의대 생활을 치열하게 했기 때문에 지금의 제가 있다고 봅니다. 지금 제게 의학지식은 거의 남아 있지 않지만, 열심히 살았던 삶의 태도는 제 피 속에 녹아 몸 속에 흐르면서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지식은 유한하지만 치열한 삶의 방식은 평생 갑니다."
"나는 우주에 절대적인 존재가 있든 없든, 사람으로서 당연히 지켜나가야 할 중요한 가치가 있다면 아무런 보상이 없더라도 그것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세에 대한 믿음만으로 현실과 치열하게 만나지 않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는다. 또 영원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살아있는 동안에 쾌락에 탐닉하는 것도 너무나 허무한 노릇이다. 다만 언젠가는 같이 없어질 동시대 사람들과 좀더 의미있고 건강한 가치를 지켜나가면서 살아가다가 별 너머 먼지로 돌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이라 생각한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 그것이야말로 평범한 두뇌를 지닌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전 미래에 대한 전망같은 건 하지 않아요. 덧없다고 생각해요. 지금 인기 좋은 게 나중에도 인기좋으란 법은 없잖아요. 매 순간 열심히 살다보면 저절로 길이 보이는 것 같아요. 운이 좋아 좋아했던 일이 유행을 탄다면 부자가 되겠지요.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 정도 실력이 되면 먹고사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어요."
안철수 어록은 더 많이 있지만 이만 줄입니다. 사람들은 이 시대에 존경할 만한 어른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주변을 잘 둘러보면 존경할 만한 스승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남 탓 하는 버릇이 많습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모든 일들은 자신을 먼저 반성하는 자세부터 출발입니다. 안철수 박사를 모두가 그대로 따라 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각자 스스로 가치있는 삶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와 열정이 변치않고 계속 된다면 최소한 자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는 나름대로 의미있는 인생의 역사가 되리라 봅니다. 존경받는 사람들이 많은 사회를 만드는 노력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 모두 각자가 변하면 시대정신이 됩니다. 남 탓하기 앞서 자신부터 돌아보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합니다.
너무 흔해서 힘을 잃어버린 가치를 되살려주는 책
weirob | 2007-03-04
잭웰치나 스티브잡스 같은 사람들 얘기도 좋지만, 아무래도 먼 나라 사람의 이야기는 그저 먼나라 이야기처럼 여겨집니다. '이런 점은 훌륭하군... 나도 배워야겠어...'라는 생각이 들다가도 '이 나라는 이런게 먹히는구나... 그런데 우리 나라여도 이게 가능했을까?' 와 같은 의심이 꼬리를 물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 기업인 안철수씨의 얘기는 몇가지 점에서 제게 시사하는 바가 컸습니다.
무엇보다 '그것이 무엇이든 자기 스스로가 가치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해야만 행복도 성공도 따라올 수 있다'는 점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이것은 어찌보면 너무 흔해 빠진 얘기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살지 못합니다. 그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요.
'왜 스스로 가치를 느끼는 일을 해야만 하는가?'하는 문제는 시절이 좋을 때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누구나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되고, 이때는 그 문제가 드디어 문제로 드러나게 됩니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과 그저 그 일을 하는 사람은 어려움에 대처하는 자세가 다릅니다. 적당히 공부하고 적당히 직장생활을 했던 사람은, 조금만 힘든 일이 생겨도 도망가기 일쑤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인가는 더이상 도망갈 데가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지요. 하지만 스스로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다릅니다. 마치 사랑의 힘으로 모든 고난을 해결하는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이, 꿋꿋하게 그것에 맞서고, 이겨내고야 말지요.
어쨌든 저는, 이 책을 여러 권 사서 여러 사람들에게 선물을 했습니다. 개그맨이 꿈이라는 초등학생, 공부는 무지 잘 하는데 딱히 하고 싶은 게 없다는 중학생, 그리고 숭고한 가치가 있는 일이지만 지난 10여년간 죽어라 고생만 해야했던 우리 회사 사장님 등등...
이미 꿈이 있는 사람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할지 모르는 사람, 꿈이 있고 최선의 노력을 다 하고 있지만 좋은 날이 보이지 않아 심란한 사람, 또 반대로 꿈이 없어서 뭘 해야할지 고민인 사람 모두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안철수에 대해 더 감동을 받는 책
fes1 | 2009-07-28
<컴퓨터 병을 고치는 의사 안철수>라는 동화책을 먼저 읽었습니다. 무릎팍 도사를 본 주변 선생님들이 하도 감동을 받았다길래, 녹화를 해서 보고 학생들에게도 보여줬습니다. 그리고 나서 안철수에 관한 동화책을 읽었는데, 무릎팍 도사의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져 있더군요. 거의 무릎팍 도사의 내용과 유사하지만 배경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책이었다는 거예요.
그리고 나서 이책을 읽었는데, 기자가 쓴 책이라 그런지 동화보다 좀더 구체적인 내용이더군요. 전체적인 틀은 거의 변함이 없지만 좀더 자세한 내용을 담았고, 안철수가 쓴 서문에서는 부끄러움이 배어나왔습니다. 그리고 책의 끝머리에는 안철수의 여러 주제에 관한 간단한 글이 실려 있었습니다. 아마 잡지나 그런 매체에 기고한 글이 아닌가 싶은데 기고한 매체와 날짜가 나와있지 않아 좀 아쉬웠습니다. 한가지 분명한 건, 참으로 독특하고 올바른 그런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저도 꼭 본받아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긍정적이고 원칙을 지켜나가는 쉽지 않은 길을 걸었지만 신념을 가지고 밀고 나간 그의 외유 내강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냅니다. 그가 평생을 살았던 방식대로 책에서 먼저 경험하고 실전에 들어가는 자세를 저도 본받고 보다 도덕적인 삶을 저도 추구하고 싶습니다.
네 꿈에 미쳐라 (인간 안철수. 그의 원동력은?
무소유 | 2009-10-10 22:06
“개인적으로는 저 자신에 대한 글이나 기사를 꽤 많이 접해온 편인데도 아직도 저에 관한 새 글을 쓸 때마다 쑥스럽고 불편합니다. 이는 마치 혼자서 열심히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데 어느 순간 주위가 모두 소란스러운 것 같아 둘러보니 수많은 사람들이 일제히 제가 공부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깨닫게 되는 기분입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글이나 저에 대한 언론보도를 접할 때면 스스로를 채찍질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스스로 책임감을 느끼게 되고,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죠.” -미국에서 띄운 편지 중-
잘하는 운동도 없었고, 희멀건 했던 외모를 가진 어린 시절의 안철수는 주위의 친구들에게 ‘흰둥이’라고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그에게 의지가 되었던 유일한 친구는 병아리였고, 병아리 친구와의 비극적 사건 이후에 그의 유일한 벗은 책이 되었다.
그가 얼마나 책에 미쳐있었는지는 근처 도서관의 책을 빌리고 반납하는 행동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반복하다보니, 도서관 사서가 ‘얘가 책의 뒷면에 이름을 남기려고 빌려가는구나.’라고 오해했다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이처럼 책에 미쳐있던 그는 책을 통해서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은지, 어떤 일을 잘 할 수 있는지 스스로 탐색해나가는 과정이었다고 고백한다.
물론 그는 처음에는 책을 통해서 하고 싶은 일을 발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각종 기계들을 분해하고 조립하면서 컴퓨터와 같은 기계와 익숙해졌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 가지고서는 지금껏 그가 이루어낸 성과들을 설명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듯싶다.
그는 고등학교 때까지 썩 뛰어난 학생이 아니었지만 결국 서울대 의대에 합격했다. 그 고된 대학생활과 레지던트 생활을 하면서도 국내 최초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을 개발하는데 성공했다.(인생의 여인을 만나는데도 역시 성공했다. 그것도 한방에)
‘안철수 연구소’라는 회사를 차려서 연간 순수익 100억 원이 넘는 회사로 발전시키는 일에도 성공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경영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을 위해서 다시 새로운 공부를 하러 떠나고……. 책에서는 유학생활의 결과에 대해서는 이야기 하지 않고 있지만 현재는 화려하게 교수로 컴백한 안철수. 대체 이 사람이 가질 수 있었던 무한한 능력의 원동력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이 책 <네 꿈에 미쳐라>라는 책은 안철수 그의 자서전은 아니다. 그를 옆에서 취재했던 김상훈 기자가 보고 들은 이야기들을 전기식으로 재구성해 엮은 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내용과 함께 안철수 자신이 직접 참여한 공간도 이 책에서 찾아볼 수 있다. 뒷부분 선각자 안철수가 하는 이야기는 지금의 관심사인 경영부분에 상당부분 많이 치우쳐있어서 CEO가 되고 싶은 이들에게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이야기들을 담고 있다.
한 없이 보통사람인 내가 책을 모두 다 읽은 뒤에 느낀 소감을 이야기해보라 한다면 참으로 우직한 사람이라고, 그저 대단한 사람이라는 정도의 말 밖에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특히, 어떤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다른 분야의 일도 과정이 비슷하기 때문에 쉽게 해낼 수 있다는 그의 이야기는 어떤 분야에서도 전문적인 경과를 만들어내지 못한 나에게 있어서 마치 도교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은 ‘무’에서 비롯되었다‘라는 말과 같은 의미로 해석될 따름이다.
하지만 마냥 감탄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 이런 성과를 이루어냄에 있어서 중요한 비결은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밝혀내서 나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 책 속에서 그 비결을 찾아봤는데 내가 생각하기에는 비결은 바로 ‘기본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대입을 앞둔 다른 친구들은 문제집을 얼마나 많이 풀어내느냐를 경쟁했다고 하는데, 그 시기의 안철수는 영어의 기초가 되는 단어를 중점적으로 파고들었으며, 수학 같은 경우에는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확실히 기초를 다지고 난 이후에야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고 이야기한다.
나중에 백신을 개발할 당시에도 컴퓨터에 관련된 언어라든지, 프로그램에 대한 이해를 숙지한 이후에 다음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그리고 경영에 관련해서도 체계 없이 지휘하지 않았고, 서재에 꽂힌 각종 경영전문 서적을 탐독하면서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 끊임없이 탐구해나갔다고 한다.
몇몇 사람은 학창시절에 그런 식으로 공부를 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며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나도 이 책만 가지고서는 그가 어느 정도까지 기초를 다졌는지에 대해서 자세히는 알 수 없지만 그의 기초에 대한 만족도는 보통사람이 생각하는 만족도 이상으로서의 기초를 다지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를 풀어낸 앤드루 와일즈의 경우에도 300년 간 풀리지 않고 있던 그 정리를 풀어내기 위해서 수학적으로 필요했던 지식의 도구를 갈고 닦기 위해서 평생 수학자의 삶을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7년의 기간 중에 절반이상의 시간을 바쳤음을 이야기한다.
지금은 카이스트의 석좌교수가 된 안철수 교수는 어떤 어려운 상황과 어려운 공부를 함에 앞서서 다음과 같은 마음가짐으로 임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기본기의 확립과 더불어 그를 완성시켜낸 무서운 집념의 근원지라고 할 수 있다.
“어떤 문제에 부딪히면 나는 미리 남보다 시간을 두 세 곱절 더 투자할 각오를 한다고. 그게 당신이나 나처럼 평범한 두뇌를 가진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야. 시간을 투자해 봐. 길이 보일거야.” -88쪽-
무조건 빨리 해야 하고 남들이 하는 진도에 따라서 움직여야 하는데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은 그의 이야기를 새겨들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돌아서가라는 선조의 가르침도 이와 다를 바 없다. 정확성과 확실성이라는 능력을 키우기 위한 시간적 투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것으로 체득되어 아마도 지금의 안철수와 같은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 생각된다.
결국 지금의 안철수를 만들어 낸 경험치는 그의 인생의 대부분을 자신의 능력 향상에 힘써온 결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처음에는 그도 우리와 같은 일반인이었지만, 남들과는 다른 멀리 볼 수 있는 그리고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열심히 공부할 수 있었다. 그가 만들어낸 굳건한 지식의 탑과 실전으로 체득한 경험의 탑. 양쪽의 탑으로 떠받혀진 그가 완성되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그리고 그런 든든한 양방향의 탑이 있기 때문에 어떤 분야로서의 시도를 함에 있어서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지지 않고 그 탑의 일부분을 이루고 있는 벽돌과 같은 모양새로 또 다른 분야의 탑을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우리에게 당부한다. 뜨거운 가슴과 차가운 머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라고……“아무리 어려워도 결국에는 성공할 거라는 믿음을 잃지 않으면서, 동시에 그것이 무엇이든 눈앞에 닥친 현실 속의 가장 냉혹한 사실들을 직시하는 것이 개인이든 기업이든 성공할 수 있는 근본적인 사고방식이다.” -212쪽-
냉정한 현실인식, 과거에 대한 자기반성, 현실에 근거한 치밀한 사업계획, 구체적인 결과를 이끌어내는 현장 경영과 더불어 결국에는 성공할 것이라는 믿음과 열정. 이것이 바로 그가 실행하고 있는 경영자의 비법이요. 인간 안철수를 만들어낸 또 하나의 비법일 것이다.
날짜: 2010. 3. 26. 금요일
본문: 마태복음 26장 36절 ~ 46절
영적 상태: 감사…평안…
시작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새 날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주님, 사라도 그랬을까요? 그리고 사라를 바라보는 아브라함의 마음도 이랬을까요? 어떤 때는 정말 왜 이러시나 싶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정말 원망스럽기도 하고, 사람들의 시선은 차치하고라도 이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너무나 마음이 아프기도 합니다. 저희들의 어떻게 해야 주님께서 마음을 돌리실 수 있을는지… 정말 잘 모르겠습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좋을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희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네요. 가끔이 이 부분이 터져 나올 때마다 저희들의 힘으로는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그렇게 받아 넘겨야 하는 상황도 그렇고, 이래저래 참 사는 게 쉽지 않고, 어느 것 하나도 마음대로 되지 않음을 깨닫게 될 뿐입니다. 저희들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을 또 고민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닌데, 저렇게 마음을 쓰는 아내도 안타깝고, 그냥 씩씩하게 생활했으면 좋겠는데, 그런 모습을 보면서 저도 참 마음이 아프네요. 주님, 오늘도 주님의 말씀 앞에 섭니다.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여 주시고, 저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통해서 제 아내의 마음도 어루만져 주시길 소망합니다. 순간순간 가슴을 파는 사람들의 말과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주님의 말씀에 집중하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열심히 주어진 자리에서 그저 최선을 다할 수 있게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개역개정>
36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37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실새 고민하고 슬퍼하사
38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39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하시고
40 제자들에게 오사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시되 너희가 나와 함께 한 시간도 이렇게 깨어 있을 수 없더냐
41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도 하시고
42 다시 두 번째 나아가 기도하여 이르시되 내 아버지여 만일 내가 마시지 않고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거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고
43 다시 오사 보신즉 그들이 자니 이는 그들의 눈이 피곤함일러라
44 또 그들을 두시고 나아가 세 번째 같은 말씀으로 기도하신 후
45 이에 제자들에게 오사 이르시되 이제는 자고 쉬라 보라 때가 가까이 왔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46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새번역>
36 그 때에 예수께저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고 하는 곳에 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어라.”
37 그리고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다.
38 그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 예수께서는 조금 더 나아가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하실 수만 있으시면,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40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너희는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
41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42 예수께서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셨다. “나의 아버지, 내가 마시지 않고서는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십시오.”
43 예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다.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 없었던 것이다.
44 예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로 기도하셨다.
45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어라. 보아라. 때가 이르렀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46 일어나서 가자. 보아라, 나를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
<메시지>
36~38 그러고 나서, 예수께서 그들과 함께 겟세마네라는 동산으로 가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저기 가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 있어라.” 베드로와 세베대의 두 아들을 데리고 가시면서, 예수께서는 심히 괴로워 슬픔에 잠겼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이 슬픔이 내 생명을 꺾어 버리는구나. 여기서 나와 함께 깨어 있어라.”
39 예수께서 조금 더 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 다른 길이 있거든 나를 여기서 벗어나게 해주십시오. 그러나 내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행하십시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40~41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예수께서 베드로게에 말씀하셨다. “단 한 시간도 나와 함께 견딜 수 없더냐? 깨어 있어라. 위험에 처한 줄도 모른 채 유혹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기도하여라. 너는 하나님 안에서 무엇이든 열심히 할 각오가 되어 있다만, 한편으로는 난롯가에 잠든 늙은 개처럼 나른하구나.”
42 예수께서 두 번째로 그들을 떠나서, 다시 기도하셨다. “내 아버지, 이 잔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는 것 외에 다른 길이 없다면, 나는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아버지 방법대로 하십시오.”
43~44 예수께서 돌아와 보니, 이번에도 제자들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도저히 눈이 떠지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께서 이번에는 그들을 자도록 두시고 세 번째로 가서 기도하시되, 똑같은 말씀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기도하셨다.
45~46 예수께서 돌아와 말씀하셨다. “밤새도록 자려느냐? 내 때가 되었다.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간다. 일어나거라! 가자! 나를 배반할 자가 왔다.”
본문의 연구(관찰/연구)
수난을 당하기 전에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아버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지만 예수님과 동행한 세 제자는 기도는커녕 깊은 잠에서 깰 줄을 모릅니다.
(36v)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에 가셔서 말씀하시기를 저기서 기도하는 동안에 너희는 여기에 앉아 있으라고 하심
(37v) 그리고는 베드로, 요한, 야고보를 데리고 가서, 근심하며 괴로워하기 시작하셨음
(38v)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당신의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고, 너희는 여기에 머무르며 깨어 있으라고 하심
⇒ 36~38절 십자가를 앞둔 예수님도 여느 사람처럼 슬퍼하고 괴로워하셨습니다. 고뇌가 깊어 죽을 것 같다고 솔직히 털어놓으십니다. 십자가의 고통과 이 백성의 저주를 대신 지고 아버지께 버림 받을 고통이 두려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함께 깨어 기도해주길 바랐던 제자들마저 한 순간도 깨어 그 아픔과 고뇌를 이해해주지 못했습니다.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고 느끼며 외로이 기도할 때, 주께서 나를 도와주실 수 있는 것은 이 고통을 당해보셨기 때문입니다(히브리서 12장 2,3절).
(39v) 예수님께서는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기도하셨는데, 가능하다면 이 잔을 당신에게서 지나가게 해 주시길 소망하지만 예수님의 뜻대로가 아닌, 아버지의 뜻대로 해주시기를 간구함
(40v)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고, 그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한 시간도 당신과 함께 깨어 있을 수 없느냐고 말씀하심
(41v)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라고 하시면서,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다고 하심
(42v) 예수님께서는 다시 두 번째로 가서 기도하셔고, 이 잔이 당신에게서 지나갈 수 없는 것이라면, 아버지의 뜻대로 해달라고 기도하심
⇒ 39~42절 극심한 고통과 외로움 속에서 주님은 기도하셨습니다. 자신의 무력함을 고스란히 인정하고 하나님의 뜻을 묻고 그 뜻에 순종할 힘을 구하셨습니다. 처음엔 죽음의 잔을 마시지 않고도 아버지의 뜻을 이룰 수 있는 길이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했지만(39절), 나중엔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기도처럼(6장 10절) 어떤 수난을 당하더라도 전적으로 아버지 뜻만 실현되기를 구했습니다. 기도는 나의 바람을 관철시키는 일이 아니라, 나의 순종을 통해 주의 뜻이 이뤄지도록 비는 일입니다. 자기부정과 절대 의존의 기도 없는 십자가의 순종도 없습니다.
(43v) 예수님께서 다시 와서 보시니 그들은 자고 있었고, 그들은 너무 졸려서 눈을 뜰 수조차 없었던 것임
(44v)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그대로 두고 다시 가서, 또 다시 같은 말씀으로 세 번째 기도를 올림
(45v) 그리고 제자들에게 와서 이제 남은 시간은 자고 쉬라고 하시면서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갈 때가 이르렀다고 하심
(46v) 일어나서 가자고 하시면서 당신을 넘겨줄 자가 가까이 왔다고 하심
⇒ 45,46절 죽을 만큼 고통스러우셨던 예수님은 ‘땀이 핏방울 되도록’(누가복음 22장 44절),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리신’(히브리서 5장 7절) 후 아버지의 ‘때’를 향해, 그리고 자신을 잡으려고 기다리는 이들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뜻을 알았고 아버지께서 용기를 주셨기에 가능한 순종이었습니다. 그 길에 우리도 함께 가자고 하시는데, 떠날 준비가 되었습니까?
⇒ 36,40,41,43,46절 죽을 각오가 됐다고 장담하던 세 제자들(20장 22절; 26장 35절)은 육신이 연약하니 시험에 들지 않도록 깨어 기도하라시던 예수님의 명령에는 단 한 순간도 순종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세 제자는 변화산의 영광에는 쉽게 참여했지만, 일어나 예수님과 함께 갈보리산 골고다 언덕 위 십자가까지는 갈 수 없었던 것입니다. 말로 장담하는 신앙이 아니라 손발과 무릎으로 순종하는 신앙으로 주의 부르심에 따라 나섭시다.
본문의 구조(흐름 문장/본문의 명제)
* 흐름 문장 *
1. 습관처럼 가시던 겟세마네 동산에 제자들과 함께 올라가 괴로운 마음을 달래시며 기도에 힘쓰시는 예수님(36~38v)
2. 될 수만 있다면 그 고난의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되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기를 간구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 그러나 그 곁에서 잠을 취해 있는 제자들(39~43v)
3. 같은 말씀으로 기도를 하시다가 이제 인자가 죄인들의 손에 넘어갈 때가 이르렀다고 하시며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하시는 예수님(44~46v)
* 본문의 명제: 너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깨어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메시지
명제: 우리는 주님의 뜻에 온전히 순종해야 합니다…
Keyword: What to do?
대지와 소지:
1. 늘 주님 안에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a. 예수님께서 근심하고 괴로워하며 기도하는 동안에 깨어 있지 못해 잠에 취해 있는 제자들
b. 우리는 주님 안에, 말씀 안에 깨어 있으면서, 날마다 주님의 뜻을 구해야 함
2. 늘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a. 죄인들의 손에 넘어갈 상황이 임박했음에도 습관처럼 기도의 자리로 가시고, 그곳에서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로 들어가시는 예수님
b. 우리는 주님의 뜻을 구하고, 그 뜻에 기꺼이 나의 뜻을 꺾기 위해 날마다 기도에 힘써야 함
3.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고난의 현장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a. 당신의 뜻대로고 아니라, 기꺼이 아버지의 뜻대로 하겠다고 순종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고난의 현장을 향해 당당하게 나아가시는 예수님
b.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상황이 놓여 있을 지라도 주님의 뜻에 순종하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힘차게 나아가야 함
개인적 적용
1. 늘 말씀으로 깨어 있도록 주님과의 깊은 교제에 더욱 더 신경을 쓰도록 하자!!!
2. 아무리 힘들고 어렵더라도 꼭 시간을 정해서 기도의 자리로 나아가도록 힘쓰자!!!
3. 피하지 말고, 회피하지 말고, 주님을 의지하여 당당하게 맞서 나가자!!!
묵상과 기도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말씀하여 주시고, 용기와 힘을 허락하여 주심을 감사 드립니다. 저희들의 상황에 꼭 필요한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보게 됩니다. 기도가 부족하고, 주님과의 교제가 부족했던 저희들을 용서하여 주시고, 당당하게 고난의 현실과 직면하지 못했던 저희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주님, 온전히 주님의 뜻을 쫓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당당하게 맞서 나가는 저희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 길을 가는 내내 당당하게 맞서게 하여 주시고, 결코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게 도와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의 삶도 온전히 주님 앞에 올려 드립니다. 주님께서 함께 하여 주시옵소서. 감사와 찬송을 주님 앞에 올려 드리며, 거룩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렸습니다. 아멘.
20세기 영국 역사가 에드워드 H. 카(Carr)는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책 3장 ‘역사와 과학과 도덕’에서 역사·과학 그리고 도덕을 구분하며 그 구분의 타당성과 한계를 논한다(<역사란 무엇인가?>, 길현모 역, 81~84쪽). 그는 무엇보다도 먼저 역사는 종교와 도덕을 수렴하기보다는 사회과학을 수렴하는 공적인 객관담론을 지향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역사가 종교와 도덕 쟁점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회과학으로서의 역사가 자연과학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통해 그는 역사학의 사회과학적 입지를 굳게 하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카는 성경의 신학적 역사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한다. 그가 총론에서는 학문 활동과 기독교신앙의 공존가능성을 인정하는듯 하면서도 각론에서는 기독교신학과 역사학의 공존가능성에 심각한 회의를 표한다. 가령, 그는 천문학자의 학문은, 신이 세계를 창조하고 지배한다고 믿는 신앙과 양립할 여지가 있으나 “자신의 백성을 도와주기 위하여 별과 유성의 궤도를 바꾸어버리는 변덕스런 신”(수 10장)을 믿는 것과 양립할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진지한 역사가들이 신이 역사 전체의 행로를 명령하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고 믿을 수는 있겠으나, 아말렉 족속의 도륙을 자행한다든지(출 17장; 삼상 15장) 여호수아 군대를 돕기 위해 낮 시간을 연장해주는 구약성서의 신(수 10장)을 믿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카는 구체적인 역사적 사건들을 인과적으로 규명하기 위하여 신을 원인자로 끌어댈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특히 그는 인간적 원인을 충분히 궁구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의 원인을 추적하는 과정에 신의 섭리를 끌어들이려는 입장을 지적 태만이라고 본다. 세속사나 인간세계의 드라마의 전개과정을 충분히 인간적 차원에서 규명한 후에야 더 넓은 사고(예를 들면 신의 섭리)를 끌어들일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탈신학적인 계몽주의적 역사이해에 대한 반론이 없지 않다. 러시아의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인 니콜라이 베르자예프나 미국의 기독교윤리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나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리탱 같은 저술가들은 역사의 자율적 지위는 인정하면서도 역사의 목적이나 목표는 역사 밖에 있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역사의 초월적인 기원과 지향을 승인한다. 반면에, 카는 역사의 초월적 기원과 지향성을 전혀 믿지 않는다. 그는 역사의 의미와 중요성을 좌우하는 어떤 초월적인 힘-기독교의 신이건, 자연과학자들의 보이지 않는 신이건, 헤겔의 세계정신이건 간에-을 믿는다는 것은 진지한 역사의 입장과 조화되기 어렵다고 본다. 역사가란 자기 문제를 신의 조화력 같은 것에 의지하지 않고 풀어나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즉, 역사란 조커 없이 노는 트럼프 놀이와 같다고 본다.
카의 이런 입장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을 펼치는 성경의 역사의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 원인론으로 불릴 정도로 단일한 원칙을 갖고 역사를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은 요즘 말로 말하자면 과도한 하나님 원인론적 축소주의에 기대어 역사해석을 시도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은 주전 9세기 다윗-솔로몬 제국의 분열과 쇠락, 주전 8세기 북이스라엘 멸망, 주전 6세기 남유다의 멸망, 바벨론 유수의 종료와 페르샤 제국의 흥기, 그리고 바벨론 귀환포로들의 중건 역사 등 모든 굵직굵직한 역사적 격변들을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의 빛으로 해석하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스라엘 민족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중심으로 모든 이스라엘 안팎의 역사를 해석한다. 이스라엘 민족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는 이스라엘을 통치거점으로 삼아 온 세계로 확장되는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사 9:6~7; 11:6~9; 출 19:5~6; 창 18:19). 하나님나라는 온 열방 백성이 하나님 영광을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무장해제하여 우애롭고 평화로운 공동체를 통해 구현된다. 구약 예언자들은 공평과 정의가 하수처럼 흐르는 세상,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온 세상을 가득 덮는 상황이 바로 하나님나라의 현존이라고 보았다. 신구약 성경은 이 하나님나라의 목적과 의도의 빛 아래서 이스라엘 안팎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을 해석하고 있다.
물론 성경이 모든 역사적 사건들을 하나님 원인론적으로 해석한다고 해서 보통 역사가들이 추구하는 합리적·이성적·역사적 해석을 포기하거나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경은 현대 역사가들이 추적한 역사적 사건들의 배후원인들을 다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초월적 틀 안에 재배치한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성경의 역사해석은 카 역사관의 중요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배척하기보다는 그것 위에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라는 역사철학적 요소를 추가한다고 보는 편이 더 객관적인 판단일 것이다. 이런 구약성경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이 잘 드러난 곳이 구약의 다니엘서나 4세기 교부 성 오거스틴이 지은 <신의 도성>이다. 전자는 세계제국들의 흥망성쇠의 역사적 격변기에 이스라엘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잘 포착하고 있고 후자는 로마제국이 고트족과 롬바르드족 등 게르만족들에 의해 무자비하게 유린당하며 쇠망해가는 위기의 상황에서 기독교회의 종말론적인 위상, 초월적인 지평을 장엄하게 그려낸다. 이 두 책이 보통 역사가들이 추적하는 사건들의 인과관계 규명에 전혀 무관심한 것은 아니나,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더욱 부각시켜 나머지 인간적 요인들의 역할을 무색케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런 성경적 역사관은 헤로도투스나 투키디데스나 타키투스 등 흔히 말하는 세속적인 그리스 로마 역사가들의 역사관과 다르다. 그것은 역사주의적 인과 관계 규명에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는 일견 형이상학적 준거에 과도하게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가 이런 하나님 원인론적 설명이나 단일 원리중심의 역사해석에 대하여 반대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하나님의 섭리와 같은 법칙이나 사적 유물론과 같은 원리를 갖고 역사를 연구하다 보면 결정론적인 역사이해로 귀착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둘째, 초월적인 준거나 역사 내재적인 원칙에 호소한 역사해석이 원인단순화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카는 여기서 신학적 역사해석이나 칼 마르크스의 사적 유물론에 입각한 역사해석 둘 다와 거리를 두고 있다. 그에게는 ‘진보와 변화’만이 역사를 해석하는 틀이 될 뿐이다. 따라서 이런 입장에 서 있는 역사가들이 역사라는 무대에서 하나님 원인론적 해석틀을 추방하려고 하는 것은 당연해보인다. 카의 입장에서 볼 때 하나님 원인론에 대한 호소가 인간적 원인론들에 대한 철저한 탐구를 가로막는 지적 태만과 정직하고 투명한 이성적 연구를 제어하는 교조적인 오만으로 돌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카의 역사관은 유신론적인 인격신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도전이 된다. 신학적 입장을 견지한 그리스도인 역사가들이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을 아주 정치한 중간공리로 환원해 구사하지 않는다면 카가 만들어 놓은 역사학의 운동장에 참여하는 데는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여기에 신구약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을 역사의 주관자라고 고백하는 기독청년들이 세속학문에 대하여 느끼는 고뇌와 긴장이 있다. 기독청년 학자들은 인간 역사의 진행에는 역사 내재적인 인간세력들, 동기들, 이해관계들, 기타 우발적 요인들 외에 하나님의 목적과 이유가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이런 상황에서 선교적·변증적인 맥락에서 기독청년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이라는 이 신학적 용어를 일반 역사학 용어들로 치환할 수 있는 길을 개발하지 않으면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먼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의 원형인 고대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을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주전 8세기 이스라엘과 유다의 예언자들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
성경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을 가진 예언자들이나 서기관들, 제사장들과 사도들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아 기록한 책이다. 성경은 온 세계 만민을 위한 메시아적 사명감을 의식하며 고난의 역사를 헤쳐나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명선언서(mission statement)다. 더 구체적으로 성경은 이스라엘의 존재이유, 구원과 심판, 갱신과 정화의 목적을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관을 취한다. 이런 하나님의 원인론적 역사관은 뉴톤적인 기계론적 우주관 아래서는 용납될 수 없을지 모르나 최근에는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뉴톤적인 근대물리학과 우주론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에 학문의 교도권을 내준 금세기에는 뉴톤적인 인과론으로 설명할 수 없는 엄청난 불확실성의 영역이 새롭게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세상에 존재하는 물질이나 사건 혹은 사태를 ‘확률’로 설명하는 최근세기의 양자역학, 불확정설 원리, 중층결정론(overdetermination) 등은 자기충족적으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계질서 속에 하나님의 개입여지가 얼마든지 확보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기적이나 역사개입이 반드시 창조질서의 인과론적 질서를 손상시키지 않고도 일어날 가능성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추세가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을 시도하는 기독청년들의 학문적 분투에서 감당해야 할 짐을 가볍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기독청년들은 일반역사학의 준칙들을 다 섭렵하고 파악하되 사실진술, 인과관계의 규명 단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역사적 사건들을 예언자들처럼 하나님 원인론적 해석을 시도해야 한다.
주전 745년 경 북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2세의 41년 간의 통치와 남유다 왕 웃시야의 52년간의 통치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디글랏 빌레셀 3세가 앗수르의 왕위에 등극하여 전무후무한 정복주의적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주전 740년대 초반부터 북부 시리아 일대를 성공적으로 정복한 이 정복 군주는 이후 신속히 팔레스타인 및 이집트 쪽으로 기수를 돌렸다(사 10장, 왕하 18:33~35[참조: 사 14:13~14]). 예언자들은 팔레스타인 역사의 지평 위에 파괴적으로 육박하는 거대한 산사태와 같고 홍수와 같은 앗수르의 출현이 자신들의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 심판의 서곡임을 느꼈다. 앗수르 제국의 팔레스타인 침략과 정복으로 마침내 북이스라엘 왕국은 멸망당했고 남유다는 나라의 중축이 파쇄되는 치명상을 입었다. 아모스·호세아·이사야 그리고 미가가 이 잔혹한 앗수르 제국이 하나님의 백성을 징벌하는 대행자라고 선포했다. 예언자들은 그 앗수르 범람과 팽창의 역사를 ‘신학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하나님의 의도의 빛 아래서 앗수르의 침략을 파악한 것이다. 독일 구약학자 마틴 노트(Martin Noth)는 이러한 예언자들의 역사신학적인 모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했다.
“예언자들은 그들의 동시대적 사건들을 보편적 관점으로 해석한 최초의 역사가들이었다. 그들은 과거를 뒤돌아보는 식으로 설명하지도 않았고, 미래 사건의 일반적 향방에 대해서 막연하게 예언하지도 않았다. 그들은 당대의 사건들 속에서 한 거룩한 계획이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하였다.”(<The History of Israel>, Edinburgh: T&T Clark, 1958년, 256쪽)
이와 같이 8세기 예언자들이 세계사를 하나님의 심판의 맥락으로 파악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이스라엘을 역사 속에서 선택하시고 그들을 당신의 세계사적인 구원계획을 실현시키는 도구로 사용하시려고 이제까지 인도해오셨다”고 믿는 신앙고백 때문이다. 예언자들은 철두철미하게 언약공동체인 이스라엘의 역사를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에 얼마나 신실하게 복무했는가에 따라 평가했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닥친 민족적 멸망 재난은 이스라엘의 존재기반인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어진 언약과 율법을 지키기 못한 불충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면서도 예언자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을 외면하지 않았다. 그들은 막연히 이스라엘 백성이라는 총칭적인 집단의 죄를 규탄하기보다는 국가 공동체의 운영에 결정적인 책임을 왕·귀족·고관들 그리고 지배계층의 죄악을 탄핵했으며 그들의 죄악이 국가멸망을 초래했다고 적시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지도층 백성들이 하나님과 맺은 계약적 요구(십계명과 기타 부대 율법)를 준행하지 못하여 ‘가난한 백성들’을 양산하고 그들을 압제한 그 죄악이 국가멸망을 초래했다고 선언했던 것이다. 그들은 국가 멸망의 책임을 강대국이나 외국 침략군의 공격에 돌리지 않았다. 공평과 정의의 원칙을 어기고 공동체 구성원들 중 약한 자들을 극도로 압제하여 공동체 소속감을 박탈해버린 잔혹한 지배계층과 중추적인 민족 구성원들에서 물었다. 이처럼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멸망을 가져온 사회적·정치적 총체 부패의 우선적 책임을 이런 중상류층 이상 계약공동체 구성원들에게서 찾았다.
예언자들의 역사해석은 요즘 말로 말하면 사회과학적 분석과 인식 위에 바탕한 것이었다. 모든 예언자들의 심판 언어가 집중적으로 겨냥한 대상은 왕, 귀족들, 고관들, 지주들, 거짓 예언자들과 종교권력자들이었다. 그들이 지적한 죄는 아주 구체적이었다. 하나님의 기업으로 배분된 이스라엘 자유농민의 땅을 빼앗은 지주들의 출현과 이들의 토지독점, 이들의 불법을 눈감아 준 악한 재판관들의 타락한 재판, 이들의 악을 보고도 정의를 집행하지 못한 왕권, 이들의 죄악을 신의 이름으로 승인하고 축복해준 제사장들의 영적 무지몽매가 이스라엘과 유다에게 하나님의 추상같은 심판을 촉발시킨 죄악들이었다. 예언자들의 선포는 철저한 사회과학적 분석, 냉정하고도 정확한 국제정세 인식, 그리고 강하고 잔혹한 지배권력 엘리트 집단에 의해 생존권과 인권을 박탈당한 채 아우성치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공감과 체휼에 바탕하고 있었다.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누구에게나 설득력이 있는 객관적이고 공변된 학술담론의 품격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이 예언자들의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 즉 신학적 역사해석의 구성요소들을 살펴보자.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관의 요소들
1. 신학적 역사관은 내인(內因) 중심의 역사해석학이다
에언자들의 신학적 역사관은 한 나라나 왕조의 몰락과 멸망을 외인론적으로가 아니라 내인론적으로 우선 해석하는 관점이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몰락이나 멸망은 우발적인 상황, 즉 때마다 일어난 강대국 혹은 패권주의적인 세계정복 전략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왕국 내에 누적된 불의·불법·반(反)공동체적 죄악이 임계점에 도달해서 생긴 모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었다고 해석했다. 유다나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와서 그것들을 각각 정복하기 전에 이미 계약공동체적인 결속감이 파괴되어 있었다. 지배층이 기층민중을 향해 이미 내부정복전쟁(계급적 계층적 압제와 수탈)을 수행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강대국이 와서 정복하기 전에 이미 급속한 공동체성의 해체를 겪고 있었다. 이처럼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주전 8세기나 주전 6세기경에 닥친 국가적 재난의 원인을 찾을 때 강대국의 출현에서가 아니라 이스라엘과 유다를 부패와 총체적인 공동체 해체를 초래한 중심적 지배계층의 죄악에서 찾았다. 이런 예언자적 역사관은 침략자인 이민족에 대한 증오심을 초극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도덕적 자학사관이 아니다. 이것은 엄정한 자기추궁적인 역사해석이다. 우리는 조선과 대한제국의 일제에 의한 멸망을 이런 방식으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다. 1811년 홍경래 농민반란, 1862년 진주민란, 1894년 갑오농민 혁명 등은 조선은 지배계층의 민중수탈과 압제로 그 자체로 존립할 수 없는 내부전쟁중인 나라였음을 보여주지 않는가? 기독청년들이 일제하 독립운동사를 연구할 때 조선 멸망의 원인을 이사야나 예레미야·아모스나 호세아처럼 추적해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2. 신학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절대주권적인 제3자 활용을 적극적으로 승인한다
신학적 역사관은 하나님의 구속사를 집행할 전혀 예기치 않는 제3자의 역할을 주목한다. 지배자의 정복전쟁이 다른 한편으로는 옛 제국의 포로민들에게는 희망과 해방의 거룩한 전쟁이 됨을 믿는다. 주전 6세기에 이스라엘과 유다를 위한 하나님의 새 언약 공동체는 페르시아의 전쟁승리로 이뤄졌다. 그 페르시아의 승리는 하나님의 행동이었다(사 44~45장). 페르시아 제국 아래서 에스라 느헤미야의 제한 자치가 이뤄진다. 어찌보면 악한 나라나 잔혹한 제국마저도 하나님 백성들을 위한 해방군의 역할을 떠맡는다. 우리 겨레의 역사에서 볼 때 1945년 이후 미군은 바벨론의 압제에서 이스라엘을 해방했으나 유다를 식민지화했던 페르시아 정도의 역할을 한 것일 수도 있다. 남북 분단 체제는 페르시아 체제 아래서 메시아를 기다리던-다소 불완전하게 회복된-바벨론 귀환포로 공동체의 탄식을 누적시키는 시대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역대기서와 에스라~느헤미야서는 귀환포로 공동체의 자기정체성 회복 투쟁을 자세히 보여준다. 바벨론 귀환포로들로 구성된 페르시아의 식민지 예후다(유다)는 식민지 백성으로 만족하지 않고, 오실 메시아를 대망하는 구속사적 약속의 상속자로서의 자기이해를 구축해갔다. 우리 겨레가 언제까지 분단시대의 포로로 살 것인가? 기독청년들은 이런 성경적 패러다임에 입각해서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 두신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를 궁구하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3. 신학적 역사관은 심판을 넘어 이어지는 하나님의 구속사적 의지를 긍정한다
신학적 역사관은 재난과 멸망 너머를 바라보는 희망의 역사관이다. 엔트로피의 법칙을 따르면 앙시엥레짐의 해체는 새 언약 공동체가 출현할 기회를 제공한다. 식민주의 역사관은 식민지 지배의 정당성과 필연적 역할을 강조한다. 민족주의 역사관은 일제 식민지가 36년만에 끝난 것은 독립투쟁의 결과로 보면 민족주의적 역량결집에 최우선 관심을 보인다. 하나님 원인론적 역사해석은 이런 하위적인 인간적 요인들을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를 강조한다. 기독청년은 민족의 강고한 독립투쟁만이 아니라 그것을 활용하고 그것을 추동하신 하나님의 절대주권적 의지 때문에 1945년 8·15해방이 일어났다고 본다. 이런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해석은 패배주의적·현실주의적·현실순응적 친일파들이나, 일본의 대동아 지배를 정당화하는 봉건질서에 굴복하여 친일활동을 한 이광수·최남선·윤치호(윤리적 민족주의)의 한계를 넘는다. 그들은 민족의 재난(일제 식민지) 너머에서 시작될 새 언약 공동체의 탄생을 믿지 못했다. 그들은 강대국이나 제국주의적인 세계 지배를 정당화하는 강력한 군사력 물리적 힘의 시위에 기가 질려버렸다. 그들은 현실적인 군사적·경제적·정치적 힘을 초월하는, 궁극적인 세계 역사 운행 법칙에 대한 신뢰를 결여하고 있었다. 친일파들은 일제강점기가 새로운 언약공동체의 해산을 위한 창조적 고통기요, 해체기라는 사실을 믿으려고 하지 않았다. 예언자들의 역사관에 따르면 조선과 대한제국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다림줄에서 너무나 절망적으로 기울어져 위태롭게 된 건축물로서 창조적으로 파괴되었어야만 한 구조물이었다. 이 역사관에 따르면 한 나라와 왕조의 멸망은 낡고 모순에 찬 앙시엥레짐의 장엄한 멸망이며, 더 위대한 태양의 일출을 기대하는 낡아져버린 태양의 일몰이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패권주의적 국가들에 대한 궁극적 심판을 믿는다. 예언자들은 자신의 민족에 가해진 하나님의 심판의 가혹한 궤적들을 정직하게 대면하며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이 갖는 밝은 면을 강조했다. 예언자들은 하나님 심판의 정당성을 인정하고 그 심판의 불꽃에 의해 정련된 남은 자들이다(아모스·호세아·이사야·에스겔·예레미야 모든 예언자들의 마지막 언어는 희망). 이들은 재난의 의미를 아는 자들로서 바벨론 포로살이의 불가피성을 알 뿐만 아니라 고토로 돌아와 하나님의 구원사를 이어가야 할 사명감을 느끼는 자들이었다. 에스라 1장 1절은 예레미야의 예언 성취로서의 고토 귀환이 이루어졌음을 말한다. 포로 교포들 2~3세는 예레미야의 예언을 이정표 삼아 이스라엘 고토로 되돌아온다. 에스라·느헤미야 등은 바벨론에서 태어난 포로 2세들이다. 그들은 가나안 고토에 대한 생리적 결속감이나 정서적 유착의식이 없었으나 예레미야의 예언을 믿고 고토로 돌아와 그곳에서 이뤄진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승한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재난과 멸망의 의미를 아는 자들만이 멸망과 재난 너머까지 살아남는다는 것이다. 이 남은 자들은 이상왕의 도래와 이상왕의 통치로 새롭게 개시되는 새 시대의 여명을 앞당겨 경험한 자들이다.
결론
이처럼 고대 이스라엘의 성경저자들은 인간의 결정 및 자연적 요소들 외에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확보되는 공간이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는 믿음을 상식으로 받아들였던 사람들이다.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역사가 자연과학적 객관담론을 지향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다. 그들은 역사는 차라리 이머징 처치·철학적 상상력에 터한 시와 영감어린 예술에 가깝다고 본다. 기독청년들은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의 빛 아래서 우리 겨레에 일어난 역사적 격변, 흥망성쇠를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조선 멸망, 기독교 복음 시작, 해방, 민족전쟁, 그리고 오랜 분단 시기로 이어지는 이 역사의 흐름에 작동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궁구해보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어떤 역사적 과업에 충실하는 것이 하나님나라의 대의명분에 충실한 것인가를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처럼 우리는 우리 시대에 두신 하나님의 뜻을 섬기다가 하나님께 돌아가는 존재다(행 13:36).
우리는 광복절을 맞으면서 다시 묻는다. 우리 겨레가 반세기가 넘는 분단체제를 유지하며 동족상잔의 긴장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데는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가 있다고 믿을 수 있다. 반세기가 넘는 분단체제의 존속에는 인간 내재적인 동기나 원인으로 귀속될 수 없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뜻이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이 분단시대를 사는 기독청년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능동적으로 받들어 우리 겨레의 역사 속에 뿌리내린 이 근본모순을 초극하고 새로운 역사 창조의 주체가 될 것인가? 우리 겨레의 고통이자 원죄인 분단 시대는 단일민족이라는 신념을 조롱하고 남북한을 아예 다른 나라로 갈라버리시려는 하나님의 장기계획의 일부일까? 단일민족이라고 단일 민족국가를 이룰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실제로 이 세계에는 단일민족이지만 한 단일민족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흩어져 사는 족속들이 얼마나 많은가? 분단체제를 영속화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란 말인가? 아니면 이 분단 체제의 존속 안에는 분단체제를 죄악된 역사, 하나님께 연단 받는 시기로 영접하고 새로운 화해와 일치의 대통일 시대를 열망하도록 갈증을 촉발시키려는 신적 의도가 작용하고 있을까? 우리는 위에서 내린 두 가지 시나리오 중 둘째 시나리오라고 믿어야 분단체제 청산의 능동적 노력을 경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님의 목적과 의도에 대한 석명(釋眀)을 통하여 개인과 공동체는 자신의 미래를 기획하고 하나님의 의도를 구체적인 역사 속에 성취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역사주관에 대한 신앙고백은, ‘하나님이 뜻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일어날 수 없다’고 믿는 숙명론적 결정주의로 퇴행하는 대신,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역사변혁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희망의 역사관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원인론적인 역사이해는 실상 모든 인간적 차원의 사실이해와 사회과학적 인식의 엄정성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입론가능한 입장이 될 수 있다.
다시 생각해 보는 <복음과상황>의 길
다시 새해가 밝았다. <복음과상황>은 기독 청년이 직면한 ‘상황’을 ‘복음’의 눈으로 분석하고 재해석하여, 신앙 실천의 의지를 벼리도록 격려하는 잡지다. 복음은 바벨론 제국의 잔악한 세계 지배가 영원히 계속될 것처럼 보이던 시대에, 산을 넘고 강을 건너 달려오는 전령이 전하는 아름다운 소식, 즉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소식이다(사 52:7). 복음은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무질서와 혼돈처럼 보이는 이 세상이 하나님나라가 건설되어 가고 있는 토대라고 선포하는 메시지다. 복음서에 나오는 나사렛 예수의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서 이 복음은 가장 강렬하게 선포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생생하게 작동하고 있음을 명명백백하게 증시(證示)하는 계시 사건이다. 로마제국의 정치권력과 유다의 종교권력의 협잡 아래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은, 모든 불의한 권력 행사는 무효화되며 모든 부당한 재판은 뒤집어질 것이라는 희망을 안겨 준다. 나사렛 예수의 부활은 이 세상의 모든 강압적이고 불의한 권력 행위가 종국에 파탄하며 하나님나라와 의를 추구하다가 희생당한 모든 자들이 신원될 것을 믿는 대반전의 신앙을 가능케 한다. 요약하면 복음은 이 세상의 정부들과 위계 결사체들(군대·기업체·대학·종교집단 등)이 내린 모든 불의한 판결을 뒤집는 최후 권위다. <복음과상황>은 이 압도적인 하나님의 현실 초극적이고 세계 변혁적인 복음의 관점에서 현실 상황을 분석하고 재구성하려고 노력한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많은 사태들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지 않으면, 우리는 도덕적 무정부주의와 허무주의자가 되기 쉽다. 세계를 지배하는 열강의 주요 언론 매체나 불의한 기득권 세력을 옹호하는 신문만 읽으면 세상에는 강대국의 보무당당한 정복 전쟁과 수출용 다국적 기업들의 막힘없는 시장 지배만 영속할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의 감미로운 통치를 경험하지 못하고, 하나님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들의 생생한 삶의 현장을 목격하지도 못하며, 그런 의로운 성도들과의 신령한 교제에도 참여하지 못한 채, 악당들의 활동상을 소상하게 보도하는 신문만을 읽는 독자들은 자신도 모르게 세상적 힘의 질서에 순응적으로 변한다. 그들은 정제되지 않은 악당 기사, 뇌물 받아 부자 된 사람 이야기, 부동산 투기해서 돈 번 사람 이야기, 권력에 야합하여 이익을 누리는 목사들의 이야기를 읽고 분통을 터뜨리다가 자신도 모르게 패배주의자가 되기 쉽다. 즉 세상은 힘과 권력을 가진 집단의 의지가 관철되는 현장일 뿐이라고 냉소적으로 판단해 버리기 쉬운 것이다. 도덕적 무정부 상황에서 회의하던 냉소주의자는 어느새 악착같은 이기주의자가 되고, 이 세계를 움직이는 기득권 질서의 일원으로 안착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냉소주의자에서 힘과 권력을 숭배하는 자가 되면 권력 의지를 갖게 되고, 이기고 빼앗고 움켜쥐려는 야수적 인격으로 바뀐다. 그 결과 이들은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분노와 긍휼의 동선을 포착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역동적인 현존을 역사 속에서 감지하지도 믿지도 못한다. 무신론자가 되어 가는 과정에 자기 몸을 맡기는 셈이다. 힘과 권력욕이 각축하는 세상에 참여하여 살아가는 과정은 마음이 강퍅해져 가는 과정이요, 하나님에 대한 감미로운 의존과 신뢰를 잊어 가는 과정이다.
이 흐름을 중단시키려면, 무엇보다도 역사 속에 일하시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 그리스도적 사랑 실천에 참여해야 한다. 무책임하고 이기적인 욕망을 충족하려는 삶을 벗어 버리고 자기를 내어 주는 사랑과 봉사에 참여하는 길밖에 없다. 아무리 신앙심이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려는 실천적 순종이 없는 한 그 신념은 희석될 수밖에 없다. 겸손하신 하나님께 공명하는 유일한 길은, 깊은 고독과 불확실함 속에서도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일상생활의 매 순간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손해와 불편을 감수하는 것이다.
둘째, 이렇게 살아가는 성도들과 만나 서로 지지받고 격려받아야 한다. 이 성도의 통공은 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하고 공시적으로도 일어나야 한다. 먼저 우리에 앞서 믿음의 길을 걸어가신 성도들의 발자취를 읽고 격려받아야 한다. 구름같이 허다한 증인들이 서로 둘러싸고 격려하는 운동장을 생각하면서 달려가야 한다. 그것은 바로 성경 읽기와 신앙 인물들의 역사를 공부하는 길이다. 동시에 우리 시대에 믿음의 순전을 지키기 위해 살아가는 소박하고 아름다운 형제자매들과의 교유를 통해 안위를 받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 하나님나라의 소망을 안고 십자가를 지는 성도들의 삶을 통해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심을 늘 확인해야 한다.
불의한 힘과 권력자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실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기쁜 소식(사 52:7)에 근거하여 그것을 분석하는 훈련이 기독 청년들에게 요청된다. 이런 점에서 예언자 아모스는 자기 주변에서 일어나는 미시적 사태들을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신다는 복음의 거시적 관점으로 재구성하고 재해석하여 동시대인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에 대답하려고 한 인물이었다.
<복음과상황>적 세상 읽기의 전범(典範), 아모스서
아모스는 분단 시대의 지성인이었으나 분단을 초극한 하나님나라의 시민이었다.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두 왕실이 하나님의 백성을 갈랐으나, 그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통일이스라엘적 관점으로 자신의 분단 조국이 직면한 현실을 분석한 예언자였다. 그는 남유다 소재 드고아의 농민이었으나 북이스라엘의 벧엘로 올라가 불의한 종교와 정치권력의 야합을 규탄했다. 국제 정세를 분석했고 국제 관계의 정의와 불의를 논했다. 그는 법정의 부패와 악한 종교권력, 이들과 결탁한 폭압적인 정치권력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고 있었고, 가장 가난한 자들이 당하고 있던 비인간적 처우와 궁핍, 그들의 한숨을 숙지하고 있었다. 북이스라엘을 향해 쇄도하는 거대한 심판의 홍수를 한 세대 먼저 예견하고 그것으로부터 살아날 길을 제시했다.
아모스는 분명 풍요와 번영의 시기에 하나님이 보내실 가뭄과 궁핍을 예고했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가장 기름진 목장도 가뭄에 타들어 갈 것을 경고했다. 그가 예고한 가뭄은 자연 순환의 일부로 경험되는 가뭄이 아니라 나라 전체를 죽음으로 몰아갈 무서운 가뭄이었다. 그는 국제 정세 추이에 민감했고 국가 간에 벌어지는 전쟁, 조약 파괴, 그리고 전쟁을 통한 인신매매와 영토 침략을 비판했다. 그는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는 물론이며 인근 다섯 왕국의 대표적인 죄악들을 구체적으로 탄핵했다(다메섹[3~5절]; 블레셋[6~8절]; 두로[9~10절]; 에돔[11~12절]; 암몬[13~15절]; 모압[2:1~3]). 유다는 야훼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고 조상들이 섬긴 거짓 신들에 홀려 그릇된 길로 나갔다(2:4~5). 가장 늦게 언급되는 이스라엘이 부국강병이란 국가 이데올로기에 경도되어 국운 융성을 누리며 지은 죄는 가장 크고 심대했다.
북이스라엘의 가장 큰 죄악은 가난한 동포들을 잔학하게 학대함으로써 언약 공동체를 파괴한 죄였다(2:6~16). 북이스라엘의 부유층은 의로운 사람을 돈 받고 팔고, 신발 한 켤레 값에 빈민을 팔았다. 둘째, 성 문란과 음란 죄였다. 셋째, 하나님에 대한 참된 앎을 거부한 거짓 종교에 집착한 죄악이었다. 신명기 법전에 의하면 아무리 가난한 자들이라 할지라도 겉옷은 반드시 밤에는 돌려받을 권리가 있었다. 그것은 일교차가 심한 이스라엘 지역의 차가운 밤을 나기 위한 이불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이 빚을 갚지 못한다고 전물로 압수한 겉옷을 제단 옆에 펴놓고 철야 기도를 드렸다. 넷째, 하나님의 구원사 망각 죄와 거룩한 백성의 정체성 상실 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을 출애굽시켜 가나안 땅을 얻게 하신 그 근본 은혜를 망각해 버렸다. 그들의 죄는 구원사 망각에 그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필사적으로 저항한 죄였다. 나라의 영적 토대를 굳건하게 세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일으키신 나실인에게 독한 포도주를 마시게 해 타락시키는 한편, 추상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예언자의 입을 봉하려고 하였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서의 책임을 특권적 선민의식으로 변질시켜 버린 나머지 마침내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다(3:1~2). 예언자 아모스는 야훼의 영으로 가득 차 당신백성의 죄악을 징치하려고 분연히 일어나신 하나님의 거룩한 분노를 대변하는 사나운 맹수처럼 심판 예언들을 분출했다(3:3~8).
예언자 아모스는 사마리아에서 자행된 불법과 잔학한 폭압 정치를 탄핵했다(3:9~15). 폭압 정치의 온상인 호화스러운 궁궐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거짓 종교들의 본거지인 벧엘 제단들은 동시에 초토화될 것이라고 선포했다.
아모스가 보기에 이런 사마리아의 부패와 가난한 자들의 억압 이면에는 사마리아 유한부인들의 망국적 유흥 문화가 있고(4:1~3), 북이스라엘의 거짓 종교가 있었다. 거짓 종교는 하나님의 정의(신적 친절)와 공평(부당한 권력자 억제와 견제)을 실천하는 데 무관심한 반면 맹목적인 기복 신앙을 고취하는 종교였다. 유력자들의 이기심과 탐욕을 부추기고 눈감아 주는 종교였다. 지주들과 지배층 사람들은 가난한 동포들을 학대하고 억압한 죄를 가리기 위하여 거짓 종교에 더욱 매달렸다. 그 결과 이스라엘 농업은 재기 불능의 파산을 맞이할 것이며, 적군의 침략으로 사마리아는 유린될 것이고 나라의 기간요원들인 청년들은 대가 끊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회개할 수 없는 수준까지 강퍅해져 버리고(4:4~12), 이스라엘 왕국은 재기 불능의 몰락을 경험할 것이다(5:1~3).
이런 참혹하고 퇴로 없는 심판 신탁을 선포하는 중에서도 아모스는 이스라엘이 살아날 길을 제시한다(5:4~15). 거짓 종교의 상징 처소인 유명한 성소 순례를 즉각 중단하고 야훼 하나님 자신을 찾으라는 것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6). 여기서 ‘야훼를 찾는 행위’는 소극적으로는 불의한 행동들을 즉각 중단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난다. 즉 정의(신적 친절과 공동체적인 약자 돌봄)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잔학 행위를 그치며(7절),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 행위를 중단하는 것이다. 야훼를 찾는 길은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가난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일을 즉시 그치는 것이다(12절). 적극적으로 야훼를 찾는 길은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정의를 세우는 일”(15절)이다. 하나님의 율법을 가르치고 공동체 전체의 안녕과 형제 부조적인 인애를 강조하는 예언자들과 올바른 재판관을 존중하는 행위다(10절). 그러나 결국 이스라엘은 야훼를 찾는 데 실패하고 멸망의 길을 자초했다. 이 몰락의 도상에서 하나님을 찾는 길은 양상을 약간 달리한다. 이 경우 야훼를 찾는 행위는 심판과 정화의 채찍으로 임하실 하나님을 만날 준비를 하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공동체의 죄악을 지적하고 나라 전체의 살길을 제시하는 통렬한 예언자적인 탄핵을 받아들이는 것, 책망을 듣고 자복하여 죄악된 습속과 관행을 즉시 중단하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준비인 셈이다(5:16~24). “오직 정의를 물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같이 흐르게”(4절) 하는 일에 착수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면할 준비를 하는 길이다. 이렇게 하나님만을 만날 준비를 하지 못하면 이스라엘은 다메섹 밖으로, 북방 먼 곳으로 유배될 운명을 면치 못할 것이다(5:25~27).
아모스가 보기에 지배층과 국가 지도층의 철저한 부패, 약한 동포를 억압한 죄는 사마리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그 죄악은 남유다의 시온에까지 전염되었다. 아모스는 남북 두 왕실 모두의 죄악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탄핵했다. 멸망의 시각이 다가오는 순간에도 남유다와 북이스라엘 왕실과 지배층은 죽음을 부르는 연회와 환각적인 유흥에 탐닉하고 있었다. 그들은 가난하고 연약한 백성들의 궁핍과 비참에 연대할 수 있는 공감력을 상실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난 자들은 연약한 동포의 눈물과 한숨, 고통과 울부짖음을 듣고도 도저히 공감할 수 없고 같이 아파할 수도 없는 무감각한 자들이다. 그들은 권력의 술에 취해 있고 착취와 억압의 정치가 주는 혜택에 인이 박힌 자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마침내 그들의 호화로운 궁궐은 파괴되고, 큰 집들 작은 집들은 완전히 붕괴되고 거리는 살해당한 백성들의 시신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나라 전체의 파탄을 의미하는 패배를 당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국가를 운영할 기간요원들은 먼 북방 왕국으로 유배될 것이기 때문이다(6:1~14).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라 전체를 타격하는 대파국적 심판 전에 이스라엘에게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해 중보자 아모스의 중보기도를 유도하신다. 대파국적 심판을 철회할 명분을 스스로 찾으시기 위해 작은 심판들을 연쇄적으로 보내시겠다고 선포하신다. 먼저 농작물과 초장을 파괴하는 메뚜기 재앙(7:1~3)과 지진과 화산 활동을 암시하는 큰 불 재앙(바다를 삼키는 큰 불)(7:4~6)을 내리시겠다고 선언하신다. 아모스는 메뚜기 재앙과 큰 불 재앙을 통보받고는 간절하게 중보자적 탄원을 드린다. ‘야곱이 미약하여 그 심판을 견딜 수 없으니 심판 계획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2, 5절). 야훼 하나님은 두 번씩이나 중보자 아모스의 기도를 듣고 심판 계획을 철회하셨다. 이 예비적 심판 신탁들을 듣고 이스라엘은 응당 마음을 찢고 돌이켜야 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회개하지 않고 더욱 더 격렬하게 하나님의 예언에 저항했다. 그래서 셋째 재앙 예고인 다림줄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왕국 전체가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에서 너무 크게 어긋나 자체적으로 붕괴되고 있는 상황임을 밝히 드러내 주셨다(7:7~9). 하지만 이 상황에서도 북이스라엘은 자기갱신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총체적 저항으로 응답했다. 북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 2세와 왕실 제사장 아마샤는 아모스의 예언에 저항하며 그를 마침내 고향 땅으로 추방해 버린다. 자기 고향으로 내려가 협박과 심판을 예언하며 생계를 유지하라고 조롱한 것이다(7:10~17). 아마샤와 여로보암은 아모스를, 협박과 심판예언을 남발하면서 금품을 갈취하던 예언자들 중 한 명으로 간주한 것이다. 그러자 아모스는, 자신은 생계를 유지하기에 충분한 땅과 재산이 있으며 진실로 자신을 격동시킨 것은 하나님의 강권적인 부르심과 장악하심이라고 선포한다. 동시대의 예언자 미가에 따르면 하나님의 영으로 가득 찬 예언자가 아니고는 왕과 지주, 악한 제사장 체계를 향해 하나님의 전쟁과 분노를 대언하지 못한다(미 3:8).
마침내 넷째 재앙인 여름 과일 한 광주리 예언은 북이스라엘 왕국의 종말이 임박했음을 예고한다(8:1~13). ‘여름 과일’을 의미하는 히브리어 카이츠는 ‘끝’을 의미하는 케츠의 유음이의어(類音異意語)다. 이 끝은 이스라엘 지배층의 몰락을 의미했다. 백주 대낮에 임한 하나님의 심판 흑암 때문에 국제 정세와 시세의 향방을 몰라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려는 젊은이들은 전곡 방방곡곡을 헤매고 다닐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예언자들은 이제 멸망을 앞둔 도성에서 종적을 감추어 버릴 것이다(8:11~13). 그래서 마침내 우상을 숭배하던 사마리아는 우상과 함께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다.
아모스가 받은 마지막 환상은 성전 문지방이 흔들리는 환상으로 북이스라엘 국가 종교가 파괴되고 왕국이 멸망당하는 환상이었다(9:1~10).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스라엘 성전 제단의 붕괴에서 시작된다. 이스라엘은 이제 하나님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나라, 하나님께서 그 임재를 철수해 버린 나라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이스라엘의 왕국이 무너진 그 자리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궁전을 하늘에 세우사 이스라엘의 남은 백성을 직접 통치하실 것이다. 이스라엘은 인간 왕이 없던 출애굽 시절의 공동체로 회복되어 하나님의 직접적 다스림을 당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열국 중에 유배되어 흩어진 자들을 체질하여 남은 자들을 거두어 들이신 후에 새로운 이스라엘 역사를 시작하실 것이다. 만국 중에서 체질하고 정결케 하여 거두어 들인 이스라엘은 고토로 돌아와 다윗과 같은 성군의 통치 아래 다스림을 받을 것이다(9:11~14). 아모스는 북이스라엘 왕실의 멸망이 통일 군주 다윗의 나라 실현을 위한 전제 조건이라고 보았다. 그러나 당시 웃시야 왕 치하의 유다 왕국으로는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거룩하게 흡수통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찢겨진 다윗의 천막이 회복되었을 때, 즉 공평과 정의의 다윗 통치를 실현하는 이상적인 왕실이 들어설 때에야 참다운 남북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다윗의 천막은 현재로는 찢겨져 있어 북이스라엘 동포들을 품기가 어렵지만 하나님이 복구해 주신 다윗의 천막에서는 남북 동포들이 다윗 왕국적 기상을 회복할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아모스는 북왕국이나 남왕국 모두의 창조적 재편을 통한 겨레의 일치, 즉 다윗 왕국적인 정의와 공평의 토대 위에서 일치와 연합을 희구했다.
아모스를 따라 우리 시대의 ‘복음’과 ‘상황’ 엮어 읽기
분단 의식을 극복하는 기독 청년
무엇보다도 아모스처럼 ‘복음’으로 ‘상황’을 읽고 해석하는 기독 청년들은 겨레의 분단 시대에 살지만 분단 의식에 매이지 않는다. 분단 시대를 살아가지만 그것을 초극하실 하나님의 위대한 은총의 햇살을 기대하며 그 햇살을 선취하여 겨레의 화해와 일치 역량을 비축하기 위해 애쓴다. 생물학적 민족주의의 명분만 갖고는 남북한 동포들의 연합과 일치는 어렵다. 정의와 공평이 작용한 결과, 창조되는 평화(사 32:16~17)만이 기독 청년이 추구하는 겨레의 일치와 화해다. 공평과 정의는 유력한 자, 기득권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부당한 불법, 편법 이익을 스스로 거룩하게 도륙하여 이웃 사랑과 봉사에 바칠 때, 그 결과 억울하게 압제당한 가난한 이웃의 하소연이 소통될 때 일어난다. 분단 체제의 해소는 공평과 정의의 구축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예언자적 비통과 공감의 영성으로 연단된 기독 청년
아모스는 외견상 풍요와 국운 융성의 시대에 궁핍과 기근을, 공동체의 파괴를 간파했다. 아모스는 남유다의 웃시야 왕과 북이스라엘 왕국의 여로보암 2세 치세 동안에 혜성처럼 나타난 예언자다. 여로보암과 웃시야는 대규모 농지 개간과 확보, 농업 생산력 증가, 영토 확장, 국제 교역 증가, 국방력 강화, 장기간의 평화 내치(52년간 통치한 웃시야와 40여 년간 통치한 여로보암 2세) 등으로 일반 역사에서는 나름대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업적을 남겼다. 그러나 역설적인 사실은 웃시야와 여로보암이라는 두 왕이 다스리던 그 시기가 주전 8세기의 가장 위대한 네 예언자 아모스·호세아·이사야·미가가 등장하여 지주와 권력 엘리트, 부패한 제사장 계층을 집중적으로 탄핵하던 시기였다는 점이다. 두 왕 모두 거대한 지주들의 출현을 방치했고 이스라엘과 유다의 애국심과 야훼 신앙의 기초단위인 자작·자영 소농들의 공동체를 급격하게 해체시켰다. 그래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왕국 모두에 ‘가난한 자들’이라고 하는 미증유의 사회현상이 나타났다. 그 가난한 자들은, 북이스라엘이 국제적으로 전개되는 경제 흐름에 적응하기 위하여 대규모 조방농업과 대지주제도를 도입했을 때 조상 전래의 땅을 잃고 소작인으로 전락한 이스라엘 동포들이었다. 이 가난한 자들의 농토 박탈은 성문의 법정을 통해 내려진 불의한 재판을 통해 이뤄졌고, 풍요의 우상을 섬기던 당시의 거짓 종교에 의해 옹호되었다. 북이스라엘 왕국의 자영·자작 소농 해체는 야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결정적으로 위협했다. 아모스는 가난한 자들의 집단적 출현이 나라 전체가 멸망당할 망조라고 보았다. 아모스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을 때 바로 북방 메소포타미아의 앗수르 제국에서는 신흥 정복 군주 디글랏빌레셀 3세가 남서진 정복을 위한 무장 행렬을 차비하고 있었다. 그는 단지 봄과 가을에 조공 물품을 약탈하러 가는 정도가 아니라 한 나라의 기간요원들을 뿌리째 포로로 잡아 가서 재기가 불능하게 한 새로운 정복 군주였다. 아모스는 이 사실을 보고 북이스라엘 처녀가 쓰러졌다고 본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사 전통에 정통한 기독 청년
아모스는 모세 이래로 이스라엘에 계승되어 온 선택, 계약, 가나안 땅 기업 상속 등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고,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특별한 대우는 공평과 인애에 대한 하나님의 요구의 근거가 됨을 믿고 있었다. 예언자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전통을 숙지한 사람, 하나님의 구원사를 윤리적·도덕적·정치사회적 책임감의 관점에서 소화한 사람들 중에 일어난다. 하나님의 구원, 즉 선택과 계약을 자기만족적인 구원 신앙으로 변질시킨 사람들은, 늘상 하나님의 임재를 주장하지만 실은 하나님과의 공감을 상실한 자들이다. 하나님께 속 깊이 공명한다는 말은 가난한 지체들의 아픔과 슬픔에 메아리치는 경험을 한다는 것이다. 이 세상의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운명에 대하여 많이 아는 자들, 하나님의 은총 햇살을 영원히 누리지 못하고 살아가는 자들의 삶에 주목하는 사람들 중에서 예언자가 일어나고 나실인이 나온다. 예언자는 비통의 감수성이 고양된 사람이다. 기독 청년들이 힘없고 권력에서 가장 먼 자들, 가장 비참한 사람들의 아우성에 응답하려고 할 때, 예언자적 감수성에 공명할 수 있을 것이다.
중보자적 공감과 체휼의 기독 청년
아모스는 폭풍 같은 심판 언어를 분출한 활화산이었으나 그 중심에는 긍휼과 동정심이 불탔다. 아모스는 정작 하나님의 편이 되어 임박한 심판을 통고해 놓고는 이내 이스라엘 백성의 편이 되어 심판의 완화를 간청했다. 예언자는 한편으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추상같은 분노에 동참하여 불 같은 신탁을 쏟아 내면서도 심판으로 짓이겨질 위기에 처한 동포들의 처지에 한없이 동정하며 체휼하는, 자기모순적인 감정에 시달린 자였다. 아모스는 결국 메뚜기 환상과 가뭄 환상으로 북이스라엘을 전복하시겠다는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듣고 그 엄혹한 심판을 철회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다. 아모스는 두 번씩이나 하나님의 심판을 철회시킬 정도로 강력하게 중보했다. 실로 예언자적 기독 청년은 비판자와 탄핵자임을 넘어 동정심과 애휼이 넘치는 중보자다.
국제적 불의와 국내적 불의를 관찰하고 탄핵하는 예언자적 기독 청년
예언자 아모스는 정의와 공평과 관련된 국제 정세와 국내 정세에 정통한 이해를 갖고 있었다. 인근 나라들의 죄악을 정확하게 지적하고 분석할 수 있는 식견을 갖추었다. 그는 제단과 성문의 법정에서 벌어지는 비리와 재판 부패, 뇌물 재판의 실태를 잘 알고 있었고, 민심을 시원하게 울려 주는 촌철살인의 민속학적 지혜를 구사할 줄 알았다. 그는 상류층 유흥 문화의 내부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고, 종교 지도자들-야훼의 날을 구원과 빛의 날이라고 기대하는 자들-의 그릇된 구원 전승 해석의 자기기만적 작태를 알고 있었다. 아모스는 악한 종교(값비싼 순례 종교, 성대한 절기와 축제 종교, 기름진 제사 종교, 하나님의 구원을 자기만족적으로 해석하는 영적 청맹과니 종교)와 악한 정치(민중 압제적, 강대국 외교 동맹 의존적)의 동맹, 악한 법정과 악한 지주들의 동맹을 통찰할 수 있는 사회과학적 인식 능력을 구사했다.
결론
아모스적 교양과 영성을 가진 기독 청년들은 새해에도 ‘복음’의 확신을 갖고 ‘상황’을 분석하고 돌파하는 일에 투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를 의심케 하는 일들이 병발하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사에 정통한 이해를 구축하기 위해 성경을 제대로 읽고 해석하는 일에 계속 도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영으로 고취된 기독 청년들만이 ‘사회 지도층과 권력기관들의 허물을 감히 지적하고 규탄할 용기’를 구비할 수 있을 것이다(미 3:8). 하지만 기독 청년은 자신이 심판 언어의 궁극적 발화자가 아님을 인식하고, 심판 언어, 비판 언어를 분출함과 동시에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비는 죄인의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 미약한 동포들에게 가해질 심판의 참상을 체휼하는 비통과 공감의 사람들이 되어 중보기도에 몰입해야 한다. 미약한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를 위하여 기도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아야 한다. 마지막으로 기독 청년들은 하나님나라의 평화 비전에 붙들려 분단 시대를 초극할 실천력을 비축해야 한다. 다윗의 찢어진 장막이 다시 기워져서 남북한 동포가 함께 공존공영할 수 있는, 그리하여 전 아시아와 세계의 평화 운동을 주도하는 하나님 중심의 겨레 화해를 성취하는 일에 전심전력을 다할 것을 부탁한다.
세계는 지금 미국발 금융위기에 빠져 정신적 시계(視界)가 불확실한 밤바다에 표류하고 있다. 이 위기는 억제되지 않는 권력 엘리트들의 탐욕과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가져다준 재앙이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하나님의 진리를 크게 이탈한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 사회가 가져온 필연적 파탄이며 인류 역사를 주도하는 중심부 문명이 맞이한 막다른 골목이다. 소비주의 사회는 특정 계층의 인간들에게 욕망의 과도한 충족을 의미하며, 대다수의 사람들에게는 의식주라는 기본적인 욕망의 부정과 비인간적 궁핍을 의미한다. 고도의 소비주의 사회는 자기부인의 문화와는 정반대로 질주하는 자기파멸적인 욕망의 과잉충족 사회다. 그것은 공동체 안의 가장 주변화되고 연약해진 구성원들의 눈물과 비통에 공감할 수 없는 사회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근심과 탄식을 자아내는 사회다. 그런 사회는 마음이 강퍅해져서 예언자의 목소리에 더 이상 응답할 수 없는 무감각한 파라오의 압제 체제이며, 급기야는 예언자적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사회다.
최근 우리는 자유 시민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누르고 주변화된 자들의 생명 가치를 능멸하는 권력 중심부와 지배 문화의 강퍅함을 두려운 마음으로 지켜본다. 그들은 유난히도 법과 질서를 강조하지만, 긍휼과 비통의 감수성, 체휼과 동정의 마음을 잃어버렸다. 월터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극단적인 욕망 충족으로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능력을 상실한 지배 문화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할 영적 감수성을 회복해 주는 한편, 왕권 의식으로 가득 찬 지배 문화에 의하여 억눌리고 무기력해진 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새 일에 참여할 수 있도록 희망을 고취시키는 책이다. 이 책은 중심과 주변을 나누고, 왕권 의식과 예언자적 상상력을 나누는 외견상의 이항대립 구도를 사용하지만, 실은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도록 초청하는 나사렛 예수가 전한 복음의 원음(原音)을 아주 생생하게 재생하고 있다.
이 책은 1978년에 출판된 저자의 <예언자적 상상력> 개정·증보판이다. 2000년대 개정판은 20여 년 이상 성서연구 분야에서 일어난 변화를 반영하고 있으나 책의 중심 논지는 동일하다. 초판이나 개정판 둘 모두에서 브루그만은, 예언자를 단지 미래를 점치는 자라든가 사회 저항가가 아니라, 인간 정신을 획일화하고 노예화하는 전체주의에 대항하여 한 공동체의 근원적 변화를 촉발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모두 일곱 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모세, 예레미야, 제2이사야, 그리고 구약 예언자들의 총합이자 그 이상인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를 감동적으로 분석한다. 모든 장이 설득력 넘치고 역동적인 어조와 문체로 채워져 있으나, 특히 5장과 6장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과 목회에 대한 저자의 논의는 십자가 죽음의 대속적 차원만 알고 있는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관복음서의 예수상, 곧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면모를 입체적으로 재생해 준다. 때로는 과도한 단순화(왕정 체제와 모세 체제, 이사야와 예레미야의 이분법적 구분)가 옥에 티처럼 보이기도 하나, 그것들이 이 책의 중심 논지를 파악하는 데 장애가 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이 책의 순서를 따라 예언자적 상상력의 위력을 음미해 보고자 한다.
에언자적 상상력의 얼개와 메시지
제1장 ‘모세의 대안 공동체’에서 저자는, 오늘날 미국 교회의 정체성을 앗아 가는 미국의 소비주의를 히브리 노예들을 압제한 파라오의 억압 체제와 견준다. 미국의 자본주의 소비 문화에 교회가 순응하게 된 내적 원인은, 성서의 예언자 신앙 전통을 저버리고 그 결과 교회의 정체성을 상실한 데 있다. 예언자는 한 사회의 지배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어 거룩성을 상실해 가는 교회를 경각시키는 사람이다. 예언자는 지배 문화의 의식과 인식에 맞설 수 있는 대안 의식과 인식을 끌어내고 키우고 발전시키는 예언자적 목회에 투신된 인물이다. 이 예언자적 대안 의식이 바로 예언자적 상상력이다. 예언자적 상상력은 지배 의식을 해체할 목적으로 현존하는 질서의 불법성을 드러내고 ‘비판’한다. 다른 한편, 그것은 신앙 공동체가 바라볼 하나님의 새로운 미래를 약속하고 선포함으로써 개인과 공동체에게 ‘활력을 불어넣는’ 일을 한다. 저자는 모세가 바로 이런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구약성서의 첫 예언자라고 본다.
모세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내세워 파라오의 정적(靜的)인 승리주의와 억압과 착취 정치를 해체한다. 모세의 핵심 메시지는 이렇게 요약된다. “우리가 만일 가진 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질서만 강조하는 정적인 신을 따른다면 억압을 떨쳐 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반대로, 자유롭게 행하시는 하나님, 곧 기존 체제로부터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그 체제를 반대하실 만큼 자유로운 분, 노예들의 탄식을 들어주실 뿐만 아니라 응답해 주실 만큼 자유로운 분, 제국이 정해 놓은 모든 신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운 하나님을 인정한다면 이 사실은 사회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자유로운 새 하나님을 소개하거나 사회 해방의 메시지를 선포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를 인간적인 정의의 정치와 결합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이처럼 파라오의 정적인 승리주의와 억압 체제에 대한 모세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비판과 활성화로 구성되어 있다. 출애굽기 1~12장에 걸쳐 전개되는 출애굽의 구원 이야기는 이집트 제국의 번영과 막강한 힘을 분쇄하는 하나님의 심판과 재앙의 드라마다. 파라오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이스라엘의 탄원과 하나님의 긍휼로부터 시작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예언자적 긍휼이 역사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점이다(출 2:23~25). 모세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는 하나님의 약속과 미래를 제시함으로써 예언자적 활성화의 생생한 예를 제공한다.
하나님의 자유와 기존 질서를 해체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
제2장 ‘왕권 의식과 대항 문화’에서 저자는, 모세의 대항 공동체 구축활동은 단순한 반체제적인 사회활동과는 구분된다고 말한다. 모세의 대안 의식, 곧 예언자적 상상력은 종교와 정치 사회적 기존 질서의 해체에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이 대안 의식은 첫째, 체제 고착적인 질서의 신(神) 관념에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대립시킨다. 이집트의 신들에 의해 영원한 가치가 있다고 선포된 것들이 하나님의 자유 앞에 무력화된다. 둘째, 인간 공동체를 형성하는 일에 결정적으로 중요한 요소는 정의와 긍휼이라는 관념임을 역설한다. 노예와 산파들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하나님의 자유라는 관념을 받아들임으로써 이집트의 정적인 승리주의 종교를 돌파할 수 있었다. 노예로 이루어진 소수자 집단이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주장할 수 있었던 까닭은, 그것이 억압적인 상황에 저항하는 데 유일한 버팀목이 되어 줄 사회적인 비전이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파라오 체제와 모세의 갈등이 솔로몬적 왕정 체제와 그것에 대항하여 일어난 예언자들에 의해 재현되고 계승되었다고 본다. 브루그만은 솔로몬이 이룬 풍요와 번영은 일부분 억압적인 사회정책 때문이었다고 본다. 솔로몬의 풍요(왕상 4:20~23)는 억압의 정치(왕상 5:13~18; 9:15~22)가 가져다준 선물이요 하나님의 친근성을 과도하게 강조하는 내재적 종교(왕상 8:12~13)에 의해 뒷받침되었다는 것이다. 솔로몬 체제의 내재적 종교는 모세가 그토록 강조했던 하나님의 자유와 하나님의 접근성 사이에 마땅히 존재해야 할 긴장 관계를 해소해 버렸다. 하나님의 접근성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자유를 강조하는 쪽을 택했던 모세의 종교와 하나님의 접근성을 강조한 솔로몬의 종교는 날카롭게 충돌하게 되었고, 이 충돌이 왕국 시대의 예언자 운동의 배경을 제공했다.
제3장 ‘예언자적 비판과 파토스의 포옹’에서 저자는, 예레미야를 모세적 의미의 예언자적 상상력을 구현한 예언자의 전범으로 파악한다. 예레미야는 애통의 시가를 통하여, 왕권 체제가 있는 힘을 다해 지켜 내려 했던 사회 세계가 종말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선포하고자 애썼다. 그의 예언자적 비판은 분노가 아니라 고뇌였다. 하지만 솔로몬 체제가 구현한 왕권 의식은 사회의 변두리로 내몰린 자들과 연약한 구성원들의 고통에 공감할 수 있는 격정을 잃어버렸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에 대항하여 예언자적 상상력과 그것에 입각한 상하고 찢긴 공동체 구성원들의 아픔과 탄식을 체현했다. 그는 애통과 공감을 잃어버린 왕에 맞서서 모세적 대안 의식을 구현했다. 냉담한 풍요와 냉소적인 억압과 뻔뻔스런 종교에 맞서서 그는 애통과 격정, 공감과 체휼의 종교를 주창했다.
제4장 ‘예언자적 활성화와 경탄의 출현’에서 저자는, 예레미야의 사역이 단지 근원적 비판을 넘어 가장 대담하고 창조적인 희망을 선포한 목회였음을 역설한다. 앞서 말했듯이, 예언자적인 대안 공동체는 비판과 동시에 활성화를 기도(企圖)한다. 예레미야의 목회는 유다 공동체와 바빌론 포로 공동체에게 생생한 신앙과 생명력을 불어넣어, 파국적 멸망 너머로부터 오는 하나님의 미래를 주목하도록 했다. 왕권 의식이 백성들로 하여금 새로운 삶을 향해 나가는 힘을 포기하고 닫힌 현실에 안주하도록 만드는 반면에,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충만했던 예레미야의 목회 과제는 백성들로 하여금 역사 속에서 일하시며 마침내 새 일을 추진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도록 돕는 일이었다.
기원전 587년에 유다가 바빌론에 의해 멸망당한 왕권 의식이 자신에게 아무런 자원도 남기지 않다는 현실을 깨닫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왕권 의식을 지배했던 절망을 뚫고 하나님의 깊은 섭리 속으로 들어가 유다의 종말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새로운 시작을 통찰했다. 이 공공연한 예레미야의 예언자적 희망의 근거는, 야웨께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품으신 한결같은 질투였다. 이러한 질투 때문에 하나님은 자기 백성과 함께하시고,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여기시고, 자신의 미래를 그들의 미래로 허락하셨다. 이 하나님의 질투에서 비롯된 새 일은 예언자들에게 경탄의 언어를 고취시켰다. 특히 제2이사야는 절망한 왕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예언자를 위한 경탄 언어의 대표적 전령이었다. 그는 예레미야 애가의 파토스와 욥의 분노를 알았고, 또 그것을 몸으로 체험하며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파토스와 분노를 뛰어넘어 희망과 송영의 언어로 나아간다. 제2이사야의 시는 포로생활의 종식과 그 후에 벌어질 하나님의 새 역사를 다채로운 경탄의 이미지로 선포했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제5장 ‘나사렛 예수의 비판과 파토스’는 이런 예레미야와 제2이사야 등의 예언자적 비판 목회가 어떻게 나사렛 예수에게 발전적으로 계승되었는지를 추적한다. 브루그만은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상상력이 어떻게 현실을 변혁하고 당대의 지배 문화였던 왕권 의식을 비판했는지를 자세히 논한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그 자체만으로도 지배 의식에 대한 결정적인 비판이 된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 그리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예수와 기존 권력자들과의 껄끄러운 갈등은 모두 왕권 의식을 비판하는 대안 의식의 등장을 웅변한다. 둘째,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막 1:15; 눅 4:18~19)는 하나님의 친정통치 시대가 도래했음을 통고하는 한편, 당시의 지배 권력자들과 그 하수인들에 대한 냉혹한 비판을 함의한다.
왕권 의식에 도전하는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는 그의 목회를 통해 실체화되었다. 예수의 근원적 비판을 대표하는 몇 가지 사역들을 살펴보자. 첫째, 예수의 용서 메시지와 용서 행위(막 2:1~11)는 현존하는 종교 체제의 중개 기능과 권위를 위협하는 행위였다. 한나 아렌트가 지적했듯이, 예수가 위험을 자초하게 된 가장 근원적인 행동은 죄 용서였다. 둘째, 예수의 안식일 치유(막 2:23~28)는 안식일을 관장하고 거기서 이익을 얻는 사람들의 아성을 공격하는 행위였다. 당시 안식일은 사회의 안정을 나타내는 성스러운 표지였기 때문에 안식일 계명을 ‘위반’하는 일은 사회질서를 교란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셋째, 버림받은 사람들과 거리낌 없이 나누었던 예수의 밥상 교제는 사회의 근본 도덕을 뒤흔드는 일이었다. 정결한 것과 부정한 것, 옳은 것과 그른 것을 나눔으로써 유지되던 종교 체제를 무력화 하는 일이었다. 넷째, 예수의 병자 치유와 귀신 축출은 인간을 병들게 하고 귀신 들리게 하는 극단 경험으로 몰아 가던 당시의 악마적인 사회 체제, 권력 관계의 실상을 폭로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회가 불결하다고 판정한 사람들(막 7:24~30)과 죄인들(막 2:1~12), 하나님께 벌 받은 사람들(요 9:1)까지 하나님나라로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무한 자비의 과시였다. 다섯째, 당시 천대받던 여인들에 대한 나사렛 예수의 긍정과 존대는 성차별적 남성지배사회를 타격하는 사회 비판적인 자비의 실천이었다. 여섯째, 세금과 빚에 대한 예수의 담론(마 20:1~16)은 단순히 영적인 가르침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금과 십일조, 사용료, 소작료, 압류 처분으로 인한 재산 상실 등의 문제로 시달리던 갈릴리와 유대 농민들을 자유하게 하려는 예수의 정치적 해방 담론이었다. 마지막으로, 예수가 성전에 대해 보였던 태도(막 11:15~19; 요 2:18~22)는 가장 불길한 체제 전복적 위협으로 간주되었다. 예수는 성전을 비판함으로써, 사실은 자기만족적이고 교조적인 이데올로기로 전락한 성전체제주의자들의 선택 교리를 공격한 것이다.
나사렛 예수의 하나님나라 선포와 실천은 예언자적 긍휼에서 발원되었다. 긍휼은 비판의 근원적 형태이다. 예수의 긍휼은 단순히 개인의 감정적인 반응이 아니라 공적인 사회 비판이었다. 예수는 이 아픔 속으로 뛰어들었고, 마침내 그것을 자신의 몸으로 구현했다. 예수는 지배 문화가 거부한 사람들의 애통을 긍휼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냈으며, 이렇게 아픔을 구현하는 행위를 통해 드러나는 그의 권위는 지배 문화의 파멸적 종말을 분명하게 선언한다.
그러므로 예수의 십자가 처형은 왕권 의식에 대한 결정적 비판이 된다. 브루그만은 예수의 십자가 처형을 고매한 사람의 희생이라고 이해하는 자유주의도 거부하고 중보적인 속죄 죽음이라고만 말하는 보수주의도 거부한다. 오히려 그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 속에서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을 본다. 그 행위를 통해 예수는 죽음의 세상이 종말에 이르렀음을 선포하면서 죽음을 자신의 인격으로 끌어안는다. 예언자적 비판의 궁극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이 당해야 할 죽음을 대신 끌어안으신 사건이다. 이러한 궁극적 비판은 의기양양한 분노로 가득 찬 비판이 아니라 격정과 긍휼로 이루어진 비판이다. 더 나아가, 예수의 수난 고지들과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한 말들은 지배 문화와 왕권 의식의 철옹성 같은 죽음의 질서를 궁극적으로 해체한다. 근원적 비판을 이루는 이 전승은 자기를 내어 주는 예수의 비움, 지배권을 포기함으로써 다스림, 그리고 자기비움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완성에 관해 말한다. 복종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권력을 포기하고 모든 것을 비운 이 분은, 다른 누구도 엄두를 못 낼 권위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허락하는 지고의 권력자이다. 이 자발적인 권력 포기를 통해 하나님께 절대적 순종을 드린 예수에 대한 십자가 처형은 신앙의 역사 속에 등장한 결정적인 사건이기는 해도 뜻밖의 사건은 아니다. 오히려 십자가 처형은 모세가 파라오와 맞서 싸운 이래로 예언자들이 겪어 온 고난과 희생의 총화이다. 모세와 마찬가지로 예수는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무기 삼아 억압의 정치에 맞서 싸웠으며, 이 모든 일이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모세처럼 예수도 하나님을 포로로 삼은 종교에 대항해, 하나님의 자유 곧 당신의 뜻대로 행하시고 죽음에 대해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시는 그 자유를 무기 삼아 싸웠고, 이 일 역시 그의 목회와 죽음에서 드러난다.
제6장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와 경탄’에서 저자는, 나사렛 예수의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을 더 깊이 다룬다. 그 예언자적 사역의 궁극이란 단지 낡은 체제에 대한 그의 비판에 있지 않고, 그가 하나님의 자유의 종교와 정의와 긍휼의 정치를 통해 새로운 인간적인 시작을 열었다는 데 있다. 나사렛 예수가 말과 행동, 특히 십자가 처형을 통해 왕권 의식을 해체하는 일을 했으며 또 그의 공동체를 향해 그러한 해체를 슬퍼하라고 요구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의 일에서 핵심은 해체가 아니라, 전혀 새로운 하나님나라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나사렛 예수의 활성화 사역이다. 첫째, 예수의 탄생은 새로운 사회 현실로 나아가게 하는 결정적인 활성화를 의미했다. 모든 옛 역사는 로마 제국 황제의 호적 포고령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예수가 창시한 새로운 역사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작한다. 새 왕의 탄생은 하늘과 이 땅에서 전혀 다른 식으로 열리는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표지이다. 이 새로운 시작은 옛 질서의 희생자들로부터 나온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늙은 여인(엘리사벳), 결백하지만 믿음으로 행한 젊은 여인(마리아), 말문이 막혀 버린 늙은 남자(사가랴), 그리고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들(목자들) 가운데서 시작이 이루어진다. 둘째, 예수의 목회도 근원적인 시작을 열어 주는 활성화다. 예수의 탄생이 새로운 시작에 대한 희망을 담고 있는 반면에, 예수의 사역은 그 희망의 가능성들을 절망의 세상 속에서 온전히 이룬다. 예수의 사역은 대부분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희생자들 가운데서 이루어졌다. 셋째, 예수의 가르침은 그의 목회보다 훨씬 더 근원적이었다. 버림받은 사람들과 함께 식사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내부인과 외부인을 가르는 구분이 무너지고 백지화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은 훨씬 더 근원적인 일이다. 치유하고 죄를 용서하는 일도 가치 있지만, 사람들을 병자와 죄인으로 만드는 조건들이 더 이상 통할 수 없게 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더 큰 일이다. 특히 누가복음에 나타난 예수의 지복 선언이 근원적인 새로움의 결정체다.
마지막으로, 예수의 부활이야말로 새로운 미래로 향하게 하는 궁극적 활성화다. 부활은 지금까지 존재한 현실에 근거해서는 설명이 안 되는 전적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구원 행위다. 저자는 부활의 역사적 유일회성이라는 특성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부활이 예전에 예언자들의 말에 의해 제시되었던 대안적 미래와 동일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모세의 대안 공동체가 능력의 말씀으로 노예들을 해방하신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미래를 선사받았듯이, 예수의 부활은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에게 미래를 열어 주었다.
제7장 ‘목회의 실천에 관한 주’에서 저자는, 1~6장의 내용을 요약한 후에 예언자적 목회와 관련된 실천적인 문제들을 다룬다. 브루그만은 예언자적 목회는 거창한 사회적 십자가 운동이라든가 의분을 쏟아 내는 비판적인 행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대안적 인식을 제시하는 목회라고 주장한다. 그는 예언자적 목회의 특징을 네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예언자적 목회의 과제는, 자기들에게 특별한 방식을 따라 행하는 특별한 사명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대안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다. 둘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상에 대해, 그리고 어떤 상황에든 빛을 비출 수 있는 생명의 말씀을 취하는 태도와 자세, 해석학에 관심을 갖는다. 셋째, 예언자적 목회는 죽음의 세력에 맞서기 위해 애통과 탄식을 피력함으로써 무감각을 꿰뚫고 들어간다. 고통을 드러내어 함께 나누는 일은 고통의 현실을 가라앉게 만들고 죽음을 몰아내는 방법이 된다. 넷째, 예언자적 목회는 절망을 꿰뚫고 들어가서는 사람들이 새로운 미래를 믿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우리에게 미래가 있음을 믿고 그 미래를 우리에게 있는 그대로 확증해 주는 말과 몸짓과 행동만이 활력을 불어넣어 줄 수가 있다.
마지막에 저자는, 이런 예언자적 목회를 가능하게 하는 예언자적 상상력, 근원적 신앙은 인간이 쌓을 수 있는 공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는 예수의 관심이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있었음을 강조한다. 예수는 이 기쁨을 약속했으며, 사람들을 이 기쁨으로 초청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미래를 기뻐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질서에 애통할 필요가 있다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그런데 이 애통이야말로, 하나님나라의 기쁨에 이르기 위한 형식적이고 외적인 요구사항이 아니라 유일한 문이자 통로가 된다.
끝으로 저자는,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애통과 희망이 지배 문화의 굴레를 깨뜨린다는 확신을 지닌 참된 신앙인들이 행하는 구체적인 실천임을 강조하며, 결미에 목회의 실천 후기를 첨부한다. 슬픔과 희망을 품고서 저항과 대안을 이루는 일에 참여하는 구체적인 하위 공동체 몇 곳을 제시하고, 그들을 통해 예언자적인 상상력이 현장에서 실천되는 모습을 살펴본다.
예언자적 목회는 오늘도 가능하다
브루그만은 번영과 풍요를 구가하는 미국의 주류 사회를 흔들어 깨울 예언자적 목소리는 ‘자연스럽게’ 정치 경제적으로 주도적인 공동체와 갈등관계에 있는 하위 공동체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는 미국의 소비주의가 예언자적 담론과 행동을 촉발시키는 가장 주요한 환경이라고 말한다. 결국 예언자적 목회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 능력과 영적 감수성을 잃어버린 주류 문화에 창조적으로 대항하는 하위 공동체를 길러 내는 목회라는 것이다. 그것은 분파주의로 후퇴한 태도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며, 또는 끝없이 저항과 비판을 제기하고 대결적인 ‘사회 행동’을 실천하는 삐딱한 공동체를 지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지배 문화가 이루어 놓은 모든 ‘가상현실’에 맞서는 생명과 희망의 공동체를 일구는 목회다.
이처럼 브루그만의 <예언자적 상상력>은, 예언자가 먼 옛 과거에 속한 인물이 아니라 바로 우리 시대에 출현할 수 있는 인물임을 보여준다. 예언자의 서식지는, 고도의 자본주의적 소비주의 사회, 경쟁과 탐욕으로 인간의 정신을 마모시키는 도시의 소비문화에 의해 생존의 벼랑 끝으로 내몰린 자들의 누추한 삶의 자리다. 도시에 속한 교회가 바로 이 과도한 욕망 충족의 사회인 도시 문화를 해체하고 자애와 형제적 우애가 넘치는 사귐의 공동체를 이루는 예언자적 목회를 하기에 적합한 하위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교회는 왕권 의식에 젖어 자신의 종말이 도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벳세다와 고라신과 가버나움 같은 도시 사회가 아니라, 가난하지만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애통하지만 하나님의 은밀한 위로를 경험하는 산상수훈 시민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브루그만은 무감각과 냉정함으로 강퍅하게 된 도시 문화를 살릴 수 있는 유일한 목회는, 예언자적 상상력으로 가득 찬 비판과 활성화를 두 축으로 하는 예언자적 목회임을 설득력 있게 제시한다. 예언자적 목회는, 기존 권력자들과 날카롭게 충돌하다가 감옥에 가고 이후 정치적 유명 인사가 되어 주류 사회로 진입하는 그런 목회가 아니라, 지배 문화의 변두리에서 시작한 하나님의 애통과 체휼 목회를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죽을 때까지 비영웅적으로 감당하다가 남몰래 죽는 목회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교회가 참으로 인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말이, 더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가 보혈로 값 주고 사신 기업(基業)이라는 말이 아주 실감나게 다가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