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5. 묵상 여정의 동반자 (1) : 공동체 (말씀과 사역 연구소) |작성자 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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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와 너의 모호한 경계 

1.1. 나와 너의 경계 

내 기도 속에서 타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던가? 내가 존경하는 사람, 내가 사랑하는 사람, 때로는 나를 불편하게 했고 낯뜨겁게 했지만 맞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그 사람의 언어를 어느새 내가 사용하고 있지는 않던가? 너무나 낯설고 기이하여 내 것을 다 버리지 않으면 수용할 수 없었고 그래서 내 속에 들어와 보지도 못하고 문전박대 당한 줄 알았던 생각이, 장마철 지하 자취방 벽을 타고 피어 오르던 곰팡이처럼 서서히 엄습하여, 어느 날 아침 느닷없이 점령군 행세를 하지 않던가? 그런데도 나는 별로 비굴하다가 생각하지 않으면서 인용 부호를 넣을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도리어 그것이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것처럼 사자후(獅子吼)를 토하고 있지 않던가? 이렇듯 어디까지가 내 생각이고 어디서부터가 남의 생각인지 알 수 없고, 인용과 표절, 순종과 굴종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일이 우리에게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1.2. 나를 정의하는 너 

“나는 나다(I am who I am)”(출 3:14)라고 하셨던 하나님 말고는 우리는 아무도 자기 자신만으로 자신을 정의할 수 없고 설명할 수도 없는 존재들이다. 나라는 존재는 오로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삶의 조건이나 관계를 통해서만 규명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나고 자란 곳과 나의 가족과 친구들, 내가 다닌 학교와 내가 읽은 책, 나의 직업, 내가 만난 사람과 내가 겪은 일들이 오늘의 나를 형성했다. 아무도 스스로 존재할 수 없고,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 누구나 오늘 내가 마련한 삶의 조건으로 내가 기대한 내일을 맞이하여 살고 더 많은 소유와 권력이 더 안정되고 예측 가능한 내일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라고 믿는다. 그것이 우리가 가장 많이 속는 인생 최대의 기만적인 진실이다. 그처럼 확실한 불안보다는 불확실한 안정을 택하는 것이 인간이다. 유익하더라도 불확실한 것보다는 무익하더라도 확실한 것을 더 좋아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살지(to live) 않고 살아지는(to be lived) 존재라는 엄연한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능동적인 존재인 만큼 수동적인 존재도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나의 이웃이, 나의 공동체가, 내가 맺고 있는 무수한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무엇보다도 내 존재의 근거 되시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나를 정의한다.  

1.3. 나를 발견하게 하는 너

성경 묵상의 여정은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이다. 그것은 ‘되고 싶은’ 내가 ‘이미 된’ 나의 모습을 감추려고 바른 짙은 분장을 지우고 속살을 감춘 껍데기를 벗기고 나 자신과 정직하게 대면하는 일이다. 그런 내가 적나라한 날 것으로 하나님을 뵈옵는 통쾌한 고통이요 끔찍할 만큼 행복한(terribly happy) 작업이 묵상의 여정이다. 나를 만날 용기가 없이는 하나님을 온전히 대면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데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나게 해주는 것이 바로 성경과 성령과 공동체다. 에드워드 패럴이 그것을 잘 지적하고 있다. 

“경청하는 이는 드물다. 살다 보면 편하게 이야기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는 특별한 사람들을 만나는 때가 있다. 그들에게는 들을 수 있는 대단한 역량이 있기 때문이다. 그냥 말만 듣는 것이 아니라 인간인 우리를 듣는다. 이전보다 높은 수준의 말하기를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 우리가 이전과 전혀 다른 모습이 될 수 있게 해준다. 그러므로 우리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의 참 모습을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을 찾기 전에는 우리 자신을 참되게 알지 못할 것이다. 자신을 발견하는 일은, 혼자 힘으로는 어렵기 그지 없다.” 

히말라야를 오르는 이들에게 셰르파는 지도 자체일 뿐 아니라 짐꾼이고 길동무이고 내 목숨을 지켜주는 자일이다. 성경이 묵상 여정의 지도이고 나침반이라면, 성령과 성도 혹은 거룩한 공회인 교회는 그 여정의 동반자, 즉 셰르파 같은 존재들이다. 지도를 읽을 수 있는 독법을 제시해 주는 선생이요, 사실상 운명 공동체다. 그들은 나를 형성하고, 나를 지도하고, 나를 발견하여 하여, 함께 하나님을 알현하는 영광 속으로 들어가는 한 몸이다. 



2. 공동체를 수용하기

2.1. 소극적인 수용: 공동체에게 나를 허용하라

헤셸은 “우리에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교과서(敎科書)가 아니라 교과인(敎科人)이다. 교사의 인품은 학생들이 읽는 본문이다. 그들은 절대 까먹지 않을 본문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 스스로 자신을 읽기 전에 우리는 공동체에 의해 읽혀야(to be read) 한다. 그들이 우리 자신을 읽고 영향을 미치도록 공동체를 위한 공간(空間)을 우리 안에 마련해야 한다. 세상은 누군가의 생각을 수용하고 명령을 수행하는 것을 수치로 여긴다. 자기 생각과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을 긍지로 여긴다. 내가 생각하는 듯이 믿고 생각하고 내가 행동하듯이 행동하면 나와 상관 있는 사람으로 받아주겠다고 한다면 나는 공동체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조건을 둔 사랑이며 대가를 바라는 사랑이고 따라서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조건을 강요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조건이 우리 세계로 들어오도록 허용해야 한다. 자기 부인의 사랑이 아니고는 결코 공동체를 얻을 수 없다.  

공동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을 기록하신 또 다른 책이다. 성경은 이미 성경 저자들과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과한 그들의 간증이고 고백이다. 그 시대의 도전을 향한 저자 공동체의 신학적인 응전(應戰)이다. 그 성경이 나 자신을 읽게 하는 것이 성경묵상이라면, 그 성경을 읽은 공동체가 나를 읽고 나를 질책하고 나를 일깨우고 나를 격려하도록 맡기는 것 역시 성경묵상이다. 성경 묵상을 하는 나는 이미 단독자로서의 ‘나’가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과 함께 하는 ‘나’이기 때문에, 나를 향한 관심사와 공동체의 관심사는 별개가 아니다.  

2.2. 적극적인 수용: 나에게 공동체를 허용하라

1) 환대

공동체와 내가 하나라는 점에서 나는 끊임없이 영향을 받을 준비를 하는 동시에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영향을 주고 있는 존재다. 따라서 이기적인 오만함은 공동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나아가 자신의 존재를 파괴하는 무서운 질병이다. 공동체에게 내 사랑을 증명해 보여야 하는 동시에 그들에게 자유를 주어야 하고, 나를 긍정해야 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위해 나를 부정해야 하는 둘 사이에 우리는 끼어 있다.  

소로우(Thoreau)는 말한다. “나는 어떤 일이 있어도 내 삶의 방식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지 않으련다. 그 사람이 내 삶의 방식을 충분히 익히기 전에 내가 다른 생활 방식을 발견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외에도 나는 이 세상에 될 수 있는 한 많은 다양한 사람들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나는 각 사람이 매우 신중한 태도를 가지고 자기 아버지의 생활방식이나 어머니의 생활 방식, 이웃의 생활 방식이 아닌 자기만의 방식을 찾고 추구하게 하련다.”  

소로우의 생각이 바로 환대(hospitality)의 네덜란드어 ‘하스토레이하이트’가 뜻하는 바다. 이 단어는 ‘손님의 자유’라는 뜻이란다. 손님에게 큰 사랑을 느끼게 하면서도 동시에 구속이나 부담을 주지 않고 자유를 주는 것이 환대라는 뜻일 것이다. 주인에게 가장 좋은 것이 늘 손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지는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공동체에 기여하고 변화시키고 영향을 미치려고 하기보다는 그들이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 선택하고 스스로 자신을 발견할 수 있도록 장을 마련해 주는 것이 참된 섬김이다. 선택할 다른 대안이 없는 구석으로 이웃을 몰아 가는 것이 아니라 폭넓은 선택과 위탁을 할 수 있도록 장(場)을 열어주는 것이다.  

2) 가난한 마음과 가난한 생각

이를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가난한 생각’과 ‘가난한 마음’이다. 즉 ‘겸손’(humbleness)이다. 겸손을 통해서 우리는 ‘공동체라는 본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으며, 공동체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수 있게 된다. 헨리 나우엔은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우리 얘기하는 것을 그친다면 세상은 더 이상 이러저러한 모습으로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  

무슨 운동을 배울 때든지 우리는 우리를 잘 아는 코치에게서 똑 같은 요구를 받는다: “힘 빼십시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라는 요구다. 힘이 들어간다는 것은 자기도 모르는 자신의 습관을 고집하겠다는 뜻이 된다. 코치에게 모든 것을 맡기지 않으면 코치가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다. 내 스타일, 내 취향, 내 목표를 고집하면 공동체는 없다. 그것은 스스로도 모르는 자신을 고집하겠다는 것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가난이 훌륭한 주인을 만든다. 아무도 가난한 사람에게는 자기를 방어하려고 애쓰지 않는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킬 것이 있는 한 우리는 어느 정도는 방문객을 적대자로 여길 수밖에 없다. 하지만 가난한 주인은 우리에게는 잃어버릴 것이 아무것도 없고 단지 주어야 할 것만 있는 존재다. 인생의 신비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생각의 가난과 나는 쉽게 선입견과 걱정과 시기에 가득 찬 사람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하는 마음의 가난이 나에게 공동체를 가져다 준다.  

그것은 나의 지식과 경험과 감정으로 남을 대하지 않겠다는 태도다. 그럴 때 나의 삶보다 더 위대한 삶이 있고, 나의 역사보다 더 뛰어난 역사가 있고, 나의 경험보다 더 큰 경험이 있고, 내가 아는 하나님보다 더 위대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공동체를 통해서 볼 수 있게 된다. 그 때 비로소 성경 속의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권면(베드로전후서)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순종하려고 하고 그것에 의해 내가 영향을 받는 것을 굴종으로 여기지 않고, 그 말씀이 나의 기도가 되고 고백이 되고도 표절이라고 말하지 않듯이, 공동체의 체험과 고백과 권면과 꾸짖음을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때 그들의 살아온 역사가 나의 역사와 창조적으로 연결되며, 그들의 삶은 나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주고 그들이 느끼는 하나님이 내가 느끼는 하나님에게 서로를 드러내며 대화할 수 있게 된다.     

그래서 과거 성직자의 훈련 단계 중에서 배움을 통해 터득한 확실한 무지인 독타 이그노란티아(docta ignorantia)를 익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교육을 받아서 자기 마음대로 상황을 통제하고 사물을 자기가 바라는 대로 움직일 수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성직자가 되기 위한 교육은 하나님을 부리기 위한 교육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림을 받기 위한 교육이다. 수련의 기간은 지식을 익히는 기간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을 버리는 기간이고, 공동체를 섬길 때는 많은 말로 가르치려 들기보다는 많은 것을 듣는 사람이 되게 하는 훈련이다. 빈틈없이 교육을 잘 받은 성직자라면, 하나님이 어떤 분이고 선과 악이 어떤 위치에 있으며 이 세상에서 저 세상으로 어떻게 가는가를 정확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분명한 무지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하는 말 속에서, 그 날의 여러 가지 사건 속에서, 또 다른 시간과 공간 속에서 존재하는 사람들이 겪은 삶의 경험을 담고 있는 여러 책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마음껏 듣는 사람이 될 것이다.  

  요하네스 메츠(Johannes Metz)는 이 가난한 마음과 생각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상대방을 내리누르며 우리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본다. 그럼 우리는 상대방의 존재에 감춰져 있는 신비한 비밀과 진정으로 만날 수 없으며, 오로지 우리 자신만을 만날 뿐이다. 만남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는 새로운 형태의 자기 주장에 빠져버리며, 거기에 대한 대가를 지불한다. 그 대가란 외로움이다. 자기를 열어 놓음으로 인한 가난을 무릅쓰려고 하지 않기에 우리의 삶은 인간 존재의 포근한 충만함으로 빛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진짜 자신의 그림자만 안고 사는 것이다.” 

생각과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 만족을 추구하지 않고, 삶의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창조적인 상호 의존감을 추구하기에, 그런 자들만이 진정한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 



3. 대립을 통한 하나됨 

손님에게 자유를 준다는 것이 손님에게 빈 집을 내준다는 뜻은 아니다. 버나드는 사랑의 4단계 가운데 가장 높은 단계를 놀랍게도,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 나를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공동체를 진정으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의 위치를 정하는 한계선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것이 겸손한 선이고 융통성 있는 선이어야 하지만, 모호한 중립성 뒤로 숨어서는 안 된다. 때로 우리는 자신의 생각과 의견과 생활방식을 분명하고도 명료하게 드러냄으로써 공동체와 맞서기도 해야 한다. 그것이 살아있는 관계다. 자기 주관이 있는 사람과 자기 신념이 없는 사람 사이에 진정한 대화란 있을 수 없다. 헨리 나우엔은 말한다: “우리 나름의 삶의 선택과 태도와 관점이 경계선이 되어서 그 경계선에 자극을 받아 방문객이 자신의 입장에 대해서 의식하게 되고 그 입장을 비판적으로 탐구할 때, 우리는 대화할 수 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된다. 나를 향한 긍정과 부정, 자기만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자기를 사랑해야 하는 두 긴장 속에서만 우리는 공동체와 건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4. 나가는 말 

넬슨 만델라는 자서전  ‘멀고 먼 자유의 길’에서, 다른 정치범들과 거의 30년을 보낸 로빈섬에서의 생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당국이 저지른 최대 실수는 우리를 함께 수용한 것이었다.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결의는 더욱 굳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 붙들어 주었고, 서로에게서 힘을 얻었다. 알고 있던 바와 새롭게 알게 된 것들을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각자의 용기는 몇 배로 늘어났다. 그러나 우리 모두 눈앞에 닥친 어려움에 똑같이 반응하지는 못했다. 사람마다 능력이 다르고, 스트레스 반응하는 방식도 다르다. 그래서 더 강한 자들이 약한 자들을 일으켜 주었고, 그 과정에서 둘 다 강해질 수 있었다.” 

  자신을 찾아가고 함께 믿음의 순례의 길을 걸어가도록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가장 놀라운 지혜가 ‘교회’(공동체)이고, 사탄에게는 가장 절망적인 무기가 ‘교회’(공동체)일 것이다. 공동체를 통해서 우리는 나를 발견하고, 하나님을 발견하고, 또 끝까지 순례의 길을 포기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을 만큼 강해진다. 아프리카의 속담에 “혼자서 많은 멋진 것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 어느 것도 사실이 아니었다”는 말이 있다. 내가 읽고 보고 느끼고 경험한 하나님은 하늘의 무수한 별 중 하나일 뿐이고, 수많은 직소퍼즐 중 한 조각일 뿐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은하수를 만나고 온전한 메시지를 듣게 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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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묵상의 길잡이 : 성경 - 박대영 목사님


1. 즉흥 연주와 텍스트

랑카스터의 겨울 밤은 깊어가고 벽난로가 넓은 홀을 데워주고 있었다. 기숙사 학생들이 둘씩 서넛씩 옹기종기 모여 홍차 한 잔 앞에 두고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서 토론을 하기도 하고 바닥에 앉아 체스도 하면서 쉬고 있었다. 큰 웃음을 터뜨리는 재미난 이야기와 빨갛게 달아오른 열띤 대화가 있었지만, 모두들 자신들이 들어야 할 또다른 소리가 있기나 한 듯이 옆 사람이 간신히 알아들을 만한 저음들을 주고 받는다. 학생들의 다른 쪽 귀는 잔잔히 들려오는 피아노 연주를 향해 열려 있었다. 벌써 1 시간이 다 되어간다. 미국에서 온 학생 둘이 두 대의 피아노로 재즈를 연주하고 있다. 놀랍게도 악보 없는 즉흥연주다. 둘은 평소 잘 아는 사이도 아니고 여기서 처음 만났다. 연주가 끝나자 귀 기울여 듣지 않는 듯 하던 아이들이 큰 함성과 휘파람을 부르며 감사를 표한다. 

한 친구에게 어떻게 그렇게 긴 시간 즉흥연주를 할 수 있느냐고 물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것은 아니란다. 악보는 없지만 약속은 있단다. 재즈 고유의 코드 진행 방식이 있는데, 그 규칙을 잘 지키고 그 길을 따라가면, 그 안에서 연주자 개인에게 큰 자유가 주어진단다. 연주자마다 누리는 그 자유가 다양한 빛깔의 연주를 만들어낸단다. 하나 더 있다. 함께 연주할 때는 동료를 배려하는 자유의 절제가 필요하단다. 상대가 앞에 서면 자신은 배경이 되어 주고, 자신이 앞으로 가면 동료가 배경이 되어 주어야 한단다. 배려는 더 큰 자유를 만들어내지만, 무언의 약속과 소통이 깨지면 연주는 ‘혼돈’에 빠지게 된단다. 그렇게 우리는 1시간 동안 연주자와 재즈의 대화, 그리고 두 연주자 간의 조화로운 대화를 엿듣고 있었던 거다. 약속을 지키는 자유,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자유, 상대를 배려하는 자기 부정의 자유가 빚어낸 고른 숨소리를 듣고 있었던 거다. 그들에게는 그 약속과 배려가 ‘보이지 않는 악보’였던 거다. 



2. 악보 없는 연주, 대본 없는 연극, 지도 없는 여정의 세상

하나님을 떠나 독립을 선언한 세상은 곧바로 ‘혼돈’이 되었다. ‘자기 눈에 옳은 대로’ 살 뿐이다. 길도 없고 규칙도 없고 배려도 없다. 자기 느낌, 자기 필요, 자기 만족의 지도를 따라서 자기가 만든 길을 가고, 그 길이 자신이 되는 인생을 산다. 화려한 수사로 장식된 소경들의 공허한 허풍만 가득하고, 곳곳마다 경적과 욕지거리로 시끄럽다. 악보도 없고 지휘도 없는 오케스트라가 만들어낸 불협화음이다. 대본 없이 무대에 선 연극 배우들의 무의미한 좌충우돌이다. 지도 없이 떠나는 위험천만한 정글 여정이다. 그러나 아무도 말을 멈추고 들으라고 말해주지 않는다. 아무도 말리지 않는다. 그저 존중과 관용(tolerance)을 최고의 미덕으로 떠받들 뿐이다.  

그것이 “네 맘대로 하세요”라고 말하는 우리가 사는 포스트모던 시대의 우상이다. 전에는 없던 새로운 시대가 당도한 듯이 호들갑이다. 하지만 이성을 척도로 삼던 모던시대나 그 이성 자체를 해체한 포스트 모던 모두 하나님 없이 자기 맘대로 살겠다는 생각의 동종변이일 뿐이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 혹은 성경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오만하고 편협한 잣대일 뿐이다. 모던은 “너만 옳으냐”고 대놓고 반대했다면, 포스트모던은 “다 같이 잘해보자”고 웃으면서 반대할 뿐이다. 그들은 모두 하나님이 아닌 자아가, 성경이 아닌 나의 경험이 텍스트이고 기준이고 권위라고 주장한다. 무례한 성경이 자신들을 환기시키고, 자극하고, 꾸짖고, 다듬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모른다. 너무 많은 선택의 자유가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궁지로 몰아가고 우리는 선택하는 자유를 빼앗기고 자발적으로(?) 선택하도록 강요당하고 있다는 것을, 자아와 자기 체험을 가장 권위 있는 텍스트로 삼는 한 그들은 자기 통제력을 상실한 채 익숙하고 길들여진 것에 이끌려 살고 있다는 것을. 이마트에 진열된 수십 종의 우유 중에 무엇을 사야 하는지 결정하지 못하다가 그냥 먹던 거 먹었던 거 기억하는가? 선택을 하지 않을 자유가 있지만, 정말로 그 자유를 행사했을 때 그 무모한 용기의 대가가 얼마나 혹독한지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고도 우리는 자유롭다고 착각한다. 



3. 소통의 하나님, 소통의 나라 

3.1. 낯선 세계로 인도하는 성경

창조자 하나님 안에서만 인간은 자유롭다. 그래서 묵상은 명상도 아니고 공상도 아니다. 자신에 대한 통렬한 성찰과 면벽수도만으로는 자신을 알지도, 찾지도, 만나지도 못한다.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그 새로운 재해석의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나를 지으신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을 기록한 성경이다. 성경만이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며, 이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 인생이 돌아가는 방식, 그리고 우리의 존재 방식을 드러내 보여준다. 하늘이 땅과 다르듯이 하나님의 생각과 길은 우리와 다르다. 성경이 없으면 우리는 설 수 없다. 선의를 가졌으나 무능한 인간들의 늪에 빠져 버릴 것이다. 

따라서 묵상의 대상은 성경이고,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고,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사건이며,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이고 그 인간의 모습 속에 투영된 바로 나 자신이 되어야 한다. 성경묵상은 내 말이 통하고, 내 생각과 말로 창조해온 나의 나라를 전복하고, 우리에게 전적으로 낯선 하나님의 세상, 창조와 구원의 세상이 끝도 없이 우리 위로 그리고 우리 너머로 펼쳐져 있는, 그러한 세상 속으로 들어가게 해준다.  

그래서 성경묵상은 이제 한치 앞도 못 보는 내가 모든 것을 주도하고 책임지고 칭송 받는 고단한 삶을 중단하게 한다. 모든 대상을 나를 위해 사용하고 이용하고 나의 논리와 이념을 위해 봉사하도록 환원하던 삶을 멈추게 한다. 성경묵상은 하나님을 어떻게 하면 우리 인생에 끌어들일 수 있는지, 어떻게 우리 삶에 참여시킬 수 있는지를 생각하는 일이 아니다. 도리어 성경묵상을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성경이 우리를 일깨우고, 놀라게 하고, 성경이 내포하는 실재(reality)로 우리를 끌어들이도록 허용한다. 이젠 성경묵상은 하나님이 제시하는 조건대로 하나님께 참여하도록 성경이 나를 이끌게 하는 일이다. 내 자아의 어둡고 좁고 음습한 창고를 벗어나 하나님의 거대하고 광활하고 신비하고 낯선 세계로 나아가게 하는 일, 그것이 성경묵상이다. 신발 안에 들어간 조그마한 모래 한 알이 타자(other)가 될 때 우리 몸 전체를 불편하게 하고 우리의 신경을 자극하듯이, 성경 말씀이 타자가 되고 그 말씀으로 성령께서 역사하실 때, 우리도 자기 기만과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라는 껍질을 벗고 자기 밖에서 자기를 바라볼 수 있는 시야를 얻게 된다. 하나님과 사람과 세상 속에 깃든 신비를 되찾게 된다.



3.2. 말씀의 인격성과 성경 묵상

성경 묵상은 하나님 묵상이다. 하나님은 자연현상, 사람, 성육신하신 그리스도, 성경 등 다양한 방법으로 말씀하시지만, 성경만큼 결정적이지는 않다. 성경은 하나님에 관한 논문이나 보고서도 교과서도 아니다. 인격적으로 전달된 계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으로서 사는 것의 의미를 인격 대 인격으로 알려주는 계시다. 그분의 말씀이 곧 그분 자신이다.  

우리는 말과 말하는 사람을 따로 뗄 수 없다. 말의 본질은 인격성에 있다. 말을 통해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뜻이 표출된다. 그것은 한 사람의 내면에 있는 것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수단이다. 따라서 말을 통해 우리는 사실상 다른 사람에게 내 존재의 한 조각을 떼어 주는 것이다. 타인의 말을 통해 우리는 그들의 생각과 감정을 알게 되고 그들의 삶에 동참하게 된다. 더 나아가 말을 통해 영혼은 영혼에 부딪친다. 단순히 기호나 소리뿐이라면 말은 아무것도 아니다. 마음과 실체의 숨은 지렛대를 건드려 기호나 소리에 엄청난 힘을 부여하는 것은 그것들의 정신적 측면이요 영적 힘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영과 대면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는 말씀을 통해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며, 말씀과 함께 우리에게 다가와 우리 가운데 임재하시기 때문이다. 성경의 명사는 어원 분석의 대상으로, 동사는 문법 분석의 대상으로, 형용사는 감탄의 대상으로, 부사는 토론의 대상으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 성경은 책만이 아니라 말이고 인격이기에 연구 대상만이 아니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대상이다. 쳐다보는(見) 대상이 아니라 알아보는(觀) 대상이어야 한다. 사용할 대상이 아니라 수용할 대상이어야 한다. 유진 피터슨의 말대로, “우리가 읽는 말이 우리 삶의 내부가 되도록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 리듬과 이미지가 기도의 실천, 순종의 행위, 사랑의 방식이 되도록 하는 독서”가 바로 성경 묵상이다. 



3.3. 말씀의 창조성과 성경 묵상

그렇게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인격에 참여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열어가시는 창조 역사에 참여하게 되고 내가 그분이 말씀하신 의도대로 새창조 되어 간다. 그 때 나의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서게 된다. “언어의 본질은 정보 전달이 아니라 무언가를 형성하는 데 있다.” 친밀함을 만들고 인품을 만들고 아름다움을 만들고 선을 만들고 진리를 만든다. 반대로 왜곡되고 거짓되고 부당한 힘에 의해 악용된 말은 창조된 것을 부수고 파괴하고 오염시키기도 한다. 그렇게 말은 늘 ‘사건’을 만들어낸다. 물리적인 힘이 만들어낸 사건보다 훨씬 그 영향력이 크고 결과도 오래 지속된다. 인터넷 상의 근거 없는 악플이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쌓아 올린 한 인생을 망가뜨려버렸고, 결국 떳떳한 엄마로 남기 위해 사랑하는 자녀들을 두고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한 연예인을 우리는 안다. 말이 허물어지면 존재가 허물어진다. 그래서 시편 기자들도 살인자, 부정한 자, 고리대금업자, 이방인보다 거짓된 입술과 아첨하는 혀를 더 호되게 비판하고 있는지 모른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를 향한 가장 무서운 공격이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의심하게 하거나 부인하게 하는 것인 이유다. 

동시에 성경을 받아들이고 거기에 굴복하고 그것으로 기도하는 대신에, 소유하고 옹호하고 기리는 것 역시 말씀의 생명력과 창조력을 파괴하려는 사탄의 고전적인, 그러나 늘 성공적인 하나님 나라 파괴 전략이다. 성경에 대한 찬양은 있고 성경의 권위에 대한 치열한 논쟁과 변증은 있지만, 그것이 나와 내 삶을 창조하도록 허용하지 않는 것은 성경을 사유화하고, 하나님을 사유화하는 우상숭배고 기만이다.  

성경묵상의 목적은 우리 무릎을 꿇고 하나님을 경배하게 하며, 구원을 이루는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 가운데 작동하게 하는 데 있다. 우리가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사용하여 우리를 당신의 나라로 이끄시는 것이다. 우리를 성경에 정통한 학생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말씀을 듣고 진정한 그리스도인-경외심을 품은 예배자, 자기 희생의 고난을 감수하는 자, 일편 단심의 추종자-이 되게 하는 것이다. 



4.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창조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언어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마음을 얻게 된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유에 참여하게 된다. 작곡가는 연주자가 자기 악보를 무시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연주자의 연주가 다 똑같으리라고 기대하지도 않는다. 아무도 연주가 악보에 나오는 음을 정확하게 재생산하는 행위라고 보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자유를 존중한다. 우리를 조작하지도 않고 강제하지도 않고 인생에 대한 주의력을 흩트리지도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구원하시고 복을 주시는 넓은 세상으로 우리를 데리고 간다.  

욕망과 탐욕으로 버무려진 무의미한 즉흥 연주에 취해 있는 세상을 향해 성경은 존 케이지의 “4분 33초” 같은지도 모른다. 그 악보에는 TACET, 즉 ‘침묵’이라는 음악용어만 기록되어 있다. 4분 33초 동안 아무런 연주도 하지 않는 상태에서 그 공연장에서 나오는 모든 소리들이 각자에게 어떤 음악으로 다가오는지 느끼게 하려는 시도란다. 자기 내면의 소리와 대면하게 하는 ‘침묵’이야말로 소음을 존재 이유로 삼는 세상이 가장 참을 수 없어하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성경이 주는 그 침묵은 약속 준수와 자유의 포기 속에서 1시간 동안 악보도 없이 즉흥 연주를 하였던 나의 친구들처럼,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리듬과 박자에 맞춰 창의적인 개성을 발휘하고 만끽할 무대가 될 것이다. 그 침묵은 길을 잘 아는 가이드를 따라 처녀림을 여행하는 이들이 느끼는 신기와 신비의 감동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경’ 묵상은 내 삶의 저자이신 창조주와의 만남을 통해서 내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창조되어 가고, 내 인생이 하나님 나라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 가는 것을 발견하는 희열을 경험하게 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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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의 여정: 낯설음 회복의 여정 - 박대영 목사님

1.  낯설게 하기

‘낯설게 하기’(defamiliarization) 혹은 ‘거리두기’(distanciation)란 용어가 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익숙해져 있는 사물을 낯설게 하면 그 사물의 본질이 보인다’고 말한 데서 알 수 있듯이 원래는 문학용어다. 생각해보자. 설이나 추석 명절에 새 신발을 신고 새 옷을 입을 때 느낌은 사뭇 다르지 않던가. 발뒤축이 헐고 딱지가 생길 때까지는 신발은 아직 손님이다. 새 옷이 주는 냄새와 감촉은 여간해선 가시지 않는다. 한번 손빨래를 하여 햇볕에 짱짱하게 말린 후에야 그 싱싱하던 느낌이 수그러든다. 그러다 시간이 더 흐르면 흐를수록 그것들은 어느새 내 몸의 일부가 된다. 안경을 쓰고도 안경을 찾는 것처럼, 코고는 남편 때문에 잠 설치던 아내가 코고는 남편이 없으면 잠을 설치는 아내가 되듯이 말이다.    

낯설음을 잃고 익숙해지면 편하다. 사람도 물건도 심지어 짐승도 길들여지고 자연스러워지면 대하기 쉽다. 편한 건 좋다. 그런데 그 익숙함이 주는 편안함의 대가는 상당하다. 익숙함이라는 정(正)은 변증법적으로 두 가지 반(反, anti-thesis)을 만들어낸다. 하나는 ‘자아 통제력 상실’(the loss of self-control)이고 다른 하나는 ‘타자성의 상실’(the loss of otherness)이다. 얻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것이다. 자동차가 편하지만 사고 날 가능성은 커지고, 투자 수익이 높을수록 리스크(risk)가 큰 것과 같다. ‘자아 통제력 상실’은 다른 말로 하면 ‘길들여짐’(accustomed)이다. ‘타자성의 상실’은 ‘길들임’(accustoming)이라고 할 수 있다. 



2. 길들여짐의 위험  

2.1. 내 삶의 조건에 길들여짐 

  편해지고 익숙해지면 더 이상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지 않는다. 불편하지 않는 이상 모든 것에 순응하고 감각이 전하는 대로 군말 없이 받아들인다. 자신이 의식적으로 선택하지 않았으면서도 소속되어 누리고 있는 삶의 조건들이 불편하지 않으니 그냥 마땅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우리 중에 우리의 삶의 조건을 스스로 선택하여 태어난 사람은 없다. 지나온 삶을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인과율로 설명해보려고 하지만, 무수한 우연과 우연 사이의 간격은 ‘보이지 않는 힘의 개입’을 말하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다.  

오늘의 나를 정의하고 형성하는 것이 내가 맺고 있는 관계들이다. 그런데 나의 부모, 학교, 친구, 교회, 교단, 교파, 교회의 지도자, 책, 이웃, 좋아하는 음식 가운데 내가 좋아하기로 작정하고 속하기로 맘먹고 정한 것이 얼마나 되던가? 어느 순간엔가 내 삶에 진입하여 내 존재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그게 문제라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헌데 알아야 할 것이 있다. 걸리적거리는 게 없어서 편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그는 이미 어느 정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통제력을 상실한 상태가 된다. 불행하게도 가만히 놔두면 자신은 그것을 의식하지 못한다. 모든 게 자신의 의식적인 선택과 대가를 치른 결과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나를 자연스럽게 길들인 생각과 태도가 내게는 안락한 사유의 거처가 되지만, 타인에겐 타성이 되고 편견이 되고 오만이 될 수도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게 편한 것만 옹호하는 동안 침묵과 방조를 통해 거대한 사회 구조의 폭력에 동조할 수도 있다. 명분은 누구에게나 있다.  하지만 모두에게 명분이 되는 명분은 그리 많지 않다. 소자와 약자를 외면한 명분엔 사랑이 없다.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다.



2.2. 신앙의 길들여짐 

사실 익숙함에서 비롯된 자기 통제 능력의 상실은 우리의 생각과 삶 전반에 걸쳐서 적용된다. 무엇보다도 위험한 건 바로 ‘신앙의 길들여짐’이다. 우리가 진리라고 철석같이 믿어왔던 교리나 하나님에 대한 지식도 모두 하나님을 사랑한 시대의 아들들의 경건한 고백이고,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 이들의 지적인 몸부림이며, 나만의 독특한 경험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성경해석의 역사와 교회의 역사가 증명해준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신앙의 습관이나 형식에 익숙해지거나 길들여지면, 내게 편한 스타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신앙의 신비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깔끔한 몇 개의 공식으로 정리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데 있다. 자기 감각의 노예가 될 뿐 더 이상 자기 자신이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다름이 틀림이 되고,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할 마음이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이 내 사유 너머에서 자유롭게 역사하시고 존재하시게 할 공간이나 여백이 내 안에 남아 있지 않은 사람이 된다. 불확정성과 불확실성 속에 역동적인 반응을 생명으로 하는 신앙의 신비 앞에서 이런 자기 충족적 순응주의는 치명적인(fatal) 태도다. 순종이라는 모험을 감행하지 않고는, 즉 시간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하나님께 양도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없고, 하나님의 생생한 임재 대신에 낯익은 의식이나 신앙고백문만을 붙잡고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묵상이 하나님이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나(사랑의 사람)를 찾아가는 여정이라면, 그것은 자아통제력 상실, 즉 ‘길들여짐’에서 벗어나는 여정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묵상은 내 신앙과 내 지식과 관계를 포함하여 나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삶의 조건을 낯설게 보고 재해석하는 일이다. 



3. 길들임의 위험 

3.1. 길들임

익숙함의 두 번째 결과는 ‘타자성의 상실’ 즉 ‘길들임’이다. 이는 상대방을 길들인다는 뜻이다. 자기가 길들여지는 것과는 동전의 양면이다. 어느 쪽이 먼저냐고 할 것 없이 둘은 서로가 서로에게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된다. 익숙해지면 그 익숙함이 정당한 것이냐고 자기 자신에게 묻지 않는다. 이는 익숙한 존재로 다가오면 그 대상은 더 이상 자기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누군가에게 혹은 무언가에게 익숙해지면 우린 그 사람 자체나 그 삶의 조건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워진다. 이게 바로 '타자성의 상실'이 뜻하는 바다.  

예를 들어보자.  연애할 때는 만날 때마다 그렇게 낯설어 보이고 눈을 감아도 도대체 그렇게 좋았던 그 사람의 모습이 떠오르지 않아 다시 만나고 싶고, 그래서 만나면 이번에는 또 다른 것으로 내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 도대체 어디까지 나를 감동시키려는가? 어느새 그 사람의 말투를 흉내내고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걸 좋아하게 되는 나를 본다. 언제부턴가 난 그 사람이 좋아하는 색깔을 나도 좋아한다고 믿게 되고, 그 사람이 좋아하던 거리를 나도 제일 좋아한다고 누군가에 대답한다. 매일 아침 새로운 감동으로 나를 깨울 것이라 믿던 그 낯설음 때문에 결혼을 한다. 하지만 머지 않아 익숙해진다. 길들여진다. 자연스러워진다. 있는 듯 없는 듯 해진다. 이제 배우자로 인해 사는 게 아니라 내 길들여짐에 기대어 산다. 타자(otherness)는 없고 나만 있다. 더 심각한 건, 그 때부터 상대는 내 통제의 대상이 될 뿐 결코 나에게 영향을 주거나 감동을 주는 대상이 아니다. 누군가 그런 익숙함을 ‘자동화’라고 말한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고 더 이상 찌릿한 자극도 없다. 정으로 산다. 한 노 교수가 수업 시간에 했던 말을 이제야 이해한다. 그분은 아내와 모든 것을 공유하지만 결코 아내의 핸드백만은 열어보지 않겠다고 맘 먹었단다. 모르는 게 남아 있을 때 타자성과 그 타자성 유지의 원천인 신비가 유지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3.2. 신앙의 길들임: 타자성의 상실 

신앙에 있어서 타자성의 상실은 자아 통제력의 상실만큼이나 치명적이다. 신앙에 있어서 타자는 하나님이고 그분의 계시인 성경이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고, 그 사람이 사는 세상이다. 이런 것들에 익숙해질 때 우리는 더 이상 이런 대상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성경의 많은 개념들은 한번 입력된 후로 요지부동이다. 기도가 무엇이고 교회가 무엇이고, 심지어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더 이상 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설명을 들어도 거기서 거기인 것 같다. 다 아는 소리를 반복하는 것만 같아진다.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것은 소통(communication)의 단절을 의미한다. 하나님도 너무 익숙한 존재일 뿐이다. 굳이 다른 설명을 들을 필요 없이 그분의 존재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분에게 예배도 드리고 돈도 갖다 바친다. 그분이 원하시고 나도 재미있으니,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도 하고 성경도 공부한다. 하지만 그것이 소통은 아니다. 소통의 도구가 오히려 소통을 가로막고 있다. 하나님을 대신해서 그런 것들이 하나님이란 관념에 길들여지게 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통제하기 시작한다. 타자가 없어지니 자기가 그 타자를 만들어 통제하는 것이다. 이미 자기 속에 길들여진 편견이나 선입관을 가지고 하나님 상을 만들어 간다.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하나님에 대한 가르침은 간단히 거부하면 그만이다. 악한 인간에게 낯익은 하나님은 하나님에 대한 왜곡으로 흐르기 마련이다. 길들여진 사람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자유로운 만유의 주권자가 아니라, 알라딘의 램프에서처럼 늘 주인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길들여진 사람은 그렇게 사람도, 이 세상도 자기의 입맛대로 길들인다. 하나님과의 소통의 단절은 다른 하나님의 형상들과의 소통의 단절로 이어지고, 이것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세상의 고통과 아우성에 귀기울이지 않는, 세상과의 소통 단절로 이어진다. 그저 나와 내 가족을 위해서만 매진하고, 저 천국을 보장받기 위해 매진할 뿐이다.  

오스왈드 챔버스의 단호한 권면을 들어보자. 

“만약 우리가 상투적인 종교의 발에서 상투적인 종교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께 다가갈 때 지닌 합당치 못한 익숙함을 모두 떨쳐 버리는 경험을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면, 과연 우리가 그분의 임재 앞에 제대로 서 본 적이 있는지 의심해볼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가볍게 대하고 그분에게 익숙한 사람들은 한 번도 그분을 대면해 본 적이 없는 자들이다.”  

오스 기니스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라'는 마틴 루터의 말을 우습게 만든다고 지적한 것은 맞다. 하나님을 길들인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할 수 없게 된다. 광부의 아들에 불과한 수사 루터는 1521년 보름스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와 브로고뉴, 베네룩스, 스페인과 나폴리의 군주요, 합스부르크 왕가의 아들이요, 대대로 내려오는 가톨릭 통치권의 상속자인 총명한 젊은 왕, 카를 5세 앞에 섰다. 하지만 그는 그 앞에서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황제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나의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고 철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 나를 도우소서. 아멘.”  

하나님을 길들이고 하나님께 익숙한 사람들은 그분의 권위 앞에 떨지 않는다. 자기의 감각에 더 크게 보이는 권위 앞에 굴복할 것이기 때문이다. ‘낯설게 하기’가 없고는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신앙도 없다. 



4. 묵상: 낯설음의 회복의 여정 

묵상은 나 자신과 나를 지으신 하나님, 하나님이 지으신 세상과 나를 둘러싼 숱한 관계들을 새롭게 보게 하는 일이다. 묵상이 없고는 자유인의 삶은 없으며, 자유가 없이는 사랑도 없다. 묵상은 이 세상이 정해준 행복과 불행, 유리와 불리, 성공과 실패의 잣대를 내던지고, 하나님의 시각을 회복해가는 과정이다. 묵상을 통해 날마다 나를 갱신하는 일이 없이는 내 욕망과 기대의 노예가 된 삶에서 벗어날 수 없다. 묵상은 나 밖에서 나를 관찰하는 일이다. 내게 길들여진 하나님 밖에서 나에게 계시하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보는 일이다. 깨어진 내 질그릇에 절망하는 내가 그 틈 사이로 질그릇에 담긴 보화,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흘러나오는 것을 보게 하는 일이다. 그것은 우상 파괴 작업이요, 욕구의 감옥에서 빠져 나오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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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묵상-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매일성경 순> 9-10월호에 투고한 글입니다. 거기엔 요약본이 들어가 있고 이것이 전문입니다.

1.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2.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3.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4. 다윗의 춤



I. 캐디에게 순종하는 골프의 황제 

미국의 프로 골퍼 타이거 우즈가 필드 위를 걸을 때 가장 가까이서 그를 따르는 사람이 있다. 거구의 몸을 이끌고 큰 가방 어깨를 매고 걷는데, 그 안에는 골프채들이 잔뜩 들어 있다. 놀라운 것은 우즈가 공을 치기 전 항상 이 사람에게서 뭔가를 경청하여 듣고 그가 건네 준 골프채로 휘두른다는 것이다. 타이거 우즈는 이 사람의 지령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는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도 화려한 조명은 우즈가 다 받고 있다. 이 사람이 타이거 우즈의 캐디인 스티브 윌리엄스(Steve Williams)다. 타이거 우즈는 가야 할 방향으로 공을 잘 때려 보내서 결국 자그마한 구멍 안에 그 공을 집어넣는 기술 하나로 상상할 수 없는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 그런데 얼마나 멀리, 무슨 골프채로, 어느 방향을 향해 공을 보내야 하는지를 더 잘 아는 것은 선수가 아니라 캐디다. 게다가 마음 먹은 대로 공이 날아가지 않을 때는 우즈의 자세가 몸 상태가 좋을 때와 어떻게 다른지를 가장 잘 알아낼 수 있는 사람도 윌리엄스다. 쓰든 달든 윌리엄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타이거 우즈가 세상에 존재한 적이 없었다. 상금의 십일조를 캐디에게 아낌 없이 갖다 바칠 만큼 우즈는 기꺼이 그의 조언이 경기 전체를 지배하도록 신뢰하고 맡겼다. 캐디를 바꾼다는 것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타이거 우즈가 되겠다는 의미다. ‘순종하는 황제’라는 모순적인 자기 정체를 수용한 데서 ‘영광스런 황제’가 태어난 것이다.



II. 묵상의 시작: 하나님의 정의를 수용하는 일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며(real),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일이며(relational),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품과 주변의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revolutionary) 급진적인(radical) 일이다. 창조주의 숨과 맞닿을 때, 바로 그 때 우리의 마른 영혼이 일어서고(revival), 우리는 하나님의 온전한 교제 파트너로 다시 창조된다(re-creation). 창조와 성육신과 십자가는 우리와의 교제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이 얼마나 강렬한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기 부인’이었고, ‘자기 비하’였고, ‘자기를 내어줌’이었다. 하지만 그 애절한 마음을 적절하게 담아 본 적이 있는 인간의 언어는 지금껏 없었다. 우리와 맺은 언약을 향한 하나님의 이 신실함, 자식을 향한 아비의 지고한 사랑, 그리고 신부와의 진정한 ‘앎’을 추구한 신랑의 열망을 다 헤아린, 역사상 단 한 분 (예수님)이 존재했을 뿐이다.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사시면서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묵상하고 보내신 분의 뜻을 묵상하여 그 뜻을 자신의 소명과 양식으로 삼으셨다. 순종의 묵상을 통해 예수님은 ‘아들’ 노릇에 신실하셨고 ‘종’의 사명을 이루셨다.  

예수님의 묵상과 순종의 삶은 자신의 모순적인 정체성을 수용하는 데서 시작하였다. 그는 하나님이면서 인간이셔야 했고, 하나님의 나라를 대리 통치하시는 ‘사랑하는’ 아들이면서 동시에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보내신 이의 기쁨이 되어야 할 고난 받는 ‘종’이셨다. 왕이면서 맘대로 할 수 없고, 사랑 받는 아들이면서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하나님 안에서 예수님은 더 이상 삶과 죽음의 경계는 없었고, 수치와 명예의 경계도 없었다. 태어난 곳이 왕궁이 아니라 구유라서 문제 될 것이 없었고, 지배자로가 아니라 식민지 백성으로 산다는 사실이 그에게 수치로 여겨진 적도 없었다. 가장 먼저 영접할 줄 알았던 율법교사들과 성전 권력자들이 자기를 영접하지 않고 도리어 핍박하고 비난하고 죽이려 한 것 때문에 하늘을 향한 자신의 순종을 재고하지 않으셨고, 심지어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들까지 자기를 몰라주고 자기 말을 믿어주지 않는다고 하여 사명을 포기하려고 하지도 않으셨다. 결코 조화될 수 없어 보이는 모든 환경이나 조건이 예수님과 하나님의 관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는 오직 하나님만이 존재의 근거였고, 존재 이유였고, 존재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분이 생명이었고, 그분이 명예였기 때문이다. 흙의 몸이 생존하는 데 필요한 떡과 고기와 물만 제공해준다면, 믿음의 대상이 애굽의 바로든 출애굽의 하나님이든 상관 없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과는 달랐다. 남의 마음에 들어야 한다는 숨막힌 부담감 때문에 ‘예’라고 말할 때처럼 확신있게 ‘아니오’라고 말하지 못하고, 사람과 일에 과도하게 자신을 내어주는 우리와는 달랐다. 하나님의 ‘사랑 하는 자’와 ‘기뻐하는 자’로서의 내 정체성을 수용하기보다는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에 늘 집착하는 우리와는 달랐다.  

‘묵상’은 내가 누구인지를 수용하는 데서 시작한다. 내가 누구라고 정의하시는 그분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렇게 불릴 자격이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는데도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요 기뻐하는 자인 나에 대해 긍정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굳이 내가 사랑 받을 만한 사람임을 설득하고 증명하려고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중간에서 나를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찾아 떠나는 여정은 시작된다. 그것이 생을 불사르는 헌신보다 앞선다. 예배보다 앞선다. 좋은 QT 교재(매일성경?)를 고르는 일보다 앞선다. 성경을 펼쳐 드는 것보다 앞선다. 기도하러 골방을 찾는 일보다 앞선다. 이것을 앞세우지 않고는 결코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이 내 삶의 모든 활동들보다 앞선 일이 될 수 없다. 그런데 ‘묵상’이 우리 삶의 가장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이 되지 않으면 결코 두 번째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없다는 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모순적인 자기 정체에 대한 진정 어린 수용이 없이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갈망’도 없고 ‘배고픔’도 없다. 사랑은 용서하는 사랑, 즉 은혜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빠진 묵상은 ‘나’를 치장하는 종교적인 액세서리로 전락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앞세우지 않는 모든 활동들 역시 쉽게 남의 기대에 못 미칠까 봐 두려워하는 내 마음을 위로하는 수단에 그치고 만다. 필사적으로 사랑하려고 하면서도 사랑하는 못하는 사람들이 된다. 자유를 원하면서도 자유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된다. 쉬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텅 빈 스케줄을 두려워하고 바쁜 삶을 자랑한다. 나에 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못하고 내가 아는 사람들로 나를 정의하려고 한다. 세상의 중심에 자기를 놓으면서도 주의를 끌만한 대상이나 사람이 없으면 안절부절해 한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불현듯 찾아오는 불안이라고 하는 불편한 감정을 어루만져 줄 정신적(영적이 아니라) 안마사로, 묵상은 스케줄 표의 한 칸을 채우는 활동으로, 제자가 되는 훈련 과정의 한 강좌로 전락할 수 있다.



III. 묵상: 나를 읽고 하나님에 의해 내가 읽히는 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정의(定義, definition)를 수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과의 교제로서의 묵상을 내 삶의 목적으로 삼는다는 것을 뜻한다. 그 뿐만 아니라 모순적인 자기 조건과 대면한다는 뜻이다. 이미 하나님의 백성이면서 아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긴장을 수용하고,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이면서 세상의 사랑은 받지 못하는 간극을 인정하고, 사랑을 갈망하면서도 사랑 받는 것을 두려워하여 자꾸만 각성제만 찾는 내 자아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생명임을 알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식의 순간인지 알면서도, 거의 한 번도 예외 없이 성경을 펼치고 무릎을 꿇기까지 불굴의 의지로 다짐해야 하는 이 모순덩어리와 화해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묵상’은 하나님을 읽는 일이기 전에 ‘나’를 읽는 일이며, 하나님께 내가 ‘읽히는’ 일이다. 따라서 본문(text)을 대하기 전에 하나님이 지으신 나 자신(혼돈 가득한 광야)과 그런 나를 ‘사랑하는 아들’로, 그리고 ‘기뻐하시는 종’으로 새로이 지어가시기 위해 허락하신 삶의 조건들(혼돈 가득한 광야)을 연구하고 관찰하고, 그 실상을 인정하지 않는 한, 하나님과의 참된 만남은 기대하기 어렵다. 매번 묵상이 어려운 것은 성경을 이해하기 어려워서가 아니다. 성경을 대하는 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나를 통해 지금도 써가시는 하나님의 이야기(내러티브)를 읽어내지 못하고 그 이야기 속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은 성경의 이야기를 만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성경 이야기를 해석하는 입장에 서기 전에 땀과 눈물과 웃음과 신음이 버무려진 성경 속의 인물, 즉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헨리 나우엔은 “우는 것을 배우는 것과 철야하는 것을 배우는 것과 새벽을 기다리는 것을 배우는 것, 아마도 이것이 인간적이 된다는 것의 의미일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제의 파트너로서의 ‘인간’이다. 나에 대한 묵상은 내 속에 있는 슬픔과 응어리와 분노와 야망과 대면하고, 응답 없는 캄캄한 현실 속에 있는 나를 만나게 한다. 그런 내가 성경 내러티브 속의 인물이나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고, 치유 받고, 화해하고, 인내할 힘을 얻고, 기다릴 소망을 얻게 하는 모든 과정이 묵상이다. 숱한 QT 이론이나 묵상 교재들(매일성경을 포함하여)은 자칫 우리를 마비시키는 심리적 마취제가 되어 이런 영적 감수성과 자발적인 영적 수용성(Spiritual receptivity)을 둔감하게 하고, 단지 우리의 기분을 더 좋게 하는 수단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기 자신에 대한 묵상은 자기 한계를 인정해야 하는 고통스런 과정이다. 그래서 아침마다 기도하고 성경을 펼쳐서 묵상하는 일이 매번 결심이 필요한 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나와 하나님을 만나러 가는 나 사이의 엄청난 간극이 늘 내 발걸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다. 차리라 ‘성경’ 읽기는 쉽고 ‘묵상 교재’ 묵상은 쉽다. 내가 “참, 잘했어요”라고 도장 찍어주면 되는 숙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 관찰이 빠진 묵상, 즉 사적이고 내면적이지 않은 삶에서 나온 대화는 잡담에 불과하고, 그 때의 기도는 독백에 불과하다.  

별로 달갑지 않은 자기와의 만남은 자칫 우리 자신을 절망으로 이끌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기 절망이 자기 포기로 가지 않고 자발적인 자기 비움으로 나아가게 하는 단 하나의 처방전이 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사랑하는 아들이요 기뻐하는 자’로 여겨주신 ‘하나님의 모순적인 정의’(定義, definition)를 기억하고 수용하는 일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우리의 책임을 묻고 자격을 요구하는 무수한 교리를 침묵시키시는 ‘경계를 허무는 사랑’이다. 이 사랑만이 우리의 마음을 열어준다. 자기와 만나는 위험한 모험의 길에 나서게 한다. 거룩하신 주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죽지 않을 확신을 가지고’ 나아갈 수 있게 한다(히 4:16). 



IV. 다윗의 춤 

어거스틴은 말한다: “기본적으로 사랑은 두 가지 밖에 없다. 자아를 잊을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랑과 하나님을 잊고 부인할 정도로 자아를 사랑하는 사랑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랑을 다윗과 사울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다윗은 목동으로 있을 때에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그는 한 동안 목동으로 살았다. 왕 위에 오르고도 열방과 같은 절대 권력자가 아니라 이스라엘의 ‘목자’로 살았다. 왕 같지 않은 왕으로 산 것이다. 왕이면서 동시에 아버지 심부름을 해야 하는 막내 아들이었다. 왕이면서 사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궁정 음악가였다. 왕이면서 광야 동굴을 전전하는 도망자였다. 반대로 사울은 왕이면서 왕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느라고 왕의 삶을 누리지 못했다.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왕위를 자기 힘과 자원으로 유지되는 왕위로 바꾸어버렸다. 한 사람은 삶의 조건은 그것을 부인한다 해도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수용하고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고, 다른 한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정의를 거부하고 자기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살았다.  

권력의 자리를 하나님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자는 결코 춤을 출 수 없다. 사울은 춤추지 않았다. “사울은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백성들의 흥겨운 노래와 춤이 오히려 그를 하나님과의 교제의 문을 닫는 경직된 사람이 되게 하였다. 하지만 다윗에게는 노래가 있었고 춤이 있었다. 특히 여호와의 법궤가 예루살렘에 당도하자 너무 기쁜 나머지 알몸이 되는 것도 모르고 춤에 몰두했다(삼하 6:20). 그 순간 다윗 앞에는 찬양 받으실 하나님만 계셨을 뿐이다. 자신과 상관 있다고 눈으로 볼 수 있게 임재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만 보일 뿐이었다. 그 순간 자신을 세우고 보호하고 사랑해주시는 하나님 앞에서 다윗은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벌거벗고 춤추는 왕’이라는 모순적인 정체를 수용한 것이다. 하지만 권력자 사울의 딸 미갈에게는 그것이 왕을 왕 되게 하고, 왕을 백성들과 경계 지어주는 왕의 권위와 품위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을 뿐이다. 그 마음으로는 법궤의 도착이 주는 엄청난 메시지를 묵상할 수 없었다. 자신을 지키느라고, 사람들의 수용과 인정을 계산하느라고, 묵상을 통해 하나님께 발돋음할 수 있는 도약대를 경멸한 것이다.  

하나님이 마련하신 춤판에 참여하는 일은 이처럼 나를 대면해야 하고 나를 잊어야 하고 나를 부인해야 하는 위태로운 일이다. 그것은 나에게 먼저 ‘인간’이 되라고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내가 통제하고 조정하고 조작할 수 없는 ‘타자’(하나님)가 있음을 인정하라는 말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과 교제로서의 묵상은 날마다 원점으로 돌아와 그런 나와 대면하는 용기와 모험에서 시작한다.


위험을 무릅쓴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

웃는다는 것은 바보처럼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운다는 것은 감상적으로 보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손을 내민다는 것은 성가신 일에 연루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감정을 드러낸다는 것은 당신의 참된 자아를 드러낼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사상과 꿈을 사람들 앞에 내어놓는 것은 그들의 사랑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을 돌려 받지 못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산다는 건 죽을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희망을 갖는다는 건 절망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시도해본다는 것은 실패를 각오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삶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어떤 위험도 무릅쓰지 않는 것입니다. 
전혀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이며 아무 것도 갖지 못한 사람이며,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가 됩니다. 
그는 여하간의 고난이나 슬픔도 피하려고 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배우거나 느끼거나 변하거나 자라거나 사랑할 수 없을 것입니다. 
자기 확신에 매인 노예에 불과합니다. 그는 자유를 빼앗긴 것입니다. 
오로지 위험을 무릅쓰는 사람만이 자유롭습니다. 

-작자미상, 숨 번역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원글 http://cafe.naver.com/verbumetvita/405

1. 묵상 여정으로의 초대

-나를 찾아오신 하나님의 먼 여행 

1.1. 친구가 돌아왔다

친구가 돌아왔다. 먼 길을 둘러서 돌아왔다. 최루가스 잔뜩 묻히고 술 한 잔 걸친 채 ‘교회가 그럴 수는 없다’며 떠났던 그 선량한 친구가 다시 찾아왔다. 몇 해 전 아들이 또래 친구가 필요할 나이가 되자 먼저 아내 손에 들려서 주일학교로 보냈다. “세상이 이리도 험한데 부모라고 무슨 수로 제대로 건사허겄냐. 하나님 헌티 맡길란다. 잘 부탁헌다고 전해드려라.” 그러면서도 자기는 안 맡겼던 친구가 이젠 아내 손, 아들 손 잡고 같이 나오기 시작했다. 어려운 사람 그냥 지나치지 않았고 아닌 것은 절대 아니었던 친구에게 국민들이 징허게 고생하던 시절 힘 있는 사람들에게만 유독 관대한 듯 보이던 하나님이 야속했을 것이다. “나 하나 교회 박차고 나가 봤자 하나님이 눈 하나 깜짝 안 할 줄 알았다. 근디 그분, 내 맘 만큼 독하지 못하시더라. 난 잘 알지도 못하면서 참 모질었어. 그분 뒤통수에 대고 헐 말 못 헐 말 다 했거든. 참 속(마음)도 좋으시지. 어디가 이쁘다고 이렇게 또 불러주셨는지….”   



1.2.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

늘 하나님은 그런 식이었다. 우리가 먼저 시작하는 법은 없었다. 항상 먼저 찾아와 주셨고 맨 나중까지 기다려 주셨다.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 <?xml:namespace prefix = st1 />3:9) 하며 부르시는 그 순간부터 우리를 찾는(pursuing) 하나님의 음성은 계속되고 있다. 여전히 작은 음성의 메아리요, 항상 눈과 귀로 보고 들을 수 있는 것만도 아니요, 온 세상을 채운 영광이요, 존재 하는 모든 것이 사실 우리를 향해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시는 하나님의 단단한 메아리이다. 우리가 하나님 말고 바라는 것이 수도 없이 많을 때도, 하나님은 매번 나 하나만 있으면 된다는 식이었다. 그래서 우리 안에 당신이 아니면 채울 수 없는 영적인 열망을 심어 우리가 하나님을 추구하게 하셨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바라는 우리 안의 불꽃마저도 우리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열망의 표현인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와의 교제를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라도 치르신다. 심지어 자신에게 수치와 조롱을 안겨다 주는 일일 때라도, 하나님은 ‘나를 찾아 떠난 이 여정’을 중단 없이 지속하고 계신다. 다 ‘사랑’ 때문이다. 사랑하시니 아깝지 않으셨던 거다. 나와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보다 하나님이 내게 더 바라시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 ‘친밀한 사랑의 관계’를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다. 사랑하시기에 창조하셨고, 창조하셨기에 사랑하신다. 그런데 세상 어디서든 ‘사랑의 관계’는 거저 생기지 않는다. 저절로 생기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를 ‘제품’으로 찍어내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인격’ 있는 ‘작품’(masterpiece)으로 ‘창조’하셨다. 그것은 ‘자유로운 존재’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며, 하나님이 맘대로 조종하거나 통제할 수 없는 ‘타자’(other)로 창조하셨다는 뜻이다. ‘자유’만이 ‘사랑의 관계’를 낳을 수 있으니 그 길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자유가 거절당할 수 있는 위태로운 결정이며,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제한한 자기 포기의 결정이었다. 창조는 위험을 무릅쓴 하나님의 사랑의 결단의 결과인 것이다. 제임스 힐만의 말대로, 창조는 인간이 거할 자유로운 공간을 주기 위한 하나님의 ‘뒤로 물러남’의 사건이다. 관계의 파트너를 향해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데서는 굴종만 있고 복종은 없으며, 거기서는 ‘사랑’이 형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간을 사랑의 파트너로 삼은 하나님의 전능성은, 라벤슨의 표현대로, 악에 의해 상처받고 망가지는 것을 견디는 전능성이다. 그 사랑에 압도되어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분의 주권에 순종할 때 완전해지는 겸손한 전능성이다. 



‘묵상’은 하나님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우리를 창조하시면서 그토록 바라셨던 그 ‘사랑의 소통’을 나누는 것을 말한다. 트레이시는, 그것은 평생 동안의 여정이며, 위로부터 부르시는 소리를 듣는 일이며, 그 음성으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거룩한 대로(大路)를 걷는 일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친밀한 교제를 위해 우리를 지으셨고 부르셨으며, ‘묵상’은 그 초대장을 받고 그 친밀한 교제 속으로 들어가는 일인 것이다. 



그런데 인간은 이 초청을 거부하고 하나님 없는 자유를 선택했다. 하나님 바깥에서의 자유를 원했다. 하나님은 버림 받았고 소통은 단절되었고 자유를 준 그분의 숭고한 사랑은 이용당했다. 하나님이 떠난 자리는 외로움에 떠는 두려움의 자리가 되었고, 인간은 지금도 중독과 소음과 쉼 없는 분주함으로 이 공허를 메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리를 떠나 스스로 ‘말’의 주인이 되겠다고 한 순간 자기 자유는 물론이고 자기 존재 전체를 허물고 말았다. 하나님과의 끊어진 소통(묵상)은 자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 뿐 아니라 이웃과 피조 세계 전체와의 소통 단절로 이어졌다. 항상 관계를 갈망하면서도 늘 외롭다고 중얼거리면서 살게 되었다. 하나님과 같아지려다가 인간마저 되지 못한 채 금수(禽獸)와 다를 바 없이 그저 탐욕스런 본능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다. 역사의 매 순간마다 먼저 손 내밀고 불러주신 하나님의 오래 참으시는 사랑, 좀처럼 포기할 줄 모르는 고집스럽고 바보 같은 눈 먼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에겐 희망이란 없었을 것이다.  



“이스라엘이 자기의 안식처를 찾아 나섰을 때에, 나 주가 먼 곳으로부터 와서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주었다. 나는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였고, 한결같은 사랑을 너에게 베푼다.(렘 31:2b-3)



“나는 내 백성의 기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내 백성은 아직도 내게 요청하지 않았다. 누구든지 나를 찾으면, 언제든지 만나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나를 찾지 않았다. 내 이름을 부르지도 않던 나라에게, 나는 '보아라, 나 여기 있다. 보아라, 나 여기 있다' 하고 말하였다. 제멋대로 가며 악한 길로 가는 반역하는 저 백성을 맞이하려고, 내가 종일 팔을 벌리고 있었다.” (이사야 65:1-2)



1.3. 헤픈 사랑(눅 15장)과 집요한 사랑의 추격자(시 23편)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여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아들이 되어 이 땅에 오셨으며, 심지어 가장 낮은 인간보다 한 발 더 아래로 내려와 그들을 대신하여 돌아가심으로써 또다시 자기를 버리는 사랑을 보여주셨다. 사람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여정은 끝없는 ‘자기 버림’과 ‘자기 부인’의 여정이다. 아래로 아래로의 여정이다. 사랑 아니면 상상할 수도 없는 그 추락의 여정이 우리를 죽음에서 건졌다. 눈에 보이는 것만을 향한 자기 탐닉의 사랑밖에 할 줄 모르던 우리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아버지가 바란 것은 금의환향이 아니었다. 그저 돌아기만 바라셨다. 돌아온다는 것은 아들에게 죽은 것이나 다름 없던 아버지가 살아난다는 것이요, 아버지에게 죽었던 아들이 살아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고개만 돌려도, 누가복음 15장에서 돌아오는 탕자 아들을 보고서 뛰어나가 맞이한 아버지처럼, 하나님은 악취나고 부끄러운  것 투성이인 우리를 단 한 마디 따져 묻는 것도 없이 용서하시고, 우리와 풍성한 산 교제를 나누기 위해 단 일초도 기다리지 않으시는 참을성 없는 아버지가 되신다. 아들을 위해 자신이 지켜야 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듯이 행동하시고, 아버지를 인정한 아들을 얻고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는 듯이 기뻐하신다. 이보다 더 헤픈 사랑을 본 적이 있는가? 



시편 기자는 우리와의 교제를 갈망하시고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그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여기 ‘나를 따른다’를 직역하면 ‘나를 추격한다’이다. 그것도 ‘평생’ 추격하신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까지, 아니 죽음 그 너머까지 선하심과 인자하심으로 우리를 따라다니실 것이다. 왜 그토록 집요한 사랑의 추격자가 되시는가? 영원토록 여호와의 집(하나님 나라)에서 우리와 교제하기 원하시기 때문이다. 



1.4. Shall we dance?

아마 이 추격은 내가 하나님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시절에까지 거슬러 올라갈 것이다. 따라서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은 나를 ‘중간에서 만나기’ 위해 먼 길을 뒤쫓아오신 하나님의 여정인 것이다. 술래잡기 놀이에서 술래인 아버지는 어서 아들에게 붙잡히기를 바라신다. 숨바꼭질 할 때 아버지는 술래인 아들이 어서 자신을 찾아주기를 기다리며 “나 여기 있다” 하고 소리쳐 주신다. 묵상은 하나님이 주신 혜택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을 갈망하고 추구하는 일이며, “나 여기 있다” 하시는 그분의 음성을 듣고 그분을 찾아내서 함께 웃고 즐거워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분의 임재 속으로 들어가 그분과 함께 먹고 마시는 일이다. 

“보아라, 내가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요한계시록 3:20)



조이스 럽은 이것을 자신에게 춤을 권하는 하나님으로 묘사한다. “하나님은 늘 공허하고 죽고 텅 빈 내 뼈의 마른 골짜기에 찾아와 내게 춤을 청하신다.” 하나님은 열정도 없고 소망도 없고 활기도 없는 자리에서 일어나 더 풍성하고 열정적인 삶을 살지 않겠느냐고 내게 신실하게 물으신다. 묵상은 하나님과 추는 춤판에서 그분의 리드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리듬과 박자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내 자유를 그분의 움직임에 양도할 때 우리는 주께서 창조하신 놀라운 스텝에 취하여 참된 자유의 희열을 맛볼 것이다. 



이렇듯 묵상을 통한 창조주와의 교제는 이론이 아니라 실제이며(real), 정보만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인격과 인격이 대면하는 일이며(relational), 더 나아가 그 만남을 통해 우리 자신의 성품과 주변의 삶을 변모시키는 변혁적이고(revolutionary) 급진적인(radical) 일이다. 창조주의 숨과 맞닿을 때 우리의 마른 영혼이 일어설 것이고(revival), 우리는 하나님의 교제의 온전한 파트너로 다시 창조될 것이다(re-creation). 



주님은 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이 땅까지 먼 길을 달려오셨고, 역사를 가로질러 오늘 내 앞에 서셨다. 그래서 아주 간절하고 곡진하게 당신의 사랑을 보이시면서 우리를 당신과의 깊은 교제의 관계로 부르신다. 손을 내밀며 묵상의 춤판에서 만나 천국의 자유를 춤추자고 하신다. 



잃어버린 꿈들.

잊혀진 즐거움들.

내 불안한 활동들과

광포를 먹고사는

탐욕스런 세상에

팔려 버린 영혼처럼.



바로 그 때 오래된 뼈더미가

가장 메마르고

버려진 듯싶은 그 때.

강한 생명의 호흡 하나

내 죽음을 꺠우네.



하나님이라 하시는 분

내 파편 조각에 다가와

서늘한 눈빛으로 청하시네.

“나와 함께 춤을 추겠니?”

내 안에 파고드는 음성.

내 심장 속에서 뛰고

죽음의 뼈를 일으키네.



한결같이 믿어주신 분께

내 기다리던 자아

네, 내어드리고

그렇게 춤은 시작되네.

                                      -조이스 럽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224호 발행인 논단]다니엘의 기도, 기독 청년의 순교
다니엘서 6장
[224호] 2009년 05월 22일 (금) 15:57:55 김회권  haekwonkim@hanmail.net

구약성경의 다니엘은 시편 1편이 말하는 물가에 심긴 나무 같은 상록수 신앙인의 전범(典範)이다. 그는 바벨론 제국이 망하고,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의 패권을 잡았을 때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세계통치를 매개한다. 어떻게 다니엘은 청소년시절에 품었던 그 영적 지조와 절개를 노인이 될 때까지 지키고 발전시킬 수 있었을까? 그가 평생 그토록 아름다운 영적 지조와 절개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체질화된 기도생활 덕분이었다. 다니엘서 6장은 다니엘의 기도생활을 좌절시키는 극한 환난을 소개하고 있다. 땅의 세계를 지배하는 페르시아 제국의 어인(御印, royal seal)이 찍힌 칙령이 내려져 한 달 동안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를 금지한 것이다. 이제 다니엘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남았다. 현실에 순응하면서 기도를 멈출 것인가, 아니면 페르시아의 어인보다 더 강한 하나님의 어인 찍힌 칙령을 기대하며 기도를 감행할 것인가. 순교적 각오로 기도한 다니엘은 마침내 페르시아 왕의 어인 찍힌 조서를 무효화시킨, 하나님의 어인 찍힌 응답을 받아낸다. 요즘 활동적인 복음청년들일수록 실천의 우위를 앞세운 나머지 기도무용론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어인 찍힌 조서 같은 완강한 현상 질서를 바꾸려는 기독청년일수록 기도에 매진해야 한다. 기도는 페르시아 황제가 내린 법을 무효화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칙령을 매개하기 때문이다. 이 세계를 거룩하게 변혁시키려는 하나님 나라 운동가들일수록 집요하고 줄기찬 기도생활에 정진해야 한다. 참된 복음주의는 기도생활의 치열성에서 만개할 수 있고, 진정한 사회변혁은 기도하는 기독청년들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기획회의, 각종 집회도 다 좋으나, 일주일간 혹은 한 달간 한적한 곳에 자신을 은둔시켜 기도로 단련하는 복음청년에게 미래가 걸려있다.  
 
다니엘 기도금지법을 선포한 페르시아 제국(1~9절)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오 왕은 자기 뜻대로 백이십 명의 고관을 세워 전국을 통치하게 했다(1절). 그 120명의 지방 총독(satraps)을 다스리기 위해 또 세 명의 중앙 총리를 세웠는데, 그 가운데 한 사람이 다니엘이었다(2절). 다니엘을 비롯한 중앙 총리들은 지방 총독들을 감독하는 자로서, 지방 총독의 재정 보고를 받아 왕의 국가재정이나 통치력의 누수를 막는 일을 맡았다(2절). 마음이 민첩한 다니엘은 다른 총리들과 고관들보다 훨씬 뛰어났고, 왕은 그를 아예 전국을 다스리는 총통급 총리로 세우고자 했다. 왕의 인사의중을 알아차린 나머지 두 총리들과 지방 총독들은 국사에 있어서 다니엘을 고발할 근거를 찾았지만, 아무런 허물도 찾지 못했다(4절). 높은 관직에 오랫동안 있으면서도 권력형 비리가 없었다는 것은 다니엘이 순교자의 마음으로 관직을 수행했음을 의미한다. 고위직에 있으면서도 뇌물을 안 받고 자기 월급대로만 사는 그리스도인 공무원은 순교자다. 우리나라의 모든 권력기관에 종사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양심이 순교적 청렴성으로 담금질 될 때 성서한국이 이뤄진다. 성서한국은 특정 도시를 하나님께 봉헌하자는 식의 도발적이고 공격적인 태도가 아닌, 눈에 보이지 않게 청렴을 유지하고 뇌물을 거절하면서 자기 월급만으로 살아가기로 결단하는 기독청년들의 결단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충성심을 흠잡는 일 외에 다니엘에게서 어떤 흠도 잡을 수 없다는 것을 안(5절) 대적자들은 일명 다니엘 박해법이라고 불릴 수 있는 한 법령을 발의하기에 이르렀다(6~7절). 총리들과 고관들이 모여 왕에게 “다리오 왕이여 만수무강 하옵소서”라는 의례적 인사를 마치고(6절) 본론을 꺼냈다. 그들은 왕에게 나라의 모든 총리와 지사와 총독과 법관과 관원이 공모하여 기안한, 이른바 집단 상소를 통해 한시적이지만 가장 엄중한 기도금지법령의 제정과 반포를 요청했다. 그들이 발의한 법령은 “이제부터 삼십일 동안 누구든지 왕 외의 어떤 신이나 사람에게 무엇을 구하면 사자 굴에 던져 넣기로 한다”(7절)는 것이었다. 그들은 왕에게 이 금령을 제정하되 그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서 메대와 바사의 법령절대불개변한 관습에 따라 그것을 다시 고치지 못하게 해 달라고 강청했다(8절). 어처구니가 없는 악법이었으나, 다리오는 조서에 왕의 도장을 찍어 금령을 반포했다(9절). 세계사에나 한국현대사에 이런 어처구니없는 악한 법들이 일사천리로 제정되어 인권을 탄압하고, 헌법이 보장하는 양심보호 조항마저도 유린한 예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나님이 감찰하시는 이 세계 속에서도 이처럼 극한의 어리석음과 악을 표방하는 법들이 활개치고 있다. 인간의 양심 이하의 원리로 움직이는 법이야말로 악한 정권에서 발호하게 마련이다. 인간 정신의 가장 열등한 영역에서 기안되고 발포되는 법은 대개 법치주의라는 탈을 쓰고 인륜과 상식을 유린하는 경우가 많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 자비와 진리에 터한 법인지의 여부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니엘 박해자들은 법령절대주의, 법조문 절대주의에 빠져 다니엘의 순결한 양심을 압박한다. 다니엘은 이에 대하여 어떻게 응답할까?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10~17절)

다니엘은 여기서 정공법을 선택한다. 10절은 이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 빛을 발하는 다니엘의 영적 돌파력과 기개를 증언한다. “다니엘이 이 조서에 왕의 도장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는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이 선포된 것을 알고도 습관대로 자신의 다락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을 향하여 열린 창문을 열고, 하나님께 기도했다. 하나님이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무효화하실 수 있는 참 대왕이심을 인정한 것이다. 야웨 하나님께 범죄하여 먼 이역만리 이방 땅에 유배되어 갔다할지라도 이 약속의 땅, 그 중에서 야웨께서 택한 성읍 예루살렘,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야웨께서 당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택한 성전을 향해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하늘 성소에서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용서하셔서 기도에 응답해 달라는, 솔로몬의 중보기도에 터하여 기도했던 것이다(왕상 8:46~49).
   
다니엘은 하나님께서 페르시아 왕이 지배하는 현실을 전복하시고, 하나님의 어인 찍힌 칙령이 페르시아 왕의 칙령을 무효화 해 달라고 간청했다. 그에게 기도는 페르시아적 현실을 하나님의 현실로 전복시키는 하나님의 통치수단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이 땅을 다스리도록 위임하셨기에 인간의 역위임을 받으신 후 인간역사에 개입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께서 맡기신 지상통치의 위임을 다시 양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개입을 요청해야 한다.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가 이 땅의 폐쇄적인 질서를 재편하도록 간구하는 것이다. 이 기도야말로 하나님의 뜻에 정통한 이해를 가진 사람이 드릴 수 있는 왕적 책임이다. 기독청년들은 이 땅이 페르시아 왕의 어인이 찍힌 칙령이 지배하는 현실로 전락하지 않도록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천지주재권, 하나님 나라 통치대권을 가슴 깊이 확신하고 영접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일편단심을 쏟아내는 기도는 단기적으로 박해를 초래할 수도 있으며, 죽음의 위기에 내몰리는 역경에 직면케 할 수도 있다(딤후 3:10~12). 마침내 다니엘 기도금지법이 효력을 발하기 시작했다. 다니엘이 기도하는 것을 본 대적자들은 고칠 수 없는 페르시아 법령을 어긴 그를 다리오 왕에게 고발했다(10~12절). “사로잡혀 온 유다 자손 중에 다니엘이 왕과 왕의 도장이 찍힌 금령을 존중하지 아니하고 하루 세 번씩 기도하나이다”(13절). 이 말을 들은 왕은 몹시 근심하였고, 해 질 무렵까지 다니엘을 구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하였다(14절). 다니엘의 대적자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강경하게 왕의 온정주의와 동정심을 압도했다. 그들은 왕에게로 달려가 메대와 바사의 절대불개변의 규례 관습을 상기시키며(15절), 즉시 다니엘을 끌어다가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강압했다(16절). 하는 수 없이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 던져 넣으라고 명한다. 다만 왕은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보호해 주실 것을 믿는다고 말한다. “네가 항상 섬기는 너의 하나님이 너를 구원하시리라”(16절). 이에 형 집행자들이 돌을 굴려다가 굴 어귀를 막았다(17절). 

역전된 운명, 사자 굴에 던져진 다니엘의 대적들(18~28절)

원하지 않게 충신 다니엘을 사자 굴에 집어 던진 다리오 왕은 깊은 번뇌에 빠져들었다(18절). 날이 새자마자 일어난 왕은 급히 사자 굴로 달려갔고(19절), 다니엘이 던져진 굴에 가까이 이르러서는 슬피 소리 지르기까지 했다. 다리오 왕이 다니엘의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아니나 다를까 놀랍게도 저 아래 사자 굴에서 다니엘의 응답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21~22절).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22절). 다리오 왕은 매우 기뻐하며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고 명했고, 사자 굴에서 올라온 다니엘의 몸은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보호를 받았던 것이다(23절). 물론 다니엘의 사자굴 경험을 너무 일반화해서는 안 될지 모른다. 사자 굴에 던져진 모든 시대 성도들의 운명이 이같이 살아생전 대역전을 경험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실상 성도들의 순교 이야기는 사자 굴에서 찢겨 죽음으로 믿음의 승리를 확정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만 다니엘적 대역전승을 이생에서 거두었을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자 굴에서 당장 건져주시지 않고 부활의 약속만 주신 후에, 우리 몸이 사자에게 찢기도록 내버려두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차안적 삶에서도 확증된 하나님의 구원개입이 본문에서 일어난 것이다. 
   
사자 굴에서 멀쩡하게 살아나온 다니엘을 본 왕은 이제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을 끌어오게 하고, 그들을 그들의 처자들과 함께 사자 굴에 던져 넣어 버렸다(24절). 이런 운명 대역전극을 지켜본 다리오는 온 땅의 모든 백성과 나라들과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의미심장한 조서를 내린다(25절). 이 조서는 다니엘의 하나님을 공적으로 인정하고, 그의 절대주권과 그의 나라를 찬양하고 있다. 다니엘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을 목격한 이방 군주 다리오가 야웨 하나님의 세계통치권과 역사주재권을 공적으로 고백한 것이다. 사자 굴에 던져진 기독청년들은 “내 주여 뜻대로 행하옵시며…”라는 찬송으로 체념해서는 안 된다. 다리오 왕의 어인이 효력 정지되도록 강청하는 기도에 정진할 수 있는 기개와 상상력을 가져야 한다.

하루 세 번 드리는 기도는 기독청년의 순교다 
 
일생동안 조금씩 일관성을 갖고 신앙원칙대로 살아가는 사람은 순교자며, 십대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순수성을 유지하는 것 역시 순교적인 신앙이다. 기독청년들은 순교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기독청년들이 죽는 방식에는 순교 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기독청년 앞에는 순교 외에도 자연사와 병사, 사고사 및 기타 비명횡사 등이 있으나, 순교 외에 다른 것들은 기독청년들이 선호해서는 안 되는 죽음의 방식들이다. 순교란 불멸의 가치를 위해 필멸(必滅)의 목숨을 상대화하고 희생시키는 삶이다. 그래서 순교란 사실 엄청 이익이(?) 남는 영악한 이해 타산적 결단이다. 썩어질 생명을 죽이고 영생할 가치를 살리는 결단이기 때문이다. 만약 돈과 우정 사이에서 하나만 선택해야 한다면, 기독 청년은 돈을 희생시켜 우정을 지켜내야 한다. 찰나적 욕망 충족과 영원한 희락 추구 둘 중 하나를 취해야 한다면,  기독청년은 응당 후자를 취해야 한다. 우정을 위해 돈을 죽이는 것이 일종의 순교요, 영원한 희락을 위해 찰나적 쾌락추구를 포기하는 것이 순교다. 순교에서 죽는 것은 썩어 없어질 욕망이며 옛 자아지, 영원한 생명이나 불멸의 가치가 아니다. 그러므로 기독청년들은 순교를 두려워하거나 순교에 직면했을 때 낙담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기독교 신앙 때문에 손해를 보고, 의롭게 살다가 가난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곧 순교다. 
      
597년에 그레고리 1세 교황이 된 힐데브란트 수도사의 말처럼 로마제국의 창검 아래 순교하는 기회가 사라진 이상, 제자도를 실천하는 것만이 순교다. 즉 일상생활의 소소한 현장에서 비영웅적 순교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비영웅적인 순교자는 예수님처럼 3년간 강렬하게 살다가 단번에 산화(散華)하는 식의 순교는 하지 않는다. 일생 동안 예수님의 격렬한 영단번의 죽음을 미분하듯 서서히 죽어갈 따름이다. 활동적이고 지극히 능동적인 기독청년들에게 매일 하루에 세 번 기도하는 것은 순교다. 형식적인 기도생활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늘 매순간 기도해야지 하루에 굳이 세 번 시간을 정해놓고 기도하는 것은 경직된 율법주의가 아니냐며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루에 세 번 기도해 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의 의심이다. 일단 하루에 세 번 씩 습관적으로 기도하는 일 자체가 거의 초인적인 성실과 인내로 지지되는 훈련이 아니고는 불가능하다. 또한 습관 속에 기도몰입을 경험한 사람은 그가 확보한, 그 정한 시간의 기도생활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분투하게 되고, 어렵게 확보된 정한 시간에 드린 기도생활은 일종의 은밀하고 지속적인 희락의 원천이 된다. 에즈라 바운즈의 <기도의 능력>은 이런 점에서 기도생활의 신비한 능력과 영적 의미를 아주 간결하면서도 체험적으로 간증하고 있다. 생산성의 신화, 효율과 가시적인 성과에 목맨 현대사회에서 낮 시간을 삼등분해서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거룩한 바보가 되기로 결단하지 않는 한 시도하기조차 힘든 일이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들이 물리적으로 24시간을 갖고 사용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죄와 불순종의 사람이 가진 24시간은 방황과 심판, 불안과 공포 속에서 상실된 시간이다. 하나님을 향해 생동감 넘치는 신뢰와 감사 찬양을 드리는 사람만이 온전한 시간의 선물을 향유할 수 있다. 
      
특히 이삼십대에 기도를 체질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인생의 승리자가 된다. 여기 승리자라는 말에 섣불리 냉소를 보이지 말자. 우리의 승리는 천박한 세상에서의 출세와 성공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뇌물을 쉽게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한 의지에 대한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 패배주의와 무기력한 의기소침에 대한 지치지 않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심의 승리를 말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승리자라는 것은 이런 뜻이다. 기도는 즐거운 고역이다. 그것이 즐거운 이유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웹2.0적인 쌍방향소통이기 때문이다. 소통되는 경험, 그것도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과 소통되는 경험은 이 세상살이에 지쳐 냉소와 무감각으로 완악해진 기독청년의 마음을 완벽하게 위로하고, 부드럽게 만든다. 그러나 또한 기도가 고역인 이유는 육체를 쳐서 복종시켜야 하는 단련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앙생활 중 가장 감미로운 부분이 기도생활이라는 것을 직간접적 경험을 통해 알고 있지만, 실제로 기도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성도들에게 기도가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활동이라는 것을 알지만, 우리는 계속 숨 쉬려고 하지 않는다. 숨 쉬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죽는다. 영인(靈人)이 계속 영적인 호흡을 하여 영인 모드(mode)로 살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당장 죽지는 않지만, 대신 육인(肉人) 모드로 살아가게 된다(롬 8:5~11). 이것이 죽는 경험이다. 사납고 무서운 인간성, 즉 세파에 마모된 야수적 인간성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성경은 그렇게 사는 것을 “산다”고 말하지 않고, “죽는다”고 말한다. 사나운 눈빛, 꼭 다문 입, 패기와 경쟁심으로 가득 찬 빛나는 이마, 질 수 없다고 버티는 환도뼈의 각도서린 입상(立像)은, 죽음빛깔을 띤 사이비 활기이며 세상적 생명이다. 이런 죽음의 생기는 주로 을지로, 충무로, 신도림역, 워싱턴 D. C, 그리고 뉴욕의 맨해튼 등 메트로폴리탄에 집단군락지를 형성하고 있다. 이런 곳에 사는 우리가 기도하지 않고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의 생기, 살기(殺氣)로 충만한 인생임을 의미한다. 죽음의 생기는 자기파멸적이고 이웃살해적이며 공동체 파괴적이고 하나님 모독적인 반생명, 반창조, 반그리스도적인 기운이다. 그러나 놀라운 것은, 이 살기(殺氣)마저도 생기처럼 느껴진다는 점이다. 우리는 여기에 속지 말아야 한다.
    
기독청년은 페르시아 제국의 어인이 찍힌 포고령처럼 자신이 능히 극복할 수 없는 현실에 직면할 때, 예루살렘 창문으로 달려가 하늘로 열린 창문을 향해 아우성쳐야 한다.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 위협하듯이 명령하는 현실을 하나님께 고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 주변에 얼마나 많은 페르시아 왕의 칙령이 남발되고 있는가? 얼마나 많은 현실의 법들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가? 이 때 예루살렘을 향해 열린 창문을 확보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너무나 번잡스럽고 산만한 오늘날, 기도의 용사들이 배출되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이런 시대 풍조에 도전한다. 우리는 이른 새벽, 정오, 늦은 밤 숨 쉬는 순간마다 기도를 습관화하는 기독청년이 되기로 결심한다. 이제 기독청년들의 활동에너지가 분출되는 행사와 활동과 대회의 계절이 다가왔다. <복음과상황> 체육대회, 성서한국대회, <뉴스앤조이>의 각종 집회, 기윤실의 각종 모임, 공정연대, 평화와통일을위한기독인연합, 한반도평화연구원, 평화한국 등은 한결같이 소중하고 보배로운 기독청년들의 배움과 익힘과 행함의 동아리들이다. 이 동아리에 속한 모든 기독청년들이 자기소모적인 활동에 몰입하기 전에, 기도정진의 도량에서 땀 흘리는 기독청년으로 거듭 태어나길 간절히 기도한다.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본지 발행인) haekwonkim@hanmail.net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스펄전 목사가 어느날 많은 사람들을 울리고 웃기는 감동을 주는

명배우를 찾아갔다. 스펄전 목사는 그와 같은 연기의 능력이

어떻게 해서 나오는 것인지 물었다. 그는


"나는 거짓을 진실되게 하여 사람들을 감동시키는데 반하여

목사님들은 진실을 거짓같이 전하니 감동이 없는 것이죠."

라 답했다. (- Oct, 'Preeching' 中)


새길 말이다. 깊숙히...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 아래 글의 확대된 원본은 류호준의 저서 [옛적 말씀에 닻을 내리고](서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998), 280-306에 있습니다.*


쵸서의 켄터베리의 목사상을 중심으로..


목사가 된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일들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목회를 하는 일이 문자 그대로 신체적으로 위험하다는 의미는 물론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일 것입니다. 그가 만나고 사귀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교인들이요, 그가 맴도는 삶의 반경도 틀림없이 종교적인 영역일 것입니다. 대부분의 한국 교회 교인들이 그러하듯이, 성직자들은 적어도 그들의 면전에서는 존경의 대상이며, 명예와 신망을 받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감히 목사를 향하여 불손하게 대들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는 위험천만한 공사판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며, 폭력배를 추격하는 경찰수사대의 일을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면 목사가 되는 일은 결코 위험천만한 일이 될 수 없습니다. 목사가 된다는 것이 또한 정신적으로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의미도 아닙니다. 물론 수많은 스트레스에 싸여 좌절할 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의 스트레스는 오히려 소위 세속적 직업을 가지고 있는 여러분들의 교인들에게 더욱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목사의 일이 위험 천만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이 세상에서 가장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가 생명과 죽음을 다루는 전문가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마치 숨겨진 시한폭탄을 찾아내어 그것을 해체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 있는 사람을 상상해 보십시오. 지난달 나는 미국 여행을 다녀오면서 기내에서 상영하는 영화 한편을 보았습니다.「The Rock」(바위 섬)이란 제목의 영화로 숀 코넬리와 니콜라스 케이지라는 유명 배우가 주연으로 등장하였습니다. 걸프만 전쟁 영웅들에 대한 미국정부의 처우에 대해 불만을 품은 수십 명의 전역 공수부대원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앞에 있는 유명한 알카트라즈(Alcatraz) 섬을 탈취하고 그 안에 비축되어 있는 치명적인 화학 미사일을 수중에 넣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해협 건너편의 샌프란시스코를 살상화하려 합니다. 물론 그들은 이러한 무기를 가지고 정부와 협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연방정부의 한 화학 전문요원이 졸지에 차출되어 영국의 정보원으로 무기수로 수형생활하고 있던 노련한 숀 코넬리와 함께 그들의 계획을 분쇄하고 위기를 극복한다는 내용입니다. 정해진 시간내에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해체해야 급박한 상황이 전개됩니다. 연방정부에서는 섬에 갇힌 수십 명의 사람을 희생하고서라도 섬을 전격 폭파하겠다는 결정을 내립니다. 영화의 절정은 시간을 다투는 화학무기 해체 장면이었습니다. 매우 위험천만한 작업이었습니다. 그 한 사람의 손에 백만에 이르는 샌프란시스코 주민의 인명이 달려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동작 하나 하나, 한순간 한순간이 죽음의 경계를 드나드는 위험 천만한 작업이었고 움직임이었습니다. 마침내 그는 해내고 맙니다.


이러한 위험천만한 일에 종사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모든 것, 그가 입에 담고 있는 모든 것, 그가 머릿속에 생각하는 모든 것, 그가 가슴에 품고 있는 모든 것들은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야 할 것들입니다. 목사는 자기가 하고 있는 일이 촉각을 다투는 매우 위험천만한 일이라는 것을 인식하기 전까지는 진정으로 자신의 하는 일을 알지 못하는 자입니다.


이제 쵸서(Geoffrey Chaucer, 1343-1400)의 글 가운데 목사(The Parson)에 관한 글을 중심으로, 우리는 '이러한 목사님을 그리워합니다'라는 제목으로 성직자론에 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쵸서의 본문은 다음과 같이 읽혀집니다:


목 사


479착하고 경건한 어떤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480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였지요.

481그러나 그는 거룩한 생각과 일에 있어서는 부요한 사람이었습니다.

482그는 역시 학문의 사람, 학자-성직자이었습니다.

483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설교하려고 힘썼으며,

484그의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485그는 온화하였으며 매우 근면하였습니다.

486역경의 시기에는 인내하였으며 모든 일에 만족하며 살았습니다.

487종종 이 사실은 증명되곤 하였는데, 그는 항상 유쾌하였으며

488십일조를 받아 가지기 위하여 출교 선언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습니다.

489그러나 그는 의심없이 기꺼이 주는 것을 기뻐하였으며

490특별히 교구 안의 가난한 교인들에게 그러했습니다.

491그는 수입 중의 일부분만 아니라 그의 소유 중에서도 기꺼이 주었습니다.

492그는 적은 것으로 만족하였고 그것을 풍족하게 사용했습니다.

493그의 교구는 매우 넓었고 교인들의 집들은 산지사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494그러나 그는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거나

495아픈 사람이든 죄지은 사람이든, 그 어떠한 상태에 있는 자들이거나 상관치 않

496가장 멀리 있는 가정이나, 큰 자나 작은 자들 방문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497그는 손에 지팡이를 들고 도보로 걸어갔습니다.

498그는 이러한 훌륭한 모범을 그의 양들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499그는 먼저 몸소 실천하였고 그후에야 가르쳤습니다.

500복음으로부터 그는 이러한 본문을 발견하였습니다.

501그리고 이러한 것을 덧붙였습니다-

502즉, 금도 녹이 슨다면 불쌍한 철이야 오죽하겠는가?

503만일 우리가 신뢰하는 목사가 부정하고 더럽다면

504평신도가 향락에 빠진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인가?

505수치스러운 일입니다, 만일 목사가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506빌어먹을 못된 목자가 깨끗한 양들을 친다는 것이.

507목사는 좋은 모범을 주어야 마땅할 뿐만 아니라

508자신의 청결함을 통해 그의 양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509그는 결코 성직(록)이 삯으로 전락하도록 하지 않았으며,

510그의 양떼들이 수렁 속에서 허덕이도록 방치하지 않으며

511런던으로 올라가 옛 성 바울 성당으로 가서

512죽은 영혼들을 위한 명복의 기도를 드리지도 않으며,

513어떤 형제단에 가입하지도 않았습니다.

514그와는 반대로 그는 집에 머물면서 양 울타리를 잘 보살피며

515이리가 그의 계획들을 유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516그는 목자였으며 삯꾼이 아니었습니다.

517그리고 그는 성결하고 덕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518죄인들에게 대해서 경멸하지 않았습니다.

519그의 언사는 오만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신적(神的)이지도 않았으며,

520오히려 그의 모든 가르침 안에는 신중함과 유쾌함이 있었습니다.

521그는 무리들을 공정하게 하늘로 인도하였으며

522좋은 본보기는 그의 바쁜 일과였습니다.

523그러나 어떤 자들이 죄를 짓고도 완고하면,

524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525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526그 어느 곳에서도 이 보다 더 좋은 목사(사제)는 없었습니다.

527그는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하지 않았습니다,

528그렇다고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독선적인 양심을 가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529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530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


본문 해석


[479] "착하고 경건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시골 교회의 목사님이었습니다. 물론 가난하였지요."라고 본문은 시작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복음의 사역에 부르심을 받았다고 느낀 사람이 있었다는 말입니다. 쵸서 당대의 많은 교직자들과는 달리 이 사람은 그의 소명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이었습니다. 성직에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은 먼저 하나님을 마음속 깊이 모시고 그분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설명되어 질 수 있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외형적인 경건의 모습을 추구하려는 성향은 많은 목사로 하여금 위선자로 만듭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은 정직과 순결을 전제로 합니다. 우리 시대의 목사들 가운데 '착함'(善)을 추구하는 분들이 얼마나 있는지 매우 의심스럽습니다. 아니, 교인들로부터 '우리의 목사님은 착하신 분이야' 라고 칭송을 받으시는 분이 얼마나 되는지 매우 회의적입니다.


본문의 목사님은 또한 '가난'했다고 합니다. 그는 재물과 돈을 모으는데 우선권을 두지 않은 목사였습니다. 그의 진정한 재산이 있었다면 그것은 '거룩한 생각과 일'에 있다고 본문은 말합니다. 물론 내가 재물 그 자체에 대해 반대하거나 멀리한다고 생각하지는 마시기 바랍니다. 자신들의 근면과 그것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을 통하여 부요하게 된 자들을 경멸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들이 우리 가운데 있습니다만 나는 그러한 경향을 매우 혐오합니다. 중세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이 흔히 하듯이, 목사들도 빈곤서약(vows of poverty)을 해야 한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러나 나는 분명히 말하고 싶습니다: 만일 물질적 이익에 관한 생각이 여러분의 가치관이라는 저울 속에 상당한 무게를 차지하고 있다면, 그는 교회의 봉사 중 가장 최고의 가치를 요구하는 이 직업(성직)말고 다른 직업을 찾아 나서십시오. 쵸서의 목사님이 '가난'하다고 한 것은 쵸서 당시의 많은 목사들이 돈과 재물을 얼마나 열정적으로 추구하였는가를 반어적으로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목사는 무엇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까? 그는 무엇이 사람을 진정으로 부요하게 하는가에 대해 생각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거룩한 생각 대신에 치졸하고 불경건하고, 저속한 것을 은밀한 가운데 계획하고 생각하는 우매한 목사들이 우리 가운데 너무 많다고 생각지 않습니까?


속으로는 돈을 추구하며 재물을 탐내면서, 겉으로는 복음을 전한다는 미명아래 교인들을 착취하는 어리석은 전문 부흥사들이 이 시대에 없다고 단정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연말 예산결산 위원회의시 내년도 목사 사례금 책정에 초연했던 목사들이 얼마나 있었습니까? 물론 쵸서의 목사님처럼 지금 이 시대에도 물질적으로는 가난하지만 생각과 일에 있어서는 부요한 분들이 적지 않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개탄할 정도로 목사의 이미지는 땅에 추락하여만 가고, 은밀하게 세속적인 물질을 추구하는 목사들이 너무나 많은 시대가 되었습니다. 물론 일꾼에게 합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하겠습니다만, 목사직이 '전문인'(professional)이라면, '전문인'이란 용어 자체의 정의는, '통상적으로 이윤을 추구하지 않으면서 자신의 소명을 추구하는 사람이다' 라는 의미입니다.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공언하는 사람이 월급이나 사례금 그리고 교회로부터 반드시 받아내야만 한다고 생각되는 다양한 혜택(예를 들어, 자동차, 사택관리비, 자녀 교육비, 학위를 위한 목사 교육비, 출장비, 심방비, 손님 접대비, 판공비!)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을 평신도들이 보았거나 들었을 때처럼, 그들의 마음을 가장 심각하게 상처를 내고 그들로 하여금 사역자로부터 가장 빨리 등을 돌려대게 하는 일들은 없을 것입니다. 교인들의 마음을 멍들게 하기보다는 적당히 참을 수 있을 정도의 상황아래 사는 것이 훨씬 나을 것입니다. 물질과 돈은 마치 탄탈로스의 깊음처럼 영원히 채워질 수 없는 유혹이기 때문입니다.


[482] "그는 역시 학문의 사람, 학자-성직자이었습니다." 쵸서 당시의 상황을 감안한다면 이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매우 큽니다. 쵸서는 이 사실에 독자들이 주의를 기울이기를 원합니다. 그가 그려놓은 목사는 당시 중세의 일반적인 목사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는 뜻입니다. 많은 목사들, 특별히 그들의 일생을 시골의 교구에서 보내야만 할 정도의 목사들은, 많은 경우 무식했으며 천박하기까지 했습니다. 반면 예배 시에(미사) 라틴어를 말할 수 있는 목사라면 유식하고 학문이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따라서 본문이 암시하고 있는 바는, 배움이 있는 학자 성직자가 시골교회의 목사로 겸허하게 소명에 응답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특이할 만 하며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심지어 매우 '비정상적'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학벌이 좋고 유식한 목사들은 종종 좀더 명성이 있고 전통이 있는 교회들을 추구하였으며, 또한 그렇게 함으로써 많은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자리에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그들 자신의 권위와 품격을 고양하는 방법이기도 하였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위한 긍지와 명성을 추구하며 권위와 자만을 갖게 되었습니다. 물론 불쌍한 생각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결국 덜 배우고 학벌이 낮은 동료 목사들에게 그들의 교구를 떠맡기고(참조, [509]) 런던을 향해 갔던 것입니다(참조, [511-513]). 요즈음 말로 부자들이나 학식있는 사람들, 혹은 권세있는 자들이 많이 산다는 서울 압구정동에서 목회하기를 소원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곳에 가서 유명인사들의 추도예배를 인도하거나 그들의 어린애들의 돌잔치 설교라도 맡으면 여간 즐겁고 뿌듯한 일이 아닌지요! 쵸서 당시에도 많은 식자층 목사들이 런던의 유명한 성 바울 교회당에 가서 부잣집의 친지나 가족들 중 이미 죽은 자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기회를 잡으려고 런던으로 가려는 사람들이 많았던 것입니다. 또한 그 당시 런던에는 여러 종류의 '형제단'들이 있었는데, 이 형제단들은 일종의 중세의 상공인 연합회(guild)들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는 단체입니다. 바로 이러한 단체의 기관목사(사목: chaplain)가 되려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마치 밤에 아르바이트하면서 이중적, 혹은 음성적으로 돈을 버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쵸서는 말합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목자이지 삯꾼은 아니었다" [516]. 삯꾼으로 번역된 용어 'mercenary'는 이중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첫째는 라틴어를 말할 줄 아는 사제(목사)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언변이 유창한 자들로서 이 교구 저 교구를 순회하면서 배우지 못한 목사들이나 교인들을 위해 미사를 라틴어로 집전하였습니다. 둘째로, 이 용어는 한글어 번역을 통해 나타나듯이 '삯꾼', 혹은 '용병'을 가리키는데 '돈 벌레'(money-grubber)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서, 목사는 학문의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목회 사역에 들어갈 사람이라면 반드시 그러해야 할 조건과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신학교의 학생으로서 여러분들은 이미 문학사에 해당하는 교육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현대 교회의 교인들의 지적 수준이 높아가는 현실 앞에서 사역자가 무식할 수는 없으며, 적어도 신학수업을 받기 위하여서 인문계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상기시키고 싶습니다: 현재 문학사라고 불리는 B.A.(bachelor of arts)는 인문계 대학 교육학위 명칭으로 사실상 중세로부터 시작하였습니다. 이 경우 'bachelor'(학사)는 어떤 이들이 냉소적으로 말했듯이 '동일한 실수를 다시는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 아닙니다. '학사'란 인문계 학문에 있어서 도제(徒弟: apprentice), 견습공, 혹은 훈련병을 가리킵니다. 평생을 '그 책'(The Book)을 다루고 연구하고 묵상하고 기울여야만 할 여러분들은 도제적인 정신이 없이 훌륭한 장인(匠人)이 될 수 없습니다. '그 책'을 올바로 이해하고 가르치기 위하여 이미 여러분들은 신학교에 들어오기 전에 기본적인 소양과 인문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았으리라 생각합니다. 그것들이 좋은 도구가 되어서 신학을 수립하고 성찰하는데 사용되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의 위대한 정신들을 함양한 고전들을 가까이하고, 창조적인 생각과 여유를 위하여 음악을 사랑하며 - 위대한 개신교 신학자 칼 바르트(Karl Barth)가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에 관하여, 최근에는 독일 튜빙겐 대학교의 천주교 신학자 한스 큉(Hans Kng)이 다시금 모차르트에 관한 책을 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십시오 - 다양한 언어 습득을 통하여 (특별히 헬라어와 히브리어!) 하나님의 '책'을 심도 깊게 이해하는데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신학교육에서 신학원어 과목이 앞으로도 주님 오실 때까지 필수 과목으로 계속되기를 기도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공부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신학교육 3년으로 마치는 것은 아닙니다. 만일 여러분이 소명에 진정으로 진실하고 성실하려면 스스로를 지속적으로 교육시켜 가지 않으면 안될 것입니다. 물론 나는 이점에 있어서 목사들이 많은 핸디캡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교수들이나 교사들은 그들의 학생들을 위하여 강의를 준비하는 것이나, 목사가 그들의 교인들을 위하여 설교를 준비하는 것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적어도 첫 몇년간은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한 교회에서 3년 정도 시무하다가 다른 교회로 옮기거나, 아니면 여러분의 교인들의 기억력이 매우 짧거나 하지 않은 이상, 목사들은 교수나 교사들보다 훨씬 많은 핸디캡을 갖고 있을 것입니다. 장래 목사로서 여러분들은 우리 교수들이 계속적으로 변화하는 학생들을 위하여 같은 과목을 가리키는 강의를 개정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니고 있지는 못합니다. 여러분들은 옛 설교를 단순히 개정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속적으로 연구하고 스스로를 교육시키지 않으면 소명을 불성실하게 감당하는 일이며 심지어 직무유기를 범하는 것이 됩니다.


지금도 잊지 않는 한 개인적인 고백이 있습니다. 내가 미국 오하이오 주에서 목회하고 있었을 때입니다. 한 교회에서 목회하던 4년째 되던 어느 주일이었습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 한번도 사용했던 설교를 다시 하는 법이 없었던 나로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그러나 설마하는 심정으로 주일 아침 강단에 섰습니다. 3년전에 설교했던 설교 한편을 꺼내 들고 강단에 섰던 것입니다. 그전 일주일동안 몹시도 아팠기 때문에 설교 준비할 여유가 전혀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튼, 아무 누구도 이 설교를 기억치 못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설교를 하였습니다. 예배 후 교인들을 만나기 위하여 교회당 현관에 서서 교회당을 나오는 교인들과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중년의 어떤 집사님이 악수를 하면서, '목사님! 오늘 설교는 3년전 3월 25일에 하신 설교지요!' 당황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나는 얼떨결에 '어떻게 아셨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 교회에 부임해 와서 세례를 주었던 분이었습니다. '나는 목사님의 설교가 너무 좋아서 성경에 날짜와 설교 제목과 그 내용을 적어 놓고 있습니다.' 이런 비극이! 그럴 줄이야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 후로 나는 설교한 후에는 반드시 날짜와 청중들에 관한 기록을 설교문 끝에 남겨 놓는 습관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아마 방어심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다시금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일주일에 상당한 시간을 따로 할당하여 독서하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많은 경우 상당수의 목사님들이 다음 주일 설교를 위한 탄약을 장전하기 위해서 독서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불행한 습관입니다. 또한 나는 여러분에게 신학에 관련된 책을 읽을 것을 권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여러분이 대학이나 신학교시절 읽을 시간이 없어 읽지 못했던 고전적인 소설들이나 희곡들, 혹은 국어 개론시간에 스쳐갔던 어떤 저자들의 시(詩)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저명한 작가들의 작품들, 훌륭한 언어의 스승들, 언어를 표현함에 있어서 치밀성과 단순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문체가들, 문법가를, 언어학자들의 글들을 가까이 하라는 권면입니다.


다시금 말하거니와, 학자ㅗ성직자가 되십시오. 그들은 모두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가 다루게 될 가장 기초적이고 기본적인 자료가 하나님의 바로 그 말씀이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러므로 모든 목사들은 언어를 다룸에 있어서 '학자'(clerk)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교인들을 무시하거나 경홀히 취급하지 마십시오. 너무나 뻔한 것을 말하느라 시간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또한 교인들을 마치 초등학교 2-3학년생이나 되는 것처럼 낮추어서 말하지 마십시오. 문체의 위대한 스승들을 공부하시고, 빈틈없는 구절들을 기억하시고, '정확하게 선택된 단어'들을 사용하시며, 생각된 것을 그 보다는 달리 더 잘 표현할 수는 없는 그러한 '참된 기지와 해학'을 개발하십시오.


[483/484] "그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정으로 설교하려고 힘썼으며 / 그의 교인들을 헌신적으로 가르치곤 하였습니다." 이 본문은 적어도 여러 가지를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 같습니다. 먼저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그들이 '무엇에' 부르심을 받았는가를 분명히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어떤 이들이 그들이 받은 소명을 저버리고 다른 것을 추구하고 따라갔다는 것에 대해 말씀을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물론 목사에게 있어서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특별히 오늘날처럼 복잡한 사회 속에서 목사의 역할을 다양한 교인들만큼이나 다양하게 이해되고 요청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러분에게 분명히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말씀 사역자'의 일차적 기능은 선포하는 일과 가르치는 일입니다. 물론 이것만이 그가 해야 할 유일한 기능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앞으로 우리가 보겠지만, 쵸서도 목사의 소명 안에는 다양한 측면들이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심방하고([493-496]) 구제하고([489-491]) 상담하고 치유하는 것들이 그것들입니다. 또한 설교와 교육 이외의 다른 봉사는 질적으로 열등하다는 것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내가 말하려고 하는 바는, 여러분들이 복음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여러분은 먼저 복음을 기꺼이 선포하고 설교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만일 여러분 가운데서 교인들에게 문화공간을 제공하고 싶거나 크리스천 커피집을 운영하고 있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혹은 방탕하는 청소년들을 위한 캠프를 운영하고 싶으면 그렇게 하십시오. 미혼모들을 위한 보호소를 설립하기 원하면 그렇게 하십시오. 원치 않은 임신으로 인해 생겨난 아이들을 위해 입양기관을 만들고 싶거든 기꺼이 그렇게 하십시오. 그러나 부탁드립니다. 제발 말씀을 선포하고 말씀을 가르쳐야 할 여러분의 의무를 희생하거나 외면해가면서는 하지 마십시오! 먼저는 여러분이 받는 신학교육은 하나님의 나라의 그러한 사역을 위하여 여러분을 적절하게 준비시키지 못할 것이며, 둘째로는 교인들에게 여러분 자신들을 복음의 사역자라고 알리면서도 실제로는 위에서 언급한 다른 일들에 시간을 투자하고 힘쓴다고 한다면 그것은 부정직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485]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는 "온화하였으며 매우 부지런하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역경과 고난의 때에는 인내하였고 자족할 줄 알았습니다([486]). 더욱이 자신의 봉급을 안전하게 확보하기 위하여 무서운 열쇠를 휘두르지도 않았습니다. [488]을 한번 다시 읽도록 하겠습니다: "십일조를 받아 가지기 위하여 출교선언하는 것을 매우 혐오하였습니다". 중세시대에 출교를 당한다는 것은 '점차적 죽음'(slow death)을 선고받았다는 것에 해당하는 무서운 형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출교당한 사람과는 그 어떠한 거래도 금지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에게 음식이나 거할 곳을 제공하거나, 혹은 일자리를 주어서는 안되었으며 만일 누구든지 그것을 범하면 그 사람 역시 출교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을 악용하여 몇몇 방자하고 무법한 목사들은 교인들에게 출교로 위협하면서 돈을 뜯어내었던 것입니다. 쵸서의 시대처럼, 오늘날에도 강단에서 '쌍칼'(?)을 - 하나님의 축복과 저주 - 자기 마음대로 휘두르는 무당과 박수같은 목사들이 있다는 사실은 매우 불행한 현실입니다: '목사를 잘 섬겨야 축복을 받는다', '주의 종을 잘 받들지 않으면 저주받는다',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통사고나 질병 등과 같은 재앙으로 비극적으로 죽는 수가 있다' 등과 같은 문구들이 때로는 직설적으로 혹은 매우 완곡된 표현으로 교인들에게 주입된 신학적 명제들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는 것은 매우 큰 불행이며 암울한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의 가난한 목사님은 오히려 이와는 정반대의 극단으로 갔습니다: 그는 자신의 적은 수입(사례금)과 가진 물건들 중에서 얼마를 떼어내어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들에게 주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만족하고 살기 위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의 목사님은 알았습니다 (참조 [492]).


[493] 이후는 '가정 방문'(심방)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는 교구를 담당하고 있는 장로들에게 심방을 떠맡기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천둥과 번개치는 날에도 스스로 심방에 나섰습니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차별하지 않고 모두를 동일하게 찾아갔습니다. 요즈음처럼 목회상담실로 불러낸 것은 아닙니다. 병들었거나 - 육신적이든지 영적이든지 - 혹은 건강하거나 상관치 않고, 또한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찾아갔습니다. 그것도 걸어서 갔던 것입니다(참조, [493]-[497]). 당시 그의 동생은 농부였는데「토마스 아 베케트」성소(shrine of Thomas ? Becket)에 순례하기 위하여 종종 밭가는 말을 타고 갔지만 우리의 목사님은 걸어서 같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는 자신의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떠맡기지 않고 솔선수범하였다는 것입니다. 자 이제 나는 미래의 목사님들에게 권합니다: 이점에 있어서 이 목사님의 모범을 따르십시오. 만일 당신이 복음전도의 사역자로 부르심을 받았다면, 당신이 마땅히 하기로 약속한 일을(복음 전도), 그리고 그 일 때문에 당신이 돈을 받고있는 바로 그 일을(복음 전도) 당신이 하지 않고 교인들이 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짜는데 당신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심으로 부탁합니다. 쵸서의 목사님처럼 되십시오: 교회의 다양한 활동과 행사와 프로그램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당신들의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행동으로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 가르치시기 바랍니다.


목사 안수를 받던 날 나를 위해 설교를 맡아 주셨던 목사님(Rev. Terrey Huttinga)의 권면을 잊지 못합니다. 그는 말하기를, '목사의 삶이란 마치 유리집에서 사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설명하면서 '자, 이제부터 당신은 대중의 면밀한 조사를 받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다. 매우 소름끼치고 두려운 감정을 금치 못하였습니다. 교인들에게 드러내어 놓여진 삶을 사는 사람이 목사라면 그는 강단에서의 말과 그의 가정에서의 삶이 하나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교인들의 모범이 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여러분은 존경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존경과 명예는 버는 것이지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499] "그는 먼저 몸소 실천하였고 그후에야 가르쳤습니다"라고 쵸서는 말합니다.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쵸서는 다시금 본문의 마지막 두 행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529-530]). 이 구절은 적어도 동사의 순서에 의하면 마태 5:19의 예수님의 말씀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행하여」「가르치는」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쵸서의 목사님은 그가 설교한 것을 살았습니다. 실천이 먼저 온다는 것을 그는 항상 명심했던 것입니다. 말하기는 쉽고 설교하기는 쉽습니다만 실제로 성육신화된 설교를 하기는 어렵습니다. 아니 설교의 성육신화 역시 십자가의 죽음을 넘지 않고는 완성될 수 없습니다.


복음의 사역자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면제되는 적어도 두 가지 힘든 짐을 짊어지고 노동합니다. 첫째, 그는 그가 이 세상에서는 결코 성취할 수 없는 것, 즉 '성결함'과 '거룩성'의 조달자라는 사실입니다. 문학교수가 그가 사용하는 모든 언어에 있어서 문학적이어야 한다는 것과 국어교수가 언어사용에서 국어법에 정확해야 한다고 일반 대중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실제로 그렇지 못하다고 해서 심각하게 문제를 삼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또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그들과 별로 차이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수준을 높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보통 사람들 가운데 그들보다 더욱 문학적이고 문법적인 사람들이 많지 않습니까? 한편 목사는 성결의 선생이며 거룩의 교사입니다. 그들의 삶은 그 모든 자세한 내용까지 대중들의 끊임없는 조사의 대상이 될 뿐만 아니라, 교인들은 목사님의 삶이 그들이 따라야 할 모범이 되기를 기대합니다. 물론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은 이것이 불공평하다고 항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견디기 힘든 현실이기도 합니다. 나는 장래의 목사들이 이 사실을 깊이 마음에 새길 것을 권합니다.


쵸서는 목사를 금에다, 교인들을 철에다 비유하고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금은 산화작용에 해당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녹이 슬지 않습니다. 반면에 철은 쉽게 산화되어 붉은색으로 녹이 습니다. 만일 금이 녹이 슨다면 철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느냐는 쵸서의 논리입니다. 그래서 쵸서는 질문하기를, 더럽고 깨끗지 못한 목자가 어떻게 깨끗한 양떼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겠는가? 착한 목사에게 착한 양떼들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고, 만일 양떼들이 더럽고 깨끗지 못하다면 목사는 먼저 자신을 성찰하고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도 맑다는 우리의 속담은 진리입니다. 좌우지간 목사에 대한 평신도들의 특별난 기대와 요구는 모든 목사들이 마땅히 짊어져야 하는 짐이며 핸디캡입니다.


목회 사역에 있어서 목사들이 짊어져야 두번째 짐은 다른 어떠한 직업의 사람들도 지지 않는 짐일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사역하고 있는 사람들과 그 자신사이에 매우 친밀한 관계가 수립된다는 점입니다. 전형적인 신학교육은 사실상 신학생을 현장 목회에 충분히 준비되도록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는 졸업하자마자 즉시로 그의 양떼들의 심리와 정서들을 다루고 사역하도록 부르심을 받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불가피하게 그는 그의 교인들과 정서적으로 깊은 관련을 맺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부담이 되기도 합니다. 바로 이곳에 그의 소명의 특수한 위험이 가로놓여 있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다른 직업은 이러한 위험부담을 안고 있지는 않습니다. 학생들이 교수에게 와서 그의 남편이나 아내의 문제에 대해 심각하게 불평하거나 도움을 요청하지는 않습니다. 기껏해야 그들이 와서 할 수 있는 불평이 있다면, 당신의 강의가 잘 전달되지 않는다느니, 혹은 당신의 시험이 너무 어렵다느니 하는 종류일 것입니다.


그러나 목사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소명은 다른 사람들이 정직하게 피할 수 있는 관계 속으로 그를 강제로 끌어들입니다. 목사는 영혼의 의사입니다. 그러나 불쌍하게도, 목사 역시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인간의 연약성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인간이기도 합니다. 다시 말해서 자신도 연약할 수밖에 없어 스스로의 짐을 감당키 어려운 인간이 다른 사람들의 연약함과 고뇌와 괴로움을 받아들이고 감당해야 하고 치료까지 해야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자신도 고통하는 환경가운데서도, 자신도 유혹받고 감당키 어려운 일들 가운데 처해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은총을 베풀어야 하는 사람이 목사입니다. 잘못하면 자신도 심각한 어두움 속으로 들어가기 쉬운 처지에 처하게 됩니다. 근본적으로 경건한 사람이 어떻게 조금씩 조금씩 보이지 않게 간음에 빠지게 되고 결국 자살에 이르게 되는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섬머세트 모옴(William Somerset Maugham)의 단편,「비」(Rain)가 보여주는 교훈과 덕을 상기하여 보십시오.


앞으로 목회하다가 혹시 여자 홀로있는 가정을 심방하여야 될 경우, 여러분의 아내들과 함께 가십시오. 어떠한 유혹이나 온당치 않는 의혹을 피해야 할 것입니다. 목사실의 문에는 조그마한 유리창문이라도 만들도록 하며, 아니면 항상 어느 정도는 열어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503, 504] "만일 우리가 신뢰하는 목사가 부정하고 더럽다면 / 평신도가 향락에 빠진다는 것이 놀랄만한 일인가?" 그렇다면 당신과 양떼들 사이의 그 어떠한 부정하고 온당치 않은 관계를 암시하는 일들을 피하십시오.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옵소서' 라는 기도를 기억하십시오. 어떤 소설 속의 설교자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내 무릎에 앉아 있는 여인은 여인이 아니라 양떼 중의 한 어린 양(lamb)일뿐 입니다." 그때 그의 장로들이 이 어처구니없는 변명에 대해 말하기를, "형제여, 다음에 양떼 중 어린양을 당신의 무릎 위에 앉히려거든 분명히 그것이 수컷 어린양(ram lamb)이 되도록 하십시오!"


여러분은 지난 80년대 말경을 전후로 해서 일어난 미국의 유명한 텔레비전 복음전도자들(Tele-evangelists)의 몰락들을 기억하십니까? 짐 베이커(Jim Baker), 지미 스웨거(Jimmy Swagart)등과 같은 TV 전도자들의 몰락은 교회의 신뢰성에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다주었습니다. 혼외정사로 몰락일보 직전에 처한 지미 스웨거트(Jim Swagart)는 공중파 TV 앞에서 눈물을 흘리면서, 역사상 가장 극적인 참회를 연출해 낸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의 시사 주간지 Time지가 그 광경을 표지에 실을 정도로 유명했던 참회였습니다. "O, Lord, I have sinned against thee, thee only!" ["오, 주여! 내가 주께만 범죄 하였나이다!"](시 51:4). 그러나 그는 일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성적 유혹에 빠져들고 말았습니다. 캘리포니아의 로스앤젤레스 지역의 사창가에서 창녀를 그의 자동차에 태우고 가다 일방통행로로 거꾸로 들어갔던 것입니다. 교통경찰에 잡힌 그가 이번에는 무엇이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나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습니다. 그놈의 마귀 때문입니다!" 비난받아야 할 대상은 본인이 아니라 마귀라는 것입니다.


목사에게 있어서 도덕성은 가장 최후로 지켜져야 할 처녀의 순결성과도 같습니다. 도덕성을 상실하면 그의 사역은 힘을 상실한 삼손이 되고 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그를 사용하실 수는 있겠지만 -삼손처럼 -, 우리가 다 알다시피 그는 비극적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일종의 '시적 정의[詩的 正義]'(poetic justice)의 실현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님은 몇 가지 본보기가 될만한 것들이 더 있습니다 첫째로, "그는 집에 머물면서 양 울타리를 잘 보살피며 / 이리가 그의 계획들을 유산시키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514-515]. 부패하고 게으른 목사는 무섭고 소름끼치는 늑대가 양을 잡아먹도록 양떼를 방치합니다. 직무를 유기하는 목사가 많이 있었으며 지금도 그러합니다. 정작 돌보아야 하는 양들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일들'에 수많은 시간을 소비합니다. 자기의 명예를 위하여 각종 기관의 '장(長)'자리를 추구하다가 목이 길어진 분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자기 열등감에 빠진 사람일수록 그런 성향이 많이 있습니다. '시찰장', '노회장', '총회장', 각종 '교단장' 자리들을 탐하고 목말라 하는 우리시대의 어리석은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가슴칠 노릇입니다. 물론 내가 독선적으로 모든 사람이 다 그렇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어울리지도 않는 박사학위를 고집하여 혈세와 같은 교인들의 헌금을 남용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목사의 '목회학 박사' 학위 취득예배를 교회 재정으로 드려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정도의 한국 교회라면 그 장래는 매우 암울한 것입니다. 교인들이 낸 헌금을 자기 마음대로 사용하여 노회장, 총회장이 되는데 사용한다면 이는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는 무서운 죄악일 것입니다.


목사는 무엇 때문에 분주해야 합니까? 양떼를 돌보고 양 울타리 보살피는 일 말고 목사에게 우선적인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 볼 때 "저 멀리 산 중턱에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는 양들이 항상 있어 왔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온갖 종류의 늑대들이 하나님의 교회와 양떼들을 위협하여 왔습니다. 속이 좁은 근본주의자들, 자유적인 사회복음주의자들, 무율법을 가르치는 보편주의자들, 정신치료적 설교로 현대인들을 유혹하는 사람들, 할리우드적 감상주의로 교인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은 안으로부터 발생하는 무서운 위협들이며, 마약과 술, 성적 자유와 향락, 개인주의와 방종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지 못하도록 유혹하는 외부적 위협들이기도 합니다. 쵸서의 시대보다는 지금에 더욱 많은 늑대들이 있을 것입니다. 현대의 풍요와 기동력을 감안할 때 양우리는 더욱 쉽게 공격당하여 부서질 염려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양떼들이 수렁에 허우적거리도록 방치하고 있으면서[510] 자신은 개인의 영리영달과 이익을 위해 런던으로 올라가려는[511] 목사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를 몹시도 서글프게 합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우리 안에 있는 양떼를 돌보았다고 합니다. 이 점에 대해 한가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그동안 폭발적인 교회성장을 해왔습니다. "가서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라"는 주님의 지상 명령에 순종하여 한국 교회는 수많은 개종자들을 얻었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러한 순수한 주님의 명령에 대하여 많은 목사들이 불순하게 응답하여 왔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입니다. 즉 교회성장을 통하여 세를 확장하고 자신들의 명예나 능력을 보이지 않게 자만하고 과시하는 일입니다. 큰 교회의 목사들은 적은 무리를 보살피고 있는 목사들을 향해 고자세를 나타내곤 합니다. 적은 무리를 이끌고 있는 목사들 역시 보이지 않는 분노와 허탈감, 증오와 시기를 외형적인 겸손과 자책으로 위장합니다. 결국 목사들 간에는 천국 사역의 동료의식이나 하나님의 목동들이라는 생각들이 사라진지 오래되었습니다. 수적 팽창주의는 개교회주의를 가속화시켰으며, 목사들 간의 이질감을 조성하여 왔으며, 목사들의 개인적 성취를 위하여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은 크나 큰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적지 않은 수의 목사들이 심각할 정도로 병들었다는 말입니다. 병든 마음을 가진 목사들이 목회를 하니 양떼들이 정상적으로 생각하고 양육받을 수 있을지 의문시됩니다. 자연히 그러한 분노와 좌절감을 교인들을 향해 여러 모양으로 발산하고 있으니 불쌍한 것은 교인들뿐입니다. 마치 목자없이 방황하는 양떼들이라고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다시 우리의 본문으로 돌아갑시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양무리들을 희생해가면서 전도에 종사하는 경향은 매우 큰 우려를 자아냅니다. 목사들은 먼저 양우리 안에 있는 양떼들을 지키고 먹여야 할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착하게 하시오. 그러나 먼저 믿음의 가정들에게 그리하십시오"라고 한 사도는 우리에게 권면한 일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들 중 선한 목자에 관한 비유는 우리 안에 있었던 아흔아홉 마리의 양들 중 어느 한 마리도 목자가 잃어버린 한 마리를 찾아 떠나있는 동안에 방황하지 않았을 것이란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여러분에게 위탁된 양들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이제 쵸서의 목사님의 성품을 알아보도록 합시다. [485]에서 '그는 온화하였다'고 말합니다. 이를 설명이나 하듯이 [518-519]에서는 그가 '죄인들을 경멸하지 않았으며, 그의 언사는 오만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신적(神的)이지도 않았다'고 말합니다. 긍휼과 애정을 갖고 죄인들을 질책하면 그는 그 질책과 꾸중을 감사히 듣고 돌이키지만, 마치 목사가 하나님이나 되는 양, 오만하고 불손하게 징책하면 사람을 돌이킬 수 없는 법입니다. 어떤 목사들은 매우 오만스럽게 교인들을 야단칩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사역의 본질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예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성육신의 가르침은 목회자도 교인들이 죄를 지을 때 마치 자신이 죄를 지은 것처럼 간주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들을 다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그가 모든 일에 유약하게 대처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온화하고 겸손하다는 것이 곧 모든 일을 부드럽게 타협해 나아간다는 의미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의 온유함은 천하에 따를 자가 없었으나, 그는 백성들의 잘못과 죄악을 엄히 지적하고 꾸짖었던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치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데도 '아닙니다, 모든 것이 잘될 것입니다' 라고 말하는 자가 아닙니다. 그들은 구약 성서의 예언자들이 그처럼 통렬하게 비판했던 '평화로다 평화로다'를 외치는 거짓 선지자들이 아닙니다. 다시금 말씀드리거니와, 우리의 목사님은 "그러나 어떤 자들이 죄를 짓고도 고집적으로 완고하면, 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523-525]. 혹시 여러분은 교회에서 누구에게 머리를 수그립니까? 누구를 무서워하십니까? 스스로의 양심에게 답변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재력이 있는 장로가 아닙니까? 세상의 지위가 높은 교인에게 아부하지는 않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직업적인 목사일 수는 있어도 소명에 충실한 진실된 목사는 아닙니다.


교인들이 떠나는 것이 두려워서 마땅히 질책하고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할 경우로부터 움츠려 드는 소심한 겁쟁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잘못을 지적하고 책망하는 일이 쉽지는 않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의 이상적인 목사님은 그가 누구이든 - 높은 자이든 낮은 자이든 상관없이 - 그를 책망하였으며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습니다. 과거에는 교회 안에 책벌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물론 정당치 못하게 시행된 사례들도 없진 않았습니다. 나의 소년시절에 교회의 어떤 여신도가 '장막성전'에 가입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녀는 명문대학의 피아노과를 졸업한 재원이었으며, 시골교회의 입장에서는 그녀를 놓친다는 것은 커다란 교회적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 담임목사님은 눈물로 그녀에게 권고하였고, 듣지 않자 공개적으로 교회에서 책벌을 내렸습니다. 어린 소년의 가슴속에도 그 사건이 얼마나 두려웠는지! 그러나 이제는 시계추가 정반대의 쪽으로 쏠린 것 같습니다. 교회안의 '책망'은 잊혀진 단어들이 되었고 '책벌'은 사전에서나 찾아 볼 수 있는 고어(古語)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관해 너무나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죄의 고백없는 사죄, 죽음없는 부활에 관한 설교를 많이 듣게 되었습니다. 신학자 본 훼퍼의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우리는 '값싼 은총'(cheap grace)을 추구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랑과 아울러 하나님의 존엄과 하나님의 정의에 관한 설교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죄에 대한 심각한 인식, 인간의 전적 부패와 타락에 대한 지적이 없이는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의 은총과 사랑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그 신앙고백서에 의하면, 진정한 위로를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하여서 우리는 '우리의 죄들과 비참함들이 얼마나 큰가'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러한 죄들과 비참함들을 단지 또 다른 삶의 방식으로 치부하여 버리거나 그냥 넘어간다면, 혹은 신약에 사는 크리스천들은 더 이상 십계명의 '하지 말라'들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치부해 버린다면, 여러분들은 여러분들에게 위탁된 의무를 소홀히 하는 죄를 짓는 것입니다. 아니면 우리 모두는 어리석은 자들의 낙원에서 스스로 안위하면서 사는 바보들일 것입니다.


최근에 여러분의 교회의 강단으로부터 죄에 대해서 혹은 지옥에 대해서 두려운 설교를 들어본 일이 있습니까? 물론 내가 말하는 두려운 설교란 협박성의 설교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으로 인간의 죄와 비참함을 심각하게 인식하게 해 주는 두려운 설교 말입니다. 또한 그러한 설교는 하나님의 은총의 불가피성을 온몸으로 전율케 하는 설교입니다.


그가 책망할 때는 공정성이 있었습니다. 누구라고 봐주고 누구라고 눈감아 주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지위에 높고 낮음에 상관없이, 사람의 재물에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그는 목사의 직무를 공정하게 행사하였습니다. 물론 교회 안의 유명한 인사를 책망하는 일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그래서 과거에는 종종 이러한 일에 실패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쓸데없는 오만과 대결을 위해서 나서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영혼을 진정으로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서라는 것입니다. 멸망으로 치닫는 사람을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재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처럼 배금주의의 제물이 되어 버린 곳이 또 어디 있을까 생각이 듭니다. 주의 일을 돈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악성 전염병이 무서운 속도로 확산되었습니다. 가장 돈을 멀리해야 할 단체가 가장 돈을 사랑하고 돈을 좋아하게 되었으니 비극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변명하고 핑계를 댄다 하여도 하나님은 사람의 중심을 보시고 계십니다.


한편, 동전의 다른 면도 있다는 사실을 말하고 싶습니다: 낮은 사람을 질책하고 책망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처럼 죄책감에 쪄들은 사회의 기류아래 약자나 불이익을 당하는 자들의 죄들을 지적하고 책망한다는 것은 점점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흔히 불공평하고 부당한 사회의 희생자들로 치부하여 버리면서 그들의 죄들을 간과하거나 덮어버리는 것도 크나큰 잘못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젊은이들의 성적 간음률이 점점 높아만 가는데도, 그들의 감정과 기분을 상하지 않는 정도안에서만 '권면'을 할뿐입니다. 더 이상 그들을 간음자라고 규정하지 않습니다. 단순히 '성적으로 활동적'(sexually active)이라고만 부를 뿐입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낙태를 허용하는 것은 좀더 가진 자의 알량한 자비심이 가져다주는 합리화이며, 사람의 생명을 단순히 경제적 측면으로만 바라보는 잘못된 인간관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목사님은 하나님의 말씀의 범죄자를 매우 날카롭게 꾸짖었다고 합니다.


쵸서의 이상적 목사상은 특별히 우리 시대에, 특별히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 하는 많은 목사를 가진 우리 한국 교회를 향하여 매우 처방적이며 지시적입니다. 그는 "헛된 명예나 존경에 대해 목말라 하지 않았습니다"[527]. 그는 그가 받은 특별한 소명, 하나님의 부르심을 특별한 대우나 특권을 부여받았다는 보증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아마 상상하건대, 그는 그에게 찾아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자신의 주머니에서 지출하였으며, 결코 교회 회계 집사로 하여금 돈을 지출하도록 강요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부엌을 스스로 고쳤을 것이며 사찰에게 목사의 개인적인 일들을 명령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또한 교인들이 그에게 신형 자동차를 선물하리라고 기대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자신의 돈을 들여 자신의 자동차를 구입하였을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 재정을 마치 자신이 맡겨 놓은 돈으로 착각하여, 주의 사업이라는 미명아래 함부로 사용하고 남용하는 빌어먹을 못된 목사들이 얼마나 많은지요! 자신의 이력서에 줄이 모자랄 정도로 거짓되고 헛된 명예로 가득 채우는 자들이 우리들의 목사라면 이보다 더욱 큰 불행이 이 세상이 어디 있을 것입니까! 신학도들 가운데 명예와 권력을 밝히는 자들이 있다는 것은 한국 교회를 위해 매우 큰 재앙과 불행의 징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장(長)'자리가 그렇게도 매력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목사가 될 이유가 없습니다. 진심으로 여러분들에게 권면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쵸셔가 우리의 목사님에 대해 잘 말한 것처럼, "그렇다고 내가 특별하다고 생각하거나 혹은 독선적인 양심을 가졌기 때문도 아닙니다"[528]. 나나 여러분이나 동일한 목표와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신실한 사역자요 복음의 수종자들이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제 우리의 본문의 마지막 두 행이 참다운 목사상의 결론부분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목사님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그의 열두 사도들의 교훈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그는 먼저 그것을 친히 실천하였습니다" [529-530].


이 자리에 모이신 형제 자매들이여, 그리고 미래의 복음의 사역자들이여, "그러므로 여러분들도 가서 이같이 행하십시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