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약 신 학 강 의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 신약학 교수 김세윤
신약신학 제 2강
책 소개 하겠습니다.
먼저 독일어로 되어 있는데 영어로 번역된 고펠트의 신약신학 두권으로 되어
있다. 보수주의 입장에서 독일 사람의 책으로는 상당히 온건하고 밸런스를
잘 이룬 책인데 비판적인 학설을 충분히 토론하고 그러기 때문에 교과서로는
아주 좋은 책이다.
그 다음에 확실히 보수주의 입장에서 쓰여진 책으로써 교과서로는 많이
쓰이는 책이 G.E.Ladd의 시약신학 책이 있는데 이미 번역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 아주 좋은 책이 J. Jermias의 신약신학이
있는데 이책도 원래 독일어로 쓰여졌다가 번역이 된 책인데 이 사람이
두권을 쓰려고 했는데 두번째 책을 못쓰고 세사을 떠났다. 그래서 제
1권 예수의 선포만 있는데 아주 좋은 책이다. 우리가 늘 참조해야할
아주 많은 자료들을 요약해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응데 아주 온건한
책이고 이 사람이 신약의 유대교적 배경에 있어서 금세기 최고의
학자이었다. 그래서 그런 지식을 충분히 복음서연구에 활용을 해서
저술하였다.
신약신학 교과서로서는 대개 이러한 책들이 좋고 우리가 참고해야할 책으로는
불트만의 신약신학(1,2)인데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볼 것이 하나도 없다.
그리고 여기에 대해서는 30 page 정도로 떼어버리니까...그리고 그는 예수는
신약신학에 속하지 않는다고 그런다. 이 사람의 신약신학이란 책을 열면 무슨
말이 나오느냐하면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은 신약신학의 전제이지 신약신학의
내용에 속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역사적인 예수를 경시하고 무시해버렸기
때문에 그의 신학 체계가 그렇기 때문에 그런 체계 밑에서 시작하고 예수에
대한 가르침이 약 30page정도밖에 없다.
그러나 바울신학에 대해 상당히 집중되어 있는데 바울과 요한신학에 집중되어
있는데 물론 우리가 그 사람의 신학적인 결론을 대부분 받아들일 수 없다. 특히
역사적인 평가를 못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도 바울신학이나 요한신학의 주제들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우리가 볼 것이 참 많다. 특히 이 사람의 바울신학에 있어서
인간론이나 구원론의 부분에 있어서 아까처럼 없는 것도 많지만 배울 것도 많다.
좋은 insite가 많고 또 묵상하는 방법을 많이 배울 수가 있다. 그래서 보수주의
학교에서 보통 공부를 하면 불트만 하면 무조건 안읽는 버릇이 있는데 그것은
옳지 않은 태도이다.
우리가 신학적으로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책에서도 우리는 많이 배울 수가
있다. 긍정적으로도 배울 수가 있고 부정적으로도 우리 말에 '반대거울'이란
말이 있듯이... 이사람들에 대해 내가 왜 동의하지 않나? 이 사람말이 왜 틀렸나?
를 추적하다가 우리가 많은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 책도
무조건 안읽는 것이 아니고 읽어서 긍정적으로도 부정적으로도 배울 것을 많이
배우는 것이 좋다.
그 여태 신약신학에 대한 교과서류가 더러 있는데 H. Conzelmann 이러한
책들은 아까 소개한 책보다는 조금 떨어지는 책인데 W.G. Kummel(퀨멜)의
신약신학 같은 책이 있는데 이러한 책은 조금 부족한 책들이다. 각각
특징이 조금 있다. 퀨멜은 짧게 요약되어있는 장점이 있다. 예수와
바울과 요한의 세개의 부분에만 요약되어 있는 장점이 있다.
콘젤만은 강의실에서 사용하기 좋게 배열해 놓은 점과 불트만의 약점을
조금 보완했다는 것이 특징이 있지만 불트만의 선에서 그렇게 많이 발전된
것도 아니고 별로 일류책이록 볼 수 없다.
D. Guthrie의 책은 내가 읽어보지 못해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으나 그는
좋은 학자이다. 그래서 volumn이 방대한데 주제별로 잘 다루었을 것이다
. 이러한 것들이 교과서이고 앞으로 신약적인 주제를 다룰 때마다 그때 그때
주제에 대해 쓰여진 단행본들을 소개할 것이고 많이 읽어야 한다. 우리
한국말로 되어져 있는 서적들도 더러 있겠지만 이러한 것은 내용이 빈약하고
영어나 독일어로 된 서적들을 많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언어를 위의
둘중에 잘 해두는 것이 신약신학을 하는데 필수적이다.
자 지난 시간에 어디까지 하였는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간접 기독론이란 방법을 쓸 수밖에 없다고 하였고 쓸 수
밖에 없는데 그 방법론이 비유사성의 원칙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우리가 그 방법을 사용하여 가지고 어제 예수의 자기 이해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그러면 첫째로 예수의 독특한 말버릇이 우리에게 눈에 띈다.
1)말버릇
여기서 두 가지가 있는데 a) ( )이란 말들을 어떻게 사용하여쓴가 하는 것이
아주 독특하다.
유대교에서는 을 우리와 같이 사용하였다. 우리가 아멘을 어떻게 씁니까?
하나님의 말의 선포 끝에나 끝에 그것이 진리이다. 그것이 학실하다는 우리
수용의 표시로 아멘 그렇게 한다. 그리고 기독의 긑에 우리가 하나님게 드리는
기도와 청원,찬양의 끝에, 지금 우리가 드리는 것이 진정으로 확실히 우리가
드리는 것을 확인하는 의미로 그렇게 한다. 유대인들도 아멘을 꼭 이렇게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아멘을 뒤집어서 사용하였다. '아멘 아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리고 중요한 하나님의 말슴의 선포의 순우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우리 말에
'진실로'라고 번역된 것이 그렇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우리 말에
그렇게 번역되어 있지요?
우리, 유대인: 내용
예수님: ,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내용
사실 진실로 라는 말이 번역되어서는 안되는 말이다 그냥 놔두어야 한다.
왜그러냐하면 헬라어로 쓰여진 우리 신약성경에 셈족어 이 그냥 그대로
나온다. 왜냐하면 이 아주 중요한 예수의 독특한 말이었기 대문에
일부러 번역하지 않고 일부러 그 말이 무슨 말인가를 가르친다.
신약에 그런 아주 중요한 말들이 꽤있다. 일마누엘,아멘,아바,마라나타,
이런 말들이 다 그렇다. 요새 많이 쓰는 할렐루야도 그렇다. 히브리어
몰라도 할렐루야가 무슨 소리인지 알듯이 물론고린도 교인이나 갈라디아
교인 로마교인도 히브리어는 몰라도 그런 말들은 알았다. 왜? 그것이 아주
중요한 신앙고백을 담고 있는 기독교적인 특수용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에도 번역이 안되고 그냥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니가 그런 정신을 살려서 우리 한글 번역에도 그냥 놔두었어야 한다.
그런데 잘 났다고 그런 것을 다 번역해 놓은 것이다. '진실로' 그렇게
번역해 놓았다. 물론 뜻이야 그렇다. 그런데 뜻만 가지고 되냐? 이게 벌서
을 이렇게 썼다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이렇게 아멘 하면 내가(강조) 너희에게 말한다가
강조되어 있다. 이미 헬라어 배워서 알겠지만 동사가 인칭변화가 하기 때문에
인칭대명사 주어는 생략된다. 그런데 어느때만 나오느낙? 강조할 때 이다.
이때는 항상 나온다. 아멘, 내가 너희들에게 말한다. 이렇게 '내가'가
항상 강조되어 나타난다. 벌서 이 문장 형식에만 해도 내가 말한다는 강조가 되어
있다. 즉 자기의 권위주장이 이 문장의 형식에만 해도 들어 있다.
그런데 이것의 진정한 의미를 우리가 하려면 성경에 이와 비슷한 말 버릇을
살펴보아야 한다. 그것은 한 두가지가 있다. ①그중에 한 가지가 랍비드의
자기딜의 가르침을 자기 제자에게 전수할 때 어떻게 하였냐 이다. 항상
어떻게 하였는가? 자기 선생의 이름으로 말하였다. 그래서 랍비 Meir가 랍비
R.J.B.Z.의 이름으로 힐렐의 말을 하기를 R. Meir R.J.B.Z. R.H
하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그러니까 랍비 Meir가 자기의 직접 선생이다.
그 선생이 하나 가르침을 전할 때 자기의 직접 선생이 랍비 요한 흠 벤자카이의
내용을 전하는데 요한 흠 벤자카이는 랍비 헬렐에게서 배웠다. 이렇게 바통
3,4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일을 하였다. 랍비 Meir가 랍비 요한흠벤자카이의
이름을 랍비 힐렐의 말을 또 하시기를 '네가 안식일에 소를 끌어서는 안된다'
고 이렇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어디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는가 하면 모세까지
올라간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에게 최고의 권위를 호소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때의 이러한 말버릇은 무엇을 한 것인가? 이것이 내 말이 아니라
나의 위대한 선생의 말라고 그 선생의 더 위대한 선생의 말이고 그 사람말도
아니고 결국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법을 계시한 모세의 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기가 지금 전수하는 가르침의 권위를 성립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자 이것이 랍비들이 하던 말버릇이었다면 ②선지자들은 어떻게 자기의 말을 시작하였는가? '주의 말씀(영)이 나에게 임했다''여호와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고 했다' 또는 '여호와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고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임한 말씀을 선포한다.
예수의 이 말버릇은 물론 랍이의 말과는 정대조적인 방법이다. 랍비들은 자기들의 선생에게 거슬러서 올라가서 자기가 한 말의 권위를 부쳤는데 예수님은 누구? '자기에게'' 내가 한다는 것이다. '
그런데 그것의 진리됨을 누가 보장한다는 것인가? 내가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의 말도 '주의 말씀이 나에게' 또는 '주의 영이 나에게 임했다'할 때에 왜 이렇게 했는가? 결국은 자기 청중들의 관심을 자기에게서 누구에게로? 주께로 돌려서 지금 자기가 선포하고 있는 말이 주께서 하시는 권위있는 말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에는 형식적으로는 이렇게 小文이 있다는 것이 선지자들이 말과 랍비들의 말투와 비슷하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경우는 정반대이다. 즉 랍비들이 자기들의 선생들에게 호소를 했다. 그래서 구윽적으로 모세에게 호소해서 그 권위를 의지하였다면 또 선지자가 주의 영이나 주의 말씀에 호소했다면 예수는 그 권위를 누구에게 호소하였는가? 자기가 한 말의 권위를 누구에게 호소하였는가? 자기 자신이다. 내가.
내가 그 말의 진리됨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 독특한 이라는 말을 쓰는 용법을 보면 이 속에 얼마나 예수의 큰 권위 주장이 들어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자기 권위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진리됨을 자기의 권위로 보장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생각해 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로 물론 그 내용이 중요하다. 예수가 이렇게 을 사용하는 이렇게 귀중한 자기 주장이 들어 있다는 것처럼 그런데 이것이 소위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비유사성의 원칙을 써서 이렇게 확연히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유대인들이 어떻게 말을 했나? 또 선지자가 어떻게 아멘을 사용하였는가? 것 등과 비교해 볼 때에 비유사성 원칙을 사용하셨을 때에 예수의 독특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된다. 즉 검은 배경에 하얀 글씨로 써 놓은 것처럼 확연히 드러난다.
이렇게 지난 시간에도 이야기하였지만 비유사성 원칙을 문자 그대로 적용이 되면 아주 파괴적이고 상식을 벗어나는 비역사성을 띠는 그런 방법이 되지만 바르게 사용하면 아주 이렇게 유용할 때가 있다.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을 확연히 드러나게 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을 사용하였다는 것을 심지어 Bultmann도 비판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비유사성 원칙이란 방법이 유용할 때가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방법을 사용하여서 보니까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는 것은 얼핏 보게에는 기독론적인 자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기독론적인 칭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이 반영된 것도 아닌 아무런 직접적인 관계가 없다. 그러나 그런 자료를 분석해보니까 이렇게 엄청난 예수의 자기이해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추출하여 예수의 자기 이해를 도출하여 내는 것을 간접 기독론이라고 한다. 이렇게 이 방법이 유용할 때가 있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러한 짐작도 하였다. 예수가 항상 하나님과 긴밀한 교통을 하고 계셨으므로 하나님이 예수에게 어떤 말씀을 계시하면 거기에 아멘 이라고 응답을 하고 이제 내가 그것을 받아서 너희에게 말한다. 하나님이 예수에게 무슨 말씀을 계시하면 그 하나님의 말씀에 '아멘'하고 응답을 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고 한 그 말을 예수가 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우리에게 한 말은 아멘 이후의 말이 아니겠는가? 하고 해보았는데 그럴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게 그렇든 안 그렇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이렇게 독특한 예수의 말 버릇에서 우리는 무엇을 아느냐면 자기가 선지자보다 더 직접적인 그리고 완벽한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라는 주장이 주는 것이다. 그러한 자기 이해가 이 말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 이 어떻게 쓰였는지에 대해서 자세히 보려면 Kittel의 신약사건의 '아멘'이란 부분을 찾아 보라. 그 areicle을 H. Schleir라는 사람이 썼는이 이 사람은 뭐라고 결론을 맺느냐 하면 이 '아멘'이라는 조그마한 한 마디에 신약 기독론이 전부 다 들어 있다고 한다. 마치 방송이에 알맹이가 그냥 꽉차 있듯이 이 '아멘'이란 조그만 한 마디에 신약 기독론이 꽉차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혀 과장이 아니다. 여러분들 이것에 대해서 좀더 추구할려면 J. Jeremias의 신약신약 책에도 나온다. 그보다 더 자세하게 나온 것이 Kittel의 신약사전에 H.Schler가 쓴 '아멘'이라는 부분을 읽어보시기 바란다.
b)abba ( )이다.
이빠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압바가 아니라 아빠임) 자기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아람어 애칭이었다. 우리말의 아빠와 똑같은 말이었다. 가정에서 아이들이 아버지를 아빠라고 부르죠?
서양언어에 papa 아니면 영어의 dad와 꼭같은 말이었다. 단 한가지 우리나라의 아빠와 틀렸다면 우리는 꼭 자기의 육친의 아버지에게만 사용하는데 셈족에서는 이 말의 사용이 좀 확대되어서 장성한 아이가 아버지에게 부를 수 있었고 요새 시집간 부인들도 친정의 어머니에게 엄마라고 부르죠? 옛날에는 그럴 수가 없었는데 지금을 그러잖아요? 그리고 아버지와 좀더 가까와지면 아빠라고 할 때 시집가고 장가간 뒤에도...
하였든 처음에 어린아이가 아버지에게 사용하는 호칭이었는데 이것이 확대되어서 장성한 사람에게도 자기 아버지에게 섰으며 또 자기 아버지 뿐만 아니고 자기 스스이나 자기 아들의 친구 중데도 쓰는 말이었다.
그러나 항상 원래는 아주 가까운 관계, 아주 가까운 사람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바로 이렇게 시작이 어린아이가 자기 아버지에 대해서 아주 가까운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고 그런 그 말이었기 대문에 유대인들은 이 말을 하나님에게 대해서 절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못불렀다. 너무 거룩하다 해서 이름을 불렀는가? 못 불렀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이 나오면 우리 주, 나의 주, 아도나이 이렇게 대칭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에 상응하는 많은 이름들을 지어내었다. 그래서 가령 '하늘과 땅을 지은이''막강한 힘을 가진 이' '전능한 이' 또는 '태초부터 계신 이' 이렇게 하나님의 이름을 무한히 많이 지어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말을 하나님에게 적용한 예는 없다. 이것에 대해서 착안하고 많이 연구한 사람이 T.W. Manson이었는데 이 사람의 'Teaching of Jesus'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보면 이것이 나와 있는데 이것을 진짜로 더 많이 연구한 사람은 J.Jeremias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금세기 셈족과 유대교적인 배경에 대해서는 둘째 가라고 하면 너무너 섭섭해 할 사람인데 이 사람이 유대문서를 다 찾아보아도 AD 7 세기의 무슨 문서에 이와 비슷한게 뭐 하나 나온 것 외에는 도대체 유대문서에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예가 없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다라는 사상이 구약부터 쭉 있다. 가령 출 4:22부터 쭉 나온다. '이스라엘은 나의 첫 아들이라' 거기에서부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아버니라는 사상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그런 이해를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른 것으로 절대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제 소위 비유사성 원칙에 의해서 예수의 진짜 말로 확인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에 '아빠'라고 불렀다. 기도에서 하나님을 ㅜ를 때 아빠라고...
①예수가 항상 그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부를 때 아빠라고 불렀다.
②자기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 것이 아니라 자기 제자들도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도록 가르쳤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가르쳐준 아주 독특한 기도에의 부름이기 때문에 헬라말을 쓰는 바울의 교회들에서도 하나님에 대해서 아빠라고 부르는 이 기도가 계속 남은 것이다. 그러한 구절이 그 흔적이 우리에게 두 곳이 있다. 하나는 갈4:7 하나는 롬8:17 거기에 보면 바울이 뭐라고 하는가? '그 아들의 영이 우리 안에서 뭐라고 울부짖는다고요?' 아빠 아버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었다. 우리가 아들들이 되었다는 것이 무었어냐? 아들이 영을 우리가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다. 양자의 영을 받았다는 것이 뭐냐?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서 원래 독특한 하나님이 아들 예수의 기도, 예수가 하나님을 부르는 기도, 아빠를 부른다. 예수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아빠로, 하나님을 아빠로 부르라 하셨다. 그런데 또 재미있는 것은 이렇게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고 자기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라고 가르치면서도 자기와 자기 제자들을 동급으로 놓지 않는다. ③자기와 동급으로 놓지 않고 항상 구분한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와 제자들을 싸잡아서 하나님을 '우리 아빠'라고 한 예가 없다.
하나님은 또 너희들의 아빠, 또 나의 아빠, 이렇게 구분한다. 우리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는다. 자기와 제자들을 포함해서 사용하지 않는다. 자신을 제자들과 구분한다.이러한 세가지 현상을 우리는 발견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그러면 어떠한 예수의 자기 이해가 담겨 있느냐?
첫째로는 예수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이다. ①과③이 그것을 말한다. 예수가 하난미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내 준다 ①과③이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낸다.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됨을 중계하는 자기의 주종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개하는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이해가 있는 것이다.
Jeremias는 이 관계를 아주 잘 요약하고 있다.
예수님의 하나님께 대한 아빠라는 그 기도 속에는 예수님이 하나님을 얼마나 가까이 느꼈고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얼마나 확실한 이해가 나타나느냐? 이말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의존은 어린아이가 아빠에게 전적으로 의존하고 하듯이 의존하고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 어린아이가 아빠를 경외하듯이 그 하나님에 대한 순종심, 그 하나님에 대해서 포근함을 느끼는 것, 이러한 모든 것이 그 한마디에 들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Schlier는 '아멘'이라는 말에 신약기독론이 밤송이가 알맹이로 그 속에 꽉찼듯이 말했다면 마찬가지로 이 라는 말에 신약의 기독론이 꽉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예수의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가 이렇게 확연히 된다.
또 이말도 얼핏 보기에는 기독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자료가 우리에게 더 예수가 자기 스스로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더 정확히 보여준다. 더 의미심장하게 더 깊이 예수가 자기에게 메시야라는 칭호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주라는 칭호를 사용했느냐 안했느냐는 것이 별로 중요한게 아니다. 예수가 자기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르 사용했냐 안했냐 그것가지고 대가기 터질 필요가 없다.
그냥 '아빠'라는 말속에 그냥 다 들어 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는 것보다 더 훌륭하게 들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했느냐 하는 그 이유가 우리에게 더 중요하다. 그래서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내 놓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안하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자꾸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그러면 요한복음이 다 틀렸느냐 하면 안틀렸다.
이런 예수의 독특한 말들,
두번째 모세의 율법과의 관계에 있어서 예수가 율법관이라든지 이것을 하기 전에 앞으로 무엇을 하겠는가를 조금 이야기 하겠다.
지금 하는 간접 기독론이 제 1부라면 제 2부에서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인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살펴볼려고 한다. 제 3부에 가서는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 인자를 집중적으로 토론할려고 한다. 그 다음 4부에 가서는 예수의 죽음과 부활 이런 식으로 이번 학기의 강의를 이어갈려고 한다.
이제 간접기독론을 해나가는데
2)예수의 모세 율법에 대한 태도
이것을 우리는 산상수훈의 예를 잘 들수가 있다.
마5:21-22을 읽어보라. 거기에 보면 거기의 문장 형식 '옛 사람에 대하여 말하기를 살인하지 말라'했다.
옛사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여기서 '내가'는 강조이다. 새로운 것의 선포이다. 산상수훈에 보면 새로운 것이 무엇이 되어 있는가? 5:27-28/31-32/33-34/38-39/43-44 절에 보면 '반대문형'이 나온다.
'너희가 옛사람에게 이러이러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가끔 '아멘'이라는 말이 동반된다. 이 옛사람에게 말한 것이 무엇인가? '살인하지 말라'이다. 이것이 무엇인가? 모세 율법의 요약인 십계명에서 왔다. 모세의 법이 무슨 법인가? 옛사람에게 말한 옛법이다. 이제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는데 형제에게 화제를 무시하는 자는 벌써 살인행위를 범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27-28절에 보면 옛사람에게 말하기를 '간음하지 말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그 사람은 벌써 간음을 한 자이다. 여기에 보면 우선 형식으로 여기에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나중은 예수가 이제 선포하는 새로운 것, 이렇게 반대형식으로 되어 있다.
내용적으로는 십계명을 인용하고 있다. '살인하지 말라' 모세 율법의 핵심인 십게명을 인용하고 있다. 그런데 모세 율법은 무엇을 요구한 법인가?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진짜 누구의 목을 치지 않으면 살인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선언하는 복음은 무엇인가? 이 행위 이전에 동기의 최대한을 요구하는 법이다. 형제를 미워하는 형제를 무시하는 여기에서부터 살인하는 행위가 나온다. 형제의 목을 치는 살인행위가 나온다. 동기의 최대한, 우리 심장의 상태를 추궁하는 법이다. 그러니까 그 내용에 있어서 행위의 최소한을 요구하는 옛법에 비해서 동기의 최대화를 요구하는 과격히 내면화도니 절대화된 법을 예수가 선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모세의 법보다 훨씬 더 완벽화된 법을 선포한다.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런데 그것을 누가 하는가? 내가 한다는 것이다. 내가....
자 이러한 말 버릇에 숨어 있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이러한 말버릇으로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나타내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자기가 모세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의 법을 계시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이속에 나타난다. 모세보다 더 직접적이로 완벽하고 더 권위있는 하나님의 법을 계시한다는 것이다. 모세의 법을 능가하는 옛법에 대해서 새로운 능가하는 하나님의 법을 선포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무슨 소리인가? 이 이야기가.... 그것은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권위있는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말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틀 안에서 모세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있는가 없는가? 없다. 심지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의하면 메시야도 모세 밑에 있다. 신18:15에 의하면 하나님이 어떤 선지자를 약속하는가? 여기가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의 중요한 뿌리 중의 하나인데 어떤 메시야인가?
모세와 같은 선지자 모세와 같지만 모세를 능가하지 않는다. 모세가 기준이다. 거기에 나오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보면 이런 거이 있다. 메시야가 오면 어떻게 해요?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메시야가 뭐해요? 모세 율법을 잘 가르치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모세가 메시야보다 더 우선한다.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모세가 더 위대하다.
그런데 예수가 여기에서의 말버릇은 무엇을 주장하는가? 내가 모세보다 더 위대하다고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다만 간접적으로 그러나 더 효과있게 우리에게 나타내는 주장이 무엇인가? 하여간 모세를 능가하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더 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예수의 말 버릇은 이미 유대교의 틀을 부순 것이다.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것이다. 유대교의 틀 안에서는 이런 말을 할 수가 없다.
아까 랍비들의 가르침을 아무리 위대한 '힐렐'이고 '자카이'고 누구고 할 것없이 그들의 모든 권위를 모세에게 호소하였는데 모세의 권위를 능가하는 것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자는 이미 유대교를 떠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보지 않았다고 하는 라구크 스트라우스나 Wrede 등의 과격파 신학자들, 특히 Bultmann 학파의 과격한 신학자들 F. Kasemann까지도 이 현상을 보고 말하기를 이러한 주장을 하는사람에게는 이미 유대교의 틀을 벗어난 사람이다. 그런데 이 사람에게 적용될 수 있는 카테고리는 미흡하지만 메시시야적인 카테고리밖에 더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했다면 에수가 자기 자신이 (스스로를) 메시야라고 아니 메시야를 능가하는 자라고 주장하는 것이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Kasemann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Kasemann의 유명한 1956년인가 출간한 유명한 paper가 있는데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제고'라는 아주 긴 논문인데 그 논문에 의해서 Kasemann이 Bultmann에게 정면으로 도전해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를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주장을 해서 그 일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가 다시 시작된 것이다.
그논문에서 위의 점을 들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예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고 양식사 비판으로 그리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비유사성 원칙을 중심으로 한 전승사 비판으로 공관복음에 기록된 역사성은 다 부인된다 해도 이것은 부인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부인할 수가 없다. 비유사성 원칙으로 해봐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런데 이것을 음미해 볼 때 예수가 이미 모세 율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그러니까 유대교의 테두리를 벗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메시야적인 카테고리 밖에 더 적용할 게 없지 않느냐 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Kasemann은 했다. 역사적인 예수에 대해서 연구가 가능하고 또 신학적으로 해야만 되는 그렇지 않으면 우리 신학이 전부가 신화가 되어 버리고 만다. 역사적인 에수의 우리 신앙이 근거하지 않으면 신화가 된다. 역사적인 근거가 없는 그냥 주장밖에 되지 않는다. 문선명이가 신아다라고 하는 것과 비슷해져 버린다. 아루런 근거없는 주장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재론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Kasemann이 이런 주장을 하는데 거기서 Kasemann이 이런 관찰을 하고 있다. Kasemann도 예수가 자기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는 과격한 자유주의자들이 대 전제 때문에 그 논문에서 스스로 모순을 범한다. 그러나 예수가 자기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 이 다위 소리를 한다. 하였든 Kasemann은 위의 내용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이것을 볼때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유대교가 그 당시 기대하였던 메시야 이상의 권위를 가진 ,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으로서는 도저히 부적한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위를 주장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유대교의 메시야는 어떤 자이었다고? 모세의 율법을 잘 가르치는 자이었다고. 그런데 예수는 그 보다 더 한 권위주장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3)죄 용서
또 한가지 예수의 특징이 무엇이냐 하면 죄용서이다.
예수님은 죄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였다. 막2:5,10 눅 7:48 인자가 그러니까 ' 그 사람의 아들'이 땅 위에서 뭐할 권리가 있는가?죄를 용서해 주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자 죄를 용서해줄 권리가 있고 죄를 용서해 주는 종말론적인 구원행위를 한다는 것을 극으로 표시하였다. 그것이 무엇인가? 세리와 죄인들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것이다. 불의한 죄인들로 더불어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즉 회개한 죄인들과 그 집에 들어가서 잔치를 베풀므로 그들의 죄를 자기가 지금 용서해 주었다는 것을 드라마로 표시하는 것이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틀안에서는 누구만 죄용서해 줄 수 있었는가? 하나님만. 왜? 하나님만 죄용서하실 수 있었는가?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가 지은 모든 피조물들에게 뜻을 두었다. 자기의 뜻을 모든 피조물에게... 그래서 하나님 만이 자기가 지은 피조물들이 합당하게 살았는지 않했는지를 판결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만이 심판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만이 죄를 용서해 줄 수 있다. 자기의 뜻에 어긋나게 산 피조물을 용서해 줄 수가 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가 죄를 사해주는 권리를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가령 마가 2장을 보면 거기에 둘어 앉았던 서기간들, 요즈음 말로 하면 신학자들이 화가 났겠는가? 아니 나겠는가? 화가 났죠.
그래서 예수님을 요새말로 뭐라고 욕하였나요? 참람하다고 하였다. 그말이 무슨 말인가? 하나님을 모독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권리를 침해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특권을 침해했다는 것이다. 즉 예수 스스로 자기를 하나님으로 만든 자라는 것이다. 스스로 신격화한 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기에 대해서 예수가 뭐라고 하는가? 그 사람의 아들(인자)이 땅 위에서 죄사하는 권세가 있는 것을 너희드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하였다. 내가 demonstration하겠다고 그래서 중풍병자에게 네 자리를 들고 일어나 가라고 하였다.
이제 예수가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가라는 것이 이 땅에서 예수가 죄사하는 권리가 있음을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고 하였다.
아렇게 죄 용서해주는 권리를 선언하고 죄를 용서해주고 죄를 용서해 주는 표시로 무엇을 하였는가? 죄인들을 모아서 먹고 마셨다. 이렇게 먹고 마시니 예수님에게 무슨 별명이 있었는가? 술주정뱅이라고 하였다. 또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먹기 좋아하고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하였다. 이렇게 욕을 얻어 먹었다.
경건하려면 세례요한의 제자같이 금식하며 얼굴에 머 시커멓게 바르고 다니고 해야 하는데 예수는 이 형편없는 것들-세리들,창기들-과 먹고 마시고 심지어 세리집에서 잔치 베풀고 하니 탐식하는 자요, 술주정뱅이라고 욕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가 뭐라고 답하였는가?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하니까 너희들이 귀신들렸다고 하더니 그 사람의 아들(인자)은 와서 먹고 마시니 술주정뱅이요 탐식하는 자라고 욕하느냐? 그리고 이 세대가 분간할 줄 모른다고 하였다. 여기가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그래서 이렇게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선언하고 또 demonstration하는데 그게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는가? 여기서 도출할 수 밖에 없는 예수의 자기 이해는 무엇인가? 자기가 하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라. 자기가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자다. 하나님의 대권자이다. '하나님을 대신하는 자'라는 것이다.
하나님 대신 권리를 행사하는 자,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대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자기이해가 있어따 그렇죠?
또 예수의 특징 하나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무엇이었나? 하나님 나라이다. 그것은 이 다음 시간에 자세히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그런데 여기서 잠간 보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어떠하다고 선포한 것이 아니다. 예수가 무엇도 했냐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고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라는 것도 가르쳤다. 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리고 들어갈 수 없는 조건도 내세웠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그 속에 있는 것이다. 마치 하나님의 나라의 대문의 열쇠를 가진 것같이.. 그런한 권위주장이 그 속에 들어 있다.
그런데 한발 더 나아가서 어떤 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가? 궁극적으로 말하면 죄를 회개하고 옛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믿고 예수를 추종하는 제자들, 곧 누가? 자기를 버리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예수)를 따르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것만 해도 상당히 큰 권위주장이 내포되어 있는데 한발 더 나아가서 그 조건이 무엇이냐 하면 자기에(예수) 대한 제자도가 그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런 주장을 하는 예수는 어떤 주장을 하였다고 보아야 하는가? 자기가 인간의 생사를 경정하는 arbiter. 자기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으로서 인간의 생사를 결정하는 arbiter라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이 어디에 쓰여져 있는가? 예수의 제자돌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얻을 수도 있고 그것을 부인하므로 멸망에 이를 수도 있고 .. 최후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자기 이해가 여기에 나타나는 것이다. 막10:15.마7:21.눅12:32.22:29.23:42 등을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4)마지막으로 예수의 또 하나의 특징은 무엇이냐 하면 당시의 선지자들이나 랍비들과는 달리 예수는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흔히 예수의 12제자를 예수의 후계자라고들 하는데 그것은 아주 옳지 않은 신학이다. 예수는 도대체 자기 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면 예수가 자기의 사역을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구원사 가운데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단회적인 사건으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보았다. 단회성이다. 되풀이 되고 또 되풀이 되는 것이 아니다. 단 한번 일어나는 이것을 이어받은 신약의 신앙고백이 무엇인가 하면 예수가 우리를 위하여 단 한번 ones for all,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한번 일어나는 한번에 완성하는 일인 것이다.
예수가 자기 사역을 이렇게 종말론적인 독특한 구원사역의 중심사건으로서 단 한번 일어나는 사건으로 이해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일을 계승하고 하는 것이 없다. 제자들이 예수의 일을 계속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단 한번에 완성될 구원을 가지고 선전하는 것 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은 그 구원에 덧붙인 것이 하나도 없다.
이러한 것들이 지난 시간에 이야기한 비유사성 원칙을 적용해서 도출해낸 예수의 독특성이고 그 독특성 그래서 누구도 부인할 숭벗는 아무리 과격한 신학자들도 부인할 수 없는 그 점을 살펴보니까 그게 전부 얼핏 보기에는 기독론적인 자료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으나 그 속에는 예수의 엄청난 권위주장이 혹은 자기 이해가 들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신학 전문용어로 vollmachsansprud(권위주장)이라고 하고 영어로는 claim to authority라고 한다. 예수의 아주 독특하고 강력한 절대적인 권위주장인 것이다.
그것을 조금 더 정확히 정의하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는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며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며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가?
자기 자제들, 자기를 추종하는 자들을 , 백성을 모으며 그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든다는 그리고 자기를 믿고 자기에게 모여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을 뭐라고 부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자녀들을 회개케 하는 자라는 자기 이해가 그 속에 있는 것이다.
이렇게 기독론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은 자료들이 이렇게 엄청난 예수의 권위주장, 또는 자기 이해를 갖고 있는 것이다. 어때요? 이러한 것들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간접기독론을 하여 보니.....
만일 이러한 것을 하지 않으면 여러번 읽어도 그냥 지나치고 넘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간접 기독론을 해보니 분명히 예수의 이와같은 자기 이해가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간접 기독론적인 자료에 의해서 이와같은 예수의 자기 이해를 도출하고 보니 예수가 그 제자들에 의해서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고 신앙고백 받고 하나님에 의해서 또는 악령들이 또는 하나님의 막강한 힘을 체험한 소경이나 병든 자들이나 귀신 쫓겨난 자들이 예수의 진정한 정체를 알고 예수를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을 예수가 받아들이는 이유가 나타났다. 그럴 수 있는 것이다. 예수가 그 고백을 박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왜 간접기독론에서 직접적인 자료들을 일단 체쳐놨었다. 왜? 그러한 자료들이 예수의 메시야 사상을 직접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니까 혹 나중에 교회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신앙고백한 후 교회가 다 그러한 것을 지어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그러한 자료는 앞에서 일단 제쳐 놓는다고 하였다. 왜? 그러한 것은 직접 기독론의 자료이니까 제쳐놓는 것이다.
이제는 그러한 것이 아닌 자료만 우리가 본다고 하였다. 그렇게 하고 보니 여기에서 최소한도의 예수의 메시야적 자기 이해가 나타난 것이다. 그렇게 보았을 때 그러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예수의 직접적인 기독론적인 자료도 예수의 삶과 가르침 중에 가끔씩 튀어나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즉 남들이 그렇게 신앙고백을하였을 때에 그렇게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개연성을 간접기독론이 충분히 지적해 준다는 것이다. 간접적인 기독론의 결론이 직접적인 기독론의 개연성을 지적해준다.
Ⅱ.하나님 나라 선포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대해서는 책이 참으로 많다. 나이를 많이 먹은 H. 리더보스 책도 있고 그 책이 나이를 많이 먹었다. 그 책이 나왔을 때 그렇게 original한 책은 아니었다. 미국의 reformed한 사람들이 많이 사용해서 우리 한국에도 많이 읽히었는데 좌우간 좋은 책이지만 나이가 많이 먹은 책이다.
좀더 새로운 책들을 볼려면 가장 최근의 책이 G.Beasley Murray 영국 침례교 신학자인데 참 좋은 신학자이다. 좋은 책을 많이 썼다. 특히 이 사람이 전공한 것이 종말론이 전공이어서 마가복음 13장에 대한 책도 썼고 요한계시록의 주석책도 하나 좋은 것을 섰고 그런 사람인데 1985년에 출판한 책이 'Jesus and the kingdom of God'인데 한번 구해서 읽도록 하고 1960,1970년대에 나온 책은 래드의 책이 있다. 래드의 책도 좋고 또 예레미야스의 신약신학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 그것도 좋고 고펠트에 나오는 하나님 나라도 좋고 물론 래드의 신약신학에도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충분히 토의가 되어 있다. 래드에 대해서는 래드가 원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종말론'을 전공한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신약신학 책에 충분히 언급되어 있으니까 그런 것들을 죽 읽어보기 바란다.
신약신학 제 3강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서론으로써 이 하나님 나라( )가 예수의 주신 메시지라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사실이다.
특별히 이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에는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을 , 하나님 나라라기보다는 하늘 나라라고 하였죠. 이것은 마태복음의 저자가 유대의 전통 즉 랍비의 전통에 깊이 뿌리박고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나타내는 한 표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둘은 의미가 다 똑같은 것이다.
우리는 보통 '하나님의 나라'라고 해서 통일해서 보통 부르는데 이 때의이 의 이 개념이 히브리어의 에 해당되는 개념으로서 전에는 히브리어의 이 개념에서 의미를 도출하기 보다는 헬라어로 는 장소의 개념으로 많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늘에 있는 -옛날 유대의 세계관에 의하여 삼층 세계관 즉 하늘, 땅, 지하의 3층 세계관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즉 하늘 나라를 저 하늘에 있는 장소로 우리가 종말에 가거나 보통 죽으면 간다는 그런 장소적인 개념으로 많이 생각을 하였는데 그것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 구약의 히브리어의 이 쓰여진 곳을 보면 대개가 dynamic sense 역동적 의미로
①다스림. 통치 혹은 통치권 소위 영어로는 reign, rele의 의미 소위 dynamic sense가 강하다. 그래가지고 최근에는 1950년대 60년대에는 하나님 나라가 신학의 중심이 되었을 때 주로 이렇게 dynamic sense로만 이해할려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런데 사실 구약에 있어서의 은 동적인 개념이 아주 주개념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오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예수의 여러 가르침에 보면 항상 이런 동적인 개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거기에는
②장소적인 개념이 쓰였다. 조금 있다가 보겠지만 이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과 동시에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이다. 하나님 나라에는 문이 있다. 그래서 무슨 문으로 들어가야 하나요? 하나님 나라의 문에도 열쇠가 있다.
베드로에게 열쇠를 주었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에 장소적인 개념,sphere이 개념을 우리가 다 떨굴 수가 없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이렇게 동적인 개념이 많이 있고 심지어 그것이 주개념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어떤 대는 장소개념이 강력하게 나오고 주 개념이 들어올 때가 있다. 뿐만 아니라 어떤 때는
③하나님의 백성의 개념이 강할 때가 있다. 대개의 경우 신학자들이 어느 하나만 가지고 이것 뿐이라고 그러는데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 이 전체가 다 의 변형인데 그 하나님 나라가 나오는 구절구절마다 어느 개념이 더 앞장서 나오느냐의 문제이지 어느 하나만 이라고 할 수가 없다.
하여간 위의 세 가지의 뉘앙스를 가진 개념이다.
구약과 유대교의 '하나님 나라' 또는 '하늘 나라'가 이렇게 정해져서 나오는 예가 아주 드물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하나님 나라와 대칭되는 사상들은 상당히 흔하다.
그령 그래서 구약의 하나님의 왕되심, 하나님께서 우주를 다스리시고 그래서 우주 온 세상의 왕이시다 하는 개념이 강하고 또 특별한 의미로 하나님이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왕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라는 사상이 아주 구억에 강하다. 그래서 구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 즉 신약의 '하나님 나라'에 대칭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 묵시문학에 있어서 오는 세상, , 묵시문학의 큰 특징의 하나가 역사를 둘로 나누는 것이다. 이 세상 즉 satan이 통치하는 악과 고난의 세상과 오는 세상, 하나님이 통치하는 오는 세상 즉 메시야가 와서 이 세상을 종결짓고 새시대, 새세대를 가져온다(연다)는 것이 묵시문학의 큰 특징중의 하나가 아닌가? 이렇게 묵시문학의 오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와 대응되는 그런 것들이다. 개념이다.
하나님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왕권을 종결시키고 스스로 통치하심으로 구원의 시대가 열린다는 사상, 그래서 고후 4:4에도 사탄을 바울은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이 세대의 왕이라' '이 세대의 신이라' 고 한다.
이렇게 이 세대, 이세상을 사탄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나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다스릴 텐데 오는 세상에서는 하나님이 신이고 하난미이 왕이라는 것이다.
이 사상이 벌써 묵시문학의 원조중의 하나인 다니엘서에 나타난다. 그래서 단2:44/7:14ff에 보면 종말에 하나님이 통치한다는 사상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개념이 나타난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 다니엘서 2장과 7장은 내용이 아주 비슷하다.
7장에 보면 나타나는 것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의 환상과 더불어 나타난다. '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데 단 7:18이하에 보면 거기에 무슨 의미를 갖느냐면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거기서도 이렇게 '하나님 나라'라고 개념화 되어서 나오지 않고 그냥 나라를 받는다.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다고 나온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구약성경가ㅗ 유대교에 아주 드물게 거의 안 나타나는 개념이나 그와 대칭되는 개념들, 가령 오는 세상 또는 하나님의 왕되심 이런 것들로는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전제들이 있어야 한다. 신약에서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가르칠 때에도 물론 다음과 같은 전제들을 가지고 가르치는 것이다.
ⓐ이 세상이, 온 우주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셨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온 세상의 정당한 주가 정당한 왕이 하나님이라는 것.
ⓑ그런데 어덯게 된 셈인지 사탄이 하나님의 왕권을 찬탈해서 지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고 있다는 것.
ⓒ이 사탄이 하나님의 권한을 찬탈해서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이 세대가 종결되어지고 오는 세대 즉 이 세상이 이제 종결되어지고 새 세상이 도래한다는 묵시문학적인 종말론 또는 역사관 이것이 세번째로 전제되어 있다.
그러면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 나라라는 고정된 개념은 잘 안나타나지만 그에 대칭되는 개념들이 사상들이 또는 생각들이 구약과 유대교의 여러곳에서 나타난다고 그랬는데 예수님 당시나 또는 직전 직후에 유대교의 여러 분류에서 어떻게 그러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나를 간단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 그래야 예수의 가르침이 얼마나 그들과 가깝고 또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가를 우리가 생각해 볼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을 잠간 살펴보면
유대 묵시문학에서는 선지자들의 주의날 The day of the Lord 사상을 이어받아가지고 이 '주의날'을 오는 세상으로 보고 이 오는 세상은 묵시적인 사건으로서 그날의 종말론적인 심판이 일어나며 하나님께서 타락한 세상과 질서를 완전히 한꺼번에 종결지으시고 전혀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고 온 우주가 완전히 쇄신된다고 보았다.
그때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완전히 들어가고 하나님과 더불어 온 세상을 통차하게 되며 모든 이방민족들이 완전히 굴복하게 된다. 그때는 의가 승리해서 이 세상이 더 이상 악과 고난의 세상이 아니라 의로운 세상이 된다. 이런 것들이 묵시가들이 바랐던 오는 상이었다.
랍비들도 이 오는 세상이라는 개념을 매우 중시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오는 세상의 상황을 묵시문학가들보다 더 형세적으로 생각하였다. 물질적으로 생각하였다. 다만 오는 세상이 이 세상과 다른 것은 양적으로 더 풍부하고 더 좋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는 세상의 모든 상황이 이 세상의 연속이다. 그래서 랍비들의 부활에 대해서도 보면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부활하는데 그 때에는 어떤 상태냐의 논쟁이 있다. 그때에 어떤 결론이 나느냐면 우리가 병고에 시달리는 그러한 약한 몸이 아니라 더욱 강한, 아름다운, 좋은 몸을 가지나 지금의 몸과는 같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한 상타에서 부모와 자녀들이 남편과 아내가 친구와 친구가 서로 알아보는 그런 상태이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지금 세상의 연소으로 이렇게 보는 것이다. 다만 다른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악과 고난이 없고 모든 것이 더욱 좋고 아름답다는 그것 뿐이지 다른 것은 없다. 단절보다는 연속으로 본다.
그러므로 그들의 오는 세상에서의 상황은 아주 earthly하게 이 땅적인, 물질주의적인 것으로 이 사람들이 생각하였다.
이사람들에 있어서 한가지 중요한 강조점은 무엇이냐 하면 그러면 이 세상이 언제오느냐?
메시야가 언제 와서 어떤 세상을 가져오느냐? 그것은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온다고 한다. 그래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을 이스라엘의 회개가 있을 때라는 것이다. 모든 이스라엘이 회개하면 그때는 그 세상이 온다는 것이다.
열혈(심)당원들은 좀더 독특한 관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들도 랍비들과 마찬가지로 아주 이세상적이게 하나님 나라를 상상을 하였다. 그런데 이들에 있어서 특히 강조되는 것은 오는 세상이 이루어져서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이루어지는 것을 무엇과 동일시 하였느냐면 이스라엘이 온 세계를 정복을 해서 통치하는 것과 동일시하였다.
하나님의 통치가 곧 이스라엘의 통치와 동일시되고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개념은 무엇이었느냐하면 '자유'라는 개념이었다. 이방의 식민지주의적인 압제에서 해방되는 것과 자유, 이것을 중요시하였다. 그래서 이방에게 더 이상 압제받고 고난 받는 것이 아니라 자기들이 이방을 통치하는 것을 상상하였다. 또 이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것이 무엇이냐면 '사회정의'가 중요하였다. 그래서 오는 세상에서는 '평등'이 이루어지고 '정의'가 이루어지고 거기에서 이스라엘과 이방인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그래서 이방인들을 다 종으로 만드는 것이 유대인의 이상이나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는 자기들 사이에는 주도 없도 종도 없는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이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열혈당원들의 AD 66,70년대의 소위 유대정쟁을 일으켰을 때에 로마 사람들과 전쟁을 했을 때에 이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에 제일먼저 한 일이 무엇이냐 하면 노예방부와 빚채권,채무장부를 다 불태워 버린 것이었다.
옛날 우리 한국에서도 노예난이 나면 대개 그렇게 하였지요? 이렇게 그들이 사회정의를 상당히 강조하였다.
이들은 오는 세상, 그 하나님 나라가 언제 오느냐? 고 보았느냐면 자기들의 가만히 기다렸다고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또 이스라엘이 회개만 해서 오는 것도 아니고 자기들이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투재을 하샤 얻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소위 聖戰 이스라엘 초기 이데올로기인 성전 holy war를 치룸으로 당시의 로마의 압제자들과 성공적으로 투쟁해서 이겨서 이스라엘의 통치권이 확립이 될 때에 이러한 '오는 세상'이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 오는 세상, 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느냐? 인간들이 투쟁으로 온다고 이렇게 보았다. 그 투쟁이 무엇이냐 하면 이 거룩한 전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들의 초기 이스라엘의 특히 출애굽이후의 聖戰의 이데올로기를 재생시키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이들이 자기들의 모델로 삼은 것은 마카비형제들로 보고 聖戰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려고 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유대교에서는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를 공통적으로 어떻게 보아쓴냐 하면 ①묵시적인 사건으로써 이 세사이 끝나고 하나님이 직점 통치하는 새로운 시대의 새 세상, 새 세대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볼 수있고 ②이것이 더이에서 이루어지느냐면 땅위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들의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황 자체에 대한 생각들이 아주 이 세상적이었고 물질적이었다. 유대교에 있어서 오는 세상,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있어서 또 하나의 특징은 ③민족주의가 아주 강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와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이스라엘의 구원만 직결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통치와 직결되었다. 아주 강한 민족주의...
또 하나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④Synergism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으로 이루는 것이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랍비들의 인간들이 회개로, 의를 실천함으로, 열혈당원들은 자기들의 직접적 투쟁으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즉 인간의 하나님의 협동으로 보았다.
자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두번재로
2. 예수께서는 그러면 어떻게 가르쳤나?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선포했나를 볼 때에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장래에, 미래에 오는 것으로 보았다.
그점을 우리가 어디에서 쉽게 볼 수 있느냐 하면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볼 수 있다. 주께서 가르쳐주신 기도에서 중요한 요청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 하는 것이다. 아직 임하지 않았다. 그러기 때문에 그것을 기도로 기도의 대상으로 삼으라는 기도제목으로 삼으라는 그말이다.
이 악과 고난의 세상을 종결시키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시는 그 세상 세대를 빨리 가져오소서 하는 기도이다. 그래서 분명히 하나님 나라는 미래에 오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것으로써 미래에 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상이 창조주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벌써 dejure 법적으로 원칙적으로 통치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defacto누가 이세상을 통치하느냐면 사탄이 통치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이미 하나님이 이 세상을 통치하고 계시는데 이 통치가 실제로도 defacto로도 세사에서 확립이 되어서 그러니까 하늘에서 하나님이 법적으로 뿐 아니라 실제로도 하나님이 통치하는 바와 같이 땅에서도 실제로도 defacto로도 하나님의 토치가 확립이 되어서 사탄을 완전히 결멸하고 타락한 세상과 인간들을 구원하시옵소서 하는 기도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이가 있느냐면 예수께서 유대 묵시사상 곧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새로운 세대를 말한다. 그런데 그 때는 미래에 오는 것이다라는 묵시문학의 사상을 예수가 이어받은 것을 여기서 우리는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이 점에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묵시사상과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미래에 오는 하나님 나라에서 종말론적인 최후의 심판이 일어나며 모든 죄악이 일어나며 이 온 우주가 갱신된다는 새롭게 된다는 사상(마19:28)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된다는 사상들을 가르치는데 이러한 것들은 다 예수가 묵시문학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마19:28을 읽어보라 거기에 세상을 새롭게 하며 라는 말이 나온다. 그것을 헬라어의 의 번역이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창조되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라는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이 세상이 새롭게 되고 새롭게 창조되는 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묵시문학과 비슷한 사상들을 가르쳤다.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을 알아보기 위해서 다음 구절들을 집에가서 찾아보기 바란다. 막13:32/마24:42,50/눅12:46/마25:13/10:23/24:44/눅18:8/21:36
이러한 곳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미래에 오는 실재로서 미래에 오는 실재에 대해서 유대의 묵시문학과 비슷하게 가르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제 이것도 묵시문학과 비슷한데 예수가 하나님 나라가 그러면 언제 온다고 보아쓴냐? 아주 가까운 장래에 온다고 보았다.
금방 온다고 보았다. 그래서 소위 imminent expectation 금방 온다는 사상이 예수에게 강하다. 마10:7/눅10:9/눅19:11/막9:1/눅21:31/막1:15. 이러한 데에 보면 하나님 나라가 미래의 실제인데 그것이 금방 도래한다고 그렇게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이다.
3. 하나님 나라에서의 상황(conditions)
이것을 우리말로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으나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느냐하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유대교와 커다란 차이를 나타낸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상황에 대해서 별로 가르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 구체적으로는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지 않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유대교에서는 하나님 나라를 또는 오는 세상을 아주 이 세상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에게는 이런 것이 별로 안나타난다. 또 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와 우리 신약의 전통을 상당히 많이 이어 받은 이스랆교에서는 종말에가는 파라다이스, 이 천국을 아주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유대교보다 더 물질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래서 여기서는 성전을, 이스람교를 위해서 전쟁을 하다가 순교를 하면 파라다이스의 제일 높은데로 가는데 그 가는 길목마다 아주 아름다운 천사들이 있는데 이 천사들과 가기 마음대로 결혼할 수가 있다. 이런 식으로 아주 육신적이고 물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렸다. 먹는 것이 풍부하고 육신적인 향락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는 식으로.
우리 기독교에서도 하나님 나라에 대한 환타지를 많이 그려놓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금으로 깔려 있고 다이아몬드가 어떻고 하는데 예수님의 가르침에는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으로 하나도 없다. 좀 목마를 정도로 하나도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가라칠 때에 다만 한가지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타락한 인간들이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한다는 것이다. 이 일반적인 구원론적인 사실에만 집중하고 있지 그 상태가 어떠어떠한 것인지 구체적으로 하나도 그린 것이 없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어떠 어떠하다고 비유를 많이 하였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비유로 가르쳤다. 하나님 나라는 어떠어떠 하다고... 그러면 그럴 때에 예수님이 구체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려주었으면 우리가 상상할 때에 쉬울텐데 그렇지 않다.
제일 구체적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유, 가르침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하나님 앞에서 먹고 마시는 하나님의 믿음의 백성과 먹고 마시는 그 그림만 그렸다.
그리고 이제 여러가지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축복을 가르치기는 가르쳤는데 그것들이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하나님 나라는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눅19:9ff) 아버지의 집으로 우리가 그 자녀들로 귀환되는 것을 의미한다(눅15:11ff). 거기에 아버지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고 기쁨이 있다는 등의 이런 것만 알지 아버지의 집이 금으로 지어지고 방이 얼마나 큰지 구체적으로 아무것도 모른다.
또 하나님 나라는 모든 가치의 전도. 이것을 독일말로 하면 Umwertung aller werte의미가 있다. 모든 가치가 뒤집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막강하고 부자고 이 세상에서 즐긴 사람들은 어떻게 돼요? 그들은 이미 이 세상에서 윙나을 받아 버렸으므로 하나님 나라에서는 위안을 못받는다.
그러면 누가 위안을 받는가?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약하고 슬퍼하는 자들, 그래서 이른바 산상수훈에서 누가 복이 있는가? 가난한 자가 복이 있고 또 우는 자들이 복이 있다. 또 누가 하나님 나라에 가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겼어요? 그 대신 누가 지옥에 떨어져서 죽을거라고 해요? 부자가. 이렇게 완전한 가치의 전도.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나님 나라는 이 세상의 가치가 완전히 도치되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 나라 또 죄의 용서를 의미한다(막2:7). 하나님 나라에는 종말에 기쁨이 있는 곳이다(막2:19).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즐긴다. 오는 세상의 생명을 즐긴다(눅20:34ff). 그러므로 거기에는 더이상 죽음이 없고 거기에는 더 이상 자녀들을 낳을 필요가 없고 그래서 더 이상 결혼도 없다. 이렇게 무엇무엇이 없다는 것. 거기에는 더이상 배고픔이 없고 목마름이 없고 더 이상 고난이 없고 울음도 없다. 평화와 의가 가득차며 그러기 때문에 독일말로 Heilwerdem 우리 모두가 온통 아주 만족한 상태에 이르는 그것을 shalom이라고 한다. 우리의 온 실존이 부족함이 없고 아픔이 없고 무엇무엇에 대한 간절한 바램이 없고 만족한 상태들을 예수가 여러비유들을 통해서 그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축복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이 축복들이 다 어떻게 오느냐?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절단된 교제의 회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를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과의 절단된 관게의 회복이다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보다 더 구체적으로는 예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그리지 않고 있다. 이것이 우리에게 상당히 중요하다.
하나님 나라게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기 위한 실제이기 위해서는 그것은 초월적인 것이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실제가 아니라 이 세상의 실제 그것은 내재적인 실제는 항상 제한성,한계성과 임시성 등을 특징지워져 가지고 그것은 우리에게 절대적인 만족을 줄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에게 이 세상의 한계성과 임시성, 사라져 가는 이런 상태속에서 구원받고자 하는 것이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하는 소원인데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구원의 축복을 가져오는 것이라면 무조건 정의상 초월성을 갖추어야 한다.
이 초월적인 실제는 곧 하나님 나라는 세상적인 것으로 그릴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세상에 사는 사람들이 완전히 이해할 수가 없다. 이 세상에서 우리 자신들이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제한되어, 한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이 초월적인 실제는 어떻게 가르칠 수 있느냐? 기껏해야 비유로 밖에 가르치지 못한다. 이 세상적인 것으로 초월적인 실제를 잠간 견주어서 말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것도 비유의 도가 중요하다. 비유가 어떤 진리를 나타낼 수는 있지만 또 그것이 비유이기 때문에 초월의 진리를 왜곡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왜곡한시키는 비유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실제,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이렇게 물질적인 것으로 비유를 들지 않았다. 아까 이야깋나대로 좀 더 추상적인 기쁨이라든지 하나님의 집에 우리가 다시 회복된다든지 등의 비유지지 집이 어떻게 생겼는지 우리가 거기서 밥을 많이 먹게 되는지, 밥안먹어도 배부르게 살게 되는지 등의 인간들이 알고 싶어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 비유에는 없다. 가장 물질적인 비유가 있다면 그것은 잔치비유이다. 잔치는 무엇을 말하는가? 잔치는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하나님이 베푸는 하나님이 얼마나 풍요로우신가? 풍요로운 하나님이 우리 아버지로 우리에게 큰 상을 베푼다는 것이다.
우선 풍요로움을 나타낸다. 우리 제한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무한한 부요함에 무한한 자원에 참여함을 나타낸다. 그러기 때문에 그곳에는 뭐가 없는가? 베고품이 없다. 이것도 비유이다. 목마름이 없다. 풍요로움이 있으니까..
그러기 때문에 잔치는 우리에게 무엇을 가져다 주는가? 기쁨을 가져다 준다. 풍요와 기쁨,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과 단절된 타락한 피조물의 단절된 상태에서 하나님과 교제를 회복하는 것을 예수는 가장 즐겨 어떤 비유로 말했느냐면 잔치라는 비유로 말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유대교나 이스람교 같이 아주 세상적인 가치들로 그리지 않은 것이 아주 의미심장하며 아주 천만다행이다.
거기에 예수의 가르침의 진리됨이 있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님 나라를 이 세상의 됨같이 그려놨다면 생각해 보라.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무슨 구원의 능력이 있겠는가? 이 세상을 조금 잘 만들면 이 세상이 하나님 나라가 되어 버릴 것이 아닌가? 물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만들겠다고 주장하고 나서는 사람이 많이 있다. 해방신학자라는 그러한 사람들이 그렇다. 해방신학자들 뿐 아니라 우리 복음주의 하는 사람들도 가만히 보면 말에 그 쓰는 용어가 그런 식이다.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확장해야 한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 content가 있다. 그러나 그것이 특별한 context에서 쓰이지 아니하면 무슨 인상을 주는가 하며 우리가 노력을 해서 아까 랍비들이나 열혈당원들 같이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떻게 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 같이 그래서 이 땅에 무슨 하나님 나라의 reality가 될 수 있는 것 같이 오해하게 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가르침은 하나님 나라가 오는 세계에 미래에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으로 가르치고 초월성을 강조하였다.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라고 가르쳐주기는 주어야 하지만 초월성을 보호하여야 되기 때문에 예수께서는 그 하나님 나라의 상황을 자세하게 세상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리기를 거부하고 다만 그것이 종말에 구원을 의미한다는 구원론적인 천명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4.하나님 나라의 현재성
하나님 나라의 옴. 바로 이점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통치에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에서 제일 독특한 부분이다.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다. .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벌써 여기 임했다. 당도했다고 스스로 선포했으며 자기의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선포하도록 가르쳤다. 막1:15과 그병행절 마4:17.눅10:9-1.
곧 하나님께서 사탄을 꺽고 그의 구원을 우리에게 가져올 그 사건이 임박했다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임박했을 뿐 아니라 벌써 여기 도착했다고 그렇게 가르쳤다. 눅11:20/마12:28. 예수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사역에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곧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사역에 있어서 실제로 나타나고 있다고 실제가 되어서 나타나고 있다고 그렇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면 예수의 사역에 있어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실재하느냐?
우선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다. 하나님이 정당한 통치자이시고 하나님이 사탄을 몰아내고 자기의 구원의 통치권을 확립하신다고 선포하였다. 즉 하나님이 왕이라고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왕권이 벌써 지금 나타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유대묵시문학에서 이 세상이 종결되어지고 하나님 나라가 새세상이, 하나님의 통치가 실제로 나타난다고 했는데 그 시간이 벌써 와서 지금 그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있다고 선포하였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임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통치권이 벌서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통치권이 나타나는 곳에는 항상 심판과 구원이 일어난다.
그러면 심판과 구원이 일어나는 그 증거가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예수의 귀신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이 그 증거이다. 예수의 귀신 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이 예수 안에서 예수를 통해서 이미 하나님의 주권이 막강한 구원의 힘을 드러내고 있는 증거이다.
예수가 귀신을 쫓아내서 사람들을 귀신의 통치에서 해방을 시켰다. 이 귀신들은 사탄의 종들인데 이 사탄의 종들인 귀신들로부터 사람들을 해방시켰다. 그래서 이 예수의 귀신쫓아냄은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남이요 하나님의 나라. 통치가 곧 완성되리나는 표징이다.
눅11:20,29을 보세요.
여기가 무슨 이야기인가?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선교여행 보냈다. 가서 뭐하라고 하였는가? 거기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고 그 다음에 귀신들을 쫓고 병자들을 고치라고 하였다. 자기의 하는 일을 그대로 하라고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이렇게 해서 제자들이 돌아와서 자기들의 성공담으로 기쁨에 가득차니 예수가 뭐라고 했는가?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속에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했다. 눅 10:20절을 읽었는데 아주 옳은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귀신을 쫓아내서 그것으로 아주 좋아하고 기뻐하였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낸다는 것은 무엇이냐? 귀신의 통치권이 종결된다는 말이다. 귀신의 통치권이 종결되고 그 대신 누구의 통치권이 그 사람들 위에 확립이 되는가? 하나님의 통치권이 확립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가 그들 위에 실재(reality)가 되어서 나타나는 것이다.
왜 그러느냐? 그게 11:20절의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들을 쫓아낸다ㅁ녀 하나님 나라가 너희에게 임했다'고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을 예수가 왜 하고 있어요? 예수의 원수들이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일을 뭐라고 단정하였어요? 귀신들의 두목인 사탄인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귀신을 쫓아낸다고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일을 비꼬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뭐라고 하는가? 그것은 가당치 않다고. 내분이 일어나면 그 집이 망할텐데 어떻게 귀신들의 왕인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 귀신을 쫓애날 수 있다고? 더 강한자, 더 강한자가 이 귀신을 꽁꽁 묶었을 때만 종들을 쫓아내고 그 집을 노략질할 수 있다고 하신다.
그래서 이 비유에서 은근히 자기가 무엇을 나타내느냐면 예수가 바알세불보다 더 강한자로써 바알세불을 꽁꽁 묶어가지고 바알세불의 종들을 다 패서 그 집을 노략질하고 쫓나낼 수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나서 이말을 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곧 하나님의 힘으로, 힘을 입어서 마태복음 판에 보면 하나님의 영으로 그렇게 되어 있다. 누가복음 판에는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그렇게 되어 있고 하나님의 영이든지 하나님의 손가락이든지 하여간 하나님의 힘으로 귀신들을 지금 쫓아내고 있다면 지금 자기가 쫓아내고 있는 것이다. 위에서 부인한 것이 무엇인가? 바알세불의 힘을 입어서자기가 귀신을 쫓아내지 않았다는 것을 자기가 부인하였다.
그러니까 자기가 말을 할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가 하나님의 힘으로 쫓아낸다는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실재화되겠는가? 하나님 나라가 실재화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사탄의 귀신의 통치를 종결지으고 하나님이 직접 통치함으로써 우리에게 구원을 이루시는 그 구원을 주시는 그 통치권이 지금 자기를 통해서 지금 귀신 쫓음을 받은 그 사람에게 너희들에게 reality가 되고 있다.
그러니까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하나님 나라가 reality가 되고 있다. 이미 임해서 그것이 실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 귀신 쫓는 일이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힘과 능력이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이미 세상에 나타나고 있다. 그것이 사탄의 사슬에서 인간들을 해방하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예수께서 사탄을 이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21절 보세요.
거기에서 예수가 사탄보다 더 강한자로써 사탄과 투쟁해서 이겨서 사탄을 묶고 사탄의 집을 노략질하는 것으로 자기의 귀신 쫓는 것을 비유하였다. 귀신들이 사탄의 종들인데 자기가 사탄을 이겼기 때문에 종들을 쫓아낼 수 있다는 그말이다.
아까 하나님 나라의 개념과 상반되는 것으로 무엇을 생각해야 한다고 하였는가? 이 세상의 사탄의 통치이다. 그래서 이제 예수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가 점점 물러가고 사탄이 패배를 해서 그 통치가 좀 약화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사탄의 통치권 아래에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되요? 점점 해방되는 것이다. 사탄의 통치권에서 해방이 된다. 해방이 되고 예수를 통해서 나타나는 구원의 통치권을 맛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귀신쫓겨남을 체험하는 사람들이고 그것이 병고침을 체험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를 통해서 벌서 하나님의 통치가 하나님의 나라가 reatity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눅10:9,17절을 보면 거기에 아까 20절을 읽었는데 그 직전을 보면 예수게서 성공적인 선교를 마치고 돌아온 제자들에게 뭐라고 말하느냐하면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들을 쫓아낼 때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내가 봤다' 무슨 소리인가? 사탄이 하나님이 통치해야할 이 세상을 통치하고 있었는데 이제 예수와 자기 제자들의 하나님나라 선포, 하나님이 왕이시라는 이 선포와 그리고 그 선포를 듣고 사탄을 부인하고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기로 사람들이 결단을 하고 또 실제로 사탄의 종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탄이 가져다준 질병을 치유함ㅇ로써 사탄의 굴레에서 허덕이는 사람들을 사탄의 영역에서 빼옴으로 사탄의 통치권이 잃어가고 사탄의 통치가 무너져가고 있다. 이것을 보고 예수가 기뻐했다는 그말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한 관점을 보고 넘어가야 하는데 이 예수의 병고침과 귀신 쫓아냄이 그것을 통하여서 하나님 나라가 이미 reality로 나타난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것인데 예수가 즐겨 어느날 병을 고쳤는가? 안식일날 병을 고쳤다. 예수가 즐겨 안식일날 병을 고쳤다.
안식일날 병을 고친다고 유대신학자들에게 욕을 많이 먹고 혼을 많이 나고 한다. 그런데도 왜 자꾸 안식일날 하는가? 예수가 좀 짖꿏은 면이 있었는 모양이지? 왜 그랬는가? 여기에 아주 깊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왜 예수가 안식일날 병을 고쳤는가를 알려면 안식일의 원래의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가 알아야 한다. 안식일의 의미가 무엇인가?
원래 안식일은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하게 지으셨다. 완전하게 지으시고 짓는 일을 다 마쳤다. 그리고 보니까 매우 아름다웠다. 그러니 할일이 더 있겠는가? 없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쉬신 것이다. 그래서 이 안식일의 원래의 의미는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를 기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완전히 창조하셨기 때문에 창조하는 이 일을 완전히 마쳤기 때문에 더 할일이 없으신 것이다. 그래서 안식했다 이말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가 타락으로 그들이 저주를 받았다. 하나님의 전체 피조세계가 저주를 받았다. 그래서 더 이상 이 피조물이 완전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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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한 창조를 기념 -+-- 안식일 | 불완전시 |
| +---------------+-
그래서 땅은 엉겅퀴를 내고 아담과 이브는 이제 어떻게 먹고 살아요? 피땀을 흘려 먹고 살게 된 것이다.
이제 일이 생긴 것이다. 할일이 생긴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안식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과 이브만 더 이상 안식을 못하고 할일이 생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일이 생긴 것이다. 자기의 타락한 이 세상, 고장난 이 세상과 인류를 고쳐야 하는 일이 생긴 것이다. 그래서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요5장에서 뭐라고 하시는가? 안식일에 병자고친다고 시비하는 유대신학자에게 뭐라고 하는가? 아버지가 지금까지 일하시는 것 같이 나도 일한다고 하신다. 아버지가 지금 안식하지 않는다. 그날이 무슨 날인가? 안식일날 예수가 병고치니까 38년된 중풍병자를 예수가 고치니까 바리새인이 시비하니까 말하기를 아버지가 일하시므로 아들도 일한다고 한다. 그날 안식일날인데 아버지가 쉬지 아니하는 것이다. 왜?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할일이 생긴 것이다. 이 세상을 고치고 이 세상 속에 들어 있는 타락한 병고에 시달리는 인간을 구출해야할 구원해야할 세상을 새롭게 해야할 재생해야할 재창조해야할 일이 생긴 것이다. 그런데 왜 모세를 통해서 안식일을 지키라고 계명을 주셨는가?
그 안식일은 태초의 창조의 완전함을 기념하며 종말의 하나님의 새창조의 완전한 새창조를 바라는 소망의 의미로 주어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은 이 이중의 의미가 있다. 태초의 하나님의 창조의 완전함을 기념하며 원래가 그런 의미가 있으며 그런데 이제는 그 뿐만 아니고 종말에 오는 새창조의 바램,기대를 나타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꼭 새창조를 이루어서 우리를 영원한 안식에로 인도하시리라는 신뢰를 나타내며 그 바램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 바램을 나타내는 것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이것을 법적으로 해석을 해가지고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발검음도 몇 발자국 이상 떼면 안되고 그 이내면 되고, 무엇을 하면 안되고 무엇을 하면 되고, 아주 복잡하게 만들어 놓았다.
이런 율법주의적인 안식일에는 원래 의미의 안식일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지금 뭐하는 사람인가?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이 지금 뭐하는 것인가? 타락한 불완전한 세상을 구출하는 새창조의 역사인 것이다.
사탄의 통치 밑에서 어그러지고 고생하는 불완전한 인류, 또 세상을 치유해가는 구원해가는 과정이 예수의 사역이다.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고 귀신 쫓아내는 일이고 병고치는 일이다. 그것을 안식일과 결부시켜 말하면 무엇이라고 말하겠는가?
안식일이 있도록 해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으로 안식일 있도록...
진정한 의미의 안식일이 있도록... 다시 말하면 진정으로 자기가 안식일이 있도록 해가는 분이라는 것이다. 진정한 원래의 안식일이 되도록 하는 것을 아주 극적으로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안식일날 병고치는 것이다.
이 안식일에 하나님을 예배하러 다 모였는데 거기에 손 마른 자가 있다는 현실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안식일이 없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는 일이 있는 것이다. 손 마른 자를 고쳐주고 거기에 더 이상 병고와 질병이 없어야 안식이 있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안식일에 예배하러 모인 이 회중에 손마른 자가 하나 나타났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안식이 없다는 것을 극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자를 고치는 것이 안식일을 안식일 되게 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귀신 쫓아냄, 병을 고침, 특히 안식일에 병을 고침은 그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며 그것의 실재화, 하나님 나라의 실재화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안식일의 병고침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며 설명 뿐만 아니라 실제로 하나님의 구원의 통치가 구원의 힘으로 나타나게 하는 reality 하는 그래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고 이 타락한 세상에서 타락과 고난을 다 물리치고서 새로운 창조를 다 완성해서 거기에서 원래의 의미의 안식일 즉 하나님도 쉬고 우리 인간들도 쉬는 병고와 더 이상 투쟁할 필요가 없는 그러한 새로운 질서, 새 세대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귀신 쫓아냄과 병고침이 특히 안식일에 일어난 것은 예수가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주석이며 실재화라고 그렇게 말할 수 가 있다.
질문:안식일에 대한 개념이 출애굽기에서와 신명기에서는 완전함과 출애굽의 의미상의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유대신학에서는 출애굽을 새창조로 보았다. 유대신학에서 중요한 사상 하나가 출애굽이 새창조이다 하는 것이다. 그래서 출애굽 사건만 새창조로 본 것이 아니고 묵시문학에서는 종말에 오는 새창조를 또 하나의 출애굽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본다. 이렇게 출애굽과 새창조를 항상 이렇게 결부시켜 본다.
그러기 때문에 안식일이라는 것이 원래 하나님의 완전한 창조에 대한 celebration인데 이 엄청난 구원의 사건, 출애굽의 이 사건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와 같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원래의 창조와 같이 기념되어야할 새로운 창조의 사건으로 같이 기념되어야할 그래서 안식일의 의미가 원래의 창조를 기념할 뿐만 아니라 출애굽의 사건, 구원의 사건, 새창조와도 같은 이 구원의 사건도 기념하는 의미를 더 갖는 것이다.
그래서 typology라. 그래서 종말에 일어날 새창조가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다. 그래서 그때에 진정한 안식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출애굽의 절대적인 의미로 새창조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하여간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중요한 사상의 맥 하나가 구원을 또는 새창조를 출애굽의 사건으로 제2의 출애굽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 묵시문학이나 랍비 문학을 보면 새로운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메시야가 가져오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할 때에 그 때는 출애굽때 일어나는 모든 이적들이 일어나는 세상이라고 보았다. 그러니까 출애굽때 일어나는 모든 이적들이 되풀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애굽의 파라오를 패퇴시켰듯이 모든 이방민족들을 패퇴시킬 뿐 아니라 이스라엘 밸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게 된다. 땅을 일굴 필요가 없고 천사들의 음식인 만나를 먹고 산다. 만나를 천사들의 음식으로 보았다. 이렇게 출애굽 때의 기적의 되풀이 되는 것으로 보았다.
그러면 출애굽 때의 기적은 무엇이냐? 원래 완전한 창조때의 되풀이로 본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 원래 창조때의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래서 모세가 원래 아담이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영광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또 다시 이스라엘이 금송아지를 만들고 우상숭배함으로써 다시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상실하게 되어 우리 인간과 같이 왜소하게 되고 우리 얼굴, 이마에서 광채가 안나타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종말에 새창조때 우리가 어떻게 되는가 하면 우리가 다시 한번 아담의 이마에 났던 광채가 얼굴에 나게되고 아담과 같이 거인으로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된다고 한다. 이처럼 출애굽의 사건이 원래 창조의 영광을 많이 회복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많이 없어져 버렸는데 새창조때에 또 출애굽 때의 기적들이 일어나는데 그 출애굽 때의 기적은 무엇이냐? 원래의 창조 때의 회복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이런 식을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유대의 랍비 문학에 보면 랍비책에 보면 모세와 아담과 위대한 랍비인 벤자카이 인가 하였든 위대한 아담과 모세의 무덤에 갔더니 둘이 열심히 논쟁하고 있었다. 누가 더 위대하느냐의 논쟁이었다. 그런데 아담은 내가 원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니 내가 더 위대하다고 모세는 반박하기를 너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지는 죄를 지어서 상실했지 않느냐? 그런데 나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였으니 내가 더 위대하다고 논쟁을 열심히 하더라는 것이다.
이것이 아주 우스운 이야기같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들은 우리들에게 진리를 헤아릴려고 녀력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은 무엇이냐 아까 이야기한대로 출애굽 사건이 하나님의 절대적인 구원의 사건이 태초의 완전한 하나님의 창조를 회복하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모세가 되찾은 것이라는 것을 암암리에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귀신 쫓는 일과 병고치는 일을 통해서 실제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나라가 예수를 통해서 예수 안에서 임한 것이다. 실제로 나타난 것이다. reality 지금 나타나고 있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제일 독탁한 점이다. 유대교의 여러 분류에서 볼 수 없는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이요 주장이다.
그러면 이렇게 예수의 선포와 예수의 사역 병고침이나 귀신 쫓아내는 것을 통해서 reality로 나타나는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인간들이 해야될 것은 무엇이냐? 회개라는 것이다. 회개...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받으라' 그래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믿으라'고 신약성경은 부르고 있다. 예수와 제자들을 부르고 있다.
이 회개라는 것은 사탄에 대한 순종을 하지 말로 사탄에 대한 순종에서 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고 그의 왕권에 순종하는 것이 회개이다. 그래서 바로 이 회개가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예수는 이와 같이 자기의 하나님의 왕권 곧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와 그것의 실증으로서의 병고침, 귀신 쫓아냄 등에 응답하여서 사탄에 대한 순종을 버리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겠다고 회개하는 죄인들을 모아서 예수가 무엇을 하였는가? 잔치를 베풀었던 것이다.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푼 것이다. 이것은 당시 유대인들의 율법에는 완전히 어긋나는 것이다. 의인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면 어떻게 되는가? 죄인이 된다.
그런데 예수가 그들과 먹고 마셨다. 이렇게 죄인들을 모아서 그들과 먹고 마시는 교제를 한 것은 그들이 죄가 용서되었음과 그들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되었음을 나타내는 sign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잔치에 대한 성취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성취가 그에게 응답한 사람들에게 실제로 나타난다. 죄의 용서가 선언되면 죄의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었음을 드라마로 표현한 것이 잔치이다.
그런데 예수가 나누는 이 잔치는 천국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예비적인 임시적인 지상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렇게 회개하고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믿는 죄인들 가운데 특별히 일단의 제자들을 모았다. 그래가지고 이들을 자기가 새롭게 구성하는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핵으로, 핵심으로 삼았다. 자기가 새롭게 구성하고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백서이 무엇이요? 하나님의 통치아래 있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나라의 백서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가 아까 무슨 뉘앙스가 강할때가 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라는 뉘앙스가 강할 때가 있다고 하였다.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핵심으로 삼은 거이다. 그래서 그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12제자를 특별히 선택한 것이다. 곧 옛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12지파의 상징적으로 대응하는 12제자들을 틀별히 삼은 것이다. 곧 자기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누가 새롭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느냐? 예수의 메시지 곧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고 회개한 자들, 곧 사탄을 주로 더이상 사탄을 왕으로 섬기지 않기고 결단하고 그에게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을 왕으로 고백하며 그에게 순종하기로 결단하는 자들,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들이다라는 것이다. 그들의 핵이 12제자이다 라는 것이다.
신약신학 4강
5.그러면 하나님 나라는 어떻게 오느냐? 이 문제 있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가르침은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이 theocentric, 철두철미하게 하나님 중심적인 사상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해서 인간을 위해서 인간을 행해서 하시는 행위리는 것이다.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시는 행위이지 무슨 인간이 거기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데 무슨 협조하는 것도 아니고.
지난번에 우리가 배경으로 유대에서 하나님의 통치가 또는 오는 세상이 어떻게 오는가에 대해서 이야기 하였지요? 그런데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유대의 종교적인 모든 분파들이 전부 하나님 나라의 오는 것에 대해서 이 synergism아니면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해야 된다는 것이 아니면 이 synergism이란 이러한 것이다. 이것은 헬라어의 에서 왔다. 같이 일한다의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일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synergism이란 말은 구원론에서 많이 쓰는 말이다.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지만 하나님의 인간의 구원에 인간도 조금 스스로 공헌한다고 하는 교도들이 우리가 교회사를 공부하면 나오는데 그럴 때 그런 이단들이 synergism이다.
그런데 유대교의 여러파들의 신학이 대개 이 synergism 아니면 열혈당원의 신학과 같이 완전히 이 땅 위에서 그들이 투쟁함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야 할 것으로 보았는데 그것에 대항해서 예수의 가르침은 전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이 인간들에게 인간을 위해서 한 행위이지 인간이 무슨 거기에다가 공헌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와 제일 많이 쓰이는 동사가 '온다'는 것이다. '온다'는 동사이다. 또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는 동사이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와요.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주어져요.
그러면 인간 편에서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행위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것이다. 하나님 나라를 인간의 편에서는 받는다는 것이다.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이다. 이러한 것이 가장 많이 쓰이는 동사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들어간다'고 하는 동사가 재미있다고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동사가 아주 많이 나오는데 이때에 지난번에 잠간 말을 했지만 하나님 나라는 장소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의 장소로 하나의 공간으로 상상이 되는 것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의 집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가 같이 가는 그림들이 많다.
거기에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문이 있다. 하나님 나라에는 들어가는길이 있다. 그 길이 어떤 길이라고요? 좁은 길이다. 좁은 길로 가야한다. 또한 거기에는 하나님 나라에는 문이 있다. 그래서 두드리라 그러면 어쩐다고? 열린다고 하였다. 또 하나님 나라의 문에는 열쇠가 있다. 그래서 열쇠가 누구에게 주어졌는가? 베드로에게 주어졌다. 또 하나님 나라에는 방이 있다. 그 방에서는 무엇을 하는가? 그 방에서는 하나님이 잔치를 베푸신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집으로 상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집이 정확히 무슨 집이냐? 좀더 정확히 말하면 성전을 생각하는 것이다. 성전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이 무엇이냐? 유대신학에서 성전은 뭐냐면 유대말에 '우주'라는 말이 있는가? 없는가? '우주'라는 말은 없다. 그와 같은 추상명사는 없다. cosmos라는 명사는 없고 우주를 이랴기할 때는 '하늘과 땅'이라고 한다. 이렇게 히브리어 숙어로서 하나님께서 전체의 양극을 말함으로써 창조 전체를 말하는 수단이다. 그래서 창조의 두 부분이 하늘과 땅이다.
그런데 하늘은 하나님의 거처이다. 하늘이 하나님의 거처이고 땅은 인간들의 거주하는 곳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당에 거처하기로 정하면 어디에 거처하느냐? 어디인가? 성전이다. 그래서 성전은 하늘과 땅, 즉 온 우주의 두 부분을 연결하는 기능을 하고 있으며 다시 말하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는데 이 보좌는 하늘에 있는 보좌의 copy이다.
하늘
+------+
---------+ 성전 +-------
+------+
땅
그래서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거처, 모조품이 지상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다. 그 성전이 땅에서 하늘로 통하는 관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하는 표현을 제일 많이 사용하는데 '들어간다'는 말과 더불어 아까 말한대로 좁은 길, 좁은 문 그리고 열쇠 또는 방으로 들어간다. 그 방에 누가 계시느냐? 하나님이 계시고 잔치를 베푸시는 것이가. 그래서 그 잔치는 성전에서 하나님과 백성이 속죄의 제사를 통해서 다시 한번 화해를 해서 잔치를 베푸는 것의 완성인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일부 성전에 비추어서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속죄제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성전이다. 속죄의 제사는 왜 드리는가? 하나님과 그의 백성의 언약의 관계가 지탱하기 위해서 속죄의 제사가 드려지는 것이다. 언약을 어긴 것이 죄인데 그 죄를 속하기 위해서 제사를 드림으로 하나님과 그의 백성이 다시한번 언약의 관계가 회복이 되어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간에 화해가 되는 것이다.
그 화해가 어떻게 그림으로 나타나느냐면 극으로 나타나느냐면 잔치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서 여러 절기때에 커다란 잔치가 베풀어지는 것이다. 성전에서의 이러한 것들이 전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Model이 되었다.
그것은 왜 그러느냐면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로 하나님의 하늘의 서언의 모조품으로써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중요한 부분이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상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여기서 또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예수께서 무엇을 성전을 선포함에 있어서 누구누가가 성전에 들어갈 수있나? 어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가를 말한다. 어떤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 수 있어요? 어린아이와 같아야 되고 또 바리새인보다 더 의로와야 되고 요한복음 3장에 의하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되고 좌우간 예수의 제자도를 지킴으로 예수의 말을 듣고 행하고 따르는 제자도를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조건으로 세웠다.
그런데 이것도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성전에 들어가는 조건과 거의 같이 만들어져 있다. 시편에 여러편을 보면 우리 말로 무엇이라고 하는가? 목사와 회중이 교대로 읽는 것을 무엇이라고 하죠? 교독문! 그 교독문이 여러가지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유대의 중요한 절기 때에 순례자들이 예루살렘 성전 문 밖에서 회친다. '누가 이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수있는가?' 그러면 거기의 제사장이 대답을 한다. '우상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면 또 '누가 들어갈 수있는가?' 고 하면 답하기를 '도둑질하지 않는자''간음하지 않는자' 이렇게 여러가지 조건이 있다. 성전에 들어갈 수있는...
그러니까 도덕적으로 의식으로 깨끗한 자만이 성전에 들어갈 수가 있다. 거룩한 자만, 청결한 자만,..이렇게 성전에 들어가는 조건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에게 있어서도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 조건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별난자이다. 손을 씻고 발을 씻은 그러한 자들이 아니라 완전히 이것은 예수에 대한 태도와 도덕적인 기준으로 정해져 있다. 이것은 다르지만 형태는 비슷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여러가지의 형태로 볼때 예수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동사를 사용할 때는 주로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왜 예수가 성전에 대하여 그렇게 독특한 태도를 취했는가를 우리가 알 수가 있다.
예수는 성전에 가주 갔는가? 안갔는가?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예루살렘 성전을 그냥 무시하였다. 당시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에 사는 유대인들이 절기 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거기의 잔치에 참여하곤 하였다. 심지어 팔레스타인 밖에서 사는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일생의 한번 쯤은 그러한 것을 자신의 평생 소원으로 알았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돈 푼깨나 번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성전에 가까이 가서 살다가 성전에 드나들다가 살다가 죽어서 그 성전 가까이에 묻히기를 소원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 세상을 10등급의 거룩도로 나누었다. 동심원으로....
그런데 성전의 지성소가 제일 거룩하고 그 다음에 성전의 마당이 거룩하고 그다음에 예루살렘이 거룩하고 그 다음에 유대가 거룩하고 그 다음에 어디까지가 거룩하고, 이런 식으로 거룩의 도를 열등급으로 정하였다.
그래서 되도록 성전과 가까이에서 죽는 것이 그들의 구원관과 결부되어 있어서 아주 중요하였다. 이와 같이 성전이 그 사람들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는데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해버렸다.
도리어 예수가 무엇이라고 주장하였는가? 이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의 돌이 돌위에 얹히지 않도록 다 부셔져 버리리라고 예언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기가 성전을 다시 짓는다고 예언하였다. 그게 예수의 재판의 죄목이다. 예수의 재판의 죄목이 그것 밖에 더 있는가? 성전 부순다고 예언했다는 것이 예수의 죄목이 아니었던가? 성경 열심히 읽어도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야? 눈만 말똥말똥 떠가지고...
엊그제가 예수의 수난절이었지만 예수의 죄목이 무엇이여? 증인들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자가 말하기를 내가 손으로 만든 성전을 때려부수고 삼일만에 손으로 만들지 않은 성전을 짓는다고 하였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재판의 증거가 아닌가? 이거 성경 100번 읽어도 아무 소용 없다구! 그냥 중 염불하듯이 무슨 뜻인줄도 모르고 막 읽는 모양이라..그러니까 기억에 남을리가 있나?
이와 같이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가 아주 독특하고 우리 보기에 이상하다. 왜 그러느냐? 일단의 설명이 이렇게 된다. 나중에 더 자세히 설명하 필요는 있겠지만.. 예수는 예루살렘 성전이 자기가 지금 이 세상에서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의 그림자, 그림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기가 지금 선포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전의 진정한 기능이 완성된 것으로 보았다. 자기가 지금 완성된 것을 가져오는데 지금 예루살렘의 성전, 부패한 성전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래서 그것을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이다. 여러분들 중에 혹 요한복음 공부를 많이 하였으면 그럴 것이가. 요한복음에 보니까 아 예수가 성전에 여러번 가지 않았습니까? 초막절에도 가고 유월절에도 가고 여러번 가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세요.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가 성전에 딱 한번 간다. 가서 뭐해요? 가서 난동을 부리신다구요. 채찍으로 막 쫓아내고 난리를 쳐요. 성전에 가서 예배참석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성전에 가서 대해서 긍정적인 태도는 하나도 안취하고 불경적인, 부정적인 태도만을 취한다. 공관복음 보면 한번 가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예서가 성전에 4번 간다. 적어도 3번은 간다. 그런데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예수가 성전에 가서 성전의 무슨 제사에 참여하거나 성전의 무엇을 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성전의 그 절기에 초막절이면 초막절,유월절이면 유월절, 그 절기에 모인 사람들에게 가서 자기가 그 성전의 진정한 완성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초막절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가? 초막절에 유대 사람들이 광야에서 헤맬때에 하나님이 찾아오셔서 초막에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 계시의 불빛이 나타났다. 그래서 초막절에는 시내산에서 일어난 계시를 기념해서 제등행렬을 하였다. 그 불행렬.. 세상에 비치는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상징해서 불교의 초파일에 하듯이 제등행렬을 하였다.
또 물긷는 행렬을 하였다. 실로암 연못에서 물을 긷는 행렬을 하였다. 그것에 비유해서 예수가 초막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요한 복음 7장에서..'내가 세상의 빛이라' 또 내가 무엇이라? '내가 영생을 주는 물이라'
너희들이 이 성전에서 행사하는 것이 아무것도 아니고 내가 그 진정한 실체라. 요한복음에서도 예수가 이 예루사렘 성전의 진정한 의미로 자기가 성취하는 것으로 설명하지 성전에 가서 제사하고 하는 것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는 성전을 깡그리 무시하였다. 왜 그랬느냐 하면 예수가 지금 자기가 선포하고 있는 이 하나님 나라, 자기가 지금 이 세상에서 현실이 되게 하는 실제가 되게 하는 하나님 나라에서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그 기능이 완성이 되는 것이다. 성전의 진정한 의미와 그 기능의 완성으로 가져오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지금 부패한 기껏해야 지금 그림에 불과한 또 그림노릇도 제대로 못하는 부패한 성전에 대해서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그래서 깡그리 무시해 버린 것이다.
그러니까 요즘 수백억씩 돈 대가지고 성전짓는 사람들 좀 생각해 볼 일이 있다고...
이런 것을 보면 예수가 유대의 하나님 나라 옴에 대한 사상, 아까 이야기한 synergism에 대해서 아주 다른 가르침을 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 우리가 알아 두어야할 것은 이 하나님 나라의 오는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과 인간의 어떤 관계에 어떤 영향을 미치며 어떤 새로운 실재가 나타나는가에 집중되어 있다. 예수의 가르침은...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에게 오고 우리에게 주어지고 우리가 이어받고 우리가 그 곳으로 들어간다고 할 때에 성전에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람의 옛날의 속죄 제사로 화해함으로써 다시 옛날의 언약의 관계, 즉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이 언약의 관계가 회복되어서 다시 한번 화해가 일어났듯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의 화해, 인간의 그 죄사함, 그리고 인간이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이러한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주로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에 대해서만 말을 하지 하나님 나라에 와서 보면 하나님 나라가 이 세상의 어떤 사회적인, 경제적인 변화가 와야 되지 않느냐? 등의 이러한 것에 대해서는 거의 하나도 없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독특한 것중의 하나가 부정적으로 말한다면 social program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정치적인, 경제적인,사회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지난 번에 열혈당은 무슨 program을 가지고 있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와 관계시켜서 무슨 program을? 사회정의의 program을..그래서 어떻게 한다고 하였는가? 그래서 노예를 다 해방하고 빚을 다 청산하고...그래서 이들이 유대전쟁때에 예루살렘을 함락했을 때에 자기들의 하나님 나라의 vision을 이루는 줄 알고 무엇부터 하였다고요? 노예장부하고 빚 장부를 다 불태웠다고 하였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이런 것이 없다. social action program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해방신학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아쉬운 점일 것이다. 그래도 그 사람들은 예수가 그렇게 했다고 거짓말로 막 억지로 그렇게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없다. 예수에게 있어서는...
예수가 가르친바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또 어떻게 오느냐면 처음에는 조그만하게 온다. 보일락 말락하게 온다. 이것이 유대 무슨 묵시문학 같은 데서나 열혈당원들이 상상하는 것같이 무슨 세상을 뒤집어 엎는 위대한 커다란 혁명이나 무슨 벼락이 치고 난리가 나는 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아니라 조그맣게 보일락 말락하게 온다. 지금 내가 무슨 비유를 이야기하고 있는가?
겨자시 비유의 이야기다. 겨자씨 같이 온다. 또 어떻게? 누룩같이 온다. 처음에는 이렇게 보일락 말락하게 시작한다. 무슨 그러니까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대할 때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어떻게 하나님 나라가 온다고 하였나? 묵시문학가들은 무슨 천지개벽이 일어나는 것 같이 열혈다원들은 무슨 커다른 정치적인 대혁명과 위대한 작전으로 오는 것 같이 가르치는데 그것에 반응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온다고요? 겨자씨 같이 온다고 하였다. 누룩같이, 보일락 말락하다. 그러나 그것이 어쩐 다고요? 점차 커진다. 그것이 확실하게 커진다. 그래서 겨자씨가 커다랗게 커져서 큰 나무가 되어서 새들이 거기에 둥지를 만들어 산다는 것이다.
그런데 많은 학자들은 새들을 이방인으로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랍비들의 책에 이방인들을 새들로 비유를 많이 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 같은데 마치 겨자씨같이 처음에는 시작하는데 점점 커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새들이 와서 깃든다하는 말은 유대민족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들이 모두 하나님 나라에 와서 보호받고 축볼을 받는 그것을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처음에는 조그맣게 보일락 말락하게 시작을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커지고 있다는 말이다. 그것은 예수의 지금 자기의 행위를 두고 하는 말이다. 갈리리 시골의 조그마한 목수의 아들로서 제자 12들과 여자 몇몇을 데리고 처음 하나님 나라를 지금 시작하고 있다. 그것은 보일락 말락한 것이다. 로마의 위대한 힘이나 예루살렘 성전의 지배계증에 비하면 진짜 이것은 보일락 말락한 것이다. 아무 무의미하게 아주 조그맣게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확실히 확신한 것은 그것이 점차 커서 큰 나무를 이루어서 어쩐다고요? 모든 민족들이 새들이 와서 둥지를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예언이 맞았는가? 안맞았는가?
맞았다. 갈릴리의 조그마한 동네에서 몇몇 사람에 의해서 시작한 예수의 운동이 전 세계 만민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전달하는 그래서 세계 모든 만민들이 하나님의 통치 밑에서 구원을 얻는 그 일이 우리 가운데에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12제자들을 에수의 제자들을 12을 삼은 것도 재미있다. 그것도 새로운 이스라엘, 새로운 언약의 백성의 시작으로서 옛 언약의 백성의 이스라에릐 12지파의 상징적으로 상응하는 12제자를 모집한 것이다. 이것을 보면 예수가 또 이 하나님 나라를 또 백성의 개념으로 이해한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언약의 이스라엘로..
예서 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의 상응하는 새 이스라엘 백성을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12제자를 임명한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이렇게 이 세상 가운데에 무슨 천지개벽이나 커다란 혁명으로 오는 것이 아니고 이렇게 보일락말락하게 시작을 하기 때문에 당연히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면 하나님 나라의 안에서도 진정한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과 사탄의 자녀, 세상의 자녀들이 이 세대에는 같이 산다. 이것이 양과 염소의 비유이고 밀알과 가라지 비유가 아닌가? 최후 심판때까지 그들을 분갈할 수 없을 정도로 같이 자라는 것이다. 같이 자라요.
그래서 이 세상의 하나님 나라의 영역이 딱 여기있고 세상나라의 영역이 딱 여기 이렇게 따로따로 있는 거시 아니라 이 세상이면서 하나님 나라가 거기서 시작이 되엇 누룩이 퍼지듯이 겨자씨가 자라듯이 자라는데 그 하나님 나라의 영역에 세상의 자녀와 하나님의 자녀들이 같이 자라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최후 심판 때 그들이 확실히 색깔을 드러내고 갈린다 그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는 비밀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최후 심판 때에야 하나님 나라의 비밀의 비밀성이 확연히 드러나게 될 것이다.
또 그러면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하면 예수를 통해서 온다. 예수가 지금 가져오는데 그것은 지금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다. 마12;28을 보세요.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듯이 예수의 귀신 쫓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미 예수를 통해서 이 지상에서 실재가 되고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실재가 되고 있다는 증거이다. 예수의 이적들과 귀신 쫓아내는 것과 병고치는것들이 이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 사탄의 통치는 항상 그 증상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그 표증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악과 고난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통치는 항상 그 고난의 치유와 그리고 평화로 나타난다. 그래서 귀신을 쫓아내고 그러니까 사탄의 사자들인 귀신을 쫓아내고 하나님의 통치가 일어나는 가운데에 거기에 치유가 나타난다. 사탄이 가져온 고난이 이제 종식되고 치유함이 일어나고 거기에 평화가 있게 되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가 지금 예수를 통해서 지금 현재에 역사속으로 들어와서 지금 현재에 역사안에서 실재가 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데 예수가 어떻게 그것을 가져오느냐 하면 성령의 능력으로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곳곳에 하나님 나라의 현재성과 성령의 역사가 연결되어 있다. 지금 읽은 마12:28도 그러하다. 또 12:21도 그렇다. 막3:29/마12:32/요3:3,5/롬14:17/갈5:21ff/고전4:20 등에서 하나님 나라와 성령의 역사가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역사는 동시에 성령의 역사라고 할 수 있고 성령이 사탄과 더불어 싸우는 역사라고 볼 수있다. 그래서 예수가 이 하나님 나라의역사를 언제 시작하는가? 언제 무엇으로부터 시작하는가? 자기의 세례로부터 시작한다. 세례 때에 예수가 무엇을 받아요?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는다. 그래서 세례를 받자마자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시험을 받는다. 그 시험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사탄과 싸워서 승리하는 것이다. 그래가지고 공생애에 나서고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역에 나서는데 그것이 계속해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과 싸워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래서 성령의 능력으로 사탄의 사자들인 귀신들을 쫓아내고 사탄이 가져온 고난을 치유하고 병고를 치유하고 이렇게 한다.
그런데 결국 사탄이 예수를 어떻게 하는가? 십자가에 넘겨준다. 사탄이 누구에게 들어갔는가? 유다에게 들어가서 예수를 팔게해서 예수가 체포되고 심판받고 십자가에 넘겨주는그 darma의 주역이 satan의 도구이다. 그래서 사탄이 예수에 대해서 이렇게 최후의 발악을 했는데 그래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을 박았는데 결국 하나님이 이 예수를 살리심으로 사탄을 결정적으로 꺾었다. 사탄의 마지막 무기인 죽음을 이겼다는 말이다. 이것에 대해서 눅 22:3/요12:2,17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사역은 동시에 성령의 사역이라고 볼 수 있고 성령이 사탄의 권세를 꺾어가는 사역이라고 볼 수있다.
그런데 이 성령은 구약에서 종말에 모든 사람들에게 퍼부어질 것으로 예언되어 있다. 요엘서 2:28절에 보면 .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가 종말론적인 개념이고 성령도 종말론적인 개념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 하나님 나라와 성경이 같이 가는 것이 전혀 당연한 것이다. 자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온다. 자 하나님 나라가 결국 성령의 능력으로 오는데 인간의 무슨 보탬이 없이 하나님의 일방적인 행위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진다 그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시작하는가? 조그맣게 보일락말락하게 시작하짐나 점차 커서 온 민족을 모두 다 추복의 장에 끌어들일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하나님 나라는 무엇이냐?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의 교제의 회복으로서 성전의 원래의 기능이 완성되는 것으로써 사탄이 가져오는 고난이 해결되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요약할 수 있다는 것이다.
6)의도
그 다음 여섯번째로서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의 의도, 예수의 의도,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무엇을 할려고 하였나? 무엇을 이룰려고 하였나? 하는 그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것은 이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자이다. 청첩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도이다.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통치권 밑에서 떠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권 밑으로 들어오라는 청첩이며 부름이다. 진정으로 하나님의 그 통치가 의와 사랑이며 생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구신들을 쫓아내고 병고를 치유하는 그 능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과 같이 하나님의 통치는 의와 사랑이며 고난의 종식이며 건강의 회복이며 축복이다. 한마디로 구원이라는 것을 보여주면서 말로 선포하면서 또 이적으로 귀신 쫓아내는 것을 보여주면서 사람들로 하여금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탄의 지배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축복 밑으로 들어오라고 부르는 것이다. 청첩장을 발부하는 것이다. 초대장을 발부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즉 예수가 무엇하기 위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가? 종말에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기 위해서 사탄의 통치권 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통치권 밑으로 오는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그게 무엇인가? 하나님 백성이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을 모으기 위해서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다.
그래서 이것을 굉장히 강조해야 하는 것인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가 하면 종말에 하나님 나라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또 다른 지난 시간에 우리가 살펴본 예수의 독특한 가르침과 행동이 전적으로 일치한다. 지난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빠라고 부르는 것에서 예수의 무슨 자기 이해가 나타났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출 4:22-23절에 누가 하나님의 아들인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이제는 예수가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새로운 이스라엘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예수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으며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자기의 추종자들에게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있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아빠라고 하는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부름에서 나타나는 자기 이해가 두가지라고 하였다.
하나는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와 둘째로는 자기가 무엇을 하는 사람?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는 자라는 이해이었다. 어떻게?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재주므로써...
그러니까 예수의 이 아빠라는 독특한 기도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이것도 독특하다고 하였다. 독특한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 선포와 그의도에 있어서 똑같다.
예수가 무엇을 하는 분인가?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다. 가져와서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 나라 백성,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수있는 즉 하나님 나라가 가져온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받는다'는 동사이었다고 하였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하면 '상속받는다'는 말이다.
바울은 고전 15장에서 어떤 자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수없다고 하였는가?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유업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는 '받는다'는 것과 '상속받는다'는 것이 항상 같이 간다. 여기에서 상속받는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의 부요,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그게 누구의 것이니까? 내 아버지의 것이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무엇인가? 상속자가 아닌가? 이러한 모든 것이 다 그림언어이다.
그것이 무슨 소리인가? 우리 제한성의 한게성의 고난 받는 피조물들이 무한하신 하나니의 자원을 상속받는 것이다. 내것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한다 말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인간의 근본문제가 무엇인가? 피조물성이다. 한계성이다. 그것을 극복하는 길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무한함, 창조주의 무한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 나라를 받음으로... 사탄의 통치권에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 넘어감으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어서 우리 아빠 것을 내것으로 할 수가 있어서 내 지난번에 그 소리도 한 것 같은데?
그래서 왜 우리가 기도할 때 아빠라고 하다고 그래요? 벌써 우리가 이땅에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기 전에 벌써 하나님의 부요함을 끌어쓰기 위한 행위가 기도라고 하였다. 그래서 아빠라고 기도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 그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도 똑같다. 이것은 나중에 좀 살펴보도록 하겠다. 눅19:28절 보세요.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사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하리라"
이것이 누가 복음에 보면 눅22:29에 대응절이 있는에 이 대응절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대개 학자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여기에서는 누가가 옳다. 눅22:29절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12제자들에게 지금 약속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어서 새로운 창조가 일어났을 대에 그 때에 12제자들이 종말에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핵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핵을 이르고 이 패역한 이스라엘, 옛언약의 이스라엘을 심판하는 자리에 설 것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다.
막13:27
" 또 그때에 저가 천사들을 보내어 자기 택하신 자들을 땅 끝으로부터 하늘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
하나님 나라가 완성된 종말에 어쩐다구요? 하나님의 백성을 모은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는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에 있었다. 마8:11-12절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종말에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었을 때 어쩐다구요? 세상의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이 모여져서 하나님 나라에서 커다란 잔치를 베푸는데 그때에 이 에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그를 통한 이 청첩장을 제일 먼저 받은 자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이스라엘, 옛 언약의 백성들이다. 그런데 이 청첩장을 무시하고 거절한 그들은 어덯게 된다고 하였는가? 내어 쫓긴다고 하였다. 그 잔치상에 참여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될 때에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의 사방에서 모아져서 하나님의 잔치상에 참여해서 역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등 모든 선지자들과 같이 커다란 잔치를 베풀것이라는 그말이다.
지난번에 왜 예수께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즐겨 잔치로 비유하였다고 하였나? 왜 잔치로 비유하였는가? 그게 무엇을 상징하기 위해서인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부요함,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잔치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잔치는 거기에는 항상 무엇이 있는가? 기쁨이 있다. 거기에는 사귐이 있다.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관계회복이 있다. 사귐이 잇다. fellowship이 일어난다. 그래서거기에는 잔치에의 기쁨이 있다. 이러한 것들을 상징하기 위해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상징할 때 가장 즐겨쓰는 그림이 잔치이었다.
그래서 지금 읽안 마8:11 등에서본바와 같이 이렇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면 세상에서 사방에서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들, 종말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역대의 하나님의백성의 조상들과 역대의 하나님의 언약을 지킨 선지자와 더불어 커다란 잔치를 베푼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그런데 지금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해서 그 청첩장에 응해서 회개하고 제자에게 따르는 자들과 백성에게 무엇을 베풀죠? 먹고 마시는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의 행적의 특징중의 하나이다.
예수의 회개한 죄인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것, 하도 그것을 많이 해서 예수의 별명이 뭐라고요? 탐식자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고 그랬다.
예수의 이것이, 예수가 지금 하나님 나라 선포의 그 청첩장에 응한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에 대한 sign이다. 그림이다. 약속이다. 그것을 미리 연극으로 표시해서 깨닫게 해준 것이다.
눅12:32
"적은 무리여 무서월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버하시느니라"
이 적은 무리여. 여기에서 '무리'라는 말은 양무리라는 소리이다. 따라서 '적은 양무리여'이렇게 번역해야 한다. 여기에서 '양무리'는 항상 이스라엘 백성을 '양무리'라고 한다. 하나님이 '양무리'라고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칭호인 '양무리'를 이제는 누구에게 적용하고 있는가?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고 있다. 자기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한 자기 제자들에게 적용하는것이다. 그들에게 무엇이 주어진다고요? 하나님 나라가 주어진다고 하였다. 곧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서 삼으신다는 말이다.
옛 이스라엘 백성, 옛 언약의 백성이 이 하나님의 청첩에 응하지 않으므로 이 적은 무리들 이들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는 아들이라. 이와 같이 여러곳에서 예수는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즉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 그래서 구원을 받도록 하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의 궁극적인 의도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확실히 볼 수 있는 것은 예수가 그 당시의 활활 불타오르던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한 것을 볼 수가 있다. 아까 마 8:11절에 어떻다구요? 누가 하나님 나라에 와서 잔치에 참여하는가? 동서에서... 누까 좇겨나는가? 그 잔치에서? 이스라엘, 유대인들이.. 지금 방금 읽은 눅12:32에서도 누구에게 '양무리'란 하나님의 백성이란 칭호가 주어지는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 누구에게?그중에서 몇 사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사람들..
여기에서 하나니 나라를 선포하면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여하라고 초대장을 발부하니까 유대인들이 다 어떻게 하였는가?이 핑계, 저핑계로 다 피하였다. 결혼해서 못간다느니, 무슨 소를 사서 못간다는니....그래서 하나님이 화가 나서 어쨌다구요? 종들을 보내서 골목골목 가서 앉은뱅이, 무슨 병든자 다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유대의 민족주의를 완전히 배격하고 이 하나님 나라의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운 백성을 유대민족에서만 모으는 것이 아니라 세계 만민중에서 모은다는 것이다는 사상이 강력히 나타나며 도리어 이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는 심판과 버림이 있다는 것을 아주 강력하게 나타난다.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 중에 아주 강력히 나타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때가 메시야 시대의 때가 임하면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높임을 받고 이방인들을 심판해서 이방인들로 하여금 유대인을 섬기는 종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예수는 그것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었다. 유대인들이라고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그 몇 사람과 또 어느 민족에게서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자들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데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대체로 예수의 청첩장에 응하지 않음으로 그들이 도리어 심판을 받고 던져버림을 받을 것을 예수가 경고하시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이 유대민족주의와 아주 반대되는 가르침을 하였다. 그래서 이 하나님 나라 선포를 올바로 하면 민족주의를 내세울 수가 없다. 어느 민족이나..그런데 지금까지의 교회사를 보면 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이 각 민족 민족주의와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아주 깊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마치 한국사람이 새로운 이스라엘인양 주장하고 지금도 많이 그렇게 선포하고 다닌다. 여러분의 겨단이 원래 합동과 본류 아닙니까? 거기에서 늘 하던 게 무슨 아시아의 장자교단, 그런말 어디 있어요? 그런 엉터리가 어디가 있겠어요? 옛날 일정때에 하던 버릇이 지금까지 계속이 된다. 옛날 일정때에 일본 사람에게 억눌리던 우리 백성들이 성경을 어떻게 읽었느냐면 구약의 출애굽하는 이스라엘에게 거기의 '이스라엘'을 빼고 '한국'을 넣어서 읽었다. 그래서 하나님이 한국백성을 출애굽시킨 것으로..그래서 한국 사람들이 이스라엘의 후예로 이렇게 늘 성경을 읽어왔다. 지금도 그렇게 한다.
옛날에 내가 외국 학생들을 데리고 한국의 기도원이 어떻게 생겼나 해서 가보라고 해서 저기 동두천에 갔더니 거기에 완전히 출애굽의 상황을 해 놨었다. 무슨 '구국기도'라 해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출애굽한 것 같이 오늘날 새로운 모세가 한국을 출애굽시켜야 되고 구원시켜야 되고 그것을 위해서 기도해야 된다고 해서 작뜩 써 붙였더라고.
그런데 그것은 한국사람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영국 사람들도 한 동안 자기들이 진정한 이스라엘의 후예로 보았다. 독일 사람들도 그렇다. 미국에 이주간 사람들도 처음에는 다 그랬다. 자기들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 백성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민족주의를 늘 이렇게 연결시켜서 생각하기를 좋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이렇게 배태적으로 사용하기를 좋아하는데 그것은 예수의 가르침과는 전혀 아긋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하면 벌써 보편주의, 사해동포주의, 세계만민을 포함하는 인종과 피부색을 초월해서 하나님의 온 우주를 창조하고 온 인류를 창조해서 이룩한 하나님의 나라인데 그것이 어덯게 해서 여기 한 민족, 여기 영국 사람, 여기 독일사람, 여기 미국인으로 생각을 하겠는가? 그래서 민족주의라는 것은 도대체 맞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개념과는...
마16:18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여기에서 베드로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신앙고백한 베드로에게 약속을 하고 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를 줄 것이며 그 위에 자기 교회를 세우겠다. 그래서 이 교회가 히브리어의 을 번역한 것으로써 이 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인 사태를 두고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께서 이 가르침에서도 마16:18에서도 옛 이스라엘은 이제 제쳐놓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하나님의 백성으로의 모임, 를 세울 것을 약속하고 있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교회가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들이 사탄의 주권을 버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함으로 모인 종말의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인데 그들이 아무리 완성을 기다리는 이 세생에서 죄악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나타나고 그들이 또 하나님의 통치를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그 통치와 더불어 오는 하나님의 받고 있다는 의미에 있어서 이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의 지상에서의 표현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그러면 교회,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삶의 원칙은 무엇이냐 하면 제자도와 섬김이다.
막10:32-45절을 보세요.
거기는 우리가잘 아는 장이다. 거기에 보면 예수께서 이제 자기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를 이룰 것인가를 설명하니까 이 유대의 하나님 나라 사상에 찌들은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요한과 야고보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가 오면 국무총리가 되고 내무부 장관이 되겠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거기에 질세라 다른 제자들이 분해서 화가 나가지고 네가 공로를 더 세웠느냐? 내가 더 세웠지. 그러니까 내가 국무총리감이지 하고 다투었다.
거기에 대해서 예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42절부터 보면 제자들을 불러가지고 이르기를 이방인들, 세상의 통치자들, 세상의 큰 자들, 세상의 힘있는 자들은 남들을 지배하고 통치하고 억누른다. 그런데 너희들 중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들이 지금 누구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새로운 공동체,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의 핵인 제자들, 그러니까 그들이 무엇인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그 공동체에서는 그런 ethos가 통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새로은 상황의 공동체의 ethos는 무엇이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어떻게 되어야 하고? 작어져야 하고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의 도, 세상의 ethos와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여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의 ethos가 180도 다르다.
세상의 ethos는 자기 주장하는 것이 그 원칙이다. 자기를 남위에 주장을 해서 남을 자기의 종으로 삼는 것이 세상에서의 삶이요 방법이다. 이 세상에서 성공했다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주장 성공적으로 했다는 이야기다. 이 세상에서 누가 대통령이 되는가? 총칼 가진 놈을 많이 지휘하는 놈이 대통령이 된다. 이 세상에서 누가 부자가 되는가? 남을 잘 속이고 착취를 많이 하는 자가 부자가 된다. 이렇게 자기 주장을 한다.
따라서 세상의 ethos는 무엇이냐 하면 남위에 군림하는 남에게 자기를 주장해서 나위에 군림하는 것이 세상의 ethos이다. 그래야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높다고 하고 귀하다고 하고 아름답다고 한다. 귀하신 몸이 이 세상에서는 어떤 몸이신가? 남을 막 짓밟는 몸이 귀하신 몸이라고.. 남에게 막 짓밟힌 몸은 귀하신 몸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아름답다고 하는 놈이 누누구인가? 부라는 것이 옛날 한국사람들이 추구하던 부귀,장수 이러한 것이 다 무엇인가? 이것이 다 세상의 ethos이다. 그것은 자기 주장하는 의지를 성공적으로 행사함으로써 이 세상에서는 성공했다고 하고 귀함을 얻고 존경을 얻고 부를 얻고 그렇다. 즉 이 세상에서의 행복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러한 것에 대해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것은 이방인이 추구하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세상의 백성의 삶의 도이며 삶의 길이라는 것이다.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고 새로운 백성의 공동체에서의 ethos는 무엇인가?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섬김이 무엇이냐? 여기에 대해서 45절에 자기를 예로 들어서 섬김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self-giving. 세상의 eths는 무엇이었는가? 영어로 self-assertion이었다. 자기 주장이었다. 남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예수가 새롭게 창조하는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의 공동체에서는 그 ethos가 무엇이냐 하면 섬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섬김은 무엇이냐 하면 자기를 내어주는 것이다.
인자가 무엇하기 위해서 왔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내어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가 이제 새롭게 창조하는 하나님 백성의 종말의 백성의 공동체의 삶의 방법이고 ethos이다.
7)하나님 나라와 예수
자 일곱번째 하나님 나라에 예수에 대해서 살표보자.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것에 의해서 분명한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agent로서 그의 선포와 그의 사역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 속으로 들여오고 그 하나님 나라의 구원의 힘이 실재로 나타나게 하고 그렇게 하여 하나님의 통치가 실재가 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예수는 하나님의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은다.
이렇게 보았을때 하나님 나라는 '예수 안에서' 그리고 '예수를 통해서' 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짊어짐(bearer)이다. 하나님 나라를 짊어짐이다. 하나님 나라를 bearer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나라가 나타내는 종말론적인 구원의 bearer를 가져오시는 분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는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고 누가 들어갈 수 없는가의 조건을 내세울 수가 있었다.
지난번에 간접기독론을 할 때 예수의 권위주장 중의 하나가 이것이라고 하였다.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없느냐의 조건을 예수가 제시하였다고 하였다.
즉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기 위해서는 어린아이 같아야 하고(막10:15) 이 세상을 버리고 자기의 제자가 되어야 하고(막10:17-31) 또는 산상수훈에서 제시된 여러가지 가르침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으로 예수가 제시하는데 이렇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느냐면 예수 스스로가 하나님 나라의 vearer이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우리는 지난번에 간접 기독론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가 이같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그 구원위를 주장했다는 것도 엄청난 놀나운 일이지만 그 조건이 자기에 대한 제자도로 나타난다는 것은 더더둑 놀라운 것이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이 전권대사라는 자기 이해 즉 하나님의 plenipotentiary를 하나님의 전권대사라는 자기 이해를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것을 구약과 유대교의 언어수단을 통해서 표현한다면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나타내고 있다는 것이다.
8)하나님 나라와 예수의 죽음.
예수는 하나님 나라와 그 구원을 가져오신 분인데 궁극적으로 자기의 새속의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왔다. 즉 자기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가져온다. 그래서 여기서 분석해보려고 하는 것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 마가복음 14:17-25까지 읽어보세요.
한마디 한마디 주의해서 읽어보세요. 최후의 만찬의 말씀은 두가지의 판이 있다. 최후의 만찬은 우리가 4가지로 전수되어 있다. 세공관복음에도 나타나고 고전 11장에도 나타난다. 그런데 그 4가지 전승이 크게 2가지로 나타난다.
막-마 | 눅,바울
그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가거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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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oe to that man throug who the son of man is delivered
하나는 마가,마태판이고 하나는 누가,바울판이다. 그래서 이 마가,마태판은 아주 비슷하다. 거의 똑같다. 누가와 바울판은 또 상당히 비슷하다. 그러면서 또 누가와 바울판은 마가와 마태판과 다르다.
이처럼 최후의 만찬의 전승이 4가지로 전승이 되는데 크게는 이렇게 두개의 전승으로 보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 나이를 먹었느냐 이것이 나이를 많이 먹었느냐를 가지고 이제까지 학자들의 연구가 많짐나 해결이 나지 않는다. 어떤 교수는 이것이(막-마) 나이를 더 많이 먹었다고 하고 어떤 교수는 눅-바울이 더 나이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결하기가 아주 어려운 부분이다.
그런데 하여간 우리는 이 마가판을 지금 보자 이말이다.
자 여기의 21절이 최후의 만찬에서 주님의 말씀을 여는 말이다. 거기에 인자는 '그 사람의 아들은 그에게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이렇게 되어 있다. 자 기록된 대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가거니와....그런데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아주 어렵다. 어순이 번역하기가 정확히 어렵다. 영어는 헬라어와 어순이 비슷해서 번역하면 좋은데 우리만은 그렇다. 우리 말로 거기에는 어떻게 되어 있는가?
영어로 써 보자. woe to that man through who the son of man is delivered 여기에 소위 word play라는 것이 있다. word play가 무엇이냐? 영어로 pun이라고 한다. 비슷한 말이 전혀 다른 의미를 가지면서 웃기는 것이다. 그런 것을 word play라고 한다. 또는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할 때 잘 사용한다.
지금 여기 that man은 누구를 두고 하는 이야기인가? 유다를 지칭한다. '그를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 이제 넘겨줌을 받는데 그 사람에게 저주가 있을 지어다'인데 the son of man이란 말도 숙어적으로 하면 '그 사람'이라는 that man의 뜻이다. 이 문장에서 그 사람....그 사람..이것이 word play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의 만찬을 여는 이 말씀이 뭐라고 시작되느냐면 '그 사람이 간다'고 시작되고 있다.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중의 하나가 알쏭달쏭하게 가르치는 것이다. 이것을 라고 한다. 수수께끼라는 말이다. 그래서 비유도 그 중에 포함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앞의 말투도 에 해당한다. '간다'느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예수가 간다고 하는 이 말이.... 그것은 자기의 죽음을 두고 한 소리이다.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로써 성경에 기록된 대로 예언된 대로 죽는다는 말이다. 그것을 좀 더 알쏭달쏭하게 간접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자기 제자들은 그 말을 알아 들었다. 왜? 하도 같이 오래 있으니까. 그런데 어떻게 해서 가느냐? 한 사람이 그를 배신해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봐야할 때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여러 곳에서 예고하는데 예고할 때마다 꼭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고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 마다 예수는 자기의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을 사용하여 '내가 죽는다거나 간다'고 하지 아니하고 인자가.. 그렇게 한다. 아까 막10:33에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넘겨줌을 받아서..' 45절도 마찬가지이다. '인자가 온 것은 뭐하러? 자기 몸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기 위하여'라고 하고 있다. 이처럼 예수는 죽음을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면 왜 그러느지는 다음시간에 볼 것이다.
그러면 우선 그것만 염두에 두고 그러면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
그러면 죽음이 이제 내일 다가온다.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보았을 때 내일 죽음이 다가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이제 그 제자들에게 미리 설명해 준다. 설명을 하는데 어떻게 하느냐면 우선 연극을 한다.
연극을 한다. 이 떡을 떼는 그 제스쳐, 그 행위, 그리고 빨간 포도잔을 붓는 제스쳐를 한다. 그런데 이 연극이 두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는 떡을 떼는 일 그리고 부수는 일, 하나는 잔을 붓는 일, 포도주를 붓는 일, 이렇게 연극의 제스쳐에 무어가 붙었느냐면 설명어가 붙어 있다.
+-떡을 부수는 일+설명어
연극+-잔을 붓는 일+설명어
이것은 무엇이라?(떡) 너희를 위해서 부서지는 나의 몸이라. 이것은 무엇이라(포도주) 이것의 붓는 설명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에 대해 우리가 집주적으로 분석하고 있는데 24절, 이것은 무엇이라고요?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24절)' 마가판은 이렇게 되어 있다.
누가,바울판은 이것이 좀 다르다. '너희들을 위해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언약이라'이렇게 되어 있ㄷ. 누가, 바울판에는...많은 사람들이 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 언약이라. 이것이 잔이므로 새언약의 상징이라. 거기에 비해서 마가, 마태 판은 ' 이잔이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이고 누가,바울판은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로 되어 있다.
어순이 다르므로 이렇게 조금씩 다른데 그러나 의미는 똑같다.
어떤 것이 더 나이를 많이 먹었고 어떤 것이 더 부드럽게 표현한 것이냐?를 따지는데 내가 보기에는 마가,마태 판이 더 나이를 많이 먹은 것 같다. 하여간 이것이 잔의 말씀을 설명해주고 있다. 이것을 소위 잔의 말씀이라고 한다. 왜? 잔을 붓는 일의 설명어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런에 이 연극의 제스쳐나 설명어나 모두 다 같이 무엇을 설명하느냐면 그 사람의 아들로써 가는 것을 설명한다.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이렇게 연극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 죽음의 의미가 무엇이냐 하면 잔의 말씀만 분석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어약의 피'이다. 그러며 이게 무슨 말이냐? '많은 사람을 위하여서 흘리는'이 말은 이사야 53:1-12절에서 왔다. 거기에 보면 고난받는 종이 많은 사람을 위해서 마태복음에서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영혼을 흘린다는 말을 사용하였다. 내어 쏟는다. 내어 쏟아 흘려서 그들을 하여금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 쓰여있다.
즉 주의 고난 받는 종이 곧 대속의 죽음, ,곧 속죄의 제사로 자기를 내어주어서 자기 영혼을 내어 쏟아서 많은 사람들에게 속죄하고 의롭게 함을 입게 한다는 내용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사야 53:10-12까지를 인용을 해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바로 그 이사야서에 있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면 '언약의 피라'는 어디에서 왔느냐? 이것은 아주 풍부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첫째로 우리가 무엇을 상기하게 하느냐면 출24장에 보면 19장,14장,34장에 보면 모세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과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 시내산에서 언약을 세우는데 언약의 제사를 드리고 그 피를 모아져 있는 이스라엘 공동체 에 뿌리면서 무어라고 부르짖는가? '언약의 피라' 그렇게 부르짖는다.
그러니까 이 말은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모세가 세운 그 옛언약에 상응하는 그 옛 언약의 후형, typology에 상응하는 새언약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의 죽음이 모세가 sinai에서 제물을 바쳐서 세운 옛언약에 상응하는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본 것이다.
또 아까 누가,바울 판에는 이것이 무엇이라고 쓰여져 있다고요? '나의 피로 세운 또는 피로 인한 피가운데 세우는 새언약이라' 여기에 '새'자가 들어간다. 이것은 벌써 이속(마가판)에 들어 있는 말이 조금 더 분명히 한 것에 불과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나는 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여기 분명히 새언약이라고 하였다. 왜? 모세가 세운 언약에 대응해서 상응하는 언약이기 때문에 새언약이다. 그래서 이것이 렘31:33절에 나오는 위대한 새언약에 대해서 나오는데 예리미야서에서는 패역한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고 종말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신다고요? 새언약을 종말에 세운다고 하였다. 그 예레미야서의 새언약에 대한 예언을 가르친다. 그런데 이 부분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고 이사야서 42:6/49:8에도 근거하고 있다.
이사야서 42:6절과 49:8절에 보면 주의 종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는 예언이 있다.
이사야 42:6절,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즉 내가 네 손을 잡아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8절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도대체 이 언약을 세우는데 짐승의 피로 세우지 않고 인간의 제물로 세운다는 사상은 여기의 최후의 만찬에 밖에는 안나온다. 예수의 이 가르침 밖에는 없다. 그래서 그것에 대한 제일 가까운 구약적인 배경이 이사야서의 주의 고난받는 종에 대한 것이다. 주의 고난받는 종이 속죄의 제사만을 위해 시험만을 위해 보내어진 것이 아니고 새 언을 세우는 제사로 보내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언약의 피'라는 말이...
요약하면 무슨 말인고 하니 예수가 체포되어 처형받고 십자가에 달려 있기 전날 밤에 제자들을 모아놓고 최후의 만찬에서 지금까지 자기가 해왔던 모든 것의, 잔치의 종합,완성, 종결의 잔치를 하면서 거기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 두마디로 요약될 수 있는데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며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여기서 많은 사람들이란 의미의 이란 소리는 히브리어의 숙어이다. '모든 사람들을 위한' 이란 뜻이다. 히브리말에는 추상명사가 없어서 이런 말로 그런 추상명사를 삼았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란 소리는 '모든 사람들' 이란 소리이다. 모든 사람, 모든 인류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일이라고 본 것이다.
즉 자기가 내일 당할 죽음이 대속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설명을 한 것이다.
자 그러면 대속을 하면 무슨 결과가 나타나요? 제사와 덕을 입는 사람들의 죄가 용서된다. 그래서 하나님과 화해가 일어난다. 언약을 세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요. 언약을 세우면 항상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이것이 언약의 형식이 아닌가? 그래서 언약을 세워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되었듯이 예수가 새언약을 세움으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핵이 누구냐하면 거기의 만찬석에 둘러앉은 12제자들인 것이다.
옛 언약 백성 이스라엘에 상응하는 이스라엘의 12지파의 조상에 상응하는 12제자인 것이다. 그래서 유대가 빠졌지만 이 12이라는 말이 전문어어가 되어가지고 심지어 바울도 12라고 칭하고 있다. 실제로는 11밖에는 없는데....
그래서 예수의 자기 죽음이 무엇이냐 하면 속죄의 제사이며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인데 이 죽음을 통해서 어떤 결과들이 오는가 하면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한 새로운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러니 예수의 죽음이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와 결부해서 생각해볼 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의도를 성취하는 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죽음인 것이다.
신약신학 5강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궁극적인 의도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이었다.
그러면 예수의 이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 어떻게 관계가 되는가? 하는 것은 아주 신학적으로 중요하다. 그것이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는 것은 공관복음서에 보면 이 예수의 중심 메시지가 하나님 나라 인데 사도행전의 설교를 넘어서 서신으로 가면 벌서 사도행전에 나타나는 사도들이 설교의 요약부터가 하나님 나라는 거의 등장을 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그 중심 메시지이다.
그래서 성경을 좀 자세히 읽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벌서 평신도에게라도 그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어떻게 된 셈인지 그의 제자들과 그의 사도들이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이어받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그 중심 메시지로 보았나? 하는 이것은 아주 단순한 질문인것 같지만 우리 신약신학의 근본문제가 그 속에 있다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어떻게 the preached, 하나님 나라의 선포자가 사도들에 의한 선포의 대상이 되었나? the preached, 예수가 누구인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분이었지?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이 복음서를 넘어가면서 사도행전에 들어가면서부터 예수가 선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하겠는가?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소위 역사적인 예수, the Jesus of history, 이 역사적인 예수가 어떻게 이 신앙고백과 이 선포의 그리스도가 되는가? the Christ of faith and kerygma. 신앙의 대상이되고 선포의 대상이 되느냐?
예수는 하나님의 통치를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고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그리서 그 예수의 선포의 내용은 하나님 나라이었다. 어떻게 보면 하나님 나라 자체라고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통치하심 그리고 하나님의 아버지되심. 그런데 사도들에 의해서는 하나님 나라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무엇만 나오는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만이 나타난다.
Jesus:the preacher ----------- the preached
the Jesus of history ----------- the Christ of faith and Kerygma
하나님 나라 ----------- 십자가와 부활
특히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있다. 이것이 서로 어떻게 연관이 되었나? 를 논하는 것이 기독교 신학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이다. 기독교의 신앙이 어떻게 발생하였나 하는 것이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위의 그림에서 양쪽 간에 근본적인 단절로 보았다. 예수와 그의 교회, 그의 사도들간의 근본적인 단절로 보았다.
그래서 그 유명한 자유주의 신학을 총결산했다고 할 수있는 벨른 대학의 A. Von Harnack은 위의 관계를 한마디로 표현하기를 이렇게 말하였다. 예수의 복음에는 하나님만 속하지 그의 아들은 속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수의 원래의 복음에는 하나님의 통치하심과 하나님의 자비로운 아버지되심만 그 내용이었는데 나중에 사도들이 와 가지고서 또는 나중에 교회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원래의 복음에 덧붙였다는 것이다. 아니 이것으로 원래의 복음을 대치시켰다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대치했느냐? 자유주의 신학자에 의하면 역사적인 예수와 관계없이 헬라의 종교사적인 영향을 받아가지고 헬라 기독교에서 이와 같이 전혀 새로운 기독교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진짜로 전혀 역사적인 예수와 관계없는 발달로서 이것은 합법적인 것이 못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았다.
이러한 관찰방법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또는 최근에 새로 부활되는 유대신학에서 계승되고 있다. 그래서 자유주의 신학이나 유대신학에서는 이 예수는 유대교의 카테고리에서 충분히 이해될 수있는 유대교에서 선지자나 랍비정도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역사적 인물이다. 선지자나 선생으로서 충분히 이해될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신앙을 하고 그를 선포하고 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것이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의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여가지고 자유주의 유대교 신학자들이 보수주의 유대교 신학자들은 예수에게 관심이 없고 무조건 옛날 식으로 정죄하는 태도만 취하는데 자유주의 유대교 사람들이 예수에 대해서 관심을 많이 보인다.
그들은 사실 예수가 유대교에 속한다고 본다. 그래서 요새 자유주의 유대교 사람가운데 이런 운동이 소위 독일말로 Heimholung Jesu라한다. 예수가 본래 유대교의 선지자이고 랍비이고 지도자인데 지난 2000년 동안 기독교에 납치되어가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예수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된다고 한다. '고향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 그말이다. 그래서 이 Heimholung 란 말이 '집으로 다시 데리고 온다'는 의미이다. 지금까지 예수가 너무 오래 기독교에 납치되어가 있었다. 그래서 다시 집으로 데리고 와야 한다는 것이다. 영어로 굳이 번역한다면 bringing Jesus home 이러한 운동이 일어난다.
Bultmann도 예수는 세례요한과 똑같은 유대교에 속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의 관계, 나중에 그의 사도들이 그들의 중심 메시지로 삼는 그의 죽음과의 관계는 이 기독교 신앙의 근본문제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와 같은 관찰이 법에 억눌려서 또 이와 같은 관찰을 해석할려는 자유주의 학자들에 경향에 억눌려서 이 관계는 별로 분명히 밝히지 못했다.
그래서 신약학자들 중에 온건하고 보수적인 학자들, 가령 스코틀랜드의 I.H.Marshall같은 사람들, 또 M. Hengel 같은 학자들이 기껏해서 이것에 대해서 변명을 하면 무슨 말투로 하느냐면 위의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와 사도들이 선포한 예수의 죽음과의 관계를 너무 완전히 다른 것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그런 식의 문장 한두개를 쓰므로 어떻게 좀 이것의 어려움을 완화해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 오늘 우리의 과제이다.
그러면 어떻게 연결되어 있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과는 어떻게 관련이 되어 있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그것을 보기전에 먼저 우리가 복음서에서 하나 관찰할 것이 있다. 마가복음을 가령 보면 막8:27-31이 마가복음의 분수령이다. 여기가 뭐하는 곳인가? 베드로의 신앙고백, 베드로의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신앙고백이다. 마가복음 8:29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오고 31절에는 뭐가나오는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고 있다. 거기가 첫 예고이다. 그 뒤부터는 자기의 죽음이 자꾸 예고된다. 9:9/9:12,31/10:33,45/14:17ff 등등 예수의 죽음이 자꾸 예고된다.
이전에는 예수의 메시지가 저부 하나님 나라이었다. 이전에는 예수가 주로 공중에서 설교를 함녀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다. 그런데 마가복음 8:27-31의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분수령으로 해서 톤이 달라진다. 이제 예수의 설겨의 주제가 무엇이냐 하면 예수의 죽음에 관한 것이다.
그러니까 벌써 이 복음서와 사도행전이나 서신서간의 관게가 어떻게 되느냐를 물을 것이 아니라 벌써 복음서 내에서도 이것이 문제가 된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던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는데 그러면 자기가 지금까지 선포하던 하나님 나라와 다가올 자기의 죽음이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우리는 무엇을 염두에 두어야 하느냐면 예수의 지난 시간에 관찰해 본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긍극적인 의도, 그의도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그의 의도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라고 하였다. 그것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러면 에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를 살펴봄으로써 그 의도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를 우리가 살펴보겠다.
자 가령 예수가 이제 막8:31.9:31.10:33 에 아주 대표적으로 예고한다. 많은 학자들은 이 막 8:31/9:31/10:33절을 한 예고로 본다. 9:31절이 가장 원어적으로 되어 있는 한 예고로 보고 8:31과 10:33절은 똑같은 판의 되풀이로 본다.
물론 과격파 자유주의자들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다는 것도 다 부인한다.
그러나 예수는 죽음을 여러번 예언하였다. 그런데 대부분 간접적으로 하였다. 그런에 이제 막8:31/9:31/10:33에 나오는 이 예고에서는 아주 직접적으로 하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에는 항상 '인자'라고 하였다. '그 사람의 아들'이 죽는다고 하였다.
그래서 자기의 죽음을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죽음이라고 가르쳤다.
그러면 예수가 자기 죽음의 뜻,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뜻을 가장 이제 잘 밝힌 것이 언제이냐 하면 최후의 만찬 때이다. 최후의 만찬은 이제 예수가 체포되어서 죽기 하루 전날 성전에서 이제 소란을 피워서 곧 체포되어서 죽기 하루전날 성전에서 이제 소란을 피워서 체포되기 하루 전날 그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제자들과의 마지막 만찬은 예수의 특색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회개한 세리와 창기들과 먹고 마시는 천국의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의 지상에서의 실현으로 회개한 죄인들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죄인들과 같이 먹고 마시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 일련의 지상에서의 만찬의 종결로써 그리고 완성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대한 예고로써 최후의 만찬을 베풀었다. 거기서 예수는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임박한 죽음의 의미를 연극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미리 drama를 해석을 한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그래서 이 drama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하나는 행위의 gestures가 있다. 이것은 무엇인가? 떡을 부수고 빨간 포도주를 붓는 gesture가 있다. 떡을 떼는 체스쳐와 포도주를 붓는 제스쳐가 있다.
또 하나는 거기에 무엇을 부착하였느냐면 설명의 말를 부착하였다. 그래서 떡을 떼는 제스쳐에 떡의 말씀, 그리고 잔을 붓는 제스쳐에 잔의 말씀의 소위 영어로는 bread saying 과 cup saying 이라고 한다. 잔의 말씀을 부착하였다. 떡을 떼면서 뭐라고 하였는가? '이게 부서지는 나의 몸이라' 잔을 부으면서 뭐라고 하였는가? 이것의 나의 피에 세우는 새언약이라.
그런데 여기에는 두개의 판이 있다. 최후의 만찬의 전승에는 4가지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공관복음에서 3개가 나오고 고전 11장에 나온다. 그런데 이 4가지가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런데 크게 두가지로 구분할 수가 있다. 하나는 마태, 마가판이고 하나는 누가, 바울판이다.
마태,마가 | 누가,바울
이것이 많은 사람을 | 이것이 너희들을
...언약의 피라 |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 마태와 마가판은 아주 비슷하다. 그 다음에 누가와 바울판은 조금은 차이는 있지만 중요한 일에 있어는 크게 일치한다. 그래서 전승을 보통 2가지 종류로 분류한다. 이 잔의 말씀에 있어서 두가지의 전승에 있어서 차이가 난다.
마가판에 의하면 '이것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이렇게 되어 있다. 누가,바울 판에 의하면 '이것이 너희들을 위하여'로 되어 있다. '많은 사람'이아니라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그렇게 되어 있다. 하나는 이것이 '흘리는 언약의 피라' 고 되어 있고 하나는 '흘리는 피로 세우는 새언약이라'이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하나는 '많은 사람을' 말하고 하나는 '너희들을'을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렇게 차이가 나는데 그래서 주님의 최후의 만찬의 전승이 두가지인데 마가 마태판이 더 오래된 것이냐? 즉 원형에 더 가까운 것이냐? 아니면 누가 바울판이 더 오래된 것으로써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까운 것이냐의 논란은지금가지도 해결나지 않고 있다.
어떤 문서는 분명히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고 어떤 문서를 보면 누가 바울판이 더 오래되고...그령 그러면 어떻게 결정하느냐? 이 마태, 마가판과 누가,바울판의 잔의 말씀에 있어서 두드러지게 다른 점이 두가지있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져 있다. 그런데 이 누가판에 의하면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쓰여져 있다.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을까? 어떤 점이 더 원어에 가까울까? 할때 많은 학자들을 쉽게 그점에 있어서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의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히브리어 숙어라고 볼 수있다.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이다. 히브리어에는 '모든'이란 말이 없으니까 '많은'이란 말을 '모든'이란 말로 대치해서 사용한다. 그래서 많은 이란 말은 곧 '모든 사람을 위해서'흘렸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여기의 '너희들을 위해서'는 어떻게 '많은 사람을 위해서'가 '너희들을 위해서'로 변했느냐? 하는것은 쉽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예배용어에 있어서는 아주 용어가 personal해진다. 그래서 '우리들을 위해서''너희들을 위해서'이렇게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나타내 강조하는 것이 예배용어이다.
그래서 벌써 최후의 만찬이 성만찬으로 예배의 의식에 많이 사용되는 것으로 벌써 나타낸다. 그래서 이런 점에서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예수님의 원어에 더 가까운 것이고 '많은 사람을위해서'라고 하였지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것은 금방 알 수가 있다. 그러면 또 다른 점이 하나 있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은 '나의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하였고 누가,바울 판은 '너희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새언이라'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그 점에 있어서는 어느 판이 더 오래되었을까?
또 이것을 생각해보고 비판해 보아야 하다. 그때는 이것에 대해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내가 이것을 소개하는 것은 어떻게 신학자들이 사고하는가를 보여줄려고 그렇다.
어떤 학자들은 그 점에 있어서는 마태,마가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한다.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언약의 피라'
유대인들에 있어서 제일 무서운 것이 무엇이냐 하면 피를 마시는 것이다. 예수가 유대인들인 자기 제자들을 향하여 빨간 포도주를 부으면서 '이것이 피이니까 마셔라'고 이렇게는 하지 않했을 거라고 말한다. '이것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에서 잔은 언약이라고 하였지 피라고 이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누가 판이 그것에 있어서 예수가 어떻게 차마 자기 제자들 앞에서 이러한 피를 마시라고 하였겠는가? 다들 유대인들인데....
그래서 누가,바울판이 더 오래되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생각한다. 즉 예수나 되니까 이것이 피라고 하고 피를 마신다하고 가르쳤는데 나중에 유대제자들이 처음에 예수 제자들이 다 유대인들이 그것이 거리끼니까 그것을 살짝 돌려가지고 피로세운 새언약이라고 변경했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즉 예수나 되니까 그렇게 도전적인 그리고 분명한 확실한 말을 먼저 했고 제자들은 그점에 있어서 조금 예수보다 못하니까 조금 바꾸었을 것이다.
그것은 조금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있다. 그런데 그거 가지고 그냥 싸운다구요.
그래서 이 누가의 전승이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느냐? 어느것이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깝는가? 하는 것에 대해 책들도 많이 쓰이고 한다. 그런데 그런 것은 어떻게 보면 다 헛수고이다. 누가, 바울 판이나 마태,마가판이나 그 의미는 다 똑같다. 그 어순이 조금 바뀌었다고 해서 의미가 하나도 틀려지지 않는다. 의미는 똑같다.
그러면 여기의 잔의 말씀에서 우리는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의 진정한 의미를 미리 설명해주고 있다. 그런데 그것을 이렇게 drama로 극으로 표시해 설명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드라마를 분석함으로써 에수가 자기 죽음을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마가복음 10:45절의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무로 주려 함이니라' 이말도 많은 학자들은 원래 이 말도 예수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것으로 본다. 이것의 일부 병행절, 전체가 아니라 일부 병행절은 눅22:27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는데 이것은 분명히 만찬석상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많은 삭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고 다른 상황에서 이야기한 것으로 본다.
그런데 나는 내 책에서 주장하기를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의 다가오는 죽음의 의미를 설명해주는데도 깨닫지 못한 제자들이 서로 누가 높냐고 주장하니까 이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자기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번 요약하는 것이다(막10:45)
그러니까 막10:45절이 예수가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을 다시 한번 요약한 것으로 본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두잔의 말씀 막14:24절의 잔의 말씀과 막10:45의 말씀을 분석해보면 예수의 자기 죽음에 대한 의미를 금방 알 수가 있다. 그것을 명료하게 알 수가 있다. 그러면 14:24절에 있는 잔의 말씀을 한번 분석을 해보자.
우선 마가복음 판을 따로 따로 보자.
그래서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그 소리는 어디서 왔느냐면 그 소리는
①이사야서 53:10-12절에 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그러니까 에수가 자기의 죽음을 구약에서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주의 종의 역할을 성취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사야서 53장에 예언된 고난받는 주의 종은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매맞음을 당하고 궁극적으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거기에서 '많은사람들'이란 가르침이 나온다. 거기에서부터 많은 사람들이란 말이 자꾸 나온다. 5번이나 나온다. 쏟아,흘려서,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것이다. 대속의 제사를 드림으로써 그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되게 한다는 이야기이다. 주의 고난받는 종이 죄인들을 위해서 대신 매를 맞고 궁극적으로 자기의 목숨을 대속의 제사로 쏟아서 흘려서 많은 죄인들을 의롭게 한다는 내용이다. 바로 그 점을 이 잔의 말씀에서 예수가 인용한 것이다.
②그 다음에 '언약의 피라'는 어디에서 왔느냐? 언약의 피라고 하는 이 소리는 성경에서 여러 배경을 가지고 있다. ⓐ출24장 출19장 34장이 언약에 관계된 장인데 출애굽기 24장을 보면 시내광야에서 모세가 하나님과 이스라엘 간의 언약을 맺는제사를 드리고 그 제물의 피를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면서 뭐라고 외치는가? '언약의 피라'
그러니까 예수가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 곧 피흘림을 시내에서 세운 모세에 의한 그 옛언약에 대한 후형으로서 그 언약의 후형으로써 새언약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이 마태,마가 복음 판에 '새'자가 안들어가지만 어떤 사본에는 '새'자가 들어가는데 그것은 별로 신빙성이 없고 그것은 후에 쓰여진 사본이다.
'많은 사람을 위한 언약의 피라' 이렇게만 되어 있다. 그리고 바울,누가판에는 '새언약'이라해서 '새'자가 분명히 들어가고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없는 것이다.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 죽음을 모세가 시내산에서 드린 언약의 제사와 비교해서 보았을 때는 그 후형으로써 분명히 '새언약'이라는 소리가 분명히 들어간 것이다. '새언약'이란 그 의미가..그래서 그'새'자가 들어가고 안들어가고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안들어가도 그것이 새언약이다.
언약이 하나 있는데 또 세우면 그게 새언약이지 그게 헌언약이겠느냐고? 아주 멍텅구리같은 놈이다. 그런 소리하지. 가끔 그런 엉터리 학자들도 있어요. 하여간 학자라고 잘난체하는 친구들 중에 반멍텅구리가 상당히 많아요.
ⓑ또 이 새언약의 예언은 우리가 잘 아는 렘31:33ff 거기에 예레미야가 뭐라고 예언해요? 이스라엘 민족이 이 시내산에서 세운 언약을 파기하므로 그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지 아니하므로 이 하나님께서 이 이스라엘 민족을 어떻게 한다고? 싹쓸이를 해버린다고. 싹쓸이를... 그래서 누구를 통해서 싹쓸이를 해요? 바벨론에 의해 싹쓸이를 해요. 그리고 싹쓸이 하는 표로 이 성전까지 싹쓸이 한다.
그렇게 싹쓸이를 해버리고 하나님이 구원작업을 새롭게 시작하는데 어떻게 새롭게 시작한다고 하였는가? 남은 자들과 새언약을 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새언약은 옛언약과는 다르다. 옛언약은 그 옛언약의 표현하고 율법은 어디에다 썼는가? 돌판에 새겼는데 새언약의 율법은 어디에다가 새긴다구요? 인간의 심장에다....
그래서 마음속에서 울어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게 해서 하나님을 아는 자식이 가득차고 의가 이루어지게 하겠다는 것이 새언약의 내용이다. 그것을 예수가 지금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고후에서 자기를 무엇이라고 하는가? 새언약의 사역자이라고 한다.
새언약의 사역자, 새언약을 섬기는 종이라고 한다.
ⓒ또 여기에 어떤 배경이 있냐면 이것은내가 주장하는 소리인데 이사야서 42:6/49:8이 반영되어 있다. 이게 다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사42:6에는 '나 여호와가 의로 너를 불렀은 즉 내가 네 손을 잡고 너를 보호하며 너를 세워 백성의 언약과 이방의 빛이 되게 하리니'
이사야 49:8에는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주의 종의 노래에 대해서 Duhn이라는 독일의 학자가, 구약학자가 금세기 초에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까지의 이른바 세개의 주의 종의 노래를 분류하였다. 42장46장49장과 53장의 세개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를 분류하였다.
그래서 이 42장과 49장을 보면 주의 종이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는 말이 있다. '주의 종이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 바꾸어 말하면 주의 종이 백성을 위한 새로운 언약의 중보자가 된다는 그말이다. 언약의 중보자로...
그런데 우리는 성만찬 할때마다 이것이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것은 많은 사람을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아무 정신 없이 낭송을 하지만 도대체가 사람이 언약ㅇ르 세우는 제물로 바쳐진다는 것은 구약에는 없는 것이다. 예수의 이 자기 죽음에 대한 해석이..자기의 죽음이 곧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이라는 것이..
그것에 대한 가장 가까운 구약적인 배경이 이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의 종의 노래이다. 주의 종이 언약의 백성에게 언약으로 주어진다. 주의종이.... 그래서 아까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이것이 어디에서 왔다고 하였는가? 소위 4번째의 주의 종의 노래에서 왔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앞의 '언약의 피'라 하는 그 소리도 다른 주의 종의 노래를 반영하고 있다.
아까 이야기한 막10:45절 이것도 예수가 처음에 만찬석상에서 한 만찬의 말씀을 또 다른 말로 요약한 것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해 내책에서 자세히 썼다. 이것도 분석하면 이와 비슷한 구약적인 배경을 발견할 수가 있다.
여기에서도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무엇으로 준다고요?
대속물로 주려 한다는 것이다.
여기의 그 사람의 아들은 다니엘서 7장에서 분명히 왔다. 그 다음에 섬긴다고 하는 소리는 주의 종의 노래, 주의 종이 무엇하는 자인가? 섬기는 자이다. 섬김. 이것은 무슨 소리인가? 섬긴다는 소리이다.
그 다음에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는 이사야서 53:10-12절에서 왔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그다음에 대속물 그소리는 어디에서 왔느냐면 그곳에서 왔다. 하나는 이사야서 43:3-5절까지에서 왔다. 이사야서 43:3-5까지 버면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기에 그들의 죄값으로 이집트와 에돔을 대속물로 준다는 말이 있다. 이스라엘의 죄를 위해서 그들을 멸망에 이르는 심판을 받아야 하는데 그 대신에 하나님께서 이집트와 에돔을 때리겠다는 그말이다. 이집트와 에돔이 무엇이냐? 이다.
그 다음에 또 어디가 배경이 되느냐 하면 이사야서 53장이다. 거기에 보면 많은사람들을 위해서 누가 대속물을 바쳐요? 대속의 제사로 바쳐지는가? 주의 종이다.
그래서 막 10:45절에 나오는 이 대속물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는 이 말은 이사야서 43장과 53장의 결합이다. 자 이렇게 볼때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이사야서에 있는 주의종의 노래에 근거해서 보았다는 말이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보았다는 말이다. 대속의 제사로 봤다는 말이다.
그래서
1.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 )
여기의 중요한 개념이 하나는 이고 하나는 인데 이둘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르다. 영어로는 guilt offering이다. 댓가를 치르는 것이다. 이 사람이 죄르 ㄹ지어서 죽어야 되는데 다른 사람이 대신 죽어주는 것이 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대속의 제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2.새언약의 제사
둘째로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다는 것이다. 즉 언약을 세우는제사로 보았다. 자 그러면 예수가 자기 죽음의 결과를 무엇으로 보았는가?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이면 즉 대속을 하고 새언약을 맺으면 그 결과가 무엇인가? 무엇이 나타나는가?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소리는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되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 이것이 언약의 형식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이 소리는 하나님이 제일 못한 이것들을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선택한다는 것이다.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다 그리고 너희가 나의 백성이라.이렇게 법적으로 하나님과 이들과의 관계를 맺는 것이 언약이다.
어떻게 관계를 맺는가? '내가 너희의 못난 너희의 하나님 노릇해줄께! 너는 내 백성이라' 이렇다. 그러므로 언약을 세운다고 하는 것은 늘 백성이 창조된다는 소리이다. 선택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단의 자기의 백성들을 선택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가 그들의 하나님으로 축복하고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언약의 백성은 무엇을 짊어지는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순종하는 그런 관계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들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하는 것이고 백성들은 그 하나님의 보호에 의존하고 그 뜻에 순종하겠다는 의무감을 지니는 것이다. 그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언약을 세운다는 그 소리는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그 소리이다.
그래서 시내산에서 모세의 언약을 통해서 모세가 동물을 제사로 바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였다. 그런데 그것의 옛언약에 대응해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데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사가 드려졌다. 속죄의 제사를..그래서 그것이 의로운 것이다. 의롭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설명해준 자기 죽음, 임박한 자기 죽음의 진정한 의미인 것이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려면 다음 주제를 보도록 하겠다.
그러나 우선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이 대속의 제사요 새언약의 제사로써 보았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떠하냐? 그러면 예수의 죽음을 통해서 벌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결과되어지는 것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새로운 의로운 백성의 창조이다.
그렇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그 의도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들, 또는 새로운 백성을 옛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었는데 이들 말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라고 하였다. 따라서 똑같은 것이다.
좀더 자세히 그리고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의도를 성취한 것이다라고 볼 수 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약속이요 너희들을 하나님의 백성을 내가 만들어 주겠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을 받는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져들로 만들어 줄테니까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새탄의영역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을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주권의 영역으로 오라는 약속이요 초대장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그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내가 주겠다. 그러므로 사탄의 주권에서 하나님의 주권 밑으로 넘어오라는 초대장이자 청첩장이다.
하여간 예수가 이렇게 초대장을 발부한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약속이다. 초대장이다. 그 초대장을 받고 오는 자들, 그 약속을 받고 그 초대장에 응해서 초대장을 들고 오는 자들을 예수가 뭐라고 했는가? 잔치를 베풀었다. 먹고 마시는.. 하도 많이 먹고 마셔서 예수가 무슨 병명이 있었다고 하였는가?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도게 하겟다는 약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초대장이다. 예수의 그 십자가에서의 그 죽음을 그 약속의 성취이다. 자기 목숨을 대속의 죽음으로 새 언약을 세우는 일에 바침으로써 자기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한 초대장을 들고 오는 사람들에게 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일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죽음은 무엇이라고? 그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성취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과 얼핏보면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지만 그렇지가 않다. 왜? 무엇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가 그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그 약속을 성취했어야 했다. 예수가 자기 대속의 제사의 죽음을 통해서 그 초대장을 효력을 발생하게 하였다. 바람 맞히지 않고...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은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다. 성취이다. 이렇게 볼 수 있다.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이렇게 정확히 말할 수 있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서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게 하겠다는 약속이요, 그의 대속의 그리고 새얀약을 세어는 제사로서의 죽음은 그 약속을 법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으로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 새롭게 법적으로 만들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법적으로 성립시켜서 너희는 내 백성이요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이 언약의 관계가 맺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하나님이라 하고 우리의 아버지로 부를 수있고 그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은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한 약속의 성취라고 이렇게 볼 수 있다.
자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그런데 부활이 일어났다. 이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은 우선 무엇을 깨달았겠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높였다. 이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높였다. 그 소리는 누구소리인가? 무슨 소리인가?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인정했다. 옳다고 선언했다는 말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vindicate했다. 옳다고 선언했다는 것이다.
약속,초대 |-------------- 성취 |부활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개념으로 연결 |vindicate
의도-하나님의 새로운 |하나님의 의로운 백성이 창조 |
백성 창조 |1.대속의 제사 |
|( ) |
|2.새언약의 제사 |
그래서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은 이 유대인들은 예수를 거짓 메시야라고 백성을 오도한다고 해서 사형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가운데에 사형에 처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죽음에서 일으킴으로 그가 옳다고 선언하였다. 그리고 그를 높였다.
그를 옳다고 선언하다니 무슨 소리인고? 예수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선언한 것이라 이말이다.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고 하나님 나라가 실재가 되게 한 분이라는 것을 그가 진정으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것이지 그의 죽음이 자기 죄를 위한 것, 즉 자기가 거짓 메시야라고 주장해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그런 죽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인 것이다.
그러한 새 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라. 이러한 예수님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하나님이 선언했다. 부활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의미인 것이다.
그랬을 때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입장에서 이제 예수의 모든 행적과 가르침, 그의 하ㅏ님 나라 선포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까지를 되돌아 보았을 때에 이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 무엇이 정확히 말하면 구원의 사건이었겠는가? 십자가의 죽음이 그렇다. 왜? 이것이(죽음) 이것의(약속,초대) 성취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전체, 즉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적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전체가 구원의 사건임에 틀립이 없다. 그래서 그것을 그리스도 사건이라고 그냥 그런다. 짧은 말로 Christ-event. 또한 이것을 Salvation-occurents. 구원의 사건이라 한다. 독일말로 Heilsgeschehen 구원의 사건이라 그렇게 말한다.
그런데 예수의 전체 행적 중에, 아까 내가 뭐라고 말했는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다고? 약속과 성취 관계가 있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조금더 정확히 말하면 이 Heilsgeschehen. 구원의 사건이 무엇인가? 내가 너희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해주겠다 하는 그것이 약속인가? 그것이 구원의 사건인가? 좀더 정확히 말하면..그것은 그 약속의 성취이다. 진짜. 대속의 새얀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법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한 그 사건이 그것이 구원의 사건인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의 선포에는 더 이상 하나님 나라가 나오지 않고 가끔 나오나 그것이 중심이 되지 않는다. 왜? 그것은 약속의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심이 되는가?
우리를 위해서 대속의 제사를 통해서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실제로 되게한 그 사건, 곧 그의 죽음, 그의 죽음 그것이 그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의 사건으로써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 되는것이다.
그래서 이 사도들의 선포에 그리스도의 죽음이 중심 메시지가 되는것이다. 더이상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더 이상 중심이 되지 않고 예수의 죽음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한, 통해서 한 구원의 약속을 성취하는 것으로써 사도들의 메시지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 구원의 사건을 일으켰는가? 누가 대속의 제사로 새언약의 제사로 자기를 버려서 우리를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으로 만들어서 의롭다 하는 구원이 일어났는가? 누가 그랬는가? 예수가....
그러니 자연히 사도들의 선포의 대상이 누구여? 예수와 그의 십자가! 그래서 아까 뭐라고 그랬다구요? 아까 뭐가 문제라고? 예수는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무엇을 선포한다고 하였는가? 예수와 그의 죽음을 선포하였다. 그러면 사도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깡그리 무시하고 무슨 헬라 종교에 의해서 무슨 새로운 종교를 만들었는가? 그게 아니고 바로 이러한 논리적인 이유 때문에 그렇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이 연결된다.
다시 표현하면 하나님 나라를 통해서 우리에게 한 구원의 약속, 곧 우리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겠다는 그 구원의 약속은 그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가 되었다.
그것을 뒤집어서 말하면 그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위해서 이룬 구원은 그가 하나님 나라를 선호함으로써 우리에게 한 약속의 구원, 바로 그것이다.
신약신학 제6강
지난번에 어디까지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 다 하였는가? 죽음과 부활까지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초대교회의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으로 선포하게 된 것과의 상관관계를 하였을 것이다. 이제 마지막으로 하나님 나라의 주제에서의 마지막으로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을 보냄을 공부하겠다.
9)예수께서 제자들을 보냄.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응하는 사람들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사람의 통치의 축복만을 받는 나라들이 아니라 동시에 예수에 의해서 하나님 나라에서의 여러 과제들을 성취하도록 위임을 받고 보냄을 받는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응하는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의 축복만을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나라에서 할 의무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 의무가 세가지로 되어 있다.
하나는 이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서 주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도 그렇게 시작한다.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이제 하나님 나라가 빨리 완성이 되도로 끼도하는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는 것(막3:13.눅10:8ff) 등. 이 두번째에 있어서는 이 하나님의 백성이 예수의 사역을 계속한다고 볼 수있고 또는 예수의 사역에 참여한다고도 볼 수 있다.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을 불러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귀신을 좇아내서 병자들을 고치도록 보냈다.
세째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다운,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의의를 나타내야 한다. 이세상에서 살지만 벌써 하나님 나라 백성으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아라. 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의는 무엇으로 나타나느냐면 섬김으로 나타난다. 겸손한 섬김으로..그러니까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막10:33-45절가지에 나오는 교훈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에 있어서의 그들에 있어서의 ethos는 이 세상의 도와는 달리, 세상의 도는 자기주장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자기 주장을 잘해야 국회의원도 되고 대통령도 되고 그런다. 자기 주장을 잘해야 남의 돈도 많이 뺏고 사람도 마구 죽이고 그래야 대통령도 되고 한다. 이렇게 이 세상은 전체가 고난이요 고통이다.
그러기에 그의 백성은 하나님 나라를 구해야 하고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이루어지도록 구해야 하는 것이다. 즉 이세상의 지배자들은 자기 밑의 피지배자들을 깔고 뭉개는 것이 이 세상의 일이지만 예수께서 가르치시기를 너희들 가운데에서는 그게 아니라는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에서의 ethos, 도는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섬김이라고 하였다. 그 섬김이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이 온것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것이 하나님 나라에서의 백성의 의무인 기도하는 것이라든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 그 다음에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를 내어보이는 것이다.
바로 그 섬김으로... 겸손한 섬김으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의를 내어보이는 것이다.
이제 그것이 종합되어서 마 28:19절 이하의 우리가 잘 아는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고 너희들이 가르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 이렇게 부활하신 주께서 명령을 하셨다.
그런데도 이 명령이 주로 기도와 복음선포이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의 의를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도 그랬지만 예수가 자기 제자들에게 명령하는데에 있어서도 제자들의 하나님 나라 백성의 과제라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명령하는데에 있어서도 사회,정치,경제적인 program이 전혀 없다. 이것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상당히 독특한 것이다.
우리가 지나번에 배경을 설명했듯이 유대의 여러신학적인 조류들, 여러 파당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은 아주 물질주의적이고 이세상적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다 사회적인,정치적인 대안들을 다 가지고 있었는데 그 당시 하나님의 통치에 대해서 가장 열렬히 선포했던 열렬당원들이 하나님 나라의 개념을 무엇으로 보았다고 하였는가? 이 세상에서의 신정의 구현으로 보았다. 그런데 그 신정은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이스라엘의 독립, 즉 우상숭배하는 로마사람들로부터 완전히 독립을 하여소 로마의 가이사가 아니라 하나님을 왕으로 섬기는 이스라엘 민족이 되어야 하고 다윗 왕조가 재건되어야 하고..
사회적으로는 무슨 하나님의 백성간의 주가 있고 종이 있어서는 안된다 해서 열혈당원들이 66-70년에 일으킨 유대전쟁때 예루살렘을 함락하였을 때 제일먼저 한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노비문서를 다 불태워버렸다고 했다.
또 이 경제적으로도 평등, 그래서 빚, 채무,채권관계 서류도 다 불태워 버렸다. 이렇게 그들의 하나님 나라 개념에는 아주 정치적이고 사회적이고 경제적인 program이 주류를 나타내었다.
그런데 그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으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사회 경제적인 또 정치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이것이 이른바 해방신학하는 사람들, 예수를 이른바 해방운동의 효시로 삼으려고 하는 살마들에게는 상당히 큰 문제이다.
우리가 우리의 복음서에 나와 있는 예수의 하나님의 나라 선포에는 그런 사회적인,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불행히도 도리어 반대현상이 많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가 이러한 사회적인 현상을 지지한 것도 아니다. 의식적으로 예수가 분명히 현재 지금 이런 관계가 이런 사회적인,경제적인 관계가 좋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너무 이렇게 원칙적으로 이 세상에 있어서 ethos 통치자들은 어떻게 한다구요? 자기 아래 있는 사람들을 깔고 뭉갠다. 섬김이 없고 탈취하고 핍박한다. 자기 주장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이 세대의 가치와 질서를 뒤집어 놓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혁명 program을 제기하나 구체적으로, 구체적인 것에 있어서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program이 하나도 없다. 구체적인 면에 있어서는 도리어 좀 반대적인 요소가 좀 있다.
예수의 비유들 가운데 당시의 착취의 관계에를 많이 드는데 거기에 있어서의 착취의 관계를 비판하지 않는다.
가령 거기의 포도원의 농부의 비유를 들어보자. 막12:1-12절까지 나오는 포도원의 농부의 비유를 들어보자.
이 비유에서 포도원은 분명히 이스라엘을 말한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그리는 그림들 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포도원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농부들은 이스라엘의 대표자들, 지도자들, 대제사장들, 이런 사람들을 말한다. 그래서 농부들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진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순종하는 언약의 백성으로 잘 인도해야할 의무가 있는데 그 정반대로 이제 하나님의 종들을 선지자들을 다 잡아 죽이고 종국에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까지도 잡아 죽이리라는 비유이다. 요점은 거기에 있다.
그런데 예수로 하여금 그렇게 생생한 비유를 아주 효과적으로 들수 있게 한 것은 당시의 갈릴리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이었다. 당시의 갈릴리의 많은 농토들이 부재지주의 소유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이나 이런 도시에 사는 큰 부재지주가 갈릴리의 농민들의 땅을 다 뺏어가지고 조그만한 땅을 가지고 있는 농민에게 대여해주어 소작농,농노의 관계로 전락하였다.
즉 옛날의 땅 주인들이 부재지주에게 땅을 다 뺏기고 자기들이 가지고 있던 땅을 계속 경작하지만 이제 그것이 남의 땅이 되어서 농사를 지어 주인에게 소작료를 내어야만 했었다. 이렇게 당시의 갈릴리는 아주 소작농이 많았다.
그래서 이 막 12:1-12절까지의 비유를 예로 들면 당시의 갈릴리의 사회 경제적인 현상을 아주 잘반영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는 그 당시의 사회적인 현상에 대해서 그 비유에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예수가 그 비유를 어떻게 사용하는가? 그 사회적인 현상을 가지고 차라리 하나님과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를 설명하고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지요?
이렇게 차라리 세례요한의 메시지에서는 사회 경제적인 혁명적인 program이 많다. 그래서 세리들에게 착취하지 말라. 군인들에게 강포를 하지 말고 착취하지 말라 등의 program이 많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가르침이 없다.
그래서 이제 이것을 곰곰히 생각하면 그 재물에 대한 태도를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왜 그렇게 예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면서 그 당시의 열혈당원이나 유대인같이 사회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하지 않았는가?
예수는 부, 부의 우상성에 대해서 실랄히 공격한다. 그들의 부에 대한 태도를 실랄히 공격하였다. 누구든지 부, 하나님을 동시에 섬길 수 없다. 하나님과 mamon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부라는 것이 우상이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우리를 부의, 물질적인 것을 같이 섬길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신다. 부자에게 대해서도 그렇지만 가난한 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가난한 자, 부자는 자기의 부에 대해서 의종하고 부에서 자기의 security를 얻으려고 하고 하는 것을 보고 예수는 부가 그의 우상이라고 경고한다. 즉 부자는 부가 자기에게 안전을 주고 자기의 생명을 유지한다고 해서 그것을 경고한다.
그래서 이 부의 우상성과 그 어리석음을 예수는 지적하고 있다. 예수는 부자들에게 경고하는 것이다. 즉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에서도 부자들을 많이 경고한다.
그러나 예수는 동시에 부자들의 덕을 많이 본다. 그래서 부자들이 소개하면 가서 음식 많이 먹고 베다니의 말아, 마르다, 나사로가 돈이 꽤나 있었든것 같은데 그 가정을 본보기로 삼는다. 예수의 제자들도, 요즈음 해방신학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고난과 고통을 받는 것이 아니라 또 가난뱅이가 아니라 요즘 말로 다 중산층이다. 거기에 보면 베드로도 집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베드로의 집에서 예수가 대접받고 그런다. 그래서 소의 장모의 병도 고여주고...
소의 세배대의 아들들도 조그만한 중소기업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 자신도 빈민층이 아니다. 당시의 사회계층을 보면 부자는 농토를 가지고 있고 똫나 농토를 다 빼앗기고 농노로 전락한 하층민이 있는 반면에 또는 부재지주로써 로마 사람들과 결탁하고 아니면 제사장 가문과 연결되거나 공무원과 연결된 보다 나은 상류층이 있는가 하면 중산층이 있었는데 그 중산층이 무엇이냐면 이렇게 손재주를 가진 사람이 있었다. 그래서 개작하는 기술을 배운 사람들이 이게 중산층이다. 예수가 목수이었다 하는데 있어서 중산층인 것이다.
예수도 대개 자기의 제자들을 중산층에서 선택하였다. 그런데 그것은 자기가 의식해소 뽑은 것도 아니다. 왜? 거기에는 또 무엇이 있었는가?대개는 중산층이지만 세리도 있었다. 세리.. 이 세리들은 어떻게 세리가 되느냐면 로마의 치리자에게 뇌물을 잔뜩 주고 그 자리를 샀다. 돈으로 이 세리직을 산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에게 세를 책정할 권을 갖는 것이다.
그러면 로마 사람들은 유대인들에게 10쯤 세를 책정하라 하면 15쯤 책정해서 10은 갖다 주고 나머지 차액을 자기가 챙겼던 것이다. 뇌물을 잔뜩 주어가지고 세관을 샀으니까 본전을 빼야 될 것이 아니겠는가? 자기돈 하나도 안들고도 대통령 되어가지고 수천억을 먹었는데 자기의 돈이 들어갔는데 안그러겠어?
그래서 세금을 먹이는데 많이 먹여서 나머지는 착복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적으로는 정치 경제적으로는 막강한 권력이 있었지만 종교적으로는 죄인 취급을 받고 미움을 받고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까지 세리가 있었다. 그리고 예수의 친구들까지 세리가 많았다.
예수가 가난한 자들을 미워하기도 하고 또 사랑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에게 얼마나 사랑하였느냐면 특별한 사랑을 베풀었다. 그들이 금전적으로 없어서 없이 여기고 그런 자들 뿐만 아니라 어떠한 형태들로든 억눌림을 당한 자들을 사랑하였다. 세리들도 사랑하고 심지어 창녀들도 다 사랑하였다. 그러데 억눌림을 받고 배척을 받는 다수가 자연히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었다. 그래서 가난한 자가 예수의 사랑의 대상이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가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사회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고 경제 개혁을 어떻게 해야 하고 하는 그러한 program을 제시해야 하느냐 하면 그런 것은제시하지 않는다.
우리가 아까 말하는 착취와 착취당하는현 경제체제를 하나도 바꾸지 않고 그것을 하나님 나라의 진리에 대한 예화로 들고 있다.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민족주의 신학자들은 큰일이 났다. 공산주의자들도.. 이 달란트 비유는 자본주의 중의 자본주의 비유이다. 달란트 받아가지고 뭐하라고? 장사해서 이득을 남기라고!! 이익을 안남기면 어떻게 한다고? 이놈!! 한다고..
이렇게 당시의 사회 경제제도도 즉 착취와 착취당하는 관계에 대해 구체적인 어떤 program을 제시하지는 않지만 그런 것을 이용해서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설명하고 있다.
왜 그렇느냐? 왜 이와같이 하는가?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코멘트가 하나도 없느냐? 이것은 여러가지로 생가해볼 수 있다. 하나는 이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 때문에 그렇다. 초월성, 지난 번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는 것이었다. 온다 거기에 바대해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온다'라는 것이었다.
그러데 우리는'하나님 나라를 받는다'는것이다. 거기에서 벌서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온다는 말이다. 우리는 받아요!
우리가 어떻게 무슨 경제적인 사회적인 정치적인 혁명을 통하고 무슨 개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우리에게 임해서 우리에게 주어져서 우리가 그것을 받아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그것이 제일 첫째 이유이다.
이 유대의 하나님 나라 개념을 다 synegism이라고 하여싸. 인간이 하나님과 협동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열형다원들은 자기들이 하나님 나라를 정치적인 사회적인 투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정반대로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전적으로 우리에게 온다고 하였다. 이것이 가장 근본적인 이유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하나의 사회 경제적인 정치적인 이유가 없느냐에 대해서..
두번째로 이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결부해서 말할 수있는 것은 사회 정치적인 경제적인 program이라는 것이 전부 역사적인 시간적인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다 이세상적이다. 물질주의적이라는 것은 다 이세상적이다.
예수는 이 세상의 지금 현 질서를 조금 어떻게 개혁해서 조금 더 공정하게 만들고 하는 그것이 참 목적이 아니었다. 초월자 하나님의 전혀 새로운 질서 새로운 세계가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지 이 세대의 무엇을 조금 고쳐놓고 하는 것이 그의 목적이 아니다.
이것과 연관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잘 생각해 보자.
부에 대한 경고, 부가 무엇이 될 수 있다고? 우상이 될 수 있다는 것에 대한 경고, 부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가난한 자에 대한 위로와 사랑, 그러나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무슨 program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이러한 것들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예수의 부에 대한 태도를 알 수 있다.
세째로 예수는 '부'라는 것을 절대화하기를 거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는 '부'를 절대화 하기를 거부하였다. 이 세상을 전부로 알고 사는 사람들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할 것 없이 '부'를 mamon을 절대화 하였다.
부자는 왜 남을 윽박지르며 죽이면서까지 '부'를 만들려고 하는가? 얻을려고 하는가? 그것은 '부'를 절대화한 것이다. '부'가 자기에게 안전을 주고 쾌락을 준다고 생각한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왜 더 '부'를 외쳐 내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아우성치고 난리인가? 마찬가지로 똑같은 생각이니까 그렇다. 이 사람들도 부를 절대화한 것이다. '부'라는 것이 나에게 안전을 주고 쾌락을 주고 안정을 제공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모든 삶의 풍요로움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부를 절대화하는 것은 부자나 가난한 자나 같다. 부자에 있어서는 '부'를 절대화하고 가 한 자에 대해 나타나는 현상은 교만이요 사랑없음이요 윽박지름이요 착취요 짓밟음이요.. 이러한 것이지만 가난한 자의 부자에 대한 태도는 사랑없음이요 질시요 미워함이요... 이렇게 똑같다.
그래서 예수는 무슨 부자와 가난한 자의 자리바꿈하는 것을 문제해결로 보지 않았다. 또 '부'를 공산주의식으로 빼앗아서 똑같이 나누는 것도 그 해결책으로 보지 않았다. 도대체 '부'라난 것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부자에게도 '부'라는 것이 우상이기도 하지만 가난한 자의 우상이기도 하다. 부자가 '부'를 우상화하지 못하도록 실랄하게 비판하고 경고하였지만 마찬가지로 가난한 자들이 '부'를 우상화함으로 절대화하도록 위로하지도 않았다.
무엇가지고 위로하였나?
하나님 나라의 보상을 가지고 위로하였다.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다. '부'라는 것을 가볍게 상대화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부'에 대한 자유함,부를 섬김의 수단으로서 해야지 부로부터 나의 안정, security를 얻고 삶의 힘을 얻으려고 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부를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것이다. 부를 섬김의 수단으로 사용할 때에 '부'를 즐겨도 괜찮다. 그러므로 예수에게 있어서 금욕주의가 없다. 예수가 부를 비판하였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그러면 '금욕주의'로 가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고 말한다. 그러나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고 말한다.
예수는 스스로 소유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개서 공중의 나는 새로 깃들 곳이 있고 들의 여우도 잘들 굴이 있으나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였다. 예수 스스로 소유한 것이 없었다.
그러나 부에 대한 아주 자유로운 태도, 부라는 것이 무엇이냐? 섬김의 수단이다. 그것에서 security를 얻는 그것에서 삶의 원동력을 얻는 그것에서 무슨 삶의 도피처 처럼 생각하는 그것이 부자나 가난한 자들이 그것이 안된다는 것이다.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가 그것을 자 보여준다.
그러면 어떻게 부를 상대화할 수있느냐? 이 세상에서는 이 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그래서 자기 주장을 하는 의지, 이 세대에 사는 사람들을 부를 상해화 할 수 없다. 부를 상대화할 수 있다는 것은 오로지 초월적인 가치의 빛 아래서 보았을 때에만 이 세상적인 것이 없어져 버리는 것, 시간에 제한되어 있는 그것이 상대화되는 것이다. 그때만 진정으로 부를 상대화하고 부로부터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우리가 부를 가지고 있든, 가지고 있지 않든지 간에 부라는 것은 우상화하며 절대화 해서 거기에 매이는 것이다.
해방신학자들이 민중신학자들이 요구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이 이 착취하고 짓밟는 부자들의 돈을 빼앗아 가지고 그들이 가난한 자들이 부자가되느냐 하는 것이 그들이 관심이다. 아주 유치하게 표현을 하자면...그렇죠?
그렇게 하면 무슨 문제가 해결이 되겠는가? 자리바꿈만 되지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옛날에 블란서 혁명 때 혁명 시민들이 거리에서 빵을 달라고 데모하니까 마리앙토와네트 여왕이 시녀에게 물었다. 혁명이라는 것이 무엇이냐? 그러니까 시녀가 대답하기를 '혁명이라는 것은 내가 여왕이 되고 당신이 내 시녀가 되는 거요' 이 대답에는 상당한 진리가 있다. 혁명이란 무엇이가? 자리바꿈이다. 가난한 자가 한번 부자가 되고 부자가 한번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자리 바꿈을 했짐나 착취자와 착취당하는 그 관계에는 변함이 없다.
옛날 브레즈네프가 소련을 통치하고 있을 때 그 사람에 대한 농담 참 많았었다. 이런 것이 하나 있다. 브레즈네프가 외국에 다니면서 선물 받기를 좋아하였다. 그 선물 중에 좋은 차(car)를 좋아하였는데 그런데 한번은 자기의 별장에 자기의 어머니를 초대해서 저녁을 근가하게 대접을 하고는 자기의 어머니에게 선물들을 꺼냈다. 그리고 자기가 받은 선물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말하기를 '엄마, 당신 아들 꽤 성공했지?' 그런데 그 엄니가 갑자기 슬픈 기색으로 말하기를 '얘 그런데 지금 걱정이 하나 있다.' 무슨 걱정이냐고 물으니 공산당이 만약에 정권을 잡으면 이거 다 어떻게 되니?
그런데 브레즈네프가 공산당 서기장이 아닌가? 공산당 서기장이 호사스런 선물들을 갖추어 놓고 자기 어머니에게 자랑을 하였다. 자기이 어너미가 걱정이 생겼다. 공산당이 집권하면 이게 다 뭐가 되니?
공산당 무산 계급이 혁명을 하였다. 모든 것을 똑같이 받고 형제애로 산다고 하는데 브레즈네프는 그렇게 잘 살게 되고 일반 국민들은 가난과 고통 가운데....
내가 지난 주에 아파가지고 솔제니친의 소설 하나를 읽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하던 때의 1914년 8월을 배경으로 해서 이것은 공산주의 소설은 아니지만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재정 러시아의 부패한 무능상을 묘사하고 있는데 재정 러시아의 하급 생활자들은 엄청난 고생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혁명하기를 잘 했는데 혁명이라는 것이 문제해결을 하지 못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는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하지 않는다. 무엇을 제시하는가?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ethos가 바뀌어야 된다. 세상의 도는 무엇인가? 자기 주장이다. 누구든지 클려고 하는 큰자가 되고자 하는 누구든지 서로 첫째가 되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가 제시하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도는 자기를 내어주는 섬김의 도라는 것이다. 자기 주장이 아니다. 자기를 내어줌인 것이다. 그러니까 ethos가 180도 전환인 것이다. 사실 이것만이 문제해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사회적인,경제적인,정치적인 program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다. 왜 그러느냐?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이 세상적인 것이고 내재적인 것이기에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못된다. 그러기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는 이 세상적인 사회,정치 경제적인 program을 안가지고 있어도 진정한 의미의 혁명적인 program을 진정한 의미의 ethos를 자세하는 것이다.
이른바 해방신학자들이 이정도 과격해가지고는 진짜 과격할려면 예수 정도 과격해야 하는데 지짜 예수 만큼 과격한 사람이 요새 어디 있느냐?
그런데 해방신학이라는 것이 내재주의, 내재성 속에서의 문제해결을 할려고 그러고 그 안에서 과격할려고 하니까 잘 안맞아 들어간다. 잘 안맞아 들어갈 뿐 아니라 예수의 메시지와 맞지 않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은 억지를 자주 부려야 한다.
그러니까 성경을 억지로 해석을 하고 그렇게 해도 안되면 예수가 진짜는 어덯게 어떻게 했는데 복음서 기자들이 다 그것을 왜곡해놓았다고 ...그리고 지도자들이 이데올로기를 위해서 다 왜곡해 놓았다고 한다. 그렇게 꾸며댄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부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통치자에 대한 실랄한 비판, 그러므로 헤롯을 뭐라고 하였는가? '여우 같은 놈'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한동안 전두환 못불렀다. 박정희 이름도 못불렀다고.. 이름 불렀다가는 무슨 죄목으로 잡혀갔지? 원수 모독죄로...
지금도 그 죄가 있는가? 있시요. 있으면 노태우 이름 함부로 못부르겠네. 그래도 전도환은 국가 원수 아니니까 불러도 되겠지? 전두환, 그 여우같은 놈이라고...(하하하..) 에수가 그랬다 그말이여.
그리고 가난한 자들을 사랑하였다. 이렇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의 그 사회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이 없느냐를 토론하면 신학적으로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보수 경향을 띤 사람을은 뭐라고 하느냐면 저 해방신학자들을 못된 놈들 진짜 틀렸구나! 그래가지고 굉장히 위안을 받는다. 그래서 더 반동적으로 그러는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실업인회들인가 나발인가 하는 사람들은 이런 메시지를 듣기를 아주 좋아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진짜 바로들이다. 예수가 누구를 경고하였다고? 부를 경고하고 부자들을 규탄하였다. 누구를 진정으로 사랑하였어요? 가난한 자들을..
이 부자들이라는 것들은 기독교 실업인들인가 나발인가 하는 것들을 나와가지고 최일류 호텔에서 최일류 밥을 먹으면서 기도회 한다고 앉아가지고 성경본다고 앉아가지고 찬송한답시고 앉아가지고 거기서 배울 것은 하나도 없다.
몇년 전에 손봉호 박사한테서 들었는데 자기가 기독교 실업인회 성경공부를 매주 인도하는데 그 모임에 개근하는 사람이 몇명 있대요. 그 중의 하나가 대한민국의 유수기업주 중에서 종업원들 월급을 제일 적게 주는 사람으로 신문에 났데요. 그 사람이 하는 짓이 무엇인줄 알아요? 그 사람이 회사에 가서 자기 회사 직공들을 데리고 성경공부한다고 하고 기도한다고 하고 찬송한다고 하고..그래서 잠못자게 만들고(하하하..)
우리 기독교 정신으로 한다고 하면서... 기독교 정신으로 자기가 착췩하였지!
나는 기독교 실업인 협회라는 것이 뭐하는 것인지 모르겠어. 자기들끼지 만나가지고 성경공부한다고 위로받고 시편에 '나는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라'하는 말을 자기가 읽으면서 지가 어떻게 가난한 자요 곤고한 자여? 지가 읽으면서 그것으로 위로를 받고 즈그들끼리 기도하고 서로 위로하고...꼴물견이여.
나는 그런데 안가지만 신학 나부랭이나 좀 공부했다고 하는 사람 데려다가 이런 강의한번 들으면 그러면 그렇지 민중신학자들 다 못된 놈들이지. 해방신학자들, 다 빨갱이들이지. 그렇게 소리나 하고 앉아 있다. 그러면서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은 안중에도 없다.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이 무엇인가?
섬김의 도이다. 섬김의 도는 하지 않고, 아 섬김의 도 그런 것은 다 밑의 것들이나 하는 짓이지 나는 사장이니까 당연히 이런 호텔에서 기도한답시고 이렇게 앉아 있으면 되는 것이고 저 밑의 것들, 열심히 섬기는 것이 이게 아니겠느냐고 생각한다. 열심히 섬겨야 한다.
그러니까 하루 12시간씩 일을 하다. 거기다가 기도한답시고 하니까 기도하고 예배해야지, 찬송해야지.. 아주 못된 악랄한 친구들이 많다.
어디 기독실업인회 멤버 손좀 들어보세요?
내말이 틀렸어요 안틀렸어요? 정말 정직하게 하는 분들도 게중에는 있겠죠. 그러나 내가 말한 것처럼 극단적으로 비판을 받아야할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아 이동네에서인가 옆동네에서인가 국회의원 된 사람 이태섭인가 하는 사람도 기독교 장로라고 하며 교회마다 돌아다니면서 까불가불하고 다녔지만 그 사람이 돈 제일 많이 쓰지 않았어요? 엊그제 강남 반포로 처음으로 이사하였을 때 누가 담요하나 갖다 줘요. 그래서 이게 뭐냐고 했더니 수해받아서 이것을 가져왔다고.. 그래서 아 나 수해받은 일 없노라고..금방 이번에 이사왔다고, 나 수해 안받았다고 그래도 세번이나 왔다고 통장이.. 받아야지 않받으면 큰일난다고.. 그래도 나는 안된다고..나만 도장이 안찍혔어요. 나는 안받는다고..저기 명동성당의 철거민들이나 갖다 주라고..했더니 나중에 알고보니 그것도 국회의원 선거용이래. 그러면서 기독교인이라고 까불고 있어.
부산에서 낙동강 오리알 떨어지듯이 '장성만'이 떨어졌다. 기독교인이라는 것을 어디에다 팔아 먹는가? 남을 윽박지르고 착취하는데 팔아먹고 있다. 예수만 앞세워 가지고...
기독교 실업인 대표, 아이고! 그런 것들이 기독교실업인이라고 하니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뭐가돼? 그런 쓰레기들 보기 싫어서 예수 안믿는 사람 많아요. 그게 기독교라면 누가 예수 빋을 필요가 있냐?
예수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의 사회적인 경제적인 정치적인 program을 제시안한 것은 그 가난한 자에 대한 무관심 때문에 의한 것도 아니고 부자들의 착취에 대한 원통함이 없어서 그런 것도 아니고 그런 문제들의 근본적인 해결이 무슨 해방신학자들, 무슨 공산당이 제시하는 그런 해결이 아니라 초월적인 해결인 것이다.
바로 그것이 이 ethos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간본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지 예수님은 이 세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지 않았다. 부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 것은 그것은 부자하든, 가난한 자가 하든 똑같이 나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자가 부를 우상화해서 더 많이 해야 하는 것도 경고를 해야 하는데 경고도 못하고 그렇게 되어간다.
그러니 수백억짜리 집지어가지고 교회 중에서 제일 똑똑하다고 그런다. 십일조 하라고 하고, 반지, 목걸이 팔아서 하라고 해서 쥐어짜 가지고 집 팔으라고 쥐어짜가지고 교회당을 지어가지고 그냥 그게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과 같은 것인가?
그러기 때문에 자기 직권으로 착취하고 착취한 사람들이 그렇게 건축을 하면 크게 한번 씩 하지. 그러면 그런 사람은 당장에 장로가 된다. 꼼짝 못하고 누가 얼마 몇 천만원 헌금해서 했다고 하고..,
그래서 교회가 아주 못된 착취와 착취관계를 이용하고 있다. 이게 너무 많다.
그래서 그 반동으로 교회가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해야 한다고 한다. 당연히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이 예수의 정신이다. 그런데 그렇게 극단적으로 반대로 나간 사람은 정반대로 나가지만 똑같은 우를 범한다. 왜? 가난한 자의 부를 절대화하고 우상화하는데에 나꾸 놔준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부를 우상화하고 절대화해서 부를 얻기 위해서 지금 있는 자들을 향해서 증오하고 질시하고 한을 가지라고 자꾸 가르친다.
그게 뭐라는 것인가? 그것이 의식화 교육이라는 것이다. 교회가 그래서도 안된다. 지금 현재 부자들과 같이 손잡는 것이다. 그것들이 거기에서 생명을 얻으려고 위로를 얻으려고 security를 얻으려고 자꾸 붙들려는 것이다.
조용기는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물질적인 부를 누리지 않으면 진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가르친다던데 그래요?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에 대해서는 낫놓고 ㄱ 자도 모르는 녀석이다. 아와는 또 반대로 그렇다고 교회가 가난한 자들에게 부자들을 향해서 증오하고 질시하고 때려 죽일려고 하고 또 이에 대해 한을 가져야 한다고 의식화하고 그것이 옳은가? 그게 그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부를 우상화하고 절대화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을 강구해야 한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섬김의 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섬김의 도를 배우면 그러면 인간은 하도 죄악이 많은 사람들이라 또 빠져나갈 구멍을 간구한다. '아 그러면 내가 섬김의 도를 잘 배웠다고 하면 되는 것이고 내 주위에서 조금 하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새 사회학자들이 말하는 individualization, 도덕을 완전히 개인화 하고 사회적인 구조를 못보고 말면 되겠는가?
복음이라는 것을 이렇게 개인의 영혼 문제와 국한시켜 가지고 개인이 거듭나고 새로워지고 그러면 되는 것이지 교회가 복음이 무슨 사회적인 방면의 분야까지 언급할 기초가 뭐 있느냐?고 한다. 그것은 옳지 않다.
진정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백서응로 하나님 나라의 ethos 즉 섬김의 도를 실천하며 사는 개개인들이 된다면 사회구조가 변할 것이다. 국회의원이라고 주장하는 것들이 그리스도인 국회의원이라 하여 모여서 무슨 기도회하는 것들이 진짜 그리스도인 답게 살아봐요. 이 나라의 정치가 지금까지 이렇게 되었을까? 기독교 실업인회도 마찬가지요.
기독교 실업인회와 사회가 무슨 상관이여? 자기들에게 주어진 부를 청지기 정신으로 잘 관리해서 백성을 섬기겠다는 그런 정신으로 날마다 모여서 섬김의 도를 배우고 실천하자고 다짐하고 실천해서 나가봐요? 그러면 한국에 10만원 봉급받는 사람이 있겠어?없겠어? 자기들은 저녁 한끼에 100만원 짜리 먹으면서... 그러면 노사 분쟁도 없어질 것이요.
그런데 이제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 중에서 자기주장을 하는것이 아니라 섬기는 도를 내세우도로 가르쳐야 하는데 그 가르침을 받지 않고 계속해서 남을 윽박지르고 죄악을 저지르고 그렇게 힘 가진자들, 정부나 부자들이 그렇게 하면 그러면 교회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항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폭력을 쓰지 말고 주로 말씀선포,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주 무기이며 거룩하고 의로운 삶의 모범이 무기이다. 그래서 정부를 뒤집어 엎고 부자집에 가서 탈취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의롭게 사는 모범으로 가르치고 깨우치고 하나님을 알도록 해도 이 세대에서는 근본적인 해결이 있을 수가 없다. 근본적인 해결은 오직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기에 우리의 기도의 첫 편도 하나님 나라가 임하소서이다.
이 역사 안에서의 진정한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했을 때에만 가능하다. 그때까지는 하나님 나라가 완전히 임할 때까지는 하나님 나라의 도, service, humble service, 겸손한 섬김의 도를 실천하는 사람들이 살면 고난이 동반되는 삶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제자들의 삶을 제자도를 고난으로 생각한 것이다. '너희들이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이것이 예수의 제자도이다. 제 1조가 무엇인가? 자기부인! 이 세상의 도의 제 1조는 무엇인가? 자기 주장! 따라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자기를 따르라고 하였다. 고난의 삶인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승리의 삶이기 전에 고난의 삶인 것이다. 자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거기까지 하고...
2. 다음에 예수의 자기칭호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하겠다.
예수의 자기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은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복잡할 뿐만 아니라 어려운 부분이다.
Ⅰ.서론-근본적인 관찰과 문제점들
서론적으로 다음과 같은 근본적인 관찰과 거기에서 나오는 문제점들을 공관복음서들에서 보면
1)예수는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얒거인 칭호들을 피하였다. 간접적으로 자기의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이것은 우리가 소위간접 기독론에서 보았다. 간접적으로는 자기의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를 사용하면서 신앙고백을 할 때에는 그 신앙고백을 받아들이고 가령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하였지요? 마태복음 16장에서. 그것을 예수께서 받아들였다. 이처럼 받아들여서 스스로를 간접적으로 자신이 메시야됨을 주장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당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를 사용하면서 신앙고백을 하면 그것은 받으들이나 스스로는 당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했다.
2)그러나 예수는 자기 자신을 부를 때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그 '사람의 아들'이 우리 복음서에는 항상 균일하게 로 쓰여져 있다.
이것이 우리 4복음서에서 82번 나온다. 공관복음서에는 62번 나오고 요한복음서에 13번 나온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병행절을제거한다면 공관복음서에 38개의 상이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고 요한복음서 13개가 나온다. 그런데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이른바 4자료설에 의해 분류해보면 그 모든 자료에 다 나왔다.
마가 | Q
마태 | 누가
|
M | L
마가복음에는 14번 나오고 Q에는 10번. Q가 무엇인가? 이럴 때는 Q가 무엇을 상징하는가?그것은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는 자료로써 마가에 서 오지 않은 자료들을 Q라고 한다. 보통 공관복음에서도 그러지만 왜 누가복음에 서로 비슷하면서 서로 다르냐에 대해서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세복음서가 상호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를 논하는것이 공관복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여러가지 해결책들 즉 가설들이 있느데 가장 유력한 가설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두번서설이라고도 하는데 네 자료설이라고도 한다.
이것을 보면 그렇게 되어 있다. 원래 공관복음을 근간으로 해서 주는 자료로 두문서라는 것이다. 마가와 Q 그리고 마태와 마가의 틀에 Q를 더하여 번역되어 있고 그러면 마태와 마가가 조금 다르게 된다.
또 마태는 마가와 Q에서 오지 않은 또 다른 자료가 있다. 그것이 M이라고 하는 것이다. 누가도 마찬가지이다. 누가복음에서도 마가복음과 Q에서 온 자료를 빼버리면 또 누가만 가지는 독특한 자료가 있다. 그것을 L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M은 마태만의 독특한 자료이고 L은 누가의 독특한 자료이다. 그러면 Q는 무엇인가? 마태와 누가가 공유하는 자료중 마가에서 오지 않은 자료이다. 이렇게 알고 있어야지!
그래서 이런 이론들을 일단 받아들여 가지고 우리가 공관복음의 자료를 분류해보고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마가에서는 어떻게 나타나고 Q문서에서는 어떻게 나오고 M과 L문서에서는 어떻게 기록되어 있는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우리가 공관복음의 근본을 이루는 자료를 어덯게 분류하던 그 모든 자료에 다 나온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3) 이 사실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당시 유행하는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했다는 것, 그러나 한결같이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는 것의 이 사실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우리로 하여금 예수의 자기이해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열쇠를 쥐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시사해준다.
무슨 말이냐하면 예수가 당시에 주장하는 모든메시야적인 칭호들을 피하였다. 그런데 한결같이 자신을 뭐라고 하였는가? '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뜻이냐? 예수가 자기 이해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문구를 잘 이해하면 예수가 자기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였는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2.'그 사람의 아들'이란 문구는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만 쓰는 문구이다. 두번째로 우리가 관찰해야 할 것은 초대교회에서 이 문구가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에 쓰였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리스도, 주, 하나님의 아들, 등을 신앙고백에 그리고 케리그마에 아주 흔히 쓰이는 기독론적인 칭호들이었다. 그런데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절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말이 3인칭으로 되어 있다. 즉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이 보어로 나오지 않는다. 항상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주어로 나온다. 남이-베드로나 안드레가 예수에 대해서 말할 때에도 '그 사람의 아들'이다. 이런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이말은 예수만 사용하는 말이다. 단 한번의 예외가 없다.
사도행전 7:57에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하늘이 열리고 '그 사람의아들'이 서 있는 것을 본다고 하였다. 그것이 단 한번의 예외이다. 그 외에는 막 14:62에 나오는 예수의 산헤드린에서의 심판 때의 약속관 관련이 되어 있다. 또 예외인 것 같으나 진짜 예외가 아닌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요 12:34절이다.
여기에서 예수가 쓰로 '그 사람이 아들'을 자기라 부르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 누구냐'고 의아해 하는 질문이 하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도 아니고 케리그마도 아니고 예수의 말을 되받아서 질문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진짜 예외가 될 수없다.
또 계 1:13/14:14에 단 7:13이 인용되어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라는 말이 나온다. 그러나 복음서와 같이 이렇게 관사를 동방하는 라고 나오지 않고 계시록도 하나의 예가 되지 못한다.
마찬가지로 히2:6절에도 시8:6절이 인용되어서 사람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생각하시며 그 사람의 아들이 무엇이관대 주께서 저를 권고하시나이까? 저를 잠깐 동안 천사보다 못하게 하시며 영광과 존귀로 관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아래 복종케 하셨느니라고 하여 창세기의 창조기사를 시로 읊은 시 8:6의 시가 인용되어 있다. 거기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거기도 관사가 있지 않은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공관복음의 관사가 있는 것과 다른 것이 나온다.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모든 칭호는 관사를 동반하는데 다만 요5:26에 관사가 나오지 않은 예외가 있다. 그렇지 않고는 전부 복음서에는 관사가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이 나온다.
여기에서 문제가 하나 발생한다. 질문하나가 발생한다.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칭호는 오직 예수의 입술에서만 나온 칭호이고 초대교회가 이 문구를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로 쓴 흔적이 전혀 없다면 이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표현이 전적으로 역사적인 예수가 쓴 표현인가? 아니면 교회가 예수의 됨됨과 예수의 의미를 선포하기 위해서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적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 내 가지고 예수의 입술에 넣은 것인가? 전자의 가능성이 훨씬 크다. 왜냐하면 후자의 중에는 스스로도 그네들의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형식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했을 것이 아닌가?
그러기 때문에 일단 나중에 보겠지만 자유주의 학자들은 복음서의 저자들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자기들의 기독론을 전개할려고 했다고 주장하는데 그것은 가당치 않다. 만일 복음서의 제자들이 '그 사람의 아들' 칭호로 자기들의 기독론을 전개하였다면 그러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이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에 쓰인 흔적이 나와야 할것이 아니겠는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가 우리의 구원자다.' 이런 흔적이 하나도 없다.
3.예수의 가르침에 보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이 아들;과는 자기 칭호를 써서 하는 가르침과 분리되어 있다.
쉽게 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과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같이 나오지 않는다. 어떤 곳에서는 이 두개념이 지리적으로 아주 가깝게 나오나 내용적으로는 전혀 연관이 되어 있지 않다. 가령 막8:38,9:1,눅17:21과 22 /21:27과 31 /마10:7과 23 /13:37과43/ 25:31절과 34/ 등에서 아주 가깝게 두 개념이 나오나 내용적으로는 분류되어 있다.
예외적으로 마 13:37 이하와 16:28에는 이 두 개념이 연결되어 있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 부분에 있어서 이 마태의 편집적인 노력에 의해서 연결되었다고 말한다.
자 그러면 문제가 또 하나 발생한다. 왜 이렇게 두 개가 분리되느냐? 이 둘다 예수의 가르침임에 틀림이 없으면 이 둘을 통해서 예수가 자기의 메시야적인 됨됨과 자기의 메시야적인 사역을 표현하려고 하였으면 이 둘이 같이 나와야 했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이렇게 두 개념이 분리되어 있는데 어떻게 이 두 개념이 서로 연관이 되는가? 이런 문제가 발생한다.
4.예수는 가지의 죽음에 대해 이야기할 때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을 한다. 공관복음에서 볼 수 있는 이 관찰에서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을 유추할 수 있다.
첫째로 아주 근본적인 문제이다. 나는 자유주의 학자들이 다 부인하니까 하는 소리인데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이야기하였느냐? 아니면 자유주의자들이 이야기한대로 엉겁결에 죽었느냐?
둘째로 예수의 자기 죽음에 대한 견해가 무엇인가?
세째로 이것이 지금 본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 사람이 아들'에 무슨 의미가 있기에 예수가 자기 죽음과 이 칭호를 연결시키는가?
네째로 예수는 '그 사람의 아들'의 재림, '그 사람의 아들'의 미래의 옴을 이야기하고 자기의 높임받음, 자기를 하나님이 옳다고 높인 승천을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느냐면 예수가 미래를 무엇으로 보았느냐? 특히 자기의 미래를 어떻게 보았느냐? 이상 5가지를 관찰하였다.
이상의 것이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관찰이다. 우리가 공관복음서를 눈을 크게 뜨고 보면 아주 이런 이상한 현상들이 나타난다. 이 5가지 사실들에서 유추되는 문제들이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주제가 신약신학의 아니 모든 기독교 신학의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왜? 예수의 자기 이해와 직결되어 있기 때무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제는 신약신학에도 물론 가장 결정적인 중요성을 가지고 있지만 모든 기독교 신학의 가장 결정적인 핵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지난 100여년 그 전에는 그러니까 이 모든 역사적인 비평적인 방법으로 보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인성을 나타내는 칭호이고 하나님이 아들은 하나님의 신성을 나타내는 칭호로서 하나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양성을 나타내는 칭호들이라고 이렇게 생각해왔다.
더구나 120년전부터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아무관계가 없는 칼세돈에서의 기독론적인 formula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을 밝혀 내었다. 이것은 역사적인 종교사적인 언어학적인 고찰이 발전하면서 고찰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그 뒤부터 지난 예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신약신학의 결정적인 중요성을 제공하게 되었다. 그것은 쉽게 말해서 지난 100여년 동안 이 주제에 대해서 신약신학의 학자들이 가장 많이 note한 것이다. 이 주제 연구에 대해서.. 그러니 이 주제에 대한 연구가 제일 많다. 또 그러기 때문에 이 주제에 대한 이론들의 가설들이 제일 많고 제일 복잡하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합의점이 없다.
그래서 쮜리히 대학의 E.Schweizer라는 조금 훌륭한 학자는 1960년대에 이 주제에 대해서 moratorium(토론중지)을 선언하자고 주장하였다. 이게 무엇인가? 이것이 경제적 용어(은행에서의 지불중지)이다. 이 단어가 이제는 일반화되어서 쓰인다. 그래서 무엇무엇에 대한 토론을 잠깐 중지하자는 것이다. 그러니 그 토론에 대해서도 토론중지를 선언하자고 한다. E.Schweizerrk가 이 문제에 대해서 하도 연구도 많고 의견도 분분하니까 더 혼돈만 되고 더 복잡해지니까 뭐라고 했느냐면 한 10년동안 아무도 연구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자고 하였다. 이것에 대해서 no-touch 그리고 예수의 다른 면, 성경에서의 다른 면을 자꾸 연구하다 보면 새로운 각도와 새로운 시각이 발달하고 새로운 빛이 발견되면 이 문제가 자연히 해결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 그냥 복잡해지니까 뭐라고 하였느냐면 토론중지하자고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그런데 E.Schweizer 지가 뭔데 토론중지를 선언해? 이렇게 중요한 문제를...
그래서 학자라고 생긴 것들은 이 문제를 한번쯤은 해결해 보려고 한다. 대개 미련하고 우직한 학자들이 이것에 대해서 한번쯤 손을 대볼려고 한다. 그중에 하나인 나도 거기에 대해서 연구해서 책을 썼다.
신약신학 제7강
어디까지 하였는가?
지난 시간에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중요한 관찰까지 하였다. 그러면 복음서를 읽을 때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이러한 현상들이 일어는데 이런 현상들을 가지고 있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을 함에 있어서 우리가 무엇을 참조해야 할 것이냐? 지난 시간에 한 것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관찰을 하였다.
2. 다양한 해석들을 위한 요인들
왜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한가? 하는 것에 대한 요인들, 다양한 해석들이 요인들에 대해서 오늘 자세히 논하기로 하자.
1)학자들의 전제
①이 학자들의 전제 중에서도 특별히 자유주의,비판주의 신학자들이 대개 가지고 있는 도그마가 하나 있는데 그게 뭐냐면 좀 지나친 학자들, 그 도그마가 뭐냐면 예수가 스스로 메시야라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non-messianic Jesus. 예수가 스스로를 메시야로 보지 않았다는 것이다 라는 도그마가 상당히 작용을 한다.
그래서 가령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면 이 도그마에 의해서 예수가 스스로르 메시야라고 부르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것은 칭호는 메시야에게 칭호가 될 수가 없고 예수이 메시야적인 자기이해를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어떻게 메시야가 될 수 있을 것인가의 이런 논리가 전개되는 것이다.
만약에 '그 사람의 다들'이라는 칭호가 종교사적으로 메시야적인 칭호임에 틀림이 없다면 그러면 예수가 스스로 자기를 메시야라고 보지 않았으므로 그러므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 칭호를 썼을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예수가 스스로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종말에 올 메시야를 지칭했거나 아니면 도대체 예수가 사용하지 않은 말을 교회가 지어내가지고 예수가 썼다고 교회가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이다라고 이런식을 신학을 전개한다.
만일 예수가 메시야로서 오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이 학자들의 도그마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요인이 된다.
②그러면 현대 심리학에서는 심리적인 어려움, 가령 종교사적으로 볼 때에 '그 사람의 아들'이 만약에 초월적인 존재, 신적인 존재라고 규명이 된다면 어떻게 이 나사렛 예수가 이 땅위에서 이 시간 속에 사는 사람이 자기가 바로 그 초월적인 사람이라고 하였겠는가? 이 심리적으로 상당히 믿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심정의 어려움도 학자들의 전제들로서 이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함에 있어서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한다.
그러니까 이런 논의를 좀 쉽게 한다면 학자들의 전제중 하나가 자유주의 학자들의 전제요 도그마요 심리적인 전제,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다.
2)방법론의 문제
비판적인 방법론은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아들'을 다양하게 해석할 수 가 있다.
①자료비판(source-criticism)을 해보면 공관복음서의 자료비판에 가장 유력한 설이 그렇다고 완전히 만족스럽지도 않지만 많은 학자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설이 무엇이냐하면 두 문서설이다.
두문서설이라고 하면 공관복음이 근본적으로 '막가복음'과 'Q'라는 두 문서로 구성이 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마가'와 'Q'와 그리고 누가가...
마태는 '마가'와 'Q'가 합쳐서 되었고 즉 마태와 누가는 마가에 Q를 사용하고 즉 마가의 작품에다가 덧붙인 것이 많다는 것이다. 거기다가 Q라는 어록, 즉 예수님의 어록 말씀들, Q는 예수님의 행적이나 역사적 이야기는 별로 없고 예수의 말씀들만 모아 놓은 것인데 간혹 이제 그 자료를 '마가'의 틀에 끼워 넣어서 만들었다는 것이다. '누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에는 자기의 특수자료가 들어 있고 누가에도 자기의 특수자료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처럼 가장 유력한 공관복음서 자료설에 의하면 이러한 내용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선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자료비평에 보면 이 Q가 난해해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것이 사실인데 그 종류가 다르다.
이 Q에 있는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의 해석,그 사람의 아들이 죽음에 대한 것만 나타난다. 이 의미에는 강조되는 것이 그 사람의아들의 죽음이다. 이것은 지난 시간에 이야기하였다. 그가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할 때에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한다 그런데 게 다 마가에서 온 자료이다. Q자료에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우리가 자료설을 자료비판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그에 버금가는 Q가 더 원래의 많고 오래된 자료로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진정으로 유추하는데에 마가가 좀더 발전시켜서 예수의 죽음을 강조하게 되었다.
왜? 마가에 있어서는 바울과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사건이 그냥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런식으로 전개한다.
그래서 Q공동체에서는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 예수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 아니고 종말에 온 예수의 지혜 선생으로써 하나의 선지자로써 활동하고 그가 종말에 올 그 사람의 아들, 메시야를 예고했을 뿐이라고 이렇게 그들은 그 삶의 아들을 해석한다.
따라서 예수가 세례요한과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 세례요한과 비슷하다.
②양식사 비판(form-criticism)에 의하여 학자들의 해석이 다양해질 수 있다.
가령 L. Kasemaan 같은 사람은 Q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은 원래 거룩한 법의 선언 형식으로 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이 사람에 의하면 가령 누가복음 12:8의 경우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지금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고백하면 그 사람의 아들도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천사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다 누구든지 지금 나를 부인하면 그도 부인될 것이다'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식상 양식사비판학에서 어떤 형식을 가지고 있느냐면 소위 Talio의 법칙을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대의 법 형식에서 가장 근본되는 공식이 Talio의 공식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래서 어떤 녀석이 자기 친구를 때려서 이를 부러뜨리면 그 벌로 그 녀석도 똑같이 이 하나를 부러뜨려 놓는 것이다. 이 친구가 눈을 빼면 가해자에 대한 벌로 똑같이 눈을 빼는 것이다.
이 동급의 복수의 원칙이다. 이 형식으로 눅12:8이 되어 있고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 나를 지금 시인하면 고백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그를 고백할 것이요 지금 나를 부인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그 때 부인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양식사 비판에서 Kasemann이라는 사람은 원래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법정에서 적용될 거룩한 법들이 모음 형식을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것은 천사들이나 선지자들이 초대교회의 제자들이 이렇게 해가지고 이것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주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나 뒤에 말씀하였는데 원래는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혹은 주의 영의 감동으로 받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에 선지자가 한 말이지만 주의 말씀이라고 하여 가지고 그것을 나중에 점점 발전시켜 역사적인 예수가 한 것으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③전승사 비판(Tradition-history)의 방법론에서는 가장 과격한 학자들이 내세우는 원칙이 무엇이냐하면 지난번에 설명을 하였는데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이다.
이것이 무엇이냐하면 가령 어떤 사상,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언어적인 구조나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표현된 신학사상이 어떻게 전승사적으로 발달하였는가? 하는 것을 본다.
그래서 구약 유대교 예수 원시 초대교회 그리고 원시 초대교회에서 유대초대교회, 아람어를 사용하면 팔레스탄인 초대교회, 헬라말을 사용하면 헬라초대교회 이런 식으로 어떤 가르침이 전승사적으로 발전했다고 단정하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이 가르침은 어떻게 전승된 것으로 보아야 하느냐? 할 때에 이 문제에 있어서 아주 중차대한 문제가 무엇이냐하면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느냐? 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어떻게 사용하였느냐?
그러면 예수가 어떻게 가르쳤느냐를 알기 위해서는 어떤 전제가 필요하다고 보느냐면 이 dissimilarity의 원칙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것에 대한 가르침이 만약에 유대교에도 있고 즉 예수가 복음서에서 가르쳤다고 하는 이것에 대한 가르침이 유대교에도 있고 초대교회에도 있으면 어떤 가능성을 상정할 수 있는가? 이것은 진짜 예수가 가르친 가르침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전승된 것을 교회가 마치 예수가 가르친 것 같이 내세웠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또 공관복음서에서 예수가 가르쳤다고 했는데 그런데 또 초대교회에서 만연된 사상인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예수가 가르치지 않았는데 초대교회가 자기들의 사상을 적나라하게 그 사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해서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예수의 입에다 넣었을 가능성이 있는가? 없는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간혹 그렇기 때문에 과격한 학자들은 무어라고 이야기하느냐면 진짜 예수가 진짜로 역사적인 예수가 가르쳤다고 주장할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느냐면 그 가르침과 주장한 것이 유대교의 사상과도 다르고 초대교회의 사상과도 달라야 한다. 그런 것만 진짜 예수가 가르쳤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인데 이것을 주종으로 사용하는 것이 전승사학파이다. 독일말로는 Unableitbarkeit라고 하는데 ableit 한다면 여기에서 유대교에서 '유도한다'는 말이다. '도출한다'는 말이다. Unableit이니까 유대교에서 도출되거나 줄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초대교회에서 Unableit한 것 즉 초대교회에서 줄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이 아주 비현실적인 방법이라는데에 있다. 왜 그런가? 이것은역사적인 현실을 완전히 무시하기 때문에 그렇다. 왜그러냐? 예수가 유대인 출신으로서 유대교에서 자란 사람인데 유대교에서 배운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예수의 가르침은 유대교와 비슷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예수는 역사속에서 산 사람이 아니다. 갈4:4에 보면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셔서 여인에게 나게 하고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셨다'로 하였다. 그것은 유대인으로 율법의 통치 밑에 나게 하셨다는 의미이다. 예수가 유대인으로 나신 것이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하는 율법의 통치밑에서 나셨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방법론은 예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가? 예수는 유대교와 아무런 상관과 관련이 없다는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초대교회에서는 더 심각한다. 초대교회는 자기들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예수의 제자로 자기 자신을 보았다. 그런데 예수에게 하다도 배운 것이 없겠는가? 예수에게 배운 것을 초대교회가 만약에 계속했다면 이 방법론에서 우리가 무엇으로 보아야 하는가? 초대교회에서 지어내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런 엉터리 제자들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이 방법이 아주 기가막히게 쓸데가 있다. 지난번의 간접기독론이 바로 이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러면 어떤 부분에 이것이 필요하느냐면 예수의 가르침 중에 가장 독특한 것으로써 누구든지 부인할 수없는 점이 있다. 누구든지 부인할 수 없는 예수의 가르침의 최소한을 확보하는데에 있어서 그렇다.
만약에 일반적으로는 이렇게 비현실적인 방법론이나 우리가 이렇게 비현실적인 방법론을 사용해서라도 진짜 유대교와도 다르고 초대교회와도 다른 예수의 독특한 것을 발견한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두가지 면에서 있어서 중요하다.
첫째로 예수에 있어서 독특한 점을 안다는 것이고 둘째로 그것이 예수에게 있어서 독특한 점이기 때문에 예수의 자기 이해를 표현하는 가장 좋은 수단일거라는 것이다.
그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멘이라고 하였다. 예수가 아멘을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유대교와 전혀 다르게 사용한다. 유대교는 우리아 같이 기도의 끝에 사용하였다. 초대교회에도 다 그렇게 기도의 끝에 사용하였다. 그런데 예수는 어떻게 사용하였는가? 중요한 사람 앞에 사용하였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아멘 내가...' 예수의 아멘 용법은 중요한 것이다. 이것은 예수의 아주 독특한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아멘 용법에서 예수의 아주 중요한 자기이해를 도출할 수있다고 하였다.
그렇게 해놓고 보니까 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가 우리에게 예수에 대해서 중요한 이해의 한 방법을 제공하다. 따라서 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가 예수이해에 있어서 출중하게 쓰일때가 있다. 그러나 이 법칙이 일반적으로는 이러한 비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문제가 많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이 방법론을 얼마만큼 사용하느냐? 할때에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에 있어서 나타났던 것을 가령 공관복음서에 나타나는 예수가 하였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유대교에 있어서 가령 에녹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말과 비슷하면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에서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가짜로 보아야 한다. 즉 유대교에서 전증받은 것을 마치 예수가 한 것처럼 만든것으로 보아야 한다. 전승사 비판에서는...
그렇게 하면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사람은 예수가 유대인이었으므로 묵시문학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따라서 묵시문학의 것과 비슷하다고 해서 예수가 말한 것이 가짜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하며 도리어 진짜일 가능성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The principle of dissimilarity를 이해할 수 있ㄷ. 이렇게 해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 많이 차이가 난다.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해석이 다양한 해석이 왜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이처럼 이러한 방법론을 배우면 신학의 내용도 배울수 있지만 신학하는 방법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내용도 중요하지만 신학적으로 사고하는 훈련도 필요하다.
물론 여러분이 교회에 가서 설교하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여러분의 사고하는 훈련을 배우고 나면 여러분의 설교가 비상해진다. 이런 훈련을 하나도 하지 않으니까 성경해석을 하나도 할줄 모르니까 맨날 엉뚱한 이야기나 한다. 그러니까 교회가 오래 다닌 사람에게 당신 도대체 무엇을 믿습니까? 하고 물으면 '잘모르겠다'고 '그냥 믿으면 되는게 아니냐'고 대답한다.
여러분들 그런 사람이 되지 말로 여기 학교의 교훈에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를 아주 신기하게 보는데 개혁교회 장로교 전통에 신학이 '학'을 상당히 중요하게 여긴다.
영국에 가봐요. 장로교 종교개혁한 스코틀란드의 교육 수준은 지금도 잉글란드는 일반 대학이 서울에 2개밖에 없는데 스코틀랜드는 대학이 4개이다.
스코틀랜드는 잉글란드보다 가난하고 인구도 작고 그래도 대학이 4개이다.
그래서 장로교 신자들이 일반적으로 교육수준이 높고 목사들도 학식이 깊으며 백성들도 일반적으로 높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학을 상당히 중요시한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별로 그런 것이 없다.
3)종교사적인 배경(The old religions, geschichfliche schule)
세째로 또 하나의 형태가 무엇이냐면 종교사적인 배경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아들'에 대한 해석에 큰 차이가 있다.
옛 종교사학파 소위 The old religions 독일말로 geschichfliche schule인데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20세기에 횡횡하였던 옛종교 사학파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에 있어서 종교사적인 배경을 무엇으로 보았느냐 하면 고대 중동 문헌과 지중해 연안의 문명의 즉 인도에서부터 로마 이집트까지 아주 만연되었던 '태초인간' 소위 The primal man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상의 한 표현으로 보았다.
그래서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아담이 무슨 말인가? '사람'이다. 아담이라는 말이 히브리 말로 무슨 의미인가? 사람이다.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 설화도 중동내에서 널리 퍼져있던 '태초인간'의 사상의 한 판 한 거주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이 히브리판ㅇ이 창세기에 나오는 '아담'이라는 것이다.
또 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도 '태초의 인간'으로서 어떻게 된 셈인지 악의 힘에 패배해가지고 모든 자손들이 악과 고난에 종속되었는데 종말에 이 '태초의 인간'이 다시 회복을 해가지고 자기 자신의 자손을 다 회복한다는 그런 사상이 중동에 많이 있었는데 이 창세기 1장이나 다니엘서 7장이나 다 중동에 널리 퍼졌던 '태초인간'에 대한 히브리판인 것이라는 것이다.
여기의 바벨로니아판은 조금 차이점이 있으나 그것도 마찬가지이다. 이런 식으로 종교사학파들이 생각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종교사적인 배경에 의해서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하낟.
오늘알 이것을 믿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아마 지금도 조금 뒤떨어진 곳에서는 그러한 것을 하고 있겠지만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아직도 주장하는 사람들은 뒤떨어진 사람들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묵시문학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이 묵시문학에서 메시야, 하늘에서 오는 초월적인 메시야, 특히 다윗왕조를 재건하는 다윗의 자손 메시야, 정치적인 메시야와 대립될 수 있는 대조될 수 있는 초월적인 묵시문학상의 메시야 칭호이었는데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그런 묵시문학상의 배경에서 이었다고 한다. 이런 것이 상당히 많이 퍼져 있었다.
특히 보수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이것을 많이 주장하였는데 나중에 고찰해보니까 그렇지가 않다.
그것도 이제 튀빙겐의 구약학 교수인 H.Gsee(게세) 같은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다윗의 아들'이라는 메시야와 대조되는 또 하나의 초월적인 메시야 사상이다.
이처럼 구약의 메시야 사상이 여러가지로 표현이 되는데 내용이 다 똑같은데 다만 표현 방법만 다르다는 이말이다. 그래서 메시야 geschichfliche '그 사람의 아들' 등 이와같은 것을 서로 연결되는 전승사적으로 보려는 것이 서로 연결되는 것으로 보려는 것이 종교사적인 학파의 접근방법이다.
그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은 옛날 종교사학파들이 말했듯이 옛날 중동의 '태초인간'에서 온것도 아니고 무슨 다윗의 아들과 대립되는 천상의 초월적인 묵시문학상의 메시야 사상도 아니고 구약과 유대교의 내적인 발전의 결과로써 구약과 유대교의 표현의 메시야사상의 또 하나의 메시야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는 이런 식으로 게세가 주장을 한다.
이렇게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종교사적인 배경을 어떻게 설정하느냐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 되는 것이다.
4)언어학적인 측면
우리 복음서에서는 한결같이 헬라어로 로 되어 있다. 한결같이 이렇게 되어 있다는 것 조차가 상당히 신기한 것이다.
그런데 헬라어로는 '그 사람의 아들'의 표현은 아주 어색하다. 우리말로도 아주 이상하지만..
헬라어 문장으로는 그러한 말이 나온 예가 없다. 그런데 왜 어색한 표현을 이렇게 한결같이 하는가?
이것을 어학적으로 왜 이런 표현이 나오느냐를 규명해야 한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자들의 의견이 이점에 있어서는 대부분이 일치한다.
이것은 아람어의 의 문자적인 헤랄어 번역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가 예수님 당시에 어떻게 쓰였느냐? 예수가 가령 했으면 듣는 사람이 이 말을 어떻게 이해했을까? 그것을 하나의 칭호로 쓸수가 있었느냐? 아니면 그것이 하나의 숙어적인 용법으로 '한 사람'의 뜻으로 이었느냐?
'한사람'의 뜻이었으면 소위 한 사람의 말에 말하는 자기를 포함시키는 것이냐? 그럴 경우에는'나같은 한 사람' 이란 뜻일 것이다. 아니면 자기만을 지칭해서 말할 수 있는 것이냐 등의 언어학적인 면에 있어서는 그 당시에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쓰였을 것이냐? 이것 또한 '그 사람의 아들'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다양하게 설명하는 하나의 pattern이다.
이상의 4가지가 '그 사람의 아들'의 해석에 있어서 여러가지로 의견이 분분하게 만드는 것들이다.
3. 다양한 해석들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은 굉장히 많다. 그리고 자신이 학자라고 행세하는 사람들은 여기에 대해 한가지의 주장은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주장이 각기 다르다. 또 어떤 학자들은 아주 설득력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으므로 나는 이것에 대해서 의견을 유보한다고 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어떤 이는 이렇게 중요한 문제에 대해서 의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으니까 하면서 여기에 대해 다 한마디씩 한다. 그래서 그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고 대가 중욯나 것만 7개를 준비하였는데 설명하기로 하겠다.
1)옛 종교사학파
여기는 W.Bousset 나 G.Mowinkel 이나 O.Cullmann, F.Borsch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옛 종교사학파는 W.Bousset에 의해서 완전히 성립이 되었고 Cullmann이나 Borsch에 의해서도 전개가 되는데 이들에 의하면 '그 사람의아들'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동양과 헬라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상의 일부로써 유대 묵시문학에서 받아들여져 가지고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었는데 복음서에 묵시적인 메시야적인 칭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O.Cullmann은 뭐라고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느냐면 구약성경의 이 '태초의 인간'에 대한 추측이 두가지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이다. 그런데 이 아담은 태초체 죄를 범해서 자기 자손인 모든 인류를 전부 죄와 고난의 통치를 받게 하였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그 태초의 인간이 다시 종말의 인간으로 나타나서 대니엘서에서 종말의 인간으로 나타나서 악과 고난을 극복하고 아담의 죄를 속하므로 아담의 죄를 극복하고 그의 후손들에게 그에 의해 대표되는 그의 후손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종말의 인간, 이 '그 사람의 아들'이 태초의 인간 아담의 죄를 극복하느냐? 속하느냐? 의 여기에 Cullmann은 이사야서의 후반에 나타나는 주의 종의 노래와 함쳐졌다는 것이다.
예수에 의해서 주의 종의 노래,주의종, 이사야서 49-53장까지 나오는 주의 종의 사상과 종말의 인간이 합쳐져가지고 종말의 인간 '그 사람의 아들'이 주의 종으로써 자신이 ㅁ나유를 위한 제물로 속죄의 제물로 드려져서 아담의 죄를 속하고 자기의 백성을 의롭게 한다고 전개한다. 이것이 Cullmann이 옛종교사학파의 전제를 계승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해석이다.
2)옛 영국학파(The old English school)
이것은 우리들끼리만 쓰는 용어인데 이 The old English school은 옛날이 아니라 1960년대 까지만 활약한 중요한 영국의 대부분의 학자들은 대개 지금 내가 소개할려는 해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T.W. Manson이나 V.Taylor 과 C.H.Dodd나 M.Black이나 캠브리지의 C.F.Moule 등 FF Bruce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해석을 하고 있다. 그게 무엇이냐 하면 무슨 해석이냐하면 '그 사람의 아들'은 묵시문학에서의 메시야의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옛영국학파의 해석은 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종말의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symbol이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예수가 이런 의미로 종말의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으로써 자기를 보았고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주의 종은 이와 같은 해석을 해서 자기가 패역한 이스라엘 대신에 주의 종으로써 속죄의 죽음을 함으로써 종말에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고 가르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이 Manson이나 Tylor이나 Black 같은 사람이 가르친 입장이다. 그런데 Manson은 거기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예수가 말할 때의 '그 사람의 아들'은 에수 자기 개인자격이지만 자기와 연합하는 운명을 같이 하는 자기의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듣고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되겠다고 하는 자기 제자들과 연합해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구성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The old English school에서도 Moule이나 Hooker나 Barrett는 조금 방향이 다른데 이들은 이사야서 53장의 주의 종의 노래가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에 전혀 관계치 않는다고 본다. 아까 이야기한 Manson이나 Taylor나 이런 사람들은 다니엘서 7장이나 이사야서 53장이 연합되었다고 보는데 지금 Moule 이나 Hooker나 Barrett는 이사야서 53장은 연결이 아니고 다니엘서 7장 자체에서만 그 사람의 아들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symbol로써 상징으로써 이방인들로부터 고난을 받고 종국에 하나님으로부터 높임을 받는다는 사상이 다니엘서 7장에서만 나왔다고 주장한다.
하여간 그러한 차이점은 있짐나 이 사람들이 모두 다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냐면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라기 보다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대표하고 상징하는 의미로 다니엘서 7장에서의 해석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3)독일학파,비판학파
여기에 속하는 학자들로는 R.Bultmann 이나 W.보른캄,그의 제자인 H.E.Toat 또 하나의 다른 제자인 F.Hahn이나 K.코르테 이런 사람들 그리고 H.E.Toat의 영향을 받은 R.H.Fuller 영국 사람으로서 A.J.D. Higgings 등 이런 사람들을 대표하는 비판적인 학자인데 Bultmann이 이런 식으로 원래 해석을 창시하였고 그것을 그의 제자 보른캄이 발전시켰는데 그것을 보른캄이나 Hahn 등이고 그래서 Toat가 대표적인 학자이다.
이들은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면 공관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형태를 3가지로 분류를 한다.
①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 즉 당시가 아니라 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씀. 아까 이야기한대로 만일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과 함께 영광중에 올 때에 부인할 것이고.. 등의 이런 말들이 꽤나 많다.
②죽고 부활할 '그 사람의 아들'. 마가복음 10:45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나의 몸을 대속물로 주려함이니라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고 3일만에 부활한다. 이런 말들은 여기에 해당한다.
③현재 이땅에서 겸손하고 가난하게 사는 그 사람의 아들. 대표적인 것이 새도 깃들 둥지가 있고 여우도 굴이 있건만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
현재에의 일이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고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였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와서 먹고 마시니까 탐식자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 미래나 과거가 아닌 현재에 놀림받고 고난받고 겸손히 가난하게 사신 것이다.
이렇게 '그 사람의 아들'의 해석에 있어서 3분한다. 3가지 종류로 분류를 한다. 그러면 이 속에 들어있는 3가지 종류의 말들 즉 3가지의 '그 사람의 아들'의 의미가 각각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러기 때문에 한 사람이 위의 3가지의 이유를 다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사람들은 뭐라고 주장하느냐 하면 위의 ①번 것만 예수의 진짜 말이라고 한다. 또한 첫번째 것도 다 예수의 진짜 말이 아니라 첫번째 말 중에서 한 2-3개가 예수님의 진짜 말이라고 한다.
그것은 어떤 말이냐면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내세우지 않고 미래에 올 그 사람의 아들, 자기 아닌 다른 사람, 다른존재를 미리 소개하는 것 같은 문장 형식을 가진 말로 된 것만 진짜라고 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3개밖에 없다.
아까 이야기한 눅12:8 그것은 마가같은 것을 Q말이라 하는데 그런데 그것은 막8:38/막14:62
산헤드린 재판 때 대제사장이 이제 유죄판결을 내림으로 예수가 여기에 대해서 뭐라고 하는가? 너희들이 이제 '그 사람의 아들'이 높임을 받아 하나님의 우편에서 심판을 하는 것을 보리라 고 말한다.
이런 문장형식에 있어서는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든지 아니면 자기와 다른 제3자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소개하는 것이 평범치 않다. 그냥 형식말을 보면...
그런에 이 학자들은 불트만,보른캄,퇴트 등 독일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여기서 뭐라고 주장을 하느냐 하면 예수가 여기서 자기 아닌 다른 종말의 메시야적인 존재, 종말의 심판자요 구원자인 '그 사람의 아들'을 미리 예고한다는 것이다. 이것만 진짜라고 한다. 그러나 여기에 해당되는 것은 2-3가지 뿐이다.
그렇게 설정을 해 놓으면 여기를 어떻게 논리를 전개하느냐면 그러면 어떻게 해서 다른 미래에 속한 말들 중에서도 예수가 종말에서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내세우는 말이 있다면 그 아들의 어떻게 이 진짜 말에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또 둘째말은 어떻게 해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그리고 세번째 말도 어떻게 해서 누락이 되었겠는가? 를 초대교회의 삶의 장 초대교회의 sitz im Leben을 재구성해 가면서 전승사적으로 해석을 하려는것이 비판적인 학자들의 방법이다.
오늘날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여러 해석들 중에 아마 이 독일학파의 비판적인 학파의 의견이 자유주의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 제일 많이 제일 흔히 수용되는 견해이다. 오늘날의 다수 의견이라고 볼 수있다. 최근에 와서 이 다수가 많이 무너졌지만 그래도 자유주의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서는 이 의견이 제일 많이 수용이 된다고 볼 수 있다.
4)E.Schweizer
이것은 일반적인 학자들의 견해인데 쮜리히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다가 은퇴한 E.Schweizer가 노르웨이의 오슬로 대학에서 L.Leivestad 같은 학자들에 의해서 대표되는 인물인데 이 사람도 '그 사람의 아들'의 위의 분류를 하기는 그대로 한다. 그러나 이 분은 독일학파들과는 정반대로 ③의 말씀이 진짜 말이고 이 ③의 현재 말씀이 진짜 말씀으로서 Schweizer의 같은 경우에는 ②의 말씀도 몇 마디는 진짜 말씀이라고 한다. 그러나 거기는 원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안붙었고 그냥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고 지금까지 오해받고 핍박받으며 사는 것의 연장으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고를 했는데 거기에다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거기다가 붙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③번의 말씀이 진짜 말이고 ②번의 몇개가 어느 면에 있어서는 진짜 말이고 ①의 경우에는 초대교회가 예수의 부활 후 곧 재림할 줄 알았는데 그 재림이 곧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초대교회가 유대묵시문학적 종말론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믿기는초대교회가 원래 유대 묵시문학적인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에서 점차 완성된 종말론으로 정반대적으로 변한 것이다.
C.H.Dodd도 마찬가지이다. 원래 예수의 가르침에 있어서는 완성된 종말론, 예수에 의해서 이미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종말론적 구조가 탄생되어지는데 이것이 현실적으로 예수의 재림의 형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이 되지 않으니까 차차 유대묵시문학적인 경향으로 되돌아 갔고 유대묵시문학적으로 규명할려고 하였다.
그래서 가령 요한계시록 같은 문체가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요한복음이나 요한 계시록이나 모두 요한문서임에는 틀림이 없는데 요한 학파에서 나왔다해서 요한문서임에 틀림이 없는데 요한복음에 보면 ...
요한계시록에 보면 미래지향적이다. 미래지향적인 종말론이 강하다.
어느것이 문제인가? C.H.Dodd는 요한복음적인 것이 문제이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아들'에 있어서도 교회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변화하면서 만들어낸 말이라고 한다.
L.Lerversad는 독일의 아주 비판적인 학자들에 대항해 가지고 '그 사람의 아들'이란 칭호가 메시야적인 칭호이었으면 전승사적으로 그 흔적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에녹서나 4에스라서에 부분적으로 있다고 하는데 그런 책이 다 무슨 책인가? 외경이다.
그러니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는 흔적이 하나도 없는 것이다. 또 설령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 하더라도 예수가 어찌 그 말을 사용할 수 있겠는가? 왜? 에수에 대해서 우리가 확실히 알아볼 수 있는 경향이 무엇이냐 하면 당시 유대교에서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들은 무엇이 문제인가?
다윗의 아들이니,다윗의 가지니 하는 이런 메시야적인 칭호들이 거의가 어떻게 해서 이 메시야적인 칭호를 썼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L.Leivestad는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고 약한 인간이라. 약한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의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죄와 악과 고난 밑에서 허덕이는 인간으로서 자신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것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렇게 보면 ③의 말만이 제일 가깝게 쓰인 것이다. 그러기에 ③의 말만 진짜라고 한다.
자 여기서 지금 3)의 해석자들과 4)의 해석자들의 차이점은 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나 3)은 세가지로 분류에서 어느 한 것을 진짜의 말이라고 해가지고 진짜 말에서 정리가 되어서 다른 말로 발전해 가는 방법론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결론은 결과적으로 첫번째의 것이다. 4)의 경우에는 ③이 옳고 ①②가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둘중의 하나가 잘못되었던지 둘다 모두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똑같은 전제를 가지고 똑같은 방법론을 사용하는데 어떻게 이렇게 180도 다른 결론이 나타날 수있는가? 그러므로 위의 방법론 3)4)는 둘중에 하나가 옳든지 둘다 그르든지 둘중의 하나이다.
5)독일의 과격파학파
이 독일의 과격파 학파는 옛날의 본 대학에서 가르쳤던 P.Vielhauer와 E.Kasemann 그리고 이들이 영향을 받은 영국의 N.Perrin인데 N.Perrin은 나중에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쳐서 미국의 과격한 영향을 가진 많은 학자들을 배출하였다. 이들에 의하면 S.Kasemann의 스승인 불투만 그리고 친구인 보른캄인데 이들이 아까 주장한 위의 3가지 중에서 어느 하나를 주장하고 이론을 폈는데 비하여 이친구들은 어느것 하나도 해당되지 않는다. 예수가 도대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입에 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모두다 교회가 지어내가지고 예수의 입에 집어 넣은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 우리가 주로 지난 번에 관찰한 대로 우리가 복음서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씀이 한두절이 예외를 제외하고는 다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분리되어 있다. 마태복음에서 한두절 예외가 나오는데 그것은 대개의 학자들이 마태의 편집사적인 접합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예를 떠나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하나님 나라와 전부 분리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가 한사람이 하나님 나라로 나아올 때에 예수가 만일 '그 사람의 아들'로 지칭하였다면 미래에 오는 어떤 메시야적인 지칭을 하였다면 자기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하나님 나라, 그 구원의 개념인 하나님 나라와 연결을 시켰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분리가 되느냐? 그러니까 둘중에 하나는 예수가 한 것이고 하나는 예수가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의 주제에서 하나님 나라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수없이 이야기하지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이 가짜라고 성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argument를 전개한다.
그러나 이것을 잘 생각해보면 앞 뒤가 맞지 않고 똑똑한 것이 아니다. 왜 말도 돼지 않는 소리이냐? 우리가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지난번의 기본적인 관찰에서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이 아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을 관찰하였다. 분리되었다는 것에 대해서 이 사람들은 그러한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그러면 그게 말이 돼요?
결론은 무엇이냐면 예수가 이것으로 말했는데 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목해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자기들의 신앙고백의 일부로 그런 말들을 지어냈다는 것이다.
이 사람들의 논리가 성립 될려면 교회가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 사람의 아들을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섞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에 의하면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은 왜 지어냈는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이 역사속에 가져올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 이런 식으로 하였을 것이 아니겠는가?
이 사람들에 의하면 교회가 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만들어 내었는가? Kasemann이나 Perrin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위리의 반격은 교회가 만일 지어냈다면 하나님 나라라는 말과 '그 사람의 아들'을 접합시켰을 것이 아니겠는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잘생각해보라.
이렇게 형식적으로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 분리되었다는 것이 도리어 둘다다 예수가 한 말이라는 가능성을 더 높이는 것이다. 만약에 하나는 예수가 한 말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가 지어낸 것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예수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교회가 지어냈다면 교회가 얼시구나 하고 여기다 붙였을 것이 아닌가?
예수가 가령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내가 하나님의 영으로 내가 하나님의 손가락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자를 고치면 너희들 가운데 벌써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는 이 말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중요한 말이다. 그 말을 교회가 전승하면서 지어 내야할 것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내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지금 병자들을 고치고 귀신을 쫓아내면 하나님 나라가 너희 가운데 임하였다고 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와같이 이 사람들의 결론은 도리어 정반대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다. 왜 그렇게 이 두개가 분리되어 있느냐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는지 모르지만 하나님 나라는 에수의 무엇인가? 예수의 공적인 선포인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공적인 선포인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은 예수가 누구에게 한 말인가? 자기의 제자들에게 내적인 가르침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공적인 가르침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내적인 가르침이다.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분리된 것이다. 왜 그러느냐는 조금 있다고 말을 더 자세히 하도록 하겠다.
6)새로운 영국학파(The New English School)
이것은 옥스포드에서 가르치는 G.Vermes에서 시작해가지고 M.Casey, B.Lindars 이런 친구들이 중심이 되는 학파인데 지금 이들이 상당히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이들은 언어학적인 고찰로부터 시작을 한다. 이들의 주장은 복음서의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헬라어 말투에는 이런 아람어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아람말이 하나는 로 나타나고 그냥 로 나타나기도 한다. 어느시대의 아람어냐 어느 지방의 아람어이냐에 따라 이런 여러 종류들로 나타나는데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이 말은 두 세가지의 의미를 갖는 숙어이었다는 것이다. ①a man(일반적인 한 사람) 또는 the man 이러한 것을 일반적 사람이라고 한다. 한 사람이니까 말하는 자도 포함되는 것이다. ②the man as I(나같은 사람) 이것도 일반적인 용법이나 더 적용범위가 좁아지는 것이다. ③그 말이 I(나)에 대한 대칭어라는 것이다. 나에게 나를 두고 말할 때 나에 대해서 대칭해서 사용하는 말인 것이다. as 는 예수가 주로 이용법으로 많이 사용하였다.
그러니까 그 사람의 아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고 단지 '나'라는 말과 대치한 것 밖에 없다는 것이다. M.Casey는 사람이 이것도 예수가 주권적임을 주장한다는 것이다. B.Lindars의 해석에 의해서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특별히 예수에 의해서가 아니라 ②의 '에수 같은 자'라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
그러나 우리가 복음서에 나타나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여기가 이런 용법으로 해석되지 못한다는 말을 많이 있다고 그런 말을 많이 한다. 그러면 그 사람들은 뭐라고 하느냐면 그런 것은 다 가짜라는 것이다.
예수가 원래 이런 의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썼다. Lindars에 의하면...
그런데 교회가 나중에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그 표현을 아람말에서 헬라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다니엘 7장의 영향을 받아가지고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칭호로 탈바꿈시켜가지고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말들을 지어내서 예수의 입속에 넣어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했다는 거이다.
또 이학파에 의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과 다른 숫자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원래 예수의 입의 말에 있어서 나중에 교회가 예수의 말을 오해해가지고 예수는 이렇게 일반의미로 썼는데 예수에게만 적용되는 메시야적인 칭호로 탈바꿈해가지고 다니엘서 7장에서 자꾸 떨어지기 시작한 것이지 원래 실제 예수는 다니엘 7장과는 관계없다고 한다. 이것이 새로운 공식이고 자꾸 이들이 주장한다. 예수 당시에 이말이 그렇게 쓰였느냐?
7)H.Gese와 튀빙겐 학파
옛날 튀빙겐 학파가 아니고 지금의 튀빙겐인데 아까 이야기한대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과 같은이'는 구약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메시야적 전승의 한 종류로서 구약에 나타나는 다른 메시야적 표현 즉 다윗의 아들, 주의 종, 지혜 등과 전승사적으로 결부시켜서 해석해야 된다고 한다.
내가 지금 분류를 7가지 하였다. 이외에도 대단히 많다. 그 중에서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 내가 분류한 것이 특히 이전에 많은 영향력을 끼치고 많은 여러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받아들이는 그런 학설들이다. 이중에 3)번것과 6)번 것이 오늘날 비판적인 학자들 중에 가장 영향력이 있는 설들이다.
다음은 두 학파의 요점을 간단히 더 고찰해보고 이 친구들이 왜 틀렸는가를 설명하고 내가 발견한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하겠다.
신약신학 제8강
Ⅱ.종교사적 배경(Religion-historical Background)
지난번에 한 것은 서론이고 이제는 종교사적인 배경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 헬라어로는 가 아주 불가능한 구문이다. 그래서 모든 학자들이 일치하는 것은 이것이 아람말 의 문자적인 번역이라는데에 일치한다. 그러니까 이 표현의 종교사적인 배경을 찾기 위해서는 바로 이 아람말 표현의 종교사적인 배경을 찾아야 한다.
그러면 무엇이 아람말 '그 사람의 아들'이란 말의 배경일까?
우리 복음서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과 같이 나오는 구절의 많은 경우에 다니엘서 7장이 은유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것이 좋은 실마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 가운데 자기가 다니엘서 7:13-14절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과 같은 이'와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의 배경을 일단 다니엘서 7장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을 아는가?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은 무엇을 보는가? 한 환상을 본다. 한 환상을 보는데 거기에 보면 아주 혹독하게 생긴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본다. 그래가지고 이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면서 앞의 짐승들을 다 잡아 먹는다. 그 다음에 9-14절까지 무엇을 보는가?
그래서 4짐승들이 차례로 일어나는 것을 보고 그 다음에 내가 또 보니 뭐가 놓이고? 거기에 왕좌(보좌)들이 놓이고, 거기에 우리말 번역에 그냥 단수로 왕좌라고 하였는데 우리말에는 단수 복수 개념의 구분이 없어서 그래요. 그런데 원래 그게 복수이다. '왕좌들이 놓이고' 그 드암에 누가 나타나는가? 옛적부터 계신 이 곧 하나님이 백발이 성성한 노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하나님이 옛적부터 계신이가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옛적부터 계신이, 머리가 양털같이 희고...
그러니까 이 장면이 무슨 장면이냐 하면 하나님이 왕좌위에 등극하는 장면인 것이다. 등극하는 것을 환상으로 본 것이다. 그리고 뭐가 열립니까?
심판이 열리는 것이다. 책이 열리고...책이 열렸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심판이 열렸다는 의미이다. 심판이 열리고 그 마지막 짐승이 그러니까 마지막 짐승이 심판을 받는다. 권세를 다 빼앗기고 심판을 받는다.
그 다음에 내가 또 보니 심판의 과정이 죽 설명이 되고... 또 내가 보니 누가 나타나는가? 또 한 존재가 나타난다. 한 존재가 나타나는데 즉 한 사람의 아들 같은이가, 거기에 아람어로 어떻게 되어 있는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났는데 무엇을 타고 나타났는가?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
14절에 그리고 그가 어디로 나타났는가? 옛적부터 계신 이에게 나타났다. 그래서 그에게 뭐가 주어졌는가? 권세가. 즉 왕적인 권세가 주어졌다. 그리고 나라가 주어졌다. 통치권이 주어진 것이다.
9절......하나님---옛적부터 계신 이
심판
13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 )
구름을 타고
14절...... 권세(왕권)
그러니까 13,14절의 장면은 9절의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을 하고 또 하나의 존재가 하나님의 보좌 옆에 등극하는 장면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는 장면이다. 하나님 나라의 통치권 즉 대권을 받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니까 다니엘이 환상 가운데 본 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이 보좌에 등극하시고 찬하의 심판을 하시는데 그래서 마지막 짐승이 심판을 받고 또 하나의 존재가 하나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등극을 해서 하나님으로 부터 왕권을 받는 나라를 받는 통치권을 받는 그 장면을 이 다니엘이 본 것이다.
그런데 그 한 사람 같은 이의 권세와 영광은 4짐승들이 왕권과는 달리 영원히 계속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고 하는 데에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이것이 한 인간이 아니라 한 신적인 존재(theophany)임을 알 수 있다.
왜 그러느냐면 구약에서 이 구름은 하나님이 출현할때마다 항상 쓰이는 문구이다. 구름이라는 상징언어는 이 하나님의 출현, theophany 하나님의 출현에만 동반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른바 주의 종인 천사가 나타나도 구름을 타고 나타났다고 한다. 그런데 이 '한사람 같은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고 하는데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이것이 사람이 아니라 한 신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서 벌써 하나님과 또 하나의 신적인 젼자가 하나님에게 다가와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받는 장면인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이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그가 가 무슨 칭호가 아니다. 무슨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다. 이것은 그냥 한 신적인 존재, 하나님과 또 하나의 제2의 신적인 존재가 환상 가운데 나타났는데 그의 모양이 사람같더라는 것이다. 사람같은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그말이다. 는 그냥 '한 사람'이라는 하나의 숙어로써 한 사람과 같이 생긴 신적인 존재가 나타났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이 아들'은여기서 무슨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다. 한 신적인 존재가 사람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의 재미있는 것은 여기의 환상 중에 두개의 신적인 존재들이 상정되게 된다. 하나님과 또 하나의 사람의모습과도 같은 신적인 존재...
여기에서 하나님도 사람과 같이 나타난 것으로 그리고 있다. 그런데 이 두번째의 신적인 존재도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라고 표현되고 있다. 이렇게 두개의 신적인 존재를 나타내고 있다.
그러면 사람들이 다니엘서 7장은 이러한데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은 어떻게 되겠나?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배경.
다니엘서 7장의 이런 환상이 그려지는 것에 대한 종교사적인 배경은 어떤 것일까? 고 많은 생각을 하였다.
1)그래서 옛 종교사학파에서는 다니엘서 7장이 이란에서부터 에집트까지의 중동의 널리 펄쳐지고 흩어졌다고보는 이 '태초의 인간'의 한 사상의 유대교판으로 볼려고 하였다. 종교사학파에서는 이란,바벨론니아,에집트,심지어는 인도,그리고 영지주의 먼서들에 널리 흩어진 '태초의 인간'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신화가 있었는데 그것의 유대교판이 두가지로 나타났다고 본다.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 기사로 나타났고 또 다른 하나는 여기의 다니엘서 7장의 '사람의 아들'의 기사로 나타났다고 보았다. 그래서 이것이 나중에 Enoch의 비유 1En 37장에서 71장을 에녹의 비유라고 하는데 이 에녹의 비유와 네번째 에스라책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엣종교사학파에서는 이렇게 고대 문명의 '태초의 인간'에 대한 관심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오늘의 인간의 숙명,고난의 인간의 숙명을 설명하기 위해서 태초의 인간에 대한 태초의 인간이 무엇을 어떻게 하였기에 그 후손들이 이렇게 고난에 떨어졌나 하는 추측을 많이 하였는데 그것이 이제 태초의 인간의 빛의 존재로서 아주 찬란한 존재로서 악과 고난을 모르는 존재이었는데 어찌된 셈인지 악의 힘과 싸워서 져가지고 타락해가지고 그의 자손들이 다 악과 고난에 어두움의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다.
그래서 이 '태초의 인간'의 자손들이 어떻게 구원받느냐? 이것이 다시 고대문명이 태초 인간에 대한 사상들의 관심이었다고 본다.
이것의 유대판이 이스라엘 판이 하나는 창세기의 아담 기사로 나타나고 그래서 유대판에 의하면 아담이 '태초인간'이었는데 아담이 낙원에서 아무 부족함이 없이 살았는데 그런데 죄와 악과 고난을 모르고 살았는데 타락을 해가지고 그의 자손이 다 악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악과 고난의 구렁텅이에 빠진 아담의 자손들을 구출할 구원자는 또 하나의 인간은 종말의 인간은 이 '태초의 인간'이 어찌된 셈인지 종말에 다시 와서 그의 자손들을 다 구출해간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종말의 두번째 인간이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은 아담의 타락을 뒤바꿈을 해놓는 아담이 그의 후손들에게 가져온 숙명을 뒤바꿔놓는 그런 임무를 띠고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옛 종교사학파들은 보았다.
특히 이것이 나중에 불투만 학파에 가서는 이것이 소위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로까지 발전을 해가지고 한동안 신학계에 굉장히 영향력을 끼치고 어지럽게 하였다. 지금도 케케묵은 책들을 보면 그렇게 쓰여이싿.
그런데 요새는 최근에 와서 불투만 학파 뿐만 아니라 오스카 쿨만의 '신약의 기독론'이 상당히 괜찮은 책인데 바로 이 학설을 받아들인 것이 큰 맹점이고 문제는 나이를 좀 먹어서 틀린 것이 많다.
또 미국 친구가 쓴 프레드릭 보쉬의 'the son of man--and history'라는 책도 바로 이러한 이론을 주장하고 있다. 바로 이런 옛종교사학파에 의하면 사람의 아들은 아담의 타락을 뒤집어 놓고 그래서 아담의 자손들을 구원할 메시야의 칭호로 그래서 이 사람의 아들은 하나의 메시야적인 칭호로 이해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의 '사람의 아들'은 유대 전통적으로 메시야사상, 곧 다윗의 아들로써 다윗의 왕위를 회복하고 다윗의 왕조를 재건할 그런 정치적인 군사적인 영웅으로서의 메시야관에 반해서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오는'초월적인 메시야'라해서 다윗적인 즉 세상적인 정치적인 메시야 사상과 경쟁하는 또 하나의 메시야 사상을 탄생시켰다고 사람들은 보아싿.
그래서 다니엘 7장에서의 사람의 아들은 다윗의 아들로서 메시야 사상에 반한 초월적인 메시야 사상을 가져왔다고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 1960년대 이후는 이러한 사상을 갖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지금도 그렇게 케케묵은 책에는 더러 쓰여짔지만 요새와서 이런 설을 주장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왜 그러느냐면 1960년대부터 사람들이 고대 문서에 대한 연구가 훨씬 더 활발해져서 옛날 불투만 이런 사람들은 고대 언어를 잘 몰랐다는 것이다. 그래서 엉터리 여기 저기서 한조각씩 붙여가지고 자기들이 '태초의 인간'에 대한 신화를 만들어 낸 것이다.
그래서 영지주의 구속자 신학이라는 것도 불투만의 '신약신학' 챌에 보면 거기에 '영지주의 주제들'이라는 항목이 있는데 거기에 보몬 자기가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화'라는 것을 재건한다. 그래가지고 우리 '신약기독론'이 어떻게 영지주의 구원자 신화를 예수에게 그냥 뒤집어 씌어서 '신약 기독론'이 발생하였는가를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에 와서 밝혀진바에 의하면 다 불투만이 혼자 대학 도서관에서 만들어낸 것이다. 진짜 문서에는 그런 것이 없다.
그래서 최근의 학자들, 특히 옛날 이란의 문서들을 읽을 정도로 고대언어를 하고 그 문서들을잘 살펴본 C.Colpe나 동독의 H.M.Schencke나 스코틀랜드의 R.McLeod등 이런 사람들이 고대문서를 조사해보니까 이런 것이 다 없다. 만들어 낸게...
그런데 특히 C.Colpe는 케텔의 TDNT의 제 8권에 에 대해서 긴 논물을 썼는데 거기에서는 바로 이와같은 옛 종교사학파들이 주장하는 '태초의 인간'이론을 완전히 배격한다. 따라서 더 이상 들춸볼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이 고대 중동에 널리 흩어졌다고 보았던 '태초의 인간'의 신화가 아니라면 그러면 무엇인가?
2)두번재로 대두되는 이론이 무엇이냐 하면 소위 가나안의 신화,가나안의 종교와 신화의 영향에 의해서 대니엘서 7장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케임브리지 구약학자 J.Emerton. 상당히 좋은 학자인데 이 사람이 먼저 발설을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을 Kittel의 TDNT에 C.Colpe가 그냥 수용해서 좀 더 발전을 시킨다.
그의 이론에 의하면 가나아의 정통적인 종교가 무슨 신을 섬기는가? El을 섬긴다. El은 이것이 父王이다. El의 아들은 누구냐하면 Baal이다. 그래서이 바알은 부왕의 子王이다. 그래서 이 바알은 항상 무엇을 하고 다니는가? 구름을 타고 다닌다. 왜? 바알이 구름과 비의 신이다. 구름과 비의 신으로서 자연을 비옥하게 하는 신인 것이다.
그래서 엘인 부왕으로부터 대권을 받아서 바알 자왕이 구름을 타고 다니면서 천지에 비를 내리고 천지를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아들을 많이 낳게 한다. 그래서 가나안의 자식을 잡아 불로 태워죽이는 것이 성행하였다. 그리고 그것이 종교의식이었다.
바로 이 엘-바알 관계가 다니엘서 7장의 바로 그 옛적부터 계신이와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구름을 타고 오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약간 변형되어서 나타났다고 보는데 이러한 학설을 주장하는 이가 J.Emerton 과 C.Colpe이다.
얼듯 보기에는 이 이론이 상당히 그럴듯하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가나안의 신화와 다니엘서 7장을 비교해보면 자세한 점에 있어서 차이점들이 참으로 많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나안의 신화들이 어떻게 다니엘서의 7장에 영향을 주었을가가 역사적으로 설명하기가 참으로 힘들다. 그래서 J.Emerton이나 C.Colpe와 같은이러한 사람들은 물론 다니엘서를 BC 167-168년 쯤에 쓰여진 것으로 본다.
전통적인 견해는 이것이 바벨론의 포로기간중에 쓰여진 것으로 보지만 대부분의 비판적인 학자들은 마카비 전쟁이 날 무렵 그러니까 셀루키드 왕조의 안토니쿠스 4세가 유대인들을 핍박하고 성전을 막 더럽히고 할 때를 배경을 삼는다. 그래서 BC 167,168년 이때를 배경으로 삼는다.
그렇다면 더 문제가 된다.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집입한 때가 언제인데 주전 11세기쯤 되는데 옛날에 의하면 13세기도 되고 어떤 사람은 17세기라고도 하는데 그런데 어떻게 수백년 동안 가나안의 신화가 잠잠하였다가 갑자기 다니엘서에 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가 주전 5세기의 것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수백년동안 잡자다가 갑자기 출현하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Emerton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시편에 보면 농사절기에 따른 축제들이 많은데 그 축제들을 통해서 가나안 종교의 신화가 잠재해서 전승되다가 다니엘서에서 나온다는 이런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다니엘서가 제일 이방우상정교와 많이 싸우는데 이와 같은 책이 어디에 있는가?
다니엘서가 무엇으로 시작하는가? 다니엘과 그의 두 친구들이 바벨로의 수도에 끌려가서 고사하고 별 대우를 다 받아도 그들의 우상숭배에 참여하지 않는다. 심지어 음식도 먹지 않았다. 이렇게 외국의 종교와 우상숭배와 전혀 타협하지 않는 다니엘에 갑자기 구약에서 철천지 원수로 보는 가나안의 신화가 그대로 모방되어 나타나겠는가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도 옳지가 않다.
그러면 다니엘서 7장의 배경은 무엇인가?
그래서 일단의 학자에 의해서 새로운 의식이 삭트는데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 배경은 중동에 흩어져 있던 무슨 '태초의 인간' 이나 가나안 신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고 전적으로 구약적인 배경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하면 구약에서의 theophany 현상의, 하나님의 출현 현상의 배경을 두고 있는 것이다. 다나엘서 7장이 결국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theophany 현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출현현상이다. 구약에 하나님의 출현현상이 얼마나 많은가? theophany 전승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다니엘서 7장을 문서적으로 비평을 해보면 다니엘서 7장과 아주 가까운 것이 하나 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에스겔서 1장이다.
에스겔서 1장이 에스겔 선지자로 부름을 받을 때에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이 출현을 환상가운데 본다. 하나님이 그런데 어떻게 해서 나타나는가? 어디에? 불이 훨훨 막 타오르는 전차위에 하나님의 보좌가 놓여 있다. 하나님의 보좌위에 하나님이 앉아계신 것이다. 하나님의 보좌가 불이 훨훨 타오르는 전차,요새말로 하면 탱크위에 보좌가 놓여 있고 하나님이 그위에 앉아 계시는 것이다.
이 전차를 히브리말로 무엇이라고 하느냐면 라고 한다. 그래서 오늘날 이스라엘의 전차 이름이 라고 한다. 그런데 에스셀이 자기의 환상 중에 나타난 하나님을 어떻게 그리고 있느냐? 에스겔서 1:26-28까지 누가 한번 읽어보라.
거기에 이렇게 되어 있다. 26절에 하나님이 어떻게 되었더라?
이렇데 되어 있다. 형상이라는 말은 무엇 무엇과 같은 likeness 여기의 '사람의 모양 같은'으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어덯게 나타났어요? 사람의 모양으로...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에스겔서 1:26-28은 우리로 하여금 무엇을 연상케 하느냐면 창세기 1:26절을 연상케 한다. 창세기 1:26은 여기와 거꾸로 되어 있다. 하나님이 인간을 무엇으로 창조하였는가?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형상으로,거기에 똑같은 말이 나온다. 하나님의 형상과 하나님의 비슷한 것들로 이것은 likeness 라는 말이고 이것은 image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창세기 1:26절의 위대한 창조, 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으로 만들었다. 이것이 신학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천명인가? 그래서 사람들이 이 신학적인 천명의 배경을 살필려고 하였고 이 천명이 신학적으로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나 해가지고 신학적으로 무진장 토론을 많이 하였다.
이것이 기독교 신학자들만 토론을 많이 한 것이 아니라 영지주의자들도 이것이 그렇게 중요하였다. 또한 영지주의자들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랍비들도 이점을 굉장히 토론을 많이 하였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데 인간의 무엇을 가지고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느냐? 이러한 토론이 굉장히 많았다. 이와같은 구약의 학자들, Ladd나 등의 의견이 맞다.
이와같은 창세기 1:26절의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와같은 신학적인 천명뒤에는 어떠한 계시체험이 있느냐면 하나님이 나타날 때에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인간같이 나타난다. 그러니까 그와 같은 하나님의 출현, 하나님의 게시의 체험에서 하나님이 형상이 없는 존재인데 하나님이 스스로 인간에게 계시해서 형상을 입을 때에는 인간과 비슷한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양과 하나님의 모양에는 유사함이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계시의 체험에서 거기에 대한 신학적인 천명이 나온다 그말이다. 지금까지는 너무나 많이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바 되었다는 것을 추상화해가지고 어떤 신학자는 말하기를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말한다고 한다. 이성을 가리켜서 주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또는 인간의 말하는 존재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또는 인간의 하나님과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해서 생각하였는데 어떤 것을 두고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고 그렇게 추상화해서 말하는 견해가 수없이 많다.
여러분이 그 견해를 알려면, 그 견해가 도대체 몇십자기나 되는지 알고 싶으면 C.Westermann의 창세기 주석에서 거의 창1:26절을 펴보면 지금까지 대두되었던 의견이 다 망라되어 있다.
하여간 그렇게 수없이 많았는데 그것들에 다 일리가 있다.
그러나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천명한 사실 뒤에는 에스겔서 1:26절과 같은 체험이 있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자신을 나타낼 때는 사람과 같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구약에 하나님의 출현을 묘사할 때 대개 인간형상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에스겔서 1:26의 하나님의 출현이 인간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28절에 보면 26절에서 사람의 형상대로 나타났다고 하는 존재를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에스겔서를 죽 읽다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타남, 원래 영광이라는 말이 하나님의 나타남이라는 말인데 영어로는 God in his revelation 이라고 하는데 하나님의 나타난 상태가 영광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하는 말은 스스로를 나타낸 하나님을 우리가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뜻이다. 영광을 돌린다의 가장 간단한 정의는 하나님으로 인정한다는 것이다. 이 영광을 올린다는 말이 애매하게 무슨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광을 돌린다는 소리는 God in his revelation이다. 그런데 보통 빛이 그 상징어로 나타난다.
그런데 에스겔서를 죽 읽다보면 이 하나님의 영광, 란 개념이 하나님과 전적으로 동위를 이룬다. 그래가지고 하나님의 실현자,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제2의 신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소위 binitatianism 이란 말은 요새 학자들이 니어낸 삼위일체론을 무엇이라 하는가? Trinity에 대항되는 말이다. binitatian하면 하나님을 그위 일체로 보는 것이다. 그래서 2위일체로 인식한ㄴ 것을 binitatianism이라고 한다.
그런데 에스겔서에 이 binitatianism이 점차 발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있고 하나님의영광이 따로 있는 것 같이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의 사자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중에 유대신학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신학과 특히 지혜의 신학으로 발달한다. 그래서 유대의 지혜문서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다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실제로 담당하는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중보자,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무슨 노릇을 하는가? 하나님의 창조와 하나님의 계시와 하나님의 구원의 중보자 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따로서... 이러한 binitatianism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적으로 우리에게 우수꽝스럽게 들릴지는 모르지만 여기는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적인 시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초월적인 하나님이 어떻게 동시에 이 세상과 역사에 내재하여서 활동하느냐? 하는 것을 해결하고자 하는 수단이 바로 이것이다.
말을 뒤집어서 다시 하자면 하나님이 초월하시면서 동시에 역사와 세상에 내재하셔서그렇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우리에게 구원자로 활동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신학적인 언어 수단이 binitatnanism이다.
하여간 하나님이 창조하셨고 하나님이 스스로 계시하시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는데 그런데 그 초월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하셨느냐? 이 세상 밖에 계신 하나님이....
하나님이 지혜를 통해서 이루셨다. 그러면 지혜는 무엇이냐? 하나님의 소성이면서 그러니까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심부른꾼 노릇을 하면서 하나님의 딸로서이다. 그러니까 초우러하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하고자 하는 언어적인 수단이 이것이고 그리고 지혜신학이며 중보자 신학이며 이것이 유대교에서 점차 발달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binitatiasm이 점차 발달하는 상황이 어떠한 상황이냐 하면 하나님이 점차 초월하신 하나님으로 인식이 될 때에 그러하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일로서 우리 삼위일체를 논의의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이 우주보다더 커야지 그래서 우리가 병났을 때 우주가 고장났을 때 우주를 고칠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우주를 고칠 수 있는 하나님은 우주보다 더 커야 한다. 초월하신 하나님만이 우주를 고칠 수가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초월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엇이냐? 하나님의 전능함, 하나님이 우주를 지배하고 우주를 고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초월만 하고 이 세상을 내팽개쳐 버리면 그러면 구원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동시에 내재하셔야 구원과 계시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내재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무슨 소리이냐 하면 하나님이 구원하고자 하는 그 의지,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이 초월하셔서 우주를 구원할 수 있어야 되고 동시에 내재하여서 실제로 구원하게 하는 의지가 나타나야 구원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이 일어나지 않는다.
도대체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이 일어난다는 것이 무슨 소리이냐?
초월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내재한다는 그 소리이다. 그런데 어떻게 초월하신 하나님이 동시에 내재하신다고 할 수 있느냐? 그 conceptuality과 언어의 수단을 총동원하여 어떻게 하였느냐면 유대인들은 초월하시고 내재하신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후에 그것을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 바로 이런 식의 신학으로 나타났다.
그런데 이게 벌써 에스겔서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의 불가불의 관계에 있짐나 점차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서 하나님의 사역으로 독립되는 장면을 에스겔서는 그리고 있다.
이것이 나중에 유대 묵시문학과 랍비 문학 중에서 소위 신비주의 랍비문서가 있는데 데클로트라는 랍비신비주의 문서가 있는데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하늘에 하나님이 나타나는 것을 보고 하늘의 정경, 하늘의 사람이 하늘에 올라가는 것이다. 가령 고전 12장에 바울이 무엇이라고 하는가? 자기가 어디에 갔다고? 바로 그런 체험을 그려놓은 아주 굉장히 많은 문서들이다.
그러한 것들이 다 어디에 근거하고 있느냐면 묵시문학과 신비문서에서 하늘을 보고 하늘에 앉아계신 보좌의 하나님을 보고 하는 것이 다 궁극적으로 어디에 정승사적으로 근거하고 있느냐면 에스겔 1장에 근거하고 있다.
그래서 에스겔 1장에 나오는 묵시문학과 신비주의의 전승을 마타비 vision, 마카비 환상 전승이라고 한다. 왜? 에스겔서에서 에스겔이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의 를 본다. 하나님이 어디에 앉아 계시는가? 에 앉아 계신다. 그래서 그것이 전문언어이다.
유대묵시문학과 신비문학에 나타나는 하나님을 보좌를 보고 그 위에 등극하신 하나님을 보는 그것을 그린 모든 문서들 전체를 뭐라고 하느냐 '마카비 환상 전승'이라고 한다. 이게 다 에스겔서 1장에서 나온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바로 에스겔서 1장의 '마카비 환상 전승'의 약속에 있는 것이다. 벌써 에스겔서 1장의 하나님과 하나님이 무엇과 같이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다니엘서 7장에도 하나님이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난다.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도 무엇으로 나타나는가? 사람의 형상으로....
이처럼 에스겔서 1장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형상이 분리되어서 binitatianism으로 시작하는데 다니엘서 7장에서도 이렇게 옛적부터 계신이와 함사람의 아들 같은 이=이위일체론적인, 그래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 나라를 받아서 하나님 대신 통치한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면 내 책 16-18page를 읽어보기 바란다.
Ⅲ.다니엘 7장이 유대교에서 어떻게 해석이 되었느냐?
예수님 전에 그리고 예수님 당시까지 다니엘 7장이 어떻게 해석되었느냐 하는 것을 살펴보겠다.
1)다니엘서 7장 자체내에서는 어떻게 해석되었느냐? 하는 것이다.
15절 이하를 읽어 보라.
그 해석이 무엇이냐 하면 네 짐승들은 무엇을 나타낸다고? 네 이방 왕조들의 왕들을 나타낸다고 하였다. 네 이방 왕조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끝내 마지막 짐승이 상징하는 마지막 왕조의 왕이 아주 못살게 군다 이말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런다구? 하나님의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 곧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하나님 나라를 받을 때까지 그런다 그말이다. 이 환상에서는 4번째 짐승이 언제 망하는가? 하나님의 심판자로 나타나고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을때까지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믿음과 이 믿음의 해석과 다응을 해보라. 그러면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이 해석에 의하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이 환상에서는 누가 하나님 나라를 받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그러면 이 해석에서는 누가 하나님 나라를 받아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이..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서 벌써 무엇을 알 수있느냐면 이 환상 가운데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나는 존재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이요 네 짐승들이 네 왕조들의 상징이듯이 상징이요 그 대표이다. 그 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종말의 하나님 백성의 상징이며 그 대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1-22절도 읽어보라.
여기도 마찬가지로 되풀이되는 해석이다. 뭐냐하면 마지막 짐승이 이 하나님의 백성을 못살게 구는데 드디어 옛적부터 계신이가 개입해서 와서 그를 없애버리고 그의 성도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26-27절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이 역사에 개입하셔서 그 마지막 짐스으로 상징되는 마지막 왕조를 심판하고 하나니이 그의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 곧 종말의 하나님이 백성에게 그 나라와 권세를 줄 때에 그 나라와 권세가 영원하리라 하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세번이나 자꾸 읽으라고 한 것이 무엇인가?
이것은 다니엘이 본 황상의 해석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환상에서는 누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그것의 해석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나라를 받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 것이다.
그러면 환상에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상징이요 그 대표라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보면 4짐승들도 '왕조'라는 집단적인 개념을 나타내기도 하고 '왕'이라는 개인적인 개념을 나태내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도 한편으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의 하나님이 백성들 전체를 상징하는 collective 그러니까 집단적인 개념이기도 하고 4짐승이 왕이라는 개인을 나타내는 개념이기도 하듯이 또 하나님의 백성의 한 대표로서 개인적인 해석도 가능하고 또 집단적인 해석으로써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 집단적인 해석과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전체의 대표라를 개인적인 해석 사이의 양쪽의 중복이 있다. 그러한 조금 애매한 점이 있다.
그러면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은 구약에서는 성도들 성도들이 두가지 의미로 사용된다. 하나는 천사들을 지칭할 때 이 말을 많이 사용하고 그러나 또 하나는 하나님의 백성을 지칭할 때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 다니엘서의 문맥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자 그러면 우리가 다니엘서 7장 9절-14절의 환상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그러면 그 환상이 무엇인가? 다니엘서 7:9절에 뭐가 놓이고? 왕좌(보좌)들이 놓이고 하나님이 등극하고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우편에 놓인 그 왕좌에 등극하는 환상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대권을 위임받는 나라를 받는, 통치권을 받는, 권세를 받는 심판의 권세를 받는 광경인 것이다.
그런데 그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누구라고요?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요 상징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이 다니엘서의 환상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 마디로 말하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한다는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그러니까 진정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보좌의 우편에 등극하여서 하나님의 통치권, 하나님의 대권을 받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하나님의 백성이 이방왕조에 의해 짓밟히고 고난을 받고 그래서 허덕이고 있다. 대부분의 이스라엘은 언약을 포기하고 패역한 자들로 굴러 떨어졌다. 그러나 끝까지 언약에 충실하는 진정한 이스라엘,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그들이 종말에 어떻게 된다고? 하나님의 최후 심판때에 어쩌리라? 하나님이 보좌 우편에 높임받는다는 말인 것이다. 그것이 다니엘이 본 환상이다. 그런데 어덯게 높임을 받아요? 하나의 신적인 존재로 높임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스콜틀랜드의 중요한 신학자인 H.Black같은 사람은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다니엘서의 진정한 의도는 무엇이냐면 Apotheosis of Isfael이라고 한다. Apotheosis란 말은 무엇인가?그것은 피조물이 하나님과 같이 됨 그것을 말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 인간이 신격화됨. 그러니까 H.Black은 다니엘서 7장의 진정한 의도를 한마디로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종말의 진정한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고 한다.
이것은 구약의 언약 신학의 논리적인 발달이다. 구약의 언약 신학은 이스라엘을 무엇으로 보는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본다. 구약의 언약의 형식은 무엇인가?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이다. 하나님이 이 미천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해서 그들이 하나님이 되어 주기로 약속을 하고 그러니까 그들을 축복하고 보호하고 그들의 하나님이 되어주겠다고 약속을 하고 그들을 자기 백성으로 삼은 것이다. 이것을 선포한 것이 언약이다.
그런데 이 패역한 이스라엘이 대부분이 이 언약을 포깋나다. 그러면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해야 되는데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의존하고 순종해야 되는데 이렇게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대부분이 언약을 포기한다. 그래서 점차 구약의 전승이 진행됨에 따라 선지자들로부터 이스라엘 민족을 가르기 시작한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으로 언약의 관게를 유지하는 이스라엘, 그들을 '남은 자들' 이라고 한다. 이들은 끝까지 하나님께 의존하고 충성을 해서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고 귿르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과 특후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하기 위해서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을 뭐하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이 사상이 여러곳에 나타나지만 가장 도전적인 곳이 어디냐 하면 출4:22-23이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라'라고 한다. 왜? 언약의 백성으로 내가 택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언약의 백성이라는 소리이다.
그런에 아까 이야기한대로 이스라엘 백성이 점차 패역하고 우상숭배하는 이방민족의 암력하에 점차 패역해감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 내에서 진짜 언약에 충실한 사람드로가 그렇지 못한 다수를 가르기 시작한다. 그를때에 이 하나님의 아들됨이 누구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하느냐면 언약에 충실한 자들에게만 적용된다. '남은자들'에게만 적용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이 선지적인 문서들, 특히 지헤의 문서에 아주 똑똑히 나타난다.
그러면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남은 자들의 숙명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의 숙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은 뭐하냐 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을 자들인 것이다.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언약으로 받은 축복이다. 그런데 그 축복은 현재는 법적으로만 있는 것이다. 또는 in posse 가능성으로만 있다. de hure
다니엘서 7장은 이러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약속을 받은 이스라엘이 현재는 이방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언젠가는 실재적으로도 in esse de facto 실재적으로도 그 축복을 받는다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숙명이 무어라구요? 하나님의 언약 백성 곧 하나님이 아들로서 그의 아버지 즉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 언약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으 역사속에서 이방민족에게 짓밟히고 있지만 그래서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견디지 못해서 다 언약의 관계를 포기하고 떨어져 나갔지만 끝까지 언약에 매달리는 충실한 자들에게는 그 아들로서의 축복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축복이 종말에는 realtity로 나타난다는것이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이 세상의 모든 악한 자들은 죄의 심판을 받고 그들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는가? 하나님의 권세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영광을,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과 같이 되는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다.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 한 종말론적인 소망을 나타내는 것이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인 것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다니엘서 7장은 하나의 어전회의인 것이다. 이것을 독일말론 Thronratversammling이라고 한다. 영어로서 Heavenly assembly 히브리어로는 우리가 이것을 이해하려면 시편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고 선지서에도 많이 반영되어 있지만 가장 쉽게 이해할려면 이사야서 6장을 상상하면 된다.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성전에서 무엇을 보는가? 하나님이 성전의 보좌 우편에 높이 앉아계신 것을 본다. 그 하나님 앞에 누가 앉아 있어요? 천사들이 부복하고 있다. 그들이 하나님께 거룩 거룩 거룩 찬양하면서 부복하고 있다. 거기에서 하나님이 자기이 천사 종들과 무엇을 상의하는가? 구원의 계획을 상의하고 계신다. 앞으로의 이스라엘을 구원할 계획을 상의한다.
그런데 이사야에서는 그 구원의 계획이 거꾸로 일단 나타난다. 어떻게? 이 말 안듣든 놈들, ㅇ너약을 파기하고 말을 듣지 않는 놈들은 싹쓸이를 하겠다고 하신다. 그래가지고 다 타고 남은 둥지에서 나는 새싹으로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새로 구원의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그것을 토론하고 상의하는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의 어전회의인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하기로 하나님의 계획을 가결하였는데 우선 이들을 심판으로 싹쓸이를 하고 다 털어버리고 그 둥지에서 새싹으로 새롭게 시작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계획이다. 심판과 구원의 계획이다.
그래놓고는 하나님이 물어요. 그러면 우리를 위해서 이말을 선포하도록 누구를 보낼꼬? 그러니까 이사야가 환상 중에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부복하고 있는 천사들의 대열에 하나님의 신하들의 대열에 지금 업저버로 참석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환상 중에 그러한 어전회의를다 보는 것이다.
어전회의르 보고 듣고.. 다른 천사들은 아무 말도 않고 가만히 있는데 그런데 자기가 한 발자국 앞에 나가서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옳지 너 됐다'그러니까 이사야가 내가 입술이 부정하다고 하니 그러니까 제단에서 레14:16에 따라서 그자리에서 숯불로 부정한 입술을 지져서 깨끗이 해가지고 그를 선지자로 내세운다. 그러면 이사야가 선지자로서 선포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
어전회의에서 가결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 계획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심판으로 싹쓸이 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은자들로 새롭게 하는 역사를 시작하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어전회의이다.
이 선지들이 부름을 받을 때에 대개 이와같은 계시의 체험을 하고 그 메시지를 선포한다. 그러니까 그 계시가 무엇이냐 하면 이 어전회의 즉 가 헬라어로 번역되기는 이다. 영어로는 mystry 우리말로는 신비 또는 비밀.
바울이 로마서 11:25절에서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너희들에게 바밀 하나를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엄숙히 선언하고 있다. 여기의 비밀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다 들어올 때까지 이스라엘의 심장을 완악하게 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종말에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이게 다 무엇인가?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바울이 무어라고 부르는가? 비밀이라고 부르고 있다. 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하나님의 어전회의도 라고 하고 그 어전 회의에서 가결되어서 선지자에게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도 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선지자는 가령 예메미야는 우리에게 자기가 받은 에 대해서 , 하나님의 어전회의의 계시에 대해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레미야가 누구하고 싸웠는가? 거짓선지자들과 싸웠다. 예레미야는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패역한 이스라엘을 하나님이 싹쓸이 한다는 것을 선포하였다. 그래서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간다는 것을, 그래서 이 성전도 다 때려 부순다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레미야는 선포하였다.
그런데 패역한 왕에 붙은 간신들 거짓선지자들은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하나냐 이런 자들은 무엇을 선포하였는가? 예레미야가 전쟁을 선포하고 심판을 선포하면 하나냐는 평화, 평화 그러고 다녔다.
그러니까 거짓 선지자들은 예레미야를 진흙구덩이에 뭉고 그랬다. 그러니까 예레미야가 그들에게 도전하기를 뭐라고 하였는가? '너희들이 하나님의 에 서봤느냐?' '너들이 하나님의 를 들었느냐?' 진정한 선지자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어전회의에 참여해서 거기서 계시를 받은 자가 진정한 선지자이다.
이 전승이 에스겔서 1장에 나타나고 이 전승이 바로 다니엘서 7장인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무엇인가? 다니엘서 7장에서 다니엘이 본 그 환상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무엇을 말하는가?
우선은 4왕조들이 일어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못살게 굴고 핍박하고 잔해하지만 종말에 하나님이직접 개입해서 심판으로 그들을 물리치고 그의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종말의 백성들, 또는 마지막까지 언약에 충실한 그들에게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숙명을 달성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편에 높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통치에 참여하도록 한다는 거이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로서 언약의 백성으로서의 숙명을 달성하겠다는 하나님의 구원의 게획의 계시이다. 이것이 이다.
그러니까 양식사적으로 볼 때 이사야서 6장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이... 자 여기서 볼때 한 사람과 같은 이는 거기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라 사람 같은 이라는 것이다.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상징이요 대표이다. 그것 뿐이지 사람의 아들이 문구 자체가 무슨 메시야적인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다니엘서 7장의 살람 같은 이가 점차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된다. 유대의 전승에서.. 두개의 문서에 분명히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된 문서가 있다.
그 하나가 제1에녹서 37장-71장(1En 37장-71장) 에녹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제1 에녹서,제2에녹서,제3에녹서가 있다. 제1에녹은 에디오피아 말로 우리에게 전승되어서 에데오피아 에녹이라고도 한다. 제 1에녹은 긴 책이다. 여러 부분으로 된 복합된 책이다. 37장-71장이 한 부분을 이루는데 이 부분을 에녹의 비유라고 한다. 영어로 Similitudes of Enoch 라 한다. 여기에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가 분명히 메시야적인 존재로 나타난다. 태초부터 계신 이로써 메시야적으로 활약을 할 존재로 나타난다. 특히 심판할 존재로 나타난다.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해석되는 분명한 또 하나의 문서가 4번째 에스라 13장에도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고 다윗의 아들 메시야와 동일시 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제1에녹서와 4에스라서에 근거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람의 아들'이 예수님 전에 또는 예수님 당시에 메이야 칭호였다고 그렇게 보았다. 특히 유대 묵시문학에서 '사람의 아들'은 메시야적인 칭호로서 종말에 올 심판자요 구원자를 가르치는 것이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면 예수가 스스로를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곧 바로 묵시문학에서 기다렸던 종말의 초월적인 심판자요 구원자 메시야가 자기임을 나타내고자 했다. 그렇게 많이 해석을 하였다.지금도 보수적인 학자들의 책에는 많이 그렇게 쓰여지고 있다.
그런데 그것이 문제가 많다. 우선 무슨 문제가 있느냐면 요새와서 분명히 밝혀진 바에 의하면 이 책들이 다 예수님 이후에 책들이다.
연대적으로.. 첫째로 연대적으로 문제가 있다. 이것은 거의 모든 학자가 인정한 바와 같이 AD 약 90년경에 쓰여진 것이다. 이책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다.
대부분이 독일 학자들은 지금도 이 책은 BC 1세기 쯤에 쓰여진 책으로 보낟. 그러나 많은 영국 학자들은 이 책도 AD 2세기의 책으로 본다. 그런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최근에 나타난 쿰란 문서에 보면 쿰란 공동체에서 에녹서가 아주 중요하였다. 쿰란 사람들이 에녹서를 아주 좋아하였다. 그래서 쿨란 사본들 가운데 에녹서의 조각들이 다 나온다. 에녹의 긴 책의 모든 부분의 조각들이 다 나오는데 37장-71장의 부분은 한 조각도 나오지 아니한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문서가 쓰일 당시에는 이 책(에녹37장-71장)가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최근에 와서 이 책의 내용을 분석해볼때 2세기 중반에 일어난 정치적인 사건에 대한 은유가 나타난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부분의 영국 학자들은 이 책을 AD 2세기 중반의 책으로 본다.
그렇다면 이게 무슨 소리이냐? AD 1세기 말, AD2세기에 유대 묵시문학에서 독자적으로 다니엘서 7장 중에서 특히 13절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발달하나 이것이 예수님 당시에는 그렇게 했다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예수님 당시에는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벌써 메시야 칭호로 유대교와 묵시문학에서 확증되었다는 증거가 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또 더 어려운 것은 예수의 모위 메시야 비밀이 문제이다. 예수께서 우리 다 아는바와 같이 공관복음서에 보면 당시 유행하는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전부 피하였다. 그런데 그런 경향이 분명한데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의 칭호로 이미 확립이 된 것이었다면 어떻게 예수가 이 칭호를 자기에게 적용할 수 있었겠느냐?
이점을 특별히 강조하는데 노르위에 오슬로의 신학자 E.Leivestad이다. 유대교에서 이미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묵시 문학에서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이 되었다는 것은 자료로서는 증거할 수 없짐나 유일한 증거를 댈 수 있는 이것들이 다 지금은 대개 생각하는 바와 같이 주후 문서들이니까 자료로서는 증거할 수 없지만 그것이 예수의 메시야적인 비밀과 상충된다는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 유대 묵시문학의 메시야적인 비밀로 이미 확립이 되었다면 예수가 스스로를 계속 그렇게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를 때 그러면 '내가 메시야다' 그소리 밖에 안되는데 제자들이 예수가 누군가 하고 그렇게 방황하고 어쩔줄 모르고 그럴리가 있겠는가?
이런 저런 이유로 예수의 당시에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이 되지 못했을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신약신학 제9강
다니엘서 7장을 유대교에서 어떻게 하석하였는가를 하였다. 그리고 1En 37장-71장의 내용과 4에스라13장의 내용까지 하였다.
그러면 이어서 이렇게 1에녹서와 4에스라서에서 확실히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할 뿐 아니라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거의 메시야적인 칭호가 되다시피 한다. 완전히 칭호가 되지는 않지만 거의 메시야적인 칭호가 되다시피 한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이 바로 이 두 문서에 근거해서 예수님 당시의 '사람의 아들'이 유대의 묵시문학에서 기대했던 메시야였다. 또는 메시야적인 칭호이었다. 이렇게 보았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 복음서에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 바로 이와같이 다윗적인 메시야라기보다는 묵시문학에서 고대하는 하늘로부터 오는 초월적인 메시야라는 것을 스스로 밝히는 것이다라고 이렇게들 보았다.
그런데 최근에 와서는 이런 견해가 문제가 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는 1에녹서와 4에스다라서 책이 예수님 이후의 책이라는 것이 많은 학자들에 의해서 천명되고 있다. 4에스라서책은 주후 90년대의 책이라는데 거의 異論이 없다. 1에녹서는 지난번에도 이야깋나바와 같이 여러책의 합본인데 그 중에 37장-71장까지가 '에녹서의 비유'라고 해서 한 책을 이루는데 이 책은 요사이 많은 학자들이 주후 2세기에 완성된 책으로 본다.
지금도 대부분의 독일학자들은 이 책이 주전에 쓰여진 것으로 보는데 대부분의 영국학자들과 많은 미국학자들은 이책 또한 주후 2세기에 쓰여진 책으로 본다.
그 이유는 1에녹서 37-71장까지 나오는 거기에 나오는 의문이 되는 정치사가 주후 2세기에 일어나는 사건과 잘들어맞을 뿐 아니라 그것은 이제 내적인 증거이고 또 외적인 증거로서는 쿰란 문서중에 제1에녹서의 긴책의 모든 부분의 파편들이 다 나온다. 그런데 바로 에녹서의 37장에서 71장까지의 이 부분만은 나오지 않는다.쿰란에서 에녹서가 아주 중요한 책이었는데 그래서 쿰란 사람들에게 이 에녹의 비유 즉 1에녹서 37장-71장가지가 이미 알려졌드라면 이들이 분명히 이 책을 가지고 있었을텐데 그러한 흔적이 없다.
에녹서의 다른 부분이 모든 부분이 쿰란 문서에서 발굴이 되는데 이 부분만 안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아마 이 부분이 주후 2세기 쯤에 쓰여져 가지고 쿰란 사람들에게 미쳐 알려지지 않았었던 것이 아니냐? 이렇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주후의 것으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에수님 당시의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쓰였다는 증거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하나 중요한 것이고
또 하나는 오슬로의 학자 Leivestad가 아주 강력히 주장했듯이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 널리 알려진 유대교에서 메시야적인 칭호였다면 예수가 그 칭호를 사용하는 것이 예수위 일반적인 경향과 어긋나는 것이다. 예수의 일반적인 경향은 한마디로 메시야적인 비밀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당시에 유행하던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다 피하였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되도록이면 간접적으로 나타내었다.
그때 만약에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널리 알려진 메시야적 칭호라면 에수가 그것을 자기 칭호로 사용하였다며 그러면 '내가 바로 그런 메시야다'라는 것밖에 더 되겠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가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예수의 일반적인 경향과 완전히 위배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널리 인식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한가지 잠정적인 결론을 한가지 내릴 수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아직 메시야적인 칭호로 확립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잠정적인 결론을 하나 내릴 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설령 우리가 에녹서 37장에서 71장까지를 주후 2세기의 문서로 규정하고 4에스라 13의 문서를 주후 90년 대의 문서로 규정해도 적어도 주후 90년대에는 또 적어도 주후 2세기에는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고 사람의 아들이 거의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왜? 에녹서나 에스라서가 그것을 증거하니까...
그러니까 에녹서가 에스라서는 예수님 당시에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은 증명하지 못하지만 예수님 이후에는 메시야적으로 쓰였다는 것을 증명해준다.
그러면 언제쯤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이해가 디고 그래서 거기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 거의 메시야 칭호화 했느냐?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면 이런 에녹서 37-71장과 4에스라서 13장 이외에도 또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고 거기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같은 이를 메시야임을 인정하는 유대문서가 있느냐? 하는 것을 찾아볼 필요가 있다. 있으면 그것이 언제쯤 쓰여졌느냐? 를 정확히 연대를 규명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그런 것을 해보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자료들을 발견할 수가 있다. 자료들이 조금 있는데 그것이 그토록 중요하지 않고 제일 중요한 자료만 몇가지만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중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4Q ps Dan Aa라는 긴 기호를 가진 문서가 하나 있다. 조그만한 조각이넫 이것을 어떻게 읽을줄 알지요? 이게 무슨 뜻이지?여기에서 Q자는 Qimram문서라는 것이다. 4자는 Qumram의 4번째 동굴에서 나왔다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 다음이 문서의 성격을 규정하는 것이다. pa Dan는 다니엘서와 유사한 문서라는 것이다. ps는 pesudo의 약자이다. '유사 아니엘서 문서'라는 것이다. 이것을 간단히 쓰면 '4Q 243'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이 문서는 그림처럼 두줄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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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둘째 칼럼
++-+---+--------+
|첫째칼럼
그래서 여기의 처음의 3분의 1이 떨어져 나가 버렸다. 그래서 우리가 이것을 정확히 복원하기가 어렵다. 이 문서가 내책 20페이지에 이 문서의 내용을 영어로 적어놓았는데 사실 Joseph Fitzmyer가 이 문서를 발간하였는데 자세히 볼려면 내 책 20페이지를 보도록 하고 하여간 첫째칼럼 여기에는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면 한신하가 왕좌에 앉아 있는 왕에게 부복하여 아뢰는 장면이다.
왕에게 신하가 하는 소리가 뭐라고 하느냐면 '당신의 아들이 이 땅위에서 위대해질 것입니다. 왕이시여 모든 사람들이 그 때에 평화를 이룰 것이고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길 것입니다. 그는 그러니까 당신의 아들은 위대한 왕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며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며 그 이름은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리울 것입니다' 즈 ㄱ하나님의 이름을 가진 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두번째 칼럼에는 또 뭐라고 쓰여져 있느냐면 그는 그러니까 '왕인 당신의 아들은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울 것이며 모든 사람이 그를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부를 것이며' 여기에서 '지극히 높으신 이'의 이말은 우리의 귀에 익은 말이다.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온다. 그리고 하늘의 별이 반짝거리고 우리의 눈 앞에 빨리 나타나듯이 그들의 왕국은 빨리 사라질 것입니다.
조금 있다가 그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볼 것이다. '몇년 동안 그들은 이 땅 위에서 통치할 것이고 사람들을 짓밟을 것이며 도시들을 짓밟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일어나고 그리하여 모든 사람들이 이 칼로부터 이 전쟁의 칼로부터 쉼을 얻을 때까지만 입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이 문서가 아직도 완전히 발간이 되지 않았다. 이 문서를 가지고 있는 자가 쿰란 문서를 발굴하고 발간하고 번역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친 J.Milik이라고 프랑스의 카톨릭 신학자가 가지고 있는데 이 친구가 술을 많이 마셔가지고 주정뱅이가 되었다. 그래서 폐인이 되어 버렸다. 그런데 이 문서를 안 내놓고 있다. 지가 가만히 가지고...
그래가지고 이 문서가 완전히 아직도 발간이 안된 상태이다.
그런 상태속에서 이 Joseph Fitzmyer가 일부를 가장 중요한 대목을 이렇게 대충 발간을 했는데 왜 이 문서를 다니엘서와 유사한 문서라고 이름을 붙였느냐면 다니엘서 7장과 아주 유사하다. 아까 내가 두번째 칼럼에서 뭐라고 하였는가?
그들의 왕국은 마치 이 세상이 조금 반짝하다가 사라져버릴 것이다. 당분간 사람들을 짓밟고 도시들을 짓밟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이 끝내 일어나서 평안을 받고 쉼을 얻으리라는 말이 있는데 여기에서 '그들의 왕국'이란 이 문맥에서 누구를 말하느냐면 '에집트와 앗수르 바벨로니아'와 같은 이런 나라들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그들의 왕국은 다니에서 7장에 나오는 네 짐승들로 표시되는 네 왕조, 그 네 왕조들과 대치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의 vision의 내용이 무엇인가? 네 이방 왕조들리 차례로 일어나서 심판을 받고 차례로 망하고 결국에 누가 나타나는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나서 뭐 한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고 하였다. 그것이 무엇을 상징한다고 하였는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나랄ㄹ 받는 것으로 다니엘서 7장이 해석되었다.
이 4Q ps Dan Aa에서는 이와 똑같은 형식을 취하고 있다. 그들의 왕국 그러니까 이집트나 앗수르나 그들이 왕국이 일어나서 백성들을 못살게 군다. 그러나 결국 누가 일어나는가? 당신의 아들, 왕의 아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이 왕의 아들이 뭐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하였는가?
다니엘서 7장에 누가 나타나는가? 여기에...'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나타나는 것이다. 이 쿨란 문서에는 누가 나타나는가? 왕의 아들, 그런데 이 왕의 아들이 뭐라고 불림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는가? 위대하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이라고 불리움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다. 다니엘서 7장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서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나타나서 하나님 나라를 받는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서 구원에 이름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누가 여기에서 일어나서 하나님의 나라를 받고 평화를 받고 쉼을 얻어요? 하나님의 백성이.. 이와 같이 4Q ps Dan Aa은 다니엘서 7장과 모든 요점에 있어서 일치하고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모든 것이 일치하다 이말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면
첫째로 만약에 4Q ps Dan Aa이 다니엘서 7장을 재해석한 것이라면 바로 이와가은 유사함 점을 볼 수 있느데 그렇다면 무엇을 알 수 있느냐면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것이 첫째 요저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요점이다.
(다니엘 7장) (4Q ps Dan Aa)
네 짐승들 ----------------------- 그들의 왕국들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 왕의 아들(다윗의 아들,다윗의 자손)
=하나님의 아들(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왕국,하나님의 백성 -------------- 하나님의 백성
둘째로 우리가 상당히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하나님의 아들 또는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로 해석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동시에 무엇으로 보느냐 하면 '왕의 아들'로 보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조의 맥락에서는 이 '왕의 아들'이라는 소리는 무슨 소리인가? 다윗왕의 아들이라는 소리이다. 다윗왕조를 이을 수 있는 다윗자손이 왕위에 오른다는 의미이다. 다윗자손이 지금 왕 위에 앉아 있는데 그 아들이라는 것이다. 이제 궁극적으로 다윗의 아들이라는 소리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무슨 힌트를 얻을 수있느냐면 4Q ps Dan Aa의 사실은 다니엘서 7장을 나단의 예언의 전승들, 삼하 7:12-16절 까지의 나단의 예언의 전승으로 해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다니엘 7장 + 삼하 7:12-16
나단의 예언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통해서 다윗에게 약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게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다윗의 수가 다차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 하나를 택해서 그냥 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다윗의 왕조를 이어가는 합법적인 통치자로 내세우고 그가 하나님의 원하는 백성을 그가 하나님을 대신해서 합법적으로 통치한다는 것을 선언하기 위해서 그를 자기 아들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하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그것이 나단의 예언의 전승이다.
이 나단의 예언의 전승이 가령 시편 2편 시편 110편 이런데에 나오고 있다 그래서 시2편 같은 것은 다윗의 자손이 다윗 왕조에 왕위에 오를 때마다 하는 등극시이다. 그래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좌에 오를 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시이다. 그래서 시편 2편이 신약기독론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거기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다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다윗의 자손이 다윗왕을 위해서 이스라엘 왕이 된 것을 정식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합법적인 통치자로 선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므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 대신에 다윗의 아들을 통치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나단이 전승이 이렇게 시편에서 다윗왕조를 잇는 등극시로만 쓰인 것만 아니고 선지자들에 의해서 계속 재해석되고 심지어는 메시야적으로 재해석되어서 이것이 구약과 유대교의 가장 중요한 메시야 사상의 커다란 흐름이 되고 있다.
그래서 이 메시야 칭호들, 가령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이런 말들이 전부 어디에서 나왔느냐 하면 전부 이 나단의 전승에서 나왔다. 그러니까 나단의 전승이 요점이 무엇이냐 하면 다윗의 아들이 무엇이 되는가? 다윗의 왕위를 이어받아서 뭐가 된다고?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는 것이다.
이 쿨란 문서에서도 이 부복하고 있는 신하가 지금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가? 왕에게... 그러면 이스라엘의 content에서 왕은 항상 누구를 말한다고? 다윗을 말한다. 다윗의 아들로서 왕위를 점하고 있는 현재의 왕에게 신하가 무어라고 말하느냐면 '당신의 아들'이라고 하나. 그러면 그게 누구인가?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중에 뭐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무엇을 반영하고 있는가? 나단의 전승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니까 4Q ps Dan Aa는 다니엘서 7장과 나단의 전승이 집합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서 7장을 나단의 예언으로 해석한 것이라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나단의 예언이 이스라엘의 메시야 예언의 뿌리라고 하였다. 그래서 메시야의 칭호들이 전부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의 가지, 하나님의 아들 이렇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여기의 다니엘서 7장에서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바로 이렇게 다윗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운다는 것이다. 그러면 분명히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가 메시야로, 다윗적인 메시야로 해석이 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런데 거기에서 강조된 칭호가 두번이나 강조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지극히 높으신 이의 아들' 이라는 것이다.
이 문서를 쿰란에서 나왔으므로 이것이야말로 에수님 전의 문서이다. 쿰란 공동체가 유대전쟁 때 없어졌다. 주후 66년에서 70년 그때 유대전쟁 때에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쿰란 공동체가 주전 150년에서 주후 70년까지 존재한 것이다. 그 공동체에서 이 문서가 나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예수님 당시나 아니면 예수님 전에 이러한 사상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이 문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는가? 예수님 당시 아니면 예수님 조금 직전에 쿰란 같은데서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기 시작하였다는 것, 그리고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적으로 이해되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아주 널리 펼쳐진 흔적이 없어야 함에도 왜? 유대문서 중에 많이 반영되어 있지 않으므로, 따라서 이러한 사실이 쿰란 문서 같은 데에 나온다는 것은 바로 다니엘서 7장의 메시야적인 해석이 이제 점차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는 것이다.
또 우리가 이제 관심있게 보아야 할 것은 LXX에서 다니엘서 7장을 어떻게 번역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중요하느냐 하면 이것들의 번역을 보면 번역에는 항상 해석이 첨가된다. 반영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헬라어로 구약성경을 번역할 때 당시의 사람들이 어떻게 번역하였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이 사람들이 다니엘서 7장을 어떻게 해석했는지를 알 수가 있다.
그런데 이 LXX의 여러 사본들이 있는데 그중에 origen이라고 하는 위대한 초대교회의 성경학자가 모아논 사본 소위 codex 88과 같은 syro-Hexapla가 있는데 이것은 origen이 이제 성경을 6가지 말로 해놓았다. 히브리어,시리아어,헬라어,라틴어.. 이러 식으로 6가지 말로 편집을 하였다.
그중에 나오는 하나의 사본이 syro-Herapla 그것이 실제적으로 dodex88과 같은 것이다. 이것 하나 하고 또 하나 LXX사본의 파피루스에 적힌 사본 p967이 있다. 이 p967은 독일의 퀠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해서 이렇게 쓰는데 p967(퀠른) 이판을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다니엘서 7:13-14을 어떻게 번역되어 있느냐 하면 이렇게 되어 있다.
그것도 내책 22-23page에 취급해 놓았는데 두개가 약간의 차이가 있짐나 내용에 있어서는 똑같다. 그래서 하나만 보도록 하겠다.
"내가 밤에 환상 가운데에서 보았다. 보라 하늘이 구름 위에 '한 사람의 아들' 같으며 또 옛적부터 계신 이 같은 이가 와서 당도했다 .그래서 거기에 정렬해 있던 자들이 천사들이 그에게 다가갔다" 이렇게 되어 있다.
14절에 "또 그에게 왕적인 권세가 주어지고 이 땅이 모든 민족들이 각 족속마다 영광마다 그에게 예배했다" 이렇게 되어 있다.
여기에서 13절에 중요하다. 다니엘서 7장의 원래의 아라어판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9절에 옛적부터 계신이가 나타나고 그 다음 13절에 또 하나이 신적인 존재가 구름을 타고 나타나는데 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에 이 LXX 사본들에는 뭐라고 되어 있느냐면 13절에 한 사람의 아들 같으며 또 옛적부터 계신 이와도 같은 이라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이 두번째 나타나는 신적인 존재가 사람같은 것만이 아니라 그 앞에 나오는 하나님 같기도 했다. 하는 것을 강조한다.
그리고 그에게 왕권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아람말 이것을 우리말로 권세라고 하는데 이 말은 벌써 왕권이라는 말이 벌서 내포된 말이다. 그런데 이 헬라어 구문에서는 그것을 매우 강조해서 '왕으로서의 권세'가 주어졌다고 기록한다.
그러니까 첫째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 같았다'는 것 뿐 아니라 '하나님 같았다'고 하는 것을 굉장히 강조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님의 권세'를 가졌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이 70인 역의 번역자들이 다니엘서 7장 13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다니엘서 7:13절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되도록 이면 하나님과 가까이 볼려고 하였다는 그 말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이 두번째 신적인 존재의 관계를 우리가 이스라엘 유대 신학이 제공하는 언어적인 가능성을 총동원하여 정의하면 어떻게 할 수 있느냐?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관계라고 밖에 정의할 수없다. 유대신학이 제공하는 언어수단은 이 두번째 인간간치 나타나지만 동시에 하나님과 같은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밖에 정의할 수박에 없다.
그래서 4Q ps Dan Aa과 비슷한 해석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이 헬라어 번역판이 그러면 나이를 얼마나 먹었느냐?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본의 연대측정을 하는 방법이 여러가지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글씨체를 가지고 추정하는 방법이 있다. 왜냐하면 세대마다 유행하는 글씨체가 다르다. 그래서 이것을 글씨체 방법이라고 하는데 이 글씨체에 의해서 보통 주후 2세기 초로 본다. 그사본 자체를...
그래서 이것을 쿰란 문서와 같이 예수님 전에까지는 소급해 올라갈 수는 없지만 하여간 상당히 일찍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하는 것이 헬라번역판에도 나온다고 우리가 볼 수 있다.
후기 랍비 문서에서는 다닝레 7:13절에 나오는 신적인 존재의 이름을 무어라고 붙였느냐면 '구름타고 오는 이'또는 '구름의 아들' 이라고 붙였다. 왜 '구름의 아들'이라고 하였느냐면 그가 구름트고 오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의 아들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아니고 구름의 아들이라고 호칭하였다. 그래서 '구름타고 오는 이'로... 그래가지고 그것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였다. 그래서 가령 주후 2세기 초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던 당새의 최고의 랍비 R. Akiba는 여기에서 사람 이름 앞에 R을 쓰면 랍비라는 의미이다.
R.Akiba는 다니엘서 7:9절을 해석함에 있어서 이렇게 해석하였다. 왜 여기의 왕좌들이 복수로 되어 있느냐? 내가 거기에 복수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왜 여기의 하늘이 왕좌들이 복수로 되어 있느냐에 대해 R.Akiba가 답하기를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이야기냐 하면 '다윗을 위한 것이다'라는 것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다윗의 왕위에 오르는 자를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그냥 다윗이라고도 하였다. 메시야라고도 했다. 그래서 메시야의 이름이 그냥 다윗이다. 그래서 메시야의 이름이 다윗의 가지,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 다윗 이렇게 여러가지이다.
그래서 랍비 Akiba가 7:9절을 왕좌 하나는 하나님을 위한 것이고 또 하나는 다윗을 위한 것이라고 했다는 소리는 무슨 소리냐 하면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했다는 소리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Akiba도 13절에 나오는 '그 사람이 아들'은 메시야 칭호를 쓰고 있지 않다.
또 내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다른 랍비 문서에서 13절에 나오는 '그름을 타고 오는 이'를 사람의 아들로 보지 않고 구름의 아들이라고 지칭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주느냐면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면서도 사람의 아들은 메시야 칭호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Akiba와 동시새의 사람으로서 Akiba와 더불어 당대의 세명의 위대한 랍비들이 있었다.
그중의 하나는 누구이냐 하면 R.Elisha ben abuya이다. 랍비문서에 아주 중요하게 전승되는 이야기에 의하면 Akiba와 그의 친구 R.Elisha ben abuya하고 또 하나의 유명한 랍비 3사람이 하늘에 갔다고 한다. 갔더니 세 천사가 이 세 랍비들의 하늘의 궁전 여기 저기를 보여주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조 앞에 나아가서 R.Elisha ben abuya가 무엇이라고 소리질렀느냐면 '하늘에 두 전능하신 이가 계시다'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그가 이단자로 몰렸다. 왜? 유대의 정통신앙은 무엇인가? 유일신론이 아닌가? 그런데 R.Elisha ben abuya가 '하늘에 두 전능하신 이가 존재하다'고 주장하니 어찌되겠는가? 그래서 R.Elisha ben abuya가 이단으로 몰렸다는 이야기가 나와있다.
그러데 이렇게 하늘에 두 전능한 이가 존재한다는 사상은 아주 발전된 당대의 사상을 보여준다. 그런데 에스겔서 1장에 보면 무슨 형상으로 나타나는가? merkabah가 나타난다. 히브리어로 인데 이것은 전차이다. 전차를 merkabah라고 한다.
왜 전차를 라고 하느냐면 하나님이 나타날 때에 전차 위에 그 위에 왕좌가 놓이고 그 위에 하나님이 나타나신다. 그것이 에스겔서 1장에 나타난다.
그래서 이 에스겔서 1장부터 유대묵시문학과 랍비신비주의의 면면히 흐르는 전승이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것 또는 환상가운데에서 하늘에서 그 보좌 위에 높이 앉아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초월하신 분으로 그러니까 우리가 구약의 이름을 사용하면 거룩하신 분으로, 여기서 거룩하다는 말이 무슨 의미인가? 초월하여 계신다는 뜻이다. 거룩하신 이로써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중계해주는 중보자를 사실은 보는 것이다. 그런데 그 형상을 중계해주는 중보자가 누구인가? 에스겔서 1장에 있는 하나님이 영광이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원래는 하나님의 영광이 무엇이냐하면 나타난 하나님이시다. 계시된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그 영광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점점 분리되어 가지고 독립된 개체로서 인식이 되어진다. 에스겔서에서... 그래가지고 하나님을 계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이 한편으로는 지혜의 신학으로 발달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혜가 하나님의 한 속성이다. 그런데 그 지혜가 점찬 hypostatized를 실체화한다. 즉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시간과 공간을 차지하는 물체를 가진 존재로 인식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실체화하고 인격화 personified 된다.
그래서 가령 잠언 8장을 보면 벌써 그것이 나타난다. 지혜가 하나님의 딸로서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는 그래가지고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가지고 하나님의 실행자agent 노릇을 한다. 하나님의 agent, 하나님의 심부름꾼 노릇을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일, 크게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역에 agent로서 지혜가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solomon의 지혜 7:25절에 보면 이하에 보면 이와같은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지혜가 하나님을 보여주므로 그러하다.
이 사상이 philo에 의해서는 더 발달해가지고 가령 필로가 창28장에서 하나님이 벧엘에 야곱에게 나타난 현상을 어떻게 해석을 하느냐면 하나님 자신이 직접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 로고스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로고스를 보면 하나님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분이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머리로 하나님을 인식하지 못하는 야곱과 같은 바보천치들에게는 스스로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잡혀주시는 것이다. 잡혀주시는데 어떻게 잡혀주시는가? 자기의 로고스를 통해서 잡혀 주시는 것이다.
말씀의 신학이나 지혜의 신학이나 똑같은 것이다.
로고스가 직접 하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이유는 로고스가 하나님께 함께 하나님의 왕좌에 앉아계시므고 그 왕좌로부터 보냄을 받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렇게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를 전부,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이 앉아계심을 본 체험을 기술하는 문시문학이나 신비문학의 모든 것을 다 한마디로 뭐라고 하느냐면 신비주의라고 한다. 그 신비주의 전승이 한편으로는 지혜의 신학, 말씀의 신학으로 발전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어떻게 발전하느냐면 다니엘서 7장과 같이 발전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하나님의 왕좌들이 놓이고 하나님이 거기에 정좌하시고 그 밑에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등극하는 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서 누가 그런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등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R.Elsha b.Abuya의 선언, 하늘에 하나님 한분만 혼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또 한분의 신비적인 존재가 있다는 선언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가 되는 것이다. 나중에 이 전승이 소위 제 3 에녹서에 가면 제 3 에녹서는 히브리어 에녹이라고도 한다. 왜냐하면 히브리말로 쓰여져 있으니까..
제 3 에녹서은 주로 merkabah 신비주의를 담고 있는 것인데 그래서 신비문서인데 거기에는 이 사상이 더 발달해서 하늘의 하나님의 왕좌에 하나님 혼자서 앉아계시는 것이 아니라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앉악시는데 그 이름이 무엇이냐 하면 metatron이다.
그런데 이 metatron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작은 야웨(little Yahweh)라고도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이 왕좌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가지고 심부름군 노릇을 하는 실행자(agent)인 것이다. 그런데 그 이름이 metatron이다.
그런데 이 metatron의 어원이 어떻게 되느냐에 대해서 어떤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meat tronos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왕좌 뒤에 앉는자'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왕좌를 공유한 자라는 말이다. 이자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작은 야웨라고도 한다고 하였다. 이런 전승사에 있어서 다니엘서 7장이 좀 초기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이 문자적으로 에스겔서 1장과 아주 가깝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첫째로 이스라엘의 유일신론이 절대유일신론이 2위일체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소위 이것을 영어로 Bitarianism이라고 한다. 지혜신학이든 아니면 나중에 metatron으로 발전하는 묵시문학이든 이스라엘의 절대유일신론이 Bitarianism으로 2위일체론적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스라엘의 신의식이 절대적 유일신론에서 2위일체론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까지 내가 대충 든 예를 살펴보면 우스꽝스럽죠? 우리로서는좀 이해가 안되는 이상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이런 고대문서를 대할 때에 늘 염두에 두어야할 것이 이 사람들이 이런 언어를 통해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해보아야 한다.
이것은 무엇이냐 하면 신의식에 있어서 하나님 의식에 있어서의 발전의 과정을 나타내주고 있다.
바로 이 2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이 발전이 무엇과 시간적으로 병행이 되느냐면 하나님의 초월이 강조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함이 강조됨과 시간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하나님은 곧 초월자다라는 것과 병행되어 발전하는 것이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이로써 하늘과 땅과 동일시 될 수있는 분이 아니고 하늘과 땅의 저편에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늘과 땅 저편에 계시는 초월해 계시는 초월자가 어떻게 동시에 역사속에 개입하셔서 아니면 이 세상에 개입하셔서 우리에게 스스로를 계시하시고 구원하시느냐? 혹은 내가 그가 어떻게 동시에 내재하시느냐?는 사상을 나타내는언어적인 수단이 바로 이러한 지혜 신학이요 이런 묵시문학에서 발달되는 metatron이다.
초월하시는 하나님 동시에 이 역사와 세상에 내재하셔서 우리에게 계시와 구원의 활동을 하시는 분이시다 라는 이 진리를 신학적으로 표현하는 수단이 지혜 신학의 발달과 metatron의 발달이다.
구원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일어나기 위해서는 위의 둘다 다 필요하다. 하나님은 초월하셔야 우리를 구원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이 우주보다 커야 이 우주의 고장을 고칠수가 있다. 하나님이 겨우 우주만큼 하다고 가정해 보자. 범신론과 같이... 그러면 이 우주의 병을 고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주를 초월하여서 이 우주의 고장을, 병을 고칠 수가 있다. 초월하여 계셔야 구원할 수가 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이 이 우주를 초월하셔서 저 위 꼭대기에 앉아계시면 또한 우주를 고칠 수가 없다. 이슬람교의 신관같이 '알라'가 저기 너무 거룩해가지고 하늘 꼭대기에 자기 혼자 앉아있으면 이 세상은 나몰라라하고 앉아 있으면 구원이 안일어 나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이 동시에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이 역사안에 들어오셔서 스스로 계시하고 우리에게 구원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내적이어야 내재해야 구원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러면 초월하시는 분이 어떻게 내재하시느냐? 어떻게 내재하시는가? 자기의 실행자, agent를 통해서 하시는 것이다. 자기의 지혜를 통해서 그 일을 하신다. 또는이 metatron을 통해서 하신다.
하나님이 어떻게 자기의 왕권을 행사하는가?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자기의 딸인 지혜를 통해서 하나님이 왕권을 행사하시는 것이다. 그러면 그 아들과 딸은 하나님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똑같으므로 하나님을 보여줄 수가 있고 하나님과 똑같으니까 하나님의 뜻을 100% 이행할 수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과 똑같으니까 하나님의 권능을 완전히 행사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2위일체론적인 신의식이 발전하는 것이다. 이것의 완전한 발전형태가 삼위일체론이다. 삼위일체론의 논리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신의식의 발달 전 과정중에 다니엘서 7장이 나타난다. 이것을 전통적인 계시의 신학에서 이른바 점전적인 계시라는 카테고리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
우리에게 지금 관심있는 것이 무엇이냐? 다니엘서 7장의 지금 이와같은 점차의 발달들은 bitarianism 전승의 초기단게에 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면 지금 우리에게 있어서의 관심은 다니엘서 7장에서 '한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왔다는 것에 대해서 지난번에 뭐라고 하였는가? 신적인 존재라고 하였다. 그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왕좌를 공유하는 자이다.
그러니까 그가 무엇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밖에 이해도리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쿰란 문서의 해석이 전적으로 그 전승의 의도에 합당한 것이다. 그리고 LXX의 번역자들이 전적으로 그 전승의 의도에 합당하게 번역하였다는 것이다. 즉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무엇이라?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까지 몇가지 문서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이제 두어 문서만 살펴보면
'요셉의 기도'라는 문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독립된 문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위대한 성경학자 origen의 요한복음 주석책에 인용이 되어 있는 유대인들의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들을 origen이 무엇이라고 칭호를 주었느냐면 '요셉의 기도'라고 칭호를 주었다. 그래서 보통 요셉의 기도라고 알려져 있다.
그 문서를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다. 그것도 내책에 다 밝혀 놓았는데 내책 27page에 인용해 놓았는데 그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이 하나님으로부터 무슨 이름을 받았는가? Isfael이라는이름을 받는다. 그래서 이 야곱이 이스라엘이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합명사이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이스라엘의 씨이다. 야곱의 씨이다.
야곱 이스라엘의 씨이다. 그래서 야곱이 이스라엘 후손 전체가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몸에 내포되었다고 본 것이다. 그래서 야곱 이스라엘의 운명이 곧 그 후손들 곧 이스라엘 민족의 운명인 것이다.
지금 극단적으로 개인저의적으로 생각하는 현대인들에게는 좀 이것이 어려운 이야기이다. 인간 실존의 연결성을 잘 나타내는 개념이다.
그런데 그 '요셉의 기도'라는 문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야곱 이스라엘이 원래 하늘의 궁전의 천사들 중에 제일 대장이었다. 천사들 중에 제일 으뜸가는 천사이었다.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천사들 중에 제일 대강가는 천사이었다 .그런데 그가 땅위의 야곱에 의해서 incarnation된 것이다. 성육신 된것이다. 그래가지고 그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는데 자기의 본향, 본래의 위치로 올라가는데 다른 천사들..미가엘 이런 천사들이 방해하고 싸우고 시기해가지고 그가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보좌 제일 가까운 곳에 앉는 것을 방해한다. 그런데 결국 야곱 이스라엘이 그러한 것을 다 물리치고 하늘에 올라가서 하나님의 가장 가까운 곳에 앉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이야기가 아주 우스꽝스러운 이야기 같다. 사실은 여기에 약간 영지주의적인 영햐이 뒤섞인 이야기이다. 그런에 이 이야기가 나타내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이냐하면 이스라엘 민족의 숙명론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언약이 백성이므로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다. 출애굽기 4:22절 이하부터 이스라엘을 뭐라고 부르는가? 하나님의 맏아들이라고 부른다. 왜? 이스라엘이 언약의 백성이므로 그렇다.
그래서 하나님의 맏아들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과 뗄래야 뗄수 없는 교제의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fellowship에 들어가서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을, 유산을, 부요함을 상속받는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숙명이다.
그런데 지금 현재는 이스라엘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이 땅 위에서 자기의 형에게 쫓겨서 방황하는 자기 조상의 야곱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이 땅 위에서 에돔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앗수르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애굽 사람들에게 고생하고 바벨론 사람들에게 고생한다. 이렇게 맨날 쫓기고 고생만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정한 숙명은 무엇인가? 종말에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로 확인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그것이 이스라엘 민족의 진정한 숙명인 것이다.
그러한 이해를 나타내는 것이 '야곱의 기도'인 것이다. 이스라엘이 원래 무엇이라고? 하나님과 제일 가까운 ,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모든 천스들의 대장이다. 하나님의아들로서..그런데 그가 이 지상에 형에게 쫓겨서 유리 방황하는 야곱으로 성육신 되었으나 그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서 자기의 원래의 자리, 하나님의 맏으들로서의 원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그의 숙명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반대 세력이 많다. 그런 이야기이다. 우기아 여기에서 자세히 논할 수는 없지만 이 이야기가 어떠한 유대신학의 전승에서 나오느냐 하면 바로 다니엘서 7장의 전승에서 나오는 것이다.
왜? 다니엘서 7장의 내용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구름을 타고 와서 무엇을 하는 장면인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는 장면이다. 그 장면을 뭐라고 해석하였는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우편에 등극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진정한 이스라엘 진정한 언약의 백성이 종말에 어떻게 된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을 받는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아들인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에게 내포되어가지고 그 하나님 보좌의 우편에 높임바든다는 이야기가 다니엘서 7장의 이야기이다. 여기서 이 '요셉의 기도'라고 하는 문서에서 우리가 무엇을 알 수있느냐면 다니엘서 7장의 이 전승이 에스겔서 1장에 나오는 묵시문학의 소위 전승이 한편으로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있는 하나님의 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제2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하나님의 그 내재의 수단으로서의 제2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신학사상과 신학언어를 창출하였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야곱이 이스라엘의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므로 그에 내포되어서 이스라엘 하나님의 아들이 종말에 하나님에 의해 높임받는다는 사상이 크게 발달되었다.
그것이 좀 더 발달된 것이 우리가 좀 더 살펴볼 수 있는 이른바 Nag Hammadi에서 발달된 CodexⅡ이다. Nag Hammadi는 이집트의 Nag Hammadi라는 나일강의 유역의 모래 밭에서 발견된 영지주의 문서를 Nag Hammadi문서라고 한다.
이 문서의 153에 보면 무슨 이야기가 나오느냐면 보좌에 보좌르 둘러싸고 있는 천사들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merkabah보좌를 받침으로 하고 있는 천사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누구이냐 하면 교회이다.
그런데 이 교회가 하나님의 맏으들로 불리우고 이스라엘이라고 불리우고 그렇게 불리움을 받는다. 이것도 똑같은 전승의 발전과정이다. 하나님의 보좌 곁에 누가 있는가? 교회가 있는데 교회가 하나의 천사로서 존재한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좌 곁에 있는 것이다. 이것도 똑같은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과 뗄래야 뗄수 없는 밀접한 fellowshil상태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지금은 우리 교회가 이 지상에서 짓눌림을 받고 고생하지만 교회가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교회의 숙명이 무엇이냐? 하나님의 보좌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런 전승이 발달하는 것이다.
이런 것이 다 직관적으로 다니엘서 7장과 관계되어 있는 것이다. 다니에럿 7장이 무엇인가? 지극히 높으신 성도들이 무엇을 하는가?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높임 받아서 그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한 그 구원의 기대 이것이 점차 이렇게 발달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러면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문서들에 근거해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가 있다.
첫째로, 다니엘서 7장이 유대교전승에서 활발하게 메시야적으로 해석되고 거기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메시야로 인식되는 것이 주후의 문서들에서는 상당히 광범한 증거가 된다. 그러나 주전의 문서에서는 쿰란문서에서만 유일하게 증거가 된다. 그래서 그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다니엘서 7장의 메시야적 해석과 한 사람고 같은 이라의 메새야적인 해석이 예수님 당시에 유대교 일부에서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아직 널리 퍼지고 일반화된 사상이 아니라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재 주는 것이다.
둘째로 유대의 전승 가운데서 다니엘서 7:13절의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식되어서 한편은 하나님의 대권자로, 하나님의 전권대사, 하나님의 실행자로 아들로 인식이 되기도 하고 다른 한편은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의 대표로 하나님의 아들인 하나님의 백성의 종말의 대표로 인식이 되어서 그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의 하나님의 보좌에 높임바 되는 것을 상징화 되는 것으로 인식이 된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난번에 대니엘서 7장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에 대해서 설명을 하였다. 하나님의 궁중 어전회의에 선지자가 참여하는 장면이라고 하였다. 지금 이와 같은 결론하에서 그러면 예수님의 다니엘 7장을 어떻게 해석하였을까? 그것이 이제부터의 과업이다.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니엘서 7:13절에 나오는 그 존재와 자기를 일치하는 것이다. 이 다니엘서 7장을 하나의 로 보고 곧 하나님께서 자기 구원의 계획을 선지자가에 미리 계시하는 것으로 보고 그래서 선지자에게 계시된 이 구원계획이 지상에서 이제 펼쳐져야 할 것으로 보고 자기가 바로 그 구원계획을 펼치는 수행을 담당하는 자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예수의 자기칭호를 '그 사람의아들'로 나타내는 것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러한 사상은 겨우 쿰란과 같은 묵시문학의 써클에서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가 아주 이 칭호를 사용하기에 합당하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을 자기의 칭호를 만들기에 아주 합당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이 진정한 관심은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게 하고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도록 하는 것이었다는 것이다.
지난번에 내가 다니엘서 7장의 진정한 관심이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같이 됨이라고 하였다. 바로 예수께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았음으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해서 하나님과 같이 되게 하기 위한 자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다니엘서 7장에 계시된 하나님의 구원계획 비밀을 성취하는 자라는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고 이렇게 볼 수 있다.
신약신학 제10강
오늘은 언어적인 자료에서부터 시작한다고 하였다.
언어적인 자료와 이른바 영국학파에서 시작해본다.
우리의 복음서에 항상 똑같이 나오는 가 아주 이상한 문구라는 것이다. 첫째로 헬라어로 보면 아주 이상한 문구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거의 모든 학자들 사이에서 일치를 하기를 이것은 아람어의 문자적인 번역이다 라고 본다. 예수께서 하였는데 이것에 대한 문자적인 번역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히브리어의 에 해당된다. '사람의 아들'에 해당되는 것으로서 이 개념은 Gattung을 말한다. 종교... 의 사람이라는 말은 인류중의 하나라는 개별화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개별화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가령 '소 한마리'할려면 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소떼중의 하나'라는 뜻이다. 즉 소 한마리라는 소리이다. 마찬가지로 인간떼들, '인류중의 하나'라고 해서 '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말도 똑같다. 이것인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한 사람'이라는 숙어라는 말이다. 여기까지는 다들 동의한다.
그런데 문제는 어떻게 발생하느냐하면 어떻게 그러면 가 예수님 당시에 사용되었나? 그 문구가 어떻게 그 당시에 사용되었었나? 이것에 대하여 유대학자 G.Vermes라는 사람이 1967년 이후 줄곳 주장하기를 이 아람말 문서 특히 이 사람이 쓴 게 좀 후기의 라비 문서를 많이 사용하였는데 아람말 문서에 또는 가 더러 나온다.
예수님 당시의 문서에 이 문구가 별로 안나온다. 그런데 후기의 아람말 문서에 이 말이 나오는데 이것은 앞의 가 생략된 것을 말한다. 그래서 또는 로 앞의 가 생략된 것을 말한다.
그런에 이 문구가 이든 아니든 마지막 를 붙였든지간에 마지막 는 강조형으로서 아람말에 있어서는 관사가 없다. 따라서 관사 역할을 하는 것이다. 즉 강조형으로서 관사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가 없는 형을 절대형이라고 하고 가 있는 형을 강조형이라고 하는데 이 강조형이 있을 때는 무슨 역할을 하느냐면 관사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G.Vermes는 무엇이라고 주장하느냐면 의 이 기능이 사라졌다고 한다. 그래서 절대형이나 가 나오는 강조형이나 모두가 그냥 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한 사람이라는 의밈나을 갖는 것으로서 말하는 이가 자기를 포함해서 말할 때 '한 사람'이 그러니까 '나같은 사람'
영어로 말한다면 ①a man such as I 나같은 사람이거나 또는 그냥 ②a man 사람이라면 나도 적용이 된다(Therefore I also) 나에게로 이것이 적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사람인 것이다. 이것을 generic meaning이라고 한다. 일반적인 의미라고 한다.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말이다. 모든 사람에게 다 적용되는 의미로 쓰였든지 아니면 나같은 사람이라고 특수한 케이스 나를 포함한 나같은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특수한 사람에게만 쓰였든지 아니면
③심지어 I '나에'대한 대칭어로 쓰였다고 주장하였다. '나'를 말할 때에 써야할 때에 '나' 대신에 라고 할 수있었다고 주장한다. 예수가 바로 이러한 의미로 사용했었다는 것이다. 위의 세가지 중에 어느 하나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지 이것이 무슨 메시야적인 칭호는 물론 아니고 다니엘서 7장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냥 숙어라는 것이다. '한 사람' 또는 '나 같은 사람이..' 또는 '내가' 라고 할 때에 그냥 숙어적으로 를 사용했다고 말한다.
그뒤의 학자들이 G.Vermes가 사용한 자료들을 자세히 검토한 결과 이러한 용법은 없었다. ③의 '나'라는 대명사를 대칭해서 사용한 예는 없고 위의 ①②의 두가지는 있다. 일반적인 의미로 그냥 '사람'이 할 때, 또는 특수한 경우 '나 같은 사람이'의 이러한 경우로 쓰인 경우는 있다고 사람들이 그렇게 본 것이다.
그래서 논쟁이 이렇게 벌어지기 시작하는데 또 아람말에 정통한 미국의 카톨릭학자 J.Fitzmyer는 주장하기를 이 복음서에 항상 일관되게 나오는 관사를 동반하는 는 분명히 강조형, 가 마지막에 있는 강조형 의 강조형을 문자적으로 직역하였다는 것을 우리에게 암시해주는데 이 강조형은 Vermes가 주장하는 것과 같이 예수님 당시에 그 말이 효력을 잃고 기능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후기 아람말에서만 잃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당시에는 그 강조형이 그대로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예수가 일관적으로 를 사용한 것이 아니고 강조형인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고 주장하면서 Vermes에 대항해서 Vermes가 사용한 자료들이 증거자료들이 대부분 주후 4세기 이후 쓰여진 자료들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ㅎ다. 그러니까 Vermes의 자료가 신빙성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Vermes와 Firzmyer가 한 네번 글을 주고 받은 대논쟁이 벌어졌다. 그런데 Vermes가 가지고 있는 자료들이 대개 맨 앞의 가 없는 것이다. Fitzmyer에게는 Vermes가 쓴 자료들이 이것도 늦은 자료라는 것이다. 아람말에도 점차 이 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 예수님 당시에는 분명히 있었다. 그래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 당시에 이 말이 어떻게 쓰였나? 특히 이 강조형이 어떤 기능을 발휘하였는가? 아니면 아무 기느을 다 잃어버렸느냐? 하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지 예수님 이후 300-400년 후에의 자료를 가지고 예수님 당시에 언어가 어떻게 쓰였다고 하는 것은 쓸데가 없는 짓이다.
세종대왕 때의 한글이 어떻게 쓰였는가 하는 것을 지금 자료를 가지고 어떻게 그 당시에 쓰였는가 하고 이야기하면 되겠는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Fitzmyer가 이 사람에 대항해서 논쟁을 많이 벌였는데 이 Vermes에게 영향을 받은 영국의 M.Casey와 B.Lidars는 계속해서 Casey는 예수가 를 a man, (the) man의 의미로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사람의 의미로 썼고 그것은 예수 자신에게도 적용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B.Lindars는 예수가 a man such as I 의의미로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어느 사람에게나 다 적용되는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와 같은 특수상황에 처한 사람들, 그렇다고 해서 자기에게만 적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되는 말이 예수의 자기 칭호도 아니고 자기만을 특수하게 지칭하는 것도 아니고 자기와 같은 사람에게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에 우리의 복음서에 보면 분명히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예수의 자기 칭호로 되어 있고 예수만을 지칭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M.Casey 나 B.lindars는 뭐라고 주장하느냐면 그런 것은 다 교회가 나중에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령 B.Lindars는 같은 경우에 그 많은 '그 사람의아들'의 말씀들 중에서 진짜 예수의 말은 6개밖에 없다고 한다. 거기에다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나중에 덧붙였지만 그 내용상 예수의 말로 들어가는 것이 3개가 더 있어서 기껏해야 9개만 진짜의 예수의 말이고 나머지는 전부 교회가 나중에 신앙고백으로 지어냈다고 이야기한다.
가령 Lindars가 주장하는 6개 내지는 9개의 진짜의 예수는 말에 그런 것은어떤 것인가? 거기에서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어쩌면 Lindars가 조금 억지를 부리면 다 이렇게 해석될 수가 있다.
가령 '그 사람의 아들'은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으나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는 그 말도 이렇게 해석될 수가 있다. '나같은 사람은 머리둘 곳이없다' 꼭 나만 머리둘 곳이 없다는 소리가 아니라 나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은 머리둘 곳이 없다는 의미이다. Lindars의 해석방식에 의하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는 6개 내지 9개의 말만 진짜 말이고 그 나머지는 모두 다 교회가 나중에 지어낸 말이라고 한다.
이들이 교회가 나중에 지어낸 말이라고 주장할 때에 큰 어려움이 하나 있는 것은 우리가 처움에 서론에서도 분명히 관찰했짐나 교회가 도대체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말을 신앙고백이나 복음 선포에 사용한 흔적이 없다.
예수가 그리스도다. 예수가 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등이 다른 기독론적인 칭호들은 신앙고백이나 케리그마에 열심히 쓰였으나 '예수가 사람의 아들이다'는 그러한 말은 한 적이 없다.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도대체 케리그마나 신앙고백에 쓰인 일이 없다. 다른 마로 하면 남이 그말을 쓰지를 않았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만 그 말을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교회가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말을 많이 지어내서 우리의 복음서에 사용하였다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러면 신앙고백으로 쓰였다는 의미인데 우리 복음서 외에 그 쓰인 흔적이 어디에 있는가?
우리 신약성경도 없고 신약성경 이후의 고대문서에도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들에게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다 알 필요가 없고 이상의 이들은 다 영국의 학자들이어서 영국학파라고 내가 부르는데 이들의 문제가 발생한다.
둘째는 복음서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씀에는 분명히 다니엘서 7장의 영향이 매우 크다.
그러면 도대체 에수가 기껏해야 '사람이 이러이러하다'거나 또는 '나같은 사람이 어떠하다'고 하기위해서 하는데 그러면 어떻게 해서 이말이 다니엘서 7장과 연결이 되어서 우리 복음서에 나오게 되었나? 예수가 다니엘 7장 13ㅈ덜을 전혀 안중에 두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말투,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투를 다니에서 7:13절과 연결시켜서 중요한 기독론을 형성하게 되었나? 하는 이것을 설명할 길이 없다.
그래서 B.Lindars같은 사람은 이것을 아람말로 구전되는 예수의 전승이 헬라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번역자들이 다니엘서 7:13절의 가 나오는데 그것이 거기에 LXX에 로 되어 있다. 그래서 거기에 일치점을 찾아가지고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이러한 의미로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가끔 사용하였는데 그것을 다니엘 7:13절과 연결시키기 시작했다는 것이 다니엘서 7:13절을 도입한 '사람의아들'에 대한 기독론의 시초다라고 이러한 식으로 설명하는데 그런 것은 일고의 가치도 없는 억지이다.
여러분들이 더 자세히 알려면 B.Lindars의 책이 치ㅗ신의 책이니까 한번 읽어보라. 별로 뭐 바쁜 사람은 그것을 읽을 필요는 없고 이것에 대해 전공하려면 한번쯤 읽어볼 필요는 있다. 그래서 이들은 내가 더이상 논하지 않겠다.
하여간 이렇게 영국학파가 주로 언어적인 배경을 가지고 논한다는 것 그것만을 우리가 알아두기를 바란다.
내가 대충 결론을 내리면 이 는 에수님 당시에 '한 사람'이라는 의미로 또는 '나같은 이' '어떤 이' a human being, someone '나같은 어떤 이' 라느 의미로 쓰이고 또 그렇게 쓰이는 숙어이었다.
그런데 우리가 두번째 생각해보아야 할 것은 Fitzmyer나 Jeremias가 밝힌바와 같이 심지어 Lindars도 동의하는 바와 같이 라는 구절이 예수님 전이나 심지어 예수님 당시의 문서에 그렇게 흔히 안나온다는 것이다. 이말 자체가 아주 드물다.
그렇다면 이 말 자체가 아직 확실히 숙어로 성립되지 않은 것이다. Vermes가 Casey 나Lindars는 이것이 확실히 성립된 숙어라고 전제하기 때문에 가설을 제시하는데 도대체 에수님 당시에 이 말이 별로 안쓰였다면 어떻게 이것이 숙어로 성립이 되었다고 보는가?
이제 숙어로 성립되어가는 단계에 있었다는 그 정도일 뿐이다.
세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할 것은 이 는 또는 는 그 자체로서는 전혀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한 사람'을 지시하는 숙어적으로 발달되는 과정에 있었을 뿐이지 그것은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네째로, 그러나 우리가 중요한 것은 다니엘서 7장의 그 vision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는 전승이 예수님 직전에 예수님 당시에 점점 발달을 한다. 우리가 지난번 시간에 본바와 같이 점점 발달하는데 바로 그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메시야적으로 해석되는 다니엘서 7장의 이 문구가 나온다. 의 문구가 거기에 나온다.
그러니까 자연히 가 다니엘서 7장이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지는 전승이 발달해지는 것과 동시에 이 문구가 점점 메시야적인 의미를 띠기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원래는 이것이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다. 방금 세번째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러나 예수님 직전에서부터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점점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지기 시작된다. 그리고 예수님 당시부터..
그런데 바로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다니엘서 7장의 이 문구가 내용으로 다니엘서 7장의 중심된 인물로, 이 구절로 지칭된 존재가 나타나므로 점차 이 문구가 메시야적인 의미를띠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심지어 다니엘서를 메시야적으로 해석하는 문서에서도 예수님 전에서부터 예수님 당시까지는 확실히 메시야적인 칭호로 성립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는 그냥 '사람'이라는 일반적 의미의 발전되는 숙어로 발전되는 단계에 있었고 다른 한편에서는 제한된 circle에서는 메시야적으로 해석되어지는 다니엘서 7장과 더불어 메시야적인 의미를 띠기 시작하는 그 운동도 같이 일어났다 그말이다.
그런데 다니엘서 7장을 메시야적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 자연히 거기에는 중심역할을 하는 중심역할을 가진 로 지칭되는 존재가 듣는 사람에게는 금방 메시야적인 의미를 금방나타내게 되는 것이다.
다섯째로,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할 것은 강조형 중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복음서에 항상 이렇게 관사를 동반하고 쓰인다.
그래서 이 강조형 마지막 가 있는 것으로 보는데 이것의 중요성을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한다.
캠브리지의 신약학자 C.Moule이 관찰한 바와 같이 우리복음서 이전의 유대 문서에 이렇게 강조형을 가지고 로 나타난 흔적이 없다. 아까 뭐라고 그랬는가? 예수님 당시의 유대문서에 자체가 드물게 나온다고 그랬다. 그런데 강조형을 가지고는 한번도 안 나온다.
그렇다면 예수가 이 문구를 사용했다는 것도 상당히 독특하나 강조혀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더 독특한 일이다. 예수님 당시에 강조형을 가지고 나타난 흔적이 전혀 없으므로 더욱 독특한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여기의 이 강조형의 의 기능이 무엇이었을까? 아까 관사의 기능이 있다고 하였다. 히브리말에는 관사가 있지만 아람말에는 관사가 없다. 그래서 강조형으로 관사를 대치한다. 그러며 무슨 역할인가? 관사는 지칭,지적하는 역할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무엇을 지칭하는가? 나는 이것이 예수가 다니엘서 7장 3절에 나오는 '사람의 아들 같은 이' 문구가 나오는 , 그런 문구로 지칭된 그 하늘이 존재를 지칭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니까 에수가 자기를 라고 부른 의도는 자기가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라는 그말이다.
자기가 바로 다니엘서 7장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을 들을 귀 있는 자만 들으라는 것이다. 성경을 아는 자만 들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를 이렇게 무미건조한 인자로 번역해서는 안되고 이렇게 관사를 강조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번역을 하고 이것에 따옴표를 두번씩 해야 한다고 본다. '사람의 아들'은 어디에서 따온 것인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데 "그 사람의 아들" 전체가 예수의 말을 우리가 인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중 따옴표로 사용하고 "그 사라의 아들"이라고 하며 '그'자에 강조를 두어야 한다.
이게 무슨 소리이냐 하면 예수가 은근히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함으로써 자기가 바로 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그 사람의 아들"로서 "그 사람의 아들"의 기능을 역할을 성취하는 이라는 자기이해를 은근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지난번에 우리가 다니엘서 7장에서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의 계시라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비밀의 계시라고 하였다. 그 비밀의 내용이 무엇인가? 종말에 하나님의 진정한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을 하나님의 우편에 높인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과 통치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곧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다니엘서 7장의 이다. 비밀 곧 구원의 계획이다.
예수가 자기가 바로 그런 구원의 계획을 이 땅위에서 이루는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를 "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은다니엘서 7장에 예언된 그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곧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을 모으는,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자기 이해를 나타낸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가 이렇게 자기 자신을 생각하였다. 그것이 나의 가설이다. 그러면 그것을 증명해야 한다. 진짜로 예수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같은 이를 지팅해서 내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 그 사람의 아들"의 역할이 무엇인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이다.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아서 그들에게 하나님의 권세와 영광과 나라에 참여하게 하는 그들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여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하는 것이다.
이상의 내용이 언어적인 관찰과 분석에서 얻는 가설인데 그것이 진짜로 그러한가는 이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을 하나하나 해석해 봄으로서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증명을 하기 전에 나의 가설을 증명하기 전에 우선 염두에 두어야할것은 지난 번에 내가 이야기한 소위 일반적인 학계에서 주종을 이루는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연구 방법이 틀렸다는 것, 그래서 우리는 그 방법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야 한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일반적인 학계에서 주종을 이루고 있는 그 방법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그것은 '그 사람의 아들'의 말을 세가지로 분류한다고 하였다. 어떻게 세가지로 분류하는가?
a)미래에 심판자와 구원자로 올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
b)고난받고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는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
c)현재 땅위에서 겸손히 지내는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이다.
이렇게 3가지로 분류한다고 하였다.
그래가지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에 이렇게 한다. 첫째로 '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을 분류한다. 어떻게 분류하느냐면 Bultmann이 주로 이렇게 하였는데 미래에 '그 사람의 아들'이 천사들과 함께 영광가운데에서 올 때에 와서 무엇을 하는가?
심판을 하고 구원을 한다. 그래서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 미래에 천사들을 동반하고 심판과 구원자로서 천사들과 함께 오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말들. 둘째 종류는 고난받고 죽고 부활하는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
세째는 지금 현재 겸손히 땅위에서 살고 섬기는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이다. 여기에서 둘째 번은 매우 많다. 가령 누구나 잘 아는 마가복음 10:45절도 두번째에 속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대제사장들에게 의해 넘겨줌을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할 것이다.
마가복음 8:31.9:31/10:33/45 등 엄청나게 많다. 9:9/9:12절 등...
이 세번째 종류는 무엇인가? 아까 이야기한대로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 곳이 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였다. 요한은 마시지도 않고 먹지도 않으니까 귀신들렸다고 하고 그 사람의아들은 마시고 먹으니 뭐라고 하는가? 탐식가요 술주정뱅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분류를 한다. 분류를 해가지고 이중에 어떤 것이 진짜 예수의 말일까?고 주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불투만학파는 이 미래의 것 중에서한 두개만 예수의 진짜의 말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그때에 예수는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지칭한 것이 아니고 자기 아닌 종말의 구원자, 심판자, 구원자로서의 '그 사람의 아들'을 미리 예고하는 것이라고 한다고 하였다.
또한 E.Sbhweitzer 같은 사람은 b)의 고난받고 죽임받는 '그 사람의아들'로서의 말 중에 몇개만 예수의 진정한 말이라고 주장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 말중의 어느 한가지가 예수의 진짜 말이라면 나머지 두가지는 어떻게 여기에서 유추되었을까? 그러면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의 부활 후에 다 발달시킨 것이넫 이 사람들의 연구 전제와 방법이 맞다면 그러면 어떻게 a)의 말에서 b)나 c)가 나왔을까?
또한 E.Schweitzer의 의견을 수납한다면 어떻게 b)에서 a)나 c)가 나왔을까?이렇게 소위 전승사적으로 Tradition-history로 연구하는 것이 지금까지의 대체적이고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연구 방법이다.
이렇게 연구를 하여보면 지금 이야기한대로 전혀 다른 똑같은 방법, 똑같은 전제와 똑같은 분류방법과 똑같은 전승사 방법을 사용하여도 전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한다. 하나는 불투만학파나 다른 하나는 E.Schweitzer학파...
그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내가 지난번에 뭐라고 하였는가? 방법론이 틀렸다고 하였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 분류의 기준이 무엇인가? 기준에 혼동이 있다. 첫번째와 마마지막의 분류기준은 무엇인가? 시간이다. 미래와 현재에서의 '그 사람의 아들'이다. 시간을 기준으로 하여 분류하였다. 두번째의 나누어진 것은 무엇때문에 분류하는가? 내용상으로 분류한 것이다. 고난 받고 십자가에 죽어 부활한다는 내용이었다. 이것은 시간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벌써 분류 자체가 아무런 기준의 일관성이 없이 자기들의 마음대로 분류한 것이다. 그러니까 이렇게 분류하는것 자체가 틀린 것이다.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면 이렇게 억지로 분류를 해놓고 그중의 어느 것을 진짜 예수의 말이라고 하고 그 나머지를 전승사적으로 예수의 진짜 말에서 그것이 어떻게 예수의 부활후 유래되는지를 설명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성립될 수 없는 논리이다. 따라서 이 방법론 자체가 틀린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구태여 우리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말들을 분류할려면 두가지로 밖에 못한다고 한다.
그것은 그의 권위가 무시되는 '그 사람의 아들'과 그의 권위가 확인되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이렇게 주로 이 권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올 때마다 그 근저에 예수의 강력한 권위주장이 풍긴다. 직접적으로, 간접적으로 풍긴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제사잘들에 의해 넘겨져서 죽임을 당하고 그런다는 말들은 전부 '그 사람의 아들'의 권위가 전부 짓밟히는 것을 말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 권위 있는 존재이지만 이 땅에서 머리둘 곳이 없다는 것도 여기에 속한다. 사람들에게 술주정뱅이요 탐식가요 욕먹는 것도 여기의 카테고리에 속한다.
반면에 옛날의 분류 방법에 의해서 미래에 속하는 , 즉 첫번째 카테고리에 속하는 것은 전부 예수의 권위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권위가 천명되고 확인되는 말투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에서 올때 천사들을 동반하고서 올 때에 심판자와 구원자로서 오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구태여 우리가 분류하려면 이렇게 예수의 권위가 짓밟히느냐 아니면 존중되느냐의 두가지로 밖에 분류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그것도 미흡한 방법이고 예수의 '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을 내용상 분류해야 한다. 그래서 내용상 한 6가지 정도로 분류하였다. ①분류부터 틀리게 하였던 것이다. ②이렇게 한 여섯가지로 분류해 놓고 그중의 어느 하나를 예수의 진짜 말로 생각하고 그 나머지는 그 진짜말에서 이차적으로 교회가 나중에 덧붙인 것이라고 그렇게 볼 것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연구할 것이 아니라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 중에 제일 우리에게 그 의미를 쉽게 드러내는 것을 하나 골라가지고 그것에서 그것을 자세히 연구하므로 해석하므로 '그 사람의 아들'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거기서 캐면 거기서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열쇠를 갖게 될 것이다.
그래가지고 그 의미를 내가 여섯가지로 분류한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다른 말에도 적용해보아서 잘 의미가 통하며 잘 그의미가 드러나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방법을 택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을 보아야 하느냐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로 되어 있다. 그런데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들은 우리에게 예수의 자기이해를 제일 환하게 보여주는 말들인 것이다. 왜냐하면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가장 극적으로 해석해주는 것이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다. 죽음 직전에 하신 말씀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주 결정적인 말들이다.
그런데 내용상도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해석하는 말이기 때문에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어떻게 보았느냐? 자기의 사역을 어떻게 보았느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자기 이해를 가장 확실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특별히 에수의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아들인 죄인들과 더불어 일련의 잔치를 베풀었다.
예수가 즐겨 비유한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종말에 완성된 잔치에 일시적인 임시적인 성취로서 예수가 죄인들과 하나님 나라의 메시지를 받은 죄인들과 잔치를 베푸는 것이다. 바로 그 잔치들의 , 하나님 나라의 선포에 있어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받아들인 죄인들과 나눈 일련의 잔치의 종결이 요약이 summary가 클라이맥스가 이 최후의 만찬인 것이다.
한편으로는... 다른 한편으로는 이 최후의 만찬은 동시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 종말에 완성돌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예표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은 두가지의 perspective가 있다. 하나는 예수가 지금까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그 말씀에 의한 제자들과 먹고 마신 그 잔치를 되돌아보는 그러니까 이제까지 베풀어 온 모든 잔치를 종결하고 요약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마가 있고 다른 한편은 완성될 천국에서의 잔치를 예견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 의해서도 우리가 최후만찬의 말씀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하나님의 백성을 모아서 잔치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이것이 예수의 자기 이해에 있어서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의 그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예수의 그 자기 이해를 해석하는데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열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마침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으로 되어 있다.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써 그런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으여 따라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예수가 어떤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방법은 예수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중심으로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라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증명이 되면 그렇게 해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했다는 것이 증명이 되면 둘째 단게로 그러면 최후의 만찬의 말이 무슨 의미를 갖나? 하고 그것을 해석해야 한다. '최후의 만찬'의 말을 해석해야 한다. 그러면 세째로 그것의 결론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가 무슨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나 하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거기에서 의미를 도출해가지고 아까 이야기한 6가지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의 의미를 적용해 보아야 한다. 이러한 방법을 택하기로 하겠다.
첫번째로 그러면 최후의 만찬의 말들이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말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것이다.
눅14:17-25절
그러니까 여기에 소위 word-play가 있다. 영어로 pun이라고 한다. 이 헬라말을 아람말로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은 는 성경에 예언된대로 간다는 말이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죽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를 파는 그 사람은 여기에서 '그 사람'을 아람말로 표현하면 무엇인가? 그것도 이다. 즉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의 아들'은 화가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이렇게 간접적으로 가르치니까 이렇게 word-play가 있게 되고 이것이 아주 예수적인 표현이다. 지금 날이 저물 때 예수가 어떻게 하였는가? 제자들과 더불어 예수가 식탁에 앉았다. 앉아서 이제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예언된대로 간다" 자기의 죽음에 대해서 이제 말이 시작되었다.
그러면 자기가 가는 것, 자기가 죽는 것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이제부터 설명해준다. 그다음에 예수가 떡을 떼고 잔을 부으며 여기의 덕을 떼는 제스쳐, darama의 의미가 무엇이냐? 잔을 붓고 그 잔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설명한다. 이것이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의 죽음을 설명하는 것이다. 죽음의 의미를 설명한다. 그런데 자기의 죽음이 무엇으로 죽는 것인가? '그 사람의 아들'로 죽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최후의 만찬때의 제스쳐가 떡을 떼고 잔을 부으며 설명한 이것이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그 사라의아들'로 되어 있다.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최후의 만찬의 말을 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마가복음 14:17-25절까지의 말이....
여기서 벌써 우리는 최후의 만찬의 말을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의 아주 중요한 또 하나의 증거가 요한복음 6:53절에 있다. 이것이 소위 요한복음판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다. 요한복음에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13장에서 보여주나 최후의 만찬때의 말씀들을 기록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들의 신학적인 해석들은 일부 요한복음 6장과 일부 요한복음 13장에 가지고 있다.
그러면 왜 요한복음이 최후의 만찬, 성만찬의 말씀을 전승하지 않는가? 공관복음에서도 하고 바울도 하는데 왜 요한은 전승하지 않는가하는 것은 아주 재미있는 질문이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성격에 대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재미있는 질문이다. 하여간 그것을 여기에서 논할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 6:53절에 뭐라고 되어 있는가?
"너희가 그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영생을 얻지 못한다" 라고 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 때의 떡이 무엇인가? 예수의 몸이다. 이것이 히브리어로 이다. 이것이 헬라어로 이다. 이것은몸으로도 번역될 수 있고 고기덩어리, 육신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살'로 번역하고 있다. 그 다음에 이잔은 에수의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의 피흘림을 상징한다. 요한복음에서는 이것을 무엇이라고 하는가? "너희가 그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피를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에 이르지 못한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 요한복음이 공관복음의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다.
공관복음에서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무엇이라고 해석해하였는가? 자기 몸의 찢겨짐, 자기의 피흘림으로 해석하고 자기의 몸을 부셔서 제자들에게 먹으라고 나누어 주었다. 거기에 앉아있는 만찬에 참여하는 자들이 예수의 무엇을 먹는가? 예수의 피를 마신 것이다. 또한 예수의 죽음에 참여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에게 무엇이 약속되었는가? 마가복음 14:25절에 의하면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된 신탁에 앉을 것이 약속되었다.
그때에 가서 예수가 다시 먹고 마시는 일을 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은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해서 '너희들이 그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서의 생명 곧 영생을 얻을 수없다'고 하신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거기의 주어가 무엇인가? 누구의 살을 먹고 누구의 피를 마시고? '그 사람의 아들'의 피와 살이다.
공관복음에서는 떡을 베풀고 잔을 붓는 이가 누구인가? 마가복음 14장을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래서 요한복음 6:53절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최후의 만찬을 베풀고 떡을 떼고 잔을 붓고 떡의 말씀을 하고 잔의 말씀을 하고 있는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인 것이다.
세째로 또 증거들이 Igmatius가 '에보소 사람들에게 쓴 편지'가 있다. 여러분들 이그나티우수가 누구인지 알것이다. 1세기 말 2세기 초에 주교이었다. 그런데 나중에 순교당하였다. 그래서 주를 증거하기 위해서 순교하는 것을 찬양하고 순교를 해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그런데 이분이 여러곳에 편지를 썼다. 그 중의 하나를 에베소에 썼는데 그편지 20장 2절에 보면 이런 말이 나온다.
"그리스도인들이 떡을 떼기 위해서 모이는 것은 한 믿음에 의해서이요. 사람의 아들이요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다." Igmatius가 무엇을 말하면서? 떡을 떼는 성만찬을 말하면서 성만찬이 어떻게 이루어진다고 하였는가? 사람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래서 Igmatius의 이 편지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성만찬을 연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 그보다 늦은 자료로서 '요한의 행적'이라는 성경의 외경에서 '요한의 행적' 신약의 외경에서 109장을 보면 성만찬 때의 긴 기도에서 예수의 이름을 여러가지로 부르 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인가 하면 '사람의 아들'이다.
여기에서도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이 성만찬과 관계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빌립의 복음'이라는 외경이 있는데 거기에서도 예수를 뭐라고 부르느냐면 '완전한 사람으로서 우리를 위해서 하늘로부터서 떡을 가져와서 우리에게 사람의 음식으로 먹이시는 분이시다'고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아들이나 한 사람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의 아들이 사람의 음식이 되어졌다.
이렇게 보면 요한이 우리가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를 먹는다고 한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러한 표현이 나온다.
이와같이 요한복음과 초기 기독교의 대표적인 신학자요 교부인 Igmatius나 외경에도 성만찬이나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또 네번째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 초대교회에서의 성만찬에는 항상 종말에 있어서의 구원의 완성, 특히 예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강력히 나타난다. 그래서 가령 바울의 전승인 고전 11장에도 우리가 이렇게 먹고 마시는 것은 어떻다고 하는가? 그가 다시 올때까지 예수의 재림 때가지 그의 죽음을 선포해야할 것, 선포해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바울에 있어서 성만찬의 의의가 무엇인가? 그의 재림때까지 예수가 심판자로, 구원자로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재림때까지 그의 죽음을 선포하는 의미가 있다. 이렇게 성만찬에는 항상 예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강력히 있다. 왜? 최후의 만찬이 무엇이라고? 종말에서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에 대한 예견이라고 하였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4:25에서 뭐라고 하였는가? 내가 포도로 만든 이 잔을 언제에서야 마시게 된다고?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에야 마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최후의 만찬은 완성된 하나님 나라, 그곳에서의 완성된 구원에 대한 예견으로서 그것에 대한 포인트로서 소망이 강력히 나타난다.
곧 예수의 재림 때 일어날 그 구원의 완성에 대한 소망이 강력히 나타난다. 누가복음 판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공관복음서에 있어서 예수의 재림은 항상 무엇으로 표시가 되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의 옴으로 표시된다.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중에 나타나고 천사들을 동반하여 나타나는 것으로 표시된다.
그래서 예수의 미래의 재림을 항상 담고 있는 최후의 만찬은 최후의 만찬의 전승은 이렇게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연결되어 있다. 미래에 재림하는 예수의 칭호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에서 무엇을 기대한다고 하였는가?
예수의 재림을 기대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재림하는 것을 기대한다고 그렇게 말할 수가 있다.
이것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에수의 재림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성만찬과 연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제 누가복음 판의 최후의 만찬의 말을 한번 읽어보겠는데 눅22:28-30절.
이말이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한 말이다.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때 거기서 먹고 마시는 것을 약속하고 예수의 통치, 이스라엘에 대한 통치에 그들을 참여하도록 하겠다는 약속을 주는 것이다. 여기서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은 최후의 만찬이 이렇게 종말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의 잔치를 예견하는 것이다.
그런데 재미 있는 것은 이말의 마태복음 판이 마태복음 19:28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이 마태복음 판이다. 그래서 마태복음판의 이 말은 분명히 '그 사람이 아들'로 되어 있다. 누가복음 판은 '그 사람의 아들'이라기 보다는 .....안 나온다. 이것은 상당히 정확한 증명이 필요하다.
여러분들 그 증명이 필요하면 내 책을 다 읽어보라. 거기에 다 쓰여져 있다. 나의 결론은 무엇이냐 하면 이 말의 context는 누가가 정확히 보존하였다. 이 말은 에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그러나 마태는 이 말은 다른 context로 옮겼다. 그러나 누가에 대항해서 마태가 옳은것은 이것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이라고 밝힌 것은 마태가 원래 예수의 말을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다. 그러면 왜 누가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나'라는 말로 대치하였느냐? 이것은 누가의 문장 스타일과 관계가 있다. 여러분들 누가복음 자세하게 연구하면 알겠짐나 누가는 중복을 피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누가는 이미 22:22절에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한번 사용하였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에 있어서 모든 말들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기 때문에 22:28-30절에서 다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주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누가의 문장 스타일 중에 여러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가 받은 전승에 상당히 충실한 살함이었다. 그래서 자기 받은 전승의 순서를 잘 바구지 않는 사라이다. 되도록 가능한 한 자기가 받은 전승의 순서를 그대로 간직하는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 최후의 만찬의 석상에서 12제자들에 대한 미래에서의 약속이 누가가 옳은순서를 갖직했을 것이라는 가능성을 우리가 갖는 것이다. 누가는 그렇게 자기가 받은 전승을 잘 바꾸지 않는 성향의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의 스타일이고 또 하나의 누가의 문장의 스타일이 무엇이냐 하면 되풀이를 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서 예수가 '그사람의 아들'로서 한 말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뺀 것이다. 왜냐하면 22절에 벌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사용하여서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한 모든 말씀이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것을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다.
여기서 보면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최후의 만찬 때에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에 참여하고 또 예수의 주권에 참여할 것을 약속하고 있다.
또 이것도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이라는 증거중의 하나이다.
여섯번째로 요한복음 13:31-35절까지 한번 읽어보세요.
이것이 요한복음판 최후의 만찬이다. 아까 이야기한대로 요한복음에서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13장에 나온다고 하였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 말씀 자체는 전승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씀의 해석이 일부 13:6절에 전승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해석이 여기에 조금 나온다.
요한복음 13:31-35절을 읽어보라.
지금 여기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나아감 여기의 나아간다는 동사가 헬라어로 이다. 이것은 아까 마태복음 14:19절에서 "그 사람의 아들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에서 '간다'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최후의 만찬의 장면에서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가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그것의 의미를 이제부터 설명한다.
그러니까 요한복음판의 최후의 만찬의 장면에서도 이 최후의 만찬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인가? '그 사람의 아들'의 감을 상징한다. 그러면 그 '감'의 의미가 무엇인가? 조금더 읽어봐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여기의 요한복음 13:31-35절까지 보면 예수가 '그 사람의아들'로서 감을 설명한다. 이것이 아까 이야기한대로 마가복음 14:21절과 일치하는 것이다. 최후의 만찬에서 공관복음서나 바울에서와 같이 이렇게 떡을 떼고 잔을 붓는 것으로 설명하지 않고 요한복음 13장에서는 도리어 무엇을 내는가? 새계명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 이 새계명을 지키면 너희들이 나의 사람들이 되는 것이다. 곧 나의 백성, 예수의 백성임을 알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새계명이 무엇이냐하면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계명은 항상 언약, 구약과 유대신학에 있어서 항상 계명은 언약의 법조문이다. 그래서 새계명을 준다는 것은 새언약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새 언약을 세우고 그 새언약에 따른 법조문, 계명을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그 언약과 그 계명에 의해서 예수의 백성을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알려진다는 그 말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석가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여기에서의 요한복음 13장에서의 새계명은 최후의 만찬 때의 그 잔의 말씀의 해석이다. 최후의 만찬에서의 잔의 말씀이 무엇인가? 누가 바울판에 의하면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인한 그 피로 세우는 새얀약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 마가판은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새언약이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은 의미는 다 똑같다.
우리가 나중에 이 의미를 자세하게 분석해야 되나 우리가 좀 요한복음 13장과 관련해서 말을 한다면 누가, 바울 판에서는 새언약이라고 하여서 '새'자가 나온다. 그러나 마가복음 판에는 '많은 사람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만 되어 있다. 잔에 담겨져 있는 포도주가 언약의 피라.
이언약의 피라고 하는 소리는 출애굽기 24장에 근거한다. 출애굽기 24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언약의 제물을 바쳤고, 그 제물의 피를 모여있는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면서 무엇이라고외치는가? '언약의 피라' 언약의 피라. 이러한 언약의 피를 뿌리는 제사를 통해서 언약이 세워져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된 것이다.
그런데 예수가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 자기의 내일의 피흘림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가? 모세의 그의 것에 상응하는 출애굽의 상황에서 모세가 바친 그 언약의 제사에 상응하는 언약의 제사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이 새언약의 제사이지 옛것의 되풀이인가?
그래서 마태, 마가판은 '새'자가 안 나와도 '새'자가 그속에 있는 것이다. 옛 그 시내산에서의 언약에 상응하는 종말론적인 Typology로 상응하는 종말론적인 새언약의 제사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예수는 언약의 제사로 보았다. 새로운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다. 그런데 새로운 언약에는 무엇이 뒤따르는가? 새계명이 뒤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요한은 이것을 하일라이트로 본다. 지금 무엇을 하기 위해서 이렇게 장황하게 설명하느냐면 방금 읽은 요한복음 13:31-35절까지의 내용에서 누가 간다고 하였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 간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을 가져오는가? 새 계명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새언약을... 그런데 그것이 공관복음에 있어서 잔의 말씀에 상응하는 것이다. 요한복음 13장에 있어서도 그 사람의 앋르이라는 칭호가 최후의 만찬과 연결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더 보도록 하겠다. 이렇게 성경구절을 해석하면서 하면 재미가 없다.
디모데 전서 2:5-6절을 보라. 아주 중요한 대목이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이것을 헬라어 성경을 한번 써보자.
이렇게 되어 있다.
이것을 자세히 읽을 때에 상기되는 공관복음의 한 구절이 없는가? 이것이 신앙고백이다. 여기에 인용된 신앙고백이다.
우리에게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한 중보자가 계시다. 그런데 그 중보자가 누구인가? 사람 그리스도 예수이신데 그는 자신을 모든 사람을 위해서 속전으로 주셨다. 이렇게 하였는데 공관복음에서 생각하는 구절이 없는가? 마가복음 10:45절이다. '그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어떻게 되어 있느냐면 거기에 헬라어로 성경을 가지고 있으면 보라. 마가복음 10:45절 말씀
사람의 아들은
는 빼버리고
이렇게 되어 있다.
이렇게 보면 위의 디모데전서 2:5-6과 내용이 똑같다. 는 무엇에 상응하는가? 숙어적으로 위의 사람에 상응한다.
이것이 이다. '자기의 영혼을' 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숙어적으로 '자신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는 무엇과 상응하는가? 위의 이다. 는 무엇인가? 이다. 이것은 똑같은 동사이다. 또 여기의 은 , 는 좀더 헬라어적인 을 사용하였다.
여기에서도 히브리말에는 추상명사가 없다.그래서 히브리어 이 이를 대신한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라는 것이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많은사람들의 의미가 추상명사 '모든 사람들'의 의미를 나타냈다.
여기에서 우리가 알아낸 것은 디모데전서 2:5-6절은 마가복음 10:45절의 헬라어판이다. 헬러아화된 판이다. 똑같다. 단지 좀더 헬라어적인 숙어로 표현된 것이다. 디모데전서 2:5-6절은 셈족언어 냄새가 잔뜩풍기는 마가복음 10:45절의 다듬어진 헬라어판이다. 그러니 어느것이나 똑같다.
무엇까지 심지어 똑같냐하면 예수의 칭호를 라고 쓰는데 똑같은 것이다. 는 셈족어 냄세가 물씬 풍기는 의 숙어적인 표현이 무엇인가? 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내어주는 속전이라는 말 그말은 우리에게 무엇을 연상케 하는가? 최후의 만찬의 잔의 말씀을 연상케 한다. 이말의 마가복음 10:45절의 누가복음판은 누가복음 22:27에 나오는데 이것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의 일부이다.
누가복음 판은 여기까지 '그 사람의 아들은 섬기러 왔다'만 나오고 그밑은 나오지 않는다. 이것도 누가복음의 스타일과 관계가 있다.
마가복음 10:45절에 기록된 이 말의 맥락은 누가가 보존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하신 말씀이다. 아까 누가의 스타일 중의 하나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자기가 받은 전승의 순서를 바꾸지 않는다고 하였다. 반면에 또 하나의 누가의 특징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중복을 피한다고 하였다.
누가는 이 말씀의 두번째 부분이 최후의 만찬의 잔의 말씀에 이미 다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것을 생략하는 것이다. 이말이 무슨 말이냐고 하면 마가복음 10:45절이 원래 예수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하신 말씀으로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의 요약이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면 시간이 없으니까 다음 시간에 더 자세히 하겠지만 우선 여기에서 알 아 둘 것은 그 요약에도 만일에 나의 가설이 맞다면 마가복음 10:45절이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하신 말씀으로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의 요약이라면 그 요약도 무엇을 시작하는가? '그 사람의 아들'로 시작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와 직결되는 것이다. 이 다음 시간에는 마가복음 10:45절이 어떻게 최후의 만찬과 연결되는가? 그의 만찬석상에서 하신 말씀인 것을 증명하고 그 다음에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해석할 것이다. 거기에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일들을 도출해 볼 것이다.
신약신학 제11강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을 논함에 있어서 우리가 제일 먼저 자기 칭호와 더불어 관찰해야할 점들을 여러가지 하였다. 생각해보았고 그 다음에 여러 학파들의 경향을 소개를 하였다. 거기에 대한 여러 학파들의 학설이 어떻게 구구하게 하나? 그래서 아직 학자들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없다. 그러한 상황에서 나는 그러면 어떻게 해석하느냐해서 이제 내 해석을 개진하고 주장하였는데
그 첫째번으로 고찰한 것이 이른바 조교사적인 자료이었다. 종교사적인 자료들은 전통적으로 다니엘서 7장과 제 1에녹서나 네번째 에스라서 등에서 사람들이 찾을려고 그랬는데 제1에녹서나 제 4에스라서가 아마 신약후에 쓰여진 문서일 가능성이 많으니까 그것은 그렇게 종교사적인 자료로 그렇게 합당한 것이 못된다 그래서 좀더 새로운 자료들을 사용해 보아야 한다고 해서 쿰란 옛터에서 찾은 조그마한 조각 하나 4Q ps Dan Aa이라는 이것을 좀 우리가 살펴보았고
그 다음에 다니엘 7장을 헬라어로 번역한 것이 있었다. 이른바 LXX로 번역함에 있어서 어떻게 다니엘 7장을 이해하였나? 하는 이러한 것을 주로 살펴 보았다. 그런 결과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오는 한 사람과 같은이를 하나님의 아들로 이해하고 있는 것을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고 있는 것을 우리가 보았다.
그 다음에 다니엘 7장이 이제 발달되는 마카비 전승에서 어떻게 쓰였는가를 보았을 대에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는 그런 (전차) 장면으로 이해되는 것을 많이 보았는데 그 전승이 나중에 유대의 영지주의 문서에까지 이어진다고 그렇게 말하였다.
이렇게 보았을 때에 다니엘서 7장이 하나님의 나타나는 현상으로서 소위 vision전승의 초창기의 일부로서 거기의 한 사람과 같이 나타나는 이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 즉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의 대표로 그렇게 이해될 수있다. 그렇게 대개 종교사적인 배경을 살펴 보았다.
그 다음에 우리가 살펴본 것은 언어적인 배경을 죽 살펴보았다.
그래서 첫째로 을 직역하면 아람말로 강조형,마지막 가있는 것으로 번역을 해야 된다. . 왜냐하면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을 논함에 있어서 제일 우선적을 관찰해야할 점이 무엇이었냐 하면 항상 이렇게 관사가 붙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공관복음 다른곳에서 또는 이렇게 관사없이 자주 나오는데 관사를 동반하는 경우는 유대문서에 복음서 전의 유대문서에는 없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이 상당히 관건인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직역하면 이렇게 아람말로 의 마지막 를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해야 한다.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다니엘서 7장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에 '그'라는 관사는 다니엘서 7장에 있는 '그 사람이 아들'이다. 하는 지칭의 기능을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하는 말은 셈족언어의 숙어로서 그냥 '사람'이라는 소리이다. '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다니엘서 7장 13절의 하늘에서 거름을 트고 오는 이가 한 사람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났다는 말이다. 사람과 같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예수가 사람과 같이 나타난 그 사람이라고 자기를 지칭했다는 말이다. 대개 아마 거기까지 지난 시간에 우리가 관찰하였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서 이정도로 종교사적인 배경과 언어학적인 설명을 하였으면 그 다음에는 공관복음서 4복음서 전체에 나타난 예수의 어록들,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지칭하는 말들을 하나하나 해석함으로써 분석함으로써 예수가 도대체 어떤 의도로 또는 어떤 의미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자기에게 썼는가를 밝혀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난번에 첫 시간에 이야기한바와 같이 전통적으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들을 세가지로 학자들은 분류하였다.
1)지상에서 겸손히 존재하고 일하는 '그 사람의 아들'. 그래서 가령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들곳이 있고 여두도 굴이 있으나 그 사람의 아들은 머리둘 곳이 없다고 하는 이런 말, 또는 요한은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으므로 귀신 들린 자라 했는데 그 사람의 아들은 먹고 마시니까 뭐라고 한다고? 술주정뱅이요 탐식가라고 한다고 한 이런 말을 첫 카테고리에 넣는다. 현재에 땅위에서 겸손히 존재하며 역사하는 사역하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2)죽음,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소위 공관복음에 마가자표에 집중해서 나타난다. 마가복음 8장 31절부터 시작하는데 9:31/10:33의 세가지에서 '그 사람의아들'이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 넘기움을 받아서 죽임ㅇ르 당하고 사흘만에 부활한다. 그런데 보통 이 세가지를 말하지만 그와 비슷한 말들이 수없이 많다. 막9:9/9:12/10:45/14:19-24 등등의 '그 사람의아들'이 죽임을 당한다는 말이 많다. 10:45절은 우리가 너무 잘아는 말도 거기에 뭐라고 쓰여져 있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고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왔다고 한다. 그 사람의 아들이 자기 목숨이 많은 사람들 우리 해서 대속물로 주기위해서 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두번째 카테고리로 사람들이 보통 간주한다.
3)그 다음에 세번째의 카테고리는 미래에 하나님의 영광으로 와서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천사들과 와서 세상을 심판하리라는 미래의 파루시아의 관한 말들이 대개 '그 사람의 아들'과 연결이 되어 있다.
그래서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예수의 말들이 우리의 공관복음서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이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를 해가지고 논한다고 하였다. 어떤 살마들은 3)에 예수의 진짜 말이 몇개 있고 이 나머지들은 예수의 죽음과 부활후 교회가 예수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기 위해서 그래서 그냥 발달시킨 것이다. 특히 독일의 비판학자들이 그렇게 본단고 하였다. 독일의 대개의 비판학자들이 그렇게 볼때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천사들과 더불어 와서 심판한다고 할 때에 예수가 자기를 두고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한 것이 아니라 자기 말고 종말이 올 심판자와 구원자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대교 묵시문학에서 있어서 '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존재로 이미 묵시문학에 알려졌기 대문이다. 그렇게 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이 옳지 않다고 하였다.
옳지 않은 이유가 많은데 근본적으로 두가지 면에서 옳지 않다.
1)유대의 묵시문학에 '그 사람의아들'이라는 메시야적인 존재가 없다. 유대의 메시야 사상에 무슨'그 사람의 아들'이 메시야적인 칭호로 복음서에 전혀 알려진 것이 없다. 보수주의자나 복음주의자들 책에고 그렇게 많이 쓰였는데 그렇지가 않다. 그렇게 자꾸 저장하면 독일의 과격파의 주장에 사실은 말려드는 것이 된다. 그런데 조금 뒤떨어진 책들에는 그렇게 많이 쓰였다. 그렇지가 않다. 그 뿐만이 아니고 이 세째번 카테고리의 말들을 잘 분석하여 보면 예수가 어떤 또 하나의 존재를 기대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두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2)번만 진짜로 예수가 한 말들이고 그 나머지는 나중에 교회가 나중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얻은 신앙고백을 발전시켰다고 그렇게 말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옳지 않다고 하였다.
도대체가 예수의 이 말들을 이렇게 세종류로 분류해놓고는 어느 한쪽이 1)과 2)만 진짜 말이고 나머지는 여기에서 발달시킨 신앙고백으로 초대교회가 만들어낸 것이라는 그 연구 방법그것을 제일 먼저 개발한 사람이 Bultmann인데 그런데 그 연구 방법이 틀렸다고 하였다. 도대체가 이렇게 분류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다. 왜 틀렸는가에 대해 그때 이야기를 하였는데 내가 기억을 다시 한번 새롭게 하면 이 분류방법이 무슨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가? 언뜻보면 그럴듯하다. 그러나 사실 그렇지가 않다. 여기의 1)3)은 무슨 기준으로 분류한 것인가? 시간적으로 분류한 것이다. 1)은 현재 지상 위에서 겸손히 행하는 그 사람의 아들3)은미래에 영광중에 올 그 사람의 아들 그러면 가운데 2)은 무엇인가? 이것은 내용적으로 분류한 것이 아닌가? 그 사람의 아들의 죽음과 부활. 그래서 이것을 이렇게 분류할 때에는 기준이 어긋나는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자기의 마음대로 분류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분류를 시작하면 수없이 많은 분류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실제로 6-7가지로 분류하였다. 그래서 내책 끝부분에 보면 내용이라는 한가지 기준으로 6-7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런데 어떤 학자들은 대개 2가지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것은 a)권위가 무시되고 핍박받는 '그 사람의 아들'. 그의 권위가 무시되고 핍박받는 그 사라의 아들 b)그 다음에 그의 권위가 확인되고 심판자로서, 구원자로서 나타나는 그사람의 아들. 이렇게 두가지로 분류한다. 따라서 그의 권위가 무시되었느냐? 아니며 확인되었느냐의 하나만으로 이렇게 분류한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 사실은 위의 것에 해당하는데 a)는 앞의 것의 2)에 해당되고 b)는 앞의 3)에 해당된다. 이렇게 분류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가령 캠브리지의 모나크 교수나 튀빙겐의 오토베쯔 같은 사람은 내용적으로 이렇게 분류를 하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우리 복음서에 나올 때마다 예수의 권위주장이 은근히 풍긴다 그러기에 아주 엄숙한 선언이며 그 말들이 쓰인 곳은 예수의 권위 주장이 은근히 풍긴다. 담나 지금 이 땅위에서 권위가 무시되고 그래서 심지어 '그 사람이아들'이 머리둘 곳이 없는 그 사람의 아들이 심지어 술주정뱅이요 탐식가라고 놀림을 받는 그 사람의 아들이 섬겨야될 자기 백성들에 의해서 대신 죽어가야 하는 심지어 자기 목숨을 대신 죽기 위하여 장로들과 서기관들에 의해서 넘겨줌을 받아서 침 뱉음을 당하고 죽임을 당하는 이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아들의 권위가 무시되고 짓밟히는 이야기이다.
반면에 여기의 b) 즉 앞의 3)의 이야기는 그러나 '그 사람의 아들'이 종말에 심판자로, 구원자로 그의 천사들과 함께 나타난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두가지로 내용별로 나누었다. 그것은 자중에 좀 더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이상의 두가지로 분류하는 기중이 내용상 이루어진 것이고 또 그렇게 할 수 있겠지만 그것이 미흡해서 나는 6-7가지로 분류하는데 일단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용하는 위의 3가지 분류방법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옳지 않은 분류방법으로 시작하는 해석은 대개 옳지가 않다.
그래서 우리가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렇게 세가지로 분류해놓고 그 중에 어느 하나만 예수의 진짜 말이라고 시작해서 거기에서부터 해석을 해나가서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렀다면 설명 불렀다고 하더라도 무슨 의미로 불렀겠느냐 하는 것이다. 그러면 많은 '그 사람의 아들'의 말중에 어느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우리가 해야하는가 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그러니 이것을 연구하는 받ㅇ법이 여러가지가 있을 수있다. 지금 복음서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을 가령 마가복음은 마가복음, 마태복음은 마태복음, 누가복음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순서대로 정확히 해석을 해서 이 문제를 접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것은 비경제적이고 상당히 혼란스러운 방법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을 취하느냐면 우리 보기에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가 자기 계시,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예수가 자기계시를 하는 순간에 쓰이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이 상당히 예수의 자기 의도 또는 자기 이해를 제시해주지 않겠는가? 는 가정을 설립해 볼 수 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수가 자기의 십자가의 못박히기 전날밤에 주의 만찬이라고 부르는 만찬석상에서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자기의 제자들에게 연극으로 설명해주고 있다. drama로 설명해 주고 있다. 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drama로 예수가 제자들에게 설명해주고 있다.
그래서 떡을 떼는 제스쳐를 하고 그 제스쳐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내일 자기 몸의 부서짐을 의미한다. 또 빨간 포도주를 붓는 그 제스쳐를 하면서 그것은 내일 자기이 피흘림을 의미한다는 것을 연극으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설명한다. 그런데 그것을 신학적으로 설명한다.
자기의 자기 몸의 부서짐이 너희들을 위한 것이다. 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또 피흘림이 많은 사람들을 위한 피흘림으로서 새언약을 세우는 피흘림이다라고 이렇게 설명을 한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다가오는 자기의 숙명적인 죽음, 십자가의 죽음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순간에 예수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자기의 사명ㅇ르 가장 절실하게 가장 분명하게 확실하게 표현한다고 그렇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가자 ㅇ결정적으로 그 순간에 자기의 자기 이해 또는 자기의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에 대한 이해를 가장 분명하게 가장 확실하게 표현한다고 그렇게 볼 수있다.
그런데 마침 회후의 만찬의 말슴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사람의 아들'로서 말을 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결정적인 순간이 예수의 자기이해를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분명하고 가장 확실하게 설명하는 바로 그 순간에 그가 '자기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는 것이다고 하였다면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역으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의미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예수가 어떤 의미로 썼는가를 해석하는 열쇠를 우리에게 제공할 수 있지 않는가? 그렇게 가설을 세워고 이제 접근을 해보는 것이다.
그러면 마가복음 14장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보자. 이것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다. 최후의 만찬의 말씀은 우리에게 4가지로 전승이 되어 있다. 공관복음에서 3가지이고 그 다음에 고너 11장이다. 요한복음에서는 최후의 만찬의 장면은 나와 있으나 최후의 만찬이 말씀은 전승되지 않고 있다. 좌우간 요한복음을 자세히 보면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약간 변형되어서 나타나는 것은 사실이다. 우리가 그것은 다음 시간에 살펴보기로 하겠다.
그러나 일단 공관복음에 3가지 고전 11장에 바울의 것이 전승이 되는데 이것의 4가지를 자세히 분석해보면 두가지로 구분이 된다. 하나는 마태,마가판이고 하나는 누가, 바울판이다. 이 마태 마가판은 거의 비슷하다. 누가,바울판도 거의 비슷하나 약간의 차이가 있는데 신학적으로는 같다.
마태/마가 누가/바울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너희들을 위해서....
...이것은 언약의 피라 나의 피로 세언 새언약의 피라
언약에 참여
그래서 학자들 사이에서는 어느것이더 예수의 원래의 말에 더 가깝느냐? 를 가지고 굉장한 논란이 벌어졌다. 많은 학자들은 마가복음판이 더 오래되었다고 하고 또 다른 학자들은 누가복음판이 또한 오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논쟁이 많이 벌어졌고 지금도 해결되었다고 볼 수 없으니 지금은 다수의 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둘다다 오래된 요소들도 유지하고 좀 교회에서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우리가 성례전에서 교회에서 낭독한다. 그렇게 교회의 예배에 쓰임에 있어서 조금씩 변형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누가, 바울 판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고 마가 마태판에도 일부 있다고 이렇게 본다.
그래서 어느 것이 더 오래되었느냐고 단정적으로 말 할 수 없고 어느것은 마가복음의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하고 어느 것은 누가복음의 것이 더 오래되었다고 이렇게 혼합적으로 생각을 하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이제 주목해야 할 것은 마가복음 14:24절에는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포도주를 붓고 말씀하시기를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이다. 이 말을 잔의 말씀이라고 한다. 잔의 말씀, 소위 cup-saying이라고 한다. 앞의 떡의 말씀, 이것은 너희를 위해서 부서지는 나의 몸이다. 떡의 말씀이 있는데 우리는 잔의 말씀이 신학적으로더 정확히 해석한 말씀이기 대문에 잔의 말씀 여기에 우선 집중하겠는데 이 잔의 말씀의 두판이 확연히 다르다.
누가 바울판에는 어떻게 되었느냐면 이것은 '이 잔은 너희를 위해서' 우선 그것이 마태 마가판과 다르다. 마가, 마태판은 '많은 사람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다. 누가바울판은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되어 있지만..'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 이 잔은... 새언약이라 라고 문법구조가 되어 있다. 마가,마태판은 어떻게 되었느냐면 '이것은 ...언약의 피라'라고 되어 있다.
빨간 포도주가 무엇인가? 피라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앉은 사람들이 무엇을 마시는가? 피를 마시는 것이다. 문법구조로 보면 그런 것이다. 그런데 거기에 '새'자는 없고 그냥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후의 사본에는 마태마가에만 '새'자를 집어 넣는다.
반면에 이 누가바울판에는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너희들을 위해서'라고 다르게 되어 있고 또 하나의 다른 점은 '이것은'이 무엇을 말하는가? '피'가 아니고 '새언약'을 말한다. 그러면 '피'는 어떻게 나오는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나의 피로 세운 새언약이라'고 나온다. 그래서 우리가 누가바울판을 사용하면 거기의 최후의 만찬석상에 앉았던 사람들이예수의 피를 마시는 것이 아니고 새언약에 참여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없어진다. 마가마태판에는 그 피를 마시는 것으로 나타나지만...
이렇게 확인히 다르게 나타난다.
그래서 여기에서 어느 것이 더 먼저이고 어느 것이 더 예수의 원래의 말에 가까운가?를 학자들간에 논란이 매우 많으데 대개 논란이 어떻게 전개되느냐면 이렇게 전개된다.
여기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는 분명히 셈족언어의 숙어이다. 셈족언어에는 추상명사가 없다. 그래서 가령 '우주'라는 말이 없다. 우주를 말할 때에는 양극을 말한다. '하늘과 땅' 그리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어쨌다? cosmos 우주를 창조했다고 말할 때에 말하고 싶을 때에 뭐라고 말하는가? 하늘과 땅을 지으셨다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이 숫자도 전체적인 개념인 '전체'라는 개념이 없다. 그래서 전체,모든 사람들, 영어의 all, 헬라어의 , 에 해당하는 히브리말이 없다. 이럴때는 무슨 말로 대치하느냐면 , '많은 사람들'이라는 말로 대치한다. 영어로 many이다.
그래서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라는 것은아주 셈족언어적인 숙어적인 표현이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하면 '모든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이다. 라는 말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셈족언어적인 냄새가 많이 난다.
반면에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라'는 것은 벌써 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성만찬에 개개의 의식으로 많이 쓰여서 지금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직접 적용된다고 하는 것을 다주 강조하는 문구이다. 그래서 '너희들을 위해서'라는 말은 최후의 만찬의 말씀이 성만찬에 예배의식의 말씀으로 많이 쓰였던 그래서 예배용어가 되었던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점에 있어서는 마가복음판이 더 원어에 가깝다. 예수의 원래의 언어를 간직하고 있을 것이라는 것으로 이렇게 대개 보는 것이다. 그러면 그 다음에 중요한 차이점은 어디에 나타나느냐면 그것은 마가마태판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ㄷ. 이것은 빨간 포도주의 잔은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고 되어 있다. 거기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무엇을 마시는가? 싱징적으로 예수의 피를 마신다.
이 말이 유대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겠는가? 유대인들이 피를 마시는가? 유대인의 법에 의하면 피를 마시면 되는가? 안되는가? 절대 안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예수도 유대인이었고 거기에 앉아있는 사람도 다 유대인이었는데 감히 피를 마신다는 말을 하였겠는가? 그러니까 피 마신다는 말이 피해진 누가바울판이 더 원어에 가까울 것이라고 주장한다. 누가바울판은 무엇이라고 되어 있는가? '너희들을 위해서 흘리는 피로 세운 내 언약이라' 그러니까 그것이 원어에 더 가까울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이렇게 말을 하고 여기의 피를 마신다는 것은 나중에 헬라의 무슨 신비종교의 영향으로 예수의 죽음에 그 신의 죽음에 직접적으로 동참하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그것이 변형된 것이다고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많은 학자들은 그것을 정반대로 생각한다. 어떻게 하느냐? 에수나 되니까 '이것이 나의 피다'라고 말할 수있지 어떻게 초대교회가 감히 예수의 말을 변형해서 초대교회가 대부분 누구인가? 유대인이다.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그것이다. 종교사학파들 특히 Bultmann학파들이 신약의 기독교를 순 헬라적인 종교사적인 해석을 할려고 한다고 그랬다. 그런데 그것이 근본적으로 틀린것이 그 이유가 무엇이냐하면 신약시대 2세기동안은 신학적인 leadership이 누구에게 있었느냐면 전부 유대인들 손에 있었다.
그래서 우리신약성겨의 저자들이 전부 유대인이다. 누가만 빼고..
어떤 많은 사람들은 누가는 유대개종자로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사람일 것이다고 많은 사람들은 보는데 제 친구 올 엘리스 같은 사람은 누가도 유대인으로 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의 의견들은 누가가 유대개종자로서 나중에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만 우리 신약성경의 저자중 유일한 이방인이다. 그 외에는 전부 유대인이다.
따라서 그것만 봐도 1세기 말이라는 것은 교회사에 있어서 아주 재미있는 시간대인데 그 때의 신학적인 지도력이 유대인에게서 헬라인에게로 넘어간다. 1세기 말에 활약한 교회지도자들인 안디옥의 이그나티우스나 폴리캅이나 로마의 클레멘트나 이런 교회지도자들은 전부 이방인이다. 1세기 말부터 그 사람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신학적인 지도자로 등장한다.
이 성만찬의 말씀이 전승되어 복음서에 기록될 때까지는 신학적인 지도력이 전부 유대인에게 있었는데 어떻게 감히 유대인들이 예수의 피를 마신다는 생각을 할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예수나 되니까 그렇게 할 수 있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무엇인가? 예수가 유대의 관습을 많이 무시를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의 피마신다는 것이 도리어 마가마태판이 더 오래되었다는 것을 더 예수의 원어에 가깝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준다고 이렇게 논리를 전개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도 그것이 옳은것 같다.
그래서 나는 이 마가복음판이 대체적으로 전부는 아니지만 누가바울판보다 나이를 더 먹은 것으로 본다. 예수가 말한 원어에 더 가까운 것으로 본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라는 그 말 뿐만 아니라 '언약의 피라'는 그 말이...
또 이 '새'자가 없는 것도 예수의 원어에 더 가깝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곧 이제 설명을 하겠다. 그래서 우리가 마가복음판에 집중을 해야 하겠다.
마가복음 14:24절. 그런데 왜 그렇게 그것이 중요한가? 방금 마가복음 14:17-25절을 읽었는데 21절을 한번 다시 읽어보기 바란다. 여기의 21절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은자기의 기록된 바대로 가거니와' 여기의 '간다'는 말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두고 하는 소위 Eupuenmism이다. 자기의 내일 다가오는 죽음을 듣기 좋은 말로 표현한 것이다.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간다. 그런데 그 사람을 파는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위 word-play가 있다 .이것을 아람말로 다시 번역해보면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은 그리고
그 사람에게는
또 이다. 즉 를 파는 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위 언어유희가 있다.
예수의 말씀들 중에 특징이 여러가지가 있다. 그것에 대해서 여러분들이 잘 공부해볼려면 J.Jeremias의 신약신학을 한번 읽어보라. 그러면 제일 첫장에 예수의 말씨의 특징이 여러가지로 나와 있다.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word-play이다. 또 예수가 알쏭달쏭하게 말하는 것이다. 수수께끼 식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만 듣도록 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고 미련한 자는 못듣게 하는 것이다. 그것을 라고 하는데 그 의 일부가 비유이다. 그러기에 예수의 가르침의 말씀이 특징들이 거기에 잘 고찰되어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word-play이다. 말로 하는 장난이다.
우리말에도 말놀음이 많다. '그 사람의아들;은 자기의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러니까 성경에 예언된 대로 하나님이 뜻대로 그러니까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뜻대로 죽는다. 죽는다는 이말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을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의 아들의 성경에 기록된 대로의 죽음의 의미를 22절부터 drama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 사람의아들이 성경에 기록된 대로 간다. 하나님의 뜻대로 간다. 그런데 '그사람의 아들'이 성경의 기록된대로 가는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이 떡의 말씀과 잔의 말슴으로 그리고 말씀을 동반한 제스쳐, drama로 나타냈다. 그러니까 마가복음에 나타난 최후의 만찬의 말슴을 보면 마가복음 14:21절이 가장 중요한 천명이다. statementㅇ다. 그 사람의 아들이 곧 죽는다는 것, 그 사람의 아들이 이제 곧 죽는다는 것 그런데 그것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다는 것 이것이 statement이다.
그 statement의 해석이 22-24절까지의 drama로 나타나는 것이다. statement에 대한 해석이 그러니까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것이 무엇을 나타내는가? 사람의 아들이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대로 죽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신 것이며 내일 다가오는 그 자기의 죽음이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공관복음에 보면 예수의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는 항상 그 사람의 아들로서 예고한다. 항상....아까 이야기한대로 막8:31/9:9,12,31/10:33/10:45.14:20-25절까지 등이 다 그러하다. 이렇게 항상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에는 '그 사람의 아들'로서 죽음을 말한다.
그래서 주어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 예수가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어떤 신분으로서 죽는가? '그 사람이 아들'로서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의 아들'로서 죽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 그것이 잔을 붓고 떡을 떼는 drama로 지금 최후의 만찬이 설명이 되고 있는것이다.
그러니까 이 최후의 만찬의 말을 번석을 해보면 예수가 무슨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하였는가를 해석할 수 있는 열쇠를 갖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이 결정적인 자기 계시이니까 그러하다. 십자가의 죽음 직전에 하신 결정적인 자기계시이니까 그러하다. 그래서 여기에서부터 우리가 출발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 24절의 잔의 말씀이 모든 것을 내포하므로 잔의 말씀에 집중해보도록 하겠다. 우선 마가마태판이 예수의 원래의 말에 가까운 제일 오래된 전승이라고 보고 24절을 한번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것은' 이것이 무엇인가? 포도주가 잠긴 이 잔은 그러니까 그 잔이 아니면 그속에 들어 있는 포도주는 '많은 사라들을 위해서 흘리는 언약의 피라' 이것을 해석할려면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좋은가?
이말도 분명히 풍부한 구약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그것이 어디에서 암시되었느냐면 21절에 암시되어 있다. 21절에 보면 '그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대해서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그러니까 성경에 계시된 대로 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잔의 말씀 뒤에도 성경, 당시의 성경은 구약이니까 풍부한 구약의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고 우리가 생각할 수가 있다. 그래서 그 구약의 배경을 찾으면 쉽게 찾을 수가 있다.
첫째,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그 말은 분명히어디에서 왔느냐하면 이사야서 53장 10-12절까지에서 왔다. 여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주의 종 주의 종을 무엇으로 바치게 한다고 하는가? 우리말로 해서 속건제물로 바치게 한다는 것이다. 히브리말로 이다. 로 바치게 해서 결과가 어떠한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 24절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되게 한다는 것이다. 대속의 속건제물로 주의 고난받는 종이 드려제기 된다.
이것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네번째 노래이다. 여기의 주의 고난받는 종이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드려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가 용서받아서 그들이 의곱게 되게 한다.
그래서 잔의 말씀의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흘리는' 그 말은이사야서 53:10-12에서 왔다. '흘린다'는 말도 거기에서 왔다. 주의 고난 받는 종이 자기의 영혼을 '쏟는다'는 말이 그 말이 '흘린다'는 말과 동일하다. 히브리말과 헬라말이 대칭하는 말이다. 그래서 그것은 거기에서 왔다.
그 다음에 '언약의 피'라는 말은 어디에서 왔을까? 언약의 피라는 것은 아주 풍부한 구약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 제일 첫째로 출19장 24장 34장을 통해 배경을 가지고 있다. 거기에 보면 그래서 유대전승이 아주 중요한데 시내산에서 이스라엘 회주을 모아놓고 모세가 하나님과 언약을 세운다.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그래서 여기의 제물을, 제사하면서 제물의 피를 모여있는 이스라엘 회중에 뿌리면서 뭐라고 부르짖는가? '언약의 피라' 고 한다. 언약의 피라.
유대신학에 의하면 바로 이 언약의 피가 대속의 효과를 갖는다고 보았다. 그래서 모세가 광야에서 언약을 세우고 이스라엘 백성 위에 뿌린 피가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속죄해서 그들로 하여금 의로운 하나님이 백성이 되게 하였는데 그 언약의 피가 어떻게 해서 항상 언약의 피를 뿌린 것이 재생되느냐면 할례를 통해서 재생된다고 보았다.
할례가 무엇인가? 언약의 백성의 표징이다. 이 할례때에 그 피가 언약의 피다와 연결되고 그것의 재생으로 보았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이 계속 모세가 세웠던 이 언약의 피에 할례를 통해서 참여해서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이렇게 유대신학에서 신학을 전개하였다. 그래서 언약의 피라는 말은 항상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언약을 되돌아보는 표현이다. 그것이 유대신학에서는 할례를 통해서 그러나 예수가 여기에서 내일 자기에게 다가오는 죽음이 그와 같은 의미를 갖는다고 그와 같이 표현한 것이다.
내일 자기의 피흘림이 모세가 세운 모세가 광야에서 세운 언약과 대응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해야할 것은 이미모세가 광야에서 천 몇백년전에 피를 뿌리고 언약을 세웠다. 그런데 예수가 내일 자기의 피흘림을 또 언약의 피라고 하였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두가지를 생각해야 한다. 첫째는 그것이 모세가 세운 그 언약과 대응하는 것이다. 소위 Typology 이다. 모세가 세운 그 언약에 상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적어도 그 만큼이 효과를 갖는다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모세가 언약을 세움으로 무슨 효과가 나타났는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항상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한다는 말이다.
언약의 형식이 무엇인가?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 이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여호와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고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이스라엘과 하나님 사이에 맺는 언약의 내용이다. 그래서 여호와는 이스라엘을 자기의 백성을 인도하고 보호할 책임을 스스로 맡는다. 그들을 사랑하고 인도하고 보호할 구원할 책임을 스스로 맡는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여호와께 전적으로 의존하고 순종해야할 또 의무를 지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이다. 그래서 모세가 언약을 세움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보호아래 들어가고 하나님의 구원을 약속받고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만 의존해야 하는 그런 관계에 들어간 것이다. 그것이 소위 의로운 관계이다.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이다.
그것은 예수가 내일 다가온 자기의 피흘림을 적어도 그 만큼의 효과를 갖는 적어도 거기에 상응하는 것이라고 암시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소리이냐?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내일 다가온 자기의 죽음이.... 그것이 첫번재 생각이고 두번째 생각해야 될 것은 이미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피가 뿌려지므로 언약이 세워졌는데 이미 모세를 통해서 언약의 피를 뿌려서 언약의 백성을 또 만드는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모세가 세운 옛 언약의 피 또는 언약을 부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의해서 일어난 효과 즉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의 백성됨을 일단 부정하는 것이다. 앞에서는 긍정적으로 서로 상응하는 것이라면 두번재의 이야기는 앞의 옛언약이 효과가 없으니까 또 언약을 세우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이야말로 새언약이다. 그러니까 누가바울판에는 그것을 더 분명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새'자를 넣은 것이다. 그러나 그 의미는 똑같다. 마가마태판에도 새 언약이다. 왜냐하면 옛언약이 있는데 또 언약을 세우니까 새언약이다. 다만 누가바울판은 그것을 분명히 하였을 뿐이다. 더 의미가 확연하게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새'자를 넣은 것이다.
그러니까 원래 모세가 출 24장에서 세우는 그 언약과 무슨 관계이냐 하면 antithetical typology 즉 반대적으로 상응하는 사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보는 바와 같이 언약의 피라는 말 속에는 출19장 24장 34장 중에서 주로 24장이 반영되어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은 여기까지만 이야기하는데 나는 몇개가 더 반영이 되어 있다고 본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이사야서 42:6절, 49:89절인데 한번 읽어보기 바란다.
이것이 다 이사야서 53장과 같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이것 즉 이사야 42:6절이 첫 노래이고 49:8은 세번째 노래이고 사53:10-12절은 네번째 노래이다. 거기에 주의 종을 하나님께서 무엇으로 세운다고 하였는가? 백성을 위한 언약으로 내어준다고 하였다. 주의 종이 언약으로 내어준다. 이사야 49:8도 마찬가지이다. 한번 읽어보라.
거기에도 똑같이 내가 너를 뭐라고 하였는가? 주의 종을 백성의 언약으로 삼겠다. 그랫 ㅓ자기의 다가오는 죽음을 '언약의 피'라 할때에 출애굽기 24장 뿐만 아니고 이사야서에 나오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가 계속 반영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하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에 보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이다. 이사야서 40장에서 53장 어떤 사람은 61장까지도 말하는데 하여간 이사야 61:1-3절까지를 제 5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라고도 한다. 하여간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 또는 42장에서 61장까지에서 나오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으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해석하고 있다.
그러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 무엇이냐? 이사야에 기록된 내용이 무엇이냐?
늘 기억할 것은 마가복음 14:21절에 무어라고 하였는가? 자기의 죽음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성경에 기록된대로 성경에 예언된 대로 성경에 이미 하나님이 뜻으로 계시된 대로라는 것이다. 그러면 좀 더 좁혀서 말하면 이사야서에 기록된 대로 라고 좁혀서 말할 수 있다. 또는 출애굽기에 계시된 대로라고 이렇게도 좁혀서 말할 수도 있다.
여기의 이사야서에 보면 주의 고난받는 종이 무슨 일을 하는가? 그가 자기의 목숨을 대속의 속건제물로 드려서 많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다시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또 백성의 언약으로 바쳐져서 그들로 하여금 다시 한번 하나님의 백서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또 그렇게 해서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계시의 빛을 선포하고 구원을 선포하게 하는 자가 된다는 말이다. 그것이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에 나타나는 고난받는 종의 역할들이다.
여기에는 잘 나타나있지 않지만 이사야서 42장에서 53장에 있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들을 읽어보면 무슨 사상이 강력히 나타나는가?
'내가 너를 세워서 이방의 빛으로, 이방의 구원으로 내세운다'는 것이 강력하게 나타난다. 그것과 더불어 강력히 나타나는 것이 내가 너를 세워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모으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창조하고 모으는 어떻게 창조하고 모으는가?
그들을 위해서 대속의 제물로 또는 언약의 제물로 스스로를 바침으로 그의 백성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주로 두가지만 생각해보자.
첫번째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 무엇이가? 대속의 제물로 스스로를 바쳐서 거기에 따른결과가 무엇인가? 많은 사람들, 이 언약을 지키지못해서 패역한 패역해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는 많은사람들을 의롭게 한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가 대신 속해지게 해서...똑같은 말이지만 주의 고난받는 종의 또다른 역할은 무엇인가?
둘째로 언약의 제물이다. 따라서 그결과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백성을 다시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다. 이것은 다 같은 말이다.
언약을 지키지 못해서 그러니까 의롭지 못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특권에서 밀려난 자들, 언약을 지키지 않으니까 그들이 무슨 하나님의 백성이겠는가? 따라서 그런 자들이 다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의로운 자들이다. 하나님과 다시금 관계가 회복된 자들이다.
이것이 고난받는 종의 역할인데 바로 이 최후의 만찬에서의 잔의 말슴이 그러한 것을 반영하는 것이다. 자기가 바로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무엇이라고?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죽음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대속의 죽음이고 대속의 제사이고 언약의 피흘림이다. 그래서 그것이 무엇이라는 것인가? 출24장에서 맺은 모세를 통해서 맺은 이 옛언약을 대치하는 새 언약을 세우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옛언약에 의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그런데 그것에 상응하는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고 탄생되는 것이다.
그들은 죄가 대속되었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을 것이며 그들은 예수의 피로 세운 새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이라 함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잔의 말씀이다. 그것이 내일 다가오는 자기 죽음의 의미이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을 무엇으로 안다고 하였는가? 예수가 무슨 자격으로 하는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어디에서 왔는가? 다니엘서 7장에서 왔다. 지난번에 우리가 누차에 강조한 바와 같이 다니엘서 7장의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라고 하였다.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자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여기의 내용과 완전히 일치하는 것이다.
예수가 '그 사람의아들'로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마14:21절에서 쓰인대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죽는다. 그것은 무엇이냐? 다니엘서 7장이 예언을 자기가 이제 내일 서취한다는 말이다. 내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무엇인가?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들 곧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내일 다가오는 자기의 죽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의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다니엘서 7장의 '그 사람의 아들'은 예수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무엇인가를 말해준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것을 말한다.
여기의 이사야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이사야서와 출애굽기의 배경은 어떻게 이다. 예수가 그러면 어떻게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성취하느냐이다. 어떻게 성취하는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감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다니엘서 7장은 what이고 이사야, 출애굽기는 how인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4:21절의 statement, '그 사람의아들'은 성경에 기록된대로 간다. 즉 죽는다는 곧 무엇을 말하는가? 그 사람의 아들이 내일의 죽음을 통해서 다니엘서 7장의 예언 '그 사람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종말에 하나님의 아들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것이다.
22절에서 24절까지는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그것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서이다. 그것도다 성경에 예언된 대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므로, 곧 대속의 언약의 제물으로 자기를 바치므로 새로운 언약이 세워져서 새로운 언약에 의한 하나님의 종말의 새백성,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을 창조한다는 것이다.
의로운 하나님의 새백성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들,자녀들이라는 이말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무엇인가? '그 사람의아들'로서 이러한 일들을 하였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종말의 새로 창조된 아들들의 대표이다. 그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대표라는 것이다. 이렇게 결정적인 순간의 예수의 자기 계시를 분석해본 결과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것은 곧 다니엘 7장의 예언을 이사야서에서 예언된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써 성취하는 분이라는 의미로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이것을 좀 더 부연하면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이유가 무엇이냐?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아들'이라고 부르면서 스스로 계시하고자 했던 거시 무엇이냐?
그것은 자기가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자라는 것을 은근히 나타냈다. 그것은 뭐냐하면 종말에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들을 창조하고 모으는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자기이해를 나타낸 것이다. 그러면 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면 이사야서에 나타난 주의 고난받는 종들의 역할을 감당하는 곧 스스로를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침으로 새로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이 자녀들을 창조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나타낸 것이다.
그래서 최후의 만찬의 말에서 우리를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부름으로서 나타내고자 했던 예수의 자기 계시를 이렇게 해석하였다. 그러면 이것이 옳은지 안그런지를 테스트 해보아야 한다. 테스트하려면 어덯게 해야 하는가?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말들에 주의 만찬석상에서 도출한 '그 사람의 아들'의 의미를 적용해보아서 잘들어 맞으면 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의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예수의 자기계시는 이러한 의미를 도출해내었는데 그럼 이 의미가 예수의 다양한 '그 사람의아들'의 말씀들에 의해서는 잘 통하는지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맞는지 아닌지를 테스트 해보는 것이다. 소위 Verfication해보는 것이다.
지난번에 이야기한 여러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말을 세가지로 분류해서 해석할려고 했던 것들이 옳지 않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verfication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어느 한 가령 세번째 미래의 하나님의 영광주에 오는 '그 사람의아들'의 말에서 시작해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칭호를 해석하렬고 하는 것이 옳지 않고 억지이며 무리라는 것이 어디에서 발각이 되는가? 그것은 다른 '그 사람의아들'의 말씀들을 잘 해석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그런 것을 틀렸다고 생각해서 우리가 예수의 결정적인 순간의 예수의 자기 계시 곧 자기의 죽음을 앞두고 최후의 만찬을 통하여 연극으로 drama로 스스로를 계시한 그 최후의 만찬의 석상에서 그 사람의 말을 통해서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한 자기이해를 우리가 도출하였다면 똑같은 원칙대로 우리가 예수의 다른 '그 사람의 아들'의 말에도 적용해 보아서 그것이 잘 들어가면 이 해석이 옳은 것으로 판정되는 것이다.
우리가 다음 시간에 그것을 하겠는데 그것을 어디에서부터 시작하느냐면 우리가 지난번에 하다만 마가복음 10:45절부터 하겠다. 마가복음 10:45절은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가 최후의 만찬의 말들을 다시 한번 요약한 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지난번에 마가복음 10:45절이 최후의 만찬의 말씀들과 어떻게 연결되는가를 여러가지 이유로 설명하였다. 거기의 '그 사람의아들'은 섬김을 받으려가 아니라 섬기려 하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왔다고 하였다. '많은사람들을 위한'이란 말은 분명히 이사야서 53:10-12절에서 왔는데 뿐만 아니라 이사야서 43:3-5절서도 왔다.
그래서 마가복음 10:45절의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속물'은 이사야서 43:3-5/53:10-12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그것을 분석해 보면 최후의 만찬의 말과 똑같다.
그 다음에 시작할 것이 내가 내용상으로 분류한 6가지로 '그 사람의아들'의 말을 분류하였는데 거기에 여기서 도출된 의미를 다 적용해 볼 것이다;.
그 다음에 해야되는 것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보아야 하다. 그러면 예수의 자기이해와 예수의 자기 사명에 대한 이해가 확연히 드러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를 이제 서로 연결시킴으로 예수 즉 신약신학의 제1부를 마치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곧 설명할 수가 있다. 이렇게 제1부를 마치고 제2부는 사도들의 선포로 들어가겠다.
신약신학 제12강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까지 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 '하나님 나라 선포'와의 관계를 논하고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결론짓겠다고 하였다. 좀 자세히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지금까지 우리가 해온 것을 여러분에게 상기시키면 신약신학의 과제를 어덯게 십자가에 못박힌 나사렛 예수를 태초부터 선재하신 신적인 하나님이 아들로 그리고 그리스도로, 주로 신앙고백하게 되었나? 이렇게 이 기독교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나 하는 것을 역사적으로 규명하는 것이 신약신학의 과제라고 하였다.
그것을 규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앞에서 예수의 생애와 가르침을 살펴보았는데 그 중에서 주로 3가지를 살펴보았다.
첫째는 간접 기독론이라고 해서 예수가 당시의 기독론적인 칭호를 쓰지 않고 어떻게 간접적으로 은근히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계시자이며 하나님의 구원자이신가를 나타내었나? 이라는 것을 살펴보았고
그 다음 우리가 예수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를 살펴보았다.
그 다음, 우리가 살펴본 것은 예수의 자기 칭호,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예수의 자기 칭호까지 죽 살펴보았다.
그래서 우선 세 이 큰 주제의 결론만을 대시한번 우리가 살펴봄으로써 이 세가지가 어떻게 서로 맞아 들어가는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예수가 하나님을 독특하게 라고 부르고 이라는 말을 독특하게 쓰다가 모세의 율법에 대한 태도, 죄사함의 권리를 주장한다든가 하는 이러한 것을 통해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다고 하였는가?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계시하고 , 율법보다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자기 추종자들을 하나님의 자려들 되게 하는 분이라는 자기 계시를 나타내셨다고 하였다. 이것이 간접기독론의 결론이었다.
그 다음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는 우리가 무슨 결론을 내었는가?
그것은 아주 다양한 내용알 가진 가르침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예수께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지금 이루어지는 것으로 그렇게 나타냈다고 하였다.
다양한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여러양상들을 가르쳤는데 그 비유들 중에 가장 중요한 비유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아니 가장 중요한 비유라기보다 가장 흔히 나오는 비유가 '잔치'의 비유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의 fellowship의 회복으로 보았고 그것은 죄인들이 하나님과 화해되어서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하는 것, 즉 하나님이 잔치에 참여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즉, 무한한 하나님의 자원에 참여하여 살 수있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으로 계속해서 선포하였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는 어디에 있었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은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니까..
그래서 직접 기독론에서 나오는 예수의 의도,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죄를 용서하고 구원을 베푸는 것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이 자녀들을 모으려는 간접기독론에서 추출한 에수의 의도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를 통해서 설펴본 예수의 의도와는 차이가 없고 똑같은 것이다.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써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으는데 본 의도가 있었다. 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더불어 예수의 성전에 대한 독특한 태도도 우리가 조금 살펴보았지요? 기억나요? 예수께서 성전에서 아주 독특한 태도를 취했다는 것.
그런데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성전은 무엇을 하는 곳인가? 성전은 이스라엘 백성의 선택과 언약을 전제로 하는 것이 성전이다. 성전이 있는 이유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성전에서 자기의 백성으로 만들었고 그들과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언약을 세웠기 때문에 성전이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이 성전에서는 하나님과 그의 백성, 하나님의 백성이 fellouship을 하는 곳이다.
성전은 그래서 우주의 두 부분,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곳이다. 다시 말하면 땅에서 하늘로 들어가는 관문이다.
그래서 여기(성전)에 하나님이 임재하시고 여기에 백성이 나아가서 하나님과 교제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제가 자꾸 죄로 인하여 깨어지므로 자꾸 제사를 드려서 속죄의 제사를 드려서 죄를 깨끗이 하고 교제를 자꾸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무한한 축복에 참여하는 것의 매타니즘이 바로 성전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성전에 들어간다. 그리고 성전에서 하나님이 무엇을 하는가? 잔치를 한다. 사람들과 더불어...
그래서 절기때마다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성전에서 뭐가 베풀어졌는가? 커다란 잔치가 베풀어졌다. 그래서 잔치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배경이 대개 성전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함께 가장 흔히 쓰이는 동사가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들어간다'이다.
또 성전에 들어가서 무엇을 해요?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과 들어가서 잔치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는 한 마디로 뭐하는 곳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잔치하는 곳이다. 그러면 성전에서 누구만이 들어갈 수있느냐? 시편의 여러 곳에 있는 바와 같이 행악자가 아니고 의를 도모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성전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외적 기준이 구약의 법에 레위기에 다 있다.
마찬가지로 에수도 누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있는가? 어린이아와 같은 순전한 자, 깨끗한 자, 믿음을 가진자,악을 품지 않는 자 등 여러가지 것을 내세웠는데 이 때 이러한 형식은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과 맞아들어가는 것이다.
예수는 성전에 들어갈 수 있는 의식적인 조건들을 많이 도덕적인 조건들로 바꾸었다 뿐이지..성전에 들어갈 수있는 조건과 맞아가는 것이다.
이렇게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성전으로 많이 그림을 그린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예수가 마가복음 11:27에서 33절을 보면 성전에서 예수가 소란을 피웠다. 상인들을 쫓아내고 소란을 피웠다.
그래서 그것이 마가복음 11:15-6절에 나온다. "왜 네가 그런 일을 하였느냐?"고 유대 관원들이 와서 신문하자 예수가 뭐라고 대답하였는가? 간접적으로 대답한다. 간접적으로...
나도 질문이 하나 있는데 너희들이 그것에 대해 대답하면 나도 하겠다. 그게 뭐냐하면 '세례요한의 세례가 하늘로서냐 이땅에서 났느냐?' 다시 말하면 세례요한이 진짜 선지자냐? 하나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진짜 선지나냐? 아니면 땅에서 난자냐 곧 스스로 선지자라고 주장하는 거짓선지자냐?고 묻는다.
그러니 유대관원들이 '아 나 그것 답하기 어렵다'고 피해버린다. 그러니까 예수가 뭐라고 하는가? 그러면 나도 답안해준다. 고 그런다.
그래서 예수의 이 예수의 수수께끼같은 대화의 예수가 주로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많이 하였다. 랍비들도 이런 식으로 대화를 많이 하고... 여기의 숨겨진 의미가 아주 재미있다.
성전에서 예수가 소란을 피웠다. 요새 정치신학자들은 무슨 억눌림받은 사람이 민중이 창취하는 성전의 제사장 계급에 대해서 폭력을 휘드르고 무슨 정치적 혁명을 한 것으로 보는데 그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성전의 뜰이 얼마나 크냐면 400m 300m이다. 한번 상상해보라.
큰 국민학교 운동장의 2배는 더 된다. 거기에서 장이 벌어졌다. 여기에서 상인들을 다 쫓아낼려면 예수가 적어도 1개 중대의 전경을 투입했을 것이다. 무장한 1개 중대....
그러니까 성전에서 성전 경찰들이 많았다. 레위인들이 주로 성전경찰이었다. 레위인들이 주요 직책은 성전경찰과 성가대노릇을 하였다. 그래서 경찰들이 유월절 같은 절기에는 로마의 군대가 증파된다. 그래서 높은 망대같은 데에서 늘 성전의 되어가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무슨 사건이 터지면 즉각 체포하여 잡아오고 하였다. 여기의 뜰까지는 이방인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이렇게 큰 뜰에서 장사하는 장사치들을 다 쫓아낸 것이 아니고 내짐작으로는 상 한두개 뒤집어 엎었고 그리고 한 모퉁이에서 상인 2-3명이 있는데 여기서 장사하면 되느냐고 소리하번 지른 것이다. 그러니 여기 성전 뜰의 수백명의 상인들을 한꺼번에 몰아놓고 혁명하고 하는 것은 전혀 아니다.
하여간 이러한 제스쳐가 symbolic 제스쳐이다. 하나의 symbol이다. 이 상징제스쳐는 구약의 선지자들로부터 죽 내려오는 전승이다.
선지자들이 자기들의 메시지를 아주 효과적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아주 괴상한 sing, 이상한 상징을 내세우므로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만드는 그러한 dramatic한 symbol을 이용하였다.
예수님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가령 이사야도 발가벗고 거리에 다녔다든가 세례요한이 무슨 옷만 입었다고? 약대옷입고 무엇만 먹었다고? 메뚜기와 석청만 먹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의 금식주의만 나타낸 것이 아니고 거기에 symbolism이 있다. 그것을 독일말로 소위 Zeichemhanelung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유대 관원들이 그것을 간파하고 이 사람이 무슨 symbolic을 주장하는 구나 하고 문초를 한다. "네가 무슨 권리로 성전에서 소란을 피웠느냐?" " 또 누가 너에게 그러한 일을 하라고 하더냐?"하니까 예수가 세례요한에 대해서 물었다.
예수께 나아와서 "네가 무슨 권리로 소란을 피웠느냐?"고 물을 때 예수께서 세례요한에 대해서 묻는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네가 무슨 권세로 성전에서 소란 피웠느냐? 누가 네게 권세를 주었느냐? 하니까 지금 예수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무엇인가? 자기의 권세의 즉 예수의 권세의 원천과 그권세가 어디에서 왔느냐? 누가 주었느냐?이다. 그 다음에 그것의 성격이다. 그 권세는 어떤 것이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예수가 세례요한이 베푸는 세례에 대해서 물었다는 것은이 예수의 권세와 점 더 정확히 말하면 예수의 권세의 원천과 그 권세의 성격과 세례요한의 세례와 논리적으로 관계가 있어야 그 질의 응답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에수가 세례요한을 통해서 세례를 받을 때에 뭐라고 선포되었는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도다" 마가복음 1:11-12절의 내용이다. 세례요한이 예수에게 요단강에서 세례를 줄 때 하늘에 열리고 구름 가운데 큰 소리가 울려 퍼졌는데 뭐라고 하였는가? "이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이 마가복음 1:11-12절은 이 예수에 대한 세례시의 하늘의 선포는 이것이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하나는 시2:7의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너를 낳았도다"는 것이도 하나는 사42:1절의 이것은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시작이다. 여기에는 "나의 사랑하는 종 이스라엘" 이렇게 시작한다. 그래서 이 세례시의 이 선포는 시2:7과 사42:1절의 혼합이다.
여기에서 시2:7절은 뭐냐면 나단의 예언 삼하 7:12-16절의 전승이다. 삼하 7:12-16절은 그 내용에 대해서 전에 소개하였는데 이게 무엇이라고? 선지자 나단의 예언 이라고 하였다. 나단이 성전을 세울려고 애쓰는 다윗에게 가서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다윗에게 말하기를 너희 수가 다하면 너의 씨, 다윗의 아들 나단의 예언이 어떻게 되어 있느하면 하나님이 다윗에게 말씀하시기를 "너의 수가 다하며 내가 너의 아들, 너의 씨, 너의 씨 하나를 택하샤 너의 왕위에 앉히겠고 그래서 너의 왕조, 왕가, 너의 지방을 내가 건설하고겠고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집(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한 편은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아들 하나를 택해서 다윗왕가를 너의 집을 내가 이루도록 하겠다. 왕조를 이루겠다는 약속이고 또 하나는 그로하여금 하나님을 위해서 집을 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집"이라는 말이 두개 나온다. 이러한 집을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예언이다.
이 예언이 곧 무엇이냐 하면 다윗오아조를 세우는 예언이다. 다우시이 구데타로 사울을 문뜨리고 왕권을 잡았다. 그래서 이제는 왕조가 사울 선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고 다윗 선으로 이어진다. 그러한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것으로 하나님이 원하신 뜻을 합법화하는 것이 이 나단의 예언이다.
그런데 거기에 그 아들로 하여금 성전을 짓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예언이 솔로몬에 의해서 성취가 되었지만 계속 이 예언이 솔로몬을 정점으로 계속 다윗왕조가 내리막길으 ㄹ가자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는 이 예언이 계속 재해석되어서 가령 솔로몬의 성전이 완전히 부서진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 갔다가 다시 고레스의 칙령에 의해서 본국에 돌아가서 자기들이 성전을 다시 짓도록 하였을 때에 이 때 다윗왕의 자손인 스룹바벨이 다윗의 아들, 다윗의 왕자 스룹바발이 성전을 짓는 것으로 인해서 마치 이 나단의 예언이 다시 한번 성취될 줄을 알고 그래서 다윗 왕조가 새롭게 건설될 줄 알고 따라서 스룹바벨을 중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한 것이 슥3장 4자 6장 그런데 보면 잘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도 별로 꿈이 이루어지지 않고 그러니까 이 나단의 예언이 중간사 시대를 통해서 신약시대에 까지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을, 하나님의 아들,다윗의 가지, 다윗의 씨 등의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부르는 이유가 이 나단의 칭호에서 나온다고 하였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 다시한번 다윗의 왕위에 앉고 다윗의 왕국을 재건하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는 것이 유대의 다양한 메시야 사상중의 가장 중심된 사상이다.
그런데 이 시2:7의 내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이 나단의 예언에 근거해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마다 소위 대관식의 시이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이 손자가 증손자가 즉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오를 때에 원래의 이 하나님의 나단을 통해서 선포된 약속에 따라 선포하는 것이다. 다윗의 왕위에 오른 이스라엘의 왕을 자기의 아들로 선포한 것이다. 그래서 합법적인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에을 하나님을 대신하여 군림하고 통치할 수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다윗 왕위에 오르는 이스라엘 왕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로서 자기를 대신하여 군림하고 통치할 수있는 합법적인 왕이라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나의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다윗 왕위에 오르는 왕을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로 삼는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합법적 통치자로 세우는 것이다. 그러니까 시2:7은 이 '나단이 예언'의 전스으로서 왕위 취임식때마다 불렀던 시의 일부이다. 그 시의 내용이 이 예수의 세례 때에 예수를 향해서 선포된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다윗의 왕위를 회복해서 다윗과 왕이 되는 그런 하나님의 아들이냐? 는 것이고 또 두번째 그럼 그가 어떤 성격의 하나님의 아들이냐를 설명해 준다.
어떤 성경이냐?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그것이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첫 절이다. 이사야서 42:6 "나의 사랑하는 종 이스라엘" 이렇게 시작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노래의 첫절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단의 전승을 이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그러니까 메시야인데 메시야 사상의 근원인 나단의 예언을 성취할 메시야인데 그러나 나단의 예언이 표면적으로 생각했던 바와 같이 다윗의 왕위를 재건하고 거기에 정치적인 왕으로 군림하는 그런 왕이 아니라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종으로서의 하나님의 아들이다.
여기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들이 무엇인가?
지난시간에 이야기하였지? 주의 고난받는 종이 무엇을 한다고?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을 모으고 이스라엘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그들을 모으고 그들에게 하나님을 계시하고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을 계시하여 따라서 이상인의 빛이라.
그리고 언약을 세우고(사42:6.49:8) 그리고 끝내는 대속의 죽음을 하는 (사53장) 이러한 일들을 하는 분이 주의 고난받은 종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여러가지 가르침에 스스로를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의 자기에 대한 계시가 잘 나타난다고 하였다.
그러니까 주의 백성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서 스스로를 대속의 제물로 바쳐서 그들이 죄를속하고 그들을 위해서 언약을 세워서 다시 한번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여기의 언약을 세운다는 말은 하나님이 백성을 모으고 창조한다는 말이니까 다시 한번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이다. 그 하나님의 백성이 대표자가 누구이냐? 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백성은 뭐라고? 항상 하나님의 자녀들이다(출4:22).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의 예수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떤 성격의 하나님의 아들인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신해서 스스로를 속죄의 제물로 바침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과 화합시켜서 하나님과 언약의 관계를 회복하는 그래서 언약을 세우는 그래서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요 너희는 나의 백성이라'는 이 관계가 회복되도록 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그래서 이 창조와 모으는 일을 하는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자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마가복음 11:27-33의 유대관헌들이 와서 "왜 네가 그렇게 성전에서 소란을 피웠느냐?" 할 때에 예수의 답변이 무엇인가? "세례요한의 세례가 무엇이냐?"고 하였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세례요한을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선지자로 인정한다면 나도 대답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너희들이 세례요한을 거짓 선진자로 인정한다면 나는 할말이 없다" 는 것이다.
왜 그런가? 에수님이 세례요한을 통해서 이러한 하나님의 선포를 들은 것이다. 그래서 뒤의 예수의 권세,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권세는 세례요한을 통해서 증거되었다고 볼 수있다.
그래서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는 세례요한이 진짜로 이런 하나님의 큰 일을 중개할 수있는 하나님으로부터 임명받은 하나님의 종, 하나님의 선지자인가? 아니면 거짓 선지자인가? 하는 이것이 상당히 중요하다.
여기에서 세례요한이 거짓 선지자이면 세례요한이 세례 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었다 하면 예수는 거짓 선지자 세례요한과 더불어 거짓 선지자로 정죄받을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만약에 세례요한이 진짜 하나님의 선지자이었다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계시할 수있는 그런 사람이었다면 그의 세례 때에 하늘로부터 이런 엄청난 계시가 있었다 그런데 그게 뭐냐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이다라고 할 수 있다. 위 대화에서의 내용이 이러한 내용이다.
그러니까 여기에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예수가 성전에서 소동을 피운 것이 무슨 권세가 있다고?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가 있다는 말이다. 세례요한이 세례 때에 자기에게 중개된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로 이 일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전에서 소란 피운것이 하나님의 아들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바로 이 나단의 예언이 그 관계의 배경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뭐하는 사람인가? 성전을 새로 짓는 사람이다. 나단의 예언을 살펴보면 ....지금 이 서 있는 성전, 헤롯이 지은 이 성전은 부패할때로 부패하였다. 그 부패의 상징이 무엇인가? 이 성전 뜰에 장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이제 싹쓸이를 해버려야 하는 것이다. 좋은 의미로...그래서 성전을 지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서 있는 예루살렘 성전에 대해서 뭐라고 예언하였는가? 이 부패한 성전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다 무너진다고 하였다(막13:2)
갈릴리의 시골사람들이 시골 사람들이 아니라도 성전을 보면 입을 딱 벌렸다. 로마의 책에도 헤롯이 세운 예루살렘 성전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에 대해서 노래하고 있다.
유대의 책 Mishina에 보면 이러한 이야기가 있다.
"헤롯의 성전의 건물을 보지 않은 사람은 아직 그 일생에 좋은 건물을 보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엄청나게 지어놨다.
헤롯이 그렇게 엄청난 성전을 지은 이유가 있다. 그것은 헤롯이 그이 아버지는 에돔의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는 유대인이다. 따라서 경건한 유대인들은 헤롯을 이방인으로 취급하였고 유대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다윗 왕조를 재건할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바로 나단의 예언을 통해서 메시야 사상이 전개되므로 헤롯 성전을 엄청나게 지어가지고 유대인들로 하여금 '나단의 예언'이 자기를 통하여 성취된 것으로 생각케 할려고 의도 하였다. 그러니까 다른 왕,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왕을 기대하지 말고 메시야적인 왕을 기대하지 말고 지금 여기서 태평성대를 누리고 이루어진 천국으로 생각하라는 것이었다.
왜? 좀더 나은 미래를 생각하면 현재의 하는 짓에 대해서 비판하며 욕할 것이 아니겠어. 다 그러는데 헤롯이 이와 같았다.
그런데 예수가 이제 뭐라고 하시는가? "돌위에 돌 하나도 남김없이 다 무너지리라"고 이야기하신다. 그리고 자기가 성전을 3일만에 다시 세운다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가 무엇으로 재판을 받았는가? 예수의 죄목이 바로 그것이 아닌가? 이 성전을 위협했다.이 성전을 때려 부수고 손으로 지은 성전을 때려부수고 예수가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 받을 때 바로 그것이 죄목이다.
손으로 지은 성전을 때려부수고 손을 짓지 않는 성전을 사흘만에 일으킨다는 것이 예수의 죄목이다.
그 죄목에 대해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물었다. 정말로 네가 그렇게 말했느냐? 그러니까 예수가 묵비권을 행사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이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라고 물었다.
성전을 때려 부순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어요? 바로 나단이 예언을 살펴본 그러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가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했다는 것은 자신이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왜? 성전은 누가 짓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짓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그렇다고 그러니까 유죄판결을해서 빌라도에게 넘겨주는 것이다.
자 여기서 보면 예수가 나단의 예언을 염두에 두고 현재의 성전을 하나님의 심판으로 완전히 때려부수어질 것이고 자신이 3일만에 사람의 손으로 짓지아니한 성전을 지을 것을 의식한 것이다.
그러면 사흘만에 일으키는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은 무엇인가? 여기서 '사흘'만이라는 말은 호세아 6:2에서 온 말이다. 호세아 6:2절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하면 하나님의 징법로 신판으로 완전히 녹아 떨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의 그의 백성으로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사흘만에 다시 회복하는 것을 말한다. 여기서 '사흘'이라는 소리는 짧은 기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호세아 6:2절을 염두에 두고 예수께서 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 여기에서 손으로 짓지 아니한 것이 무엇인가? 돌과 나무로 짓는 성전이 아니고 건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벌써 쿰란 공동체에서 엣센 공동체에서 성전을 영화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았다. 특히 쿰란의 엣센파의 사람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의 썩어빠진 자들은 다 범법자들오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자기들의 공동체에서 율법을 연구하고 자기들이 몸을 깨끗이 하고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키는 쿰란 공동체, 엣센파 자기들만 하나님의 백성들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자기들이 드리는 기도가 곧 성전에서 드리는 제사로 보았고 자기들이 하는 성경공부가 곧 성전의 제사로 보았다. 이것은 선지자들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래서 벌써 성전의 spiritualisation, 성전을 건물만을 성전이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하나님의 성전으로 보는 전통이 선지자들의 가르침이 발전되어 가지고 중간사 시대에 발전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예수가 가령 막14:58에서 손을 짓지 아니하는 성전을 짓는다고 할때 예수는 무엇을 염두에 두었는가 하면 이 건물을 말하지 아니하고 예수를 재판한 사람은 건물을 두고 말하지만 그래서 그가 마치 기적적으로 하나님 앞에 이 엄청난 건물을 지을 것같이...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그렇게 되어있다. "아 46년 동안이나 계속해서 짓고 있는 중인 이 성전을 네가 때려부수고 사흘만에 지어? 그건 말도 안되는 소리이다"
이것이 예수의 insunderstanding technique이라. 즉 이것은 건물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두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손으로 짓지 아니하는 성전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이다.
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예수가 성전으로 바꾸고 이것을 자기가 사흘 만에 자기가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한 것이다. 호세아서 6:2절의 말대로 하나님의 백성을 죄로부터 회복하는 것이다.
어떻게 예수께서 회복하는가?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이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곧 새로운 성전을 다시 세운다고 한 것이다.
그런에 이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는 무엇인가? 바로 그것이 성전의 기능이 아닌가? 성전이 무엇하기 위해서 있는가? 거기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서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의 교제를 회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의 기능이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분으로 이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의 기능을 완성해 버렸으니까 다시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는 그런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완성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백성 자체가 성전이라고 볼 수 있다 .왜? 이곳의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를 통해서 하나님과 완전히 교제가 회복이 되어가지고 하나님이 그들 안에 거한다는 것이다.
그들안에 거하는 것이다. 성전은 어떤 곳?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다.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는 곳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 자체에 하나님이 거하시고 그들이 하나님과 더불어 먹고 마시는 잔체를 베풀게 되므로 그것이 바로 성전인 것이다. 이것이 곧 하나님 나라이다.
아까 우리가 지난 시간에 한 것을 상기할 때 뭐라고 하였는가? 에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궁극적인 의도가 무엇이라고?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모아서 이룩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의 간접기독론이나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나 예수의 성전에 대한 태도나 다 일치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이다.
그런데 그 일을 누가 하느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한다 이말이다.
즉 그 일을 다른 말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을....
이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이 자녀들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그림언어이다. 그래서 그것이 유명한 출24장에서부터 나온다.
그러면 여기에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이해가 있는 것이다. 지난 시간에 분석해 본바에 의하면 지난 시간에 우리가 두 가지의 결정적인 '그 사람의 아들'의 말씀을 통해서 분석하였다.
하나는 최후의 만찬 때의 말씀 마가복음 14:17-24절까지 나오는 최후의 만찬의 말씀을 분석함으로 예수가 스스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할 때에 무슨 의미를 갖고 무슨 의미를 갖었냐는 것을 해보았다. 또 그와 똑같은 말이나 약간 변형되어서 나오는 마가복음 14:45절을 분석함으로 지난번에 이야기하였다.
자 마가복음 10:45절이나 마가복음 14:17-24절까지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에서 거기서 우리가 무엇을 알아냈었는가?
가령 마가복음 14:24절의 잔의 말씀에 반영된 구약의 구절들이 무엇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사야서 42:10-14의 대속, 사42:6절의 언약 또 사49:8/출19장 24장 34장 등이 반영되어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 말씀이 '그 사람의 아들'로써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자기가 주의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곧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대속의 죽음을 하므로 타락한 하나님의 백성이 다시한번 회복되도록 하여 그들을 다시한번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는 언약을 세우는 제사로 보았다 이말이다.
이렇게 해서 창조된 것이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제까지 예수의 간접기독론이나 예수이 하나님 나라 선포로 보나 예수의 율법에 대한 독특한 태도를 보나 예수의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로 보나 모든 것이 어디에 집중이 되고 있는가? 어디에 다 통일이 되고 있는가?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들 즉 하나님의 백성들, 그것을 새로운 성전이라고도 할 수 있고 백성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를 연구할 때에 몇가지 독특한 사실들을 관찰함으로 시작하였다.
첫째는 예수가 다른 모든 메시야적인 칭호들을 거부하면서 독특하게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불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두 말은 같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태복음의 한 두어 곳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이 두개념을 같이 나오지 않는다.
마태복음의 두어곳 중에서 같이 나오는 것은 전에 고찰한 바와 같이 마태의 편집사적인 교정이라고 하였다.
왜 자기 중심 메세지인 '하나님 나라'와 유일한 자기 칭호인 '그 사람의 아들' 이라는 말이 같이 나오지 않는가? 같이 연결되어 있지 않는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그것을 가지고 독일의 과격파 학자인 Vielhaver 나 Kasemann(케제만)같은 사람은 뭐라고 한다고 하였는가?
그 둘다 예수가 말했을 수는 없다. 둘다 말했으면 에수가 섞어 쓸 것이 아니겠느냐? 즉 자기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들여온다고 하거나 둘을 유치해서 쓸 것이 니겠는가?
이 개념이 이렇게 분리되어서 우리 복음서 전승에 나온다는 것은 한 사람이 두가지를다 말했을 수는 없다. 그러니까 하나만 예수가 말하고 다른 하나는 초대교회가 지어내어 가지고 예수의 입에 넣어가지고 마치 예수가 한 것같이 했다고 보아야 된다.
그래서 이 Vielhauer는 말하기를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초대교회가 예수가 종말에 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신앙고백하고 '그 사람의 아들'은 이제 묵시문학에서 흔했더 종말론적인 구원자,메시야적인 존재이었다. 라고 전제하고 부활후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해서 신앙고백하고 그 고백을 예수의 입속에 넣어서 예수가 마치 스스로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던 것같이 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이 두가지 면에서 틀렸다고 했다.
첫째로 '그 사람의 아들'이 그 묵시문학에서 메시야적인 칭호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Vielhauer의 전제가 무너지는 것이다. 더 중요한 것은 만약에 Vielhauer의 논리를 180도 뒤집는 것인데 Vielhauer가 어떻게 주장했느냐하면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다 썼으면 이것이 섞여서 나왔을 것이다.따라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만 선포했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은 초대교회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지어가지고 예수의 입속에 넣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하나의 근거없는 이야기이다.
초대교회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을 하고 바로 '그 사람의아들'의 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사람이라는 이해가 있었으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이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낼 때에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재가 되게 한 분이라고 말을 지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초대교회가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하는 말을 지어냈다면 뭐하기 위해서 지어냈겠는가?
하나님 나나를 선포하고 하나님 나라를 실재라 되게 한 예수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인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오는 분이라고 이렇게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을 초대교회가 이렇게 연결시켰을 것이다.
따라서 이렇게 공관복음의 전승에서 이 두개념이 이렇게 떨어져 있다는 것을 도리어 Vielhauer가 말한대로 '하나님 나라'만 예수가 말하고 '그 사람의아들'은 초대교회가 지어냈다는 것은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정반대로 증명하는 것이다.
만일 초대교회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의 의의 와 지위와 중요성을 선포하기 위해서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말을 지어냈다면 초대교회가 '그 사람의 아들'과 '하나님 나라'를 뒤섞었을 것이다. 예수가 바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였는데 그가 섞어서 쓰는 것은 그가 바로 '그 사람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는 이런 식으로 하였을 것이다.
여러분들이 비판적이고 자유주의 학자들의 논의를 쓱 보면 상당히 그럴듯한 데가 있다. 그런데 그것이 우리 정통신앙과 위배가 되면 여러분들이 가만히 생각해보라. 그라개지고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정도 더 비판적이 되면 그 사람들보더 더 훌륭한 진리를 찾아낼 수가 있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의 큰 결함이 어디에 있느냐면 이 비판주의 신학자들처럼 비판적으로 생각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무비판적으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옛날 우리 선조들이 전달해준 것은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이 보수주의자들의 가장 약점이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학증을 갖는 신학을 전개할 수가 없다. 사실 진정한 보수주의자라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면 이른바 비판주의 학자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보다 250배 정도 더 비판적이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을 이겨 먹어야 진리가 보수되는 거이지 그냥 모래 속에 머리만 그냥 박고 있으면 세상이 잘 되어 가는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안되는 것이다.
여러분들이 진짜 보수적으로 신앙을 유지하고 교회를 지키려면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더 비판적이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면 여러분들의 길이 쫙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이 피상적인 것과 약점이 다 보이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씩 신학에 ㄱ자도 모르는 사람들이 비판적인 학자들보다 한 250배 더 비판적이기 위해서 책을 읽고 그 사람들과 씨름을 하고 논쟁을 하면 그 사람들에게 지는 것이고 오로지 루이스벌코프 책만 읽어가지고 일년내내 그것만 가지고 설교만 하고 하면 좋고 하는 것을 나는 원치 않는다.
그럴러면 뭘라고 신학교 댕겨? 차라리 1주일간 합숙해가지고 그책달달 외면 될것이 아닌가? 하여간 그건 잔소리고....
그래서 지난번에 우리가 '그 사람의 아들'에 대해서 연구할 때에 이러한 독특한 현상들을 관찰함으로 시작하였다. 예수가 자신을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의 중심 메시지인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은 따로 분리되어 있다.
또 하나 우리가 관찰한 것이 무엇인가? 예수가 자기의 죽음을 예고할 때 항상 무엇으로 예고하였는가? '그 사람의 아들'로 예고하였다. '그 사람의 아들'로 자기의 죽음을 예고하였다. 이러한 것들이 바로 무슨 관계가 있느냐?
여기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 '그 사람의 아들'선포가 우리 복음서 전승에 연결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래서 Vielhauer는 '하나님 나라'만 예수가 선포한 것이고 '그 사람의 아들'은 나중에 교회가 지어 내어서 예수의 입에 넣었다고 하는 주장과는 정반대인 것이다.
즉 예수가 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초대교회가 이것을 감히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에 분리되어 있는 것이지 만약에 초대교회가 여기에 개입했다면 예수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 나라'를 가져온 분이라고 섞어서 썼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그렇다면 Vielhauer의 주장은이제 무시가 되었지만 그러면 왜 분리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설명이 안되어 있다. 이것을 설명해야 한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고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의 칭호를 사용하는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그러면 우리는 거시서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하게 된다.
두세곳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가령 마가복음 2:10 같은 두세곳을 제외하고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어디에만 나오느냐면 에수가 자기 제자들과 대화할 때만 나온다. 자기의 가까운 제자들과 대화할 때만...
반면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는 큰 청중들에게 선포할 때에 등장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에수의 공개적 가르침이라고 한다. 공개적으로 모든 청중들에게 베푸는 가르침인 것이다.
여기에 반해서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은 어디에서만 나오느냐면 그의 제자들과 내밀하게 비밀적으로 하는 가르침이라고 한다.
그래서 J.Jermeias가 관찰한 바와 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가르침은 에수의 공개적 가르침이고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가르침은 제자들에게만 하는 내면적인 심지어 비밀 가르침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렇게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의 , 예수의 말씀 전승에서 이것이 분류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을 좀 더 자세히 말하면 무슨 말이 되느냐 하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내가 지난번에 무엇이라고 하였는가? 이것은 하나의 초대장이다. 사탄의 권세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권세를 받아들이고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들어오라는 청첩장이라고 하였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call이라고 하였다.
사탄에게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선한 통치,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통치에서 벗어나서 의와 사랑으로 다스리는 하나님의 통치 밑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라고 하였다.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예수는 일반 대중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회개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초대장인 것이다.
이 부름에 응한 자들, 이 부름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예수의 제자들이 아닌가? 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부름, 예수의 초대장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부름에 응한 자들이 누구인가? 그들이 바로 예수의 제자들이다.
그의 제자들에게 그러면 자기가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것인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도록 초청을 했는데 여기에 응한 사람들에게 그러면 어떻게 자기가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것인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로 만들 것인가? 를 설명할 때에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다.
어떻게 만드는가? 그의 대속의, 궁극적으로는 그의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자기 제사행위로 그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 이것이 이사야서의 주의 고난받는 종의 예언이 바로 그것이다.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예언이 다니엘서 7장의 예언이 무엇인가?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종말에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창조하고모은다. '그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뭐하는 분인가?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시고 모으는 이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그 사람의 아들'이다.
그런데 그가 어떻게 하는가? 이사야서 42장-53장까지 예언된 고난받는 종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을 통해서... 곧 스스로를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 바침을 통해서 그것을 이루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어 "내가 너희의 하나님이고 너희는 내 백성이라"는 법적인 관계가 성립이 되고 보장이 되는 것이다.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의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그래서 뭐가 이루어지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만들어지고 탄생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의 성취인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와는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공개적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나라 백성이 되도록 초대장을 발부하였다. 그래서 그 초대장에 응한 자기의 제자들에게 자기가 어떠게 자기의 백성으로 삼아주겠다는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느냐 하면 그것은 '그 사람의 아들'로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물로서 자기를 바친 것이다. 그것이 무엇의 성취인가? 다니엘서 7장의 성취인 것이다.
이래서 우리의 복음서에 '하나님 나라'와 '그 사람의 아들'이 많이 분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하나이다. 무엇이 하나인가? 하나님의 새로운 백성을 창조하는 것에 있어서 그러하다.
그러니까 이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가 곧 성전인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인 것이다. 그 안에 이 성전에 누가 거하는가? 하나님이 거하신다. 하나님의 백성가운데 하나님이 거하신다. 이러한 자기 이해를 예수는 성전에서 소란을 피움으로 표시를 했고 바로 그것에 의해서 붙잡힌 바되어서 십자가에 처형이 되었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그리고 이 모든 것에 유대의 관헌들과 로마의 병정들은 이것을 거부하면서 스스로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면서 하나님에 의해서 이용당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쓰임을 받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진짜 '그 사람의 아들'로서 대속의 새언약의 제물로서 스스로를 십자가에서 바친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었다. 그때의 죄목은 무엇인가?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짓는다고 했다. 그러므로 그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왜 이것은 어디에서 근거하였는가? 나단의 예언에서 근거한 것이다. 유대의 메시야 사상의 가장 중요한 뿌리인 나단의 예언에서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곧 무엇을 의미하는가? 당시 유대인들의 메시야 사상과 로마 사람들의 이해에 의하면 이것은 곧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소리이다. 왜냐하면 다윗의 왕조를 재건한다는 소리이니까.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니까. '유대인의 왕'이라는 소리이다. 그래서 로마 사람들에게 무엇으로 낙인이 찍히는가? 반란자로 인식된다. 로마 가이사의 식민종주국에 반란을 일으킨 반란자로 여긴다. 그래서 그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의 죄목을 뭐라고 써붙였는가? 유대인의 왕 예수라.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 그의 죄목이다. 이렇게 연결되는 것이다. 성전을 때로부수고 새로 짓겠다고 하는 것이 예수님의 죄목이다.
이것이 산헤드린에서 결정한 죄목이다. 그것은 무슨 죄목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가?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죄목으로 연결짓는다.
왜? 이러한 전승(나단의 예언) 때문에 그렇다. 성전을 다시 짓는다는 것은 다윗의 아들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는 것과 연결된다. 그것은 당시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메시야 사상과 로마 사람들의 이해와 같은 것이다. 유대의 왕인 것이다.
다윗의 왕조를 다시 재건해서 로마의 종주국으로붙 탈피하여 유대의 독립을 선언하는 그리하여 독립왕국을 건설하여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소리이다.
그러니까 소위 정치적으로 본 것이다. 그래서 해방신학자들은 말하기를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사실 자체가 예수가 열형당원들처럼 해방운동가였다는 사실을 말한다고 한다. 이러한 주장은 신학적으로 유치한 사람들이 하는 짓거리이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적으로 일관성있는 해석이다. 그러니까 이 때이 산헤드린의;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이 신학적으로 멍텅구리들이 아니다. 신학자들이다. 신학적으로 아주 일관된 견해이다. 그러나 여기에 숨어 있는 자기들의 깉은 이해관계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신21:23에 기초되어 있다. 신21:23이 당시에 어떻게 이해가 되었냐면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자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이라는 것이다. 신21장의 본문에 의하면 죄인을 십자가에 처형하면 그 사람을 나무에 달아놓되 해질 때까지만 해가 떠 있을 때까지만 하고 해가 지면 그 시체를 내려 놓아라고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께 욕되게 한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처형당한 시체를 해질때까지만 두고 그 후에 처리해버리라는 거은 그가 하나님께 욕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해석이 꽤나 애매하다.
하여간 쿰란 문서들이나 신약의 문서들을 보면 신21:23이 어떻게 당시에 이해가 되었느냐면 나무에 달려서 처형을 받는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아서 하나님께 가증스러운 것이다. 라는 것이다.
그래수 예수가 성전에서 소란을 피우고 성전을 때려부수고 새로 성전을 짓는다고 하는 죄목을 들었을 때 곧장 이렇게 일관된 신학적인 해석을 해서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로마에 넘겨 주면 그때의 로마의 처형방밥은 신민국가에서 노예들이나 반란자들에게는 반드시 십자가 처형을 하였다. 그래서 나무에 달려 죽게 되는데 그렇다면 유대인들의 신학적인 눈에 의하면 신21:23이 예수에게 적용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죽은 것으로 유대인의 눈에는 판명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것이야말로 예수 운동을 가장 효과적으로 종결시키는 방법인 것이다.
구약 후기 중간사시대를 거쳐서 연연히 흐르는 전승 하나가 무엇이냐 하면 진정한 선지자는 당세대에 의해서 버림을 받아서 고난을 받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선지자의 고난받음의 전승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가 신7장 13장 17장 18장이 제시하는 거짓 선지자의 처형방법인 돌려쳐죽임의 그 방법으로 예수가 거짓 선지자로 유대인들에 의해서 예수가 돌로 쳐죽임을 당하면 에수의 추종자들에 의해서는 그것이 예수가 더욱 선지자임이 더욱 드러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에 면면히 흐르는 전승은 진정한 선지자는 당세대에 훼방세력에 의해서 고난을 받는다는 그 신앙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빌라도가 여러번 책임을 회피할려고 하고 너희의 법대로 처리하라고 할 때에 이들이 빌라도의 요구를 듣지 않고 빌라도에게 끝까지 정치적으로 처리하도록 빌라도에게 압력을 가한 것이다.
"네가 스스로 왕이라고 처리한 예수를 처형하지 않고 놓아주면 너는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다" 네가 바로 가이사의 역적이 된다는 것이다. 가이사에게 역적 행위를 한 예수를 네가 놓아주면 네가 역적이 되어서 네가 십자가에 처형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얼마나 큰 공갈이냐?
네가 예수를 놓아주면 네가 역적자로 십자가에 처형을 받는다고 하니까 빌라도가 화가 나가지고 잔뜩 때리고 나와서 뭐라고 놀린다. "너희들의 왕 예수를 보라"고 외친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이 뭐라고 하는가? "처형하라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예수가 그들이 왕이 아니다라는 말을 위해서 뭐라고 하는가?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고 외친다. 이게 얼마나 숙명적인 말인가?
유대인의 왕은 누구인가? 하나님이다.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이 유대인의 왕이고 이스라엘은 그의 백성이 아닌가.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대신인 예수 그리스도의 왕권을 부인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자기들이 왕됨을 부인하고 누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지금까지 누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가이사가 자기들이 왕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은 무슨 소리인가? 자기들은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자기 부인이다. 자기들이 더 이상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 대신인 예수가 진정으로 이스라엘의 왕이다. 사무엘하 7:12-16절의 나단의 예언을 성취하는 왕인 것이다.
이 왕을 부인하는 그 자리에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위치가 종결되는 것이다. 어떻게? 자기부인을 통해서 종결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가이사 외에는 왕이 없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고 누구의 백성? 가이사의 백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십계명의 제 1조를 위반하는 것이다. 나 외에는 무엇을 두지 말라? 다른 신을 두지 말라. 이 언약의 제 1조, 이것은 언약이 파기된 것이다. 그래서 구약이 파기된 것이다. 언약이 파기된 것이다. 언약이 예수의 십자가전에서 파기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게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의 일방적인 파기이다. 더이상 나는 너희들의 하나님이요 나는 너희의 백성이라고 할 수 없다. 왜? 유대인들이 하나님이 우리 왕이 아니요 가이사가 자기들의 왕이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가 십자가에서 못박힌 것이다.
바로 이러한 신학적인 이유 때문에 이렇게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 때문에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버려두고 다 도망가는 것이다.
왜? 신명기 21:23에 의해서 예수가 의로운 선지자로서 당세대에 버림을 받고 패역한 이스라에의 지도자의 대적과 핍박으로 억울하게 처형당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예수가 거짓 선지자이었나 보다. 거짓 메시야였다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법,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선언한대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것이다. 혹 예수가 메이야인가 선지자인가 하고 따라다니면서 예수의 제자들이 환멸과 공포속에서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런데 사흘만에 예수가 다시 부활하였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그래서 이 부활은 곧 하나님께서 예수가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Vindication한 것이다. 예수가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하나님이 진짜 예수를 십자가에 처형하셨으면 죽은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겠는가 그래서 옳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제자들에게는 예수가 옳은 것이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한 것이다. 예수가 의롭다고 한 것이다. 뭐가 의롭다고 한 것이냐? 예수의 모든 주장과 행동이 옳다는 것이다. 예수의 모든 주장이...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주장이 옳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이 세상에 도입하고 그가 자기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자라는 사실이 옳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가 '그 사람의 아들'로서의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그리고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라고 주장하였는데 그것이 옳다는 것이다.
그런 의로운 예수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참혹한 죽음을 당하는 이것이야말로 예수가 평소에 주장하던, 전날밤에 떡을 떼고 잔을 붓는 그 drama로 우리에게 설명해 준대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이라. 그것을 하나님이 확인한 것이다. 그것이 그렇다고...
그런데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르로 우리에게는 가이사외에는 왕이 없다고 선언하므로 구약의 역사는 끝나고 유대인들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역사는 끝나고 무엇에 의해서 대치되는가? 새언약에 의해서 대치되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들,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이 대속의 효과를 받고 새언약에 의한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라는 자기 이해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가 사흘만에 손으로 짓지 아니한 성전을 세운다고 한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자기들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성전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교회, 즉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의 공동체를 성전으로 본 것이다. 이 성전에는 이미 대속의 새언약의 제사가 종말론적으로 한번 영원히 바쳐진 것이다. 그래서 더 이상 이제는 제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뭐라고 자기이해를 갖게 되었는가?
자기들이 새 이스라엘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자기 이해를 가지게 되고 벧전 2:9절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모든 귀중한 칭호들, 출19:5절에 나오는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칭호들을 옛 이스라엘, 육신적인 이스라엘에게서 뺏어가지고 누가 누구에게 적용하는가? 자기들에게 적용한다.
너희는 뭐라? 너희는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족속이며....
그것이 출19:5의 이스라엘, 하나님의 백성에 적용되는 칭호이다. 그런데 그것을 그들에게 뺏어가지고 누가 갖게 되는가? 새이스라엘이다.
그러니 예수가 진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진짜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삼하 7:12-16의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진짜 메시야이다. 예수가 진짜 주이다. 예수가 정말로 우리 죄를 위해서 대속의 죽음을 하였다. 예수가 정말로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하였다는 선포가 울려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복음이다. 케리그마이다. 사도들의 복음이 이렇게 해서 발생한 것이다.
예수가 메시야이다. 예수가 우리 죄를 위해서 죽고 부활하였다는 복음의 요약인 케리그마가 이렇게 예수의 가르침과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발생한 것이다.
신약신학 제 13강
신약신학 Ⅰ의 요약
신약신학을 하면서 과제로 삼은 내용은?
어떻게 해서 AD30년 쯤에 예루살렘 성밖에서 처형된 예수가 그리스도요 주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을 해서 하나님의 구원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 신앙고백을 하게 되었는가? 어떻게 해서 이 신앙고백이 인류를 위한 기쁜 소식으로 복음으로 선포되게 되었는가? 어떻게 기독교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는가?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삼았다.
이 문제는 인류 종교 사상 유례없는 일로 강조했다. 십자가에 처형된 사람을 하나님이 아들로 우리를 위해 인간이 되시고 대속의 죽음을 당하시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만유의 주로 높임받으시고 군림하신다는 이 신앙고백, 십자가에 죽음과 현재 통치하심과 재림으로 이루어진 십판과 구원의 완성을 통해서 인류가 구원을 얻는다는 이러한 사상의 전제는 인류 종교 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어떻게 이런 신앙이 발생하게 되었는가가 우리의 과제이다.
이 과제를 살리기 위해서 우리는 불투만 이래로 역사를 경시하는 자유주의 학자들은 이 신앙고백의 발생을 예수의 사건 첫 부활에 대한 체험의 사건에서부터 돌출하려 하는데 이것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서 역사적 예수가 어떠한 삶을 살고 어떠헥 가르치며 어떠한 운명을 가졌는가에서부터 문제를 해결하겨 해야 한다고 강조.
그러면 역사적 예수의 독특한 점들을 하나씩 살펴보아야 그 분이 어떠한 자기 이해를 가지고 있었으며 인류에게 어떠한 약속을 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1)간접기독론 2)하나님 나라3)'그 사람의 아들' 이것들이 예수의 특징들이다.
1)간접기독론
예수는 자신을 주, 하나님의 아들,메시야다라고 직접적으로 주장하지 않고 당시 유행하던 유대교의 메시야적 칭호들을 피하고 남들이 자신에게 사용하면 인정하나 스스로는 거절함. 공관복음에는 자신이 메시야라는 주장이 나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간접적으로 자기의 독특한 권위를 주장했는데 그것이 의미가 있다. 그것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면 에수가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예수의 독특한 말씨,주장들들 살펴보자.
A) ,
여기서 의 사용법은 독특하다. 당시 유대인들이나 우리들 같이 하나님이 말씀 선포나 기도의 끝에 을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중요한 선언 앞에 아멘 내가 여러분께 말한다. 우리말로 진실로라고 번역된 말이다.
둘째로 예수는 하나님을 아고 불렀고 자기 제자들에게도 아빠라고 부르게 하였으나 자기와 자기 제자들 사이에 차이를 두고 나의 아빠 너희들의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 이런 것을 통해 예수가 스스로를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계시할 수 있는 구약의 선지자들도 주의 영이 주의 말씀이 나에게 임했다고 말씀을 선포했는데 예수는 자신이 선포한 말의 진위됨을 보증할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의 추종자들을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든 분이다라는 것이 자기 이해이다.
B)모세 율법에 대한 태도
특히 모세 율법에 대한 태도가 반대 어법에 묘사되었는데 거기에 "옛 사람에게 살인-,간음-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형제를 미워하거나 --" 그러내 내가 말한다라고 반대어법을 사용하여 말함으로써 모세 율법보다 더 완벽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분으로 주장하는데 이것은 유대교의 틀을 부수는 주장이다. 왜? 유대교는 모세의 권위위에 세워진 종교로서 유대교의 틀 안에서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인간은 없다. 모세 다음은 하나님이다. 예수는 모세보다 더 위대한 권위로 하나님의 뜻을 직접적으로 완전하게 계시를 선포하였다. 그래서 어떻게 예수가 제2의 모세로서 모세의 첫 언약과 첫 율법의 게시에 후형적으로 상응하는 제2의 모세로서 종말론적인 율법의 계시자로 말할 수 있지만 여기서 모세가 표준이 아니고 모세를 능가하는 종말론적이인 완성자로서의 위대한 면모가 나타난다.
이러한 말투로서 간접적으로 모세를 능가하는 권위를 주장한다.
C)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
죄를 용서해주는 권위를 주장하고 자기의 회개와 하나님 나라이 선포에 응한 죄인들의 죄가 용서되어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짐을 받았다는 것을 데모로 증명했다. 이것이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잔치이다. 종말에 죄의 용서와 하나님과 교제의 회복의 구원이 이미 예수를 통해서 임한다고 주장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항상 잔치로 비유하였는데 그 잔치를 하나님 나라에 응한 사람들에게 배풂으로서 그들이 벌써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베푼 진정한 잔치를 미리 맛보는 것으로서 시위를 하는 것. 여기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 만이 할 수 있는 하나님의 대권인 죄를 용서하는 권위를 주장-신적인 권위를 주장. 막 2장에 보면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권윌를 침해한 것이라고 판단을 내린 것이다.
뿐만 아니라 종말에 구원을 가져올 분이라고 스스로 주장했다. -신적인 권위로서
D)하나님 나라를 들어가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 또 들어갈 수 없다고 판단 기준을 스스로 제시하는데 이것도 엄청난 권위주장이다.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자기를 따르는 곧 제자도를 행하는 사람들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엄청난 권위주장이다.
E)후계자를 생각하지 않은 것을 보면 자기의 삶과 사역을 단회적인, 독특한 사역으로 봄. 이런 주장들을 통해 예수가 간접적으로 신적 권위를 주장하며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모세보다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죄용서와 종말의 구원을 지금 현재 베풀며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통치자로서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고 없음을 결정하는 자기 이해를 주장.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을 유대교가 제공하는 카테고리로 정의한다면 무슨 카테고리가 있을까? 종말에 구원자라는 메시야라는 category는 예수와 같이 주장하는 사람에게는 불완전한 카테고리다.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이런 엄청난 주장을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매우 복잡. 이런 주자을 한 사람은 이미 유대교의 틀을 부순 사람이므로 유대교의 지도자들과 충돌을 하고 재판에 처해지고 사형. 그러나 우리가 구태여 유대교의 틀안에 머물러 유대교가 공급하는 카테고리로 명명해야 한다면 조금 부족하지만 '메시야'라는 명칭을 쓸 수 밖에 없다.
2)하나님 나라 선포
이것은 예수의 중심 메시이다.
구약은 하나님 나라라는 개념이 아주 드물게 나오나 왕이라는 개념은 자주 나오며 언약 사상의 표현이다. 그래서 구약에는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신정주의적 이상이 있었다. 그것이 배경이 된다. 구약의 창조,언약,종말사상이 큰 의미로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기초가 된다.
그러나 재미 있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말하면서 하나님의 뜻으로 별로 지칭하지 않는다. 예수의 가르침 속에는 항상 아버지로 나타난다. 하나님 나라 개념이 가르침 속에 수없이 나타나지만 왕이라는 개념은 없다. 왜? 구약과 유대교적 배경과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연속성이 되지만 불연속성도 있다. 불연속성이란 예수의 독특한 점이다.
그런 것이 다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는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종말의 기대가 실현된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라. 좀더 새롭게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첫째 미래올 하나님 나라의 실제로 나타났는데 임박하다고 말한다. 이런 점에서 묵시문학과 유사. 예수는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의 상황은 별로 언급하지 않고(유대 묵시문학은 환상적으로 랍비 문학은 물질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그리는 반면)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여 죄용서, 의로운 사람이 되는 것, 하나님 집의 아들로서 회복되는 것, 영생, 오는 세상의 삶, 기쁨이 있는 곳이라는 구원론적 천명에만 그치고 그 속에서 삶이 어떻게 되는가에 대해서는 일체 말하지 않는다.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그릴 때 구체적인 그림은 잔치이다.
왜? 묵시문학처럼 하나님 나라를 구체적으로 그리지 않느냐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을 강조하기 때문.
둘째 예수를 통해 실체가 되는 하나님 나라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미래에 올 것으로만 말하지 않고 자기를 통해서 자기의 선포와 자기의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고치는 자신의 사역에서 하나님의 다스리심이 실제로 나타난다고 주장하였다. 이 점이 미래에 올 하나님 나라보다 강조되었고 이점이 독특한 점이다. 예수의 선포와 귀신, 병고침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가 실제가 되었고 종말의 구원의 현재의 선포로 주어지며 특히 안식일에 병고침을 통해 고장난 하나님의 창조를 고쳐서 원래의 아름답고 완벽한 하나님 창조를 회복하고 진정한 안식을 갖도록 한다는 것을 시위적으로 표현.
세째 하나님 나라가 어떻게 오느냐? 초월적 은혜성. 초월의 하나님이 은혜로 인간을 위해서 행하심으로 온다.
㉠동사들을 살펴보면 하나님 나가 어떻게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온다. 도착한다. 주신다. 들어간다. 받는다 의 동사들이 사용됨.
우리가 즐겨쓰는 하나님 나라를 이룬다. 확장한다. 이런 동사는 일체 나오지 않는다.
이 동사 사용에서 알 수있는 것은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초월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인간을 위한 행위다. 인간이 이루는 것이 아니고 초월적 신적인 것이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 은혜를 주시는 구원의 통치를 받으들여서 그 구원의 영역에 들어가는 것이다. 다분히 수동적이고 인간이 할 수있는 것은 하나님 나라가 오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이 주권을 확립할 수 있도록 기도. 그러나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고 치유하도록 제자들을 보냈다. 이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세상에서 실제가 되어감. 그래서 이것을 굳이 우리의 용어를 쓴다면 2차적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가 이런 단어를 피한 것은 하나님 나라의 초월성과 하나님의 구원자적 행위를 강조하기 위해서다.
㉡성령의 능력으로 온다.
성령이 능력으로 인간 위에 하나님의 주권을 확립하심으로 도래한다. 예수는 자신을 스스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나타내고 있는데 예수를 통해서 능력이 나타나고 그의 선포와 치유가 하나님 나라의 실재와의 증거이다.
㉢유대 묵시문학이 기대했던 천지개벽을 기대한다거나 열혈당원이 기대했던 혁명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는 조그마하게 믿음 없이는 보이지 않게 시작한다. 그러나 온 사회를 변혁시킨다는 주장.
미래에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유대 묵시문학의 사상을 반영하여 온세상의 변형,갱신 등을 막 19:28절에서 반영하기는 하지만 예수의 강조점은 지금 여기서 자신의 삶을 통하여 자신의 제자들과 더불어 조그마하게 시작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나라는 크게 자란다.
ⅰ)점진적으로 자란다:하나님 나라의 점진성
ⅱ)하나님 나라의 비밀성:믿음 있는 자들만 헤아릴 수 있다.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에 대해서 유의할 것은 열혈당원의 신학적 후예인 해방신학자 비판.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 있어서 정치,경제,사회적 program이 하나도 없다.
사회변혁을 통해서 나은 정치가 경제체제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네째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새로운 성전으로 보았다.
다섯째 예수가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면서 가졌던 의도
그것은 악과 고난으로 통치하는 사단의 통치영역에서 벗어나서 생명,사랑과 의로 통치하는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들어와서 생명을 얻우라는 초대, 청첩. 부름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의도. 다시 말하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려는 사단의 영역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영역으로 들어와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라는 초대를 함으로 그들에게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구원을 약속. 잔치에 참여하였다. 피조물의 한계성을 극복하고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며 영생 즉 신적인 삶을 얻도록 약속함으로 초대함.즉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여섯째, 하나님 나라 선포와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고
왜 하나님 나라를 열심히 선포한 예수가 막8:27ff 분수령으로 하나님 나라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죽음을 이야기하는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자기 죽음과는 어떤 관계가 있느냐? 이것은 신학적으로 중요.
예수가 자신의 죽음을 예고할때 최후만찬의 말씀을 고려
잔의 말씀:자신의 죽음을 대속의 죽음으로 보고 대속과 새언약의 제사로 자기 죽음을 예고
이것은 성전의 진정한 기능을 완성하는 것이고 자기 죽음을 예고했다. 진정한 성전은 대속의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의 언약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대속과 새언약 제사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은 종말에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되는 것이다. 언약을 세우는 것은 항상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는 것-내가 너의 하나님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된다. 예수도 가기 주권 새언약을 세운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통해서 죄의 용서함을 받은 하나님과 화해한 종말에 의로운 백성을 창조할 것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죽음과의 관계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는 구원의 약속이요 하나님의 백성의 초대 죽음은 약속의 성취로 법적으로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는 성취.
3)자기 칭호
①'그 사람의 아들'
단 7장에 나타난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을 성취하는 사람임을 자기 칭호를 통해서 암시.단 7장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는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여 대표하러 나타나는 바로 그 사람이라고 예수님은 암시 주장.
예수가 자기 죽음을 예고할 때 항상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는 것이 재미있다.
최후 만찬도 마찬가지다(막8:31/9:31/10:33/9:12/마10:45)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기 길을 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를 떡과 포도주의 떡의 말씀과 잔의 말씀을 통하여 연극으로 설명하였다. 예수는 자기의 죽음을 말할 때는 항상 이 칭호를 사용하였다. 이것을 보면 왜 자기의 죽음을 그 사람의 아들로 예고 했는가가 잘 나타난다. 왜 그런가 하면 자기의 죽음이 대속의 죽음이고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이어서 자기 죽음을 통해서 종말의 하나님의 백성이 창조된다.
이것이 단 7장의 예언된 하나님의 구원의 도리의 성취다. 단 7장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이 임무요 그래서 자기가 자기 죽음을 통해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단 7장에 나타난 '그 사람의 아들'의 임무를 완성한다고 나타난다.
②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유대인들은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서 예수가 메시야로 주장했다는 "성전을 부수고--" 것을 빌미로 빌라도에게 처형받게 한 것은 신21:23이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였다. '나무에 달린 자는 저주를--'라고 당시에 이해되었다. 쿰람문서에서 알 수 있듯이 유대인들ㅇ느 이 말이 예수에게 적용되게 하기 위해서 유대인들이 예수를 정치범으로 몰아 하나님의 저주 아래서 죽은 것이 되었다.
그런데 그 예수가 부활해서 제자들에게 나타났다. 부활을 체험한 그 제자들의 입장에서 되돌아 보았을 때 무엇을 깨달았겠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옳다고 선언하신 것이다.그러면 예수의 모든 권위주장-모세를 능가한 분으로 직접으로 계시. 우리를 하나님 아들 혹은 백성이 되게 해 주신 분이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를 하나님이 백성되게 하신 분. 자기 죽음이 '그 사람의 아들'의 임무를 성취하는 것으로서 대속의 새얀약의 제사로서 우릴르 의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창조하는 것이다.-이 옳다고 인정.
그렇다면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가 그의 죄 때문이 아니고(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했으니까)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케리그마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대신해서 죽었다(고후5:21). "죄없는 분이 우리를 위해서 죄가 되었다"-문자적 해석.
는 히브리어 카타트이 번역으로 죄란 말도 되고 대속의 제사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예수그 우리 대신 우리 죄에 대한 저주를 받은 대속의 제사를 한 분이다라는 케리그마가 선포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은 부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선언한 것이므로 예수의 모든 주장도 가르침도 옳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죽음이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이고 우리를 위한 새언약을 세우는제사고 그래서 그가 우리 죄를 위해 죽었다는 그렇다면 그이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죽음이고 우리 죄를 속죄하고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이 백성 만들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게 한다.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잔치에 참여한다. 피조물이 무한한 자원에 참여한다. 피조물의 제한성을 극복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 구원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이 우리 구원을 위한 죽음으로써 그것이 구원의 사건이다. 아까 예수의 가르침속에서 벌써 그의 하나님 나라 선포와 그의 죽음에서 관계는 그가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통해서 한 약속과 초대의 성취로 예고했다. 그가 실제로 사건으로서 그의 죽음이 그가 약속한 하나님의 통치 영역의 백서으로 만들고 잔치에 참여하게 하겠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사단의 통치를 부인하고 하나님을 왕으로 주로 고백하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초대를 한 것이다. 초대를 한 사람을 어덯게 그렇게 만들어 주겠다고 했냐면 자기의 죽음을 통해서 새언약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 만들어 주겠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의 죽음을 통해서 성취하겠다. 그것은 이 모든 것 , 예수의 가르침.
실제로 그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무엇이 구원의 사건이냐? 예수가 우리에게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의 풍요로운 잔치에 참여하게 해 주겠다. 구원해 주겠다. 약속한 것이 복음이냐 아니면 죽음을 통해서 약속을 성취하고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 될 수 있다는 것이 복음인가?
십자가에서 그의 죽음이 구원을 성취했다는 것이 복음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선포에는 더이상 예수의 하나님 나라선포가 나타나지 않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다.
이 예수의 가르침과 행적은 이것에 대한 약속이었고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약속의 성취였고 이 모든 것을 체험한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보았을 때는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를 통한 구원의 성취, 하나님 백성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게 되게 하겠다는 약속의 성취로 이것이 구원의 사건이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선포는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되었다. 복음서를 넘어서 사도해언에 들어가면 금방 나타나는데 이상한 현상 복음서에서 예수는 하나님 나라를 선포했는데 사도들은 하나님 나라 대신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에 집중하고 있는 현상이 이렇게 해서 설명이 된다.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사건이다. 그러면 예수는 부활의 사건을 이루신 분이며 그러므로 메시야. 그리스도다. 종말에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 하나님의 독특한 아들로서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들되게 해주신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은 사단의 세력을 꺾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사단의아들 세력을 제거하며 종말에사단이 아들 세력을 완전히 없앨 주이시다. 그의 죽음이 우리의 죄문제를 해결한 대속의 죽음이고 그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등의 다양한 기독론적 구원론적 신앙고백과 복음선포 양식이 발생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완성된 구원의 사건을 살명해야 하는데 초대교인들에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배경은 구약과 유대교에서 올 수 밖에 없는데 여기서 오는 그림 언어, 칭호, 카테고리 들을 총동원해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다. 그가 우리를 위한 종말의 구원 해결을 하신 분이다 라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 다양한 기독론적 칭호를 동원-예수가 주, 형상, 지혜,마지막 아담,선한 목자,모퉁이 돌,생명의 떡 등-구약과 유대교가 제공하는 칭호들을 예수에게 붙임으로서 예수가 이루신 종말의 구원을 충분히 나타내려고 함.
신약신학 Ⅱ 제 14강
초대교인들은 에수의 이와같은 사건을 통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체험하고 그가 메시야, 주,마지막 아담 등의 구약과 유대교가 제시하는 카테고리들을 예수거에게 붙여서 신앙고백을 하고 그를 선포할 때에 구체적으로 예수의 의미, 사건의 의미를 어떤 부분은 어떻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그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라고 했을 때 예수이 어떤 점을 설명하려고 하는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을 때 메시야와 어떻게 다르며 구체적으로 예수의 어떤 성품, 신격, 기능의 어떤 부분을 설명하려고 하며 예수를 마지막 아담이라고 했을 때 예수를 어떤 그림으로 어떤 틀로 우리에게 설명하려고 하는가?
기독론적 칭호들이 혼동되어 사용되는 것이 아니고 뉘앙스가 조금 씩 다르다. 쓰임새가 다르다. 칭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어떤 면을 찾을려고 하는가를 살펴볼 것임. 그래서 초대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한 신앙고백의 전체 의미를 파악할 수있으며 그의 시점을 복음으로 선포할 때의 전체___가 되는 의미를 헤아릴 수가 있다. 그래서 그것이 신약신학Ⅱ의 과제이다.
원시교회가 예수를 어떻게 선포했는가에 대한 예를 몇가지 들자.
바울 서신에 부분들이 케리그마가-다른 부분은 나오지만-인용하자.
바울이 자기보다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 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전승을 여러번 인용했다. 최근 연구되는 부분이 바울의 신앙고백, 예배의식,찬송가등을 발굴해서 초대교회의 신앙발전 과정을 살피면서 동시에 바울이 먼저 사람들에게 이어받은 전승을 어떻게 사용,폐지하고 있는가를 살펴서 바울 신학의 특징을 살피고자 함.
(고전15:1-8)
1절: 을 상기. (받았다) 그리고 그 안에 서 있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말씀을 내용과 함께 상기시키고자 함.
2절:먼저는 시간적인 먼저의 의미다. (넘겨주었다):
중요도로의 먼저의 의미 (받았다)
이 두동사는 랍비들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침을 전수,전승 하는데 사용된 전문용어. 랍비들이 제자들을 가르치는게 가장 힘들여서 강조한 것이 일점 일획도 틀림없이 암송하여 그대로 전승. 바울이 지금 고린도 사람들에게 선포한 베드로의 증언에서 이런 전문용어를 쓰고 바울 스스로도 이 복음을 받았고 고린도 사람들에게 전함. 랍비들이 전승과정에 사용되는 전문용어를 쓰면서 바울이 선포했고 그때 선포한 복음들이 문자 그대로 어떤 말을 통해 강조하고 하는 것은 바울이 먼저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로 부터 받은-소중한 것으로-그대로 교린도에 전함. 자기가 상기시키려고 하는 복음이 자기가 만든 것도 아니고 자기가 고친 것도 아니고 먼저 그리스도인 된 사람들에게 받은 것을 그대로 넘겨줌을 말함으로 복음의 신실성과 보편성을 강조하고자 함.
바울전의 초대교회 복음
3절: (죽고)
4절: (장사)
(부활)
5절: (보이시고-부활하여 나타남을 나타내는 전문용어),12제자
고린도 인들을 설득하며 바울이 증거를 덧붙인 것.
6절: 500
7절: 야고보,모든 사도
8절: 바울
3-5절: 복음이라는 것이 4개의 절로 구성되었다. 이것을 요약하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인데 이것이 복음이다. 그런데 이것을 원시 초대교회가 이 주장을 시작함. 그때 쓰인 칭호가 그리스도이다. 도대체 그 당시는 메시야는_______에 있지 않는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하며 이것이 복음이 되느냐 어떻게 이런 발전이 있느냐? 이때 죽음과 부활과 연결된 칭호가 그리스도라는 칭호다.
(롬1:1-5)
1절:하나님의 복음:하나님이 복음의 저자
2절:약속이(구원의 계획이) 성취:구원사적으로 성취,구원 계획이 성취
3절: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복음을 요약.이것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1:16) 복음을 다시 정의:구원의 능력:로마서 전체의 요약:바울은 즐겨 이 칭호를 사용한다.
3절: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의:육신으로는(인간성을 말하는 것이냐?) 다윗의 아들:나단의 예언이 숨어 있음:복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되는데 이것이 아주 오래된 예언의 신앙을 인용. 이 용어는 이 방인에게 별 필요가 없으므로 바울 서신에는 잘 나타나지 않음.
4절:하나님이 아들에 관한 정의:성결의 영으로는(영적으로는 이냐?)
부활로 말미암아(원인) |
부활때부터(시간) |
바울은 보통 성령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셈족의 언어(아람어를 문자 그대로 번역한 것임.)
주권을 행사하는 주가 됨.
3-4절:
3: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케리그마의 형식과 바울은 즐겨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을 요약했다. 예를 들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어서 이렇게 강조를 했느냐? 롬1장에서 중요한 문제로 등장하는 것은 바울이 16절에서 다시 한번 복음을 정의하는데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의 능력'-구원론적 정의
16절은 '롬'전체의 요약이라고 볼 수 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한마디로 복음을 요약하는 곳을 여러군데서 볼 수 있다)
3: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정의:육신으로는( ) 다윗의 아들로
육신있는 예수의 인간성을 말하자면 다윗의 아들로 나타나고 4절의 신성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다. 아니면 관점의 차이에서 육신으로 보면 영적인 관점으로 진짜로 예수를 영적으로 잘 이해하고 있으면 하는 말인데 복잡한 말이다. 아니면 이 세상에서( ) 우리가 말하는 세상이 아니고 영원히 높임받은 그리스도,영원한 세상에 관심을 갖고 하는 말-번역이 어려운 말이다.
4:영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로 말미암아:원인으로 번역
+-부활한 때부터:시간으로 번역
성결의 영으로는 능력으로가 인정되었다는 동사에 붙는 부사구로 되었는데 (개역성경에는) 능력으로가 하나님이 아들에 붙는 형용사로, 능력을 주권적으로 행사하는 아들로 등극했다. 만유의 주가 되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되어 있다.
여기에는 나단의 예언이 숨어 있다. 재미있는 것은 복음이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되는데 이것이 아주 오래된 셈족 언어를 사용하는 바울전의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을 만들었고 바울이 인용한다는 흔적이 많이 나타난다.
성결의 영:바울은 보통 성결의 영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이라고 하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는 라는 셈족적인 언어형식으로 원래 아람어적인 신앙고백을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또 다윗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이방인들에게 별 의미가 없으나 바울 서신에서는 잘 나타나지 않는데 여기서는 다윗의 아들이라고 말하는데 나단의 예언을 중시한 아주 원시 예루살렘 셈족 언어를 쓰는 이 사람들의 성서를 위주로(?) 그때 벌써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우리가 아는 복음이라는 것이 선포되었다.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이라고 선포되었다.
(빌 2:6-11):그리스도에 대한 찬송시
대부분의 학자들은 찬송시가 바울전에 찬송시를 바울이 인용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바울이 지었다고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자들의 견해를 따르면 찬송시의 11절을 보면
11: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며--
바울 전에 주라는 칭호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고 이것이 복음이 선포형식에 사용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의 죽음과 부활 후에 이러한 칭호들이 주께 붙여져서 예수께 선언되었는데 이것을 살펴볼 것이다.
예수의 전 경력은 메시야적 사건이다. 구원의 사건이다. 종말의 사건이다. 예수의 삶과 죽음,가르침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사건으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 우리를 위해 담당하신 분이라. 이런 인식들이 일어났다. 이 인실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형식이 십자가=그리스도=하나님의아들=주=지혜=어린 양이라는 케리그마의 형식으로 표현. 이런 칭호들은 십자가가 하나님의 종말에 사건을 이루시는 분이라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들이다.
신약신학2에서는 대표적인 기독론적 칭호들을 살펴봄으로서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안에 예수를 통해 일어난 종말의 하나님의 구원의 사건을 어떻게 이해하고 선포했는가를 살펴보고자함.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신앙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게 되는데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은 신약성경에 담겨져 있는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 초대교회의 복음 선포에 기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이러한 기독론적인 신앙고백은 궁극적으로 우리로 하여금 신학의 모든 다른영역 즉 신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낳게 된다.
가령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통해서 보겠지만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 계시가 발생했다는 인식을 예수를 통해서 스스로를 완전히 계시하시고 자기 종말의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냐? 그런 점에 대한 새로운 신인식을 가져왔던 것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서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인식하고 신앙고백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구약성경과 비교해보면 다른 신인식인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가?
이런 것을 보게 되는게 신론뿐만 아니고 구원론,교회론,종말론 등의 큰 신학의 주제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에 구원과 계시를 이루신 분이라는 기독론적인 인식이 이런 모든 신학적인 주제에 있어서 새로운 인식과 새로운 신앙고백을 낳게 했다.
이런 칭호들을 통해서 예수 안에서 일어난 하나님의 종말의 계시와 구원의 사건들에 대한 초대 교회들의 이해를 살펴보면서 이러한 기독론적인 인식이 결국 신학의 큰 주제들에 어떠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오게 되었는가를 알게 된다.
1. "예수=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
( )
는 헬라어의 라는 동사에서 부터 왔는데 '기름 부은다'는 뜻. 헬라어로는 아무 의미 없는 말이다.
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뜻인데 헬라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것은 히브리어 의 직역이기 때문에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서 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는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살펴보고자 한다. 논지의 하나를 제출하면
신약성경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은 통일된 것이 아니고 다양하고 심지어 모순되기까지 한 상태에 있었다.(예,요1:19):예루살렘에서 파견된 사람들이 요한에게 질문
"네가 누구냐?"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엘리아냐? 그 선지자냐?
광야에서 부르짖는 소리이다.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해서 표현.
그 다음에 요한이 예수에 대해서 증거 하는 것이 나온다. '성령으로 세례를 줄 분''하나님의 아들'
그 다음날, 하나님의 어린양으로 증거하고 요한의 제자가 예수에게 넘어오는데 안드레게 예수에 대해서 베드로에게 말하는데 메시야를 발견했다. 빌립이 나다나엘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예언한 분을 발견했다. 나다나엘이 고백.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함. 반면 예수는 자신을 '그 사람이 아들'이라고 함.
요1:19-51은 증언들의 3section이라 하는데 '요'본문에서 보여준 예수의 계시를 보고 믿게된 사람들이 신앙고백한 것을 미리 모아 놓은 서문적인 section이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는 '요' 본문이 '요'서문에 나오는 제자들의 그리고 요한의 신앙고백을 통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요한의 자기 계시를 보고서 예수에 대한 신앙고백을 하라고 주문하는 것이 서문의 기능이다.
여기서 관심을 갖는 것이 보는 바와 같이 다양한 칭호들이 종말의 구원자라는 다양 창호와 사상들로 표현되었다. 여기서 예수 당시 다양했던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이 반영된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야를 유대인들은 종말에 엘리야가 다시 돌아로 것으로 보았다 엘리야가 돌아와서 무슨 일을 하느냐에 대한 의견이 분분. 엘리야가 메시야의 준비자로 오느냐 스스로 구원을 행하는 자로 오느냐 하여간 종말에 엘리야가 돌아오리라 믿는 사람들이 많았음.
공관복음에서는 예수가 이 사상을 받아 세례요한이 엘리야라고 한다. 그 선지자는 신18:15절에 근거해서 나왔을 것이다. -확실하지는 않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약속. 이 약속에 근거해서 종말에 제2의 모세가-종말의 선지자가 나타나서 제2의 출애굽을 이룰 것이다. 온 이스라엘 백성을 이방인의 굴레에서 해방시키고 모세가 광야에서 기적을 베풀었던 모든 기적들을 다 베풀고 모세가 받았던 하나님의 율법에 상응하는 새로운 종말의 하나님의 계시를 보여줘서 이스라엘 사람들로 의롭게 할 것이다.
그래서 제2의 출애굽을 할 제2의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기다렸다. 그러면 그 선지자는 메시야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그가 메시야냐 하는 것이 유대문서에 불분명하다. 하나님의 아들, 이스라에의 왕은 메시야의 칭호와 연결이 되는데 나단의예언 중에 나오는 메시야 사상이 복잡하고 다양하게 전개된 유대 메시야 사상 중에서 주류를 이룬다. 하나님의 어린양이 나오는 '요'은 어떤 배경을 가지느냐? 이사어 53장의 배경이 유력. 또는 '계'의 묵시문학적 배경을 갖고 있다.
akkdeak Issac이라고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묶은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랍비들은 모든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는데 왜냐하면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하나님께 제물고로 바친 공로가 하도 커서 아브라함의 모든 후손들의 죄를 덮고도 남는다. 그래서 이삭을 Akedak Issac이라고 함.
유대학자는 '요'의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이라는 표현이 Akedak Issac의 사상을 이어받았다고 설명한다.
그런데 사 53장 배경이 가장 유력한데 또는 어떤 사람은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 나타났다고 하는데 원래 유월절 양은 제사의 의미가 없다. 출애굽 시기 유월절 양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름으로서 죽음의 사자가 이스라엘 족속의 집안은 통과하고 애굽 사람들의 집에 가서 장자를 죽이는 사건인데 유월절 양의 피는 이스라엘 죄를 속죄하는 제사의 의미가 없었다.
그런데 '요'에 있어서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 나타난다. 예수가 가령 니산 14일 정오에 십자가에 못박혀 죽는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여기서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날짜가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다르다. 공관복음에는 닛산 15일 못박힘으로 나타남.
니산 14일은 유월절 양을 성전에서 잡는 날. 유월절 양이 희생되는 날에 예수가 못박히는데 예수가 유월절 양으로서 출애굽의 구원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분이다. 출애굽의 구원사건의 전형으로 암시한 그 구원을 종말의 구원자로서 후형으로 완성한 것이다. 예수가 못박힌 사건이 기록된 공관복음도 요한복음과 뜻은 같다.
15일 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면 14일에서 15일로 넘어가는 밤이 해지면 새날인데 그 순간에 예수가 최후의 만찬을 했다. 그래서 공관복음의 날짜를 따지만 최후의 만찬이 유월절 만찬이다. 예수의 죽음이 공관복음의 연대로 따져도 유월절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죽음이 요한복음의 연대로 따져도 유월적의 의미를 후형적으로 완성한 구원의 사건이다. 이런 의미를 가진다.
그러면 왜 날짜가 다르냐?
하나의 해결책은 당시 팔레스타인이 사용하는 달력이 상이할 가능성. 쿰란 문서에서 보면 당시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파의 달력과 쿰란의 엣센파가 상이한 달력을 사용했으나 성전을 장악하고 있는 사두개의 달력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따랐다. 그래서 사두개파와 에센파가 절기 지키는 것이 조금 달랐다. 이것을 보았을 때 공관복음과 요한복음이 상이한 달력을 써서 유월절에 잔치를 지키는 것이 상이한 달력의 차이이다.
요한복음의 어린양은 사 53:7ff에서 있는데 그러나 동시에 이 양은 이사야의 고난받은 종이 양으로, 속죄의 제사의 양만이 아니고 유월절 양으로 나타났다.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신약시대쯤 와서는 구약의 다양한 제사의 의미가 서로 중복되어 각 제사가 정확한 의미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이때쯤에는 속죄의 의미를 가질 가능성이 있다. 심지어 유월절 양이 속죄양의 의미와 겹쳐질 가능성도 있다.
하여간 메시야 모세와 선지자가 예언한 분, 모세가 예언한 분은 신18:15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를 선지자가 예언한 분은 주로 엘리야나 나단의 전승을 이어받은 그 메시야를 두고 말하는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요1장 증언들이 section을 예를 들어 보여줄려고 하는 것은 유대교의 이와 같이 다양한 메시야 사상이 있었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1)신 18:15 같은데 뿌리를 둔 종말의 선지자-혹 엘리야와 동일시 될 지도 모른다. 다시 살앙온 엘리야를 기다림. 이 사상은 하나님의 선지자로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예비.
2)나단의 예언 삼하7:12-16
선지자 나단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전달하는데 다윗의 씨라고 . 다윗의 씨 하나를 하나님께서 허락하여 다윗 왕위에 앉히고-(이스라엘의 왕)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이스라엘의 진정한 왕은 하나님이며 그런데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백성 위에서 왕 노릇하는 자의 의미로 그를 나의 아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통치하는 왕이다.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야 칭호들로 메시야 사상을 문서들에 일으킨다.
이 삼하 7:12-16은 다윗 왕조를 설립시키는 하나님의 언약으로서 이것에 근거해서 시2:7/89/139편 같은 등극시에서 다윗의 자손이 다윗의 왕위에 등극할 때에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에 대해 합법적으로 하나님 대신 통치하는 왕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선언. 이 사상이 계속되다가 중요한 전기를 맞게 되는데 유대인들이 바벨론에서 팔레스타인으로 돌아와 유대 나라를 재건할 때 돌아온 유대인들이 지도자중 하나가 수룹바벨인데 다윗가의 왕자인 스룹바벨이다.
이가 성전을 짓는 일을 하는데 나단의 예언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 하나를 택하여 그를 다윗 왕위에 앉히고 하나님 아들로서 선언하고 그로 하여금 성전을 짓게 하겠다고 한 나단의 예언이 역사속에서 실현되어 다윗 왕조가 재건될 줄 알았다.
수룹바벨을 중심으로 한 또 한번의 나단의 성취-다윗 왕조가 재건된 것-이 방인의 압제에서 벗어나서 번영하는 나라로 세울 것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그런데 스룹바벨도 희미하게 끝났고 그 당시 지었던 성전도 형편없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압제에서 벗어나기를 커녕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통치를 받고 알렉산더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알렉산더의 후계자인 톨리미 왕조와 셀류키드에게 잔인한 통치를 받게 되었다. 여기서 다시 한번 더 실망한 유대인들은 나단의 예언을 종말에 하나님께서 성취할 것으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근거는 벌써 바벨론의 압력을 받고 있던 때부터(렘21:5) 벌써 예레미야때부터 나단의 예언이 미래에 다시 한번 성취될 것으로 기대했고(슥6:12) 스룹바벨에 의해 성취도는 줄 알았고 구약 내에서 다윗 왕조가 멸망할 것을 뻔히 알고 있는 상황에서 일단 바벨론에서 유대가 멸망해서 패역한 유다에 대한 심판이 있은 후에 다지 하나님께서 다윗에 대한 자기 약속을 지켜서 다윗 왕조를 재건하고 새롭게 할 것이라는 사상이 쭉 있었다. 그래서 이(렘23:5)에 다윗의 씨라를 말이나오는데 이것은 '렘'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암9장 미가 5:1에서도 벌서 다윗 왕조가 멸망 직전 위기속에서 다윗 왕조의 멸망을 미리본 선지자들은 바벨론에 의한 하나님의 심판 후 다윗 왕조를 재건할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그때의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다윗에 대한 약속을 이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암,미,사2장11장 렘23장 등에서 심판후에 하나님께서 약속을 다시 실현시킬 것을 보았도 이 약속을 미래에 투사했다. 이것이 스룹바벨에서 진짜 일어날 것으로 보았으나 그렇지 않았으니 유대인들은 종말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나단의 예언에서 메시야 사상이 주종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것은 신약시대에서는 어디서 볼 수 있냐면 여러 묵시문학에서 볼 수 있다. 쿨란 문서에서도 메시야가 다윗 혹은 다윗의 아들로서 지칭되어 그들을 기다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대표적으로 솔로몬의 시편이다. 주후 1세기 신약시대 쯤에 쓰여진 책인데 바리새인의 작춤인데 17,18장에 강력한 메시야 사상이 전개되는데 이 메시야 사상은 어떠하냐면 지금은 유대인들이 핍박을 받고 살지만 종말에 하나님께서 다윗의 아들을 보내서 이방민족을 멸망시키고 윗 왕조를 재건하고 이스라엘에게 영광과 번영을 가져다 줄 군사적 전쟁의 영웅 혹은 승이랒로서 정치적 왕으로서의 다윗의 아들을,메시야를 기술하고 있다.
그래서 그가 이방민족을 다 복종시켜서 이스라엘로 하여금 세계를 정복하고 다스리는 민족으로 삼기 위해 다윗 왕조를 재건하는메시야 사상이 나타난다. 그래서 다윗의 아들, 다윗의 씨, 다윗의 가지 등이 주된 메시야적 칭호로서 나오는데 최근가지 나단의 예언에 근거해서 하나님이 아들로 유대문서에 혹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흔적이 있었느냐? 없었느냐? 최근가지 종교사학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메시야적 칭호가 아니었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유대 묵시에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한 곳이 없다고 봄. 그러나 최근에 2개의 쿰란 문서, 하나는 4Q flor라는 조그마한 문서 이것은 구약의 메시야 tent 즉 나단의 예언과 시 1,110편 등을 한꺼번에 모아 주석해 놓은 것인데 여기에 나단의 예언이 정확히 예언이 되었다 .다윗의 아들=하나님이 아들이라고.
메시야가 하나님이 아들로 불린 흔적이 나타났다.
좀거 정확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4Q ps Dan Aa 그 쿰란으로 되어 있는데 1/3이 떨어져 나간 조그만 문서이다. 이 문서는 다니엘 7장과 비슷한데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온다. 그가 즉위 높으신 이의 아달.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이 나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종교사학파들은 특히 Bultmann은 헬라 그리스도인의 신앙 고백으로 본다. 왜냐하면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로 부르지 않았으므로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인정하는 유대교에서는 불가능하고 신과 인간의 근본적인 차이를 별로 인정하지 않고 신이 인간의 맏형정도로 인정하는 헬라 세계에서 가능했다고 본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전부 헬라적인 것이며 후기에 발전한 것이라는 식으로 생각했는데 이런 유명한 증거들이 우리로 하여금 그것이 아니고 유대교에서 벌써 메시야를 하나님이 아들로 불리운 흔적인 있다.
예수 당시 아주 초대 교회에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신앙고백했다는 우리 신약성경이 그만큼 신빙성이 있는 것이다.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나단의 예언에 근거를 두고 있다.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된다. 나단 예언의 전승인 시2편 89편 7편 사2장11장미5:1 암9장은 아주 유명한 전승이다. 나중에 이 전승이 랍비문서에 이어지는데 다윗왕조를 재건할 메시야를 찾는데 랍비문서에서는 메시야를 다윗 혹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다윗이 오면 그런식으로 말하는데 이때는 다윗이 메시야로 지칭된다.
가령 2세기 초 유명한 랍비 아키바는 '단' 주석에서 하나님의 보좌가 하나가 아니고 복수로 나오는가? 그것은 어좌 하나는 하나님의 보좌이고 또 하나는 다윗의 보좌이다. 곧 메시야의 의자다.
나단 예언의 전승이 강력하게 발달해서 유대교에서 주종을 이루는 메시야 사상을 유방시켰다. 그런데 단 7장 이래로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 하늘에서 오는 신적인 존재로서 소개된다.
이것이 1En37-71장. 사Esra 13장 중에서도 하늘에서 온 초월적인 존재로 세상의 심판과 이스라엘의 구원역할을 한다고 또 한 사람의 아들로서 지칭하지 않으며서 메시야가 태초부터 존재하는 분으로 하나님에게서 부터 오는 초월적인 분으로 내세우는 문서들도 있다.
그래서 19세기말 20세기 말 종교사학파들은 이것을 간단 명료하게 정리:그릇됨.
신약,중간사 시대에 메시야 사상이 두종류가 있었다.
1)나단의 예언에 근거한 다윗 왕조를 재건할 전사적,정치적 왕 메시야를 기대하는 세상적인 메시야 사상이 있고-랍비문서로 연결
2)다윗 왕조에 철저히 실망한 유대인들이 점차 묵시문학으로 종말에 하늘에서 오는 메시야를 기대하는 조류:초월적인 천상의 구원자(사람의 아들 같은 이)
이 두 사상은 서로 대비됨.
1)은 바리새인,랍비,열혈당의 메시야 사상
2)는 묵시문학적인 메시야 사상
그런데 예수가 이 정치적 메시야 사상을 배격하고 묵시문학적 초월적 메시야 사상에 연결해서 자기는 '그 사람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함.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도식화. Bousset, Mowinkel 등에 의해 주장.
벌써 메시야 사상에 대한 주류가 2가지 있지만 또 있다. 무엇이냐면 쿰란문서에도 잘 나타나지만 12족장의 유언이 있다. 그 중에는 메시야가 2이다.
하나는 왕-메시야이고 다윗의 아들로서 다윗 왕국을 재건할 왕-메시야이고 다른 하나는 대제사장 메시야이다. 두 메시야를 기다림. 제사장 메시야가 왕-메시야보다 높다.
이것만 봐도 종말에 선지를 대제상도 기다렸고 왕도 기다렸다. 구약에는 이 3사람을 대상으로 기름부음을 함. 이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일꿈으로 내세우는 것이다. 자기의 권위를 부여하고 하나님의 임무를 수행하도록 내세우는것. 그런데 구약에서의 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돌고 기름 부음을 받은 대상이 왕,선지자,제사장 등이다.
그런데 그것과 상응하는 지는 몰라도 신약시대에 유대교에 있어서 메시야 사상은 왕-메시야를 제사장-메시야 종말에 선지자도 기다리고 이런 것들이 상호 어떤 관계로 서로 어떤 관계로 천상의 메시야를 기다리는 등 복잡하게 전개가 되었다.
그러나 주종을 이루는 것이 나단의 예언이 나오는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다윗의 아들로서 왕-메시야인데 이것을 어떤 사람들은 민간 메시야 사상이라고 하는데 신학적인 깊은 사고에 의해서 도출되지 않고 일반 신앙으로 널리 퍼졌던 메시야 사상. 이방인 정복하고 이스라엘을 높이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줄 왕을 기다림.
이런 것을이 '예수=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의 배경을 이룬다.
그러면 예수의 추종자들이 그의 그리스도 사건-삶과 가르침, 십자가 죽음, 부활을 체험하고 그가 종말에 하나님의 구원을 완성한 분이라는 인식을 갖게 된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범주에서 이 분을 무엇이라고 고백해야 하는가? 그가 메시야라 해야 한다. 에수가 메시야라는 신앙고백이 발생. 그렇다면 지금 첫 신앙고백을 한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가졌던 메시야 사상의 일체를 예수에게 적용해야 할 것인가?그러면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하나님께서 예수를 옳다고 인정함으로서 자기가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며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 자녀들을 창조 모으는 분이다. 이것을 위해 자기가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함으로 진정한 새언약의 백성 곧 하나님이 자녀되게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을 하나님이 옳다고 인정하고 예수를 부활시킴으로서 인정하였으므로 예수가 메시야라고 한 그 고백을 한 유댕니들이 자기들이 지금까지 기다렸던 메시야로 인식하여서 자기들의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인식을 모두 예수에게 씌워서 바로 예수가 그런 메시야라고 고백했는가? 이것이 중요한 issue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Interpretio Christiana
기독교적인 새로운 메시야 사상을 내포한게 예수가 메시야라고 했을 때 그가 종말에 구원자라는 의미로 메시야라 한다.
메시야라는 범주와 그리스도라는 범주 자체, 용어 자체는 유대교에서 빌려왔으나 그 내용은-예수가 무슨 일을 했고 에수의 메시야적인 과업이 무엇이었으며 그가 무슨 일을 했기에 메시야냐 하는 것은 유대교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예수의 메시야성은 유대교의 메시야에 대한 기대가 정의하는 것이 아니고 그 내용을 채우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었으며 예수가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서 그 내용이 채워졌다.
예수가 종말에 구원한다는 의미에서 메시야인데 그러면 예수가 종말에 구원하는 내용은 유대교의 소망에 의해서 채워진 것이 아니라 예수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서 채워졌다.
이것을 두고 Interpretio Christiana라고 한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복음서들에 기록된 행적과 가르침 그리고 행전과 서신들에 요약된 초대교회의 예수에 대한 예수의 메시야성에 대한 선포가 지금 요약한 다양한 구약과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다. 바로 이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신약에 그려진 예수의 모습과 다름에 착안한 종교사학파-W.Wrede는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약성경에 표현된 예수의 모습은 유대교에서 기다렸던 메시야와는 너무 다르므로 가령 예수가 다윗 왕국 재건했는가? 이방인들 정복했는가? 다윗왕이 되어서 군사적, 정치적 왕이 되었는가? 또 유대 묵시문학이 천상에서 오는 메시야가 온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 인간들을 찬란한 존재로 탄바꿈하고 이세상에.... 아니다.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신약성경의 예수의 상과는 너무나 다름.
Wrede:그래서 종교사학파들은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모순이 발생. 이 모순은 처음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한 것이 마가다. 마가는 '복음'이라는 새로운 문체를 개발함으로써 이 역사상의 실제 곧 예수가 유대인이 기다리는 메시야가 아니었다고 주장. 그러나 교회는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했다. 역사적 예수의 실제와 초대교회의 신앙과의 괴리를 극복할려고 마가가 처음으로 '복음'이라는 문체를 개발했는데 마가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여 이 괴리를 해결하려고 했나? '메시야적 비밀' 이라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함. 마가의 의하면 예수가 실제는 메시야 였다. 그런데 왜 예수의 메시야됨이 알려지지 않았는가? 예수 자신의 메시야됨을 인간보다 더 큰 통찰력을 가진 초월적 존재로서 성령,메시야적 구원의 체험한 사람들 예수의 제자들은 예수의 메시야됨을 알았는데 예수가 비밀을 지키라고 해서 널리 퍼지지 않았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후 이 비밀의 비밀이 벗겨져서 교회가 이제 예수가 메시야였다고 고백할 수있었다. --이러한 소설을 썼다고 주장. 이것이 마가의 소설이다. 왜냐하면 소설을 쓴 이유는 역사적 예수의 실제와 초대교회의 신앙과의 괴리르 극복하려고 쓴 소설. 소설의 핵심은 '메시야 비밀'
이런 식으로 신학을 전개했는데 이것이 Bultmann에게 완전히 받아들여지고 강조되어서 역사적 예수를 부인하는 그런 신학을 전개한다.
W.Wrede가 터득하지 못한 진리는 신약의 케리그마에 있어서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할 때 예수가 메시야이므로 예수의 메시야됨이 내용을 유대교에서의 메시야 사상을 다 이룬 분이라고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전가해서 예수의 메세야 됨을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으로 정의 한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예수의 메시야 됨이 정의되는 Interpreito Christiana의 논리를 터득하지 못한 것이 문제.
신약신학 1에서 열심히 가르침을 살펴 볼 것은 예수의 자기 주장과 자기 계시를 통해서 예수가 자기 이해를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행사하여서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 나라를 선포해서 하나님 백성을 창조하고 모으는 일 그것의 완성으로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새로운 하나님의 자녀를 창조하고 모으는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기 이해가 있었다. 이것이 예수의 자기 이해이다. 예수는 어떤 분이었는가? 그러면 그가 한 일은 무엇인가? 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원의 효력을 보였고 죄인들을 용서해서 하나님의 자녀되었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 그들과 먹고 마시고 그들로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게 하고 그들을 위해서 궁극적으로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했다.
그래서 예수가 어떤 분이며 어떠한 일을 했는가에 따라서 대속과 새언약을 세우는 제사를 통해서 죄가 용서되고 하나님과 화해되고 새로운 하나님의 백성으로 탄생되었다. 이것이 예수가 한 일이다.
자기가 그것을 하는 분이라고 주장했고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그것을 했다고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부활시킴으로 이 예수의 자기 이해와 자기의 과업이 옳따고 하나님이 선언하신 것. 하나님이 부활시키신 것. 그렇다면 예수의 메시야 됨이 무엇으로 결정되는가?
그가 어떤 분이며 그가 무엇을 했는가에 의해 결정되지 유대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사상에 의해 예수가 메시야 됨이 결정되는 것이 아님. 예수의 모습이 유대교의 메시야 모습과 다르지만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를 메시야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메시야라고 고백할 때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이 무엇이었느냐? 그것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고 그것보다 더 풍부하다.
유대교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것이다.
그러므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예수의 메시야 사상의 내용은 유대교의 소망에 의해 채워질 것이 아니라 초대교인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직접 관련시키지 않았고 단지 메시야라를 용어를 차용하여 메시야가 대속과 새언약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고 자녀가 되게 해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케할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으로 예수의 메시야됨을 정의하였다.
이와 같은 Interpretio Christiana. 예수의 메시야됨의 내용-예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부활의 의해서 예수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했는가에 결정이 되지 유대교에서 메시야를 어떤 분이라고 해서 결정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의 삶과 죽음 부활에 의해서 그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 판명이 났고 예수의 메시야성이 정의된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성경을 되돌아 보았을 때 예수의 삶과 가르침, 십자가, 부활 곧 예수가 어떤 분이고 어떤 일을 했는가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놀랍게 성취한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교의 메시야적 사상들은 구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왜곡한 것들이다.
그래서 정확히 말하면 예수가 메시야라는 신약성경의 신앙고백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 성취다. 그러나 유대교는 구약에서 나왔지만 신약의 예수는 메시야라는 신앙고백과 일부 연속성이 있지만 그러나 불연속성이 있다. 이 불연속성은 유대교가 구약의 예언을 잘못 이해한데서 왜곡한데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 사상을 진저으로 성취한 분이다. 유대교의 왜곡을 넘어서 유대주의의 제한된 민족주의의 왜곡을 넘어서 구약성경의 진정한 정신을 선취한다.
유대인들의 종말에 구원자에 대한 기대는 분명 구약성경에서 나옴.
예수가 바로 그 소망을 성취한 분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황당하게 전사적,정치적 메시야로 와서 이방민족들을 다 전멸하고 유대인들이 온 세상을 지배하는 왕국을 건설하려고 함. 도리어 예수가 건설한 하나님 나라는 모든이방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예수의 주권에 믿음의 순종을 하게 한 메시야 그대로 였다.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구약성경에 있는 이른바 이바인들의 시온에 대한 순례사상-하나님의 영광이 시온에 나타나면 메시야가 온통 이방민족들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세상에 퍼져서 온 세상의 이방인들이 자기 신들을 버리고 보화를 가지고 시온에 와서 순례를 하고 여호와를 섬긴다. 이것이 유명한 이방인들의 시온에의 종말론적인 순례라는 사상이다. 아주 민족주의적이고 선교가 없다. 이방인들이 종말에 보화를 가지고 이스라엘에 와서 하나님을 섬기고 자기들을 섬김.
예수가 이 유대인들의 기대를 성취하지 않았음.-문자 그대로 성취하지 않음.
그러나 진정한 의미로 바로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했음. 어떻게? 예수의 메시야적인 행위로(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와 그의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주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아서 예수가 주라는 복음이 온 세계에 퍼져서-온세계가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와 이스라엘을 섬기는 문자적 성취는 아니지만 그러나 온 세상 만민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예수를 주로 고백한다. 그에게 무릎을 꿇는 일이 벌어졌다.
진정한 의미로 구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해석했던 그런 의미는 아니다. 이런 예는 엄청나게 들 수 있다. 에수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나단의 예언이 그대로 성취되고 그가 메시야가 主고 하나님이 아들로 고백이 되고 나단의 예언한 것을 그대로 성취.
그러나 유대인들이 해석했던 것과는 다르다. 이들은 정치적, 군사적 왕이 되어서 유대인들의 번영과 군림을 가져다주는 다윗왕국의 건설을 기대했는데 예수는 그것을 넘어서는 진짜로 예언을 성취함.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왕되심을 선언하고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온 세상을 의와 사랑으로 통치하여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오는 대속의 제사로 하나님과 인간을 화해시키고 인간들을 화해시키는 샬롬을 이루는 하나님 나라를 이루는 분으로 나단의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함. 그러나 주의할 것은 유대인들이 유대교에서 기다하였던 것은 성취하지 않았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라는 고백은 진정하며 더 기쁘며 구약의 예언들을 성취하였으나 유대교가 해석한대로 성취하지 않았다. 쉽게 말하면 예수에 의해 완전히 새롭게 해석된 구약의 예언이 이루어짐.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구약을 보는 것이 유대인들과 완전히 달라짐.
전승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중간사 시대에 구약의 유대교가 구약에 뿌리를 둔 AD 1세기 경에 문제점으로 커져 유대교와 기독교의 구약의 해석방법이 다르고 시간이 갈수록 그 차가 커져서 완전히 다른 종교가 되어버림. 이 근본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예수의 자기 이해와 자기 주장은 구약에서 나왔지만 그 구약의 해석은 당시 유대교와 다름. 그러므로 예수의 자기 이해가 당시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에 비추어 예수가 메시야 모습과 달랐으므로 예수가 메시야가 아니었다는 주장은 피상적인 결론을 내리는데 이것은 Interpretio Christiana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한데서 나오다.
'성탄절날 설교에서' 예수가 유대인들이 바라던 종말의 모든 기대를 완성해 주신 메시야로 오셨다. 그러나 다 완성하지는 못했다고 설교할 경우 역사적 사실에도 대치되지만 예수를 상당히 끌어내리는 행위이다. 유대교의 수준으로 예수를 내려버림. 예수의 메시야됨은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과 다르고 유대교보다 훨씬 높은메시야사상이다. 예수가 구약의 진정한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한 메시야로서 유개됴가 구약을 왜곡시켜 발달시킨 메시야 사상보다는 훨씬 높다.
Interpretio Christiana의 성경적 근거
고후 5:16
바울이 지금까지 그리스도를 육적으로 알았다. (Bultmann은 이 문장을 자기 신학의 대원칙으로 삼음. 육시적인 그리스도를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해석하여 육신적인 그리스도가 역사적 예수로 보고 바울이 역사적 예수를 거부하지 않으냐고 주장. 영적 그리스도, 믿음 그리스도, 케리그마의 그리스도가 중요하지 역사적 그리스도는 더 이상 알필요가 없다고 말함. 그러나 사실은 는 안다는 말을 수식하는 부사구다.)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육신적으로 알았다.
육적인 가치판단으로 그리스도를 알았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를 육신으로 안다는 말은 무엇인가? 이것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이 되는 사건을 말함. 이제는 그때까지는 바울이 자기의 메시야에 대한 사상을 육신적인 것으로 말한다. 다시 말하면 다메섹도상 사건 이전까지 가지고 있었던 유대교적인 메시야 사상을 육신적인 메시야 사상이라고 한다. 곧 자기가 그런 메시야 사사을 가지고 있으면서 예수에게 비추어 보았을 때 예수가 메시야가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것이다. 그리고 예수를 신 21:23에 근거하여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고 예수가 저주를 받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다메섹 사건을 통하여 그는 자신의 그릇된 메시야 사상을 깨닫고 새롭게 정리할 필요를 느꼈다. 예수를 통해서 안 메시야 사상을 통해서 예수를 그려야 하고 유대인의 메시야 사상은 잘못.
신약신학 제 15강
지난 시간에는 사도들이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고 고백함에 있어서 Interpretio Christiana라는 것을 설명했다. 그래서 예수의 삶과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다라는 것을 깨달은 초대교인들은 무조건 유대교의 다양하고 복잡한 그리고 황당무게하기까지한 메시야 사상을 무조건 예수에게 다 전가시킨 것이 아니라 오히여 예수가 메시야라 했을 때 예수의 메시야 됨이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나타난 예수의 자기 이해와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에 의해서 결정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예수가 그리스도라 했을 때 다시 되풀이 하는데 유대교의 메시야 사상을 무조건 예수에게 전가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가 어떤 분이고 무슨 일을 했는가가 그의 메시야 됨의 내용을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 간단히 말하면 예수가 메시야라 할 때 예수가 하나님의 종말의 구원을 담당할 분인데 그 종말의 구원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고 대속의 죽음과 새 언약 세운 죽음이어서 우리를 하나님께 화해시키고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 하나님의 자녀들로 만들어 준다. 그것이 예수의 메시야됨의 행위이고 예수가 메시야라 고백할 때 바로 예수가 그런 일을 하신 분이라. 그 말이다. 유대교이 황당무게한 메시야 사상을 예수에게 적용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메시아라고 유대교의 정치적 메시야 사상에 대항해서 예수를 메시아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메시야라고 고백한 것은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예수가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서 정의된 그 메시야를 선포한 그리스도인들이 메시야 사상을 자세히 살펴보면 도리어 예수가 메시야라는 선포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더 심오하게 더 정확히 성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은 그림으로 말하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에서 신약성경에 있어서 예수가 메시야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 나온다. 예수의 하신 일과 예수가 어떤 분이다라는데서 나오는데 여기서 자세히 살펴보면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징정으로 성취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런데 유대교는 같은 구약성경의 뿌리에서 예수와 신약성경의 사상과 달라서 갈라진다. 그래서 시기적으로 말하면 구약과 중간사시대의 유대교와 한동안 같은배경으로 자라서 이것이 주전/주후 를 나누는데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의해 결정되는데 이것을 뒤돌아 볼 때는 이 신약성경에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상이 구약성경의 예언을 진정으로 성취한 분이다.
유대교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을 문자적으로 성취되어질 것으로 보고 있으나 다윗 왕조가 재건될 것으로 보고 제 2의 출애굽이 문자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열혈당들이 독립운동을 했으나 예수에 있어서 구약의 예언들이 영화되었다고 말할 수 있어서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다윗왕조의 재건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정립된 하나님의 백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약의 나단의 예언을 진짜성취해서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의 백성을 이루신 분이다 그러나 문자적으로 다윗 왕조를 재건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백성을 만든 것이며 또 신명기 18:15도 마찬가지다. 모세와 같은 선지자로서 제2의 출애굽을 한다고 하는데 유대교는 문자적으로 정치적 군사적 해방을 이룰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러한 구원을 기다리는데 예수에게 있어서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제2의 출애굽이 일어났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에 대한 모형에서 가장 흔한 모형이 출애굽 모형이다. 그래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진정한 구속,해방이 일어났다. 구속이라는 말은 해방인데 로마제국, 애굽과 같은 정치,군사적 속박의 힘에서 벗어나는 구속이 아니고 인간을 속박하는 더욱 근본적인 죄와 세상, 죽음 즉 사단의 악과 고난으로부터의 해방을 예수의 십자가죽음과 부활이 이루었다. 그래서 이것을 제2의 출애굽이라 보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아주 흔한 모형이 예수를 통해 이룬 구원을 네2의 출애굽이다. 이 신 18;15이 예수를 통해서 진정 성취가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문자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니까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가 메시야, 그리스도 라는 신앙고백을 예수의 삶과 가르침,십자가의 죽음,부활을 통해서 얻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가 어떤 분이었고 무슨 일을 했는가에 따라 그의 메시야됨을 정리하고 보니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진정으로 성취한 분이다.
사11장 시2:7 시111편 등도 다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도들이 에수가 그리스도라고 선포하면서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예언들을 증거로 사용한 것이다. 유대인들과 논재에서 구약성경의 메시야적인 text 등을 예수가 메시야됨을 증거하는 에수가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성취하는 분으로 나타나서 그래서 testimonia라 해서 초대교회 등의 많은 학자들이 R.Hans C.H.Dodd 등은 최최의 신약 성경의 사도들이 예수가 그의 삶, 가르침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성취했다고 보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예언들을 전부 모아서 그것으로 유대인들과 논쟁을 벌였다. 그래서 예수가 메시야임을 증거하여 설득하게 되었다. 그렇게 모아진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text를 Testimonia라고 한다. 그래거 신약성경에서 구약을 인용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인들이 예수가 성취했다고 하는 구약성경의 메시야적 해석이다. 이것을 Testiminia라고 한다.
이렇게 예수이 메시야됨과 구약성경이 이렇게 연결되었다.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말은 종말에 구원을 이루신 이, 그래서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모든 그리스도론적 칭호중 가장 기본되는 칭호이다. 그리스도와 다른 칭호-주,주의종,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형상,선한 목자,세상의 빛,영생의 떡,마지막 아담,하나님의 지혜, 등-들과 어떻게 연관이 되었느냐 함녀 그리스도가 기본칭호이고 예수이 종말의 구원자 됨-하나님의 종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담당하실이라는 기본적 칭호이고 다른 칭호들은 예수의 그리스도욈의 다양한 면들을 틀별히 부각시키는 칭호들이다. 그리스도가 기본 칭호인것은 구약성경의 예언을 담당하신 이라는 뜻으로 기본칭호이고 이 칭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하나님의 구원사적인 칭호로서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구원사적인 계속성을 잘 밝혀주는 칭호다. 곧 약속(구약성경)과 성취(신약성경)라는 관계르잘 나타내주는 칭호로서 구원사적 칭호이고 기본칭호이다.
다른 칭호들은 이 칭호의 다양한 의미들, 면들을 부각시키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칭호들이 쓰임새가 조금씩 다른 것은 분명하다.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가장 흔히 쓰이는 context는 소의 믿음의 형식이라는 formula이다. 이것은 믿는다는 동사 +- -+ +
+- -+
고전15:3-5을 잘 생각해보면 잘 알 수 있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을 믿는다. 절 이하가 복음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죽고 부활했다. 이것이 우리를 위한 사건이다. 우리 죄문제를 해결한 사건이고 복음이다. 복음은 선포된다. 복음이 선포된다 와 그리스도라는 칭호가 많이 사용.
선포된 복음-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인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이 전체를 formula라 한다. 이것의 약자가 (to believe in Christ)
원래 헬라어의 은 타동시켜서 전치사가 필요없고 목적어를 동반하는데 신약성경에서는 전치사가 들어 있어서 영어로 그대로 번역하여 to believe in Christ로 번역함.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한동안 이것을 특별히 신약의 헬라어인가 생각을 해보고 이상히 생각했는데 요사이는 believe in Christ 라는 말이 절에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말의 약자로 대개 생각한다. 그리스도를 믿는다하면 그리스도를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다는 말이다. 본바와 같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다. 이것을 믿으면 주관적 구원의 사건이 되어서-우리의 구원이 발생하게 되어서-효력을 발생하게 한다. 이것이 믿음이 하는 일이다.
이 선포된 말씀, 복음을 믿으면 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이 우리에게 개인적으로 효력을 발생하게 되어 우리의 구원의 사건이 되고 우리가 구원을 얻게 된다.
믿음이 선포된 메세지를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믿음이라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 사건을 주관적인 구원-왜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게 하느냐? '그 사람의아들'인자,pp 297-311.
믿음의 근본의미가 선포된 말씀을 받아들이는 것인데 왜 믿음이 2000년전의 사건과 2000후의 오늘 나와의 연결이 되어 오늘 나에게 효력을 발생하느냐를 이해하려면 (for)는 "대신,대표,위한"의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대신'이라는 이미와 '대표'라는 의미와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을 가져오는 우리를 '위한'사건이다.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두 개념을 합치면 내포적 대신(Inclusive Substitution) 우리를 내포하면서 대신했다. 그가 우리를 가의 몸속에 내포하면서 대신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할 사건이 구약성경의 corporate personality(=stammvater) 개념인데 Stammvater(약어로 S.V)라 하는데 한 민족의 조상은 그의 자손들을-마치 줄기가 가지들을 내포하고 대표하듯이-내포하고 대표한다고 본다. 그래서 이 조상이 개인이면서 동시에 집단적인 인격체로 이해된다. 그래서 영어로 corporate personality.
가령 구약성경에서 가장 두드러진 야곱에서 이스라엘 이란 칭호를 주는데 야곱이란 한 개인이 이스라엘 민족 전체를 대표. 유다도 한 개인이면서도 민족을 내포적 대표로서 그의 후손들을 그에게 내포한 것으로 본다. 야곱 이스라엘의 하나님에 대한 관계가 그의 후손들 이스라엘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기 때문에 야곱 이스라엘 유다가 한 개인으로만 인식되는 것이 아니고 그 후손들 전체은의 운명을 좌우하는 존재로서 그 민존 전체가 그 안에 내포되었다는 으미에서 야곱이스라엘, 유다 등이 Stammvater가 된다.
이런 이간론을 이해해야 한다. 현대인들의 인간론은 극단적인 개인주의로 각 개인의 실존을 한 존재의 단위로 보는데 고대 사상은 그렇지 않다. 구약만 그런 것이 아니고 어디나 집단이 그리고 한 민족이 존재의 단위였다.
Substitution 이란 말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를 위해 죽을 수 있느냐? 그러나 인간의 모든 관계가 복잡한 substitution으로 되어 있다. -한 사람이 잘 하면 민존 전체가 잘 살게 되어 있다.
야곱 이스라엘, 그 조상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올바른 관계 언약의 관계로 있다면 그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수 있고 야곱 이스라일이 범죄하면 반대의 현상이 일어난다.
이런 의미에서 조상이 한 개인이지만 한 개인으로서 그 민족의 운명이 전부 결정된다는 의미에서 그 민족이 조상 속에 내포된다고 본다. 그래서 그 조상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 민족 전체의 하나님 과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해야 한다. 곧 예수가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는 것은 그가 우리 대신 대표라는 것은 그가 우리의 S.V라고 믿는 것이다.
이 인정과 더불어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하면 우리의 '내포적 대신'이므로 우리가 그의 속에 내포된다. 이것을 성경에서 '연합'이라고 말함.
그러나 S.V의 개념이 야곱 이스라엘 , 족 조상 안에 그의 후손이 내포되는 것을 보아 그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의 후소 전체의 운명을 좌우한다.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 내포된다는 것은 그를 우리의 S.V로 인정하는 것인데 곧 그와 연합한 것이다. 그러면 예수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리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되고 그가 한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되고 그의 하나님 에 대한 철저한 의지와 순종이 우리의 것이 되고 그의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우리의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가 되고 그의 조로 인해 벌받음이 우리의 벌받음이 되고 그의 죄를 위해 죽음이 우리의 죽음이 되고 그이 새로운 생명으로의 부활이 우리의 부활이 된다.
그래서 믿음을 내포적 대신인 도 우리의 S.V인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의 됨됨이(what he was:그가 어떤 분인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하나님이 아들)가 우리의 됨됨이 되고 그의 하신 일이 우리가 한 일이 된다. 그래서 믿음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키고 그리스도와 연합시켜서 그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사건을 일으킨다. 고후 5:14-17에서 14절에 예수가 모든 사람을 대표해서 죽었으므로 우리가 그의 안에 내포되어 우리가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죄에 대해서 죽고 의에 대해서 의로운 사람으로 새로 부활한 사람 즉 새로운 피조물이다. 이 새로운 피조물은 그리스도와 연합해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난다. 이 관계를 바울이 나타내기 위해서 아주 많이 사용되는 것이 , 이다.
이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즉 가가 우리의 내포적 대신이라는 것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안에 내포되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게 된다. 곧 그리스도와 연합되고 있다. 그래서 두 구절은 항상 함께 다닌다.
바울 신학에 있어서 가장 많이 토론되는 단어가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이 무슨 의미를 갖느냐? 많은 사람들이 헬라 신비주의에서 나온 공식이 아니냐고 추측했지만 요사이는 많이 밝혀져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죄를 위해 죽고 부활했다는 내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가 우리의 S.V가 되고 우리가 그 안에 내포된 생태로 그와 연합한 상태에서 그의 하신 일이 우리의 한 일이 되고 그분의 됨됨이가 우리의 됨됨이가 되는 것을 나태나는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이다.
나중에 보겠지만 '주안'이란 말은 '그리스도 안'과는 전혀 다르다.
그래서 믿음이 2000년전에 일어난 사건이 오늘 나를 그리스도 안에 내포시켜서 그리스도의 됨됨과 그의 하신 일이 나의 것이 되게 한다. 십자가에서 죄값을 받고 새로운 삶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객관적 구원의 사건이 나에게 구원을 준다. 믿음이 우리를 예수 안에 내포시킨다.
이 믿음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 '세례'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침례하는 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장사됨을 극화한 것이다. 세례때 이 믿음을 고백하고 고백된 믿음을 극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이다. 그래서 침례가 그리스도와 함께 연합해서 죽고 장사되었음을 상징화했고 물로 깨끗이 씻긴 몸으로 나온 상태를 그리스도 안에서 내포되어 그리스도와 함게 새로운 생으로 즉 하나님과의 의로운 관계를 갖는 생으로 부활했음을 극으로 표시한 것이다. 롬 6장에 잘 나타남.
이 극적인 효과를 느끼면서 그리고 초대교인들의 예를 따라 침례하는 것이 상당히 의미가 있다. 세례라는 자체가 물이 마술적인 힘이 있어 거듭나게 하는 것이 아니고 세례 자체에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고 믿음에 의미가 있다. 이 믿음을 극으로 표현한 것이 세례다. 그림으로 '세례'는 '믿는자가 되어가는 과정의 종결'이라 말한다. 세례를 받음으로 밀마암아 입으로 고백한 신앙이 문서적으로 인제 내가 믿는 자가 되었다는 증거이다.-믿음의 객관화:믿음을 객관적인 사건화 한 것이다.
질문:세례에 있어서 씻음에 강조점을 두어 약식 세례를 주는데...
답:씻음에 의미가 있다. 그것은 너무 소극적이다. 씻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인데 죄인이 죽었다는 것이 훨신 더 적극적인 의미이다.
질문:신약에 있어서는 죽음의 이미가 장조되었다고 보아야 하는가?
답:다 있다. 씻음의 의미도, 죽음의 의미도 있는데 죽음의 의미가 더 강하다. 더 적극적인 의미로 롬6장에 언급. 씻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개념이다. 완전히 주고 새피조물로 되었다는 것이 적극적인 개념이다.
질문:구약적인 연결에 있어서는..
답:씻는다는 개념도 있다. 바울도 씻으라고 말함. 그리사도 안에서 씻긴 문제다. 그러니까 죄가 씻겼다는 것을 말함. 그러니까 이런 것들이 다 그림언어이다. 어느 하나만 맞는 것이 아니고 죄가 씻겼다고 볼 수 있고 죄인이 죽고 의인으로 거듭났다고도 할 수있고 위로부터 났다-요한복음적인 그림인데 이것도 상당히 소극적인 그림이다. 완전히 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비유적인 그임이지 이것이 훨씬 적극적인 그림이지 -다 똑같은 Royality를 알리고자 하는게 옛사람이 죽고 완전히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했다. 이것이 가장 적극적인 그림이 새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질문:세례가 구약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답:홍해를 지나는 것은 세례라 할 것이 아니고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의 사건에서 되돌아 보았을 때 구약의 백성들이 홍해를 지난 것을 모세로 세례 받았다고 한다(고전11장)
질문:할례와 세례의 관계는?
답:할례와 관계 있는 것은 언약의 백성의 표시인데 세례 자체가 원래 할례와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세례가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내포된 자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한 자로서 새로운 사람들이 된, 의로운 사람들이 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과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덕보는 사람들이 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세례가 하나님이 백성의 공동체로 편입되게 함. 이런 의미에서 할례와 의미가 상관됨. 세례라는 것이 중간사 시애에 발달했는데 이것이 신약적인 세례의 이미가 아니고 몸을 씻는 것을 의미. 한번 씻는 것이 아니고 날마다 씻는 것을 의미. 쿰란 공동체에서는 날마다 씻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위한 세례다. 목용함으로서 죄와는 관계 없고 의인으로 살겠다는 결단을 나타내는 회개의 세례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씩 다 있다. 회개, 죄씻음. 그러나 신약의 세례는 중간사 시대의 유대인들의 세례와는 질적으로 다른 일부 연속성이 있으나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갖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부활하는 것을 나타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동체로 들어가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른 말로 예수의 몸이라 하는데 몸이 지체들로 내포적 대표들로 내포되어 한 몸을 이룬다. 이것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진입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례가 할례,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의 공동체의 일원이었던 할례와 의미가 비슷하나 조인이 죽고 새로운 의로운 자로 부활한다. 죄문제가 청산된다는 의미에서 죄를 씻다고 회개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일부 중간사 시대의 목욕과 전승사적인 의미가 있기는 하나 그것을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이 아니고 소극적인 의미이며 배경에 불과하다.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난 실제는 그의 배경들이 상상할 수 없었던 훨씬 근본이 되는 것이고 큰 것이다.
질문)중간사 시대의 세례운동에 설명해 주십시요.
답:중간사 시대에는 부흥운동이 많이 일어났다-Hasidim에서
Hasidim이 나중에 여러파로 갈림. 바리새파,엣센페(혹은 사두개패), 이들이 자기들의 부흥운동에 일부로 목욕하는-옛적인 죄를 씻어버리고 하나님의 언약에 충실해서 하나님의 율법을 준수하여 살겠다는 결단에서 나타내는 목욕운동이 일어났다. 목욕운동은 종교사적으로 보면 꼭 유대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중동에 널리 퍼진것이 목욕운동이다. 이 목욕운동이 중요한 것은 쿰란의 엣센파에서이다. 이것은 쿰란 공동체가 자신들을 제사장 공동체로 보았다. 왜냐하면 쿰란 공동체를 세운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타락한 것을 보고 그것에 반발해서 떨어져 나간 예루살렘 제사장들이 세운 공동체 이기 때문이다. 쿰란 공동체 자신들이 꼭 예루살렘 성전의 제사장들의 조식같이 꼭 조직하고 자기들의 공동체를 성전이라 보고 성전을 나무와 돌로 만든 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공동체를 성전으로 보는 이른바 성전개념의 영화 또는 모형론이 쿰란에서 발생한다. 그래서 이른바 쿰란 공동체를 예루살렘 성전 공동체의 조직으로 만들어 놓고 예루살렘 성전 제사장들이 제사들릴 때마다 아침 저녁으로 하는 목욕을 그대로 행했다. 주의할 것은 기독교에서와 같이 목욕을 한 번 하는 것이 아니고 매일 하는 것이다. 매일 같이 죄를 씻고 의로운 사람으로 하나님께 나타내는 그런 운동을 했는데 이것이 세례이다.
논란이 되는 것은 사도들이 행한 세례가 예수의 세례와 연결이 되고 예수의 세례는 또한 요한의 세례와 연결이 되고 요한의 세례는 쿰란의 세례와 연결이 되었는가에 의문이 많다. 인반적으로 요한의 가르침과 쿰란의 가르침이 비슷한 것이 많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요한이 쿰란의 한 일원이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다. 요한이 세례를 준 사막지역이 쿰란과 아주 가까운 곳이다. 직선거리로 약 12Km.
그래서 어쩌면 요한이 쿰란 공동체의 세례의식을 발전시켜서 세례운동을 했을 것으로 본다. 그러나 요한의 세례 운동은 쿰란의 세례운동과 다르다. 요한의 세례 운동은 매일 반복하는 것이 아니고 회개를 위해 오직 한번. 이런것이 전승사적으로 사도들에게 거슬러 올라갔느냐? 여기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그러나 오늘 알아야 할 것은 세례가 이와같은 배경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배경들이 말할려고 하는 것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고 큰 의미를 가진 것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통해서 탈바꿈한 것이다. 이것도 메시야 사상과 마찬가지고 Interpretio Christiana가 일어난 사건이다. 유대의 배경을 보고 무조건 신약의 세례에 무슨 세례 신학이 있었다고 전제하는 것은 아니다. 그 뒤 교회사에서 세례에 대하 많은 묵상이 되어 의미가 덧붙여져 복잡하게 발전한 것이다.
질문:바리새인들이 요한에게 무슨 권세로 세례를 주느냐고 말할 때 그리스도의 권세와 세례를 연관시켜 말하는데....
답:요 1장을 자세히 읽어보면 요한이 부흥운동을 하는데 세간에 요한이 그리스도나 엘리야, 그 선지자 종말의 사자라고 주장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표단을 파견하여 요한의 성격을 자세히 알려고 함. 요한이 자신 스스로를 무엇이라고 보고 지금 이 부흥운동을 하고 있느냐? 요한에게 특징 있는 운동이 세례라. 그래서 그의 이름이 세례요한이다. 요한이 부흥운동의 핵심이 세례운동이었다. 그러니까 세례운동을 통하여 요한이 무엇인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운동을 한다고 주장하는 것 같은데 정확히 무엇이라고 하는가를 묻는 것이다. 네가 그리스도냐? 엘이야,그 선지나냐? 아니다. 그러면 지금 하고 있는 이 세례운동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하나님으로 위임받은 권세 사명이 무엇이이냐? 그런 말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일을 네 스스로 무엇이라고 보고 하나님께 무슨 권세를 위임받은 것이냐고 질문 그래서 요한에게 있어서 세례가 가장 핵심적인 의미를 가지고 예수가 요한의 제자들 중의 하나에서 예수그 그의 운동을 요한의 운동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은의심할 수 없는 사건이다.
그래서 요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하나님 나라의 선포 뿐만 아니라 종말론, 심판 에서도 요한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을 텐데 우리가 예수의 종말, 하나님 나라에 대한 선포,심판에 대한 선포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요한과는 많이 달랐다.그래서 나중에 예수가 요한과 분리해서 독자적인 운동을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과 달라지기 시작했지만 그 관계를 규명하는 것은 어렵다.
기타:쿰란 공동체에서는 자기 스스로 몸을 씻은 것이고 요한에 오서 타인에게 베품.
여기에 관계된 책:G.Beasly Murray "신약에 있어서의 세례'
O.Cullman
J.Jerenias-K.Aland:유아세례의 정당성에 관해 논쟁. 유아 세례가 신약시대부터 시작되었으냐 아니면 교리사 나중에 발달한 것이냐 혹은 유아세례가 꼭 시행된 것이냐 아니면 세례가 시행되기도 하고 되지 않기도 했느냐에 대해 논쟁.
질문:유월절 양에서는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었는데 요한복음에 제사적 의미로 쓰였다고..
답:'요'에서는 제사의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고 점차 제사의 의미를 띠게 되었다. 유대교에서 신약시대에. 왜냐하면 제사는 여러가지인데 원래는 삶의 정황과 뉘앙스가 달랐는데 섞이는 경향이 있었다. 유월절 양은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는데 신약시대에 와서 구약의 다양한 제사들이 섞이는 바람에 유월절 양도 제사의 의미를 갖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그것을 '요'이 반영하고 있다. 왜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지고간다는 말은 지어서 없애버린다는 말인데 어린 양이라는 말에 제사의 의미가 강하다.
질문:어떻게 해서 유월절 양이 제사의 의미를 갖게 되었느냐?
답:원래 구약에는 많은 제사가 있었는데 그것이 섞였다. 유월절 양은피를 문설주에 바르면 죽음의 사자가 애굽 사람의 장자만 죽이는 의미. 그래서 유월절 양의 피가 히브리 사람들이 집을 나타내는 그래서 죽음의 사자가 pass over 지나가는 의미가 있다. 이것이 죄값을 치루거나 하나님이 진노를 푸는 제사의 의미는 하나도 없다. 그것을 성전에서 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집에서 행해지고 자기 집의 문설주에 바르는 것이 유월절 양이었다.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다. 그 말은 유월절의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53:7-12에서 주의 고난 받은 종이 하나님의 양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대속의 죽음을 한다. 또 유월절 양의 의미가 있고 또 계시록의 양이 승승장구하는 정복하는 메시야에 대한 표시라고 말함.
C.H.Dodd 같은 사람은 요1장에서의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양의 의미 보다는게의 의미에서의 양의 의미로 주장한다. 또는 아람말로 양이 '탈리야'였는데 주의 종 혹은 양이라고 번역되었다.
그러나 유월절 양이라는 말을 부인할 수 없는게 요 1장에서 예수가 십자가에 목박히는 순간을 유월절 양이 잡히는 순간으로 잡고 있다. 그것만 보아도 그리고 유월절에 예수가 예루살렘에 여러번 가는 것도 있고 유월절 신학이 '요'에 상당히 중요핟. 그래서 유월절 양이란 의미를 부인할 수 없다. 다만 이것이 의심을 받는 이유는 유월절 양이 원래 제사의 의미가 없는데 '요'에서는 세상 죄를 지고가는 제사의 의미가 있는, 죄문제를 해결하는 그것으로 나타났느냐? 그것은 신학적으로 섞여서 그렇다. 이와 같은 신학이 나올 수 있는 것은 전승사적으로 중간사 후에 제사들의 의미가 섞어서 심지어 유월절 양도 제사의 의미를 띠게 되었을 것이다.
질문:출34:25에 유월절의 희생 양이라고 했는데 유월절 양이 희생제물의 성격이 강했다고 말할 수 없겠느냐?
답:나는 모르겠다. 유월절 양이 무슨 희생제사의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성전에사 제사한 것도 아니고 제사라는 것은제사장이 한 것이다. 그런데 각자가... 예수 시대에도 유월절 전야에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기들의 양을 잡기는 성전뜰에서 잡았다. 그래서 자기 집에서 잘 구원 먹었다. 그래서 유월절 만찬을 한 것이다. 제사라는 것은제사장이 한 것이다. 유월절 양은 예수 시대에도 각자가 잡은 것이다. 물론 잡는 의식에 있어서 제사장이 축복하고 하는 의식이 있었지... 여러분들 각자 좀 더 연구해 보라 .나는 그 이상은 몰라.
Ⅰ.예수가 라는 발생과 의미
1.배경
1)헬라적 배경에 있어서 주라는 칭호의 3가지 사용법에 있어서
①일상 생활에서 지체높은 사람이거나 큰 재산이나 노에들을 소유하는 사람들에게 존경하는 의미로 부를 때 사용하는 칭호로 영어의 Sir,Master
②종교적 용법으로는 에집트나 시리아 소아시아에서 serapis,osiris,isis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비종교들에서 신들을 여신들을 라고 부르고 이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라고 불렀다.
③정치적 용법에 있어서는 지배자,통치자를 지체높은 사람들을 라고 부르기도 했는데 특별히 로마 황제를 라고 불러 황제를 신격화하여 황제숭배주의가 발생하고 거기에 따라 는 신성을 지닌 자가지 의미하게 되었다.
2)유대교적 배경을 살펴보면
Hebrew Text에서 4자음이 나왔을 때는 유대인들은 이것을 발음하기를 꺼리고 (아도나이) 라고 불렀다(나의 주). 그래서 이 관습이 LXX역까지 그대로 이전되어서 M.T에 라고 쓰여 있으면 LXX에서는 라고 번역하였다. 이것이 신약성경에도 반영이 되어서 구약성경의 가나오는 문구를 인용함에 있어서 항상 로 대치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신약시대에 diaspora 유대인들 간에는-헬라말을 쓰는 유대인 간에는-하나님을 로 지칭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아람말의 (주)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것이 존경하는 의미로 지체높은 사람에데고 쓰이고 또는 하나님에게도 적용되었다. 특히 호격으로 (나의 주) 사용. 그런데 혹은 의 절대용법이-인칭접미사 없이 주라는 절대 용법이 하나님에 대하여 쓰였느냐에 논란이 많았는데 최근에 발견된 ⅡQzqJob 24:5-7에서 절대 용법이 하나님에 대한 칭호로 사용된 것을 발견.
그래서 헬라세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유대인들 가운데도 과 가 일반적으로 높은 사람에게 쓰이는 존경의 의미를 띠는 호칭에서 시작해서 하나님께로 쓰이는 절대적 칭호로 발달했다.
2.예수와 주라를 칭호
예수께서 생전에 자기 제자들에게 스스로 주라고 주장했을까? 제자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했을까? 아니면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십자가와 부활후 발생한 것인가? 등을 알기 위해서 예수가 주라는 칭호를 따지는데 첫째로 이것을 따지는데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간접기독론에서 살펴본 예수의 절대적 권위 주장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혹은 하나님의 대권자로서 하나님의 권세를 주장하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했던 분. 그런 권위의 주장을 한 예수에게 그의 제자들이 어떻게 반응을 했을 것인가? 그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 관계에서 3가지 중요한 말들이 있는데
1)막11:3에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서 타고갈 나귀를 불러오라고 할 때에 제자들이 이르기를 "주께서 쓰시겠다 하라" 여기서 주라는 말이 이것은 지체높은 분, 특히 랍비(선생)에게도 (나의 주)라고 불렀다. 그정도의 의미에서 생각해서 상황을 생각하건대 우리의 가 쓸거니까 나귀를 무조건 풀어 주는 것을 보면 거기에서 는 보통 선생보다는 무게있는 의미가 지워져 있지 않겠는가? 생각해 볼 수 있다.
보통 이런 경우를 예수와 나귀주인과 미리 약속이 되어 있는 상태로 본다. (예수의 지지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예수가 자기 제자들을 내어 보내면서 전대도 지지말고 그냥 가라고 한 것은 많은사람들이 생각한대로 하나님 믿고 하나님이 다 주실 것이니까 걱정말고 가라는 뜻이 아니고 사실은 예수의 하나님 나라 운동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다 지원할테니까 곧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 지원할테니까 걱정말고 가라는 말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 믿고 가라는 말과 비슷한데)
예수의 최후 만찬도 약속이 되었다. 그 당시 예수를 공개적으로 지지할 경우 상당히 많은 피해를 볼 경우가 많으므로 숨어서 예수의 운동을 지원하는 부자들이 꽤 있었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이 오면 음식을 제공하고 몇일 씩 재워주기도 했다.
나귀 주인과 제자들이 같이 예수를 주로 보았다. 그런데 이럴때는 나귀를 필요로 한 것은 슥 9장의 메시야가 예루살렘 입성할 때에 '나귀'를 타고 입성한다는 예언을 성취하기 위함이니 나귀 주인도 예수의 그 의도를 알고 순종해서 나귀를 바쳤다. 그럴때 나귀의 주인은 예수를 무엇으로 보았겠는가? 슥 9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야로 보았다. 그래서 이때의 주는 보통 선생이라는 의미의 주라기보다 훨씬 더 내용이 채워진 의미일 것이다.
2)막12:35-37 "주께서 내 주께 이르시되..."
예수가 당시 신학적인 전승 사상에 도전한 것이다. folk dessianism이 당시 주종을 이루는 메시야 사상인데 나단의 예언에서 전승된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다.(삼하 7:12ff) 예수가 여기서 그것을 시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어째서 너희들의 신학자들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고 하느냐? 그 시비의 근거는 시편 110:1인데 여기서 다윗이 "주께서(하나님) 내 주에게(메시야) 이르시되 ...내 우편에 앉으라"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하나님 우편에 높이셔서 심지어 다윗이 그를 주라고 부르는데 어떻게 메이야가 다윗의 아들이겠느냐? 이런 문장형식이 됨.
시110:1은 신약성경에서 가장 많이 인용된 구약의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의 부활과 높임 받음의 proof text로-증거 예언으로-아주 중요한 예언이다. 그래서 논란이 시편 110:1이 초대교회의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그의 제자들에 의해 도입이 되었느냐 곧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하고 그의 제자들이 그가 메시야인 것을 곧 구약의 예언된 구원자인것을 확인하고는 구약으로 되돌아가서 그 메시야에 대한 예언을 전부 모아서 그것을 testionia라고 하는데-초대교인들이 예수의 삶과 십자가,부활의 빛 아래서 구약성경에 메시야인 에수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다고 혹은 예언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전부 모은 것을 testionia라고 한다. 이런 것들은 시2:7/89편/134편/이사야2장,11장,미5장 슥6장 9장 등. 메시야인 예수에 대한 예언들을 모아 놓았다. 그 과정중에 시편 110:1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과 성경해석에 도움이 된 것이냐 아니면 예수가 시편 110:1을 자기에게 적용했느냐 하는 것이 중요.
가령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막14:62)에서도 예수가 대제사장의 질문에 그가 메시야임을 수긍하고는 곧 단7장과 시110:1이 탄생된 말을 한다.
시110:1을 예수께서 직접 자기에게 적용한 것 같다. 물론 비판적 학자들은 시편 110:1이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교회가 시110:1이 예수의 부활과 높임을 받음을 예언하고 있구나 하고 후에 깨달은 것으로 말하는데 바로 이 막12:35-37이 우리로 하여금 예수가 미리 시110;1을 자기에게 적용했을 것을 상당히 강력히 시사한 것이다.
왜냐하면 막13:35-37까지는 초대교회가 니야내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에서는 예수가 다윗의 아들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피상적으로 볼 때 예수가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실에 시비를 거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면 초대 교회가 예수가 메시야로서 다윗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이 이런 말을 지어내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이 말은 분명히 예수의 진짜 말씀이다.
예수가 무엇을 할려고 그러느냐? 예수가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임을 부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나단의 전승 일체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냐? 그렇다면 구약의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의 전승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냐 아니면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것은 조금 부족한 것다 그정도 인식은 정말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겨우 다윗 왕조나 재건할 그런 존재로 인식한 것 은부족한 것이다. 메시야는 그 뿐 아니라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는 만유의 주로이해되어야 한다고 일부 수정한 것이냐? 민간 메시야 사상-정치적,군사적,메시야 사상을 부족한 것으로-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데-고 일부 수정한 것이냐?
메시야를 겨우 그 정도로 보아서는 안된다. 만유의 주로 높임받을 자로 보아야 한다고 예수가 또 하나의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 것이냐? 그러다면 예수는 스스로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느냐? 이런 걸로 해서 이 구절이 알송달송 중요하다. 예수가 보통 알송달송하게 가르치는 것 이것이 예수의 가르침의 특징이고 이것이 잘 들어 맞음.
이것에 대한 확고한 해석이 아직도 부족한데 동독의 F.Nergebauer는 막12:35-37에서 예수가 시편 110;1을 인용해서 메시야의 다윗의 아들됨에 대한 시비를 걸때에 단 7:13에 나오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는 초월적인 존재로 염두에 두고 이야기했다고 주장한다. 하여간 여기서 중요한 것은 메시야가 다윗의 주라고 할 때에 은근히 자기가 바로 그러한 사람이라는 것인데 다윗의 주라는 소리는 이제는 선생님 정도는 아니고 의미가 엄청나게 부과됨. 메시야적 칭호인데 다윗의 왕국을 재건할 왕저도가 아니고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을 존재로 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
3)눅 6:46 "주라고 부르면서 내가 너희에게 하는 말은 행하지 않느냐"
이 말로 예수는 제자들의 절대적 순종을 요구하고 있다. 보통 랍비 정도가 아니라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 있는 주라는 것이다. 예수는 은근히 여기서 보통 선생님 정도의 sir,master 정도가 아니고 제자들 전체의 절대적인 주권을 행사할 수있고 절대적인 순종을 요구할 수있는 주임을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이와 같은 예들을 보았을 때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느냐면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스승(랍비)로 처음에는 그런 의미로 로 시작했지만(지체높은 사람) 그러나 자기들이 라고 부르는 이 선생이-간접 기독론에서 본 바와 같이 하나님의 대권을 행사하고 모세보다 더 높은 권위를 주장하고 심지어는 제자들의 절대적인 순종에로 요구하는 이런 주로 예수가 스스로 계시함에 따라 그의 제자들이 예수를 라고 불렀으며 그 주라는 소리에는 더 높은 무게 있는 의미가 들어갔을 것이다. 보통 선생님 정도가 아니라 예수의 권위 주장에 다가 그것에 상응하는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칭호는 점점 더 무게가 실렸을 것이다.
3.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의 발생.
W.Bousset의 이론으로 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 W.S는 1세기를 지배한 책 " "라는 책을 저술. Bultmann은 고백하기를 이 책이 자기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W.S은 주장하기를 예수가 높임을 받아서 현재 군림하는 주라는 신앙은 헬라세계의 신비 종교에서와 비슷한 예배의 체험에서 발달한 것으로서 최초로 안디옥에서 발생하였다. 팔레스틴의 교회는 예수를 체험할 그 사람의 아들로 기다리는 것이 그들이 신앙의 중심이었다. 그런데 헬라의 신비종교들에서 신들을 예배하는 관습에 젖어 있던 사람들이 예수를 바로 그 신비종교들이 신으로 예배하기 시작함으로서 신비종교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는 신의 칭호가 였으므로 이 예수를 라고 하였다.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를 생전에 또는 라고 하고 불렀던 것과 예수가 라는 신앙고백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주장을 했다. 즉 W.S에 의하면 원래 팔리스탄인에 있는 교회는-아람말을 쓰는 유대인들 중의 예수의 추종자들은-그들의 신앙의 중심이 종말에 재림할 예수 곧 그 사람의 아들로서 종말에 재림해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 세상을 심판하여 그의 백성을 부러 모아 구원할 그 시랆의 아들을 기대리는 것이 그들의 신앙 내용이었다. 그런데 안디옥에서 헬라 이방인들이 자기들의 종교들이 전통인 serapis,osiris,isis 등의 신들을 섬기는 신비종교였다. 신비종교 중 serapis 들은 자연종교로 오대지방에서 자연의 cycle에 대한 인식에서부터 시작하여 인간도 자연의 cycle에 지배를 받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자연의 주기를 운행하는 존재가 신이라고 보았는데 신이 쓰로 쇠퇴하고 죽고 싹이 나고 생명이 무성하고 되는 주기를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 스스로가 죽고 부활하는데 우리 인간들이 신과 연합하면 죽어도 다시 생명이 여름이 무성하게 다시 나오듯이 새로운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신들과 연합상태를 지탱하는 것이 신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심-종교를 추종하는 사람들까지 신과 더불어 먹고 마심 또는 신의 몸체를 먹고 마신다고도 할 수 있고-이런 의식을 통해서 신과의 연합을 지탱한다고 보았고 설령 죽우도 생명으로 부활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종교적 전통에서 자란 헬라 이방인들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예수의 이름을 접하게 되자 serapis,osiris 대신에 예수를 중심으로 하는 신비종교를 이루어가지고 자기들이 옛날 serapis나 osiris를 섬기듯이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예수와 연합하고 예수의 살과 피를 먹는 성찬식을 함으로 예수와 연합을 지탱한다고 보았고 예수를 예배하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이런 신비종교들의 신을 대체하게 된 것이다. 이 신비종교에서 신들이 이다. 그래서 예수가 라는 신앙고백이 이렇게 신비종교의 배경을 가졌던 헬라 이방 기독교에서 처음으로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들에 의하면 W.S는 팔레스타인 교회와 헬라 이방인간의 교리는 전혀 별개의 종교였다. 이 헬라 이방인들의 교회의 가장 발달된 상태가 우리가 바울과 요한에서 보는 신학들이다. 그러면 우리 교회는 지금 바울과 요한의 서신에 근거를 하고 있다.
사실상 이렇게 된다면 예수와 예수의 원래 추종자들과는 관계없는 우리의 기독교이고 관계없는 종교가 되어버리고 만다. 이런 이론을 제시했는데 이 이론이 Bultmann에 의해 수용되었고 오늘날까지도 S.Schulz, W.Kramer, F.Hahn 등에 약간의 수정을 거친 상태로 계속 지탱되고 있다. 여기서 하나 우리가 인정할 것은 헬라세계에서 예배의 대상이 되었던 신을 로 불렀던 그 전통이 예수가 라는 신앙고백의 생성과 발달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헬라 기독교로 들어갈 수록 라는 칭호가 더 자주 사용된다.
그러나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안디옥에서 헬라 이방인들에 의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미 팔레스틴에서 발생했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몇가지 이유로 논증할 수 있다.
1)W.B.이론에 의하면 안디옥 교회는 헬라 이방인 중심의 교회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인들과 헬라 이방인 그리스도인 간에 섞인 교회다. 그래서 그들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섞여 먹고 마시는 문제가 발생했다. 바울이 갈2장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 문제로 베드로와 충돌하였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헬라 이방인 교회가 아니고 유대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이 섞인 교회였다 .그래서 그 곳에서 신학적인 leadership은 유대 그리스도인에게 있었다. 바라바,바울,베드로-이 사람드이 우리가 아는 안디옥 교회의 목사들이고 신학자들이다. 사실은 안디옥 교회 뿐만 아니라 어디에서나 1세기 동안 신학적 지도력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었다. 우리 신약성경이 그것을 잘 반영하고 있다. 1세기 말부터 신학적 지도력이 헬라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 넘어갔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어쩌면 누가 한 사람만 빼고 모두 유대인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여러분들이 아는 안디옥이 이그나티우스부터 시작해서 1세기 말 2세기 초에 활약한 점점 신학적 지도력이 이방인 그리스도인에게로 넘어갔다. 그것은 1세기가 분수령이었다.
그런데 W.B.가 설정하는 1세기 중반의 안디옥은 우리가 아는 신학적 지도자들은 바울,바라바,아볼로 등 모두 유대인들이었다. 구성은 섞인 교회였는데 신학적 지도력은 유대인들이었다. 차라리 유대교적 색체가 강하게 나타난 곳이 안디옥이었다.
2)W.B.가 전제했던 serapis,osiris,isis 등의 신비종교는 주후 1세기에는 그렇게 발달하지 않았고 주후 2세기 말부터 발달하기 시작. 기껏해야 2세기 말에 발달한 신비종교를 W.B.는 신약의 주라는 칭호를 통해서 전개된 기독론을 설명하는데 원용하는 것은 시간적으로 뒤바뀌었다.
3)W.B.이론에 의하면 예수에 대한 헬라 이방인들-곧 신비종교에서 신을 예배하던-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팔레스틴에서 부터 시작했다. 이것은 O.Cullman이 상당히 강조하고 있다. 왜 예배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는 것이 중요하냐고 하면 예배가 시작된 곳에서 예수를 현재의 주로 인삭하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디옥의 헬라 이방인에게서 부터 시작했다면 물론 주라는 칭호는 거기서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팔레스틴에서부터 예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되었다면 팔레스틴에서부터 지금 현재 군림하는 주로 예수를 인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O.Cullman이 이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후 처음 모여서 최후의 만찬을 되풀이 한 것이 떡을 떼었다(행2:42). 이 떡을 뗌으로서 생전에 예수와 더불어 먹고 마시던 체험을 갱신하고 예수와 더불어 교제를 새롭게 했다. 그래서 요 21장, 눅의 엠마오 제자들과 같이 우리는 부활한 예수를 그리스도인들이 체험하고 알아보는 것이 부활한 예수가 베푸는 식탁에서 같이 떡을 뗌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것을 Appearance meals라고 한다. 부활한 예수가 나타나서 식사를 같이 한 일련의 체험들을 통해서 팔레스틴의 원래의 예수의 처종자들은 십자가에 죽기 전에 자기들과 먹고 마시는 가 지금 생생하게 살아 계셔서 자기들에게 마찬가지로 식탁을 배설하는 분으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분은 생전에도 절대 주권을 주장하는 엄청난 주였는데 이제는 부활로 하나님에 의해 높임받은 주로 체험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체험에서부터 시작해서 예수에 대한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 예배의 중심은부활한 높임받은 예수의 경우는 식사를 같이하는 걸로 곧 우리 말로 하면 성찬식이 예배의 중심이 되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날 회당에 나가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그 다음날(안식일 다음날) 모여서 떡을 떼고 부활한 예수와 더불어 교제를 나누고 그 예수를 예배하게 되어 그날을 주의 날이라고 하였고 그날 자기들이 되풀이한 예수의 떡뗌을 주의 만찬( )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예수의 최후만찬이 주의 만찬 성만차으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서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토요일이 아닌 일요일이 그리스도인의 예배의 날이 된 것이다. 그 일요일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날인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예수에 대한 예바가 부활을 체험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금방 발생한 것이지 헬라 이방인들에 의해서 처음 시작한 것은 아니다. O.Cullman책을 읽어 보세요.
4)W.B의 이론에 Archilleo heel로 작용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고전 16:22에 있는 " "원래 헬라어로 쓰여진 고전에는 바울은 아람어 '마라나타'를 그대로 두고 있다. 한국말에도 그 정신을 살려서 그대로 두어야 하는데 번역하였는데 그 번역이 잘못되었다.
이것이 아람말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초대교회에서 신앙고백은 번역되는데 그것은 그 뜻이 정확히 전달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도 용어등 예배용어는 의식 소의 liturgical language는 원어가 지탱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말들은 예배에서 사용되는 기도용어이다. 는 예수에 대한 예배가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었음과 에수를 주로 고백하고 주로 부르는 것이 팔레스틴에서 시작되었음을 증거하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그래서 영국은 Rowlinson은 Cullman은 이것을 가 비밀이우리에게 간직시켜준 W.B.의 Archilleo heel이다.
는 두 마디로 되어 있다. 옛날 언어는 띄어 쓰기가 없었다. 그러므로 적당히 띄어야 한다. -
이것은 두가지로 가능한데 (①) 와 (②)이다. 어떻게 떼느냐에 따라 의미가 조금씩 달라진다.
①은 주께서 임하셨다. 또는 주께서 임하신다. 가 되어서 신앙고백이 된다. 그래서 이미 오셨다. 또는 곧 오신다는 신앙고백이 된다. :우리말 번역이다.
②주여, 오소서라는 명령어법의 기도가 된다.
그럼 어느것이 더 옳은 독법인가? 이것을 가리기 위해서 기도나 예배의 언야가 원어로 남는 경향이 있다. 신앙고백은 번역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에게 얼른 무슨시사를 하냐면 이것이 기도일 가능성이 더 많다는 시사를 준다. 그래서 로 읽어야 한다.
그러데 다행히도 우리를 그정도 애매한 짐작으로 하지 않게 하는 것은 Didache 10:6-1세기 말 12사도들의 가르침이라는 책-에 성찬식을 중심한 예배때에 드리는 기도에 가나온다.-기도로-
계22:20에 "주여 오소서"가 기도로 번역되어 끝난다. 이런 것을 볼 때에 가 초대교회때 기도로 쓰인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아람말로 되어있음으로 분명이 팔레스틴에서 예수를 주로 아람말로 고백했고 그가 다시 오기를 기도했으니 예수가 기도의 대상이 되었으니 곧 에수가 예배의 대상이 된 것이다. 파레스틴에서 벌써 예수가 예배되었고 주로 고백되었고 한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이로서 W.B.의 이론이 한마디로 완전히 무너졌다.
초대교인들이 자기들과 같이 식사를 나누었던 예수, 십자가에 죽고 부활함으로 자기를 떠나갔던 그 예수를 다시 오시도록 기도할 때는 무엇을 전제하느냐면 그 예수가 지금은 주로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곧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았음을 전제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주로 고백하고 그의 다시 오심을 기대했다.
그주에 대한 그들이 태도는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초대교인들이 입장에 서보자. 예수의 생전에 예수의 제자들이 에수를 무엇으로 불렀다고 랍미. 라고 불렀다. 예수의 자기 계시가 점점 진전되면서 라는 말이 점점 무게를 갖게 되었다. 왜? 예수의 자기 계시가 진전되면서 더 절대적인 권위를 주장하고 그의 제자들을 절대적인 순종에로 요구했으니까. 선생 정도가 아니고 메시야보다 더한 이로서의 권위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그 에수가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서 부활되어서 높임받았다는 것을 체험하고 그 예수가 다시 나타나며 생전에의 식사의 교제를 새롭게 했을 때 그런 일련의 사건을 체험한 초대교인들이 계속해서 똑같은 말로 예수님을 라고 고백하게 되었는데 - 라 이것을 증명- 이제는 이 주라는 말이 선생, 다윗의 아들 ,메시야 정도가 아니라 신적인 존재로(기도의 대상,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므로)-신적인 존재란 의미를 띠게 되었다. 이것을 헬라 그리스도인ㄷ르이 이어 받아서 아주 정당하게 을 로 번역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교의 새로운 것은 팔레스틴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시작되었고 헬라 이방인들이 이것을 이어받았을 따름이지 W.B. 나 Bultmann이 말한대로 여기서는 예수를 재림하는 분으로만 기다리는게 여기서는 전혀 새로운 -예수를 예배하고-종교가 발생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가 기도다(주여 오소서) 이 기도는 2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
①종말에 재림하신 주에 대한 기도. 오셔서 빨리 악과 고난의 세상을 종결 지으시고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셔서 우리를 구원하시옵소서 하는 기도다 .그래서 종말론적인 기도다.
②동시에 이 기도는 '예배의 부름'이다.
우리가 여기 당신의 이름으로 식탁을 두고 둘어 앉아 모였으니 주여 여기에 여기에 임재하시고 생전에 베풀던 식탁을 베풀어 주시옵소서 하는 예배의 부름이다. 그래서 Lore's Supper이 이루어지도록 하소서. 마18:20 나의 이름으로 2,3사람이 함게 모이면 내가 너희와 함께 하겠다. 계3:20 (초대교회에서는 예배의 시작과 끝에 를 고백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성만찬 때에 고백한 didache에서 볼 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생전의 교제를 새롭게 하고 부활 직후에 나타나셔서 식탁을 배설하셨던 주를 새롭게 체험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와 종말의 관계를 예배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다. 주는 종말에 재림하신다. 그 종말에 재림할 주께서 예배가운데 지금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종말에 오실 주를 체험하게 한다. 지금 현재 그래서 예배는 하나님 나라에서의 종말론적인 잔치의 현재적인 성취다.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맛볼 그 잔치-예수께서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비유하셨다. 늘 현재에서 미리 맛봄이다.
성만찬은 주의 오심의 현재적인 실현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의 현재적 실현이다. 예배 가운데서 우리는 종말을 미리 체험한다. 예배 가운데 주와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예배 가운데 그 주로부터 우리의 죄악성에 대한 심판을 체험하고 예배가운데 그 주로부터 치유와 구원을 체험한다. 예배가운데 우리는 완성될 하나님 나라에서 잔치와 교제를 체험한다. 그러니까 예배가 종말의 성취다. 반면에 예배에서 체험하신 주의 오심과 그 주의 구원은 종말에 주께서 강림하실 것에 대한 증거요 뒷받침이다.
우리의 예배가 종말의 성취로서 이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실제 우리의 예배에서 이런 것들이 체험되게 해야 한다. 예배가 말씀 선포와 성만찬이 같이 이루어져야 한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는 역사적 필요성 때문에 성만찬을 자주 안하는 걸로 되어 있는데 원래는 주일날마다 해야 한다. -신약성경에 따라서- 말씀 선포와 성만찬이 같이 간다. 로마 카톨릭에서 말씀 선포가 약해지고 성만찬이 마력을 발휘한는 magical하게 발달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종교 개혁자들이 성만찬을 조금 소홀히 했다고 할까. 그러나 칼빈 스스로도 성만찬을 매주 하기를 원했다. 주는 말씀으로 뿐만 아니라 성만찬으로 임재하신다. 그러므로 같이 행해져야 한다. 예배와 종말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계'이 종말론적인 책이고 예배의 책이다. 요한이 어느날 환상을 봅니까?주의 날에-예배 시간에- 하늘에서 예배의 상황을 본다. 주일날 하늘에서 벌어진 천사들이 예배드리는 상황을 보는 것이다. 그것이 땅에서의 예배로 상응되어야 한다. 하늘에서의 예배가 땅에서 신현이 될 것이다. 그것이 종말론적 드라마로 펼쳐질 것이다. 그래서 계시록은 종말론적인 드라마를 그린 책이지만 사실은 예배의 책이다.
기도는 우리에게 주라는 칭호가 부활하고 높임받은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라는 것을 가르쳐주고 "주"라는 칭호가 주로 쓰이는 context는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현하는데 사용한다.
주라는 칭호가 주로 쓰이는 context는 예배와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현하는 때다.
신약신학 제16강
지난 시간에 라는 기도를 중심으로 이것이 종말론적 기도-예수의 parousia를 비는 기도이면서 동시에 예배에의 parousia-예배에 오셔서 임재하시기를 비는 기도다.
그래서 예배라는 것은 종말의 성취라고 볼 수 있다. 예배는 종말에 parousia할 주의 parousia 미리 체험하는 것이고 종말에 있을 하늘 나라의 잔치를 미리 체험하는 것이다. 말씀과 성찬식이 예배의 중심이다. 그래서 예배에서 종말에 주 예수의 parousia와 더불어 있을 심판을 체험하고 또 죄의 용서와 구원을 미리 체험하는 것이 예배이다.
지금까지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느냐?
주라는 칭호는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과 주라는 칭호는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 그리고 종말에 올 심판자와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배의 대상,기도의 대상이 되는 예수 이런 3가지 관계에서 쓰이는 칭호이다. 종말에 다시 올 종말론적인 사상을 표현할 때에 주라는 칭호가 쓰이고 그것의 현재적인 성취인 예배 때에 주라는 칭호가 쓰이고 종말론적인 사상과 예배는 무엇을 전제하느냐면 예수가 부활하심으로 하나님께 높임 받아서 지금 현재 주권자로 군림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래서 주라는 칭호는 3가지의 context에서 주로 쓰이는 칭호다. (그리스도라는칭호는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를 위한 구원사건이다. 곧 그것이 그의 메시야적 과업이었다. 그것이 곧 그의 그리스도로서의 과업이었다. 우리를 위한 죽고 부활하심이 그의 과없이었다. 그리스도라는 칭호는 그이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관계해서 주로 쓰인다. 그것을 믿는 것이 객관적인 구원의 사건을 주관적인 구원의 사건으로 만든다. 그래서 믿음이라는 말과 같이 쓰인다. 그 객관적인 그리스도의 죽고 부활함에 우리가 믿음으로 연합하고 동참케 해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는 사상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그리스도 안에'라는 맥락에서 사용된다.)
오늘은 시편 110편의 역할:예수가 주라는 고백에 있어서 시 110편의 중요성.
시110편은 신약에서 제일 많이 인용된 구약성경이다.(시110;1)
롬8:34/고전15:25/골3:1/엡1:20/히1:3/8:1/10:21/벧전3:21/행2:34-35/5:31/7:55/계3:21/마22:44/26:64/막12:36/14:61/눅20:42/22:69 등 이렇게 많이 시110:1이 인용되거나 은유 반영되어 있다. 그래서 이것에서 우리는 시편 110:1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난 시간에 예수께서 민간 메시야 사상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시110:1을 인용하면서 비판하는 것을 보았다.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 정도로 다윗적인 메시야에 그칠 수 없다. 왜? 다윗이 여기서 메시야를 주라고 부르기 때문에.
거기서부터 시작해서 여기에 나오는 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예수의 부활을 체험한 그의 제자들은 그가 하나님의 대권을 받아서 절대적 권위를 행사한다는 그의 주장-간접 기독론에서 확인-이 옳다고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을 보았고 그래서 그러한 주장에 상응해서 예수를 , 라고 불렀는데 이 주가 하나님의 영광으로 높임받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의거하여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 받은것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부활이 우편에 높임받음이다. 예수의 부활을 시편 110:1에 의거해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은 것으로 해석하게 된데에는 예수 스스로가 시편 110:1을 자기에게 간접적으로 적용한 것이 중요한 발단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막12:35-37에 다윗의 아들에 메시야 사상에 대한 시비와 예수의 산헤드린 재판 때(막14:62)에 예수께서 대제사장과 그의 무리들에게 시편 110:1에 대한 사용이 부활을 체험한 예수의 제자들에게 상기되어서 예수의 부활이 하나님께서 그를 시110:1과 마찬가지로 그의 우편에 높이신 것이구나 깨닫게 된것. 그래서 주라는 칭호는이제 확실히 구약적인 근거를 갖게 되었다(시110:10. 이렇게 됨으로 점점 주라를 칭호는 구약적인 의미로 이해되었으며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구약의 야웨에 대해 나오는 많은 본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전하게 되었다. 구약에서 를 라고 불렀는데 시 110:1의 주가 예수를 두고 말하는 것이 확실히 이해되자 점점 구약의 다른 곳에서 주라고 읽을 수 있는 야웨에 관한 본문들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본분들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계가 정확히 설정이 되었는가를 겔 2:9-11에 잘 그려져 있다. 여기 보면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일므을 주었다. 모든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은 하나님의 이름 자체, , 를 예수에게 주었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에 -하나님의 이름, -에 무릎을 꿇게 하고 천사들이나 땅에 있는 것(인간) 땅아래 있는 것(악령들)이 무릎을 꿇게 했다. 그리고 모든 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고백하게 했다. 여기서 무릎을 꿇는다. 혀로 고백한다는 것은 사 45:23에서 왔다. 이것은 야웨 이외에는 다른 어떤 신에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예배한다는 것이다. 야웨 외에 다른 어떤 것에 예배하고 그를 주로 불러서는 안된다. 바로 그 말을 예수에게 적용했다.
예수가 야웨 이름을 갖었으므로 하나님 스스로가 자기 이름 야웨 곧 아도나이, 를 예수에게 주었으므로 사 45:23이 원래 의도했던 예외 규정이 아니고 예수 에게만 적용되는 규정이 된다.
그래서 온 우주가-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위에 있는 인류나,땅아래 있는 악령들-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그를 주라 고백하게 하였다. 왜? 그가 야웨 이름을 받았으므로.
그래서 그가 주로 고백되고 예배되게 되었다. 그런데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는것이다. 여기서 아버지라는 말이 나옴으로-이 주 예수-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주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부자로 설정이 되었다. 그것의 함축 의미는 예수는 아들로서 아버지의 이름을 상속받았다.
그래서 아버지의 이름 주를 물려받게 되었다. 아버지 하나님에게만 해당되는 예배를 에수 그리스도가 받게 되었다. 이러헥 관계가 설정되었다. 물론주 이름과 더불어 하나님 아버지의 전권을 이양 받게 되어 예수가 만유의 하나님 아버지 대신에 그의 대권자로 군림하는 분이 되었다. 비슷하게 딤전 3:16도 이러한 사상을 가르쳐줌.
그래서 시 110이 야웨가 메시야인 내 주께 이르기를 내 오른 쪽에 앉으라... 고 말한 말히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성취된 것으로 보고 그렇게 함으로써 에수가 하나님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받고 하나님의 전권을 위임받아서 현재에 하나님 우편에 높임 받아서 하나님 대신에 군림하는 곧 하나님의 agent 노릇하는 하나님의 통치를 대신 통치하는 그런 주권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가 예배나 기도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까 주라는 칭호는 예수의 부활과 높임을 받음과 예수가 부활하여 높임 받으신 분이라고 할 때에 예수를 주라고 한다.
그래서 예배와 기도의 대상이 되신 분이라고 할 때에 예수를 주라고 하고 현재 군림하는 분이라고 할때에 주라는 칭호를 사용하고 종말에 심판과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오시는 분이라고 할 때는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예수가 주라고 고백될 때 지금 이야기한 모든 것을 의미한다.
예수의 주권은 시간적으로 제한된 것이다(고전15:24). 부활의 순서를 이야기한다. 이제 각각 자기 순서와 계급대로 이루어질텐데 제일 먼저 그리스도,다음에 그리스도에 속한 자들이 그의 재림 때에 부활한다. 그리고 종말이 오는데 그때에 예수께서 현재 군림하는 주가 모든 원수들과 모든공중의 권세 잡은 악령들과 권위자들-모든 악의 세력들-을 무찌른 뒤에 (무찌른 다는 말은 실업자로 만든다는 뜻. 악령들이 인간들을 괴롭히는 일을 못하게 한다. 그들을 무력하게 한다.)
그때에 하나님 아버지께 그의 왕권을 넘겨 준다. 이것의 의미는 예수의 부활과 하나님 우편에 높임-그의 agent가 되었다-받았다. 그래서 예수의 왕권이 주권이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으로 하나님의 주라는 이름과 그의 모든 권능을 위임받아서 예수의 왕권이 시작이 된다. 그런데 언제 예수께서 이것을 하나님께 돌겨주는가? 예수의 재림때 모든 사단을 정복하고 실업자로 만든 뒤에-온 세상을 평정한 후에-아들도 그의 왕권을 하나님께 돌려준다.
그렇다면 예수의 왕권은 한계적이다-하나님의 구원사역에서-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그의 재림때까지-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심판과 정복과 온 우주의 평정. 이것은 무엇을 말하느냐하면 온 우주가 사단의 세력 아래서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켰다. 인간들은 반란의 와중속에서 하나님께 적대하는데 예수가 군림하여 주권을 행사하는 것은 사단의 세력과 계속 싸워가는 것이라고 볼 수있다. 현재 예수가 주로서 정통성이 없고 스스로 주라고 내세우고 우리들을 자기의 주권아래 넣을려고 하는 사단과 진정한 주 예수님 사이에 격전이 벌어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예수의 재림과 더불어 결정적인 전투가 벌어져서 악령들을 쳐부수고 반란 상태에 있는 온 우주를 평정해서 그때의 주 예수-하나님의 agent-의 임무가 끝난다. 그 때에 주 예수가 주권을 하나님께 돌려드림으로 온 우주가 하나님과 화목의 상태에 들어간다. 그래서 그 상태는 고전 15:25-28. 아들의 사단과의 투쟁을 통해서 사단의 세력들이 완전히 꺽이고 온 우주가 평정된 상태를 28절에 그리고 있다. 하나님이 그가 지은 만유 안에 있고 만유 안에서 모든 것으로 하나님 만이 절대 주권을 행사하고 자기가 지은 온 우주에 절대 주로 군림하게 도는 그런 상태이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기간은 부활과 높임받음, 시110;1이 성취되는 부활과 높임받음부터 그의 parousia와 더불어 사단의 세력들을 꺽은 기간이다.
이 기간을 종말론적으로 말하면 이미,벌써(already)와 아직도(not yet)의 긴장이 있는 기간이다. 이미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부활함으로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찌르고 군림하는 기간이다. 의와 사랑과 생명으로 벌써 군림하기 시작했다. 사단이 결정적인 패배를 벌서 당했다. 벌써 예수께서 의,사랑,생명의 통치를 하신다. 그래서 그만큼 그의 의,사랑,생명이 체험되는 시간(벌써) 그만큼 종말의 구원의 실제가 실현된 것이다.(realised eschatology).
그러나 아직도 약간 세상이 계속된다. 사단의 세게가 계속된다.(아직도)
결정적인 패배는 당했지만 완전히 실업자가 되지 않았다. 언데 완전히 실업자가 되는가? 완전히 패배할 때. 그림으로 말하면 주 예수께서 악령들을 발등상으로 만드신 때이다.
고대 근동에 왕이 앉을 때에 발을 괘는 상이 있었는데 상에는 용의 그림이 조각되어 있다. 카오스,암흑,악의 세력을 완전히 정복하고 왕으로 군림한다는 것을 상기하기 위해서 예수가 재림해서 악의 세력들을 자기 발등상으로 만들 때에 악과 고난이 없어지고 의와 평화가 생며이 완성될 것이다. 그것은 예수의 parousia때 온다. 그의 주권이 완전히 성림되어서 세상을 평정해서 그때는 자기 주권을 하나님께 되돌겨 준다. 종말론적인 간장 관계를 보통 D-day V-day라고 말한다.
D-day:전쟁이 결정된 날. 1943년 연합군이 노르망디에 상륙해서 독일군을 결정적으로 무찌른 때. 그러나 그 때는 전쟁이 결판이 났지만 끝난 것은 아니다.
V-day:1945.5.8일 베를린의 함락, 히틀러의 자살, 되네트 제독이 항복.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로 에수가 사단을 결정적으로 무찔렀다. 그러나 아직도 사단의 세력이 예수에게 항거하며 오늘날도 우리가 지금 벌써 군림하는 예수의 의,사랑,생명의 축복을 우리가 누리지만 동시에 악의 지배를 뼈저리게 느낀다. 고난을. 그런데 예수가 재림함으로서 사단을 완전히 쳐 없앨 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된다. 다른 그림으로 말하면 사단의 들뼈을 분질렀다. 그런데 이작도 사단이 사지에 힘이 남아 우리를 못살게 굴고 괴롭힌다. 이때에 예수께서 다시 오알때 사단의 사지에 힘까지 다 빼서 실업자로 만든다. 그때 우리의 구원이 완성이 된다.
성경적인 그림은 지금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과 높임 받음으로 지금 현재 예수의 의,사랑,생명으로 살 수 있는 축복을 첫열매라고 말한다.( :고전 15:23)
우리가 구원의 첫열매를 받았다. 이것을 첫맛(foretaste) 이라고 한다.
첫 열매인 우리의 구원의 완성을 전체적인 수확이라고 한다. 첫열매는 얼마 있지 않으면 모든 것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장한다. 그래서 첫열매는 보증금 노릇을 한다.
그래서 벌써 군림하는 주로부터 우리가 첫 열매를 받았는데 첫열매는 종말에 있을 완성된 구원-전체 수확에 있을 보증이다. 그런데 구원의 첫 열매와 종말에 완성될 구원의 보증금 노릇하는 것이 대표적으로 성경이 그러하다. 그래서 바울이 성령을 구원의 첫 열매라고 하고(롬8:23) 또 종말에 있을 구원의 보증이라고 한다(고후1:23/5:5/엡1:14). 그런데 예수의 주권의 기간은 종말론적 긴장 벌써와 아직의 긴간이 나타나는 기간이면서 동시에 교회의 성교의 기간이다. 교회의 선교의 본질을 여기에서 알 수 있다.
선교의 본질을 세상에서 아직도 사단을 주로 섬기는 인류에게 사단이 주가 아니고 예수가 주다고 선포하는 것이 교회이다. 사단이 주가 아니고 예수가 주라는 것을 선포해서 세상,사단의 주권에 있는 사람들-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주권에 있는 사람들-을 의,사랑,생명을 다스리는 예수의 구원의 영역으로 불러오는 것이 선교이다.
그리스도인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고 예수가 주라고 고백함으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그래서 골 1:1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흑암의 권세-사단의 암흑과 악의 권세의 영역에서 건짐을 받아서 하나님의 아들-의,사랑,생명으로 다스리는 예수의 주권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예수가 주라는 선포를 통해서 이루어지는데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단의 영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옮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세례때 신앙을 고백할 때 가령 롬 10:8 네가 네 입술로 주라 고백하면 부르짖으면 -우리말의 신인한다는 말이 조금 약하다-네 심장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킨 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그래서 세례때 중심되는 신앙고백이 예수가 주다인데 이것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는 것을 전제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서 세례 때 에수가 주라는 고백을 하기 전에 '네가 사단의 주권을 부인하느냐?'는 물음을 먼저한다. 그래서 '예'하면 '네가 예수를 주로고백하느냐'하는 형식을 갖는다. 사단의 주권을 부인한다. 지금까지는 사단을 섬기고 사단의 주권아래 자기를 주장해서 죄를 짓는 노릇을 했다. 사단의 주권 영역에 있었으나 사단을 부인함으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을 한다. 이것이 회개이다.
사단에게 바쳤던 삶을 청산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함으로 주권의 변동이 일어났다. 소위 권의 변동이 일어났다. E.Kasemann은 이것을 중요시함. E.kasemann이 이것을 중요시한 것은 전통적으로 개혁신학에서 구원을 의인됨으로만 설명하면 너무 인간 중심이 된다. 의인됨(justification) 자체가 사단의 주권의 영역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영역으로 들어가서 예수의-하나님의 대권자 노릇하는 예수-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원래 하나님이 의도했던 하나님과 인간의 올바른 관계에 들어갔다는 것이 의인됨인데 예수의 주권은 생각지 않고-주권의 비중은 생각하지 않고-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다 하면 항상 그 사고가 인간중심이 된다.
그래서 의인됨이라는 선물만 강조하지 그 선물을 주신 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망각하기 쉽다. 그러나 우리가 사단의 영역에서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예수의 영역에 들어가서 비로서 창조주 하나님과 그 하나님께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서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래서 주권의 변동의 개념을 강조함으로 우리 사고에 있어서 원래의 올바른 우선순위가 된다.
먼저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될 것은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giver 하나님,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우리에게 선물을 주신 분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학사에서 Bultmann 신학이 너무 인간중심의 신학인 것에 반발하여 그의 제자인 E.Kasemann이 주권의 변동 개념을 강조함으로써 하나님 중심,그리스도 중심의 사고방식을 일깨울려고 했다.
그래서 구원이라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함을 받는다. 그래서 의인이 된다로도 설명할 수 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이 우리가 주권의 변동을 이루는 것이다.
이 사단의 주권 밑에서 해방이 되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 갔다. 이것은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의지하고,순종하는 올바른 관계에 들어가는 것이 우리에게는 의롭다함을 받는 선물이다.
예수의 주권은 두 영역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①예수는 세상의 주,만유의 주와 빌2:9-11에서 하늘에 있는 것들이나 땅위에 있는 것들이나 땅아래 있는 것들이나 온 우주가 그의 주권의 영역이다. 옛날 우주관은 3층 우주관이다.-하늘,땅,지하-
②예수는 그의 교회의 주이다. 그래서 온 우주와 교회 두가지가 주의 2개의 주권의 영역이라고 볼 수 있다. 2주권의 영역들은 2개의 동심원으로 나타낼 수 있다. 겉은세상, 안은 교회. 세상과 교회의 다른 점은? 세상의 예수의 주인줄을 모르고 사단을 주로 섬기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예수의 주권을 거부하는 것.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가 주임을 알고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의 주권을 고백한 사람들의 공동체이므로 예수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더 많이 일어나는 그러므로 예수의 주권이 더 집중적으로 나타나는 영역이다.
그러나 세상이나 교회에서는 다 변증법적 관계가 일어난다. 세상은 예수가 주인줄 모르고 거기에 대해서 항거하는데 예수가 사단을 이긴 주이기 때문에 세상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하고 만다. 세상 역사를 다스리는 분이다. 그런데 세상은항상 주의 주권에 불순종한다. 그러나 예수는 이미 사단을 이긴 주로서 세상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자기의 뜻을 관철시킨다.
반면에 교회는 에수가 주라고 고백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예수의 주권에 완전히 순종하지 못한다. 가래서 교회가 죄가 많고 혼잡하다. 그래서 세상에서나 교회에서나 dialectical relationshil 예수의 주권을 거부하지만 예수가 그의 불순종을 이용해서까지라도 그의 주권을 나타낸다.
반면에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면서 주의 뜻을 불순종하고 거역할 때가 있다. 그러니까 긍정과 부정,부정과 긍정이 나타내는 것이 세상이나 교회나 원칙적으로 마찬가지이다. 다만 세상과 교회에서 주의 주권에 대한 순종이 어떻게 다르냐?
①교회는 예수의 주권을 알고 순종하고 알면서 불순종하다가 주 예수의 심판과 통치로 할 수 없이-주 예수께서 그의 뜻을 성취하고 만다 왜? 그가 주권자이므로-그래서 성취되는 것이 교회라면
②세상은 주의 주권에 무지하거나 의도적으로 반역해서 예수의 주권의 힘으로 다스림을 받아서 세상을 통해서 예수의 주권이 성취된다. 이것이 차이점이다.
농도-예수의 뜻이 관철되는 농도에 있어서 주권이 나타나는 농도는 어쩜 교회가 더 진하다. 그런 것이 차이다.
이런 관계에서 최근에 유행된 여러 선교 사상이 나오는데 하나는 nissio Dei(하나님의 선교)라는 개념. 하나님이 이 세상에 그의 아들을 통하여 오신다. 그리고 자기의 뜻을 관철한다.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아 이 세상이 완전히 다른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도 세상도 예수의 주권아래 있고 하나님의 선교의 대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역사가 구원활동의 장이라 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행사되고 관철되는 장이다. 꼭 교회만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이 행사되는 영역이 아니고 교회 역사만 예수의 주권이 행사되고 펼쳐지는 장이 아니고 이 세상 역사 전체가 하나님의 구원의 대상이고 선교의 대상이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사건에만 예수의 주권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삶 전체에 주의 주권이 나타난다. 즉 이 세상의역사 가운데에서도 예수의 의,진리,사랑으로 다스리는 주권이 악,고난,거짓으로 다스리는 사단의 주권과 더불어 각축을 벌이는 것으로 본다. 그래서 의의 세력이 악의 세력이 싸울 때에 의이ㅡ 세력은 설령 그리스도인이 아니고 교회에서 일어나지 않고 예수를 전혀 모르는 사람에 의해서 한 것도 주의 주권의 사주를 받아서-예수가 동원해서 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세상의 어떤 삶의 과정에서도 진리,의,사랑,평화가 승리하면 바로 그곳에 주께서 주권자로 진리,의의 세력을 동원해서 악의 세력과 싸워서 자기 주권을 성취한 것으로 보아야 하다. 그렇다면 교회는 삶의 장에서 의,진리,평화의 세력과 연대하고 그 곳에서 바로 예수가 주다. 여러분들이 에수의 뜻을 관철하는 예수의 군대라고 증언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그것이 교회의 선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가 주라고 선포해서 영혼 구원만 하는 것이 아니고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진리,의,평화,사랑의 편에 서서 악의 세력은 사단의 세력으로 의를 위해 싸우는 세력을 에수 그리스도의 세력을 증언하고 투쟁에 동참해야 한다.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이해이다. -이런 신학적 근거로 해서 참여의 신학-도시 산업 선교 등-예수의 주권을 세우기 위한 싸움으로 나타날 수 있다. 지금까지 설명한 것은 다 옳다!! 그런데 이것이 2가지 문제점을 안을 수 있다.
①교회와 세상의 영역을 완전히 없애버리는 것이다.
교회가 특별한 의미에서 예수의 주권이라는 개념이 약화되어 세상에 흡수되어 버린다. 이런 신학을 너무 강조하면 그래서 이런 신학과 선교가 이해가 옳게 지탱되느냐면 교회의 특성:세상에서 불림 받은 자라는 교회의 특성, 세상과 다른 점을 상당히 강력히 유지해야 한다.
②역사속에서 교회의 주의 편에서의 악의 세력과 싸움을 통해서 구원이 완성디 것으로 생각하는 것-다시 말하면 종말론이 약화되는,역사 속에서 종말을 희구하는-
역사속에서 교회가 증거하는예수의 주권과 악의 세력이 계속 싸우가지 역사 내에서 가령 이 세상에 예수의 주권이 완성이 된다. 교회가 예수의 주권에 대해서 증거하고 그의 진리,의의,평화,사랑과 평화 편에 싸워서 이 세상에 완전한 의의 왕국,진리,평화의 왕국을 이룰 수 없다. 그런데 해방신학은 그것을 상당히 이룰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내는데 역사안에서 종말론을 펼치는데 문제가 있다. 고전 15장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의 재림으로 더불어 사단의 세력이 완전히 꺾어진다. 그래서 종말론이 역사내에서 우리들의 투쟁으로 이루어 질 것으로 보는데에 큰 문제가 있다.
③이와 같이 되면은 에수의 주권을 빙자하지만 교회가 의,진리의 세력으로 거짓 세력과 싸우는 인간이 스스로 투쟁해서 종말을 실현하는 의,평화,자유의 세계를 실현하는 열혈당적 신학이 된다. 인간의 투쟁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고자 했던. 초월적인 예수의 주권자적인 간섭이라기 보다는 인간들이 모든 진리와 거짓,선과 악의 싸움에서 진리와 선의 편은 예수의 주권이 나타나는 것이므로 우리가 덤벼들어 싸움으로서 진리,선을 세운다. 그러므로 예수의 주권을 세운다는 식의 신학이 되면 열혈당 신학이 된다.
인간의 투쟁,노력으로 구원을 이루면 더 이상 구원이 은혜로 이루어지는 초월의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선물로 주는 것이 안된다. 이 논리는 보수 경건주의에서는 교정을 가져와야할 성경의 진리이다. 투쟁방법은 말씀과 시위(안식일 병고침,죄인들과 식사 등)로 해야 한다. 비폭력적으로...
신약신학 제 17강
지난 시간에서는 예수의 주권의 투쟁에 관한 부분을 공부했다. 그래서 예수는 교회의 주일뿐 아니라 온 우주의 주이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나는 장이 교회의 직접적인 활동에서만이 아니고 우주 모든 영역에서 -모든 만물의 역사의 장에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난다고 본다.
그러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 이외에 이른바 세상의 역사의 구체적 과정 속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예수의 주권을 나태내야 하는 가를 인식하고 거기서 구체적인 역사적 과정에서 예수의 주권이 나타날 때 인식하고 그것을 고백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악과 거짓,불의,추악함은 사단으로부터 유래한다고 보듯이 모든 참과 진리,사랑,의,아름다움,평화는 예수의 주권의 선물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역사의 구체적인 장에서 거짓과 자기가 맞서 있을때-의와 불의,평화와 불의가 맞서 있을 때-이런 곳에서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의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인식하고 그 곳에서 예수가 주임을 선포하고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해서 삶으로써 그 주권이 실현되도록- 구체적으로 일하면 진리가 승리하고 의가 펼쳐지고 사랑이 행해지고 아름다운 것이 추악함을 이기고 실현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이른바 요즘 확대된 선교의 개념이다. 전통적으로는 선교의 개념을 교회가 예수가 주라고 주로 영혼구원의 영역에만 선포한 것으로 해석했는데 하나님 나라의 예수의 주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서 선교의 개념에 대한 확대가 일어났다. 이것게 공헌한 선교 신학자는 Missio Dei에서 출발했지만 사실은 신약성경 신학에서는 예수의 주권에서부터 시작한다. 지금까지 이것에 대한 몰이해에서 지금까지 많은 보수 경건주의 전통에서는 이 선교를 너무 교회의 4 벽안에서만 행해지는 활동을 보았고 즉 예수의 주권을 교회의 4벽 안에 가두는 신학적인 오류를 많이 범했다. 현실적으로 독재하고 압제하는 독재자들에게 악용당하고 그들의 편을 들어서 사회의 정의를 실현하고 자유를 구현하고 인권을 구현하는 적극적인 그리스도인들의 가치를 천명하고 실현하는데 부족했다.
역사의 장이-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들-구체적으로 예수의 주권과 사단의 주권에 각축장이라면 사단이 거짓-불의,증오,추착함 등 이런 것으로 우리를 통치하며 죽게하고 예수의 참,진리,정의,사랑,아름다움의 가치들을 실현시키는 예수의 구원이 구체적인 역사의 사건 속에서 그것에 반대하는 악과 맞서 있다.
이건 역사적인 장에서 -예수의 주권과 시단의 주권이 맞서 있는 장에서-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은 참___의 편에서 투쟁하는 것을 포함한다.
그런데 더 나아가서 선교의 개념이 확대되는 것 까지는 옳은데 이렇게 확대되다보니 항상 그리스도인들은 이원론에 바지기 쉬워서 전에 영혼구원에만 심쓰던 사람들은 사회참여를 해서는 안된다는 식으로 영혼과 몸, 내세와 현세를 구분지어 기독교는 죄용서와 영혼구원만 감당하라는 잘못된 해석이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대한 반작용으로 역사의 구체적인 장에거 예수가 주임을 고백해야 한다.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당시 가이사거 주라는정치적인 가이사,가이사교에 대한 다분히 정치적인 도전이다. 정치적인 함축의미가 들어 있는 신앙고백이다. 그런 것을 강조하는 신학에서는-에큐메니칼-또 반면에 정치,경제적,투쟁만이 선교로 즉 초월의 평면,내세의 평면-종말론적인 평면은 다 잊어버리고 현재의 정치적 압제가 있는 곳에서 경제적 수탈이 있는 곳에서 투쟁을 함으로 자유,정의,자유를 확립하는 것만이 선교라는 식으로 주장이 진행된다. 이것은 옳지 않다.
예수의 주권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주권이다. 영혼 만이 아니라 현재의 삶 만이 아니라 지금부터 영원까지 우리의 실존 전체에 대한 주이시다. 예수의 주권은 예수의 부활과 높임받음부터 재림까지이며 예수의 주권은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느냐 하나님이 직접 통치하는 즉 (고전 16:24) 예수께서 모든 악의 세력을 꺾고 하나님께 그의 왕권을 돌려주는 그때까지 계속적으로 종말의 평면과 초월한 평면을 좇아야 한다.
또 하나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구체적으로 정치,경제의 상황 속에서 예수의 주권을 선포하고 예수의 주권을 선포한다는 말은 이 기간(현재의 하나님 나라의 기간)은 하나님 나라가 예수의 주권을 통해서 나타난다. 즉 하나님의 통치를 확립한다는 말인데 이것을 구체적으로 정치 경제 영역에서 확립하고자 하는 운동이 많이 있다.
교회로부터 시작되는 운동들이 많고 정식 교회 기구와 관계 없지만 그리스도인들이 연합체들이 그런 운동을 많이 한다. 도시 산업 선교,민중신학,해방신학운동..
또 교회가 시작하지 않았지만 압제자 파시즘에 대한 민족 해방 전선, 이런 곳에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참여한다. 그때에 이런 선교 신학을 가진 사람들이 곧 잘 범하는 오류는 자기들의 운동이 1:1로 예수의 주권 또는 하나님의 주권과 동일시 하는 잘못을 많이 범한다. 즉 자기들의 자기들의 투쟁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것으로 본다. 자기들의 거짓,불의 와 투쟁하는 것이 정치,경제 현장에서 투쟁하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확립하는 것으로 본다. 그러할 때 이 사람들은 벌써 예수의 당시의 열혈당의 논리에 빠지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에서 본 바와 같이 예수는 열혈당의 인간의 투쟁으로, 聖戰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루다 곧 신정체제를 이룬다는 것에 대해 예수는 반대했다.
하나님 나라를 초월성과 은혜성, 하나님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고 인간들은 수동적인 표현-하나님 나라에 들어감. 하나님 나라를 받는 예수는 열혈당의 성전을 통한 신정체제를 구축하고자 하는 그러한 하나님 나라의 개념에 반대하여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께서 확립하는 것이고 인간은 그것에 대한 순종으로 결실이 역사속에서 나타난다고 말한다.
그래서 이런 출발점이 옳은 확대된 선교의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 잘못하면 도리어 자기들의 올바른 신앙의 동기에서 시작했지만 사단의 세력과 싸우면서 자기들의 활동이 예수의 주권을 확립하는 하나님 나라를 확립한다는 사상까지도 전개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모든 구체적인 현장에서 인간의 모든 삶의 투쟁자체도 변증법적인 긴장을 해속할 수 없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고자 하는 의지와 사단의 주권에 사주를 받아서 자기 주장 하는 의지의 변증법적 성격을 다 띄고 있다. 그래서 역사의 과정이 이런 변증법적인 긴장을 다 가지고 있다. 예를 들면 불란서 혁명은 인류 해방 역사에서 크게 경축되었지만 이것은 참, 아름다움,정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엄청난 비극과 공포정치만 초래했고 나폴레온이 엄청난 군부독재체제를 낳았고 하나님의 주권을 잊어버린 인본주의적 자산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주권을 무시하는 인본주의적 세속화 과정에 박차를 가하는 불란서 혁명이 당시 절대 군주의 불의,압제 하에서 해방시키는 그만큼 우리에게 정의,사랑을 가져온 만큼은 예수의 세상을 다스리는 주권에서 왔다고 보아야 한다. 모든 참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불란서 혁명이 가령 절대군주로부터 자유를 얻어냈다면 정의를 구현했다면 그것은 예수의 주권으로부터의 선물로 보아야 한다. 반면에 ___단체가 참,정의...가 아니고 그 자체가 이런 것으로 섞인 것이었다. 이와 같은 모든 인간이 enterpraise가 더 그렇다.
심지어 교회가 하는 활동도 그렇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현실정치,현실경제의 과정 중에서 사단의 주권과 맞서서 스스로의 주권을 확립하려면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적극적인 보다 확대된 선교가 있어야 되겠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항상 비판적으로 해야 한다. 우리의 활동이 사단의 자기 주장할려는 의지에서 나오는 이런 것들에 오염되게 나타나지 않게 하며 항상 비판적이어야 하며 이런 비판적인 태도를 견제한다는 것은 기독교 복음이 ideology가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마치 현실정치에서 자유,정의,인권을 확립할려고 하는 신학-민중,해방신학-이것이 곧 변증법적 관계 없이 일방적으로 하나님 나라 운동이다. 예수의 주권의 현재적 표현 양상일다라고 동일시 할 수 없다. -이런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또 이것이 예수의 주권의 2영역이며 이것이 어떤 관계가 있으며 세상에 예수의 주권이 어떻게 나타나며 그래서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역사 속에서 예수가 주임을 증거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어떻게 적극적인 현실 참여 형태로 나타나는가? 선교로 나타나는가를 지금까지 이야기했다.
그런에 이건 예수가 주다는 기독론적이 인식과 더불어 나타나느냐 또 하나의 근대신학사상이 소위 anonymous Christians(익명의 그리스도인),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 않지만 이미 실제로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것은 로마 카톨릭의 Karl Hahner와 그의 제자들이 개발한 ideaㅇ니데 O.Cullmann도 상당히 긍정하고 있다. 가령 예수가 세상의 주가. 교회는 예수가 주임을 알고 고백하는 사람들의 공동체라면 세상은 예수가 주임을 모르고 사단이 주임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세상은 벌써 예수의 주권 아래 있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축복,구원 등 긍정적이인 가치들을 벌써 받고 있는 존재들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렇다면 그들은 자기들도 모르게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은 예수의 주권 영역에서의 삶이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삻이다. 이런 dialectic이 일어나지만 예수가 사단을 이겼으므로 그들도 궁극적으로 사단보다 더 큰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예수의 구원의 축복이 그들에게도 미친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이 벌써 그리스도인이다. 다만 그들은 그리스도인인줄 스스로 모른다. 그래서 티벳,아프리카 정글에서 예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선을 베풀고,참을 발견,사랑을 행하면 그것은 그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며 하는 행위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가 이름없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신학을 전개한다. 이것은 보편구원론(universalism)으로 연결된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므로 선교는 '네가 이미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그리스도인임을 깨우쳐 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이런 dialectic의 관계가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쪽으로 좀더 기울도록 일깨우는 것에 불과하다.
이 신학이 종교간의 대화에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래서 로마 카톨릭의 Raymond Panikar(인도), Han Kung(한스 퀑) 이런 사람들이 Karl Rahner의 개념을 그런 쪽을 많이 활용하였다. -종교간의 대화-이것이 개신교에도 영향을 끼쳐서 1950년대 에큐메니칼 운동에서 선교를 대화로 규정했을 때 이 신학이 상당히 그 근저에 있었다.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이들은 신약성경에 예수의 주권에 대한 논리의 연장이라고 주장하지만 우리 신약성경과는 관계없는 신학이다. 세상이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예수를 의도적으로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한 그는 사단의 주권아래 있다. 그를 베푼 선,행한 의,발견한 참 등은-그가 사단의 주권아래 있으므로 예수의 주권에 반항하는 것인데-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보다 큰 주권에 의해서 억지로 강요되어 이루어진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의 영역을 여기까지 확대하면 이것은 신약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 로마카톨릭 학자들이 이러한 신학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로마카톨릭의 특징중의 하나가 그리스도의 이름 아래 모든 것을 넣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좋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런 신학이 Raymond Panniker, 인도의 개신교 지도자들에 의해서 어떻게 전개되느냐면 인도,힌두,불교 모두가 그리스도인들이다-자기들은 모르지만-
더우기 예수가 자기 주권을 그리고 거기에 딸린 구원의 은혜를 여기 여러 민족,문화에 그들의 종교를 통해서 베푼다고 확대한다. 그래서 인도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힌두교를 통해서 구원하고 태국 사람들은 불교를 통해서 구원한다.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에 의하면 힌두교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지만 구원을 주는 자는 그리스도이다. 그러니까 괜찮다. 그래서 로마카톨릭이 그리스도의 후례자로 본류이고 힌두,불교,이슬람교 등을 통해서 예수가 그 민족에게 예수의 주권을 나타낸다.
Anonymous Christians과 같이 가는 개념 하나가 cosmic christ(우주적 그리스도)다. 예수가 교회의 주만이 아니고 우주의 그리스도다. 우주의 주다. 그래서 온 우주에서 자기의 주권을 확립하는 분이다. 이러한 사상을 -예수가 우주적 주라는 사상을 갇조한 나머지 예수를 주로 고백하지 않는 세상의 사람도 이미 그리스도인이라는 신학은 지금 이 세상이 예수와 사단의 각축장이라는 현실을 부인하고 사단의 주권이 해소된 것으로 생각하고 그리스도-일원론으로 변증법적인 긴장을 불법적으로 해소시켜버리는 문제가 있다.
그런데 사단의 권세가 완전히 해소되는 것은 예수의 praousia때이다. 지금 현재는 예수우ㅢ 주권과 사단의 주권이 팽팽히 맞서서 각축을 벌이지만 궁극은 예수가 승리할 것이다. 왜 D-day가 지났으므로 그런데 벌써 세상이 예수의 주권의 영향 아래만 있는 것같이 그래서 세상의 성원들이 예수의 주권에 순종할 수 있듯이 사단의 주권에 더 순종하고 있는 것인데 로마카톨릭 신학자들은 일방적으로 너무 빨리 해소시킨 것이다.
그리스도-일원론은 종말론적인 구도에서 본다면 그리스도의 재림때 이루어질 최후의 승리와 그때 있을 예수의 영광의 참여를 미리 너무 빨리 지금 현재 선포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학을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이다. 사실은 지금 현재가 예수의 구원과 사단의 주권의 각축장이기 때문에 사단은 우리에게 고난을 예수는 우리에게 영광과 구원을 가져오기 때문에 그런데 우리는 세상을 부인하고 살아야 하기 때문에 그 삶은 사실 고난으로 나타난다. 자기 부인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의 주권을, 구원을 축복을 맛볼 수 있다. 그래서 현재는 Theologia Cross-십자가의 신학-에 의해서 얻어진다. 즉 현재는 예수의 재림때까지 이전에는 십자가의 신학과 영광의 신학이 교체한다.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은 십자가에 동참함-사단과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는-삶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즉 영광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그런데 십자가의 신학이 없이 종말에 있을 영광의 신학의 승리만을 너무 조급하게 경축하는 의미가 된다.
이것을 또 triumphalism-이미 예수가 사단을 완전히 다 이겨서 이 세상에서서는 마치 고난은 없고 승승장구하고 그리스도인의 삶이 승승장구하는 삶으로 표현한다. 또 enthusiasm 이라고도 한다-광란주의- 하늘의 축복이 이미 도달했다. 그래서 성령받고,구원받고,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어서 이 세상에서 실재하지 않는 삶을산다-고린도인이 가졌던 신앙이다. 그래서 바울이 자기의 고난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십자가의 신학에 의한 실존이라고 해서 고난을 강조했다.
오늘날 은사주의 계통에서만 이 영광의 신학이 있는 것이 아니고...중산층 교회. 십자가 신학을 의연하고 영광의 신학에....심지어 에큐메니칼,해방신학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마치 역사속에서 투쟁을 낙원을 건설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런 것들이 다른 신학적인 배경을 갖고 있으면서도 똑같은 영광의 신학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하여간 신약성경에서는 이 세상이 사단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각축장으로 보기 때문에 일관되게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라고 부르고 있다. 이것이 교회의 선교로 나타난다.
Herrshagts wechsel=Lodship Change 그래서 사단의 주권의 영역에서 회개함으로 벗어나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의 영역으로 들어오는 주권의 변화를 이루라고 한다. 가령 골 1:13. 흑암의 권세, 곧 사단의 권세 영역에서의 그의 사랑하는 아들의 주권 영역으로 불러왔다. 롬1:5에서 바울은 스스로 모든 민족을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불려와서 예수의주권에 순종하도록 하는 것이 자기의 사도직을 보았다. 이것은 포기할 수 없는 신약성경의 가르침이다. 이것은 사단의 주권을 배제하고 예수의 주권만을 강조하며 영광의 신학에 도달하며 이미 다 온 세상이 예수의 주권만 나타나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의 일이 완성된 것으로 종말에 있을 현사이 이미 다 이루어진 것으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지 않는 사람도 그리스도인 이라고 선포해 버리고 이렇게 할 수없다.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s)가 성립될 수 없다.
다른 것으로 넘어가서
①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실존에 표징이다(롬10:9/빌2:9/고전12:3)
롬10:9 시인 고백.: (호모로게인)는 부르짖는다. 시인한다. 주이름을 부른다는 말.
그가 어떻게 주가 되었느냐? 마음속으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높이신 것을 믿으면 그때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시키신 것을 믿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만유의 주로 삼으셨다는 것을 고백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는다. 이것을 소위 세례 약식(Baptismal formula)초대 교회때, 세례 때 이 고백했던 신앙고백의 형태를 바울이 여기서 인용하고 있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세례는-믿는 자가 되는 과정의 종결이다- 믿음의 극화, 사단이 주인줄 알고 살다가 예수가 주임을 고백하고 사단을 주인으로 섬겼던 사람이 죽음을 침례로 나타내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새로운 사람으로 예수의 주권의 영역으로 새로 탄생되는 새로 창조되는 체험을 한다. 그렇게 함으로해서 세례가 그리스도의 교회의 입교 예식이다. 왜냐하면 교회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사람들이 공동체이기 때문.
우리가 우리를 교회의 일원으로 만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표징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전 12:3에서도 그렇게 말한다."누구든지 성령으로가 아니고는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누구든지 성령으로는 예수가 저주 받았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우리가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것은 성령의 역사에 의해서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을 증명한다.
성령받음의 표징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신앙고백에 어떠한 핍박의 상황에서도 이 신앙고백을 신실히 견지해야할 것을 고전 12:3은 암시하고 있다. 대개 학자들이 고전 12:3의 이 댓구는 "누구도 성령으로가 아니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할 수 없고 누구도 성령으로는 예수가 저주를 받았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핍박의 상황에서 나온 것으로 본다. 유대인들에 의한 혹은 로마 관원들에 의한 핍박인지는 논란이 있으나 핍박의 상황에서 나온것으로 본다. 핍박의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을 많이 부인했던 모양이다. 특히 유대인들은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인을 붙잡아서 신21:23을 들이대면서 나무에 달린 자는 자주를 받았다고 했는데 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느냐. 만약에 그렇다면 하나님을 욕하는 것이니 너를 죽이겠다. 네가 신21:23에 의해서 예수를 저주받은 자라고 하면 너를 용서해 주겠다는 핍박의 상황에서 예수가 주라는 고백을 철회하고 예수가 저주받았다고 강요를 한 것 같다. 특히 유대학자들이..
이런 상황에서 많은 믿음이 약한 그리스도인들이 일단 더럽히고 나중에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돌아와서 변명하기를 '아 그때 그 상황에서 성령이 나한테 그렇게 하라고 일러 주어서 그렇게 했다'고 변명한 상황이 벌어진 모양이다. 그래서 바울이 여기서 못을 박고 있다.
성려을 그런 영감을 안 준다고. 핍박의 상황에서도 그리스도인의 실존은 예수가 주라고 고백하고 그 주권에 순종하는 것이다. 이 신앙 고백으로 신자들은 지금 하나님 우편에 군림하는 예수께 충성을 서약하는 것이고 그의 주권에 순종을 서약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신앙고백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신앙고백을 하는 신자와의 사이에 법적인 관계를 성립시킨다.
이러한 관계가 새로워지고 실제로 체험되는 상황이 예배의 상황이다. 그래서 이 주라는 칭호를 예배에서 일어나는 여러 활동들과 관계있는 칭호이다. 예배때 우리는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부르짖고 그의 임재함을(마라나타) 기도하고 빌고 그 주에게 주권을 행사하도록 빌고 우리를 보호하도록 빌고 예배의 그 주로부터 신분이 _____의 심판을 빌고 그 주로부터 치유함을 받고 이렇게 예배의 여러 활동들과 관계해서 쓰이는 칭호가 주라는 칭호다 . 그거와
②주라는 칭호는 윤리적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다.
왜?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종으로 인정하며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기를 서약한다는 것이다. 순종이 구체적으로 나타나도록 하는, 다시 말하면 윤리의 상황에서 쓰이는 칭호다. 그래서 바울은 주라는 칭호를 윤리적인 가르침이나 또는 교회에 있어서 실제적인 문제와 그리스도인들이 실제적인 행동을 규제케하는 context에서 가장 흔히 사용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바울이 즐겨 쓰는 주안에서( )라는 말의 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빌 4:2 빌립보 교회가 아름다운 교회였는데 거기도 문제가 조금 있었다.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열렬한 집사요 바울의 복음의 동역자들로 교회에 큰 공헌을 하는 바울 선교에 큰 공헌을 하는 사람들이었느네 둘이를 중심으로 다툼이 생겼나보다. 그래서 방루이 한 마음이 되도록 권면하고 있다. 구체적인 교회의 문제에서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고 있다. 한마음이 되라고. 주안에서 한 마음이 되라. 그런 context에서 주라는 칭호를 쓴다.
그런데 주 안에서 한 마음이 되라는 소리가 무슨 소리냐? 순두계와 유오디아에게 상기시키는 것으로 너희들이 두 사람 다 예수의 주권아래 있는 사람들이다. 주안에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를 주라고 고백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구하는 뜻은 주 예수의 뜻이다. 교회를 향한 주 예수의 뜻은 하나이다. 그래서 이 두 사람이 주 안에서 자신의 실존을 재점검하면 곧 자기들이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예수의 주권에 순종하는 종들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면 그들은 한마음이 된다. 예수의 교회를 위한 한 뜻을 발견하고 그 뜻에 순종하면 둘이 다 한몸이 된다. 그래서 주는 모든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모든 결단의 최종권위를 가지신 분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그에게 심판을 받을 것이므로 그의 주권자적 뜻에 일치하게 행동해야 한다. 자 이렇게 예배와 윤리와 여기 상황 속에서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 지난번에는 예수의 부활하시고 높임받는 분으로 지칭할 때 주라는 칭호가 쓰인다고 하였다. 또 종말에 영광가운데 다시오실 종말에 심판과 구원을 이루실 분으로 재림과 관계하여 쓰인다. 재림의 성취도 예배롸 관계하여 쓰인다. -오늘 배운 예배의 상황과 연결해서 쓰인다.
③그리스도인들에게 확신과 위안을 주고자 할 때 쓰인다.
예수가 이미 사단의 세력을 꺾고 만유의 주로 군림하시면서 의,사랑,생명으로 통치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인들 혹은 교회는 그 주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어느 상황에서나 겁낼 필요가 없고 도리어 확신을 가지고 기쁨을 가질 수 있다. 왜? 그들의 주가 이미 사단-그들에게 악과 고난을 끼칠려고 하는 -을 이기신 그래서 그들에게 의,사랑,생명으로 충복하고자 하는 분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들은 사단이 악과 고난으로 위협하는 순간에도 인간적으로 두려움과 불안한 상황에 처한 순간에서도 주를 부르짖으며 확신과 위안과 기쁨을 갖을 수 있다.
그래서 주 예수는 순종만을 요구하는 분이 아니라 우리를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승리를 주는 그래서 우리가 위지하며 확신과 위안을 얻을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주이시다.
빌4:4 빌립보서에서는 '기뻐하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빌'에는 사실 기뻐할 일이 별로 없다. 객관적 상황은 바울은 사형선교가 내릴지 모르는 감옥에서 불안한 상황에서 '빌'교회 그 자체대로 엄청난 핍박이 있고 내분이 있고 사실 기뻐할 것이 없는 상황속에서 바울은 기뻐하라는 말을 연거푸 하고 있는데 여기에 주의할 것은 '주안에서 기뻐하라' 여기서 '주안에서'는아까와는 다르다. '주 안에서'가 2가지 경우로 쓰이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 주는 악과 고난으로 다스리는 사단을 꺾고 이기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승리를 주시는 축복을 주시는 만유를 통치하시는 인간의 모든 불안하고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그의 주권을 확립하시고 그의 구원을 이루어 가시는 분임을 싱기시킴. 우리가 그런 분에게 붙들려 있다. 그런 분 안에 있다. 그 분이 우리의 품이 되어서 우리를 품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단의 통치하에 있는 인간의 상황은 우리에게 불안,두려움을 일으키지만 그보다 더 큰 힘이 우리를 안고 있다.
누가? 주께서 그 사단의 세력을 꺽은 주가 그러므로 주안에 있음을 상기할 때 우리는 위안,기쁨,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러므로 주안에서 기뻐하라.
이런때 주는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으로 사단의 세력을 꺾고 승리한 분으로 구원의 주로서 위안과 확신을 주시는 분이다.
④'예수가 주다'는 신앙 고백은 예수의 신성을 깨닥게 하는 신앙고백이다.
지난번에 빌2:9-11에서 본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를 지극히 높이셔서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었다' 곧 자기 이름 야웨를 주었다( )
그래서 하늘에 있는 천사들이나 땅위에 있는 인간들이나 땅아래 있는 것들이나 온 우주가 그에게 무릎을 꿀고 예배하고 그를 라고 하였다.
그리고 예배의 대상이 되었다(이사야 45:23 인용). 야웨 외에는 누구에게도 무릎을 꿇어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그 exclusive 조항. 야웨에게만 무릎을 꿇고 예배해야 한다는 조항을 예수에게 적용한다. 왜? 예수가 야웨라는 이름을 받았기 때문. 그래서 예수가 야웨라는 이름을 받아서 주이기 때문에 사45:23에 의해서 그 말이 온 우주 만물의 경배르 ㄹ받을 수 있다. 이 말은 우리에게 예수의 신성,예수의 하나님 됨.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주라는 신앙고백은 예수의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함. 그래서 예수의 신성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에서 야웨에 관한 말들을 거리낌 없이 예수에 관한 말로 적용하고 있다. 신약성경에서 구약성경을 인용할 때 구약성경의 맥락에서는 분명히 야웨에 관한 것인데 그것을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빛 아래서 보았을 때 그것이 주 예수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를 하고 예수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히 1:10ff인데 여기서 시 102:25ff에 나오는 우주의 창조자로서 야웨에 관한 말씀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곧 우주의 창조에까지 참여한 분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내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차이를 신약성경은 분명히 유지하고 있다(빌2:9-11). 예수가 주 이름을 받았는데 그가 하나님께서 예수에게 자기 이름, 주라는 야웨를 주었는데 그래서 온 우주가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고 예배하게 하였는데 그것이 결국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에서 유래한 것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데 이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받은 예수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정한다면 부자관계로 설정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호칭하고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나 하나님과 동시에 다름이 있는데 하나님은 아버지이고 예수님은 아들이다. 그래서 예수의 이름 야웨와 더불어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 심지어 창조시의 속성까지고 예수에게 주가 되었으가 (히1:10ff) 단 한가지 칭호인 하나님께 유보되었다-아버지란 칭호. 이 한가지만 제외하고 하나님의 모든 칭호들과 속성들이 모두 예수에게 전가되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란 신앙고백에 관한 참고도서
*M.Hengel The Son of God
H.Marshall The origines of N.T. christology
E.Schweizer et,al, TDNT Ⅲ pp334-397
O.Cullmann "신약 기독론"-하나님의 아들
김세윤 The orgin of Paul's Gospel 109-166/256-260/315-319
J.D.G Dunn NT christology in the making p12-64
Ⅰ.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그 의미
1.헬라적 배경
20세기 초까지 종교사학파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유대의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흔적이 없다는데서 헬라적 배경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이들은 헬라 사상이 히브리 사상과는 달리 신과 인간의 차이를 강조한 것이 아니고 신을 인간보다 조금 큰 존재로 생각을 해서 현명한 철학자나 이적을 행하는 자들이나 막강한 정치적 영웅들을 신격화하는 일에 착안해서 예수가 이적을 행하고 또 현명한 그르침을 한 지혜로운 인간이었던 점을 헬라적으로 나태내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신격화해서 칭호하기 시작했다고 추측하며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전적으로 헬라적 배경을 가진 헬라 교회의 산물이라고 보았다.
그런데 실제로 고대 헬라 문서들을 검토해보면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별로 많이 나타나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도 아주 드물게 나타난다. 또 이적을 행하고 지혜로운 가르침을 하고 막강한 정복행위를 한 알렉산더 등과 같은 군사적 정치적 영웅을 신적인간( )이라고 지칭한 예가 없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 Bieler 이래로 라는 개념을 예수에게 적용해서 이적들을 행하고 현명한 가르침,막강한 정복행위를 한 군사적 정치적 영웅들-초인간적인 힘을 가졌다고 생각하는 자들을 인간인데 신적인 사람이라해서 신격화했다고 보고-Divine man-이러한 사상이 헬라 사상에 많았는데 이것을 예수에 적용해서 '막'기독론은 예수를 신적인 인간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막'에서 예수가 이적을 열심히 행하는 분으로 나타난다. 막1:1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시작하고 15장에 있어서 백부장이 '이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것으로 inclusio된 현상을 보고 바로 '막'이 예수는 신적인 인간으로 나타낼려고 한다. 이적을 행해서 스스로를 신적 인간으로 보여줄려고 한다. 그러한 예수를 '막'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야 말로 헬라적인 에서 배경을 가지고 있는 칭호이고 신앙고백이라는 식으로 전개를 했는데 실제로 헬라문서를 살펴보면 E.Schweizer와같이 TDNT의 areicle을 쓴 실제로 W.Von. Martitz가 헬라 문서들을 실제로 survey해 보면 이런 말이 나온 것이 없다. 그 이후에도 헬라 문서를 실제로 survey해 보니까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됨이 흔한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자체가 드물게 나올 뿐 아니라 어느 곳에서도 라는 말이 나온곳이 없다. 이것은 Beiler가 만들어낸 말이다.
한동안은 영지주의의 구원자 신학에도 호소를 하고 신비종교에도 호소를 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런데서 다 나왔다고 하는데 요새 헬라적 배경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나타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과 더불어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실제로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어떤 문서들에 자주 나오느냐 하는 것을 생각해보면 재미 있다.
바울 서신들로 말하면 '롬''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나오고 공관복음에서는 '눅'보다는'마'에 하나님이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흔히 나타난다.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종교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면 바울 서신에서 헬라 종교와 헬라 문화와 가장 절실히 씨름하는 편지들에서 이 칭호가 가장 많이 나와야 할 것이다. 바울 서신 중에서 헬라적 종교사,문화사적 배경과 많이 씨름하는 고전후서에-헬라적 종교현상과 가장 많이 싸우는 곳.헬라적 지혜의 이해,헬라적 우상숭배,헬라적 이원론,영과 육에 근거한 이원론,여러가지 윤리적 문제,결혼의 문제,헬라적 이원론에 근거한 육신의 부활의 부인,헬라적인 종교 현상에 의한 열광주의라고 하는 성령과 성령의 은사의 오해로 인한 문제등을 다루는 곳이 고,전후서다.-그렇다면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배경을 가지고 있다면 헬라적 종교현산을 다루는 고전후서에서 가장 많이 이 칭호가 쓰여야 할 텐데 그러기보다는 유대교의 율법과 율법의 행위와 씨름하는 '롬,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가장 많이 쓰인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또 이방적인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는 '눅'보다는 철두철미하게 유대적인 orientation을 가지고 있는 '마'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하느냐? 이것은 유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헬라적 배겨을 가진 것이라기보다는 유대교적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유대인들에게 또는 유대교를 이해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에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하는 것이 더 의미 있었던 것같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래서 우리들은 헬라적 배경을 작별하고 구약성경과 유대적인 배경을 한 번 찾아보자.
2.구약적인 배경
구약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은 3가지 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붙였다.
1)천사들에게 인데 이 때 천사는 하나님의 하늘의 궁정의 시종들로 궁정에서 살며 시종을 드는 존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된다.
2)하나님의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을 단수로, 집합명사로 하나님의 아들 또는 개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지칭한다. 이것의 고전적인 text는 출 4:22f인데 이것을 언약에 의한 선택의 특별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자 함. 그래서 '내가 너희 하나님이 되고 너희가 나의백성이다'는 언약에 의해서 하나님의 이스라엘의 아버지가 되고 아버지로서 이스라엘을 보호,구원하시며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그래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사는 관계에 있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부자관계로 나타난다. 이때 이스라엘의 백성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3)이스라엘의 왕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부여되는데 이 때 왕은 하나님의 대신으로 하나님의 백성인 하나님의 아들들인 이스라엘을 통치하는 자라는 합법적으로 하나님 대신에 통치하는 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이스라엘의 왕을 하나님이지. 하나님 대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합법적으로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또 하나님의 아들인 이스라엘 백성의 대표자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때 왕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은 고대세계에서 왕권에 합법성을 주기 위한 형식으로 온 세계의 보펴적인 현상이다.-에집트의 왕인 파라오가 태양신의 아들이라고 보았고 메소포타미아의 바벨론에서도 마찬가지. 중국에서도 황제를 천자라고. 일본의 천황도 태양신의 아들, 한국의 단군 신화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고대세계에 일발적인 현상으로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함.
이것은 왕권의 합법성 정통성을 표시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스라엘에서는 언약 신학의 틀에서 나타난다. 이때에 왕이 신에 의해서 낳음을 받는 것인데 구약성경에서는 왕을 시2:7 "너는 내 아들이고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인데 낳앗다는 말이 에집트적으로 육신적으로 낳앗다는 문자적으로 이해된 것이냐? 왕이 하나님의 선택과 은혜로 하나님 대신 통치한다는,낳는다는 말은 metaphor로 사용된 바벨론식으로 이해된 것이냐에 대해 토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런 것은 더 이상 재론의 여지 없이 구약성경에 있어서 왕이 하나님으로부터 낳음을 받았다. 낳음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때 바벨론 식으로 metaphor로 사용되었음을 거의 다 동의한다.
여기서 이 전통에 속하는 것이 나단의 예언이다. 삼하 7:12-16에 나오는 나단의 예언에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다윗의 씨=다윗의 아들'을 택해서 다윗의 왕위에 앉히고 그래서 너의 집을 세우겠다. 즉 다윗 가문을 세우겠다. 그래서 너희 왕위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하나님의 아들로 삼겠다. 그래서 내가 그의 아비가 되고 그가 나의 아들이 된다.
그리고 그로 하여금 나를 위해서 성전을 짓게 하겠다는 예언이다.
그래서 이제 다윗 왕조를 성립시키는 하나님의 신학이다. 다윗아들이 다윗의 왕위에 오르고 그가 합법적인 하나님 대신에 하나님 백성위에 군림할 수있는 왕이라는 것으로 내세우기 위해서 하나님의아들로 선언하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나온 것이 등극시이다. 가령 시편 2:7, 다윗의 아들이 다윗의 왕위를 계승할때, 그가 왕위에 등극할 때 너는 나의 아들이라는 선언이 울려 퍼진다. 그래서 네가 하나님 대신 합법적으로 하나님 백성 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선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시89:4ff/27ff/대상17:13/22:20/28:6/사9:5,11 등에서 제2나단의 심판이 재해석되면서 역대 이스라엘 왕에게 적용될 뿐만 아니라 미래에 올 다윗왕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솔로몬을 정점으로 해서 퇴락하기 시작하는 다윗 왕조의 실망을 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나단의 신탁을 자꾸 미래의 진짜 왕다운 왕을 기대하는 것으로 미래에 다윗과 같은 성군을 기다리는 소망의 근거로 삼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벨론의 침공으로 완전히 망해서 다윗 왕조가 끊어졌다. 그 뒤에 페르시아의 고레스 왕의 칙령으로 바벨론으로 포로갔던 유대인들이 돌아올 때에 그들을 이끌고 돌아온 사람이 스룹바벨인데 그는 다윗 가문의 왕자다. 그래서 스룹바벨이 성전을 짓는 그일을 두고 나단의 신탁이 성취되어서 다시 한번 다윗 왕조가 재건될 것으로 보고 곧 스룹바벨이 다윗의 왕위에 등극할 것으로 보고 다시 말하면 유대가 페르시아의 식민 통치에 독립하고 해방이 되어서 솔로몬의 태평성대가 새로 이루어질 것으로 보고 스룹바벨과 그의 성전 건축을 중심으로 메시야 사상이 굉장히 일어났다(슥4:6-10/6:12-13)
그런데 스룹바벨도 유명무실하게 끝나고 그가 지은 성전도 솔로몬의 성전보다 훨씬 못하고 유다는 독립은 커녕 계속해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고 알렉산더에 의해서 멸망하고 알렉산더 후계자들인 톨레미 왕조와 셀류키드 왕조의 통치를 계속 받으므로 유대 사람들은 나단의 예언이 점점 더 종말론적인 미래로 투사하기 시작해서 종말에 올 다윗의 씨, 다윗의 아들,다윗의 가지를 기다리게 된다. 이것이 유대 메시야 사상의 근거를 이루게 된 이유다.
그래서 다윗의 씨, 아들,가지 등이 메시야의 칭호를 이었고 다윗의 씨,아들,가지가 와서 나다의 신탁을 다시 한번 성취해서 다윗의 왕위를 복원하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위에 군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곧 이방민족들로부터 유대가 독립하는 것을 의미할 뿐 아니라 다윗이 이방민족을 정복했듯이 다 정복해서 이스라엘 백성의 높임을 의미하기도 한 것으로 보아싿.
3)유대교
구약내에서 그렇다면 우리는 이미 유대교 속으로 들어갔는데 유대교에서는 구약성경에서와 마찬가지로 3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쓰는 전통이 계속된다. 다만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경향이 약화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3존재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는 전통이 계속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대교에서 다음과 같은 2가지 아주 중요한 전승사적 발전이 이루어지는데 그 하나는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의 중보자적 개념이 발달하고 그리고 binitarianism(二位一체) 이라고 해서 절대적 유신론(absolute monotheism) 가령 신6:4에 쉐마 같은 데 보면 절대적 유일신론인데 여기서 하나님이 이위일체론적인 신론이 발달되고 이스라엘 백성의 신격화의 사상들이 발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게 어떻게 이루어지느냐? 지혜 신학과 묵시문학에서 발달하는데 가각 지혜 신학에서 하나님의 지혜가 원래는 하나님의 한 속성으로 간주되었으나 점차 독립적인 개체로, 존재로,인식이 되고 인격화 되어서 세상의 창조전에 창조된 선재하는 하나님의 말로 인식이 되고 하나님의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실행자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 위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는 존재로 가령 (솔로몬의 지혜 9:4-10) 그래서 하나님의 어좌에서 하나님에 의해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실행자,일꾼으로,시온에 내려와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고 뜻에 따라 사는 사람들을 지혜롭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는 존재다.
그래서 알렉산드리아 철학자 philo는 여러 책에서 지혜를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구약에서 유대교로 넘어오면서 점점 하나님의 초월성이 강조되었다. -하나님의 거룩성.
그러나 동시에 구약적인 신관은 초월한 하나님의 내재하심-세상에 간섭하시고 역사에 간섭하시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에게 자기를 계시하시고 그들을 인도하며 구원하시는 분-
그러면 초월하신 하나님이 이 세상에 어떻게 오셔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보호하시고 구원하시느냐? 내재하시느냐? 이 문제를 해결하기위해서 발달되는 신학 사상이 지혜신학이다. 곧 초월하신 하나님이 자기 지혜를 내려 보내서 자기를 계시하게 하고 자기의 구원 사업을 담당하게 한다. 지혜가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행할 수 있는 이유는 지혜가 하나님의 한 부분으로 -하나님의 지혜다-그래서 선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적이고 하나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는 실행자로서 세상에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을 실행하는 분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를 하나님과 구분해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제 딸이라는 의미는 지혜가 히브리어로 고,헬라어로 sophia인데 둘다 여성명사이므로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하나님과 분리할 수 없는,하나님의 전권을 가진, 아들,딸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상속의 개념인데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 곧 신성,하나님의 모든 속성과 권능을 상속받는 존재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모든 신성을 가진 존재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실행하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지혜문서를 보면 지혜와 하나님을 분리할 수 없는 고나계를 강조하는 문구들이다.
그래서 지혜가 보통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있다. 그곳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세상에 오시는데 시온을 택해서 그곳에 내려와서 거기다 천막을 치고 이스라엘 백성과 같이 어했다.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뜻을 행했다. 그러면 시온에 하강한 하나님의 지혜가 어떻게 나타났느냐? Sirach24장에 의하면 모세 율법에 스스로를 나타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지혜가 모세 율법(Torah)에 담겨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지혜와 모세 율법인 Torah와 identify해서 사람들이 어디서 하나님의 지혜를 찾을 수 있느냐? Torah에서.
사람들이 어덯게 해서 지혜가 주시고자하는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 토라를 연구하고 토라를 준행함으로서 그래서 율법을 연구하고 지킴으로서 이렇게 신학이 발전했다. 그러니까 지혜신학의 발전은 근본적으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성을 청명하기 위해서 발전한 신학이다. 신이 절대적으로 초월만 하면 구원이 일어날 수가 없다. 계시 역사,초월한 신은 동시에 이 세상에 내려와서 자기를 이 세상에 계시하고 또 자기 구원의 뜻을 베풀어야 인간들에게 구원이 일어난다. 이러한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기 위해서 이것이 동시에 천명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도 그렇지 않으면 계시도 있을 수 없고 구원도 있을 수 없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것이 삼위일체론적 신론의 가장 근본되는 논거의 시작이다.
지혜 신학이 얼핏듣기에 옛날 사람들의 신화적 이야기 같은데 이것 아주 고도의 신학 용어이다. 하나님의 초월성과 내재성을 동시에 천명하는 언어적 수단이다.
지혜와 같은 것으로 또는 지혜를 담고 있는 율법신학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들 사이에 중보의 개념으로 발달하는데 이 중보자,지혜가 이위일체론적 신론을 이미 암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 이위일체론적 신론은 또 묵시문학에서도 발전한다.
묵시문학
그것은 가령 겔1:26-28:거기에 보면 에스겔이 하나님의 신현(theophany)을 본다. 전차 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높여 있고 그 어좌 위에 하나님이 사람의 형상으로 나타나있다.
:사람의 모습과 같은 형상으로 나타난다.
겔 1:26은 창 1:26을 뒤집어 놓은 말이다.(자기 형상과 자기와 비슷하다는 말이다. ) 그래서 가령 Von Rad, J.Baur 같은 구약학자는 '창'의 위대한 천명-하나님이 인간을 자기 형상대로 만들었다-은 '겔'에 나오는 것같은 하나님을 인간의 형상으로 체험한 소위 제사장적 전승에 근거를 하고 있다고 한다. 문서설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이것을(?) 제사장 문서라고 한다. 그래서 Theophany는 특히 성전에서 나타나는데 성전이 하나님의 거처이다.-하나님은 보통 하늘에 거처하시는데 지상에 오시면 성전에 거처한다-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이 나타난다(사6장). 그래서 성전에서 하나님의 신현을 체험하는 제사장적 체험에서-하나님이 인간의 형상을 가지고 나타남.-
인간이 하나님과 형상에 있어서 비슷함이 있다는 착안에서 이 위대한 천명.하나님이 인간을 자기형상으로 지었다는 천명이 나왔다고 구약학자들은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말이 신학적인 토론에서 수없이 여러갈래로 해석되었다 .그런데 이거은 기독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이미 유대 신학에서도 그했다. 랍비 신학과 영지주의 신학도 인간이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냐? 인간의 무엇을 두고 하는 소리냐? 에 대한 토론은이미 랍비 신학에서 수없이 여러갈래로 해석되었다. 대표적인 해석은 C.Westermann의 창세기 주석에 나와있다. 인간의 하나님의 형상됨을 하나님은 인식하시고 언어를 사용하므로 relational concept로 보아지고(?)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존재로, 인간이 다른 짐승과 달리 하나님과 관계를 맺을 수있는 Quality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는 식으로 자꾸 추상화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는데 이런 구약학자들의 말이 맞다면 아까 그런 것도 다 포함하겠지만 하나님은 안보이시는 분이지만 보이시기로 한다면 인간의 형상 비슷하게 보이신다. 그래서 외형적인 면에서의 비슷함을 배제할 수 없다.
너무 추상화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이런 경고를 하고 있다.
그런데 겔 1:26이 하나님이 인가의 형상으로 나타났다고 했는데 겔 1:28은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 )의 나타난 모습이었다 .주의 영광이란 개념, 영광은 하나님의 본질의 표현인데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날때 하나님이 엄청난 구름을 동반하고 나타나는데 구름이 하나님의 운반체다.
그때 광채가 빛나는데 이 광채가 영광의 외형적인 표시이다. 영광 자체는 하나님이 본질이 드러나는 상태가 영광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났다는 말은 하나님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났다. 그런데 '겔'에서 하나님의 영광이란 말이 하나님과 독립되는 경향이 있다. 점점.
하나님 자신과 독립되어서 하나님을 보여주는 하나님을 계시하는 독립적 개체로 이해가 된다. -'겔'전반에서- 아까의 지헤와 비슷하게 영광이 독립된 개체로 ,추상황된 개념이 아니고,시공을 차지하는 물체와 같이 인식이 되고(hypostatized) 인격화되고 (personfied) 이러한 전승이 좀 더 발달한 것이 단7:13이다. 단 7:9에 하늘에 하나님의 어좌들이 놓이고 하ㅏ님이 거기에 등극하시고-백발이 서성한 옛적부터 게신 노인의 형상으로 나타나시고-내가 또 보니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사람의 아들 같은이는 사람이란 말의 숙어이다- 사람 같은 형상을 가진 하나님이 나타났는데(단7:13) 이가 하나님의 어좌 옆에 앉는다. 그래가지고 이 존재가 하나님으로부터 나라를 받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의 해석은 단 7:18ff에 되어 있는데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
그래서 '한 사람의아들 같은'존재가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해석되었다. 그래서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의 어좌 우편에 등극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이 종말에 하나님의 어좌 우편에 등극을 한다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여기서 2가지가 나타나는데
첫째는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가 '겔'의 의 좀더 굳어진 상태, 좀더 독립된,좀더 발전된 상태라고 대개 본다. 그렇다면 '겔'에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이 하나인데 동시에 2개체로 인식된다.
이 '단'에서도 '옛적부터 게신이가 한 사람의 아들 같다'는 분이 하나인데 동시에 2존재로 인식된다. 그래서 이위일체론적 개념의 발달이 하나 일어났고
둘째는 '한 사람이 아들 같은 이'가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 곧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어좌에 높임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이것은 apotheosis of Israel-하나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에 하나님 같이 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됨의 그 사상을 여기서 나타내고 있다 여기 binitarianism적인 발달은 이제 '겔''단'에 theophany vision-하나님의 출현을 이어 받은 하나님의 출현을 보는 전통을 -mysticism이라고 한다.
-신비주의라 하는데 는 '겔' 1장에서 하나님의 어좌가 놓였던 전차이다. 전차위에 하나님의 어좌가 놓이는 vision을 보는 전통을 -mysticism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mysticism이 주후 2세기초에(주후 110-135년에 활약한 당대의 가장 유명한 3랍비들이 하늘에 올라갔는데-환상 가운데-그중에 R.Elisha ben Aubjah라는 랍비가 하늘의 궁정에서 하나님을 보고는 '하늘에 두 힘이 있구나'하고 외쳤다.
하늘에는 하나님 한 힘만 있어야 하는데-'힘'이라는 말은 하나님에 대한 별칭이다-두 힘이 있구나.
하나님의 어좌위에 하나님 혼자 앉아 계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의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그의 또 하나의 존재를 -mysticism에서는 metatron이라고 한다.
metatron에 대해서는 어원이 무엇이며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많은 해석이 있는데 하나님 어좌 뒤에 앉는 존재라해서 metatron이라고 했을 것이다.
R.Elisha ben Aubjah가 하나님과 metatron이 하나님 어좌 위에 같이 있는 것을 보고 지금까지 자기들은 하나님이 한 분이신줄 알았는데 하나님이 2분이시구나. 하늘에 2힘이 있구나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래서 이것이 유대의 유일신론을 거스린 이단이라고 해서 유대교에서 추출당했다. 그러나 그것과 관계없이 계속해서 하나님의 어좌 가운데 하나님과 metatron이 앉아 있다(Elisha ben Aubjah의 이야기는 바벨로니아 탈무드 15장 A-h.hagiga 15a-에 나온다)
그 다음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할 것은-에녹서는 3권이 있는데 1에녹서는 에집트 언어로 보관되어 있어서 예디어피아 에녹,제2에녹은 슬라브 언어로 보관되어 슬라브 에녹,제3에녹은 히브리말로 보관되어 있어서 헤브라이 에녹이라고 함.-
제 3에녹은 AD 4세기 문서이나 그 안에 담긴 전승은 오래 된 것이지만 쓰여지기는 주후 4세기경 쓰여진 책이다. 거기서 metatron을 소야웨라고 부른다.
이런 R.Elisha ben Aubjah 이야기나 제 3에녹의 metatron 전승이나 '겔''단'을 거치는 binitarinism적인 사상의 발달이라고 볼 수 있다.
또 재미있는 문서가 '요셉의 기도'이다. 거기에 이스라엘의 조상 야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중의 대장이다. 하나님의 아들들인 천사들중의 대장으로서 천사작으로서 원래 하나님의 어좌 위에 앉아 있는 존재인데 야곱 이스라엘 속에 인간으로 나타났다. 그래서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조상이 되었다는 사상이 나타난다.
이것과 연결된 사상이 창 28:12의 야곱의 벧엘에 있어서의 꿈이야기에 대한 유대인들의 전설이다. 이 전성은 Targumin-구약성경의 아람어 번역인데 해석을 첨부한 번역이다-에 전부 나온다.
또 랍비들의 창세기 주석 62장에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야기 내용은 -이 이야기 내용은 여러 곳에 많이 나와서 중요한 것을 알 수 있는데-야곱이 에서에 쫓겨서 아버지 집을 떠나 그 어머니 집으로 가는 중에 벧엘에서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그래서 하늘이 열리고 야곱위에 사다리가 놓이고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했다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는 Tardun과 랍비들의 주석에서 무엇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느냐면 야곱 이스라엘이 그 아비 집을 떠날 때 천사들이 동행하고 야곱을 호위했다. 그래서 야곱이 벧엘에서 피곤해서 잠이들자 천사들이 야곱의 얼굴을 처음으로 쳐다보고 사다리를 내리고 빨리 하늘로 올라가서 하늘에 있는 다른 천사들에게 야! 너희를 야곱 얼굴 볼 수 있는 절호의 챤스다.하나님 어좌 위에 야곱이 앉아 있는데 또는 야곱의 형상이 하나님 어좌에 새겨져 있다고도 하는데 그런데 하나님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형상이 너무 거룩해서 천사들이 쳐다볼 수 없다. 천사들이 늘 야곱의 상이 어떤 것이냐 호기심이 가득했지만 너무 거룩해서 쳐다보지 못하고 얼굴을 가리우고 있었는데 이 야곱의 형상에 똑같은 형상이 지금 벧엘에서 잠자고 있으니 너희들이 빨리 내려와서 구경을 하면 어좌에 앉아 있는 야곱의 진상을 알 수 있다고 하여 천사들이 오르락 내리락 저녁내내 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단 7장과 사상이 똑같은 이야기인데-'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나님 보좌 우편에 높임 받는 존재인데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데 그 사상은 무엇을 나타내느냐면 종말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 어좌 위에 높임을 받음. 그래서 하나님 같이 됨.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함을 나타냄.이같이 다 똑같은 사상을 나타내는 이야기이다. 다 궁극적으로는 언약신학의 표현이다.
언약신학에 의해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곧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교제를 나누고 하나님의 모든 부요함을 상속받고-하나님의 자녀가 되니까-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숙명을 받은 그것이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것.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는 것. 그래서 하나님과 가장 밀접한 교제를 나누는 것. 이것이 이스라엘의 숙명이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하나님의 어좌위에 높임받는것 그것이 언약신학이다. 그런데 실제는 갖기는 에서한데 쫓겨 갈바를 알지 못하는 존재다. 다시 말하면 이 사상을 발달시킨 당시 이스라엘은 바벨론,페르시아,헬라,로마에 지배당하고 나라가 완전히 망하는 성전이 부숴진 현실, 하나님의 자녀라고 말하는데 실제는 쫓기고 짓밟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종말에는 그들의 숙명이 성취될텐데 곧 하나님의 언약이 성취되어서 그 언약에 의한 숙명이 성취될텐데 그 숙명은 하나님의 어좌에 높임받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이스라엘의 숙명이다. 이러한 종말론적 소망,언약신학이 허락하는 종말론적 소망을 이스라엘백성-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한 종말론적 소망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런 이야기들을 하는 것이다. 옛날 고대 이야기들을 읽으면 다 우수꽝스러운 신화같은 이야기지만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려고 했느냐? 지금 이야기하는 진리를 표현하고자 하는 자기들의 언약신학과 언약 신학에 근거한 소망을 표현하고자 하는 언어 수단이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발견하느냐면 한편은 지혜 문학을 통해서 한편은 묵시문학을 통해서 유대교에서 새로운 전승사적 발전 이것은 언약신학의 펼침이다. 그리고 유대 신관의 펼침이다. 하나님은 절대적 유일하신 분이나 거룩 초월하신 분이나 동시에 내재하신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초월하신 분이 내재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위일체론적인 신개념이 발달하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중보자 노릇하는 '지혜''한 사람의 아들 같은이''metatron' 같은 존재가 설정된다. 이런 '지혜''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metatron'은 하나님의 신성에 동참하는 자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어좌에 앉아 있는 자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하나님의 일을 실행하는 실행자 노릇을 한다. 초월적인 하나님의 내재의 수단으로 이용되는 존재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 설정이 되고 다른 한편으로 언약신학의 표현으로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 세상에서는 쫓기고 짓밟히지만 종말에는 언약대로 하나님의 우편에 높임받아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한다. 그 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 같이 됨(Apotheosis). 이스라엘이 하나님 같이 됨의 사상을 발달시키는 것. 이것이 유대에서의 하나의 새로운 발전이라면 발전의 씨는 다 구약성경에 있다. (잠8장)
binitarianism의 발전도 '겔''단' 에 그 씨가 다 있는데 그것이 유대교에서 더 펼쳐진 것이다.
두번째는 이스라엘을 전체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것이 아니고 언약에 충실한 남은자들과 믿음 없는 유대인들을 분리해서 언약에 충실한 남은 자들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려는 경향이 점점 발달한다.
야곱의 자손이라고 해서 다 언약의 백성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실제로 언약을 지키는 자들만 언약의 백성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이 발달한다. 그래서 지혜문서에 보면 지혜를 받아서 언약에 충성함으로 이들은 지혜를 받아서 야웨를 경외,순종하는 자. 어약을 지키는 자들, 이들만 지헤로운 자이고 의로운 자들로 이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다(시락4:10/솔로몬의 지혜2:18/5:5/2:13).
이들이 주의 종들이며 이들은 이 세상에서 언약의 충실하지 않은 패역한 자들에 의해서 무시,고난받지만 이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대상이 된다.
이 사상은 단7:18ff에도 벌써 비춘다. 모든 야곱의 자손들이 모든 이스라엘이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성도들만, 종말에 끝가지 언약에 충실한 남은 자들만 구원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들만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며 구원을 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A.Philo의 책에 "Confusione linguarorum)의 146장을 보면
"아직까지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칭호를 받기에 합당하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그는 빨리 하나님의 첫아들인 에게로 들어가도록 하자. 이 는 하나니므이 천사들 중에 제일의 장로이며 천사장이다. 그의 이름이 여러가지 인데 '시작''하나님의 이름''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의형상으로 지음받은인간''하나님을 보는 존재 곧 이스라엘'등이다." 그러므로 가 하나님의 첫 아들로서 천사장이고 그의 이름이 여러가지인데 그중의 하나가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은 야곱의 이름이다. 야곱의 진정한 아들들만 하나님의 아들인데 야곱의 육신적인 아들 중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림받기에 합당하지 못한 자들이 있다. 이런 잗르은 야곱의날개-이스라엘의 날개, 의 날개-속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도록 하자. 그럼으로 여기에 육신적인 이스라엘과 진짜 이스라엘,언약의 백성 이스라엘을 분간한다. 이들에게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서 진짜 이스라엘,하나님의 후손이 될 수 있는가? 그이 날개 밑에 들어가는 것. 밑에 들어가는 것. 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곧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계시에 순종하라는 자가 되라는 것이다. 이런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는데 또 한가지 우리가 중요한 2가지 발달이기에 유대교에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 적용되는 상황을 보면
세째 하나님의 영의 힘을 얻어서 이적을 행하는 사람들,또는 신비적인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본 사람들, 이런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붙었다.
그 다음에 우리가 눈여져 보아야 할 것은
쿰란 문서를 보면 나단의 예언 전승이 멧야적으로 해석이 되어서 다윗의 아들,다윗의 씨,다윗의 가지만 메시야 칭호인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도 메시야 칭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아까 말한 것처럼 최근까지 종교사학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유대교에서 메시야의 칭호로 쓰인 일이 없다는 단정하에 헬라적 배경을 찾을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이제 쿰란 문서가 발견됨으로서 4Q Flor 1:1-11 이곳에 나단의 예언이 메시야적으로 해석이 되었는데 다윗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로 곧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로 지칭된 것이 나타난다. 또 1Qs 28a 2:1ff에도 마찬가지다. 4Qps Dan Aa에도 나단의 예언이 메시야적으로 재해석 되었는데 그 곳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메시야적 칭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참고:김세윤 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pp20-22). 그래서 쿰란 문서들이 우리에게 신약성경 전의 유대교에서 나단의 예언의 메시야적 해석 과정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메시야에게 적용되었던 메시야적 칭호임을 증거해 주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막14:61 같은 곳에 '네가 메시야냐 하나님의 아들이냐'고 대제사장이 에수에게 물음.
지금까지는 이것을 가짜로 보았다. 왜?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쓰인 일이 없는데 유대교에서 대제사장이 예수에게 '네가 메시야 곧 하나님이 아들이냐'고 묻는 것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다 가짜다.
그런데 나중에 헬라적 배경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예수에게 발달시켜 놓고는 이렇게 예수 당시로 거스러 올라가서 심지어 대제사장 입에 이 말을 넣었다고 했는데 그렇지 않다.
쿰란 문서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면 신약성경 전에 유대문서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메시야의 칭호로 쓰인 적이 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아주 풍부한 하나님의 아들 사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여기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상적 배경을 찾야어 하겠다.
신약신학 제 18강
지난 번에 유대교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의 유대교적 배경을 살펴봄에 있어서 구약성경의 전승이 어떻게 유대교에서 중대한 발전을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주로 지혜 신학을 통해서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천명할려고 해서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실행자로서 지혜 곧 하나님의 딸에 대한 사상이 발전한다고 했다.
또 묵시문학에서는 하나님의 보좌위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하들에 해당하는 또 하나의 신적인 존재가 앉아 있다는 겔 1장에서 유래하는 이른바 -vision 전승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 하나님과의 어좌 위에 앉아 있는 존재가 한편은 그의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metatron-작은 야웨-로서 하나님의 실행자 노릇을 한다는 사상이 있었으며 다른 한편으로 이분이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이다. 야곱 이스라엘이다. 야곱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어좌 위에 앉아 있다. 이것은 언약신학의 표현으로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의 부요함을 상속받는 자다. 그래서 하나님과 뗄래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교제를 나누며 하나님의신성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해야 하는 것은, 참여하는 숙명을 가졌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이 언약신학의 표현이며 언약신학에 근거한 이스라엘의 종말론적인 소망을 표시할려고 한 것이다. 이런 것들을 조직신학적 케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인 계시이다. 구약성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자기 계시자 점진적으로 더 많이 계시되는 것이다.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 그러면 이와같은 점진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인간의 카테고리로 이해하고 인간들의 말로 표현해야 하는데 그러한 표현의 수단이 지혜신학이고 묵시 문학의 -vision 전통이다. 귀납적으로 관찰하는 성서신학에서는 이런 것을 전승사적 발전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들은 똑같은 말이다.
지난 시간에 우리가 또 살펴보았던 것은
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어냑의 관계에 의한 것이므로 점차 유대교에서 모든 이스라엘, 모든 야곱의 자손들에게 전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부여하기보다는 실제로 언약을 지키는자들 곧 선지자들에 의하면 남은 자들, 지헤 신학의 언어로 말한다면 지혜로운 자들.
시락24장에 의하면 지혜가 모세의율법에 담겨 있으니까 율법 신학에 의하면 율법을 지킨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충실한, 언약에 충실한 이 자들만 의로운 자들만, 지혜로운 자들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적용하는 경향이 발달한다.
또 한가지는 나단의 예언(삼하7:12-16)까지가 강력한 메시야 사상을 창출했는데 그것이 쿰란문서들에 증거되어 있어서 쿰란 문서에서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로 쓰인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금세기 초에 종교사학자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은 무조건 헬라적인 배경을가진 헬라 교회에서 생긴 신앙고백이다라고해서 헬라 사상적인 배경을 찾을려고 했는데 그 중요한 이유중의 하나가 유대교에서는 메시야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한 예가 없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야 말로 헬라적 배경을 가진 것이다는 식으로 생각을 했는데 이 쿰란문서에서 메시야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호칭된 증거가 최근에 나왔다.
그러나 헬라세계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아주 드물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배경을 위해서 헬라사상으로 갈 것이 아니고 구약과 유대교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우리가 관찰한 구약과 유대교의 배경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약성경의 신앙고백에 아주 중요한, 우리의 신약성경의 신앙고백을 자세히 그리고 환하게 이해하는데 배경을 제공한다.
Ⅱ.지금까지 배경을 했으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를 하겠다.
1.이것은 첫 부분의 간접기독론의 증거들이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이 아들로 본 것을 가르쳐 준다. 예수가 하나님께 아빠라고 불렀다든지 아멘 사용법의 독특성에서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주장을 했다든지 또는 하나님의 죄를 용서해 주는 권위를 주장했다든가 또는 적어도 내 해석에 의하면 예수가 자기를 '그 사람의 아들'로 칭함으로 말미암아 종망에 하나님의 백성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대표하는 분으로 스스로르 내세웠든가 이런 것들이 다 간접 기독론과 예수의 그 사람의 아들이라는 자기 칭호가 제시하는 증거들이고
또 하나 덧붙인다면 지난번에 '예수가 주다'는 신앙고백과 더불어 살펴본 막12:31ff에 나오는 예수의 다윗의 아들에 대한 논쟁, 예수는 나단의 예언 전승에서 나오는당시 주종을 이루었던 민속메시야 사상에 시편 110편에 근거해서 도전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이라는 사상에 시편 110;1에 다우시의 메시야를 내 주라고 하는게 메시야가 다윗의 주인데, 어떻게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일 수밖에 없느냐?고 상당히 알송달송한 신학논쟁을 일으켰다고 했다. 거기서 예수가 은근히 나타내고자 했던 것은 메시야가 육신적으로 다윗의 자손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다윗의 주가 되는 분이다. 겨우 다윗의 왕위나 재건하고 다윗의 통치나 흉내내는 그런 인간적인 다윗 왕적인 메시야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아들로서 다윗의 주라는 것을 부각시키기 위해서 그와 같은 논쟁을 일으킨 것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래서 이런 것들이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본 강력한 증거들이다.
2.그 외에 또 중요한 자료들이 있는데 예수가 자신에게 아들이라는 칭호를 몇번 사용한다. 적어도 3번은 상당히 중요한 대목에서 사용한다. 첫째가 마11:27은 눅10:22과 같은데 것을 Q자료라고 한다. 이 Q자료, 마태와 누가가 공통자료에 5개의 지혜의 말씀이 있다. 그래서 양식사가들은 5개의 지혜의 말씀을 Q자료에서 구분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지금읽은이 말씀이다.
그 다음 마11:28ff도 지혜의 말씀이다. 왜 이것을 지혜의 말씀이라고 양식사가들이 분류하느냐면 이 말씀의 형태와 양식과 내용이 지혜문학 전승에 속한다. 이런 자료를 Q자료라고 하는 이유는 공관복음의 문제에 있어서 2문서설을 가설로 쓰는 사람들에 의해서 그러하다. -이말을 안쓸려면 공관복음 문제에 있어서 Griebach의 가설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태가 제일 먼서 쓰였고 '눅'이 '마'를 보고 썼고 '막'은 '마'의 축소판이고 '눅'도 조금 보았다. 마태 우선설.
Q라는 자료를 이야기 하는 사람들은 '막'이 제일 먼저 쓰였고 '막'와 독립된 또 하나의 '눅''마'의 '막'에서 오지 않는 공통자료가 있고 '마'는 '막'을 보고 썼고 '눅'고 마찬가지다. 또 '마'의 특수 자료가 있고 '눅'의 특수 자료가 있고. 이런 식으로 해서 공관복음의 근본은 2자료다해서 2자료설이라고도 하고 4자료설이라고도 한다.
마태-+--- 누가
|
+--- 마가
(Grieshach's hypothesis)
마가 Q
M 마태 누가 L
(two-document hypothesis)
이것이(Q) 학자들의 다수 의견이고 마태 우선술이 학자들의 소우 의견인데 소수 의견이 최근에 일부 부활하는 경향이 있는데 아주 일부 소수들이다.
-마태 복음은 교회의 전통이 가캐라고 말하고 있다. Papias에 의하면 '마'을 연구해 보면 레위 마태가 썼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 '마'는 상당한 성경신학자이다. 랍비들의 토론방법과 전승,구약해석을 상당히 알았던 사람이었음. '마'이 마태에 의해서 쓰여졌다고 말한 Papias가 또 '막'을 쓴 마가는 베드로의 통역관이었다고 말함. '막'은 베드로가 선포한 볻음을 베껴썼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은 베드로의 증거이다.
이런 것들은 공관복음의 상호관계를 설명하는 가설이지 진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공관복음을 이해할려면 할 수 없이 어떤 가설을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이말의 중요성을 살펴볼려면 J.Jeremias의 "신약신학"을 살펴보라.
Jeremias는 예수의 세례때 이와 같은 계시의 체험을 했다고 말함.
a.마11:25-27:계시와 위엄의 체험이다.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빠 내가 당신에게 부르짖습니다 이런 것들을 지혜롭고 이해하는 자들로부터는 감추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계시하였음을 하늘과 땅의 주이신 아빠 당신에게 감사해서 부르짖습니다'는 말이다.
여기서 이런 것들이 무엇이냐? 이런 것들이 무엇을 지칭하느냐는 해석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지혜롭고 이해하는 자들에게' 이것이 형식상으로는 지혜 문서 전승에 속하나 이 부분에서 예수는 지헤 문서의 신학 하나를 거스리고 있다. 지혜신학에 의하면 지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의 자녀들이고 지혜를 받은 자만 하나님의 계시를 알 수 있다. 왜? 지혜가 하나님을 계시하는 계시의 중보자이니까! 그런데 지혜가 모세의 율법에 나타나니까 토라를 열심히 연구하는 자가 지혜로운 자고 의로운 자고 이해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계시를 받는 자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그런 자들에게 도리어 감추었고 어린아이들에게 도리어 나타냈다고 말씀하심. 이 어린 아이들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자들,이들에게만 계시했다. 이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이말이 아주 중요하다.
27절:그런데 우리가 관심이 있는 말은 '나에게 나의 아빠로부터 모든 것이 넘겨졌다' 그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아빠로부터 전권을 위임받았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아버지 이외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하고 아들 이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계시해준 그 사람 외에는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는 말이다.
여러분이 Jeremias챌을 읽어보면 알 수 있듯이 여기에 비유가 하나 숨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고대의 가업을 계승할 때의 부자관계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쓰이고 있다. 이것은 C.H.Dodd가 (요 5:19ff)에서 여기서 마11:27과 요5:19ff가 이런 식으로 통한다.
C.H. Dodd는 여기서 가업을 잇는 관계에서의 비유가 숨어 있다고 본다. 그것은 고대 사회에서 가업이 대대로 이어진다. 예를 들면 목수 집안에서는 대대로 목수직업을 한다. 그때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로부터 전수 받은 목수의 일의 모든 비밀들,자기만 아주 잘 만드는 비밀이 있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일체 비법을 지킨다. 자기 아들에게만 다 가르쳐주고 전수시킨다.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기의 모든 비법을 가르쳐준다. 아들은 아버지의 비법을 아버지가 하는 것을 보고 자기고 그대로 따라서 한다. 이 도제훈련을 통해서 아버지의 모든 것을 전수 받는다. 그러니까 아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나타낼 수 있는 위치에 선다. 그래서 아들이 아버지의 계시자가 된다. 이런 관계가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를 설명하는 비유로 쓰이고 있다.
그래서 J.Jerenias는 C.H.Dodd가 요5:17ff에서 발견한 비유의 관계가 지금 하나님 말씀에도 나타난다. 그래서 예레미야스는 이 말을 아람어로 그대로 번역해보면 거기에 아들,아버지 앞에 정관사가 쓰일 것이 아니라 the Father,the Son의 식으로 정관사가 쓰일 것이 아니라 아들이라는 것은 하나님의아들로 굳어진 칭호가 아니라 부정관사 a Father a Son으로 쓰고 이것이 비유라고 말함.
어떤 아버지가 자기 아들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고 고스란히 가르쳐주어서 아들이 아버지를 속속들이 안다. 여기서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이 아니고 자기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업을 전수받는 부자관계로 나타냈다고 예레미야스는 말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조금 보충해야 할 것은
I.H.Marshall이 처음부터 '눅'의 주석에서 설령 Jeremias의 말이 맞다고 해도 예수가 이 관계를 자기와 아버지의 관계로 적용함으로 이 속에는 이 아들이라는 속에는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이라는 자기 이해가 들어가 있다고 Marshall이 Jeremias의 의겨을 보충했는데 그 말이 옳다.
그래서 여기서 마11:27에 비유 같은 말을 통해서 에수는 상당히 확실하게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고 있다. 어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모든 것을 -전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자다. 아들은 무엇을 하는자? 아버지를 계시하는 자다. 전권을 위임받아서 하나님 아버지를 계시할 수 있는 자라는 의미로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아주 강력히 나타내고 있다. 이 마11:25-27까지는 사실은 단2:19-23까지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가설을 W.Grimn이 자세히 설명했다.
b.막12:6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 (당시 갈릴리 소작농의 상황을 잘 반영한다)
예수는 이 비유를 말하고 시편 118편을 인용하여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된다'고 말함.
여기서 아들과 돌과 말장난이 있다( : )
그래서 이 비유와 시편 118편 인용이 하나고 묶어져 있다. 아주 재미있고 중요한 비유인데 거기서 예수가 자기를 포도원 주인의 아들로 설명하고 있다. 이 비유에서도 예수는 자기가 하나님에 의해서 이스라엘에게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패역한 이스라엘 지도자의 손에 죽임을 당할 그런 아들로 나타나고 있다.
c.마지막으로 막13:32 종말이 언제 일어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들도 모른다고 말함.
이말도 아들의 상당히 중요한 사용이다. 이런 3곳에서 예수께서는 상당히 강력히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내고 있다.
3.예수께서 평소에 다른 사람들에 의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는 예가 더러 있었다. 다른 존재들에 의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된 예가 있었다.
a.그의 세례 때,하늘의 음성이 곧 하나님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다. 막1:11=시2:7+사42:6의 혼합.
이 소리는 예수가 세례때 나단의 예언의 전승인 시 2:7의 성취자로 곧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라는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언이 되었고 그런데 예수의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의 사명 곧 나단의 예언의 시형을 주의 고난받는 종으로서 담당한다(사42:6)는 것으로 나타냈다.
b.사단에 의해 시험받을 때 예수의 시험때 막1:12-13
'막'판과 Q판이 완전히 다르다.막4:1-11/눅4:1-13
이 '마''눅'판은 보통 Q판이라고 하는데 '마''눅'판을 보면 '막'판과 Q판의 혼합니다. 여기서 사단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를 자의적으로 자기를 위해서 막 휘두르는 그런 메시야적 왕으로서 행사하라고 자꾸 예수에게 충동하고 예수는 고난 받는 주의 종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는 아들이 되어야 함을 천명함으로써 사단의 시험을 이긴다. 이것은 예수가 자의적 하나님의 아들됨의 권세를 휘드르는 정치적 왕으로서의 메시야,하나님의 아들 노릇을 하는 유혹을 계속 받았음을 말한다. 그것을 사단의 유혹이라고 하고 예수는 도리어 고난 받는 종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분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기를 천명하고 있다.
c.예수의 세례와 시험에 대하여
베드로의 고백때 '마'판에만 '메시야 그리스도 곧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리스도라는 메이야라는 신앙고백이 사단의 전승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메시야가 다윗의 아들,하나님의 아들이다. '마'덧붙이는 메시야-우리말로 정확히 하면-선생님은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그리스도라는 메시야라는 칭호를 해석한 것이다. 나단의 예언의 전통에 근거해서 '마'에 나온다.
d.예수의 변화산에서(막9:7)
세례때 울려퍼졌던 하늘이 선언이 다시 울려 퍼진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e.쫓겨나는 귀신들이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막3:11/5:7)
f.예수가 산헤드린 앞에서 재판 받을때(막14:61)
'네가 메시야 곧 하나님의 아들이냐'여기서도 네가 메시야냐는 질문인데 나단의 전승에서 메시야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네가 메시야 곧 복받을 자의 아들이냐 곧 하나님의 아들이냐? 거기에서 예수가 긍정적으로 대답한다.
g.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혔을 때에 군중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 오너라 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는자' 라고 놀리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놀린다(마27:43)
h.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를 보고 백부장이 '이 사람은 진짜로 하나님의 아들이구나'하고 신앙고백하는 막15:39/마27:54.
이러한 자료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4.결론적으로 공관복음에 의하면 예수는 일단 은밀하게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나타냈고 특별한 경우에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좀더 적극적으로 표시했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특별한 경우에만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인지되었다. 예수이 가까운 제자들 베드로에서 대표되는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 육과 혈이 아니고 하나님에 의해서 계시를 받은 예수의 가까운 제자들이 그것을 인지했고 그래서 베드로의 신앙고백이 나타났다(마16:17). 또 사단과 악령같은 초자연적이 인지능력을 가진 존재들에 의해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이 인지되었다.
이것이 진정한 의미로 메시야적 비밀이다. 진정으로 예수가 자기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은밀하게 나타냈기 때문에 초자연적인 인지 능력을 가진 사단이나 악령들 이외에는 예수를 가까이 따라다니는 제자들만 인지했다. 일반 청중들을 잘 몰랐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공개적으로는 비밀로 지켜졌다.
복음서들이 쓰일 당시에는 -빨라야 AD 50견 이후이고 보통 69년 이후에는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것이 교회의 중심고백이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공관복음-공관복음이 씅리 당시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고백이 교회의 중심 고백이었다.-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엄청나게 나타나지 않는 사실,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드물게 나타나고 그것도 몇 사람에 의해서만 인지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은 공관복음이 저자들이 예수 당시 역사적 전승을 신실하게 간직하고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즉 공관복음이 쓰일 당시에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이 중요한 신앙고백이었다. 만약에 불트만이나 양식사가들이 주장하는 것같이 복음에 나오는 전승들이 교회의 신앙의 표현에 불과하다면 신앙고백의 수단으로 예수의 이야기를 막 지어낸 것이라면 무슨 이야기들이 막 지어내어졌겠는가?
에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유주는 이야기들이,자기들의 신앙고백이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되는 것이니까 그 신앙고백을 표현하는 이야기들이 마구 지어져 공관복음에 있을 것이다. 도리어 공관복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보여주는 이야기들이 드물게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가까운 사람들만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 공관복음의 이야기들이 나중에 교회가 자기들의 신앙고백의 수단으로 무책임하게 지어낸 이야기들이 아니고 역사적으로 신빙성있는 자료들을 신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
5.예수가 어떤 의미로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느냐?
G.Vermes 같은 유대 학자는 하나의 유대 선생으로 특히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Charismatic 유대 선생으로 예수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 왜냐하면 후기 랍비 문서들에 보면 하나님과 특별한 charismatic 관계를 가지고 귀신을 쫓아내고 이적을 행하는 은사,영적인 능력 charisma를 받았다고 주장하는 랍비들이 실제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운다. 랍비 문서에 보면 그래서 예수도 이런 식으로 이적을 행하고 귀신을 쫓아내는 charismatic 인물로 유대 선생으로 예수 스스로가 하나님의 아들로 보지 않았느냐.
K.Berger는 그것보다도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해는 지혜전승에 근거해서 보아야 한다. 지혜 신학에서는 지혜를 받은 자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이와 같이 예수가 지혜를 받은 지혜의 선생으로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지 않았겠느냐.
Vermes 나 Berger의 이론이 다 일리가 있는데 그것은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자기 이해의 일부분을 설명하는 것이고 그것도 중심부분이 아니라고 본다.
예수가 스스로를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을 독특하게 아빠라고 불렀다. 이것은 유대의 charismatic 선생도 그리하지 않았고 지혜선생도 그리하지 않았다. 예소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아멘,죄를 용서해주는 것을 통해서-이런 보통 이적을 행하고 영적인 능력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혜 선생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그런 류의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그보다 훨씬 독특한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한 것을 볼 수 있으며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단의 예언의 성취자로 스스로를 예수가 보았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의 가장 중심적인 배경은 나단의 예언과 삼하 7장과 이사야 42-53장의주의 종의 노래에서 나왔다. 이것은곧 시편 2:7에 근거한 것이다. 예수의 세례 때 울려퍼졌던 그 성경의 전통에 하나는 나단의 예언의 전통,-시편 2:7으로 대표해 주는 나단의 전통 또하나는 사42:1로 대표되는 주의 고난받는 종의 전통. 그 2전통에 의해 예수의 하나님이 아들됨의 중심적인 배경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예수는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고 주의 종의 역할을 감당함으로 곧 그의 대속의 새언약을 세우는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말의 백성을 창조하고 모아서 곧 하나님의 자녀들을 창조하고 모아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는 분으로 그런 의미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
곧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통치의 대권자로서 하나님의 백성의 우두머리로서 대표로서 곧 하나님의 자녀들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보았다.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그런데 이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고 재판때도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문제가 되었다. 산헤드린 재판소에서(막 14:161f) 십자가에 죽을 때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죽은 예수가 사흘만에 하나님에 의해서 다시 일으킴을 받아 부활함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인정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다시 일으킴을 받아 부활함으로 제자들이 하나님이 그를 옳다고 인정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며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며 하나님을 특별한 이런 의미로 계시하는 분이라고. 아멘이라는 독특한 말을 쓰며,하여튼 모든 것이 다 옳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이 울려퍼졌다. 그렇게 해서 이 신앙고백이 발전을 했다.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자기 이해가 확인이 됨으로 이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를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신앙고백하고 선포하게 되었다.
Ⅲ.바울전의(pre-paline) 교회에서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했는가?
롬1:1-4
1:1에서 보면 바울이 자기를 하나님의 종으로 소개하는데 복음을 위해서 택정받음 종이라고 하는데 여기서 '복음'을 여러가지로 정의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복음이다니까 하나님이 복음의 저자시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으로 신적인 Quality가 있다. 인간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신적인 quality가 있다.
둘째 복음을 구원사적으로 정의하면 성경에 성지자들을 통해서 미리 선포한 약속한 것들이 성취다. 성경의 성취,하나님이 구원사의 성취이다.
세째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이냐면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의 내용이다.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이 복음의 내용이다.
그러면 그 하나님의 아들은 누구냐? 3,4절로 설명 되는데 이 3,4절은 모든 신약 학자들이 동의 하듯이 발울전의 교회에서 생성된 신앙고백이다. 또 예수에 대한 선포양식이다. 이 신앙고백이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어떻게 해서 이것이 바울전의 것인줄 아는가?
①거기에 아주 셈족언어적인 언어로 되어 있는 것이 헬라말로 번역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이것이 아마 아람말을 쓰는 예루살렘 교회에서 생성된 아주 초기 교회의 것일 것이다.
②위와 연결되어 바울의 표현이 아닌 표현으로 되어 있다. 대표적으로 성령을 ' ' 바울은 그냥 혹은 라고 말한다. the Holy Spirit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the Spirit of Holiness-성결의 영-
이것은 아주 셈족적인 구문이고 바울이 도저히 사용하지 않는 구문이다. 이런 것을 보면 바울 전의 교회에서 생성되는 아람말을 쓰는,아라말을 쓰는 교회에서 생성된 아주 초기의 것이다. 그런데 2부분으로 되어 있다.
'육신적으로'는 -3절에 ' '와 ' '가 대조되었다. '육신으로는' 그리고 '성결의 영으로는' 도대체 '육신으로는'그리고 '성결의 영으로는'은 무슨 뜻이냐? 참 해석이 구구하다.
'인간적으로 보면 ,인간이 세계에서'또는 '육신의 족보로 따지면'의 뜻인데 대개 정확한 의미는 모른다. 다윗의 아들,다윗의 씨로 남고
육신의 평면에서 보면 성령의 평면에서 보면 혹은 성령에 의해서-번역하기 어려운데-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었다. 능력으로가 인정되었다는 말과 같이 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번역이 틀리다.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하심으로'라고 원인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또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때부터'라고 시간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두 해석이 다 가능하다.
능력을-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 -또는 임명되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이나 등극한 것이 아니고 '능력으로 혹은 힘을 가진' 그 말이 하나님의 아들에 붙는 수식어다.
그러니까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 아들로 등극했다. 다윗의 씨가 곧 하나님의 아들로 이것을 보면 성경의 성취라고 보는데 주로 어떤 성경을 말하고 있는가? 나단의 예언을 두고 한 말. 나단에 의하면 '네 수가 다하며 너의 씨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너의 왕에 앉히고 그를 나의 아들로 삼겠다 그래서 내가 그의 아비가 되가 그가 나의 아들이 되리라'
거기 히브리말로 ( 이 일으키다) '내가 그를 일으킬 것이다' 이것이 LXX에서는 일으킨다고 되어 있다.
이말의 명사형은 , 부활이라는 말이다. 여기 헬라어에 ' ' 죽은자 가운데서 일으킴으로 부활시킴으로 그래서 여기서 나단의 예언에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시를 네 수가 다하면 네 씨 하나를 내가 일으켜서 일으킨다는 말이다' LXX에 의하면 그를 일으킨다고 그러는데 다윗의 씨로서 일으킴을 받는 분이 예수님이다.
죽은자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행위는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행위다. 부활을 어떻게 해석했느냐?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 하나를 일으킨 것으로 해석하고 그를 일으켜서 내 아들(하나님)로 삼는다
그래서 예수가 나단의 예언에 문자적인 성취자다. 또는 예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나단의 예언을 문자적으로 성취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다윗의 씨를 일으켜서 자기 아들로 삼았다 하는 것이 신앙고백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나단의 예언의 성취자로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로 높임받은 일으킴을 받는 분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메시야다는 신앙고백이 선포되었다.
진정으로 유대 메시야 사상을 성취한 분이다. 메시야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들을 성취한 분이라고 선언했다. 육신의 상태에서도 예수는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그것이 감추어졌다.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그의 하나님의 아들됨이, 예수가 육신의 상태 또는 다윗의 씨로서 예수가 나단의 예언의 담당자로 하나님의아들이었다.
그런데 이제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셔서 하나님이 아들로 등극시키고 선언했다. 그래서 모두에게 인정되게 만들었다. 이때 감추어진 아들과 하나님의 아들의 위에 등극해서 인정된 하나님의 아들과 차이가 무엇이냐? 이제는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이냐?주이다. 만유의 주권을 행사하는 주이다.
바로 이분이 주가 되었다. 예수가 다윗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아들이었는데 부활절에 일으킴을 받아서 권세를 휘두르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는 것은 만유의 주가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만유에 군림하는 주가 되었다는 신앙고백이 거기에 나타났다.
신약신학 제19강
지난번에 우리가 본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직후에 바울 전의 초대 교회가 예수를 어떻게 하나님이 아들로 선호했는가 하는 것을 바울 서신에 나와있는 바울 전의 신앙고백을 분석함으로 살펴보았다.
이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한 그래서 하나님 우편에 높임받은 예수를 하나님의 영광가운데 나타남을 보았다. 소위 그리스도의 나타남을 체험했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나타난 예수가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찬란한 빛 가운데에 아주 신적인 분으로 나타났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주 라고 부를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우리 행9:5.22:8.26:15에 바울이 자기에게 나타난 예수에게 예수를 부르는 장면이 있는데 거기에 한결같이 주라고 부른다. 또 바울 서신 자체에서도 확인이 된다. 고전 9:1에 바울이 자기 사도직을 의심하는 고린도인들에게 '내가 주를 보지 않았느냐'고 말한다. 이렇게 해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에게 나타난 하나님의 영광의 빛으로 둘러싸여서 나타난 분이 신적인 분으로 인간의 자태보다는 훨씬 고양된 자태로 영광스러운 분으로 나타나셔서 바울이 주로 호칭하지 않으면 안되는 그런 분으로 나타났음을 알 수가 있다.
이런 경우 분명히 인간인데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난 존재를 묵시문학에서 '하나님의아들 같은 이'라고 부른다. 거꾸로 하나님이 나타났을 때-Theophany 때-는 하나님의 형상을 그릴 때 '한 사람의아들 같은 이'라고 한다(겔1/단7:13). 하나님이 나타날 때 하나님 같다하면 아무 수식이 안된다. 아무 그림이 안된다. 흙이 땅같다는 소리와 똑같다. 그런 것을 tautology라고 한다. 그래서 아무런 기술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하나님이 어덯게 나타나겠느냐? 그 모양이 어떠하던가? '사람과 비슷하더라' 반면에 신적인 높임 받은 존재가 나타날 때, 분명이 인간이라고 예수라고 그런데 에수가 사람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예수가 사람인데 사람 같이 나타났다고 하면 아무런 descreption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경우 묵시문학에 보면 아브라함이 '하나님 아들 같이' 나타났다는 묘사가 많다.
반면에 하나님이 나타날 때는 '사람의 아들 같이' 그래서 다니엘 7:13에는 '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신적인 존재임을 우리가 알아야 한다. 그래서 이러한 묵시문학적인 표기방법에 따라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영광 가운데 나타나는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나는 예수,인간 자기가 지금 적대시하는 예수가 신적인 영광가운데 나타나서 자기가 주라고 부르짖을 정도의 분을 무어라고 그러겠는가? 어떤 형태로 나타났겠느냐?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그렸을 것이다.
'하나님 아들 같이 '나타났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christophany(예수의 체험-예수의 나타남)과 항상 직결해서 쓴다.
대표적인 경우로 갈1:16. 다메섹 도상에서 지금 핍박자로 교회의 핍박자로 행하는 바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났다. 무엇하도록?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에게 복음으로 선포하도록. 그에게 자기가 혈육과 상의하여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인간들과 자기보다 먼저된 사도들과 상의하러 예루살렘에 가지 않고 아라비아로 갔다. 거기에 오해가 많다 아라비아로 바울이 묵상하러 갔다고 말하는데 묵상하러 가지 않고 선교사로 갔다. 바울이 사막에서 3년간 묵상한 것이 아니고 선교하러 갔다. 하나님께서 자기를 이방인에게 그의 아들을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핍박자로 행하는 바울 자신에게 그의 아들을 나타냈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내서 곧 내가 순종해서 예루살렘에 가서 시간 낭비할 시간이 없어서 아라비아로 선교사로 갔다. 여기에 오해가 두가지 있다.
첫째는 아라비아라 하면 오늘날의 사우디 아라비아로 생각하는데 당시 다메섹 도성 밖이 아라비아였다. 지금 바울이 다메섹 도성 앞에서 있을 당하였다.
다메섹 도성 밖은 Nabatea왕국이 있었다(고전12장)(행 )에서 바울이 다메섹에서 광주리를 타고 성에서 도망가는데 왜 도망갔는가?
Nabatea의 왕 아레타스가 바울을 잡으려고 성을 다 지키고 있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복음을 선포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시끄럽게 구니까 바울을 잡아 없앨려고 하니까 바울이 자기의 선교를 받은 형제들의 도움으로 광주리를 타고 도망을 갔다. 갈1:16의 문구가 '그의 아들을 이방인들 가운데 복음으로 선포하기 위해서 나에게 그의 아들을 계시하였다. 그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고-혈육과 상의해서-곧장 아라비아로 직행했다'고 말함.
바울이 자기 다메섹에서의 체험을 한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의 계시라고 요약한다. 이것과 상응하는 것이 행전 9:20-사도행전 전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딱 한번 나오는데-바울이 다메섹에서 그리스도를 보고 곧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였다고 다메섹 도상의 체험 직후 바울의 케리그마, 바울의 복음 선포를 한마디로 요약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여 높임받은 예수의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나타남을 체험했는데 그때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곧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남을 보고 자기가 핍박하던 예수를 주라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그리스도라고 선포했던 것이 옳음을 확인받는다.
그래서 바울도 예수가 주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라고 선포했는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 칭호는 그몬든 것들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칭호였다. 그래서 갈1:16/행9:20에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초대교회의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신앙고백을 수용하게 되었다. 바로 초대교회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선포한 것을 자기가 체험했으므로 그것이 사실이다는 것을 느낌. 하나님이 그것을 자기에게 가르쳐주었다. 그래서 자기의 핍박자로서의 생애를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의 종으로 사도로 나서서 그 하나님을 복음으로 선포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롬 1:3,4을 다시보면
3절:
3'절:
4절:
3절: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바울의 서문이다. 그의 아들은 (여기서부터가 초대교회 신앙고백이다)
3'절:4절만 보면은-바울 전 교회의 신앙고백만 보면은
예수가 육신적으로 다윗의 씨로부터 낳았고 부활로 말미암아 권세를 행사하는 하나님의 아들로 등극했다. 이런 신앙고백이다. 이 신앙고백은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예수의 사건을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유대 메시야 사상의 뿌리인 나단의 예언의 성취로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이 신앙고백은 선재사상은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이 여기에서 서문을 달므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아들의 씨로 낳았다. 이렇게 말함으로서 바로 이와 같은 서문의 역할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 다윗의 아들로 낳은 것으로그에게 선재사상과 성육신 사상이 비로소 나포되기 시작한다. 이것은 갈4:4과 비교해보면 잘 알 수 있다.
4절:때의 충만함이 왔을 때에 때가 차매,하나님께서 그이 아들을 보냈다.
이것을 한번 비교해 보자.
초대교회 신앙고백 자체는 아직 신앙고백이 내포되어 있지 않다. 그런데 바로 바울이 서문을 담으로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씨로 낳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보냈다. 보내서 여자의 몸으로 낳게 했다. 문장형식이 똑같다. 그의 아드이 했다. 낳았다.-다윗의 씨로 낳았다. 여자의 몸에서 낳았다. 율법 아래서 낳았다- 문장형식이 똑같다. 그러니까 신앙고백 자체만 보면 선재사상이 없는데 바울이 서문을 담으로 말미암아-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그의 아들은 다윗의 씨로 낳았다-이 선재사상이 아직 없는 신앙고백의 의미를(갈4:4)에서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이른바 보냄의 형식과 같이 만든다. 여기서 제일 먼저 두드러지게 나타난 사상이 하나님의 아들이 선재한, 태초전에 인간 되기전에 하나님과 영원히 같이 한 존재했음을 나타낸다. 그래서 그의 여자의 몸에서 또는 다윗의 씨로 난것이 성육신이었음을 밝힌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 하나님+그의 아들+보냈다+목적:이런 형식을 보냄의 형식이라고 한다. 이런 문장 형식은 항상 쓰이는 기독론적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칭호다(갈4:4/롬8:3/골1:13ff/요3:17/요1서 4:9,10,14 등).그래서 하나님께서 -갈4:4에서 보는 바와 같이-그의 아들을 보내서 여자의 몸에서 낳게 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여자의 몸에서 낳기 이전에 존재한 걸로 쓰여있다.
이런 것을 선재사상이라고 하는데 엄밀한 의미로 선재사상은 사람으로 세상과 역사 속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존재했다는 말이다. 사실은 그보다 조금 더 큰 의미를 가진다. 이 세상 창조전에 이미 존재했다.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이 '보냄의 형식'이 우선 나타내는 것이 선재사상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으로 낳기 전에 이미 하나님과 같이 존재한,영원히 존재한, 이미 세상의 창조전에 존재한 분이다. 그럼으로 그의 여자의 몸에서 혹은 다윗의 씨로 낳음은 성육신이었다는 것을 내포한다. 선재사상과 성육신의 의미를 내포한다. 이것이 sending-formula의 첫번째 두드러진 의미이다.
둘째로는 '보냈다'는 말의 배경.왜 보냄의 형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이느냐? 이것은 히브리어 뿐만 아니라 셈족의 공통된 사고에 보냄에 대한 Massanger,심부름꾼에 대한 이해에 비추어 이것을 이해할려 한다. 이 agent는 mishnah Berakoth 5:5에 보면 -미쉬나는 AD100년경에 유대랍비들이 지중해 연안 Jemnia(Yevneh) 라는 곳에서 이제 성전이 다 부숴져 버려서 성전에 제사를 중심으로 한 유대교가 더 이상 가능하지 않는 마당에 구약성경-Torah책의 해석의 전통들을 전부 참조하여 율법들을 제정한 것들의 미쉬나이다. 역대 랍비들이 구약성겨에 근거해서 가르침 하나님의 율법들을 제정한 것이 미쉬나다. 미쉬나의 주석이 Talmud이다.
예루살렘 탈무드-팔레트신 탈무드-있다. 미쉬나가 율법책의 근본이다.
미쉬나의 Berakoth 5:5에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낸 자와 같다고 법으로 정하고 있다. 이것은 agent는 보낸이의 전권대사이다. 그래서 보냄을 받은 심부름꾼 agent는 보낸이의 저권을 행사할 수있고 이 심부름군이 계약을 체결하면 그것은심부름을 보낸 주인에게 완전히..
성경의 예를 들면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기 위해서 그의 종을 사라의 고향에 보낸다. 엘리에셀이 거기가서 리브가를 데리고 아브라함의 집에 올 경우 아브라함이 리브가를 박대할 수가 없다. 이삭이 박대할 수가 없다. 왜? 엘리에셀을 보낸 아브라함의 전권대사이기 때문이다. 엘리에셀이 택했으면 아바르함이 택한 것과 마찬가지이고 엘리에셀이 계약하면 아브라함이 게약한 것과 마찬가지이다. 법적으로 그렇다. 박대할 수가 없다. 계약을 파기할 수 없다. 이런 셈족의 전권대사의 이해.
그래서 (보낸다)는 항상 보낸이의 대권을 행사하고 그래서 보냄을 받은 이가 결정하고 게약한 것은 보낸이에게 구속력이 있는 뜻이 항상 들어 있다. 여기서 발달하는 랍비들의 사상이 제도다. -보냄의 제도. 가령 랍비들이 공회에서 중요한 법을 결정하면 랍비 공ㅇ회가 한 대표를 혹은 대표들을 여러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 회당들에게 파견을 한다. 이때에 파견 받은 랍비는 랍비들의 공회의 전권을 행샇나다. 그런 제도를 제도다. 예수의 사도들을 -보냄을 받은 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마 유대 랍비들의 제도와 관계가 있을 것으로 본다. 원래 은 심부름꾼을 파견한다는 말도 되지만 광대를 파견한다는 뜻이었다. 원래 지금 신약성경에 나오는 사도라는 뜻, 또는 그렇게 보냄을 받은 자를 사도로 부른 칭호가 없었다. 심지어 유대교에도 이렇게 랍비들의 고 회의 보냄을 받은자도 칭호가 없었다. 또 그렇게 보내는 제도를 라고 했지만 이 제도에 의해 보냄을 받은 자의 칭호도 없었지만 보냄을 받은 자가 평생동안 직책을 갖는 것이 아니고 일회적이다. 임무를 마치면 1회로 끝이 난다.
그러나 예수에 의해사 사도로 임명을 받은 자는 신약성경에서 평생 사도가 된다. 그리고 그에게는 보낸다는 동사는 와 마찬가지다. 여기서 온 독특한 칭호가 있는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신약성경의 사도라는 직책은 이런 와 적인 전승사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새로운 제도이고 칭호다. 이 신약성경의 중요한 단어는 다 똑같다. 복음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라는 말도 히브리어 기쁜 소식을 선포한다는말과 연결되어 있으나 이것도 전혀 새로운 의미이다.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그리스도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을 표현함에 있어서 당시 언어들의 부족함을 느겼다. 그래서 이와 같은 새로운 언어들을 개발한다. 도 그중 하나. 는 원래부터 헬라어에 자기를 내어누는 사랑이라는 뜻이 아니엇다. 는 자주 쓰이지 않는 무의미한 말이었다. 반면에 라는 말은 아주 뜻이 분명한 그리고 아주 중요한 헬라말이었다. 그게 이성적인 즐김,애력만에만 적용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원래 가치의 끌림이라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을 지식을 사랑한다든지 아름다움,권력을 사랑한다든지 하는 모든 말에 적용되는 말이다. 그래서 인간으로 하여금 인간되게 하는 것이 라고 보았다. 인간이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 자체를 로 보았다.
그래서 인간이 가치에 끌림,가치에 매력됨이 이다. 는 인간의 삶의 원동력으로 보아 셀라 철학에서는 아주 고양된 개념이었다. 그런데 그것은 주체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객체에 매력을 느낀다. 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정체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욕구 때문이다. 가치를 소유하려고 하기 때문. 를 다른말로 하면 자기 주장이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 추구 활동이다. 이렇게 이것인 색깔이 분명한 언어였다. 헬라사상, 인본주의 사상을 가장 잘 나타내는 말이었다. 이 말로 어떻게 십자가에 그의 아들을 내어버린 하나님의 행위를 기술할 수 있겠느냐? 십자가 아래 그의 아들을 내어버린 하나님의 행위는 우리를 위해서 내어 버렸다. 라는 말이 전혀 해당이 안됨. 왜? 그것은 하나님이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들에게 자기를 준 것이다.
이것은 라는 말을 쓸 수가 없다. 그래서 이런것-하나님이 아무 가치도 없는 인간들을 위해 자기를 내어줌-을 어떻게 표현하느냐? 표현할 말이 없다.
그래서 무미건조하고 색깔이 없는 라는 말을 선택해서 그 말에 그 내용을 채운 것이다. 그래서 가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전부 신약성경의 기독교적 용법이다. 그래서 신약성경에 라는 말이 일관되게 쓰인다. 그런데 가금 이와 같은 사랑을 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요'에서는 가 주로 나오는데 가끔 문체의 변화를 위해서 이라는 동사를 동의어로 사용한다.
하여간 이렇게 그리스도 안에 나타난 위대한 계시와 구원을 체험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새로운 언어들을 개발하여야만 했다.
요21:15-17: 와 의 교차적 표현은 문체적 변화를 위해 사용했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 두드러진 사상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전권대사다. 그런데 특이 아들이 agent로 보냄을 받았을 때에 이 사상이 더욱 확실하다.
막12:1-7은 포도원 농부의 비유다.
7절: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 농부들에게 종들을 보내서 세를 받을려고 하니까 종들이 아마 선지자들이나 유대의 율법을 현명하게 가르친 의로운 선생들을 심히 때려 보내니까 포도원 주인이 몸시 화가 나서 마지막에는 자기 아들을 보낸다. 그런데 농부들이 이 아들은 상속자라..
아들에 있어서 제일 중요한 개념은 상속자이다. 바로 아들이 상속자이기 때문에 그가 agent로 보냄을 받았을 때 그 보내는 아버지의 전권을 위임받는다.-전권대사
그래서 아들을 죽이면 상속자가 없어지니까 그 주인의 땅이 우리 것이 된다고 하였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에 항상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세째로, 보냄의 형식은 항상 목적이 있는데, 목적은 구원을 위한 것이다.
가령 갈4:4/롬8:3, 보냄의 형식은 구원이 목적이다.
그러니까 보냄의 형식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함을 나타내고 둘째로 하나님의 agent로 하나님의 전권대사, 하나님의 상속자로 활동하는 분임을 나타내고 세째로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의 agent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는데 누구를 일꾼으로 삼아서 구원을 하느냐? 자기 아들. 하나님의 구원의 사업에 예수가 그의 아들로 실행자 노릇을 한다.
네째로 보냄의 형식의 배경을 이루는 종교사적 전승은 지난번에 우리가 살펴본 유대교의 지혜사상이다. 유대 지혜 문서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말'로서 태초부터 하나님과 같이 하고(선재) 하나님의 어좌에 하나님과 같이 앉아 있고, 지혜가 보냄을 받아-하나님의 agent노릇을 한다.-
무엇하러 보냄을 받느냐? 창조와 계시와 구원의 사건의 중보자 노릇을 하도록 보냄을 받는다. 그런 의미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사업의 agent로서 하나님의 전권 대사라 해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했다. 딸이라고 하는 이유는 지혜가 여성명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래서 보냄공식은 지혜 신학의 예수에 대한 적용이라고 말할 수 있다. 뒤집어서 말하면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초대교회가 예수가 바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말했던 지혜였다고 깨달았다. 또는 예수의 인격과 사역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말했던 지혜의 인격과 활동이라고 기술되고 예언되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고, 또는 예수가 성육신 하기전에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에서의 활동을 구약성경 그러니까 전의 계시에서는 지헤의 활동이라고 계시되고 깨달아 졌구나 하고 깨달은 것을 말할 수도 있고.
지난번에 내가 지혜 신학의 말달은 초월하신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나타내는 것의 언어수단이다. 바로 구약성경 그러니까 점진적인 계시에서 구약성경에서 하나님의 지혜의 활동이라고 초월하신 하나님의 세상 속에서의 활동을 지혜라는 category를 통해서 그렸는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다 더 완성된 계시의 빛 아래에서 보았을 때 바로 예수의 활동이라고 본 하나님의 창조, 계시,구원의 활동을 예수가 하였구나. 예수가 어떤 분?
옛날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의 활동이라고 한 그 하나님의 활동-창조,계시,구원의 활동을 하시는 분으로 깨달아서 그렇게 천명한 것이다. 그것이 sending formula이다.
그래서 보냄의 형식은 일단 겉으로 나타나는 것은 예수가 구원의 사업에 실행자,중보자인 것만을 나타내나 이 속에 같이 나포된 것은 바로 이 보냄의 형식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의 지헤신학에 근거하고 있으니까 예수가 동시에 창조,계시의 실행자인 것도 나타낸다.
그럴때 쓰이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가령 골1:13-20:예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노릇함을 그리는 '골'의 시의 서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이다.
나는 내책에서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사상과 예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됨의 사상 곧 예수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사상을 성취한 분이라는 사상은 바울의 공험이라고 바울의 초대교회의 신학에 대한 공헌이라고 주장했다. 다시말하면 바울 전의 교회 신학에서는 롬1:3,4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아직 선재사상이라든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라는 사상이 나타나지 않았다.
바우이 이러한 사상을 발달시키는데 바울이 어떻게 이 사상을 발달시키느냐면 예수가 바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사상을 성취한 분이라는 것을 깨달음으로 바울이 초대교회에 한 공헌이다라고 나는 주장을 했다.
지금까지 학자들은 바울의 공헌이라고 보지 않고 바울 전의 교회에서 이미 발생한 것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지금 이런 사상을 담고 있는 보냄의 형식이 바울 서신에만 나오는 것이 아니고 요한복음에도 나온다.요한의 교리에서도 보냄의 형식이 나타나고 요한복음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바울 신학에서와 똑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그래서 이것은 바울 만의 신학이 아니고 요한의 신학도 됨으로 교회 전체의 공통된 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전에 그리스도인들로부터 이어받은 바울 전의 신학이라고 대개 주장을 한다.
나는 바울이 신학적인 통찰력을 개발해서 전체 교회의 유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히'가 대표되는 교리,요한 교리,-신약전체의 유산이 되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첫째 이유가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된 그리스도를 본 것이 하나님의 아들로 보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칭호가 다메섹 도상하고 다메섹 체험하고 결부되었다. 극러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을 어떻게 체험하였는가?
a)하나는 묵시문학적 전통에서 아까 이야기한대로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난 것을 보았다. 그러니까 묵시문학적으로 신적으로 고양된 높임 받은 인간이 나타날때 그런 인간을 '하나님의 아들 같은 이'로 나타났다. 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나타났다.
이때 쓰는 말이 이나 이다. 하나님의 형상,하나님의 이미지로 나타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영광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하나님의 형태로 보았음을 바울은 여러 곳에서 시사한다. 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쓰는 말이다. 바울은 아주 자주 사용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고후 4:4/골1:15 등에 쓰고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하나님이 맏아들 예수의 형태로 닮아간다. 변화한다는 것을 나타낼때에 란 말을 쓴다(롬8:27/고후3:18/빌3:21 등).
그래서 바울의 기독론에 있어서 하나님이 형상-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바울의 구원론에 있어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의 형상으로 변화된다 또는 그의 형상과 같이 된다는 형상의 카테고리가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신학에서만 나타난다. 그런데 바울의 신학에서 아주 중요하게 나타난다. 그런데 이 형상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쓰인다. 대표적인 것은 롬 8:29이다.
롬8:29 , 즉 image. 형상을 본받는다고 그랬는데 헬라어 동사는 ( ) 은 같다는 말이고 는 form이다.
그의 아들의 형상에 일치하도록 본받는다는 뜻이 아니고 일치하도록, 우리 형상이 그의 아들의 에 일치하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예정대로 미리 정했다. 이 구원론이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그리고 우리가 그의 형상에 일치되어가고 변화되어 가고 예를 들면 고후 3:18은 대신에 라고 했다. 변한다고 그의 형태로 변한다고. 빌3:21의 변화되어 간다는 말이다.
이런 것이 바울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데 이것은 다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 다음에 살펴볼려고 하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다'는 신앙고백이다. 거기에서 아담 기독론이 나온다. 예수가 마지막 아담이다. 왜?
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았느냐? 아담이. 그런데 아담이 어쨌냐?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다. 누가 이제 하나님이 형상이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것이다.
우리 옛 아담적인,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우리들이 어떠헥 되는 것이냐?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다. 그것이 구원이다. 이런 신학이 . 형상이 기독론. 아담 기독론 이것이 다 연결되어 있는데 아담 기독론은 형상 기독론의 일부이다. 이전까지는 거꾸로 볼려고 했다. 형상 기독론이 아담 기독론에서 나온 것으로 볼려고 했다. 그것이 아니고 아담 기독론이 형상 기독론에서 나온다.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고. 그런데 그것이 신약성경에서 바울의 서신에 나오되 아주 중요하게 나온다. 그러므로 이곳이 아주 바울적인 신학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솔로몬의 지헤 7:27에 보면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지헤가 하나님의 계시의 중보자라는 말이다.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니까 지헤를 보면 어떻게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무엇을 알아요? 하나님을 알지.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서 솔로몬의 지혜라는 책 7:27에 보면 지혜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 같은이'로 보았고 '하나님이 형상'으로 보았다. 그러면 이와 같은 구약성경과 유대교 신학을 전수받은 바울은 이 예수를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겠지. 왜? 거기에 알려진 신학에 의하면 지혜가 하나님의 형상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했을 것이다. 또 자기에게 알려진 하나님의 형상은 누구? 아담이 그러니까 예수를 아담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b) 또 하나는 지난번에 지혜신학을 말할 대 Issuo ben Sirak 24장에 지혜가 모세의 율법,토라에 담겨 있다. 왜? 모세 율법에 하나님의 뜻이 계시되었다. 지혜는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계시자니까 그런데 모세 율법이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것이니까 토라와 지혜가 같은것으로 정확히 말하면 토라가 지혜를 담고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것도 지혜전승의 일부이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왜 교회의 핍박자로 활동했느냐? 십자가에 달린 에수가 바로 율법을 거스린 거짓 메시야로 율법의 의해 저주를 받은(신21:23)자인데 -랍비 신학 교육을 받은 바울에게는 분명한 사실인데 못된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를 주 메시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며 율법이 옳으냐 그리스도인들이 주장하는 예수의 메시야 사상이 옳으냐 이것이 바울에게 alternative이다.
바울은 유대 신학자로서 율법이 옳다고 믿었다. 그래서 율법의 이름으로 예수를 저주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한 자들을 핍박한 것이다. 그런 과정중에 다메섹 도성 앞에 다다랐다. 거기서 십자가에 죽은 율법이 저주한 예수가 하나님이 아들로 나타났다. 거기서 무엇을 깨달았느냐? 하나님의 진정한 뜻이-예수가 옳다고 인정하고 하나님의 우편에 높이셨으니 하나님이 진정한 뜻을 계시하는 지헤가 모세 율법에 담겨진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 담겨져 있다. 예수가 하나님이 진정한 뜻의 계시자다. 토라가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이지만 그것은 아직 완벽되지 않은 부분적인 계시에 불과하다.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뜻의 완성된 계시자였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의 계시자인 지혜가 토라에 담겨 있다기 보다는 예수에게 담겨 있다. 이렇게 해서 또 이러한 이유로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은 예수와 토라와 연결짓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이 지혜라고 부른다(고전1:30).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라고 부르고 예수가 하나님의 지혜이기 때문에 지혜를 보내어 지혜로 하역므 창조,계시,구원의 agent로 된다는 사상을 예수가에게 적용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이와같은 sending formula를 개발한 것이다.
그런데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주후 32-34년 쯤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죽고 부활한 것은 30년쯤으로 본다면 바울이 이와같은 다메섹 도상에서 엄청난 계시의 체험을 한 것은 불과 2-3년 사이이다. 그런데 우리가 본 바와 같이 예수를 지혜로 이해하고 지혜라는 카테고리로 해석한 것은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연관된 것을 보니까 뭐라고 결론을 내릴 수 있겠어요? 부활한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해석은 것은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관계가 있으니까 아주 예수의 부활 직후였다-시간적으로-
그래서 우리가 지나번에 본 롬1:3,4 같은 신앙고백은 약 30년 바로 그때 발생한 것이라면 그 신앙고백의 깊이를 더하는 바로 하나님이 아들 다윗의 자손으로 나단의 예언을 성취한 하나님이 아들,메시야,주만이 아니고 선재한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라는 사상은 곧 바로 이어진다. 그래서 내 주장은 바울에 의해서 이어진 것이다.
*요한복음은 바울에 의해서 이루어진 sending-formula와 sending-formula가나타내는 사상. 예수가 곧 선재하는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속의 중보자라는 사상이 교회전체의 신학이 되었다. 그것을 요한이 발달시켰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예수 자신에게서 역사적인 예수 자신에게서 시작된다. 양식사가들은 공관복음에서 다음과 같은 5가지 Q의 말씀,Q의 자료들을 예수의 지혜의 말씀들이라고 분류한다. ㉠마11:16-19=눅7:31-35㉡마11:25-27=눅10:21-22㉢마11:28-30㉣마23:34-36=눅11:49-51㉤마23:37-39=눅13:34ff) 이것이 소위 예수의 지혜의 말씀이다.
지혜의 말씀들 속에서 예수는 자신을 지혜의 대표로, 지혜의 사자,지혜의 체현으로 나타낸다. 이것이 '마''눅'의 공동자료에 나타난다. 다시말하면 Q자료에 나타난다.
그래서 Q자료를 모든 공동체의 기독론 중의 중요한 기독론이 지혜기독론이다. 예수를 지혜의 선생을 나타낸 것이다. 예수는 구약성경과 유대신학에 있어서 지혜 자체로 나타난 것이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예수를 지혜와 연결시켜서 보려는 운동은 바울과도 관계없이 이미 예수의 가르침 자체로부터 시작되고 예수의 가르침을 바울은 Q공동체-- '마'의 신학이 아주 중요하다. 뿐만 아니라 '요'신학에도 중요해서 심지어 '계'에도 중요하다. '약'에도 중요하다. 지혜 신학디라는 것은 신약성경 자에세 있어 퍼져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데 정확히 예수를 지혜의 체현으로 보고 지혜를 나타내는 정도가 아니고. 이렇게 보냄의 형식을 그의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계발해서 그의 에수의 선재사상과 예수의 창조,게시,구원의 중보자임,실행자됨을 누가 가장 먼저 나타냈느냐? 나는 바울이 제일 먼저 나타냈다고 주장하는데 바울의 그런 신학적인 공헌에 직접적인 근거는 다메섹 체험이었고 다메섹 체험후 예수의 가르침의 전통을 보았을 때 바울이 확인 받은 것이었다. 예수의 가르침에 예수 자신이 지혜의 대표로 나타났다. 그러니까 다메섹 도상에서 얻은 신학적인 통찰력, 에수가 바로 지혜이시라는 통찰력이 다메섹 도상 체험 바울이 누구와 사귀었는가? 그리스도인들과 사귀었지, 특히 베드로와 예루살렘에 가서 베드로와 2주일 같이 지냈다지(갈2:21). 2주일동안 무엇을 했겠느냐? 예수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그건 다메섹 도상 체험후 그리스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서 예수의 가르침을 전수 받았다 . 거기서 바울은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지혜로 본 그 통찰력을 확인받은 것이다. 왜? 에수 자신이 지혜로 가르쳤으니까. 그래서 지혜신학이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 것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바울이 중요한 공헌을 했다고 나는 주장한다.
보냄의 공식에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이 보냄의 공식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볼때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뜻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냐?
예수가 선재하신 영원한 신적인 존재로서 다윗의 아들로 이 세상에 성육신하신 메시야 되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다. 전권대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 선재하신 영원한 신적인 존재로서 우리에게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되신 분,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을 대행하신 분,실행하신 분이다. 그것이 우리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할 때에 제일 먼저 나오는 의미이다.
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
아들이라는 칭호와 더불어 쓰이는 문장형식이 지난번에 이야기한 sending-formual가 있고 또 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아들+(내어)주셨다+목적(구원).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요3:1:'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그의 아들을 내어 주셨다' 바울 서신에 있어서 롬8:22/갈2:20/롬5:10/요1서4:10.
내어줌의 형식은 이 형식이 나올 때마다 주체가 하나님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라을 이야기할 때에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셨다고 되어 있다. 그래서 요3:16에도 '..사랑..그의 아들을 내어 주었다' '믿는다마다 멸망치 않고 다 구원에 들어감' 롬8:32도 마찬가지다.
거기서 바울이 하나님이 사랑으로 고난받는 그리스도인들을 이제 확신시키기 위해서 '자기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 그와 함께 모든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느냐' 갈3:20은 약간 변형된 형태로 바울이 '자기가 이제 사는 것은 스스로를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산다'고 한다.
내어줌의 형식이 하나님의 아들로 내어준다고 하는데 갈2:20은 하나님의 아들이 스스로를 위리를 위해 내어준 것으로 약간 변형된 형태로 나타나는데 내용을 다 똑같다.
그래서 그때마다 쓰이는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지난번에 sending-formula에 쓰인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듯이 롬8:32을 보면 '그의 아들을 아끼시지 않고 내어주신 이가'그 말은 창22:16을 상기시킨다. 거기에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하나님께 그의 독생자 이삭을 아끼지 않고 내어줬다. 그래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사랑을 확인하고 다른 대속물을-양을- 준비한 것을 말한다. 거기서 '창'의 주제를 보통 Akeadh Issac이라고 한다. 문자 가대로는 이삭을 묶음이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하나님께 제사로 바치려고 묶었다는 소리이다. 이거이 유대 신학에서는 아주 중요한 주제다. 가령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전부 구원받는다는 랍비들의 교리가 있는데 왜냐하면 바로 Akeadh Issac 때문에 그렇다.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바친 것이 이 Akeadh Issac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의 모든 죄를 덮고도 남는다. 아브라함이 아들을 바친 공로가 후손들의 모든 죄를 덮도고 남는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모든 이스라엘은 구원받는다는 교리가 여기서 나온다. 이것이 유대의 구원론에 아주 중요한 주제인데 우리 신약성경에 예수의 십자가에서의 바쳐짐을 이렇게 Akeadh Issac의 후형적으로 설명할려고 보는 학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롬 8:32에 나타나는 내어줌의 형식에도 나타났다고 하고 가령 G.Vermes-유대인-학자는 요1장에 세례요한이 예수를 보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한데도 반영되어 있다고 하고 또 1-2곳도 반영되었다고 함. 하여금 아브라함이 이삭을 하나님께 바친 것에 비유했든지 아니했든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하나님이 그의 아들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것으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내어줌의 형식을 쓴다.
하나님의 사랑의 직접적인 주체가 아닐 때는 내어줌의 형식이 다른 칭호들과도 쓰인다. 가령 롬 4:25/엡5:2 등.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이 주제일 때는 항상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쓰인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enbodiment)이다.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다. 인류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 몸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지난번에 보냄의 공식에서 우리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이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며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창조,계시,구원의 실행자 노릇을 하는 분이다는 것은 지난번에 이야기 했다.
그런데 이제 '내어줌의 형식'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뜻이 '하나님의 사랑의 체현이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내가 롬1:3,4을 갈4:4과 비교하면서 어쩌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신 태초부터 존재하신 하나님의 창조,계시, 구원의 대행자로서 전권대사로서 인식된 것은 바울에 의해서 시작된 다시 말하면 바울이 초대교회의 신학발전에 한 공헌일 것이라고 지난 시간에 이야기 했는데 왜 내가 그렇게 주장했느냐? 다시 한번 상기하면
우선 그것은 지혜 신학에 의해서 내어줌의 형식이 만들어 졌다고 했다. 곧 예수를 지혜로 예수의 가르침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하고 보니 바로 이 분이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로 불리웠던 분이구나. 지혜로 활동했던 분이다는 깨달음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조직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점진적인 계시로,성서신학적 카테고리로 말하면 전승사적 발달에서는 지혜의 활동이라고 하나님께서 지혜를 보내서 지혜를 통해서 세상을 지으시고 가지를 계시하시고 자기 백성을 구원하신다고 했는데 그것이 예수의 자기 계시들, 예수를 통한 더 발달된, 더 많은 더 확실한 계시를 체험하고 나니 바로 그것이 선재하신 예수의 활동이었구나 선재하신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신 활동이었구나 한 것을 깨닫게 되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해서 보냄의 공식 같은 것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 sending formula는 지혜신학의 발달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지혜 기독론은 예수를 지혜로 보는 기독론은 바울 서신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요'에도 중요하고 가령 . 그 찬송시가 전부 지혜 신학이다. 또 공관복음도 중요하고 그래서 Q자료에 나오는 5개의 지혜의 말씀들 특히 '마'에 중요하고 '히1장''약''계'에도 나타나고 신약에 전체에 걸쳐 나타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초대 교회의 공통된 신학이다.- 예수를 지혜로 보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개 왜 시점을 바울이 예수를 지혜로 보고 sending formula를 개발해서 이것이 초대교회에 바울이 한 공로로서 이것이 초대교회의 나중에 공통적인 신학적인 유산이 되었다고 주장을 하느냐면 첫째로 바울이 예수를 지혜로 체험한 것이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체험과 직결되기 때문에 그렇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지혜의 체험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의 사건은 주후 32-35년에 발생한 아주 초대교회의 초기 사건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30년에 일어났다면 바로 직후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지난번에 이야기한대로 바울은 갈 1:16/행9:20에서보는 바와 같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체험한 것을 그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그리스도의 체험의 본질로 나타내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그리스도에 대한 칭호이다.
둘째로 바울은 이 에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에서 바울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고후 4:4/골1:15/롬8:29 등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한다.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하는 신학을 바울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기독론적인 주제이다.
(image) 이라는 말과 같이 같는 말이 인데 보통 form으로 번역한다. 가령 빌2:6 같은데. 그런데 나 는 거의 동의어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image,form)로 보는 기독론과 그의 형상에 한다. 또는 그의 형상으로 우리가 변형된다는 구원론이 바울에게 있어서 중요하다. 예수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기독론과 우리가 그 형상으로 바뀌어져 간다. 그래서 롬 8:29에 보면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 나-에 같은 형상이 되게 했다'. 또 고후 3:18에 보면 '우리가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의 형상을 보며 그의 형상으로 변형되어 간다( ).'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의 형상인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변형되어간다.
또는 같은 형상으로 되어간다는 기독론과 구원론은 바울 신학에 있어서 아주 주요하다. 그래서 물론 아담 기독론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상실한 하나님의 혀앙을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가 회복해서 그에게 연합된 그리스도인들이 그 마지막 아담 그리스도의 형상에 같은형상이 되어가고 그 형상에 변화되어 간다는 기독론과 구원론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아주 중요하다. 사실은 바울의 구원론은 전부 아담 기독론의 틀을 가지고 있다. 바울에 있어서 이것이 아주 중요하다.
그런데 또 하나 유의할 것은 바울에게만 이렇게 나온다. 바울에게만-신약성경에서-이렇게 나온다.
그런데 바로 솔로몬의 지혜 7:27이나 필로의 여러 책들에서 지혜가 하나님의 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이라 할때는 지혜 신학을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이라는 중요한 기독론적인 통찰력을 얻게 되었느냐?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았다.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바울이 그 체험을 곧 자기에게 알려진 신학적인 카테고리 곧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누가 하나님의 형상이냐? 지혜가,아담이. 그래서 다메섹 도상에서의 예수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 바울이 즉각 예수 그리도를 지혜로,마지막 아담으로 해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아담 기독론과 지혜 기독론이 바울에게 발달하는데 이 기독론과 그 에 우리가 같은 형상이 되어간다. 또는 그 으로 변형되어 간다에는 지혜 기독론과 아담 기독론이 같이 작용한다.
그래서 이것도 우리는 바울이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과 그리스도를 지혜로 보는 것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세번째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또 무슨 체험을 했느냐면 그리스도가 율법의 종결인 것을 체험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 왜 갔느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러 갔다. 왜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할 필요가 있었느냐? 율법에 충성하기 위해서. 갈1:13-15에서 본바와 같이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다메섹에 까지 가서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자들을 붙잡으러 간 것이다. 왜? 갈3:13에 말한 바와 같이 율법은 예수가 십자가에 곧 나무에 달려 죽었으므로 예수에게 저주를 내렸다고 신21:23이 선언한 바와 같이. 이렇게 율법, 토라가 하나님의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거스리는 자가 분명하다고 확신. 그래서 율법의 이름하에 율법의 열심으로 율법의 진리를 내세우기 위해서 바울은 율법이 저주를 선언한 예수를 그리스도로 주로 하나님이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핍박하러 다메섹으로 갔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무엇을 체험하였는가? 하나님이 예수를 높이신 것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예수를 옳다고 선언했음을 체험했다. 자 그렇다면 율법이 무엇이냐?
율법은 예수에게 저주를 선언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수가 옳다고 인정하시고 그를 높이셨다.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그것을 체험했다. 그러면 바울에게 무슨 깨달음이 왔겠느냐? 예수가 율법의 종결이다(롬10:4). 예수가 율법의 종결이다. 거기서 예수가 율법의 종결이라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느냐? 아주 논란이 많다. 아주 중요한 신학적 논란이다.
율법이 목적이라는 말이냐? 에수가 율법의 목적을 완성했다는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율법을 끝장내었다는 말이냐? 주로 이 2가지로 율법이 예수를 통해서 성취되어...예수가 율법의 성취라는 말이냐? 아니면 예수가 율법을 끝장냈다는 말이냐? 2가지 가지고 지금까지 논란이 계속된다. 이 논란은간단한 신학적 논란이 아니고 이 논란에 따라 기독교 신앙을 어떻게 이해하느냐가 결정되는 아주 중요한 논란이다. 나 보기에는 두가지 전부다. 예수가 율법을 성취해서 끝장내는. 그래서 이제 더 이상 모세의 율법으로서 효력을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완성된 그리스도의 법으로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의 법-이라는 말을 쓴다. 고전 8장에서. 하여간 둘다 의미가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을 성취했다. 율법이 하나님의 구원사에 대한 예언으로서 또는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약속의 의미를 갖는 한 율법을 성취한 것이다. 성취해서 더 이상 율법이 독립적인 의미를 갖지 않는다. 그러나 또 율법은 변증법적인 문제가 있다. 바울이 '롬'에서 설명한대로 이것이 생명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나 이것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해서 인간이 자기 주장할려는 의지를 자극해서 도리어 하나님께 대항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변증법이 인간의 육신을 자극해서 하나님께 대항하게 하는 사단의 도구로 쓰이는 이런 율법은 예수가 종결시킨 것이다. 그래서 성취와 종경의 2가지 의미가 다 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무슨 뜻이냐? 가령 시락 24장에 유대교에서 지헤가 율법에 담겨 있다고 보았다. 왜? 지헤가 계시의 수단인데 율법이 게시의 수단이므로. 그래서 지혜가 율법 속에서 ,율법으로 체현되었다고 보앴다. 그런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것이 무엇이냐? 율법이 완벽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고 율법이 불완전한 하나님의 계시이다. 예비계시에 불과해.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한 계시로서 율법을 성취하고 완성시키고 그리하여 종결시키는 예수가 진정으로 하나님의 계시이다. 왜? 율법의 성취,완성,종결이다.
그렇다면 구약신학에서 계시의 수단이라고 보아야 하는 지혜가 과거에 율법을 통해서 부준적으로 불완전하게 체현되었다면 예수 안에서 완전히 나타났다고 보아야 하다. 그래서 아담 같은 율법과의 체험도 우리로 하여금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체험과 지혜 신학의 연결을 보게한다.
그래서 나는 주장하기를 예수를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하기를 시작한 것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의 직후이다. 왜? 다메섹 도상에서 체험한 바울의 체험의 내용이 구약성경의 지혜 신학과 이런 식으로 직결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초대교회역사에서 아주 초기에 신약성경 저자들 중에 우리가 아는 한 유일한 정식신학교육을 받은 신학자 바울이 이 지혜 신학을 발달시켰을 것임이 거의 확실하다.
물론 '마'저자도 랍비 훈련을 상당히 받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에게 알려지기는 바울이 신학자로 훈련받은 신학자이다. 그래서 나는 바울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지혜로 identification 하고 지혜의 카테고리로 해석해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선재하심과 그의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하나님의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되심의 사상을 발달시켰다. 그것이 초대 교회에 들어가서 초대교회의 공동유산이 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의 체험을 통해서 지혜신학을 발전시켰지만 나중에 바울이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가령 베드로 같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통하여 얻은 예수의 지혜 말씀들이 지난 시간에 내가 말한 Q자료들, 바울의 지혜 신학 전개에 역사적인 근거로 작용했을 가능성이 많다. 그 Q자료에 나오는 지혜의 말씀들을 다 보면 예수가 지혜로 완전히 identify되지는 않고 있다. 그 말씀들에는 예수가 지혜의 선생으로 또는 지혜의 대표로 나타난다. 곧 예수가 지혜를 나타낸 분으로, 예수가 incorproation으로 나타난다. 이제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보았을 때 바울에게는 어떻게 예수가 지혜의 선생을 지혜를 나타내는 분으로 역사적인 예수가 작용할 수 있었느냐? 바로 그분이 지혜자체이기 때문에 지혜를 가르치는 지혜를 표현하는 분이었다. 이렇게 바울은 자기의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 근거해서 예수가 지혜임을 깨닫고 그것에 근거해서 역사적인 에수의 지헤의 말씀들을 이해했을 것이고 역사적인 예수의 지혜의 말씀들이 바울에게 지혜 기독론을 펼치는데 있어서 역사적인 근거로 작용했을 것이라고 나는 주장한다.
자 여기서 우리는 또 다음 문제로 넘어가야 한다.
아까 롬 10:4의 유명한 말씀을 근거로 예수가 율법의 이다. 그래서 율법을 성취,마침(종결)이다. 그래서 예수가 지혜의 enbodiment다. 여기서 우리는 왜 바울이 자기의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로 즐겨 요약을 하는가를 우리가 이해할 수가 있다. 이 예수가 율법의 성취,종결로서 지혜다. 그런데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지혜가 하나님의 딸이라고 한다. 예수가 지혜로서 지혜는 하나님의 딸이라고한 이유는 여성명사이므로 예수는 남성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래서 예수의 지혜 기독론을 표현하는 좋은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이다.
지혜 기독론을 표현하는 제일 좋은 칭호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예수가 구약성경과 유대교에 그러니까 점진적인 계시의 전단계에서지혜로 활동하신 분이다. 또는 지혜의 활동이라고 하는 활동들을 하신 분이라는 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다. 지헤가 주로 무슨 일을 했다고? 창조,계시,구원의 중보자 역할을 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지혜가 그런 활동을 했다고 그러는데 사실은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이었다. 성육신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활동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지혜신학을 표현하는 칭호로서 어떤 의미를 갖느냐면 율법을 성취하고 종결하셔서 신자들을 죄와 율법으로부터 구속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구속의 사랑을 계시하셔서 인류를 구원하신 분이다. 이렇게 하여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라고 생각했던 지혜의 역할을 감당하신 분이라는 뜻을 갖는다.
우리가 여기서 sending formula를 생각해 보자. 갈4:4/롬8:3,4 이 두곳에서 sending formula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율법이 하지 못하는 일,율법이 지혜의 enbodiment라 생각했지만 완전한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 되지 못해서 도리어 인간을 속박하는 사단과 육신의 수단으로 전락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서 그의 몸에서 저를 정죄하고 율법의 정당한 요구가 완성되게 하고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구원했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지혜 신학으로 말하면 율법은 지혜의 완전한 체현이 못된다. 율법은 하나님이 계시와 구원의 완전한 수단이 되지 못한다. 그런데 지혜의 완전한 체현을 누가 했는가? 하나님의 아들이.
이런데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을 가지고 있는가?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으 수단, 하나님의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계시와 완전한 구원의 수단이다. 그랫 구약신학에서는 율법의 지혜를 곧 하나님의 계시요 구원자인 율법을 나타낸다고 했는데 그것이 아니고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가 완전히 나타나게 되었다.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는 무엇이 구원의 수단인가? 율법이.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보고 나서 누가 구원의 수단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자기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로 정의,요약한다.
갈1:16/고후1:18ff/롬1:2-4,9/살전1:10/행9:20/고후2:18ff 등.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 복음의 정의와 요약을 사용되었을 때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인가? 율법을 능가한 하나님의 게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곧 구약성경과 유대교에서 말하는 지헤의 체현으로서 율법은 그 지혜를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는데 지혜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중보자이다. 그런데 다메섹 도상에서의 체험에서 예수가 율법의 성취,종결인 것을 깨달은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을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던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종결되었으므로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인 지혜가 예수 안에서 나타난다. 그때의 예수를 바울은 무엇이라고 지칭한다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지칭한다.
그래서 복음의 요약이나 정의로,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놀랍게도 복음의 정의와 요약으로 사용하는데 그때에 하나님의 아들은 무슨 뜻이냐면 율법을 능가하는 하나님의 게시와 구원의 중보자-지혜를 체현하는 분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 되는 분,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해주고 하나님의 구원을 중보해주는 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율법을 지켜서 가능하지도 않는 구원을 얻을려고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내어주신 이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의 구원의 수단이므로 우리는 은혜로 구원을 받는다. 또 믿음으로 값없이 받는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많은 곳에서 복음의 정의와 요약으로 쓰인다.
바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드물게 나오는 칭호다. 그리스도, 주라는 칭호에 비하면 드물게,몇번 안나오는 칭호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나오는 곳은 항상 신학적인 논리 전개의 climax에 나온다.
이것이 무슨 말이냐면 바울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를 아주 아껴썼다. 아주 중요한 신학적인 단계에 도달했을 때에 아껴쓴 것이다. 주로 복음의 정의를 위해서 썼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바울이 자기가 다메섹 도상에서 자기가 계시 받은 복음의 내용을 한마디로 하나님의아들이라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있다(갈1:15,6/행9:20).
다메섹 도상에서 바울이 율법의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딸이라고 생각했던 지혜의 역할을 완전히 성취하신 분이다. 율법이 불완전하게 나타내었던 지혜를 예수 그리스도가 완전히 체현한 분이다. 그러므로 그를 통해서 우리가 구원을 받는다. 이것이 바울의 복음이다. 다메섹 도상에서 깨달은 복음이다. 그래서 갈1:16/행9:20에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느 칭호로 그때 그가 받은 복음을 요약한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롬1장에 예수에 대한 유명한 정의가 같은 의미를 가진다.
복음이 무엇에 관한 것인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복음을 무엇으로 정의했나? 하나님의 아들로-기독론적인-
롬1:16f에는 구원적으로 정의했다. '복음이 모든 믿는자에게 구원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학자들이 복음의 그 정의가 어떻게 상호 연관되었느냐에 대해서 토론을 했다. 롬 1:16f의 구원론적인 정의는 '롬'전체에 대한 테마이다. 그래서 다음에 나오는 '롬' 전체이 내용을 테마를 펼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들은 바로 롬 1:16f이 바울의 특별한 복음의 정의라고 롬 1:2-4절까지는 바울 이전의 교회의 복음에 대한 정의인데-그래서 바울의 것이 이건데-그러면 왜 '롬' 첫마디에 자기가 하지 않은 복음의 정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고 있느냐?
자기를 모르는 어저면 자기에 대해 일방적으로 나쁜 소문을 들은 '롬' 교회에 바울이 자기를 소개하면서 자기 복음을자기 사도직을 소개하면서 자기가 초대교회의 교회 공동체 전체의 전승에 확고히 선 사람이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그래서 '롬' 교인들로 하여금 바울에 대한 의구심을 제거하기 위해서 초대교회의 공통된 복음에 대한 정의를 먼저 인용했다고 대개 주장한다.
그런데 이것이 도무지 옳지 않다. 우리가 무엇을 발견했느냐? 바울이 인용하는 롬 1:3,4만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고 그것의 서문인 2b '복음은 그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는 것은 바울의 말이다. 뿐만 아니라 갈1:16f/고후1:18ff/살전1:10/행9:20에서도 바울은 항상 하나님의 아들로 복음을 정의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내가 설명한 대부분이 학자들의 견을 옳지 않다. 바울 스스로 즐겨 복음을 하나님의 아들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니까 롬 1:2-4까지 나오는 복음의 정의와 롬1:16f에 나오는 복음의 정의의 관계는 지금 내가 방금 요약한 그런 식으로 설명해서는 안된다. 이것만 바울의 것이고 이것은 초대교회의 공통된 것인데 바울이 이것을 먼저 인용한 이유는 자기가 초대교회의 공통된 신앙고백위에 초대교회의 공통적인 복음위에 서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서 '롬'교회로 하여금 자기에 대한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사용된 것이 아니라 사실은 다 똑같은 것이다.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고 다른 하나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었다.
왜? 하나님의 아들이 무슨 뜻? 율법을 능가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아들이 율법을 부분적으로 불완전하게 체현한 지혜, 곧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을 완전히 체현하는 분이라는 뜻이 있다고 했다. 하나님의 아들의 뜻이 무슨 뜻? 율법을 능가하고 율법을 대치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원의 수단이다. 복음이 무엇이냐?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는 능력이다. 구원의 수단이다. 의미가 둘 다 똑같다. 하나는 기독론적으로 정의되고 있고 하나는 구원론적으로 정의되어 있지만 바울에 있어서 의미가 똑같다.
그런 것이지 전략상 인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에 살펴볼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또 무슨 의미를 갖고 있느냐면 우리를 하나님의 아들을 만드는 분이라는 뜻이다.
갈4:1-7/롬8:1-23에 자세히 쓰여있다.
우리를 율법으로부터 속량하여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이다(이 사상은 상당히 복잡하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구약성겨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이스라엘의 대표인 왕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다. 또 천사들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다.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의 숙명을 대표적으로 대신적으로 성취한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아들,하나님의 백성의 대표인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면 그의 대표적인, 대신적인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숙명 성취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안에 내포된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백성의 조상이 된다. 우리는 그 가지가 된다-그 안에 내포되어서.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곧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 이것을 어떻게 울가 체험하느냐?
믿음을 고백할때, 믿음의 공식적인 고백의 순간이 언제? 세례 때. 우리가 믿음을 고백해서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와 연합함으로 그때에 우리에게 성령이 주어진다. 이 성려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가운데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빠라고 부르짖느다. 그렇게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다.
우리가 믿음을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인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 가운데-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고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거하게 되는데,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어떻게 거하느냐? 그의 영으로 거한다. 그래서 우리 가운데 거하는 그의 영 곧 아들의 영이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기도가 뭐라고 했지? 아빠라고 부르게 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됨을 확인한다. 이것이 이렇게 체험상 나타난다. 믿음을 고백할 때,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름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했음을 알게 된다.
곧 하나님이 아들이 우리 속에 거함을 곧 하나님의 아들의 영이 우리 속에 거함을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안에 있게 됨을-연합했음으로. 그래서 그의 아들됨에 참여해서 그의 하나님에 대한 독특한 관계 아빠라는 기도의 부름으로 표현되는 독특한 관계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이다. (세례는 공식화 믿음은 그 전에 있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에 참여한다. 그것은 예수와 더불어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예수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된다 .상속자가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자원에 참여하게 되어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같이 된다. 이것이 인간의 피조물성,제한성을 극복하는 길이다. 곧 이것이 구원이다.
질문:로마카톨릭과의 구원관의 차이는?
초대교회의 구원관에 Apotheosis(하나님과 같이 됨) category가 있었다. 이것이 아주 성경적인 가르침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오해를 많이 안을 수 있는 가르침이다. 로마의 이교도식으로 특히 신비종교 식으로 오해될 수 있는 소지를 가질 수 있는 것인데 성경적으로 옳게 이해하면 아주 옳바른 가르침이다.
인간의 제한성이 인간에게 근본문제이다. 제한성을 극복하는 것이 구원이다. 구원은 어떤 의미로든지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할 때 일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무한한 신성에 참여할 때,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는 상태가 하나님 같이 됨이다. 문제는 2가지가 있다.
첫째는 어떻게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하느냐? 인간에게는 항상 2개의 길이 열려져 있는 것 같다. 인간 스스로 자기 주장하며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자 한다. 아담 같이.
그러나 그 길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하나님 같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이하로 인간을 타락과 고난속으로 전락시킨다. 반면에 이 길은 하나님이 제시하시고 하나님이 보내시고 하나님이 내어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와 연합하는 이 길, 그래서 하나님께 의존하고 순종하는 길. 하나님께 자기 주장 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를, 하나님의 은혜의 재현인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들이고 하나님께 의종하고 순종하는 이길은 인간의 자율성을 약화시키고 -인간의 자율성이 인간의 가장 중요한 것이지만-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같지만 니이체식으로 말하면 인간을 노예화시키는 것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의 무한함에 참여하게 하고 인간의 제한성을 극복하게 해서 하나님 같이 되게 한다. 그러니까 역석이 일어난다. 인간의 자기 주장하는 것은 인간을 인간이하로 떨어뜨리고 하나님께 완전히 스스로을 내어 맡기는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길은 그래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의 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자율성과 인간의 자기의 힘을 포기하는 것 같지만 그래서 인간을 인간성 이하로 떨어뜨리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것이 인간을 하나님됨에 참여하게 한다. 하나님되게 한다.
그러니까 인간의 하나님되게 하는 방법은인간이 하나님 될 수 있는 길은 인간의 자기 주장에서 스스로 하나님 같이 되고자 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해서 그것이 첫째 중요한 것이고
둘째로 중요한 것은 그것이 연속선 상에서 인간이 하나님과 같이 됨. 구원의 상태가 인간의 하나님 같이 됨인데 그 상태에서 하나님과 동등해질 수 있고 맞먹을 수 있느냐? 절대 그럴 수 없다.
인간은 어떻게 해서 하나님같이 됨. 인간이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므로서 하나님과 절대로 좁힐 수 없는 간격을 유지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순종함으로서만 인간이 하나님의 무한성에 참여할 수 있다.
그러기 때문에 헬라의 신비종교들과 같이 인간이 어느 정도 입신의 단계에 도달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면 이제 자기 마음대로 행세한다 그런 것이 아니다.
인간의 하나님같이 됨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창조주와 피조물의 올바른 관계를 갖는 상태. 그 상태가 계속되는 한 인간이 하나님과 같다. 그 상태가 무엇이냐? 인간은 하나님께 완전히 의지하고 순종하는 그 상태. 그래서 신약성경에 있어서 그리스도인의 구원의 상태 곧 하나님의 자녀됨의 상태 곧 하나님같이 됨의 상태는 하나님에 대항해서 스스로 무슨 자유를 주장하고 자기 주장하는 상태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것이 인간이 하나님같이 된다고 하면 우리는 곧장 헬라 신비종교식으로 그렇게 이해하기 쉬운데 그것은 역설적으로 인간을 하나님과 같이 고양시키지 않고 인간이하로 떨어뜨린다. 이런 오해를 배제하고 정확이 히해하면 인간의 하나님같이 됨이 궁극적인 구원이다.
우리 인간의 피조물성,결핍성을 극복하는 것이 곧 구원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 되어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의 상속자가 되는데 그 상태에서도 하나님과 인간이 구분이 있듯이 그리스도와 우리의 구분이 있다. 그 구분을 롬 8:29은 어떻게 나타내느냐면 그리스도를 맏아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의 동생들로서 그의 형사에 같은 형상이 되어가도록 또는 그의 형상으로 변화되도록 예정받은 자들이다. 다시 말하면 예수는 하나님의 독생자다. 독특한 아들, 독생자란 말은 독특한 하나뿐인 아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를 통해서 아들됨을 파생받는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독생자를 통해서 중계된 아들들이다. 그래서 구분이 항상 강조되어 있다 .이것을 나타내기 위해서 '요'은 어휘를 달리 한다. '요'에서는
예수가 독생자다. 유일한 독특한 아들이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우리들은 '요'에서
(아이들)ㅇ라고 한다. 그래서 와 를 구분한다.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됨과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을 구분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의 아들됨에 참여해서 우리가 입양된다. 그래서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됨은 예수, 하나님의 독생자를 통해서 중계된 아들들이다.-이런 구분을 분명히 해야 한다.
하나님이 아들됨을 받는다=양자된다= =인양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을 중계받는다는 것을 그림으로 말할 때 입양한다고 한다.
질문: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됨으로 하나님의 부요함에 참여하게 되는데 그로 인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얻을 수 있는 사용할 수 있는 능력은 무엇인가?
답: 하나님이 모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니까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는다. 하나님의 신성에 참여한다. 그런데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잇다. 벌써 혹은 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신성에 완전히 참여하는가? 완전한 상속자가 되는가? 종말에. 롬 8장이 그것을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들 되었짐나 종말에 우리의 하나님의 아들들로서 하나님의 모든 것을 상속받아서 그의 신성에 참여해서 구원이 완성될 때까지는 이 세상에서 게속 고난을 받는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그러면 지금 현재, 종말에 완성되기 전에,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권능과 축복을 상속받는 자로서 아무런 득도 없느냐?
많이 있다. 우리가 벌써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러니까 성취된 종말이지. 하나님의 능력,축복을 상속받을 수 있다.
완전히는 아니지만 부분적으로라도. 받는 수단이 기도이다.
여러분들 기도 무엇이라고 시작해요? 아빠로 기도를 시작한다. 그 다음에 아빠로 불러놓고 ..을 달라고 기도함. 우리가 하나님께 달라고 할 수 있는 자격이 어디서 생기느냐? 아빠라고 하나님을 부르니까.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까 달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됨. 하나님의 상속자됨. 모든 구원은 벌써 그러나 아직의 종말론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다. 종말에 우리가 완전한 상속자가 되어서 하나님같이 됨에 이른다. 지금 그러나 벌써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종말에 실현되는 부분적으로라도 이 하나님의 아들됨의 축복을 체험할 수 있다. 그 체험의 수단이 지금 현재는 기도이다.
신약신학 제20강
요한복음은 20장 30,31에서 저술의 목적을 밝히고 있다. 요한복음의 저술 목적이 예수가 그리스도 즉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되어 있다. 그래서 요한 복음의 전체의 내용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한 분이라는 것을 그래서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신약의 다른 어떤 책보다도 더 많이 나오는 책이 요한복음이다.
요한복음에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보냈다는 이 보냄의 형식이 나타난다. 요3:17/요1 4:9,10,14. 또 보냄의 형식에 근거한 하나님에 대한 지칭이 '나를 보내신 아버지'또는 '나를 보내신 이'로 요약된다. 하나님 이름이 요한복음에서는 나를 보내신 아버지,나를 보내신 이( )가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에 대한 정의이다. 이것이 곧 보냄의 형식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예수의 관계는 하나님은 예수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아버지이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자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그런데 하나님으로부터 나옴을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음은 선지자들이다. 다른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보냄을 받음과 질적으로 다른 것이다. 그래서 선지자를 가령 세례요한이나 이런 존재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할때는 , 라는 전치사를 쓴다. 그러나 예수가 하나님 아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았다 할때는 라는 전치사를 쓴다.
여러분들이 헬라어 기초에서 배웠겠지만 이 라는 말은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 는 그냥 애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말이지만 라는 말은 그 속에서 나온다는 말이다. 영어로 하면 out of라는 말이고 , 는 하나님 곁으로부터, 하나님으로부터 란 말이다.
예수와는 하나님 종들과 근본적으로 다름을 이 전치사로 벌써 나타낸다. 그래서 이 라는전치사를 쓰는데어 우리는 요한이 강조하고자 하는것은 옛가 하나님으로부터 보냄을 받은 하나님의 전권대사인데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이다. 이러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됐음은 곧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보냄을 받는 하나님의 전권대사 라는 그러니까 예수는 하나님의 독특한 agent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 요한은 여러가지 언어를 쓴다. 하나는 모노게네사(독특한 아들=독생자) 1:14,18. 아가케토스(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 3:16,18/요1 4:9 뿐만 아니라, 이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는게 가령 요한복음 내용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우리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요약하는 복음 서문 1:11-12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 누구든지 그 이름을 영접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 되는 일컫는 권세를 준다. 하나님의 자녀되는 권세를 준다.
1ㅣ11,12의 요한복음의 요약이다. 11절을 요한복음의 첫책 가 그의 백성에게 왔으나 그의 백성이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2-12장까지의 내용이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야로 자기 백성에게 왔다. 그래서 표적과 표적에 대한 설교를 통해서 이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영생을 베풀었다. 그런데 그를 영접하지 않았다. 또 12절은 수난과 영광의 책 13-20장까지의 요약이다. 그러나 거기에 소수(11명)가 예수를 영접했다. 그들에게 하나님의 백성됨 곧 하나님의 자녀들 되는 권세를 주었다. 두번째 책 수난과 영광의 책에서는 바로 11명에게 예수가 말하고 있는 걸로 되어 있다. 이렇게 되어 있는데 그러니까 여기서 예수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계시 활동을 통해서 예수를 믿는자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었다. 그런데 그때 쓰는 명사가 , 이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라는 말을 쓰고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는 또는 복수 라는 말을 쓴다. 이렇게 어휘를 달리한다. 그래서 예수가 사랑하는 아들 또는 독특한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아들이다. 또 이 독특한 사랑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요1:18은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자다. 품속에 있는 아들 1:18에 아무도 하나님을 본 자가 없다. 그런데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독생자 하나님이 거기서 를 아니면 로 읽어야 되느냐? 사본학적으로 아주 결정하기가 어렵다. 그런데 대개 편집자들은 로 읽는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니의 품 속에 있는 모노게네스 데오스다. 독특한 아들 하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우리에게 나타냈다. 하나님의 품속에 있는 분이라는 말로 아버지의 본질로부터 나오고 아버지의 사랑의 관계에 있는 분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말한 것을 요약하건데 요한 복음에 의하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냐면 하나님의 본질로부터 나오는 하나님의 전권대사로서 '이 세상에 보냄을 받으니라'이 말이다. 전권대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하는 일이 무엇이냐 첫째로 하나님을 계시하는 일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으 ㄹ실행하는 실행자이다. 계시와 구원의 실행자이다. 어째서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를 실제로 담당할 수 있느냐 그것을 첫째로 예수 하나님의 아들이-하나님 아버지와 본질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하나되기 때문에 그렇다. 아버지와 같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가령 10:30에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라고 예수께서 그런다. 또는 10:38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 상호연합, 상호 내재함.또는 유명한 (I am saying) 내가 ....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에 7개가 나오는데 이것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절대적 용법이 있다. 하나는 보어를 수반하는 용법이 있다. 절대 용법은너희들이 그 사람의 아들을 높이면(들리면) 내가 인것을 너희들이 알것이다고 예수께서 그런다.
가령 요8:28 "너희들이 인자를 들어 올릴때 내가 그인줄 알라" 우리 한국말 번역에 '그'라는 보어를 집어넣었는데 원래 헬라어는 그냥 그들이 인자를 들어 올리면 인것을 안다. 절대용법이다. 보어가 없다. 그러나 보어를 동반하는 것이 많다.
내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내가 세상의 빛이다. 내가 포도나무다. 내가 선한 목자다. 내가 양무리의 문이다. 내가 생명이요 부활이요 내가 하늘로 부터 온 떡이다. 많다. 내가 ....이다가 7개 있다. 이 보어를 동반하는 말씀은 주제가 전부 생명과 관계가 있다. 예수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하나님을 함께 해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그래서 이 생명을 주시는 분이라는 생명을 누가 주느냐? 하나님이 준다. 그래서 보어를 동반하는 의 말씀은 절대용법 말씀을 푼 것이다. 그것을 해석한 것이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실은 출 3:3이다.
이사야 서 후반부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됨 예수의 야웨됨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자 그런데 우리가 8:28에
너희들이 들어 올릴때 내가 인 것을 안다. 풀어 말하면 내가 하나님 인것을 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가령 10:30 나와 아버지는 하나라. 이렇게 말하는데 이것이 다 무슨 말들인가? 이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면 너희들이 인 것을 안다. 들어올린다는 소리가 인데 요한복음에 있어서 들어 올린다는 동사가 이중 의미로 쓰인 것은 여러분들이 다 알것이다. 하나는 십자가에 못박혀서 자표에서 들어 올린다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박힌다는 것은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을 말한다. 그 사람의아들을 들어 올리라는 소리는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다는 소리이다. 그러면 예수가 십자가에 목박혀서 지표에서 들어 올리면 그때에 인 것을 안다. 그때 예수가 하나님인 것을 안다. 그 말이다. 이것이 무슨 소리인가?
예수는 십자가에서 들어 올릴때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순간에 하나님이 인류를 사랑하심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한다. 곧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임을 계시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계시한다. 그런데 이 계시의 첫원칙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계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본질을 계시한다는 것은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는 것이다. 그러기때문에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는 순간에 하나님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그 본질을 드러내게 하는 예수가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하나님임을 나타낸다.
예수가 십자가에 들리는 순간에 하나님을 계시하짐나 그것은 동시에 예수를 계시하는 것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의 계시자는 하나님과 본질이 같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여러분들 내가 누차 얘기했짐나 예수가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면 하나님을 계시할 수 없다. 사람보다 못한 원숭이가 사람을 보여 줄 수 없듯이 하나님보다 조금 못한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하나님을 보여줄 수 없다. 사람은 사람만 보여줄 수 있듯이 하나님은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다. 하나님을 보아야 하나님이 어떻게 생긴줄 알지 그런데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사랑을 계시하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다. 우리가 어덯게 아는가? 하나님이 사랑인 것을 십자가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인류를 위한 구원의 사건을 나타냈다. 그래서 하나님은 본질이 사랑이다. 곧 하나님을 계시했다. 하나님을 계시하므로 예수는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나타낸 것이다.
우리 기독교 신앙구조가 항상 이렇게 되어 있다.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하나님을 계시하므로서 스스로 하나님의 계시자임을 또 나타낸다. 그래서 이 십자가에서야 비로서 예수이 본질이 드러났다.
하나님의 계시자로 하나님의 아들도 하나님과 본질이 같은하나님으로 그것이 무엇인가? 옛의 영광받음, 예수의 높임 받음. 하나님으로 인정됨. 영광받음이란 본질이 드러나고 드러난 본질에 의해서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인정됨 이것이 영광받음이다. 그래서 예수의 들림이 일단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이 이것이 수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예수의 본질을 드러나게 하는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로서 하나님의 본질에 참여하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임을 드러내는 행위다. 그러니까 예수가 본질적으로 존재론적으로 하나님과 하나됨이 굉장히 강조되었다. 그래서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의 십자가의 죽음이 예수의 영광 받음이다. 예수의 본질이 드러난 것이다. 그래서 높임받음 들림받음의 의미가 이중으로 쓰이고 있다. 이것이 십자가의 죽음 이것은 글자그대로 고난이다. 그러나 이것이 동시에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계시자됨. 그래서 하나님적인 본질을 드러내는 사건이다. 예수의 아들됨. 하나님 됨을 나타내는 사건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있다. 너희들이 인자를 들어 올릴때 그때에 인것을 내가 하나님인 것을 너희들이 보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이 하나님과 본질이 같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됨을 고이장히 강조한다.
둘째로 이 의지의 하나됨(unity) 하나님 아들과 하나님 아버지와 의지가 똑같다. 이 의지의 일치는 아들의 아버지에 대한 절대순종으로 나타난다. 절대 복종으로 나타난다.
아들이 만약에 아버지와 같은 의지를 갖고 있다면 요한복음 언어로 말하면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지 않으면 아들이 아무리 본질적으로 아버지와 같다고 해도 아들의 말에서 아버지의 말을 헤아릴 수 있겠어요? 없다 .아들이 하는 의지에서 아버지의 의지를 헤아릴 수 있어요? 없다. 아들이 하는 행위에서 아버지의 행위를 헤아릴 수 없다. 아들이 아버지의 뜻에 자기 뜻을 완전히 일치시켰을 때 아들의 가르침에서 아버지의 뜻을 아들의 행위에서 아버지의 행위를 헤아릴 수 있다.그래서 본질적으로만 unity가 아니고 의지의 unity를 가져야 하는데 의지의 untiy를 갖는다는 소리는 아들이 아버지에게 자기 뜻을 완전히 일치시킨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그것이 어떻게 나타나느냐면 아들이 아버지에 대한 절대 순종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예수가 이것을 굉장히 강조한다. 8장에서 내가 아무것도 내 스스로 할 수 없다 .아버지가 나에게 가르쳐준 대로 나는 말한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는 것만 나는 한다. 그러니까 자기 스스로 아들이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하는것을 보는데로 할 것이며 5장에 보면 또 자기 스스로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대로 자기는 가르치며 자기 뜻을 자기는 받드는 것이 아니고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한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뜻에 자기가 완전히 순종함. 절대 복종함 이것을 말하다(8:28/7:16/7:14,10/5:19,55/4:34/5:30).
이런 의미에서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 말할 수 있다.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14:28)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나와서 아버지의 뜻을 완전히 순종하면서 성취하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는 아버지의 심부름꾼이다 .이런 의미에서 기능적인 subordiantion(기능적인 복종) 그러니까 본질적인(essential) 또는 존재론적인 하나됨과 의지의 일치(uinty of the will)는 곧 functional subordination을 의미한다. 기능적인 아버지에 대한 완전한 순종, 이런 후자의 의미로 아버직 아들보다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래서 고대교회에서 아리우스와 아다나시우스가 논쟁할 때 양파가 다 요한복음에 호소했다. 아리우스는 바로 요14:28 아버지가 아들보다 크다고 하지 않느냐 또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고 아버지 뜻을 순종하는 자기를 보내신 이의 뜻을 한다.
그러니까 아들이 하나라고 하지 않느냐 10:30 그리고 아버지가 내 안에 있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고 하지 않느냐 또 예수가 하지 않느냐 그런데 사실은 이 두가지가 계시의 요건들이다.
둘다 본질적인 존재론적인 unity 의지의 하나됨 functional subordination이 있을 때에만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또는 존재론적으로 같고 또 그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완전히 일치시킬 때 곧 순종할 때만 예수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계시자가 된다.
계시의 요건이다. 예수가 바로 이러한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고 그러면서 하나님의 뜻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계시했다 .요한복음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가 이다.하나님의 게시자.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계시 자체다. 하나님의 본지에서 나오는 하나님과 본질적으로 같은 분이니까 물론 선재하신 영원한 분이다. 하나님 말씀 자체 그런데 이 예수가 하나님이 주로 무엇임을 계시했는가? 생명을 주시는 분임을 계시했다. 하나님이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이로 창조주로 또 우리를 죽음의 구렁텅이에서 살리시는이로 다시 생명을 주는 영생을 주시는 이로 우리에게 계시했다.
요한복음에서 누차 강조하는 것이 무엇인가? 가령 3:16,17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다. 구원하려 함이다. 예수를 믿는 자들에게 생명ㅇ르 주기 위해서 그러니까 하나님은 심판하는 분이 아니다. 심판하려고 자기 아들을 이 세상에 보내신 분이 아니고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또는 이 세상에게 생명을 주려고 보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사랑이시다. 하나님이 사랑이심을 계시한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셔서 이 세상에 생명을 주려하시는 분이다. 이것을 강조.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 내어줌에 형식이 3:16에 나타나고 10:11.15:13/요일4:10 비슷하게 나타나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이 세상을 심판하시지 않고 구원하려고 이 세상에서 생명을 주려고 자기 아들을 보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이 하나님을 심판자로 알고 있다. 무서운 저기 서초동에 앉아 있는 검사 할아비꽃으로 생각한다. 하나님을 그래서 무엇을 조금만 잘못하면 여지없이 저기 지옥의 유황불에 떨어뜨리는 분으로 하나님을 안다.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우리를 구원하시는 분이다. 우리를 요서하시는 분이다. 너무나 많이 경건주의자들의 신앙은 왜곡된 신관으로 되어서 그렇게 되면 신앙이 옳을 수가 없다. 그럼녀 그것이 율법주의 신앙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벌벌벌 떠는 새벽기도 한번 안나가면 복받기는 틀렸고 그걸 어떻게 회복하려면 심방을 한 25번 더 해야 어떻게 겨우 회복해 가지고 지옥 꼭대기 층에서 천당 제일 밑바닥으로 올라가는 조그마한 그렇게 율법주의 신학이 될 수밖에 없고 공로로 구원받는 공로의 신학이 돌 수밖에 없다.
이거야말로 하나님에 대한 대칭이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범을 좀 잘 지켜서 하나님 앞에 공로를 세워 하나님이 차마 나를 괄시 못하게 하려고 내가 이렇게 열심히 헌신했는데 하나님이 차마 나를 괄시못하겠지 이거야말로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도전이다. 하나님이 누군가. 하나님에 대해서 내가 공로를 이렇게 쌓았으니 하나님 당신 꼼짝 못하고 나 축복해야지. 내가 공로를 이렇게나 많이 쌓았는데 당신 나 복안주고 베겨.이런 신관이다. 그러니까 루터가 큰 깨달음 하기 전의 심관이 대부분의 한국의 그리스도인의 신관이다. 이것이 성경이 계시하는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하는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무엇하러 요3:16,17 요한복음 전체가 보여주듯이 무엇이라고 하나님은 사랑이다. 이 세상을 구원하려고 자기 아들을 보냈다. 그런데 심판이 불가피하게 이루어진다. 그것은 하나님이 심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 하나님의 생명의 계시를 받은 우리 인간들이 그것을 안받겠다고 그것을 부인할 때 우리가 스스로 암흑의 자식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항상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가 이루어질 때 요새말로 하면 복음선포가 이루어질 때 인간들의 반응이 갈라진다. 소수의 인간들은 그 계시의 빛을 이해하고 예수를 영접하고 그래서 이 계시가 주고자 하는 생명을 받고 구원을 받고 다수이 인간들은 이 계시의 빛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이렇게 항상분리가 일어난다. 이 분리가 심판이다. 그래서 이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거부한 사람들은 이 세상의 죽음 이 세상의 암흑 가운데 남겠다고 하는 사람이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르지 못한다. 그런데 이 세상의 암흑과 이 세상의 죽음의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 것인가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으하면 이를 갈고 슬피 운다. 좀더 묵시문학적인 만화로 그린다면 유황불에도 떨어지고 그런 것이다. 여러분들 생각해 보세요.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유황불에 떨어뜨리겠어요? 그런 하나님이 하나님이겠어요? 이것을 만화다. 그림이다. 묵시문학의 상징이다. 그림어이다. 무엇을 상징하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이르지 못한 상태가 얼마나 지독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인가? 얼마나 우리가 도저 원하지 않을 것인가를 그리는 그림이다. 그 죽음의 상태이다. 얼마나 우리로서는 그걸 진짜 알면 원하지 않을 것인가를 아주 생생하게 보여줄려고 하는 그림이다. 그걸 그먄 문제적으로 해석을 해서 진짜 하나님께서 유황불로 떨어뜨리는 것으로 이해한다. 인간도 자기를 반대하는 적수를 막 유황불에 떨어뜨리면 우리는 그 사람을 존경할 수 없다. 사랑을 고사하고 인간성이 없는 사람으로 본다 .그런데 본질이 사랑이신 하나님이 자기를 안믿었다고 막 유황불에 집어 넣으면 그런 하나님을 믿겠습니까? 여러분들 이것은 그림이다. 상징어 묵시문학의 상징어, 요새로 요한계시록을 도대체 이해하지도 못한 사람들이 요한계시록을 깨달았다고 교계 신문만 보면 요한계시록 부흥회 한다고 난리를 피우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고 가지 마세요.
그런 사람 요한계시록을 모르는 사람이다. 엊그제 누구한테 들었더니 무슨 EC가 92년에 통합되는게 그것이 전천년설하고 어떻게 연결된다고 난리를 피운다고 그래요. 왜 그것이 한국에서 대단하다고 그래요. 요한 복음에서 예수께서 지옥에 대해서 한 것도 다 비유이다.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하나님이 사랑임을 선포해요. 자꾸 하나님을 despot독재하는 서초동 공안검사 할아비같이 만들지 말고 그러면 신앙이 다 뒤틀린다. 이런 사람이 믿지 않고 등지면 그것은 인간의 지금 암흑의 썩어질 상태 바울도 마찬가지다. 로마서 1장에서 무엇이라고 하는가? 인간들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있으면서도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고 그래서 하나님을 자기들의 욕심에 내버려 둔다.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그러니까 심판은 누가 하는가? 인간 스스로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거부하는 행위가 스스로 자기는 하나님의 사랑에 참여할 수 없는 하나님의 구원에 참여하지 않는 그러니까 이 세상의 썩어짐과 암흑에 죽음에 머무르겠다고 스스로 선택하는 것이다. 그 사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desirable하지 않는가. 그것이 얼마나 참담한 현실인가? 그것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산다. 그것을 상기 시키기 위해서 아주 엄청난 만화를 그린 것이다.
묵시문학이 만화다. 만화로 그 진리를 아주 효과적으로 표현할려고 한 것이다. 여러분들 저기 소련을 그릴 때 무슨 만화로 그리는가? 곰을 그린다. 곰을 그리므로 소련의성격을 효과적으로 communication 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다. 소련의 만화를 곰으로 그려놓고 소련 사람을 문자 그대로 곰이다 생각하면 돼요?
종말 이후의 지옥의 상황은 어떤가?모른다. 그것이 무지무지하게 지독한 상황일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이루어질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의 상황 그것이 지옥에 간다는 것이다. 그게 무지무지하게 지독한 상황일 것이다. 정말 desirable하지 않는 상황일 것이다. 그걸 나타내기 위해서 묵시문학에서 그림으로 유황불로 난리가 나게 그릴 수 있다 .그런데 문자 그대로 유황불에 끓고 그러느냐?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고 이 종말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때 구원에 이르지 못하면 하나님의 생명에 이르지 못하면 죽음이 confirm 확인이 되는데 그 확인의 상태가 지옥이 얼마나 지독한 것이냐 그것을 비유로 말한 것이다. 그것이 도저히 인간이 그 실체를 안다면 바라지 않을 그런 상황일 것은 분명하다. 지옥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가 확인되는 종말에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것이 확인되는 그 상황인 것을 알게 하기 위해서 비유로 말해야지 우리 중벌상 제일 나쁜 것이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일 것이다.
상상하건데 그보다 더 나쁠 것이다. 지옥은 있지. 그런 의미로. 그런데 그 지옥이 얼마나 지독하냐 그러니까 여러분들 좀 더 훌륭한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고 그러세요. 그게 옳다 .그러니까 인간의 체험상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이 지독하다면 적어도 그 정도는 지독하라는 것이다. 알겠어요? 또 괜히 쓸데없이 녹음해가지고 가서 김세윤이 지옥 안믿는다고.... 지옥이 있지. 그런데 유황불에 떨어지는 것보다 더 지독하다고 인간의 언어로서는 그렇게 밖에 표현 못해. 그러나 사실은 그 보다 더 지독하다. 인간의 극한 상황을 표현하는 그림이 그런 것이다.
요한 복음이 강조하는 것이 무엇이냐? 요3:17 심판하려고가 아니고 생명을 주러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판이 이루어진다. 3장 5장 9장 10장에도 그렇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사랑해서 그 아들을 보내서 십자가에 달리게 하므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디에서 나타나는가? 십자가에서 나타난다.(giving form)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내어주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그의 아들을 내어주었다. 그래서 그를 믿는 자마다 심판과 멸망에 이르지 않고 구원하려 함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이다. 그래서 이런 의미에서 예수가 세상의 빛이다. 이 예수가 하나님의 빛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계시라는 말이다. 하나님이 사랑임을 계시했다. 빛을 보고 계시를 보고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된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하나님을 믿는다는 말과 안다는 말이 동의어로서 같이 쓰인다. 아주 중요한 말이다.
예수가 하나님의 세상의 빛이다. 곧 하나님을 계시하는 계시자이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임을 계시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사랑임을 그래서 그 계시를 우리가 받아드리면 하나님을 안다. 안다는 말이 무슨 말이냐면 헬라 사람들은 안다는 것이 현상들을 관찰해서 그 현상들 뒤에 숨었다고 보는 원칙을 추상하는 것을 안다고 그런다. 이 현상들 뒤에 있는 그 원칙들을 추상화해서 이론을 만드는 것을 지식이라고 한다. 객관적인 지식이가. 그런데 성경에서는 안다는 말은 그런 말이 아니고 관계를 갖는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안다는 말은 하나님과 관계를 이룬다는 말이다. 그래서 아는 것의 가장 밀도 깊은 앎이 남녀의 성관계 그래서 가령 성관계를 말할 때 안다고 그런다. 예를 들어 이 아담이 이브를 알았다. 성관계를 했다는 말이다. 마리아가 아직 남자를 알지 못했다는 것은 성관계가 없었다는 그런 말이다. 이 관계 부부간의 성관계와 같은 밀접한 관계 하나됨의 관계 이것이 앎의 극치이다. 예수가 하나님을 계시해서 우리로 하나님을 알게 하는데 이 앎의 극치가 하나님과 관계 하나님과 하나됨 마치 부부가 한 몸을 이루듯이 하나님과 union한다 그말이다.
그러면 우리 피조물들이 하나님과 하나되면 우리 제한성 속에서 죽어간 피조물들이 무한한 창조주 생명주와 접합됨녀 우리가 하나님의 그 삶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결과가 영생이다. 신적인 삶이다. 그래서 예수의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 union하게 해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가 빛과 생명을 가져오는 분이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앙고백을 하면서 늘 염두해 두어야 할 것은 이 하나님의 아들을 통해서 스스로 계시하신 분이 어떤 분이냐 우리를 사랑하는 분이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우리의 구원자 하나님이시라는 말이다. 늘 그 공안검사 할아비꽃으로 생각하지 않도록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해서 설교를 하세요.
아까 이야기한 하나님의 아들과 하나님의 하나됨이 아까 내가 제시요건이다 해서 두개를 썼지요. 하나는 존재론적인 unity요 기능적인 unity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실존의 논리의 시발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이 계시했다. 그래서 아들이 계시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아들이 같아야만 한다. 존재론적으로도 같고 의지에 있어서도 하나되고 그래서 아버지와 같은 본질에 있어서도 같고 의지에 있어서도 같은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나와서 아버니의 품으로부터 나와서 아버지로부터 보냄을 받아서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계시란 것이다. 이 계시가 객관적 모든 역사적 계시이다.
팔레스타인에서 거의 2000년전에 우리의 참여 없이 역사적으로 일어났다. 과거이다. 과거시제 이 계시를 오늘 우리에게 하나님의 계시로 계시되게 하는 분이 성령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 그것을 분명히 밝혔다. 성경이 또 하나의 (보혜사)로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보낸다. 또는 아들이 아버지 이름으로 보낸다.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 .소위 고대 교호에서 삼위일체 교리에서 아주 중요한데 서방교회에서는 성령이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하고 동방교회에서는 아버지로부터만 나온다고 하고 그래서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지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다. 하여간 요한복음에는 아버지가 아들의 이름으로 보낸다. 아들이 아버지로부터 성령을 보낸다고 그래요.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온다고 그런다. 그래가지고 요한 복음에 의하면 성령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예수의 것을 가르치고 아들의 것을 가르치고 아들의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깨닫게 한다. 아들은 자기 뜻대로 자기 멋대로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가 가르쳐 준 것을 가르치고 아버지의 뜻을 했했다. 성령은 아들의 가르침을 가르치고 아들이 가르침을 기억나게 하고 아들의 한 것을 깨닫게 한다. 그러니까 성령이 아들을 나타낼려면 어때야 하는가?
똑같은 논리를 아들과 똑같아야 한다. 아버지와 똑같아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아버지를 아들이 역사적으로 우리에게 계시했다. 그 계시를 성령이 우리에게 계시되게 한다. 우리가 그것을 진짜 하나님의 계시로 하나님을 깨닫게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계시의 본질상 하나님은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으니까 아들 안에서 아들을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을 계시할 수 있는 성령을 아버지와 아들과 같아야 한다. 이것은 초월하시는 하나님의 내재하심을 동시에 천명하는 것이다. 아무도 하나님을 볼 자가 없다(요1:18).
그러면 하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낼 수 있느냐? 하나님을 하나님만 보여줄 수 있다. 그 하나님인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에게 초월한 하나님을 보여주셨다. 이 하나님 아들을 보여주었는데 우리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누가 우리에게 예수를 통해서 주어진 가릋미과 그 행적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절정에 이르는 그 예수의 행적이 바로 하나님의 모습 자체라. 하나님의 본질이다.
하나님은 사랑이다는것을 누가 깨닫게 하는가?우리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다. 십자가의 못박힌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하나님으로 그래서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인 것을 누가 깨닫게 하는가? 하나님인 성령이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서 무한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한다.
이것이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의 논리의 시발점이다. 이 삼위일체론적 신관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무엇을 항상 염두해 두냐면 첫째로 지금 하나님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는 사람들이 누군가? 요한이다. 바울이다. 마태다 이들이 다 누구인가? 유태인들이다. 이 유태인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나면서부터 신명기 6:4의 쉐마 유대인의 근본 신앙고백. 들으라 이스라엘 여호와는 유일한 주시라. 절대 유일신학을 하루에도 몇번씩 낭독하는 사람들이다.
아돌프 하르낙을 위시한 19세기말-20세기 초의 자유주의 신창자들이 생각했던대로 무슨 이런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은 헬라의 존재론의 영향을 받은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유대인들이 만들어낸 것이다. 절대유일신론의 신앙고백속에서 낳고 자란 요한이 바울이 마태가 깨달은 하나님이시다. 그것을 우리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벌서 이것이 헬라 철학적인 존재론적인 speculation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 두번째로 알 수 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계시를 체험한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한 하나님을 또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서술 할 때 또는 개념화할 때 아주 spontaneous 하게 아주 자연적으로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삼위일체로 신관은 어디서 나온것이예요?
초대교회의 절대유일신론의 신앙고백에서 낳고 자란 유대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의 엄청난 체험을 한 뒤에 그러한 예수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스스로 나타난 하나님을 그릴 때 그 하나님을 conceptualive할 때 이 사람들이 무슨 존재론적인 철할을 배워서가 아니고 특별한 하늘의 수학을 배워서가 아니고 그러한 하나님을 기술할 때 자연히 삼위일체론적으로 밖에 기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에수 그리스도에 의한 엄청난 계시와 구원을 체험한 이 유대인들이 이 사건을 통해서 구원자로 스스로를 들어내신 하나님을 개념화할 때 서설할 때 자연히 삼위일체론적으로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삼위일체론적인 언어는 그리스도의 계시를 체험한 사람들의 아주 spontaneous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고 새로운 신앙고백이다. 그러면 하나님을 이렇게 삼위일체론적으로 말할 때에 궁극적으로 무엇을 천명하느냐? 하나님이 초월하신 하나님으로서 영원한 창조주 하나님으로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분이다.
자 하나님이 초월하지 않으면 이 우주보다 크지 않으면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어요? 없어요? 고칠 수 없다. 그래서 삼위일체 신론의 그 오묘함, 그 중요함을 알려면 우리가 다른 신관들과 좀 대조를 해보아야 한다. 어떤 신관들이 있는가? 범신론이 있다.
인도 종교들이 다 pantheism 이나 힌두교나 개척 힌두교라 할 수 있는 불교가 범신론이다. 범신론은 초월을 부인한다. 신이 우주와 coextensive인 우주전체가 신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런 신관을 가지고 있는 종교에서는 우주의 고장난 또는 인가의 고뇌를 어떻게 설명할 수 밖에 없느냐면 고뇌가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우주전체가 신이라면 선과 악이 무슨 구별이 있는 것이 아니다. 선과악을 구분하는 것을 순전히 현상에 세계에 대한 우리의 환상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이 선과 악의 reality을 부인하거나 아니면 이러한 선과 악을 체험하는 현상의 세계에서 선과 악이 없는 변화가 없는 본질의 세계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그런 구원론을 제시한다. 그것을 보통 힌두교에서나 불교에서는 수레바퀴로 설명한다. 이본질을 기하학적으로 기하학적인 축과 같다. 이 수레바퀴의 기하학적인 축은 도는가? 안돈다. 그것은 변화가 없는 세계다. 그러나 수레바퀴의 겉은 어떠한가? 돈다. 변화의 세게이다. 우리의 실존은 본질에서 소외된 그래서 현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윤회의 법칙이 노예가 된다. 돌고 돌음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또 낳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이 고뇌가 언제 얼마나 계속되는가? 영원히 계속된다. 인생관이 이렇게 설정된다. 그렇다면 세계관 인생관 이런 신관에서는 구원이 무엇이겠는가? 현상의 세계에서 과감히 본질의 세계로 뛰어드는 것이다. 어떻게 본질의 세계에 들어가느냐? 자아를 없앰으로서 시론한다는 것이 본질로부터 소외된 것이니까 본질의 세계에 함몰되는 것이다.
본질의 세계에 무아 몰아적멸 자기를 없애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말하면 태평양의 한 물방울 같이 떨어져버린다는 것이다. 그것이 열반이다. 열반이 무아의 경지다. 몰아적멸, 없어져 버린 것이다. 태평양의 물한방울 같이 본질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구원론이 이렇게 설정된다.
그러면 누가 구원을 하는가? 자기가 자력 구원이다. 자기가 도를 닦아서 하든지 지식을 얻어서 하든지 사랑의 행위를 베풀어서 하든지 반면에 고등종교에서 또 하나의 신관이 무엇인가? 이슬람식 신관이다(Deism). 이것은 하나님의 초월을 너무 강조한다. 하나님의 내재를 부인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고는 이 세상이 타락해 이 더러운 타락한 세상에 개입을 하지 않고 하늘 꼭대기에 혼자 고고하게 앉아 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을 고장난 우주를 고칠 수 있는 신이 있기는 있다. 고칠 수 있다. 할 수 있다. 그런데 그가 이 세상에 오지를 않는다. 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 이 세상 역사속에 와서 하나님의 신이 우주를 끌어내야 한다. 우리에게 구원의 손길을 내밀어야 우리가 구원을 받는데 혼자 하늘 꼭대기에 있다. 이 이슬람의 신관은 부재주의 신관이라 한다. 실제로 역사속에 세상 속에서 구원의 손실을 내밀지 않는다. 내재가 없으니까 이런 데는 인생관이 어떻게 되느냐면 완전히 숙명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완전한 숙명주의는 우리 인간을 한시도 존재하지 못하게 한다. 숨막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로 구원이 논의되는데 어떻게 되겠는가? 구원할 수 있는 신은 있는데 그가 구원하러 내려오지 않으므로 여기서도 자력구원이다. 신이 게명에 완전히 순종을 해서 또는메카네 순례를 해서 또는 라바라덴에서 금식을 하고 하루 네번씩 기도를 해서 자력구원이다. 자력구원일 수밖에 없다. 신이 내려와서 구원하지 않으니까.
그러니까 이런 신관이 고등종교에서 제기된 신관이다. 범신론이든지 아니면 초월신론이든지 둘다 결국 구원론이 자력구원론이다. 그래서 모든 종교들이 전부 자력구원론이다. 그러니까 이런 신관을 궁극적으로 신의 존재를 완전히 부인하는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와 완전히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결국 인생관이 어떻게 설정이 되느냐면 인간은 결국 자기 손에 달려 있다. 인간은 자기가 자기 운명을 개척해야 하고 자기가 자기 스스로 구원을 하든지 말던지 해야 한다. 인간이 자기 손에 달려 있다. 이 인간이 자기 손에 달려 있음. 이것은 얼마나 처절한 위로 없는 말입니까? 곰곰히 생각해보세요. 우리의 운명이 우리의 손에 달려 있다면 그것같이 불안한 것이 없다. 인간같이 불안정하고 잔인하고 이 세상이 이 역사가 인간 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지금 미국과 소련이 적재해 놓은 핵무기가 지구를 몇번 파괴할 수 있는 양인가? 이 인류가 운명이 인간의 손에 달려 있다면 인간들은 이 지구를 여섯번 파괴하고 말았을 것이다.
인간은 빝보다 암흑을 더 사랑해서 이 세상을 완전히 카오스로 전락시켰다. 잉ㄴ간이 이 세상을 완전히 카오스로 전락할려는 끝없는 동작에도 불구하고 이 세상에 이만큼이라도 질서가 있는 것 같고 정의가 있는 것은 전부 창조주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붙들고 게시기 때문에 그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붙들고 계시는 분이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나님이 초월하신 분으로 이 세상보다 커야 이 세상을 붙들고 있지 이 세상을 붙들고 있다는 것은 무슨 소리인가? 이 세상에 내재하시고 이 세상에 간섭하시는 이 세상에 들어와서 인간들이 자구 카오스를 떨어뜨리는 이 세상은 그래서 코스모스의 흔적이라고 계속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기를 드러내셨다. 그런 초월하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이 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을 체험한 유대인들 그리스도 사건을 통해서 자기들에게 계시된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밖에 개념화하고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천명하는 것으로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 우리를 구원하러 오셨음. 그래서 우리에게 구원이 발생함. 그래서 이 삼위일체론적인 신관과 대조되는 신관과 또는 그 신을 완전히 부인하는 무신론적 인본주의이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신관 세계관 인생관은 크게 두 종류이다. 하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에 근거한 것이거나 아니면 이런 범신론, 자력신론 신관이나 무신론적인 인본주의에 근거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을 전제할 때 우리는 계시라는 말로 쓸 수있고 사랑이라는 말로 쓸 수 있고 은혜라는 말도 쓸 수 있고 구원이라는 말도 쓸 수있다. 인간이 하는 행위가 구원일 수가 있겠는가? 인간 스스로가 제한성에 갇혀 있는 존재인데 인간 스스로가 어떻게 그 제한성을 극복하는 것이 구원인데 어떻게 극복하겠어요? 인간이 하는 어떤 행위가 구원이 될 수가 없다. 구원은 하나님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초월하는 하나님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 초월한 하나님이 예수 그리드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내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초대교인들이 나사렛 에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엄청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의 사랑을 체험하고 그의 구원을 체험했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렇게 자기를 드러내고 계시하고 자기 사랑을 나타내고 자기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을 개념화하고 서술할 때 어떻게 해요?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이다. 그러나 보통 오늘날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론 신론을 말할 때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3위가 한분이냐는 숫자놀음으로 전락시킨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삼위일체론 신관하면 그 문제가 본질이 성경이 가르치는 삼위일체론적인 신론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을 하나도 모르고 어떻게 3분이 하나가 되느냐? 물론 여기까지 성경이 가르쳐 주는데 성경이 여기까지 밖에 안가르쳐 준다. 여기까지밖게 안가르쳐주는데 인가의 호기심은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러면 어떻게 이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어떻게 다르면서(diverse) 동시에 하나(uinty). diversity 와 unity가 되는 mechanism을 어떻게 더 설명할 수가 없을까? 이렇게 인간은 그것을 더 알고 싶어 한다. 그래서 신학자들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여러가지 개념들을 개발시킨다. 그래서 한 본질에 세 persona 그것을 설명할려고 애쓴다. 개념을 자꾸 만들어 가지고 본질( ) substance persona 그러면 persona가 무엇이냐? 도대체가 이래가지고 개념 말장난을 많이 했다. 그것으로 안되니가 그림 비유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그래서 아마 많이 아려진 비유 어거스틴이 했다고 비유 어떻게 셋이 하나가 되느냐? 쇠더이를 하나 게속 달구어 버린다. 쇳덩어리가 열이 나고 빛이 난다. 열,빛,쇠덩이 삼위일체가 아니냐? 그래서 셋이 하나가 되는 법도 있다. 이런 식으로 비유들을 많이 개발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에 의하면 삼위일체론 특히 조직신학만 열심히 공부한 사람들은(요새 공부한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구식 조직신학 열심히 한 사람들은 삼위일체론하면 삼위일체론 신관이 어떻게 인식되고 고백되고 무엇을 말하는가? 다 잊어버리고 모르고 완전히 셋이 하나가 된다는 추상화한 abstract formula해서 무슨 고등숫자 놀음으로 수학으로 본다. 지상수학은 그렇지 않은데 하늘에서 수학은 그렇데 된다. 1+1+1은지상에서는 셋인데 하늘에서는 하나다. 그래서 숫자놀음 해가지고 기껏해야 한다는 것이 아까 든 비유같은 것이다. 그런 비유가 우리에게 지금 내가 말하는 우리를 구원할 수있고 구원하신 분으로 실제로 그래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알게 하고 구원이 발생하게 하는 그런 하나님에 대한 인식이고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고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이런 신관이나 인본주의를 택할 수 밖에 없는데 이렇다면 세계관, 인생관이 이렇게 되고 우리에게 구원의 가능성이 없음. 이런 것을 깨닫게 해요. 삼위일체론을 계속 숫자놀음으로만 생각하면 아무것도 모른다. 진정으로 성경이 가르쳐 주는 성경이 어디까지 가르쳐 주는가? 이것을 깨달았을 때의 삼위일체론의 신관의 오묘하고 중요한 것이다. 어떻게 하나님이 diverse하면서 unity로 존재하느냐 이것에 대해서 궁극적으로 답할 수 없다.
거기에서 질문을 그렇게 한다면 삼위일체론의 신론은 궁극적으로 신비다. 그렇게 할 수는 있다. 질문을 그렇게 한다면 그러나 성경을 질문을 그렇게 하지 않는다. 계시와 구원을 체험부터 시작해서 이러한 계시와 구원을 하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이시다. 이런 하나님이 삼위일체론 하나님 인식 체험 그것의 개념화 여기에 중요성이 있는 것이지 그 다음에 우리 지적인 호기심이 일으키는 그것은 이차적인 것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답을 모른다. 신념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그럴듯하게 만들려고 한 신학자들의 그많은 노력이었다. 그많은 노력들은 나름대로 값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unity 와 diverse 가 있기에 그분이 초월하실 수 있는 분이고 내재할 수 있는가를 우리 지성이 만족할 수 있을 정도로 성명한다고 하면 값진 것이지 그러나 궁극적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럴듯하게만 만족한다. 그런데 까닥 잘못해서 거기에 집중을 하다가는 그것이 삼위일체론의 신관인줄 안다. 삼위일체론적인 신관이 제기하는 주요점이 그것인줄 안다. 하나님을 삼위일체론적으로 고백할 때 우리는 무엇으로 고백하는가? 우주를 고칠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초월하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오셔서 우리를 구원했다 이말이다. 스스로 계시하시고 우리 가운데 내재하시고 우리를 구원했다. 그런 하나님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은 인간 손에 달려 있지 않는다.
인간은 이 세상의 역사는 인간 손에 달려 있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께 달려 있다. 무한하신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 그분이 이 세상을 게속 붙들고 우리를 붙들고 계신다. 무엇으로 사랑으로. 이런 신론관을 어떻게 체험했는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누가 처음에 유대인들이 이 절대 유일신론의 신앙고백속에서 낳고 자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체험하므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진 것이다. 그것을 구태어 말한다면 점진적인 계시로서 절대 유일신론에서 전에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다는 신앙고백의 유대적배경할 때 이위일체론적인 개념을 받아들인다고 했지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삼위일체론적 계시가 완성이 된 것이다. 그래서 이러한 신앙고백이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 신앙고백을 하나님을 계시한 사건인데 예수가 하나님의 계시자라는 소리인데 어떤 하나님의 계시자인가?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의 계시자이다. 이 삼위일체론적으로 하나님이 계시되었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에서는 무슨 의미인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말이다. 그러니까 우리의 운명과 인류으 운명과 세상과 역사의 운명은 우리 손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고 살아계신 하나님의손에 달려 있다. 여기에서 진정한 기독교적인 역사와 세상에 대한 우리 운명에 대한 낙관론, 다른 말로 하면 소망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에 불교신관,이슬람신관에서는절대 소망이 있을 수 없다.
예수가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줘요?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준다. 곧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 가운데 거하셔서 하나님에게 배반하고 하나님께 반발하면서 자꾸 이 하나님의 cosmos를 chaos로 떨어 뜨리려고 하는 우리 인간들을 붙들고 계신다. 그래서 이 세상에 요만큼의 cosmos가 있고 질서가 있고 요만큼만한 정의가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우리를 전부 구원하신다. 우리 인간의 손에 달려 있으면 우리는 이른바 한시도 지탱 못할 것이다. 창조하시고 창조하신 하나님이 사랑으로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데 그분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사랑이 하나님이 전능한 사랑의 하나님에게 우리의 구원이 달렸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신앙고백은 어떤가?근본적으로 우리에게 삼위일체론적인 하나님을 가르쳐 주어서 우리에게 새로운 인생관, 세계관 역사관을 갖게 하고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소망을 갖게 한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사는 의미를 갖게 한다 그러니까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복음입니까? 아닙니까? 복음이다.
저기 케케묵은 식으로 신학하면 안된다. 그러면 맨날 에수가 인성이 어쩌고 신성이 어쩌고 삼위일체론 신관이 어쩌고 셋이 하나되고 숫자놀음으로 안다. 이 예정론도 완전히 거꾸로 가르친다. 이 예정론을 우리에게 위안과 확신을 주는 교리인데 거꾸로 우리를 불안하게 하는 교리로 만들어 버린다. 성경이 가르쳐준 것을 정반대로 한다. 그래서 여러분이 앞으로 신학을 하면 이 성경의 고귀함을 강조한 보수 신학도 있고 성경신학도 많이 하고 그 위에 조식신학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