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CUSA lectionary readings
http://www.pcusa.org/devotions/lectionary/index.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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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필독서 152권
구약신학
「20세기 구약신학의 주요 인물들」 벤 C. 올렌버거 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속사적 성경해석학」 베이커 엠마오
「구약 성서 이해」 버나드 W. 앤더슨,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 세계의 이해」 박준서, 한들출판사
「구약 이스라엘사」 김희보, 총신대학교출판부
「구약 정경 개론」 B. S. 차일즈,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성경과 구약학」 박동현, 장로회신학대학교출판부
「구약성경신학」 월터 카이저, 생명의말씀사
「구약성서개론」 노만 가이슬러, 엠마오
「구약성서신학」 게르하르트 본 라트, 분도출판사
「구약성서신학」 발터 아이히로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시대의 생활 풍속」 롤랑 드 보, 대한기독교서회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구약신학」 존 H. 스택, 솔로몬
「구약신학」 폴 하우스,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신학의 과제 2」 룰프 크니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신학의 요소」 클라우스 베스터만,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기독론」 E. W. 헹스텐베르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구약의 메시야사상」 게라르드 반그로닝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의 역사이해」 강사문, 한국성서학연구소
「구약총론」 글래슨 아쳐, 기독교문서선교회
「구약총론」 에드워드 영, 개혁주의신행협회
「모세오경의 문화적 배경」 허버트 리빙스톤, 기독교문서선교회
「복음과 하나님의 나라」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새로운 주경신학 연구」 월터 카이저, 엠마오
「성경신학」 게르할더스 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성경어휘와 그 의미」 모세 실바, 성광문화사
「신구약성서신학」 B. S. 차일즈, 은성출판사
「어떻게 시편을 읽을 것인가」 트렘퍼 롱맨, IVP
「오경과 구약의 언약신학」 송제근, 두란노
「요단강에서 바벨론 물가까지」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이스라엘의 역사」 존 브라이트, 분도출판사
「최신구약개론」 레이몬드 딜러드 & 트렘퍼 롱맨, 크리챤다이제스트
신약신학
「하나님의 나라」 존 브라이트, 컨콜디아사신약신학
「공관복음서의 기원」 스톤하우스, 성광문화사
「누가행전」 하워드, 마샬 엠마오
「바울, 율법, 유대인」 E. P. 샌더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바울복음의 기원」 김세윤, 엠마오
「바울신학」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바울신학」 헤르만 리델보스 ,개혁주의신행협회
「비유해석학」 크레그 블롬,버그, 생명의말씀사
「사도 바울」 크리스천 베커 한국신학연구소
「사도행전 비평사」 W. W. 가스끄, 엠마오
「성경해석학 개론 : 성경의미의 탐구」 월터 카이저 & 모세 실바, 은성
「신약사」 F. F. 브루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현대논쟁의 기본 이슈들」 게하르드 하젤, 엠마오
「신약신학」 E. E. 래드, 대한기독교서회
「신약신학」 레온 모리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신약신학」 요아킴 예레미야스, 새순출판사
「신약신학」1, 2 레온하르트 고펠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신약의 기독록」 오스카 쿨만, 나단
「신약의 윤리적 비전」 리처드 헤이스, IVP
「신약해석학」 하워드 마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시대의 예루살렘」 요아킴 예레미아스, 한국신학연구소
「예수와 바울」 김세윤, 두란노
「예수와 하나님 나라」 G. R. 비슬리-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예수의 가르침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나라」 노만 페린 ,솔로몬
「요한계시록 신학」 리처드 보쿰, 한들
「하나님 나라의 도래」 헤르만 리델보스, 생명의말씀사
「하나님나라 방정식」 존 팀머,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개혁주의 신론」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교회란 무엇인가」 H. 큉, 분도출판사
「그리스도의 십자가」 존 스토트, IVP
「기독교 강요」 칼빈, 생명의 말씀사
「나를 따르라」 디트리히 본회퍼, 대한기독교서회
「나와 너」 마르틴 부버, 대한기독교서회
「루터 선집」 마틴 루터, 컨콜디아
「세속도시」 하비 콕스, 대한기독교서회
「신앙과 정서」 조나단 에드워즈, 지평서원
「신의 도성」 어거스틴, 크리스천다이제스트
「조직신학」 벌코프,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웨인 그루뎀, 은성
「조직신학」 찰스 하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조직신학」 폴 틸리히, 한들출판사
「존 머레이 선집」 존 머레이,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칼빈주의 강연」 아브라함 카이퍼, 크리스챤다이제스트
「하나님을 아는 지식」 J. I. 패커, 기독교문서선교회
「하나님의 모략」 달라드 윌라드, 복있는사람
「하나님의 아들」 M. 헹엘, 대한기독교출판사
「하나님의 큰 일」 헤르만 바빙크, 기독교문서선교회
「해방신학」 G. 구티에레즈, 미래사
「희망의 신학」 J. 몰트만 ,현대사상사
교회사
「간추린 미국장로교회사」 제임스 스마일리, 대한기독교서회
「개신교역사와 신학」 박건택 ,개혁주의신행협회
「교회사 100대 사건」 케네스 커티스외, 생명의말씀사
「기독교신앙과 역사이해」 로날드 H. 내쉬, 성광문화사
「기독교와 역사: 믿음과 이해」 로날드 H. 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새롭게 조명한 초대교회의 역사」 J. 포스터, 웨스트민스터출판사
「세계교회사」(1~3) 이형기, 한국장로교출판사
「신학사」 벵트 헤그룬트, 성광문화사
「신학의 역사」 앨리스터 맥그레스, 지와사랑
「에큐메니칼 교회사3」 레이문트 콧체·베른트 묄러, 한국신학연구소
「역사와 진리」 폴 리쾨르, 솔로몬
「요세푸스」 클론 L. 로저스, 엠마오
「유세비우스의 교회사」 유세비우스 팜필루스, 은성
「인물로 본 기독교회사」 존 우드브리지, 횃불
「종교개혁사」(Ⅰ,Ⅱ) 토마스 린제이,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부
「종교개혁사」 오원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종교개혁의 필요성에 관하여」 존 칼빈, 솔로몬
「중세교회사」 윌리암 R. 캐논, 기독교문서선교회
「중세교회사」 R. W. 서던,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헨리 채드윅,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초대교회사」, 후스토 L. 곤잘레스, 은성
「중세교회사」,
「현대교회사」
「폴 틸리히의 그리스도교 사상사」 I.C. 헤네르 편, 한국신학연구소
「한국기독교회사」 민경배, 연세대학교출판부
「현대교회사」 J .H. 니콜스,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사 사상시리즈1/ 칼 바르트, 엠마오
「현대인을 위한 교회사」 브루스 셸리,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설교학
「건축술로서의 강해설교」 김서택, 홍성사
「구약의 그리스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시드니 그레이다누스, 이레서원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브라이언 채플, 은성
「목사님, 설교가 아주 신선해졌어요」 브루스 모힌니, 베다니출판사
「목사와 설교」 마틴 로이드 존스, 기독교문서선교회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김남준, 두란노
「성경신학적 설교 어떻게 할 것인가」 그레엄 골즈워디, 성서유니온
「성서의 문학 유형과 설교」 토마스 롱 ,대한기독교서회
「언어의 직공이 되라」 김지찬, 생명의말씀사
「프리칭 예수」 칼스 L. 캠펠, 기독교문서선교회
「현대교회와 설교」 존 스토트, 생명의샘
목회상담학
「내가 누구인지 이제 알았습니다」 닐 앤더슨, 죠이선교회
「당신의 과거와 화해하라」 H. 노먼 라이트, 죠이선교회
「목회상담과 상담목회」 오성춘, 쿰란출판사
「목회상담신론」 하워드 클라인벨, 한국장로교출판사
「목회상담학」 제이 E. 아담스, 총신대학교출판부
「상처 입은 치유자」 헨리 나우웬, 두란노
「상한 감정의 치유」 데이빗 A. 씨맨즈, 두란노
「신학과 목회상담」 드보라 벤 두젠 헌싱거, 한국심리치료연구회
「우울증상담」-기독교상담시리즈13 아치볼드 D. 하트 ,두란노
「인간이해와 상담」 로렌스 J. 크렙, 두란노
「죄책감과 은혜」 폴 트루니에 ,IVP
「크리스챤 카운슬링」 게리 콜린스, 두란노
선교학
「21세기를 향한 한국선교의 비전」 정민영 외, IVP
「교회는 당신의 생각보다 큽니다」 패트릭 존스톤, WEC출판부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레슬리 뉴비긴, IVP
「로잔, 세계 복음화 운동의 역사와 정신」 조종남 편저, IVP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찰스 벤 엔겐, 두란노
「문화 속의 종교」 유진 나이다, 로고스
「문화적 갈등과 사역」 셔우드 링엔펠터,마빈 메이어스, 죠이선교회
「미션 퍼스펙티브」 랄프 윈터, 스티븐 호돈, 예수전도단
「변화하고 있는 선교」 데이비드 J. 보쉬, 기독교문서선교회
「선교사가 되려면」 오스왈드 스미스, 생명의말씀사
「선교사열전」 루스 터커,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선교사의 생활과 사역」 허버트 케인, 두란노
「선교신학의 성서적 기초」 허버트 케인, 나단
「선교와 문화인류학」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선교학 개론」 J. H. 바빙크, 성광출판사
「선교현장 이야기」 레나 테일러, IVP
「선교현장의 문화이해」 폴 G. 히버트, 죠이선교회
「세계 기도 정보」 패트릭 죤스톤, 죠이선교회
「세계를 품은 그리스도인, 왜 되어야 하는가」 허버트 케인, 죠이선교회
「현대의 자비량 선교사들」 크리스티 윌슨, 순출판사
「화해의 아이」 돈 리챠드슨, 생명의말씀사
예배냐 공부냐
성년인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시험하는 것이 ‘하나님이냐 돈이냐’에 있다면, 청년 그리스도인의 예배를 도전하는 것은 ‘예배냐 공부냐’입니다. 돈을 버는 사람이 예배를 돈의 가치로 환산한다면, 그래서 하나님께 예배할 것이냐 아니면 돈 벌러 나갈 것인가를 고민한다면, 공부하는 학생들은 예배를 공부와 시험의 잣대로 잴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하는 시간 동안 얼마나 공부할 수 있으며, 예배하지 않는 친구들이 얼마나 공부할 것인지를 두고 번민합니다.
예배하기 위해 공부하기를 쉬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성공과 성취를 인생을 재는 척도로 삼는 시대에, 자기 계발을 위해 시간을 하루도 아니고, 분단위와 초단위로 쪼개어서 효율적으로 사용할 것을 강요하는 때에 예배야 말로 시간 낭비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뒤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면서도, 무작정 어디론가 달리기도 벅찬데 절대 가치인 하나님 앞에서 잠시 멈추어 서서 숙고한다는 것은 뒤처진 자의 그럴 듯한 변명쯤으로 여겨지지 않겠습니까?
그런 가치관을 갖고 있는 이들에게 예배는 당연히 시간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하여, 마르바 던은 그렇다고 말합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것은 분명히 고귀한(royal) 시간 낭비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틀림없는 시간 낭비다. 사회적 관점에서 보면, 예배에 참석해서 얻는 유익은 전혀 없다.”(「고귀한 시간 ‘낭비’」, 9) 그녀가 보기에 시간 사용에 관한 한, 예배드리는 시간을 다른 것에 투자하는 것과 견주어 볼 때, 건질 것이 별로 없다는 겁니다.
예배가 시간 낭비라니요? 이 글을 읽고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지신 분, 십자가에 달리신 그분의 은총을 덧입고 그 덕으로 사는 자로 어떻게 예배를 시간 낭비라고 말하느냐는 겁니다. 저자도 이를 인정하는지 ‘고귀한’이라는 단어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했지만, 제목 자체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히 있어서 다른 제목을 검토하다가 결국 ‘고귀한 시간 낭비’라고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일리 있는 말입니다. TV나 인터넷 시간과 비교해 보면 예배가 고귀한 시간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자료를 보니, 우리나라 사람의 일일 TV시청 시간이 하루 평균 3시간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인터넷은 주당 9.6시간이라고 합니다. 아마 청소년들이나 대학생들의 인터넷 시간은 훨씬 상회할 겁니다. 반면 독서는 주당 3시간에 불과합니다. 하여간에 TV와 인터넷을 합하면 대략 5시간을 사용합니다. 한국인의 평균 수명을 대략 80세로 본다면, 평생의 5분의 1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TV와 인터넷이 상상력과 사고력을 죽이고, 가족 간의 대화를 없애고, 소비와 탐욕을 조장하고, 성적 욕망과 폭력을 부추긴다는 것은 익히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어느 정도 유익한 면이 전연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유해성이 심각합니다. 사용을 제한하고, 거리를 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문명과 기술을 원천적으로 부정할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간을 그것들이 시간을 유용하게 사용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일주일에 TV와 인터넷으로 30여 시간을 사용하면서도 10분의 1에 해당하는 독서시간, 그리고 주일 낮예배로만 한정하더라도 30분의 1에 불과합니다. 설령 예배가 시간 낭비라고 하더라도 TV와 인터넷에 비하면 조족지혈(鳥足之血)에 지나지 않을 겁니다. 백번 양보해서 예배가 지루하고 고루하더라도 해롭지는 않지만, 그것들은 정말 해롭습니다. 그런데도 예배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한다면, 더욱 해로운 TV와 인터넷은 아예 담을 쌓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에 비하면 공부는 훨씬 효율적이고 유익한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공부 대신 예배하는 것은 특히 고3 학생들이나 시험 기간 중에는 이만 저만 걱정이 아닙니다. 부모나 당사자로서 그리 간단치 않는 선택입니다. 한국사회에서 대학이 갖는 중요성을 익히 아는 터에 시험공부 위해 예배를 빼먹는 것을 그리 이해 못할 바가 아닙니다. 학원에서도 시험 기간에 맞추어 주일날, 강의나 공부를 하도록 지도하는데, 다른 친구들이 공부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적의 하락을 감수하면서라도 예배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용기와 결단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습니다.
한홍 목사님의 특강 테이프를 들었습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에 관한 것이었는데, 기도하는 것이 전략적으로 공부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데, 고3이면 더 예배해야 하는다, 어쩌자고 그 중요한 때에 예배드리지 않느냐구요. 지혜의 영이요, 지식의 근원되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더 없이 필요한 그 때에 예배를 소홀히 하는 것은 어처구니없는 잘못이라고 질타하더군요. 제가 다른 곳에서 쓴 것처럼 “기도를 잘 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 합니다.” 다만 기도와 예배가 공부 잘 하고, 성공하기 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여긴다면, 그 끝은 실로 씁쓸할 것입니다.
제 죽마고우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 친구는 초등학생 때 공부를 썩 잘하지 못했습니다. 그런 친구가 신앙생활하면서 무섭게 변했습니다. 공부도 열심히 하고, 신앙생활도 타의 모범입니다. 토요일 밤 자정까지만 공부하고 취침합니다. 주일예배와 봉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는 음악을 듣거나 독서를 하면서 쉬고는 밤 12시가 지나자마자 공부를 재개합니다. 중학교 졸업할 때는 독보적인 성적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마음에는 공부도 중요하지만, 주일 하루는 하나님 안에서 안식하는 날이요,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그 무엇과도 대체할 수 없는 최고 가치였던 것입니다. 다른 어디에선가 말씀드렸듯이 기도를 잘하는 사람이 공부도 잘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예배에 관한 한 우선되어야 할 것은, 공부를 중단하고 온전히 예배에 정성을 다해야 하는 까닭은 위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배는 일의 그침이요, 하나님의 가치에 상응하는 가치를 지니는 것이기에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합니다. 다시 말해 부모나 학생이나 모두 자신의 삶에 최고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예배가 먼저인지 아니면 공부가 우선인지에서 판가름 납니다. 공부가 아무리 중요하기로서니 하나님의 가치를 경배하고, 자기 영혼을 돌보는 것에 비할 바 아닙니다.
예배는 세상의 가치 기준과 잣대를 따라 사는 것, 매일 염려하는 실존으로 살기를 단호히 거부하는 것과 맞닿아 있습니다. 해서, “우리는 세상의 가치와 대조되며 공동체 밖의 사람들에게 다른 길을 선택할 기회를 줄 수 있는 대안 사회의 한 부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특별한 시간”(「안식」, 60)이 바로 예배입니다. 자녀들이, 그리고 내 자신이 무엇을 따라 살기를 원하나요? 하나님인가요? 진학인가요? 주님의 말씀으로 제가 대답을 대신할까 합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