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8. 11. 26. 20:22

소망의 복음, 요한계시록 서평

나와 그렇게 나이 차이가 많아 보이지 않는 목회자가 담임목회를 하면서 책의 저자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움과 도전으로 다가왔다. 바로 이 책의 저자인 조영민 목사님이다. 개인적인 친분은 없지만 SNS나 지면으로 그의 목회의 여정을 간접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읽는 설교 룻기’를 통해 큰 감명을 받았기에 이번 책도 기대감을 가지고 대할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은 많은 편견과 잘못된 선입견으로 대하기 쉬운 책이다. 이단들이 급진적 종말론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들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문자적으로 사용한 전례가 있기 때문에 어렵다는 느낌이 크다. 또한 여러가지 상징과 이미지들이 나타나며 심판과 멸망에 관한 내용이 등장하기 때문에 막연한 두려움이 있다. 어렸을 때 부흥회에서 보았던 휴거에 관련된 영상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해석하며 오늘에 살아있는 메시지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돕는다. 무엇보다 성도들이 요한계시록을 바르게 잘 이해하고 말씀을 따라 살도록 하고자 하는 목자의 마음이 잘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학문적으로 어렵다거나 반대로 개인 묵상의 차원이 아니라 공적인 설교의 자리에서 쓰여졌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대하는데 있어서 적절한 균형이 잡혀있는 책이다.

저자는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데 있어서 소망, 그리스도, 복음 이 세 가지를 축으로 삼았으며, 교회를 향한 메시지가 있는 본문 11개를 선택하였다. 이 책을 통해서 확인하게 된 중요한 두 가지는 요한계시록은 미래를 예언하기보다 현재를 위한 책이라는 것과 핍박이라는 당시의 배경을 염두에 두는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대와 상황은 다르지만 여전히 신앙이 위협을 받는 우리에게도 생생히 살아있는 말씀으로 들려지는 유익을 누리게 된다.

가장 감동적이었던 부분은 마지막 장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유업으로 누리기 위해서 성도는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부분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기는 자는 싸움을 잘하는 자나 높이 올라가는 자가 아니라 ‘생명수에 목마른 자(221쪽)’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참된 생명수 샘물을 기다리며, 타는 목마름으로 주님이 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222쪽)’입니다. 가난한 심령과 겸손이라는 성경을 관통하는 하나님 나라의 가치와 잘 어울리는 탁월한 해석이 아닐 수 없다. 양들에게 있어서 입에는 쓰지만 영혼에 유익이 되는 참된 목자가 주는 진정성 있는 메세지로 다가온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교회 공동체를 세운다는 것이, 신앙을 생생하게 유지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어려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교회, 목회자,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절망과 환멸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포기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우리에게 복음의 소망을 확고하게 제시하는 요한계시록의 말씀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목자의 따뜻하고도 자상한 시선으로 안내하며 깨닫게 해주는 이 책을 강력하게 추천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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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7. 14. 15:41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의 삶 - 10점
스캇 맥나이트.조지프 모디카 지음, 최현만 옮김/에클레시아북스


바울과 그리스도인의 삶을 보는 새 관점 /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의 삶 서평

 

바울의 새 관점몇 해 전부터 온라인 상에서 계속 접했던 용어이다톰 라이트니 샌더스니 하는 학자들이 이 관점을 주장했고이것으로 인해 기존의 학자들이나 목회자들과 칭의 논쟁이 후끈했다는 정도로 알고 있었다. SNS에 올라온 새 관점에 대한 알기 쉬운 설명이나 도표도 보았지만 이 관점이 정말 무엇이 다른지를 알지는 못했다그러나 이번에 이 책을 통해서 바울의 새 관점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알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바울의 새 관점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되어서 좋았다옛 관점에서 유대교는 행위 의의 율법주의 종교로율법의 행위는 행위와 공로 쌓기를 근거로 하나님 앞에 자신을 세우려는 인간의 시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다분히 구원론 중심이고 개인의 구원이 강조된다.

그러나 새 관점에서 유대교는 언약적 신율주의로 유대인들은 언약을 따라 선택을 받아 구원을 이미 받았고이제 율법은 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가르침이다바울이 공격했던 율법은 유대인이 준수했던 율법 중 그들을 이방인과 구분하는 역할을 했던 행위들이다결국 여기에서는 교회론이 중요하며 이방인과 유대인의 하나됨이 부각된다.

 

신약성서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바울서신의 주요 주제를 살피고그것들을 한 흐름으로 연결시켜 볼 수 있는 장점이 있다여러 저자들의 논문을 묶은 책이지만 공통적으로 강조하는 주제들이 있다성령을 따르는 삶십자가를 본받는 삶자기희생사랑교회의 하나됨과 이를 위한 연합과 포용이다이전에는 이런 주제들이 따로따로 느껴졌다면 이 책을 통해서 이것들이 서로 촘촘히 연결되며 한 흐름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게 되었다구슬이 서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이 책은 바울신학을 하나로 볼 수 있게 하는 유익이 있다.

 

한국교회의 상황과 연결되어서 그런지 새 관점의 강점이기도 한 교회론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특히 교회의 연합과 하나됨이 중요한데 그 이유는 단합된 공동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선언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쟁취하신 승리가 적대적인 우주의 세력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는 수단이며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수단”(213)이라고 한다여러 가지 이유로 분열과 갈등의 몸살을 앓고 있는 한국교회가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깨닫고 회복의 길로 돌아서기를 소망해본다.

 

무엇보다 이 책은 성서와 신학 차원의 논의에서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인의 삶까지 연결시키고 있다그래서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현학적이거나 어렵지 않고 삶에 와닿는 느낌이다어떤 신학을 갖느냐에 따라 성경에 대한 해석이 달라지고 삶과 교회를 새롭게 보게 되는데오랜만에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하는 고민과 탄성을 자아내는 책을 만나 반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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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7. 12. 15:51
사도 바울과 그리스도인의 삶 - 10점
스캇 맥나이트.조지프 모디카 지음, 최현만 옮김/에클레시아북스


여기가 바로 (인간 내면의 죄성을 강조하는) “전통적인 관점(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유대적 정체성의 극복을 강조하는) 소위 새 관점이 손을 맞잡아야 할 지점으로, 두 관점은 바울이 우주적 세력의 탓으로 돌린 중심주의에 내포된 서로 다른 측면을 각각 강조한 것이다. 123

 

바울은 까도까도 끝이 없는 양파 껍질처럼 타인을 희생시키는 이 같은 안을 향하는”(구심성, centripetal) 삶의 방식이 개인과 공동체에서 구현되는 모습에 우주적 권세가 작용한다고 보았다. 이런 삶은 바울이 오직 자기희생적인 주님의 성령에게만 돌린 밖을 향하는”(원심성, centrifugal) 삶의 방식과 대조된다. 124

 

한 공동체는 (1) 구성원의 다양성과 (2) 하나이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통일성, 둘 다를 특징으로 가질 수 있다. 125

 

새 관점의 관심사는 개인 구원 중심의 바울 해석이 (리처드 헤이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교회 완결적”(ecclesiotelic) 해석학, 즉 예수 그리스도 복음의 목적을 한 백성의 형성으로 보는 해석학의 필요성을 무시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개신교 복음주의가 개인주의를 강조하면서 교회론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바울은 파괴적이고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육신의 행위”(5:19-21)를 낳을 뿐인 육체의 욕망을 극복하는 수단으로서 이성과 토라를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런 욕망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은 성령을 따라 걷는 것”(5:16),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18), 그리고 성령과 계속해서 보조를 맞추는 것”(25)이다. 175

 

성령이 함께하시는 종말론적 공동체인 교회가 하나님의 임재가 현시되는 매력적인 장소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바울이 빈번하게 사용하는 표현인 서로는 신자들의 서로를 향한 헌신의 철저함을 잘 보여준다. 그들은 서로 지체이며, 서로 세워 주어야 한다. 또한, 서로 돌보고, 타인의 유익을 추구하며, 사랑 안에서 서로 참아 주고, 서로 짐을 지며, 서로 친절하고 따뜻하게 대해 주고 서로 용서하며, 서로 복종하고, 서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며, 사랑 안에서 서로 헌신하고, 서로 마음을 같이 해야 한다. 178

 

그리스도인의 삶은 공동체라는 맥락이 특징이라는 사실은 우리의 마지막 요점으로 이어진다. 즉 바울 사도의 윤리에서 핵심은 사랑이었다. 178

 

바울이 생각하는 단합은, 근본적인 교리 면에서 의견 일치를 이룬다는 전제 조건 아래서만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 백성의 단합이 중요한 이유는, 단합된 공동체 자체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선언되는 수단이기 때문이다. 또한, 단합된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쟁취하신 승리가 적대적인 우주의 세력들에게 명백하게 드러나는 수단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되지 않음을 증명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213

 

우리는 바울이 인류를 반드시 낙관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지만 모든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유일한 참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필요성을 언급하지 않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바울이 이런 입장이 가진 까닭은 아마도,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유일한 동력이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께 연합된 모든 사람이 누리는 하나님의 힘주심 때문이라는 사실을 그가 인식했기 때문일 것이다. 218

 

바울이 어디서도 조직 신학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바울이 각 교회와의 독특한 관계 안에서 특정 교회가 직면하고 있던 구체적인 일상적인 쟁점과 무관하게 모세 율법과 칭의의 특징이나 그리스도인의 삶에 관해 설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219

 

다시한번 강조하자면, 옛 관점은 핵심 문제를 개인의 속량으로 보았지만 새 관점의 시선은 백성으로, 이스라엘과 교회로 이동한다. 옛 관점의 초점이 실존이었다면, 새 관점의 초점은 교회다. 232

 

이신칭의는 유대교의 행위 의를 고발하는 내용이 아니라, 유대인과 이방인 양자 모두의 구원을 위한 포용적인 틀이다... 옛 관점의 동력이 개인 구원론이었다면, 새 관점의 동력은 확장의 교회론이었다. 233

 

바울에게는 성령에서 도출된 교회 중심 윤리가 있었다. 말하자면, 그의 윤리는 교회 안에서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었다. 258

 

여기서 바울이 제시하는 목록은 하나님과의 친밀함이나 사색의 삶에 관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제시한 목록이 얼마나 타인 지향이며 교회 중심인지 주목하라. 259

 

바울은 사랑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으로, 할례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로마제국의 동쪽 지역 전체에 걸쳐 이제 가정 교회 안에서 서로 유대 관계를 맺게 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 던지는 도전의 의미를 바울이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이 그 도전에 응하는 유일한 길은 서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262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이해할 때, 개인을 과도하게 중시하고 공동체의 집단적 삶을 과도하게 경시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이 항목들은 대부분 각 신자의 내면적인 삶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공동체의 집단적 삶과 관계된 것이다. 292

 

성령의 열매인 사랑 안에서 우리는 우리와 판이한 사람들과 동료로 살도록 떠밀린다. 성령의 열매인 기쁨 안에서 이 공동체는 동료인 다른 사람의 삶에서 이루어지는 승리를 축하한다. 성령의 열매인 평화 안에서 이 공동체는 어둡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냉정과 평온을 유지한다. 성령의 열매인 인내 안에서 우리는 밀접한 공동체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운다. 성령의 열매인 친절 안에서 우리는 우리가 대접받고자 하는 방식으로 타인을 대접한다. 성령의 열매인 선행 안에서 우리는 동료인 타인의 유익에 깊은 관심을 가진다. 성령의 열매인 신실함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와 더불어 한 공동체를 이룬 사람들을 향한 철저한 충성과 헌신을 맹세한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 안에서 우리는 분노와 냉소가 아닌 은총과 사랑으로 서로에게 말한다. 성령의 열매인 절제 안에서 우리는 타인을 모임에서 배제하거나 분열과 갈등을 조장할 수 있는 모든 일을 삼간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이 한 공동체를 떠밀어, 왕 예수가 설립한 새로운 세계의 질서로 나아가게 할 때, 그 공동체를 특징짓는 표시는 다름 아닌 단합된 교향곡을 만들어내는 성령의 열매들이다. 293

 

바울이 말하는 성령 육체 간 갈등은 한 사람의 영혼 안에서 일어나는 내적 갈등에 관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육체가 매우 활발하게 작용하는 세상 속에서 미래의 삶을 살아내는 하나님의 백성에 관한 것이라고 표현했다... 육체는 교제와 단합, 성결을 파괴한다... 성령의 방식은 어떤 상황에서도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며, 오직 성령만이 우리 같은 타락한 사람을 사랑하는 존재로 만드실 수 있다. 294

 

신약의 기록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예수의 부활과 마지막 갱신 사이의 시간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도록 교회를 세우고 교회에 힘을 불어넣는 것이었다. 313

 

메시아 안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 된 것의 의미는 교회를 통해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는 것이다. 정말로 이 내용은 비밀의 경륜이 드러난 것이었다. , 창조주 하나님께서 늘 마음에 두셨던 내용의 묵시였다. 그리고 에베소서 4,5,6장도 마찬가지로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선교의 증표와 상징이 되려면 교회의 연합과 거룩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한다. 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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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6. 1. 12:35

잔 다르크는 톨스토이처럼 모든 길을 거부하지도, 니체처럼 모든 길을 수용하지도 않음으로써 교차로에 고착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의 길을 택하여 벼락같이 그 길을 따라갔다. 108

그녀는 무언가를 행했던 아주 실체적인 인물이었던 반면에,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변가에 불과했다. 109

전통은 선거권의 확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전통이란 모든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계급, 곧 우리의 조상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이다. 전통은 어쩌다가 권력을 쥐게 된 거만한 소수 지배층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모든 민주주의자는 사람들이 출생시눕ㄴ에 의해 그 자격이 박탈당하는 것을 반대한다. 117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비록 하인일지언정 좋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어쨌든 나로서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전통의 개념을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117

바로 나는 내가 속한 골치 아픈 특수한 문필가 계층을 믿기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주름살을 믿는 것이다. 117

이런 것들이 해결된 다음에는 동화 철학이 두 번째 위대한 원리가 등장한다... 현학적 냄새를 풍기기 위해 나는 그것을 조건부 기쁨의 교리라고 부를 것이다. 131

그렇지만 깨지기 쉬운 것이 썩기 쉬운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유리를 쳐 보라. 그러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냥 유리를 치지 말아 보라. 그러면 천 년을 견딜 것이다. 요정의 나라에서든 지구에서든 사람의 기쁨도 바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곧 어느 순간에든 할 수 있으나 할 이유가 종종 분명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부당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134

나는 동화들을 아기방의 마룻바닥에 두고 떠났는데, 여태껏 그만큼 분별력 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또한 전통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보모를 떠났는데, 이제까지 그처럼 분별력을 갖춘 급진적이거나 보수적인 현대적 유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137

첫째 이 세계는 거칠면서도 경이로운 곳이며, 현재와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현 상태로도 무척 즐거운 장소라는 확신과 둘째, 이런 거침과 즐거움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겸손해야 하고, 그토록 기이한 친절의 기이한 제한사항에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는 확신이다. 138

첫째, 나는 현대 세계 전체가 과학적 숙명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아무 결함도 없이 개현되어 왔으므로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138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대체로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를 대중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해가 규칙적으로 뜨는 것은 그 일이 결코 지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의 일과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용솟음 덕분에 영위되는 것이다. 141

어린이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고 열정적이며 홀가분한 기분을 갖고 있기 때무에 어떤 것이 변함없이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또 해 줘요"라고 말하고, 어른은 녹초가 되기까지 그것을 반복해서 행한다. 아이들과 달리 어른은 단조로운 행휘를 보고 미친 듯이 기뻐할 정도로 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런 반복적인 행위를 무척 기뻐할 정도로 강하신 것 같다. 하나님이 아침마다 해를 향해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저녁마다 달에게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42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열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죄를 지어 늙어버렸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젊기 때문일 것이다. 142

자연의 반복현상은 단순히 되풀이되는 현상이 아니라, 무대에서 받는 앙코르 때문일지도 모른다. 142

첫째, 이 세계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세계는 초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또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둘째, 마법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고, 의미는 그것을 뜻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이 세계는 예술작품과 같은 인격적인 면이 있다. 그게 무슨 의도든지 간에 강렬한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다.

셋째,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 세계에 대해 감사하려면 겸손과 절제의 모양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참으로 이상하고 모호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모든 좋은 것은 최초의 파산에서 살아남아 보존된 신성한 잔유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크루소가 자기의 물건을 건졌듯이, 자기의 좋은 것들을 파선에서부터 건져내었던 것이다. 151.


5장 세계의 깃발

낙관주의자는 당신의 눈을 주시하는 사람이고, 비관주의자는 당신의 발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155.

사람은 과연 이 세계에 속하는 일이 좋은지 묻기도 전에 이미 여기에 속해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요약하자면, 그는 어떤 동경심을 품기 한참 전에 이미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56.

이 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핌리코를 사랑해 주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을 사랑하되 세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초월적인 유대감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157.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을 얻은 셈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함양하지 않았다. 신전을 위해 싸우다 보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결함을 함양하지 않았다. 제단을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하다 보니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

비관주의자의 악은 그가 신들과 사람들을 질책하는 점이 아니라, 자기가 질책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에게는 사물에 대한 일차적이고 초자연적인 충성심이 없다. 162

그러면 보통 낙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인가? 낙관주의자는 이 세계의 명예를 변호하고 싶은 나머지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것이 문제이다. 162.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쁜 낙관주의(회칠하는 것, 모든 것을 엉성하게 변호하는 것)가 합리적 낙관주의와 함께 온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낙관주의는 침체를 낳는다. 반면에 개혁으로 이끄는 것은 비합리적인 낙관주의다. 162

자기가 사랑하는 곳을 망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장소를 개선하게 될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핌리코의 어떤 특징을 사랑한다면(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는 핌리코 자체에 반대하면서까지 그 특징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핌리코 자체를 사랑할 경우에는, 그곳을 황폐하게 만든 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 개혁이 과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개혁을 주도하는 인물은 신비주의적인 애국자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163.

믿음과 혁명이라는 우리의 거대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타협의 일환으로 차갑게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뜨겁게 미워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쁨과 분노가 서로 상쇄되어 그냥 자족하는 상태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강렬한 기쁨과 더 강렬한 불만족을 원한다. 우리는 우주를 우리가 습격해야 할 괴물의 성으로 느끼는 동시에 저녁에는 돌아갈 수 있는 우리의 오두막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167. 

달리 말하면, 순교자가 숭고한 것은 바로 생명과의 궁극적인 연줄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 바깥에 둔다. 그는 무언가를 살게 하려고 죽음을 택한다. 자살이 비열한 것은 자살자에게 존재와의 이런 연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파괴자일 뿐이며 영적으로 우주를 파괴한다. 170.

기독교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경이감과 열정을 품은 채 신적인 동반자와 신적인 우두머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격렬하게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음과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함께 홀로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해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청명하며 군기 달린 군대처럼 무서운 저 바깥의 빛을 명백히 인식하는 즐거움이다. 176. 

이 세계를 정말로 즐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체하느라 바빴고, 덕스러운 사람들은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의 관심이 없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기독교가 갑자기 진입하여 독자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세계가 마침내 그것을 정답으로 수용했다. 당시에도 정답이었거니와 지금도 정답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답변은 마치 칼로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잘라 버렸고, 어느 의미로든 감상적으로 묶어 놓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나님을 우주로부터 분리시켰다. 요즈음 일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로부터 제거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독특성이야말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 특성은 기독교가 불행한 비관주의자는 물론이고 더 불행한 낙관주의자에게도 제공하는 답변의 핵심이었다. 178.

그리고 모든 기독교 유신론의 뿌리 어구는, 마치 예술가가 창조자이듯이 하나님은 창조자라는 것이다... 모든 창조와 출산은 곧 분리의 행위라는 이 원리는, 모든 성장은 뻗어나가는 것이라는 진화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가로질러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다. 여인은 한 아이를 출산하는 중에도 한 아이를 잃는다. 모든 창조는 분리이다. 출생은 죽음만큼이나 엄숙한 이별이다. 179.

또한 나는 기독교 신학에서 단단한 대못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고 세계를 그 자신에게서 분리했다는 도그마적인 주장이었다. 181.

기독교적 낙관주의는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에 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고기를 구하는 다른 여느 동물과 같은 하나의 동물이라고 독백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다. 내가 모든 것을 묘하게 느꼈던 것은 옳았다. 나 자신은 모든 것보다 더 못한 동시에 더 나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의 즐거움은 모든 것의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산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초자연적인 것에 비추어 모든 것의 부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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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4. 25. 11:27
파란 앵무새 - 10점
스캇 맥나이트 지음, 전의우 옮김/성서유니온선교회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파란 앵무새 서평 

성서유니온에서 나온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성경의 각 책에 대한 개론과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이다. 지금도 가까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읽으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할수록 정말 중요한 문제는 과연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가 정말 중요하다.

어떤 구절은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그대로 지키지만, 다른 구절들은 더이상 시대와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지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들은 어디에서 누가 정해주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나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저자인 스콧 맥나이트는 참새들 사이에서 서로 친해지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던 파란 앵무새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의 본문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나간다.

그 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이 책에서 꽤 많이 반복되는 문장이자 저자의 입장을 핵심적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그는 단순히 성경의 개념과 행위를 되살리거나, 전통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함께 읽기를 제안한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교회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 시대에 우리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48쪽).” 과거를 너무 존중해서 전통주의에 빠지면 안되지만, 속도를 늦춰 하나님이 과거에 교회에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정도로는 존중해야 한다. 

또한 성경을 대할 때 위키 이야기로 볼 것을 제안한다. “옛 이야기를 자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기 위해 새로운 저자들이 성경 이야기를 끊임없이 고쳐주는 것(90쪽)”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이었다고 느끼는 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창조, 타락에 이어서 구속으로 가기 전에 언약 공동체가 있다고 설명한 점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내용으로, 여기에는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은 구약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본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목적 중심의 귀 기울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주목, 흡수, 행함의 단계가 있다고 설명한 부분이 참 좋았다. 저자는 목적 중심의 귀 기울이기는 결국 선행의 삶으로 열매맺어야 한다는 지적하는데, 자칫 공허한 논쟁으로 그칠 수 있는 성경 해석에 대한 우리의 논쟁에 대해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집중력은 책의 후반부를 여성 안수와 여성 사역에 대한 논의로 다 채웠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저자의 성경해석 사례를 통해 성경 해석과 적용에 대해 한방에 정리할 수 있었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이 시대에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그의 참신한 노력과 통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은 독자들에게 후속편으로 이 책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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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인문2018. 4. 10. 18:08

핵심은 불균형이다.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40쪽.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원하는데, 바로 존재감이다... 모욕은 바로 그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62쪽.


즉,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64쪽.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67쪽.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파괴된 존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개개인의 마음을 깊이 살피면서 자아를 새롭게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건설이 그 핵심이다. 79쪽.


그러나 이런 굴종과 복종은 사람에게 요구해선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80쪽.


올드보이나 디스커넥트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했듯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 또는 자기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억울하게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82쪽.


한국인의 삶은 부정적인 감정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거기에는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또는 그러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행들이 맞물려져 있다... 그러나 변화를 일으킬 힘은 턱없이 모자란다. 그런 감정 자체를 표출할 통로조차 너무 비좁다. 그 어두운 에너지가 해소되지 못한 채 증폭되고 사회적으로 악순환을 일으킨다. 111쪽.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잘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건강, 인간관계, 경제적인 여유, 물리적인 공간의 안락함, 일의 보람, 마음의 평화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느 ㄴ왜 그 가운데 경제력 하나만을 따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반세기 동안 진행된 압축 성장 덕분에 삶이 극적으로 달라졌다...한국의 경우 그 변화가 워낙 초고속으로 진행되어서 경제적인 차원의 변수가 훨씬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13쪽.

조선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귀'마저도 벼슬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평가이다. 

그에 비해 '귀'는 공적인 차원에서 끝없는 확장성을 가진다. 이웃에게 덕이 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힘쓰면서 삶의 격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벼슬로 '귀'의 의미가 국한될 때, '가문의 영광'을 세우는 비좁은 목표를 넘어서지 못한다. 116쪽.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속물적 문화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서로의 존엄을 북돋아주는 관계가 절실하다. 그러한 관계가 자라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119쪽.


신분제의 와해에 결정타를 매긴 것은 6.25 전쟁이다. 124쪽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온전존하게 되었다.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지배 질서는 무너졌지만, 귀족적 차별의식은 오히려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126쪽.


'오만과 모멸의 구조'는 무엇인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서잉 사회적 관성으로 고착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멸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과민함이 그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점에서도 유별나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138쪽.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141쪽.


한국의 근대화는 합리적 개인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집단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지만, 대안적인 공동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의 형성은 지극히 미미했다... 고도 성장기에는 상승 이동의 즐거움으로 그러한 부실함이 상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자, 사회의 약한 고리들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142쪽.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쪽.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동차도로가 그 현장 가운데 하니다. 인격과 대비되는 '차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전대만 잡으면 심성이 거칠어지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라는 사물 속에 얼굴을 숨기고 익명의 타자들과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다른 차가 조금만 진로를 방해해도 마구 경적을 울려댄다. 얼굴을 마주보고서는 내뱉지 못할 극언을 혼잣말로 퍼붓는다. 167쪽.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86쪽.


사회학에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신경을 끄는 것이 곧 배려인 경우가 많다. 189쪽.


동정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분법에 갇혀 있는 시선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동은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시혜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진정한 덕행이 되기 위해서는 혜택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동정이 침해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7쪽.


다시 말해서 감정은 팔지만 자존심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존중받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212쪽.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은 습득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은 습득되었을 확률이 높다. 221쪽.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 또는 배신을 당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르주를 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였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집 짓는 일'이었다.

돈이 너무 많은 일을 좌우하고 돈 때문에 모멸감을 맛보기 일쑤인 현실에서, 나의 자존을 세우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착복해야 한다. 돈의 논리로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에 눈떠야 한다. 물론 절대 빈곤으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영위하기 어렵거나 너무 많은 빚에 쪼들리는 이들에게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돈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 굴레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숨통을 트고 안정적으로 생애를 계획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돈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240쪽.


인간은 사사로운 삶의 공간에서 친밀감과 평온함을 누리지만, 그것을 넘어선 공공의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대한다. 낯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의 경험과 공적인 서사(내러티브)를 창출하면서 더욱 고양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255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쪽.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리이 된다. 살아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애는 고귀해진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관계에서만 인간적 존엄을 누릴 수 있다. 259쪽.


인간은 자기를 알아주는 공동체를 만나 공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진부한 삶에 생기와 역동을 불어넣을 수 있다. 260쪽.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263쪽.


지위가 높거나 해당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사람,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의식이 없이 상대방을 대하는 덕성의 소유자 말이다. 애써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동등한 눈으로 바라보며 존중하는 태도가 체질화된 것이다. 그런 이들은 상대방과 주변 사람을 은은하게 감싸 안는다. 269쪽.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272쪽.


채근담.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고서도 낯빛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무궁한 뜻이 있으며 또한 무한한 활동이 있다. 281쪽.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는 조언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해보라고. 거기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286쪽.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들 앞에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온갖 관심은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되면서, 나 자신은 공허한 중심으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돌보는 힘이 자라난다. 301쪽.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면 무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도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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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2. 1. 10:14

희망의 두 지평 / 이종인 지음 (박영사)

블로흐몰트만희망신대원 시절 조직신학 수업 시간에 들었던 단어들이다몰트만이라는 세기의 신학 거장이 희망의 신학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낼 때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 블로흐라는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그런데 이 두 사람의 희망을 분석한 책이라니어려울 것 같아 읽기 부담스러웠지만희미하게 남아있는 두 거장의 희망을 분명하게 알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먼저 블로흐와 몰트만 두 사람의 공통점이 존재한다모두 희망이라는 개념을 붙들었고, “다가올 시간즉 종말론적 기대와 희망이 현재를 바꾸는 동력이고 힘”(153)이라고 주장했다이런 공통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유대적 메시아니즘에 대한 관심이다그리고 희망과 다른 현실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저항과 반역을 강조한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 보다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희망의 기초를 두고 블로흐는 인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미래희망을 말하는 반해몰트만은 변함없고 신실한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강조한다블로흐는 예수를 전형적인 저항의 전범으로 보았지만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약속의 성취와 미래희망의 근거를 끌어낸다.


또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가진 확실하고 분명한 미래희망을 갖는다그러나 블로흐는 양자택일이라는 어찌될 줄 확신할 수 없는 아직-아님의 미래적 종말관을 지닌다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증거된 약속의 완성을 내다본다하지만 블로흐는 미래의 희망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통한 인간의 나라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몰트만이 희망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저항의 삶을 살게 하는지 설명한 것이다. “희망은 우리로 모순의 세상과 투쟁하게 하고약속을 따라 저항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이는 세계사적이고 선교적 사명에로의 소명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96형이상학적이고 뜬구름의 희망이 아니라 피와 땀의 희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가장 아프게 다가왔던 한 구절이 있었다블로흐가 루터를 비판한 것으로 기독교가 저항과 전복의 정신을 잃고 체제 순응적인 성격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자들은 권력자가 아니라뼈 빠지게 일하는 농부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165힘 있는 자들 보다는 힘 없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쉽게 말하는 신앙의 민낯을 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 책 한 권으로 두 거장의 희망을 다 알게 되었다 말하는 것은 교만한 일일 것이다그러나 이전의 흐릿한 지평에서 좀더 분명한 지평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그러면서 한 가지 소득은 지금도 책꽂이 한켠에 먼지 수북이 쌓인 채로 꽂혀 있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읽겠다는 다짐이 생겼다는 것이다.


희망의 두 지평 - 10점
이종인 지음/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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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7. 8. 8. 07:27

P 전도사님께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서펑)


 전도사님 잘 지내죠? 여름사역이 한창 때라 바쁘게 지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의 수고와 헌신으로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끼치려면 전도사님도 공급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좋은 책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간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를 추천하고 싶네요.


 저자인 김기현 목사님은 현재 부산 로고스교회를 섬기고 계시고, 로고스서원이라고 해서 글쓰기학교, 북토크 등을 열어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분이세요. 무엇보다 목사님이시니 우리의 선배로써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잘 아실거고, 또 이 책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먼저 이 책은 신앙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다 붙들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 신앙과 철학, 기도와 노력,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전통의 계승과 혁신, 바르트와 니버 등 신앙에 있어서 양면적인 부분을 잘 논의하면서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로써의 고민이 솔직히 드러나 있고,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설교하러 앞에 서서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했고, 설교대로 살지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설교를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는 고백은 정말 제 마음을 들킨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이중적인 위선이라고 괴로워하기보다 긴장으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는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기초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이슈들을 다루면서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돈과 신앙적인 경제관,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과 정치의 정도, 교회의 위기에 대한 원인과 대안, 신앙의 공공성 등 요즘 우리나라와 기독교계에 이슈가 되는 주제들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잘 인식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때 도움이 필요한 성도님들에게도 적절한 안내를 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때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요? 지금은 여름사역 준비로 여유가 없어서 책 읽을 시간도 없이 바쁘겠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싶네요. 어쩌면 준비로 불안하고 부족하다 느껴지는 전도사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말을 걸어오시는 은혜가 찾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운 여름 강건하시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 밥 한번 먹어요.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 10점
김기현 지음/예수전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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