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하나님의 음성(IVP, Dallas Wilard)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역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지침 

3.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들어맞는 것이 대화적 임재 방식이다. 성품 개발의 틀이 되는 것도 바로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분별하기. 의사소통은 두가지 방시긍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나아가 우리를 통해-들려주시는 음성 내지 말씀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신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그분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받는 자쪽의 훨씬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며, 하나님의 가정 내지 나라에서 매우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되, 일하시는 그분께 온전히 흡수됨으로써 아는 수준이다. 특히 우리는 상대가 집중하고 있는 바를 인식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의 전반을 아셨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잘못된 해석. 첫째,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는 견해는 성경과 교회의 공동체험으로도 입증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베드로나 바울, 예수님도 쉬지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기적이 너무 많으면 우리는 약해지며, 자연법칙에 순응하기 보다는 기적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적은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 줄 정도면 충분하다. 둘째, 성경에 다 있다는 견해. 우리는 성경의 원리 안에 있되 성경의 명시적 세부 내용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셋째, 아무래도 좋다는 견해 이것은 어떤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는데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많은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우리의 역할이 없어서는 안되는 곳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도 중요하다. 

4. 대화하는 우주 

5. 세미한 소리와 그 경쟁자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개인들의 체험 중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세미한 음성'이다. 이 세미한 음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고 가장 가치있고 우선적이며 개별적인 의사 소통 형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숙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자신과 동행하는 이들에게 대체로 이 내면의 음성을 사용하여 개별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이 걸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선포하고 알려 주신다. 지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하나님의 동역자이자 친구로서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의 제반 기능이 최대한 개입되기 때문이다. 
성경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음성, 환상, 꿈, 예언하는자, 개인의 생각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성경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는 주장이 있다.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말을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데 최소한 요구되는 것으로 본다면, 성경에 근거할 때 성경과 교회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다(롬1:19-21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 그러나 '필요하다'라는 말이 하나님과 개인 간의 참으로 인격적이고 구속적인 관계에 요구되는 것을 뜻한다면, 성경과 교회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최소한 각 개인의 삶에서 개별적인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전의 비문명 시대에 비해 훨씬 성숙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 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가 없어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주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모든 능력을 행하시며 강한 자로 나타나시고 지금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손을 펴시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분을 부당하게 대하는 처사다(스펄젼의 시 103:2에 대한 주해). 성경이신론을 주의하라. 
지도자가 해야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이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실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 일임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주는 것이다(엘리 제사장). 
음성의 우위성. 음성은 내용이 명료하고 듣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극적일수록 덜 성숙한 것이고,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을 위해 모호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6.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구속은 그 자체가 곧 말씀이다. 어떤 백부장(눅7:2)은 권위를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위력에 대한 믿음, 그것도 체험적 지식에 근거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눈 앞에 닥친 문제 때문에 기도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분은 대체로 문제 자체를 향해 말씀하시거나 그 문제와 관련된 모종의 행동을 취하신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은 아니다. 성경은 독특한 기록된 형태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성경은 시편 기자의 말처럼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서(시119:89) 자연 질서를 드러내는(시19:1-4)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널리 퍼져 흥왕하여 더한(행12:24)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오늘 각 신자들과 개인적으로 나누실 자세한 대화가 나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원리면에서 그 경계를 정해준다. 성경 안에 묘사된 광의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화목하게 살려는 불타는 열망을 가지고 겸손하고 꾸준히 성경에 다가감으로써 누구나 살아계신 말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성경을 공부할때 우리를 교만, 무지, 두려움, 조급함에서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살아계신 말씀인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속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우리를 통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통해서다. 
생명이란 구체적인 관계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씻김받다. 엡5:25-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에 씻겨 마음이 변화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실제적인 일이된다. 말이란 근본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과 생각의 구습-생각과 감정과 행동과 상상과 개념화와 신념과 추론의 낡은 습관-을 제거하시며 그 자리에 다른 것, 즉 그분의 생각, 그분의 태도, 그분의 믿음, 그분의 관점과 해석방법과 그분의 말씀을 넣어주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진행 과정에서 대화는 교제로 발전하고 교제는 연합으로 발전한다. 교제가 연합으로 발전되면 '네것', '내것'의 인식이 없어지고 '우리 것'만 남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새 생명과 동화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끝내 선을 고수하는 새 생명, 그것과의 연합을 인정하고 인식하며 단언하는 것이다. 
구속과정에서 기록된 말씀이 하는 역할. 성경은 교제를 확립시켜 주고 연합의 길을 열어 주는 하나의 의사 소통 방식이다. 순종하는 자세로 읽으라. 즉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을 그대로 행하고 실천하려는 열망에 굴복시켜야 한다. 
성경으로 기도하기. 계시된 그분의 뜻이 내게도 진리여야 한다는 열망을 품어야 한다. 1년 동안 성경의 모든 단어를 눈앞에 스쳐 지나가게 하는 것보다 딱 열구절만 내 삶의 본질로 바꾸는 편이 훨씬 낫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장소에 가는 마음으로 선택한 본문을 펼치라. 1.정보, 2. 열망: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3. 단언: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다짐, 4. 간구: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 5 적용의 선포: 하나님의 은혜로 과연 나도 그렇다는 고백. 특히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런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8. 하나님의 음성 알아듣기 
세개의 빛으로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환경, 성령의 감화,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믿어도 좋다. 
책임있는 판단의 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배제하지 않는 삶이다. 세가지 빛이란 한마디로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책임있는 판단과 결정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각 빛이나 세 빛 전체는 하난미의 직접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대개 실제로 그렇다.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게 하는 것은 권위, 정신, 내용을 살펴볼 때 알 수 있다. 권위는 우리의 의식에 감화를 일으키는 무게 내지는 영향력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언제나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오류없이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은 첫째, 모든 신자가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둘째, 우리에게 확신과 위로와 평안을 공급하며 셋째, 사이비 광신자와 율법주의에서 우리를 지켜주며 넷째, 성경이 말하는 질적인 삶을 현실로 맛보게 한다. 

9. 인도하심 그 이상의 삶 
믿음이란 지식의 반대가 아니라 보는 것의 반대다. 은혜란 노력의 반대가 아니라 대가로 얻는 것의 반대다. 헌신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할 뿐 아니라 뜻(생각, 지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막12:20). 그러므로 성경을 근거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하며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문제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를 만났을때 못지않게 삶이 평탄할때도 그 음성을 진심으로 들으려 한다. 즉 평소에 들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꾸준히 듣는 시간을 갖고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내면의 공간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요령이나 수법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위해 우리가 '조종하는 분'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억지로 말씀을 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화목한 연합 가운데 있지 않을때 특히 그러기 쉽다. 억지로 말씀을 얻으려는 사울왕(삼상13:5-10). 
'스스로 알아서' 내리는 결정 
특별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로는 우리가 하나님 속을 썩인 것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삶의 행로를 정할 때 대부분 우리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정권을 맡김으로써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시험하시기도 한다. 우리의 영혼이 절대적으로 독립하는 만큼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만 우리의 영혼도 절대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하나님의 뜻', 존 우드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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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요단, 필립얀시) 

one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two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고통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믿음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보다는 믿음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보여준다. 금처럼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들을 허용하셨으니 실제로 고통을 일으킨 것은 사단이었다. 
2. 욥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선하심이 부족했다는 언급이 없다. 
3. 욥은 고난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온다는 이론을 단호하게 논박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공정성이 이생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사후에 공의를 베푸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5.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심과 절망을 꾸짖지 않으셨으며, 그의 무지함을 꾸짖으셨을뿐이다. 
6. 어느 누구도 고난에 대해 다 알수 없다. 하늘의 싸움임을 모르고 제한된 시각에서만 봤다. 
7.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침묵하시지 않는다. 
8. 좋은 의도의 충고도 때로는 유익보다 해를 끼칠수 있다. 
9.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문제를 결코 설명하지 않으셨다. 
10. 하나님의 계획에서 고난은 구속될 수 있거나 더 고상한 유익에 사용될 수 있다. 


three 쓰고도 단 인생: 신명기 
모세의 삶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셨다"이다. 모세의 연설의 메시지는 "기억하라!"였다. 사랑은 그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출애굽의 스릴에 흥분되어 그에 앞선 비극 400년이나 시내 광야와 뒤이은 약속의 땅에서 나타난 비참한 실패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숩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관해서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슬프고 설득력 있는 연설에는 두 개의 후기가 있다. 첫째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모세의 무서운 예언이 성취된 후에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끔찍한 저주가 성취되었기도 하고 요시야 시대에는 "언약책"을 통해 영적인 대청소와 부흥이 일어났다. 두번째 후기는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 3절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실때 모세가 나타났다. 모세는 마침내 약속의 땅의 산꼭대기에 서있는 생전의 꿈을 이룬 것이다. 

four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시편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께 나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기능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편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오놓아도 좋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경배(예배)란 우리가 몰두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전략이다. 시편의 소수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고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다윗은 사건들을 회상하고 거기에 관한 시편을 쓰면서 하나님을 무대 중앙에 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든지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다. 다윗의 시편은 일상의 삶을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체에 맞추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유쾌하든 불쾌하든 간에 모든 행동과 느낌, 모든 경험을 반드시 하나님께 아뢴다는 뜻이다"(C. S. 루이스). 
저주시편을 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욥기, 예레미야, 하박국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참고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감정들, 억제되지 않은 분노들을 그분께 내어놓을때에만 고치시고 치료해주실 수 있다. 

five 지혜의 마지막: 전도서 
잠언은 삶을 이해한다. 지혜를 배우고, 신중히 행하며, 규범을 따르면 네 사람이 길고 번성하리라. 그러나 전도서는 자신있고 실제적인 음조는 사라지고 체념과 냉소가 그자리를 대신한다. 전도자는 지혜가 어리석음에 비해 몇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지혜로운자의 운명이나 우매한 자의 운명이나 다를게 없다고 본다. 이러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원하는 것을 얻는 저주. 그렇기에 황금의 시대에 전도서와 같은 절망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좋은 시대가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폐허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도서는 즐거움을 좇는데 우리 삶을 바치게 만들 정도로 즐거움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즐거움이 궁극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잊혀지지 않는 깨달음도 준다. 우리는 또다른 집을 향해 가도록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실들이 일의 결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의미가 세상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 

six 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예언서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자 17권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의 애절한 물음에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언서들은 "성공신학"의 실패를 강하게 항의한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을, 다시말해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내세우신다. 예언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무감각하고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인격이시며, 당신이 만난 어떤 사람 못지 않게 열정적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주요 메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예언서를 읽다보면 예언자들에게는 지금이 나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예언자들의 통찰력을 지금/나중/훨씬 나중 의 셋으로 구분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예언자들의 성취를 볼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그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동경을 규정한다-사실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언자들의 멋진 말에서 기원한다. 그런 후에 이들은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영광되 미래를 그려낸다. 이들은 사람들이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제시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미래로 날아가고 싶어하나 예언자들의 메세지는 일차적으로 나의 지금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예언자들은 보통사람보다 용기가 많았던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시각, "그림자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예언자들은 이 세상을 비록 무대 뒤의 보이지 않은 힘의 영향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각 사람이 연기를 하는 무대로 묘사한다. 중요한 질문은 "느부갓네살이(또는 러시아나 중국이) 얼마나 많은 영토를 다스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진격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충성을 잃지 않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는가?"이다. 
예언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혹은 2050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보다 분명히 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성취하기 원하시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seven 마지막 답변의 전주곡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를 위한 전주곡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가계와 정체성과 민족의 형성에 기여한다. 구약성경, 특히 이 책에서 논의한 부분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가지 질문이 다른 형태로 계속 떠오른다. 내가 소중한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가?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나는 소중한가? 복음서에 있는 예수와 그 분이 행하신 일에 눈을 돌린다. "해 아래" 있는 내 실존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내린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와 모순된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 
하나님이 돌보시는가? 예수께서 그 해답이시다. 예수께서는 고통의 문제에 결코 철학적인 해답을 주려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실존적인 해답을 주셨다.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길 원하지만 그 대답을 얻지 못하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신다는 신비로운 확증을 얻는다.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만 빼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셨으며, 이번에는 연약함과 낮아지심이 아니라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그 분을 다시 보내심으로 다시 한번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날이 오면, 구약성경 저자들을 그렇게 괴롭혔으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질문들은 아이들이나 묻는 질문들처럼 우리의 가뭇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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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IVP, 송인규)

제1부 우리 모두는 보냄받은 선교사입니다 

1장 세상: 사랑하라/사랑치 말라 
이 내용은 은 서강기독인오티때 강영안 교수님의 세계관 강의를 들었던터라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잘 이해되었다. '세상'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고 그래서 세상 정신은 철저히 미워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세상사람들로부터 격리되서는 안된다. 
내면화란 외적 원리를 자신의 인격과 삶에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작업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매순간 떠올리고 결심하고 실행하고 돌이키는 의식화 작업이 필요하다. 

2장 선교: 보냄받은 의식 
요17장 13, 14, 15, 18절.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not out of the world but into the world. 저자는 수도원, 변절자, 양다리 모델 대신에 침투조 모델을 제시한다. 침투조 곧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첫째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하고 둘째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성질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함. 선교의 핵심은 보냄받은 의식. 

3장 사명: 미션 임파서블? 
우리에게 있는 요소를 이웃, 복음, 달란트로 이 각각을 원으로 보았을때 이웃과 복음이 만나는 영역을 '증거'로 이웃과 달란트가 만나는 영역을 '봉사'로 복음과 달란트(전공/직업)이 만나는 영역을 '변호'라고 보았다. 

제2부 우리의 모든 생활은 연장된 예배입니다 

4장 교회: 흩어지는 공동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오라'의 구조(마11:28) '가라'의 구조(마28:19) 
내향성 외향성 
예배, 교제, 교육, 봉사공동체 특징 생활, 선교, 증거, 봉사공동체 
예배당 중심성 생활현장, 세상, 사회 
주일 시간 매일 
목회자, 교역자 주도자 평신도, 일반 그리스도인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 하나님께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사로잡힘으로써 성령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내는 신앙경험. 

5장 예배: 하나님을 섬김 
'예배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두가지로 첫째, 노예가 주인에게 소속되어 부과된 사역이나 임무를 다한다는 뜻의 헬라어 '라트레이아'-히브리어의 '아보다'에 해당-가 있고 둘째, '프로스쿠네오'-이는 '히스타하와'라는 히브리어에 상당함-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을 향하여'('프로스')와 '입맞추다'('쿠네오')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숭앙한다는 뜻에서 무릎을 꿇든지 절을 하는 모습과 연관된다. 이 두가지를 종합해 보자면, 예배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 부복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는 가운데 수종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외적 형식이나 제도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의 내면이나 인격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와 예배한 다는 뜻이고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헬라어 '알레데이아'로서 객관적 측면뿐 아니라 주관적 측면도 보유하고 있는 단어이다. 즉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면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과 마음의 진실한, 진지함, 간절함이 동반된 예배를 가리킨다.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 거룩한 제물, 산제물로서 바치는 것이 올바른 예배 행위인데,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예배라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이 참여하는 모든 영역의 행위와 활동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구성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일상 생활 자체를 통한 예배이다. 

6장: 일상사의 거룩성 
'거룩'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신적존재임을 나타내는 표현과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나 사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보유하는 관계 혹은 위치 그리고 개인이 보유하고 반영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특질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에 대한 구속사적 도표 
이스라엘 백성-> 제사장, 선지자-> 예수-> 사도들, 선지자-> 교회, 성도들, 거룩한 나라 
자연세계(슥14:20-22, 딤전4:4-5)와 문화세계 역시 하나님께 성별될 수 있다. 가정(마19:4-6), 직장(골3:22-24), 정부(롬13장). 거룩의 보편성. 

제3부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7장 주님: '내 영혼'과 '모든 만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신앙입문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롬10:9,1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빌2:9-11). 우리의 믿음을 신장시킨다(마8:8-10). 그리스도인의 일관성 있는 충정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롬14:6-9). 주되심의 범위를 가장 좁고 사적인 영역 즉 내 영혼에서부터 거의 무한대로 넓고 공적인 영역 즉 모든 만물에 이르기까지 열거할 수 있다. 주되심의 범위를 넓히는 길은 첫째, 예배의 면에서 훈련되어야 하고 둘째, 목숨, 재물, 시간, 우리의 재능과 은사의 영역에서 청지기의 삶을 추구함으로써 주되심의 범위를 넓게 인식할 수 있고, 셋째 우리의 교제 생활 또한 주되심의 범위를 넓히도록 자극하고 넷째, 그리스도인의 사도적인 면모 즉 우리가 어느 영역에서든 보내심을 받은 의식에 충실하려면 그 영역을 다스리는 주님에 대한 주되심의 범위 또한 넓어져야 한다. 

8강 소명: 삶의 위치로의 부르심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의 완성으로, 신앙적 목표로, 삶의 위치로 부르신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소명을 목회자와 해외 선교사 계층과만 연결시키는 소명의 독점화 현상, 또는 진정한 의미의 소명이란 마찬가지로 목회자나 해외 선교사에게만 해당된다는 소명의 계층화, 소명을 신앙적 영역의 사역이나 영적 성격의 활동과만 연결시키는 태도인 구획화 입장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앙에 대한 이원론적 자세와 목회자가 아닌 이들의 모범이 너무 희귀한 것 그리고 신약 몇몇 성구에 대한 그릇 해석과 적용(눅10장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사)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9강 현장: 우리의 삶터, 우리의 지성소 
일/직업에 대한 성경적 시각. 첫째, 우리가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업 영역에서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창세기 1장 일하시는 하나님). 둘째 그것은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데살로니가후서 3장 7-12절). 셋째, 그리스도인은 일을 통하여 이웃을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일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엡4:28). 넷째, 이 땅에서 힘들여 일하는 것이 천국에서 영원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4:13). 
직업현장에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들. 첫째, 시간 사용과 '충성'의 문제. 둘째, 자아실현과 관련된 문제(승진) 그리고 윤리적 갈등에 관한 것(술, 담배)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자아실현의 문제에 대해 세가지 유형을 나타낸다. 도피적/소극적 유형은 직장생활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모습으로 자신의 능력 부족과 패배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다. 둘째 유형은 기복적/보상적인 것으로 자아실현을 하나님의 기복적 개입에서 찾는다. 즉 교회봉사와 전도를 열심히 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이나 성공을 허락하신 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방식(뿌린대로 거둔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지막 유형은 권모술수적/비윤리적 유형으로 자아실현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반적으로서도 합당치 않은 방식과 수단을 취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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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신학> 
구약서론 
신약개론 
신학으로의 초대 

<세계관> 
창조, 타락, 구속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나의 세계관 뒤집기 

<강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역사> 
이야기 교회사 
천국의 기둥 
기독교회사 

<예수전도단>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네 신을 벗어라 
벼랑끝에 서는 용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스릴있고 성취감 넘치는 중보기도 
영적전쟁 
불가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손에 훈련된 예배인도자 
효과적인 찬양사역 
십분의 일 선교 
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 

<IVP>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내마음 그리스도인의 집 
하나님을 아는 지식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탁월한 지도력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사랑은 배워야할 감정입니다 
여성 그대의 사명은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라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남준> 
거룩한 부흥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영적기상도를 말한다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 

<두란노> 
거인들의 발자국 
당신안에 잠재된 리더쉽을 키우라 
남자입니까 
기도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찬양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홍성사>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생명의 말씀사> 
양과 목자 
기독교 영성관 
기독교 성경관 
부흥 
종교에 메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삶을 변화시키는 가르침 

<기타> 
성령세례 
성경과의 만남 
성경대로 살기 
C. S.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 
제자입니까? 
예수님처럼 
예기치않은 기쁨 

<유진 피터슨> 
목회오경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필립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기억나는건 별로...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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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래리 크랩/ 두란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땅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이 끈질긴 죄라는 사실을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을 통해 깨닫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은 우리가 율법적인 옛 방식대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성령의 새로운 길을 알아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인 생활과, 자선을 베풀며 신뢰할 만한 관계를 맺는 모습 뒤에 감춰진 목적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더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결과를 얻을까 하여 인과법칙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열망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있는 모습 그래도 거룩한 공동체로 담대히 나아감으로서 성령의 자유의 법을 따르고 있는가?(p.64-65)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열망은 하나님인가?

옛 생활의 길에는 수많은 종류의 갈망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지금 당장 더 나은 삶'이라는 핵심적인 가치가 목적이다....새 길에서도 축복을 소망하고 치유를 위해 기도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쓰임받는 기쁨을 기대하는 등 형통한 삶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없다. 비록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더 실제적이고 깊은 욕구이지만 그것 자체가 중심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이 행동을 움직이는 목적이 아니며 마음의 첫번째 갈망이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의 궁극적인 갈망, 즉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만나며 그를 알아가고 즐거워하며, 그분을 나타내고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산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가장 최선의 것을 주시리라 믿는다. 환경이 평탄하든지 힘들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삶을 주관한다.

그러나 그 갈망이 만족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고 기다리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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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책...
나에게 참 새로운 시각을 던져 주었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도 A를 하면 B라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라는 철저한 인과율에 사로잡힌다는 것...
그러나 삶은 아무리 올바르게 살고자 애써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

결국 조건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은혜로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나의 기도제목이...
나의 가장 궁극적인 열망이...
하나님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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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생명의 말씀사/ Alister Mcgrath

칭의는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한편, 칭의를 얻은 인간은 이후로는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권을 얻지 않는다. 칭의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인간의 의뢰하는 수동성을 강조하는 바울의 논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반론을 뛰어넘으며, 우리 시대에도 직접적이고 밀착된 적실성을 갖는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칭의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개인의 지위 변화이지 본성의 심원한 변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다.

믿음은, 칼빈이 간파하였듯이,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다. 칭의의 문제에서 우리는 수동적이고 하나님은 능동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1540년경 개신교 칭의 교리의 특징
1.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는 법정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본성이 아니라 신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 치으이(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외적인 행동)와 성화 혹은 중생(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갱신의 내적 과정)을 주도 면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구별한다.
3. 의롭다 하시는 의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로서, 믿는 자는 밖으로부터 그에게 전가된다. 이 의는 믿는 자에게 생래적으로 내재하거나 그 안에 정주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4. 칭의 는 페르 피뎀 프롭터 크리스툼(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칭의의 방편이요, 칭의의 기반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해된다.

로마 카톨릭과 어거스틴은 개신교와 루터와 칼빈이 칭의와 성화 이 둘을 한데 묶어 이해한 것을 칭의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 우리는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실존적인 측면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과 진리에 의해 붙들림(달리 말해서, 주관적인 진리)을 즐겨 나눈다. 칭의가 개입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지식 바로 이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무의미에 대한 공포와 정면 대결을 한다....이신칭의의 교리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선포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변혁시키시며 진정한 실존으로부터 비껴 나간 우리의 소외를 없애시어 하나님 자녀로서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
인격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이다.
보편구원론 비판. 아니오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
이신칭의 라는 기독교 교리를 정초시켜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즉 갈망의 경험, 인간 관계 안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잡을 수 없다는 낭패감, 우리 손에 영영 들어오지 않을 듯하면서도 인간 관계 그 자체 너머에 있을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그 지향성이 되어야할 것이다.
부버가 지적햇듯이, 모든 인간 "당신"은 그 자신 너머에 있는 "영원한 당신" 곧 하나님을 지향하고 잇다. 인간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 국면 때문에 하나님을 지향하게 된다. 즉, 인간 관계를 통해서 오지만 그것 안에는 없고 그것을, 아니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지향하ㅏ게 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인 측면
세속 윤리 체계가 도덕적인 행위를 목적(달리 말해서 성취하려는 것 또는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 하지만, 이신칭이에 기반을 둔 신학적인 윤리체계는 미리 정해진 것 또는 표출하도록 의도된 것, 즉 회심을 통한 개인의 근본적인 변혁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한다. 진정한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개인의 회심이 새로운 순종과 삶의 방식 그리고 최소한 세속 윤리체계와는 잠재적으로라도 다른 새로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세속 윤리 체계가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거나 부인하는 인간 본성의 결정적인국면, 즉 죄를 인정하도록 촉구한다.
"죄인이 되어 마음껏 죄를 지으라. 하지만 더욱 강하게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라."는 루터의 저 유명한 언표에 깔려 있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달리 말해서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죄를 짓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요, 설령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용서 받을 수 있음에 안도하고 기뻐하라는 뜻이다.

1. 이신칭의 경험에 관계된 교리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점은 무엇보다도 경험이다.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으냐는 경험 이후의 문제이다.
2. 이신칭의는 역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되는 분이 아니다, 혹은 우리의 유한한 사고의 범주 속에 포박될 수 없는 분이라는 간단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는 어떤 시도도 역설의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많은 복음적인 설교가들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관에 부딪히고는 한다.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청중의 마음을 돌려 주시기를 간구한다(회심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전제 위에서). 하지만 정작 설교할 때에는 하나님께 반응하느냐 않느냐의 선택권을 마치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양 설교한다(회심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인 양). "기도할 때에는 칼빈주의자, 설교할 때는 알미니안주의자"라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 아래서이다.
왜 이 역설이 칭의 교리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루고, 왜 그렇게 중요한가?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칭의 문제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두 가지 부적절한 이해를 일부러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마치 종주먹을 들이대듯이 강요하는 전능자의 손에 마냥 놀아나는 마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견해(보편구원론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않고는 오직, 오로지 우리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후자에게서 "선택"은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택했다는 의미이다.
은혜라는 역설- 이 역설은 궁극적으로는 예정 교리를 안전판으로 삼는다-은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칭의에 개입하시는데,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에게 보이는 반응 역시 그분의 개입 결과이다. 이 역설은 복음을 위험스러울 정도로 단순화 하는 경향에 대항하여,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부하고가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린 것처럼 호도한느 사람들에게 맞서는 안전판이라고 말하면 적절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칭의에 기여했다고 억지로라도 말할 건더기가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은혜스럽게 용서해주신 죄뿐이다."

3. 이신칭의는 인격적인 겸손과도 연관이 있다.
칼빈이 말했듯이, 우리는 빈 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우리에게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받을 것뿐이다. 
4. 이신칭의는 세속적 가치관의 전복을 말한다. 
5.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미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교리는 전도, 즉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언을 강조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교리는 신약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 된 바로 그 경험이 오늘날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한다. 게다가 각 개인이 지금 여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잇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신칭의 교리의 교의적 중요성
누가 구속자인가? 가현설(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를 가장한 하나님)과 에비온파(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었다)
누가 구속의 대상인가? 마니교(일종의 숙명론)와 펠라기우스주의(자유주의, 전적주권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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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과연 행함을 강조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강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면서 읽은 책이다.
그러나 답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전제를 깔고 난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행함이 강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이루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 성령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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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우리의 성화는 우리의 일을 바꾸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흔히 자신을 위해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기도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기도 할 때 기도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 못지않게 행동할 때 행동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할 준엄한 의무가 있다. 
- 로렌스

나는 예수로부터 내 삶을 사는 법을 배우되 그분이 나라면 내 자리에서 사실 그 삶을 배운다.

모든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예수와의 천국교제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자는 그분에게서 배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을 제자삼을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가 우주의 주님이라는 믿음을 방해한 그들의 실제 신념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의 신념이 무엇인지 연구하라.

예수의 모든 말씀을 행하도록 그들을 훈련하는 일은, 한마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처음 믿은 결과로 이미 얻은 정보를, 전인격을다해믿도록 해주는 것이다. 

훈련과정의 두가지 주요목표
첫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찾아오신 "하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늘 기뻐하며, 또한 그 분의 선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시는 능력에 "함정"과 제한이 없으심을 확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우리의 자동적인 반응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대상을 사랑하도록 도울 것인가? 간단히 답하면, 그 사랑스러운 대상에 마음을두도록 유도하고 구하고 돕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대상을간절히 생각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지식을 따른다." 사랑이란 좋은것을 봄으로써 의지 안에생겨나는 감정 반응이다. 흔히들 하는 말과 달리 사랑은 혹 똑바로 보지 못할 수는 있어도 절대 눈먼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보지 않고는 사랑은 존재할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삶이 충만해지도록 하려면,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앞에 다가가 충분히 머물러야 한다.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통찰과 습관을 형성해 주는 일이다.

결국 모든 신학을 검증할 테스트는 바로 이것이다. 그 신학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분인가?...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학자는 큰 위험에, 큰 해를 끼칠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다. 신학자는 하나님을알아야 하며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를 메고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나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으로 사신 바 되어 이제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지금 나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한 하나님의 모략은 십자가의 형태로 인간 역사 위에 우뚝 서 있다."

사실, 천국 바깥의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죄의 습성은 대개가 아주 미약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그저 습관일 뿐이다...내가 내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여 세력을 내어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나를 유혹하거나 죄에 빠뜨릴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혹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깊은 성품의 변화가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성령의 활동에는 우리의 반응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의 몇가지 구체적 훈련
절제를 통한 훈련/ 고독과 침묵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하는 즉각적인 반응의 위력을 깨뜨리는데 도움을 주고 사람과 사건에 대해 내면의 태도를 바꿀 공간을 제공한다. 한동안 우리 어깨에서 세상의 짐을 벗겨 냄으로써, 끊임없어 뭔가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에 제동을 건다. 영적으로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철학자 파스칼은 아주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한가지 사실, 즉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극적 행위를 통한 두 훈련/ 공부와 예배
예수의 제자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자신의 존재 속에 흡입하기 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그러하시듯 그 나라 안에 살기 원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그 질서의 내면화가 필요하다. 공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요 수단이다. 천국의 질서는 예수 안에, 기록된 성경 말씀 안에, 그 길로 행하는 다른 사람 안에, 그리고 사실상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모든 좋은 것 안에 나타나 있으며, 제자는그 질서를 전심으로 살피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삶으로 실험하는 자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을 그분께 돌린다. 존재의 모든 가능한 측면, 곧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개념과 활동과 창조능력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예배의 특성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행동의 변화에 있지 않고 영혼 내면의 변화에 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받으실 수 있으며, 올바른 행동이 율법적 행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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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오래전에 마쳤는데...
이것저것 하느라 정리는 오늘에야 마쳤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8복...진정한 의...기도와 공동체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으로서의 제자도를 보았다.

예배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 가운데서의 전도와 선교로 나타나기 위한 성육신으로서의 '제자도'...
한번쯤 깊이 맛보아야 할 영역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그 모략은 십자가에서 분명하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

마7장
1.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1-5절)
2. "놀라운 것들"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6절)
3. 그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단순히 구한다(7-11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자신은 물론 상대의 유익을 위해-천국의 방법은 단순히 구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변화를 구하는 것이요 상대가 나에게 구하는 것을 어떻게든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하라거나 달라거나 혹은 뭔가가 되라고 요청하는 것은, 곧 강요나 억지가 없는 단순한 속박의 영역에 그 사람과 함께 서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다. 요청이란 본질상 양쪽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반대로 일방적인 요구는 사람을 인간시킨다...그런데 그 길은 상대의 자유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 길이다. 구하고 요청하는 행동은 본질상 상대가 거부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하는 것의 위력은 너무도 커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 불편을 느낄 정도이다. 부탁을 잘 하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 다니는 이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유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한 필요, 그 필요에 대한 기본 해답이 마침내 여기서 주어진다. 그 해답은 기도, 즉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주려는 유익을 확실히 성취할 수 있는 보장된 길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마땅이 대해야 할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영적공동체 안에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 안에는 예수의 임재와 행동이 빠진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일대일" 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예수를 통해 중재된다. 나는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예수와 나-가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시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곧 나의 사랑으로 상대를 규제하고 지배하고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상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이 영적 사랑은 형제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 형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전저긍로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영적인 사랑은 잘 안다.'

C. S. 루이스
'기도란 언제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의 동인으로서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단 "효력"을 낼 때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임의 재량이 하나님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 것이다. 학교 교장이 학생들에게 이러게 말하는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다. "이러이러한 일은 정해진 교칙상 자유로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이러이러한 일은 일반 교칙으로 허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기 원하거든 나를 찾아와 요청해야 한다. 내 방에서 문제 전반에 대해 나와 대화해야 한다. 결과는-두고봐야 한다.'

또 인간에게 두 가지 인과법칙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화단에 잡초가 있거나 자동차 바퀴가 터졌다면 그저 잡초가 죽고 바퀴가 고쳐지도록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기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임으로 순리상 나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나 헤로인에 중독됐거나 지적 유행 풍조의 미로에 빠진 친구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돕든지 반드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상대를 "고쳐 주는" 거이 내 능력 밖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능력 밖이어야 더 좋기 때문이다.

예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조건 그를 "고쳐 주지" 않았다. 인생의 본질과 구속에 대해 깊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슬픔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를 향한 놀라운 믿음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그분은 베드로가 시험을 이겨내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도록 그냥 두셨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정죄나 수치심이나 "지혜의 진주"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의 영혼이나 두뇌를 바꿔 놓지도 않았다.

기도의 기본은 요청이다. 기도란 결코 구하는 것만은 아니며 나의 소원을 구하느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수인이나 해결사가 아니며 우주는 내 욕심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관심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훌륭한 일"에 대해 기도하려고 애쓸 때 기도는 죽는다.

"기도란 하나님과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것이다." 이 묘사는 기도의 초점을 즉각 우리의 현 위치에 맞추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주의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 대화의 동행 과정에는 의당 요청이 있게 마련이다. 기도는 내 삶의 관심사-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한-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나누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내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시며 특히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관심사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다. 거기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차피 하실 일을 하시면서 마치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것처럼 가장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이 하시거나 하시지 않는 일에 정말 변화를 가져온다. 어차피 모든 일이 우리의 기도와 무관하게 될 대로 된다는 개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망령이다. (모세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이 장면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당신 앞에 신실하게 서는 자들에게 '설득 당하시는' 하나님이다. 요청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란 전혀 없다. 기도에 "무조건 공식"이란 없다. 요청한 내용은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선한 이유에서이다. 인격간의 관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기도란 무엇보다도 성품을 형성하는 길이다. 기도는 자유와 능력을 섬김과 사랑에 접목시켜준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결국 얻으시는 것-사실상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결국 얻는 것- 단순히 우리가 갖추게 될 인격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받아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훈련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앞질러 문제를 내 손으로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다림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더없이 값진 성품, 즉 그분의 능력을 받아 자신이 택하는 일을 능히 해낼수 있는 성품이 빚어지는 것이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다른 이들이나 나 자신의 변화가 포함되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눅18장 불의한 재판장에게 구하는 과부
요청이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요청이 계속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기도가 인격과 인격간의 관계 방식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물론 기도는 어김없이 그런 관계의 방식이지만 요청이라는 전반적 특성은 남아 있다. 사실, 그 반대의 가정이야 말로 기도를 "중단"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기도를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단번의 간단한 행동으로 자동 장치가 작동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같은 문제로 두 번 기도하는 것은-하나님이 아직 모르고 계시기라도 하다는 양-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나는 보았다....기도는 절대 자동 장치가 아니다. 기도란 언제나 인격적 협상이다.

주기도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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