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창세기'에 해당되는 글 43건

  1. 2014.11.07 창41:1-13
  2. 2014.11.04 창39:20-40:4
  3. 2014.10.31 창37:18-36
  4. 2014.10.22 창32:21-32
  5. 2014.10.19 창31:36-55
  6. 2014.10.14 창29:21-35
  7. 2014.10.13 창29:1-20
  8. 2014.10.09 창27:15-29

그것을 바로에게 해석하는 자가 없더라(8절)
술관원이 복직된지 이 년 후에 바로가 꿈을 꾸게 된다. 그러나 애굽의 점술가와 현인들은 그것을 해석하지 못한다. 이 때 술관원이 요셉을 기억하고 그 때일을 바로에게 고한다.

이제 요셉의 기구한 운명에서 해방될 시간이 거의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그런데 여기에서 바로는 자신이 꾼 꿈 때문에 번민하고 괴로워한다. 꿈 해석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애굽의 당대 최고의 지혜자들도 이것을 해석하지 못한다. 이 꿈이 무슨 꿈인가? 이 꿈은 하나님이 주신 꿈이기에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의 영에 감동된 사람만이 해석하고 풀 수 있다. 말씀, 계시, 묵시가 그러하지 아니한가? 믿는 자들에게는 그 감추어진 것이 드러나게 된다. 또한 하나님 나라에 자신의 삶을 드린자를 통해 그 꿈은 이루어지고 성취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40:4)

보디발 아내의 모함 때문에 요셉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그러나 여기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고 형통케 하셔서 간수장에게 은혜를 입는다. 그래서 모든 일을 맡아 처리하게 된다. 그러던 중 왕의 시중을 들던 두 사람이 들어오게 되었고, 요셉은 두 사람을 섬긴다.

이 본문 뿐 아니라 창세기 39장에서는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형통하게 하시는 것이 계속해서 반복되고 강조된다. 그런데 이런 하나님의 함께 하심과 형통케 하심은 관계를 맺은 사람들 사이에 한가지를 가능케 한다. 그것은 다른 이에게 은혜를 입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에게도 호의를 얻게 되는 것을 보게 된다. 우선 이렇게 호의를 입는 것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요 역사이다.
그러나 요셉의 삶에서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것은 사람을 섬기는 것이다(39:4, 40:4). 물론 종의 신분이기에 섬기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섬김도 어떤 섬김이냐에 따라 달라질 것이라 생각된다. 여러가지 억울함과 고난의 시기 가운데 있지만 섬김을 통해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꿈을 자신도 모르게 이루어가고 있다. 하나님의 함께하심과 형통케 하심을 경험하는 사람, 다른 사람들에게 은혜를 입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다. 하나님 나라의 꿈은 섬김을 통해 성취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서로 이르되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19절)

요셉은 형들과 부모가 자기에게 절하는 것을 의미하는 꿈을 이야기하고 미움을 받았다. 야곱은 형들이 일하는 것을 보고 오라 말했고 요셉은 이제 형들을 만난다. 이 요셉을 보고 형들은 꿈꾸는 자가 온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리고 구덩이에 빠트려 죽이려했으나 르우벤과 유다의 제안으로 목숨을 건지고 미디안 상인의 손을 거쳐 바로의 친위대장인 보디팔에 집에 이르게 된다.

하나님이 주신 꿈은 단순히 긍정, 잘되는 나, 자아성취의 꿈이 아니다. 그것은 윗사람이 아래사람을 섬기는 이 땅의 체제전복을 지향하는 하나님 나라의 꿈이다. 그런 꿈을 꾸는 사람은 미움을 받게 되어있고, 비웃음을 당하게 된다. 윗사람들은 그런 꿈을, 그런 꿈을 꾸는 자들을 없애려고 한다. 그러나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자들과 여러 도움의 손길을 통해 그 꿈은 없어지지 아니한다. 전혀 안 될 것 같은 상황 속에서도 성취를 향해 한걸음씩 나아간다. 나는 무슨 꿈을 꾸고 있는가? 아니 무슨 꿈에 사로잡힐 것인가?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31절)

야곱은 에서와의 만남을 앞두고 모든 소유와 가족을 먼저 보내고 혼자 남는다. 여기서 그는 어떤 사람과 씨름을 하였는데 하나님이기도 하고 하나님의 사람들이기도 한 존재이다. 씨름할 때 그의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는 고통을 겪는다. 그러나 이것을 통해 그의 이름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이스라엘로 바뀌는 축복을 얻는다. 야곱은 이곳 이름을 하나님을 대면하고도 살아남았다는 의미로 브니엘이라 짓고 절체절명의 순간을 향해 나아간다. 밤이 지나고 아침해가 눈부시게 떠오르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며 절뚝거리며 걸어간다.

아침해가 떠오름과 동시에 다리를 절뚝거리는 야곱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너무나 대조적인 두 가지라고 생각된다. 어둠이 물러가고 빛이 오며, 두려움과 절망에서 용기와 희망을 품게 되었고, 속이는 자 야곱에서 하나님을 이긴 자 이스라엘로 변화되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서 내가 함께 씨름하고 대면한 나의 하나님이 되었지만, 그는 우스꽝스럽고 불안하고 불쌍하게 절뚝거리게 되었다.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을 받았지만, 그의 존재는 불편해졌고 약해졌다. 하나님이 하나님되실 때, 나의 나됨은 꺾여진다. 이것이 축복이다 말할 자신은 없다. 다만 하나님의 샅바를 붙든 손을 놓지 않는 하루가 되길 원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그의 아버지 이삭이 경외하는 이를(42, 53절)

라반이 자신의 드라빔을 찾지 못하자 야곱은 라반을 책망하고 그동안 자신이 당한 어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이야기 하는데 아브라함과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후에 라반과 야곱은 돌무더기를 세우며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서로를 축복하고 헤어진다.

야곱은 하나님을 부르되 아브라함과 이삭이 경외하는 하나님이라고 말한다. 거기에 나의 하나님이라고 포함시키는 것은 교만한 것이었는지, 조상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은 내가 경외하는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함께하시고 보호하시고 부요케하신 하나님을 알았지만 아직 인격적인 하나님, 자신의 끈질긴 이기심을 다루시고 끝내 꺾으시고 변화시키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오늘도 나와 함께하시지만 나를 꺾으시고 다루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주일이 되기 원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외삼촌이 나를 속이심은(25절)
야곱은 라반에게 속아 라헬이 아니라 레아와 결혼하게 되었다. 왜 속이냐고 분노하는 야곱에게 이것은 그 지방의 풍습을 따른 것이라 이야기한다. 그래서 야곱은 라헬을 위해 7년을 더 일을 하여 아내로 맞아들이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랑받지 못하는 레아에게 자녀를 주셨지만, 라헬에게는 자녀가 없었다.

속이는 자 야곱이 속임을 당한다. 장자처럼 행세하여 속였는데, 장녀에 의해 속임을 당했다. 뛰는놈 위에 나는 놈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고, 이것을 통해 자신의 속임과 그 비참한 결과를 깨닫게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든다. 심은대로 거두는, 악한 일은 그 결과를 받게되는 일상의 법칙을 보게 된다. 나는 오늘 하루 무엇을 심고 무엇을 거둘 것인가? 사랑을 심고 믿음을 심자.

하나님은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자녀를 주셨다. 미움받아 쫓겨난 하갈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는 하나님이 떠오른다. 이에비해 야곱의 사랑을 받는 라헬은 자녀를 낳지 못한다. 사람마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없는 어떤 의미의 공평을 이루시는 하나님, 긍휼의 하나님이시지만 사람이 원하는대로만 놔두시지 않는 하나님을 보게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있지만 희한하게 안되고 꼬이는 것이 있음을 보게된다. 아마도 내 안의 야곱을 다루시는 중인가 보다. 아직 두손을 번쩍 못들었나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야곱은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약속받고 하란에 도착하게 된다. 우물에서 목자들과 그 중에 있는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나게 되고 결국 라반을 만나게 된다. 야곱은 라반의 집에서 삯을 받고 일을 하게 되었고,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7년을 일하게 된다.
라반의 등장이 심상치 않다. 한달 후 삯을 주고 일을 시키고,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동안 일을 하라는 모습을 보면서 야곱이 적수를 만났다는 느낌이 든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연단하시고 빚어가시는 것을 보게된다. 선한 사람들을 통해서는 좋은 모델로 배우고 도전받게 하시고, 당시에는 참 싫었던 사람이지만 지나고 보면 나와 반대되는 그 사람을 통해 나의 약점이 보완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사람을 통해서 사람으로 만들어가시는 하나님. 때로는 사람 때문에 상처받고 절망하고 분노하지만 기꺼이 이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분별하지 못하고 축복하였더라(23절)
에서의 장자의 직분을 경홀히 여김, 이삭의 작은 자가 크게 되리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민감하지 못함,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과 축복을 가로챔, 이삭의 분별하지 못함이 합력(?)하여 결국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게 된다.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은 이렇게 야곱에게로 이어진다. 이렇게 놓고보면 뭐 이렇게 엉망징창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선과 성실로 하나님의 역사가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된다. 그렇다고 인간의 죄와 연약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룬다는 것으로 비약할 것은 아니다. 죄와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신실하게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어가시는 것을 보게된다.
그러니 안심해도 좋다. 일을 저질러도 좋다. 마음껏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들을 해보자.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