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달라스 윌라드(IVP)
The Divine Conspiracy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선인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선하게 되도록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선한 사람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선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죄관리의 복음'
신앙고백이 삶 전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 상황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요 최근에 생겨난 것도 아니다...역사상 우리 기독교의 메시지가 본질상 오직 죄, 곧 행동의 잘못, 존재의 잘못, 그리고 그 결과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만 관심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점에 처해 있다. 현재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것 속에는 삶, 즉 우리의 실체적 실존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극히 주변적으로만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이다.

기독교의 선포 및 실천의 전체 스펙트럼을 잘 살펴보면, 우익 신학의 본질이 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죄 용서임을 알 수 있다. 좌익의 경우에는 사회악이나 구조악의 제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은 "죄 관리의 복음"이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과 성품의 변화는 구속적 메시지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 매순간의 인간 실체의 깊이는 신앙과 영생의 지평에 들지 못한다.

복음서에서 복음에 관한 한 최대 이슈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는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삶, "위로부터" 오는 삶의 성분인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대언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복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의 풀타임 학생이 되게 하는 본연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을 믿는 이들은 당연히 "다음 단계"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있는가?
실제로 내 메시지의 본질을 믿는 이들에게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자원이 인간 생활과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과 기독교 제자도의 복음은 없고, 죽음을 위한 복음 아니면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인생의 광야에서 시들어 죽도록 방치돼 있는 채 말이다. 창조 때에 의도된 환경, 곧 살아있는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는 이가 없는 탓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현재적 실체를 예수의 말씀과 인격을 믿는 믿음을 통해 말(설교)과 삶으로 똑바로 제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학생 내지 도제가 될 수 있다.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서 살아가실 삶, 그 삶을 사는 법을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분의 영원한 질의 삶에 지금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의미있게 다가와야 할 하나님 나라

4장 참된 복을 누리는 자: 8복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8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8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8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8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자신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자동적으로 기억하게 돼 있다. 위대한 교사의 비밀은 듣는 이들의 삶의 실제 흐름에 영향을 주는 말,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 특유의 교육 방식으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과 연결시키셨다.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는 듣는 이들의 마음과 습관, 그것이 예수의 말씀의 표적이었다.

8복이란 예수의 근본 메세지, 즉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세상 속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찾아 오신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는 하나의 도구이다.

5장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온전하라"는 계명은 이상주의의 허영이 아니며 실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계명을 지킬 수 잇는 자로 빚으실 것이다.
C. S. 루이스, '내가 믿는 기독교'

우리는 신약 시대에 바울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유대교 교사들의 일을 이상하게 전복시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식법의 준수를 더하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도덕법을 빼려 한다. 믿음과 순종의 결합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의 중대 과제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목표를 율법이 아닌 다른 것, 그 이상의 것에 두어야 한다. 율법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삶,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오류도 여기 있다. 이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 그 행위들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자세히 규정했다.
우리가 변화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영혼의 내면 새오할이다. 그러면 행동은 자연스럽고 쉽게 뒤따라 나온다. 

상황과 천국의 의(디카이오수네) 마 5:21-48
화, 성적매력, 배우자와의 불행한 관계, 상대방에게 뭔가를 믿게 하고 싶을 때, 신상에 해를 입었을 때, 원수가 있을 때

런던이나 애틀란타에 가지 않는다는 계획으로 뉴욕에 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화내지 않는다는 계획으로는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십계명처럼 율법은 행동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무리 필요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행동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율법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율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능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관계라면 얼마든지 가능핟.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예수의 예화에 나타난 행동을 그대로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예수의 예화에 예시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가?"가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천국 마음의 완성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의는 곧 사랑이다.

바리새인들은 행위가 자연스럽게 율법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가페의 사랑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이에게 가 닿는 사랑이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되어진 혹은 앞으로 될 수 있는 우리의 존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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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제임스 휴스턴(IVP)
원제: The Transforming Friendship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기도를 엄격한 훈련이나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아닌 우정과 관계적인 차원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기도는 신학과 윤리의 문제, 즉 사고와 행함의 문제이다. 우리의 믿는 바와 행동방식은 기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격에 따라 기도의 성격도 결정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죄렌 키에르케고르
우리는 정보를 하나님께 제공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양 말이다. 우리는 대신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한다. 그리하여 기도의 사람으로서 하난미과의 사귐 속에서 우리 자신은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의 전 존재는 기도의 삶과 영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기도하면서 거의 간구하지 않는다. 배고픔은 인간에게 구걸을 가장 잘 가르쳐 준다. 자신의 마음속을 더 자주 들여다본다면 당신은 더 자주 무릎을 꿇을 것이다. 자신의 필요를 안다면 당신에게 기도가 그리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알라. 그러고 나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한번 그렇게 해보라. -17세기의 한 필자

믿음이란 한마디로 기도이다. -마틴 루터

기도는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것이다. 믿음이 행함에 의존할 때 믿음은 그 뿌리를 잃는다.

*기도의 초점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기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더 깊고 더 친밀한 관계를 탐험한다.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영을 구하는 것이다.

기도에는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 안에서의 탐구. 금식. 침묵. 공동체. 영적지도.

기도의 장애물
우리의 상처와 기도. 기도와 활동주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 내면의 어두움을 두려워함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홀로됨(solitariness)으로 하는 그 무엇이다. -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우정이란 서로를 확인하기 위하여 만나고 그런 후에 서로를 신뢰하기 위하여 작별하는 것.- 프랑스의 저술가 시몬 웨일.
'지나치게 감상적인' 관계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유대를 성숙케 하기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아마 기도도 이런 식으로, 즉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을 때 그들의 성품이나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색다른 통찰을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된 존재이시며,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면서 우리는 자신을 좀더 현실적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부재는 아이가 갖는 관계들이 단순한 소원성취가 아니라 더 큰 성숙을 추구하게 만들어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은 집으로 보내 오는 편지들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의 부재는 그분의 성품과 생각에 댛나 우리의 좁은 관점을 초월하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타자성에 관해서 가르쳐준다. 존경과 경외심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 한, 친밀함은 경멸을 낳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잘 이해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재가 필요하다.

우리의 소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의식, 우리의 어두움과 무지를 바로 하나님이 짊어지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즐거움을 알려주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체험 주엥서 가장 고통스러운, 하나님과 분리되는 체험 속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역설 중 하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한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죄의식을 체험할 때, 기도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깊이 아는 것이다.

가난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그분의 임재를 가장 실제저긍로 만든다. 그와 마찬가지로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영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하나인 곳에 이를 수 있다. 

제7장 성령, 우리는 변화시키시는 친구
성령은 우리가 성부, 성자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제8장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
기도가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에만 유이랗게 발견되는 기도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느 ㄴ것이다.
두번째 새로운 요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복종의 길.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기도의 열쇠이다.
믿음의 길. 
순종의 길. 사랑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며...

당신의 길을 취하소서, 이는 당신의 길이 최선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비천한 채무자인 저를 늘이거나 줄이소서.
이는 단지 더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제 가슴을 조율하는 것뿐입니다.
조지 허버트

조명하는 진리.
자유케하는 진리.
예수님의 이르믕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자유롭게 예수님께 속한, 아니 예수님께만 속한 그리스도 안의 인격체가 된다. 이러한 소속감은 절망이라는 질병에 대한 강력한 처방이다.


인도해주는 진리.
은밀한 삶.
의뢰하는 삶.
겸손한 삶.

제10장 삼위일체 내의 우정
관상기도는 그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에 가까이 이끌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르 의미한다. 이것은 다양한 기도 체험의 일부이다.

기도는 오히려 열린 마음, 믿음, 주목,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사랑의 문제이다. 이것이 기도에서 진보를 거두는 방법이다. 우리는 관성적인 삶을 진지하게 다루려고 수도원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인격 자체를 하나님의 삶과 사랑에 맡긴다면, 바쁜 직장 생활에서나 어린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실직자로서 또는 삶의 어떤 정황 에서도 기도의 모든 깊이를 측량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저긍로 우리가 어떻게 내적인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상하는 체험에서의 세가지 결론.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각들로 안내해 주는 기호와 욕구와 신비에 개방된다.
둘째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신비가 무한한 바다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변혁을 초래하는 신뢰.
중지될 수 있는 우정은 결코 우정이 아니다. -제롬
나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 12세기의 저술가 리보의 앨리드

기독교 신앙이 우정을 너무나 평가 절하 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주는 사랑을 보여 주라고 명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친구들을 가려서 선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레미 테일러 주교는 기독교 역사상 보기 드문, 영적 우정에 관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온 세상을 향한 우정이다. 그리고 우정이 세상(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것인 때에, 기독교의 사랑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건, 볼록 렌즈의 중시믕로 그 광선이 집중되는 햇빛처럼 미미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동방의 언덕을 오르는 태양의 얼굴처럼 확장되는 우정이다.

관상한다는 것은 그릿도 안의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5장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이유. 요17장

* 우리의 섬김이 예수님의 섬김처럼 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섬김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심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과정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아버지께 복종시키신 방식에 기초한다. 예수님의 순순하고 온전한 거룩하심을 통하여 제자들의 삶과 사역도 순수하고 온전해지는 것이다.

제12장 다양한 기도의 전통들

구송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무아경의 기도

묵상한다는 것은 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하여 우리의 이성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진리들을 숙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묵상은 하나님과 함께 또는 하나님 앞에서 나누는 대화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언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다.

묵상은 이성이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의식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언어적이고 상징적인 대화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관상상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렬하고 친밀하게 실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그분의 임재에 대한 순수한 의식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말과 생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무야경은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과 나누는 우정의 진정한 정점이다. 무아경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우리 밖으로 취해지는 거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직접 온 단어이다. 기도중에 무아경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밖으로 취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노력으로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능려긍로 산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삶의 전체가 하나님의 의해 통제됨으로써 무아경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비, 양선, 오래참음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충성, 온유, 절제 => 자신을 아는 지식

제13장 기도의 공동체

모든 기도를 능가하는 기도는 "말하는 자가 진정 저 자신이 되게 하시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대상이 진정 당신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이다. - 루이스

기도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기도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보다, 잘난체 하는 능률주의와 자신감에 넘친 프로정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모두 기도의 초보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음의 치유에서의 기도. 야고보서에서 육신의 치유와 함께 죄를 고백하는 것과 사함을 받는 것 그리고 의인의 기도의 능력에 간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왜곡된 감정과 욕구를 드러내는지, 어떻게 그분이 우리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여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은혜는, 기도할 때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변화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기도가 위험한 경험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적이 점령하고 있는 나라에서 지하 저항 운동에 가담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복음의 비치 어둠의 나라를 전복시키도록 싸운다.

제14장 함께하는 기도
기도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어거스틴 말했듯이 "절대자만이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은 절대로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인간의 관계들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기 위한 선택이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의 우정도 변화된다. 생떽쥐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분을 찾게 만든다. 

*하나님은 관계이시다.
기독교 공동체는 단순한 인간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둔 신성한 실재다. 
삼위일체는 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비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랑의 공동체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사랑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인격체가 필요하다. 사랑은 보호받기 위하여, 인격체들의 삼위일체를 요구한다....그러므로 사랑의 공유는 세 인격체 미만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 성 빅터의 리처드

만일 삼위일체가 모든 실재와 사고의 유일한 근원임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아무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길-우리 존재의 해체와 영적인 죽음에 우리를 내맡기게 된다...삼위일체와 지옥 사이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 블라디미르 로스키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는 것
두 가지 믿음이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체화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믿음이고 둘재는 하나님이 교회 즉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함께 모인 하나님의 선택받은 회중을 불러 내셨다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언급하며, 후자는 실제로 그런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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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읽고 기도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았었는데...
저자가 참 많이 인용했던 책이어서 한 번 읽어보려고 생각했었떤 책이다.

이책의 저자는 기도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우정, 하나님과의 우정,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하나님은 관계'라는 진술은 이전에 예배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생각하게 되었던 '기독교는 관계'라는 진술과 함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사실 성경을 두가지로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여기에서 관계는 중심이 된다.

특히 번역자가 저자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내의 얼굴은 너희 믿음의 이력서다."라고 말한 역자의 서문이 참 인상 깊다.

요약하려고 했으나 너무 내용이 좋아서 그냥 다 써버렸다.
끈기가 있는 사람들이 읽고 은혜를 받겠지...^^;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만한 책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토니 캠폴로 (도서출판 누가)

chapter6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를 이야기하는 법

무엇보다도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마술이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초자연적인 힘을 조종하려는 시도이다. 한편 기도란 사람들이 영적으로 항복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도구로 드릴때 하나님은 그 도구를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기도가 아닌 두번째 유형은 당신이 매우 선하거나 혹은 매우 영적이라면 더 잘 기도 응답을 받으리라는 생각이다.
셋째로, 기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chapter10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때까지 기다린다는 명목하에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 인생을 통해 하기 원하시는 거룩한 계획을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은 그 반대다. 성경은 하나님은 인도하시되 한번에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로 건강하고, 건설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 자신께 의존케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집에 가는 방법으로 상대방이 그려준 지도를 보고 가는 방법이 있지만 더 좋은 방법은 그 집 주인과 함께 차를 타고 길을 안내받는 것이다. 

성령께 매일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꼭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성경과 친밀한 신자의 교제라는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chapter12
현대철학에 쇠뇌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법

만약 이성적 사고가 영적인 것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다면, 지성인들은 어리석은 자들보다 더 낳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평가받는 자들이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목격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매우 잘 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얼마나 우리가 깊이 생각하느냐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하나니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안토니 플류 이야기. 숲 속을 걷던 두 사람이 한 개척지에 도착해서 한 사람은 꽃을 보며 정원이라 하고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며 잡초를 가리킨다. 어떤 사건을 분석하는데 있어, 각자가 수집한 증거는 다른 증거들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전에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선택한다는 결론에 도달.

이성과 과학은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강해 주는 역할임을 알아야 하다. 이성과 과학은 믿음을 지원하고, 대로 믿음이 타당성이 없어보일때 이런 믿음에 정당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성과 과학이 동원된다. 이성과 과학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구별하는 기초가 아니다.

chapter15
당신의 영혼을 잃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는 법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때때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두 학생의 반대로 고등학교 졸업식때 찬송가를 부르는 전통을 두 사람을 위해 하지 않았던 이야기. 

정치참여와 관련해 신자가 기억할 것은 정치는 힘에 관한 것인 반면에 신자의 존재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현 사회 질서 안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 때,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는 사랑을 옆으로 밀쳐놓는 것이다. 정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세워갈 때, 신앙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정당화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신자에게 무례히 행치 낳도록, 노선이 다른 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기더라도 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라는 의미는, 영적 실패 없이 정치적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의 삶에 대해서
chatper18 죄책감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법
잔소리하지 말라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
생각해야 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chapter19 팝 심리학에 동요되지 않고 자녀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양육하는 법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 생활이나 행동을 더 잘하게 하는 수단으로 자존감을 사용하지 말고, 그들에게 높은 기대를가져라.
보상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하다. 사랑으로 하게 하라.
소명감을 심어줘라.
정(부모의 기대) - 반(자녀의 뜻)
-> 합(양쪽 최고의 요소들) 

chapter21 고립되는 이 세상에서 가족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법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가 회자될 때 가족을 하나로 묶는다.
함께 먹는 시간의 중요성
위대한 기대- 높은 기대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인 실패자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한 큰 기대는 가족이 가족 한 사람, 한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값비싼 선물이라는 일반적인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
가족의식의 중요성- 생일, 가정예배, 성탄의식, 추수감사절 의식

chapter22 착취당하지 않고 사람을 섬기는 법

첫째, 자신의 힘으로 정서적 필요를 채우지 못해 우리에게 오는 자들이 있다.
둘째,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도록 우리가 강요할 자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결론

사람들이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성경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고 , 말하는 어리석은 짓 때문에,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닝르 거부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전하기 위해 당혹스러운 전도를 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농담을 했는데 오히려 그 당혹스러운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생각에 천박한 복음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신실한 사람을 우리가 경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 중 누군가는 어리석어보이고, 당혹케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하나님을 당혹케 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당혹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모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당혹케 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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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교수이자 미국에서는 유명한 스피커란다.
현실에 맞는 진리의 적용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과학과 이성이 진리를 판단하는 기초가 아니라는 그의 진술은 참으로 아직까지도 파격적이다...
포스트모던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그의 의견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어쨌든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색다른 생각과 관점을 주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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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제럴드 싯처(성서유니온 선교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당신의 미래는 어떨까? 한마디로 우리는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된다. 만약 미래가 힘겹고 그달프며 고난으로 점철될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몸을 사리며 그 끔찍한 실체를 불안스레 기다릴 것이다. 손써볼 힘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난이 가져다 줄 지혜와 성품도 놓치고 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일 것임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나태하고 안일해질 것이다. 우리 몫으로 주어질 미래의 낙을 누릴 만한 능력을 잃고 마는 꼴이다.

성경의 신앙 인물들에게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뇌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살려는 고뇌이다. 바울의 내면에 열정과 두려움을 자아낸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미래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 하나님의 주권인가 인간의 자유인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이루어졌고 요셉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했다.

내가 믿기로 기독교의 고난의 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주 신기한 사실을 설명해준다. 세상의 본질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든든한 행복과 안전을 다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그분은 기쁨과 낙과 즐거움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으셨다. 우리는 결코 안전하지 않지만 우리에겐 풍성한 즐거움과 적잖은 환희가 주어져 있다......몇몇 순간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곡,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풋볼 경기 따위에는 그런 성향이 없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군데군데 상쾌한 여인숙으로 우리의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시지만 그곳을 집으로 착각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으신다.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염려
1. 아무 쓸데없는 염려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른다. 
2. 염려는 우유부단함을 낳는다.
3. 염려는 우리 마음을 산만케 하여 정작 가장 주요한 것-현순간-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못하게 한다.
=>기도, 준비, 희망으로 극복할 수 있다.

현 순간의 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은 현 순간을 사용하여 불변의 과거를 구속하시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신다.하나님의 뜻은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평범이 곧 비범. 하나님의 뜻은 날마다 내 주변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거창하게 하고 싶어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만 하는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면 결과가 잘 풀릴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악한 뜻으로 시작한 일 뿐아니라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도 재앙은 닥쳐온다. 성공은 한번도 하나님의 뜻의 증표가 돼본 적이 없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부르셨다." 난관과 좌절에 부딪힐 때 원망 없이 계속 감당해낼 은혜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곧 그 특정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분명한 증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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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열망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많은 말씀과 강의들을 통해 배워왔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여전히 갈등하는게 우리네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련된 책들을 보다보면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성숙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기도 했지만 정말 그것이 맞는 이야기 임을 깨닫게 된다.

이책의 저자는 음주운전자로 인해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를 잃고 세자녀를 친히 키워낸 아버지이자 신학자이나 목사님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뜻-인생의 청사진을 있고 그것을 놓치면 차선으로 전락한다는-이라는 것 대신 그분의 계시된 뜻 안에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글쎄...이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맞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고칠수 있을 거 같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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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2
복음주의자는 무엇을 믿는가? (IVP)
복음주의의 기본진리, 존스토트(IVP)
지성인을 위한 신앙지침서, J.I패커외(크리스챤 다이제스트)
복음주의 신학의 정수, 도날드 블러쉬(한국장로교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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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특수문제에서 사용하는 교재가 자유주의 입장을 취하는 카톨릭 신학자의 책이어서...
처음에는 분한 마음에 그 책에 반박하기 위해 이 책들을 찾았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주장하는 것을 꼼꼼히 살펴보고 이에 대해서 복음을 믿는 믿음의 선배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반응했는지를 보면서 내안에 더욱 복음이 견고하게 세워지길 기대한다...
앞으로 이번학기 동안 계속 참고해야 할 책들이다...

p.s: 혹시 복음주의에 대해 잘 쓴 책들이 있다면 소개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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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2
이재철(홍성사)

홍성사라는 출판사의 경영인이고 얼마전 주님의 교회를 개척하였지만 초기의 약속대로 10년 임기 후 사임, 자원하여 총회 파송선교사로 스위스 제네바 한인 교회에서 사역하셨다.
또 한분의 모델이 될 만한 좋은 목회자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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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믿음의 논리- 황제의 논리를 배격하고 영원의 논리를 따를 것.

자기부인이란?
①황제의 논리를 부인- 하루하루를 열심히 일하다 보니 결과가 거대하게 되었다는 것과, 처음부터 거대한 것을 목표로 삼는 다는 것은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니다.)

②넓은 문의 부인- 세속적 사고방식의 부인

③자기관대의 부인- 어느시대, 어느 곳에서, 절대다수의 사람들이 하나님을 바로 믿은 적이 있던가요?...그대신 하나님께서는 매시대마다 깨어 있는 소수르르 도구로 삼아 그 시대를 새롭게 하셨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주는 일관된 메시지 입니다....그러므로 젊은 목회자인 그대는 그릇되어 보이는 기성세대를 비판하는 일에 정열을 쏟지 마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그대는 조만간 그대가 그토록 비판하는 그분들과 닮아 있을 것입니다. 오히려 자기 자신에 대해 엄격하시시오. 자기 자신과 싸우십시오. 자기 눈의 들보 빼기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그대 자신이 먼저 이 새대의 '깨어있는 소수'가 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기필코 그대를 통해 이 시대의 역사와 교회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약속입니다.

④눈에 보이는 것의 부인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오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8)

※ 그리스도는 당신만을 믿습니다.
☞ 합정동 절두산 교육관 입구에 김수환 추기경이 쓴 글.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믿음을 절대시 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믿음과는 감히 견줄 수도 없다.

2. 믿음의 자리- 믿음의 자리는 공간이 아닌 바로 그대의 중심이다.

주님의 참된 능력은 오병이어나, 혹은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 같은 물질적 표적에 있지 않다. 그런 표적은 이 세상 어느 종교에서나 이야기하게 마련이다. 오히려 사이비로 분류되는 종교일수록 더 많은 표적을 내세운다. 우리 주님의 참된 능력은, 짐승보다 더 못한 인간으로 하여금 다시 시작케 하시는 사랑의 능력이다. 그 사랑의 능력을 힘입어 베드로는 다시 시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에 이끌려 우리 또한 제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3. 믿음의 원천- 내면화와 외향화(나무와 뿌리, 생수, 생명잉태)

베드로가 가로된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행3:6)

그러므로 영원의 논리를 따르는 힘, 참된 믿음의 자리를 고수하는 힘, 믿음다운 믿음을 견지하게 하는 힘- 그 모든 힘의 원천은 그대 자신이 아니다. 믿음의 원천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지금 그대와 함께 하고 계시는 그분이시다.

외향화- 달라진 시선, 생명 바꾸기, 넉넉한 등, 작은 예수, 위를 향한 호흡

4. 믿음의 틀- 믿음이 성숙해진다는 것, 믿음의 틀이 커져 간다는 것으은 그동안 턱없이 과장되어 있던 나의 틀을 축소함과 아울러 내 속에 가두고 있던 하나님의 틀을 본래의 크기로 확장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 삶, 시간, 사람, 고난, 기도와 찬양, 재물, 심판
믿음의 큰 틀 속에 거하는 사람이라면, 내 곁의 사람이 나의 속을 썩일 때 피하려 해서는 안된다. 그를 변화시키려 해서도 안 된다. 눈물을 삼키면서도 속썩임을 당해야 한다. 그래야 그분의 손길에 의해 나의 마음이 큰 그릇으로 변화될 수 있다. 내가 큰 그릇이 되어 그를 품는 순간부터 그로 인한 나의 속상함도 종지부를 찍게 되고, 더이상 속상함이 속상함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은, 이미 그와의 관계에서 문제였던 것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음을 의미한다. 
잊지 마라.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그대 곁에 두신 것은 그를 변화시키려 하심이 아니다. 그를 통해 그대 자신을 변화, 다시 말해 키우시려는 것이다.(사람)

주차장 혹은 주유소
"사도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교회는 그 육신을 다시 말씀으로 환원시키려 한다. 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은 육신이다." (영국의 신학자 톰 라이트)
교회 혹은 신앙생활은 주유소와 같다. 이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기 위한 은혜와 영적 에너지를 공급받는 곳이 교회요, 신앙생활이다.

그대의 신앙수준이 베드로의 어느 단계에 와 있는지 모른다.
비록 그대의 수준이 가이사랴 빌립보나,
대제사장 집 마당의 베드로와 같을지라도 전혀 절망할 것은 없다.
'그대에게 있는 것',
그대와 함께 하시고 계시는 주님을 바라보라.
그분을 믿음의 원천으로 삼아,
바른 믿음의 큰 틀을 지니고,
영원한 믿음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그대 중심으로 믿음의 자리를 고수하라.
그대는 앉은뱅이 같은 이 시대를 일으키는 성전 미문의 베드로,
이 사회를 부정과 부패, 불의와 절망의 감옥으로부터 이끌어내는
이 시대의 사도 베드로가 반드시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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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있었는데 몇 주를 기다려서 이제야 대출해서 읽었다.
이재철 목사님의 고유의 소박하고도 진실한 글과 생각이 참 마음에 와 닿았다.
다시한번 성공을 향해 달려가는 이 시대의 흐름 속에서 내게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한번 생각하게 되는 책이었다.

평생, 평생 잊지 말아야 할 것...
항상, 항상 나의 온 삶으로 선포해야 할 것...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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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2
마이클 포드(두란노)

도서관에서 빛과 소금 잡지를 읽다가 신간서적란에서 발견하고 도서관에다 신청한 책...
신청한지는 두주 정도 됐는데 어쨌든 이렇게 사다주다니 우리학교 도서관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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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은 그에게 모든 것의 중심이었다. 신실하게 기도하면서 그는 심장 고동과 호흡으로, 사고와 감정으로, 청각과 시각과 촉각과 미각으로 하나님을 들어오시게 했다.

묵상과 예배를 통해 기독교 성직자들은 사랑의신성한 목소리를 지속적으로 듣는 것을 배우고, 현대 문제들을 다루는 지혜와 담대함을 찾는다. 그렇게 할 때에만 그들은 상대주의적이 아니면서 융통성을 가질 수 잇고, 완고하지 않으면서 확신할 수 있고, 상대방을 불쾌하게 만들지 않고도 그를 직면할 수 있으며, 연약하지 않음녀서 온유하고 관용할 수 있으며, 교묘하지 않은 방법으로 진정한 증인이 될 수 있다.

나우웬은 인간 마음을 존재의 중심 곧 "하나님이 계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도록 초청받은" 신성한 공간으로 보았다. 묵상을 통해 지성이 마음으로 내려감으로 사람의 주된 주체성이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점차 바뀐다.(묵상)

그는 강의하고 갈채를 받은 후 완전히 혼자된 느낌을 받는 적이 많았다. 그는 세상을 얻는다 해도 자기 영혼을 잃는 위험, 곧 정상에 있는 빈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친밀함)

설교는 개종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도록 그들을 자유롭게 만들기 위해 탁월한 통찰력으로 사람들을 인도하는 영성과 삶의 방식의 개발을 의미한다. (춤)

그는 다른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자신의 상처를 사용할 수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교회 내에서 성직자의 교훈을 바꾸어 놓았다. 하지만 갈등은 마음에서 이겨야지 지성으로 논의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치유는 신성한 중심에서 나와야 한다.(상처 입은 치유자)

비탄과 용서와 관대함은 자비로운 아버지 자리로 인도하는 세 가지 방법이었다. 자기 내면에 있는 반항적인 작은아들과 분개한 큰아들이 아버지가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용서를 받게 함으로 그런 아버지 자리를 자신이 감당해야함을 알았다. 거기서 귀가의 진리를 발견했다. (아버지)

진정한 영적 삶은 육신의 삶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성육신을 믿는다. 하나님이 육신이 되시고, 하나님이 육신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렇기 때문에 몸을 만질 때는 신성한 삶을 만지는 것과 같다. 하나님이 육신의 옷을 입거나 육신이 되기를 결정하셨기 때문에 육체 밖에서는 신성한 삶이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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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으면서 좋은 글과 도전이 되는 삶으로 존경했던 분을 더 깊이 알게 된 거 같아 참 좋았다.
무엇보다 예상밖의 모습들을 알게 되어 충격적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퀘이커 모임에 가서 묵상하며 기도할때 집중하지 못하고 다리를 흔들며 산만하게 구는 모습...강의가 끝나고 호텔방에 들어가 친밀함을 갈망하며 국제전화로 친구들에게 길고 절망적으로 전화하는 모습...
보기에는 항상 조용하게 말할 것 같지만 그는 강연할 때 온 장소를 누비며 온 몸을 사용해서 강연했다고 한다.

특히 그의 가까운 친구는 그의 메세지와 삶 사이의 공백에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그치만 그의 친구는 그의 그런 인간다움이 그의 영성을 가까이하기 쉽고 현실적으로 만들었다고 고백한다.
이때 복음에 대한 말씀을 준비하면서 자신이 살지 못하는 것을 설교하는 것에 대해 헨리는 사막의 교부들처럼 "나의 말들로 자신이 변화되기 위해 계속해서 설교하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참으로 새겨둘 말이다.

또 서커스를 통해서,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들과 렘브란트 등 성화들을 통해서, 지체장애인 공동체인 데이브레이크를 통해서 영성을 찾아가는 그의 모습 속에서 예술에 열려진 그의 마음을 느꼈다.

결국 완전한 사람이란 없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하지만 다른 전기와는 다르게 헨리 나우웬의 성품대로 있는 그대로를 겸손하게 그려낸 책이 참 감동적이다.

나는 헨리 나우웬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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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2

4부 성찬에 대해

제1장 그리스도를 숭배함에 대해

제게 당신 안에 거하기 원하거든, 담대히 당신께 나오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영생과 은총을 웓기 원하거든 불멸의 음식을 받아먹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아, 얼마나 감미로우며 따뜻한 말씀인지요...그 친절하신 경의와 초대의 의미는 무엇입니가? 제 안에 선한 것이 하나도 없음을 알면서 제가 어찌 감히 주님께 나아가겠습니까?...만일 주님이 직접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아무도 그 ㅁ라을 진짜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제7장 양심의 성찰과 개심의 목적에 대해

다음을 슬퍼하라. 네가 이직 육에 속하고 세속적이어서 열정이 살아남아 악한 욕망에 사로잡힘을 슬퍼하라. 그리하여 네 외적인 감정이 어리석은 환상에 사로잡히는 것을 막지 모샇고 세상일에만 관심을 갖고, 내면의 삶에는 무관심해지며 쉽게 웃고 쉽게 떠들면서 눈물과 슬픔을 잊고 살며, 육신의 안일과 휴식만 추구하여 인내와 헌신에 게으르며, 새로운 소식에만 열심히이고 화려한 곳만 찾으며 겸손하고 비천한 일에는 느리며 물질을 많이 갖기만 추구하여 주는 데 인색하며 지키지기만 열심히니, 말을 할 때도 신중치 못하며 침묵을 지키지 못하고 행동에도 조심하지 않고, 늘 지나치게 서두르며 음식을 탐하고, 주님의 말씀에는 귀를 막으며 쉬기에 급급해서 일하기 더디고, 남의 이야기는 깨어 들으면서 설교 때는 졸고, 기도를 마칠 때는 급하게 서두르고 공상만 하였으며 기도문을 외울때는 무심했고, 성찬 예배에 참여해서도 그 마음이 미지근했으며 주님의 성체를 받을 때도 경건하지 못했고, 이러저리 흐트러져 마음을 모으는 일도 거의 없었으며 남에게 쉽게 화를 내고 거침없이 대했으며, 다른 사람을 쉽게 판단하고 얼마나 심하게 비난하였는지 부유할때는 행복해하고, 가난해지면 낙담하고 선한 결심을 하면서도 그것을 유지하는 데는 소홀했다.

제13장 그리스도와 하나되기를 갈망함에 대해

제자: 주여 제가 어떻게 하면 제 온 마음을 주님께 열고 오직 주님만을 즐기며 주님만을 제 영혼의 소망으로 삼을 수 있을까요? 아무도 저를 업신여기지 않고, 어떤 피조물도 저를 방해하지 않으며, 오직 주님만이 제게 말씀하시고, 저도 주님께만 말하길 원합니다. 마치 사랑하는 연인들처럼, 절친한 친구들이 함께 벌이는 잔치처럼 주님과 제가 그렇게 되길 원합니다. 이것이 제 기도요, 소원입니다. 온전히 주님과 하나가 되고, 모든 물질을 향하던 제 마음을 버리고, 성찬을 받고 예배에 참여함으로써 영원한 하늘의 구원을 배우고 싶습니다. 오, 주 하나님! 언제쯤이면 제가 온전히 당신과 하나가 되며 온전히 당신께 녹아들어 제 자신을 잊게 될까요? 제 안에 주님이 계시고 주님 안에 제가 있사옵니다. 주님과 제가 하나되어 영원히 함께 하는 은총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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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다 읽게 되었다.
솔직히 이 책은 한번 읽고 말 책이 아니라 곁에 두고 조금씩 조금씩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야 할 책이다.
읽으면서 정말 예수 그리스도를 온맘으로 사랑하고 그 분을 닮기를 원하는 글쓴이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나누게 되었다.

지금까지 수없이 참여해왔던 성찬식...
그분의 보혈의 사랑에도 불구하고 나의 죄 때문에 매번 회개만 했던 나에게...
DTS의 어느날 아침 성찬을 나눌때 예수님께서는 성찬을 통해서 나의 연약함에도 불구하고 나와 친밀감을 나누기를 원하시는, 나와 하나되기를 원하시는 그 사랑에 감격해서 통곡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성찬에 참여함으로 그분과 온전한 연합을 누려야 한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