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에 해당되는 글 1632건

  1. 2011.08.06 아직도 가야 할 길
  2. 2011.08.06 탁월한 지도력
  3. 2011.08.06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4. 2011.08.06 결혼건축가
  5. 2011.08.06 성령충만 그 아름다운 삶
  6. 2011.08.06 분별
  7. 2011.08.06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
  8. 2011.08.06 신학으로의 초대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The Road Less Traveled/ M. Scott Peck(열음사)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
"노이로제(신경증)이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칼 융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즐거움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충실한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는 가끔 정신치료를 가리켜 '진실게임' 혹은 '정직게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일 중에서도 특히 거짓말과 대결하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가 들어온 거짓말과, 또 우리가 자신에게 해온 그런 거짓말이 서로 엉키기 때문이다. 이런 원인은 오로지 정직한 분위기에서만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치료자가 제일 근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환자들과의 관계를 솔직하고 진실한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괄호로 묶기'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잠깐 포기하고, 그 대신 새로운 자료에 적응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룸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해주는 행동을 말한다...순수하게 새로운, 사물이나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실재가 내 안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하여, 자아의 탈중심화를 겪어야만 한다...즉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자기 훈련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출생이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진정한 사람은 애착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 훨씬 재미있고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구별을 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는 말이 바로 '의지'이다.


사랑하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참으로 들어주는 일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태도로 사랑의 힘을 구사하는 방법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예는 사랑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다...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사랑하는 상대의 삶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과 그 삶에 대해 사랑으로 충고해주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난처해질 수 있다. 이것은 괴로운 자기 성찰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즉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충고하고자 하는 자신의 숨은 동기와 자신의 '지혜'를 살펴야 한다.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겸손해진다. 그러나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된다...그러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일하며 행동하는 것이 신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는 행동이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주요 특징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별이 언제나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전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지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준다. 이처럼 상대방과 나와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그것은 많은 정신질환과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정신치료의 근본적인 요소는 사랑인 것이다...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이더라도 그 관계는 상호간의 정신치료적 관계다.


인식을 넓히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된 주제다.


"당신이 아는 것은 누군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것을 들은 것에 불과하거든요. 게다가 당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 중에 많은 것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당신은 당신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진리와 당신 자신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은총...인간의 의식세계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는 강력한 힘이다. 인간이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거하여 전염병 항체라든가 꿈의 상태, 무의식 같은 것을 개념화하기 훨씬 전부터 수백 수천년 동안 이 힘은 종교에 의해 인지되어 왔다.


생물학적 진화 과정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것이 일종의 기적이라는 점이다...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부다 정돈된 상태로 부터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복잡한 분화 상태로부터 보다 단순한 분화 상태로 흘러간다. 결국 우주는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가 되는데 이것을 엔트로피라 부른다...진화의 흐름은 바로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영적 성장의 과정이 힘겹고 어려운 것임을 나는 거듭해서 강조해왔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을 극복하고 그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의 힘이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인 기적은 이 저항은 극복해낸다. 우리는 성장하고, 좀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적을 이루어낸다...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태어난 진창구덩이 속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힘이 내재해 있다.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힘에 대하여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고.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영혼의 성숙에 장애가 되는 것들 중 궁극적으로 오직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혼의 성숙에는 노력이 필요하다...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즉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정신질환의 고통스럽고 언짢은 증후군은 은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의식이 바깥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의 소산이다.


자신이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권력과 대리자가 되며 하느님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이다.


Dilege et quod vis fac-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성 어거스틴


은총에 관한 이 장의 주된 목표는 영적 성장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추구하지 않고도 은총이라는 선물을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잇는 능력을 학습시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향한 여행은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과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훨씬 정확하게 바른 길로 인도된다. 그리하여 여행은 더욱 빨라진다.


수동성과 의존성, 그리고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가야 할 길의 전부를 미리 보기를 원하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안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장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말이나 은총의 도움이 얼마간 힘은 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할 길이다...어떤 말로도, 어떤 가르침으로도, 영적인 순례자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여 노력하고 고뇌하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자기 삶의 고유한 환경을 극복하며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덜어 주지는 못한다.

--------------------------------------------------

친구가 훈련에 관한 좋은 글을 인용한 것을 보고 좋은 책이겠다 싶어 읽게 된 책...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써 심리학과 영성을 아울러서 사람과 종교를 보고 있다.

그의 모든 생각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참 깊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삶...고통...정직...책임...겸손...사랑...은총...성장...순례...포기...자기부인...의지...하나님...

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책...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Excellence in leadership: Reaching Goals with prayer, courage and determination(존 화이트/ IVP)


간구(중보기도)의 전제조건
1.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마음
2. 자기 동료에 대한 사랑
3. 자신의 생명과 운명에 대한 무관심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그 약속을 아는 것.

기도라는 것이 단순히 성령님의 촉구하심에 반응을 보인 것이 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바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기도하기 원하시는지 물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느끼는대로 기도했다.'
당신이 최근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응답에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 일부가 될 수 있는가?

영성은 땀을 대신하지 않는다. 기도가 산을 옮길지 모르겠으나 기도와 육체노동은 서로 훌륭한 동역자들이다. 이것은 계획을 성취시킨다.

느헤미야에게 지도력이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다른 보통 일에서 면제받는 어떤 신분이 아니다.


-------------------------------------------------------
예전에 한번 읽었지만 아나톨레에서 이번학기 느헤미야를 공부하기에 계속 참조하고 있는 책이다.
다른 내용도 참 좋지만 이번에 개인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부분은 중보기도 부분이었다.

그동안 누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면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들을 놓고 기도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의 방식을 바꾸고 저자가 그러하였듯이 먼저 조용히 하나님께 듣고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였다.

또한 간구의 원칙 중에서 세번째가 참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중보기도 하면서 솔직히 나의 마음은 내가 기도하고 있다고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그에게 잘보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모세가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이 보장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중보하는 대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던져야 한다는 것...

와~~!!!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자신이 중보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고 품었으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된단 말인가?

진짜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나는 이러한 중보기도자의 자세에서 얼마나 벗어난 기도를 그동안 해왔던가? ㅜ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나...

정말로 나의 유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중보기도가 아니라, 상대의 유익 즉 상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때론 그것이 나에게 아픔이 되고 어려움이 될지라도 말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Jesus Drives me crazy! / 레오나드 스위트(IVP)


제1부 성육신 제자도- 거기 있으라
1. '나는 별난 괴짜': 있으라  ---> 성육신
2. '결론적 내자리': 거기 ---> 개방과 폐쇄

제2부 관계 제자도- 모두와 함께(with all)
3. '여기는 정신병원': 함께 
4. '바보의 극치': 모두와

nuts 지혜: never understimate the spirit, now under the spirit
인간이 제정신을 잃을 때 천국은 의미를 얻는다. 필멸의 이성을 모두 등질 때 인간은 마침내 천상의 사고에 다다른다.
- 소설가 허먼 멜빌

예수님의 팔복은 이탈의 언어정도가 아니다.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이다.
들어가는 길은 나가는 것이다.
먼저 되는 길은 나중되는 것이다.
성공의 길은 섬기는 것이다.
얻는 길은 버리는 것이다.
강한 길은 약해지는 것이다.
안전한 길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길은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 자아와 사회와 가족에 대해 죽는 길이다.
당신의 강점을 알라, 왜? 그래야 그 강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곳은? 우리의 연약함 속이다.
가장 많이 얻고 싶은가? 가장 적은 곳으로 가라.
자유하고 싶은가? 통제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라.
큰 자가 되고 싶은가? 가장 작은자가 되라.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가? 자아를 잊어라.
명예를 원하는가? "겸손으로 자신을 높여라"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라.


제자란 예수님이 나와의 사랑에 미치셨기에 예수님과의 사랑에 미친 자다. 제자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 삶과의 사랑의 관계이다. 유다가 더 이상 제자가 아닌 것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가 아니라 그분께 사랑이 식었을 때였다. 우리 많은 이들처럼 유다는 예수님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NUTS 지혜의 거장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시고는 결딜 수 없었다. 상대가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말이다.


일단 예수님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제자도는 삶 전체의 영성이다. 그것은 삶 전체를 간섭하며 인생을 하나님 기준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리스테이데스는 황제 하드리안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과부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고아를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로부터 고아를 건져냅니다...정말 저들은 새 사람들입니다. 저들 가운데는 뭔가 신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렇다면 복음의 위대한 신비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져 있는' 것, 거의 온 세상이 그것을 하낱 열병으로 여겨 거부하고 조롱하고 뒤없는 것, 그것을 감히 시인하는 모든 자들에게 지금도 광신도와 미치광이 알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 찰스 웨슬리

 

상식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 비상식적인 사람은 집요하게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상식적인 사람에게 달려있다. - 조지 버나드 쇼, '인간과 초인'

 

하나님은 불가능하다(impossible)이라는 단어에 소유격 부호와 띄어쓰기를 더하셔서 나는 가능하다(I'm possible)로 바꾸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시작이다.

- 소설가 루이스 라무어

 

더 이상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 관리인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 라디오 해설가 폴 하비

 

어디에 처하든 네 전 존재가 거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거든 어떤 상황에서든 철저히 살아내라 - 짐 엘리어트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밝히기가 거의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의미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말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죄렌 키에르케고르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다...그리스도의 법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 오래오래 지속되는 사랑,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참는 사랑

- 짐을 져주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 나의 짐은 당신의 복이다.

- 패배한 활동, 마지막 기회, 승산 없는 시도에서도 열매를 맺는다.

- 싱긋 웃으며 모든 것을 참는다. 당신의 등이 벽에 부딪힐 때 당신의 얼굴은 십자가를 향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믿는 사랑

- 예수님이 인간 본성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믿는다.

- 하나님의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음'을 믿는다.

-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이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것을 믿는다.

- 사람들이 무지개를 부수려 열심히 앴는-증오, 폭탄, 핵의 위협을 비처럼 퍼붓는- 세상에서, 무지개를 만드는 일을 믿는다.

- 빈곤과 착취를 벗어날 만인의 권리를 믿는다.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

- 뇌염으로 뇌가 정지된 당신의 장애인 자녀가 '참된 생명을 취할' 스 있음을 바란다.

- 당신의 교회가 '검정 고시 출신자들과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함께 앉고 함께 놀고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을 바란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 무능력해져 요실금 현상을 보이는 배우자의 중풍을 불평 없이 은혜롭게 견딘다. "변화가 생길 때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Shakespear, sonnet 114)

- 견디고 또 견디며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세상에서 이상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 성경학자 윌터 브루그먼

 

인간에게는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감히 밧줄을 잘라 자유를 얻지 않는다.

-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

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들게 된 책...

그리 두껍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좀전에 다 읽어버렸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

과연 나는 세상이...다른 사람이 다 가는 길을 무의식중에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이야기할까봐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그분께 기도해야겠다.

내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나를 매시도록...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1. 결혼의 목표


(1) 영적연합

*관계의 두가지 필수요소

안전감- 사랑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이고 완전하게 사랑받고 있으며, 노력으로 얻을 수 없기에 결코 잃어지지도 않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중요감- 매우 중요한 일,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열매를 낳는 일, 타인에게 직접 간접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일, 그러면서도 나라는 사람에게 꼭 적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밧줄을 의지하여 안전이라는 위쪽에서 거절이라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믿음의 낙하를 감행하라

* 영적연합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부부 각인이 자신의 인격적인 필요들을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뢰하는 관계입니다.
2. 다음과 같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서로를 돌보아주는 관계입니다
 (1) 서로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줍니다.
 (2) 상대의 안전감과 중요감 경험에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충분히 인식합니다.

(2) 정신적 연합
영적 연합이라 할 때 그 말의 초점은 부부 각인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그 영적인 관계가 어떻게 한 인간의 안전감과 중요감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면 정신적 연합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서로간의 관계에 초점이 있습니다.

진리란 앎으로써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행됨으로써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연합을 이루는 열쇠는 근본적으로 배우자의 깊은 필요드을 채워주고자 하는 섬김의 목표를 정해두고 그 목표가 침해되지 않도록 계속 지켜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을, 한 사람의 다른 인격을 독특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 즉 배우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고 중요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더욱 온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안정감과 중요감을 채워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그러나 나의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몸으로 전달되는 그 사랑이 아내로 하여금 사랑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더 경험적으로 알아가게 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첨가해주는 것은 그녀가 안전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것이 주는 느낌입니다.


 감정처리- 안으로는 있는 그래로 인정하라. 밖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아 선택적으로 표현하라.

감정을 거부하는 법- 방어/변명, 사과, 공격, 충고, 경멸, 수정
감정을 수용하는 법- 반영, 명료화, 탐색, 부연

(3) 육체적 연합

자신의 필요들을 주님으로부터 채움받고 상대방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린 부부가 나누는 성적 쾌락입니다.

배우자에게 육체적인 영역에서 최대한의 성적 쾌락을 주겠다고 하는 섬김에의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성적 쾌락입니다.
감각적 흥분과 성적 만족의 경험을 서로에게 충분히 나누어주는 성적 쾌락입니다.
부부 각자에게 그들의 끊을 수 없는 끈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성적 쾌락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의 표현과 연장으로써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2. 결혼의 기초건설

(1) 은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우리가 바라는대로 변화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만 더 깊으신 그분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 사건들을 우리 인생에 허락하실거라고만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배우자를 내가 원하는 식으로 바꾸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뜻에서 인생의 사건들에 반응해가는 것입니다.

결혼의 연합을 이루어가려 함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어떤 실패나 낙심이나 비극도 우리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결혼을 치료하실 수 있고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을 빼앗아 가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치 않을 만큼 비참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건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할 때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힌다는 의식적인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라는 결혼의 첫번째 건축용 블록에 달려있습니다.

(2) 헌신

요점1: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장기적이고 흔들리지 않으며 기쁨에 찬 헌신에 없어서는 안되는 기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명백한 믿음입니다.

어떤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전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의 성품에 대한 나의 인식에 달려있었습니다.(의사가 자신의 상처를 꼬매려고 할 때 어머니의 미소를 보고 그 고통에 기꺼이 임했던 자신의 경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할수록 그분의 선하시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게 될수록 더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이 없는 순종은 기쁨을 빼앗아가는 부자연스러운 헌신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면서도 순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얄팍하고 죽은 학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점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순종은 의무에의 복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깊은 열망의 수행으로서 경험될 것입니다.

요점3: 결혼의 헌신을 지켜감에 있어 만일 기쁨이 없다면 그 잘못은 배우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우자가 얼마나 내 맘에 안들든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내 믿음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수용

요점1: 배우자를 수용한다는 것과 배우자에 대해 유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책임이고 후자는 축복입니다.

배우자의 행동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로 반응하는데 하나는 섬김이냐 조작이냐의 결정이고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또하나는 유쾌감 혹은 불쾌감이라는 감정입니다.(전적으로 사건의 성질에 달려있다.)

결국 수용이란 조작하기보다는 섬기겠다는 결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누군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전의 일로 인한  분노나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압박감 없이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요점2: 배우자를 수용한다는 것은 용서의 작업에 달려있으며, 용서의 작업은 다시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을 성경적인 컨텍스트에서 보려고 하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감정적인 반응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즉 유쾌감인지 불유쾌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건의 성질 자체이지만, 그 감정적인 반응의 구체적인 내용과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개개인의 평가입니다.

유쾌감 a. 필요와 연결시킴 -> 의존심(죄)
          b. 갈망과 연결시킴 -> 만족감(죄가 아님)

불쾌감 a. 필요와 연결시킴 -> 악독(죄)
          b. 갈망과 연결시킴 -> 실망(죄가 아님)

용서란 과오를 범한 자에게 그 과오의 대가인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위반할 수 있는 미묘한 방법들에 대한 깨어있는 민감성도 포함됩니다.

악독의 치유책은 재헌신의 노력이 아니라 사고의 교정입니다.

억압된 기억들에 대한 문제는 곧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 재평가하는 일입니다. 즉 사건을 유쾌하게 보진 않지만 나의 안전감이나 중요감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시각을 옳은 시각으로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용서의 작업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사건을 컨텍스트 안에서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부요함에 대해 묵상하믕로써, 또 우리가 최악의 거절을 당하고 가장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조차도 우리는 가치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담대히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신분에 걸맞는 양식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필요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배운바를 묵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이 다시 떠오를때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강력하게 반복 주장해야 합니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며 그분의 계획 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거슬리는 행동의 기억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필요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올바른 접근의 열쇠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마 18장 21-35절말씀...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용서를 깨닫고 인식할 때 자연적으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주제입니다.

3. 바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빌2:3, 4)...그녀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추기(자기를 돌보기)보다는 메리가 겪고 있을 어려움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기(상대를 돌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거슬리는 사건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강화해주는 성경적인 컨텍스트

거슬리는 사건  -> "내 필요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어."
                       ("이건 나에게 정말 상처야"의 반대)
-> "나는 엄청난 용서를 받았어"
   ("나는 더 좋은 대우를 받는게 마땅해")
-> "배우자의 상처는 무엇일까?"
  ("나는 안전감과 중요감을 채움받기 위해 배우자가 필요해")

========================================================


몇 개월간에 걸쳐 또래친구들과 함께 북쉐어링을 한 책...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을 하였고 또 우리도 나누면서 그렇게 느꼈다.
비록 구체적인 사례나 기술이 아닌 원리에 대한 책이라 아쉽긴했어도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관계에 있어서의 태도를 섬김으로 바꾸게 하였고...
또 그것이 나의 배우자를 위한 기도제목이게 했고...
서로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채워졌지만 그것을 서로에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 참 깊이 다가왔다...

모두들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그 상황 속에서 이렇게 실천할 수 있을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이런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천할만한 능력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믿고 기대한다.

'진리란 앎으로써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행됨으로써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

어제 문득 생각난건데...

바람 피는 주된 이유는 자신은 현재의 배우자로부터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울 수 없고 새로운 파트너로부터 채울 수 있다는 것인데..

자신의 필요는 하나님께 이미 채워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바람피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결혼건축가...

부제는 '바람피우지 못하게 하는 법' ㅋㅋㅋ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성령충만 그 아름다운 삶(찰스 스탠리, 두란노) 

성령 충만을 받는 것, 또는 성령에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는 것을 말한다. 
1. 온전히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일 
2.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일 
이 두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요 15장 포도나무비유 
우리들은 변화를 만들어 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단지 변화를 맺도록 창조되었을 뿐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하리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의 메카니즘에 있어 우리가 감당할 부분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등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 힘쓰기만 하면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처럼 맡기고!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2.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유일한 공급원이다. 
3. 그들은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찾는다. 
4. 그들은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일이 없다. 
5.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 그분께 감사하고 그 분을 칭송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존매카시. 노력이나 투쟁이 아닌 순종을 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 안에 썩은 것들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전지 전능한 구세주의 사랑 안에 거하라. 


성령 충만한 삶, 그것은 성령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항상 그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삶이다. 우리 주위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들을 멀리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그리고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라. 여러분 스스로는 열매를 만들어 내지 못하낟.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를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백기를 들고 항복할 때에만 성령이 온전히 여러분을 통제 할 수 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분별(브루스 월키, 나침반) 

제1부 점과 예감으로 하나님의 뜻 감잡기 
1.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특별한 '표적' 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전능하신 자가 보내는 영적 포장 꾸러미를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나는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신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내 동기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 말씀과 그 백성을 통하 
여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살핀다.) 

2. 이교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가? 
3.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가? 
야고보서에서 사용된 '지혜(약1:5)'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는 무관하다. 여기서의 지혜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약3:13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열매... 

2부 하나님의 뜻분별 

4. 성경을 읽으라 

기도하지 않고 읽으면 말짱 도루묵 

기억하고 묵상하라 

겸손히 순종하라 
만일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해주실지도 모른다. 발람의 예 


5.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라 
우리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패스트푸드를 먹으면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식간에' 성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우리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의 일치 
믿음으로 하되 켕기면 하지마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가 나 계신 거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좀 더 가까이 오도록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통하여 당신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시려는 것일 수도 있다. 

6. 현명한 조언을 구하라 

7.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라. 
우리는 섭리를 우연처럼 말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때때로 우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영의 신학. 1980년대 미국의 독특한 신학.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건강하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만일 정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사업을 번창케 하실 것이다. 만일 병들었다면 반드시 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좀더 증진해야 한다. 만일 불경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담녀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잠30장. 아굴. 돈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의미와 안전을 주는 부를 더 의지할 것이라고 고백. 가난이 결코 미덕은 아니다. 너무 가난해도 곤란해진다. 잠언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거론되는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신 복의 하나일 수 있다) 자신의 많은 돈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영적으로 위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그 복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니을 찬미하고 우리가 원래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거저 주어야 한다. 사실상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진정한 시금석은 우리의 가진 돈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데 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환경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라 
삼상24장.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환경. 

8. 사리를 분별하라 

9.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수 있음을 알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명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뜻을 행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의미론적으로만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비법 같은 것이 없다. 직업을 바꾸고 결혼을 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하는 문제에서 해답을 찾으려면 점점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공 보다는 거룩에 더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면 힘든 수고와 전적인 헌신과 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란 그런 것이다. 


끝머리에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결정하려 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당신의 결정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당신의 내면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실제로 성령은 또한 성경과 교회와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책 등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C.S. 루이스의 편지들 중에서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John piper, 생명의 말씀사) 

1장 기쁨이 왜 의무인가?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성 어거스틴 
만일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나는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받은 것이다. C. S. 루이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2장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즐거워할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릴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라는것. 
루이스, '영광의 무게' 
만일 가장 현대적인 지성에, 자신의 유익을 바라고 진정으로 그것을 향유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숨어있다면, 이 개념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로부터 스며들어온 것이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사실 상급에 대한 분명한 약속과 복음서에 약속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우리의 소원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가가실 것 같다.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빈민가에서 진흙 파이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무지한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기쁨이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술과 섹스와 야망에 팔려 시간을 낭비하는 냉담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즐거워한다. 
루이스, '시편명상'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든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찬양이든, 찬양에 관한 가장 명백한 진실은 이상하게도 나를 피해 갔다. 나는 모든 즐거움이 자연스러게 찬양으로 넘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연인들은 애인을 칭송하고, 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을 칭송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골길을 칭송한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하는 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정작 가장 귀한 분에 대해서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기쁘게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 단순히 기쁨의 표현만이 아니라 기쁨의 완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갈망하는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3장 애정은 선택이 아니다. 
감정은 의무의 일부이며 명령.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명령을듣고 성 어거스틴처럼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되, 주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4장 기쁨의 추구는 교만과 자기연민을 막는다. 
자랑은 성공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일을 성취하였으니 칭찬받을 만하다." 
자기 연민은 고난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니 칭찬을 받을 만하다." 
내가 기쁨을 위해 선한 일을 한다면, 자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집니다. 

5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추구하라. 
기쁨의 추구는 모든 선행의 근본동기 입니다. 만일 당신의 목적이 충만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본질(고후8:1-4)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마케도니아 교인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그들의 기쁨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후히 채워주게 했습니다. 
넷째,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소유를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내어줄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기뻐함이 넘쳐 흐르고 확장되는 것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의 만족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도 요동하지 않는 신비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이 무익하고 타락한 세대에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만족입니다. 

6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예배 
공적 예배에서 
첫째, 무력한 예배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들이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 나아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얻기 위해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이 설교자의 일읿니다. 
둘째,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에 대한 만족으로 볼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주시는 것 대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진다면 그 결과 중심이 되는 것은 미묘하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것의 질이 됩니다. 
셋째, 기독교 희락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목적인 예배의 본질에 주의하게 함으로써 예배의 우선순위를 보호합니다.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라면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7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결혼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배우자의 즐거움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거룩한 기쁨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8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돈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딤전4:7-10) 
첫째,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절)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간단한 생활 필수품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때,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줄 별도의 돈이나 물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8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르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13:5-6) 

셋째, 그러한 추구는 결국 인생의 파멸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9-10) 

삶은 전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왕의 자녀로서" 호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쟁을 하러 나선 마당에 말입니다. 

9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선교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할때 더 좋은 것을 위해 덜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참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작은 쾌락과 안락을 부인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하십니다.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짐 엘리엇) 


맺음말 
마지막소명-우리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과 위험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스도는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에드워즈, "자기부인은 슬픔의 근원과 기초를 파괴한다." 
그분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누리는 기쁨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십니다. 고난을 통해 기쁨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의 고귀함, 즉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그분의 무한한 가치를 찬양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신학으로의 초대(IVP, 스탠리 그렌츠 & 로저 올슨) 

1.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다. 

2. 모든 신학이 같은 것은 아니다. 
민속신학 평신도신학 목회신학 전문신학 학술신학 

3. 신학의 정의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소도의 제자로서 공유하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행해진다. 

4. 신학에 대한 변호 

기쁨을 빼앗는다는 반대, 
신학이 믿음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기독교 신념과 교훈이 영적으로 건강에 좋은지를 알아보기 위해 검사하고 시험하는 것이다(에밀 브루너는 복음을 시장에 있는 신선한 농산물로 보고 그것이 안전하고 건강에 좋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해야 하는데 이것이 신학이 하는 일이라고 비유를 들었다). 

분열시킨다는 고소 
신학의 주된 목적은 분리시키거나 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보호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마틴루터는 "가능한 한 화평을, 그러나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진리를!" 이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고소 
교착상태에 대한 고소 

5. 신학의 과제와 전통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은 도그마(복음의 본질적인 것), 교리(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신념), 의견이라는 세가지 중요한 범주로 발전되어 왔다. 

신학의 비판적 과제 
기독교 신념들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 
타당한 기독교 신념들을 도그마, 교리, 의견으로 분류하는 일 

신학의 건설적 과제 
다양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합되 모델로 구축하는 일 
이 모델을 현대 문화에 적실성 있게 관련시키는 일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한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형제됨' 같은 소수의 중요한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그 결과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없는 인간을 심판이 배제된 나라로 이끈 것"이 된다고 비난했다. 

6. 신학의 도구 

성경 메세지 
현대를 위한 성경의 중심 메세지는 무엇인가? 

교회의 신학적 유산 
과거의 신앙고백과 신학에서 보여진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의 중심은 무엇인가? 

현대 문명의 사고형태 
오늘날 어떤 영적인 욕구가 표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7. 상황 속에서 건설하는 신학 
신학의 건설적 과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상황 속에서 하나님, 우리 자신, 세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일되고 일관성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문화에서 벗어난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황화된 신학을 구축해야만 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좋은 상황화 신학자인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성경과 문화에 치우칠때의 약점. 
세요소(성경에 대한 이해, 유산에 대한 인식, 문화적 상황에 대한 해석)가 창조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함으로써 신학을 상황화 시킬수 있다. 
신학은 통합적인 주제에 의하여 조직적이 된다. 통합적인 주제는 그것에 비추어서 신학자가 다른 모든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상대적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주제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다. 
저자는 책에서 '공동체'를 통합적인 주제로 예시했다. 


8. 신학을 삶에 적용함 
신학의 최종적인 목적은 삶에 있다. 신학적 과제는 기능적 도구(성경의 메세지, 신학적 유산, 현대문화)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관점에서 모든 실재를 고찰하는 해석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다. 
신학은 지혜를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신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학자는 주일 아침에 암송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월요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한다. 

신앙은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이 응답은 지적인 방향 전환을 수반한다. 신앙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신학적 시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문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첫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문화의 목소리를 제공하고, 우리 시대의 사조를 표현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숨겨진 내적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다양한 현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화, 음악,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예술, 신문, 잡지와 같은 많은 창구들이 있다. 
둘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문화적 현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일을 수반한다. 우리는 문화적 현상에서 작용하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신앙 체계를 분석할 목표를 가지고 올바른 질문을 통하여 이 일을 수행한다. 
셋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문화를 평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일을 수반한다. 문화에 영향을 주는 신학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와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 

신학적인 시각으로 삶을 조망함 
첫째,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체계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신학은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있음을 상키시켜 준다. 
둘째, 신학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소명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획을 진척시키는 제자로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신학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온전함은 '자신이 진술한 믿음과 일치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온전한 사람은 값비싼 개인적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한다. 온전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준다. 

9. 신학으로의 초대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어느 수준에서든지 기독교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현재 이애하는 신학에 불만족해야 한다. 
셋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위험과 상급 
첫번째 상급은 풍성하고 향상된 기독교적 삶이고 둘째는 현대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데서 오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 것고 셋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명백한 영적 고갈을 경험하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신앙 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신학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중의 하나가 대체의 위험으로 즉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을 지성주의로 대체하는 것인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규적인 예배, 성경공부, 기도를 통하여 지역 교회의 경건한 그리스도인과 강한 결속을 유지하고 또한 개인기도와 경건 생활이 어려운 신학적 과제를 놓고 고심하는 지적능력과 함께 자랄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다. 둘째는 소속된 교회를 잠정적으로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오해를 받는 것이다. 

성찰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성경연구 
역사신학 
문화적 상황 연구 

비판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하기 
기독교 신념들에 관한 당신의 생각-단순한 사실들이 아니라-을 노트에 적어라. 믿음의 어떤 내용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을때 어떤것을 버리거나 철저하게 바꿀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 
어떤 통합 주제가 나의 기독교 믿음의 내용들에 일관성을 주는가? 
신학적 성찰을 혼자서 하지말고 다른 그리스도인과 지도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