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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8.06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2. 2011.08.06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쉬는 소망
  3. 2011.08.06 이야기식 설교 구성
  4. 2011.08.06 영신수련
  5. 2011.08.06 설교/ Fred Craddock
  6. 2011.08.06 영적발돋움
  7. 2011.08.06 나와 너
  8. 2011.08.06 끝나지 않은 여행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Under the Unpredictable Plant

좋은씨앗/ 유진 피터슨

 

 신선한 자극을 추구하다보면 발전이나 덕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무익하고 파괴적인 생각은 없다. 목회자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성숙이 외적인 자극, 즉 '좋은 생각', 뛰어난 감동, 고양된 영향력이나 개념 등에 의존한다는 어떤 주장도 거부하는 삶이다.

 오히려 목회자는 내면의 두려움 또는 유혹과 환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닌 어두움과 함께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원은 우리 마음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신선한 직무와 새로운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지루함, 성적 좌절, 불안, 만족스럽지 못한 욕망에서 탈피하고자 애쓰는 것은  자기 마음의 모든 영역을 은혜로부터 차단시키는 행위이다.

 교회 생활에서 전적으로 '세속적인' 경험- 하찮은 직무들로 구성된 제한된 일상, 단조로움과 외로움- 과 굴욕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겪어볼 길은 전혀 없다. 교회 사역은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목회자는 세상이 허황된 신앙의 정체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교회 사역에 나선다. 목회자는 소명을 받은 자로서 극적이며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열망을 품어야 하고, 지성에 의해 강회된 자아의 영토 확장주의 속에 있는 환상의 뿌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성 베네틱트의 규율'이라는 책이 내용 중 저자가 수도원과 수도사를 교회와 목회자로 바꾸어서 인용)

 

 교회의 미화는 일종의 음란한 포르노그라피와 같다. 교회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이는 여러교회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이처럼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은 개인적인 또는 인격적인 관계들이 빠져 있다. 그 사진들은 지배, 만족, 단순하고 비인격적인 영성 등에 대한 열망을 부러일으킨다.

 많은 목회자들이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모습은 그런 음란한 사진- 매력적인 교인들로 넘쳐나는 높은 뾰족탑의 교회 모습-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에 대한 거부는 좀더 교묘하게 진행되는데, 지금과 다른 구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목회자들이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을 시작하려는 막연한 공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고상한 동기를 품은 사람들만을 위한 계획적인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신학교나 대학에세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도피하려는 꿈을 꾸지는 않는가? 죄와 신비로운 은혜의 복잡성이 더이상 소명과 관련된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소명적인 관심이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나 전에 비해 훨씬 다루기 쉬운 무지와 지식의 범주로 대치된 학교로 옮기는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모든 공상은 머지 않아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앗아가고 목회자들을 무기력하고 초조한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처럼 순종하는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의 만족감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목회 사역을 수행했는데, 사람들은 점점 내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 시간에 내가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선포한 설교 속에서 다른 것을 들었고, 나는 그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반응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위해 세워놓은 계획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그 계획이 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잘 진행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서 나의 명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고난, 극도의 고난, 풍랑과 같은 고난은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내 본질적인 문제에 눈뜨게 하면서 우리 삶의 기본적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요나에게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실체는 기도하지 않은 것이었고,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더욱 원대한 도전' 또는 '더 광대한 기회의 땅'과 같은 말을 하면서 현재의 위치에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는 태도는 선지자적인 열정이나 제사장적인 헌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태도는 영적인 죄악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 죄악은 영지주의 바이러스에 의해 생겨난다.

 영지주의는 고대 시대에 생겨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장소와 물질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그럴듯한 개념들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더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용납하지 못하고, 일상 생활 속의 하찮은 일들이나 무질서로 인해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좋은 감정들로 복음을 다시 조립한다.

 또한 영지주의는 우둔한 사람들과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람을 상당히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른다. 소위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을 선호하고, 전문가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와 반대로, 복음은 지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정 지역에 적용되고, 대단한 열정으로 육신과 물질과 특정 장소 속으로 몰입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모든 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인다. 목회자의 지속적인 직무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지역적인 일들에 대한 특화된 사랑, 지역적인 지식과 지역적인 헌신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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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쉬는 소망 

레슬리 뉴비긴 
서로 사랑


예배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해서 12시에 마친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예배에 잠시 참여할 뿐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을 때면 가끔 화가 난다. 내가 해줄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교회의 미래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며, 교회의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낙관과 비관의 문제가 아니라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인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계획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도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선하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 번째로 판단할 이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초점은 나, 나의 구원, 상대방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야 한다. 다른 이들의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네 번재로 우리에게는 관중석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타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철학이나 역사적 근거에 의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을 옹호하려 든다면 결국 과거에 천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안내하고 하나님께 행하신 일에 대해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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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The Homiletic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

유진 L. 로우리

 

설교가 일어나기 시작하도록 하는 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생각을 필요성과 주제 사이의 교차지점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나의 생각 조각들을 적어서 책상 위에 두편으로 갈라 놓는 것이다- 즉 하나는 문제가 적힌 노트더미와 다른 하나는 주제나 혹은 해답 노트더미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관계 형태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쪽의 생각더미에서 나온 생각들을 다른 한쪽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설교란 언제나 가려움에서 지작해서 긁어 주는 쪽으로 옮겨 가는 데 이것은 달리 옮기면 인간의 곤경에서 복음에서 나오는 해결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1) 평형을 뒤집어라. Ooops!

2) 모순을 분석하라. Ugh!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Aha!

4) 복음을 경험하라. Whee!

5) 결과를 예견하라. Yeah!

 

불완전하다는 사실,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청중이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설교를 듣는 사람ㄷ르이 가지고 있는 평형 깨뜨리기는 설교 시작의 열쇠가 된다.

 

적절한 분석을 하려면 행동의 '단순성'을 넘어서서 인과관계의 복잡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나의 행동에 대해서 더 관대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가 불공정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내적 복잡성보다 내 자신의 내적 복잡성에 더 많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자와 같이 공통으로 내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세계를 '우리'와 '그들'- 설교작업에서 굉장히 편만해 있는 경향인데-로 쪼개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것은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도 그러한 상황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믕ㄹ 반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탐구란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결실이 없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아정체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우리 자신을 찾으려고 희망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결과는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최종적으로 발견되어진다! 자신의 정체성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물이다.

 

설교학적인 '아하'를 야기시키는 역전의 원리는 단지 문학의 도구나 멋진 전략 이상의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것의 뿌리는 복음 그 자체에 있다고 믿는다.

 복음과 세상의 지혜 사이에는 그 자체가 중요한 역전의 구성요소가 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다. 역사의 주님께서는 세상이 yes라고 하는 것에 확실하게 no라고 선포하시고, 세상이 no라고 하는 것에 울려 퍼지도록 yes라고 선포하신 길고 긴 기록을 가지고 계신다. 사고의 새로운 해석학적인 학풍의 본질적인 요점은 사실 뒤집음으로써의 복음(gospel of inversion)의 진리와 일치하기 위해서 성서적인 해석을 전도(뒤바꾸는)하는 것이다. 크래닥은 실제로 그런 과점을 요약하면서 '근본적인 역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에 명쾌하지 않아서 이해의 빛을 도입해야만 하는 구어체 문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분명한 우리 자신의 상황에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고 희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석하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자유주의 개신교 강단의 근본적인 실수는 복음은 이간의 경험과 더불어 지속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경험을 뒤집어 놓은 후에도 인간 경험과 더불어 지속되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르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성서에 다가가서,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 대신에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만 발견하고 만다고 언급하고 있다...

 두 종류의 설교가드이 있다. 하나는 무언가 말 할 것이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말할 거리가 없는 사람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은 바로 전자의 경우이고, 20세기 자유주의 설교가들은 후자에 속한다..

 나는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로서 역전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식 구성으로서의 설교 관점이 제3의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 계획하고 있는 설교는 인간의 곤경의 순간에 회중과 접촉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훌륭한 자유주의 전통형석을 갖추어 두 번째 단계(분석의 단계)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인간의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복음의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을 향한 인간의 그러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냄으로써, 이것은 전형적으로 일종의 역전을 포함하고 있는데, 새로운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상황, 즉 연역적으로 정돈된 훌륭한 바르트적 형식으로 준비시켜 준다.

 역전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계획에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적어도 네 가지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 1) 원인-결과의 역전 2) 변화된 원인의 역전 3) 변화된 가정의 역전 4) 변화된 논리의 역전 등이다.

 

나는 여기서 복음은 우리의 삶의 뒤편에서 선한 삶을 살도록 밀어부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불가피성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성도들에게 놓여진 매주일의 '죄의식의 여정'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인간 죄의식의 끔찍함은 강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알려 줌으로써 새로운 삶으로의 구속을 가능하게 한다.

 

성서적인 이야기식 설교

 

1)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라.

2) 행간을 읽어라.

3)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4)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를 도입하라.

5) 행동에서 동기로 옮겨 가라.

6) 사실보다 그 이전의 역동성으로 나아가라.

7) 감각을 총동원하라.

8) 늘 해오던 동일화 작업을 전환하라.

9)능동태 어법을 사용하라.

10) 1인칭이나 2인칭 단수 형태로 이야기를 몰고 가라.

11) 주관적인 데서 객관적인 데로,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옮겨 가라- 그리고 다시 반대로 옮겨 가라.

12) 단계를 정하라(미리 암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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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사람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경외하고 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다. 그 외에 이 땅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피조물이 우리의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 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즉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더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유일한 욕망과 선택은 우리가 조성된 목적에로 보다 잘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여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나의 전 의지와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당신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의 의행대로 처분하옵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옵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겠나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사실상, 우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침묵을 배경 삼아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우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침묵은 신비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개성의 한 명으로서의 침묵이자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성격 규정의 일부로서의 침묵이었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삶이 침묵에서 잉태되어 침묵으로 사라져 가기 때문에 매 순간을 말로 채우면서 침묵을 연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우친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더 편안했으며 한 번 말할 때는 그 내용이 명확하고 분명해서 외부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상황에 좌우되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교유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확언하는 침묵은 시원적인 실체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시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설교에 대해서도 얼마나 적절한 말인가! 말씀으로 침묵을 깨시는 하나님- 이것은 계시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설교에 대해서도 얼마나 적절한 묘사인가! 설교란 바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침묵이라고 하는 투명한 유리를 향해 내어 던지는 말씀이 아닌가!

 

여기서 제시되는 설교 신학의 입장은, 속삭임인 동시에 외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신약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삭임으로 듣고 말할 때는 외침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시가 단순하거나 명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선포해야 할 믿음의 말씀이 귀에서는 속삭임이지만, 입에서는 외침이 되어야 한다. "외침"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말씀을 전달하는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선포하는 내용이 대중적인 선포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를 지붕 위에서 외치는 외침으로 보는 비유

1. 우리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중요성과 절박성

2. 이 비유의 공개적인 성격은 때때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파적이거나 배타적인 편협한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외침이라는 말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외침은 그 메시지의 내용인 동시에 그 메시지를 전달케 만드는 원동력인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4. 외치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설교는 예수가 살던 시대로 부터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의 경종으로서 기능을 한다.

 

 속삭임을 외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하는 한편, 씨뿌리는 자가 씨앗 속에는 그 자체의 미래가 들어있고 씨앗 스스로 잘 성장해 나갈 것을 믿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들어온 내용을 선포하되 전승되어 온 전통에 충실하는 한편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구성하도록 조심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속삭임을 외친다는 것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그 메시지에 대하여 갖게 마련인 거부감을 존중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출석이 시원치 않다든지, 사소하고 주변적인 문제들에 대해여 비판한다든지, 주의가 산만하다든지...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Reaching out/ Henri J. M. Nouwen(두란노)

1부 자아를 향한 발돋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2부 동료를 향한 발돋움: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3부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 환상에서 기도로

진정한 영적 안내자는 무엇을 하고 누구를 찾아갈지를 말해 주는 대신, 우리에게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권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고독이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소양 혹은 태도이다...외로운 사람에게는 내면의 질문이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대답을 원하며 그 대답을 지금 당장 원합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는 우리 내면의 자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마음의 고독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외로움에 쫓겨서 살 때는 자신의 갈급한 필요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만을 고르려고 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민감성을 계발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시작입니다.

자네에게 정말로 바라고 싶은 바는...자네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들 자체를 사랑하도록 하라는 것일세...자네가 그것들을 삶으로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구하지 말게. 중요한 점은 모든 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네. 지금은 그 질문들을 삶으로 나타내게. 아마도 어느 정도의 기간을 살아가노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네는 점차 그 대답에 이르게 될 걸세...무슨 일이 일어나든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만일 그것이 자네 자신의 뜻과 자네 내면의 존재의 어떤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꺼려하지 말게나.(릴케, 'Letters to A Young Poet')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바뀌는 움직임은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움직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쟁점이 되는 문제에 더 깊이 참여하는 쪽으로의 움직임입니다.

환대는 우선적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환대는 주인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라는 미묘한 권유가 아니라 손님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리지 않은 채로 놔 두지 못하고 또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놔 두지 못한 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손님이라는 의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의식입니다.

가르침은 기독교의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물음들이 의식에까지 나올 수 있고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두려움이 없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행동을 뜻합니다.

선생의 임무 가운데 두 가지 측면: 드러내 주는 것과 긍정하는 것
환대해주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학생들) 자신도 베풀 것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주어야 합니다.
선하고 가치있는 것, 또는 새롱누 기여를 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은 긍정적으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의사나 사회 복지사, 상담가, 목사와 같이 다른 이들을 도와 주는 직업을 통해서 동료 인간들에게 발돋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되새겨야 할 점은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치유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낯선 이가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에 민감해지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게끔 해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를 베푸는 이는 배우고자 하는 학생이 되며, 환자는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이 됩니다. 선생이 자기 생각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준비하고 정리하는 동안 학습 내용을 익히듯이 환자도 자기 얘기를 듣고자 하는 치유자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의 얘기를 익힙니다.

수용과 대립은 그리스도인의 전도의 뗄 수 없는 두 면입니다. 이 두면은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됩니다.

정신의 가난. 확실한 무지(docta ignorantia). 배움을 통해 터득한 사람은 다른 이들이 하는 말과 그 상대방을 정말로 주의 깊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생각의 가난입니다. 

마음의 가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체험을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도란 오로지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역설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경험과는 상당히 달라서 우리는 그것을 부재라고 여기기가 아주 쉽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부재를 강하게 느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십자가 위에서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예수님의 외침)

무엇보다도 영적인 삶은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삶입니다. 즉 수많은 좌절의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생각을 깨달아 가는 고통스러운 시간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로 오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최초의 표지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기대 속에서의 기다림을 통해서 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는 하나님의 부재를 깊이 의식하는 것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팔을 뻗을 수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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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집에 내려가서 읽었던 책 중 하나...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책이었으나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도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서 생각해 온 주제이었으나 원조는 바로 이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도전하시는 부분...
또 중국 땅에서도 계속 내가 훈련받게 될 부분...
중국으로 out-reach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reach-out하라고 격려하신다.
올 한해 새로운 영적발돋움을 경험하길 기대해본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Ich und Du/ Martin Buber(대한기독교서회)


사람에게 세계는 두 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가짐은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가 둘임과 발맞추어 두 겹이다.

근원어는 홀로 있는 낱말이 아니요 어울려 있는 낱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복합어 '나-너'(Ich-Du)이다.
근원어의 또 하나는 복합어 '나-그것'(Ich-Es)이다. 

근원어 '나-너'는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만 이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근원어 '나-그것'은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 이를 말할 수 없다.
세계는 이를 경험의 대상으로 볼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근원어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한다.

'나'와 '너'의 만남은 은총에 의한 것이지, 결코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하여 근원어를 건네는 것은 '나'의 전 존재를 건 행위- 즉 나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너'는 '나'를 만난다. 그러나 '나'의 쪽에서 보면 이는 '내'가 '너'에게로 다가가 '너'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남"이란 결국 "택하는 것"인 동시에 "택함을 입는 것"이요, "능동"인 동시에 "피동"인 것이다. 이는 마치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 무언가를 행위하는 경우와도 같은 것이니, 실로 그 때에는 온갖 부분적 행위는 정지하고 그와 더불어 저들의 특수한 한계가 자아내는 행위 감각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적인 것"은 "피동적인 것"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무르녹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도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 됨에 따라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Begegnung)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인 독존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한데 겹쳐져 있다.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에 들어간 뒤에는 사람은 고립된 어떠한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사람이 되었거나 물건이 되었거나, 하늘이거나 땅이거나, 그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은 거꾸로 사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 안에 안겨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영원자 너'와 더불어 순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너' 이외의 모든 것을 저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 안에서, 그리고 '너'를 통하여서, 모든 것을 내다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계를 그의 참 기초 위에 재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로부터 얼굴을 돌이킨다거나 또는 이 세계만을 주시한다거나 해서는 하나님에게 다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이 세계의 의미를 읽어 낼 때에는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현전에서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버리거나 떼어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들을 온통 '너' 안에 안아들일 때에는- 즉 이 세계의 가치와 그 진리를 인정하고 이를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들일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안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타자"임에는 틀립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완전한 자기 동일자"요 또한 "완전한 현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땅 위에 나타나서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무서운 신비"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자명의 신비요, 나의 '나'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종교적 상황-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현존한다는 것- 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이율배반의 비용해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정률만을 인정하고 그 반률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이 상황의 의미가 손상을 입는다. 만일 우리가 정률과 반률로부터 하나의 종합을 빚어 보려 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가 파괴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릴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의 알력을 우리들의 현실 생활 밖의 사건에로 도입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는 말살당하게 된다. 진실로 인간 존재의 참 의미란, 우리가 어엿이 '산다'고 하는 것- 아무런 예견도 예고도 예정도 없이 그저 생존의 이율배반을 실컷 어깨에 짊어지고 곧장, 끊임없이, 새롭게 살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다만 우리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오직 그 두 개의 명제를 한 몸에 짊어지고 묵묵히 이를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로 이를 살아 내는 것 밖에 그 둘의 통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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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용되어진 책...

조금 이해가 되고 좋다고 생각하는 몇 부분을 적어놓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많은 내용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앞으로 반복해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될 것이다.

소유가 아닌 관계...만남...인격성...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The Unending Journey/ M. Scott Peck(열음사)


Firtst Step_ 성장
Next Step_ 너 자신을 알라
Ultimate Step_ 신을 찾아가는 여러 갈래의 길

노화란 생물학적인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화는 성장을 드러내놓고 거부하는 것이며, 정신적-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인생의 패턴을 받다들인다면 누구나 피해갈 수 있는 심리적인 혼란일 수 있다...사람들은 그저 진정으로 성숙에 관해서 이야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일단,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신성을 가르치려고 계획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약해지지 않는다.

구원이란 말은 치료와 동의어이다...염증이나 감염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서 피부에 바르는 연고라는 말과 유래가 같다. 건강, 완전함, 신성일나 말들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대부분의 이단은 역설의 한쪽 측면만을 부각할 때 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 사람들이 믿고 싶든 믿고 싶지 않든- 에 남게 되는 것은 바로 역설이다. 즉 예수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면서 신이다. 그렇지만 50대 50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교리에서 말하듯이, '전적으로 인간이면서 전적으로 신'이었다...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역설이 남아있다. 즉 신은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도 존재하고 동시에 초월적이고 엄청난 타자로서 우리 바깥에도 존재한다...다시한번 우리는 구원일나 어떠한 수학적 공식으로도 얻지 못하는- 앞으로도 얻지 못할- 은총과 선행이 역설적으로 뒤섞여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심판대 위에 세우는 과정은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대부분의 살마들은 값싼 용서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유죄 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우리가 용서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왜냐면 치료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통 없이 그 일을 상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일과 친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알코올중독자 협회(AA)를 종교를 갖게하는 좋은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내게 문제가 있고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좋아질 것이다."

 

중독자들을 치료할 때, 장애가 가지고 있는 퇴행적인 측면이 아니라 발전적인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즉, 영혼과 신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완전성이라는 말은 통합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의미는 구획하다의 반대말로 전체를 달성한다는 뜻이다. 구획하는 일은 쉽다. 완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으면 전체를 이룰 수 없다. 완전함에 이르려면 인생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힘과 사상 그리고 시련에 전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계획해 놓으면 뜻밖에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독교의 죄는 교리 때문이 아니고, 행동과 신학을 통합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G. K. 체스터튼이 언급한대로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혁이 혁명보다 훨씬 더 지난하다. 어려움을 견디면서 개혁을 이루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영적인 존재이며,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신의학은 크게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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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 좋아서 그것의 속편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은 역시 성장과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것에 추가해서 용서, 죽음, 신비로움 등을 말하고 있다.

 

영성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이며 통합이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관은 평가하기 참 어렵다.

어떤 부분에서는 보통의 기독교인인 것 같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다원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

그는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

이 전편과 더불어 이 책은 앞으로 계속 읽으며 참고해야 할 책인 것 같다.

스캇 펙으로부터 앞으로 좋은 도움을 많이 받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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