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_구약/사무엘하'에 해당되는 글 35건

  1. 2016.08.14 삼하17:24-18:8
  2. 2016.08.13 삼하17:15-23
  3. 2016.08.12 삼하17:1-14
  4. 2016.08.11 삼하16:15-23
  5. 2016.08.07 삼하15:1-12
  6. 2016.08.04 삼하13:23-39
  7. 2016.08.03 삼하13:15-22
  8. 2016.08.02 삼하13:1-14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

너그러이 대우하라(5절)

다윗은 압살롬과 대치 중에 아마사로 요압을 대신하여 지휘관으로 삼으며, 백성들을 전쟁에 합당한 조직으로 변경합니다. 이 중에 암몬 족속의 소비와 마길과 바르실래로부터 공궤를 받습니다. 전쟁을 시작하며 앞장서려는 다윗을 백성들은 만류하여 뒤에 남게하는 가운데, 다윗은 부하들에게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우하기를 부탁합니다. 이후 다윗 군대는 큰 승리를 거둡니다.

먼저 암몬의 세 사람의 마음이 참 귀합니다. 백성들이 시장하고 곤하고 목마르겠다는 생각을 하고 많은 음식들을 가져와 다윗과 백성들을 먹입니다. 아들로부터 반역을 당해 쫓겨나는 다윗과 그 백성들로부터 무엇을 기대할 수 있었을까요? 그렇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옛 정을 생각했거나 아니면 현재 처한 상황을 딱하게 여겨 이렇게 행동했다고 보입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주변을 의식하지 않고,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을 돕는 마음이 참 귀합니다. 그들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삶이 아름답습니다. 곤하고 목마른 자들을 향한 마음을 잊지 않고, 또 그 마음으로 내 것을 나눌 수 있기를 원합니다.

다윗은 전쟁에서 앞장 서려고 하나, 백성들은 적군이 왕의 목숨을 노리고 있음을 알고 뒤에 남기를 간청합니다. 여기에 어떤 백성들의 사기를 고취시키려는 의도가 있었는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왕은 백성을 생각하고, 백성은 왕을 위하는 이 공동체가 참 보기 흐뭇합니다. 서로 자기만 살겠다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한 공동체를 견고히 세워갈 수 있음을 확인합니다.

다윗은 전투를 시작하려는 부하들에게 아들 압살롬을 너그럽게 대해달라고 부탁합니다. 비록 자신에게 반역한 아들이지만, 그의 생명을 살려달라는 의도가 보입니다.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살인마라도 내 자식은 그럴리 없다는 부모의 마음입니다. 진정 사랑했다면 진즉 잘못에 대한 적절한 징계를 했어야 하지 않았나는 아쉬움도 있지만, 아들을 향한 아버지 다윗의 애틋한 사랑을 느낍니다. 남들 다 비난해도, 그 곁에 서주는 마음입니다.

주리고 목마른 자를 향한 마음, 서로를 아끼는 마음, 한 사람 곁에 서는 마음. 반역과 왕위회복을 놓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면전을 앞둔 상황에서도, 생명을 위하는 마음들이 빛을 발합니다. 오늘도 생명을 무시하는 전쟁과 같은 현실 속에서 생명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고 살아가기 원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살리는 사람

몰사할까 하노라 하니라(16절), 스스로 목매어 죽으매(23절)

후세는 급히 다윗에게 아히도벨의 계략을 전하면서, 빨리 요단을 건너가게 합니다. 자기 계략이 무산된 것을 안 아히도벨은 고향에 돌아가 집안을 정리하고 목숨을 끊습니다. 

두 사람이 계속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최고의 지략가이자 새롭게 떠오르는 젊은 지도자인 압살롬을 섬기는 아히도벨. 지략에 있어서 아히도벨보다는 못하지만 다윗을 신실하게 섬기는 후새. 팽팽했던 대결은 이제 후새 쪽으로 급격하게 기울어집니다.

심장 쫄깃해지는 위기를 넘고 후새는 다윗의 살 길을 내줍니다. 그러고보면 종종 다윗은 이렇게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살 길을 얻습니다. 사울왕의 살해의 위협에 미갈과 요나단의 도움을 받고, 분노에 차 나발을 죽이려고 달려갈 때 아비가일의 도움을 받습니다. 간음과 살인의 죄를 범한 뒤에도 나단의 도움을 받았다고 볼 수 있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도움과 인도하심을 우리 주변의 신실한 사람들을 통해서 받는 것 같습니다. 믿음의 사람들 속에 있는 것이 살 길임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이들의 살 길을 내어주는 그런 존재이고 싶습니다.

자신의 계략이 실패한 것을 알고 고향으로 와서 모든 것을 정리하고 목숨을 끊은 아히도벨. 너무 지혜롭습니다. 앞으로 사태가 어떻게 되어갈지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행한 일들입니다. 반역에 실패하게 될 압살롬을 떠나, 다시 왕위로 돌아올 다윗에게 무릎꿇는 것은 생각하기도 싫을 정도로 굳은 절개가 엿보입니다. 그 탁월한 지혜와 절개가 반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섬기는데 쓰였으면 하는 안타까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과거의 잘못과 죄로 인한 절망의 자리에서라도 겸손히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는 다윗의 모습이 더 부각됩니다. 자신 자신을 너무 신뢰한 나머지 실패의 결과까지 책임지려는 인간적 고결함보다는, 오점투성이 자신의 존재를 겸허히 하나님 앞에 인정하고 회복을 구하는 것이 낫겠다 싶습니다.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나의 어떠함을 알기에 절망의 자리에서라도 회복을 구하기 원합니다. 예수의 생명 안에 늘 거하여 그것을 흘러넘치길 원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하나님 나라의 충신이 되자

좋은 계략을 물리치라고(14절)

오늘 본문은 아히도벨과 후새의 전략 대결이다. 먼저 아히도벨은 도망치는 다윗을 바로 쫓아가서 다윗만 죽이는 전략을 말한다. 이에비해 후새는 시간을 기다려 온 백성을 모아 전면전을 치르자고 제안하였고, 압살롬은 결국 이 계략을 채택한다. 다윗에게 충분히 도망갈 시간을 주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일이 이렇게 진행된 것은 하나님께서 압살롬을 어리석게 하여 좋은 계략을 물리치게 하심이었다.

 아히도벨의 전략은 탁월하고 좋은 전략이었다. 아마 후에 이 전략을 다윗이 들었더라면 간담이 서늘했을 것이다. 그대로 시행되었더라면 다윗은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고, 압살롬은 반역에 성공하여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좋은 계략이 채택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천천히 시간을 두고 전면전을 해서 완전히 적을 전멸시키자는 후새의 나쁜 전략이 채택되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압살롬은 좋은 계략을 목전에 두고, 나쁜 계략을 채택하여 결국 반역을 완성시키지 못한다.

김회권은 하나님께서 분별력을 박탈하셨기 때문에 압살롬은 좋은 모략과 나쁜 모략을 분간할 수 없었다고 하면서, 한 나라, 왕조, 회사의 명운은 나쁜 모략을 거절하고 좋은 모략을 분별하여 채택하는 예지에 달려있고 하였다. 그러면서 복 있는 사람이 악인의 꾀, 곧 모략을 따르지 않을 수 있기에, 하나님의 율법 토라를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사람만이 악한 도모를 쉽게 배척할 분별력을 갖는다 말한다.

요즘 교회적으로, 나라적으로 한 가지 사안을 두고도 다른 의견으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여러가지 해법을 제시하고 있다. 과연 어떤 것이 진실이며, 올바른 대안인지에 대한 분별력이 필요함을 느낀다.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 나는 하나님 나라의 간신인가 아니면 충신인가를 생각한다. 사람들에게 듣기 좋은 계략만을 전할 것인가 아니면 올바른 모략을 전할 것인가. 하나를 선택하자.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진짜 전략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23절)

후새는 압살롭에게 거짓으로 항복하고 그 주변에 남습니다. 아히도벨은 다윗의 후궁들을 범하여 반역 세력의 힘을 모으는 계략을 내세웠는데 그 영향력이 막강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는 전쟁에 있어서의 온갖 계략이 난무하는 상황입니다. 적의 정보를 파악하여 은밀히 알리기 위해 거짓으로 투항합니다. 또 반역하는 내부적인 힘을 강하게 하기 위해 인륜을 거스리는 행동도 서슴없이 행합니다. 상식과 선이 거짓과 악과 마구 뒤섞여 있는 모습입니다. 도대체 무엇인 선인지, 무엇이 지혜인지 혼란스럽습니다.

심지어 아히도벨이 베푸는 계략은 하나님께 물어서 받은 말씀과 같아 보입니다. 그만큼 지혜로워보이고 영향력이 강력하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렇게 보이는 것 뿐입니다. 진짜 하나님의 말씀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진짜 선, 지혜,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입니까? 비록 죄의 결과로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있지만 다윗쪽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궁지에 몰려있지만 여전히 그와 함께하셔서 불리한 상황을 하나하나 극복해가게 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이 선, 지혜, 하나님의 뜻임을 다시 생각합니다. 복잡하게 여러가지가 얽혀있는 이 땅에서 그것을 분별하기란 참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씀을 붙들고 깊이 묵상합니다. 그래서 무릎꿇고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이 함께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많은 계략에 휘둘리지 않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이기 원합니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사람 마음의 종착지

이스라엘 사람의 마음을 압살롬이 훔치니라(6절)


압살롬은 자신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받아준 아버지 다윗을 배반하여, 자신이 왕이 되기 위한 작업을 치밀하게 해나간다. 왕에게 재판하러 나오는 백성들에게 정의를 위해 친절하게 행동하여 저들의 마음을 훔친다. 마땅히 왕에게 가야할 마음을 자신이 가로챈다. 결국 하나님께 드린 서원을 이루기 위해 헤브론에 가도록 허락을 받아내고, 이 후 스스로 왕이 되어 점점 많은 수를 모으게 된다.

재판하러 온 사람들을 향한 압살롬의 모습은 너무나 좋아보인다. 정의를 세우고자 하고, 백성들에게 친절하고 겸손하게 행동한다. 손을 뻗어 붙들어주고, 엎드린 자를 일으켜세워 입 맞춘다. 그리하여 마음을 도둑질한다. 이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가로채는 것이다. 다윗 왕에게 가야할 마음들인 것이다.

이렇게 보면 과연 마음의 주인은 누가 되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마음의 소유주는 각자 본인이지만, 그 마음을 소유할 수 있는 사람은 제한이 되어야 함을 생각해본다. 오늘 본문에서 백성의 마음은 다윗에게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남편의 마음은 아내에게, 아내의 마음은 남편에게 있어야 할 것이다. 부모와 자녀도 마찬가지이다. 그것이 정상적이다.

또한 신앙을 생각할 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의 것이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 사역자들이 조심해야 할 것이 있다고 보여진다. 사역을 위해, 공동체와 교회를 세우기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하는 것은 맞다. 마음이 하나되어야 한다.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그 마음을 가로채서는 안 될 것이다. 하나님께 가야할 마음을 훔쳐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의 마음은 가장 공의로우시고 사랑이 많으신 왕이신 하나님께 돌려져야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얻지 못한다는 것에 얼마나 조바심을 내고 괴로워하는지. 때로는 그런 능력을 갖기 위해서 열심을 내지는 않는지 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반역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성도들의 마음은 내가 아닌 하나님이어야 한다. 사람 마음의 종착지는 하나님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어떤 용기인가
담대히 용기를 내라(28절)

압살롬은 2년을 기다려 다말에 대한 복수를 감행한다. 양 털을 깎는 날 형제들을 초청해 암논을 죽인다. 이후 그술 왕에게로 도망하는데 시간이 흐르자 다윗의 분노가 진정되어간다.

오늘 본문에서는 다윗의 범죄로 인한 심판이 계속 진행된다. 압살롬은 암논을 죽이는데 자신의 종들에게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내가 네게 명령한 것이 아니냐. 두려워 말라. 담대하라. 어디서 많이 들은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정복을 앞 둔 여호수아에게 주신 말씀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데에 용기가 필요하지만, 살인과 죄를 저지르는데에도 용기가 필요한 듯하다.

어제 친구와 함께 하나님의 뜻에 관한 이야기를 하다가, 믿음은 용기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크신 뜻 안에서 우리는 지유롭게 선택을 해야하는데 결국 용기가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죄를 짓는데 필요한 용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필요한 용기. 어떤 용기를 낼 것인가. 어떤 용기의 사람이 될 것인가.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다말에게 성폭행을 가한 암논은 이제 그녀를 증오하여 내친다. 슬픔 가운데 있는 누이 다말을 보고 압살롬은 잠잠하라 하면서 복수할 기회를 찾는다.

어쩌면 성폭행은 일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성욕의 결과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증오는 단순히 내분비샘과 호르몬 같은 신체적인 문제가 아니다. 증오는 파멸을 노리는 마음과 감정을 요구한다... 암논은 그녀의 몸을 더럽혔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의 영혼을 더럽힌다. 이것은 엄청난 신성모독이다. 유진 피터슨

유진 피터슨은 암논의 사랑과 다윗의 사랑의 진정성에 의문을 던진다. 각각 성폭행의 자극제와 불의를 가리는데 쓰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주의를 기울여야 함을 환기시킨다. 왜냐하면 가장 영광스럽고 사람들의 최선을 말하면서도, 폭력을 은폐하고 방종을 변명하는데 쓰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최근 한 청소년단체의 대표가 미성년과의 성관계로 대표직을 내려놓았다. 다시한번 사역자로서의 성욕에 대한 경계심을 갖게 한다.

다윗은 이 사실을 알고 단순히 화를 낸 것으로 그쳤다. 이후 적절한 징계가 내려지지 않은 것이 다윗의 실수로 느껴지는 부분이다. 잘못된 것에 대한 적절한 징계와 심판은 어떻게 주어져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사랑 안에 진리를 말하는 것의 중요성을 느낀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사랑인가 욕정인가
그를 사랑하나(1절)

다윗을 반역한 압살롬 이야기의 서론으로, 암논은 자신의 이복누이 다말을 아플 정도로 사모하다가 근친상간의 죄를 범한다.

암논은 다말을 사랑했다. 심지어 상사병에 걸릴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어떤 방법을 취했는가. 자신의 힘과 권력을 사용해서 억지로 관계를 가졌다.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욕방출의 대상'으로 바라보았다. '자신의 짐승스러운 욕정을 사랑으로 믿는 존재이며, 그 믿음을 연약한 존재에게 강요하는 존재'가 인간임을 본다.

나 또한 이 죄악의 사람이다. 자신의 욕정을 사랑으로 착각하기가 얼마나 쉬운지.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말이 얼마나 잘 맞는지. 한 사람에게 가한 깊은 상처와 고통을 기억하며 늘 자신을 경계하며 살아야 한다.

이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온유하다. 무례하지 않다. 자신을 희생하여 남을 살린다. 자신이 품은 것이 사랑인지 아닌지는 이러한 것을 통해 검증해봐야 한다. 진짜 사랑을 하자. 참된 사랑을 하며 살자.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