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윗은 기근의 원인이 사울 때에 기브온 사람을 죽였기 때문임을 깨닫고, 사울가 7명을 내어주어 죄를 해결하고 하나님의 회복을 경험한다.
기브온 족속과의 관계회복이 하나님의 복을 받기 위한 중요한 중간 단계이다. 또한 이렇게 사람을 내주어 매달리게 하는 것이 현대의 시각으로는 아해하기 어려우나 아것은 고대 사회는 계약의 엄숙성이 지배하던 사회임을 보여준다.
두 아들을 내어준 아야의 딸 리스바가 보인 슬픔과 헌신의 행동을 보고 다윗은 큰 감동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사울과 요나단의 뼈를 조상들의 묘에 함께 묻어준다. 명예회복의 의미가 있다.
속죄제사를 통해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멈추어 보려는 제사 신학이 부각될수록 성전의 역할이 부각되는 방향으로 움직임을 보여준다.
'말씀묵상_구약/사무엘하'에 해당되는 글 3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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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래셋 사람과 전쟁할 때에(18절)
본문에서는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다윗을 도와 활약한 네 명의 장수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김회권은 이 본문에서 다윗 왕국 건설사는 다윗 개인의 영웅담이 아니라 다윗과 그 동역자들이 함께 일군 공동체 역사임을 말한다.
또한 19절의 엘하난은 골리앗의 아우가 아니라 골리앗을 죽였다고 히브리어 원문, 70인역, 대부분 영어성경들이 말하고 있다. 이것에 대한 여러 해석이 있지만, 먼저 다윗의 위대한 업적을 칭송하지만 동시에 영웅시관의 이름으로 개별 용사의 업적이 망각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고 한다. 또한 집합 인격으로서의 골리앗이 특정한 개인 영웅 누구의 손에 죽었는지 중요하지 않고 다만 집합체인 이스라엘에게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다윗을 이스라엘의 대표장수로 등장시켰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신앙이 전쟁이라는 유비가 폭력을 정당화하지 않도록 제한을 두면서 함께 싸우고 함께 공동체를 세워간다는 의미를 되새겨본다. 개개인의 존재와 의미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공동체이길 기대한다.
베냐민 사람 세바가 이스라엘에게 정치적 이익이 없다고 주장하여 반역을 알으킨다. 이 반역을 처단하고자 아마사를 통해 군사를 모집하는데, 기일이 늦어지자 아비새를 통해 세바를 뒤쫓게 하였다. 뒤늦게 이들의 뒤를 따르는 아마사를 요압은 교묘한 방법으로 죽인다.
압살롬의 반역을 잠재운 것이 얼마되지 않아 또 세바의 반역이 일어난다. 하나님의 심판이기도 하지만 실상 갈등과 반목은 어디에나 있지 않던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갈등을 틈타 세바가 반역을 일으킨다. 갈등을 이용하여 자신의 위치를 높이는 것을 본다. 그리 건강한 리더십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싸움의 대상이 사라지면 그 지지가 사라지는 불안정한 지도력이다.
계속되는 반역의 이야기를 보며 반역과 혁명의 차이가 무엇인지 생각한다. 결과론적으로 성공하면 혁명이 되는 것이 역사이지만. 다윗은 반역이 아니라 순리를 택했던 것을 떠올려본다. 백성들의 인정을 받아 왕이 되는 것일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것이 중요하다.
요압은 세바의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아마사를 죽인다. 왕의 새 군대장관을 이렇게 한순간에 제압하는 그의 대담성이 놀랍다. 왕의 명령과 의도를 무시하는 요압의 행동. 자신을 내친 왕에 대한 복수심이 컸을 것이다.
진정성
그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39절)
므비보셋은 다윗을 영접하며 종인 시바가 자신을 속였음을 말하지만, 다윗은 이전의 지위를 다 회복시켜주지 않는다. 또한 이전에 다윗과 백성들을 공궤하였던 바르실래가 찾아왔는데, 함께 궁으로 가자는 다윗의 요청에 대신 김함을 보낸다. 이후 이스라엘 지파는 왕의 환궁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유다지파와 논쟁을 벌입니다.
다윗의 헤세드로 인해 함께 상에서 음식을 먹었던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 다리를 절었기 때문에 종 시바에게 무시당하고 억울한 누명을 썼다. 이제 다윗 왕을 만나 자초지종을 설명했으나 다윗의 반응은 냉랭하기만 하다. 밭을 종 시바와 반씩 나누라는 말에, 자신은 왕이 다시 안전하게 돌아온 것으로 만족하고 밭은 필요없다고 말한다. 진정성이 느껴지는 말이다. 이것에 대한 다윗의 반응은 나타나지 않지만, 아마도 마음이 많이 누그러졌으리라. 아이를 반으로 나누라는 솔로몬의 판단에 차라리 아이를 다른 여인에게 주라는 친모의 말이 겹쳐진다. 뭣이 중한지를 아는 사람의 말이 진정성이 있다.
힘들 때 친구가 진짜 친구일진대 바르실래가 그러하다. 이제 다윗이 다시 왕으로 돌아올 때 다윗을 맞이한다. 다윗은 간이라도 빼주고 싶은 심정일터. 그러나 바르실래는 왕궁으로 함께 가자는 말에 사양한다. 힘들었을 때 도왔으니 한 자리 차지할 법도 한데 오히려 다른 사람을 추천한다. 그리고 자기의 곳으로 돌아간다. 자신의 어떠함을 정확히 알고 주어진 삶에 자족하는 모습을 보인다.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도피하는 환타지를 꿈꾸기 보다 그 자리에서 주님과 동행하는 삶이 진정성이 있다. 잘나갈 때도 자기 사욕을 채우지 않는 친구가 더 진짜 친구다.
이스라엘 지파는 유다 지파와 논쟁한다. 이로서 자기들이 다윗의 환궁을 주도하려는 목적은 순수하지 않았다는 것이 드러난다. 자기가 주도권을 쥐지 못해서 괴롭고, 더구나 다른 이가 주도권을 쥐는 것은 더 못봐주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됨은 어렵다. 공동체를 세우는 일이 쉽지 않다. 그래서 참 왕이신 하나님만을 바라볼 때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를 세워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진정성이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이루어갈 것이다.
다윗의 탕평책
이스라엘의 왕이 된 것(22절)
본문에서 다윗은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유다 지파가 주도적 역할을 하도록 한다. 요단을 건너면서 이전에 저주했던 시므이를 만나 그에게 용서를 베푼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자기 지파인 유다 지파 역시 압살롬과 함께 반역했음에도 불구하고, 환궁에 주도권을 갖도록 일을 처리하는 다윗을 본다. 보통 혈연, 지연, 인맥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는 것은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그러나 냉혹한 정치적인 세계에서 믿을만한 자기 편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이것을 버리지 못하는 것 같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가 진짜 혈연이고 가족이라고 하셨는데. 믿음의 공동체가 피보다 더 진할 수 있기를.
이후 다윗은 요압이 아니라 아마사를 군대장관으로 삼았다. 압살롬 반역의 일등공신인 요압의 교체는 부당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권위에 도전해 오는 요압 세력을 견제'하는 의미로 교체를 감행한 것으로 보인다. 압살롬을 슬퍼하고 있을 때 '요압의 위협적인 언사에서 심한 모욕'을 느꼈을 법하다. 또한 '압살롬의 반역에 참가한 북 이스라엘 지파들의 여러가지 염려를 불식 시키기 위한 정치적 제스쳐'로 이해할 수 있다(김회권). 결정적으로 요압과 적이 되어버렸다.
마지막으로 피난을 갈 때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가 베냐민 사람 천 명을 데리고 다윗 앞에 나온다. 베냐민의 유력자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시므이는 현실 적응에 매우 빠르다. 이런 시므이의 약삭빠름에 아비새가 화를 내며 죽이려고 한다. 그러자 다윗은 이것을 말린다. 북이스라엘의 베냐민 지파의 유력자인 시므이를 죽인다면 자신이 어찌 다시 이스라엘 지파의 왕으로 인정받겠느냐는 것이다(김회권). 이스라엘 전체, 즉 북이스라엘까지 함께 다스리려는 다윗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렇게 보면 반대자들을 대하는 다윗의 반응이 눈에 띈다. 반대자들을 심판하거나 멀리하지 않고 오히려 잘못을 용납하고 가까이 한다. 탕평책이다. 물론 저주한 시므이를 완전히 용서한 것 같지는 않다. 후에 솔로몬에게 그냥 살려두지 말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나라를 다스리고 이끌기 위해서는 반대자들을 늘 염두에 두고 조심스럽게 대하는 모습을 본다. 나의 반대자. 나의 가시이고 나의 상처유발자이지만, 품고가야 할 대상이다. 그렇게 위태롭게 하나됨을 지켜가는 것이다. 이것이 이 땅의 공동체의 모습이다. 이렇게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하나님 나라의 진주를 만들어가나보다.
왕으로서의 다윗
왕이 일어나 성문에 앉으매(8절)
다윗은 계속해서 압살롬을 슬퍼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에게도 전쟁의 승리가 슬픔이 됩니다. 이에 요압은 다윗이 슬퍼하는 것이 부하들의 사기를 꺾고 결국 나라에 위기을 가져올 것이라 위협하여 왕의 공적인 자리에 서게 합니다. 이스라엘 지파 백성들은 다시 다윗을 왕으로 추대하는 일을 놓고 논쟁하면서 주도권을 잡으려 합니다.
이제 왕으로서의 다윗으로 나서야할 때입니다. 그동안 왕으로서의 다윗과 부모로서의 다윗 사이에서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 중 부모로서의 다윗이 좀더 드러났습니다. 공과 사에서 사가 우세한 모습입니다. 그래서 좀더 인간적이긴 합니다. 그런데 부하들과 백성들의 사기가 꺾였고, 요압의 협박이긴 하지만 지도력에 문제가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성문 앞에 앉습니다. 공적으로 왕으로서의 일에 복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의연하고 아무 일 없다는 듯 성문 앞에 앉은 다윗의 겉모습 이면에 왠지 여전히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 합니다. 이렇게 공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법을 알아야 정치에서 살아남을 수 있어 보입니다. 공과 사를 잘 구분해야 하지만, 둘 다 한 사람에게 속한 것이기에 쉽게 구분할 수 없는 안타까운 모습을 봅니다. 그것을 억지로 구분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노출되어야 하는 높은 자리가 아닌 단순한 삶이 이것을 가능하게 한다 싶습니다. 가급적 공적인 면과 사적인 면이 일치되는 삶을 산다면 좋을 것 같습니다.
이후 반역을 꾀했다 실패했던 이스라엘 지파 백성들은 어떻게 이 위기를 넘어갈지 뜨겁게 토론합니다. 다윗을 다시 왕으로 세우는 일에 유다 지파보다 더 앞서야 한다는 것입니다. 반역의 과오를 지우고, 앞으로 여러 일에 주도권을 가지겠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계산이 굉장히 빠릅니다. 빠르게 반역하기도 하고, 빠르게 재옹립하기도 합니다. 참 얄밉습니다. 속도가 필요한 때가 있지만, 언약이나 관계에 있어서는 느리면 좋겠다 싶습니다. 남들 떠나도 끝까지 함께 남아있는 사람이면 좋겠습니다. 하나님 곁에, 믿음의 사람 곁에.
신비로운 부모의 사랑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33절)
압살롬이 죽자 사독의 아들 아히마하스는 이 소식을 다윗에게 전하고 상을 얻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요압을 이것으로 상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하며 제지하지만 끝내 구스 사람에 앞서 소식을 전한다. 두 사람에게 소식을 들은 다윗은 아들의 이름을 부르며 통곡한다.
자신에게 반역하여 나라를 세우고 자신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했던 아들이 죽었다. 이 슬프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이것을 통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의 모습은 참으로 씁쓸하다. 남의 아픔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자들의 마음은 도대체 얼마나 강심장이어야 할지를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면서도 얼마나 쉽게 다른 이들의 아픔에 무감각하게 살면서 나의 안일만을 구하는지를 생각할 때 나 또한 이 어리석음에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느낀다.
반역자 아들의 죽음에 통곡하는 아버지 다윗. 지난 역사에서 자신의 적이라면 부모자식간에도 살인을 서슴지않는 무자비한 권력자들을 보게 된다. 이에 비하면 다윗은 참 인간적이다. 어쩌면 자신이 범한 죄의 결과로 이렇게 아들과 원수되어 아들을 죽게만든 본인의 잘못을 가슴아파 하는지도 모른다(김회권). 앞서 언급한 무자비한 권력자들에 비해 본인의 자리와 생명이 위태할 때도 인간적인 마음을 품고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다윗은 차라리 따뜻하다.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라면. 이것이야말로 부모의 마음이다. 잘못에도 불구하고 그의 죄책을 대신하고자 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지 않은가. 반역자를 슬퍼하기에 공과 사를 구분하지 못한다는 비난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 그 자녀의 생명을 위한 부모의 헌신과 사랑은 감동이다. 그저 신비롭다. 더불어 우리를 대신하여 아들을 주신 하나님의 마음이 새삼스레 느껴지는 아침이다.
또한 무덤에 묻지 못하고 마음에 자녀들을 묻은 부모들이 생각나는 아침이다. 자녀들을 살리기 위해서 뭐든 하겠다는 그 절박하고도 외로운 마음에, 그분들을 대신하여 죽고자 하시는 참된 부모이신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가 함께 하는 신비로운 오늘 하루이길.
타자를 위한 삶
자기 이름(18절)
전세가 다윗쪽으로 기운 가운데 압살롬은 도망치다가 머리가 상수리나무에 걸려 매달리게 된다. 이 보고를 들은 요압은 다윗의 명령을 거스려 무자비하게 살해한다. 이후 대패한 이스라엘을 향한 추격은 멈추게 되고 자기 이름을 널리 알리기 원했던 압살롬은 초라하게 기념비 하나 남기고 삶을 마감한다.
압살롬은 머리가 나무에 걸려 죽게 된다. 압살롬의 머리카락. 앞서 이것은 압살롬의 아름다움이고 매력이고 자랑이었다. 그의 장점이다. 그런데 이제 그것이 오히려 그를 죽게 만들었다. 그의 치명적인 약점이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 안에 있지 못한 장점은 오히려 약점이 되는 것을 본다. 한 사람의 강함, 부함, 높음이 후에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결과를 자주 접하게 된다. 나의 강점과 장점. 깨어있지 못한다면 오히려 나를 넘어지게 할 수 있다.
압살롬이 죽고 무덤에 기념비가 세워진다.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어 본인이 친히 만든 비석이다. 여기서 그의 인생을 읽는다. 자기 이름을 드러내고자 하는 삶. 그것을 위해 반역을 꾀했다. 그러나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고, 자기 이름을 불러주는 사람 없이, 구차하게 자기가 마련한 초라한 비석을 세운다. 자기 이름을 위해 살면 자기만 자신을 알고, 다른 이를 위해 살 때 많은 이들이 자신을 알아준다.
본회퍼는 예수님의 삶을 타자를 위한 삶으로 말했다.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다 내어주신 삶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자기 이름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이다. 무엇보다 절대타자이신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사는 것이 참된 삶이며, 영원한 행복에 이르게 될 것이다. 타자를 위해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