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 이긴다
여호와께서 사랑하셨기 때문이더라(25절)
다윗은 밧세바에게서 태어난 아이가 낫도록 간절히 기도하지만 결국 죽게 된다. 이후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아내 밧세바를 통해 솔로몬을 낳게 하시는데 이름이 여디디야, 즉 하나님께서 사랑하셨다는 의미를 담는다.
엄청난 심판과 파장을 일으킨 밧세바를 통해 자녀를 주시되, 그를 사랑하신다는 하나님의 선언이 놀랍다. 죄에 대해서는 분명 심판이 있다. 그 후유증이 분명하다. 값싼 은혜는 아니다. 그러나 그보다 언약을 기억하고 잠잠히 그 언약을 이루어가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더 크다.
이 부분에서 김회권은 이후 이루어지는 다윗에 대한 심판에 무게를 두며 경박한 은혜가 아님을 강조하고, 브루그만은 언약에 충실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후자의 해석이 더 은혜롭다. 그것이 반드시 옳은 해석은 아니지만 말이다.
성경에서 우리는 종종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라는 딜레마를 바라본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신비롭고도 절묘하게 이 둘을 만족시키신다. 그러나 우리편에서 볼 때 결국 우리를 살리는 하나님의 결정은 사랑의 우세함을 보게 한다. 사랑이 이긴다.
'말씀묵상_구약/사무엘하'에 해당되는 글 35건
- 2016.08.01 삼하12:15-31
- 2016.07.27 삼하9:1-13
- 2016.07.26 삼하8-1-18
- 2016.07.26 삼하7:1-17
- 2016.07.23 삼하 6:12-23 기쁨과 겸손의 상관관계
- 2016.07.21 삼하6:11-25 위기 뿐 아니라 부요함도 하나님께 묻자
- 2016.07.20 삼하 5:1-10 천심은 민심이다
- 2016.07.19 삼하4:1-12
은총(1, 3, 7절), 왕의 상에서 먹으니라(7, 10, 11, 13절)
다윗의 요나단과 맺은 언약을 기억하고, 사울가의 유일한 혈육이자 요나단의 아들인 므지보셋에게 은총(헤세드)를 베푼다. 종 시바로 하여금 그를 돌보게 하고, 다윗의 상에서 함께 떡을 먹는 예우를 베푼다.
먼저 이것은 다윗이 요나단과의 언약에 충실한 충성의 사람임을 드러낸다. 또한 '다윗이 배풀 하나님의 은총은 개인적인 특혜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하나님의 돌봄을 대신하는 인애'(김회권)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울 왕가를 지지하던 북쪽지파들의 민심을 달래며, 사울왕실의 복권운동과 같은 미연의 사태를 방지할 수 있는 현실 정치적인 방법이기도 했을 것이다. (김회권) 마지막 므비보셋이 두 발을 절었다는 표현도 므비보셋이 어떤 운동을 일으키기에 부적합하며, 다윗이 의외로 속넓은 사람이 아닌데 그것은 자격이 없는 자만 높였다는 점이다. (브루거만)
헤세드는 시간이 흘러도 약속에 충실함이다. 특히 자격없는 자에게 베풀어지는 것이다. 원수의 목전에서 상을 베푸시는 목자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아침이다. 그리고 나 또한 은혜의 통로가 되기를 소망해본다.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시니라(6, 14절)
나단을 통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다윗은 주변 나라들을 정복한다. 그 때 얻은 전리품들을 하나님께 드린다. 또한 모든 백성에게 정의와 공의를 행하며 내각을 세워 내적 외적인 안정을 구축해간다.
김회권은 어디로 가든지 이긴다는 로맨틱한 말씀의 이면을 탐구한다. 이 고대 전쟁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는데, 첫째 다윗의 주변세계 정복은 신학적으로 야웨가 아닌 우상 신들의 치하에 있는 이방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 확장이다. 둘째 전쟁이 일상화된 자기 시대의 기준으로 자신의 신앙을 표현한 것이라는 점이다.
결국 생물학적인 특정인간이나 민족에 대한 하나님의 무원칙적인 편애를 과시하는 것이 아니라 공과 의를 구현하는 댜리자 하나님의 대리자의 승리로 본다. 다시말해 다윗의 늘 이기는 경험은 물리적 전쟁에서의 승리이기보다는 더 고상하고 우월한 가치의 전파를 초래하는 승리를 의미한다. 바로 정의와 공평인데, 이것은 약자들에게 보호와 돌봄을 의미한다고 본다.
어디로 가든지 이기게 하신다. 이 얼마나 로맨틱 한가. 얼마나 나의 삶에도 이루어지길 원하는 구절인가.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우리는 성경을 로맨틱 코메디 영화나 드라마 보듯이 내 삶에도 좋은 일이 일어나기를 바라고, 대리만족을 누리는데 만족하지 않나 싶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어제의 언약이 가진 의미의 연장선상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어가는 당대의 실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2016년 대한민국에서 어디로 가든지 이기는 삶도 바로 정의와 공의를 이루는 삶임을 기억하자.
다윗 언약
여호와가 너를 위하여 집을 짓고(11절)
다윗은 휘장 안에 있는 궤를 보며 성전 건축의 마음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의 성전건축을 부정하시면서도 오히려 다윗에게 집을 지어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위해 집을 지으신다는 것은 결국 16절의 다윗의 가문과 그 왕위가 견고히 서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왕을 찾으시는 하나님의 잠행이란 관점에서 볼 때 핵심적인 본문이다.
김회권은 다윗에게 베푸신 영원한 집이라는 말씀은 신간적 물리적 양속성 보다는, 다윗의 후손들에게도 일관되게 하나님의 공평과 정의의 통치를 대행하라는 책임을 안겨주는 말씀으로 본다.
또한 이 다윗 언약은 부족 연맹체에서 왕조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인한 해체와 변동의 상황에서, 이스라엘 왕의 권위를 모종의 신적 질서 위에 구축할 필요성에 직면했을 때 제시된 신적 담보물이라고 평가한다.
네 집을 영원히 세운다는 말씀은 나의 미래와 삶을 하나님께서 안정적으로 인도하신다는 근거로 적용하기 쉬우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 공평과 정의의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방향이 더 성경적 가르침에 맞는다 보여진다.
기쁨과 겸손의 상관관계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14절)
오벧에돔의 집에 있던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고자 하는 두 번째 시도가 이루어집니다. 다윗은 기쁨으로 춤추고, 온 이스라엘 족속은 환호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딸 미갈은 다윗을 업신여깁니다.
매일성경의 해설은 다윗은 첫번째 시도의 잘못은 겸손히 받아들이고 율법이 정한대로 언약궤를 메고 예루살렘으로 왔다고 한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에 대해 변명한 것과는 다른 모습이라는 점이다. '실패의 좌절을 자성으로 극복하고 겸손히 하나님의 규례를 따를 때 언약궤의 순전한 행진을 가능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서의 겸비, 겸손이 오늘의 기쁨을 가능하게 했다.
다윗과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궤가 오는 것을 기뻐했지만, 미갈은 춤추는 다윗을 보고 업신여겼다. 체통을 잃은 왕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에 대한 다윗의 대답은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서 춤춘 것이고, 하나님을 높이는 일이라면 자신은 낮고 천하게 보일지라도 상관없다는 고백을 한다. 하나님만 높이고, 자신은 낮추는 겸손을 보게 된다.
이렇게 보면 겸손은 기쁨으로 인도한다. 겸손할 때 실패와 죄로부터 회복을 경험하게 된다. 겸손할 때 주위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며 기뻐할 수 있다.
위기 뿐 아니라 부요함도 하나님께 묻자
다윗이 여호와께 여쭈어 이르되(19, 23절)
다윗은 두로왕 히람이 주는 동맹과 조공의 풍요함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처첩들을 통해 많은 자녀들을 낳는다. 내적인 번영과 안정을 누린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오래된 숙적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하나님께 물음으로 두 번의 대승을 거둔다.
먼저 부르그만은 히람의 사절단과 조공을 받으면서 이것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묻지 않았음을 지적한다. '히람은 가장 성공적인 것 즉 상업주의을 구축하였고, 이스라엘에게 가장 위험스러운 것 백향목과 자부를 제시하였다'고 평가한다. 이후 블레셋과의 전쟁을 볼 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저버린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환원적인 상황으로 인해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평가는 통찰력 있는 부분이다. 이것은 이후의 블레셋과의 전쟁이 나오는 8:1-14에서 위험이 그대로 사실로 이루어짐을 보게된다.
또한 김회권은 하나님께 묻는 것은 정규전으로 감당할 수 없는 적이 다가올 때 다윗이 취하는 방법으로 전쟁을 하나님의 전쟁, 즉 성전으로 받아들이는 것으로 본다. 하나님께서 적의 중심을 궤멸하신 후에 뒷처리를 맡기는 행위인 것이다. 다윗은 이런 확신을 가지고 전쟁으로 나아가 승리를 거두었다.
오늘 본문을 통해 신앙 가운데 있지만 한 가지로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는 다윗의 모습을 본다. 순종의 왕으로 하나님께 묻되, 물질의 부여함과 처첩에 관해서는 묻지 않는 그의 타협 혹은 타락의 모습을 깨닫는다. 타락과 부패의 씨앗이 잉태되는 것이다. 어려움과 위기 뿐 아니라, 부요와 누림에도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영적인 깨어있음이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늘 하나님께 묻자. 특히 부요함에 대해서 하나님께 묻자.
천심은 민심이다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니(10절)
아브넬과 이스보셋의 사후, 온 이스라엘은 다윗을 왕으로 세운다. 이 때 이들은 다윗이 골육인 점, 군사적 지도자로 이끌었던 점,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을 근거로 왕으로 세운다. 그리고 다윗은 여부스 족속의 시온 산성을 빼앗아 다윗성으로 삼는다. 이렇게 다윗이 왕이 되어 점점 강성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다.
매일성경 해설에서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변주된다. 이것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다윗의 모습으로, 하나님의 손에 잡힌 사람으로 표현된다. 진정 하나님께 사로잡힌 그 사람을 통해 통일의 과업이 이루어지게 됨을 발견한다. 주변국의 상황과 정세, 경제적 이익과 손실, 사상과 이념의 일치 등등 많은 것들이 변수이지만 그래도 중요한 것은 사람이다.
김회권 교수는 하나님의 마음 즉 천심이 민심과 통하여 다윗이 왕으로 세워졌다는 표현을 하고 있다. 이 땅의 일은 이렇게 천심이 민심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절감하게 된다.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계속해서 사울은 장로들의 추대로 왕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언자 집단과 갈등을 일으켜 신정통치의 대의명분을 잃었다고 보았다. 이에비해 다윗은 스스로 제왕의 길을 가지 않고, 지방민들의 억울함을 신원하고 기업을 이방족속에게 빼앗긴 이스라엘 동포들에게 땅을 찾아주며, 야웨의 전쟁에서의 승리를 거두었다고 해석한다. 그래서 그는 신정통치의 대행자, 이상왕의 전범이 되었다 평가한다.
이렇게 다윗은 하나님이 세우신 왕이었지만 억울하고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것을 통해 민심을 얻어 왕으로 세워진다. 역시 천심과 민심이 함께 함을 본다. 하나님의 마음은 낮은 자들에게 있다. 그들과 함께 계신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함께 함이란 낮은 자리에 있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그들과 함께하며 마음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천심이 민심이고, 민심이 천심임이다.
무너진 사울 왕가와 다윗의 조가 정치
3장에서 점점 쇠약해져간다는 평가를 받은 사울 왕가는 아브넬의 죽음을 맞게 되고, 이후 이스보셋의 죽음을 통해 완전히 쇠락한다. 한편 다윗은 이스보셋을 암살한 두 사람을 처형한다.
말씀에 갑자기 등장한 므비보셋은 신체의 약점으로 인해 왕위를 이어갈 수 없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에 따라 다윗이 베풀 헤세드의 배경 역할을 담당한다.
므비보셋을 죽인 레갑과 바아나의 처형은 지금까지 사울 왕가를 향한 다윗의 태도와 일치한다. 사울과 요나단의 죽음에 슬퍼하며 애가를 불렀다. 아브넬의 죽음에도 마찬가지이다. 므비보셋의 죽음도 정치적으로는 북 이스라엘을 점령할 수 있는 모든 환경이 만들어진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암살한 자들을 심판하였다.
김회권 교수는 여기서 다윗의 조가 정치를 말한다. 대중을 감동시킬 줄 아는 현실적 정치가라는 것이다. 대중들이 무엇을 기대하는지를 알고 적시에 애가를 부르고 통곡하여 대중을 무장해제시켰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북이스라엘의 마음을 얻어 통일의 대업을 이룰 수 있었다는 것이다. 현실 정치적인 차원의 고도적 수사이기도 하지만, 마음에서 우러나온 진심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또한 이 과정을 남북통일의 맥락에서 해석하는 점도 탁월하다. 결국 겨레의 일치와 화합을 위해서 다윗형 정치가, 화해 추구, 통합 추구형 정치가가 필요함을 말한다. 또한 북한 동포들의 마음에 가닿는 노래, 아픔에 공감하고, 위기감에 응답하는 노래정치의 필요성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