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8. 6. 1. 12:35

잔 다르크는 톨스토이처럼 모든 길을 거부하지도, 니체처럼 모든 길을 수용하지도 않음으로써 교차로에 고착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의 길을 택하여 벼락같이 그 길을 따라갔다. 108

그녀는 무언가를 행했던 아주 실체적인 인물이었던 반면에,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변가에 불과했다. 109

전통은 선거권의 확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전통이란 모든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계급, 곧 우리의 조상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이다. 전통은 어쩌다가 권력을 쥐게 된 거만한 소수 지배층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모든 민주주의자는 사람들이 출생시눕ㄴ에 의해 그 자격이 박탈당하는 것을 반대한다. 117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비록 하인일지언정 좋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어쨌든 나로서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전통의 개념을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117

바로 나는 내가 속한 골치 아픈 특수한 문필가 계층을 믿기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주름살을 믿는 것이다. 117

이런 것들이 해결된 다음에는 동화 철학이 두 번째 위대한 원리가 등장한다... 현학적 냄새를 풍기기 위해 나는 그것을 조건부 기쁨의 교리라고 부를 것이다. 131

그렇지만 깨지기 쉬운 것이 썩기 쉬운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유리를 쳐 보라. 그러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냥 유리를 치지 말아 보라. 그러면 천 년을 견딜 것이다. 요정의 나라에서든 지구에서든 사람의 기쁨도 바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곧 어느 순간에든 할 수 있으나 할 이유가 종종 분명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부당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134

나는 동화들을 아기방의 마룻바닥에 두고 떠났는데, 여태껏 그만큼 분별력 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또한 전통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보모를 떠났는데, 이제까지 그처럼 분별력을 갖춘 급진적이거나 보수적인 현대적 유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137

첫째 이 세계는 거칠면서도 경이로운 곳이며, 현재와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현 상태로도 무척 즐거운 장소라는 확신과 둘째, 이런 거침과 즐거움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겸손해야 하고, 그토록 기이한 친절의 기이한 제한사항에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는 확신이다. 138

첫째, 나는 현대 세계 전체가 과학적 숙명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아무 결함도 없이 개현되어 왔으므로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138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대체로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를 대중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해가 규칙적으로 뜨는 것은 그 일이 결코 지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의 일과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용솟음 덕분에 영위되는 것이다. 141

어린이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고 열정적이며 홀가분한 기분을 갖고 있기 때무에 어떤 것이 변함없이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또 해 줘요"라고 말하고, 어른은 녹초가 되기까지 그것을 반복해서 행한다. 아이들과 달리 어른은 단조로운 행휘를 보고 미친 듯이 기뻐할 정도로 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런 반복적인 행위를 무척 기뻐할 정도로 강하신 것 같다. 하나님이 아침마다 해를 향해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저녁마다 달에게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42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열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죄를 지어 늙어버렸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젊기 때문일 것이다. 142

자연의 반복현상은 단순히 되풀이되는 현상이 아니라, 무대에서 받는 앙코르 때문일지도 모른다. 142

첫째, 이 세계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세계는 초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또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둘째, 마법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고, 의미는 그것을 뜻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이 세계는 예술작품과 같은 인격적인 면이 있다. 그게 무슨 의도든지 간에 강렬한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다.

셋째,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 세계에 대해 감사하려면 겸손과 절제의 모양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참으로 이상하고 모호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모든 좋은 것은 최초의 파산에서 살아남아 보존된 신성한 잔유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크루소가 자기의 물건을 건졌듯이, 자기의 좋은 것들을 파선에서부터 건져내었던 것이다. 151.


5장 세계의 깃발

낙관주의자는 당신의 눈을 주시하는 사람이고, 비관주의자는 당신의 발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155.

사람은 과연 이 세계에 속하는 일이 좋은지 묻기도 전에 이미 여기에 속해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요약하자면, 그는 어떤 동경심을 품기 한참 전에 이미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56.

이 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핌리코를 사랑해 주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을 사랑하되 세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초월적인 유대감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157.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을 얻은 셈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함양하지 않았다. 신전을 위해 싸우다 보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결함을 함양하지 않았다. 제단을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하다 보니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

비관주의자의 악은 그가 신들과 사람들을 질책하는 점이 아니라, 자기가 질책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에게는 사물에 대한 일차적이고 초자연적인 충성심이 없다. 162

그러면 보통 낙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인가? 낙관주의자는 이 세계의 명예를 변호하고 싶은 나머지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것이 문제이다. 162.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쁜 낙관주의(회칠하는 것, 모든 것을 엉성하게 변호하는 것)가 합리적 낙관주의와 함께 온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낙관주의는 침체를 낳는다. 반면에 개혁으로 이끄는 것은 비합리적인 낙관주의다. 162

자기가 사랑하는 곳을 망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장소를 개선하게 될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핌리코의 어떤 특징을 사랑한다면(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는 핌리코 자체에 반대하면서까지 그 특징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핌리코 자체를 사랑할 경우에는, 그곳을 황폐하게 만든 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 개혁이 과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개혁을 주도하는 인물은 신비주의적인 애국자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163.

믿음과 혁명이라는 우리의 거대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타협의 일환으로 차갑게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뜨겁게 미워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쁨과 분노가 서로 상쇄되어 그냥 자족하는 상태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강렬한 기쁨과 더 강렬한 불만족을 원한다. 우리는 우주를 우리가 습격해야 할 괴물의 성으로 느끼는 동시에 저녁에는 돌아갈 수 있는 우리의 오두막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167. 

달리 말하면, 순교자가 숭고한 것은 바로 생명과의 궁극적인 연줄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 바깥에 둔다. 그는 무언가를 살게 하려고 죽음을 택한다. 자살이 비열한 것은 자살자에게 존재와의 이런 연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파괴자일 뿐이며 영적으로 우주를 파괴한다. 170.

기독교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경이감과 열정을 품은 채 신적인 동반자와 신적인 우두머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격렬하게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음과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함께 홀로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해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청명하며 군기 달린 군대처럼 무서운 저 바깥의 빛을 명백히 인식하는 즐거움이다. 176. 

이 세계를 정말로 즐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체하느라 바빴고, 덕스러운 사람들은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의 관심이 없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기독교가 갑자기 진입하여 독자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세계가 마침내 그것을 정답으로 수용했다. 당시에도 정답이었거니와 지금도 정답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답변은 마치 칼로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잘라 버렸고, 어느 의미로든 감상적으로 묶어 놓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나님을 우주로부터 분리시켰다. 요즈음 일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로부터 제거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독특성이야말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 특성은 기독교가 불행한 비관주의자는 물론이고 더 불행한 낙관주의자에게도 제공하는 답변의 핵심이었다. 178.

그리고 모든 기독교 유신론의 뿌리 어구는, 마치 예술가가 창조자이듯이 하나님은 창조자라는 것이다... 모든 창조와 출산은 곧 분리의 행위라는 이 원리는, 모든 성장은 뻗어나가는 것이라는 진화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가로질러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다. 여인은 한 아이를 출산하는 중에도 한 아이를 잃는다. 모든 창조는 분리이다. 출생은 죽음만큼이나 엄숙한 이별이다. 179.

또한 나는 기독교 신학에서 단단한 대못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고 세계를 그 자신에게서 분리했다는 도그마적인 주장이었다. 181.

기독교적 낙관주의는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에 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고기를 구하는 다른 여느 동물과 같은 하나의 동물이라고 독백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다. 내가 모든 것을 묘하게 느꼈던 것은 옳았다. 나 자신은 모든 것보다 더 못한 동시에 더 나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의 즐거움은 모든 것의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산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초자연적인 것에 비추어 모든 것의 부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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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4. 25. 11:27
파란 앵무새 - 10점
스캇 맥나이트 지음, 전의우 옮김/성서유니온선교회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파란 앵무새 서평 

성서유니온에서 나온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와 ‘책별로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라는 책이 있다. 성경의 각 책에 대한 개론과 전체적인 흐름을 파악하도록 도움을 주는 좋은 책이다. 지금도 가까이 두고 필요할 때마다 찾아서 읽으며 도움을 받고 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할수록 정말 중요한 문제는 과연 성경을 읽기는 읽는데 과연 어떻게 해석하고 적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가 정말 중요하다.

어떤 구절은 오늘날에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그대로 지키지만, 다른 구절들은 더이상 시대와 상황에 맞지 않는다고 지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기준들은 어디에서 누가 정해주는 것일까? 이런 고민은 나만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저자인 스콧 맥나이트는 참새들 사이에서 서로 친해지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던 파란 앵무새에 비유하여 우리에게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성경의 본문들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설명해나간다.

그 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이 책에서 꽤 많이 반복되는 문장이자 저자의 입장을 핵심적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그는 단순히 성경의 개념과 행위를 되살리거나, 전통을 통해서 성경을 보는 것이 아니라 전통과 함께 읽기를 제안한다. “우리가 성경으로 돌아가는 것은 교회를 통해 앞으로 나아가며 우리 시대에 우리의 방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다(48쪽).” 과거를 너무 존중해서 전통주의에 빠지면 안되지만, 속도를 늦춰 하나님이 과거에 교회에 말씀하셨는지를 살펴볼 정도로는 존중해야 한다. 

또한 성경을 대할 때 위키 이야기로 볼 것을 제안한다. “옛 이야기를 자기 시대에 맞는 새로운 방식으로 들려주기 위해 새로운 저자들이 성경 이야기를 끊임없이 고쳐주는 것(90쪽)”으로 설명한다. 또한 이 책에서 가장 탁월한 부분이었다고 느끼는 것은 성경의 이야기가 창조, 타락에 이어서 구속으로 가기 전에 언약 공동체가 있다고 설명한 점이다. 이것은 창세기 12장부터 말라기에 이르는 내용으로, 여기에는 하나 되기 위한 노력이 담겨 있다고 본 것은 구약의 꽤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이 본문들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 성경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는 목적 중심의 귀 기울이기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리는 인격적이신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하는데, 귀를 기울인다는 것은 주목, 흡수, 행함의 단계가 있다고 설명한 부분이 참 좋았다. 저자는 목적 중심의 귀 기울이기는 결국 선행의 삶으로 열매맺어야 한다는 지적하는데, 자칫 공허한 논쟁으로 그칠 수 있는 성경 해석에 대한 우리의 논쟁에 대해 바른 방향을 제시한다고 보여진다.

성경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에 대한 저자의 집중력은 책의 후반부를 여성 안수와 여성 사역에 대한 논의로 다 채웠다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이런 저자의 성경해석 사례를 통해 성경 해석과 적용에 대해 한방에 정리할 수 있었다 말하기는 어렵지만, 성경의 이야기를 이 시대에 바르게 이해하고 적용하려는 그의 참신한 노력과 통찰력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성경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를 읽은 독자들에게 후속편으로 이 책을 강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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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8. 2. 1. 10:14

희망의 두 지평 / 이종인 지음 (박영사)

블로흐몰트만희망신대원 시절 조직신학 수업 시간에 들었던 단어들이다몰트만이라는 세기의 신학 거장이 희망의 신학이라는 화두를 만들어 낼 때 영향을 받았던 사람이 블로흐라는 기억이 아직도 남아있다그런데 이 두 사람의 희망을 분석한 책이라니어려울 것 같아 읽기 부담스러웠지만희미하게 남아있는 두 거장의 희망을 분명하게 알고 싶은 마음에 이끌려 책을 집어들게 되었다.


먼저 블로흐와 몰트만 두 사람의 공통점이 존재한다모두 희망이라는 개념을 붙들었고, “다가올 시간즉 종말론적 기대와 희망이 현재를 바꾸는 동력이고 힘”(153)이라고 주장했다이런 공통점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유대적 메시아니즘에 대한 관심이다그리고 희망과 다른 현실을 마주할 때 발생하는 저항과 반역을 강조한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이런 공통점 보다 차이가 더 크게 느껴진다희망의 기초를 두고 블로흐는 인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과 유토피아적 미래희망을 말하는 반해몰트만은 변함없고 신실한 하나님의 계시와 약속을 강조한다블로흐는 예수를 전형적인 저항의 전범으로 보았지만몰트만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약속의 성취와 미래희망의 근거를 끌어낸다.


또한 몰트만은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가진 확실하고 분명한 미래희망을 갖는다그러나 블로흐는 양자택일이라는 어찌될 줄 확신할 수 없는 아직-아님의 미래적 종말관을 지닌다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도 차이를 보인다몰트만에게 있어서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증거된 약속의 완성을 내다본다하지만 블로흐는 미래의 희망 역시 하나님으로부터의 탈출을 통한 인간의 나라를 희망한다는 점에서 크게 차이가 난다.


이 책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은 몰트만이 희망이 어떻게 우리로 하여금 저항의 삶을 살게 하는지 설명한 것이다. “희망은 우리로 모순의 세상과 투쟁하게 하고약속을 따라 저항하며 살아가는 삶을 가능하게 만든다이는 세계사적이고 선교적 사명에로의 소명이 발생하는 장소이기도 하다.”(96형이상학적이고 뜬구름의 희망이 아니라 피와 땀의 희망이 우리에게 있어야 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반대로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으로써 가장 아프게 다가왔던 한 구절이 있었다블로흐가 루터를 비판한 것으로 기독교가 저항과 전복의 정신을 잃고 체제 순응적인 성격만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루터의 견해에 따르면 고통의 십자가를 짊어져야 하는 자들은 권력자가 아니라뼈 빠지게 일하는 농부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165힘 있는 자들 보다는 힘 없는 자들에게 십자가를 지라고 쉽게 말하는 신앙의 민낯을 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 책 한 권으로 두 거장의 희망을 다 알게 되었다 말하는 것은 교만한 일일 것이다그러나 이전의 흐릿한 지평에서 좀더 분명한 지평으로 나아가게 되었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그러면서 한 가지 소득은 지금도 책꽂이 한켠에 먼지 수북이 쌓인 채로 꽂혀 있는 몰트만의 희망의 신학을 읽겠다는 다짐이 생겼다는 것이다.


희망의 두 지평 - 10점
이종인 지음/박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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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7. 8. 8. 07:27

P 전도사님께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서펑)


 전도사님 잘 지내죠? 여름사역이 한창 때라 바쁘게 지내고 있을 것 같습니다. 전도사님의 수고와 헌신으로 다음세대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이 증거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렇게 은혜를 끼치려면 전도사님도 공급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는데요.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좋은 책이 가장 좋은 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나온 신간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를 추천하고 싶네요.


 저자인 김기현 목사님은 현재 부산 로고스교회를 섬기고 계시고, 로고스서원이라고 해서 글쓰기학교, 북토크 등을 열어 한국교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분이세요. 무엇보다 목사님이시니 우리의 선배로써 우리가 겪고 있는 어려움들을 잘 아실거고, 또 이 책에도 그런 내용들이 있어서 더 좋은 것 같아요.

 먼저 이 책은 신앙에 있어서 균형을 잡아주고 있습니다.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양쪽을 다 붙들기 때문에 건강한 신앙생활을 하도록 안내해주고 있습니다. 신앙과 이성, 신앙과 철학, 기도와 노력,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전통의 계승과 혁신, 바르트와 니버 등 신앙에 있어서 양면적인 부분을 잘 논의하면서 깊이있게 이해하도록 돕고 있습니다.

 또한 목회자로써의 고민이 솔직히 드러나 있고,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특히 설교하러 앞에 서서 '설교를 잘 준비하지 못했고, 설교대로 살지 못하고 있으니 오늘은 설교를 못하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싶다는 고백은 정말 제 마음을 들킨 듯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을 이중적인 위선이라고 괴로워하기보다 긴장으로 받아들이라는 충고는 큰 도움이 됩니다. 무엇보다 부족하고 연약한 우리를 붙드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가장 기초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오늘의 이슈들을 다루면서 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돈과 신앙적인 경제관, 박근혜 전 대통령 사건과 정치의 정도, 교회의 위기에 대한 원인과 대안, 신앙의 공공성 등 요즘 우리나라와 기독교계에 이슈가 되는 주제들에 대한 안내를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상황을 잘 인식하고 바른 판단을 내릴 때 도움이 필요한 성도님들에게도 적절한 안내를 해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어때요 책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요? 지금은 여름사역 준비로 여유가 없어서 책 읽을 시간도 없이 바쁘겠지만 그럴수록 시간을 내어 이 책을 읽어보면 어떨까 싶네요. 어쩌면 준비로 불안하고 부족하다 느껴지는 전도사님의 마음에 하나님께서 말을 걸어오시는 은혜가 찾아올지도 모르겠습니다. 더운 여름 강건하시고 시원한 바람이 불 때 밥 한번 먹어요.


불완전한 삶에게 말을 걸다 - 10점
김기현 지음/예수전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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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7. 6. 29. 18:11

복음의 공공성/ 김근주(비아토르)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기독교윤리실천운동에서 조사한 2017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여론조사에서 기독교는 천주교불교 뒤에 위치한다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것은 교회와 사회 사이예배와 삶 사이의 불일치라고 생각한다교회 안에서는 신앙 좋은 사람이지만직장과 사회에서는 전혀 비신앙인들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 바로 그것이다어째서 이런 신앙의 균열이 생겨났을까여러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겠지만 신앙의 공적인 성격에 대해서는 별로 가르치거나 배운 적이 없기에 이런 결과가 나타났다 생각한다.


 이런 한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의 신앙을 한번에 바꿀 수는 없겠지만여기 그 흐름을 반전시킬 만한 귀한 책이 있다바로 김근주 교수의 복음의 공공성이다이 책에 의하면 우리 가운데 있는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한 정도가 아니라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한다(342). 그는 이 책을 통해 구약의 복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구약의 정치적사회적구조적 차원에 주목하여 성경을 개인적이고 사적인 영역에서 벗어나도록 돕는다구약의 핵심본문들을 다루기 때문에 구약을 한 눈에 개관할 수 있다는 유익은 덤이다.


 복음의 공공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의 시작창세기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형상부터 해석의 전환을 시도한다. ‘하나님의 형상의 실질적 의미는 복수로 존재하는 사람으로공동체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이다이렇게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49). 또한 하나님의 형상은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왕적인 존재로 부름 받았음을 의미한다왕이 사익이 아니라 공익을 위해야 하듯이 성도의 삶과 행위가 공적이어야 한다특히 노동은 하나님이 그분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존재 근거이며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제의가 아니라 일상의 일(65)이라는 점은 일과 노동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새롭게 한다.


 구약의 핵심적인 개념인 공의(쩨다카)와 정의(미슈파트)’가 공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다양한 본문을 통해서 드러낸다. ‘공의와 정의의 현장이 성문에서 이루어지는 재판임을 밝히며이것은 공공 영역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재판의 본질은 함께 살아가는 이웃의 괴로움힘겨운갈등을 듣고 그에 응답하는 것이기에다른 사람의 처지를 내 처지처럼 생각하고 공감하는 것이 중요하다특히 개인적인 복으로 오해하기 쉬운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공의와 정의를 행하는 것과 연결시켜 공적인 특성이 있음을 밝혀낸다.


 이러한 복음의 공공성을 인식할 때 우리의 관심은 사회적 약자에게 향해야 함을 강조한다이스라엘의 공의와 정의의 준수 여부는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바로 드러난다(141)는 것이다결국 신앙의 공적 차원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회의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구체화되어야 하며특히 레위기 19장에 나오는 거룩과 관련해서 개인의 자선보다는 모두를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구조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저자는 이런 삶이 야훼 신앙의 본질이며공적 신앙의 핵심’(343)이라고 역설한다.


 이 책을 통해서 나 자신을 포함한 한국교회가 그동안 성경을 해석하고 적용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사사롭게 대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개인의 성공이 아니면 개교회의 부흥으로 모든 것이 집중되었으니 말이다이제 이 책을 통해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에 있어 공적인 요소가 핵심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말씀을 공적으로 살아내어 다시 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는 일이 있기를 기대한다.


복음의 공공성 - 10점
김근주 지음/비아토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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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7. 6. 28. 22:38

복음의 공공성을 읽고

한국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공적인 자리에서 신뢰를 잃었다. 주일과 평일 사이 신앙의 불일치는 어제 오늘 일도 아니다. 어째서 이런  신앙의 균열이 생겨났을까. 신앙의 공적인 성격을 알지 못하고 배우지 못해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다면 한국 교회는 왜 이렇게 사적인 종교가 되어버렸을까. 기복신앙이나 개인의 탐욕과도 깊은 연관이 있겠다. 그러나 처음 한국에 기독교가 전해질 때 복음을 받아들여 신자가 될 때 엄청난 핍박과 순교까지 감당해야 했다. 개인이 신앙을 갖는 것 이외에는 더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가 이런 핍박과 박해를 인내하고 뛰어넘어 어느정도 위치를 차지하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과연 우리의 신앙과 믿음이 공적인 자리에서 어떻게 발휘되어야 하는지는 별로 강조되지 않았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신앙 좋은 사람이지만, 직장과 사회에서는 전혀 비신앙인들과 다를 바 없는 자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의 실질적 의미는 복수로 존재하는 사람이다. 공동체야 말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의 본질이다. 이런 관계를 고려할 때 우리 신앙은 수많은 관계 안에서 살아가기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공적일 수밖에 없다. 48-49

또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것은 사람이 이 땅에서 하나님의 통치를 드러내는 왕적인 존재로 부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왕의 통치가 공적이듯이 성도의 삶과 행위가 더더욱 공적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59

다스리는 것이 사람의 존재 이유라고 선언하며, 노동이 그 다스림의 구체적인 내용이라고 선언한다. 하나님은 예배하라고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일하라고 사람을 지으셨다. 노동은 하나님이 그분 형상대로 지으신 인간의 존재 근거다. 사람에게 주신 사명은 제의가 아니라 일상의 일이었다. 65

탐욕의 근원은 자기애다.83

하나님의 명령보다 개인의 욕망을 최우선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모든 영역을 사적 욕망의 영역으로 삼아버린 것이 문제의 근원이라고 풀이한다.

원죄를 반복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원복을 따라 관계를 피차 회복하고 세우며 공적 본질을 지켜나가는 영광스러운 삶을 살 것인가 102

 

정의와 공의.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하나님 백성으로 선택 받는 것은 열방을 위한 순종의 선택이요, 부르심이다. 그렇기에 하나님 백성은 근본적으로 공적 존재다. 127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땅고 자손의 약속을 주시는 이유는 공의와 정의를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129

하나님이 공적 이유로 그분 백성을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쩨다카로 규정할 수 있는 상황은 마음을 같이 하는 것, 동의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쩨다카를 행하는 것은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내 처지처럼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한 면에서 볼 때 쩨다카는 근본적으로 공적 문제다. 132.

하나님의 법도인 규례를 근거로 재판에서 판결을 내린다는 점에서, 미슈파트는 하나님의 법도를 근거로 올바른 사회 질서를 이루는 것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132

성문이 쩨다카와 미슈파트의 현장이라는 점은, 이 두 가치가 근본적으로 사사로운 것이 아니며 공공 영역과 연관이 있음을 명확이 보여준다.

외모와 뇌물에 좌우되는 재판은 자신이 유익을 기준으로 선악을 판단하는 것과 동일하다136

공적이라는 말은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지만 삶의 태도를 가리키는 말로도 씅니다. 138

이스라엘의 미슈파트와 쩨다카의 준수 여부는 사회의 가난하고 약한 사람들을 통해 바로 드러난다. 141

정의와 공의가 고아, 과부, 나그네와 같은 약자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난다는 점이다. 공적 차원을 고려한다는 의미가 이 사회의 약자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것으로 구체화된다.142

결국 의인들의 세상은 개인이나 집단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 앞에서 서로 도으이하고 공감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고려하는 세상이다. 143

 

출애굽

시내 산 율법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향한 법이다.

선악의 판단 기준이 하나님, 하나님의 법이 될 때 공동체적인 삶, 함께 살아가는 삶, 달리 말해 공적 삶이 가능해진다. 160

다들 죄 짓는 중에도 홀로 죄 짓지 않는 한 사람이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아니다. 그럴 때도 있을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함께 여호와의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공동체를 찾으신다. 161

 

문제의 본질은 동성애가 아니다. .동성이든 이성이든 힘없는 나그네를 향한 집단 성욕의 폭력적 발현이 문제였다. 교회는 동성애와 싸우는 곳이 아니라 나그네를 대접하기에 힘쓰는 곳이다. 179

나그네를 환대하지 않는 것이 소돔의 멸망의 원인이며,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을 겨오이하지 않는 이들의 근본 특징이다.

 

그러므로 요셉의 삶은 마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처럼, 하나님이 계시지 않은 것처럼, 그저 자기가 맡은 일을 최선을 다해 감당하고 다른 이에게 유익을 주며 정직하게 사는 삶이다.

요셉 본문은 우리에게 기독교인임을 종교 의식을 통해 말하지 말고, 일상을 통해 말하라고 한다. 190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마침내 성공해서 부자가 되고 출세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그 사람이 그 자리에서 그 부를 가지고 한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있다.

영향력 있는 위치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193

 

레위기19

공적 규례의 본질은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의 삶을 든든히 지켜내는 것이다.

연약한 이웃을 바르게 대하는 거룩함에 대한 말씀

가난한 이웃에 대한 사회적 책임이라는 세속적인 것 같은 개념을 가장 종교적인 단어인 거룩함으로 표현한다.

레위기에서 말하는 거룩한 삶은 내 자신의 자선보다는 사회 경제적인 틀, 법적인 틀을 만드는 데 관심이 있고, 내 자신의 자선보다는 서로 안정적으로 보호하는 구조에 관심이 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인간이라는 이상은 제도와 구조의 변화라는 현실과 함께 가야 한다.

지극히 추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일 수 있는 종교적 개념을 지극히 현실적으로 표현한 것이 19장의 특징이다.

 

우상숭배는 전적으로 자기를 위한사적 종교다.

자신의 힘과 이익과 안전과 평화를 위해 신을 조종하는 것이 우상숭배의 본질이므로, 우상숭배가 번성하는 곳에서는 힘없고 약한 자들이 짓밟힐 수밖에 없다. 예언자들이 우상숭배를 고발하면서 동시에 사회 경제적 불의를 고발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295

 

관계 안에서 이루는 쩨다카와 쩨다카 있게 사는 사람들이 모여서 이루는 미슈파트는 현실에서 가장 약하고 부족한 사람을 통해 예민하게 드러난다. 315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것은 하나님과 개인의 사귐을 더 깊게 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없다. 하나님에게 돌이키는 것은 성문에서 회복하는 정의다.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 가난한 자들의 권리를 공적 삶의 현장에서 지켜내는 것이다. 달리 생각하면 이스라엘의 멸망은 이렇게 공적인 신앙을 지극히 사사로운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데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신앙의 사사화는 부족하거나 미흡한 신앙이 아니라, 잘못된 신앙이다. 342

사회의 약자들을 중심에 둔 사고방식과 실천과 행동이야말로 야훼 신앙의 본질이며, 공적 신앙의 핵심이다. 343

 

사회적 약자에 대한 섬김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7. 5. 26. 18:13

** 창조적인 작품은 언제나 고유의 생명력을 가진다. 사람들이 그의 그림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으나 그 그림의 본질을 복제하지 못한다... 이런 까닭에, 진정한 예술가는 자신이 아는 전부를 다른 예술가에게 거리낌 없이 줄 수 있다. 진정한 예술가는 자기 삶의 중심에 근접해 산다. 그래서 타인의 성공에 위협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한 예술가는 타인의 성공이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빼앗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타인의 작품은 도리어 그의 지평을 넓혀주고 그의 은사를 끌어낼 뿐이다. 28

그는 자신의 자리가 있음을 알며, 그 자리를 자신에게 보여 주실 분 곁에 살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삶이 그의 소명이 된다.

삶을 소명으로 여긴다는 말은 넓은 길과 좁은 길이 있음을 안다는 뜻이다. 넓은 길은 생각이 없는 길, 좁은 길은 생각이 있는 길이라 불러도 좋다. 30

부모는 자녀의 개성을 끌어내고 자녀가 자신만의 특별한 운명을 자각하도록 도와주어야 하는데, 그러기는커녕 자녀를 자신의 연장 정도로 여긴다. 32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군중에서 발을 빼도록 도모하신다. 어떤 사건이나, 번뜩이는 통찰이나, 큰 아픔이 일어난다. 34

자신이 그 길을 가지 않고 있는데도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상상하기 십상이다. 이 지점에서, 종교인들은 하나님 나라를 놓친다. 이들은 자신은 두 길을 알고, 또 두 번째 길을 선택했으니 당연히 그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35

내적 여정의 세 가지 소통. 자신, 하나님, 다른 사람들과의 소통. 

모든 동물은 자신만의 세계에 산다고 말한다. 그것은 움벨트, 곧 자신이 반응하는 바깥 세계의 대상으로만 구성된 닫힌 세계다... 모든 사람은 자신의 좁은 움벨트를 넓히고 더 알아가는 과제를 평생 수행한다. 42

이렇게 자신과 소통하는 일에는 질문하기도 포함된다. 교회는 질문을 끌어내는 곳이라고 알려져야 마땅하다. 43

우리는 경직되고 편협한 삶이 노년에 시작된다고 착각한다. 사실, 이런 삶은 이십 대나 삼십 대에, 또는 언제든 우리가 내적 여정을 포기할 때 시작된다. 44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알려면, 자주 자기 연구를 내려 놓고 하나님의 '크심과 위엄'을 묵상해야 한다. 테레사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보기에,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고는 절대로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48

그러나 그분을 아는 주된 방법 가운데 하나는 성경에 뿌리를 내린 기도다. 48

삶의 내용과 질은 우리가 평범한 일에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결정되며, 우리가 시간을 내어 내적인 삶에 자양분을 공급하느냐 그러지 못하느냐에 달렸다. 49

**헌신이란, 특정 그룹의 사람들에게 "기꺼이 여러분과 함께 하겠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에게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볼 때까지, 서로의 관계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지체임을 알 때까지, 서로 깊은 관계를 맺으며 살자고 약속하는, 비참하고 비틀대는 한 무리의 죄인들에 대한 헌신이다.

* 교회 밖에서 그룹을 만들 때, 우리는 가까이하고 싶은 사람들과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을 구분한다... 교회는 유일하게 이렇게 하지 않는 곳이다. 한 사람을 교회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까닭은 그가 특정 유형이기 때문이거나, 삶에서 특정 위치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 사람을 부른게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부르셨다. 58

이런 이상한 공동체에서, 우리의 헌신은 일시적이지 않고, 우리는 마음껏 행동하고 말하게 된다... 말 때문에 잘릴 위험이 없음을 안다면 모임에 대해 부정적 반응과 행동을 서슴없이 표현해도 된다... 다시 함께할 테고, 그것이 지금 이렁나거나 일어나지 않는 것에 좌우되지 않음을 안다면 자신과 형제 사이에 무엇이 가로막혔는지 말해도 괜찮다. 59

* 평화는 그리스도인이 교제하는 목적이라고 생각했기에, 우리는 진실한 모습을 서로 숨기면서까지 '좋은'관계를 유지해왔다. 하지만 이런 평화를 추구하면 순례자로 동행하는 걸 포기하는 셈이다. 60

구르지에프는 우리가 자신에 대한 환상이 아닌 진짜 자신을 보아야 하며, 마찰은 갈등을 일으키고 갈등은 사람들로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는 이론을 적용했다.

그러면 우리는 다른 곳에 마음이 더 잘 맞는 환경과 마음에 더 잘 맞는 사람, 즉 "나처럼 생각하고 나처럼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렇게 유별난 그룹을 고집해 봐야 유익이 없다고 합리화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곰곰이 생각해 보면 상당히 우둔한 생각이며 허상이다. 61

내적인 삶을 키우는 목적은 잣니에게 비밀스런 유익을 안겨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조용한 아침 시간에 자기 내면에서 아늑한 자리를 찾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살아가며 부대끼는 현장에서 그 아늑한 자리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그곳에서 한 말과 그곳에서 빚어진 우리의 모습이 바깥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결국 그 일은 중요하지 않다. 65

내적인 삶의 성장과 관련된 훈련을 향해 늘 "율법주의!"라고 불러대는 사람들이 특별한 일을 성취하는 데 꼭 필요한 엄격한 훈련에 대해서도 그렇게 불러대는 오류를 범한다.

내면과 외면은 모두 중요하게 고려되어야 한다. 68

* 교회는 지금껏 우리에게 무엇을 해야 한다고 말할 때가 너무 많았고, 우리가 될 수 있는 존재가 되도록 돕지 못했다. 새로운 형태의 교회는 모든 사람이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필요에 맞게 만들어질 것이다.

외적 여정은 부분적으로 내적 여정에서 발견한 은사에 따라 결정된다. 71

한 사람의 삶에서 어느 순간에는 합당한 소명이 다음 순간에도 반드시 합당하지는 않다. 74

자신이 진리로 이애하는 대상에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줄 때, 새로운 앎에 이른다... 그리스도 안에서 들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그분의 세상과 화해하는 하나님의 선교에 동참하라는 부르심이다. 이러한 화해는 우리 안에서 화해가 이뤄지는 만큼만 이뤄진다. 75

그는 타인의 은사를 끌어내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우선 과제이자 사명이라고 요약했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마음 깊이 알고 있으며,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이러한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입니다." 76

* 지금 하는 일을 아주 즐겁게 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깊은 것을 끌어낼 방법을 가진 셈입니다. 이런 사람이 좋은 소식(Good News)입니다. 그는 좋은 소식을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 사람 자체가 좋은 소식입니다. 그는 새사람이 누리는 자유를 만끽하는 사람입니다. 자신의 은사를 자유롭게 활용하는 사람은 성령께서 하고자 하시는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 하시게 할 수 있습니다." 77

섬김에 뿌리내리지 않는 기독교 공동체는 없으며, 관계에 뿌리내리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섬김도 없다. 그리스도께서 씻기신 발은 다름 아닌 친구들의 발이었다...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기란 쉽지만 이웃을,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82

* 고든은 그룹 중재자의 책임에 대해, 늘 무엇보다 그룹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그 깊이를 더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하려면, 계속해서 소명을 일깨우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그가 말한 '소명을 일깨운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간단히 말해, 매우 기본적인 사실을 거듭거듭 말한다는 뜻이었다. 92

세이비어 교회에서 우리는 공동체로 살아간다. 공동체로 살면서 자기 문제를 감추지는 못한다... 기독교 공동체는 우리의 어린 시절 가정에 가장 근접한 공동체다. 어린 시절에 가정에서 받은 상처와 해결하지 못한 문제들이 새로운 '믿음의 가정'에서 다시 밝히 드러난다. 102

* 진정한 성장에는 아픔이 따른다. 진정한 깨달음에는 고통이 따른다. 103

또한 정신 건강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해체 과정이 없으면 인격이 성장하지 않는다는 이론들을 진지하게 숙고한다. 우리 자신과 타인들의 눈에 우리의 내면이 산산조각 나고 있다면, 그런 과정은 인격이 한 단계 성장하기 위한 준비 단계일 것이다. 103

우리 사회가 노화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우리가 삶에서 영적 차원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 삶에 새겨진 하나님의 계획을 놓치고, 삶이 각 시기마다 우리 존재를 새로운 단계로 부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삶에서 우리의 감정을 격동시키는 다른 모든 위기는 성장과 더 깊은 사고를 낳는 동일한 창조적 잠재력을 갖는다. 

**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큰 문제 없는 사람들을 가장 불쌍히 여겨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고통과 상실의 기억이 없으며, 한밤중에 울었던 기억도 없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겪는 아픔과 상실을 듣는 귀가 없다. 어쩌면 이런 사람들이 가장 많은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그들은 자신을 잃어버리고, 슬픔에 잠긴 세상을 잃어버린 사람들이다. 104 

*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잘 듣지 못하는지 안다. 그러나 그 이유는 그간 자신에게 귀를 기울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의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의 말도 듣지 못한다. 111

사실, 우리는 태생적으로 타인에게 존재하고, 순간에 대해 존재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교회로서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까닭은 내주하시는 교회의 주님께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을 그분의 임재 속으로 불러들이지 못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이 그분의 임재를 잊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순간의 하나님과 함께 서 있는 대신, 수많은 길을 달려 내려온다. 125

하나님은 말씀하시지만 우리가 들을 준비가 된 말씀만이 우리에게 들린다는 인식이 거의 없다. 내면의 깊이가 더할 때마다 거룩한 것에 마음이 열린다. 127

우리는 미래마저도 과거를 회피하는 도피처로 삼는다. 다시 말해, 자기 삶의 역사를 살피려 들지 않고 미래로 피하려 든다...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사실은 사랑으로 모험을 감행할 만큼 안전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나님 나라를 위한 훈련'이란 사랑이 있다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실패와 시련, 상실을 비롯해 어떠한 삶의 역경 가운데서도 변함없이 열정적인 사랑이 고난을 당당히 견디게 해 주리라는 믿음을 회복하는 것이다. 144

우리가 종종 새것을 못 받아들이는 까닭은 자신의 자리가 안전하지 못하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145

구성원들이 이렇게 말하는 그룹은 질병의 징후를 보이는 셈이다. "이 작은 그룹은 멋져요. 이곳 사람들을 사랑해요. 이들도 저를 사랑하지요. 이곳이 우리 교회예요. 다른 사람들은 필요 없어요." 157

데이스프링 수련회를 통해, 목회자들은 교회 갱신의 문제가 자신의 내적 문제임을 깨닫기 시작한다. 160

수련회에서 우리는 자신과의 소통과 하나님과의 소통이 서로 연결된다는 것을 자주 분명하게 확인했다. 165

교회는 보살핌과 관심과 교육을 통해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가진 사람들이 되어 감의 여정을 스스로 시작하게 해 주어야 한다... 종이신 주님을 본받아 사는 공동체를 말하지 않고는 세상 속의 교회를 말할 수 없다... 자신 속에 있는 분리의 담을 허무는 경험을 가능하게 하는 가시적 공동체만이 소외와 고립으로부터 우리를 이끌어 내시는 하나님을 증언한다. 175

** 타인을 사랑하는 첫걸음 중 하나는 하나님이 우리의 특별한 카리스마를 불러내시게 하는 것이라고 고든은 다시 강조했다. 그는 사랑이란 자신을 타인에게 주는 사건이며, 우리의 본질이 실현되지 않으면, 즉 우리가 본래 의도되었던 존재가 되지 못하면, 자신을 타인에게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잠재력이 막혀 흘러갈 창조적 통로를 찾지 못하면, 우리는 타인에 대해 시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자신의 은사를 발견하지 않고는 타인을 사랑하지 못합니다." 182

"여기서 말하는 충만하고 결실이 풍성한 종교란 신비적이고나 정서적인 요소, 역사적이거나 제도적인 요소, 지적이거나 과학적인 요소 사이의 창조적 긴장을 포함하는 종교를 말한다." 187

1. 존재하는 사람이 되려면 내적인 삶을 발전시켜야 한다. 2. 삶을 향해 열려 있는 복된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은사를 찾아내고 활용해야 한다. 3. 잠재력을 실현하려면 훈련해야 한다. 4. 성장하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을 알아야 한다. 5. 받기보다 주면서 사는 데 강조점을 두는 삶으로 보이지 않는 선을 넘으려면 목자가 되어야 한다. 188

* 이들에게 '기독교 공동체'로 산다는 말은 선교한다는 뜻으로 보였고, 교회로서 선교한다는 말은 공동체로 산다는 뜻으로 보였다. 194

우리는 먼저 서로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해야 했습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가 선교하며 만날 사람들에게 자신을 열어 보이는 위험을 감수할 준비가 된 거지요. 195

이들은 다른 사람의 실패에 율법주의적 태도를 취했으며, 규범이란 그 자체로는 가치가 없고 구성원들이 서로를 위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기본적인 사실을 잊었다. 214

이들이 거리에서 보았던 어둠은 자신 속에서 발견한 어둠과 다르지 앟았다. 이것은 이들에게 일어난 가장 중요한 일 같았다. 어쩌면, 이들 사이의 사랑만큼 중요한 것으로 치유하시는 그리스도의 임재를 증명했다. 

그해 말에 누군가 이들에게 언약 공동체를 정의해 보라고 했다면, 세밀한 정의를 제쳐 두고 간단하게 몇몇 사람들이 자신이 누구며 무엇인지 알려고 몸부림쳤던 씨름이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227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는 안정이냐, 위험하지만 온전한 삶이냐,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269

제자의 삶이란 적어도 두세 사람이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며 구체적이고 책임 있는 관계를 형성하는 공동체에 속하는 삶을 포함한다. 이러한 공동체는 그 속에서 우리의 장점을 발견하고 약점을 드러내는 공동체이고, 그 속에서 친밀감을 쌓고 상처를 경험하는 공동체이며, 그 속에서 우리의 이해와 가치관에 적대적인 형제를 참아 내는 공동체다. 이것은 그 속에서 우리가 지지를 받는 공동체이며, 배신당하기도 하는 공동체다. 이러한 공동체는 타인을 위한 사람이 목표가 되는 공동체다. 274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6. 9. 6. 14:48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서평)


고통의 문제로 씨름하는 목회자들에게

최근 권사님 한 분이 병원에 입원하게 되셨다. 지난 일 년간 남편 집사님께서 폐질환으로 입원해서 간호하느라 너무 고생하셨다. 결국 올 초에 남편 집사님께서 돌아가셔서 장례를 치르셨다. 겨우 고난을 벗어나시나 했는데, 이제 본인이 고난의 길로 접어드셨다. 병명은 척추경색이다.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와서 다리에 감각이 없어 잘 걷지 못하는 증상이다. 다행히 조금씩 감각이 돌아와서 걷는데 도움이 되는 재활치료중이셨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지난 금요일 재활치료 중 뇌경색이 와서 급하게 수술을 하셨다. 병원에 있어서 금방 처치는 되었는데 언어기능을 담당하는 부분에 손상이 와서 현재 말을 잘 못하신다. 시간이 지나면 더 회복된다고는 하는데 본인이 많이 낙담한 상황이다. 찾아가서 하나님만 의지하시도록 기도하고 돌아왔다. 만감이 교차했다. 여러번 심방 가서 간절히 기도했는데 이것은 무슨 상황인가? 나는 영빨이 없는 목사인가? 연속으로 파도처럼 몰려드는 성도들의 고난 앞에 나는 무기력한 목회자이다. 이렇게 목회자는 고통과 씨름할 수밖에 없다.

오늘도 이런 목회의 현장에서 고통과 씨름하는 목회자들에게 좋은 소식이 있다. 김기현 목사님이 쓴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라는 책이 최근 출간되었다. 하박국에 나타난 이스라엘 백성의 고난과 고통을 자신의 삶으로 풀어낸 책이다. 무엇보다 본인이 담임목회자로 성도들과의 갈등 속에서 경험한 고통에 대한 내용들이기에 목회자들에게 깊이 공감이 된다.

이 책은 고통에 대한 모든 내용이 담겨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구식으로 말하면 ‘백과사전’이고, 오늘날로 말하면 ‘위키피디아’이다. 고통에 대한 고전의 통찰력을 배울 수 있다. C. S. 루이스, 해롤드 쿠쉬너, 니콜라스 윌터스토프, 스캇 펙 등 신앙의 대가들이 고통의 문제에 대해 깊이 묵상한 귀중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보고이다. 그러나 단순히 이런 지식을 수집해 놓은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을 고찰하여 균형잡힌 시각을 갖게 한다. 이 책은 애피타이저와 같이 고통의 문제에 관심을 갖게 하며, 본요리와 같이 고통의 의미를 깨닫게 하고, 디저트와 같이 고통의 대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한다.

이 책을 통해 우리 삶에 있어 고통에 대한 해결로 제시되는 것은 하나님이시다. 특히 고통받는 하나님이시다. 신정론에 있어서 하나님은 고통이나 악과 양립할 수 없어 문제가 된다. 전능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어나는 고통과 악을 그냥 두실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깨닫게 되는 것은 누구보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에 가슴아파하시며 괴로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나는, 우리의 고통의 자리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결자해지. 하나님이 문제유발자이지만, 결국 문제해결자가 되신다는 귀중한 깨달음을 얻는다.

이 책을 통해 깨닫는 것은 목회자는 고통받는 자리에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나기 위해, 그들 역시 고통받는 자들과 함께 하는 자들이다. 김병년 목사님은 본인의 책 ‘난 당신이 좋아’에서 이렇게 고백한다.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함께 있어 줄 친구인데, 단순히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연약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고립감에 빠지지 않고, 함께함으로써 소속감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러고보면 목회자는 고통을 해결해주는 자가 아니라, 함께 성도의 고통의 씨름에 참여하는 자인 것이다.

저자는 이번에 개정판을 내면서 ‘다시 쓰는 것은 다시 사는 것이다’라고 고백한다. 다시 사는 것의 뉘앙스를 느껴보시라. 그리고 책을 ‘사서’, 성도의 고통의 자리에서 함께 씨름하는 삶을 ‘사는’ 보람과 기쁨을 누리시길 기대한다.

하박국, 고통을 노래하다 - 10점
김기현 지음/복있는사람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