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다르크는 톨스토이처럼 모든 길을 거부하지도, 니체처럼 모든 길을 수용하지도 않음으로써 교차로에 고착되지 않았다. 그녀는 하나의 길을 택하여 벼락같이 그 길을 따라갔다. 108
그녀는 무언가를 행했던 아주 실체적인 인물이었던 반면에, 그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변가에 불과했다. 109
전통은 선거권의 확장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전통이란 모든 계급 가운데 가장 낮은 계급, 곧 우리의 조상들에게 표를 던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죽은 자들의 민주주의이다. 전통은 어쩌다가 권력을 쥐게 된 거만한 소수 지배층에 굴복하기를 거부한다. 모든 민주주의자는 사람들이 출생시눕ㄴ에 의해 그 자격이 박탈당하는 것을 반대한다. 117
민주주의는 우리에게, 비록 하인일지언정 좋은 사람의 의견을 무시하지 말라고 일러준다... 어쨌든 나로서는 민주주의의 개념과 전통의 개념을 따로 분리시킬 수 없다. 117
바로 나는 내가 속한 골치 아픈 특수한 문필가 계층을 믿기보다는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의 주름살을 믿는 것이다. 117
이런 것들이 해결된 다음에는 동화 철학이 두 번째 위대한 원리가 등장한다... 현학적 냄새를 풍기기 위해 나는 그것을 조건부 기쁨의 교리라고 부를 것이다. 131
그렇지만 깨지기 쉬운 것이 썩기 쉬운 것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유리를 쳐 보라. 그러면 잠시도 견디지 못할 것이다. 그냥 유리를 치지 말아 보라. 그러면 천 년을 견딜 것이다. 요정의 나라에서든 지구에서든 사람의 기쁨도 바로 그런 것처럼 보였다. 행복은 무언가를 하지 않는 것, 곧 어느 순간에든 할 수 있으나 할 이유가 종종 분명하지 않은 어떤 행동을 하지 않는 것에 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나에게는 부당하게 보이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 134
나는 동화들을 아기방의 마룻바닥에 두고 떠났는데, 여태껏 그만큼 분별력 있는 책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또한 전통과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보모를 떠났는데, 이제까지 그처럼 분별력을 갖춘 급진적이거나 보수적인 현대적 유형을 발견하지 못했다. 137
첫째 이 세계는 거칠면서도 경이로운 곳이며, 현재와 상당히 달라질 수도 있었지만 현 상태로도 무척 즐거운 장소라는 확신과 둘째, 이런 거침과 즐거움 앞에서 우리는 당연히 겸손해야 하고, 그토록 기이한 친절의 기이한 제한사항에 마땅히 순복해야 한다는 확신이다. 138
첫째, 나는 현대 세계 전체가 과학적 숙명론을 얘기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말하자면, 모든 것은 처음부터 아무 결함도 없이 개현되어 왔으므로 현재의 모습이 과거의 모습 그대로라는 것이다. 138
인간사에서 일어나는 변화는 대체로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의해 야기되기 때문이다... 이를 대중적인 말로 표현하자면, 해가 규칙적으로 뜨는 것은 그 일이 결코 지겹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게 옳다. 그의 일과는 생명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용솟음 덕분에 영위되는 것이다. 141
어린이들은 생명력이 충만하고 열정적이며 홀가분한 기분을 갖고 있기 때무에 어떤 것이 변함없이 반복되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은 언제나 "또 해 줘요"라고 말하고, 어른은 녹초가 되기까지 그것을 반복해서 행한다. 아이들과 달리 어른은 단조로운 행휘를 보고 미친 듯이 기뻐할 정도로 강하지가 않기 때문이다. 반면에 하나님은 그런 반복적인 행위를 무척 기뻐할 정도로 강하신 것 같다. 하나님이 아침마다 해를 향해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다. 물론 저녁마다 달에게 "또 해봐"하고 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142
하나님은 마치 어린아이처럼 영원히 변함없는 열정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죄를 지어 늙어버렸고,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우리보다 더 젊기 때문일 것이다. 142
자연의 반복현상은 단순히 되풀이되는 현상이 아니라, 무대에서 받는 앙코르 때문일지도 모른다. 142
첫째, 이 세계는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설명하지 않는다. 세계는 초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또는 자연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기적인지도 모른다.
둘째, 마법은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고, 의미는 그것을 뜻하는 누군가가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느끼게 되었다. 이 세계는 예술작품과 같은 인격적인 면이 있다. 그게 무슨 의도든지 간에 강렬한 의도가 거기에 담겨 있다.
셋째, 나는 그것이 아름다운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넷째, 이 세계에 대해 감사하려면 겸손과 절제의 모양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 속에 다음과 같은 참으로 이상하고 모호한 느낌이 스며들었다. 모든 좋은 것은 최초의 파산에서 살아남아 보존된 신성한 잔유물이라는 느낌이었다. 사람은, 크루소가 자기의 물건을 건졌듯이, 자기의 좋은 것들을 파선에서부터 건져내었던 것이다. 151.
5장 세계의 깃발
낙관주의자는 당신의 눈을 주시하는 사람이고, 비관주의자는 당신의 발을 주시하는 사람이다. 155.
사람은 과연 이 세계에 속하는 일이 좋은지 묻기도 전에 이미 여기에 속해 있다... 본질적인 문제를 요약하자면, 그는 어떤 동경심을 품기 한참 전에 이미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56.
이 둘을 피하는 유일한 길은 누군가 핌리코를 사랑해 주는 일인 것 같다. 그것을 사랑하되 세상적인 이유가 아니라 초월적인 유대감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157.
그들은 그들의 종교를 지킴으로써 도덕을 얻은 셈이었다. 그들은 용기를 함양하지 않았다. 신전을 위해 싸우다 보니 용기 있는 사람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정결함을 함양하지 않았다. 제단을 위해 스스로를 정결케 하다 보니 깨끗하게 되었던 것이다. 159.
비관주의자의 악은 그가 신들과 사람들을 질책하는 점이 아니라, 자기가 질책하는 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그에게는 사물에 대한 일차적이고 초자연적인 충성심이 없다. 162
그러면 보통 낙관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악은 무엇인가? 낙관주의자는 이 세계의 명예를 변호하고 싶은 나머지 변호할 수 없는 것을 변호하는 것이 문제이다. 162.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나쁜 낙관주의(회칠하는 것, 모든 것을 엉성하게 변호하는 것)가 합리적 낙관주의와 함께 온다는 점이다. 합리적인 낙관주의는 침체를 낳는다. 반면에 개혁으로 이끄는 것은 비합리적인 낙관주의다. 162
자기가 사랑하는 곳을 망칠 가능성이 가장 높은 사람은 어떤 이유 때문에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 장소를 개선하게 될 사람은 아무런 이유 없이 그곳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핌리코의 어떤 특징을 사랑한다면(그럴 가능성이 별로 없지만), 그는 핌리코 자체에 반대하면서까지 그 특징을 옹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냥 핌리코 자체를 사랑할 경우에는, 그곳을 황폐하게 만든 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변모시킬 수도 있다. 물론 나는 그 개혁이 과도하게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다만 개혁을 주도하는 인물은 신비주의적인 애국자임을 말하고 싶을 뿐이다. 163.
믿음과 혁명이라는 우리의 거대한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이 세계를 타협의 일환으로 차갑게 수용하는 태도가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뜨겁게 미워하고 뜨겁게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이다. 우리는 기쁨과 분노가 서로 상쇄되어 그냥 자족하는 상태를 낳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강렬한 기쁨과 더 강렬한 불만족을 원한다. 우리는 우주를 우리가 습격해야 할 괴물의 성으로 느끼는 동시에 저녁에는 돌아갈 수 있는 우리의 오두막으로 여길 수 있어야 한다. 167.
달리 말하면, 순교자가 숭고한 것은 바로 생명과의 궁극적인 연줄을 고백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의 마음을 자기 바깥에 둔다. 그는 무언가를 살게 하려고 죽음을 택한다. 자살이 비열한 것은 자살자에게 존재와의 이런 연줄이 없기 때문이다. 그는 단순한 파괴자일 뿐이며 영적으로 우주를 파괴한다. 170.
기독교가 세상에 들어온 것은 무엇보다도 사람은 내면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바깥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경이감과 열정을 품은 채 신적인 동반자와 신적인 우두머리를 바라보아야 한다고 격렬하게 주장하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 다음과 같은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사람은 내면의 빛과 함께 홀로 내버려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과 해처럼 아름답고 달처럼 청명하며 군기 달린 군대처럼 무서운 저 바깥의 빛을 명백히 인식하는 즐거움이다. 176.
이 세계를 정말로 즐기는 사람들은 그것을 해체하느라 바빴고, 덕스러운 사람들은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의 관심이 없었다. 이런 딜레마 속에서 기독교가 갑자기 진입하여 독자적인 답변을 내놓았고, 세계가 마침내 그것을 정답으로 수용했다. 당시에도 정답이었거니와 지금도 정답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 답변은 마치 칼로 휘두르는 것과 같았다. 그것은 잘라 버렸고, 어느 의미로든 감상적으로 묶어 놓지 않았다. 그것은 순식간에 하나님을 우주로부터 분리시켰다. 요즈음 일부 그리스도인이 기독교로부터 제거하기 원하는 하나님의 초월성과 독특성이야말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했던 유일한 이유였다. 그 특성은 기독교가 불행한 비관주의자는 물론이고 더 불행한 낙관주의자에게도 제공하는 답변의 핵심이었다. 178.
그리고 모든 기독교 유신론의 뿌리 어구는, 마치 예술가가 창조자이듯이 하나님은 창조자라는 것이다... 모든 창조와 출산은 곧 분리의 행위라는 이 원리는, 모든 성장은 뻗어나가는 것이라는 진화의 원리와 마찬가지로 우주를 가로질러 일관성 있게 작용하고 있다. 여인은 한 아이를 출산하는 중에도 한 아이를 잃는다. 모든 창조는 분리이다. 출생은 죽음만큼이나 엄숙한 이별이다. 179.
또한 나는 기독교 신학에서 단단한 대못같은 두드러진 특징을 발견했는데, 그것은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고 세계를 그 자신에게서 분리했다는 도그마적인 주장이었다. 181.
기독교적 낙관주의는 우리가 이 세계에 들어맞지 않는다는 사실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과거에 나는, 사람은 하나님에게 고기를 구하는 다른 여느 동물과 같은 하나의 동물이라고 독백함으로써 행복해지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사람이 하나의 괴물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정말로 행복했다. 내가 모든 것을 묘하게 느꼈던 것은 옳았다. 나 자신은 모든 것보다 더 못한 동시에 더 나은 존재였기 때문이다.
낙관주의자의 즐거움은 모든 것의 자연스러움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산문적 성격을 갖고 있었다. 반면에 그리스도인의 즐거움은 초자연적인 것에 비추어 모든 것의 부자연스러움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에 시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1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