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의 아이 │ 스탠리 하우어워스 │ IVP
개인적으로 하우어워스를 알게 된 것은 그의 책 '하나님의 나그네된 백성'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나그네라는 제목부터 강하게 마음에 다가왔다. 우연히 다른 교역자의 책상에 '한나의 아이'라는 제목의 책이 놓여진 것을 보았고 이후 여러 매체에서 하우어워스의 자서전이라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한나의 아이라니. 사무엘이 아닌가. 눈에 띄였다. 왜냐하면 내가 바로 어렸을 때 집에서 불리운 이름이기 때문에 그렇다. 누나 네 명에 막내 아들인 나.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로 태어났기에 성경의 그 어떤 인물보다 나 자신을 일치화하는데 자연스러웠던 인물이 한나의 아이인 사무엘이었다. 왠지 내가 나중에 쓸 내 자서전의 제목을 빼앗긴 것 같아 아깝고 분했지만 이미 늦었다. 그러나 또 다른 한나의 아이는 어떻게 삶의 여정을 살아왔는지 구미가 당겼다.
이 책을 통해 최고의 신학자 하우어워스 개인적인 특징들을 알게 되었다. 마치 페북을 통해서 유명한 이들의 삶을 비교적 가깝게 아는 것이 비교할 수 있을까. 먼저 그는 강한 소신의 사람이다. 그는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따라 본인의 생각하는 내용과 방식을 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한다. 신학적으로 굉장히 폭이 넓고 어떤 입장을 갖지 않는다고 말하는 그의 태도와는 무언가 반대되는 모습이기도 하다. 또한, 그는 대화중 비속어를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사람이었다. 교수임용시 그것을 감시하고 관찰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꽤 터프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오랜기간 지속되었던 아내의 정신질환과 그것으로 인해 서로를 지지해주었던 아들 애덤과의 정서적 일치가 있었다.
그의 신학의 여정을 보게 되었다.
다양한 종파를 경험한 그의 신학의 여정
칼 바르트의 영향
존 요더와의 교제
믿음의 확신과 분명한 입장과는 거리를 둔 신앙과 신학
이 책을 잡기 시작한 지 3-4일 만에 다 읽게 되었다. 소설과 같다. 이야기들을 잘 펼쳐가며 그 속에 교훈을 엮어 놓았다. 글쓰기에 좋은 참고가 될 것 같다.
한나의 아이 - 스탠리 하우어워스 지음, 홍종락 옮김/IV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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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발췌
나는 '스탠리 하우어워스'가 될 의도가 없었다. 19
"'최고'는 신학적 범주가 아닙니다." -타임지에 2001년 "미국 최고의 신학자"로 선정되었음을 학교 홍보담당자가 알려주었을 때의 반응 19
1. 구원받기
내가 어머니의 기도의 결실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스탠리 하우어워스라는 사람의 실살이 그 기도의 결과물이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다. 비록 하나님의 이상한 종이긴 해도 말이다. 31
2. 일과 가족
재료를 뜻대로 다루기 위해 우리가 그것을 받아들일 때도 있지만, 때로는 재료가 나름의 방식으로 우리에게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그래서 싸움이 시작된다... 우리는 종종 재료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로 인해 더 나은 작품이 나온다.
신학자는 석공과 조적공처럼 자신이 다루어야 하는 재료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한다. 특히, 믿음의 언어가 가진 단순한 복잡성을 존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러면 정통신학의 급진적 특성을 숙고하게 될 것이다.
팔복이 이상이 되면, 그리스도께서 불러오신 새 시대에 속한 사람들의 특징을 알리는 묘사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한 공식이 되어 버릴 수 있습니다. 팔복은 모든 사람을 위한 일반적인 추천 사항이 아니라 어린 양의 피로 씻김을 받은 사람들을 묘사하는 내용입니다. 87
아버지의 인생이 유창함의 핵심인 단순함의 본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95
그 많은 일을 어떻게 다 해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데, 대답은 간단하다. 일을 하면 된다. 매일 아침 다섯 시에 일어나 저녁 여섯 시까지 일을 한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15분이 있으면 이것저것을 읽을 수 있다. 물통에 물을 마시러 갔으면 반드시 벽돌 몇 개라도 가지고 자리에 가지고 자리에 돌아오는 원칙과 다를 바 없다. 그렇게 철저히 시간을 관리하는 거이 다른 이들에게는 숨 막히게 느껴질 수 있고 가끔은 나도 그렇게 느낀다. 폴라 덕분에 나는 쉬는 법을 조금은 배웠다. 하지만 내가 일하는 것은 내게 주어진 일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98
벽돌은 한 번에 하나밖에 쌓을 수 없다는 교훈 말이다. 99
3. 공부
신경이 '아버지'를 '창조주' 앞에 두었다는 데서 우리는 첫 번째 조항이 두 번째 조항과 분리될 수 없다는 교훈을 배워야 한다. 따라서 창조의 교리는 필연적으로 종말론적 교리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끝을 보았기 때문에 시작이 있었음을 안다. 창조는 '지나간 과거'가 아니다. 창조는 하나님의 모든 행동의 특성이다.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개입'하실 필요가 없다. 창조 세계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으로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존재의 불가사의한 경이로움으로의 초대라는 것을 깨닫기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언어는 필연적으로 유비적이며, 이것은 교회가 하나님에 대해 말해야 하는 것보다 더 말하지 않도록 돕는 것이 신학의 과제라는 뜻이다. 111
길버트 라일의 '마음의 개념'이라는 책... 당시 신약학계의 주요 논쟁거리였던 예수의 '메시야 의식'을 둘러싼 추정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궁금해졌다. 한마디로, 나는 이후 내가 평생 연구하게 되는 주제와 이어지고 있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한 이해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112
나는 호머의 키르케고를 해설을 통해 신학은 일종의 실천 이성으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임을 배우고 있었다. 113
나는 노동조합의 필요성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사회복음이 새롭게 중요하게 다가왔다. 118
성품과 덕이 도덕적 생활을 이해하는 핵심이라고 생각하게 된 것은 짐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121
당시 많은 학자들은 신학의 임무가 신앙의 언어를 세상이 정해 놓은 기준에 맞추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정말 중요한 질문은 기독교를 세상에 맞출 수 있느냐가 아니라 세상을 그리스도인이 믿는 바에 맞출 수 있느냐였다. 122
내가 바르트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어떤 부분에서도 대충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설명하려' 들지 않았다. 오히려 언어가 어떻게 쓰이는지 보임으로써 언어의 작동 방식을 드러내려 했다...
하트 교수의 수업을 들으면서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단순한 믿음의 복잡성을 헤아리게 되었다. 하트 교수와 함께 바르트을 읽으면서 "예수님이 주님이시다" 같은 주장이 올바로 전해지려면 끊임없는 변주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교회교의학 모든 책은 한 가지를 잘 말하기 위해 필요한 연관관계를 보여주는 훈련이다. 그러므로 바르트의 시각에서 볼 때 신학의 임무는 결코 끝날 수 없다. 123
호머 교수에게 배운 매우 귀중한 교훈 중 하나는 지적 활동을 탐구로 이해하는 것이어다... 나느 ㄴ입장이 사고를 얼마나 쉽게 방해하는지 파악할 수 있었다... 입장의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면 그리스도인에게 필요한 것이 이론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내가 평화주의자인 이유는 어떤 이론 때문이 아니라 비폭력주의와 기독교가 뗄 수 없이 이어져 있다는 존 하워드 요더의 주장에 설득되었기 때문이다. 125
나는 하트 교수에게 배운, 신학을 '체계'로 이해하는 것이 최선이 아니라는 교훈을 로완에게서 다시 배웠다. 나는 프라이 교수의 수업에서 내러티브가 신학과 어떤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받았다. 내가 윤리학에서 회복하려고 힘썼던 성품과 덕을 강조하는 입장도 내러티브 개념과 비슷한 것이 유용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130
신학대학원에 다니는 기간에 나는 앤이 기독교와 관련된 모든 것을 멸시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안가서 기독교에 대한 그녀의 증오는 곧장 내게로 향했다... 솔직히 말해 나는 어떻게 해야 그녀의 삶이 나아질 수 있는지 몰랐다. 133
4. 교직
그는 내가 '적임자'인지 알아보려고 몇 가지 일반적인 질문을 던졌다. 그다음 그가 내게 무엇을 가르칠 거냐고 물었을 때, 문득 나는 내가 남은 평생 교사로 일하게 될 것임을 깨달았다. -오거스태나 총장과의 면접에서 150
나는 다른 사람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것에 따라 내가 생각하는 내용과 방식을 조절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55
나의 평판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아프리카계 미국인 학생들이 벌인 시위에 참여한 것이었지 싶다. 160
지금 세상의 모습이 불가피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내가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영향을 주기 시작했다. 기독교는 우리가 운명이 정해진 존재가 아님을 깨닫기 위한 지속적인 훈련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전쟁이 없는 세상도 상상할 수 있다. 165
나는 주로 그리스도인들이 내세우는 주장들이 어떻게 반증될 수 있느냐에 관심을 두었다. 기독교의 주장들을 시험하는 방법이 우리 삶의 구체적인 사건들을 예수님의 이야기와 연관시켜 바라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68
'아픔', 다시 말해 그녀가 시달렸던 '고통'은 가시지 않는 복통이었다... 한 의사가 희귀한 효소 결핍 질환인 포르피린증이라는 진단을 내놓았는데, 그 병의 증상이 우울증과 불안 같은 심리적 문제 및 복통이었다.
5. 가톨릭 신자들
오히려, 그들은 '세상에 변화를 일으킨다'는 인정이 없어도 사랑으로 일상을 감당할 수 있는 차분하고 평온한 사람들이었다. 노터데임에는 각양각색의 그런 사람들이 있었고, 그중 일부는 '신부'나 '수녀'였다. 186
한마디로, 몬테소리는 내가 애덤을 잠재적인 어른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 보도록 도와주었다. 210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정신장애자들과 같이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을 대면하는 것이 무엇인지 배우는 본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213
나는 윤리학을 '하는' 다른 방식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나느 비트겐슈타인과 코베시에게 윤리학에서 기술이 전부라고 배웠다. 그러나 참된 기술을 이어 가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의 고통 때문에 찾아올 고통을 피하고 싶어서 거짓을 선택하는 일이 없도록 덕이 몸에 밴 행위자가 필요하다. 더욱이, 그 기술들은 그냥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 연결은 '이야기'를 만든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서는 그런 이야기를 계속해서 하고, 시험하고, 다시 이야기해야 한다.
내가 이런 식으로 '윤리학'에 접근하는 이유는 예나 지금이나 결정과 자유를 강조하는 입장이 윤리 이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것이 불만스럽기 때문이다. 217
요더 때문에 나는 비폭력주의가 예수님이 우리에게 추천하신 권고 사항이나 이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밖에 없었다. 비폭력주의는 하나님이 구원의 방법으로 강제력을 쓰기를 거부하셨다는 사실 안에 이미 들어 있다. 십자가의 처형은 "예수의 정치학"이다. 222
나는 늘 '외부자'로 머문다는 평판이 있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나는 대학교 세계 안에 있는 노동 계급 사람이다. 순응한 교회에 도전장을 던지는 급진적 그리스도인이다. 이런 유의 목록은 계속 이어질 수 있고, 자기기만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사실, 나는 '외부자', 비판자, 반체제 인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고향을 찾고 싶다. 건설적인 역할을 하고 싶다. 나는 노터데임에서 그것을 발견한 줄 알았다. 하지만 내가 배우게 된 것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이 땅에 고향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227
6. 살아남기
아내인 앤의 양극성 장애 236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는 '사상가'와 강연자로서 내가 가진 강점 중 하나가 유머 감각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의 눈을 통해 세계와 우리 자신을 볼 줄 알게 되면 세상은 심오하게 희극적인 곳으로 변한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리스도인에게는 잃을 것이 없으니 진실을 말하는 편이 더 낫다고 할까. 그런 진실은 종종 우리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도 한다. 바라기는, 그런 놀라움과 기쁨이 강의를 즐겁게 만드는 원천이었으면 한다. 247
나는 신학자가 일부 철학자들처럼 어떤 '입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입장'이라고 하면 신학자가 뭔가 '새로운' 것을 주장해야 한다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나는 나사렛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가 새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신학자들에게는 입장이라는 것이 없다고 믿는다. 신학자의 과제는 입장을 내세운 것이 아니라 교회가 받은 것이 무엇인지 알도록 돕는 것이다. 250
내가 제시하는 기독교가 전혀 다르다면, 그것은 오로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가 하나님을 섬길 때 하는 고백들이 얼마나 비범한 것들인지 알아보게 하는 길을 내가 찾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251
나는 가톨릭과 재세례파의 재료들을 묘하게 조합해 그리스도인 됨의 의미를 설명해 왔고, 많은 이들이 그 설명을 설득력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
많은 사람들이 이해하기 힘들어하거나 특이하게 생각하는 것은, 내가 근본적인 기독교적 신념들을 깊숙이 받아들이면서도 사회적으로 급진적인 윤리를 내세운 다는 점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섬기는 것 자체가 정치이며,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 부활하셨기에 비로소 존재하는 세상이 그 정치를 통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런 정치의 기본이 바로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다. 252
복음의 종말론적 성격을 무시하지 않을 때 그것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사실이었다. 253
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결과를 예상하거나 보장할 수 없다는 뜻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통제하지 못하는 상태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 절박한 안전 욕구 때문에 우연성을 버리거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는 법을 배우는 것이 대안을 발견하는 방법이다. 254
내가 개신교보다 가톨릭에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256
내게 그리스도인과 친구는 너무나 밀접하게 얽혀 있어서 둘을 떼어 낼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다... 나는 덕을 강조함에 있어 우정이 필수적이라고 생각했었다. 266
'대화'는 서로를 정직한 사람으로 붙들어 주려는 공통의 헌신적 자세를 가리키는 말이다. 267
나는 애덤이 살아남게 하리라 다짐했다. 나도 살아남으리라 다짐했다. 나는 달렸고, 어쨌든 우리는 살아남았다. 275
7. 견디기
심각한 정신 질환을 앓는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 이들에게 내가 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이다. 당신이 살아남지 못하면 누구도 살아남지 못한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은 이기적인 것이 아니다. 삶이 이어질 수 있다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면 살아남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279
나는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난제가 우리가 말하는 바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 교회나 세상을 전혀 바꾸지 못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달리 표현한자면, 기독교적 확신의 진리성에 대해 내가 초기에 품었던 우려는 정치적인 것이었지 인식론적인 것이 아니었다. 나는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세상의 실제 모습을 알려면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변화를 분명히 표현할 수 있기 위한 전제 조건으로서 분명한 실체를 갖춘 교회가 필요하다고 강조하기 시작했다. 293
내가 듀크대의 자리를 마침내 수락할 수 있었던 것은 교회 덕분이었다. 듀크에서 면접을 보고 돌아온 후, 나는 브로드웨이 교인들에게 노터데임에서의 내 처지를 설명하고 듀크에서 제안이 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나는 그들에게 기도를 부탁했고, 그다음에는 그들이 하라는 대로 하겠다고 했다. 320
8. 여러 시작과 하나의 끝
"나, 안 가볼 거네." - 아내 앤이 자살을 시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한 말. 368
9. 폴라
그러나 내가 볼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답 없이 사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다. 이렇게 사는 법을 배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은 너무나 멋진 일이 된다. 신앙은 답을 모른 채 계속 나아가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문제를 지나치게 단순화시킨 것이긴 하지만, 적어도 이런 주장은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내게 지독히도 흥미진진하게 다가오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376
우리는 교회에 자주 간다. 교회에 가는 일보다 더 마음이 가는 일을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함께하는 즐거운 일들이 많이 있지만, 우리가 함께한다는 의미 안에는 함께 교회에 많이 가는 것이 들어있다. 399
10. 좋은 사람들
그러니까 내가 아는 단 한가지 새각하는 방법은 쓰는 것이다. 또 나는 할 말이 있기 때문에 쓴다. 내가 할 말은 개인적으로 성취한 것들이 아니다. 나는 그리스도인기 때문에 할 말이 있다. 422
신학이 할 일은, 인생의 복잡성에 대해 정직하게 말하려면 하나님에 대해 말해 주는 단어들이 필요함을 보이는 것이다. .. 바르트의 신학은 절대 절박하지 않다. 그의 신학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말하도록 받은 단얻르을 기뻐하며 즐겁게 사용한다. 바르트는 신학적 발언의 탁월한 모범이다.
바르트는 신학자의 일이 말로 어루어진다는 것과, 존 하워드 요더의 표현대로 신학의 과제가 "믿음의 빛에 비추어 말로 일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했다... 그러나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해 말할 때 사용하는 단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믿음으로 하는 말의 대상이자 내용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쓰는 말들로 포착되지 않는다. 423
신학은 이 이야기를 배우고 하나님에 대한 발언을 의미 있게 만드는 맥락을 찾아내기 위한 지속적이고 끊임없는 시도다. 424
근대성의 에토스에 순응한 교회에 내가 이의를 제기한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할 힘을 되찾고, 우리가 뜻대로 하지 못하는 세계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무엇일지 상상할 힘을 되찾도록 도우려는 시도였다. 426
내가 존 하워드 요더에게 배운 것이 있다면, 자신을 믿어서는 자신을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판단에 자신을 내어 맡김으로서만 자신이 누구인지 배우게 된다. 434
요더는 그리스도인들이 인간적으로 모든 일이 잘 풀리도록 애쓰는 것이 최근 들어 생긴 일이라고 주장한다. 원래 그리스도인들은 뭔가 잘못될 때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들이므로 결혼도 갈등을 해결하는 제도로 이해해야 하고, 결혼 생활은 그 목적을 위해 짜야 한다는 것이다. 그 메모에서 요더는 "함께하겠다는 결심, 즉 평생의 신의를 지키는 것이 갈등 해결을 위한 전제 조건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갈등은 도치를 꿈꿀 기회가 된다"고 적었다. 435
그는 교회 안의 남녀에게 가능한 선택지가 순결 혹은 결혼뿐이라는 주류 교회의 생각이 틀렸다고 주장했다... 한마디로 그는 성교에는 미치지는 않으나 그리스도인 남녀가 접촉할 만한 "성적이지 않은" 방법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437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는 묵시록적 특성이 있으므로, 우리는 평범한 것의 놀라운 비범함을 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신앙의 묵시록적 특성은 일상을 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일상의 비범함을 볼 수 잇게 해 준다는 것이다.
우정은 흔히 평범한 삶이라는 위장된 모습만 드러내지만, 나는 우정이 가진 비범한 특성이 존이나 나와 같은 사람의 삶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그와 나의 삶은 우리가 혼자서는 그리스도인으로 살 수 없음을 분명하게 드러냈다. 우리 삶이 가능한 것은 다른 사람들이 돕기 때문이다. 신학자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에 힘입어 지금보다 더 나아질거라는 소망을 품고서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다. 441
나는 우정에 대해 많이 말한느 반면 사랑에 대해서는 좀처럼 말하거나 쓰지 않는다... 현대 기독교의 특성을 고려할 때 그 단어가 감상적으로 왜곡되기 쉽기 때문이다. 451
나는 교회에 나가는 데 그치지 않고 교회의 신학자가 되려고 노력한다. 나는 내가 믿는 바에는 관심이 없다.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확신이 없다. 나는 교회가 믿는 바에 훨씬 관심이 있다... "어떤 교회?" 그 물음에는 "나의 삶을 가능하게 만든 교회"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다.
내가 교파적 고향이 없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기 때문이다. 454
내 삶에 사람들이 그토록 많은 이유 중 하나는 교파적 고향이 없기 때문이다... 내 고향은 교회다. 455
주일에 두 차례의 예배를 드려야 한다. 교회 홍보 전화 캠페인을 벌여 무작위로 2만 명의 사람에게 전화를 걸 것이다. 끝으로, 우리는 교회로서 지금까지 지나치게 끈끈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새 신자들은 공동체에 대한 소속감 때문이 아니라 교회가 제공하는 여러 활동과 목회 서비스 때문에 교회에 매력을 느낄 것이다. - 올더스게이트 신임 목사가 교회 성장 세미나에 다녀와서 세운 계획 460
11. 인내와 기도
솔직히, 이것을 위해 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를 세상이 정해 준 조건에 맞춰 이해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는 현대신학의 흐름을 거슬러야 했다. 세상이 정해 준 조건에 맞추려면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이나 세상에 대해 하는 모든 주장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하고, 그러면 신학은 '자연적'인 것이 된다. 하지만 바르트에게 신학의 과제는 복음을 세상의 조건 안에서 설명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참으로 부활하셨을 때만 비로소 세상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었다. 다시말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특권을 부여하는 것은 실재에 대해 어떤 주장을 하는 것이요, 그리스도인들에게 실재에 대해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세상을 보라고 초청하고 요구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 시간은 묵시록적이다. 즉, 예수님의 유일무이한 삶을 통해 나타난 하나님의 우주적이고 역사적인 행위의 타자성과 우선성이 시간의 중심이다... 요더는 면류관을 쓰고 검으로 정의를 바로잡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강하지 않고,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이 우주의 결에 따라 살아간다"는 점이 묵시록의 주장이라고 밝혔다... 기포드 강좌의 제목을 정해야 할 때가 되었을 때, 나는 '우주의 결에 따라'를 선택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모든 것, 심지어 우리의 시간 이해와 우리가 '역사'라고 부르는 '사건들에 대한 회고적 내레이션' 이해까지 결정한다는 역사적 주장에 우주적 성격이 있음을 너무나 잘 요약하는 제목이었기 때문이다. 470
"우주의 결에 따라"에서 나는 바르트가 기독교적 확신의 묵시록적 성경을 회복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것은 '세상의 모습에 대한 우리의 기술'이 '세상을 올바르게 기술하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고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와 분리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합리적으로 인정한 것이었다. 바르트는 신학적 진술을 통해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성해야 할 기본 문법,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한 문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되는 훈련을 지속적으로 제공해 주었다. 471
평화를 기도를 하면서 주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실까 봐 무섭다는 것이 무엇인지 처음으로 어렴풋이 맛봅니다. 우리르 도우소서. -911테러 이후 수업시간 전 드린 기도문 474
장 바니에는 겸손하고 확신 있게 이루어지는 그런 작은 행동들이 "세상에 일치를 가져다주고 폭력의 사슬을 끊어 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오니 우리에게 겸손을 허락하소서. 그리하여 우리가 오늘 하는 일, 우리가 매일 하는 일이 날마다 아름답고 친절한 주님의 작은 몸짓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이 되지 못할 경우 거짓과 가식에 불과함을 기억하게 하소서. 477
요더는 교회와 세상 사이의 경계가 투과성이 있음을 보여 주려는 노력에 평생을 바쳤다. 486
예수님을 섬기는 것은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인 되게 하는 중심 행위다... 전쟁은 조급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조급한 세상에서 인내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믿는다.
인내는 '아무것도 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인내는 자신이 하는 일이 가치 있고 귀하다고 믿기 때문에 그 일을 '고수하는 것'이다. 489
토미는 조직 안에서 살아가고 조직을 사랑하는 법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으로 존재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 그 핵심이었다. 490
나는 교회에서 자주 운다... 나는 평생을 교회에서 보낸 사람이다. 하지만 하나님께 감사하게도,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에는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내가 우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나님이 내게 허락하신 놀랍고 멋진 삶은 여전히 내게 과분하게 다가온다. 497
12. 마지막 이야기
나는 신하그이 일이 기도의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기도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임재하시는 방식이며,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그 임재에 참여할 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은 그 무엇보다 굳게 확신하고 있다.
내게 기도는 만사가 좋게 풀릴 거라는 의미는 아니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셨다는 뜻이었다... 기도는 우리 중 누구도 혼자 죽지 않을 거라는 뜻이다. 502
그리고 신학자의 일이 순전한 선물이라면, 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를 가르치는 소명에 충실하는 데 더욱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가끔은 내가 받은 것에 매료된 나머지 내가 누군지 잊어버리는 지경에 이를 때가 있다. 그런 망각을 다른 말로 겸손이라 한다. 겸손은 선한 일을 부여받음으로써 가능해진 삶의 등에 올라타는 덕이다. 505
사실 내가 배운 것은 아주 간단하다.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이다. 얼마나 흥미로운 일인지. 506
맺는말
하나님에 대해 증언하되 내가 아는 것보다 더 많이 말하고 싶은 유혹을 어떻게 피할 수 있을까? 이것이 내가 마주한 어려운 문제였다. 508
후기
아우구스티누스에게 타락은 지식을 버리고 무지를 고집스럽게 선택한 모종의 인식론적 불순종이다... 원죄는 인식론적 재앙이다. 자아에 대한 지식은 자아가 하나님과 연합하여 그분께 순종하며 살아갈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성욕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유화해서 독점하겠다는 악한 공상"을 말하는데, "성욕에 대한 많은 신학적 담론에서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사례가 바로 결혼으로 완결에 이르는 성관계의 낭만적 내러티브에 대한 소설적 집착"이기 때문이다. 리스의 아우구스티누스 해석에 따르면, 결혼이 죄로 인해 왜곡된 우리 성욕을 "해결해" 줄 거라는 널리 퍼진 생각 역시 죄로 드러난다. 525-6
리스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의 기원이 성적인 것임을 안다... 이 중요한 사실, 자신의 존재와 창조의 사실을 숙고함으로써 아우구스티누스는 기억이 정체성의 문제임을 발견한다. 526
기억은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주요한 관심사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자신의 기원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일의 의미를 탐구하는 책이다. 그의 하나님 인정은 인격적인 것이다. 그의 생애에서 추상해 낸 이성의 결과물이 아니라 "의존적 이성이 자아와 하나님의 관계에서 자신의 의존성을 알게 되고 받아들인 결실"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죄는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이나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다는 주제넘은 생각이다. 527
리스의 주장에 따르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자아 이해와 '고백록'의 상관적 형식은 정체성을 오로지 주어진 성적 정체성에 따라 결정하려는 현대의 흐름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백록'은 존재의 저자이신 하나님을 끊임없이 높인다. 하나님만이 개인 정체성을 이해 가능하고 신뢰할 수 있게 이야기하신다. 528
우리가 자신에 대해 말하는 이야기들은 결코 결정적일 수 없기에, 우리는 하나의 참된 이야기를 들려주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게다가, 그 이야기는 모든 사람의 결정적 이야기로 밝혀진다.
그러므로 신학의 과제는 탐구의 형식으로 내러티브를 통합하는 것이다. 529
제럴드 매케니는 '한나의 아이'를 읽은 후, 이 책이 첫 문장부터 결론까지 주체성에 대한 나의 잉해를 보여 준다고 썼다. 그는 주체성에 대한 나의 이해를 이렇게 규정한다. "우리가 우리 삶을 통제하지 못한다는 것과, 우리의 주체성은 사실상 우리가 의식하지도 의도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형성된 우리의 모습을 이해하고 설명하고 거기에 충실하려 노력하는 방식이라는 것." 531
촐생과 우리 자신의 시작을 기억하지 못함이 갖는 존재론적 중요성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심오한 설명은 피조물인 우리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이야기를 살아 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우리의 시작을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삶이라는 선물에 대해 분개하는 대신 감사하며 살아가는 기술을 습득하게 하는 진실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5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