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77건

  1. 2011.08.12 난 당신이 좋아(김병년, IVP)
  2. 2011.08.06 천국을 소유한 사람
  3. 2011.08.06 교회 DNA
  4. 2011.08.06 친구에게
  5. 2011.08.06 성공주의 목회신화를 포기하라
  6. 2011.08.06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쉬는 소망
  7. 2011.08.06 이야기식 설교 구성
  8. 2011.08.06 영신수련
북 리뷰/기독교2011. 8. 12. 23:17
난 당신이 좋아/ 김병년/ IVP


 계획을 세우다 보면 언제나 지금 내게 닥친 일 말고 다른 일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 사이의 괴리감이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을 뼈저리게 경험한 후로는 과감하게 계획을 세우지 않기로 결단했다.
 내가 꿈꾸지 않는다고 내 생이 허물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풍성함은 우리의 고난에 구애받지 않는다. 그분의 풍성함으로 나의 궁핍한 삶을 채우실 것이라 말씀하신다.(103쪽)

"오늘 이밤에 우리 모두 오른손을 들고 하나님을 향해 이렇게 외칩시다. '하나님, 저 좀 그만 때리세요!"
 나는 저들의 고통과 슬픔을 해결할 방법은 알지 못했지만, 적어도 하나님 앞에 함께 하소연하고 부르짖는 믿음의 선배로 그곳에 서 있었다.(126쪽)

 그들이 나를 찾아오는 이유를 나는 안다. 내 말이 듣고 싶은 것이 아니라 아파하는 나를 보고 싶어서 온다. 고통의 이유를 알고 싶은 게 아니라 고통 가운데 서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 찾아오는 것이다. 자기 삶이 특이한 게 아니라 평범한 또 하나의 삶이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온다.(134쪽)

 고난당하는 사람은 영적으로 예민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겪고 있는 상황이 너무도 불합리해 보이기에 하나님을 의심의 대상으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믿음의 반대말은 의심이 아니라 불신앙입니다. 불신앙은 불순종입니다. 믿음은 신뢰, 이해, 순종을 총괄하는 말입니다. 의심은 그 중 이해에 해당합니다. 믿음에는 의문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반면 불신앙은 무관심으로서,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거나 무조건 의심하는 절대적 회의주의입니다. 신자에게 의심은 성장을 위한 과정이지만, 불신앙은 성장을 저해하는 요소입니다."(140쪽)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원망과 원수에 대한 적대감을 하나님께 모두 토로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우리 마음속에 들어온다." 월터 브루그만 (145쪽)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의 말대로 "하나님의 전 존재가 고통 속에 거하셨다. 모든 고통은 하나님의 존재 속에 있었다." 

 눈물은 힘으로도, 돈으로도, 그 어떤 것으로도 깨뜨릴 수 없는 장벽을 능히 깨뜨린다. 아내의 눈물이 완고한 남편의 교만을 깨뜨린다. 목사의 눈물이 아픔에 무감각한 시대의 무관심을 깨뜨린다. (158쪽)

십자가는 나를 위해 흘리는 하나님의 눈물이다. 하나님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나의 아픔에 동참하신다. 십자가 위의 예수님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눈물이다. (160쪽)

사랑하기 때문에 '능력'을 주신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외아들'을 주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오직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충분하다. (160쪽)

 찾아가 보는 것, 그것이 먼저다. 병을 고치려 하기보다는 찾아가 들여다보는게 먼저다. 분명 고통당하는 자를 위해 기도해야 하지만, 그들에게 먼저 필요한 것은 사람들의 관심어린 방문이다.(163쪽)

 고난당하는 자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그와 함께 있어 줄 친구다. 도움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다. 극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연약한 존재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함께 살아가기 위해서다. 그가 버림받고 잊혀졌다는 고립감에 빠지지 않도록, 함께함으로써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함께'라는 소속감을 갖게 해주어야 한다.(167쪽)

 고통은 하나님을 믿고 그분 안에 거하는 중에도 겪을 수 있는 하나의 과정이다. 믿음이 없기 때문에 겪는 일이 아니라, 오히려 믿음 때문에 겪는 일일 수도 있다. 
 신학자 올브라이트의 말처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무슨 일이든지 형통해진다는 믿음처럼 진리에서 멀어진 믿음은 없다."
 이 땅에서 자신이 바라는 것을 모두 얻는 삶이 축복이 아니다.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축복이다. (174쪽)

우리가 가장 자구 그리고 가장 절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는 '선택의 순간'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하나님의 뜻은 어느 직장으로 가든지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주어진 업무를 성실하고 합법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배우자를 찾는 일도 마찬가지다. 누구를 만나든지 사랑하며 섬기며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177쪽)

폴 투르니에가 말한대로, 고난을 이기는 과정이 축복이지 고난 자체가 축복은 아니다. 고난이 축복이라는 말은, 인내하는 과정을 통해 만들어지는 새로운 삶이 있을 때에만 유효하다. (179쪽)

 고난의 신비는 고난의 끝에서 우리가 그렇게 사모하던 그분을 대면하는 것이다. 이것이 분명 하나님의 뜻이라고 나는 믿는다. (181쪽)

광야는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능력과 존귀가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 반면에 인간의 완악함과 교만, 불만족과 연약함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기도 하다. 광야는 이러한 두 가지 실재가 벌거벗은 채 만나는 곳이다. 살아 있고 먹고 있으면서도 좀더 좋은 것을 달라고 불평하는 인간과, 인간의 불평에 때로는 분노하고 벌을 주시면서도 한결같은 은혜로 공급하시는 하나님이 만난다. (186쪽)

그러나 삶의 불확실성이 클수록 믿음은 하나님을 더욱 또렷하게 인식하게 한다. 삶의 주도권을 내려놓을 때 하나님과의 관계가 자란다. 주도권을 내려놓는 것이 바로 믿음이 성장하는 출발점이다. 모든 것에 주도권을 갖고 사는 한, 믿음이 자라기는 어렵다. 그저 자신의 관리 능력만 자랄 뿐이다. (19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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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촌장로교회 청년부를 섬길 때 특새 강사로 은혜를 받았던 김병년 목사님의 책. 이제야 다 읽게 되었다.
 '내가 꿈꾸지 않는다고 내 인생이 허물어지지 않는다'는 문장이 내 마음에 깊이 남겨졌다. 나는 항상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것을 넘어선 이상을 꿈꾸는 편이기 때문이다. 지금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뭔가 뒤쳐지는 것 같고 뭔가 새로운 것을 시작해야할 것 같은 강박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신뢰하며 마음 속에 평안을 얻게 하였다.
 오늘날 강단의 메세지는 고통을 부인하며 성공과 축복으로 치우쳐져 있어서, 자신의 삶에 실제로 고통이 다가오면 어찌할바를 모르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통해서는 실제 고통을 통과하면서 갖게 된 정직한 질문과 고백을 통해 고통과 함께 걸어가는 법을 배우게 된다. 무엇보다 진정한 축복이란 '잃음과 얻음을 반복하는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하나님이 바로 축복'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목회란 어떤 의미에서는 성도들의 고통을 함께 직면하고, 함께 있어주며, 함께 걸어지나가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면서 하나님께 그리고 성도들에게 난 당신이 좋아라고 서로 진심으로 고백하게 되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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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30

Finding Identity

라영환/ IVP

 

우리의 행복은 우리가 누구인가를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팔복은 복의 조건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의 삶의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다(25쪽).

 

어떤 면에서는 하나님이 이 세상을 구원하시는 방법, 그것이 고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의로운 사람의 고난, 이것이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이다(47쪽).

 

애통이란 시대의 아픔과 공동체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받아들이고 슬퍼하는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먼저 생각하고 슬퍼하는 사람들, 나보다는 공동체를 먼저 생각하는 사람들이 리더이다. 리더는 시대를 아파하는 사람이다(63쪽).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의 힘을 조절하고, 감정도 조절하고, 이익도 포기하는 것이 온유이다(70쪽).

 

주님께서는 서로를 판단하는 세상과 달리 상대방의 잘못을 기억하지 않고 기대를 품으며 두 번째 기회를 주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공동체로서의 교회를 보여주고자 하셨다(99쪽).

 

사실은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몰라서 고민하는게 아니라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 힘들고 불편할 뿐만 아니라 나에게 손해가 되기 때문에 고민하는 것이다(125쪽).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해를 심는 사람이다. 화해라는 말은 '깨어진 관계를 회복시키다'라는 의미가 있다.

하나님 나라의 자녀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경험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랑을 드러내는 사람들이다.

사랑을 받아보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흘려보낼 수 없다. 단지 자기들의 고통만을 바라본다(131쪽).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기쁘게 십자가를 져야 한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상대방의 고통을 내가 대신 감당한다는 것'을 의미한다(141쪽).

 

손해보고 살자.

인테그리티를 지켰을 때 얻은 이익을 간증하는데, 그 이익을 얻지 못하면 어떤가?

자신이 손해를 본 후에야 그 말에 힘이 생기고, 그때 비로소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 있다(143쪽).

 

"시험 들었다"고 말하는 경우를 보면 대개는 자신이 인정받지 못하거나 자신이 원하던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임을 알 수 있다.

예수님은 의에 주리고 목마르며, 또 의를 위해 핍박을 받는 공동체를 꿈꾸셨지만, 오늘 우리는 내가 인정받는 그런 공동체를 꿈꾸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가 손상되었을 때는 아파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의가 인정받지 못할 때는 힘들어 한다(149쪽).

 

사고방식과 습관을 바꾸기 위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그들의 정체성을 재확인시키신 것이었다. 그리고 감정적 결단과 반복적 훈련을 강조하셨다. 은혜가 될 때 결단을 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결단이 한 순간의 감정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것을 지속케 하는 반복적인 훈련이 있어야 한다(151쪽).

 

일본인 스기하라 치우네가 일본 영사로써 유대인들에게 비자를 발급한 이야기.

"저는 아버지가 성공한 인생을 사셨다고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희 아버지가 필요로 하셨을 때 아버지는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을 택했으니까요"

 

이것이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성도로서 마땅한 삶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상충되는 나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는 삶, 그것이 바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이다(157쪽).

 

신앙이란 자신의 삶을 새로운 관점으로 보게 하는 것이다(160쪽).

 

인생은 패러다임 싸움이다. 하나님의 방식이 세상을 이긴다. 눈에 보이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이 다르다고 낙망하지 말자. 성경대로 살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자(16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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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하워드 스나이더/ IVP

 

하나일 뿐 아니라 다양한 교회

거룩할 뿐 아니라 은사적인 교회

보편적일 뿐 아니라 지역적인 교회

사도적일 뿐 아니라 예언자적인 교회(p23)

 

가난한 자를 향한 복음 전파는 교회가 신실하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이다(32쪽).

 

우리는 빈번하게, 그리스도인을, 하나님이 의도하시는 제자들이 되도록 돕기보다는 그들로 하여금 어떤 것들을 행하게 하는데 주안점을 둔다(51쪽).

 

교회는 선교적, 대안적, 언약적, 삼위일체적 공동체로 묘사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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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The Wisdom of Each other

유진 피터슨/홍성사

 

교회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로 이루어진 자연적 공동체가 아니라 초자연적인 공동체라네. 여기서 (super)라는 낱말은 자네의 기대를 넘어선다는 뜻이 아니라 자네의 기대와 다르다는 뜻일세.

 

영적인 삶은 자네가 시작하는게 아니라 성령님이 시작하시는 것이거든. 그리고 사실 그 삶은 오래 전에 이미 시작되었다네. 자네가 그런 생각을 하기 전에 그분이 먼저 생각하고 계셨던 거지.

 

기도에 대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점은 예수님이 기도하신다는 것, 지금 이 순간 자네를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는 사실 일세.

 

지금 세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신학이란 것이 그리 멋있는 분야가 못 된다는 걸 아네. 영혼에 도움을 받으려 하는 우리 친구들은 보통 자신의 감정이나 자아-자신의 내면과 마음-라는 관점에서 생각하고, 아주 자연스럽게 상담가나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처럼 치유 쪽 계열에 기울고 있거든.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이라는 문제를 다룰 때, 특히 기도의 문제를 다룰 때는 신학자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네. 신학자들은 그저 마지막 수단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이지.

 

기도를 어렵게 만드는 많은 이유들은 우리가 자기 자신- 내 감정, 내 기분, 내 상태가 기도하기에 얼마나 적합한가 등- 에게 지나치게 신경을 쓰는 데서 비롯한다네. 하지만 기도는 하나님께 집중하는 거야.

 

이 삶에는 기적도 많이 일어나지만, 기독교의 기적은 대부분(전부는 아닐세) 외부로부터 우리 삶에 끼어드는 형태로 나타나지 않는다네. 오히려 기적은 두려움과 배신감과 환멸을 느끼는 상황, 자녀들은 말을 안 듣고 친구들은 나를 실망시키는 그런 상황 속에 숨어 있어. 이를테면 말구유와 십자가 속에 숨어 있는 거지. 그렇게 계속 살아가는 가운데 그리스도를 닮은 아주 인간적인  이 형성된다네.

 

신학자의 첫째 가는 임무는, 하나님에 대해 생각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돕는 것이라네. 우리의 우상 숭배적인 상상력으로 만들어 낸 허구적 존재 앞에 경건하게 엎드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 안에서 성경적으로 계시된 하나님께 기도하도록 말이야.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칼뱅은 자네에게 큰 도움이 될 걸세. 그는 기도하는 목사였고 기도하는 신학자였다네.

 

지금 자네의 목표는 동생의 변화를 기대하기보다는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네. 그게 전부일세. 아무 조건없이 용납하고 끌어안는 것이야말로 성숙한 사람의 특질이라네.

...

이런 식으로 문제에 접근할 때, 가장 먼저 일어나는 일은 더 이상 누이동생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게 되는 거라네. 이제부터 자네는 기도와 하나님의 사랑과 자신의 순종이라는 맥락에서 움직이게 되는 걸세. 누이동생이 무엇을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자네가 사랑하고 살아가는 방식에 더 이상 중요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생명의 영이신 하나님은 전혀 개의치 않은 채 우리 멋대로 생명을 얻으려 하는 나쁜 습관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우리 자신의 신이 되려 하고 있고, 그 결과 계속해서 형편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하나님과 아무 상관없이 '영성' 그 자체가 좀더 강렬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라는 말이 최근에 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이 회개와 희생에 따르는 불편함과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의 길로 갈 때 생기는 위험을 피해갈 수 있는 일종의 우회로가 된다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아챈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님은 그 십자가의 길이야말로 '풍성한 삶'-예수님은 이 복을 우리에게 주시려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으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나에게는 종교의 삶(내 삶도 의미가 있고, 가능하다면 하나님께도 기쁨이 되는 상태를 최선을 다해 유지하려는 조심스럽고 불안한 삶)과 영성의 삶(삶에 대한 열정과, 어떤 상황에서든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나의 정체성과 안전을 내버리고자 하는 의지)은 이 두 가지 시나리오로 대조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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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시작하는 친구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된 책.

기본적이면서도 새롭게 다가오는 깨달음이 많다.

다시한번 유진 피터슨의 깊이와 통찰력에 감탄하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 영성을 구분하는 그에게서 바르트의 향기(?)를 느낀다.

 

참고로 이 책은 Growing Deeper 시리즈 중 한 권인데 시리즈 책들은 다음과 같다.

생활 속의 영적 싸움에 관한 이야기(요단)

응답이 잘 터지는 4단계 기도법(나침반)

물댄 동산 같은 내 영혼(요단)

교회, 나의 고민 나의 사랑(요단)

 

아직 좋았던 부분을 다 적지는 못했는데..

영성과 기도와 평신도에 관한 내용들이 인상적이다.

종종 반복해서 읽어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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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Under the Unpredictable Plant

좋은씨앗/ 유진 피터슨

 

 신선한 자극을 추구하다보면 발전이나 덕목을 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무익하고 파괴적인 생각은 없다. 목회자의 삶이란 하나님 앞에서 인간의 성숙이 외적인 자극, 즉 '좋은 생각', 뛰어난 감동, 고양된 영향력이나 개념 등에 의존한다는 어떤 주장도 거부하는 삶이다.

 오히려 목회자는 내면의 두려움 또는 유혹과 환상을 경험하면서 자신이 지닌 어두움과 함께 거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구원은 우리 마음의 전 영역에 영향을 미친다. 신선한 직무와 새로운 개념을 추구함으로써 지루함, 성적 좌절, 불안, 만족스럽지 못한 욕망에서 탈피하고자 애쓰는 것은  자기 마음의 모든 영역을 은혜로부터 차단시키는 행위이다.

 교회 생활에서 전적으로 '세속적인' 경험- 하찮은 직무들로 구성된 제한된 일상, 단조로움과 외로움- 과 굴욕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을 온전히 겪어볼 길은 전혀 없다. 교회 사역은 환상을 깨뜨리기 위한 훈련 과정이다. 목회자는 세상이 허황된 신앙의 정체성에서 탈피하기 위해 교회 사역에 나선다. 목회자는 소명을 받은 자로서 극적이며 만족할 만한 삶을 살아가려는 열망을 품어야 하고, 지성에 의해 강회된 자아의 영토 확장주의 속에 있는 환상의 뿌리를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

('성 베네틱트의 규율'이라는 책이 내용 중 저자가 수도원과 수도사를 교회와 목회자로 바꾸어서 인용)

 

 교회의 미화는 일종의 음란한 포르노그라피와 같다. 교회가 점도 없고 흠도 없는 것처럼 드러내려 한다. 이는 여러교회들이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모습이다. 이처럼 도발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사진들은 개인적인 또는 인격적인 관계들이 빠져 있다. 그 사진들은 지배, 만족, 단순하고 비인격적인 영성 등에 대한 열망을 부러일으킨다.

 많은 목회자들이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이라고 상상하는 모습은 그런 음란한 사진- 매력적인 교인들로 넘쳐나는 높은 뾰족탑의 교회 모습- 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교회에 대한 거부는 좀더 교묘하게 진행되는데, 지금과 다른 구조를 떠올리는 것으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많은 목회자들이 배고프고 목마른 자들을 위한 수용 시설을 시작하려는 막연한 공상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은가? 고상한 동기를 품은 사람들만을 위한 계획적인 공동체를 세우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신학교나 대학에세 학생들을 가르치는 자리로 도피하려는 꿈을 꾸지는 않는가? 죄와 신비로운 은혜의 복잡성이 더이상 소명과 관련된 관심거리가 되지 않고, 소명적인 관심이 여전히 위협적이긴 하나 전에 비해 훨씬 다루기 쉬운 무지와 지식의 범주로 대치된 학교로 옮기는 것을 원하고 있지는 않는가? 그러한 모든 공상은 머지 않아 현실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에너지를 앗아가고 목회자들을 무기력하고 초조한 상태에 빠지게 만든다.

 

 ...하지만 이처럼 순종하는 생활 속에서 나 자신의 만족감은 점차 떨어지고 있었다.

 내가 목회 사역을 수행했는데, 사람들은 점점 내게 반응을 보이지 않고 하나님께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설교 시간에 내가 상당히 주의를 기울여 선포한 설교 속에서 다른 것을 들었고, 나는 그들의 부주의한 태도를 불쾌하게 여겼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에 반응하는 방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내가 그들을 위해 세워놓은 계획과 맞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 그 계획이 그들의 협력을 바탕으로 잘 진행되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 아니라 그들을 지도하는 가장 뛰어난 지도자로서 나의 명성을 높여주었을 것이다.

 

 고난, 극도의 고난, 풍랑과 같은 고난은 우리의 껍데기를 벗겨내 본질적인 문제에 눈뜨게 하면서 우리 삶의 기본적인 실체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요나에게서 발견되는 근본적인 실체는 기도하지 않은 것이었고, 바울에게서 볼 수 있는 것은 기도하는 것이었다.

 

목회자들이 '더욱 원대한 도전' 또는 '더 광대한 기회의 땅'과 같은 말을 하면서 현재의 위치에서 편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다른 곳을 바라는 태도는 선지자적인 열정이나 제사장적인 헌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 태도는 영적인 죄악의 산물에 불과할 뿐이다. 그 죄악은 영지주의 바이러스에 의해 생겨난다.

 영지주의는 고대 시대에 생겨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장소와 물질을 경멸하고 업신여기며 복음을 왜곡시키고 있다. 그들은 복음을 그럴듯한 개념들로 장황하게 설명한다.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일수록 더 탁월하게 설명한다. 그들은 시간과 장소의 제약을 용납하지 못하고, 일상 생활 속의 하찮은 일들이나 무질서로 인해 당혹감을 느낀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으로 아름답게 장식된 좋은 감정들로 복음을 다시 조립한다.

 또한 영지주의는 우둔한 사람들과 꾸준히 자기 길을 가는 이들을 그냥 두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사람을 상당히 선별적으로 받아들이는 지경에 이른다. 소위 '영적으로 깊은' 사람들로 구성된 엘리트 집단을 선호하고, 전문가들의 말을 자주 인용한다.

 그와 반대로, 복음은 지역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특정 지역에 적용되고, 대단한 열정으로 육신과 물질과 특정 장소 속으로 몰입하려는 성향을 지닌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라 고백하는 모든 자를 용납하고 받아들인다. 목회자의 지속적인 직무 가운데 하나는 이러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현실적인 상황들을 존중하는 것이다. 자신이 사역하는 그 자리와, 그곳에서 일상 생활을 영위하는 그 사람들을 귀하게 여겨야 한다. '지역적인 일들에 대한 특화된 사랑, 지역적인 지식과 지역적인 헌신으로부터 솟아나오는 그런 사랑'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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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9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살아 숨쉬는 소망 

레슬리 뉴비긴 
서로 사랑


예배는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예배가 10시 30분에 시작해서 12시에 마친다고 이야기하는 자체가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영원한 예배에 잠시 참여할 뿐이다. 

교회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으로 생각하는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지 질문을 받을 때면 가끔 화가 난다. 내가 해줄수 있는 대답이라고는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질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것뿐이다. 교회의 미래는 인간에게 달린 것이 아니며, 교회의 할 일은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는 것이다. 결국 낙관과 비관의 문제가 아니라 믿고 안 믿고의 문제인 것이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때와 기한은 ··· 너희의 알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 나라는 인간의 계획에 달린 것이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우리도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 가운데 이미 선하신 것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면서도 우리에게 맡기신 복음을 전해야 한다. 세 번째로 판단할 이는 우리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의 초점은 나, 나의 구원, 상대방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에 맞춰져야 한다. 다른 이들의 최종적인 구원은 하나님께 달린 것이다. 네 번재로 우리에게는 관중석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타종교를 믿는 사람에게 철학이나 역사적 근거에 의지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앙을 옹호하려 든다면 결국 과거에 천착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사람들을 예수께로 안내하고 하나님께 행하신 일에 대해 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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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The Homiletic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

유진 L. 로우리

 

설교가 일어나기 시작하도록 하는 데 나에게 필요한 것은 나의 생각을 필요성과 주제 사이의 교차지점으로 끄집어 내는 것이다. 내가 의미하는 바는 바로 나의 생각 조각들을 적어서 책상 위에 두편으로 갈라 놓는 것이다- 즉 하나는 문제가 적힌 노트더미와 다른 하나는 주제나 혹은 해답 노트더미로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는 서로 관계 형태가 이루어질 때까지 한쪽의 생각더미에서 나온 생각들을 다른 한쪽과 연결시키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설교란 언제나 가려움에서 지작해서 긁어 주는 쪽으로 옮겨 가는 데 이것은 달리 옮기면 인간의 곤경에서 복음에서 나오는 해결점으로 옮겨 가는 것이다.

 

1) 평형을 뒤집어라. Ooops!

2) 모순을 분석하라. Ugh!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Aha!

4) 복음을 경험하라. Whee!

5) 결과를 예견하라. Yeah!

 

불완전하다는 사실, 그것의 본질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은 청중이 설교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는 이유가 된다. 설교를 듣는 사람ㄷ르이 가지고 있는 평형 깨뜨리기는 설교 시작의 열쇠가 된다.

 

적절한 분석을 하려면 행동의 '단순성'을 넘어서서 인과관계의 복잡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내 자신을 돌이켜 보면 나는 얼마나 다른 사람의 행동에 대해서보다 나의 행동에 대해서 더 관대했는지를 알게 된다 그 이유는 내가 불공정하려고 해서가 아니라 단지 다른 사람의 내적 복잡성보다 내 자신의 내적 복잡성에 더 많은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설교자와 같이 공통으로 내가 이러한 특성을 가지고 있다고 가정해 볼 때, 세계를 '우리'와 '그들'- 설교작업에서 굉장히 편만해 있는 경향인데-로 쪼개 놓지 말아야 하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별히 이것은 특수한 문제를 진단하려고 시도할 때 우리도 그러한 상황에 개인적으로 관련되어 있으믕ㄹ 반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탐구란 다른 사람에 의해서만 주어질 수 있는 것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결실이 없다는 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자아정체성을 발견하려고 하고, 우리 자신을 찾으려고 희망하지만 우리가 바라는 결과는 결코 우리 자신의 노력에 의해서 오지 않는다. 우리는 자신을 찾는다. 하지만 우리 자신은 최종적으로 발견되어진다! 자신의 정체성은 타인으로부터 오는 사랑의 선물이다.

 

설교학적인 '아하'를 야기시키는 역전의 원리는 단지 문학의 도구나 멋진 전략 이상의 것이다- 비록 그것이 그렇다고 해도, 나는 그것의 뿌리는 복음 그 자체에 있다고 믿는다.

 복음과 세상의 지혜 사이에는 그 자체가 중요한 역전의 구성요소가 되는 근본적인 불연속성이 있다. 역사의 주님께서는 세상이 yes라고 하는 것에 확실하게 no라고 선포하시고, 세상이 no라고 하는 것에 울려 퍼지도록 yes라고 선포하신 길고 긴 기록을 가지고 계신다. 사고의 새로운 해석학적인 학풍의 본질적인 요점은 사실 뒤집음으로써의 복음(gospel of inversion)의 진리와 일치하기 위해서 성서적인 해석을 전도(뒤바꾸는)하는 것이다. 크래닥은 실제로 그런 과점을 요약하면서 '근본적인 역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신약성서에 명쾌하지 않아서 이해의 빛을 도입해야만 하는 구어체 문장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불분명한 우리 자신의 상황에 빛이 비추어져야 한다고 희망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해석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해석하는 것이다.

 

지난 40년 동안 자유주의 개신교 강단의 근본적인 실수는 복음은 이간의 경험과 더불어 지속된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복음이 인간의 경험을 뒤집어 놓은 후에도 인간 경험과 더불어 지속되고 있다고 말을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운 것이리라. 바르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질문을 가지고 성서에 다가가서,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 대신에 단순히 우리 자신의 생각만 발견하고 만다고 언급하고 있다...

 두 종류의 설교가드이 있다. 하나는 무언가 말 할 것이 있지만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사람이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지만 말할 거리가 없는 사람이다. 바르트주의자들은 바로 전자의 경우이고, 20세기 자유주의 설교가들은 후자에 속한다..

 나는 해결의 결정적인 실마리로서 역전의 원리를 가지고 있는 이야기식 구성으로서의 설교 관점이 제3의 대안을 제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현재 계획하고 있는 설교는 인간의 곤경의 순간에 회중과 접촉점을 형성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귀납적으로 훌륭한 자유주의 전통형석을 갖추어 두 번째 단계(분석의 단계)로 옮겨 가는 것이다. 인간의 열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복음의 자원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막다른 골목을 향한 인간의 그러한 열망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준다.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냄으로써, 이것은 전형적으로 일종의 역전을 포함하고 있는데, 새로운 문을 열고,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상황, 즉 연역적으로 정돈된 훌륭한 바르트적 형식으로 준비시켜 준다.

 역전의 원리는 바로 이러한 계획에 중심을 이룬다- 이것은 적어도 네 가지 형태로 발생할 수  있다. 1) 원인-결과의 역전 2) 변화된 원인의 역전 3) 변화된 가정의 역전 4) 변화된 논리의 역전 등이다.

 

나는 여기서 복음은 우리의 삶의 뒤편에서 선한 삶을 살도록 밀어부치는 것이 아니라, 악을 행하는 불가피성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복음의 선포는 성도들에게 놓여진 매주일의 '죄의식의 여정'과는 다른 것이어야 한다. 인간 죄의식의 끔찍함은 강의를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구속받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선포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과 지금도 행하고 계신 일을 알려 줌으로써 새로운 삶으로의 구속을 가능하게 한다.

 

성서적인 이야기식 설교

 

1)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의하라.

2) 행간을 읽어라.

3)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4)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를 도입하라.

5) 행동에서 동기로 옮겨 가라.

6) 사실보다 그 이전의 역동성으로 나아가라.

7) 감각을 총동원하라.

8) 늘 해오던 동일화 작업을 전환하라.

9)능동태 어법을 사용하라.

10) 1인칭이나 2인칭 단수 형태로 이야기를 몰고 가라.

11) 주관적인 데서 객관적인 데로, 특별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옮겨 가라- 그리고 다시 반대로 옮겨 가라.

12) 단계를 정하라(미리 암시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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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사람은 우리 주 하나님을 찬미하고 경외하고 섬기고,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의 영혼을 구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다. 그 외에 이 땅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은 다 사람을 위하여, 즉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게 하기 위하여 지음 받았다. 따라서 사람은 사물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도움이 되면 그 만큼 그것을 이용할 것이고, 방해가 되면 그만큼 배척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에 피조물이 우리의 자유에 맡겨졌고 금지 아래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모든 피조물에 대해서 중용을 유지해야 한다. 즉우리는 질병보다 건강을, 빈곤보다 부귀를, 업신여김보다 명예를, 단명보다 장수함을 더 좋아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모든 다른 것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의 유일한 욕망과 선택은 우리가 조성된 목적에로 보다 잘 인도하는 것이어야 한다.

 

주여 받으소서. 나의  모든 자유와 나의 기억력과 지력과 나의 전 의지와 내게 있는 모든 것과 내가 소유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소서. 당신이 내게 있는 모든 것을 주셨나이다. 주여, 그 모든 것을 당신께 도로 드리나이다. 모든 것이 다 당신의 것이오니, 온전히 당신의 의행대로 처분하옵소서. 내게는 당신의 사랑과 은총을 주옵소서. 이것이 내게 족하겠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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