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에 해당되는 글 77건

  1. 2011.08.06 설교/ Fred Craddock
  2. 2011.08.06 영적발돋움
  3. 2011.08.06 나와 너
  4. 2011.08.06 끝나지 않은 여행
  5. 2011.08.06 아직도 가야 할 길
  6. 2011.08.06 탁월한 지도력
  7. 2011.08.06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
  8. 2011.08.06 결혼건축가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사실상, 우리에게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침묵을 배경 삼아서 자신들의 말과 행동을 우리에게 전달했던 것이다. 그들이 지녔던 침묵은 신비하게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침묵이 아니라, 개성의 한 명으로서의 침묵이자 그들이 누구인가 하는 성격 규정의 일부로서의 침묵이었다. 마치 그들은 인간의 삶이 침묵에서 잉태되어 침묵으로 사라져 가기 때문에 매 순간을 말로 채우면서 침묵을 연기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깨우친 것 같았다. 오히려 그런 사람들은 침묵을 유지하는 것이 더 편안했으며 한 번 말할 때는 그 내용이 명확하고 분명해서 외부 환경에 의해 제공되는 상황에 좌우되기 보다는 자신들이 가진 교유한 분위기를 지니고 있었다.

 

여기서 확언하는 침묵은 시원적인 실체이다... 하나님의 침묵은 하나님의 전체적인 계시에 필수적인 요소이다. 하나님은 언제나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침묵 가운데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설교에 대해서도 얼마나 적절한 말인가! 말씀으로 침묵을 깨시는 하나님- 이것은 계시에 대해서만이 아니고 설교에 대해서도 얼마나 적절한 묘사인가! 설교란 바로 "주님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는 마음으로 기다리며 앉아있는 사람들 앞에 놓인 침묵이라고 하는 투명한 유리를 향해 내어 던지는 말씀이 아닌가!

 

여기서 제시되는 설교 신학의 입장은, 속삭임인 동시에 외침으로서의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신약 성경을 가장 잘 해석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속삭임으로 듣고 말할 때는 외침으로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계시가 단순하거나 명백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선포해야 할 믿음의 말씀이 귀에서는 속삭임이지만, 입에서는 외침이 되어야 한다. "외침"이라고 하는 것은 물론 말씀을 전달하는 스타일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선포하는 내용이 대중적인 선포라고 하는 것을 말한다.

 

설교를 지붕 위에서 외치는 외침으로 보는 비유

1. 우리가 말하고 있는 메시지의 중요성과 절박성

2. 이 비유의 공개적인 성격은 때때로 교회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교파적이거나 배타적인 편협한 생각에 반대하고 있다. 성경에서 사용하는 외침이라는 말은 땅끝까지 전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3. 외침은 그 메시지의 내용인 동시에 그 메시지를 전달케 만드는 원동력인 사랑이 얼마나 강하고 끈질긴 것인가 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4. 외치는 자의 비유를 통해서 볼 때 설교는 예수가 살던 시대로 부터 오늘날까지도 계속해서 모든 악의 세력에 대한 하나의 경종으로서 기능을 한다.

 

 속삭임을 외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그것은 분명하고 담대하게 말하는 한편, 씨뿌리는 자가 씨앗 속에는 그 자체의 미래가 들어있고 씨앗 스스로 잘 성장해 나갈 것을 믿듯이 그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들어온 내용을 선포하되 전승되어 온 전통에 충실하는 한편 그것을 듣는 사람들의 상황에 맞게 구성하도록 조심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속삭임을 외친다는 것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그 메시지에 대하여 갖게 마련인 거부감을 존중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출석이 시원치 않다든지, 사소하고 주변적인 문제들에 대해여 비판한다든지, 주의가 산만하다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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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Reaching out/ Henri J. M. Nouwen(두란노)

1부 자아를 향한 발돋움: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2부 동료를 향한 발돋움: 적개심에서 따뜻한 환대로
3부 하나님을 향한 발돋움: 환상에서 기도로

진정한 영적 안내자는 무엇을 하고 누구를 찾아갈지를 말해 주는 대신, 우리에게 홀로 있으면서 자신의 경험 속으로 들어가는 모험을 권하는 사람입니다.

마음의 고독이란 물리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에 좌우되지 않는 내적인 소양 혹은 태도이다...외로운 사람에게는 내면의 질문이 없습니다. 외로운 사람은 대답을 원하며 그 대답을 지금 당장 원합니다. 그러나 고독 속에서는 우리 내면의 자아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마음의 고독을 가지고 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말과 다른 사람들의 세계에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일 수 있지만 외로움에 쫓겨서 살 때는 자신의 갈급한 필요에 즉각적으로 만족을 가져다 줄 수 있는 말이나 사건들만을 고르려고 합니다.

이러한 내면의 민감성을 계발하는 것이 영적인 삶의 시작입니다.

자네에게 정말로 바라고 싶은 바는...자네 마음속에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들에 대해 인내심을 가지고 그 문제들 자체를 사랑하도록 하라는 것일세...자네가 그것들을 삶으로 실천할 수 없기 때문에 대답이 주어지지 않는다면 지금은 구하지 말게. 중요한 점은 모든 것을 삶으로 나타내는 것이라네. 지금은 그 질문들을 삶으로 나타내게. 아마도 어느 정도의 기간을 살아가노라면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자네는 점차 그 대답에 이르게 될 걸세...무슨 일이 일어나든 커다란 확신을 가지고 받아들이게. 만일 그것이 자네 자신의 뜻과 자네 내면의 존재의 어떤 필요에서 나온 것이라면 그것을 받아들이고 아무것도 꺼려하지 말게나.(릴케, 'Letters to A Young Poet')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바뀌는 움직임은 자기 안으로만 움츠러드는 움직임이 아니라 우리 시대의 쟁점이 되는 문제에 더 깊이 참여하는 쪽으로의 움직임입니다.

환대는 우선적으로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적이 아닌 친구가 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을 만들어 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한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환대는 주인의 생활 방식을 받아들이라는 미묘한 권유가 아니라 손님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발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걱정과 염려는 풀리지 않는 문제를 풀리지 않은 채로 놔 두지 못하고 또 명확하지 않은 상황을 명확하지 않은 채로 놔 두지 못한 다는 사실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자녀가 손님이라는 의식은 우리를 자유롭게 해주는 의식입니다.

가르침은 기독교의 영성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이러한 물음들이 의식에까지 나올 수 있고 그 물음에 답할 수 있도록 두려움이 없는 자리를 마련해 주는 행동을 뜻합니다.

선생의 임무 가운데 두 가지 측면: 드러내 주는 것과 긍정하는 것
환대해주는 선생은 학생들에게 (학생들) 자신도 베풀 것이 있다는 점을 드러내주어야 합니다.
선하고 가치있는 것, 또는 새롱누 기여를 하는 것으로 밝혀진 것은 긍정적으로 세워 주어야 합니다.

의사나 사회 복지사, 상담가, 목사와 같이 다른 이들을 도와 주는 직업을 통해서 동료 인간들에게 발돋움하려는 모든 사람들이 항상 되새겨야 할 점은 돌보아 주어야 할 사람이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치유의 의미는 무엇보다도, 낯선 이가 자기만의 독특한 이야기에 민감해지고 거기에 순종할 수 있게끔 해주는데 있습니다. 그래서 치유를 베푸는 이는 배우고자 하는 학생이 되며, 환자는 가르치고자 하는 선생이 됩니다. 선생이 자기 생각을 학생들에게 제시하기 위해 준비하고 정리하는 동안 학습 내용을 익히듯이 환자도 자기 얘기를 듣고자 하는 치유자에게 그 얘기를 하면서 자기 자신의 얘기를 익힙니다.

수용과 대립은 그리스도인의 전도의 뗄 수 없는 두 면입니다. 이 두면은 조심스럽게 균형을 맞추어야 합니다. 대립이 없는 수용은 어느 누구도 섬기지 못하는 상냥한 중립성이 되고, 수용이 없는 대립은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무서운 공격성이 됩니다.

정신의 가난. 확실한 무지(docta ignorantia). 배움을 통해 터득한 사람은 다른 이들이 하는 말과 그 상대방을 정말로 주의 깊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것이 생각의 가난입니다. 

마음의 가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체험을 우리에게 주는 선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기도란 오로지 선물로 받을 수 있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도하는 법을 익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의 역설적인 면입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가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경험과는 상당히 달라서 우리는 그것을 부재라고 여기기가 아주 쉽습니다. 한편 하나님의 부재를 강하게 느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새롭게 인식하게 됩니다.(십자가 위에서 '나를 버리셨나이까'의 예수님의 외침)

무엇보다도 영적인 삶은 끈기 있게 기다리는 삶입니다. 즉 수많은 좌절의 경험들을 통해 하나님이 부재하신다는 생각을 깨달아 가는 고통스러운 시간 가운데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이 우리의 고통 한가운데로 오신다는 것을 나타내 주는 최초의 표지를 알아챌 수 있는 것은 기대 속에서의 기다림을 통해서 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신비는 하나님의 부재를 깊이 의식하는 것을 통해서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는 환상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팔을 뻗을 수 있으면 그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성숙했다는 증거입니다.

기도는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언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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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집에 내려가서 읽었던 책 중 하나...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 이야기하는 책이었으나 이제서야 읽었다.
아마도 교만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외로움에서 고독으로...
그동안 여러 책을 통해서 생각해 온 주제이었으나 원조는 바로 이 책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좀 더 일찍 읽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으나 어떻게 보면 가장 적절한 시기에 읽었다는 생각이 든다.

요새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내게 도전하시는 부분...
또 중국 땅에서도 계속 내가 훈련받게 될 부분...
중국으로 out-reach하는 나에게 하나님은 reach-out하라고 격려하신다.
올 한해 새로운 영적발돋움을 경험하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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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8
Ich und Du/ Martin Buber(대한기독교서회)


사람에게 세계는 두 겹이다. 세계를 맞이하는 사람의 몸가짐이 두 겹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몸가짐은 그가 말할 수 있는 근원어가 둘임과 발맞추어 두 겹이다.

근원어는 홀로 있는 낱말이 아니요 어울려 있는 낱말이다.
근원어의 하나는 복합어 '나-너'(Ich-Du)이다.
근원어의 또 하나는 복합어 '나-그것'(Ich-Es)이다. 

근원어 '나-너'는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만 이를 말할 수가 있다. 그러나 근원어 '나-그것'은 존재의 전체를 바쳐서 이를 말할 수 없다.
세계는 이를 경험의 대상으로 볼 때 '나-그것'이라는 근원어에 속해 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근원어 '나-너'는 관계의 세계를 이룩한다.

'나'와 '너'의 만남은 은총에 의한 것이지, 결코 찾음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너'를 향하여 근원어를 건네는 것은 '나'의 전 존재를 건 행위- 즉 나의 가장 본질적인 행위인 것이다.
'너'는 '나'를 만난다. 그러나 '나'의 쪽에서 보면 이는 '내'가 '너'에게로 다가가 '너'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만남"이란 결국 "택하는 것"인 동시에 "택함을 입는 것"이요, "능동"인 동시에 "피동"인 것이다. 이는 마치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 무언가를 행위하는 경우와도 같은 것이니, 실로 그 때에는 온갖 부분적 행위는 정지하고 그와 더불어 저들의 특수한 한계가 자아내는 행위 감각도 사라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능동적인 것"은 "피동적인 것"과도 같이 느껴지는 것이다.
'나-너'의 근원어는 오직 자기의 전 존재를 기울여서만 말할 수 있다. 나의 전 존재에 정신을 집중시키고 그 안에서 무르녹는 것은 나의 능력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나 없이도 이 일이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진실로 '나'는 '너'와의 직접적인 관계를 매개로 해서만 버젓한 '나'가 되는 것이다. 내가 '나'로 됨에 따라 나는 그를 '너'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온갖 참된 삶은 만남(Begegnung)이다.

 사람과 하나님의 관계에서는 무조건적인 독존성과 무조건적인 포괄성이 한데 겹쳐져 있다. 하나님과의 절대적 관계에 들어간 뒤에는 사람은 고립된 어떠한 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사람이 되었거나 물건이 되었거나, 하늘이거나 땅이거나, 그 아무것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도리어 이 모든 것은 거꾸로 사람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관계 안에 안겨 있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영원자 너'와 더불어 순수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결코 '너' 이외의 모든 것을 저버려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 안에서, 그리고 '너'를 통하여서, 모든 것을 내다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그것은 이 세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이 세계를 그의 참 기초 위에 재건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계로부터 얼굴을 돌이킨다거나 또는 이 세계만을 주시한다거나 해서는 하나님에게 다다를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품 안에서 이 세계의 의미를 읽어 낼 때에는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의 현전에서 살아 움직이게 될 것이다...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을 내어 버리거나 떼어 버리거나 하지 않고 그들을 온통 '너' 안에 안아들일 때에는- 즉 이 세계의 가치와 그 진리를 인정하고 이를 하나님의 품으로 안아들일 때에는- 우리는 하나님과의 완전한 관계 안에 서 있는 것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에게 "완전한 타자"임에는 틀립없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완전한 자기 동일자"요 또한 "완전한 현존자"이기도 하다. 그렇다, 하나님은 땅 위에 나타나서 우리를 거꾸러뜨리는 "무서운 신비"인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하나님은 자명의 신비요, 나의 '나'보다도 훨씬 더 나에게 가까운 존재이기도 하다.

 

 

 인간의 종교적 상황- 즉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현존한다는 것- 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율배반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이율배반의 비용해성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인간 존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정률만을 인정하고 그 반률을 인정하지 않을 때에는 이 상황의 의미가 손상을 입는다. 만일 우리가 정률과 반률로부터 하나의 종합을 빚어 보려 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가 파괴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을 "상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릴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를 저버리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이 이율배반의 알력을 우리들의 현실 생활 밖의 사건에로 도입할 때에는 그 상황의 의미는 말살당하게 된다. 진실로 인간 존재의 참 의미란, 우리가 어엿이 '산다'고 하는 것- 아무런 예견도 예고도 예정도 없이 그저 생존의 이율배반을 실컷 어깨에 짊어지고 곧장, 끊임없이, 새롭게 살아가는 데에 있는 것이다...다만 우리는 좋고 싫고를 떠나서 오직 그 두 개의 명제를 한 몸에 짊어지고 묵묵히 이를 살아 내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로 이를 살아 내는 것 밖에 그 둘의 통일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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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미치고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인용되어진 책...

조금 이해가 되고 좋다고 생각하는 몇 부분을 적어놓기는 했으나 대부분의 많은 내용은 너무 어려워서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

앞으로 반복해서 읽으면 더 많은 부분이 이해가 될 것이다.

소유가 아닌 관계...만남...인격성...

이것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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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The Unending Journey/ M. Scott Peck(열음사)


Firtst Step_ 성장
Next Step_ 너 자신을 알라
Ultimate Step_ 신을 찾아가는 여러 갈래의 길

노화란 생물학적인 문제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노화는 성장을 드러내놓고 거부하는 것이며, 정신적-영적 성장이라고 하는 인생의 패턴을 받다들인다면 누구나 피해갈 수 있는 심리적인 혼란일 수 있다...사람들은 그저 진정으로 성숙에 관해서 이야기하길 원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없는 것은 용기가 아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것은 일종의 뇌상이다. 용기란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혹은 고통을 무릅쓰고 앞으로 전진하는 능력이다...일단,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우리에게 신성을 가르치려고 계획된 것임을 깨닫게 되면 우리는 약해지지 않는다.

구원이란 말은 치료와 동의어이다...염증이나 감염 부위를 치료하기 위해서 피부에 바르는 연고라는 말과 유래가 같다. 건강, 완전함, 신성일나 말들은 모두 같은 어근에서 유래된 것들이다. 

대부분의 이단은 역설의 한쪽 측면만을 부각할 때 주로 나타난다...그러므로 기독교 교리의 핵심- 사람들이 믿고 싶든 믿고 싶지 않든- 에 남게 되는 것은 바로 역설이다. 즉 예수는 역설적이게도 인간이면서 신이다. 그렇지만 50대 50으로 나누어진 것이 아니라 교리에서 말하듯이, '전적으로 인간이면서 전적으로 신'이었다...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역설이 남아있다. 즉 신은 자신의 작은 목소리를 통해서 우리 안에도 존재하고 동시에 초월적이고 엄청난 타자로서 우리 바깥에도 존재한다...다시한번 우리는 구원일나 어떠한 수학적 공식으로도 얻지 못하는- 앞으로도 얻지 못할- 은총과 선행이 역설적으로 뒤섞여서 나타나는 결과라는 결론과 만나게 된다.

자신에게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심판대 위에 세우는 과정은 너무 번거롭기 때문에 대부분의 살마들은 값싼 용서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진정한 용서가 발휘될 수 있는 것은 유죄 평결이 났을 때만이 가능하다...우리가 용서를 하는 까닭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다. 우리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왜냐면 치료에 도움을 주는 정도를 넘어서 분노에 집착하게 되면, 우리는 성장을멈추고 영혼은 오그라들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고통 없이 그 일을 상기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일과 친해지는 것이다.

 

저자는 알코올중독자 협회(AA)를 종교를 갖게하는 좋은 신비적이고 공동체적인 모델로 제시한다.

"내게 문제가 있고 당신에게도 문제가 있다. 하지만 좋아질 것이다."

 

중독자들을 치료할 때, 장애가 가지고 있는 퇴행적인 측면이 아니라 발전적인 측면들을 강조함으로써 가장 큰 효과를 얻을 수 있다. 즉, 영혼과 신에 대한 열망이 그것이다.

 

완전성이라는 말은 통합이라는 말과 같은 어원에서 유래한다. 이 말의 의미는 구획하다의 반대말로 전체를 달성한다는 뜻이다. 구획하는 일은 쉽다. 완전하기란 쉽지 않다. 하지만 완전하지 않으면 전체를 이룰 수 없다. 완전함에 이르려면 인생 속에서 서로 충돌하는 힘과 사상 그리고 시련에 전적으로 열려 있어야 한다.

 

"인생에서는 뭔가 다른 것을 계획해 놓으면 뜻밖에 엉뚱한 일이 벌어진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독교의 죄는 교리 때문이 아니고, 행동과 신학을 통합하지 못해서 발생한 것이다. G. K. 체스터튼이 언급한대로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모자란 것을 채우려는 것이 아니라 거의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개혁이 혁명보다 훨씬 더 지난하다. 어려움을 견디면서 개혁을 이루는 것보다는 뭔가 다른 일을 하는 것이 훨씬 더 용이하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영적인 존재이며, 인간을 영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는 정신의학은 크게 실패하고 말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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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가야할 길'이 너무 좋아서 그것의 속편인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처음은 역시 성장과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으며 이것에 추가해서 용서, 죽음, 신비로움 등을 말하고 있다.

 

영성과 종교를 이야기하는 글에서 기독교의 진리는 역설이며 통합이 중요하다고 말한 부분에서 나는 깜짝 놀랐다.

지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그의 종교관은 평가하기 참 어렵다.

어떤 부분에서는 보통의 기독교인인 것 같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다원주의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목회자...

그는 신학자이자 심리학자이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요즈음...

이 전편과 더불어 이 책은 앞으로 계속 읽으며 참고해야 할 책인 것 같다.

스캇 펙으로부터 앞으로 좋은 도움을 많이 받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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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The Road Less Traveled/ M. Scott Peck(열음사)


인생은 문제와 고통에 직면하는 것
"노이로제(신경증)이란 항상 마땅히 겪어야 할 고통을 회피한 결과다." -칼 융


훈련이라는 것은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피하는 대신에 문제 해결의 괴로움을 건설적으로 취급하는 기술 체계라고 정의할 수 있다. 즉, 즐거움을 미루는 것, 책임을 지는 것, 진리와 현실에 충실한 것, 그리고 균형을 잡는 것이다.


나는 가끔 정신치료를 가리켜 '진실게임' 혹은 '정직게임'이라고 한다. 그 이유는 모든 일 중에서도 특히 거짓말과 대결하도록 환자들을 도와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정신병의 근본적인 원인 중의 하나는 우리가 들어온 거짓말과, 또 우리가 자신에게 해온 그런 거짓말이 서로 엉키기 때문이다. 이런 원인은 오로지 정직한 분위기에서만 뿌리째 뽑아 버릴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서 치료자가 제일 근본적으로 해야 할 것은 환자들과의 관계를 솔직하고 진실한 관계로 만드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건강하기 위해서는 성장을 해야만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낡은 자아를 포기하는 과정은 필수적인 것이므로, 우울증은 근본적으로 정상적이고 건강한 현상인 것이다. 무엇인가를 포기하는 과정에 장애가 생기면, 그 우울증은 비정상적으로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 결과로 우울증은 오래 계속된다.


'괄호로 묶기'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안정감을 느끼고, 자기 주장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잠깐 포기하고, 그 대신 새로운 자료에 적응하여 새로운 성장을 이룸으로써 균형을 이루게 해주는 행동을 말한다...순수하게 새로운, 사물이나 사람들이나 사건들의 실재가 내 안에 뿌리내리게 하기 위하여, 자아의 탈중심화를 겪어야만 한다...즉 모든 것을 포기함으로써 보다 많이 얻게 된다. 자기 훈련이란 자기 확장의 과정이다. 포기의 고통이란 죽음의 고통이고, 옛것의 죽음이란 새것의 출생이다.


사랑이란 자기 자신이나 혹은 타인의 정신적 성장을 도와줄 목적으로 자기 자신을 확대시켜 나가려는 의지이다.


진정한 사람은 애착을 초월한다는 뜻이다. 참사랑은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과는 상관없이 실존하는 것이다. 물론 애착이나 사랑의 느낌을 가지고 하는 사랑이 훨씬 재미있고 수월할 것이다. 그러나 애착과 사랑의 느낌 없이도 사랑할 수 있으며, 이런 점에서 구별을 하는데 있어 열쇠가 되는 말이 바로 '의지'이다.


사랑하는 일이란 원칙적으로 상대방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관심을 행동으로 나타낼 수 있는 가장 평범하고 중요한 방법은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참으로 들어주는 일은 사랑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혼생활에서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진정한 안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생의 불안정을 맛보는 데에서 발견되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보여줄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겸손한 태도로 사랑의 힘을 구사하는 방법일 것이다. 가장 보편적인 예는 사랑으로 상대방이 자신의 모습에 직면하도록 일깨워주는 것이다...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은 가끔 사랑하는 상대의 삶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과 그 삶에 대해 사랑으로 충고해주어야 하는 책임 사이에서 난처해질 수 있다. 이것은 괴로운 자기 성찰로써만 해결될 수 있다. 즉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사람은 충고하고자 하는 자신의 숨은 동기와 자신의 '지혜'를 살펴야 한다.


많이 사랑하면 할수록 그 사람은 더욱더 겸손해진다. 그러나 겸손하면 겸손할수록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 거만하게 행동할 수 있으리라는 잠재적인 가능성을 두려워하게 된다...그러나 참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은 사랑이 요구하는 지혜를 얻기 위해 일하며 행동하는 것이 신과 같은 일을 하는 것임을 알고 있다.


다른 사람의 정신적 성장을 촉진하는 행동이 자신의 성장을 촉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기는 하지만 진정한 사랑의 주요 특징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구별이 언제나 유지되고 보존된다는 것이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언제나 상대를 전적으로 나와 다른 아이덴티티를 가진 한 사람으로 인지한다. 진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항상 사랑하는 사람의 독특한 개성을 존중하고, 더 나아가 그 개성을 격려해준다. 이처럼 상대방과 나와의 개별성을 존중하지 못할 때, 그것은 많은 정신질환과 불필요한 고통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성공적이고 의미있는 정신치료의 근본적인 요소는 사랑인 것이다...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는 어떤 관계이더라도 그 관계는 상호간의 정신치료적 관계다.


인식을 넓히는 과정이 바로 이 책의 주된 주제다.


"당신이 아는 것은 누군가 하느님에 대해서 이야기해 준 것을 들은 것에 불과하거든요. 게다가 당신이 하느님에 대해서 들은 이야기 중에 많은 것이 잘못된 이야기입니다...당신은 당신 자신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당신은 진리와 당신 자신가 하나님에 대해서 배울 것입니다."


은총...인간의 의식세계 바깥에서 생겨나 인간의 영적 성숙을 돕는 강력한 힘이다. 인간이 과학적 연구 방법에 의거하여 전염병 항체라든가 꿈의 상태, 무의식 같은 것을 개념화하기 훨씬 전부터 수백 수천년 동안 이 힘은 종교에 의해 인지되어 왔다.


생물학적 진화 과정 가운데 가장 주목할만한 사실은 그것이 일종의 기적이라는 점이다...열역학 제2법칙에 따르면 에너지는 언제나 부다 정돈된 상태로 부터 덜 정돈된 상태로, 보다 복잡한 분화 상태로부터 보다 단순한 분화 상태로 흘러간다. 결국 우주는 완전 해체와 미분화의 상태가 되는데 이것을 엔트로피라 부른다...진화의 흐름은 바로 이 엔트로피의 힘과는 정반대이다.


영적 성장의 과정이 힘겹고 어려운 것임을 나는 거듭해서 강조해왔다. 영적 성장이란 쉬운 길을 가려 하고 날짜가 지난 지도나 낡은 관행에 집착하려 하며 변화를 싫어하는 본능을 극복하고 그에 따라 자기 마음대로 길을 가려는 자연의 저항을 이겨 내야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정신 속에서 작용하는 엔트로피의 힘이 성장을 방해하는 것도 이겨내야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 진화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인간의 영적인 기적은 이 저항은 극복해낸다. 우리는 성장하고, 좀더 나은 사람이 되는 기적을 이루어낸다...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우리가 태어난 진창구덩이 속에 안주하지 않고 보다 어려운 길을 선택하도록 부추기는 어떤 힘이 내재해 있다.


우리 자신의 관성이라는 본능적 저항을 이기고 성장하게 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이 힘에 대하여 이름을 붙였다. 사랑이라고. 인간애라고 하는 사랑은 엔트로피의 자연법칙을 무산시키는 기적적인 힘을 가지고 있다.


영혼의 성숙에 장애가 되는 것들 중 궁극적으로 오직 단 하나의 장애물이 있는데 그것은 게으름이다. 게으름은 사랑의 반대말이다. 거듭 강조하거니와 영혼의 성숙에는 노력이 필요하다...게으름의 주된 형태는 두려움이다...즉 현실을 변화시키는데 따른 두려움, 현재의 위치에서 더 나아가면 무언가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정신질환의 고통스럽고 언짢은 증후군은 은총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의식이 바깥에 존재하면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돕는 강력한 힘'의 소산이다.


자신이 하느님과 가까이 있음을 경험한다는 것은 또한 자신이 하느님의 권력과 대리자가 되며 하느님처럼 될 것을 강요받는 경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은총에의 부름은 사랑으로 세상을 돌보고 수고하는 삶에의 부름이며, 봉사와 희생이 요구되는 삶에의 부름이다. 그것은 영적으로 어린이 상태에서 어른의 상태로 나아가라는 부름이며, 인류의 부모가 되라는 부름이다.


Dilege et quod vis fac- 당신이 사랑할 수 있고 부지런하다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성 어거스틴


은총에 관한 이 장의 주된 목표는 영적 성장을 위한 여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병적으로 집착하며 추구하지 않고도 은총이라는 선물을 인식하고 이용할 수 잇는 능력을 학습시켜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우리들의 영적 성장을 향한 여행은 우리의 의식적 의지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손과 상상할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를 따라 훨씬 정확하게 바른 길로 인도된다. 그리하여 여행은 더욱 빨라진다.


수동성과 의존성, 그리고 두려움과 게으름 때문에 가야 할 길의 전부를 미리 보기를 원하며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안전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미리 보장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영적 성장의 여행은 용기와 주체성, 생각과 행동에서의 독립성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예언자들의 말이나 은총의 도움이 얼마간 힘은 되겠지만 그 길은 반드시 혼자 가야 할 길이다...어떤 말로도, 어떤 가르침으로도, 영적인 순례자가 자신의 길을 선택하여 노력하고 고뇌하면서 하느님과 하나가 되기 위하여 자기 삶의 고유한 환경을 극복하며 나아가야 할 필요성을 덜어 주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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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훈련에 관한 좋은 글을 인용한 것을 보고 좋은 책이겠다 싶어 읽게 된 책...

저자는 정신과 의사로써 심리학과 영성을 아울러서 사람과 종교를 보고 있다.

그의 모든 생각에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은 참 깊이가 있다는 것을 느꼈다.


삶...고통...정직...책임...겸손...사랑...은총...성장...순례...포기...자기부인...의지...하나님...

에 대해서 생각하고 배울 수 있게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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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Excellence in leadership: Reaching Goals with prayer, courage and determination(존 화이트/ IVP)


간구(중보기도)의 전제조건
1. 하나님의 명예를 위한 마음
2. 자기 동료에 대한 사랑
3. 자신의 생명과 운명에 대한 무관심
가장 중요한 열쇠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과 그 약속을 아는 것.

기도라는 것이 단순히 성령님의 촉구하심에 반응을 보인 것이 었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나는 바로 기도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기도하기 원하시는지 물었다. 그러고 나서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느끼는대로 기도했다.'
당신이 최근 기도하는 것에 대한 응답에 어떻게 하면 당신이 그 일부가 될 수 있는가?

영성은 땀을 대신하지 않는다. 기도가 산을 옮길지 모르겠으나 기도와 육체노동은 서로 훌륭한 동역자들이다. 이것은 계획을 성취시킨다.

느헤미야에게 지도력이란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도록 다른 보통 일에서 면제받는 어떤 신분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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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한번 읽었지만 아나톨레에서 이번학기 느헤미야를 공부하기에 계속 참조하고 있는 책이다.
다른 내용도 참 좋지만 이번에 개인적으로 나에게 다가온 부분은 중보기도 부분이었다.

그동안 누구를 위해서 중보기도를 한다고 하면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사람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것들을 놓고 기도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그간의 방식을 바꾸고 저자가 그러하였듯이 먼저 조용히 하나님께 듣고 주시는 마음을 가지고 기도하게 하였다.

또한 간구의 원칙 중에서 세번째가 참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동안 중보기도 하면서 솔직히 나의 마음은 내가 기도하고 있다고 상대방에게 말함으로써 그에게 잘보이고 그 사람의 마음을 얻고자 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저자는 자신의 생명과 운명에 대해서는 무관심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심지어는 모세가 그러하였듯이 하나님의 생명책에서 지워지는 것, 즉 하나님과의 영원한 사귐이 보장받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중보하는 대상을 사랑하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삶을 던져야 한다는 것...

와~~!!! 얼마나 놀라운가?

얼마나 자신이 중보하고 있는 대상을 사랑하고 품었으면 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게 하기 위해 자신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포기하게 된단 말인가?

진짜 이래도 되나 라는 생각까지 들게 한다.

나는 이러한 중보기도자의 자세에서 얼마나 벗어난 기도를 그동안 해왔던가? ㅜㅜ

 

사람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 나...

정말로 나의 유익과 욕망을 채우기 위한 중보기도가 아니라, 상대의 유익 즉 상대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풍성함을 누리도록 하기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때론 그것이 나에게 아픔이 되고 어려움이 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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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Jesus Drives me crazy! / 레오나드 스위트(IVP)


제1부 성육신 제자도- 거기 있으라
1. '나는 별난 괴짜': 있으라  ---> 성육신
2. '결론적 내자리': 거기 ---> 개방과 폐쇄

제2부 관계 제자도- 모두와 함께(with all)
3. '여기는 정신병원': 함께 
4. '바보의 극치': 모두와

nuts 지혜: never understimate the spirit, now under the spirit
인간이 제정신을 잃을 때 천국은 의미를 얻는다. 필멸의 이성을 모두 등질 때 인간은 마침내 천상의 사고에 다다른다.
- 소설가 허먼 멜빌

예수님의 팔복은 이탈의 언어정도가 아니다.
올라가는 길은 내려가는 것이다.
들어가는 길은 나가는 것이다.
먼저 되는 길은 나중되는 것이다.
성공의 길은 섬기는 것이다.
얻는 길은 버리는 것이다.
강한 길은 약해지는 것이다.
안전한 길은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자신을 지키는 길은 (일흔 번씩 일곱번까지라도 )용서하는 것이다.
생명의 길은 죽음의 길, 자아와 사회와 가족에 대해 죽는 길이다.
당신의 강점을 알라, 왜? 그래야 그 강점을 내려놓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능력이 온전해지는 곳은? 우리의 연약함 속이다.
가장 많이 얻고 싶은가? 가장 적은 곳으로 가라.
자유하고 싶은가? 통제권을 하나님께 완전히 드려라.
큰 자가 되고 싶은가? 가장 작은자가 되라.
자신을 발견하고 싶은가? 자아를 잊어라.
명예를 원하는가? "겸손으로 자신을 높여라"
원수에게 '복수'하고 싶은가? 그를 축복하고 사랑하라.


제자란 예수님이 나와의 사랑에 미치셨기에 예수님과의 사랑에 미친 자다. 제자도의 목표는 하나님과의 , 삶과의 사랑의 관계이다. 유다가 더 이상 제자가 아닌 것은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가 아니라 그분께 사랑이 식었을 때였다. 우리 많은 이들처럼 유다는 예수님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자기 자신을 더 사랑했다. NUTS 지혜의 거장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지 않으시고는 결딜 수 없었다. 상대가 사랑으로 반응하지 않아도 말이다.


일단 예수님을 만나면 '정상적인 상태로의 복귀'는 불가능하다. 진정한 제자도는 삶 전체의 영성이다. 그것은 삶 전체를 간섭하며 인생을 하나님 기준으로 해석한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아리스테이데스는 황제 하드리안 앞에서 그리스도인들을 옹호하며 이렇게 말했다. "저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과부들을 존중하는 마음을 저버리지 않습니다. 저들은 고아를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로부터 고아를 건져냅니다...정말 저들은 새 사람들입니다. 저들 가운데는 뭔가 신성한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지혜'가 언제나 '인간에게는 어리석음'이었다. 그렇다면 복음의 위대한 신비가 옛날과 마찬가지로 지금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 숨겨져 있는' 것, 거의 온 세상이 그것을 하낱 열병으로 여겨 거부하고 조롱하고 뒤없는 것, 그것을 감히 시인하는 모든 자들에게 지금도 광신도와 미치광이 알는 낙인이 찍히는 것은 놀랄 일이 못 된다!  - 찰스 웨슬리

 

상식적인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춘다. 비상식적인 사람은 집요하게 세상을 자신에게 맞추려 한다. 그래서 모든 진보는 비상식적인 사람에게 달려있다. - 조지 버나드 쇼, '인간과 초인'

 

하나님은 불가능하다(impossible)이라는 단어에 소유격 부호와 띄어쓰기를 더하셔서 나는 가능하다(I'm possible)로 바꾸신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될 때가 올 것이다. 그 때가 시작이다.

- 소설가 루이스 라무어

 

더 이상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수족관 관리인이 되어 버린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 - 라디오 해설가 폴 하비

 

어디에 처하든 네 전 존재가 거기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거든 어떤 상황에서든 철저히 살아내라 - 짐 엘리어트

 

사람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밝히기가 거의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 의미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지금은 전혀 힘들이지 않고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말에 아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 죄렌 키에르케고르

 

그리스도의 법은 사랑이다...그리스도의 법은 '모든 위로의 하나님'에게서 오는 사랑, 오래오래 지속되는 사랑,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이다.

 

모든 것을 참는 사랑

- 짐을 져주어 다른 사람들을 축복한다. 나의 짐은 당신의 복이다.

- 패배한 활동, 마지막 기회, 승산 없는 시도에서도 열매를 맺는다.

- 싱긋 웃으며 모든 것을 참는다. 당신의 등이 벽에 부딪힐 때 당신의 얼굴은 십자가를 향하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믿는 사랑

- 예수님이 인간 본성을 하나님의 본성으로 바꾸실 수 있음을 믿는다.

- 하나님의 '불멸의 영이 만물 안에 들어 있음'을 믿는다.

- 우리가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그분이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는 것을 믿는다.

- 사람들이 무지개를 부수려 열심히 앴는-증오, 폭탄, 핵의 위협을 비처럼 퍼붓는- 세상에서, 무지개를 만드는 일을 믿는다.

- 빈곤과 착취를 벗어날 만인의 권리를 믿는다.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

- 뇌염으로 뇌가 정지된 당신의 장애인 자녀가 '참된 생명을 취할' 스 있음을 바란다.

- 당신의 교회가 '검정 고시 출신자들과 박사 학위 소지자들이 함께 앉고 함께 놀고 함께 예배할 수 있는' 곳이 될 것을 바란다.

 

모든 것을 견디는 사랑

- 무능력해져 요실금 현상을 보이는 배우자의 중풍을 불평 없이 은혜롭게 견딘다. "변화가 생길 때 변하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Shakespear, sonnet 114)

- 견디고 또 견디며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세상에서 이상한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 백성을 향한 그분의 뜻이다. - 성경학자 윌터 브루그먼

 

인간에게는 약간의 광기가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인간은 절대 감히 밧줄을 잘라 자유를 얻지 않는다.

- 소설가 니코스 카잔차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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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우연히 집어들게 된 책...

그리 두껍지 않아 앉은 자리에서 좀전에 다 읽어버렸다.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결단해야 할 때...

과연 나는 세상이...다른 사람이 다 가는 길을 무의식중에 선택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님이 말씀하시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미쳤다고 이야기할까봐 주저하고 있지는 않은지...

 

계속해서 그분께 기도해야겠다.

내가 그분을 온전히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사랑이 온전히 나를 매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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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7
1. 결혼의 목표


(1) 영적연합

*관계의 두가지 필수요소

안전감- 사랑을 얻고자 노력하지 않아도 무조건적이고 완전하게 사랑받고 있으며, 노력으로 얻을 수 없기에 결코 잃어지지도 않는 그런 사랑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
중요감- 매우 중요한 일, 시간과 함께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지속될 열매를 낳는 일, 타인에게 직접 간접으로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일, 그러면서도 나라는 사람에게 꼭 적합한 일을 하고 있다는 확신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밧줄을 의지하여 안전이라는 위쪽에서 거절이라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믿음의 낙하를 감행하라

* 영적연합이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다
1. 부부 각인이 자신의 인격적인 필요들을 채워주시는 분으로서 오직 주님만을 바라보며 주님만을 의뢰하는 관계입니다.
2. 다음과 같은 일을 신실하게 감당함으로써 서로를 돌보아주는 관계입니다
 (1) 서로의 인생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들이 이루어지는 데 있어서 도구로 사용될 수 있도록 자신을 서로에게 내어줍니다.
 (2) 상대의 안전감과 중요감 경험에 자신이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충분히 인식합니다.

(2) 정신적 연합
영적 연합이라 할 때 그 말의 초점은 부부 각인의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와 그 영적인 관계가 어떻게 한 인간의 안전감과 중요감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있다면 정신적 연합이라는 말은 남편과 아내의 서로간의 관계에 초점이 있습니다.

진리란 앎으로써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행됨으로써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정신적 연합을 이루는 열쇠는 근본적으로 배우자의 깊은 필요드을 채워주고자 하는 섬김의 목표를 정해두고 그 목표가 침해되지 않도록 계속 지켜가는 것입니다.

남편과 아내는 결혼을, 한 사람의 다른 인격을 독특하고 특별한 방식으로 섬길 수 있는 기회, 즉 배우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고 중요한 사람으로서의 자신의 가치를 더욱 온전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하는데 있어서 내가 하나님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는 기회로 여겨야 합니다.

우리의 안정감과 중요감을 채워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그러나 나의 만질 수 있고 느낄 수 있는 몸으로 전달되는 그 사랑이 아내로 하여금 사랑받는다는 것의 의미를 더 깊이, 더 경험적으로 알아가게 해줄 수 있습니다. 내가 그녀에게 첨가해주는 것은 그녀가 안전하다는 사실이 아니라 안전하다는 것이 주는 느낌입니다.


 감정처리- 안으로는 있는 그래로 인정하라. 밖으로는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보아 선택적으로 표현하라.

감정을 거부하는 법- 방어/변명, 사과, 공격, 충고, 경멸, 수정
감정을 수용하는 법- 반영, 명료화, 탐색, 부연

(3) 육체적 연합

자신의 필요들을 주님으로부터 채움받고 상대방의 필요들을 채워주기 위해 자신을 하나님의 도구로 드린 부부가 나누는 성적 쾌락입니다.

배우자에게 육체적인 영역에서 최대한의 성적 쾌락을 주겠다고 하는 섬김에의 헌신으로부터 나오는 성적 쾌락입니다.
감각적 흥분과 성적 만족의 경험을 서로에게 충분히 나누어주는 성적 쾌락입니다.
부부 각자에게 그들의 끊을 수 없는 끈에 대한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성적 쾌락입니다.
인격적인 관계의 표현과 연장으로써 성적인 쾌락을 즐기는 것입니다.

2. 결혼의 기초건설

(1) 은혜

하나님은 우리의 환경을 우리가 바라는대로 변화시켜주시겠다고 약속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분은 다만 더 깊으신 그분의 목적을 위해서 그런 사건들을 우리 인생에 허락하실거라고만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책임은 우리의 배우자를 내가 원하는 식으로 바꾸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뜻에서 인생의 사건들에 반응해가는 것입니다.

결혼의 연합을 이루어가려 함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어떤 실패나 낙심이나 비극도 우리로부터 하나님은 우리의 결혼을 치료하실 수 있고 우리를 더욱 성숙시키실 것이라는 확신을 빼앗아 가도록 허용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충분치 않을 만큼 비참한 상황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의 결혼 건축은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기로 다짐할 때 반드시 좋은 열매가 맺힌다는 의식적인 확신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확신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라는 결혼의 첫번째 건축용 블록에 달려있습니다.

(2) 헌신

요점1: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 순종하고자 하는 장기적이고 흔들리지 않으며 기쁨에 찬 헌신에 없어서는 안되는 기초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명백한 믿음입니다.

어떤 내키지 않는 일을 하고자 하는 나의 열망은 전적으로 내가 그 일을 하기를 원하고 있는 사람의 성품에 대한 나의 인식에 달려있었습니다.(의사가 자신의 상처를 꼬매려고 할 때 어머니의 미소를 보고 그 고통에 기꺼이 임했던 자신의 경험)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할수록 그분의 선하시을 더 깊이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달게 될수록 더 순종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인식이 없는 순종은 기쁨을 빼앗아가는 부자연스러운 헌신을 낳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알면서도 순종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얄팍하고 죽은 학적인 지식에 지나지 않습니다.

요점2: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믿음에서 비롯되는 순종은 의무에의 복종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깊은 열망의 수행으로서 경험될 것입니다.

요점3: 결혼의 헌신을 지켜감에 있어 만일 기쁨이 없다면 그 잘못은 배우자에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 배우자가 얼마나 내 맘에 안들든 마찬가지입니다. 기쁨이 없는 이유는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내 믿음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3) 수용

요점1: 배우자를 수용한다는 것과 배우자에 대해 유쾌감을 느낀다는 것은 서로 다릅니다. 전자는 책임이고 후자는 축복입니다.

배우자의 행동이라는 사건에 대해서 우리는 두 가지로 반응하는데 하나는 섬김이냐 조작이냐의 결정이고 (전적으로 나의 선택에 달려 있다), 또하나는 유쾌감 혹은 불쾌감이라는 감정입니다.(전적으로 사건의 성질에 달려있다.)

결국 수용이란 조작하기보다는 섬기겠다는 결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누군가를 수용한다는 것은 이전의 일로 인한  분노나 그렇게 해야만 된다는 압박감 없이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을 뜻합니다.

요점2: 배우자를 수용한다는 것은 용서의 작업에 달려있으며, 용서의 작업은 다시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을 성경적인 컨텍스트에서 보려고 하는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감정적인 반응이 긍정적인 것인지 부정적인 것인지(즉 유쾌감인지 불유쾌감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사건의 성질 자체이지만, 그 감정적인 반응의 구체적인 내용과 강도를 결정하는 것은 그 사건에 대한 개개인의 평가입니다.

유쾌감 a. 필요와 연결시킴 -> 의존심(죄)
          b. 갈망과 연결시킴 -> 만족감(죄가 아님)

불쾌감 a. 필요와 연결시킴 -> 악독(죄)
          b. 갈망과 연결시킴 -> 실망(죄가 아님)

용서란 과오를 범한 자에게 그 과오의 대가인 처벌을 요구하지 않는다는 '가장 부자연스러운 결정'을 요구합니다. 그리고 그 결정을 위반할 수 있는 미묘한 방법들에 대한 깨어있는 민감성도 포함됩니다.

악독의 치유책은 재헌신의 노력이 아니라 사고의 교정입니다.

억압된 기억들에 대한 문제는 곧 사건을 하나님의 시각으로 보아 재평가하는 일입니다. 즉 사건을 유쾌하게 보진 않지만 나의 안전감이나 중요감과는 무관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잘못된 시각을 옳은 시각으로 바로잡는 일이야말로 용서의 작업의 핵심이라 하겠습니다.

사건을 컨텍스트 안에서
1.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우리의 부요함에 대해 묵상하믕로써, 또 우리가 최악의 거절을 당하고 가장 쓸모없다고 느껴질 때조차도 우리는 가치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담대히 주장함으로써, 그리고 우리의 신분에 걸맞는 양식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함으로써, 우리의 필요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붙잡아야만 합니다. 성경을 배우고 배운바를 묵상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우리의 마음에 배우자의 거슬리는 행동이 다시 떠오를때마다 우리는 다음 사실을 강력하게 반복 주장해야 합니다. 즉 무슨 일이 일어나든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안전하며 그분의 계획 안에서 중요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상대의 거슬리는 행동의 기억이 내 마음을 뚫고 들어오려고 할 때마다 "필요는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다"는 진리를 즉각적으로 떠올리는 것이 올바른 접근의 열쇠입니다.

2. 우리는 우리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를 기억해야만 합니다. 마 18장 21-35절말씀...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엄청난 용서를 깨닫고 인식할 때 자연적으로 흘러나와야 한다는 것이 이 말씀의 주제입니다.

3. 바울은 우리에게 다른 사람들을 나 자신보다 낫게 여기고 또한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빌2:3, 4)...그녀의 행동이 자신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는지에 초점을 맞추기(자기를 돌보기)보다는 메리가 겪고 있을 어려움들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보기(상대를 돌보기)를 선택해야 합니다. 

거슬리는 사건에 대한 올바른 평가를 강화해주는 성경적인 컨텍스트

거슬리는 사건  -> "내 필요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 채워졌어."
                       ("이건 나에게 정말 상처야"의 반대)
-> "나는 엄청난 용서를 받았어"
   ("나는 더 좋은 대우를 받는게 마땅해")
-> "배우자의 상처는 무엇일까?"
  ("나는 안전감과 중요감을 채움받기 위해 배우자가 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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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간에 걸쳐 또래친구들과 함께 북쉐어링을 한 책...
많은 사람들이 결혼에 대한 최고의 책이라고 극찬을 하였고 또 우리도 나누면서 그렇게 느꼈다.
비록 구체적인 사례나 기술이 아닌 원리에 대한 책이라 아쉽긴했어도 말이다.

무엇보다 나의 관계에 있어서의 태도를 섬김으로 바꾸게 하였고...
또 그것이 나의 배우자를 위한 기도제목이게 했고...
서로의 모든 필요는 하나님 안에서 이미 채워졌지만 그것을 서로에게 느끼게 해주는 것이라는 것이 참 깊이 다가왔다...

모두들 읽으면서 '과연 이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지', '그 상황 속에서 이렇게 실천할 수 있을지' 라는 의문을 가졌지만...
이런 귀한 진리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실천할만한 능력도 우리에게 주시리라고 믿고 기대한다.

'진리란 앎으로써 진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행됨으로써만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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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문득 생각난건데...

바람 피는 주된 이유는 자신은 현재의 배우자로부터 자신의 욕구와 필요를 채울 수 없고 새로운 파트너로부터 채울 수 있다는 것인데..

자신의 필요는 하나님께 이미 채워졌다는 사실을 깊이 인식한다면 바람피울 이유도 없는 것이다...

결혼건축가...

부제는 '바람피우지 못하게 하는 법' ㅋㅋㅋ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