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성령충만 그 아름다운 삶(찰스 스탠리, 두란노) 

성령 충만을 받는 것, 또는 성령에 취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으로 우리 자신을 성령의 지배하에 놓는 것을 말한다. 
1. 온전히 하나님 만을 의지하는 일 
2.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는 일 
이 두가지가 선행되어야 한다. 

요 15장 포도나무비유 
우리들은 변화를 만들어 내도록 창조되지 않았다. 단지 변화를 맺도록 창조되었을 뿐이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당신이 약속하신 대로 하리란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믿음의 메카니즘에 있어 우리가 감당할 부분은 매우 간단하다. 우리는 결정을 내리고, 위기 상황에 대처하고, 가족을 부양하는 등 일상적인 우리의 삶에 힘쓰기만 하면된다. 마치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당신의 약속을 이루실 것처럼 맡기고!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방식 
1. 그들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이 실패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2. 그들에게 있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제공해 주시는 유일한 공급원이다. 
3. 그들은 성령이 함께하신다는 증거를 찾는다. 
4. 그들은 스트레스로 쓰러지는 일이 없다. 
5. 그들은 하나님께 무엇을 구하는 것보다 그분께 감사하고 그 분을 칭송하는 일에 더 많은 시간을 쓴다. 


새로운 사람이 되어 
존매카시. 노력이나 투쟁이 아닌 순종을 하라, 하나님을 의지하라, 능력의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 안에 썩은 것들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라, 전지 전능한 구세주의 사랑 안에 거하라. 


성령 충만한 삶, 그것은 성령에 절대적으로 의지하며 항상 그의 가르침을 잘 따르는 삶이다. 우리 주위에서 들려 오는 이야기들을 멀리하고 성령의 가르침에 귀기울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살기 위해, 그리고 교회가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하나님 안에 거하라. 여러분 스스로는 열매를 만들어 내지 못하낟. 우리 모두는 그런 존재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하나님 안에 거할 때 하나님이 여러분의 삶 속에서 만들어 내는 열매를 보면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것이다. 
여러분이 백기를 들고 항복할 때에만 성령이 온전히 여러분을 통제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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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분별(브루스 월키, 나침반) 

제1부 점과 예감으로 하나님의 뜻 감잡기 
1.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살전4:3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살전5:18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특별한 표적을 구하는 것은 성숙하지 못한 사람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특별한 '표적' 때문이 아니라 다름 아닌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이다. 전능하신 자가 보내는 영적 포장 꾸러미를 기대하기 보다는 오히려 나는 하나님과의 친밀성을 신뢰하고 싶다.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살기를 바라시는지, 내 동기가 무엇인지, 하나님께서 나로 하여금 어떤 것에 관심을 가지게 하시는지, 내가 얼마나 그리스도와 동행하고 있는지, 하나님께서 그 말씀과 그 백성을 통하 
여 내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살핀다.) 

2. 이교도들은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가? 
3. 구약시대에는 어떻게 하나님의 뜻을 구했는가? 
야고보서에서 사용된 '지혜(약1:5)'라는 말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는 무관하다. 여기서의 지혜는 생활방식을 말한다. 약3:13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열매... 

2부 하나님의 뜻분별 

4. 성경을 읽으라 

기도하지 않고 읽으면 말짱 도루묵 

기억하고 묵상하라 

겸손히 순종하라 
만일 하나님께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듣고 싶어하는 말씀을 해주실지도 모른다. 발람의 예 


5.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가지라 
우리는 "빨리빨리"를 외치는 세상에서 패스트푸드를 먹으면서 살고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순식간에' 성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우리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 원하신다. 
우리의 소원과 주님의 소원의 일치 
믿음으로 하되 켕기면 하지마라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으신다거나 어려운 환경에 처하게 되었다고 해서 서둘러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화가 나 계신 거라고 생각지 말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좀 더 가까이 오도록 하려고 그렇게 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일을 통하여 당신의 믿음을 더욱 강건하게 하시려는 것일 수도 있다. 

6. 현명한 조언을 구하라 

7. 하나님의 섭리를 기대하라. 
우리는 섭리를 우연처럼 말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섭리가 때때로 우연히 나타나기 때문이다. 

번영의 신학. 1980년대 미국의 독특한 신학.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건강하고 부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만일 정말로 주님과 동행하고 있다면 주께서 건강을 주시고 사업을 번창케 하실 것이다. 만일 병들었다면 반드시 병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좀더 증진해야 한다. 만일 불경기 속으로 빠져들어간담녀 그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증거이다. 

잠30장. 아굴. 돈이 너무 많으면 하나님을 신뢰하기 보다는 자신에게 의미와 안전을 주는 부를 더 의지할 것이라고 고백. 가난이 결코 미덕은 아니다. 너무 가난해도 곤란해진다. 잠언에서 부정적인 의미로 거론되는 '부자'는 단순히 돈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부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에게 주신 복의 하나일 수 있다) 자신의 많은 돈을 신뢰하고 자기 자신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영적으로 위험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대신에 그 복을 신뢰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위험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늘 하나니을 찬미하고 우리가 원래 참으로 불쌍하고 가련한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위해 거저 주어야 한다. 사실상 믿음을 증명할 수 있는 진정한 시금석은 우리의 가진 돈을 궁핍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는데 있다. 그렇게 한다면 당신도 하나님을 의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환경보다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라 
삼상24장. 다윗이 사울을 죽일 수 있는 환경. 

8. 사리를 분별하라 

9. 하나님께서 간섭하실 수 있음을 알라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라 
신약성경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을 찾으라"고 명하신 적이 없고 오히려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그 뜻을 행하라고 명하신다.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대신 하나님의 '인도'를 따르는 것에 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것은 단지 의미론적으로만 다른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오라고 하시고 거룩한 삶을 살라고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에는 전혀 비법 같은 것이 없다. 직업을 바꾸고 결혼을 하고 학교에 들어가고 하는 문제에서 해답을 찾으려면 점점 하나님을 가까이 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성공 보다는 거룩에 더 관심을 가지신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것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되는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목적이 아닌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려면 힘든 수고와 전적인 헌신과 열심이 필요하다.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며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그렇게 할 각오가 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란 그런 것이다. 


끝머리에 
당신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목적으로 결정하려 하기만 한다면 성령께서 당신 속에서 당신의 결정을 인도하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당신의 내면에서만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실제로 성령은 또한 성경과 교회와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책 등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C.S. 루이스의 편지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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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6
나의 기쁨 하나님의 영광(John piper, 생명의 말씀사) 

1장 기쁨이 왜 의무인가?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안식을 찾기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 성 어거스틴 
만일 내 안에 이 세상의 어떤 경험도 결코 만족시켜 줄 수 없는 갈망이 있다면, 나는 다른 세상을 위해 지음받은 것이다. C. S. 루이스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나이다(시16:11) 

2장 하나님을 영원히 즐거워함으로 그를 영화롭게 하라 
하나님은 그분의 영광이 나타날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즐거워할때에 영광을 받으십니다. 조나단 에드워즈'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큰 만족을 누릴때 하나님은 우리 안에서 가장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이 우리의 가장 고귀한 사명이라는것. 
루이스, '영광의 무게' 
만일 가장 현대적인 지성에, 자신의 유익을 바라고 진정으로 그것을 향유하기를 소원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인식이 숨어있다면, 이 개념은 칸트와 스토아 학파로부터 스며들어온 것이며 기독교 신앙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임을 말해 두고 싶다. 사실 상급에 대한 분명한 약속과 복음서에 약속되어 있는 어마어마한 상급을 생각한다면, 우리 주님께서는우리의 소원이 너무 강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 약하다고 생가가실 것 같다. 우리는 마치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것이 어떤 것인지 상상할 수 조차 없어서 빈민가에서 진흙 파이 만드는 일을 계속 하고 싶어하는 무지한 어린아이처럼, 무한한 기쁨이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술과 섹스와 야망에 팔려 시간을 낭비하는 냉담한 피조물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즐거워한다. 
루이스, '시편명상' 
하나님에 대한 찬양이든 다른 어떤 것에 대한 찬양이든, 찬양에 관한 가장 명백한 진실은 이상하게도 나를 피해 갔다. 나는 모든 즐거움이 자연스러게 찬양으로 넘쳐 흘러 들어간다는 것을 정말 몰랐다. 연인들은 애인을 칭송하고, 독자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시인을 칭송하고, 산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시골길을 칭송한다. 내가 하나님을 찬양하기 어려운 이유는, 우리가 귀중히 여기는 다른 모든 것에 대해서는 기꺼이 하는 일,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을 정작 가장 귀한 분에 대해서는 하지 않으려 한다는 데 있었다. 우리가 즐거워하는 것을 기쁘게 찬양하는 것은, 찬양이 단순히 기쁨의 표현만이 아니라 기쁨의 완성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갈망하는것이 그리스도의 영광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기쁨을 추구하는 것은 우리의 의무입니다. 

3장 애정은 선택이 아니다. 
감정은 의무의 일부이며 명령. 
기독교 희락주의는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전적인 의존을 가져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명령을듣고 성 어거스틴처럼 "주께서 원하시는 것을 명령하시되, 주께서 명령하시는 것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칩니다. 

4장 기쁨의 추구는 교만과 자기연민을 막는다. 
자랑은 성공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일을 성취하였으니 칭찬받을 만하다." 
자기 연민은 고난에 대한 교만의 반응입니다. "나는 많은 고난을 당하였으니 칭찬을 받을 만하다." 
내가 기쁨을 위해 선한 일을 한다면, 자랑하고자 하는 충동이 사라집니다. 

5장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기쁨을 추구하라. 
기쁨의 추구는 모든 선행의 근본동기 입니다. 만일 당신의 목적이 충만하고 지속적인 즐거움을 추구하지 않는 것이라면, 당신은 사람들을 사랑하거나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진정한 사랑의 본질(고후8:1-4) 
첫째,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입니다 
둘째,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체험이 마케도니아 교인들을 기쁨으로 충만하게 했습니다. 
셋째, 하나님의 은헤에 대한 그들의 기쁨이 흘러 넘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후히 채워주게 했습니다. 
넷째, 마케도니아 교인들은 자신들의 보잘 것 없는 소유를 예루살렘 성도들을 위해 내어줄 기회를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사랑은 하나님을 기뻐함이 넘쳐 흐르고 확장되는 것으로 기꺼이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것입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의 만족은 다른 사람들의 상처에도 요동하지 않는 신비한 평온함이 아닙니다. 이 무익하고 타락한 세대에 그것은 채워지지 않는 만족입니다. 

6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예배 
공적 예배에서 
첫째, 무력한 예배의 진정한 원인은 사람들이 드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얻기 위해 나아오기 때문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얻기 위해 예배에 참석해야 합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없다면 굶주림과 목마름에 지쳐 살 수가 없다는 것을 알 때, 하나님은 큰 영광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잔치를 베푸는 것이 설교자의 일읿니다. 
둘째, 예배의 본질을 하나님에 대한 만족으로 볼때 철저히 하나님 중심의 예배가 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분을 주시는 것 대신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으로 초점이 옮겨진다면 그 결과 중심이 되는 것은 미묘하게도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것의 질이 됩니다. 
셋째, 기독교 희락주의는 우리로 하여금 그 자체가 목적인 예배의 본질에 주의하게 함으로써 예배의 우선순위를 보호합니다. 예배의 본질이 하나님 안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라면 예배는 다른 어떤 것을 위한 수단이 될 수 없습니다. 

7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결혼 
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는 이유는 남편과 아내가 각각 자신의 즐거움을 추구하기 때문이 아니라, 배우자의 즐거움 안에서 자신의 즐거움을 찾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거룩한 기쁨 안에서 자신의 기쁨을 추구함으로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십시오. 

8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돈 
부자가 되기를 열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딤전4:7-10) 
첫째,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7절) 
둘째, 그리스도인들은 간단한 생활 필수품만으로 만족할 수 있고 또 만족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모실때, 우리에게 평안과 안정감을 줄 별도의 돈이나 물건은 필요하지 않습니다.(8절)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르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히13:5-6) 

셋째, 그러한 추구는 결국 인생의 파멸로 끝나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9-10) 

삶은 전쟁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은 "왕의 자녀로서" 호화롭게 살 권리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무의미하게 들립니다. 특히 왕도 전쟁을 하러 나선 마당에 말입니다. 

9장 기독교 희락주의와 선교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해 자신을 부인할때 더 좋은 것을 위해 덜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분은 참된 생명을 향한 갈망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작은 쾌락과 안락을 부인하게 할 것이라고 가정하십니다. 
결코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을 얻기 위해, 자기가 영원히 가지고 있을 수 없는 것을 내어주는 사람은 바보가 아니다(짐 엘리엇) 


맺음말 
마지막소명-우리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해 고난과 위험을 기쁘게 받아들이라는 하나님의 부르심. 그리스도는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에드워즈, "자기부인은 슬픔의 근원과 기초를 파괴한다." 
그분은 우리가 고난 가운데 누리는 기쁨의 근원이시며 목적이십니다. 고난을 통해 기쁨을 추구함으로써, 우리는 기쁨의 근원되시는 분의 고귀함, 즉 모든 것을 만족시키는 그분의 무한한 가치를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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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신학으로의 초대(IVP, 스탠리 그렌츠 & 로저 올슨) 

1. 모든 사람은 신학자이다. 

2. 모든 신학이 같은 것은 아니다. 
민속신학 평신도신학 목회신학 전문신학 학술신학 

3. 신학의 정의 
기독교 신학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소도의 제자로서 공유하고 있는 믿음과 하나님 중심의 삶을 성찰하고 분명하게 표현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전 존재와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도록 하기 위해 행해진다. 

4. 신학에 대한 변호 

기쁨을 빼앗는다는 반대, 
신학이 믿음을 파괴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실제로 그것은 기독교 신념과 교훈이 영적으로 건강에 좋은지를 알아보기 위해 검사하고 시험하는 것이다(에밀 브루너는 복음을 시장에 있는 신선한 농산물로 보고 그것이 안전하고 건강에 좋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검사해야 하는데 이것이 신학이 하는 일이라고 비유를 들었다). 

분열시킨다는 고소 
신학의 주된 목적은 분리시키거나 연합시키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발견하고 보호하는데 있다는 것이다. 마틴루터는 "가능한 한 화평을, 그러나 어떠한 희생을 치르고라도 진리를!" 이라고 선포한 적이 있다. 

지나치게 사변적이라는 고소 
교착상태에 대한 고소 

5. 신학의 과제와 전통 
기독교 신앙의 내용들은 도그마(복음의 본질적인 것), 교리(본질적인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신념), 의견이라는 세가지 중요한 범주로 발전되어 왔다. 

신학의 비판적 과제 
기독교 신념들을 검증하고 평가하는 일 
타당한 기독교 신념들을 도그마, 교리, 의견으로 분류하는 일 

신학의 건설적 과제 
다양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합되 모델로 구축하는 일 
이 모델을 현대 문화에 적실성 있게 관련시키는 일 

20세기에 자유주의 신학을 비판한 리처드 니버(H. Richard Niebuhr)는, 자유주의 신학은 '하나님의 아버지 되심'과 '인류의 형제됨' 같은 소수의 중요한 가치를 일방적으로 강조함으로써 그 결과 자유주의 신학에 따르면 "진노하지 않는 하나님이 십자가 없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죄없는 인간을 심판이 배제된 나라로 이끈 것"이 된다고 비난했다. 

6. 신학의 도구 

성경 메세지 
현대를 위한 성경의 중심 메세지는 무엇인가? 

교회의 신학적 유산 
과거의 신앙고백과 신학에서 보여진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사역의 중심은 무엇인가? 

현대 문명의 사고형태 
오늘날 어떤 영적인 욕구가 표현되고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가? 

7. 상황 속에서 건설하는 신학 
신학의 건설적 과제는 하나님이 우리를 제자로 부르신 상황 속에서 하나님, 우리 자신, 세상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통일되고 일관성 있도록 제시하는 것이다. 
문화에서 벗어난 신학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상황화된 신학을 구축해야만 하는가?"라고 질문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좋은 상황화 신학자인가?"라고 자문해야 한다. 
성경과 문화에 치우칠때의 약점. 
세요소(성경에 대한 이해, 유산에 대한 인식, 문화적 상황에 대한 해석)가 창조적으로 상호작용하도록 함으로써 신학을 상황화 시킬수 있다. 
신학은 통합적인 주제에 의하여 조직적이 된다. 통합적인 주제는 그것에 비추어서 신학자가 다른 모든 신학적 개념을 이해하고 상대적인 의미나 가치를 부여하는, 주제적인 관점을 제공하는 중심적인 개념이다. 
저자는 책에서 '공동체'를 통합적인 주제로 예시했다. 


8. 신학을 삶에 적용함 
신학의 최종적인 목적은 삶에 있다. 신학적 과제는 기능적 도구(성경의 메세지, 신학적 유산, 현대문화)를 사용하여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신다는 관점에서 모든 실재를 고찰하는 해석 구조를 건설하는 것이다. 
신학은 지혜를 추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한 삶을 영위하는 지혜로운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 신학적 지식을 추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참된 신학자는 주일 아침에 암송하는 위대한 신앙고백이 어떻게 월요일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 탐구한다. 

신앙은 삶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며, 이 응답은 지적인 방향 전환을 수반한다. 신앙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신학적 시각으로 우리가 사는 사회를 바라보는 것을 의미한다. 즉 문화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첫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무엇에 주목해야 하는지를 결정하는 일을 수반한다. 문화의 목소리를 제공하고, 우리 시대의 사조를 표현하거나, 동시대 사람들의 숨겨진 내적 정신을 구현하고 있는 다양한 현장에 귀를 기울이는 것은 좋은 일이다. 문화, 음악, 영화, 텔레비전 프로그램, 예술, 신문, 잡지와 같은 많은 창구들이 있다. 
둘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문화적 현상을 면밀히 조사하는 일을 수반한다. 우리는 문화적 현상에서 작용하는 특정한 세계관이나 신앙 체계를 분석할 목표를 가지고 올바른 질문을 통하여 이 일을 수행한다. 
셋째, 귀를 기울이는 것은 문화를 평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일을 수반한다. 문화에 영향을 주는 신학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화와 상호작용을 해야만 한다. 

신학적인 시각으로 삶을 조망함 
첫째, 신학적인 시각을 가지고 자신을 관찰하는 것은 기독교 신앙체계에 따라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신학은 우리의 정체성의 중심이 구속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신분에 있음을 상키시켜 준다. 
둘째, 신학을 삶에 적용시키는 것은 '소명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소명을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계획을 진척시키는 제자로서 자신을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 
한마디로 신학을 삶에 적용하는 일은 온전한 삶을 영위하는 것을 말한다. 온전함은 '자신이 진술한 믿음과 일치된 행동을 하는 것'을 뜻한다. 온전한 사람은 값비싼 개인적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신의 확신을 고수한다. 온전한 사람은 자신의 행동을 통하여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준다. 

9. 신학으로의 초대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가? 
첫째, 어느 수준에서든지 기독교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축적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좀더 관심을 가져야 한다.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둘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는 당신이 현재 이애하는 신학에 불만족해야 한다. 
셋째, 신학자가 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해야만 한다. 

위험과 상급 
첫번째 상급은 풍성하고 향상된 기독교적 삶이고 둘째는 현대 문화 가운데서 그리스도인의 삶을 영위하는 데서 오는 의문에 대한 대답을 발견하는 것고 셋째는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없는 명백한 영적 고갈을 경험하는 동안 의지할 수 있는 신앙 체계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신학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 중의 하나가 대체의 위험으로 즉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을 지성주의로 대체하는 것인데 이를 피하기 위해서는 정규적인 예배, 성경공부, 기도를 통하여 지역 교회의 경건한 그리스도인과 강한 결속을 유지하고 또한 개인기도와 경건 생활이 어려운 신학적 과제를 놓고 고심하는 지적능력과 함께 자랄수 있도록 힘쓰는 것이다. 둘째는 소속된 교회를 잠정적으로 이탈할 수 있다는 것이고 마지막은 오해를 받는 것이다. 

성찰적인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 
성경연구 
역사신학 
문화적 상황 연구 

비판적이고 건설적으로 생각하기 
기독교 신념들에 관한 당신의 생각-단순한 사실들이 아니라-을 노트에 적어라. 믿음의 어떤 내용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처음으로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을때 어떤것을 버리거나 철저하게 바꿀 것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왜?"라는 질문에 답변하는 것. 
어떤 통합 주제가 나의 기독교 믿음의 내용들에 일관성을 주는가? 
신학적 성찰을 혼자서 하지말고 다른 그리스도인과 지도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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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하나님의 음성(IVP, Dallas Wilard) 

1.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에 대한 역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한 지침 

3.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에 들어맞는 것이 대화적 임재 방식이다. 성품 개발의 틀이 되는 것도 바로 대화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 분별하기. 의사소통은 두가지 방시긍로 이루어지는데 첫째, 하나님은 우리에게-나아가 우리를 통해-들려주시는 음성 내지 말씀을 통해 의사를 전달하신다. 둘째는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그분과 함께하는 이들에게 전달된다. 이것은 받는 자쪽의 훨씬 적극적인 역할이 요구되며, 하나님의 가정 내지 나라에서 매우 성숙한 사람들 사이에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를 알되, 일하시는 그분께 온전히 흡수됨으로써 아는 수준이다. 특히 우리는 상대가 집중하고 있는 바를 인식하면 그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의도를 읽을 수 있는데 바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마음의 전반을 아셨기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무엇인지를 아셨다. 
잘못된 해석. 첫째, 매순간 메시지를 주신다는 견해는 성경과 교회의 공동체험으로도 입증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베드로나 바울, 예수님도 쉬지않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받았다는 증거는 없다. 기적이 너무 많으면 우리는 약해지며, 자연법칙에 순응하기 보다는 기적을 의지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적은 그분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해 줄 정도면 충분하다. 둘째, 성경에 다 있다는 견해. 우리는 성경의 원리 안에 있되 성경의 명시적 세부 내용을 벗어나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외면해서는 안된다. 셋째, 아무래도 좋다는 견해 이것은 어떤일이 벌어져도 하나님의 인도로 받아들인다는 내용임을 알 수 있는데 앞으로 우리에게 일어날 많은 사건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바로 우리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상은 우리의 역할이 없어서는 안되는 곳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만이 아니라, 우리가 원하고 뜻하는 바가 무엇인가도 중요하다. 

4. 대화하는 우주 

5. 세미한 소리와 그 경쟁자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개인들의 체험 중에서 그 무엇보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세미한 음성'이다. 이 세미한 음성이야 말로 하나님의 뜻에 맞고 가장 가치있고 우선적이며 개별적인 의사 소통 형태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숙한 인격적 관계 속에서 자신과 동행하는 이들에게 대체로 이 내면의 음성을 사용하여 개별적으로 말씀하시며, 그들이 걸어가는 과정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재를 선포하고 알려 주신다. 지식과 자유의지를 지닌 인간-하나님의 동역자이자 친구로서 그분의 일에 동참하는-의 제반 기능이 최대한 개입되기 때문이다. 
성경 이상의 것이 필요한가? 음성, 환상, 꿈, 예언하는자, 개인의 생각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성경과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된다는 주장이 있다. 무엇보다 '필요하다'는 말을 인간이 하나님을 아는데 최소한 요구되는 것으로 본다면, 성경에 근거할 때 성경과 교회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그런 지식을 얻을 수 있다(롬1:19-21 만물 속에 하나님을 알만한 것이 있음). 그러나 '필요하다'라는 말이 하나님과 개인 간의 참으로 인격적이고 구속적인 관계에 요구되는 것을 뜻한다면, 성경과 교회의 존재만으로는 부족하다. 그것은 단순히 존재한다는 사실 외에 최소한 각 개인의 삶에서 개별적인 기능을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이전의 비문명 시대에 비해 훨씬 성숙했기 때문에 성경에 기록된 것 같은 하나님의 임재와 교제가 없어도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분하다는 주장이 있는데, 주님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는 모든 능력을 행하시며 강한 자로 나타나시고 지금 이 땅을 사는 성도들에게는 손을 펴시거나 기적을 행하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그분을 부당하게 대하는 처사다(스펄젼의 시 103:2에 대한 주해). 성경이신론을 주의하라. 
지도자가 해야할 중요한 일은 하나님의 음성을 알아듣는 일이 자신의 개인적 체험과 실험을 통해 배워야 하는 일임을 사람들에게 분명히 깨우쳐 주는 것이다(엘리 제사장). 
음성의 우위성. 음성은 내용이 명료하고 듣고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성숙한 상태에 있다는 것이다. 극적일수록 덜 성숙한 것이고, 종종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성숙을 위해 모호한 방식으로 말씀하신다는 것도 이해해야 한다. 

6.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와 구속은 그 자체가 곧 말씀이다. 어떤 백부장(눅7:2)은 권위를 가진 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의 위력에 대한 믿음, 그것도 체험적 지식에 근거한 믿음이다. 예수님은 눈 앞에 닥친 문제 때문에 기도하신 적이 거의 없다. 그분은 대체로 문제 자체를 향해 말씀하시거나 그 문제와 관련된 모종의 행동을 취하신다.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 성경은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이 곧 성경은 아니다. 성경은 독특한 기록된 형태로 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니다. 성경은 시편 기자의 말처럼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서서(시119:89) 자연 질서를 드러내는(시19:1-4)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고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 널리 퍼져 흥왕하여 더한(행12:24)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오늘 각 신자들과 개인적으로 나누실 자세한 대화가 나와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원리면에서 그 경계를 정해준다. 성경 안에 묘사된 광의의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통해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분과 화목하게 살려는 불타는 열망을 가지고 겸손하고 꾸준히 성경에 다가감으로써 누구나 살아계신 말씀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성경을 공부할때 우리를 교만, 무지, 두려움, 조급함에서 지켜 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살아계신 말씀인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7.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구속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그리하여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 온전한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우리를 향한, 우리를 통한 그리고 우리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통해서다. 
생명이란 구체적인 관계에서 행동하고 반응하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씻김받다. 엡5:25-27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이렇게 말씀에 씻겨 마음이 변화된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고 실제적인 일이된다. 말이란 근본적으로 생각이나 감정의 표현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씀을 통해 우리 마음과 생각의 구습-생각과 감정과 행동과 상상과 개념화와 신념과 추론의 낡은 습관-을 제거하시며 그 자리에 다른 것, 즉 그분의 생각, 그분의 태도, 그분의 믿음, 그분의 관점과 해석방법과 그분의 말씀을 넣어주신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하나님의 구속사역의 진행 과정에서 대화는 교제로 발전하고 교제는 연합으로 발전한다. 교제가 연합으로 발전되면 '네것', '내것'의 인식이 없어지고 '우리 것'만 남게 된다. 즉 그리스도의 믿음이 나의 믿음이 되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7장에서 자신의 새 생명과 동화되기로 결정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서 끝내 선을 고수하는 새 생명, 그것과의 연합을 인정하고 인식하며 단언하는 것이다. 
구속과정에서 기록된 말씀이 하는 역할. 성경은 교제를 확립시켜 주고 연합의 길을 열어 주는 하나의 의사 소통 방식이다. 순종하는 자세로 읽으라. 즉 진리를 찾으려는 열망을 그대로 행하고 실천하려는 열망에 굴복시켜야 한다. 
성경으로 기도하기. 계시된 그분의 뜻이 내게도 진리여야 한다는 열망을 품어야 한다. 1년 동안 성경의 모든 단어를 눈앞에 스쳐 지나가게 하는 것보다 딱 열구절만 내 삶의 본질로 바꾸는 편이 훨씬 낫다. 하나님과의 거룩한 만남의 장소에 가는 마음으로 선택한 본문을 펼치라. 1.정보, 2. 열망: 나도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 3. 단언: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는 다짐, 4. 간구: 그렇게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구하는 것, 5 적용의 선포: 하나님의 은혜로 과연 나도 그렇다는 고백. 특히 마지막 단계는 하나님이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오시는 모습을 지켜볼 때 그런 능력이 주어질 것이다. 

8. 하나님의 음성 알아듣기 
세개의 빛으로 알 수 있는데 이것은 환경, 성령의 감화, 성경 말씀을 의미한다. 이 세가지가 동일한 방향을 가리킨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원하시는 방향이라고 믿어도 좋다. 
책임있는 판단의 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며 사는 삶은 우리 자신의 판단을 배제하지 않는 삶이다. 세가지 빛이란 한마디로 마땅히 행할 바에 대한 책임있는 판단과 결정 과정에서 우리가 반드시 고려해야 할 요인이다. 각 빛이나 세 빛 전체는 하난미의 직접적인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기회가 될 수 있고 대개 실제로 그렇다.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알아듣게 하는 것은 권위, 정신, 내용을 살펴볼 때 알 수 있다. 권위는 우리의 의식에 감화를 일으키는 무게 내지는 영향력과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언제나 정확하게 이해하거나 오류없이 쉽게 받을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알고 실제적으로 이해하는 것의 중요성은 첫째, 모든 신자가 하나님 나라를 날마다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둘째, 우리에게 확신과 위로와 평안을 공급하며 셋째, 사이비 광신자와 율법주의에서 우리를 지켜주며 넷째, 성경이 말하는 질적인 삶을 현실로 맛보게 한다. 

9. 인도하심 그 이상의 삶 
믿음이란 지식의 반대가 아니라 보는 것의 반대다. 은혜란 노력의 반대가 아니라 대가로 얻는 것의 반대다. 헌신을 유지시켜 주는 것은 혼돈이 아니라 깨달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할 뿐 아니라 뜻(생각, 지성)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라고 명하신다(막12:20). 그러므로 성경을 근거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의사소통 방식을 공부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포괄적인 뜻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음성을 이해하며 간절히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문제나 중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경우를 만났을때 못지않게 삶이 평탄할때도 그 음성을 진심으로 들으려 한다. 즉 평소에 들을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꾸준히 듣는 시간을 갖고 언제라도 들을 수 있는 조용한 내면의 공간을 가꾸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요령이나 수법이 아니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은 어떤 결과를 위해 우리가 '조종하는 분'이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 억지로 말씀을 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과 화목한 연합 가운데 있지 않을때 특히 그러기 쉽다. 억지로 말씀을 얻으려는 사울왕(삼상13:5-10). 
'스스로 알아서' 내리는 결정 
특별한 상황에서 구체적인 말씀이 주어지지 않는 이유로는 우리가 하나님 속을 썩인 것 외에도 다른 이유들이 있다. 주된 이유 중 하나는 일반적으로 삶의 행로를 정할 때 대부분 우리 자신이 알아서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결정권을 맡김으로써 우리의 성품을 개발하기도 하고 우리의 유익을 위해 그것을 시험하시기도 한다. 우리의 영혼이 절대적으로 독립하는 만큼만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할 수 있으며,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만큼만 우리의 영혼도 절대적으로 독립할 수 있다('하나님의 뜻', 존 우드 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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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하나님, 나는 당신께 누구입니까?(요단, 필립얀시) 

one 구약성경은 애써 읽을 가치가 있는가? 

two 어둠 속에서 바라보기: 욥기 

욥기는 대부분의 구약성경에서 나타나는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계약적 믿음" 보다 한 단계 높은 차원의 믿음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는가는 모든 시대의 사람들이 고민해 온 문제이다. 그러나 이 고통의 재료로 만들어진 이야기의 중심주제는 믿음이다. 욥기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즐거움보다는 믿음에 더 관심이 많으신 것을 보여준다. 금처럼 가장 순수한 믿음은 극한 역설의 상태나 우리가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이 보류되는 상황에서 나타난다. 욥기는 우리의 믿음의 선택이 우리와 우리 자신의 운명뿐 아니라 놀랍게도 하나님 자신에게도 중요하다는 놀라운 진리를 제시한다. 
1. 하나님께서는 욥의 문제들을 허용하셨으니 실제로 고통을 일으킨 것은 사단이었다. 
2. 욥기 어디에도 하나님께서 능력이나 선하심이 부족했다는 언급이 없다. 
3. 욥은 고난이 언제나 죄의 결과로 온다는 이론을 단호하게 논박한다. 
4. 우리는 하나님의 공정성이 이생에서 나타나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들은 하나님께서 사후에 공의를 베푸실 것이라고 가르친다. 
5. 하나님께서는 욥의 의심과 절망을 꾸짖지 않으셨으며, 그의 무지함을 꾸짖으셨을뿐이다. 
6. 어느 누구도 고난에 대해 다 알수 없다. 하늘의 싸움임을 모르고 제한된 시각에서만 봤다. 
7. 하나님께서는 결코 완전히 침묵하시지 않는다. 
8. 좋은 의도의 충고도 때로는 유익보다 해를 끼칠수 있다. 
9. 하나님께서는 논의의 초점을 욥이 당한 원인에서 그의 반응으로 다시 맞추셨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의 문제를 결코 설명하지 않으셨다. 
10. 하나님의 계획에서 고난은 구속될 수 있거나 더 고상한 유익에 사용될 수 있다. 


three 쓰고도 단 인생: 신명기 
모세의 삶의 주제는 "하나님께서 이루셨다"이다. 모세의 연설의 메시지는 "기억하라!"였다. 사랑은 그분과 인간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관계의 기초이다. 현대의 독자들은 출애굽의 스릴에 흥분되어 그에 앞선 비극 400년이나 시내 광야와 뒤이은 약속의 땅에서 나타난 비참한 실패에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은 그 누구에게도 그렇게 숩지도 안정적이지도 않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에 관해서 가장 위대한 현실주의자였다. 신명기에 기록된 모세의 슬프고 설득력 있는 연설에는 두 개의 후기가 있다. 첫째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모세의 무서운 예언이 성취된 후에 일어난 사건을 담고 있다. 이스라엘이 망하고 끔찍한 저주가 성취되었기도 하고 요시야 시대에는 "언약책"을 통해 영적인 대청소와 부흥이 일어났다. 두번째 후기는 신약성경 마가복음 9장 3절에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변화되실때 모세가 나타났다. 모세는 마침내 약속의 땅의 산꼭대기에 서있는 생전의 꿈을 이룬 것이다. 

four 마음을 쏟아놓는 기도: 시편 
시편은 하나님을 사람에게 나타내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자신을 하나님께 나타내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시의 기능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보여주는 이미지와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이다. 시편은 영혼을 치유하는 것으로 하나님께 대해 느끼는 모든 감정을 하나님께 내오놓아도 좋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경배(예배)란 우리가 몰두하던 일을 중단하고 하나님의 존전에 나아가는 전략이다. 시편의 소수만이 찬양과 감사에 초점을 맞추고 70퍼센트가 애가의 형태를 띤다. 다윗은 사건들을 회상하고 거기에 관한 시편을 쓰면서 하나님을 무대 중앙에 세우는 방법을 발견했다. "하나님 앞에서 행함"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든지 다윗은 이것을 경험했다. 다윗의 시편은 일상의 삶을 초자연적인 세계의 실체에 맞추려는 의식적인 노력의 결과이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유쾌하든 불쾌하든 간에 모든 행동과 느낌, 모든 경험을 반드시 하나님께 아뢴다는 뜻이다"(C. S. 루이스). 
저주시편을 기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적절하다. 욥기, 예레미야, 하박국이 분명히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우리가 무슨 기도를 드리든지 참고 들으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진 감정들, 억제되지 않은 분노들을 그분께 내어놓을때에만 고치시고 치료해주실 수 있다. 

five 지혜의 마지막: 전도서 
잠언은 삶을 이해한다. 지혜를 배우고, 신중히 행하며, 규범을 따르면 네 사람이 길고 번성하리라. 그러나 전도서는 자신있고 실제적인 음조는 사라지고 체념과 냉소가 그자리를 대신한다. 전도자는 지혜가 어리석음에 비해 몇가지 이점이 있다는 것은 인정하나 지혜로운자의 운명이나 우매한 자의 운명이나 다를게 없다고 본다. 이러한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구약성경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을 반영한다. 원하는 것을 얻는 저주. 그렇기에 황금의 시대에 전도서와 같은 절망의 책이 나올 수 있었다. 좋은 시대가 진짜 위험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인간의 최선의 노력이 폐허를 초래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전도서는 즐거움을 좇는데 우리 삶을 바치게 만들 정도로 즐거움을 너무나 매혹적으로 제시한다. 그런 다음 이러한 즐거움이 궁극적으로 만족을 주지 못한다는 잊혀지지 않는 깨달음도 준다. 우리는 또다른 집을 향해 가도록 영원을 사모하도록 지음 받았다. "하나님을 믿는 다는 것은 이 세상의 사실들이 일의 결국이 아니라는 것을 보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이 의미가 있다는 것...이 의미가 세상 속이 아니라 밖에 있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비트겐슈타인). 

six 하나님께서 대꾸하신다: 예언서 
예언서의 가장 놀라운 특징이자 17권의 책을 자세히 연구해 볼 만한 이유는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의 애절한 물음에 답하신다는 사실이다. 예언서들은 "성공신학"의 실패를 강하게 항의한 것 같다. 아이러니컬하게도, 하나님은 자신이 세상에 관심이 있다는 증거로 예언자들을, 다시말해 하나님이 숨어 계시는 것이 아닌지 의문을 제기했던 바로 그 사람들을 내세우신다. 예언서를 읽는 사람이라면 무감각하고 멀리 계신 하나님이 아니라 실제 인격이시며, 당신이 만난 어떤 사람 못지 않게 열정적이신 하나님을 만난다. 예언자들이 전하는 주요 메세지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이렇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다. 
예언서를 읽다보면 예언자들에게는 지금이 나중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저자는 예언자들의 통찰력을 지금/나중/훨씬 나중 의 셋으로 구분했다. 요한계시록의 예언들이 어떻게 이루어질지는 알 수 없으나 예언자들의 성취를 볼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약속을 초과하는 방식으로 그 약속들을 성취하실 것이라고 확실하게 추정할 수 있다. 
예언자들은 인간의 동경을 규정한다-사실 모든 유토피아적 비전은 예언자들의 멋진 말에서 기원한다. 그런 후에 이들은 지금의 행동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 영광되 미래를 그려낸다. 이들은 사람들이 혼란과 절망의 시대에도 붙잡을 수 있도록 '하나님이 원하시는 세상'의 비전을 제시했다. 본능적으로 우리는 미래로 날아가고 싶어하나 예언자들의 메세지는 일차적으로 나의 지금에 영향을 미쳐야 한다. 
예언자들은 보통사람보다 용기가 많았던 사람이 아니라 특별한 시각, "그림자 속에 계시는 하나님"을 보는 통찰력이 있었다. 이러한 시각은 역사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예언자들은 이 세상을 비록 무대 뒤의 보이지 않은 힘의 영향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각 사람이 연기를 하는 무대로 묘사한다. 중요한 질문은 "느부갓네살이(또는 러시아나 중국이) 얼마나 많은 영토를 다스리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진격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백성이 충성을 잃지 않고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믿는가?"이다. 
예언서를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년 혹은 2050년에 무슨일이 일어날지를 보다 분명히 아는 것은 전혀 불가능하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내 삶에서 무엇을 성취하기 원하시는가를 보다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seven 마지막 답변의 전주곡 
어떤 의미에서 구약의 모든 역사는 예수를 위한 전주곡이며,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예수께서 태어나실 가계와 정체성과 민족의 형성에 기여한다. 구약성경, 특히 이 책에서 논의한 부분들을 돌이켜 생각해보면 세가지 질문이 다른 형태로 계속 떠오른다. 내가 소중한가? 하나님께서 돌보시는가?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나는 소중한가? 복음서에 있는 예수와 그 분이 행하신 일에 눈을 돌린다. "해 아래" 있는 내 실존이 하나님께 중요하지 않다고 결론내린다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와 모순된다. 예수께서는 참으로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이시다. 
하나님이 돌보시는가? 예수께서 그 해답이시다. 예수께서는 고통의 문제에 결코 철학적인 해답을 주려 하지 않으셨으며, 오히려 실존적인 해답을 주셨다. 우리는 고통의 문제에 대한 답을 듣길 원하지만 그 대답을 얻지 못하고 대신에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고통 당하신다는 신비로운 확증을 얻는다. 
왜 하나님은 행동하지 않으시는가? 이 질문에 유대인들과 그리스도인들은 한 가지 중요한 차이만 빼고 똑같은 대답을 한다.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보내심으로써 행동하셨으며, 이번에는 연약함과 낮아지심이 아니라 능력과 영광 가운데서 그 분을 다시 보내심으로 다시 한번 행동하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날이 오면, 구약성경 저자들을 그렇게 괴롭혔으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는 질문들은 아이들이나 묻는 질문들처럼 우리의 가뭇한 기억 속에서나 찾을 수 있을 것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5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IVP, 송인규)

제1부 우리 모두는 보냄받은 선교사입니다 

1장 세상: 사랑하라/사랑치 말라 
이 내용은 은 서강기독인오티때 강영안 교수님의 세계관 강의를 들었던터라 이미 알고 있기도 했고 잘 이해되었다. '세상'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고 그래서 세상 정신은 철저히 미워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목숨을 다해'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우리는 세상사람들로부터 격리되서는 안된다. 
내면화란 외적 원리를 자신의 인격과 삶에 받아들임으로써 자연스럽게 자신의 가치관으로 바꾸는 작업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매순간 떠올리고 결심하고 실행하고 돌이키는 의식화 작업이 필요하다. 

2장 선교: 보냄받은 의식 
요17장 13, 14, 15, 18절. We are 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not out of the world but into the world. 저자는 수도원, 변절자, 양다리 모델 대신에 침투조 모델을 제시한다. 침투조 곧 소금과 빛의 역할을 올바르게 감당하기 위해서 첫째 자신이 필요한 곳으로 가야하고 둘째 자신의 고유하고 독특한 성질을 그대로 보유하고 있어야 한다고 지적함. 선교의 핵심은 보냄받은 의식. 

3장 사명: 미션 임파서블? 
우리에게 있는 요소를 이웃, 복음, 달란트로 이 각각을 원으로 보았을때 이웃과 복음이 만나는 영역을 '증거'로 이웃과 달란트가 만나는 영역을 '봉사'로 복음과 달란트(전공/직업)이 만나는 영역을 '변호'라고 보았다. 

제2부 우리의 모든 생활은 연장된 예배입니다 

4장 교회: 흩어지는 공동체 
모이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 
'오라'의 구조(마11:28) '가라'의 구조(마28:19) 
내향성 외향성 
예배, 교제, 교육, 봉사공동체 특징 생활, 선교, 증거, 봉사공동체 
예배당 중심성 생활현장, 세상, 사회 
주일 시간 매일 
목회자, 교역자 주도자 평신도, 일반 그리스도인 
성령충만은 그리스도인 개인과 공동체가 성령 하나님께 일시적 혹은 영구적으로 사로잡힘으로써 성령님의 계획과 뜻을 이루어 내는 신앙경험. 

5장 예배: 하나님을 섬김 
'예배하다'라는 단어의 뜻은 두가지로 첫째, 노예가 주인에게 소속되어 부과된 사역이나 임무를 다한다는 뜻의 헬라어 '라트레이아'-히브리어의 '아보다'에 해당-가 있고 둘째, '프로스쿠네오'-이는 '히스타하와'라는 히브리어에 상당함-를 들 수 있는데, 이 단어는 '-을 향하여'('프로스')와 '입맞추다'('쿠네오')의 합성어로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숭앙한다는 뜻에서 무릎을 꿇든지 절을 하는 모습과 연관된다. 이 두가지를 종합해 보자면, 예배란 결국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 앞에 부복하는 일이요, 하나님을 받들어 모시는 가운데 수종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신령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외적 형식이나 제도에 의거하지 않고 우리의 내면이나 인격 중심으로부터 우러나와 예배한 다는 뜻이고 '진정으로 예배한다'는 말은 헬라어 '알레데이아'로서 객관적 측면뿐 아니라 주관적 측면도 보유하고 있는 단어이다. 즉 하나님이 누구인지 알면서 예배해야 한다는 것과 마음의 진실한, 진지함, 간절함이 동반된 예배를 가리킨다.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해서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제물, 거룩한 제물, 산제물로서 바치는 것이 올바른 예배 행위인데, 이것을 '영적 예배'라고 부르고 있다. 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우리의 예배라고 할 때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몸이 참여하는 모든 영역의 행위와 활동이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구성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즉 일상 생활 자체를 통한 예배이다. 

6장: 일상사의 거룩성 
'거룩'에는 세가지 의미가 있다. 하나님이 피조물과 절대적으로 구별되는 신적존재임을 나타내는 표현과 하나님께 바쳐진 사람이나 사물이 하나님과 더불어 보유하는 관계 혹은 위치 그리고 개인이 보유하고 반영하는 도덕적이고 영적인 특질을 가리킨다. 
'거룩한 자'에 대한 구속사적 도표 
이스라엘 백성-> 제사장, 선지자-> 예수-> 사도들, 선지자-> 교회, 성도들, 거룩한 나라 
자연세계(슥14:20-22, 딤전4:4-5)와 문화세계 역시 하나님께 성별될 수 있다. 가정(마19:4-6), 직장(골3:22-24), 정부(롬13장). 거룩의 보편성. 

제3부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소명을 주십니다 

7장 주님: '내 영혼'과 '모든 만물' 
예수 그리스도의 주되심(Lordship). 신앙입문에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롬10:9,10).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한다(빌2:9-11). 우리의 믿음을 신장시킨다(마8:8-10). 그리스도인의 일관성 있는 충정심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칩니다(롬14:6-9). 주되심의 범위를 가장 좁고 사적인 영역 즉 내 영혼에서부터 거의 무한대로 넓고 공적인 영역 즉 모든 만물에 이르기까지 열거할 수 있다. 주되심의 범위를 넓히는 길은 첫째, 예배의 면에서 훈련되어야 하고 둘째, 목숨, 재물, 시간, 우리의 재능과 은사의 영역에서 청지기의 삶을 추구함으로써 주되심의 범위를 넓게 인식할 수 있고, 셋째 우리의 교제 생활 또한 주되심의 범위를 넓히도록 자극하고 넷째, 그리스도인의 사도적인 면모 즉 우리가 어느 영역에서든 보내심을 받은 의식에 충실하려면 그 영역을 다스리는 주님에 대한 주되심의 범위 또한 넓어져야 한다. 

8강 소명: 삶의 위치로의 부르심 
사람이 하나님의 일을 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것. 하나님은 우리 모두를 구원의 완성으로, 신앙적 목표로, 삶의 위치로 부르신다.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소명을 목회자와 해외 선교사 계층과만 연결시키는 소명의 독점화 현상, 또는 진정한 의미의 소명이란 마찬가지로 목회자나 해외 선교사에게만 해당된다는 소명의 계층화, 소명을 신앙적 영역의 사역이나 영적 성격의 활동과만 연결시키는 태도인 구획화 입장이 있다.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앙에 대한 이원론적 자세와 목회자가 아닌 이들의 모범이 너무 희귀한 것 그리고 신약 몇몇 성구에 대한 그릇 해석과 적용(눅10장 마리아와 마르다의 기사)이 그 원인이 될 수 있다. 

9강 현장: 우리의 삶터, 우리의 지성소 
일/직업에 대한 성경적 시각. 첫째, 우리가 일에 대해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직업 영역에서의 노력을 통해 하나님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창세기 1장 일하시는 하나님). 둘째 그것은 성경의 명령이기 때문이다(데살로니가후서 3장 7-12절). 셋째, 그리스도인은 일을 통하여 이웃을 섬길 수 있기 때문에 일에 대해 적극적인 자세를 견지해야 한다(엡4:28). 넷째, 이 땅에서 힘들여 일하는 것이 천국에서 영원한 가치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계14:13). 
직업현장에서 우리를 얽어매고 있는 것들. 첫째, 시간 사용과 '충성'의 문제. 둘째, 자아실현과 관련된 문제(승진) 그리고 윤리적 갈등에 관한 것(술, 담배)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러한 자아실현의 문제에 대해 세가지 유형을 나타낸다. 도피적/소극적 유형은 직장생활을 대단치 않은 것으로 여기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형적인 이원론의 모습으로 자신의 능력 부족과 패배에 대한 교묘한 합리화이다. 둘째 유형은 기복적/보상적인 것으로 자아실현을 하나님의 기복적 개입에서 찾는다. 즉 교회봉사와 전도를 열심히 하면 그에 대한 보상으로 승진이나 성공을 허락하신 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인 섭리방식(뿌린대로 거둔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 마지막 유형은 권모술수적/비윤리적 유형으로 자아실현을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말할 필요도 없고 일반적으로서도 합당치 않은 방식과 수단을 취하는 일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신학> 
구약서론 
신약개론 
신학으로의 초대 

<세계관> 
창조, 타락, 구속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나의 세계관 뒤집기 

<강해> 
꿈꾸는 자가 오는도다 
메시야의 고난과 영광 

<역사> 
이야기 교회사 
천국의 기둥 
기독교회사 

<예수전도단> 
하나님 정말 당신이십니까 
네 신을 벗어라 
벼랑끝에 서는 용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법 
스릴있고 성취감 넘치는 중보기도 
영적전쟁 
불가능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손에 훈련된 예배인도자 
효과적인 찬양사역 
십분의 일 선교 
하나님을 위하여 도시를 점령하라 

<IVP> 
내면세계의 질서와 영적성장 
내마음 그리스도인의 집 
하나님을 아는 지식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탁월한 지도력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 
예배당 중심의 기독교를 탈피하라 
사랑은 배워야할 감정입니다 
여성 그대의 사명은 
무너진 세계를 재건하라 
사귐의 기도
바늘귀를 통과한 부자

<김남준> 
거룩한 부흥 
자네, 정말 그 길을 가려나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라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설교자는 불꽃처럼 타올라야 한다 
영적기상도를 말한다 
목회자의 아내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 
하늘로부터 온 사람 

<두란노> 
거인들의 발자국 
당신안에 잠재된 리더쉽을 키우라 
남자입니까 
기도 
나의 발을 사슴과 같게 하사 
찬양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홍성사>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죽으면 죽으리라 
스크루테이프의 편지 

<생명의 말씀사> 
양과 목자 
기독교 영성관 
기독교 성경관 
부흥 
종교에 메이지 않은 그리스도인 
삶을 변화시키는 가르침 

<기타> 
성령세례 
성경과의 만남 
성경대로 살기 
C. S. 루이스의 기독교 세계 
제자입니까? 
예수님처럼 
예기치않은 기쁨 

<유진 피터슨> 
목회오경 
껍데기 목회자는 가라 

<필립얀시>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이렇게 많이 읽었는데 기억나는건 별로...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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