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래리 크랩/ 두란노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이 땅에서 형통하게 사는 것을 궁극적 목적으로 삼는 것이 끈질긴 죄라는 사실을 하나님과의 신선한 만남을 통해 깨닫는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큰 도전은 우리가 율법적인 옛 방식대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성령의 새로운 길을 알아 하나님의 임재로 나아가려는 갈망을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의 도덕적인 생활과, 자선을 베풀며 신뢰할 만한 관계를 맺는 모습 뒤에 감춰진 목적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더 나은 삶을 성취하기 위한 것은 아닌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추구하는 결과를 얻을까 하여 인과법칙에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가?

아니면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끊임없는 열망 때문에 그리스도를 알고자 하는 갈급한 심령을 가지고, 성령의 음성을 듣고자 귀를 기울이고 있는가? 우리는 있는 모습 그래도 거룩한 공동체로 담대히 나아감으로서 성령의 자유의 법을 따르고 있는가?(p.64-65)

우리의 가장 궁극적인 열망은 하나님인가?

옛 생활의 길에는 수많은 종류의 갈망이 있지만 그 모든 것은 '지금 당장 더 나은 삶'이라는 핵심적인 가치가 목적이다....새 길에서도 축복을 소망하고 치유를 위해 기도하며 행복한 가정을 위해 노력하고 겸손하게 하나님께 쓰임받는 기쁨을 기대하는 등 형통한 삶을 즐거워한다. 하지만 강요되는 것은 없다. 비록 더 나은 삶에 대한 갈망이 더 실제적이고 깊은 욕구이지만 그것 자체가 중심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이 행동을 움직이는 목적이 아니며 마음의 첫번째 갈망이 아니라는 말이다.

새로운 길을 걷는 사람들은 하나의 궁극적인 갈망, 즉 하나님을 갈망하며 그를 만나며 그를 알아가고 즐거워하며, 그분을 나타내고 그분처럼 되고자 하는 소원을 가지고 산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하나님이 가장 최선의 것을 주시리라 믿는다. 환경이 평탄하든지 힘들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을 향한 갈망이 지속적으로 삶을 주관한다.

그러나 그 갈망이 만족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하나님을 갈망하지만 하나님을 체험하는 것은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간을 내고 기다리지만 하나님의 임재를 우리가 마음대로 조절할 수는 없다.(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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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읽었던 책...
나에게 참 새로운 시각을 던져 주었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할 때도 A를 하면 B라는 결과를 얻을 것이다라는 철저한 인과율에 사로잡힌다는 것...
그러나 삶은 아무리 올바르게 살고자 애써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

결국 조건의 율법이 아니라 자유의 은혜로 삶을 살아가자는 것이다.
나의 기도제목이...
나의 가장 궁극적인 열망이...
하나님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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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생명의 말씀사/ Alister Mcgrath

칭의는 인간의 행위에 바탕을 두지 않는다. 한편, 칭의를 얻은 인간은 이후로는 선행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면책권을 얻지 않는다. 칭의에 관한 한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과 인간의 의뢰하는 수동성을 강조하는 바울의 논지는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의 반론을 뛰어넘으며, 우리 시대에도 직접적이고 밀착된 적실성을 갖는다.

루터는 주장하기를, 칭의란 하나님 앞에서 어떤 개인의 지위 변화이지 본성의 심원한 변화가 아니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자는 믿음으로 의롭지만 여전히 죄인으로 남아 있다.

믿음은, 칼빈이 간파하였듯이, 그리스도라는 보화를 담고 있는 질그릇이다. 칭의의 문제에서 우리는 수동적이고 하나님은 능동적이다. 

칭의와 성화는 구별될 수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1540년경 개신교 칭의 교리의 특징
1. 칭의는 그리스도인이 의롭다는 법정적인 선언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제로 의로워지는 과정과는 사뭇 다르다. 본성이 아니라 신분의 변화라고 볼 수 있다.
2. 치으이(믿는 자를 의롭다고 선언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친히 행하시는 외적인 행동)와 성화 혹은 중생(성령님으로 말미암은 갱신의 내적 과정)을 주도 면밀하게 그리고 조직적으로 구별한다.
3. 의롭다 하시는 의는 그리스도의 낯선 의로서, 믿는 자는 밖으로부터 그에게 전가된다. 이 의는 믿는 자에게 생래적으로 내재하거나 그 안에 정주하거나, 어떤 방식으로든 그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4. 칭의 는 페르 피뎀 프롭터 크리스툼(그리스도 때문에 믿음을 통하여)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믿음은 하나님이 수여하시는 칭의의 방편이요, 칭의의 기반이신 그리스도의 공로로 이해된다.

로마 카톨릭과 어거스틴은 개신교와 루터와 칼빈이 칭의와 성화 이 둘을 한데 묶어 이해한 것을 칭의로 이해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나. 우리는 믿음과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실존적인 측면
실존주의 사상가들은 진리에 대한 지식(다시 말해서, 객관적인 진리)과 진리에 의해 붙들림(달리 말해서, 주관적인 진리)을 즐겨 나눈다. 칭의가 개입하는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자 하나님에 대한 주관적인 지식 바로 이것이다.

복음은 죽음과 무의미에 대한 공포와 정면 대결을 한다....이신칭의의 교리위에 세워진 기독교의 선포는 우리를 아시고 우리의 경험 안으로 들어오셔서 그것을 변혁시키시며 진정한 실존으로부터 비껴 나간 우리의 소외를 없애시어 하나님 자녀로서 그 영광스러운 자유를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다.

개인적인 측면
인격이라는 개념의 핵심은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자유이다.
보편구원론 비판. 아니오 할 수 있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한다.
이신칭의 라는 기독교 교리를 정초시켜야 할 곳은 바로 여기, 즉 갈망의 경험, 인간 관계 안에 있을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잡을 수 없다는 낭패감, 우리 손에 영영 들어오지 않을 듯하면서도 인간 관계 그 자체 너머에 있을 무엇을 가리키고 있는 그 지향성이 되어야할 것이다.
부버가 지적햇듯이, 모든 인간 "당신"은 그 자신 너머에 있는 "영원한 당신" 곧 하나님을 지향하고 잇다. 인간 관계에서 채워지지 않는 그 국면 때문에 하나님을 지향하게 된다. 즉, 인간 관계를 통해서 오지만 그것 안에는 없고 그것을, 아니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셔야만 손에 넣을 수 있는 그 무엇이라는 점에서 하나님을 지향하ㅏ게 된다는 뜻이다.

윤리적인 측면
세속 윤리 체계가 도덕적인 행위를 목적(달리 말해서 성취하려는 것 또는 성취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 하지만, 이신칭이에 기반을 둔 신학적인 윤리체계는 미리 정해진 것 또는 표출하도록 의도된 것, 즉 회심을 통한 개인의 근본적인 변혁에 초점을 맞추고 논의한다. 진정한 기독교 윤리의 출발점은 개인의 회심이 새로운 순종과 삶의 방식 그리고 최소한 세속 윤리체계와는 잠재적으로라도 다른 새로운 윤리의 출발점이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신칭의 교리는 세속 윤리 체계가 무시하거나 평가 절하하거나 부인하는 인간 본성의 결정적인국면, 즉 죄를 인정하도록 촉구한다.
"죄인이 되어 마음껏 죄를 지으라. 하지만 더욱 강하게 믿음을 갖고 예수 그리스도를 즐거워하라."는 루터의 저 유명한 언표에 깔려 있는 생각이 바로 이것이다. 달리 말해서 세상은 타락했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그 안에서 움직이다 보면 죄를 짓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행동하여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처한 상황에서 최선을 다할 것이요, 설령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용서 받을 수 있음에 안도하고 기뻐하라는 뜻이다.

1. 이신칭의 경험에 관계된 교리이다.
기독교 신앙의 요점은 무엇보다도 경험이다. 교리 체계를 받아들이으냐는 경험 이후의 문제이다.
2. 이신칭의는 역설을 말한다.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로 포착되는 분이 아니다, 혹은 우리의 유한한 사고의 범주 속에 포박될 수 없는 분이라는 간단한 사실 때문에 하나님에 관해 말하려는 어떤 시도도 역설의 모습을 띨 수 밖에 없다.
현실적으로, 많은 복음적인 설교가들이 이 역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지 난관에 부딪히고는 한다. 그들은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청중의 마음을 돌려 주시기를 간구한다(회심을 일으키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전제 위에서). 하지만 정작 설교할 때에는 하나님께 반응하느냐 않느냐의 선택권을 마치 청중들이 가지고 있는 양 설교한다(회심이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린 문제인 양). "기도할 때에는 칼빈주의자, 설교할 때는 알미니안주의자"라는 우스개가 나온 것도 이런 상황 아래서이다.
왜 이 역설이 칭의 교리의 핵심적인 특징을 이루고, 왜 그렇게 중요한가? 단순하게 말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칭의 문제에서 상호작용하는 방식에 관한 두 가지 부적절한 이해를 일부러 배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는, 우리가 우리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구원을 마치 종주먹을 들이대듯이 강요하는 전능자의 손에 마냥 놀아나는 마치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견해(보편구원론적인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 반응하고 않고는 오직, 오로지 우리에게 달린 문제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후자에게서 "선택"은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을 택했다는 의미이다.
은혜라는 역설- 이 역설은 궁극적으로는 예정 교리를 안전판으로 삼는다-은 이 문제가 그리 간단하지 않다고 힘주어 말한다. 어떤 방식으로든지 하나님이 우리의 칭의에 개입하시는데,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에게 보이는 반응 역시 그분의 개입 결과이다. 이 역설은 복음을 위험스러울 정도로 단순화 하는 경향에 대항하여, 특히 복음을 받아들이고 거부하고가 전적으로 우리 마음에 달린 것처럼 호도한느 사람들에게 맞서는 안전판이라고 말하면 적절한 것 같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칭의에 기여했다고 억지로라도 말할 건더기가 유일하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그토록 은혜스럽게 용서해주신 죄뿐이다."

3. 이신칭의는 인격적인 겸손과도 연관이 있다.
칼빈이 말했듯이, 우리는 빈 손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데, 우리에게 드릴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받을 것뿐이다. 
4. 이신칭의는 세속적 가치관의 전복을 말한다. 
5. 이신칭의는 기독교의 미래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교리는 전도, 즉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의 선언을 강조한다. 이미 살펴보았듯이, 이 교리는 신약에 아주 강렬하게 각인 된 바로 그 경험이 오늘날에도, 지금 여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함을 입증한다. 게다가 각 개인이 지금 여기서 살아나신 그리스도를 경험할 수 잇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신칭의 교리의 교의적 중요성
누가 구속자인가? 가현설(예수 그리스도가 인간 존재를 가장한 하나님)과 에비온파(인간이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호의를 입었다)
누가 구속의 대상인가? 마니교(일종의 숙명론)와 펠라기우스주의(자유주의, 전적주권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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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은혜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것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과연 행함을 강조할 수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강조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품게 되면서 읽은 책이다.
그러나 답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전제를 깔고 난다면 얼마든지 우리의 행함이 강조될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을 이루시는 것 또한 하나님의 은혜, 성령이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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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우리의 성화는 우리의 일을 바꾸는 데 달린 것이 아니라 흔히 자신을 위해 하는 그 일을 하나님을 위해 하는 데 있다...기도 시간은 다른 시간들과는 달라야 한다는 생각은 커다란 착각이다. 우리에게는 기도 할 때 기도로 하나님을 따르는 것 못지않게 행동할 때 행동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할 준엄한 의무가 있다. 
- 로렌스

나는 예수로부터 내 삶을 사는 법을 배우되 그분이 나라면 내 자리에서 사실 그 삶을 배운다.

모든 가족과 자신의 목숨까지 미워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는 자는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신 것의 의미는 예수와의 천국교제보다 더 값진 것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자는 그분에게서 배울 수 없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을 제자삼을수 있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엇이든, 예수가 우주의 주님이라는 믿음을 방해한 그들의 실제 신념체계를 변화시켜야 한다는 점이다. 상대의 신념이 무엇인지 연구하라.

예수의 모든 말씀을 행하도록 그들을 훈련하는 일은, 한마디로 그들로 하여금 예수를 처음 믿은 결과로 이미 얻은 정보를, 전인격을다해믿도록 해주는 것이다. 

훈련과정의 두가지 주요목표
첫번째는 제자들이 예수를 통해 이 땅에 찾아오신 "하늘 아버지"를 깊이 사랑하고 늘 기뻐하며, 또한 그 분의 선하신 뜻과 그 뜻을 이루시는 능력에 "함정"과 제한이 없으심을 확신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다.
두번째는, 하나님 나라에 역행하는우리의 자동적인 반응들을 제거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사랑스러운 대상을 사랑하도록 도울 것인가? 간단히 답하면, 그 사랑스러운 대상에 마음을두도록 유도하고 구하고 돕는 것이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사랑하는대상을간절히 생각할 때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사랑은 지식을 따른다." 사랑이란 좋은것을 봄으로써 의지 안에생겨나는 감정 반응이다. 흔히들 하는 말과 달리 사랑은 혹 똑바로 보지 못할 수는 있어도 절대 눈먼 것은 아니다. 사랑하는 대상을 보지 않고는 사랑은 존재할수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삶이 충만해지도록 하려면, 마음이 하나님의 영광의 실체앞에 다가가 충분히 머물러야 한다. 

제자들을 그리스도의 온전한 분량으로 자라가게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중요하고 가장 근본적인 부분은, 마음이 늘 하나님을 향해 있도록 그들의 마음의 통찰과 습관을 형성해 주는 일이다.

결국 모든 신학을 검증할 테스트는 바로 이것이다. 그 신학에서 제시하는 하나님이, 우리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하여 사랑할 수 있는 분인가?...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 신학자는 큰 위험에, 큰 해를 끼칠수 있는 위험에 처해있다. 신학자는 하나님을알아야 하며 그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십자가를 메고 다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나는 예수의 고난과 죽음으로 사신 바 되어 이제 하나님께 속한 자이다. 지금 나 자신이 한 부분으로 속한 하나님의 모략은 십자가의 형태로 인간 역사 위에 우뚝 서 있다."

사실, 천국 바깥의 인간 생활을 지배하는 죄의 습성은 대개가 아주 미약하고 심지어 우스꽝스럽기까지 하다. 그것은 그저 습관일 뿐이다...내가 내 안에 들어오도록 허용하여 세력을 내어주지 않는 한, 아무것도 나를 유혹하거나 죄에 빠뜨릴 수 없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혹은 우리 안에서 행하시는 일에 의존하는 것은 분명 빼놓을 수 없이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 깊은 성품의 변화가 저절로 일어나지는 않는다. 성령의 활동에는 우리의 반응이 뒤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의 몇가지 구체적 훈련
절제를 통한 훈련/ 고독과 침묵
이것은 예수의 가르침과 정반대로 행하는 즉각적인 반응의 위력을 깨뜨리는데 도움을 주고 사람과 사건에 대해 내면의 태도를 바꿀 공간을 제공한다. 한동안 우리 어깨에서 세상의 짐을 벗겨 냄으로써, 끊임없어 뭔가를 관리하고 통제하고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에 제동을 건다. 영적으로 가장 위대한 성취 가운데 하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능력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철학자 파스칼은 아주 통찰력 있는 말을 했다. "나는 인간의 모든 불행이 한가지 사실, 즉 자기 방에 조용히 머물러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적극적 행위를 통한 두 훈련/ 공부와 예배
예수의 제자란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자신의 존재 속에 흡입하기 원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친히 그러하시듯 그 나라 안에 살기 원하는데, 그렇게 되려면 그 질서의 내면화가 필요하다. 공부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주요 수단이다. 천국의 질서는 예수 안에, 기록된 성경 말씀 안에, 그 길로 행하는 다른 사람 안에, 그리고 사실상 자연과 역사와 문화의 모든 좋은 것 안에 나타나 있으며, 제자는그 질서를 전심으로 살피고 생각하고 연구하며 삶으로 실험하는 자이다.

예배를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광대하심과 선하심과 영광을 그분께 돌린다. 존재의 모든 가능한 측면, 곧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개념과 활동과 창조능력이 한데 어우러지는 것이 예배의 특성이다.
예배란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적절한 표현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우리의 목표는 단순히 행동의 변화에 있지 않고 영혼 내면의 변화에 있다. 그렇게 되어야 하나님이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받으실 수 있으며, 올바른 행동이 율법적 행위가 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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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는 오래전에 마쳤는데...
이것저것 하느라 정리는 오늘에야 마쳤다.
하나님 나라의 의미...8복...진정한 의...기도와 공동체를 거쳐...
예수 그리스도를 닮기 위한 교육과정으로서의 제자도를 보았다.

예배를 통해서 받은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세상 가운데서의 전도와 선교로 나타나기 위한 성육신으로서의 '제자도'...
한번쯤 깊이 맛보아야 할 영역이다...

위에도 적었지만...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오묘한 그 모략은 십자가에서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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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4
기도와 사랑의 공동체

마7장
1. 주변 사람들을 정죄하거나 비난하지 않는다(1-5절)
2. "놀라운 것들"을 그들에게 강요하지 않는다(6절)
3. 그들에게, 그리고 하나님께 원하는 것을 단순히 구한다(7-11절)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자신은 물론 상대의 유익을 위해-천국의 방법은 단순히 구하는 것이다. 상대에게 변화를 구하는 것이요 상대가 나에게 구하는 것을 어떻게든 들어주는 것이다.

상대에게 뭔가를 하라거나 달라거나 혹은 뭔가가 되라고 요청하는 것은, 곧 강요나 억지가 없는 단순한 속박의 영역에 그 사람과 함께 서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있다. 요청이란 본질상 양쪽을 하나로 묶어 주는 것이다. 반대로 일방적인 요구는 사람을 인간시킨다...그런데 그 길은 상대의 자유에 자신을 맡겨야 하는 길이다. 구하고 요청하는 행동은 본질상 상대가 거부할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구하는 것의 위력은 너무도 커서 많은 사람이 거기에 불편을 느낄 정도이다. 부탁을 잘 하는 사람을 일부러 피해 다니는 이들을 우리는 알고 있지 않은가?

상대의 유익을 위해 영향력을 행사해야 할 것 같은 절박한 필요, 그 필요에 대한 기본 해답이 마침내 여기서 주어진다. 그 해답은 기도, 즉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우리가 타인에게 주려는 유익을 확실히 성취할 수 있는 보장된 길이다. 하나님께 의지하는 믿음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마땅이 대해야 할 모습으로 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본회퍼의 '신도의 공동생활'- 영적공동체 안에는 인간과 인간의 직접적 관계가 절대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조.
다르게 말하자면, 예수의 제자로 사는 사람들 안에는 예수의 임재와 행동이 빠진 관계란 존재할 수 없다. "일대일" 관계란 없다. 모든 관계는 예수를 통해 중재된다. 나는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수 없다. 우리-예수와 나-가 너와 함께, 너에게, 너를 위해 해줄 일을 생각할 뿐이다.

'사랑하는 이와 사랑 받는 이들 사이에 예수 그리스도가 서 계신다...나와 다른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가 서 계시기 때문에 나는 감히 그들과의 직접적 관계를 꿈꾸지 않는다. 내가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을 오직 그리스도만이 하실 수 있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오직 그리스도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 이것은 곧 나의 사랑으로 상대를 규제하고 지배하고 강요하려는 모든 시도에서 상대를 놓아주어야 한다는 뜻이다...그러므로 이 영적 사랑은 형제에게 그리스도를 이야기 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께 형제 이야기를 더 많이 하게 된다. 다른 사람을 만나는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언제나 그리스도께 드리는 기도를 통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은 전저긍로 그리스도 안의 진리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영적인 사랑은 잘 안다.'

C. S. 루이스
'기도란 언제는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도가 하나의 동인으로서 약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강하기 때문이다. 기도는 일단 "효력"을 낼 때는 시공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 응답할 수도 있고 거절할 수도 있는 임의 재량이 하나님께 있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기도는 우리를 파멸로 몰아넣고 말 것이다. 학교 교장이 학생들에게 이러게 말하는 것은 전혀 무모한 일이 아니다. "이러이러한 일은 정해진 교칙상 자유로이 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밖에 이러이러한 일은 일반 교칙으로 허용하기에는 너무 위험한 일이다. 그런 일을 하기 원하거든 나를 찾아와 요청해야 한다. 내 방에서 문제 전반에 대해 나와 대화해야 한다. 결과는-두고봐야 한다.'

또 인간에게 두 가지 인과법칙을 이야기 한다.
하나는 전적으로 우리의 통제하에 있는 것...화단에 잡초가 있거나 자동차 바퀴가 터졌다면 그저 잡초가 죽고 바퀴가 고쳐지도록 기도만 하고 있는 것은 좋지 않다...기본적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임으로 순리상 나의 영역에 속한 문제이다. 그러나 헤로인에 중독됐거나 지적 유행 풍조의 미로에 빠진 친구가 있다면, 어떤 방식으로 돕든지 반드시 기도하는 것이 좋다. 상대를 "고쳐 주는" 거이 내 능력 밖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 능력 밖이어야 더 좋기 때문이다.

예수는 베드로가 당신을 부인할 것을 아시면서도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조건 그를 "고쳐 주지" 않았다. 인생의 본질과 구속에 대해 깊은 교훈을 주는 사건이다.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22:32) 슬픔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를 향한 놀라운 믿음이 담겨있는 말씀이다.

그분은 베드로가 시험을 이겨내기를 간절히 원하셨지만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성공할 수도 있고 실패할 수도 있도록 그냥 두셨다. 그분은 베드로에게 정죄나 수치심이나 "지혜의 진주"를 사용하지 않으셨다.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의 영혼이나 두뇌를 바꿔 놓지도 않았다.

기도의 기본은 요청이다. 기도란 결코 구하는 것만은 아니며 나의 소원을 구하느 것만도 아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하수인이나 해결사가 아니며 우주는 내 욕심과 필요를 채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나의 관심사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나에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훌륭한 일"에 대해 기도하려고 애쓸 때 기도는 죽는다.

"기도란 하나님과우리가 함께 행하는 일에 대해 하나님께 말씀드리는것이다." 이 묘사는 기도의 초점을 즉각 우리의 현 위치에 맞추지만 동시에 자기 중심주의는 허락하지 않는다. 이 대화의 동행 과정에는 의당 요청이 있게 마련이다. 기도는 내 삶의 관심사- 하나님의 관심사이기도 한-를 하나님께 숨김없이 나누는 것이다. 물론 그분은 내 관심사에 관심이 있으시며 특히 우리의 관심사는 그분의 관심사와 일치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과 함께 걷는 삶이다. 거기서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차피 하실 일을 하시면서 마치 우리 기도에 응답하는 것처럼 가장하시는 분이 아니다. 우리의 요청은 하나님이 하시거나 하시지 않는 일에 정말 변화를 가져온다. 어차피 모든 일이 우리의 기도와 무관하게 될 대로 된다는 개념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믿는 많은 이들의 생각을 사로잡는 망령이다. (모세의 기도, 히스기야의 기도) 이 장면 속에서 우리가 보는 것은 당신 앞에 신실하게 서는 자들에게 '설득 당하시는' 하나님이다. 요청에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요소란 전혀 없다. 기도에 "무조건 공식"이란 없다. 요청한 내용은 주어질 수도 있고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어느 경우이든 선한 이유에서이다. 인격간의 관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기도란 무엇보다도 성품을 형성하는 길이다. 기도는 자유와 능력을 섬김과 사랑에 접목시켜준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서 결국 얻으시는 것-사실상 우리가 자신의 삶에서 결국 얻는 것- 단순히 우리가 갖추게 될 인격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그분의 능력을 받아 원하는 일을 능히 할 수 있는 인격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이 훈련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하나님을 앞질러 문제를 내 손으로 거머쥐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움직이실 때를 잠잠히 기다리는 것이다. 바로 이런 기다림의 체험 속에서 하나님 앞에 더없이 값진 성품, 즉 그분의 능력을 받아 자신이 택하는 일을 능히 해낼수 있는 성품이 빚어지는 것이다. 기도하며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다려야 하는 것은, 때로는 기도의 응답에 다른 이들이나 나 자신의 변화가 포함되기 때문일 수 도 있다. 

눅18장 불의한 재판장에게 구하는 과부
요청이 중단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 요청이 계속되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할 몫이다.
기도가 인격과 인격간의 관계 방식으로 진행될 것을 기대해야 한다. 물론 기도는 어김없이 그런 관계의 방식이지만 요청이라는 전반적 특성은 남아 있다. 사실, 그 반대의 가정이야 말로 기도를 "중단"하게 하는 가장 큰 원인이 된다. 기도를 자판기에 동전을 넣는 것으로 잘못 생각하는 이들이 많이 있다. 단번의 간단한 행동으로 자동 장치가 작동됨으로써 필연적으로 그 결과가 나타나야 하는 것이다. 같은 문제로 두 번 기도하는 것은-하나님이 아직 모르고 계시기라도 하다는 양-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다는 증거밖에 되지 않는다고 진심으로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도 나는 보았다....기도는 절대 자동 장치가 아니다. 기도란 언제나 인격적 협상이다.

주기도문 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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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달라스 윌라드(IVP)
The Divine Conspiracy

"우리는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중요하며 무엇이 선인지를 얘기합니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이 선하게 되도록 가르치려면 어떻게 해야 되죠?" "선한 사람이 되려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는다면 선을 아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요?"

'죄관리의 복음'
신앙고백이 삶 전체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 상황은, 우리 시대에만 있는 것도 아니요 최근에 생겨난 것도 아니다...역사상 우리 기독교의 메시지가 본질상 오직 죄, 곧 행동의 잘못, 존재의 잘못, 그리고 그 결과의 죄를 해결하는 방법에만 관심 있는 것으로 간주되는 시점에 처해 있다. 현재 기독교의 메시지의 핵심으로 제시되는 것 속에는 삶, 즉 우리의 실체적 실존이 그 속에 포함되어 있지 않거나 극히 주변적으로만 포함되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서있는 자리이다.

기독교의 선포 및 실천의 전체 스펙트럼을 잘 살펴보면, 우익 신학의 본질이 되는 유일한 것은 개인의 죄 용서임을 알 수 있다. 좌익의 경우에는 사회악이나 구조악의 제거에 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복음은 "죄 관리의 복음"이 된다. 이들에게 있어서 삶과 성품의 변화는 구속적 메시지의 한 부분이 '되지 못한다.' 매순간의 인간 실체의 깊이는 신앙과 영생의 지평에 들지 못한다.

복음서에서 복음에 관한 한 최대 이슈는, 우리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는냐 하는 것이다. 새로운 종류의 삶, "위로부터" 오는 삶의 성분인 그분과의 친밀한 관계, 우리는 과연 그 안에서 살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대언하는 모든 이들은 스스로에게 다음과 같은 중대한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야 한다.
내가 설교하고 가르치는 복음은 듣는 이들로 하여금 예수의 풀타임 학생이 되게 하는 본연의 성향을 지니고 있는가?
그것을 믿는 이들은 당연히 "다음 단계"로서 예수의 제자가 되고 있는가?
실제로 내 메시지의 본질을 믿는 이들에게 마땅히 기대할 수 있는 결과는 무엇인가?

하나님 나라의 자원이 인간 생활과 여전히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인간 생활과 기독교 제자도의 복음은 없고, 죽음을 위한 복음 아니면 사회참여를 위한 복음만 있을 뿐이다. 인간의 영혼은 인생의 광야에서 시들어 죽도록 방치돼 있는 채 말이다. 창조 때에 의도된 환경, 곧 살아있는 영생의 나라로 인도하는 이가 없는 탓이다.

여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삶의 현재적 실체를 예수의 말씀과 인격을 믿는 믿음을 통해 말(설교)과 삶으로 똑바로 제시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마땅히 그분의 학생 내지 도제가 될 수 있다. 그분이 우리의 자리에서 살아가실 삶, 그 삶을 사는 법을 그분으로부터 배울 수 있다. 그분의 영원한 질의 삶에 지금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의미있게 다가와야 할 하나님 나라

4장 참된 복을 누리는 자: 8복
가난하고 애통하고 핍박받는다고 해서 그 사람이 더 형편이 좋다는 말은 사실상 어디에도 없다. 8가지 조건이 하나님이나 사람 앞에서 행복을 얻는 길로 제시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또한 8복은 "혁명 이후" 누가 높은 자가 될 것인가에 대한 지적도 아니다. '8복은 예수와의 인격적 관계를 통해 지금 가까이 와 있는 하나님 나라를, 눈앞의 현실 상황을 바탕으로 설명하고 예시한 말씀이다.' 인간이 모든 희망을 포기한 현실 상황들 속에서 과연 하나님의 천국 통치가 예수 안에서 임했음을 보여주는 증거 사례를 8복은 하나하나 꼽고 있다.

자신의 삶에 진정한 변화를 일으키는 일은 자동적으로 기억하게 돼 있다. 위대한 교사의 비밀은 듣는 이들의 삶의 실제 흐름에 영향을 주는 말, 그런 경험을 제공하는 데 있다. 예수께서 특유의 교육 방식으로 하신 일이 바로 그것이다. 그분은 자신의 가르침을 청중의 삶을 구성하는 구체적 사건과 연결시키셨다. 일상 생활에서 드러나는 듣는 이들의 마음과 습관, 그것이 예수의 말씀의 표적이었다.

8복이란 예수의 근본 메세지, 즉 하나님의 통치와 의가, 세상 속 우리 가운데 인간으로 찾아 오신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모든 인간에게 값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 주는 하나의 도구이다.

5장 천국 마음의 의: 서기관과 바리새인의 의를 넘어

"온전하라"는 계명은 이상주의의 허영이 아니며 실천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분이 우리를 그 계명을 지킬 수 잇는 자로 빚으실 것이다.
C. S. 루이스, '내가 믿는 기독교'

우리는 신약 시대에 바울의 뒤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유대교 교사들의 일을 이상하게 전복시켜 스스로 그 안에 갇히고 말았다.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의식법의 준수를 더하려 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도덕법을 빼려 한다. 믿음과 순종의 결합이야말로 21세기에 들어서는 교회의 중대 과제이다.

율법을 제대로 지키려면 목표를 율법이 아닌 다른 것, 그 이상의 것에 두어야 한다. 율법의 행위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삶, '그런 존재'가 되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근본적인 오류도 여기 있다. 이들은 율법이 요구하는 행위에 초점을 두어, 그 행위들이 무엇이며 어떤 식으로 행해야 하는가를 조목조목 자세히 규정했다.
우리가 변화의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영혼의 내면 새오할이다. 그러면 행동은 자연스럽고 쉽게 뒤따라 나온다. 

상황과 천국의 의(디카이오수네) 마 5:21-48
화, 성적매력, 배우자와의 불행한 관계, 상대방에게 뭔가를 믿게 하고 싶을 때, 신상에 해를 입었을 때, 원수가 있을 때

런던이나 애틀란타에 가지 않는다는 계획으로 뉴욕에 갈 수는 없다. 마찬가지로 부당하게 화내지 않는다는 계획으로는 이웃 사랑에 이를 수 없다. 십계명처럼 율법은 행동만을 다루기 때문에, 그 자체로 아무리 필요하고 선하고 아름답다 해도 행동의 '근원'인 인간의 마음에는 절대 이를 수 없다. 율법이 참으로 귀한 것이지만 율법으로는 안된다. 그러나 능하신 그리스도를 통한 은혜의 관계라면 얼마든지 가능핟.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에서 그것을 배울 수 있다.

"나는 예수의 예화에 나타난 행동을 그대로 했는가?"가 아니라 "나는 예수의 예화에 예시되어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있는가?"가 우리가 물어야 할 질문이다. 

천국 마음의 완성이 바로 아가페 사랑이다...의는 곧 사랑이다.

바리새인들은 행위가 자연스럽게 율법에 부합되는 사람이 되려 하기보다는 율법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아가페의 사랑은 삶에서 부딪히는 모든 이에게 가 닿는 사랑이다. 사람의 힘으로 만들어 낼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교제를 통해 되어진 혹은 앞으로 될 수 있는 우리의 존재의 핵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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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제임스 휴스턴(IVP)
원제: The Transforming Friendship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유지하는 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기도를 엄격한 훈련이나 수행해야 할 과제가 아닌 우정과 관계적인 차원으로 보기 시작하였다.

기도는 신학과 윤리의 문제, 즉 사고와 행함의 문제이다. 우리의 믿는 바와 행동방식은 기도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알고 경험하는 하나님의 성격에 따라 기도의 성격도 결정될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아니라 기도하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죄렌 키에르케고르
우리는 정보를 하나님께 제공하기 위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사건들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생각과 느낌에 대해 전혀 모르시는 양 말이다. 우리는 대신에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고 기도한다. 그리하여 기도의 사람으로서 하난미과의 사귐 속에서 우리 자신은 근본적으로 바뀌기 시작한다. 우리의 전 존재는 기도의 삶과 영에 의해 형성되기 시작한다.

자신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인간은 기도하면서 거의 간구하지 않는다. 배고픔은 인간에게 구걸을 가장 잘 가르쳐 준다. 자신의 마음속을 더 자주 들여다본다면 당신은 더 자주 무릎을 꿇을 것이다. 자신의 필요를 안다면 당신에게 기도가 그리 불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자신을 알라. 그러고 나서도 기도하지 않을 수 있다면 한번 그렇게 해보라. -17세기의 한 필자

믿음이란 한마디로 기도이다. -마틴 루터

기도는 우리가 행하는 어떤 것, 일정한 규칙에 따라 말하고 행동하는 방식이라기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와 태도에 대한 것이다. 믿음이 행함에 의존할 때 믿음은 그 뿌리를 잃는다.

*기도의 초점은 기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이다.
우리는 '기도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기도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기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속에 살아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과의 더 깊고 더 친밀한 관계를 탐험한다. 
기도는 예수님의 마음과 영을 구하는 것이다.

기도에는 도움이 필요하다.
성경 안에서의 탐구. 금식. 침묵. 공동체. 영적지도.

기도의 장애물
우리의 상처와 기도. 기도와 활동주의.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음. 내면의 어두움을 두려워함

종교는 인간이 자신의 홀로됨(solitariness)으로 하는 그 무엇이다. - 철학자 화이트헤드(A. N. Whitehead)

하나님의 부재와 임재
우정이란 서로를 확인하기 위하여 만나고 그런 후에 서로를 신뢰하기 위하여 작별하는 것.- 프랑스의 저술가 시몬 웨일.
'지나치게 감상적인' 관계는 절대로 오래가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 사이의 유대를 성숙케 하기 위한 공간을 필요로 한다. 아마 기도도 이런 식으로, 즉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 두 가지 모두에 대한 의식과 더불어 작용할 것이다. 우리는 친구들과 함께 있거나 떨어져 있을 때 그들의 성품이나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색다른 통찰을 얻는다. *하나님은 우리와 구별된 존재이시며, 단순히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기 위해 존재하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깨달을면서 우리는 자신을 좀더 현실적으로 볼 수 있다.

어머니의 부재는 아이가 갖는 관계들이 단순한 소원성취가 아니라 더 큰 성숙을 추구하게 만들어준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은 집으로 보내 오는 편지들을 통해서 새로운 통찰력을 가르친다. 또한 하나님의 부재는 그분의 성품과 생각에 댛나 우리의 좁은 관점을 초월하는 그분의 거룩하심과 타자성에 관해서 가르쳐준다. 존경과 경외심으로 거리를 두지 않는 한, 친밀함은 경멸을 낳는다. 하나님의 임재를 더 잘 이해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부재가 필요하다.

우리의 소외, 죄 때문에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의식, 우리의 어두움과 무지를 바로 하나님이 짊어지셨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임재의 즐거움을 알려주시려고 인간이 되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체험 주엥서 가장 고통스러운, 하나님과 분리되는 체험 속으로 들어오셨다. 이것이 십자가의 놀라운 역설 중 하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부재를 체험한 그 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용서받은 죄의식을 체험할 때, 기도 중에 하나님의 임재를 가장 깊이 아는 것이다.

가난 그리고 하나님의 십자가의 고난은 그분의 임재를 가장 실제저긍로 만든다. 그와 마찬가지로 겸손한 마음과 가난한 영혼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와 부재가 하나인 곳에 이를 수 있다. 

제7장 성령, 우리는 변화시키시는 친구
성령은 우리가 성부, 성자 하나님과 더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친구가 되신다.

제8장 예수 그리스도와의 우정
기도가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경험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신앙에만 유이랗게 발견되는 기도의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번째는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느 ㄴ것이다.
두번째 새로운 요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이다.

복종의 길. 다른 사람들과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 기도의 열쇠이다.
믿음의 길. 
순종의 길. 사랑하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며...

당신의 길을 취하소서, 이는 당신의 길이 최선임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비천한 채무자인 저를 늘이거나 줄이소서.
이는 단지 더 좋은 음악을 연주하기 위하여
제 가슴을 조율하는 것뿐입니다.
조지 허버트

조명하는 진리.
자유케하는 진리.
예수님의 이르믕로 기도하는 것은 우리 자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성격이 아니라 자유롭게 예수님께 속한, 아니 예수님께만 속한 그리스도 안의 인격체가 된다. 이러한 소속감은 절망이라는 질병에 대한 강력한 처방이다.


인도해주는 진리.
은밀한 삶.
의뢰하는 삶.
겸손한 삶.

제10장 삼위일체 내의 우정
관상기도는 그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도록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고, 그분의 사랑에 가까이 이끌릴 수 있도록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것으르 의미한다. 이것은 다양한 기도 체험의 일부이다.

기도는 오히려 열린 마음, 믿음, 주목, 그리고 하나님께 자기를 맡기는 사랑의 문제이다. 이것이 기도에서 진보를 거두는 방법이다. 우리는 관성적인 삶을 진지하게 다루려고 수도원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인격 자체를 하나님의 삶과 사랑에 맡긴다면, 바쁜 직장 생활에서나 어린 자녀들의 어머니로서, 실직자로서 또는 삶의 어떤 정황 에서도 기도의 모든 깊이를 측량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저긍로 우리가 어떻게 내적인 삶의 방향을 하나님께 향하게 하느냐의 문제이다.

하나님의 관상하는 체험에서의 세가지 결론.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지각들로 안내해 주는 기호와 욕구와 신비에 개방된다.
둘째로, 우리가 이러한 '하나님과의 동행'을 위하여 기꺼이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신비가 무한한 바다 같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변혁을 초래하는 신뢰.
중지될 수 있는 우정은 결코 우정이 아니다. -제롬
나는 그리스도 없이 사는 사람들에게는 진정한 우정이 불가능하다고 확신한다. - 12세기의 저술가 리보의 앨리드

기독교 신앙이 우정을 너무나 평가 절하 해 왔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아마도 복음이 모든 사람에게 자신을 주는 사랑을 보여 주라고 명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친구들을 가려서 선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레미 테일러 주교는 기독교 역사상 보기 드문, 영적 우정에 관한 책에서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의 사랑은 온 세상을 향한 우정이다. 그리고 우정이 세상(즉 고대 그리스와 로마세계)에서 가장 고귀한 것인 때에, 기독교의 사랑은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건, 볼록 렌즈의 중시믕로 그 광선이 집중되는 햇빛처럼 미미했다. 그러나 기독교의 사랑은 동방의 언덕을 오르는 태양의 얼굴처럼 확장되는 우정이다.

관상한다는 것은 그릿도 안의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 거하는 것이다. 요한복음15장
예수님이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신 이유. 요17장

* 우리의 섬김이 예수님의 섬김처럼 되고 그분의 영광을 위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섬김의 핵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예수님은 아버지를 섬기는 일에 자신을 전적으로 드리심으로써 '자신을 거룩하게 하셨다.' 우리가 거룩해지는 과정은 전적으로 예수님께 달려 있으며,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아버지께 복종시키신 방식에 기초한다. 예수님의 순순하고 온전한 거룩하심을 통하여 제자들의 삶과 사역도 순수하고 온전해지는 것이다.

제12장 다양한 기도의 전통들

구송기도, 묵상기도, 관상기도, 무아경의 기도

묵상한다는 것은 더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대로 살기 위하여 우리의 이성으로 성경과 하나님의 진리들을 숙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묵상은 하나님과 함께 또는 하나님 앞에서 나누는 대화의 한 형태이다. 그것은 언어적이라기보다는 정신적이다.

묵상은 이성이 생각과 감정을 동시에 의식하면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언어적이고 상징적인 대화 속으로 우리를 끌어들인다. 관상상에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 강렬하고 친밀하게 실재하기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묘사가 그분의 임재에 대한 순수한 의식에 자리를 내주고 만다. 말과 생각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무야경은 우리가 기도 중에 하나님과 나누는 우정의 진정한 정점이다. 무아경이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우리 밖으로 취해지는 거을 의미하는 헬라어에서 직접 온 단어이다. 기도중에 무아경을 체험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밖으로 취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통제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더 이상 자신을 통제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인간의 노력으로 살지 않고 우리 안에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의 능려긍로 산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삶의 전체가 하나님의 의해 통제됨으로써 무아경에 빠지는 것이다. 

사랑, 희락, 화평 => 하나님을 아는 지식
자비, 양선, 오래참음 =>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충성, 온유, 절제 => 자신을 아는 지식

제13장 기도의 공동체

모든 기도를 능가하는 기도는 "말하는 자가 진정 저 자신이 되게 하시고, 제가 말씀을 드리는 대상이 진정 당신이 되게 하소서"라는 기도이다. - 루이스

기도는 아마추어들을 위한 것이다.
우리가 절대로 기도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보다, 잘난체 하는 능률주의와 자신감에 넘친 프로정신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한한 가능성을 보기 시작할 때, 우리는 모두 기도의 초보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마음의 치유에서의 기도. 야고보서에서 육신의 치유와 함께 죄를 고백하는 것과 사함을 받는 것 그리고 의인의 기도의 능력에 간해서도 이야기 하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의 왜곡된 감정과 욕구를 드러내는지, 어떻게 그분이 우리 자신의 능력을 초월하여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을 주는지를 살펴보았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 은혜는, 기도할 때 우리의 성품을 변화시킨다. 우리가 변화되고 싶어하지 않는다면, 기도가 위험한 경험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기도하는 것은 적이 점령하고 있는 나라에서 지하 저항 운동에 가담하는 것과도 같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서 복음의 비치 어둠의 나라를 전복시키도록 싸운다.

제14장 함께하는 기도
기도한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여는 것이다. 어거스틴 말했듯이 "절대자만이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수 있다." 물질주의적인 생활방식은 절대로 인간의 본성을 만족시켜 줄 수 없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우정에 주의를 기울이고 인간의 관계들을 넘어 하나님의 사랑에 이르기 위한 선택이다.
이렇게 할 때 인간의 우정도 변화된다. 생떽쥐베리는 이렇게 말했다. "사랑이란 서로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분을 찾게 만든다. 

*하나님은 관계이시다.
기독교 공동체는 단순한 인간적인 이상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뿌리를 둔 신성한 실재다. 
삼위일체는 죽은 교리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영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신비이다.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제 속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을 온전히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사랑의 공동체에 가까워질 때 비로소 다른 사람들과 가까워지는 방법을 배우게 된다.

사랑이 진실하기 위해서는 복수의 인격체가 필요하다. 사랑은 보호받기 위하여, 인격체들의 삼위일체를 요구한다....그러므로 사랑의 공유는 세 인격체 미만에서는 존재할 수 없다. - 성 빅터의 리처드

만일 삼위일체가 모든 실재와 사고의 유일한 근원임을 거부한다면, 우리는 아무곳으로도 인도하지 않는 길-우리 존재의 해체와 영적인 죽음에 우리를 내맡기게 된다...삼위일체와 지옥 사이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 - 동방교회의 신학자 블라디미르 로스키

하나님의 공동체가 되는 것
두 가지 믿음이 함께 그리스도인의 삶을 구체화한다.
첫째는 하나님이 인간을 자신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믿음이고 둘재는 하나님이 교회 즉 예수님을 삶의 중심으로 모시고 함께 모인 하나님의 선택받은 회중을 불러 내셨다는 것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될 수 있는 잠재력을 언급하며, 후자는 실제로 그런 백성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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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사귐의 기도라는 책을 읽고 기도에 대한 많은 도전을 받았었는데...
저자가 참 많이 인용했던 책이어서 한 번 읽어보려고 생각했었떤 책이다.

이책의 저자는 기도를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의 우정, 하나님과의 우정, 다른 사람들과의 우정이라는 맥락에서 파악했다.
기도를 하나님과의 친밀한 우정이라는 새로운 시각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특히 '하나님은 관계'라는 진술은 이전에 예배에 대한 책을 읽었을 때 생각하게 되었던 '기독교는 관계'라는 진술과 함께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사실 성경을 두가지로 압축한다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라는 것으로 되는데 여기에서 관계는 중심이 된다.

특히 번역자가 저자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 있느냐고 물었을 때 "아내의 얼굴은 너희 믿음의 이력서다."라고 말한 역자의 서문이 참 인상 깊다.

요약하려고 했으나 너무 내용이 좋아서 그냥 다 써버렸다.
끈기가 있는 사람들이 읽고 은혜를 받겠지...^^;
앞으로도 몇 번이고 다시 읽을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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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토니 캠폴로 (도서출판 누가)

chapter6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기도를 이야기하는 법

무엇보다도 기도는 마술이 아니다. 마술이란 사람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으려고 초자연적인 힘을 조종하려는 시도이다. 한편 기도란 사람들이 영적으로 항복하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리하여 자신을 도구로 드릴때 하나님은 그 도구를 사용하여 '하나님 자신의 일'을 행하신다.
기도가 아닌 두번째 유형은 당신이 매우 선하거나 혹은 매우 영적이라면 더 잘 기도 응답을 받으리라는 생각이다.
셋째로, 기도는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chapter10
하늘로부터 음성을 듣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발견하는 법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때까지 기다린다는 명목하에 하나님을 위해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신자들에게 나는 묻고 싶다. "성경 어디에 하나님께서 당신의 전 인생을 통해 하기 원하시는 거룩한 계획을 계시하신다고 말하고 있는가? 사실은 그 반대다. 성경은 하나님은 인도하시되 한번에 한 걸음씩 인도하신다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로 건강하고, 건설적인 삶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또한 우리로 하나님 자신께 의존케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집에 가는 방법으로 상대방이 그려준 지도를 보고 가는 방법이 있지만 더 좋은 방법은 그 집 주인과 함께 차를 타고 길을 안내받는 것이다. 

성령께 매일 순종함으로 그리스도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람들은 꼭 해야 한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여기에 성경과 친밀한 신자의 교제라는 안전장치가 있어야 한다.

chapter12
현대철학에 쇠뇌되지 않고 하나님에 관해 생각하는 법

만약 이성적 사고가 영적인 것에 관한 진리를 드러내고, 우리를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인도할 수 있다면, 지성인들은 어리석은 자들보다 더 낳은 크리스천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 어리석다고 평가받는 자들이 진리를 더 잘 이해하고 있음을 우리는 현실에서 자주 목격한다. 이들은 하나님을 매우 잘 안다. 하나님에 관한 지식은 얼마나 우리가 깊이 생각하느냐에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깊이 하나니을 사랑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안토니 플류 이야기. 숲 속을 걷던 두 사람이 한 개척지에 도착해서 한 사람은 꽃을 보며 정원이라 하고 한 사람은 아니라고 하며 잡초를 가리킨다. 어떤 사건을 분석하는데 있어, 각자가 수집한 증거는 다른 증거들이 진지하게 고려되기 전에 자신이 이미 믿고 있는 것을 지지하기 위해 선택한다는 결론에 도달.

이성과 과학은 믿음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을 보강해 주는 역할임을 알아야 하다. 이성과 과학은 믿음을 지원하고, 대로 믿음이 타당성이 없어보일때 이런 믿음에 정당한 질문을 던지기 위해 이성과 과학이 동원된다. 이성과 과학은 무엇이 참이고 거짓인가를 구별하는 기초가 아니다.

chapter15
당신의 영혼을 잃지 않고 정치에 참여하는 법

이상하게 들리겠지만, 때때로 공적인 자리에서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것이 복음을 선포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두 학생의 반대로 고등학교 졸업식때 찬송가를 부르는 전통을 두 사람을 위해 하지 않았던 이야기. 

정치참여와 관련해 신자가 기억할 것은 정치는 힘에 관한 것인 반면에 신자의 존재는 사랑에 관한 것이다. 현 사회 질서 안에 하나님 나라의 가치관을 창조하기 위해 힘을 사용할 때, 우리가 범하기 쉬운 실수는 사랑을 옆으로 밀쳐놓는 것이다. 정치 참여를 통해 하나님의 의를 세워갈 때, 신앙이란 이름 하에 자신을 정당화 해서는 안 된다. 같은 신자에게 무례히 행치 낳도록, 노선이 다른 자들에게 상처를 주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우는 과정에서 사람들을 사랑하지 못한다면, 이기더라도 지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님의 참 제자라는 의미는, 영적 실패 없이 정치적 승리자가 되는 것이다.

가족의 삶에 대해서
chatper18 죄책감 없이 자녀를 양육하는 법
잔소리하지 말라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
생각해야 할 이상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chapter19 팝 심리학에 동요되지 않고 자녀를 정서적으로 건강하게 양육하는 법

아이들로 하여금 학교 생활이나 행동을 더 잘하게 하는 수단으로 자존감을 사용하지 말고, 그들에게 높은 기대를가져라.
보상으로 아이들의 행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위험하다. 사랑으로 하게 하라.
소명감을 심어줘라.
정(부모의 기대) - 반(자녀의 뜻)
-> 합(양쪽 최고의 요소들) 

chapter21 고립되는 이 세상에서 가족의 결속력을 유지하는 법
서로에게 서로의 이야기가 회자될 때 가족을 하나로 묶는다.
함께 먹는 시간의 중요성
위대한 기대- 높은 기대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인 실패자라는 느낌을 주지 않는 한 큰 기대는 가족이 가족 한 사람, 한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값비싼 선물이라는 일반적인 진리를 파괴할 수 없다.
가족의식의 중요성- 생일, 가정예배, 성탄의식, 추수감사절 의식

chapter22 착취당하지 않고 사람을 섬기는 법

첫째, 자신의 힘으로 정서적 필요를 채우지 못해 우리에게 오는 자들이 있다.
둘째, 자신의 짐을 스스로 지도록 우리가 강요할 자들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결론

사람들이 복음을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거부하는 것과, 크리스천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전하지 못하기 때문에 복음을 거부하는 것과는 다르다. 성경은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행동하고 , 말하는 어리석은 짓 때문에, 불신자로 하여금 예수닝르 거부하게 만든다고 경고한다.

저자는 기독교의 합리성을 전하기 위해 당혹스러운 전도를 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농담을 했는데 오히려 그 당혹스러운 전도를 통해 구원받은 사람이 그 자리에서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우리 생각에 천박한 복음 전도 방법이라고 생각하는 방법을 사용하는 신실한 사람을 우리가 경멸할 수 있다는 것을 이야기 한다.

우리 중 누군가는 어리석어보이고, 당혹케 하더라도, 현실적으로 매우 효과적일 수 있다. 하나님을 당혹케 하는 것과, 하나님을 위해 당혹케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것이다. 우리모두 하나님을 위해 기꺼이 당혹케 되는 용기를 달라고 기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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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학 교수이자 미국에서는 유명한 스피커란다.
현실에 맞는 진리의 적용점을 찾기 위한 노력이 있는 것 같아서 이 책을 읽게 되었다.

과학과 이성이 진리를 판단하는 기초가 아니라는 그의 진술은 참으로 아직까지도 파격적이다...
포스트모던을 무조건 나쁘게만 볼 것이 아니라는 그의 의견은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사회학자이기 때문에 그렇겠지만...

어쨌든 현대를 살아가는 크리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색다른 생각과 관점을 주는 책이다.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
북 리뷰/기독교2011. 8. 6. 10:23
제럴드 싯처(성서유니온 선교회)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당신의 미래는 어떨까? 한마디로 우리는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된다. 만약 미래가 힘겹고 그달프며 고난으로 점철될 것임을 안다면 우리는 몸을 사리며 그 끔찍한 실체를 불안스레 기다릴 것이다. 손써볼 힘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말이다. 동시에 우리는 고난이 가져다 줄 지혜와 성품도 놓치고 말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만일 우리의 미래가 탄탄대로일 것임을 미리 안다면 우리는 나태하고 안일해질 것이다. 우리 몫으로 주어질 미래의 낙을 누릴 만한 능력을 잃고 마는 꼴이다.

성경의 신앙 인물들에게 고뇌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는 고뇌가 아니라 그 뜻대로 살려는 고뇌이다. 바울의 내면에 열정과 두려움을 자아낸 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면-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다-미래에 대해 어떤 길을 선택해도 그것이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이 된다.

역설과 더불어 사는 삶- 하나님의 주권인가 인간의 자유인가?
요셉의 이야기에서 하나님의 뜻은 단순히 이루어졌고 요셉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게 했다.

내가 믿기로 기독교의 고난의 교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아주 신기한 사실을 설명해준다. 세상의 본질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 모두가 갈망하는 든든한 행복과 안전을 다 주시지 않는다. 반면에 그분은 기쁨과 낙과 즐거움을 여기저기 흩뿌려 놓으셨다. 우리는 결코 안전하지 않지만 우리에겐 풍성한 즐거움과 적잖은 환희가 주어져 있다......몇몇 순간의 행복한 사랑, 아름다운 경치, 교향곡, 친구들과의 즐거운 만남, 풋볼 경기 따위에는 그런 성향이 없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는 군데군데 상쾌한 여인숙으로 우리의 여행의 피로를 씻어주시지만 그곳을 집으로 착각하도록 가르치지는 않으신다. (C. S. 루이스 '고통의 문제')

염려
1. 아무 쓸데없는 염려다. 우리는 미래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모른다. 
2. 염려는 우유부단함을 낳는다.
3. 염려는 우리 마음을 산만케 하여 정작 가장 주요한 것-현순간-에 시간과 에너지를 쏟지 못하게 한다.
=>기도, 준비, 희망으로 극복할 수 있다.

현 순간의 경이.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산다면 하나님은 현 순간을 사용하여 불변의 과거를 구속하시며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위해 우리를 준비시켜 주신다고 약속하신다.하나님의 뜻은 지금 내가 처한 곳에서 그분을 위해 사는 삶이라 할 수 있다.

평범이 곧 비범. 하나님의 뜻은 날마다 내 주변의 일상생활 속에서 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정한 뜻은 우리가 거창하게 하고 싶어하는 큰 일이 아니라 날마다 해야만 하는 작은 일들로 이루어진다.

주님을 위해 어떤 일을 시작하면 결과가 잘 풀릴 것이라고 흔히들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악한 뜻으로 시작한 일 뿐아니라 좋은 뜻으로 시작한 일에도 재앙은 닥쳐온다. 성공은 한번도 하나님의 뜻의 증표가 돼본 적이 없다. 캘커타의 테레사 수녀의 말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충성으로 부르셨다." 난관과 좌절에 부딪힐 때 원망 없이 계속 감당해낼 은혜가 주어진다면, 그것이 곧 그 특정한 일이 하나님의 일이라는 분명한 증표라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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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은 우리 신앙인들의 가장 큰 열망이다.
그래서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하지만 갈수록 오리무중이다.
많은 말씀과 강의들을 통해 배워왔지만 정작 삶에 있어서는 여전히 갈등하는게 우리네다.
한가지 재미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관련된 책들을 보다보면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기보다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성숙하는 것이 더 중요한 것임을 강조한다. 
그래서 때로는 답답하기도 했지만 정말 그것이 맞는 이야기 임을 깨닫게 된다.

이책의 저자는 음주운전자로 인해 자신의 아내와 어머니를 잃고 세자녀를 친히 키워낸 아버지이자 신학자이나 목사님이다.
저자는 지금까지 우리가 생각했던 전통적인 하나님의 뜻-인생의 청사진을 있고 그것을 놓치면 차선으로 전락한다는-이라는 것 대신 그분의 계시된 뜻 안에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다고 한다.

글쎄...이 사람의 생각이 완전히 맞다고 생각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의 잘못된 부분을 고칠수 있을 거 같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Posted by L i v i n g R e m i n d e 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