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말씀 : 스 7:11-28

27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할지로다 그가 왕의 마음에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28 또 나로 왕과 그의 보좌관들 앞과 왕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의 앞에서 은혜를 얻게 하셨도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내가 힘을 얻어 이스라엘 중에 우두머리들을 모아 나와 함께 올라오게 하였노라 (스 7:27-28)


*오늘의 말씀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에스라가 백성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것을 허락합니다. 이뿐 아니라 에스라가 성전 운영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고 율법을 가르칠 것을 위임합니다. 이방 왕이 이런 일을 명령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고 신기합니다. 그러나 에스라는 이런 왕의 명령 너머에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의 손이 자신의 위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이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찬양합니다. 


*오늘의 기도

당시 최강의 왕인 아닥사스다 왕을 통해 성전을 세우며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게 하신 하늘의 왕이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에스라가 그리하였듯이 나의 삶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을 바라보게 하옵소서. 힘있는 이를 의지하지 않고, 나의 힘을 과시하지 않게 하옵소서.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시고 일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오늘 하루 나의 삶과 가정과 일터를 하나님의 손으로 붙들어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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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스 7:1-10

6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10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스 7:6,10)


*오늘의 말씀

성전이 완공되었지만 이것으로 다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드리는 거룩한 공동체가 세워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에스라가 귀환하게 되는데 그는 율법에 익숙한 자로 왕에게 은혜를 입는 자였습니다. 말씀을 연구할 뿐 아니라 실천하고 그것을 가르치는데 헌신된 자입니다. 거룩한 공동체, 살아 있는 성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오늘의 기도

말씀에 헌신된 에스라를 통해 거룩한 성전에서 예배하며 살아갈 거룩한 공동체를 세우시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고 그 뜻을 삶속에 실천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우리 각자가 살아있는 성전이 되게 하시고,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이루며 살게 하옵소서. 나를 부르신 이 자리에서 하나님 말씀의 사람으로 굳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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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스 6:13-22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이스라엘 자손과 자기 땅에 사는 이방 사람의 더러운 것으로부터 스스로를 구별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속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는 자들이 다 먹고 즐거움으로 이레 동안 무교절을 지켰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그들을 즐겁게 하시고 또 앗수르 왕의 마음을 그들에게로 돌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성전 건축하는 손을 힘 있게 하도록 하셨음이었더라 (스 6:21-22)


*오늘의 말씀

다리오 왕의 조서가 반포되고 성전이 드디어 완공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성대한 봉헌식을 마친 뒤 율법에 따라 유월절을 지킵니다. 회복된 성전에서 절기를 지킴으로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참된 기쁨을 되찾아 주셨습니다. 과거 하나님께서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현재화하고, 하나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표현이 절기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스케쥴에 따라 살 때 참된 기쁨을 누립니다.


*오늘의 기도

성전봉헌과 유월절을 지키는 가운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즐거움을 회복시키신 하나님. 다시한번 성전과 절기의 의미를 되새깁니다. 내 삶에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가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게 하시고 오늘 다시 감사하며 누리게 하옵소서. 내 스케쥴보다 하나님의 스케쥴에 우선순위를 두게 하시고 그럴 때 주어지는 기쁨과 평안을 경험케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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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스 4:11-24

아닥사스다 왕의 조서 초본이 르훔과 서기관 심새와 그의 동료 앞에서 낭독되매 그들이 예루살렘으로 급히 가서 유다 사람들을 보고 권력으로 억제하여 그 공사를 그치게 하니 이에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의 성전 공사가 바사 왕 다리오 제이년까지 중단되니라 (스 4:23-24)


*오늘의 말씀

방백 르훔과 서기관 심새는 과거 이스라엘이 제국에 저항했던 역사를 왜곡하여 아닥사스다 왕에게 성전건축 중단을 요청합니다. 이에 아닥사스다 왕은 조서를 내려 건축을 중단시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 중단되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인내를 배우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신뢰해야 했습니다. 단순히 성전을 가진 옛 이스라엘로의 회귀가 아닌 순간순간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거룩한 백성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악의적이고 왜곡된 의견으로 성전건축이 중단되는 상황 속에서도 이스라엘을 인도하시는 하나님. 우리도 분명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이지만 때로는 어려움과 고난을 겪게 됩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신실하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을 믿게 하소서. 무엇보다 보이는 것, 화려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거룩한 하나님 나라 백성의 삶에 집중하며 살게 하소서. 내가 성령의 전이기에, 오늘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며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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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스 4:1-10

이로부터 그 땅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 건축을 방해하되 바사 왕 고레스의 시대부터 바사 왕 다리오가 즉위할 때까지 관리들에게 뇌물을 주어 그 계획을 막았으며 또 아하수에로가 즉위할 때에 그들이 글을 올려 유다와 예루살렘 주민을 고발하니라 (스 4:4-6)


*오늘의 말씀

귀환민들은 대적들의 조직적인 방해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들은 성전 건축에 참여하게 해달라는 자신들의 요청이 거절당하자 뇌물과 고발로 성전 건축을 중단시킵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을 주시는 일에도 반대와 방해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을 싫어하는 어둠의 세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위한 고난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의 표지입니다.


*오늘의 기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귀환이라는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 그러나 이들이 성전을 세우려하자 조직적인 방해에 성전건축이 중단된 것을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감동시켜서 헌신된 이들이 모여서 하는 일인데도 이런 어려움이 있다는 것이 의아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영적인 싸움임을 기억하게 하시고, 오히려 하나님나라를 위한 고난을 기뻐하게 하소서. 믿음과 인내로 끝내 승리를 누리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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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말씀 : 스 3:1-13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아삽 자손 레위 사람들은 제금을 들고 서서 이스라엘 왕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되 찬양으로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이르되 주는 지극히 선하시므로 그의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성전 기초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 (스 3:10-11)


*오늘의 말씀

본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 사람들은 먼저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회복합니다. 그리고 스룹바벨과 예수아의 지도 아래 성전의 기초를 놓습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이는 것을 보며 이전 성전에 비해 초라해 통곡하는 이도 있었지만, 그래도 회복을 주신 선하고 인자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뻐하였습니다. 회복의 시작은 예배이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우선순위입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와 성전의 기초를 놓는 일을 통해 이스라엘 공동체에 회복을 이루시는 하나님. 출애굽과 출바벨론의 목적이 예배하는 공동체를 세우기 위함임을 바라봅니다. 주일예배 시작할 때마다 부르는 찬양처럼 어디서나 나는 예배자임을 선포합니다. 예배에 있어 무너진 부분이 있다면 다시 세우게 하시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게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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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모/한손에는 신문2018. 4. 11. 09:56
정현종 - 기다림에 관한 명상


메시아가 오시면 
이 세상이 살까 
천만에 
우리는 그를 다시
못박을 거야 
<메시아>란 항상 못박힌다는 뜻이고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그렇다면? 
메시아를 기다리지 않게 되지 
자기 자신을 기다리게 되지 
내가 메시아가 아닌데?
자기 자신을 기다리지 않으니 
영원히 메시아가 없지
(메시아를 기다린다는 건 자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 정당화하는 일이기 쉽거든.
메시아가 다 해 주실 것이고, 대신 죽어 주실 테니까.) 
궁핍에 처형된 우리들의 삶. 
하긴 오지 않는 자, 오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데가 이 세상이야. 
오지 않는 걸 기다리는 동안 --- 그게 우리 일생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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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리뷰/인문2018. 4. 10. 18:08

핵심은 불균형이다.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워한다. 40쪽.


인간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 이상의 그 무엇을 원하는데, 바로 존재감이다... 모욕은 바로 그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62쪽.


즉, 수치심이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친 자기의 모습에서 유발되는 감정이라면, 모욕감은 다른 사람이 자기를 대하는 태도나 방식에서 느껴지는 감정이다. 따라서 수치심에는 죄책감이나 미안함이 섞일 수도 있지만, 모욕감은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모욕감을 유발한 사람이나 집단에 대해서 분노나 원한 같은 감정을 갖게 된다. 64쪽.


모욕은 적나라하게 가해지는 공격적인 언행에 가깝고, 경멸 또는 멸시는 은연중에 무시하고 깔보는 태도에 가깝다. 모욕에는 적대적인 의도가 강하게 깔려 있는 반면, 경멸에는 그것이 분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모멸은 수치심을 일으키는 최악의 방아쇠라고 할 수 있다. 67쪽.


그래서 그런 일이 일어났던 지역에서 사회질서를 세우기 위해서는 파괴된 존엄성을 회복하는 작업이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개개인의 마음을 깊이 살피면서 자아를 새롭게 수립하는 것, 그리고 인간적인 만남이 이루어질 수 있는 지속 가능한 공동체의 건설이 그 핵심이다. 79쪽.


그러나 이런 굴종과 복종은 사람에게 요구해선 안 되는 것이다. 사람의 정신을 파괴하는 것은 자신이 맞는다는 사실 자체가 아니라, 자신의 자유의지에 반해 굴복한다는 느낌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80쪽.


올드보이나 디스커넥트 같은 영화에서 잘 묘사했듯이,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한 기억은 세상에 대한 증오 또는 자기에 대한 혐오를 불러일으킨다. 억울하게 수모를 당했다는 피해의식은 다른 집단에 대한 맹렬한 공격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82쪽.


한국인의 삶은 부정적인 감정에 많이 노출되어 있고, 거기에는 불합리하거나 불공정한 또는 그러하다고 여겨지는 사회적 관행들이 맞물려져 있다... 그러나 변화를 일으킬 힘은 턱없이 모자란다. 그런 감정 자체를 표출할 통로조차 너무 비좁다. 그 어두운 에너지가 해소되지 못한 채 증폭되고 사회적으로 악순환을 일으킨다. 111쪽.


잘사는 것을 경제적인 부유함으로 등치시키는 어법에는 한국인의 생활 경험과 가치관이 깔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잘산다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는 개념이다. 건강, 인간관계, 경제적인 여유, 물리적인 공간의 안락함, 일의 보람, 마음의 평화 등 복합적인 요소들이 맞물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느 ㄴ왜 그 가운데 경제력 하나만을 따지게 되었을까? 한국인들은 오랫동안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다가 반세기 동안 진행된 압축 성장 덕분에 삶이 극적으로 달라졌다...한국의 경우 그 변화가 워낙 초고속으로 진행되어서 경제적인 차원의 변수가 훨씬 압도적인 힘을 발휘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13쪽.

조선사회에서는 보편적으로 개방되어야 할 '귀'마저도 벼슬이라는 것으로 축소되고 획일화되었다는 것이 최 교수의 평가이다. 

그에 비해 '귀'는 공적인 차원에서 끝없는 확장성을 가진다. 이웃에게 덕이 되고 세상을 이롭게 하는 일에 힘쓰면서 삶의 격을 드높일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벼슬로 '귀'의 의미가 국한될 때, '가문의 영광'을 세우는 비좁은 목표를 넘어서지 못한다. 116쪽.


외형적으로 드러나는 몇 가지 요소들을 기준으로 사람의 높낮이를 매기고 귀천을 따지는 것이 우리의 속물적 문화다. 보이지 않는 것의 가치를 발견하면서 자신의 귀중함을 깨닫고 서로의 존엄을 북돋아주는 관계가 절실하다. 그러한 관계가 자라나는 사회적 풍토를 조성하는 과제가 우리에게 주어져있다. 119쪽.


신분제의 와해에 결정타를 매긴 것은 6.25 전쟁이다. 124쪽

따라서 권력의 시스템이나 사회 구조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하거나 논쟁하지 못했고, 새로운 세계를 향한 비전을 창조하면서 현실과 맞붙어 싸운 경험이 박약했다. 그 결과 겉으로 보이는 신분제도는 사라졌으나 신분의식은 온전존하게 되었다. 혼란기를 통과하면서 기존의 지배 질서는 무너졌지만, 귀족적 차별의식은 오히려 보편화되었다. 그래서 한국은 여전히 전통적인 신분 관념이 강하게 지배하는 사회다.  126쪽.


'오만과 모멸의 구조'는 무엇인가.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을 아무렇지 않게 멸시하고 조롱하는 심서잉 사회적 관성으로 고착된 것이 아닐까.


그런데 모멸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요인이 있다.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과민함이 그것이다. 한국인들은 그 점에서도 유별나다는 것을 앞서 언급한 바 있다. 138쪽.


개인주의는 여러 속성을 지니고 있지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스스로 매긴다는 긍정적 측면이 있다. 한국에는 그런 의미에서의 개인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했다. 남에 대해 신경을 너무 곤두세운다. 141쪽.


한국의 근대화는 합리적 개인화를 수반하지 못한 채 집단 에너지를 동원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공동체는 빠르게 해체되었지만, 대안적인 공동체나 자발적인 결사체의 형성은 지극히 미미했다... 고도 성장기에는 상승 이동의 즐거움으로 그러한 부실함이 상쇄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저성장 단계로 접어들자, 사회의 약한 고리들에서 파열음이 나기 시작했다. 142쪽.

고립된 개인들이 자기 정체성이 박약한 가운데 남들과의 비교 속에서 행복과 불행, 오만과 콤플렉스 사이의 왕복을 거듭한다. 143쪽.


일시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상대방을 물건처럼 취급하는 일이 벌어진다. 자동차도로가 그 현장 가운데 하니다. 인격과 대비되는 '차격'이라는 말이 있듯이, 운전대만 잡으면 심성이 거칠어지는 사람이 있다. 자동차라는 사물 속에 얼굴을 숨기고 익명의 타자들과 상호작용하는 상황에서, 다른 차가 조금만 진로를 방해해도 마구 경적을 울려댄다. 얼굴을 마주보고서는 내뱉지 못할 극언을 혼잣말로 퍼붓는다. 167쪽.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186쪽.


사회학에 '예의 바른 무관심'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공공장소에서는 신경을 끄는 것이 곧 배려인 경우가 많다. 189쪽.


동정은 인간적인 감정이다.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는 마음이 거기에 깔려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분리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그러한 이분법에 갇혀 있는 시선은 그로부터 비롯되는 행동은 자기도 모르게 상처를 줄 수 있다.

시혜에도 지켜야 할 도리가 있다...진정한 덕행이 되기 위해서는 혜택을 받는 사람의 입장에 서서 세심하게 배려해야 한다. 동정이 침해나 폭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7쪽.


다시 말해서 감정은 팔지만 자존심은 절대 팔지 않는다는 원칙이 존중받는 사회였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자신의 인격을 방어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되어야 한다. 212쪽.


인간을 인간으로 보는 것은 습득된 것이 아니라 선천적인 것이다. 그러나 인간을 인간 이하로 보는 것은 습득되었을 확률이 높다. 221쪽.


모든 사람으로부터 외면 또는 배신을 당했고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조르주를 구한 것은 돈이 아니었다. '살아야 할 이유'였다. 그의 인생을 바꾼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존재로서 자기를 다시 발견하게 해준 '집 짓는 일'이었다.

돈이 너무 많은 일을 좌우하고 돈 때문에 모멸감을 맛보기 일쑤인 현실에서, 나의 자존을 세우기 위해서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에 착복해야 한다. 돈의 논리로 포섭되거나 환원될 수 없는 삶의 근원적인 가치에 눈떠야 한다. 물론 절대 빈곤으로 최소한의 인간적인 삶조차 영위하기 어렵거나 너무 많은 빚에 쪼들리는 이들에게는 한가한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돈이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들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 굴레에 허덕이는 사람들이 숨통을 트고 안정적으로 생애를 계획할 수 있도록 정책과 제도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돈을 본래의 자리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는 진정한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지 따져야 한다. '좋은 삶'이 어떤 것인지 자문해야 한다. 240쪽.


인간은 사사로운 삶의 공간에서 친밀감과 평온함을 누리지만, 그것을 넘어선 공공의 세계에서 자기의 존재 가능성을 확대한다. 낯선 사람들 앞에 자신을 드러내고 공동의 경험과 공적인 서사(내러티브)를 창출하면서 더욱 고양된 자아를 만날 수 있다. 255쪽.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안전한 관계다.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주는 사람들, 억지로 나를 증명할 필요가 없는 공간이다. 내가 못난 모습을 드러낸다 해도 수치스럽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그것을 가지고 뒷담화를 하지 않으리라고 믿을 수 있는 신뢰의 공동체가 절실하다. 그를 위해서는 자신과 타인의 결점에 너그러우면서 서로를 온전한 인격체로 승인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258쪽.


언제부터인가 힐링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치유는 단순히 상처를 어루만지는 위로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마음의 새살이 돋아나기 위해서는 내면의 어떤 힘이 약동해야 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숨어 있는 소망과 가능성을 응시하는데서 시작된다. 그것을 꺼내어 존재의 날개로 펼칠 때 기꺼이 갈채를 보낼 수 있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 우정과 환대가 곧 힐리이 된다. 살아있음을 축복하면서 존재를 중심으로 맞아들이는 만남에서 우리의 생애는 고귀해진다. 서로를 격려하면서 더 높은 경지로 나아가는 관계에서만 인간적 존엄을 누릴 수 있다. 259쪽.


인간은 자기를 알아주는 공동체를 만나 공적인 자아를 실현하면서 진부한 삶에 생기와 역동을 불어넣을 수 있다. 260쪽.


거울 속에서 사라지는 자신을 들여다볼 수 있다는 것. 스스로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그릴 수 있다는 것.... 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가." 263쪽.


지위가 높거나 해당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루었지만 그것을 전혀 내세우지 않는 사람, 자신이 어떤 면에서든 우월한 위치에 있다는 의식이 없이 상대방을 대하는 덕성의 소유자 말이다. 애써 겸손한 척하는 것이 아니라 만인을 동등한 눈으로 바라보며 존중하는 태도가 체질화된 것이다. 그런 이들은 상대방과 주변 사람을 은은하게 감싸 안는다. 269쪽.


삶이 특별해지는 순간은 자신이 더 이상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라는 말이 있다. 272쪽.


채근담. 다른 사람으로부터 모욕을 받고서도 낯빛에 나타내지 않는다면, 그 가운데 무궁한 뜻이 있으며 또한 무한한 활동이 있다. 281쪽.


실존주의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롤로 메이는 조언한다. 자극과 반응 사이의 자동회로를 차단해보라고. 거기에서 선택의 자유가 주어진다고. 286쪽.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 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들 앞에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온갖 관심은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되면서, 나 자신은 공허한 중심으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돌보는 힘이 자라난다. 301쪽.


모멸감을 줄이려면 이러한 문화와 사회 풍토를 바꿔가야 한다. 가치의 다원화가 핵심이다. 인간과 삶을 바라보는 시야를 여러 차원으로 틔워야 한다. 그럼으로써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평범함과 비범함을 나누는 기준 자체를 상대화하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인간이라면 무두가 지니고 있는 보편적인 바탕과 존엄함에 눈을 떠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 저마다 지니고 있는 다양한 잠재력이 개발되고 꽃피울수 있는 기회가 열려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나를 있는 그대로 승인해주면서도 도전과 성취를 북돋아주는 관계와 공동체가 다양하게 형성되어야 한다.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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